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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의 여운

손 정 모

솔바람이 해송에 굽이치면서 하얀 빛살처럼 갈라져 흩날린다. 청아한 바람결의 분절(分節)처럼 선태(金饍泰)가 해변의 백사장에 들어서는 기척이 느껴진다. 사람의 발자국 소리로 들렸기에 틀림없이 선태일 거라고 믿긴다. 나도 해송 아래의 너럭바위에서 일어나 해변으로 걸어 나간다. 새벽 5시를 갓 넘긴 시점이라 해변 자욱이 해무(海霧)가 너울댄다. 해무가 걷히려면 한참의 시간이 소요되리라 여겨진다.

나는 평소 때의 기억을 더듬어 해변의 솔숲을 거닌다. 해무가 너무나 자욱이 끼어 허리 아래가 안 보일 지경이다. 이제 한 시간만 지나면 해변에 발동선이 도착될 예정이다. 발동선이 도착할 때부터는 삶의 획이 달라지리라 여겨진다. 발밑에 버석대는 느낌으로 내가 억새 더미를 지나가는 모양이다.

문득 3년 전의 일이 밀려든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위도에 들어섰다. 전북 격포항에서 서쪽으로 17km 떨어진 위도(蝟島). 섬의 남서쪽에는 논금 해수욕장이 자연의 풍광을 자랑하고 있었다. 논금 해수욕장의 북쪽에는 둘레가 2.3km에 이르는 솔숲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위도를 최종 안식처로 삼은 때였다. 그 전까지는 경기도 여주의 태평금속 회사의 공장에서 일했다. 솔숲의 중앙에 통나무집을 만들어 세웠다. 집터는 오래 전에 구입해 놓았다. 폭풍이 밀어닥쳐도 까딱없을 정도로 견고한 건물이다.

주택 인근의 바위 벼랑을 파서 작업장을 만들었다. 철물을 녹여 공구를 만들 작업장을 만들었다. 아내까지도 경기도에서 격포로 운이 좋게 도간(道間) 교류로 전근을 했다. 아내는 위도에서 격포로 날마다 여객선으로 출퇴근한다. 아내는 예전부터 나의 생활 방식을 존중해 주는 여인이다. 그러기에 매일 선박으로 출퇴근하는 일을 귀찮게 여기지 않는다.

사흘 전에 선태가 나를 찾아왔다. 그때 선태가 내게 말했다. 벌목에 사용되는 전기 쇠톱의 날이 걸핏하면 부러지든지 휘어진다고. 인도네시아 벌목 현장에서 수종(樹種)이 달라 애를 먹는다고 했다. 선태는 나보다 5살 연상인 47세의 기계 연구소의 책임 연구원이다. 선태와 나는 걸어온 길이 다르다. 선태는 미국 스탠포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연구원이다. 선태가 내게 말했다. 사흘 뒤인 오늘 통나무 표본 5그루를 가져 오겠다고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가져 온 원목인데 새벽에 선박으로 수송하겠다고 했다.

선태와 달리 나는 서울의 H대학교를 졸업하면서 곧바로 취직했다. 경기도 여주에 있는 D그룹 소속의 태평금속(太平金屬)이라는 회사였다. 직장 생활을 하다가 회사 부근의 초등학교 교사를 알게 되었다. 대중교통의 출퇴근 노선이 비슷하여 이따금씩 마주치다가 사귀게 되었다. 나보다 3살 연하였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씨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리하여 6개월쯤 시간이 지난 뒤에는 그녀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그때의 내 나이는 27살이었다.

공장에서 나는 주철(鑄鐵)에 열처리를 가하여 주강(鑄鋼)을 만들어 왔다. 회사 소속의 공장에서 직접 주강을 생산하는 일을 맡았다. 주강의 용도는 각종 강철 기구를 만드는 재료로 활용되었다. 양질(良質)의 주강을 확보하러 선진국에서도 간간히 사람을 보내곤 했다.

나는 둘레가 2.3km에 이르는 솔숲을 둘러본다. 하지만 시야는 온통 뿌연 안개에 가로막혀 있다. 심지어 나의 허리 아래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해무라는 이름의 지독하게 짙은 안개가 해변을 뒤덮고 있는 탓이다. 여태껏 이처럼 자욱한 안개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억새 숲을 스치며 내딛는 발자국 소리가 귓전을 파고든다. 아무래도 선태의 발자국 소리로 여겨진다. 하지만 안개 때문에 확인할 수 없는 처지다. 안개가 수그러들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야 할 형편이다.

전기 쇠톱은 세계적으로 수요가 많은 물품이다. 브라질, 인도네시아, 아르헨티나, 칠레 등에서 수요가 증가되고 있다. 문제는 작업 효율과 관련된다. 나무를 자르다가도 톱날이 부러지거나 휘어져 작업 시간이 길어진다.

선태가 사흘 전에 나를 찾아왔을 때 말했다.

“금속의 열처리 작업 중 네가 지닌 비법이 필요해. 공장에서 대규모로 생산되는 열처리 공정에서는 문제점을 해결하기가 어려웠어. 그래서 전통적인 비법 중에 혹여 길이 있을까 싶어서 왔어. 어떻게 좀 도와주지 않을래?”

선태와 나는 나이를 초월하여 말을 놓고 예전부터 지기로 지낸다. 사흘 뒤인 오늘 원목을 가져 오겠다고 밝혔다. 원목의 직경이 2m에 달하여 중장비까지 배에 싣고 오겠다고 말했다. 사흘 만에 전기톱을 만들 수 있겠는지도 내게 물었다. 그러면서 정확한 규격이 적힌 도안을 내게 내밀었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내가 대답해 주었다. 문제는 합금의 배합비와 열처리 기술에 달려 있다고 여겨졌다.

