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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혈(風穴)

                                                                                          손 정 모

   어디에도 바람 한 점 나부끼지 않는다. 잔잔한 바다의 수면엔 짙은 해무(海霧)만 불길처럼 엉겨든다. 선착장을 떠난 유람선의 자취가 안개 속에 아스라이 묻힌다. 영수(榮洙)는 절벽 상하로 해초처럼 뒤엉킨 동백 숲의 장관을 살펴본다. 경사진 땅에 수중 산호처럼 밀생(密生)한 동백나무 숲이다.

   눈을 감은 채 새벽에 침대 머리를 더듬어서 받은 전화에서였다.

   “영수(榮洙) 씨, 소정(韶靜)이에요. '달리도'의 풍혈(風穴)에서 오후 3시에 만나기로 해요. 스승님의 유물과 관련된 일이에요.”

   이튿날이 토요일이라 실컷 피로를 풀리라 생각하여 초저녁부터 잠들었던 영수다. 전화의 여운을 음미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수마에 휩쓸려 들었다.

   땅속의 차가운 바람이 쏟아져 나온다는 바위 동굴이 풍혈(風穴)이다. 달리도 남서 해안에 문제의 풍혈이 있다고 여인이 들려주었다. 산짐승처럼 주기적으로 음습한 기운을 내뱉는 산악의 혈맥(血脈)이라고도 여겨진다. 풍혈의 바람만 씌면 음습한 기운에 휘말려 스러질 것만 같다. 왠지 영문도 모를 스산한 느낌이 자꾸만 영수의 가슴으로 밀려든다. 해무에 휩쓸리는 섬의 언덕으로 올라서면서부터 섬뜩한 냉기가 가슴을 찔러댄다.

   ‘답답하고도 섬뜩한 냉기의 정체가 뭘까? 풍혈에 스승님이 남긴 유물이 있다고? 나한테도 말하지 않은 걸 여인한테 스승님이 말했을까? 혹시 스승님은 여인을 수제자로 키운 걸까?’

   슬쩍 시계를 들여다본다. 약속 시간은 아직 십여 분이나 남은 시점이다. 자욱한 안개로 지형을 탐색하기가 좀체 쉽지 않다.

   스승의 유해를 대한 건 올해 2월 초순이었다. ‘세계 수묵화(水墨畵) 축전’이 개최된 중국 서안(西安)에서 귀국한 직후였다. 영수가 스승을 만나러 달리도 해안의 산막(山幕)을 찾았다. ‘달리도’는 목포의 달동에 위치한 섬이다. 목포항으로부터 서쪽으로 5km만큼 떨어져 있으며 화원반도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달리도 남서 해안의 산막을 찾았을 때였다. 스승은 소복 차림으로 벼랑 아래로 떨어져 숨져 있었다. 저녁 6시 무렵이라 어스름이 해변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검시를 한 의사는 사망 시점을 두어 시간 이전으로 추정했다. 병원의 영안실에 유해를 옮기고 나서야 영수의 설움이 끓어올랐다. 정신적인 지주(支柱)인 스승을 잃은 허망함에 실신할 지경이었다.

   영수는 여인이 말해 준 위치를 찾느라고 사방을 연신 둘러본다. 이윽고 동굴로 여겨지는 바위 골짜기가 눈에 띈다. 영수가 바위 골짜기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다. 등 뒤로부터 서늘한 바람이 왈칵 밀려든다. 영수가 고개를 돌려보니 묘령의 여인이 영수를 향해 말한다.

   “오랜만이네요, 영수 씨. 용케 잘 찾아 오셨군요. 동굴은 제가 안내할게요.”

   영수가 여인을 향해 다가가자 여인이 손을 내밀어 악수한다. 그러고는 앞장서서 여인이 발걸음을 옮긴다.

   그 날 스승의 유서는 벼랑 꼭대기에서 발견되었다. 연락받고 달려온 경찰들의 수색에 의해서였다. 유서는 커다란 돌조각에 짓눌려 있었다. 유서의 곁에는 스승이 신던 하얀 고무신이 함께 놓여 있었다.

   마침내 영수가 그린 그림에서 스승님의 얼굴을 만났다.

   스승님과 상봉하게 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이제라도 뜻을 이루었으니 스승님을 찾아 떠나겠다.

   스승님이 머무는 곳은 내 영혼이 알고 찾으리라 믿는다.

   기(氣)의 합류(合流)의 기법을 찾게 하러 영수와 소정을 대면시키지 않았다.

   내가 떠나면 그들은 수학(修學)한 동문 제자로서 만나게 되겠지.

   부디 그들이 수묵(水墨)의 최상의 경지(境地)인 합류도(合流道)를 터득해 주길 바란다.

