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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 정 모

   차창 밖으로 아카시아의 향기가 진하게 몰려들고 있다. 5월 중순이라 산야의 곳곳마다 아카시아 꽃이 구름송이처럼 바람결에 나풀댄다. 담백한 향긋함이 마음을 한없이 평온하게 다스려 주는 느낌이다. 내비게이션을 보니 목적지 가까이에 도착한 느낌이 든다. 경기도 여주군에 속하는 산골짜기를 상당히 더듬어 올라왔다. 주변은 다 산악인데도 목적지 인근에는 광활한 분지가 펼쳐진다. 대략 직경이 3km에 이르는 거대한 분지가 널브러져 있다.

   분지에 들어서자마자 길가에 안내판이 보인다. 하얗게 칠한 커다란 판자에 검정색 글자가 페인트로 씌어져 있다.

   ‘여주군 운중사(雲中寺) 유적지’

   나는 차를 유적지의 주차장에 가지런히 세운다. 분지는 온통 잔디로 덮여 있는데 말끔히 깎인 상태다. 안내판 옆에는 유적지를 설명하는 입식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다. 신라 말기에 창건되어 고려조에 크게 번성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에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적지의 잔디밭에는 나뒹군 석탑과 불상을 떠받쳤던 좌대(座臺)가 눈에 띈다. 석탑과 좌대 이외에도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대도 눈에 띈다. 비석의 몸뚱이는 사라져 눈에 띄지 않는다. 거북 형상의 비석 받침대의 모양은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석탑 3개와 좌대 1개와 2개의 비석 받침대. 화강암을 조각하여 만든 이들 시설물들은 수려하기 그지없다. 그렇기에 이들이 보물로 지정된 모양이다. 탑과 좌대에 새겨진 용의 조각에는 생동하는 듯한 숨결이 느껴진다. 돌에 숨결이 느껴질 만큼 조각 솜씨가 탁월한 예술성을 보인다. 나는 천천히 유적지의 잔디밭을 거닌다. 아마 외떨어진 곳이어서인지 내방객들의 수는 20명 미만으로 보인다. 불상이 놓였던 좌대를 살펴볼 때다. 불상은 유실되었다는 안내문이 적혀 있다. 불상의 높이는 적어도 2m가량은 되었으리라는 설명이 판자에 적혀 있다.

   불상은 언제 유실되었으며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설명이다. 불상의 재질이 금속인지 석질인지조차 추정하기 어렵다고 한다. 판자에 적힌 설명문을 읽으면서 마음이 공허해진다. 마음이 공허해지자 답답한 마음이 부글거리며 들끓으려고 한다. 분지를 에워싼 사방의 산야에서는 아카시아의 향기가 물결처럼 밀려든다. 향기가 향긋함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가슴이 터질 듯이 회오리친다.

   결혼을 앞둔 서른두 살의 처녀인 내가 유적지를 찾다니? 그것도 잔뜩 심란한 상태로 혼자서 차를 몰고 오지 않았는가? 2년이 흘러도 내 마음을 들쑤시는 것은 허창민(許昌敏)의 존재다. 그는 2년 전에 결별한 나의 애인이었다. 무려 3년간을 연인으로 지냈는데도 나한테서 떠나간 창민이다. 세월이 약이겠거니하고 잊으려 해도 좀체 잊히지 않는 얼굴이다. 미련이 정리되어야 성택(吳盛澤)과 단아한 마음으로 결혼할 텐데 상당히 걱정스럽다.

   새롭게 출발하려는 시점이기에 어쨌든 마음의 앙금을 털어 버리고 싶다. 내 얼굴의 어느 모퉁이에서도 창민으로 인한 그늘을 지우고 싶다. 마음을 비우고 털려고 할수록 아쉬운 마음이 자꾸만 솟구치려 한다.

   유적지 잔디밭에 드러난 주춧돌 터를 둘러본다. 주춧돌 터만 헤아려도 건물이 적어도 20여 동은 되었던 모양이다. 이 정도의 규모라면 족히 대가람(大伽藍)이라 불릴 정도라 여겨진다. 유적지 가장자리로 뚫린 길을 걷다 보니 종무소(宗務所)라는 건물이 보인다. 컨테이너 박스로 얽어 짠 임시 건물이다. 언젠가 절을 복원하겠다는 의지로 세워졌다고 해석된다.

   종무소 언저리부터는 분지가 끝나고 산자락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분지와 산자락의 경계를 이루며 하천이 시원스레 흘러가고 있다. 분지를 에워싼 산악이 높은 탓인지 하천의 수량이 풍부한 편이다. 하천을 덮씌워 산자락과 분지의 경계 지점에 정자가 세워져 있다. 엄밀히 말하면 정자라기보다는 대형 원두막에 가까운 건물이다. 지붕은 정자의 모양새를 흉내 내어 팔각 모양을 갖췄다. 덮개는 함석이며 지붕 아래의 골격은 값싼 합판으로 얽어 짰다. 정자의 바닥은 판자들을 나란히 깔아 니스 칠을 한 상태다.

   정자 내부에는 다탁과 다기(茶器)들이 깔려 있다. 정자의 편액도 향풍정(香風亭)이라 달려 있다. 정자 옆의 산자락에는 수목들이 잔뜩 우거져 있다. 정자 아래로 개천이 흐르고 개천에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 정자 곁을 지나 산등성이로 오르는 길이 열려 있다. 산중턱에는 역대 중들의 사리가 담긴 부도들이 쫙 깔려 있다. 부도의 수가 30여 기에 이르러 그 자체가 장관을 이룬다.

