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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양의 상승 기류

                                                                                          손 정 모

   빗줄기가 쏟아지는 수면마다 냉기(冷氣)가 파편처럼 흩날린다. 실지렁이처럼 꿈틀대는 빗줄기는 반시간가량 쏟아지리라 예측된다. 바다의 전설인양 며칠간 줄곧 그래 왔기 때문이다. 해상에는 방향마저 분간 못할 정도로 안개가 무리지어 춤춘다. 양망기(揚網機, winch)가 내뿜는 소리가 갑판에 먹먹하게 감겨든다. 갑판에는 열두 명의 선원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초병(哨兵)처럼 지키고 있다. 성호(星湖)도 선원들의 위치에 서서 바다를 예리한 눈빛으로 쏘아본다.

   동경 179도, 남위 57.5도 언저리에서 선박들이 물결처럼 흔들린다. 한국 'Y상선'의 500톤짜리 메로 잡이 선박 네 척이다. 세 척은 연승선(延繩船)이고 한 척은 가공선(加工船)이다. 파란 속살을 미풍에 드러내며 물결이 연신 치솟는다. 비가 그치면 안개도 바람처럼 사라질 분위기다. 서서히 갯냄새를 내뿜으며 메로(Patagonian toothfish)들이 수면에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메로의 크기는 평균 2m 길이에 이른다. 메로들이 갑판에 올라올 때마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섬광처럼 터진다. 갑판에서 배를 뒤채며 파드득거릴 때마다 물방울을 빛살처럼 튀긴다.

   90cm 간격마다 낚시를 매단, 800m 길이의 주낙들이 감겨 올라온다. 물고기가 갑판에 올라오자마자 한데 뒤엉켜 수북이 쌓인다. 메로들이 파드득거리며 몸을 뒤채는 통에 물방울이 사방으로 불꽃처럼 튄다. 조타실에서 항해사인 용준(勇俊)이 성호에게로 걸어오면서 말한다.

   “어때? 현장 체험은 할 만해?”

   용준과 성호는 동갑인 서른한 살의 미혼 청년들이다. 성호가 허리를 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떡인다. 그러면서 연신 물고기를 주낙에서 떼어 갑판 위로 던진다. 용준도 미소를 허공으로 날리며 주낙에서 물고기를 떼어 낸다. 드러누워 허우적대는 메로들로 순식간에 갑판이 그들먹해진다. 가공선의 그물로 옮기려고 선원들이 메로를 향해 밀물처럼 달려든다.

   두 시간에 걸친 어로(漁撈) 작업이 끝났을 때다. 수평선을 바라보는 성호의 가슴이 시린 달빛처럼 착잡하게 젖어든다. 유년시절부터 비롯된 막막한 공허감이 성호의 가슴속을 수시로 빗질한다. 고향인 속초에는 예순 살의 부모가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어선도 지니고 있어서 생계가 어렵지 않은 처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호에게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고독감이 물결친다. 아무래도 근원조차 알 수 없는 공허감에 성호가 수시로 허청거린다.

   성호의 시선이 수평선 자락을 더듬고 있을 때다. 용준이 항해사실로 성호를 불러들인다. 원탁의 찻잔에서 치솟은 김이 둘의 얼굴에 감미롭게 휘감긴다. 용준이 입을 연다.

   “나를 따라 남빙양(南氷洋)에서 머문 지가 벌써 한 달째지? 네가 그토록 원하던 현장 경험은 쌓였는지 궁금해. 너의 견해를 듣고 싶어.”

   성호가 곧바로 응답한다.

   “고마워. 나를 이렇게 현장까지 불러주어서. 덕분에 수심(水深)에 따른 미끼를 살포하는 실험에서도 성공했어. 귀국하는 대로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어로 현장에 도움을 주도록 하겠어.”

   용준과 성호는 속초가 고향인 친구들이다. 둘은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다. 성호는 관악 캠퍼스를 거쳐 미국 스탠포드대학교에서 해양학의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용준은 부경대학교를 거쳐 해양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항해사다. 수심에 맞춰 미끼를 살포하는 현장 실험이 필요한 성호였다. 성호의 처지를 알아차리자 곧바로 성호를 불러들인 용준이었다. 둘은 따스한 미소를 나누며 대화를 나눈다.

   성호는 조타실의 후지모리 선장(船長)을 잠시 떠올려본다. Y상선에서 고용한 일본인(日本人) 선장이다. 처음부터 우호적으로 대하던 50대 중반의 사내다. 틈틈이 그가 말하곤 했다.

   “조카인 와타나베와 엄청나게 닮았어. 혹시 둘이 만난 적은 없는지 궁금해.”

   며칠 전에는 선장과 성호가 둘이 만나서 술잔을 기울였다. 술잔에 새벽의 별빛이 녹아들어 파르스름하게 일렁일 때였다. 선장이 성호를 바라보며 알지 못할 말을 늘어놓았다.

   “29년 전의 얘기야. 형님 가족이 어느 날 어린애 하나를 데려와서 자식이라고 우겼어. 무슨 사정으로 먼 데 맡겨 놓았다가 찾아 왔다는 거야. 나로선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믿어 주는 척했네. 형님이 불임 체질이라는 얘기를 언뜻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지. 내가 조카를 처음 봤을 때였어. 서너 살 된 소년은 말이라곤 거의 하지 않았어. 조카와 자네가 너무나 닮았기에 참 묘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선장의 조카가 공부하러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말을 나중에서야 들었다고 한다. 선장 형 가족과 선장의 가족은 멀리 떨어져 산다고 했다. 그랬기에 조카가 미국의 무슨 대학교에서 공부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와타나베라는 이름에 맞물려 성호에게 과거의 추억이 밀려든다. 2년 전 무더운 여름철이었다. 셋 모두 박사 후 연수과정까지도 마친 시점이었다. 각자 귀국하기 전의 마지막 여행길에서였다. 성호와 와타나베와 중국 여인인 친샤오밍(Chinshaoming)은 산타 모니카(Santa Monica)를 찾았다. 산타 모니카는 로스앤젤레스 서쪽의 유명한 해양 도시다. 폭이 300m이며 길이가 십여km까지 내뻗은 백사장이 유명하다. 태평양의 새파란 물결에 드러누운 백사장은 세계인들을 유혹하는 휴식의 보금자리다. 전공 학과가 같다는 이유로 셋은 곧잘 어울려 지냈다.