5년 전의 일이었다. 내가 공장에서 나날이 열처리의 기법을 숙련시키고 있을 때였다. 여주 변두리의 야산에 있는 대장간이 화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야생 벚꽃이 곳곳에 흐드러지게 핀 4월 중순 무렵이었다.

나도 호기심에 이끌려 화제의 대장간을 찾아갔다. 머리털이 하얀 66세의 노인이 대장간을 지키고 있었다. 첫 인상에도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인사 정도를 하고 금방 되돌아섰다. 그 뒤로 두 차례를 더 찾은 뒤였다. 내가 노인에게 술을 한 잔 사겠다고 제의했다. 노인이 처음에는 쓴웃음을 짓더니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노인이 흔히 찾곤 한다는 대장간 주변의 음식점을 찾았다. 순대 국과 동동주를 주로 파는 대중음식점이었다. 방의 식탁에 마주 앉은 뒤였다. 순대 국에 동동주를 주문하여 마시면서 둘은 서로의 마음을 열었다. 대장간 일은 언제부터 시작했느냐고 내가 노인에게 물었다. 마현종(馬峴宗)이란 노인이 잠시 눈썹을 찌푸리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분명히 나를 찾으러 왔을 때엔 무슨 비법(秘法)이 필요했을 거요. 내 말이 틀렸소?”

나는 노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떡여 수긍했다. 나의 진솔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던 탓인지 노인이 마음을 열었다. 노인의 형형한 눈빛에 내 시선이 닿을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나는 귀를 기울여 노인의 얘기를 들었다.

노인의 고향은 목포였다. 출항했던 어선이 전복되면서 7살 때 부모를 잃었다. 당시에 자신은 출항하려던 부모에 의해 이웃집에 잠시 맡겨진 상태였다. 그랬는데 풍랑이 심하여 그의 부모가 탔던 어선이 뒤집혔다. 3가구의 이웃집 사람들도 함께 탄 공동 조업선이었다. 그 날 마을에선 합동 장례식이 진행되어 마을 전체가 술렁거렸다.

7살의 현종을 길러 줄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어린 나이에 현종은 살기 위해 마을을 벗어나야 했다. 그때부터 현종에겐 막막한 삶이 시작되었다. 불량배들은 물론이고 거지들한테까지 얻어맞기 일쑤였다. 낭떠러지 아래로 떠밀리는 듯한 시련을 극복하면서 나날이 몸을 꿈쩍거렸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몸이 아파 길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행인들의 신고로 충남 서천의 경찰서에 실려 간 뒤였다.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는 ‘희망 육아원’이라는 곳으로 옮겨졌다.

그때부터 국가의 배려로 육아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중학교까지 교육을 받고는 육아원을 떠나야 했다. 세상은 다시 현종에게 생경스런 얼굴을 들이밀었다. 현종은 자신의 노력으로 세상을 가꾸어야 할 상황이었다.

‘일단 살아야 한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현종이 찾아든 곳은 강원도의 산사(山寺)였다. 오대산 중턱의 풍적사(風積寺)라는 작은 절이었다. 주지승은 현종에게 불목하니의 역할을 부여했다. 아궁이에 불을 때고 물을 길어 나르는 등의 잡역을 떠맡았다. 50대 중반의 주지는 현종에게 말했다. 일하는 정도에 따라 노임도 챙겨 주겠다고 했다. 현종은 마음속에서 일체의 잡념을 떨쳐 내기로 했다.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물을 길어 날랐다. 절에서 300m가량 떨어진 약수터에서 물을 길어 와야 했다. 양동이가 둘 달린 물지게를 이용하여 물을 날라 수조에 채웠다.

수조(水槽)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원통이었으며 장독대 곁에 세워져 있었다. 밥을 짓거나 빨래를 하는 물도 수조에 채워진 것을 사용했다. 수조의 직경은 2m였고 높이는 1.5m에 이르렀다.

수조 부피의 1/3가량의 공간에는 물이 언제나 남아 있었다. 나머지를 매일 아침에 물지게로 져 날랐다. 땔나무는 아침 식사를 한 뒤에 산에 가서 장만했다. 저녁을 먹은 뒤엔 골짜기로 내려가서 몸을 깨끗이 씻었다. 땔나무용으로 고사목의 둥치를 잘라 수시로 장작을 마련했다.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승방의 아궁이마다 불을 땠다. 아궁이에 매달린 솥에 수시로 끓일 것들이 많았다. 불목하니로 일하는 순간부터는 완전히 마음을 비운 상태였다. 41살의 과부가 공양주 보살로 부엌살림은 맡아서 했다. 절에서는 성씨를 따서 윤 보살이라 불렀다.

16살의 현종에게는 윤 보살이 저승의 사자처럼 무섭게 느껴졌다. 왠지 그렇게 느껴졌다. 윤 보살로서는 온화한 표정을 짓는답시고 항시 미소를 머금었지만 섬뜩하게 여겨졌다. 미소를 짓다가 표정이 바뀌는 순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 듯했다. 그래서 현종은 윤 보살에 대해서 항상 경계하는 마음으로 대했다.

그러던 여름철의 비 오던 날 밤이었다. 몸매가 탄탄해 보이는 50대 초반의 사내가 절을 찾아 왔다. 먼저 지갑을 열어 시주함에 시퍼런 지폐 한 장을 넣었다. 법당에 들어서더니 양초에 불을 피우고는 향불도 피웠다. 그러고는 방석을 펴고 경건하게 삼배를 올렸다. 얼마나 자세가 경건한지 법당 안이 숙연해질 지경이었다.

