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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일폭포

                                                                                          손 정 모

   차창 밖으로 12월의 스산한 강풍이 연신 휘몰아친다. 차내의 시계를 잠시 바라본다. 밤 6시 14분을 가리키고 있다. 하동 쌍계사 매표소 언저리의 ‘청산(靑山) 모텔’로 들어선다. 승용차를 모텔 주차장에 주차시킨 뒤다. 혼자 들어서는 나를 향해 주인 여자가 묻는다. 자고 갈 거냐고. 고개를 끄떡여 대답하고는 지폐를 꺼내 계산하며 칫솔과 면도칼을 건네받는다. 503호 출입카드를 출입문에 꽂으니 출입문이 열리면서 실내에 전깃불이 켜진다.

   피로를 풀 겸 샤워를 하고 침대에 오른다. 텔레비전의 전원을 켜자 모텔 고유의 음란 영상물들이 시선을 자극한다. 텔레비전을 끄고 침대에 드러누워 생각에 잠겨 있을 때다. 실내 전화가 울린다. 귀에 갖다 대니 주인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든다.

   “503호죠? 산 아래 건물이라 간혹 지네가 실내에 있을지 몰라요. 잠시 후에 제가 바퀴벌레 제거용 킬러를 가지고 올라갈게요.”

   주인 여자의 말을 듣고 난 뒤다. 속옷 차림으로 있다가 가방에서 체육복을 찾아 단정하게 차려 입는다. 금세 방으로 올라오겠거니 여겼는데 한동안 소식이 없다. 5층까지의 전체 실내에 500mL짜리 분사통을 공급하느라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나는 창문을 열어 숙소 바깥을 내려다보며 상념에 잠긴다. 250억 원이 걸린 프로젝트를 두고 경쟁하는 상대가 있다. 유성의 생명공학 연구소의 민종택(閔鐘澤) 선임 연구원이다. 심장으로 분화하는 줄기세포의 개발에 대한 국가의 지원 프로젝트이다. 국내 유일의 경쟁자가 나보다 두 살이 많은 종택이다. 스탠포드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세계적인 위상의 과학자다. 나의 명성 역시 그에 뒤지지 않다고 세인들에게 공인된 처지다. 지난 2년 세월이 넘게 연구한 과제를 놓고 불안에 떤다. 거기에 따라 지원 대상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250억 원을 지원받을 사람은 종택이 아니면 나라고 세인들이 떠든다. 내가 근무하는 연구소의 위상을 생각해서라도 꼭 지원받고 싶다. 이런 내 마음은 물결에 휩쓸리는 나뭇잎처럼 불안하기 그지없다. 돌파구를 찾고자 시린 과거의 추억이 담긴 불일폭포를 찾기로 했다.

   주인 여자를 기다리는 사이에 과거의 기억이 의식으로 밀려든다. 1학년 말기의 성적은 전교생 480명 중에서 440위에 이르렀다. 성적이 상대적으로 저조하여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벼락공부를 시작했다. 수면 시간이 4시간을 넘기지 않게 의도적으로 조절했다. 깨어 있는 시간에는 전력을 기울여 공부에 매달렸다. 청소년기라 적정량의 음식물 공급과 충분한 수면이 필요한 시기였다. 성적 불량자들은 미래가 불안하여 지독한 중압감에 휩싸였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신작로도 뚫려 있지 않은 황량한 지역이었다. 농로(農路)나 다를 바 없는 비포장도로를 걸어 다녀야 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7km의 거리였다. 걷는 속도와 걸린 시간을 바탕으로 계산된 거리였다. 새벽의 여명을 헤치고 매일 집을 나서야 했다. 벼락공부의 위력은 강력했다. 8달이 경과되자 전교 석차 200위 이내로 진입하게 되었다.

   여세를 몰아 부지런히 공부에 매진하던 가을철이었다. 시사(時祀)를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가 입에서 음식물을 내게 전했다. 당시에 아버지는 폐결핵을 앓던 중이었고 음식물은 씹던 돼지고기였다. 아무리 씹어도 으깨지지 않던 돼지고기였다. 가난한 형편이라 평소에 집에서 돼지고기는 구경조차 못했다. 그런 판국에 아버지는 애정의 일환으로 나한테 음식물을 건넸다. 아버지의 면전에서 돼지고기를 처리할 길은 유일했다. 그걸 받아 입에 넣어 씹어서 삼키는 길이었다. 유년시절 내내 무서웠던 아버지의 성향을 너무나 잘 아는 터였다.

   내 인생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결핵균이 은밀하게 허파를 갉아먹기 시작한 듯하다. 부족한 수면 시간에 책을 잡을수록 점차 피로감이 전신을 엄습했다. 그냥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로감에 육신은 나날이 찌들었다.

   해를 넘겨 3학년에 올라섰을 때였다. 이미 전교 석차는 50위 언저리까지 진입한 상태였다. 6월이 되면서 호된 감기를 앓듯 기침이 터져 나왔다. 감기약을 복용했음에도 3주간을 내내 기침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내게 돼지고기를 넘겨주던 해에 결국은 폐결핵으로 숨졌다. 허망하기 그지없었지만 하늘의 운명이겠거니 여겼다.

   학교 선생님들의 조언에 따라 병원을 찾아 진단을 받았다. 나 역시 폐결핵이라고 밝혀졌다. 전력을 기울여 공부해야 할 7월 초순의 일이었다. 휴학하지 않으면 주변 학생들에게 전염되리라고 의사가 말했다. 경남을 대표하는 전통의 공립학교라 학교에서 지정한 교의(校醫)가 있었다. 같은 고등학교 출신으로 진주에서 종합병원과 간호대학을 운영하는 원로 의사였다. 교의의 권유에 따라 부득이 휴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휴학하는 순간부터 이미 인생은 다른 경로로 흘러듦을 깨달았다.