                                        - 현청 -

   스승이 자신의 얼굴을 그려 달라고 한 기억이 영수에게 떠올랐다. 일정한 시차를 두고 세 번씩이나 그린 기억이 생생했다. 초상화 모델로 임할 때의 스승의 맵시는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풍란의 향기처럼 그윽한 자태로 작업이 종료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스승이 그처럼 기품이 서린 자태로 초상화에 임했던 의미를 몰랐다.

   그랬는데 일기장을 보고서야 그 내력을 알게 되었다. 사조(師祖)를 기억하는 스승의 눈빛에서 영수가 사조의 얼굴을 그려내기를 원했다. 이런 스승의 마음을 이제야 알게 된 영수였다. 아마 스승은 사조의 얼굴 사진 하나도 지니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랬기에 희박한 확률의 심인성(心因性) 회화 기법까지 동원한 모양이었다. 빼어난 경지에 달한 화가에 의해서만 재현된다는 심인성 회화 기법이다. 모델에 의해 일관성 있게 연상되는 대상을 그리는 방법을 말한다. 스승이 신화적인 방식까지 동원할 정도로 영수의 그림을 인정했다고 여겨진다.

   스승의 과도한 평가에 영수가 감격하여 눈시울이 파랗게 젖어들었다. 여태껏 스승이 제자를 덜 사랑하여 자살한 것으로도 비쳤다. 그랬는데도 자신의 재능을 놀랄 정도로 평가했다는 사실에 허청거릴 정도였다. 자신도 모르게 영수가 중얼대었다.

   ‘어쩜 스승님이 나를 그처럼 높게 평가했을까? 줄곧 시달려 왔던 자괴심(自愧心)마저도 허물어질 것 같군.’

   가슴에서 치솟던 떨림이 영수의 전신을 엄습하자 목이 메어 울먹였다. 스승이라는 소중한 보물을 잃은 허전함이 영수의 전신에 휘감겼다. 이제 어디서 스승의 그리운 평가를 받으랴? 자상하고 고운 눈빛의 스승이 마냥 그리워 영수의 콧등이 시큰거렸다.

   어구(漁具)를 내리다가 다리가 접질렸던 스승을 업고 산막을 향하던 날이었다. 영수의 두 뺨을 간질이며 스승이 말했다.

   “제자 등에 업히니까 편안해서 딱 좋네. 기왕 업은 김에 섬을 한 바퀴 돌면 안 될까?”

   그때 곧바로 영수가 응답했다.

   “섬의 둘레가 11km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저는 무조건 좋아요. 질투심이 많은 주민들이 저를 내버려 둘지 그게 문제예요.”

   스승과 제자가 함께 웃음을 깨무는 청아한 정경이 산골짜기에 물결쳤다. 기품이 그윽한 스승의 고운 얼굴이 영수의 가슴에 파동으로 밀려들었다.

   ‘단 한번만이라도 스승님을 다시 뵐 수만 있다면?’

   스승에 대한 그리운 마음에 콧등이 시큰거리며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다복솔이 짙게 우거진 바위 그늘 아래에서 동굴이 형체를 드러낸다. 무성한 다복솔의 나뭇가지를 옆으로 밀어 젖히니 동굴의 입구가 드러난다. 동굴의 재질은 석회암으로 보인다. 영수는 퇴적암층의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석동(石洞)임을 알아챈다.

   동굴 입구의 높이는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정도다. 그렇지만 내부로 들어갈수록 천정의 높이가 높아지다가 5m 높이까지 치솟는다. 동굴 내부까지의 길이는 십여m에 이른다. 동굴이 끝나는 지점은 수직으로 드리워진 암벽(岩壁)과 맞닿는다. 절벽으로 틘 동굴 종착지점에서다. 암벽 아래를 굽어보니 70여m 아래로 푸른 바다가 일렁인다. 동굴 종착점에서의 동굴 천정 높이는 3m 정도다. 내부의 넓이는 직경이 5미터에 이를 정도다.

   영수가 스승으로부터 지도받은 지는 5년째였다. 스승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알려진 수묵화의 달인이었다. 스승에게서 지도받은 지 2년 만에 미술대전에서 특선 작가가 되었다. 당시에 영수는 대학교 2학년생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임용고사를 거쳐서 중학교 미술교사로 교단에 섰다.

   “우와, 정말 절경이군요. 하루 종일 바라봐도 경탄할 만한 풍광이네요.”

   소정이 동굴 종착점에서 바다를 굽어보며 탄성을 터뜨린다. 영수와 마찬가지로 풍혈에는 처음 온 거라고 말한다. 이전에 스승으로부터 풍혈에 대한 얘기는 가끔 들었다고 들려준다. 미술 선생인 25살의 총각과 도예가인 23살의 처녀가 만난 자리다. 여인이 영수를 향해 입을 연다.

   “스승님의 연세가 57살이었죠? 그 연세에 사조(師祖)를 그리워하며 절벽을 날아 내렸다는 게 경이로워요. 잠시 쉬었다가 동굴 내부를 잘 찾아봐요, 우리.”