   산중턱의 부도들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목에 향풍정이 서 있다. 마침 약간의 갈증이 이는 판이라 신발을 벗고 정자에 오른다. 정자에 오르자 계곡의 물소리가 시원하게 귓전으로 밀려든다. 정자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머리가 맑아질 지경이다. 다탁 언저리에 내가 앉아서 하천의 물소리를 듣고 있을 때다. 부도를 둘러보고 내려오던 50대 초반의 아주머니들 넷도 정자에 올라선다. 정자의 공간은 30여 명도 수용할 정도로 널찍하다. 아주머니들과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하며 합장하여 인사를 나눈다.

   그뿐. 어디에서 왔느니 무슨 일로 왔는지에 대한 대화는 없다. 낯선 사람들끼리 무슨 얘기를 나눌 여유가 있겠는가? 그저 정자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에 취해 있을 무렵이다. 50대 초반의 여승이 신발을 벗고 정자에 오른다. 그러더니 5명의 내방객들을 향해 합장하며 입을 연다.

   “안녕하세요? 유적지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신 김에 차나 한 잔씩 마시죠? 봄철에 다향이 참 좋아요.”

   자신을 절에 파견된 주지라 밝히며 여승이 다탁 앞에 앉는다. 종무소 건물 내부에도 여승 두 명이 있다고 들려준다. 여승의 나이는 50대 초반으로 보인다. 세월에 융해된 지혜가 눈빛으로 스며 나오는 느낌이 든다. 여승과 거리가 제일 가까운 위치의 사람이 나라고 판단된다. 예의상 두어 마디의 말은 건네야 되겠다고 여긴다.

   “스님, 낮에는 사람들이 드나드니 관계없겠지만 밤에는 다소 적적하지 않으세요?”

   여승이 미소를 머금으며 나를 바라본다. 그러고는 다기의 전원을 켠다. 정자 아래쪽으로 전선이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다. ‘우웅’ 소리를 내며 다기에 열기가 공급되기 시작한다. 여승이 나를 향해 한껏 맑은 미소를 짓더니 응답한다.

   “당연히 밤 시간은 고요하면서도 쓸쓸하죠. 하지만 수행자에게는 반복되는 생활의 일부죠. 당연히 즐겁게 견뎌 내야만 합니다.”

   여승이 커다란 그릇을 앞에 두고는 작은 찻잔을 천천히 헹군다. 헹군 뒤에는 정갈한 행주포로 깨끗이 닦는다. 다탁 주변의 찻잔의 수가 30여 개는 족히 되어 보인다. 찻잔을 헹구고 닦기를 반복하면서 여승이 자연스레 얘기를 늘어놓는다.

   여승이 눈빛을 빛내면서 입을 연다.

   “제가 열두 살 때는 깊은 산중의 암자에 있었어요. 어느 날에는 암자에 저 혼자 머물렀던 때가 있어요.”

   여승의 법명은 ‘공하(空河)’라고 스스로 밝힌다. 공하의 얘기가 물이 흘러내리듯 이어진다.

   공하가 12살이었을 때다. 강원도 인제의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 잡은 암자에 머물 때였다. 주지와 공양주 보살이 불사(佛事)로 인해 암자를 비웠다. 둘은 30여 리 떨어진 본사에서 밤을 보내기로 한 터였다. 공하 혼자서 해발고도 540m의 암자를 지켜야 했다. 무더운 8월이었고 연신 폭우가 내리던 날이었다. 법당과 요사채와 해우소의 세 건물로만 이루어진 암자였다. 암자 뒷면에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펼쳐져 있었다. 암자의 뜰 남쪽에는 깊숙한 산골짜기가 벌려 서 있었다. 암자의 건물들을 뒤덮듯 암자 주변에는 거목들이 하늘을 가릴 정도였다.

   오후 5시 무렵부터 사방이 캄캄해져 왔다. 그러면서 굵은 빗줄기가 암자의 지붕과 뜰에 쏟아져 내렸다. 물통으로 물을 쏟아 붓듯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위력적이었다. 게다가 천둥과 벼락까지 간헐적으로 가세하여 점차 음산한 분위기에 휘몰렸다. 암자 뒤편의 벼랑 위로부터는 간간히 작은 돌조각도 떨어져 내렸다. 자칫하다가는 절벽이 무너져 암자가 통째로 묻힐지 모르리라는 절망감마저 들었다.

   “콰르르! 콰다다당!”

   섬뜩한 불빛이 인 뒤엔 으레 천둥소리가 암자를 뒤덮었다. 암자 마당에는 강풍에 꺾여 떨어지는 나뭇가지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천둥소리는 커졌고 기왓장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커졌다. 느닷없이 공하의 머릿속에 무서움증이 불길처럼 치솟았다. 금세 무너지려는 듯한 절간에 깔려 죽을 것만 같았다. 비가 쏟아지자 숲에서는 이상한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폭음처럼 쏟아졌다. 썩은 나뭇가지들이 부러져 마당에 수북이 쌓였다. 금세 법당으로 충혈된 눈을 가진 귀신들이 몰려들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비명도 못 지른 채 목숨을 잃을 것만 같았다.