삼배를 하고는 꿇어 앉아 눈을 감고 뭔가를 비는 모양이었다. 십여 분간 눈감은 채 염원을 하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뒤에는 주지를 따라 사찰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승방에 딸린 아궁이에서 불을 피우던 현종과 시선이 마주쳤다.

사내가 승방으로 올라가 주지와 한동안 얘기를 나눈 모양이었다. 주지가 불렀기에 현종이 승방으로 건너갔다. 승방에 들어서니 사내가 주지와 마주 앉아 있었다. 주지가 현종을 향해 말했다.

사내가 현종을 원한다고 하니 따라 가겠느냐고 물었다. 사내는 대장간의 주인이며 자신을 도울 종업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숙식을 제공하며 규칙적인 급료까지 챙겨 주겠다고 말했다. 현종이 사내의 표정을 보니 충분히 신뢰감이 생겼다. 하지만 주지의 마음이 어떤지를 먼저 물었다. 주지가 미소를 머금으며 현종의 의사를 존중하겠다고 말했다. 불목하니는 다른 사람으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리라 들려주었다.

그 날부터 현종은 경기도 이천의 시장 골목의 대장간으로 갔다. 장날마다 농기구를 구입하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주인 혼자서는 도저히 처리하기 힘든 일감이 들어왔다. 농기구의 무딘 날을 벼려 달라는 주문도 의외로 많았다. 대장간에 들어선 날부터 현종은 철물 작업에 몰입하여 일했다. 주인은 현종의 몰입하는 자세를 높이 평가했다.

현종의 나이가 스물여섯 살일 때에 주인으로부터 대장간을 물려받았다. 주인은 현종에게 대장간을 물려주고는 미국의 아들한테로 건너가 버렸다. 주인이 된 이후부터 현종은 완전히 대장간 운영에 골몰했다. 열처리에 대하여 관련 서적을 사서 틈틈이 공부했다. 그러고도 부족한 영역은 인근 대학교에 나가 청강(聽講)도 했다. 담당 교수의 양해를 사전에 구하는 절차를 거쳤다. 현종의 연구 열기는 인근 대학의 교수들까지 인정하는 처지였다.

긴 세월의 흐름을 간략히 얘기하는 화술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세월이 흐르자 현종은 독자적인 열처리 비법을 창안하기로 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잊힌 고대 철제 유물들을 복원하려고 시도했다. 난관을 만날 때마다 주변 대학이나 연구소에 찾아가 자문을 받았다.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현종은 기록으로 남겼다. 훗날 소중한 연구 서류가 될 수 있게 하려는 측면이었다.

노인이 자신의 과거를 들려준 뒤였다. 나는 곧바로 녹인 철물의 불림과 담금질에 관해 자문을 구했다. 노인은 진지한 자세로 자신이 쌓은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오랜 시간 동안 찾았지만 해결하지 못했던 실마리가 풀리는 듯했다. 노인이 들려주는 말마다 섬세한 열처리의 비법이 담겨 있음이 느껴졌다.

그 날부터 나는 노인을 스승으로 대하기로 했다. 노인을 대면한 그 날이었다. 나의 승용차에 노인을 태워 경기도 여주의 남한강을 찾았다. 여주군 금사면 전북리의 강변 백사장에 깔자리를 펼쳤다. 차의 짐칸에서 냄비와 이동식 가스레인지를 꺼냈다. 그러고는 활어(活魚) 집에서 사 간 민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였다. 금세 메기 매운탕의 구수한 냄새가 주위로 퍼졌다.

노인을 향해 마주 앉아 먼저 소주를 따랐다. 노인도 답례로 내 술잔에 술을 채웠다. 둘이 술잔을 부딪치며 술을 마셨다. 이때부터 서로의 속내를 털어 놓으며 대화에 몰입했다. 대화를 나눌수록 노인은 금속의 열처리에 있어서는 달인임이 느껴졌다. 나의 진심이 통하여 노인이 나를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나한테 말을 놓기로 했다. 그를 만난 것은 일생의 행운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스승이 강물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박 군을 처음 봤을 때는 무척 놀랐어. 세상 떠난 내 친구와 상당히 닮은 얼굴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야. 잠시 내가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군. 철의 강도를 결정하는 것은 내부에 포함된 탄소의 함량이야. 박 군도 알겠지만 이게 열처리 과정에서 조절되거든. 가열했던 쇠붙이를 냉각시키는 속도가 결정의 세기를 좌우해. 금속에 따라 결정의 성장 속도가 달라. 합금의 경우에는 혼합 농도에 따라 결정의 성장 속도가 변해. 일관된 법칙이 없으면서도 공통적인 특성이 담겨 있어. 일생 동안 혼신의 열정을 쏟을 전문가다운 정신이 있어야 하네.”

나는 스승의 말을 주워 의미를 되새겼다.

‘전문가다운 정신이라? 어떤 것이 전문가다운 정신일까?’

그 날 강변에서 엄청나게 많은 내용의 설명을 들었다. 종이를 꺼내 대부분의 내용을 기록했다. 스승이 나를 향해 말했다.

“박 군의 실력이라면 미래에 독립 업체를 꾸릴 수 있겠어. 최소한 퇴직 10년은 남겨 두고는 독립 전선에 뛰어들어야 해. 나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내가 기꺼이 도와줄게.”

회사에서 퇴직하기 전인 5년 전부터 3년 전까지의 2년 동안. 이 기간에 나는 직장에서 퇴근하면 곧바로 스승의 대장간을 찾았다. 거기에서 스승으로부터 비법을 전수받았다. 나중에 자영 업체를 차리기 위해 필요한 준비 단계였다. 2년을 스승의 대장간에서 기술을 전수받을 무렵이었다. 스승과 일하면서부터 스승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게 되었다. 전국에서 농기구를 비롯한 각종 철제 기구를 주문하러 몰려들었다.