   바다로 뚫린 동굴의 구멍은 가로가 3m, 높이가 4m에 달한다. 종착점의 동굴 내부에는 종유석(鐘乳石)이 꽤 많이 달려 있다. 종유석 아래에는 1개의 석상(石床)과 3개의 석탑(石榻)이 보인다. 화강암 재질인 것으로 봐서 외부에서 옮겨 놓았다고 영수가 판단한다.

   평생 독신으로 목포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던 스승이었다. 스승은 낡은 동력선 한 척으로 고향인 목포에서 독신으로 지냈다. 평생 제자를 배출한 것도 단 두 명에 불과했다. 그 제자들이 영수와 소정이었다. 영수와 소정은 스승의 장례식 때에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스승을 화장하여 재를 바다에 뿌린 사람도 영수와 소정이었다.

   스승의 재를 여인과 둘이서 뿌리던 날도 바다에는 해무가 내뻗었다. 뼛가루를 바닷물에 흩뿌리는 내내 영수와 소정의 마음은 신산스러웠다. 존경하는 스승의 종말이 자살로 마무리되었다는 충격 때문이다. 원인을 떠나서 자살이란 세인들에게는 음험한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설혹 당사자가 꿈꾸는 세계로 몸을 날렸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장례식 날엔 영수와 소정은 거의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자살한 스승을 둔 그들의 사회적 평가는 조금도 대수롭지 않았다. 스승이 자살하도록 눈치를 못 챘던 자괴심으로 둘은 공황감에 빠졌다. 영수와 소정은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들을 이해한다고 했을지라도.

   종유석 아래의 공간을 둘이서 천천히 탐색하기 시작한다. 석상 아래를 둘이서 살펴보니 나무 상자가 눈에 띈다. 둘이서 나무 상자를 석상 위에 올려놓고는 쌓인 먼지를 턴다. 상자에 슬쩍 힘을 주니 쉽게 열린다. 상자에서는 그림 석 장과 공책 한 권이 발견된다. 그림 석 장을 펼치는 순간이다. 영수가 화들짝 놀라며 표정이 달라진다. 그가 세 차례에 걸쳐서 그린 스승의 초상화였다. 놀랍게도 스승이 자신의 그림을 상자에 보관해 두었다.

   종이 50장 뚜께의 공책을 펼치니 스승의 친필이 기록되어 있다. 삶의 큰 기록만을 대충대충 남긴 일기장이다. 고인(故人)의 예술사(藝術史)를 작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되리라 여겨진다.

   6월 하순경부터 8월 초순까지의 기간이었다. 영수는 전국적으로 비가 엄청나게 내렸다고 판단한다. 거의 하루 간격으로 비가 내렸다고 기억한다. 그러다 보니 전국적으로 산사태가 많이 일어났다. 가옥과 사람이 흙더미에 묻혀 많이도 사망했다.

   8월 중순 무렵이었다. 누군가 학교를 통하여 영수에게로 전화를 걸어와 만나자고 했다. 학교 앞 음식점에서 낯선 50대 중반의 사내와 영수가 만났다. 사내는 구례군 대전리에서 온 연주 현씨(延州玄氏)의 종손이라고 자신을 밝혔다.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의 지리산 기슭에는 현씨 일가들이 살았다고 들려주었다. 대전리와 온당리는 직선거리로 1.8km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영수는 사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온당리에 7월 중순에 대규모의 산사태가 발생했다. 그래서 34세대의 마을 주민들이 죄다 흙더미에 묻혀 숨졌다. 그 마을은 현씨 집성촌이어서 사망자의 대다수가 현씨 일가였다. 비보를 전해들은 대전리의 현씨 문중에서는 사흘간 회의를 열었다. 사망자들을 위해 대대적인 천도재(薦度齋)를 지내 주기로 했다. '재(齋)'란 사찰(寺刹)에서 치르는 제례 의식이라는 사실이 영수의 기억에 떠올랐다. 명찰(名刹)인 화엄사의 고승들을 온당리 현장으로 불러들여 행사를 치렀다.

   그 행사를 치른 뒤부터였다. 대전리의 50여 세대의 친족들이 밤마다 가위에 짓눌렸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문중 대표자들이 유명 무속인들을 통하여 원인을 캐냈다. 천도재를 지냈지만 죽은 영혼인 영가(靈駕)가 이승을 떠돌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승들의 법력(法力)으로서도 영가들을 제대로 달래지 못한 모양이었다. 영가를 저승으로 보내려면 영가를 그린 화가의 작품이 필요하다고 했다. 대형 그림을 태우면서 굿을 하여 영가를 달래면 된다고 들려주었다.