   깊은 산중이라 불을 켜기가 겁이 났다. 불이 켜지기만 하면 금세 귀신들이 달려들 것만 같았다. 두려움에 눈물을 글썽이며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법당에 불을 켰다. 그러고는 불상을 향해 무섭지 않게 해 달라며 빌었다. 법당에 불을 켜니 귀신들이 요사채에 와서 아우성을 치는 듯했다. 두려워서 입술을 깨물며 요사채로 건너가 승방에도 불을 켰다. 촛대에 초를 꽂아 해우소에도 불을 밝혔다. 건물마다 불을 밝혔는데도 자꾸만 가슴이 떨렸다. 그래서 건물들마다 초를 한 자루씩 늘려 불을 켰다. 그랬음에도 촛불마저 바람결에 펄럭거렸다.

   “휘이잉! 휘이이잉!”

   “철꺼덕! 철컥철컥!”

   정체불명의 요란한 굉음들이 암자 주위를 뒤덮으며 공하를 괴롭혔다. 공하는 금세 숨이 멎을 듯 가슴이 격렬히 뛰었다.

   그러던 중에 법당을 태울 듯 번갯불이 번쩍거렸다. 잠시 기다렸다가 연이어 세 차례나 천둥소리가 하늘을 갈랐다. 거의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이었다. 무서워서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을 때였다. 바람결에 법당 문짝이 삐걱거리다가 활짝 열렸다. 일시에 밀어닥친 바람결에 불단의 양재기가 날아 공하의 머리를 쳤다. 급기야 공하는 울음을 토하며 법당에 주저앉았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오줌을 지려 사타구니가 질펀했다. 세상이 너무 두렵고 삭막하여 불상 앞에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울면 울수록 자신의 울음소리에 숱한 귀신들이 몰려드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이 얼어붙고 입술마저 새파랗게 변해 자지러질 지경이었다. 울면 울수록 세상이 더 무섭게 다가드는 듯했다.

   바로 이때 예기치 않게 진한 의혹이 가슴속에 끓어올랐다.

   “지금 무엇이 나를 두려워서 떨게 만들까? 나를 진실로 두렵게 하는 존재가 있을까? 아니면 내 마음이 두려워서 떠는 것일까?”

   공하는 이런 의문을 떠올리자 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시 후엔 선승(禪僧)들이 좌선을 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때부터 공하는 몰입 상태에 잠겼다. 거짓말처럼 번개 소리와 폭우 소리가 귓전에서 사라졌다.

   공하가 정자 내의 5명을 둘러보며 차 주전자를 넘긴다. 컵이 빈 사람만 차 주전자를 받아 차를 따른다. 작설차를 천천히 마시면서 내방객들은 공하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공하가 말을 잇는다.

   “그날 저는 많은 것을 깨달았어요. 몇 년이 흘러도 깨우치지 못할 뻔한 것들을 대번에 깨달았어요.”

   그녀를 산중에 혼자 남겼던 중요한 원인이 깨달음으로의 안내였음을 알아차렸다. 사물을 무서워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세상의 두려움이 사라짐을 깨달았다. 두려운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두려워하는 마음의 작용이 문제임을 느꼈다. 그리하여 공하는 법당에서 반야심경을 새롭게 음미했다.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이라. 이 세상의 모든 작용은 원래 비어 있는 체제임을 깨달았다. 객관적인 두려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을 뿐임을. 두려워하는 마음의 뿌리를 더듬으면 세상에는 두려움 자체마저도 없어진다는 얘기였다.

   여승의 얘기를 듣는 순간에 내 가슴에 격렬한 소용돌이가 인다. 만물의 작용이란 게 원래는 비어 있는 체제라고?

   지금까지 창민과 나는 마음이 잘 통했다. 연인으로 지내는 동안 마음이 수시로 달아오를 때가 많았다. 서로 사랑한다는 명분만으로도 창민과 나는 즐겁게 서로를 안았다. 그러다 보니 나의 사타구니로 그의 체액이 수시로 분출되곤 했다. 그런 일은 영혼과 육체를 연결하는 최상의 사랑의 행위로 받아들였다. 그의 체액이 내 몸으로 흘러들 때마다 세상이 녹는 듯했다. 어떤 종류의 환희보다도 황홀하고 아름답게 여겨졌다.

   그러다가 재작년 9월의 일이었다. 어느 때부터 식용 기름 냄새만 맡으면 구토증이 치밀었다. 하도 증상이 심해 산부인과를 찾았더니 임신이 의심된다고 했다. 곧바로 초음파 검사를 하니 수태가 되었음이 드러났다. 이전부터 창민은 대학원 공부를 마쳐야 결혼하겠다고 밝혔다. 그의 꿈은 교수가 되는 거였다. 그의 마음과 의지는 너무나 단호하여 변경이나 양보가 없는 성격이었다.

   내가 임신 사실을 창민에게 얘기했을 때다. 창민이 대번에 내 손을 붙잡고는 줄줄 눈물을 쏟았다. 아직 결혼해서는 안 되는 시기인데 애기를 가져서 어떻게 하느냐고? 그 자신이 조절하지 못했다면서 심하게 자책하는 행동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때 창민이 말했다. 일단 사흘만 생각할 기회를 달라고. 나는 그를 믿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순식간에 사흘이 흘렀다. 나는 창민의 지혜로운 말을 기대했다. 그래서 마음 편안히 창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내 귀로 밀려드는 창민의 말은 너무나 생경스런 느낌이었다.

