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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승과 나비
손 정 모
스산한 바람이 새벽의 소백산 산골짜기를 뒤흔든다. 치솟은 봉우리마다 눈이 쌓여 하얀 성곽처럼 펼쳐져 있다. 살갗을 찌를 듯 파고드는 한기로 가슴까지 마구 떨린다.
“그 사람을 찾아야 해요. 그 사람만이 당신의 위기를 해결해 줄 거예요.”
나흘 전 수락산의 내 숙소를 찾아와 들려준 옥희(玉嬉)의 얘기였다. 파공음(破空音)을 내며 솔바람 소리가 날카롭게 귓전으로 파고든다. 계곡에 들어선 뒤부터 급격히 바람결이 드세어진 느낌이 든다. 이른바 ‘봉황곡(鳳凰谷)’이라 알려진 습도 높은 소백산 중턱의 계곡이다.
나는 상의의 안쪽 호주머니를 더듬어 약도를 펼쳐 든다. 아무래도 약도에서 명시한 지점에까지 온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그랬는데도 정작 구체적인 도착 예정지를 찾지 못해 당혹스럽다.
12월 하순인 나흘 전의 저녁 무렵이었다. 연사흘을 악몽에 시달리던 나였다. 눈만 감으면 입술에 피를 묻히고 거미줄에 매달린 현지(鉉芝)가 나타났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절통한 목소리로 하소연하곤 했다.
“연인이기만 하면 뭘 해요? 우리 손 한 번 잡은 적이 있나요? 그러고서도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열었다고 믿으세요? 제가 죽어서조차 거미줄을 뚫지 못하고 피를 흘려야만 하나요?”
가뜩이나 심약해진 심경으로 당시에 나는 폐가(廢家)의 방바닥에 앉아 있었다. 재개발이 예정되어 1년 넘게 방치된 허물어진 폐가였다. 세상과 결별하기에 앞서서 내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었다. 단전(斷電)과 단수(斷水)가 된 지역이라 보온 시설이 있을 리가 없었다. 쓰다 버릴 작정으로 누비이불 2채를 샀다. 누비이불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고 있을 때였다. 혼미한 상태의 머릿속으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혹시 거기에 계신 분이 현동수(玄東洙) 씨인가요?”
나는 들판에 섰다가 번개를 맞은 심정이었다. 마치 내가 탈옥수로서 검문당한 듯 가슴이 덜덜 떨렸다. 내 행적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화들짝 놀란 심정으로 고개를 드니 낯선 여인이 서 있었다. 20대 초반의 살결이 뽀얗고 미목이 수려한 여인이었다. 한 번의 눈빛만으로도 뭇 사내들의 가슴을 뒤흔들 정도의 미모였다. 여인이 화사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방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군요. 다른 곳보다는 거기가 말하기가 편할 것 같아서요.”
여인이 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였다. 돌가시나무의 꽃향기가 퍼져 흘렀다. 진하면서도 매콤한 향기였다. 현지가 쓰던 향수 냄새와 흡사했다. 후각에 약간만 스쳐도 강력한 성 충동을 유발하는 냄새였다.
여인이 방에 들어선 이후부터였다. 돌가시나무의 꽃향기는 문제가 아니었다. 은방울에서 터지는 음향처럼 너무나 감미로운 여인의 목소리였다. 여인이 입을 열 때마다 하도 목소리가 감미로워 흥분될 지경이었다.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드는 세계는 별천지 같다는 환상마저 일었다. 현지에 관한 말을 들려주는 여인의 목소리가 감미롭기 그지없었다.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들면서 나의 성감대가 죄다 흥분되었다.
“동수 씨, 혹시 제가 현지(鉉芝)로 보이세요? 만약 그렇다면 저를 발가벗겨도 좋아요. 저랑 미진과 현지는 서로 지기(知己)로 지냈어요. 현지가 제게 말했어요. 너무나 소중한 애인이라 손조차도 잡아 보지 못했다고. 혹여 손을 잡는 순간에 서로 멀어질지도 모르리라는 생각마저 들었대요. 그만큼 영적(靈的)으로 현지가 동수 씨를 사랑했다고 말하더군요.”
여인의 말을 듣는 순간이었다. 나는 낭패한 모습으로 자신도 모르게 여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을 내쏟았다.
“추한 모습을 드러내어 죄송해요. 정말 부끄럽습니다. 잠시 돌가시나무의 꽃향기에 이성을 잃었나 봐요. 참으로 죄송해요.”
여인이 마치 옥황상제이기라도 한 듯 관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게도 진솔한 댁의 모습이 좋아 보이군요. 저나 댁이나 한창 젊은 나이여서 충분히 이해가 돼요. 혹여 댁이 허상에 젖어 현지의 유언을 저버릴까 봐 두렵군요.”
여인 앞에 무릎을 꿇은 죄인의 상태에서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여인이 가만히 다가와 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감미롭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동수 씨, 그다지도 내 몸매에 현혹된다면 어렵지 않아요. 까짓 것 원하신다면 여기에서 열어드릴게요. 대신 제 말에 차분하게 귀를 기울여야만 해요. 아시겠어요?”
여인의 말을 듣는 순간이었다. 여인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듣노라니 성기가 발기하여 끄떡대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까지 삼키며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서 여인의 얘기에 정성스레 귀를 기울였다.