   현씨 문중의 대표적인 화가는 현청이었다. 그의 제자로 알려진 영수에게 처음으로 의견을 전하는 거라고 말했다. 사내의 간곡한 부탁은 대형 영가 그림을 그려 달라는 거였다. 그림 값은 충분히 치르리라고 들려주었다. 스승을 생각하여 무료로 영가 그림을 그려 주겠다고 영수가 밝혔다.

   소정이 스승을 만나 지도를 받은 지는 10년째였다고 영수에게 들려준다. 소정도 미술대전 특선 작가로서 등단 경력이 화려하다.

   그림을 확실하게 그려 주겠다고 약속하고서 사내를 돌려보낸 뒤였다. 영수가 소정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전했다. 소정이 쾌히 응낙했다. 망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일이기에 기꺼이 돕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언젠가 만나서 그림을 그릴 의견을 나누기로 했다.

   현씨 종친회의 사내로부터 연락을 받은 지 닷새 뒤였다. 이 날 새벽에 소정이 영수에게로 전화한 거였다. 달리도에서 만나자고.

   1시간가량을 탐색했지만 유품이라곤 그림과 공책밖엔 없다. 동굴 벽과 종유석 내부까지 샅샅이 뒤진 결과였다. 동굴 내부의 돌로 만들어진 의자인 석탑(石榻)의 배치 상태가 특이하다. 기분대로 아무렇게나 배열한 것 같지가 않다. 영수가 자세히 배치 상태를 분석해 본다. 아무래도 바람의 이동 통로를 고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절벽면과 인접한 곳에 석탑이 하나 깔려 있다. 거기에서 대략 3m의 거리에 두 번째 석탑이 깔려 있다.

   소정이 영수를 향해 새로운 의견을 들려준다.

   “스승님의 유서를 본 뒤부터 줄곧 생각해 봤어요. 여자가 지닌 음기(陰氣)와 남자가 지닌 양기(陽氣). 이 둘을 그림에서 잘 나타내도록 하는 방법을 생각해 봤어요.”

   연이어 체계적으로 소정이 영수에게 설명한다. 미리 준비한 듯 가방에서 소정이 찜질방 의복 2벌을 펼쳐든다. 한 벌을 영수에게로 내밀며 제안한다. 동굴 내부에서 각자 찜질방 의복으로 갈아입자고 말한다. 동굴 내부 공간에서 빛이 안 들어가는 곳은 어둡다. 거기에서 각자 옷을 갈아입자고 제안한다. 몸에는 단지 찜질방 의복만 착용해야 한다고 소정이 말한다.

   찜질방 의복으로 남녀가 옷을 갈아입은 뒤다. 둘은 반시간씩 석탑의 위치를 바꿔 가며 앉아 명상(冥想)하기로 한다. 휴대전화의 경보기를 통해 반시간씩 시간을 설정해 둔다. 찜질방 옷차림인 여인이 앉은 자리는 절벽 쪽 벽면이다. 영수가 앉은 자리는 계곡 쪽의 내부 공간이다. 눈 감은 여인과의 거리는 3m가량이다. 뚫린 벽면의 구멍으로부터 바닷바람이 서서히 강도가 높게 밀려든다. 여인을 거친 바람결이 영수의 전신을 간질이며 파고든다.

   날아드는 바람결에 몸을 맡기며 영수가 생각에 잠긴다.

   ‘이 여자의 과학적 식견은 정말 놀랍군. 해풍(海風)에서 갯내가 나는 원인은 증발된 소금기 때문임을 알고 있어. 공기 중에 이온(ion)들의 농도가 커지면 전기가 잘 통하기 마련이지. 기(氣)란 에너지도 전기 에너지와 유사한 속성을 지니고 있어. 체내의 기를 최대로 내보낼 방법은 피부를 최대한 노출시키는 거야. 동문이며 남녀 간이기에 찜질방 옷으로 도의(道義)를 지키려는 모양이야.’

   영수는 생각할수록 소정의 섬세한 배려가 고맙게 느껴진다. 여인은 여인대로 석탑에 올라앉아 상념의 물결에 휩쓸린다.

   ‘학교의 선생이라니까 최소한의 과학적 지식은 갖고 있겠지. 찜질방 옷의 두께라면 서로의 기(氣)가 잘 감지되겠지? 혹시 두꺼워 감지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속살이 내비치는 잠옷까지 동원하는 불상사는 없어야 되겠지?’