심지어 제주도의 농민들까지 비행기를 타고 스승을 만나러 오기도 했다. 스승처럼 대장간을 차려도 생계를 풍요롭게 꾸려 나가리라 여겨졌다. 하지만 불을 피워 쇠를 녹이고 정련하는 일이 만만하지는 않았다. 평생 만만치 않은 일을 한다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용기와 지구력이 없이는 결코 오래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날이 스승과의 생활은 친숙해졌다. 스승과 거의 2년을 생활했을 때였다. 스승에게 폐암이 생겨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의사는 대략 2개월 정도가 생명의 시한일 거라고 일러주었다. 스승이 자신의 정황을 파악하고는 나를 불러 유언을 남겼다. 그에게 혈족이라곤 없다고 했다. 그가 죽거든 화장해서 뼛가루를 수목의 뿌리에 묻어 달라고 했다. 아울러 그의 대장간을 나한테 물려주겠다고 했다. 대장간 일을 계속하든 처분하든 나한테 일임하겠다는 얘기였다.

유언을 남긴 사흘 뒤에 스승은 영면했다. 유언에 따라 그의 뼛가루는 야산 수목의 뿌리에 묻었다. 스승을 땅에 묻고 난 뒤부터였다. 스승의 스승인 사조(師祖)의 숨결마저 내 가슴으로 몰려드는 느낌이었다. 스승으로부터 얘기로만 전해 들었던 사조의 얘기가 가슴에 감동으로 남았다. 단순히 불목하니 역할을 하는 소년을 철물의 달인으로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내겐 스승을 만났던 기억으로 세상이 특별한 의미로 밀려들었다.

솔바람 소리가 물결처럼 일더니 여기저기에 솔방울들이 떨어져 내린다. 그렇지만 허리 아래도 보이지 않을 해무로 장님이 된 기분이다. 내가 선태와 신호를 나누던 방식을 떠올린다. 두 번씩 손바닥을 두 차례 두들긴다. 그랬는데도 아무런 반향이 들리지 않는다. 다소 의외라고 여겨진다. 분명히 누군가 솔숲의 백사장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밀려들었는데도.

선태가 제시한 합금의 처방대로 주물을 먼저 만들었다. 전기톱을 만들 정도의 주물이야 얼마든 생산이 가능한 대장간의 설비다. 나는 다섯 종류의 전기톱을 만들기로 했다. 열처리 방식에 따라 강도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어떤 부품에 대해서든 이 정도의 준비는 되어 있어야 했다. 나는 선태가 돌아간 직후부터 처방에 따라 주물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쌓은 경력을 바탕으로 적절하리라 예측되는 열처리 기법을 동원했다. 선태의 부탁이었기에 각별히 신경이 쓰였다.

땀을 흘리며 소형 용광로에 주철과 소량의 텅스텐을 혼합하여 넣었다. 그러고는 용광로에 장작과 역청탄을 태워 열을 가했다. 전체적인 열의 조절은 장작과 역청탄으로 했다. 세부적인 온도는 액화 석유 가스(LPG)를 연소시켜 정밀하게 조절했다. 용광로의 온도를 1700∼1800도로 맞춰 4분간 유지시켰다가 서서히 냉각시키는 방식. 일종의 풀림(annealing) 현상을 적용시켰다. 4분간 결정은 크기를 키우지 않으면서도 안정된 위치를 찾아 정렬했다. 문헌 조사 결과와 누적된 경험이 결정의 질을 결정지었다.

열처리에 골몰할 때마다 섬광처럼 의식으로 파고드는 게 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시절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잔영이었다. 아버지는 췌장암이 악화되어 무척 고통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만 떠올리면 그만 가슴이 먹먹해진다. 단순히 인륜 관계라서 그랬던 건 아니라 여겨진다.

내게 인식된 아버지는 원래부터 다리를 저는 사람이었다. 20대 중반에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바위에 다리가 깔렸다고 한다. 인부들이 캔 바위가 언덕에서 굴러 내려와 아버지를 덮친 거였다. 아버지도 다른 인부들과 목도를 하던 중에 변을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른쪽 무릎이 짓뭉개져 그때부터 다리를 절었다고 한다.

공사장에서 내몰린 아버지한테는 당시에 애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훗날에 내 어머니가 되었다고 한다. 불구자가 된 아버지는 세상을 비관하여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어머니에게 발견되어 생명을 건진 이후부터는 착실하게 살아왔다고 한다. 친구들의 소개로 불구자인 아버지는 옥돌 가공 업체에 취직되었다. 아버지의 손재주는 선천적으로 빼어났다고 어머니가 틈틈이 들려주었다.

어머니는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내겐 친척이라곤 없었다.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혈족은 없었다. 삶이 고달팠지만 학원 강사 생활을 하면서 대학을 졸업했다. 내게 부모가 있었기에 끝까지 관문을 헤쳐 나갈 용기를 가졌다.

내 유년기에 아버지는 휴일에도 옥돌을 들여다보며 궁리하곤 했다. 어떻게 하면 옥돌로 아름다운 공예 작품을 만들 것인지를 궁리했다. 어떤 형태의 옥돌이라도 아버지의 손에만 닿으면 아름다운 작품으로 변했다. 유년시절의 내겐 아버지가 마법을 익힌 마술사라 여겨질 지경이었다. 아버지가 만든 작품을 들여다보는 일이 내겐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내가 아버지한테 부탁했다. 옥돌로 코끼리 한 마리만 만들어 달라고. 그러자 아버지가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저녁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손수건에 싼 물건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손수건을 풀었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연두색의 코끼리의 조각상이 나를 반겼다. 커다란 감자 덩어리 크기의 옥돌로 만든 조각상이었다.