여인은 현지와 동갑이며 나보다는 두 살이 적은, 23살의 여인이었다. 유년시절부터 현지와 미진(美珍)과 가깝게 지낸 지기(知己)인 옥희(玉嬉)라고 했다. 현지와 옥희와 미진은 유년시절부터 우정을 나눈 지기들이라 했다. 그러기에 셋의 관계는 생명까지 서로 나눌 지경이라고 들려주었다. 옥희가 세상에서 숭상하는 것은 만물이 발산하는 향기(香氣)라고 했다. 그 어떤 사물이라도 고유한 향기를 발산한다고 했다. 그 향기가 마음을 매혹시키면 곧바로 마음을 주고 싶다고 했다.
옥희가 나를 만난 순간에 내게서도 향기가 느껴진다고 했다. 묘하게도 그 향기가 증폭되어 돌가시 향기를 이룬다고 들려주었다.
‘아니, 내 몸에서 무슨 향기가 배출돼? 날마다 수락산 계곡에서 목욕하느라고 풍기는 세수 비누 냄새 정도겠지?’
여인의 말에 불현듯 현지가 나를 떠났던 작년 1월이 떠올랐다. 서로 미래를 약속하며 연인으로서 다정하게 지내던 때였다. 느닷없이 현지가 내게 할 말이 있다면서 나를 불러내었다. 바닷바람이 차갑게 휘감기던 강릉 경포대에서였다. 누각 위로 흘러내리는 달빛을 바라보며 현지가 내게 말했다.
“나한테는 풀어야만 할 숙제가 있어. 내게 시간을 좀 줘. 딱 1년만. 숙제를 해결한 뒤에 반드시 돌아올게. 그러니 나를 믿고 1년만 기다려 줘. 내 말 알겠지?”
현지의 말을 듣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차갑게 느껴지던 바닷바람에도 일시에 무감각해져 버렸다. 1년간 어학 연수를 받으려고 캐나다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녀의 전공이 미술이지만 국제적으로 위상을 키우려면 영어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녀가 떠난다는 날이 하필이면 내가 대학원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그리하여 공항에 나가지도 못한 채 그녀를 떠나보냈다. 묘한 것은 연수 기간조차도 일체 연락하지 말라는 거였다.
현지를 믿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 사이에 나는 대학원을 다녀 과학자로서의 기반을 구축하기로 했다. 정신을 몰입하여 학문 연구에만 줄곧 매진하기로 했다. 때때로 현지가 많이 보고 싶더라도 참고 견뎠다.
세월은 거침없이 흘렀다. 현지와 작별한 지 1년도 훌쩍 지난 올해 4월 초순이었다. 수목의 물기가 겨우내 얼어붙었다가 녹는 시점이었다. 가는 곳마다 봄꽃들이 현란한 자태로 피어나 바람결에 간들거렸다.
어디를 둘러봐도 개나리, 목련, 진달래, 산수유의 군영이 구름송이처럼 흩날렸다. 형형색색의 꽃송이들이 바람결에 휘말려 떠올랐다가 가라앉곤 했다. 안면을 스치는 바람결은 먼 데 기억을 떠올리는 꿈결만 같았다.
목련꽃 나부끼는 창에 시선을 던져 피로를 풀 때였다. 대학원 연구실 302호. 출입문을 가볍게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건성으로 ‘네’하는 소리를 길게 뽑으며 출입문을 바라볼 때였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낯선 얼굴의 여인이 연구실 내부로 들어섰다. 순식간에 연구실이 환하게 비칠 정도의 미모의 여인이었다. 눈빛마저 매혹적인 여인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혹시 현동수 씨이세요?”
내가 그렇다는 대답을 하며 의자를 내밀어 여인에게 앉도록 권했다. 그러면서 냉장고를 열어 파인애플 음료수를 컵에 따라 여인에게로 건네었다. 여인이 음료수를 입에 갖다 대며 눈부신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여인의 시선이 닿자마자 가슴이 마구 설레었다. 한데 여인이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는 가로와 세로가 24.4cm와 33.4cm에 이르는 전형적인 서류 봉투였다. 봉투 내부에는 뭔가 가득 채워진 듯했다. 여인이 눈부신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현지의 친구인 미진(美珍)이에요. 현지의 부탁으로 찾아 왔으니 잠시만 제 얘기를 들어주실래요?”
미진이 내게 먼저 봉투를 열어 보라고 했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장례식장의 빈소 사진이었다. 빈소 중앙의 액자에 든 사진의 주인공이 현지였다. 사진에서 현지의 얼굴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일시에 의식이 허물어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슬러 미진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현지가 캐나다로 어학 연수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 현지는 국내 최고의 암 전문병원인 H병원에서 줄곧 치료를 받았다. 나와 작별할 때가 췌장암 말기 무렵이라고 했다. 암을 진단받았을 때엔 이미 종양이 전신에 퍼진 상태였다. 병원에서는 길어야 두어 달 정도 살 수 있으리라고 진단했다. 현지가 나와 사귄 지 겨우 1년 만이었다.
현지는 어느 때 지기(知己) 두 명이 있다고 나한테 들려주었다. 그녀의 생명을 내맡길 정도의 진정한 친구들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솔직히 부러웠다. 생명은 고사하고 신체의 장기조차 주고받을 친구가 없기 때문이었다.
처음 만나자마자 나는 미진이 현지의 지기들 중의 하나임을 알아차렸다. 서울 H병원을 드나들며 힘겨운 치료 일정이 잡힌 뒤였다. 의사는 현지를 불러 말했다. 회생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기에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심리적인 복합 감정에서였으리라. 무척 말하기가 힘든 듯 미진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다가 말을 이었다.