   둘은 서로를 믿고 평온한 마음으로 기를 발출(拔出)시키려 신경을 집중한다. 영수는 생명체들이 내뿜는 열기(熱氣)는 적외선 에너지로 발출된다는 것을 떠올린다. 인체에서 발출되는 기(氣)의 상당한 양이 적외선이라는 사실도 기억해 낸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경과할 무렵이다. 절벽으로 뚫린 동굴 노출구로부터 불어드는 바람결이 날카로워졌다. 바로 이 무렵부터다. 남녀는 정신이 개운해지며 몸에서 활력이 치솟는 느낌을 받기 시작한다. 사내는 서서히 여인으로부터 밀려드는 은밀한 기운을 알아차린다. 여인은 여인대로 사내로부터 휘몰려드는 기운을 느끼기 시작한다. 눈감은 채 사내가 여인의 넓적다리를 떠올리며 숨을 내쉰다. 눈감은 여인이 얼굴을 붉히더니 사내의 가슴을 떠올리며 숨을 들이쉰다. 곧바로 황홀한 표정을 짓는 사내의 뺨에 불길처럼 홍조(紅潮)가 번진다.

   거의 동시에 남녀가 눈을 떠서 상대를 바라본다. 둘 다 뺨에 은밀한 홍조가 드리워져 있다. 영수가 먼저 입을 연다.

   “혹시 제가 보낸 기류를 느끼셨어요?”

   여인도 대번에 눈빛을 쏟아내며 응답한다.

   “저만의 착각은 아니었군요. 제가 보낸 기류도 느끼셨어요?”

   영수가 미소를 깨물며 대답한다.

   “상반신에 두 번 …”

   여인이 얼굴을 붉히며 황급하게 말한다.

   “됐어요. 그만해요. 기의 합류는 이미 이루어진 것 같아요. 우린 너무 잘 통해서 불안할 지경이네요.”

   여인이 말을 마치자 남녀가 마주 보고는 허리를 꺾으며 깔깔거린다. 둘 다 옷을 갈아입은 뒤다. 영수는 소정과 함께 섬의 산자락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산골짜기를 벗어나기 직전에 작은 암자가 둘의 눈에 띈다. 암자를 막 지나치려고 할 때였다. 느닷없이 묘령의 비구니가 내닫더니 영수에게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한다. 영수가 사유를 묻지 않고 명함을 건넨다. 그러자마자 비구니가 홀연 시야에서 사라진다. 둘은 머리를 갸웃대다가 해변으로 내려가서 매운탕으로 저녁을 먹자고 약속한다.

   달리도에서 빠져 나와 목포에서 소정과 헤어진 지 일주일 뒤다. 영수와 소정은 강진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상태다. 강진에는 소정의 도예원(陶藝院)이 있다. 가마 주위엔 장작 무더기가 산처럼 쌓여 있다. 그녀의 자택 곁에 가마를 설치해 둔 거였다. 가마 곁 사무실로 세워진 건물에 '도예원'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도예원은 2층짜리 독립 건물이었고 영수에겐 여인의 독립 왕국으로 여겨진다. 2층의 응접실 원탁에서 영수와 소정이 마주 앉는다. 그림에서 기를 싣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보자고 소정이 제안한다. 영수가 소정에게 의견을 제안한다. 일단 한 사람은 물방울을, 나머지는 먹물을 뿌리자고 제안한다. 공중에서 물방울과 먹물이 뒤엉켜 그림에 떨어지도록 하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쉽지 않겠지만 꾸준히 호흡을 맞추어 연습해 보자고 제안한다.

   수묵화의 최상의 기교인 파묵(破墨)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방법이라고 영수가 설명한다. 물방울과 먹물이 공중에서 만날 때 탄력적으로 충돌하리라 예견한다. 두 액체가 부딪치는 순간에 기(氣)의 어우러짐의 효과도 극대화되리라고 들려준다. 여인도 충분한 타당성이 있다며 고개를 끄떡인다.

   그 날 이후로 둘은 장소를 바꿔 가며 연습해 보았다. 연습할 때마다 물방울과 먹물이 만나는 확률은 뒤죽박죽으로 변화가 심했다. 거기에 따라 그림에 실리는 기의 느낌도 엉망진창이었다. 그리하여 남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낙담하는 날도 점차 늘어났다. 방법을 변경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기를 합류시키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간주했다. 그랬기에 내재된 절망감을 안고서도 둘은 부단히 만나 수련했다. 그랬어도 성공하는 확률보다는 실패하는 확률이 월등히 많았다.

   꾸준히 합류의 기법을 수련해 나갈 때다. 9월 중순의 주말이다. 소정과 풍혈에서 만나서 내려오던 길에서 마주쳤던 비구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연운(蓮雲)이에요. 시간이 나는 대로 해청암(海靑庵)으로 들러 주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영수가 약속한 오전 11시에 경내에 들어설 때다. 기다렸다는 듯 연운이 법당에서 나오며 영수를 맞는다. 둘은 승방(僧房)의 다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 20대 중반의 고운 얼굴의 비구니가 금세 작설차를 끓인다. 차를 마시며 둘이 잠시 일상의 화제로 서로의 기분을 맞춘다. 그러다가 비구니가 옥패(玉佩)와 노란 보자기를 다탁 위에 올려놓는다. 동그란 옥패에는 봉황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드리워진다. 그러다가 연운이 영수에게 보자기를 풀어 보라고 말한다. 보자기에서는 낡은 공책 한 권이 모습을 드러낸다. 공책 속에는 가로가 15cm, 세로가 6.5cm인 사진들이 들어 있다. 사진은 모두 5장이었고 흑백으로 촬영된 것이다. 두 명의 비구승이 법당 앞에서 열반한 모습의 사진이다. 둘 다 가부좌를 튼 자세였으며 단정하기 이를 데 없다.