아버지로서는 내게 파격적으로 커다란 선물을 준 거였다. 비록 부탁했어도 설마 그처럼 훌륭한 선물을 받을 줄은 몰랐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나를 왈칵 껴안으며 아버지가 말했다.

“못난 녀석 같으니라구. 뭘 그만한 것 때문에 눈물을 보여?”

아버지의 품이 그 날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던 때는 없었다. 나는 그 날 이후로 아버지를 달인(達人)으로 여겼다. 무엇이든 손에만 잡으면 세상의 명품을 만들어 내는 달인이라고.

잘디잔 몽돌로 이루어진 논금 해수욕장의 파도 소리가 거칠게 들린다. 바닷바람이 거세진 모양이다. 어디선가 눅눅한 습기 덩어리가 공처럼 수면 위로 굴러오는 모양이다. 해수욕장에 인접한 솔숲의 바닥은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 분명 누군가 해수욕장을 거쳐 솔숲에 들어섰는데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금방 콧구멍까지 막을 듯이 지독한 해무 탓이다.

내 기억으로 아버지한테는 희귀한 보물이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 보물을 아버지는 어떤 친구한테 주어 버렸다고 말했다. 그 보물에 힘을 실을 만한 임자를 찾아 주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기에 그러려니하고 받아들였다.

아버지가 지녔던 보물은 고대의 명검(名劍)을 만드는 비법이 적힌 종이였다. 무너진 대야성의 복원 현장에서 우연하게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야성은 경남 합천을 에두른 성곽이다. 예전에 백제의 군사들에게 단숨에 함락된 적이 있는 성곽이다.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으리라 여겨진다. 저녁에 아버지가 약주에 취해 불콰한 얼굴로 집에 들어섰다. 아버지의 취한 모습을 그때 이외에는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랬는데 그 날은 기분이 무척 좋은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나를 대청마루로 불렀다. 아버지와 마루에 앉았을 때였다. 아버지가 무척 신나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동호야, 이기 뭔지 모리겄제? 조선 제일의 칼을 만드는 비법이 적힌 종이야. 아무래도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닌지 모리겄네. 이처럼 소중한 종이가 우째 나한테까지 전해졌는지 미칠 정도로 기뻐.”

여차하면 금세 춤이라도 덩실덩실 출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하도 기뻐하는 표정이라 나도 아버지한테 질문했다.

“아부지, 그 종이에 그렇게나 좋은 기 실렸십니꺼? 대부분 한자로 적혔는데 무신 말인지 뜻은 압니꺼?”

아버지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한자로 적은 글을 한문이라 하능기라. 네 아버지도 한문은 돌아가신 할아버지한테서 잘 지도받았거든. 때가 되면 니한테도 한문은 가르쳐 줄게. 별로 안 어려워.”

어머니가 환히 미소 짓는 얼굴로 부엌에서 마루로 올라선다. 손에는 노릇노릇 굽힌 해물 파전이 담긴 접시가 들려 있다. 아버지가 일하러 다니므로 가족이 함께 앉아 대화할 시간이 드물었다. 게다가 아버지와 아들인 내가 마주 앉는 경우는 희귀한 경우였다. 이런 정황이었기에 어머니가 그 날은 몹시 기뻤던 모양이다.

어머니도 파전을 이리저리 찢어 접시에 올리며 자리를 함께 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흥겨움이 잔뜩 실린 표정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어머니와 나는 파전을 먹으면서 아버지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는 양질(良質)의 옥 덩이를 구입하러 합천을 찾았다. 예전부터 옥 덩이를 구입해 오던 거래처가 합천 시장에 있었다. 아버지가 공예점에서 사용하는 옥 덩이들은 죄다 합천에서 구입한 거였다. 합천 시장에서 옥 덩이를 구입하려니까 거래처의 문이 닫혀 있었다. 옥돌 가게의 출입문에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집안에 생긴 경조사로 사흘간 가게를 비우게 되니 양해 바랍니다.

- 주인 알림 -

거리가 멀어 아버지가 곧바로 경기도 이천으로 돌아올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부득이 합천의 여관에서 묵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성곽 복원 작업에 인부가 필요하다는 방송이 골목마다 울려 퍼졌다. 아버지는 축성 공사를 구경할 작정으로 공사장을 찾았다.

문화재 관리국에서 나온 공무원들이 공사 업체를 선정했다. 선정된 공사 업체의 노역 감독자들이 인부들에게 일을 시켰다. 야산의 능선을 따라 벽돌 규모의 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벽돌 규모의 자연석인 화성암(火成巖)들을 모아 성곽을 쌓았던 모양이다. 흩어진 화성암들을 주워 모아 원래의 형태로 쌓으려는 의도라고 했다. 70여 명의 인부들이 감독의 지시에 따라 연신 돌을 날랐다. 돌을 넣기에 적당하게 만들어진 철망(鐵網)이 인부들에게 보급된 상태다. 인부들이 철망에 연신 돌을 담아 능선으로 날랐다.

대야성 복원을 하느라 성곽의 돌 더미를 치울 때였다. 돌 더미에 묻혀 있던 색 바랜 종이가 발견되었다. 종이는 한지(韓紙)로 된 거였으며 목판 활자로 새겨진 거였다. 발행처를 보니 조선군(朝鮮軍)의 병기(兵器)를 제작했던 군기시(軍器寺)였다. 종이에는 한문으로 장검의 제조법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사용된 철 덩어리의 종류와 첨가물의 배합비까지도 상세히 제시되어 있었다. 열처리 기법도 상당한 수준까지 세밀하게 제시되어 있어서 놀라울 정도였다.