“그 때도 요즘처럼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이던 때였어요. 자고 일어나면 어느 곳에서든 수북이 쌓인 눈이 시선을 가로막았어요. 입원하기에 앞서서 현지가 내게 속내를 털어놓았어요. 진실로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고. 그래서 무척 마음이 무겁다고.”
나의 시선은 공허감에 휩싸여 미진을 비껴 허공을 더듬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청각만은 미진의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고 매달려 떨어댔다. 현지는 미진에게 번민의 속내를 죄다 털어놓았다. 자신이 병으로 죽는다는 사실을 내게 알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는 사랑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지니고 싶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가 환자라는 사실마저 감추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어학 연수였다. 어학 연수를 떠난다는 구실로 나와의 영원한 결별을 작정했다.
“현지가 세상을 떠난 지 오늘이 보름째 되는 날이에요. 현지의 유품을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태우면서 많이 생각했어요. 현지의 죽음으로 동수 씨와 소식이 단절될 경우를 헤아려 봤어요. 끝내 자세한 정황을 알지 못한다면 동수 씨가 불행하리라 여겨졌어요. 연인으로부터 일방적인 배신을 받았다고 심한 자괴감에 빠질지도 모른다고 여겼어요. 정말 제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일단 밝혀진 정황만으로도 내막이 파악된 터였다. 터지려는 울음을 입술로 깨물어 가까스로 추스르며 미진을 배웅해 주었다. 미진이 떠나면서 조만간 다시 방문하겠다고 얘기했다. 연구실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연구실 문을 잠그고는 의자에 몸을 던졌다. 순간적으로 세상이 단절된 느낌이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는 책상 위에 엎드려 하염없이 통곡했다.
충격적인 것은 그녀의 죽음 자체가 아니었다. 그녀에 대한 신뢰의 벽이 허물어졌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투병하면서 미진과 옥희한테는 알리면서도 나한테는 비밀로 붙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한테 심리적인 충격을 덜 주려고 했다는 자체가 이해하기 버거웠다.
현지를 만난 것이 나에겐 전설(傳說)을 만난 거였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미인(美人)’이라는 단어가 전설적인 단어로만 인식되었다.
내 유년기의 전 시간을 더듬어 봐도 주변에 미인은 없었다. 4학년 때의 나는 도 대회의 어린이 미술대전의 대상 수상자였다. 이런 나의 관점에서 시선을 끌 만한 얼굴이란 애초부터 없었다. 사춘기 시절을 끝내고 대학교 3학년 학생일 때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나는 통한의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죽을 때까지도 미인을 보지 못할지 모르리라는 예감마저 들었다. 이러한 생각이 들자 세상의 일들이 나의 관심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3학년생 친구들이 내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그 중의 하나가 내게 은밀히 말했다. 신림동 고시촌 입구의 카페 ‘카사블랑카’를 찾아가 보라고 권했다. 속는 셈 치고 몇 차례 거기를 드나들었다. 예상대로 실망감만 나날이 가슴으로 차올랐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한 번만 더 가 보자고 작정했다. 홍차를 시켜 마시며 세상의 이치를 한참 헤아려 본 뒤였다. 그러다가 카페를 빠져 나와 골목길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단발머리를 나부끼며 걸어가는 2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아가씨가 보였다. 나의 관점으로 나와 동갑이거나 비슷한 또래라 여겨졌다. 또한 직감으로 여대생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뒷모습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 들었기에 그녀를 가까이 보려고 내달렸다. 힘껏 달려 그녀의 가까이에까지 접근할 때였다. 여인이 내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여인과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우선적으로 내 눈으로 밀려든 건 여인의 얼굴 모습이었다. 창졸간에 실명되기라도 하듯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여태껏 세상을 살면서 봐 오던 얼굴이 아니었다. 정녕 현세에서는 보지 못할,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용모였다. 여태껏 봐 오던 여인들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라 보였다. 한 번 시선이 마주쳤을 따름인데도 자꾸만 시선이 빨려드는 느낌이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져 운치 있게 배열된 눈썹. 오뚝한 콧날에 복사 꽃잎처럼 매혹적인 입술. 뽀얀 피부에 갸름한 얼굴. 와 닿을 때마다 파문을 일으키는 듯한 서글서글한 눈빛. 흑백이 선명한 안구가 호수에 잠긴 별빛처럼 반짝였다. 한 번 시선이 닿은 것만으로 가슴에 전율이 실릴 지경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 얼마나 오늘을 기다렸던가? 이토록 오래 기다렸던 미인을 만났다니?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야. 운은 하늘에 맡기고 일단 말이나 걸어 봐야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나는 여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 잠시만요.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어요?”
여인이 발걸음을 멈추며 나를 잠자코 바라봤다. 재차 여인의 시선을 맞받았을 때였다. 글자 그대로 목숨을 버려도 좋을 지경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인이 나를 바라보며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여인을 향해 다가서며 말했다.
“딱 10분 정도만 시간을 내어 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여인이 의외로 흔쾌히 내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 날 이후로 현지와 내가 연인이 되었다.
현지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였다. 그렇게 꿈꾸던 학문의 세계마저도 한갓 망념(妄念)으로 간주될 지경이었다. 그래서 다니던 대학원에 휴학을 신청했다. 한 학기의 휴학을 신청하고는 서울의 수락산을 찾아들었다. 수락산 기슭에는 마침 철거 예정인 폐가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이미 수도나 전기 시설마저 끊긴 지 1년이 지난 폐가들이었다. 겨우 하늘에서 내리는 비나 피할 정도의 건축물이었다. 건물 곳곳마다 출입문이 떨어져 나가고 벽지와 장판마저도 제거된 상태였다. 어디를 둘러봐도 쥐들이 마구 내쏟은 배설물들로 엉망진창이었다.