   당시에 성호가 28살이었고, 일본인 사내인 와타나베는 30살이었다. 친샤오밍은 25살이었다. 국적을 초월하여 셋은 마음이 잘 통하는 처지였다. 셋은 해변에서 텐트를 치고는 생선회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술에 약한 와타나베가 먼저 텐트에서 낮잠이 들었다. 친샤오밍과 성호가 나란히 해변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친샤오밍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대답해 줘요. 제가 연인으로는 어떻다고 생각하세요?”

   성호도 망설임 없이 응답했다.

   “최상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한테는 연인을 사귀지 못할 사연이 있어요.”

   모래톱에 나란히 앉아 친샤오밍이 사연을 말해 달라고 보챘다.

   성호가 대학 3학년에 다닐 때였다. 대학에 갓 입학한 여학생과 사귀게 되었다. 이름이 소희(素熙)인 여학생은 전남 곡성이 고향이었다. 그녀의 전공 학과는 국악이었다. 여름철을 맞이하여 득음(得音)을 하겠다며 전남 보길도로 떠났다. 거기에는 무형 문화제라 불리는 여성 국악인(國樂人)인 소리꾼이 있었다. 방학을 이용하여 두 달가량을 국악인의 집을 드나들며 지도를 받았다. 하지만 득음은 사막에서 얼음을 캐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평생 노력해도 어려우리라는 절망감마저 느꼈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며칠간 꿈자리가 무척 사나웠기에 성호가 보길도로 찾아 나섰다. 해 저물 무렵에 섬에 닿아 초로의 국악인을 만났다. 국악인 여인과 함께 동백이 무성한 벼랑길일대를 탐색했다. 바다로 열린 벼랑길은 소리꾼들이 목청을 틔우는 곳이라고 했다.

   그 날 벼랑 아래의 동백 숲에는 소희가 숨져 있었다. 떨어져 내린 충격으로 전신에 피멍이 들어 상처가 극심했다. 체온은 미지근했지만 코에 손을 갖다 대니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 소복 차림의 그녀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유서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성호마저 실신할 지경이었다. 거기에는 단지 석 줄의 글이 적혔을 따름이었다.

   평생 소망했던 길인데도 가능성마저 보이지 않다니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쓰라린 한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살려니 세상이 너무나 끔찍스럽다.

   깨달았으면 이제라도 나를 대자연으로 환원시켜 평생의 번민에서 헤어나고 싶다.

   국악인과 함께 성호가 유서를 펼쳐 읽었다. 성호는 가슴속으로 중얼대었다.

   ‘어쩌면 이럴 수가? 연인인 나한테 남기는 말 한 마디조차 없었을까? 그녀에 대한 나의 연정은 일고의 가치조차 없었을까? 어쩌면 이럴 수가?’

   중풍 환자가 몸을 떨듯 성호마저 몸을 떨더니 실신해 버렸다. 죄 없는 국악인만이 두 청춘남녀를 내려다보며 마구 허둥거렸다.

   성호가 친샤오밍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날 이후로 제 가슴속에서 연정(戀情)이란 단어는 사라지고 말았어요. 이제 내가 여인을 사랑하기란 어려우리라 생각됩니다. 당신이 아닌 그 누구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말을 마치는 성호의 눈시울에 눈물이 맺혀 그렁거렸다. 친샤오밍의 눈시울마저 빨갛게 젖어 반짝거렸다. 그러다가 도전하듯 여인이 발딱 고개를 젖혀 성호를 향해 말했다.

   “소희 씨한테 득음이 최상의 관념이듯 내게는 당신이 최상의 이상향이에요. 그래도 내 사랑을 모른 척할 건가요? 내가 이 해변에서 소희 씨처럼 스러지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여인이 쏟아내는 말을 들은 직후였다. 성호의 표정이 느닷없이 급격한 속도로 침통하게 변했다. 그러더니 성호가 백사장에서 무릎을 꿇으며 여인에게 말했다.

   “제발 저를 좀 이해해 주세요. 세상 일이 억지를 쓴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여인이 자신의 분을 못 견뎌하며 시큰대더니 이윽고 선언하듯 말했다.

   “세상에서 남자는 정말 무섭군요. 여자가 죽음을 언급하는데도 어쩜 이럴 수가 있어요? 이제 다시는 나를 아는 척하지 마세요. 오늘 내 평생의 자존심이 다 무너져 버렸어요. 더 이상 여기에 머물고 싶지 않아요. 떠날게요. 시야에서 사라져 줄게요.”

   말을 마치자마자 울먹이면서도 단호한 자세로 친샤오밍이 총총히 발길을 돌렸다. 말린다고 하여 마음을 돌리기는 어려우리라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성호는 하염없이 태평양의 파도를 굽어볼 따름이었다.

   용준이 성호를 바라보며 말한다.

   “나로도의 종수 있잖아? 우리와 동갑내기이고 출신 초등학교만 다르잖아? 그 친구가 우주센터에서 무슨 일을 맡고 있지?”

   성호가 곧바로 설명해 준다. 우주선 발사의 실무 책임을 진, 선임 연구원이라 들려준다. 러시아의 리빈스크(Rybinsk) 발사장에서 우주선 발사 실험을 해 왔다고 일러준다. 나로호의 발사가 실패로 끝나더라도 자력 발사의 기초가 되리라 설명한다. 성호의 대답을 듣자 용준이 자신의 견해를 말한다.