   영감(靈感)이 통한 듯 영수가 사진을 향해 절을 한다. 경건한 자세로 세 차례 절을 한 뒤다. 그러고는 사진을 향해 낭랑한 목소리로 말한다.

   “사조(師祖)님께 제자가 인사 올립니다. 스승님은 만나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으로나마 사조님의 얼굴을 대하게 되어 기쁩니다. 어쩌다가 좌선한 채로 입멸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영수가 고승들의 입멸 내력에 관해 연운에게 묻는다. 주지승으로부터 들었다며 연운이 입을 연다. 주지승은 중국의 명찰(名刹)을 순례하는 중이라고 들려준다.

   입적한 두 고승(高僧)은 원래 해남 대흥사의 승려였다. 주기적으로 달리도 해청암의 객사(客舍)에 머물면서 수행을 했다고 한다. 뚱뚱한 73세의 법진(法眞)은 대금(大?)의 명인이기도 했다. 후리후리한 75세의 빙탄(氷坦)은 수묵화의 전설적인 달인이었다. 두 승려는 예술적 취향이 서로 마음에 들어 지기(知己)로 지냈다. 둘은 때때로 육체에서 영혼을 이탈시킨다는 심령학(心靈學)의 영체이탈(靈體離脫)을 시도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쌀쌀한 가을날이었다. 해청암의 주지와 연운을 불러 둘이 영체이탈을 시도하겠다고 말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탓이었을까? 혹여 불상사가 생겨 둘의 영혼이 못 돌아올지도 모르리라고 했다. 그렇다더라도 사흘이 지날 때까지는 둘의 몸에 손대지 말라고 당부했다. 두 고승은 법당 앞에서 앉은 채로 입적해 버리고 말았다. 검시(檢屍)를 나온 의사들이 사인(死因)을 밝혔다. 조석의 급격한 기온 변화로 인한 저체온성(低體溫性) 심장마비라고 규명했다. 고승들이 좌선(坐禪)한 지 엿새 만에야 암자에서는 승려들의 다비식을 치렀다.

   좌선에 들어가기 전에 빙탄이 주지와 연운에게 말했다. 빙탄의 제자는 수묵화의 명인(名人)인 목포의 현청(玄淸)이라고 밝혔다. 사고가 생기면 전하라며 봉황이 새겨진 고운 옥패(玉佩)를 전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현청과는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급기야 주지는 휴대전화의 문자 메시지로 빙탄의 입멸을 현청에게 알렸다. 한참 지나서야 현청으로부터 고맙다는 응답 메시지를 받았다. 또한 현청이 달리도의 풍혈을 자주 드나든다고 주지에게 알려주었다. 주지승으로부터 풍혈에 대한 얘기를 들은 뒤였다. 같은 여인으로서의 애잔한 정감으로 인하여 수시로 연운이 풍혈을 찾았다. 그러다가 풍혈을 찾은 영수와 소정을 발견한 거였다.

   풍혈에서 내려오는 두 남녀를 대한 순간이었다. 연운은 남녀가 현청의 전인(傳人)임을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다짜고짜로 영수에게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말하고는 영수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영혼의 기류가 느껴졌음일까? 영수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명함을 연운에게 건네주었다.

   가을의 서늘한 공기가 도처에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10월 초순이다. 대전리의 현씨 종친회에서 영수에게로 연락을 취했다. 토요일 밤 7시에 구례군 광의군 온당리에서 위령제를 올린다고 들려준다. 그래서 영수와 소정이 반드시 참여해 주기를 바란다는 통지였다. 영수는 응낙의 뜻을 전하고는 소정과도 행사장에 함께 참여하기로 약속했다.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 어느새 약정한 토요일이 되었다. 밤 7시가 되었을 때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세 명의 무당이 요령을 흔들어댄다. 허공을 떠돌던 영가(靈歌)들을 불러들이려는 몸짓으로 보인다. 중앙에는 40대 후반의 무녀가 징을 들고 있다. 요령을 제단에 올려놓은 뒤다. 세 무녀들이 동⋅서⋅남 세 방향으로 벌려 선다.

   징을 든 중앙의 무녀가 주술을 읊기 시작한다. 나지막한 소리로부터 점차 장내를 압도할 만한 목소리로 증폭된다.

   천지만물 우주 중에 으뜸이신 천궁신장(天宮神將)님!

   지하세계 공간 중에 최고이신 지하신장(地下神將)님!