처음 휴학할 당시에는 한 학기만 휴학할 작정이었다. 그랬는데 2학기에 접어들어서도 스스로를 정리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재차 휴학을 연장하여 어느새 겨울인 12월을 맞았다.
정말이지 암이 현지와 나를 갈라놓으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현지는 연인의 차원을 넘어서서 나한테는 삶의 의미였다. 이러한 현지를 잃었을 때의 슬픔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더 이상 나한테는 삶의 의미가 잡히지 않았다. 혼란한 머릿속으로 과거의 잔상들이 바스러져 내렸다. 그리하여 대학원에서 휴학을 하고는 곧바로 수락산 폐가로 찾아들었다. 생존을 위한 방책이라곤 누비이불 2채가 전부였다.
눈을 감았을 때나 눈을 떴을 때도 마음은 스산하기만 했다. 그렇게 세월과 더불어 나날이 죽음의 냄새를 맡아 갈 때였다. 홀연 현지의 친구라는 여인이 수락산의 폐가를 찾아 왔다. 초면의 여인을 대했을 때의 느낌은 묘하게도 너무나 친숙한 느낌이었다. 여인의 시선마저도 나를 너무나 잘 안다는 듯한 묘한 눈길이었다.
여인이 내게로 다가오더니 내게 종이쪽지를 건네었다. 펼쳐진 종이에는 현지의 친필 글씨가 적혀 있었다.
동수 씨!
이 글을 받아볼 때쯤이면 저는 이승을 떠난 상태이겠군요.
이전부터 말씀드렸던 대로, 제겐 2명의 지기(知己)가 있어요.
한 명은 미진이고 다른 애는 옥희예요.
그들은 나의 또 다른 분신이에요.
그들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내가 한 말로 받아들이세요.
모쪼록 제가 한 말을 잊지 말기를 바랄게요.
너무 실망하지 말고 새로운 인연을 찾아 꿈을 펴세요.
안녕!
내가 현지의 글을 다 읽고 난 뒤였다. 여인이 나를 향해 말했다. 자신의 이름이 옥희라고.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무용수라고 밝혔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옥희와 미진을 불러 말했다. 무척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안타까운 듯 지기들을 향해 말했다.
“세상에 단 한 번 태어나는데도 연인과 관계를 갖지 못했어. 상당히 모순스런 말 같지만 나는 그를 지극히 사랑했어. 정신적인 사랑만으로도 가슴이 벅찼기에 육체적 접촉은 나중으로 미뤄 두었어. 이제 세상을 떠나려니까 너무 허무해. 너희들이 지기라면 나를 대신하여 그와 육정(肉情)을 나눌 순 없겠니? 딱 한 번씩만 부탁해. 만약 너희들의 마음이 안 내킨다면 할 수 없고. 어쩌다가 이런 말까지 해야 하는지 삶이 너무나 허망해. 그리고 너희들한테 너무나 부끄럽고도 미안해.”
옥희는 자세한 정황을 설명했다. 현지를 화장하여 미진과 둘이서 유골 가루를 산기슭에 묻은 뒤였다. 그런 뒤에 옥희와 미진이 주점으로 가서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했다. 일단 현지의 애인인 나를 만나 보자고 결정했다. 만나는 순서에 있어서는 미진이 먼저 만나기로 했다. 간호사인 미진은 시간 내기가 어렵다면서도 그렇게 제안했다. 둘이 동시에 만나기는 쑥스러워 선후를 결정지었다. 옥희가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망자의 영혼에 대해서도 결혼식을 올려 주는 제도가 있긴 해요. 현지의 요청은 황당하다고 여겨지겠지만 충분히 헤아려 보길 바랍니다. 미진과 저 같은 경우에 동수 씨만 좋다면 수긍할 마음이에요. 저와 댁과의 관계가 아닌 현지와 동수 씨의 관계로 말이에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옥희가 나한테 한 말을 미진도 일주일 전에 나한테 들려주었다. 하지만 내 머리로는 도저히 현지의 생각이 용납되지 않았다.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좋을 얘기였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여인들은 현지의 유언을 소중히 지키려는 마음을 나에게 전했다.
폐가의 내 방에서 머물면서 한동안 나의 반응을 지켜본 뒤였다. 옥희가 감미롭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내게 조언했다. 내가 지닌 번민을 해소하려면 소백산의 극락암(極樂庵)을 찾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극락암 주변의 약도를 내게 건네주었다. 상대를 만나거든 그녀의 소개로 왔다고 말하면 된다고 했다.
옥희를 만난 순간부터 나는 옥희의 목소리에 허우적거렸다. 너무나 달콤하고 매혹적인 목소리여서 옥희한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길이 옥희한테 머물자 그녀의 미모도 현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묘하게도 옥희의 한없이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였다. 잠깐씩 옥희가 현지의 환영으로 비쳐 육정이 울컥울컥 치솟았다.
‘아, 내가 왜 이럴까? 언제부터 성욕에 휘둘리는 사내가 되었을까? 아직도 동정을 고스란히 지닌 처지이면서 말이야. 만날 때마다 미진의 매혹적인 눈빛에도 이성을 잃을 뻔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옥희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나를 주체하지 못해 쩔쩔 매다니?’
생각에 잠기다 말고 나의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현지의 아름다운 자태와 미진의 매혹적인 눈빛과 옥희의 감미로운 목소리. 아름다운 외모와 고운 눈빛과 감미로운 목소리가 제시하는 의미가 뭘까? 하나같이 인간에게 신묘한 흡인력을 갖는 요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 신묘한 흡인력은 하나의 근원에서 발원된 요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비어 허황된 욕망을 찾는 사람들을 마비시키는 요소라 여겨졌다.