   교의가 내게 말했다. 허파에 구멍이 뚫리기 직전인 중등도(中等度)에 해당하는 병세라고 밝혔다. 속칭으로 2기 말에 해당하는 병세라고 들려주었다. 머릿속에서 공부하는 행위를 말끔히 지워야만 소생하리라 말했다. 조금이라도 책에 연연하면 영원히 생명을 되찾지 못하리라 거듭 강조했다.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에 우주가 나를 외면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에서도 나를 포근히 받아줄 곳이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나를 짓눌렀다. 차라리 치료를 포기하고 공부하다가 죽어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책을 덮는 순간에 벼락공부로 쌓았던 지식들이 허망하게 스러지리라 여겨졌다. 잠을 줄여 쌓았던 지식이 소멸되리라 여겨지니 너무나 억울했다. 내게 다시는 실력으로 당당히 회생할 길이 없으리라 여겨졌다. 나의 집은 진주의 변두리인 시골 야산 기슭에 위치해 있었다. 어쨌건 행정 구역상으로는 진주인 지역이었다. 시골집에 어머니와 형님 가족이 함께 있었지만 암담하기만 했다. 어느 누구도 내게 정신적인 위안이 되지 못하리라 여겨졌다. 건강과 공부는 가족의 누구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정식으로 휴학한 뒤였다. 나는 밤을 지새워 내 후반의 인생을 예견해 봤다. 어느 국면에서도 회생하여 진로를 개척할 전망은 희미했다. 책을 덮어도 몸이 회생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천 길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비장한 각오로 책을 죄다 덮었다. 그러고는 오로지 치료에만 신경 쓰기로 했다.

   그렇게 치료했는데도 이듬해 2월까지 완치되지 않았다. 교의(校醫)로 지정된 의사가 펄펄 뛰며 복학해서는 안 된다고 막았다. 다른 학생들이 피해를 받으면 안 된다는 거였다. 피 눈물을 머금고 다시 책을 덮고 치료에 몰입했다.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는 듯한 참담한 심정이었다. 절망감에 흐느적거리면서도 규칙적으로 약을 복용하고 수면 시간을 충분히 늘렸다.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흘깃 바라본다. 벌써 밤 9시를 넘기는 시점이다. 아까 내부 전화를 받은 뒤로 이미 두 시간이 흘렀다.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댄다.

   ‘주인 여자가 살충제 약통을 갖다 주는 걸 잊었나 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지네는 독충이라서 이 방에는 없어야 할 텐데 걱정이네.’

   다시 1년의 치료를 한 뒤에야 고등학교에 복학하게 되었다. 여전히 병은 완치되지 못했다. 중등도의 병세가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했다. 그렇지만 주변 학생들에게 전염될 정도는 아니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그래서 복학이 허용되었다.

   공부와 치료. 치료해야 한다는 마음에 공부에만 매진하기가 버거웠다. 조금만 몰두하려다 보면 수면 시간이 줄어들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치료에 어려움이 생길 상황이었다. 공부에 몰입해도 걱정이고 잠시 휴식해도 걱정이었다. 그러다가 목표를 낮추어 부산의 국립 종합대학교에 응시했다. 당초에는 서울에서 제일가는 국립 종합대학교에 응시할 작정이었다. 그랬는데도 예상 밖으로 응시한 대학교에 낙방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치를 떨며 울먹였다. 그러다가 감정 조절이 어려워 부산에서 진주 가는 버스를 탔다.

   진주까지 2시간이 넘게 걸리는 시간 동안 생각에 잠겼다.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실패를 견뎌내기가 버거웠다. 진주에 도착하면 당초에 집으로 가리라 작정했다. 그랬는데 진주 버스 정류장에서 하동으로 가는 직행 버스를 탔다. 하동까지도 2시간가량이 걸리는 거리였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미래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느낌에 휩싸였다. 치료가 덜 된 병세에 대학까지 낙방하여 절망감이 가슴을 흔들었다.

   ‘바보 같은 놈. 실력 없는 주제에 미래의 세상을 꿈꾼다고? 허황된 꿈을 접고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낫지 않겠어?’

   오후 4시 무렵에 하동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거기서 다시 쌍계사로 가는 완행버스로 갈아탔다. 반시간이 지나자 버스는 쌍계사 입구 종점에 도착했다. 종점에서 내려 시계를 보니 4시 반이었다.

   그 길로 곧바로 쌍계사로 오르는 산길을 탔다. 안내판 입구에서 400m가량 오르니 일주문이 치솟아 있었다. 쌍계사를 거쳐 지리산 북동쪽으로 2.5km 거리를 걸었을 때다. 능선 아래 수직으로 드리워진 벼랑이 시야에 펼쳐졌다. 벼랑의 높이는 60여m에 이르렀다. 겨울이어서 벼랑을 타고 흐르던 물줄기가 얼어붙어 빙벽(氷壁)을 이루었다. 당초의 계획은 거기 벼랑 아래로 뛰어내려 생명을 마감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2.5km의 능선 길을 걷는 중에 생각이 달라졌다. 죽는다는 각오로 딱 1년만 전력을 기울여 노력해 보겠다고. 그래도 실패하면 그때엔 진짜 절벽에서 몸을 날리겠다고. 생명을 내던질 만큼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양심을 찔렀다.