아버지는 너무나 기뻐 온통 가슴이 설레었다. 중석(W)과 주석(Sn)이 농축된 광물이 첨가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당 광물의 출토지와 배합 함량까지 제시되어 있었다. 아버지한테는 대장간을 하는 지기(知己)가 경기도 이천에 살고 있었다. 친구한테 건네주면 좋은 선물이 되겠다고 여겼기에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대야성에서 장검 기록물을 입수한 뒤부터였다. 아버지는 친구를 당장 만나러 간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바쁘다고 하면서도 무슨 연유인지 보물을 오래 간직하려는 듯했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한테 제안했다. 기록된 종이의 내용과 같게 베껴 놓으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 말에 아버지는 대뜸 고개를 흔들며 내게 말했다.

“어른들의 일에 아는 체하고 나서면 안 돼. 너는 어디까지나 어린애일 뿐이야, 알겠니?”

아버지의 어투가 얼마나 강했던지 그만 주눅이 들 지경이었다. 그 날 이후로는 보물에 대한 생각은 잊혔다. 아마도 날을 잡아서 아버지가 친구한테 넘겼으리라 여겨졌다. 그 날 이후로 보물이 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전 6시 무렵이 되어서야 해무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한다. 뜻밖에 해변에는 백의를 걸친 무녀(巫女)들 셋이 눈에 띈다. 무녀들과 나의 시선이 맞부딪히자 서로 깜짝 놀라 말한다.

“어,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굿을 할 장소를 찾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저씨는 새벽부터 거기서 뭘 하셨어요?”

간단히 서로의 사정을 터놓고 설명한다. 무녀들은 오늘 새벽에 해변에서 굿을 하기로 했다고 들려준다. 닷새 전에 위도 서쪽의 왕등도 해역에서 어선이 전복되었다고 한다. 사망자 가족이 원하여 사망자의 출생지인 위도에서 굿을 하겠다고 들려준다. 나는 친구를 만나러 해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무녀들에게 간단히 들려준다.

무녀들과의 대화가 막 끝났을 때다. 발동선이 뱃고동을 울리며 해변으로 다가선다. 갑판 위에서 손을 흔드는 선태가 눈에 띈다. 인도네시아에서 가져 왔다는 원목 5개를 선주가 내려놓는다. 다들 직경이 2m에 달하는 거목들이다. 미리 대기해 놓았던 덤프트럭에 인부들이 통나무들을 옮겨 싣는다. 잠시 후에 5개의 통나무들이 내 집으로 운반된다. 이윽고 인부들은 뜰에 5그루의 통나무들을 부리고는 떠나간다.

나는 선태로부터 원목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말라스(Malas), 방키라이(Bangkirai), 울린(Ulin), 멀바우(Merbau), 큐링(Kurin)의 5수종(樹種)이라고 들려준다. 다들 인도네시아의 밀림에서 벌목되는 수종이라고 한다. 이들 5가지의 나무들은 일반적으로 거대한 몸체를 이룬다고 한다. 강도가 강하고 수분의 함유량이 높아 톱날이 잘 부러진다고 들려준다.

사흘 전에 선태가 나의 거처를 찾아와 말했다. 오늘 원목들을 배에 싣고 오겠다고. 그러면서 전기톱에 대한 금속의 배합비가 적힌 종이를 내게 전했다. 그것을 참고로 하여 부러지지 않는 톱날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자신이 있었기에 흔쾌히 대답했다.

그래서 어제 저녁까지 5종류의 전기톱을 만들어냈다. 만들어진 톱을 끼워 시험만 하면 되는 상태다. 나는 톱을 만들면서도 줄곧 상념에 잠겼다. 나는 7년 전에 이미 국가에서 기술사(技術士)의 자격증을 수여받았다. 해당 기술 영역에 있어서 최고의 기술 자격증이다. 내가 기술사가 되면서부터 급여 체계가 크게 달라졌다. 급여액이 거의 2배가량 높아졌다. 그러면서 곳곳에서 강연해 달라는 청탁도 여러 차례 받았다.

방부목(防腐木)으로 쓰이는 방키라이(Bangkirai) 원목 앞에 선태와 내가 우뚝 선다. 오늘 아침에 배에서 뜰로 실어 나른 것이다. 선태가 입을 열어 내게 말한다.

“동호야, 인도네시아 보루네오 섬에서 가져온 원목이라고 내가 얘기했지? 벌목 현장에서 전기톱을 가장 애먹이는 수종(樹種)이야. 톱날이 가장 잘 부러지는 게 바로 이 나무 때문이야. 나무가 강하기도 하지만 수분이 많아 톱날이 쉽게 망가져.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뛰어든 게 벌써 5년째야. 어떻게 이번에 해결이 되면 참 좋겠는데 너만 믿겠어.”

지름이 2m에 이르는 통나무가 내 앞에 드러누워 있다. 전기톱으로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섬광처럼 감이 잡힌다. 일단 감이 잡히면 해결되는 것은 시간문제라 여겨진다. 열처리 방식을 다르게 하여 만든 전기톱 5개를 선태에게 보여준다. 그러면서 신중한 목소리로 선태를 향해 말한다.