   “미선아, 모든 게 내 탓이야. 내가 조절을 잘 했어야 했는데 커다란 실수를 했어. 아직은 우리가 결혼할 시기가 아니잖아? 내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데 아직은 대학원 공부를 하는 중이야. 그래서 말인데 이번만 애기를 지우자, 응? 다음에는 절대로 이런 부탁을 하지 않을게. 당장 내일이라도 병원에 가서 애기를 지우자고, 알겠지?”

   창민의 애기를 듣는 중에 그만 울음이 툭 터졌다.

   “으흐흑! 으흐흐흑!‘

   내 관점에서 절대로 창민은 그렇게 얘기하지는 않으리라 믿었다. 그랬는데 너무 실망하여 가슴이 벌벌 떨렸다. 창민은 너무나 사고(思考)가 독단적이어서 그의 부모와도 상의하지 않으려 했다. 절대로 그의 부모가 눈치 채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그의 부모한테까지도 자존심을 내세우려는 창민이었다.

   창민과는 달리 나는 그의 부모와 진심으로 상의하고 싶었다. 그의 부모는 더욱 슬기로운 방법을 제시할지도 모르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창민은 결혼하면 당장 그가 가장(家長)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가장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데 대학원 때문에 어려운 일이라고 밝혔다. 결혼하면 가장이 무조건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겐 너무나 융통성이 없는 말로 들렸다.

   나는 여자의 관점에서 창민에게 말했다. 생긴 태아를 지우는 것은 소중한 생명을 버리는 행위라 말했다. 임신이 안 되어서 고민하는 젊은이들도 많은 세상이지 않은가? 임신된 아기를 지우면 하늘에 죄를 받을지 모른다고도 들려주었다. 게다가 여성의 성기는 민감한 곳이라 설명했다. 수술로 잘못 건드린다면 나중에는 출산조차도 못할지 모를 일이라고 말했다. 내가 이성을 앞세워 조리 있게 설명할 만큼은 했다. 그랬는데도 창민은 생계와 가장을 들먹이며 그의 고집만 집요하게 내세웠다.

   이전까지는 싸워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둘은 다정한 연인이었다. 그랬는데 내가 임신하면서부터 둘의 마음속에서는 독소가 끓어올랐다. 상대를 가혹할 정도로 모욕하려고 벌벌 떠는 자신들을 발견했다. 이런 행위는 사랑과는 거리가 완연히 멀다는 느낌이 짙어졌다. 이때부터 둘의 마음속에는 지나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하게 들끓었다. 조금이라도 자존심의 침해를 받았다고 느끼면 격분하여 난리를 쳤다. 내가 창민에게 난리를 피우기도 했고 창민이 나를 모욕하기도 했다. 나날이 둘의 사이에는 서로를 증오하는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창민이 내세운 사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나는 창민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혹시라도 창민의 견해가 달라져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창민은 완강하기만 했다. 격분하여 그가 소리를 질렀다.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 내가 가장이 되면 생계를 책임져야 된다고 했잖아? 왜 자꾸 네 고집만 내세우려고 해? 예전에는 네가 안 그랬잖아? 왜 네 마음이 변했는지 모르겠어. 자꾸 네 고집만 내세우려면 차라리 우리 헤어지자고. 아무래도 그게 낫겠어.”

   헤어지자는 극한의 말을 들은 순간이었다. 나는 눈이 뒤집혔다. 나는 독이 올라 창민의 뺨을 좌우 한 차례씩 갈겼다. 그러고는 나도 냅다 고함을 질렀다.

   “내가 고집만 피운다고? 그런 말을 하는 너는 왜 양보를 못하니? 아무리 화가 나도 할 소리가 따로 있잖아? 어디다 대고 헤어지자는 소리를 해? 내가 누구 때문에 애기를 가졌는데?”

   화가 너무 차올라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다. 잠시 숨결을 추스른 뒤였다. 나도 그를 노려보며 극한의 발언을 했다.

   “좋아, 나도 너한테서 정나미가 완전히 떨어졌어. 나도 더 이상은 너의 피가 든 애기를 용납하지 못하겠어. 네 허락에 관계없이 애기를 지우겠어. 나도 융통성이라곤 없는 네 성격에 완전히 질렸어. 우리는 연분이 아니었나 봐. 지금 이후로는 우리 절대로 만나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알겠어?”

   언쟁한 뒷날에 나는 병원에서 애기를 지웠다. 임신한 지 1개월이 조금 지난 남아였다. 생명체로 살아갈 태아의 운명이 창민과 나로 말미암아 스러져 버렸다. 수술을 하고 집으로 돌아간 날이었다. 나는 방바닥에서 이불을 둘러쓰고 마구 통곡했다. 아무리 통곡해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세상을 떠난 태아의 영혼이 언제나 나를 원망할 것만 같았다.

   세상에는 미련을 정리할 때까지가 힘든 모양이었다. 태아 문제만 아니었다면 우리는 결혼했을지도 모른다. 둘이 만난 뒤부터였다. 둘의 영혼이 통하여 창민과 나의 학력이 경쟁적으로 향상되었다. 서로 만난 이후로 둘은 진학한 대학에서 줄곧 장학생을 유지했다.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취직 문제까지도 어렵지 않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둘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던 모양이다.

   창민과 헤어진 뒤엔 결코 연인은 다시 생기지 않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신비한 혹성의 소용돌이처럼 새롭게 가슴으로 밀려든 사내가 있었다. 창민과 나이가 같은 오성택이었다. 처음부터 상대를 깎듯 배려하여 관심을 보이는 사내였다. 수수한 용모에 담긴 청순한 눈빛이 가슴에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성택도 내가 그한테서 느끼는 유사한 느낌을 곧잘 받는다고 했다. 나의 관점으로 참다운 연분은 성택과 나의 관계라 여겨졌다.