   2011년 7월 16일 새벽 산사태로 세상 떠난

   대한민국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 34세대

   귀하고 소중한 영가들을 굽어 살펴 주소서.

   제상(祭床)에 피운 향 연기가 땅바닥으로 내려깔리기 시작한다. 무녀들을 지켜보는 종친들의 가슴에도 서서히 애잔한 물결이 일기 시작한다. 징이 간헐적으로 울린 뒤에는 꽹과리 소리가 뒤쫓는다. 무녀들이 살풀이춤을 반시간가량 춘 뒤다.

   제상 앞으로 화선지에 그려진 수묵화가 드리워진다. 산사태로 뒤덮인 온당리 산기슭의 거대한 모습이 화선지에 담겨 있다. 가로가 7m, 세로가 4m에 이르는 대형 그림이다. 무너진 산악의 형상이 너무나 실제 모습과 닮았다. 그림이 드리워지자마자 사방에서 경탄하는 목소리가 들끓는다.

   그림을 향해서 무녀들이 주술을 읊은 뒤다. 종친회의 50대 중반의 회장이 제상 앞으로 걸어 나온다. 그러면서 종친들에게 영수와 소정을 소개한다. 그러더니 메가폰으로 종친들을 향해 말한다.

   “현자(玄字) 청자(淸字) 화백 어른의 제자분들로부터 그림 시연(試演)이 곧 있겠습니다. 조상님들의 혼백을 현장에서 그림에 실어 올리는 작업입니다. 전설로 전해지던 작업이 진행될 예정이니 엄숙히 지켜봐 주기 바랍니다. 작업이 끝나면 그림 속의 조상님들께 3번씩 절하세요.”

   영수와 소정이 검정색 한복 차림으로 그림 앞에 선다. 둘은 스승인 현청의 위령제도 겸한다는 뜻으로 검정색 상복(喪服)을 입었다. 잠시 서로를 바라본 뒤다. 준비해 둔 세숫대야에 물이 가득 담겨 있다. 둘은 각자 그림으로부터 다섯 걸음씩 뒤로 물러선다. 소정은 물이 담긴 세숫대야를 그녀의 앞에 놓는다. 영수는 털 길이만 30cm에 달하는 2자루의 붓에 먹물을 찍는다.

   영수에게 잠시 과거의 잔상이 밀려든다. 둘은 물과 먹물을 흩뿌려 기를 싣는 연습을 숱하게 반복했다. 하지만, 너무나 편차가 심했다. 만족할 때도 있었지만 처참할 정도로 실망할 때가 더 많았다.

   둘의 가슴으로 참담한 번민이 끓어오른다. 실패한다면? 둘로 인하여 행사 자체가 실패로 끝난다면? 영수와 소정의 가슴은 남극의 얼음조각처럼 얼어붙어 참담할 지경이다. 생각할수록 둘에게는 긴장도가 급격히 커진다. 물이 담긴 세숫대야를 든 소정의 팔이 긴장으로 떨리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소정이 급기야 두어 줄기의 오줌을 지린다. 소정의 긴장으로 인한 동요 상태까지 영수가 전신으로 느낀 찰나다. 영수의 표정이 일시에 창백하게 일그러지면서 속옷에 주르륵 사정(射精)해 버린다.

   현씨 종친들과 무녀들이 숨을 죽이며 영수와 소정을 지켜본다. 영수와 소정은 참담한 심정을 억지로 추스르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영수와 소정이 서로 눈빛을 나누는 찰나다. 소정이 세숫대야의 물을 그림을 향해 뿌린다. 그림의 좌측 상단에서 우측 상단을 향해 세숫대야의 물을 뿌린다. 세숫대야의 물이 가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그림을 향해 날아간다. 소정이 물을 뿌릴 때다. 영수도 그림의 좌측 상단에서 우측 상단으로 먹물을 뿌린다. 두 자루의 붓에서 분출되는 먹물이 물방울을 맞아 파편처럼 튄다. 그러면서 물방울과 먹물이 허공에서 빛살처럼 튀면서 그림으로 날아간다.

   그림에는 숱한 싸락눈송이들이 날아가 박히듯 먹물들이 찍혀 별처럼 깔린다. 찰나의 시간에 그림 전체에 묘한 무늬가 박힌다. 그림에서는 뭔가 생동적인 장면이 표출되기 시작한다. 숱한 영혼이 통곡하여 떼를 지어 이동하는 것으로도 비친다. 그림 속에서 혼백들이 뒤엉켜 만세를 부르는 듯한 정경마저 느껴진다. 둘러서서 그림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경탄하여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댄다. 영수와 소정에게도 성공했다는 느낌이 쩌릿하게 와 닿는다. 그러자 둘은 너무 감격하여 울먹이며 몸을 떤다.