“이들 5개 중에서 최소한 1개에는 해법이 담겨 있으리라 믿어. 만약 5개 모두에서 톱날이 부러진다면 내 연구는 엉터리가 되겠지. 부디 노력의 결실이 공허하게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이윽고 전기톱 몸체에 내가 만든 회전식 톱을 끼운다. 톱날을 회전시키며 제대로 끼워졌는지 점검한다. 톱에 전원을 넣자 톱날이 회전하며 나무를 자르기 시작한다. ‘위잉’하는 굉음을 내며 톱날이 나무를 파고들자 톱밥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막 1분이 좀 지났을 때다. ‘터더덕’하는 음향이 터지면서 톱날의 회전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든다. 전원을 끄고 천천히 톱을 빼낸다. 그리고는 톱날을 살핀다. 한 군데의 톱날이 부러져 있다.

갑작스레 전신에 한기가 치민다.

‘아니 이럴 수가? 아무리 나무의 재질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이럴 수가 있어?’

순간적으로 세상 떠난 스승의 얼굴이 밀려든다. 느닷없이 시야에 스승의 얼굴이 환영으로 밀려들며 뭔가를 말하는 듯하다. 처음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무슨 소리인지 느낌으로 전해진다.

“박 군, 그렇게 용기를 잃지 않아도 돼. 마음을 안정시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 다시 두 번째 톱날로 시도해 봐. 떨지 마. 두려워할 게 아니잖아?”

찰나간의 환영으로 밀려들었던 스승의 얼굴이 스러진 뒤다. 선태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한다.

“어떻게 괜찮겠어? 잘 안 되면 무리하게 서둘 필요는 없어.”

나는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다시 원목을 향해 다가선다. 천천히 전원 방아쇠를 당긴다. 그런데 톱날이 나무에 닿자마자 ‘끼이익’하는 음향이 사방으로 터진다. 톱을 나무에서 즉시 떼어 살펴본다. 톱날이 대부분 다 우그러들어 제 멋대로 뒤엉켜 버렸다. 기가 막히다 못해 전신이 참담할 지경이다.

우그러진 톱날을 들여다본 순간이다. 어이없게도 손등에 눈물이 떨어져 내린다. 혹여 선태가 눈치 챌세라 좌우로 고개를 흔들어 눈물을 감춘다.

잠시 마음을 추슬렀다가 세 번째 톱날로 갈아 끼운다. 그러고는 전동 방아쇠를 잡아당긴다. ‘튀이이잉’ 소리를 내더니 곧바로 톱에 섬광이 인다. 전원을 곧바로 끈 뒤에 톱을 스르르 빼낸다. 톱을 이룬 평면이 대각선으로 처참하게 찢겨 있다. 미쳐서 발작할 지경이다. 하지만 스승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문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사조의 얼굴도 백발노인의 모습으로 밀려든다. 나는 찢긴 톱을 빼들고는 참담한 얼굴로 선태에게 다가간다. 그러고는 힘들게 말한다. 잠시 휴식이 필요하다고. 그러면서 커피를 끓일 물을 가열하기 시작한다.

선태도 반갑다는 듯 선뜻 동의한다. 이윽고 커피를 끓여 뜰의 잔디 위에서 선태와 마주 앉는다. 선태가 나를 향해 말한다.

“농담 아닌 농담을 좀 할게. 네 인상이 어떤 줄 아니? 마치 무성(無聲) 연극을 하는 배우를 보는 느낌이야. 톱날 시험을 하는 게 마치 과거를 치르는 듯한 분위기야. 예를 들어 마음먹은 대로 안 될 수도 있잖아? 세상 일이 다 마음대로 된다면 누가 걱정을 하겠어? 제발 너무 긴장하지 말았으면 해. 내가 정식으로 부탁할게. 톱날 시험이 실패로 끝나더라도 너의 실력이 어디 가겠어? 너는 한국이 공인한 철물 제작에 관한 최상의 기술인이야. 해외의 허다한 전문가들도 못한 일이기에 너한테 부탁한 거잖아? 절대로 부담 갖지 마, 알겠어?”

선태의 말은 후반부로 갈수록 유언처럼 들릴 지경으로 공허하게 굽이친다. 그의 입장에서는 나를 위로한다고 들려준 말이지만 너무나 가혹하게 느껴진다. 철물 제작에 있어서는 한국이 내게 영예를 부여한 기술사(技術士)이다. 선태의 말대로 최상의 기술자로 알려진 나다. 이런 내가 선태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헛이름이나 날린 못난 위인이라는 생각에 자괴심이 끓어올라 미칠 지경이다. 어떻게 내 마음도 달래고 과제도 해결할 수 있을지 두렵다.

여태껏 이런 경우를 당한 적이 없었는데 번민의 파장이 크다. 선태와 마시는 커피 맛이 단지 쓴지도 모른 채 마셨다. 아득한 벼랑으로 떠밀리는 기분으로 네 번째 시험을 하려고 일어선다.

내가 만들었지만 톱날에 윤기가 나고 톱이 단단하게 느껴진다. 갈아 끼운 톱날을 쓰다듬으며 잠시 입술을 깨문다. 머릿속으로 상념의 너울이 지체 없이 밀려든다.

‘스승님과 사조님의 숨결이 내 몸뚱이로 전송되지 않았던가? 금속의 배합비까지 알면서도 강도에 맞는 제품을 못 만든다면? 나는 기술사로서의 자질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내가 이런 치욕의 소용돌이에 무너져서는 안 돼.’

무형의 스산한 압박감이 톱날처럼 가슴으로 파고드는 듯하다. 선태가 지켜보는 것은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다. 다만 내가 설정한 성취의 벽을 오를지가 너무나 두렵다. 짧은 시간이지만 성패(成敗)의 기로에 서서 위기감의 너울에 휘말려 버둥댄다. 자칫 자지러질 듯하여 고함이라도 내지를 듯한 기분이다. 입술이 타들어 가고 콧구멍에서 열기가 발출될 지경이다.