   여승이 나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한다.

   “제가 주지이긴 하지만 일방적으로 경전 얘기만 하지는 않아요. 어찌 보면 보살님들이 저의 스승일지도 모르는 일이거든요. 그런데 젊은 보살님께서는 아직 미혼이시죠? 처음 볼 때보다는 표정이 많이 밝아졌어요. 처음에는 마치 달이 먹구름에 갇힌 듯한 표정이었거든요. 이젠 햇살에 나부끼는 맑은 깃털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관심을 가져 주는 여승에게 뭐라고 응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도 여승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맑은 목소리로 말한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무척 편안해집니다. 결혼을 앞두고 마음이 조금 무거워 바람을 쐬려고 여기까지 왔어요. 산중에서 혼자 겪은 스님의 체험담이 인상 깊게 느껴졌어요.”

   4명의 아주머니들이 여승과 대화를 나눌 때 내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여승을 향해 합장하며 말씀 잘 듣고 간다며 인사한다. 여승이 잠시 일어나 합장하고는 자리에 앉는다. 나는 조용히 등을 돌려 주차장으로 향한다.

   새로운 장소를 찾아 길을 나서는 기쁨을 누리려고 한다. 승용차에 올라 내비게이션에 용문사(龍門寺)를 입력한다. 수령이 1,100년이나 되는 42m 높이의 은행나무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용문사를 찾되 이번에는 은행나무만 살펴볼 작정이다. 자연물에서도 수용할 만한 지혜가 가득 담겼으리라 여기기 때문이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예전에 창민과 함께 구경한 적이 있다. 나 혼자 은행나무를 보게 되면 감회가 달라지리라 여긴다.

   여주를 떠나 차는 양평군을 향해 달린다. 나는 차 문을 올려 시원한 바람을 맞아들이며 도로를 달린다. 차를 달리면서 과거에 시도해 보지 못했던 일을 떠올려 본다.

   ‘창민과 헤어지기 전에 그의 부모한테 고뇌를 털어놓았다면 어땠을까?’

   불교의 화두(話頭)처럼 사고(思考)의 윤곽이 잡히자 마음이 편안해진다.

   가장 먼저 격렬한 반응을 보였을 사람이 예견된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창민이다. 함께 지냈던 세월에서 예견되는 그의 반응이 느껴진다.

   “내가 부모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했잖아? 우리 문제는 우리끼리 해결해야지 왜 부모를 끌어들여? 너는 그렇게도 내 의견을 무시하고 싶니? 네가 굳이 그런 반응까지 보이는 데야 난들 어쩌겠니? 우린 건드리지 말아야 할 상대의 자존심을 너무 많이 건드렸어. 아무래도 우리는 연분이 아니었던 모양이야. 서운하게 생각지 말고 잘 가.”

   다음으로 예견되는 인물은 그의 아버지다. 창민의 집을 들락거리며 그의 아버지와 몇 번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아버지는 미술 선생이자 조각가이다. 주물 조각보다는 물체에 형상을 새기는 영역을 선호하는 예술가다. 오랜 교직 생활로 다듬어진 품성이 만만치 않게 느껴지는 인물이다. 만약 그에게 내가 애기를 가졌다고 호소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내 머릿속으로 다양한 상념의 구름이 피어올랐지만 맥은 통일되어 밀려든다.

   “아기를 가졌다고? 나한테 말하기까지 무척 힘들었겠구나. 우선 애기를 가진 걸 축하한다. 대자연이 준 소중한 생명이니 낳아야 되지 않겠니? 이런 상황이라면 둘이 결혼하는 게 좋겠어. 창민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내가 돌봐 줄게. 힘을 내어 결혼해서 가정을 잘 꾸려 봐. 창민한테는 내가 잘 얘기해 볼게.”

   내가 아는 그의 아버지는 이런 반응을 보였으리라 믿는다. 이런 상태였다면 아무 탈이 없었으리라 여겨진다. 애기를 지우지도 않았을 것이고 창민과도 결혼했으리라 여겨진다.

   창밖에는 여전히 5월의 부드러운 기류가 남실댄다. 열린 유리창으로 아카시아의 향기가 꿈결같이 감미롭게 흘러든다. 신체 감각이 건강한 게 무척 행복감을 안겨 준다.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면 감미로운 향기에 벌써 잠들었으리라 여겨진다.

   달콤한 아카시아의 향기와 부드러운 5월의 햇살이 어우러져 감미롭게 출렁댄다. 향기를 맡으니 세상이 이처럼 감미롭게 느껴지는가 싶어 마음이 평온하다.

   내가 창민을 좋아하게 된 보이지 않은 근원은 그의 어머니다. 시청에 근무하는 공무원으로서 항시 표정이 밝고 온화하다. 언제 만나도 항시 포근한 마음으로 나를 대한다. 어떤 경우에도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여인이라 느껴진다. 내가 아기를 가졌다고 그의 어머니한테 말했을 때의 반응을 추측한다.

   “아이고 반가워라. 참 잘 되었네. 그러면 이렇게 하는 게 어때? 양가 부모가 빨리 만나 결혼식을 올려야겠어. 걱정하지 말고 당장 결혼식부터 올려야 되겠네.”