나름대로 삶을 열심히 산다고 자부하는 나였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라 생각되었다. 불필요하게 주변을 경계하고 남들을 경쟁자로 여긴 소치라 여겨졌다. 아무래도 대자연이 내 마음을 정련(精鍊)시키려는 현상으로 비쳤다. 현지와 미진과 옥희가 다들 매혹적인 여인으로서 나를 유혹하지 않았던가? 빼어난 외모와 환상적인 눈빛과 황홀한 목소리. 이들의 실체가 어쩜 비슷한 시일에 일제히 의식을 뒤흔들어 놓았을까? 이것은 틀림없이 대자연이 나의 정신의 신실(信實)함을 측정하는 행위라 여겨졌다. 이런 생각이 든 순간부터였다.
나는 내 마음을 확실히 정했다. 미망(迷妄)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없으리라 여겨지면 삶을 끝낼 작정이었다. 그래서 미망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옥희가 알려준 상대한테서 타진하기로 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폭설에 뒤덮인 소백산 중턱의 봉황곡을 찾았다. 옥희가 수락산을 떠나며 약도를 건네주면서 들려준 말이 있었다. 옥희를 만났음에도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다면 약도의 상대를 찾아보라고. 상대를 만나려면 일주일 이내로 찾아가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만나기 힘들 것이리라 일러주었다.
약도를 근거로 소백산을 찾았을 때는 12월 하순이다. 옥희가 수락산을 다녀간 지 나흘 뒤다. 소백산에는 하늘을 뒤덮을 듯 폭설이 내리고 있다. 약도로 표시된 지형을 벌써 반시간이 넘게 탐색했다. 그랬는데도 암자는커녕 폐가조차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디선가 풍경소리가 들려온다. 순간적으로 암자가 가까이에 있다는 직감이 든다. 그래서 한결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자 눈에 뒤덮인 채 암벽에 둘러싸인 와당(瓦當)이 눈에 띈다. 하도 암벽 깊숙이 갇혀 있어서 눈에 띄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건물의 형상은 워낙 낡았어도 암자임에는 틀림없는 모양이다. 불상도 눈에 띄고 ‘극락암(極樂庵)’이란 편액도 걸려 있다. 편액의 칠이 대부분 벗겨졌고 그나마 중간쯤이 부러져 있다. 암자의 건물은 한 채뿐이다. 법당인 듯한데도 내부에는 침구류들이 눈에 띈다. 암자라기보다는 차라리 토굴에 가까울 지경이다. 법당 내부를 향해 막 발길을 옮길 찰나다. 어쩐지 섬뜩한 느낌이 전신으로 휘몰려든다. 나는 본능적인 느낌으로 두 손을 내밀고는 방어 자세를 취한다.
바로 이때 몸길이가 1.5m가량인 멧돼지가 암자 마당에 들어선다. 폭설로 먹이 구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나는 바싹 긴장하여 오줌을 지릴 정도다. 보도를 통하여 멧돼지의 공격적인 위용을 잘 알기 때문이다. 멧돼지와 내가 마침내 마당에서 서로 노려보기 시작한다. 이제는 단순히 내가 피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한 걸음이라도 동작을 취하기만 하면 공격당하기 십상이다. 마음속으로 법당까지의 거리를 재어 본다. 법당까지 움직이기도 전에 공격당할 위치다.
나는 멧돼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내가 멧돼지를 공격하지 않아도 멧돼지는 나를 공격하기 십상이다. 여기서 내가 고스란히 공격당하더라도 사람들은 나를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비록 사람이고 멧돼지가 짐승이라고 할지라도. 왜 위험한 장소에 갔느냐고 따지기부터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나는 비로소 두 팔에 힘을 넣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호흡을 가다듬고는 두 다리에 단단히 힘을 준다. 멧돼지가 돌진하기만 하면 머리로 갈비뼈를 들이받으리라 단단히 벼른다. 생후 처음으로 짐승과 겨루는 일전이 되리라 여겨진다. 운이 나쁘면 오늘 암자의 마당에서 생명을 잃으리라 여겨진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오한이 일듯 머릿속에서 광풍이 일기 시작한다.
‘아, 옥희가 보통 여자가 아니었구나. 어차피 죽기로 작정했으니까 갈등하지 말고 확실히 죽으라는 의도였구나. 정말 말이 씨가 된다더니 내가 죽을 곳이 여기란 말이지? 그렇지만 멧돼지한테 받혀서 죽을 수야 없지. 멧돼지한테 어금니가 무기이듯 나한테 최대의 무기는 머리통이다. 머리통으로 멧돼지 몸통 측면의 갈비뼈를 들이받아 죄다 부러뜨려 버리겠어.’
나는 목에 힘을 잔뜩 주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그러면서 냅다 달려가서 먼저 멧돼지의 갈비뼈를 받겠다고 작정한다. 마침내 멧돼지가 가쁜 숨결을 토하더니 나한테까지의 거리를 재기 시작한다. 나도 점차 자세를 낮추며 선제공격하기로 마음을 가다듬는다. 마침내 멧돼지가 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도 자세를 더 낮추면서 다가서는 멧돼지를 노려본다. 점차 멧돼지의 속도가 빨라지는 느낌이 왈칵 든다. 멧돼지한테 한 번만 받히면 끝장이다. 어금니에 들이받히기 직전에 내가 몸통을 날려 멧돼지를 받아야 한다.