   ‘정말 죽을 만큼 노력했다고 생각하니? 다른 학생들처럼 공부에만 전력을 기울인 게 아니잖아? 병을 고치겠다면서 밤을 새는 일을 스스로 막았잖아? 이런 처지에서 꼭 죽어야 되겠니? 너를 세상에 내보낸 대자연의 뜻을 깊이 헤아려 봤니? 다시 한 번 신중히 생각할 필요는 없을까? 지금 죽으면 너는 영원한 패배자로 세상에 인식될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폭포 아래를 굽어보니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몸을 던지기만 하면 금세 가루로 될 느낌이 들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내 양심에 당당하지 못하여 슬펐다. 이윽고 휴대한 과도(果刀)를 꺼내 들었다. 당초의 계획으로는 목을 찌른 채 절벽에서 뛰어 내리는 거였다. 하지만 이미 자살은 포기한 상태였다. 실험적으로 살며시 목에 칼날을 들이밀어 보았다. 약간 스쳤는데도 따가운 느낌이 들어 만지니 핏물이 배어 나왔다. 칼날은 강력히 핏방울을 원하는 느낌이었다. 가벼운 상처를 어루만지다가 등산로 곁의 바위를 발견했다.

   그 바위의 아래쪽 땅바닥에 휴대한 칼을 조심스레 묻었다. 한 뼘 길이의 과도였다. 잠바 안주머니에 넣어 조심스레 휴대했던 물건이다. 재도전하여 실패하면 다시 찾아오겠다고 작정하면서. 칼이 묻힌 바위를 향해 두 차례 절을 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산길을 타내려왔다. 완행버스를 타고 하동까지 갔다. 하동에 도착하니 밤이 늦어 진주 행 직행버스가 끊긴 상태였다. 그래서 버스 합동 정류장 곁의 여관에 들기로 작정했다. 여관에 들어서기 전이었다. 간이음식점에서 라면을 사 먹고는 저녁으로 대체했다.

   그간 세월에 묻혀 과거를 한동안 잊고 지냈다. 한 해의 노력으로 부산의 꿈꾸던 대학교에 합격했다. 그 이후로 공부하면서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꾸준한 꿈을 펼치려 가족과 상경하여 대학원에도 진학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서울 신림동의 캠퍼스에서 박사학위도 취득했다. 학위를 취득하자마자 자연계 연구소의 책임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나의 나이를 떠올린다. 38살의 활기 넘치는 나이라 여긴다. 자식 둘은 사내 녀석들이다. 큰애는 중학교 1학년생이며 막내는 초등학교 5학년생이다. 아내는 서울의 고등학교의 교사로 근무한다. 앞으로 정년까지는 근무하리라 예견된다. 근래에 나도 직장 근무처를 대전에서 인천의 생명 연구소로 옮겼다. 거주지를 서울에 정착시켰어도 생활에 불편함이 전혀 없다.

   근래에 연휴를 맞아 문득 불일폭포를 찾고 싶었다.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며 현실의 의미를 반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생각에 잠겨 한동안 과거의 공간을 넘나들었을 때다. 숙소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체육복 차림새로 문을 연다. 문 밖에는 여주인이 방긋 미소를 머금고 있다. 여주인이 나를 향해 말한다.

   “나는 어디선가 애인이 찾아들겠거니 여겨서 지금까지 기다렸어요. 기혼남이라도 요즘은 다들 따로 애인이 있다던데 댁한테는 없나 봐요.”

   나는 여주인이 나한테 건넨 500mL짜리 살충제 분사통을 어루만지며 응답한다.

   “겨울철인데도 지네가 돌아다닐까요? 다른 방에도 분사통을 다 건네느라고 시간이 걸린 줄 알았어요.”

   여주인의 눈길이 벽시계에 잠시 머문다. 밤 10시가 조금 지난 시점이다. 잠시 대화를 좀 나눠도 괜찮겠느냐면서 내 의향을 묻는다. 굳이 피할 이유가 없기에 괜찮다고 말했다. 여인이 잠시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맥주 두 병을 들고 온다. 손에는 마른안주인 오징어까지 들려 있다.

   밤 시간에 남편 곁을 떠나 왜 내게로 왔는지 궁금하다. 내 눈치를 읽은 듯 여인이 말한다.

   “주인아저씨는 모레 저녁에야 돌아올 거예요. 지금은 친구들과 절해고도인 홍도에서 술잔을 나누고 있을 거예요. 각 실마다 애인이 다 들어갔는데 503호만 혼자라서 궁금했어요.”

   여인의 말에 따르면 혼자 숙소를 찾는 사람들이 의심스럽다고 들려준다. 일부의 사람들은 세상을 비관하다가 숙소에서 시신으로 나뒹굴곤 했다고 한다. 독약을 마시고 세상을 작별하는 장소로서 여관을 이용했다고 들려준다. 이미 그런 일을 두 차례나 겪었다고 들려준다.

   나는 여인의 방문을 충분히 이해한 상태다. 한 마디로 내 행적이 미심쩍어 올라와 봤다는 얘기다. 남편 부재중에 송장을 치우는 일이 벌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나는 잠시 자신의 모습을 침대에 딸린 거울에 비춰 본다. 결코 초췌하다거나 얼굴에 근심이 서린 행색은 아니라 여겨진다. 문제는 나의 관점이 아닌 여주인의 관점이 어떻느냐하는 점이다. 오죽하면 맥주병을 들고 나를 찾았겠는가 싶어 불쾌감이 살짝 치민다. 하지만 얼른 얼굴 표정을 추스르고는 미소를 머금는다.

   여인이 곧장 나를 향해 말한다.

   “주영호(朱英豪) 씨 맞죠? 영호 씨도 항시 웃으세요. 웃는 표정이 아주 좋아 보이거든요.”