   그의 어머니의 견해를 따라도 불만스럽지 않은 결론이라 여겨진다. 애기도 보호했을 테고 결혼식도 올렸으리라 예견된다.

   ‘아, 그런데 나의 분신이라 여겼던 창민의 생각이 왜 고집스러웠을까?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지만 숨겨진 해결책도 있었어. 그런데도 굳이 고집을 피운 의미가 뭐였을까? 혹시라도 나에 대한 애정이 식은 탓일지도 모를 일이야. 차라리 헤어지고 싶다는 얘기를 그가 먼저 꺼내지 않았던가? 중요한 것은 마음의 흐름이라고 여겨져. 마음의 흐름이야. 그가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럼,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어쨌든 창민과 헤어진 일이 너무나 가슴 아프다. 어지간하면 호흡을 맞춰 주려고 했는데 너무 일방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득 내 머릿속으로 정자에서 잠시 들려준 여승의 얘기가 밀려든다. 세상의 영혼은 죽은 뒤에 윤회한다고 했다. 가정을 이루며 살았던 영혼은 죽어서도 새로운 가정을 찾는다고 했다. 그리하여 영혼이 새로운 가정을 이룰 아기의 몸을 찾아든다고 했다. 이 부분에서 나는 허허로운 미소를 짓는다. 영혼이 윤회를 한다는 전제는 불교의 관점이라 여긴다.

   결혼을 앞둔 처녀인 내겐 종교의 관념이 중요하지 않다. 까짓 영혼이 윤회하면 어떻고 윤회하지 못하면 어떻겠는가? 비종교인인 나는 절대로 종교의 관점을 섣불리 언급하고 싶지 않다. 종교에서는 숱한 명현(名賢)들이 머리를 짜서 틀을 잡았으리라 여기기 때문이다.

   종교의 관점을 들여다보며 복잡한 머리를 식히고 싶을 뿐이다. 현상에 문제가 있다고 간주되면 이래저래 마음이 불편하리라 여겨진다.

   여승의 말에 따르면 나도 죽으면 새로운 가정에 윤회하리라 예견된다. 하지만 여승의 말의 진위 여부는 추론하기 힘들다고 생각된다. 설혹 윤회되었더라도 전생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체제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윤회되었는지 검증할 논리가 끊긴 셈이다. 다만 윤회를 인정한다면 마음이 다소 편안해지리라는 이점(利點)은 있으리라 여겨진다.

   차창 밖으로는 낯선 산봉우리와 골짜기가 수없이 나타났다가 스러진다. 눈앞에 펼쳐진 봉우리와 골짜기 수만 해도 헤아릴 길이 없다. 봉우리를 떠올리자 창민이 고집을 부린 근원을 분석하고 싶어진다. 나의 관점이나 그의 부모의 관점에서는 분명히 돌파할 길이 있었다. 그랬음에도 굳이 고집을 피운 근원이 무엇이었던지 섬뜩할 정도로 궁금하다.

   여승이 두려움에 떨었던 본질을 곰곰이 떠올려본다. 죽음으로 내몰리는 위기적인 상황이 무서움의 근원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죽음을 떠올린다는 마음이 문제였음을 여승이 깨달았다고 하지 않은가?

   창민이 내게 중절 수술을 요청한 심리적 근원이 무엇이었을까? 임신을 받아들여 순리대로 결혼할 생각을 못한 배경이 무엇이었을까?

   창민과 갈라서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임신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임신이 안 되어 애를 쓰는 남녀들이 적지 않다고 알려졌다. 신체적으로는 결격 사유가 없는데도 임신이 안 되어 야단들이다. 이럴진대 인간에게 임신이 일어났다는 건 대자연의 축복이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들이 심드렁한데 나만 축복이라 여기면 내가 이상한 여자이리라. 정말 나만 임신을 축복이라 여길까? 숱한 사람들이 임신을 위해 팔공산의 갓바위를 찾지 않는가? 임신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갓을 쓴 돌부처를 찾게 했으리라 여겨진다.

   오후가 되자 바람결이 파동이 되어 사방으로 흩날린다. 열린 차 창 밖으로 공기의 기류가 회오리친다. 해가 지기 전에는 용문사에 도착해야 하는데 가능하겠는지 거리를 가늠한다. 충분하리란 생각이 든다. 시간의 제약에서 여유가 생기니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진다.

   철저하게 창민의 입장에서 임신을 생각해 봐야겠다고 여긴다.

   ‘지금부터 나는 옥미선(玉媚鮮)이란 여자가 아니다. 미선을 사랑한 허창민이다. 창민의 관점에서 미선의 임신을 분석해 보기로 하자. 왜 임신을 수술로 막아야 하고 둘이 헤어졌는지를? 왜 도저히 결혼할 수 없었는지를 헤아려 보자.’

   생각하다가 분노가 들끓으면 즉시 생각을 중단하기로 한다. 사고의 전환은 참신했지만 생각만큼 역할 전이가 쉽지 않다.

   문득 중절 수술하기 1주일 전의 정경이 떠올랐다. 창민과 내가 마지막으로 담판을 하는 날이기도 했다. 창민이 내게 말했다. 일단 자신의 얘기를 먼저 청취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 뒤에는 내가 하는 모든 얘기를 듣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보름이라 달빛이 눈부신 한강 백사장에서였다.