유난히 박동소리가 더 높아짐을 느끼면서 전기톱을 움켜쥔다. 방키라이 목재에 전기톱을 갖다 대고는 전원을 넣는다. 이번에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톱날 회전도 아주 부드럽게 느껴진다. 내친 김에 직경 2m의 목재를 절단시킨다. 간단히 목재가 절단되어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톱날이나 톱 어디를 살펴봐도 조금도 손상된 곳이 없다. 선태가 놀란 눈으로 톱과 나를 번갈아 살피더니 환호성을 터뜨린다.

“뭐야? 간단히 해냈잖아? 이럴 수가 없는데? 내친 김에 5번째 톱도 시험해 봐.”

작업하기 전에 다섯 번째 톱도 성공하리라 여겨진다. 가슴으로 밀려드는 직감에 의해서다. 편안한 마음으로 다섯 번째의 톱날에 전원을 넣는다. ‘위잉’ 소리를 내며 톱밥을 내뿜으며 톱날이 나무를 파고든다. 톱이 흔들리지 않게 안정적인 자세를 취한다. 다섯 번째의 톱날에 의해서도 목재가 잘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톱이나 톱날 어디에도 변형되거나 손상된 곳이 없다. 150∼160도의 온도로 3분간 불림 처리한 것이 성공의 요인이라 여겨진다.

두 번째로 직경 2m의 나무가 잘렸을 때다. 선태가 고함을 질러대며 내게로 달려든다.

“이야앗! 정말 대단해. 한국 기술사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겠어.”

어느새 선태와 내가 기쁨에 겨워 서로를 껴안는다.

어느 순간이다. 선태의 눈시울로부터 눈물이 흐르는 것이 눈에 띈다. 그러자 나 자신의 눈가를 슬쩍 더듬어 본다. 내 눈에서도 언제부터인지 눈물이 흘러내렸던 모양이다. 바로 이 찰나에 가슴으로 강력한 폭풍 같은 전율감이 밀려든다.

‘어쩌면 친구끼리 다 함께 눈물을 나눌 수 있었을까? 가슴조차 열지 못하는 삭막한 현실이 아닌가? 그런데 선태마저 감동하여 눈물을 뿌리다니? 정말 이런 일도 있기는 있구나.’

잠시 치솟았던 흥분이 가라앉자 둘이 포옹을 풀고 물러선다. 궁금증이 생겼던 부분에 관해 내가 곧바로 선태에게 묻는다.

“내 알기로 너는 철저하게 감정을 조절하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아까 보니 눈물을 흘리더라 글쎄? 내가 잘못 본 건 아니지?”

선태가 나를 향해 일부러 고함을 지르듯 큰 소리로 말한다.

“야, 이제 내가 술을 살게. 해변의 음식점으로 가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 나누세.”

이윽고 둘은 해송이 어우러진 해변의 음식점에 도착한다. 철판 낙지 구이를 안주 삼아 소주를 주문하여 식탁에 앉는다. 둘이 한 잔씩 술잔을 나눈 뒤다. 선태가 입을 연다. 나는 선태의 말에 흡인력을 느끼면서 귀를 기울인다.

선태는 인도네시아가 벌목에 관해 자문받으려고 초청한 한국의 책임 연구원이다. 그런데 벌목 현장에서 전기톱이 자꾸만 문제점으로 떠올랐다. 그래서 톱날을 개선하려고 세계 각국의 전문 업체에 협조를 구했다. 하지만 선진국의 어느 곳에서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생각던 결과에 기술사인 나를 찾기로 한 거였다. 나를 찾아도 해결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고 털어 놓는다. 비록 내가 금속 기술계 최고의 전문가인 기술사일지라도.

그랬는데 정작 내가 해결하자 감격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고 한다. 선태의 말에 재차 울컥 눈물이 치솟는다. 세계의 전문가들보다 나를 더 믿었다는 그의 속내가 읽혔기 때문이다.

이때 내 머릿속으로 어떤 상념이 흘러든다. 선태가 어쩌면 스승이나 사조가 보낸 기술 검증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마자 술을 마시다 말고 둘이 우뚝 일어선다. 그러고는 주변 사람들이 보든 말든 감격스럽게 껴안으며 말한다.

“너 때문에 한국의 이미지가 강하게 부각되게 생겼어.”

“전승(傳承)의 결실을 확인하러 날 찾아 주어서 고맙네. 진심으로 고맙네.”

밤이 깊어지자 둘이 음식점에서 나왔다. 그러자 해변에서 밤안개가 잔뜩 끼어 둘을 에워싼다. 선태와 나는 어깨동무를 한 채 흥겹게 해변 길을 거닌다. 선태가 묵기로 한 해변의 숙소까지는 동행해 줄 작정이다. 점차 눅눅한 갯바람이 선태와 나의 얼굴에 휘감겨 든다. 둘은 꿈길을 걷듯 허청대며 점차 솔숲에 잠겨 든다. 귓전으로 휘몰리는 파도 소리가 자장가처럼 아늑하게 의식으로 굽이친다. 솔바람이 해송에 굽이치면서 하얀 빛살처럼 갈라져 흩날린다. 청아한 바람결의 분절(分節)처럼 선태(金饍泰)가 해변의 백사장에 들어서는 기척이 느껴진다. 사람의 발자국 소리로 들렸기에 틀림없이 선태일 거라고 믿긴다. 나도 해송 아래의 너럭바위에서 일어나 해변으로 걸어 나간다. 새벽 5시를 갓 넘긴 시점이라 해변 자욱이 해무(海霧)가 너울댄다. 해무가 걷히려면 한참의 시간이 소요되리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