   “중국이 근래에 부쩍 해운산업에 뛰어들어 날뛰고 있어. 한국을 추월할 조짐마저 보이고 있어. 그래서 얘긴데 말이야 잘 들어 봐.”

   나로도의 우주산업과 여수의 조선공업이 보조를 맞춰야 하리라는 얘기다. 나로도에서 우주선 발사에 성공하기만 하면 한국의 전망이 달라지리라고 말한다. 타국의 위성을 개발하고 우주선까지 발사해 줄 입지까지 확보하리라는 견해다. 그리하여 한국과 우주산업을 계약할 외국인들이 한국을 찾게 되리라 말한다. 여수 국제공항은 나로도를 찾는 길목이 되리라 설명한다.

   이어서 용준이 자신의 견해를 말한다. 한국의 조선공업을 울산과 거제도에 이어서 여수에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들려준다. 돌산도의 무슬 해수욕장부터 남단(南端)까지인 21km의 해안이 요충지라고 밝힌다. 거기에 조선소를 세워 단가가 높은 선박을 제조해야 한다고 말한다. 잠자코 듣던 성호도 자신의 견해를 말한다.

   “쇄빙선, 대형 천연가스 운반선, 이지스 구축함 정도는 되어야겠지. 쇄빙선의 가격이 1,000억 원가량이고, 이지스 구축함이 1조 원가량이 되잖아? 여기와 연계하여 위성 제작에는 5,000억 원가량이 소요되거든. 중국이 해외로부터 작은 선박을 주문받아 해운업에서 도약하려고 하잖아? 이에 반하여 한국은 고단가의 선박이나 위성 제작에 주력해야 돼.”

   성호와 용준은 의기투합하여 여수를 중심으로 한 활력적인 청사진을 그려낸다. 여수만(麗水灣)에는 해양 레저 스포츠 단지를 구축해야 한다고 의견을 나눈다. 빼어난 한려해상(閑麗海上)의 풍광을 바탕으로 쾌적한 입지 조건을 살리자고 제안한다. 여수는 북서 태평양의 신흥 해양 중심 도시로 발전하리라는 견해다. 게다가 대전에 이어서 여수에서 세계 박람회가 개최될 예정이 아닌가? 원탁을 사이에 둔 젊은이들의 혈기에 여수의 미래가 출렁이는 듯하다.

   2개월간의 남빙양에서의 현장 경험을 쌓은 뒤다. 뉴질랜드의 웰링턴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성호가 귀국했다. 해양 연구원의 선임 연구원인 성호다. 그가 맡은 주된 업무는 해양자원에 대한 연구다. 근래에 우주 식품의 원료로 쓰이는 새로운 갈조류(褐藻類)를 발견했다. '갈색 털구름(brown cirrus)'이라 불리는 갈조류다.

   배양기(培養機)를 열어 배양 상태를 점검하고는 성호가 흐뭇한 미소를 머금는다. 연구 방향에 맞춰 갈조류가 잘 자라는 셈이라 여긴다. 한창 연구 보고서를 작성할 때다. 호주머니 속의 휴대전화가 떨어댄다. 귀에 갖다 대니 영환의 목소리가 파고든다. 그는 대학 동기인 여수 수산과학원의 선임 연구원이다.

   “남빙양에 잘 다녀왔어? 시간 나는 대로 주말에 여수로 내려와. 함께 의논할 일이 있어서 그래.”

   영환이 들려주던 말이 잠깐씩 떠오른다. 내년에 열릴 박람회와의 연계 차원에서 여수가 구상하는 업무라고 한다.

   어느새 며칠이 흐른 뒤의 토요일 오후 1시 무렵이다. 성호와 영환은 국보 304호인 진남관(鎭南館)을 둘러본다. 전라 좌수영의 객사(客舍)인 유적지다. 가로가 15칸 세로가 3칸으로 이루어진 목조건물이다. 이어서 둘은 시전동으로 이동하여 선소(船所) 유적지까지 찾아 들어선다. 거북선과 판옥선을 제작하던 인공 연못인 굴강(掘江)을 둘러보며 성호가 말한다.

   “확실히 이순신은 과학적인 면에 있어서도 탁월한 바가 많다고 생각돼. 굴강에 주입한 물의 높이로 작업할 높이를 마음대로 조절한 거잖아? 지금 저기 터진 입구는 배를 진수시킬 때만 열었을 거야. 배를 제작할 때엔 입구를 목책(木柵)으로 막아 수위(水位)를 맞췄을 거야. 연못가에서도 인부들이 쉽게 작업할 수 있었을 테고 말이야. 자연 현상을 꿰뚫는 통찰력이 누구보다도 뛰어난 명장(名將)이었던 것 같애.”

   영환이 성호에게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다.

   “선소 유적지가 오늘날의 조선 공업소의 전신이잖아? 그래서 울산과 거제도에 이어서 여수에도 조선소를 세워야 마땅하다고 봐. 여수가 조선 공업의 새로운 요람이 되기를 바래.”

   유적지에서 가까운 시청을 지나가면서 영환이 숙연한 표정으로 말한다.

   “여기서 차도(車道)로 북서쪽으로 50km쯤 떨어진 곳에 상사호가 있어. 행정 구역상으로는 순천시 상사면에 속한 용박골에 대한 얘기야. 그 골짜기에는 오래 전부터 방치된 폐가(廢家)가 있어. 오늘 너랑 거기에 가 봐야겠어.”

   상사호 동쪽. 도로가 S자로 굽은 곳에서 240m 떨어진 상류에 골짜기가 있다. 이른바 '용박골'이란 골짜기다. 거기엔 구조가 다 해체되어 허물어진 기와집이 형체만 남기고 있다. 허물어진 집채는 두 동이라고 성호가 추정(推定)한다. 두 채의 건물 더미가 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폐가의 잔해를 찬찬히 둘러보더니 영환이 입을 연다.