   우선 경제력이 없이 결혼한다는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분가하여 부모의 도움을 받는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했다. 설혹 부모가 도와주겠다고 하더라도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의 꿈은 대학 교단에 서는 거였다.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적어도 8년은 걸리리라 예측했다. 그러고는 미국에서 학위 후 연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그 기간이 대략 2년은 필요하리라 들려주었다. 그러고도 대학의 전임강사가 될 확률이 희박하다고 했다.

   바늘귀에 오징어 다리를 꿰듯 희박한 확률이라 말했다. 무려 10년의 세월을 소모하고서도 교수가 못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 불투명한 미래에 나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10년 뒤에조차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을 작정이라 했다. 목표를 이룬 뒤에 결혼하겠다고 강조했다. 10년 뒤조차 결혼할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교류를 지속하겠느냐고 말했다. 교류를 지속하지 못하는 원인이 오로지 그에게 있다면서 몸을 떨었다.

   그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인이 나라고 말했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무책임하게 10년을 기다리게 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부모의 심리는 태아에게 중요한 영향을 주리라 주장했다. 그가 불안할 때 아기가 생기면 아기가 압박감을 받으리라 말했다. 압박감을 받은 아기는 나중에 정신 이상자가 될지도 모르리라 들려주었다.

   인간의 성격 형성 시기인 유년기가 불안해서는 곤란하다는 얘기였다. 태아가 소중할지라도 나중에 정신 이상자가 된다면 문제가 되리라 말했다. 세상에서 외면당하는 존재가 된다면 태어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들려주었다.

   정신 기능 장애자도 소중한 생명체임에는 분명하다고 했다. 타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삶을 유지한다면 비참한 인생살이라고 주장했다. 정상인이 아닐 확률이 높은데도 출산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세상에 태어날 아기의 관점을 진지하게 고려해 달라고 창민이 말했다.

   미래에 태어날 아기의 관점이라? 이 말을 듣자마자 나는 너무나 충격을 받은 느낌이었다. 태아가 엄청나게 소중하다고 부들부들 떨며 주장했던 나였다. 그런데도 나는 정작 아기의 관점은 고려해 본 적이 없었다. 아기가 정신적인 괴로움을 안고 세상을 살리라 여기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출산된 아기가 확정적으로 비정상인이 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정상인이 될 확률이 현저하게 높다면 생각이 달라지리라 여겨졌다.

   당시에는 무조건 나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분석하려 했다. 창민의 생각마저 나의 관점에서 벗어난다고 여기자 울화가 치솟았다. 태아에겐 창민과 나의 영혼이 함께 실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태아를 지우겠다는 생각을 내비치는 창민한테 너무나 정나미가 떨어졌다. 연인끼리의 결정체를 지우겠다는 생각 자체가 무섭게 느껴졌다. 둘이 쌓아 온 사랑의 행적들을 지우겠다는 의미로도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할수록 창민에게 짙은 혐오감이 피어올랐다. 도저히 세상에서 함께 살 수는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정신 이상자’란 용어가 떠오르면서 두뇌가 감전된 느낌에 휩싸인다. 창졸간에 너무나 충격을 받아 차를 운전하지 못할 지경이다. 그래서 호젓한 산 속 능선 길에 차를 세운다. 산 아래로는 산자락들이 남북으로 아스라이 펼쳐진 곳이다. 너무 호젓한 듯 지나다니는 차량들마저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람의 형상이 문제가 아니라 여겨진다. 정신 상태가 병들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오죽 많은가? 사람들일지라도 분명 사람 나름이라 생각된다. 신체는 멀쩡해도 정신이 병든 사람은 폭발물처럼 위험한 존재라 간주된다. 내가 낳은 자식이 정신 이상자가 된다면 어떻겠는가? 진실로 무서운 문제거리가 되리라 여겨진다. 창민이 진실로 고뇌한 문제가 이것이었음이 이제야 확실히 느껴진다.

   태아 다음의 문제는 무엇이었던가? 창민이 거듭 들려주었던 내용을 떠올린다. 불투명한 10년간의 시간이었다.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기간이라고 했다. 그랬는데 10년이 지난 뒤에도 목표 달성이 불확실할 거라고 했다. 현재의 나는 결혼을 앞둔 상태다. 결혼하여 새로운 터전을 잡기 전에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창민에 대한 상념이 깊어지자 파안석불(破眼石佛)이 생각난다. 용문사를 지척에 둔 야산의 협곡에 나뒹굴던 파불(破佛)이었다. 높이는 1m가량인데 허리 윗부분만 남은 깨어진 석불이었다. 그나마 흙더미가 무너지는 좁은 계곡에 위태롭게 걸쳐져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소실될 돌 뭉치였다. 부처의 얼굴에는 눈구멍이 조각되었을 뿐 눈알은 애초부터 없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눈알이 애초부터 없었는지 의아스럽게 여겨졌다.

   혹시 처음에는 눈을 갖춘 완벽한 석상이었는데 눈이 파손되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눈구멍 부분을 예전에 자세히 관찰해 보았다. 처음에 있던 눈을 파낸 게 아니었다. 원래부터 눈구멍만 지닌 얼굴이었음이 드러났다. 눈알 빠진 눈구멍만 지닌 돌부처라?

   당시에 창민과 같이 발견했던 석불의 인상은 강렬했다. 석불에 융해된 조각 기술은 어느 고찰의 것보다 빼어나게 보였다. 당시에 석불을 바라보며 창민과 내가 의견을 나누었다. 창민이 먼저 의견을 제시했다.