   숙박부에 적힌 내 이름을 여인이 기억한 모양이다. 여인의 나이도 어쩌면 나와 비슷해 보인다고 여겨진다. 내 얼굴 표정을 훑었는지 여인이 맥주를 따르며 들려준다. 자신의 나이는 36살이며 남편은 40살이라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서현지(徐賢芝)라고 밝힌다. 여관을 운영한 지는 15년째에 접어든다고 밝힌다.

   예상 외로 여인의 언변은 탁월하다고 느껴진다. 얼굴이 수수한 편이며 몸매도 평범해 보이지만 매력이 느껴진다. 언행의 곳곳에 활기가 담뿍 느껴지기 때문이다. 당초에 여인을 경계하던 마음을 나도 허물기로 한다. 여인의 의도를 명확히 파악했기 때문이다. 얼간이 사내들을 홀려 금품을 갈취하려는 여자가 아니라 여겨진다. 여관의 안전한 운영을 위해 소신껏 행동하는 여인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당초에 엉뚱한 혐의를 받아 불쾌하던 마음이 스르르 내풀린다. 그러면서 문득 여인의 인생 여로(旅路)가 어떠했는지 궁금해진다.

   여인이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여인의 출생지는 여수라고 들려준다. 거기에서 여자 상고를 졸업할 때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은행에 취직 시험을 치려고 고향을 떠나던 새벽이었다. 여인의 집은 주로 어선(漁船)을 몰아 생계를 운영했다고 들려준다. 새벽같이 바다에 나가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건져 올렸다고 한다. 초기에는 잘 잡히던 물고기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점차 먼 바다에까지 배를 몰고 나갔다고 한다. 상고 2학년이 되었을 때에 아버지의 배가 풍랑에 뒤집혔다고 한다. 그 날 바다에서 아버지를 잃었다고 한다.

   아버지를 여읜 뒤부터였다. 어머니랑 둘이서 개펄을 호미로 파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고 한다. 조개와 세발낙지가 생계의 주된 수단이었다고 들려준다. 그런 환경에서도 여인은 어항에 붕어와 금붕어를 섞어 키웠다고 한다. 그녀가 취직해야만 생계가 해결되리라 여겨졌다. 그래서 여인은 나날이 자신의 결의를 돈독히 가다듬었다.

   여상을 졸업하고 은행 시험에 응시하기 전날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갯벌로 나가고 집이 비었을 때였다. 여인에게 급격한 강박 관념이 들끓었다. 첫 시험에 실패하면 다른 곳에서도 가망성이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어쨌건 첫 시험에 반드시 합격하리라 별렀다. 지원서를 낸 은행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유명한 은행이었다. 합격만 하면 전국 어디서나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이었다.

   여인은 반드시 시험에 합격하고 싶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깨끗이 이승을 하직할 작정이었다. 살아서 무능한 여자라고 비난받고 싶지 않았다. 당시에 여상은 입학하기가 만만찮은 인재들의 집결지였다. 여상만 나오면 취직이 거의 보장되던 시기였다. 그런 시점에서 무능력한 여자라고 매도당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 혼자서 개펄을 파서 생계를 영위하기가 너무 고달프다고 여겨졌다. 당시에 여인은 생각에 잠겼다.

   ‘어쨌든 취직 시험에 붙어야 한다. 붙지 못하면 끝장이야. 시험에 떨어지면 곧바로 이승을 떠나겠어.’

   마음을 다잡아먹자 금세 눈시울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답답한 마음을 어느 누구한테도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당장 그녀가 죽으면 어항의 물고기가 염려가 되었다. 그녀가 매일 시냇물을 받아와 어항에 채워 주고 먹이를 주었다. 그랬는데 그녀가 죽으면 누가 어항을 돌볼 것인가? 그녀가 죽는 날로 어항의 물고기도 생명을 잃으리라 여겨졌다. 취직 시험은 광주에서 시행되는 터였다. 그래서 짐을 챙겨 길을 나서야 했다.

   여인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책상 위의 플라스틱 어항을 들여다보았다. 붕어가 2마리였고 금붕어가 4마리였다. 절대로 서로 다투지 않으면서 함께 잘 살고 있었다. 그랬는데 그녀의 실패로 물고기까지 죽게 되리라 여기자 마음이 애잔했다. 광주에서의 시험 경쟁률은 12.7 대 1이라고 방송으로 알려진 상태였다. 성공할 확률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훨씬 큰 시험이라 여겨졌다.

   한동안 어항을 들여다본 뒤였다. 여인은 백지를 꺼내 서서히 유서를 작성했다.

   어머님께

   오래 곁에서 모시려고 했는데 세상을 헤쳐 나갈 자신이 없어요.

   살아서 비난을 받느니 차라리 저승으로 가고 싶어요.

   키워 주신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않을게요.

   외로우시더라도 잘 지내세요.

                    - 현지 올림 -

   유서를 책상 서랍에 단정히 넣은 뒤였다. 플라스틱 어항을 들고 마당에 내려섰다. 마당의 중앙에서 동서남북의 네 방향을 향해 엎드려 절했다. 반드시 합격하도록 조상님들이 꼭 그녀를 돌봐 달라고. 그런 뒤에 느닷없이 광기(狂氣)에 휩싸이듯 어항을 마당에 뒤집었다. 물고기들이 쏟아지면서 퍼덕거렸다. 곧바로 현지가 물고기들에게로 달려들었다. 발꿈치로 연달아 내리찍어 6마리의 물고기를 즉사시켰다. 조금의 고통도 가해질 틈이 없었던 찰나간의 살생이었다. 물고기의 흔적을 치우고 마당을 비로 쓴 뒤였다. 현지가 울타리 곁에 주저앉아 마구 흐느꼈다.