   “이 집에 대해서 너는 들은 바가 없을 거야. 다른 사람들 중에서도 나만큼 내막을 아는 사람도 없을 거야. 언제부턴가 나는 너를 여기로 데려오고 싶었어. 그 사유를 천천히 얘기할 테니 잘 들어 봐.”

   성호가 말없이 영환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이내 귀를 기울인다.

   영환의 원래 고향은 목포였다. 그런데 두어 살이 되던 해에 상사호 주변의 마을로 이사했다. 용박골과는 대략 600m쯤 떨어진 마을이었다. 그래서 유년시절에는 용박골로 많이 놀러 다녔다. 당시의 용박골에는 5가구가 살고 있었다. 제일 중앙의 집이 지금의 폐가라고 했다. 폐가는 당시에도 고풍스런 기와집이었다고 했다. 당시의 기와집의 주인은 74세의 노부부였다. 식구로는 유일하게 딸이 있었다고 했다. 딸이 출가하여 외지로 간 후에는 거의 연고가 끊긴 상태였다. 어쩌다가 사위와 딸이 2명의 아들을 데리고 마을을 방문하곤 했다.

   2명의 아들 중의 하나는 영환 또래였고 나머지는 연상으로 보였다. 나이가 많아 봐야 두어 살 차이쯤이라고 짐작되었다. 영환이 다섯 살 무렵부터는 기와집의 딸 식구를 보지 못했다. 기와집에 드나드는 가족이라곤 없었다. 명절이 몇 번이 지나도 출입하는 가족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영환이 초등학교 4학년 학생 때였다. 낯선 40대 초반의 일본인 부부가 기와집을 찾았다. 일본인 부부에게 딸린 자식은 영환보다는 두어 살 많아 보였다. 하지만 왠지 그 소년이 영환에게는 낯이 익은 느낌이었다.

   무척 세월이 흐른 뒤였다. 영환이 업무를 협의하러 해양 연구원에 들렀을 때다. 해양자원 연구실에서 성호를 만나면서 깜짝 놀랐다. 어릴 때부터 그의 머릿속을 맴돌던 얼굴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나자마자 대뜸 성호의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속초라는 말을 듣는 순간에 영환은 무척 허탈한 심정이었다. 외모가 조금 비슷하다고 하여 너무 자신의 마음이 흔들렸음을 자책했다. 하지만 왠지 성호에게 호감이 일어 그 때부터 친구로 사귀었다.

   영환이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유년기에 봤다는 일본인 소년이 흡사 너를 닮았거든. 혹시 너를 닮은 일본인 인물이 없니? 왠지 육감으로 폐가의 건물더미를 뒤지면 근거가 나오리라 여겨져. 이전부터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너를 만난 김에 이리로 왔어. 아무래도 유년기에 봤던 일본인의 아들에 대한 인상이 너무나 또렷해. 일본인이 방문했던 집이 폐가였기에 반드시 무슨 흔적이 있으리라 여겨져. 결코 단순한 육감에 의해서만 너를 데려온 건 아니야.”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흙더미에 뒤덮인 폐허의 유적지다. 둘은 준비해 간 삽과 괭이로 흙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대략 한 시간쯤 흙더미를 파헤칠 때다. 영환의 앞에 기다란, 녹슨 철 상자가 드러난다. 둘에겐 마치 보물 상자를 발견한 느낌이 든다. 혹시 전란 때의 폭발물 상자는 아닌지 둘이 조심스레 살펴본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무기류는 아닌 듯 여겨진다. 둘이 철 상자를 괭이로 슬쩍 건드리는 순간이다. 한쪽 면이 쉽게 떨어져 나가면서 내용물이 드러난다. 길이가 대략 80cm에 이르는 기다란 청동제 주물(鑄物)이 눈에 띈다. 그러자 성호와 영환이 동시에 소리를 높이며 말한다.

   “뭐야? 조선 시대의 총통(銃筒)이잖아?”

   “맞아! 진주 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는 현자총통(玄字銃筒)이야. 이게 어떻게 여기서 나왔을까?”

   둘이 총통에 쓰인 명문(銘文)을 읽어 본다.

   萬曆丙申七月日水營功會 玄字重八十九斤 京匠人 李春回

   (만력병신칠월일수영공회 현자중팔십구근 경장인 이춘회)

   성호가 명문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으로 말한다.

   “어쩌면 이럴 수가? 보물 885호로 지정된 진주 박물관의 현자총통의 명문과 정확히 같애. 1596년에 수영(水營)에서 제조한 것으로, 무게가 89근이며 제작인은 이춘회(李春回)라는 기술자야. 여수에서 대량으로 만들었다는 얘기거든. 길이가 79cm에 이르는데도 무게가 53.4kg에 이른다는 얘기야.”

   영환도 명문을 보더니 말한다.

   “이상한데? 내가 봐도 그래. 그런데 이 물건이 왜 여기에서 나오는지 영문을 모르겠네.”

   철 상자 내부에는 한 권의 빛바랜 공책이 발견된다. 성호는 감전된 듯 가슴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의 가슴에 섬광처럼 어떤 실마리가 잡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자 뭐가 급한지 책장을 넘기며 무슨 단서를 찾으려고 한다. 마침내 공책의 2/3 지점에서다. 성호의 시선을 끄는 글 줄기가 눈에 띈다.