창졸간에 뭔가 훅 다가드는 느낌에 떠밀려 몸을 날린다. 내가 몸을 날린 순간에 멧돼지는 과녁을 놓쳐 허청거린다. 바로 그때 내 왼쪽 머리가 멧돼지의 왼쪽 갈비뼈를 들이받는다. 들이받는 순간에 목뼈가 다 끊기는 느낌이 들며 땅바닥에 곤두박질친다. 그러면서도 멧돼지를 눈으로 살핀다. 충격이라곤 별로 받지 않은 듯하다. 그러면서 바닥에 나뒹군 나를 향해 다가들려고 한다. 이제는 조금이라도 양보할 때가 아니다. 나는 미친놈처럼 질풍 같은 속도로 받았던 부위를 재차 들이받는다.
이번에는 충격이 제법 실린 모양이다. ‘쾍쾍’ 소리를 내지르며 멧돼지가 고통스러워한다. 인간 멧돼지가 된 내가 세 번째로 멧돼지를 들이받았을 때다. 멧돼지가 비명을 내지르며 허겁지겁 도망가기 시작한다. 막상 멧돼지가 물러가자 갑작스럽게 목에 통증이 휘몰려들기 시작한다. 나는 신음을 내뱉으며 법당 바닥의 이부자리에 실신하여 쓰러진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작스레 전신에 차가움이 왈칵 밀려들며 멧돼지가 전신을 핥기 시작한다. 얼마나 핥는 힘이 세든지 스스로 몸을 주체하기 힘들 지경이다. 이러다간 멧돼지의 덩치에 깔려 질식사하리라 예견된다. 나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오면서 멧돼지를 끌어안는다. 이대로 얌전히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차오른다. 나도 맹렬히 멧돼지를 껴안고는 멧돼지의 몸뚱이를 핥으며 버둥대기 시작한다. 멧돼지와 껴안고 버둥거리는 사이에 이미 의식은 사라진 모양이다. 그렇다고 내가 저승을 헤매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지금 다급하게 생명줄을 걸고 핥는 행위는 또 무엇을 의미할까? 복잡한 생각의 실타래가 창졸간에 탁 끊기는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 내 머리가 터져 뇌수가 줄줄 흐르는 느낌이 든다. 흘러내리는 뇌수를 부드럽게 핥으며 멧돼지가 점차 사타구니에 힘을 가한다. 섬광처럼 일시에 전신으로 경련이 밀려든다. 거의 실신한 상태에서 나도 멧돼지의 전신을 할퀴면서 빨아댄다. 내 잇몸에 멧돼지의 선혈이 가득 묻어 흐르는 느낌이 든다. 맥을 못 쓰면서 의식을 잃기 직전이다. 느닷없이 음산한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든다.
“자세를 바로 하고 꼿꼿이 일어나 앉아서 나를 바라봐요. 내 눈을 들여다보라고요.”
느닷없이 뇌혈관이 툭 터지는 느낌에 휩싸인다. 얼핏 정신을 차리니 법당 내부에서 알몸의 여승(女僧)과 뒤엉켜 있다. 뒤엉킨 것이 아니라 늘씬한 자태의 묘령의 여인에게 깔린 상태다. 나의 성기마저 여인의 사타구니에 깔려 축 늘어진 상태다. 나는 놀라 고함을 지르려고 했지만 목소리조차 아예 나오지 않는다.
‘아, 내가 법당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직후에 여인한테 발가벗겼구나. 혹시 내가 아끼던 동정마저 빼앗긴 걸까? 정말 내 정신이 망가진 걸까? 이렇게까지 형편없이 망가진 걸까? 그렇다면 아까 마당에서 겨루었던 멧돼지는 여인과 어떤 관계일까? 그냥 지나가던 산짐승에 불과했을까? 내 목숨이 길기는 긴 모양이구나. 온갖 경험을 다 하다니?’
“동수 씨! 걱정 말아요. 아직 동수 씨와 성교하지는 않았어요. 제가 동수 씨를 책임지겠다면 나를 아내로 받아들이겠어요? 나랑 결혼하여 함께 음식점을 운영할 생각은 없어요? 내가 그대를 발가벗겼던 것은 그대를 자극하기 위해서예요. 지금부터는 그대한테 사태를 수습할 기회를 드리겠어요. 그대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발가벗겨서 죄송해요.”
완전한 알몸 상태로 나를 상대하는 여승은 옥희의 친구인 향련(香蓮)이다. 발가벗은 향련이 내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옥희와의 관계를 들려준다. 옥희와 동갑이며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라고 한다. 4살 때에 부모를 해난사고로 잃고는 고아 신세로 세상을 떠돌았다. 생활이 어려워서 화류계로 나가 몸을 팔기 시작했다.
화류계 생활도 오래 하다가 여승이 된 지는 3년째라고 한다. 화류계 생활을 하다가 폭력배들에게 엄청나게 시달렸다. 그러다가 여승이 되어 세속을 벗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향련의 몸은 선천적으로 뜨거운 편이다. 결코 구도자의 길을 밟을 인연이 아님을 깨닫는다. 언젠가 세상이 고요해지면 음식점을 차려 독립할 생각이라고 들려준다.