   여인의 처절한 과거사를 들었을 때다. 여인이 나의 분신같이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여인에게 손을 내민다. 여인도 감정이 격했던지 망설임 없이 내 손을 맞잡는다. 그러다가 이내 손을 놓고는 둘이 술잔을 기울인다. 여인의 말이 이어진다.

   유서를 책상 서랍에 넣어 두고 이튿날 집을 나설 때였다. 새벽에 사립문에서 어머니가 지키고 섰다가 현지를 배웅하며 입을 열었다. 이때 어머니가 현지의 마음을 안 것처럼 말했다.

   “끝까지 마음을 가다듬어야 쓴당께. 그렇기만 하면 뜻을 이룰 거야. 너무 마음을 조이지 않도록 하랑께. 내 말 알것지라?”

   현지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누르며 고개만 두어 번 끄떡였다. 그러면서 이내 발걸음을 놀려 달아나다시피 새벽의 공간을 뛰었다.

   여인의 술잔에 맥주를 따르면서 술이 떨어졌다는 눈치를 보인 모양이다. 여인이 문을 열어 복도를 보여준다. 복도에는 맥주병이 8병이나 세워져 있다. 여인이 진작부터 10병을 가져 왔던 모양이다. 그러고서 방에는 맥주 2병만 들고 들어왔음이 드러난다. 내가 조심스레 맥주 8병을 죄다 실내로 옮긴다. 그러고 나선 여인에게 내가 말한다.

   “잠시 안주를 좀 사 올게요. 기다릴 수 있겠어요?”

   여인이 즉시 소리를 높여 말한다.

   “나하고 얘기하는 게 거북하게 느껴져요? 안주는 내가 금세 가져 올 테니 기다리세요.”

   금세 여인이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우렁이 무침과 도토리묵을 방바닥에 펼친다. 둘이 술잔에 술을 채우면서 이야기를 계속 펼친다.

   “현지 씨, 그런데 취직 시험에는 물론 붙었겠죠? 왠지 제 느낌에 그렇겠다는 믿음이 실려 오네요.”

   여인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응답한다.

   “이야, 당신도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볼 줄 아네. 내 눈에도 당신은 나 못지않은 섬뜩한 느낌으로 비쳤거든. 나이도 비슷한데 지금부터 말 놓고 얘기하자고. 불만 없지?”

   여인이 시험을 치른 날은 일요일이었다. 시내 초등학교 교실에서 시험을 쳤다. 30명 선발에 382명이 지원한 시험이었다. 현지는 운을 하늘에 맡기고 최선을 다해 시험에 응했다. 3시간에 걸친 시험을 마쳤을 때다. 탈진한 상태로 광주의 여관을 찾아 몸을 눕혔다. 이내 수마에 휩쓸려 의식을 잃었다. 시험 결과는 사흘 뒤에 금융 협회 본관에 게시한다고 했다.

   여인은 실패할 경우에 대비하여 죽을 장소를 둘러보기로 했다. 무등산의 가파른 서석대에도 올라가 보았다. 학선리의 길이가 2km에 이르는 광주호에도 가 봤다. 나날이 근심하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했다. 며칠만 더 지나면 완전한 폐인이 될 지경이었다.

   여인이 술잔을 내민다. 여인의 술잔에 맥주를 가득 따른다. 여인도 내 술잔에 맥주를 금세 가득 채운다. 둘이 술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외친다. 내가 대화의 변죽을 슬쩍 울린다.

   “죽을 장소를 찾던 중에 죽겠다는 생각이 사라진 건 아냐? 그래 어느 정소가 마음에 쏙 들었니?”

   현지는 빙긋이 웃어넘기며 얘기를 계속 한다. 마침내 사흘이 흘러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이었다. 합격자 명단은 금융 협회 본관에 게시한다고 했다. 협회 건물은 광주역 부근인 중흥동에 세워져 있었다. 오전 6시에 협회 건물에 도착했지만 10시에 발표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일단 광주역 근방의 다방이나 음식점으로 흩어졌다. 거기에서 10시까지 기다리겠다는 분위기였다.

   맥주를 마시자 몸에 서서히 열기가 치솟는다. 여인이 덥다면서 블라우스를 방바닥에 벗어던진다. 그러자 커다란 유방을 겨우 감춘 브래지어가 눈앞에 흔들린다. 브래지어를 제외하곤 상반신은 알몸으로 드러난 상태다. 내가 눈길을 어떻게 수습할지 망설일 때다. 현지의 목소리가 내 귓전을 파고든다.

   “네 마음이 도인 수준이란 걸 이미 알고 있어. 괜히 쑥스러운 표정을 짓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어. 옛날에는 여자들이 저고리를 입었어도 젖가슴이 드러나곤 했잖아? 중요한 건 내 젖가슴이 아니라 네 마음이야. 브래지어까지 풀고 싶지만 네가 달아날까 봐 참는 중이야.”

   장난기가 그득 실린 미소를 지으며 여인이 얘기를 계속한다. 자칫 방심했다가는 여인한테 호되게 몰릴 가능성마저 엿보인다. 자연스런 분위기를 취하면서도 여인에 대한 경계를 제대로 할 작정이다. 일시의 방심으로 소중한 현직(現職)을 잃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이 들 때부터다. 나는 내 언행에 바싹 신경을 써서 마음을 추스른다. 현지의 얘기가 이어진다.

   광주에서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는 당일이었다. 마침내 10시가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무더기로 건물로 몰려들었다. 응시자들은 물론이고 그 가족들까지 몰려든 모양이다.

   마침내 오전 10시가 되었다. 건장한 두 사내가 둘둘 감긴 천 뭉치를 들고 나왔다. 이윽고 천 뭉치를 벽에 펼치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합격자 명단이 진한 글씨로 씌어 있었다. 현지의 시선이 별똥이 떨어지듯 신속히 명단을 더듬었다. 두 차례나 현지가 수험번호와 이름을 확인한 뒤였다. 자신도 모르게 기뻐 괴성을 내질렀다.