   낯선 일본인 가족이 다녀간 뒤에서야 알게 되었다. 사업 관계로 딸 가족이 일본을 찾게 된 적이 있었다. 일본을 떠나 현해탄에 접어들던 배가 해무(海霧)로 인도네시아의 화물선에게 부딪혔다. 새벽 안개 속에서 큰손자는 일본인에게 구조되고 작은손자는 한국인에게 구조되었다. 딸과 사위는 파도에 휩쓸려 시신마저 찾지 못했다고 한다. 나를 찾아온 일본인 내외는 큰손자의 양부모였다. 큰손자의 일본 이름은 와타나베라고 들려주었다. 작은손자는 어디에서 무얼 하며 지내는지 궁금하다. 이름이 바뀌어져도 제대로 자라 주기만 하면 좋겠다.

   성호는 폐가가 자신의 생가(生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몸을 떤다. 속초의 인자(仁慈)한 부모가 양부모(養父母)일지도 모르리라는 생각에 잠기며 극도로 착잡해진다. 총통은 조상일지도 모르는 이씨 문중(李氏門中)의 영혼이 담긴 가보(家寶)였으리라 여겨진다. 시간을 내어 다시 찾아와서 폐가를 정리하겠다고 마음먹는다. 폐가를 떠나기 전에 흙무더기를 향해 재배(再拜)를 올린다. 어떻게 하든 와타나베를 만나 봐야 확실한 게 밝혀지리라고 여긴다.

   영환과 헤어진 직후인 정월 하순이다. 여수에서 해양학에 대한 국제 학술 발표회가 개최되기로 되어 있다. 해양학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는 과학자들은 거의 다 참석할 예정이다. 참석자 명단 중에는 와타나베와 친샤오밍도 포함되어 있음을 성호가 확인했다. 점심시간에 성호가 와타나베를 잠깐 만났다. 발표 준비로 바빴기에 폐가에서 확인한 얘기를 들려줄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쓸 일이 있다면서 와타나베의 혈액을 한 방울 채취했다. 그러자 와타나베도 성호의 혈액 한 방울을 채취했다. 그러고는 서로가 금세 학술 발표장으로 들어섰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발표회가 오후 6시가 되어서야 종료가 되었다. 행사가 종료된 직후였다. 성호가 와타나베를 만나려고 찾았지만 그는 눈에 띄지 않는다. 일본에서 커다란 지진의 징후가 관측되었기에 긴급히 귀국했다고 밝혀진다. 와타나베는 세계적인 지진의 전문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논문만 발표하고는 곧바로 떠났다고 한다. 성호는 잠시 허탈한 심정이었지만 금세 기분을 전환시킨다.

   학술 회의장에서 떠나 성호가 그의 승용차에 올라타려고 할 때다. 호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떨어댄다. 귀에 갖다 대니 친샤오밍의 목소리가 흘러든다.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진다.

   “여보세요? 거기가 어디세요? 아까 발표하신 논문은 잘 들었어요. 위치를 알려주면 제가 그리로 달려갈게요.”

   내일 저녁에 보길도 서쪽 벼랑으로 오라고 말한다. 그러더니 곧바로 '찰칵'하는 소리를 내며 휴대전화의 접속이 끊긴다. 성호가 다시 통화를 시도했지만 전원이 끊겨 있다는 전자음(電子音)만 들린다.

   이튿날 저녁 7시 무렵이다. 보길도의 섬 자락에도 어스름이 끼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성호가 서쪽 해안에서 벼랑 위로 서서히 발걸음을 옮긴다. 점차 섬의 산자락은 짙은 안개에 휘감기기 시작한다. 안개가 너무 짙어 나중에는 길조차 안 보일 지경이다. 다시 반시간이 더 지났을 무렵이다. 어디선가 목청이 찢기는 듯한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귓전을 파고든다. 처음에는 예사로 생각했는데 점차 소희의 목소리와 닮았다고 느껴진다. 노랫소리에는 국악인이 아니면 내기 어려운 풍부한 성량이 실려 있다. 거기다가 애절함마저 담겨 있어 저절로 노랫소리에 몰입하게 될 지경이다.

   갈까부다 갈까부다 님을 따라서 갈까부다.

   천 리라도 따라가고 만 리라도 따라 나는 가지.

   바람도 쉬어 넘고 구름도 쉬어 넘는

   수진이 날진이 해동청(海東靑) 보라매

   모두 다 쉬어 넘는 동설령 고개.

   황급한 마음에 성호가 가파른 언덕길을 서둘러 뛰어 올라간다. 그러면서 소리의 발원지를 찾아 절벽이 드리워진 골짜기를 오른다. 절벽은 골짜기로 이어졌고 골짜기 꼭대기에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바위 위에 소복(素服)을 차려 입은 여인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소복을 대하자 성호의 안색이 돌변한다. 벼랑에서 몸을 날렸던 소희의 차림새도 소복이었기 때문이다. 여인의 목소리가 폭발적으로 흘러나온다.

   우리 님 계신 곳은 무삼 물이 막혔간디 이다지도 못 오신가?

   차라리 내가 죽어 삼월동풍(三月東風) 연자(燕子) 되어

   임 계신 처마 끝에 집을 짓고 내가 노니다가

   밤중만 님을 만나 만단정회를 풀어 볼거나?

   아이고 답답 내 신세야 이를 장차 어쩔거나?

   잘못한 일도 없는데도 성호가 괜히 주눅이 드는 느낌이 든다. 마치 대자연의 거대한 힘이 성호를 여인에게로 끌어들이는 듯하다. 성호는 형언할 수 없는 초조함에 몸을 떨며 여인에게로 다가선다.

   아이고 답답 내 신세야 이를 장차 어쩔거나?

   여인에게로 다가설 때 들린 가사가 성호를 빈사지경(瀕死之境)으로 내몬다. 여인이 토해 낸 처절한 목소리로 동백 숲마저 흐느끼는 듯하다. 섬광이나 바람의 소용돌이처럼 숲으로 발산되는 노랫소리로 잎사귀들마저 울부짖는 듯하다. 잎사귀들이 울부짖으며 토하는 선율들이 성호의 가슴속에서 강렬하게 소용돌이친다. 처음에는 눈가가 쓰리다가 가슴이 찢기는 듯한 통렬함에 몸마저 떨린다. 완전히 넋 잃은 표정으로 성호가 다가가 여인을 부른다.