   이때에 나이 든 무녀가 징을 두 번 울린다. 그러자 젊은 두 무녀들이 꽹과리를 치며 주술을 읊는다. 둘러섰던 현씨 종친들이 그림을 향해 일제히 절한다. 영수와 소정도 종친들과 나란히 서서 세 차례 절을 한다. 배례를 마쳤을 때다. 기다리고 있던 젊은 무녀가 그림에 불을 붙인다. 물방울에 젖었지만 넓게 펼쳐진 그림은 금세 불길에 휩싸인다. 그러더니 금세 붉은 불똥이 되어 허공으로 치솟아 올라간다.

   붉은 불똥을 튀기며 허공에서 하늘거리다가 흩어지는 재를 사람들이 바라본다. 물에 젖은 화선지가 타느라고 소지(燒紙)처럼 하염없이 허공으로 치솟은 모양이다. 이럴 때에 무녀들이 읊는 회심곡이 산야의 허공에 울려 퍼진다.

   인생 한 번 돌아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이 세상을 하직하고 북망산에 가리로다.

   어찌 갈고 심산험로 정수 없는 길이로다.

   불쌍하고 가련하다 언제 다시 돌아오리.

   현씨 종친들을 비롯한 동네 구경꾼들의 눈시울 가득 눈물이 맺힌다. 그러다가 현씨 종친들이 급기야 여기저기서 흐느끼며 울음을 터뜨린다.

   중국 서안(西安)에서 산출되는 청자옥(靑紫玉)을 갖고 싶다던 스승이었다. 염습한 상태의 눈감은 얼굴에도 단아한 기품이 서려 있었다. 다시는 얼굴조차 바라볼 수 없는 스승이었다. 피안의 세계로 저녁안개처럼 소리 없이 떠난 스승이었다. 스승에게 청자옥 목걸이를 걸어 주다가 목을 끌어안고 통곡한 영수였다.

   회심곡에 휩쓸려 허공을 배회하는 스승의 눈에도 눈물이 실리는 듯하다. 어느새 영수의 눈자위에 물기가 실려 발그스레하다. 소정의 눈가에도 그렁그렁 눈물이 출렁인다. 이제 둘은 가슴 가득 끓어오르는 눈물을 추스를 길이 없다. 어느 순간 영수와 소정이 서로의 눈을 들여다본다. 서슬 퍼런 슬픔의 격랑이 서로의 가슴으로 광풍처럼 밀려든다. 급기야 영수와 소정도 눈물을 글썽이다가 서로 손을 맞잡고 흐느낀다. 함께 시달렸던 자괴심(自愧心)이 둘의 손을 맞잡게 했다. 둘은 어디를 가나 자살자의 제자란 자괴심으로 시달렸다. 처절하게 쓰라렸던 내면의 번민을 겪은 뒤였다.

   줄곧 시달려 왔던 자괴심으로부터도 그들 자신을 해방시키기로 마음먹는다. 죄 없이 줄곧 시달려 왔던 아픈 마음을 진정으로 털어낼 작정이다. 눈만 뜨면 스승의 자살조차 예견하지 못했던 제자들이란 자책감에 시달렸다. 이제는 억압된 자신의 내면을 복원시키리라 작정한다. 그리하여 눈물을 머금으며 우주와 세상을 용서하기로 한다. 원시림을 파고드는 햇살처럼 그들은 진정한 존경과 사랑을 스승에게 바친다. 서로 잡았던 손을 풀면서 둘은 급기야 통곡하기 시작한다.

   “으흐흑! 스승님!”

   “스승니임! 흐윽! 흐으윽!”

   한동안 울부짖다가 울음을 추스른 뒤다. 둘은 여전히 허공에서 나부대는 불똥들을 우러러보며 염원을 한다.

   “스승님, 부디 좋은 세계로 환생하시기를 빕니다.”

   “고통과 절망이라곤 없는 평온한 세계에서 영생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림이 탄 불똥들이 하늘 높이 치솟아서 한동안 허공을 유영한다. 좀처럼 없던 현상이라며 무녀들이 죄다 하늘을 향해 합장하여 배례한다. 그러자 무녀들 주변의 사람들도 영가들을 위해 고개를 숙여 합장한다.

   영수가 가만히 하늘을 우러르며 스승을 떠올릴 때다. 느닷없이 환하게 웃으며 하늘로 치솟는 스승의 얼굴이 환상으로 밀려든다. 자신도 모르게 환희에 들떠 영수가 몸을 떨 때다. 마침내 영가들이 하늘로 줄줄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며 무녀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댄다. 영수의 시선이 소정에게 닿았을 때다. 하늘로 치솟은 스승의 얼굴을 방금 보았다며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느새 영수도 몽환에 취해 소정과 함께 깡충거리면서 눈물을 쏟는다. 몽환에 취해 깡충거리는 사람들의 군무(群舞)가 거대한 기류로 굽이친다.

<200자 원고지 8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