   “이야앗, 붙었어. 붙어부렀다고.”

   현지가 내게 그때의 감동을 생동감 있게 들려준다. 생생하게 들려주느라고 브래지어에 가려진 젖무덤이 내 얼굴에 슬쩍슬쩍 닿는다. 젖무덤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사타구니의 성기가 흥분하여 벌떡거린다. 아직 맥주가 한 병이 남았는데도 현지가 취해서 흐느적댄다. 나는 현지를 안아 나의 침대에 눕힌다. 그런 뒤에 나는 방바닥에 누워 잠을 청한다. 둘은 이내 잠에 휩쓸린 모양이다.

   새벽 4시가 되자 현지가 나를 깨운다. 새벽 공기가 좋다면서 당장 불일폭포로 가자고 제안한다. 둘이 신속히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린 뒤다. 가뿐한 차림새로 불일폭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매표소에서 쌍계사까지는 400m의 거리다. 쌍계사에서 불일폭포까지는 2.5km만큼 떨어져 있다. 새벽 시간이라 매표소에는 매표원이 보이지 않는다. 둘이 빠른 걸음으로 쌍계사를 거쳐 능선 길로 내닫는다. 새벽 공기가 시원스럽게 가슴으로 날아든다. 너무나 상쾌하여 가슴이 후련할 지경이다.

   발걸음을 옮기면서 내가 현지를 향해 입을 연다.

   “은행 취직하면서부터는 매사가 잘 풀렸겠네. 어머니도 편안히 모셨을 거고. 그런데 결혼은 언제쯤 했어? 애기들도 제법 컸을 텐데?” 현지가 상기된 얼굴로 응답한다.

   “취직한 지 3년쯤 지나자 지금의 남편이 내게 만나자고 했어. 일종의 청혼이었던 거야. 만나 보니 나도 첫눈에 마음에 들었어. 전자회사에 다니는 사원이라고 신분을 밝혔어. 결혼하고 보니 대단한 재력가의 아들이었어. 회사 다니는 것은 소일거리 정도였어. 그러다가 시아버지가 나를 불렀어. 둘 다 직장을 접고 모텔을 운영해 보라는 거였어. 내부 시설은 수시로 바꿔 준다고 했어. 그때부터 모텔을 운영했는데 꽤 돈을 많이 벌었어. 5층짜리 건물 3동은 너끈히 지을 만한 금액이야. 나도 은행 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해.”

   나는 현지에게 슬쩍 묻는다. 그녀의 어머니는 여전히 살아 있느냐고? 현지가 고개를 흔들며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들려준다. 간이 안 좋아 치료를 받다가 숨졌다고 한다. 그녀는 딸과 아들 둘을 낳았는데 지금은 잠자고 있으리라 말한다. 그녀는 나름대로 행복하다고 들려준다.

   마침내 쌍계사에서 2.5km 떨어진 불일폭포에 도착한다. 폭포의 안내문에 따르면 폭포 높이는 60m에 이른다고 적혀 있다. 폭포는 겨울철이라 하얗게 얼어붙어 있다. 물줄기가 흘러내리다가 얼어붙은 모양이다. 60여m에 이르는 거대한 빙벽이 수직으로 치솟아 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장관일 지경이다. 폭포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게 목책으로 가려 놓았다. 둘은 조심스레 목책을 넘어 폭포 아래의 골자기에 들어선다. 새벽 시간이라 등산객이 없기에 마음 편히 들어섰다.

   나는 불일폭포 아래쪽 골짜기 바닥의 바위 주변의 하천을 둘러본다. 표면에는 얼음이 하얗게 얼어붙었으며 속으로만 물소리가 미약하게 들린다. 얼음장 밑으로 거뭇거뭇한 것이 이동하는 게 눈에 띈다. 아마도 붕어나 피라미 계통의 물고기 떼라고 여겨진다. 거기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현지와 내가 폭포를 올려다본다. 폭포를 이루는 절벽은 완전히 얼어붙어 빙벽을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가는 물줄기들이 절벽으로 내려오다가는 얼어붙어 연신 얼음으로 변한다.

   나는 예전에 좌절하여 폭포에서 뛰어내렸을 경우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다. 칼로 목을 찌른 채 뛰어내렸다면 분명히 죽었으리라 예견된다. 만약 그때 죽었더라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내 양심의 거울에 영원한 실패자로 인식된 채 사라졌으리라 여겨진다. 그 날의 판단이 내 인생의 새로운 이정표를 구축했다고 여겨진다.

   내 눈빛이 폭포 아래 골짜기 바닥의 얼음장을 더듬을 때다. 현지가 내 등을 두드리며 말한다.

   “너무 과거사에 매달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예전에 불일폭포에 죽으러 왔던 행위는 대자연이 굽어봤을 거야. 그랬기에 네게 재생의 기회를 주었겠지. 단순히 네 생명이 귀해서 기회를 주진 않았으리라 여겨져. 너의 경건한 마음을 대자연이 높이 평가했으리라 믿어. 요즘도 걸핏하면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학생들이 보도되고 있잖아? 동일한 대자연이어도 그네들은 내버려 두는 대자연의 뜻이 뭐겠어? 우주를 대하는 경건한 자세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해.”