   “잠깐만요. 저를 좀 봐 주시겠어요?”

   등을 보이고 있던 여인이 고개를 천천히 돌린다. 마침내 성호가 여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이다. 성호가 터지려는 울음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친샤오밍과 손을 맞잡는다. 눈가의 눈물을 지우며 친샤오밍이 절제된 눈빛으로 차분히 입을 연다.

   “저는 미국에서부터 성호 씨를 진심으로 좋아했어요. 그랬는데도 성호 씨의 마음은 이미 소희 씨로 채워져 있었어요. 아주 꽉 말이에요. 시간이 흐르면 좀 괜찮겠거니 여겼는데도 의외로 성호 씨는 집요했어요. 그래서 산타 모니카 해변을 벗어나면서부터는 성호 씨를 단념하기로 했어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결코 단순하지가 않았어요.”

   친샤오밍의 얘기는 이어진다. 그녀는 미국을 떠나자마자 중국으로 건너가서 동지나해 연구소에 취직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연인을 찾으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가슴속에는 성호가 떠오를 뿐이었다. 그래서 1년 전에는 직장마저 버린 채 한국으로 건너왔다. 일체 성호에게는 비밀로 한 채로.

   그 날 이후부터였다. 보길도에 사는 소희의 스승을 찾아서 판소리를 공부했다. 소희 영혼의 도움이라도 받고픈 절절한 심정 때문이었다. 오로지 판소리 공부가 전부인 상태로 1년을 보냈다. 판소리로 소희의 영혼을 감동시켜 성호를 자신에게로 보내달라고 읍소(泣訴)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한 달 전에 중국을 찾아 이전 직장에 재취직했다.

   이런 와중에서 여수에서는 학술회의에 대한 초청장을 세계로 발송했다. 미래의 해양 도시로서의 학술적 요건부터 점검받으려는 국가적인 움직임이었다. 정월 하순에 해양학에 대한 학술 발표회를 갖는다는 취지였다. 이를 계기로 중국에서는 동지나해 연구소의 연구원 셋이 여수를 방문했다. 이들 셋 중에는 친샤오밍도 전문가의 한 사람으로 끼여 있었다.

   행사 기간 내내 친샤오밍은 행사장에서 성호를 은밀히 지켜보았다. 당장 달려가 그리움을 호소하고 싶었다. 하지만 칼날처럼 매정하게 결별한 처지였기에 서글펐다. 그래서 행사가 종료되고 나서 겨우 용기를 내어 성호와 통화했다. 성호와 통화한 뒤엔 함께 온 동료들을 먼저 중국으로 떠나보냈다. 그런 뒤에 그녀 혼자만 보길도의 해안 절벽을 찾았다.

   성호와 친샤오밍이 손을 맞잡은 채 서로를 말끄러미 바라본다. 성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친샤오밍에게 말한다.

   “부족한 제게 그처럼 관심을 쏟다니 제가 너무나 황송할 지경입니다. 정말 이처럼 판소리까지 익히리라곤 상상조차도 못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진실로 두려운 건 저 자신입니다. 이처럼 숭고한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저한테 있는지 ?”

   친샤오밍이 그녀의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성호의 입술을 막는다. 그러면서 그녀가 말한다.

   “스승님은 제게 이미 득음(得音)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시더군요. 하지만 경지에 이르면 뭘 해요? 연인의 마음 한 조각도 얻지 못하는데 말이에요. 매달리지 않을게요. 오늘의 작별이 영원한 슬픔이 되지 않길 바랍니다.”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엔 진한 슬픔이 들끓는 게 느껴진다. 성호와 맞잡았던 손을 친샤오밍이 홱 뿌리친다. 순간적으로 성호가 당황한다. 친샤오밍이 오해했음을 알아차리고는 성호가 신속히 해명하려고 할 때다. 그의 손을 뿌리친 여인에 대한 반감이 불쑥 치민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슬러 오해를 풀려고 마음먹었을 때다. 어느새 친샤오밍이 흐느끼며 동백 숲으로 내달리고 있다. 어두운 밤인데다가 안개가 너무나 자욱하다. 금세 여인의 자취를 놓치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성호가 친샤오밍을 고함질러 불러 본다. 하지만 골짜기를 뒤흔드는 산울림만이 퍼져 나갈 뿐이다.

   세월이 순식간에 흘렀다. 여수는 시민의 날을 기하여 대규모의 해양 축제까지 추진하기로 계획한다. 여수 시청에서는 공식적인 여수의 총체적인 기획 행사를 벌이려고 한다. 전남 도청과 여수 시청에서 파견된 공무원들이 행사 일정표를 짠다. 행사 추진에 대한 기획은 전문 기관들의 전문가들에게 위촉한 상태다.

   마침내 여수 해양 축제를 실시하기 일주일 전이다. 세계 71개국에서 여수 해양 축제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일본과 중국에서는 참여하겠다는 의사 표시가 전혀 없다.

   성호는 중국과 일본의 최근 경향을 분석한다. 7월말에 일본 정치인 셋이 울릉도에서 망언을 터뜨리겠다며 입국하려고 했다.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고 선언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제지로 뜻을 못 이루고 돌아갔다. 한국의 국방장관이 중국에 갔을 때 중국의 참모총장이 미국을 비난했다. 남지나해에서 미국이 베트남과 함께 기동 훈련을 했다는 점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은 한국의 파랑도(波浪島)에까지 시비를 거는 상황이다. 이런 정황으로 여수 해양 축제에 참여하겠다는 통보가 없다고 여긴다. 아직도 일주일이 남았으니 기다려 볼 일이라 생각한다.