나는 멧돼지와의 대결 이후에 벌어진 정황을 곰곰이 분석한다. 향련이 잠시 외출했던 사이에 멧돼지가 사찰 마당으로 진입했다. 그러다가 나와 뒤엉켜 겨루었다. 멧돼지가 달아난 뒤에 기진한 몸으로 내가 법당에 들어섰다. 그러다가 금세 잠이 들었으리라 여겨진다. 내가 잠이 든 후에 향련이 법당으로 돌아왔다. 미리 옥희로부터 연락을 받았던 터라 의도적으로 나를 발가벗겼으리라 추정된다. 사건의 정황은 파악되었기에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내게 달려 있다.
비몽사몽간의 일이었지만 향련과의 육체적인 마찰은 새로운 세계의 진입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향련의 행동은 내재된 나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아무리 나를 자극하려 한다고 해도 나를 무시한 행위라 느껴진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여인을 일으켜 세운다. 그러고는 승복을 건네준다. 여인이 옷을 입는 사이에 나도 옷을 갖추어 입는다. 둘이 각자 옷매무새를 점검한 뒤다. 여인이 다탁에 향긋한 찻잔을 두 잔 올린다. 내가 그러한 여승을 향해 말한다.
“무단으로 나를 발가벗긴 데 대해 내가 응징하겠다면 어쩌시겠어요?”
여승이 망설임 없이 응답한다.
“어떤 응징이라도 달게 받을게요.”
여승의 응답을 듣자 내 가슴에는 슬픔이 끓어오른다. 현지의 사망을 확인하는 순간에 나는 실신할 지경이었다. 내 생애 최대의 배신행위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내가 현지를 사랑했다는 사실이 맞는지 내 영혼에게 묻는다. 내 몸을 벗어난 영혼이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네가 사랑한 것은 허상일 뿐이야. 너는 현지마저 인정하지 않은 ‘아름다움’이란 망념에 빠진 상태였어. 내가 보기엔 현지 역시 평범한 외모의 여자일 따름이었어. 그런데도 어느 날부터 너의 눈이 삐었던 모양이야.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자를 절세적인 미녀로 간주하며 허둥거렸잖아? 실제로는 그렇지 않는데도 괜히 너의 마음이 여자를 미인으로 만들었잖아? 내 말 틀렸어? 뭐야? 내 말이 완전한 억지 주장이라고? 그래, 네 말이 맞다고 치자. 미인이라면 왜 너한테 투병 사실을 숨겼겠어? 그건 스스로 미인이 아니었음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허공에서 나를 비웃는 내 영혼을 향해 고함을 지른다.
“너 좀 맞아 볼래? 가까이 이리 와!”
그랬더니 여승이 내게로 잠자코 걸어온다. 창졸간에 묘한 현상이 일어난다. 여승이 내 육신을 벗어난 영혼의 실체라 느껴진다. 나는 다가오는 여승을 바라보다가 급기야 치를 떨며 격분한다. 여승이 나의 다른 영혼의 실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나는 여승을 향해 달려가 여승의 뺨을 치려다 말고 멈칫한다. 여승은 어디까지나 여승이기 때문이다. 나는 울화가 치밀어 연속 두 차례로 나의 뺨을 친다. 나의 오른쪽 입술이 터져 핏물이 흘러내린다. 여승이 측은한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나는 여승을 향해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미안합니다. 지금 제 마음이 너무 아파 불안감을 조성하여 죄송합니다.”
여승이 다가와 나의 입술의 피를 닦으며 뺨을 어루더듬는다. 여승도 나랑 마찬가지로 현지의 지기는 아니다. 현지의 지기인 옥희나 미진도 행하지 않았던 일을 내게 했다. 알몸 상태의 육체적 마찰이었다.
내가 현지로부터 잃은 건 영혼의 신뢰다. 신뢰심을 놓친 상태라 현지한테는 무한한 허망감을 느낀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생각에 잠겨 내면으로 중얼댄다.
‘내가 현지를 사랑했다는 사실조차 어쩌면 허상일지도 몰라. 현지가 미인이었다는 생각마저도 내가 만들어 낸 망념일지도 모른다. 존재하지도 않은 허상을 억지로 가슴에 새기겠다고 집착하던 ......’
생각에 잠기다가 커다란 사실을 깨닫는다. 나 자신도 모르게 화들짝 놀란다.
‘아, 모든 게 내 탓이었구나. 평범한 여인을 미인으로 둔갑시킨 내 마음의 가식을 현지가 알아차렸으리라. 내 가슴속의 가식 덩어리를 발견한 그녀가 느꼈던 것은 절망이었으리라. 절망감 때문에 지기들한테는 마음을 열었는데도 내게는 열지 못했을 거야. 아, 내가 왜 그 사실을 몰랐지? 허구 덩어리로 뭉쳐 살면서도 현지를 사랑한다고 몽상에 잠겨 버둥거렸어. 어리석은 놈 같으니라구. 내가 왜 이 같은 허구에 빠졌을까? 나를 믿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현지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여승 앞에서야 나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차린 나다. 여승을 보기가 부끄러워진다. 내가 여승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여승에게 말한다.
“이제야 허상에 갇힌 제 실상을 보게 되었어요. 정말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인해 제 허상을 발견했기에 너무나 고마워요.”
여승이 내 손을 붙잡아 나를 방바닥에 앉힌다. 그러더니 새로 차를 끓여 와 내게로 내민다. 그러면서 나를 향해 말한다.
“나도 방금 깨달았어요. 진실로 수도도 못할 처지에 암자에 숨어 있지 말라는 경고였어요. 동수 씨가 스스로의 뺨을 친 걸 두고 하는 말이에요. 이런 경고가 그대와 나의 허상을 발견하게 만든 것 같아요. 나도 상세한 얘기를 미진과 옥희로부터 들었어요. 진실로 현지를 사랑한다면 미진과 옥희와 육정을 나누라고 전했다면서요? 나도 당시에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얘기로만 여겼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대를 회생시킬 마지막 강력한 주술(呪術)이었던 모양이에요.”