   광주에 시험 치러 가려고 물고기들을 꺼내 밟아 죽였다는 현지다. 내겐 현지야말로 대자연의 마음을 감동시켰다고 여겨진다. 그런 강인한 정신을 지녔기에 대자연이 그녀를 합격하게 도왔다고 여겨진다. 대자연의 숨결은 우주에 견실한 기운이 충만하게 작용하리란 믿음이 몰려든다. 그러기에 대자연이 나를 현지와 만나게 해 주었다고 여겨진다. 그리하여 생동하며 희망을 갖는 새로운 기류의 근원을 조성하려는 듯하다.

   내가 여전히 골짜기 바닥의 얇은 얼음장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다. 현지가 거듭 나를 향해 말한다.

   “완전히 얼빠진 사람 같네. 내가 살짝 밀기만 해도 그대로 넘어지겠는걸.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 너무 물이 맑아도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고 하잖아? 적당한 선에서 삶의 자세를 균형 잡는 것이 좋지 않겠어? 솔직히 생각해 봐. 네가 폭포를 찾고 내가 물고기를 죽였던 것이 정상적인 행위였겠어? 아니잖아? 여태껏 잠재되었던 의식이 우리 행위들을 정당화시켜 왔다고 여기지 않아?”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듯 놀란 목소리로 현지에게 대꾸한다.

   “누가 자신의 과거를 미화시킨다고 생각해? 내가 그랬다는 말이냐? 아니면 너 자신이 그렇단 말이야? 설마 우리 둘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겠지?”

   이번에는 현지가 대꾸도 없이 얼어붙은 빙벽을 올려다본다. 자세를 보니 불도의 보살(菩薩)처럼 여겨질 정도다.

   현지를 보살로 잠시 생각한 순간이다. 내 머릿속에 섬광처럼 느닷없이 광기(狂氣)가 치솟는다. 나 자신마저도 예측하지 못했던 돌연한 마음의 작용이다. 같이 머물렀어도 현지가 나보다 먼저 득도(得道)했으리란 생각이 시기심으로 바뀌었을까? 현지가 보살이라면 진짜인지 시험해 보고픈 욕망이 뭉클 인다. 치한처럼 와락 달려들어 현지를 발가벗기고픈 충동이 일시에 들끓는다. 이런 현상은 여태껏 세상 살며 처음 겪는 일이라 생각된다.

   평시에도 나 자신을 도인(道人)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흔해 빠진 속인(俗人)들 중의 하나라고만 여겨 왔다. 그랬던 내가 돌연히 현지를 발가벗기고 싶어 몸을 떤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기며 자신에 대해 화가 치민다. 그래서 주먹을 불끈 쥔 채 입술을 깨문다.

   바로 이때다. 현지가 몸을 돌려 나를 향해 다가서더니 나를 껴안는다. 나는 여전히 두 주먹을 쥔 채 목석처럼 서 있다. 현지가 내게 말한다.

   “내 생각을 말해 볼게. 우리는 평범한 삶을 너무 힘들게 살아온 패배자들 같아. 남들 보기에는 그럴싸한 위치에 있는 것 같지만 아니라고 봐. 우리가 너무 양심을 기만하고 살았다고 여겨져. 한 마디로 철저한 위선자로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 남녀가 만나 서로 좋으면 좋은 거지. 거기에 체면과 도덕을 엮어 저울질해 대는 삶이었잖아? 내 말 틀렸으면 말해 봐. 당당하게 해명해 줄게.”

   나는 주먹을 쥐고 입술을 깨문 것도 모자라 눈마저 감는다. 현지가 포옹을 풀고 물러서더니 계속 입을 연다.

   “얼씨구, 눈까지 감았어? 그런다고 부처나 신이 될 것 같니? 네 마음에는 이미 내가 동물의 암컷으로 읽혔어. 내 말 틀렸어? 좋아, 어디 한 번 신의 경지는 어떤지 확인해 보겠어. 견디기 힘들면 나를 두들겨 패도 좋아. 절대로 문제 삼지 않을게.”

   현지의 말에 막혔던 뇌혈관이 뚫리는 기분이 든다. 대자연이 후반기의 내 삶의 철학을 일깨우는 현장이라 여겨진다. 대자연이 현지를 통하여 내게 교육을 실시한다고 생각된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대번에 현지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러면서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한다.

   “어느 것이 참다운 선이며 위선인지는 솔직히 몰라. 그걸 알 정도였다면 이미 성직자가 되었겠지? 아무래도 내겐 네가 위대한 스승으로 보여. 무슨 말이든 네가 말하는 대로 수행의 길잡이로 삼을게. 나를 지도해 줘.”

   갑자기 골짜기 폭포 아래의 얼음 바닥에 묵직한 침묵이 드리워진다. 그렇게 위협적으로 들리던 솔바람 소리마저 멎은 듯하다. 세상의 문이 일시에 막힌 듯 온 세상이 침묵에 휩싸인다.

   바로 이때다. 느닷없이 현지가 괴성을 콱 내지르더니 무서운 속도로 내게 다가든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는다. 왜 눈을 감아야 하는지도 모르게 눈을 감는다. 막연히 눈을 감아야만 뭔가 해답이 찾기리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눈을 감은 직후다.

   “철썩! 철썩!”

   현지가 두 손으로 내 뺨을 냅다 갈긴다. 그러고는 이내 앙칼진 목소리로 떠들어댄다.

   “그만큼 말했으면 알아들어야지. 구역질나게 내 앞에서까지 위선 행위를 떠벌이고 있어? 네가 얼마나 잘난 놈인지 나는 몰라. 또한 알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과거의 역경을 딛고 일어선 너의 영혼이 아름답게 비쳤어. 내가 너를 따라온 이유가 너의 영혼이 아름다웠기 때문이야. 그랬는데도 계속 세속의 틀에 얽매인 위선의 그물에서 허둥거려? 나한테 위선자는 딱 싫어. 목을 콱 부러뜨려 버리고 싶단 말이야. 네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기에 위선에 묶여 있느냐고? 대답하지 못하겠어? 뜨거운 꼴을 봐야 알겠어?”