   마침내 여수 시민의 날 기념행사가 열리는 10월 15일이다. 성호와 영환은 운영 위원회가 위촉한 행사 추진 자문위원이다. 그래서 행사 기간 내내 여수에 머물기로 약정되어 있다. 해외 자문위원으로는 중국과 일본의 인물들도 여수시에 의해 위촉된 상태다. 치밀한 배려 탓에 중국과 일본도 영향을 받았으리라 성호는 여긴다. 마침내 중국과 일본까지도 여수항에 경기용 선박을 보낸 상태다. 새벽부터 하늘은 연한 비취빛으로 맑게 개어 눈부실 지경이다. 새벽부터 여수항으로 숱한 선박들이 물그림자를 드리우며 밀려들고 있다.

   오전 10시 정각이다. 진남경기장(鎭南競技場)에는 숱한 국내외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시장(市長)의 개회 선언을 듣는다. 마침내 시장이 개회를 선언하자 경기장이 들썩거릴 정도로 환호성이 치솟는다. 300여 마리의 비둘기가 일제히 하늘을 날아오르며 축하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때를 맞춰 여수항의 구축함에서는 3발의 축포가 발사된다. 국민의례를 거쳐 개회식을 마친 뒤에는 시장 일행이 여수항으로 내달린다.

   해군 구축함에서 연이은 세 발의 축포를 쏜 다음이다. 73개 국가의 각종 선박들이 여수항을 떠나 여수만(麗水灣)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여수만에서 각종 해양 스포츠 경기를 치르기로 되어 있다. 요트와 전동 쾌속선과 카누를 비롯한 스포츠용 선박들이 가막만으로 진입한다. 비스포츠용 선박은 여수항에 정박하고, 스포츠용 선박들만 가막만으로 이동한다. 가막만은 여수만의 일부이다. 구체적으로는 여수시 학동과 돌산도 사이의 작은 바다를 일컫는다. 가막만 중의 소호동의 소호 요트 경기장은 최신 시설의 경기장이다.

   카누와 제트스키와 요트가 가막만에 구름송이처럼 떠서 흔들린다. 오전 11시가 지나면서부터 수상 스포츠 경기가 진행되기 시작한다. 가막만 일대의 해안에서 숱한 관광객들이 망원경을 꺼내 경기를 지켜본다. 관찰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겠다고 다투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띈다.

   성호는 영환과 함께 소호 요트 경기장에 머물며 지낸다. 틈틈이 대화를 나누다가는 망원경을 꺼내 바다를 바라본다. 세계 각국의 요트와 카누와 제트스키들이 정해진 구역에서 힘차게 내달린다. 시합이 종료될 때마다 사방에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지곤 한다.

   점심을 먹고 성호가 영환과 함께 잠시 해변을 산책할 때다. 가막만 수상 스포츠 경기장 본부로 긴급 방송이 전달된다. 중국과 일본 선수들도 경기에 참여하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그들은 경기용 선박을 여수항에 계류시킨 채 방관만 하던 상태였다. 그러다가 무슨 연유인지 스포츠 행사장에 참가하기로 했다는 방송이다. 우리말과 영어에 이어 중국어와 일본어의 방송이 경기장에 울려 퍼진다. 방송에 이어서 두 발의 축포가 터진다. 그러자 세계의 관광객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한다. 명실 공히 세계의 축제로 위상이 드높아지는 시점이다.

   가막만에서 한창 수상 스포츠가 열기를 더하고 있을 때다. 일본 선수 인솔단에서 연락이 왔다. 누군가 성호를 급히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었다. 행사를 지켜보는 일 외엔 특별한 일이 없던 성호다. 연락을 받자마자 즉시 일본 인솔단에게로 찾아 갔다.

   인솔단에는 와타나베가 들어 있었다. 성호를 보자 손을 내밀며 반긴다. 성호가 와타나베를 보는 순간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에게로 다가선다.

   “잠시 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어요. 호젓한 장소가 없을까요?”

   둘은 경기장 주변의 간이 찻집에서 마주 앉는다. 잠시 서로의 안부를 물은 뒤다. 성호와 와타나베가 잠시 엄숙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본다. 자못 숙연한 분위기여서 마치 결투하기 직전의 서늘한 느낌마저 풍긴다. 그러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둘이 일제히 서류 봉투를 내민다. 둘은 상대가 내민 봉투를 각자 열어젖힌다. 봉투로부터 거의 같은 내용물들이 둘의 시야로 펼쳐진다. 놀랍게도 성호와 와타나베의 유전자 검사 결과물이다. 와타나베와 성호는 생물학적으로 틀림없는 형제라는 판정이 제시된다.

   성호와 와타나베의 눈시울이 갑자기 뜨거워진다. 용수철이 튀듯 반사적으로 서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그러고는 순간적으로 서로를 껴안으며 속삭이듯 말한다.

   “형, 보고 싶었어요.”

   “동생아, 정말 그리웠어.”

   형제가 둘이 서로를 포옹한 채 한동안 떨어질 줄을 모른다. 실종으로 단절되었던 과거의 벽이 단숨에 허물어지는 느낌이다. 가막만으로 밀려드는 파도소리마저도 청년들의 가슴을 마구 흔들어댄다. 기나긴 세월 동안 응어리졌던 외로움의 잔영마저도 산산이 흩어지는 듯하다. 둘은 너무나 기뻐 얼싸안은 채 실성한 듯 깡충거렸다. 이미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초월한 듯하다. 와타나베가 감격스런 표정으로 충동적으로 말한다.