잠시 말을 하다가 말고 여승이 나의 눈을 들여다본다. 뭔가 내 마음의 진실을 읽으려는 눈치로 판단된다. 나도 경건한 눈빛으로 여승의 눈을 마주 응시한다. 뭔가 가슴으로 강한 깨달음이 밀려든 찰나다. 여승이 나를 향해 말한다.
“내가 그대한테 마지막 주술을 걸게요. 진실로 나를 갖고 싶지 않으세요?”
나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며 여승을 향해 무릎을 꿇는다. 그러면서 경건한 목소리로 여승에게 말한다.
“당신의 모든 것을 갖고 싶어요. 저랑 연인이 되기로 해요. 다만 제가 부탁하고픈 ......”
여승이 곧바로 응답한다.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다만 과거 화류계의 일들만 다 잊어 달라는 얘기죠? 전혀 어렵지 않아요.”
차를 쭉 들이켠 다음이다. 여승이 나를 향해 말한다.
“당신이 왜 ‘미인’이란 단어에 얽매였는지 느낌으로 전해져 와요. 당신 자신이 집단의 뛰어난 인재(人才)로 인정받으려는 욕망에 얽혔기 때문이에요. 집단에서의 인재란 두루 식견을 갖춰야 하리라는 강박감이 당신을 괴롭혔어요. 당신이 말하기도 전에 남들이 스스로 당신을 인정해 주기를 원했죠? 남들로부터 인정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허황된 생각임을 몰랐을 거예요. 떨쳐 버리세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버리세요. 버린다는 생각마저 버리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이다. 피를 토하고 싶을 정도의 강한 충격이 내 가슴으로 밀려든다. 나는 즉시 여승의 앞에서 부들부들 몸을 떤다. 발작할 정도로 큰 목소리로 냅다 고함을 내지르고 싶을 지경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여승을 향해 절규하며 몸을 떨어댄다.
‘건방지게 네가 뭘 안다고 떠들어? 네가 내 살아온 인생 여정을 알기나 해? 오늘의 내가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고 하는 소리야?’
여승이 연거푸 부들부들 떠는 나를 향해 다가서면서 팔을 벌린다. 여승의 눈을 들여다본 찰나다. 여승의 동공으로 자유롭게 나비가 되어 비상하는 내 모습이 보인다.
‘아, 이럴 수가? 내가 나비가 되다니? 내가 그렇게 꿈꾸던 나비가 되다니? 속박에 얽매이지 않고 비상하는 실체가 되다니?’
갑작스러운 나의 변신이 서글퍼 나도 모르게 콧잔등이 시큰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여승의 품으로 달려가 몸을 맡긴다. 여승이 가만히 나의 옷을 벗기기 시작한다. 나도 울먹이면서 여승의 옷을 마주 벗기기 시작한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향련과 나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여 꿇어앉은 자세로 서로를 바라본다. 나의 목소리가 물속에서부터 치솟듯 향련에게로 흘러간다.
“향련 씨, 우린 아마도 전생의 멋진 도반(道伴)이었던 것 같아요. 멧돼지에게 죽지 않고 그대를 만난 것 자체가 인연이라 생각됩니다. 예전에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았던 제 목숨은 사라진 상태예요. 현지가 외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면 그대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어요. 세상에 이런 인연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우리 진실로 연인이 되지 않을래요?”
향련이 한참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하다가 천천히 응답한다.
“몹쓸 기억도 억지로 지우려 하면 쉽게 지워지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오늘부터 노력할게요. 저도 당신과 연인이 되면 멋진 인생을 살게 되리라 믿어요. 저도 죽음에서 환생했다고 여기고 당신과 일생을 함께 살고 싶어요. 제게 먼저 마음을 열어 주셔서 고마워요.”
여승이 잠시 들뜬 숨결을 가다듬었다가 말을 잇는다.
“봉황곡에는 계절에 무관하게 안개가 많이 끼어요. 계곡의 수량이 워낙 풍부하기 때문이에요. 계곡에서 간단히 현지의 영혼을 달래 주지 않을래요? 우리가 연분을 맺는 관점이기에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고개를 끄떡이니 미리 준비한 제수를 내게 건네준다. 여승이 계곡을 향해 앞장선다. 이윽고 너럭바위가 깔린 곳에 제수를 펼친다. 향을 피우고 술잔에 술을 따른 뒤다. 나는 여승과 함께 제수가 깔린 너럭바위를 향해 경건하게 재배(再拜)한다. 참으로 삶이 허망하다고 느껴져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든다. 여승의 눈시울에서도 시린 눈물방울이 맺혀 대롱거린다.
제례 절차가 끝나 바위에 깔렸던 물품을 다 치운 뒤다. 둘은 잠시 말없이 발걸음을 옮겨 암자의 마당으로 향한다. 그러다가 암자의 마당에 들어섰을 때다. 발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향해 다가서며 다정하게 포옹한다. 고개를 들어 향련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놀랍게도 이번에도 향련의 눈동자에 나의 영혼이 나비가 되어 비상한다. 그토록 나를 구속하던 그림자 속의 내 영혼이 바스러져 흩날린다. 여태껏 무덤덤하게 스쳐가던 풍경소리가 청아한 선율로 불꽃처럼 울려 퍼진다. 향련과 내가 손을 맞잡고 아늑한 풍경소리에 취해 산악을 굽어본다.
<200자 원고지 100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