   찰나 간에 가슴에 격동이 인다. 나 자신도 모르게 중얼댄다.

   ‘그래, 대자연의 지도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어.’

   내가 침묵을 지키자 현지가 이마에 땀을 흘리며 몸을 떤다. 그러다가 너무나 힘겨운 모습으로 내 곁의 바위에 걸터앉는다. 그러고는 한동안 숨결을 추스른 뒤에 내게 속삭이듯 말한다.

   “이제 알았으니 눈 좀 떠. 내가 너무 과격해서 싫지? 사실은 너를 좀 부드럽게 다룰 수도 있었는데 미안해.”

   나는 잠시 일어섰다가 현지가 앉은 시내 바닥의 바위에 앉는다. 그러자 현지가 내 손을 쓰다듬으며 내게 입을 연다.

   “좀 전에는 내 머릿속으로 누가 다녀간 느낌이 들었어. 마치 무당이 접신(接神)하는 듯한 현상이 내게 일어났어. 그때의 기분으로는 여기서 너를 발가벗기고 싶었거든. 그랬는데 신기한 것은 금세 머릿속이 맑아졌다는 점이야. 뭔가 대자연에는 영험한 존재가 확실히 있기는 있는 모양이야.”

   이번에는 내가 현지를 향해 말한다.

   “옛날부터 폭포에는 죽으려는 사람들이 몸을 많이 날렸잖아? 그래서 죽은 넋들이 골짜기 주변에 깔려 있을지도 몰라. 망령들 중에는 엉큼한 생각을 지닌 영혼들도 많은 모양이야. 너한테 뺨을 맞기 전에 나도 충동적으로 너를 발가벗기고 싶었어. 평소와 달랐던 내 마음이 두려워 주먹을 쥐고 버티었을 뿐이야. 영혼이 너무 맑기에 너한테도 일시적으로 접신 현상이 생겼던 모양이야. 공교롭게도 우리 둘 다 여기서 접신 현상을 겪은 셈이야.”

   현지가 열심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녀의 자세가 너무 경건하기에 순간적으로 장난기가 일어난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장난기를 발출하며 현지한테 말한다.

   “나를 발가벗기고 싶다고 했지? 내 알몸을 보여줘? 지금 당장?”

   현지가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웃으며 응답한다.

   “됐어. 너도 장난칠 줄은 아는구나. 사실은 네가 성 불구자는 아닌지도 의심스러웠어. 어젯밤 같은 경우도 나를 고스란히 내버려 두었으니까 말이야.”

   점차 둘의 곁으로 골짜기의 안개가 밀려들기 시작한다. 어서 폭포 구역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안개가 밀려드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느껴진다. 순식간에 발등이 안 보일 지경으로 안개가 짙게 낀다.

   이때 현지가 몸을 돌려 나를 향해 말한다. 잠시 안개가 끼었다가 빠져 나갈 때까지 기다리자고 한다. 괜히 서둘다가는 절벽에 미끄러져 죽을 수도 있다고 들려준다. 현지의 판단이 옳다고 느껴진다. 쌍계사 계곡 근처에서 오래 산 여인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둘이 다시 골짜기의 바위에 나란히 걸터앉는다. 둘이 마음이 통한 듯 자연스레 손을 맞잡는다.

   현지가 내게 제안하듯 말한다. 기왕 이렇게 알게 되었으니 친한 친구로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둘의 교감의 각별했기에 함께 머물수록 마음이 편하다고 들려준다. 내 생각도 현지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에 흔쾌히 그러겠다고 응답한다. 그러자 현지도 고맙다며 내 손을 쓰다듬는다. 여인의 손결을 통해 그녀의 따스한 마음이 전해지는 느낌이다.

   현지의 체온을 느낄 때다. 느닷없이 커다란 깨달음의 섬광이 내 머리를 관통한다. 현지가 지적한 ‘위선자의 삶’이란 말의 의미가 또렷한 느낌으로 전해진다. 마음이 통한다고 아무데서나 어울리려는 불륜 대열에 불참한 사람들이 아님을. 치열한 경쟁률 때문에 추구하는 목표를 쉽게 포기하려는 사람들을 지칭함을. 경쟁률이 높은 목표를 성취하려는 자들이 진정한 실력자들임을 깨우치려는 듯하다. 또한 경쟁할 상대자들이 있기에 삶이 외롭거나 공허하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경쟁자들로 인해 흘릴 자신의 눈물까지도 승화된 사랑으로 받아들이리라 여겨진다.

   삶의 자락마다 수시로 드리워져 마음을 떨게 만드는 경쟁의 대열. 이런 대열에 낄 때마다 버거워 버둥대던 압박감이 스러지는 기분이다. 반면에 이러한 분위기들이 신선한 삶의 활력소로 소용돌이쳐 밀려드는 듯하다. 관점의 차이로 세상이 환희의 궁전으로 느껴져 황홀하기 그지없다. 이런 느낌이 들자 폭포는 이미 빙벽이 아닌 듯하다. 금세 현지와 내게로 굉음을 토하며 쏟아질 듯한 분위기다. 나는 가슴을 떨며 대자연을 향해 경건히 합장한다.

   안개가 잔뜩 끼어 숨이 답답할 지경이었지만 마음은 너무나 편하다. 불명확한 미래에 좋은 친구를 만나 가슴이 벅찰 지경이다. 느닷없이 얼음장 밑에서 물고기가 파드득대는 소리가 들린다. 물고기에게 대화를 도청당한 듯하여 현지와 내가 쑥스러워 미소를 깨문다.

<200자 원고지 10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