   “내가 소년 시절에 이미 상사면의 용박골을 방문했다고? 우리가 현자총통을 만든 이춘회 어른의 후손임에 틀림없다고? 어쨌든 현재로 너는 한국인이고 나는 일본인이잖니? 어쩌다가 이런 일이 생겼지?”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라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확인하는 물음일 따름이다. 둘이 서로의 뺨을 쓰다듬으며 신명에 들떠 깡충거린다. 새로운 세상이 열려 천지(天地)가 이들 형제의 우주로 여겨질 정도다. 형언할 수 없이 수시로 들끓던 외로움의 근원이 밝혀진 시점이다. 그 처절한 외로움의 근원이 형체 없이 주위로 스러지는 느낌이다.

   형제가 마냥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깡충거릴 때다. 느닷없이 와타나베의 휴대전화가 울어댄다. 와타나베가 전화를 받더니 이내 표정이 핼쑥해진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성호에게 양해를 구한다.

   “이번에는 급기야 강한 지진이 터졌다고 나를 부르구나. 얼마나 많은 인명 피해가 났는지 걱정스러워서 전신이 다 떨려. 일 마치는 대로 네가 있는 해양 연구원으로 찾아갈게.”

   말을 마치자 악수를 나누고는 와타나베가 성호의 시야에서 금세 사라진다. 성호가 아쉬운 한숨을 삼키며 작별의 손을 흔든다. 돌아보는 와타나베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혀 그렁그렁하다.

   오후 6시가 되자 행사가 종료됨을 알리는 방송이 가막만에 물결친다. 둘째 날의 경기는 이튿날 진행된다는 방송의 선율이 저녁놀처럼 곱다. 성호가 자신의 숙소로 터덜터덜 걸어갈 때다. 호주머니의 휴대전화가 섬뜩하게 떨어댄다. 귀에 갖다 대니 여인의 얼음장처럼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든다.

   “친샤오밍이에요. 그간 잘 지내셨어요? 만나고 싶은데 내게로 올 수 있으세요?”

   여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성호의 심장이 얼어붙는 듯하다. 보길도에서 헤어진 뒤였다. 성호는 여인과 사별했다고 여기고 그녀를 깨끗이 잊기로 했다. 그랬기에 친샤오밍의 목소리를 들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은 듯한 느낌마저 불쑥 든다. 여인의 숙소를 찾아가면서도 마음이 줄곧 신산스럽기만 하다. 여인을 만나더라도 달라질 게 없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숱한 망설임과 번민을 되풀이한 뒤다.

   마침내 여인의 숙소 문을 열고 여인을 바라보는 찰나다. 미국에서 함께 지냈던 정감으로 왈칵 친샤오밍에게로 달려가려다가 우뚝 멈춘다. 여인도 성호를 향해 힘차게 달려오다가 덩달아 멈춰 선다.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낸다.

   “혹시 지금까지도?”

   성호도 갑자기 경직된 목소리로 되묻는다.

   “이제는 결혼하셨죠?”

   둘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처참할 지경이다. 둘의 머릿속으로 세찬 광풍(狂風)이 휘몰아치는 듯하다. 여인과 성호가 거의 동시에 체념 어린 목소리로 중얼댄다.

   ‘아, 내가 너무 방심했나 봐. 결국 다른 여자와 결혼한 모양이군.’

   ‘보길도에서 그처럼 찾았는데도 왜 못 만났지? 이제 나는 진짜 외톨이가 되는구나.’

   둘이 각자 중얼댄 직후다. 둘의 눈빛이 매섭도록 반짝이며 일시에 서로를 쏘아본다. 아주 가는 소리였지만 상대방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서로 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힘이 시키는 줄도 모르게 둘이 급격히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그러고는 서로를 향해 한 마디씩 절박하게 내뱉는다.

   “친샤오밍, 진심으로 사랑해요.”

   “사무치게 그리웠어요, 성호 씨.”

   둘이 혀가 마르고 가슴이 타며 눈알마저 굳는 느낌에 휩쓸린다. 둘이 격정에 휩싸여 다시 서로를 힘껏 껴안는다. 너무나 힘껏 껴안아 숨쉬기마저 버거울 지경이다. 포옹하는 순간부터 세상은 환상의 색채로 남실대며 그들에게 밀려드는 듯하다. 둘이 서로를 안고는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어느새 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그렁그렁하다. 성호가 친샤오밍을 향해 말한다.

   “소희의 스승님한테 지도받았다는 말을 듣고는 너무나 감동했어요. 제 마음을 열려는 판이었는데 느닷없이 그대가 오해하여 사라졌어요. 경찰에까지 연락하여 얼마나 샅샅이 찾았는지 모를 거예요. 급기야는 사별한 것으로 단념하고 …”

   성호의 말을 자르며 친샤오밍이 울음을 터뜨리면서 말한다.

   “으흑! 으흐흑! 진작 진솔하게 얘기했어야죠. 잔뜩 오해하도록 말해 놓고는 이게 뭐예요? 얼마나 절망(絶望)했으면 배까지 대절하여 섬에서 떠났겠어요? 자칫 잘못했으면 영원히 결별할 뻔했잖아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요, 네?”

   껴안다 보니 남녀의 뺨이 맞닿는다. 그러자 불덩이 같은 열기가 서로에게 훅 밀려든다. 찰나 간에 부르르 떨면서도 서로를 바싹 껴안는다.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다는 강렬한 몸짓인 듯하다. 숙소의 열린 창문으로는 초저녁 달빛이 파르스름하게 휘감겨든다.

   성호에겐 일본이 경기에 참석한 것은 와타나베의 설득력 때문으로 판단된다. 마찬가지로 중국도 오후에나마 경기에 참석한 것은 친샤오밍의 뜻이라고 밝혀진다. 친샤오밍이 아시아의 친목을 위해 협조가 필요하다고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이다.

   성호는 감동에 취해 여인의 등을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눈물을 글썽인다. 창 밖에는 가막만의 파도 소리가 자장가처럼 밀려들 뿐. 사방은 정밀(靜謐)에 묻혀 심장 박동 소리만 꿈결처럼 퍼져 흐른다.

 <200자 원고지 10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