   “눈에 비친 것만 보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실린 듯해. 그래서 눈 없이 드넓은 세상을 보겠다는 의지가 내풍긴다고 여겨져.”

   묘하게도 창민의 관점은 나와 일치했다. 단지 창민이 나보다 먼저 얘기했을 따름이다. 나도 창민을 향해 말했다.

   “어쩜 우리의 관점이 이처럼 일치하는지 놀라워. 내게도 너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거든. 이 부처에겐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석불이 벼랑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데 우리한테는 대책이 없어. 안타까울 뿐이야.”

   그 날 석불을 보고 자리를 떠날 때였다. 내 의식계로 많은 상념들이 들끓었다. 하필이면 파안석불을 보게 된 무형의 계기는 없었는지? 혹여 석불이 우리한테 뭔가를 암시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그때 당시의 석불은 흙더미에 묻혀 있어서 손쓸 수가 없었다. 만약 손을 댔다가는 당시에 재앙을 당할 것만 같았다.

   아무튼 그때의 찜찜했던 여운 탓이었을까? 석불을 대했던 이후에 창민과 나는 서로 작별하게 되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다. 용문사로 갈 것이 아니라 파안석불을 둘러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곧바로 차에 오른다. 마침 용문사가 멀지 않은 지점이다. 석불이 있던 곳은 다행스럽게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기억해 두었다.

   마침내 용문사가 먼발치에 바라보이는 야산 협곡 아래에 주차시킨다.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석불이 있는 협곡에 도달하게 된다. 어떻게 할 작정은 없으면서도 트렁크에서 삽을 가지고 산을 오른다. 십여 분을 산을 오른 뒤다. 마침내 협곡에 올라선다.

   ‘혹시 석불이 사라지지는 않았을까? 문화재청의 직원이나 도굴꾼에 의해 자리를 떠난 건 아닌지?’

   두근대는 가슴으로 마침내 협곡 아래에 내려선다. 협곡 아래로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다. 흙더미에 묻혔던 석불이 의외로 반듯하게 서 있다. 허리 윗부분만 보존되어 세워진 석불이다. 허리 아래의 몸체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석불 앞에는 작은 돌멩이 3개가 탑처럼 놓여 있다. 흘깃 살펴보니 돌멩이 사이에 종이 조각이 눈에 띈다. 종이를 들어 펼치니 창민의 글씨가 내 시선을 이끈다.

   태아를 떠나보낸 내 마음

   내게 영원한 슬픔이 되리라.

   진실로 사랑하기에 놓았던 연분이여

   승화된 향기로 서로를 격려하기를.

   편지에는 일체의 서명이 없다. 하지만 창민의 필체임이 명확하다. 그의 서체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기 때문이다. 그가 나보다 먼저 석불에 다녀갔으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창민의 글귀로 그가 나를 진심으로 배려했음을 거듭 확인한다. 창민의 마음이 종이에서 치솟아 내 가슴으로 스며드는 듯하다. 나 자신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줄줄이 떨어져 내린다. 나는 마음을 잠시 추스른다. 그러고는 석불을 향해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인다. 세 차례 머리를 숙인 뒤다. 나는 석불을 창민이라 여기고 석불에게 말한다.

   “창민 씨, 예전에 내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어. 근본적으로 당신은 내가 10년간을 헛되어 기다릴까 나를 걱정했음을 알았어. 우리의 2세가 정신적으로 병든 삶을 살지 않도록 취했던 결단이었구. 이제 당신에 대한 어떠한 원망도 없어. 다만 당신의 목표가 순조롭게 성취되기를 빌게. 당신의 배려에 따라 나도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 잘 살게. 안녕!”

   당초에는 삽으로 흙을 파서 석불을 묻어줄 작정이었다. 그랬는데 이미 창민이 석불을 바로 잡아 놓은 거였다. 안구 없는 석불의 눈에서 운중사 주지의 얼굴까지 보이는 듯하다. 두려움의 실체는 죽음을 떠올리는 마음이었음을 고백한 여승을 말함이다. 마찬가지로 태아에 대해 슬퍼했던 내 마음이 평온해진다. 태아에 대해 진심으로 눈물을 쏟았던 창민의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석불을 떠나기에 앞서서 나는 눈을 감고 창민을 향해 합장한다. 진심으로 그의 목표가 잘 이루어지길 빌며.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려고 할 때다. 산록에 우거진 수목들에 물결 같은 바람이 인다. 처음에는 파드득거리는 소음이었다가 이내 수런거리는 대화 같은 음향이 흩날린다. 나를 내려다보는 대자연이 나를 격려하는 느낌이 든다. 나는 석불에게로 다가서서 눈 빠진 석불의 안구 부위를 더듬는다.

   석불이 눈을 잃듯 창민도 목표를 놓치지 않기를 거듭 빈다. 그러고는 입술을 깨물며 나는 산자락을 타고 내려선다. 점차 솔바람 소리가 청아한 음향으로 내 가슴으로 휘몰려든다. 태아로 인해 멍들었던 내 마음이 실연기처럼 흩어지며 평온해진다. 태아의 숨결이 환영인 듯 내게로 아늑한 체온으로 밀려드는 듯하다. 순간적으로 설움이 끓어오르며 내 눈에서 눈물이 줄지어 떨어져 내린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차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설혹 산사태가 일어날지라도 평온하게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산악이 생동하는 숨결로 흔들리는 듯하다.

<200자 원고지 9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