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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안개

                                                                                          손 정 모

   어디에도 경적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차량 소음조차도 말끔히 사라진 토요일의 인사동이다. 5월 초순이라 도심에도 신록의 물결이 연신 출렁댄다. 감미로운 바람결이 물속의 수조(水藻)처럼 연신 골목길에 나부댄다. 성준(星俊)이 찻집의 식탁에 앉아 통유리 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본다.

   쨍그랑거리며 찻집 출입문에 매달린 풍경소리가 실연기처럼 연신 흩날린다. 호수의 수면에 금세 살얼음이라도 얼듯 청아한 음색이다. 검정색 원피스 차림의, 얼굴이 고운 중년 여인이 들어선다. 성준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여인에게로 손을 내밀며 말한다.

   “정말 이처럼 다시 만나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여인이 성준과 악수를 나누며 응답한다.

   “저두요. 이렇게 만나서 너무 기뻐요.”

  한 달 전인 4월 초순이었다. 강남 한국화 작가회의 일원으로 성준이 당일 여행을 나섰다. 전북 변산의 격포 항구와 위도(蝟島)를 둘러보는 여정이었다. 다들 흥에 겨워 술에 듬뿍 취한 상태였다. 돌아오다가 휴식하러 충남 서산 휴게소에 대절 버스가 들렀을 때였다. 성준이 용변을 보고 식사한 뒤에 버스를 찾았다. 하지만 버스는 떠나 버리고 보이지 않았다. 성준은 일시에 사면(四面)으로 절벽처럼 치솟는 단절감을 느꼈다.

   성준은 종착지가 서울로 되어 있는 대절 차량을 찾기로 했다. 주말이어선지 서울을 종착지로 삼은 대절 차량이 다섯 대나 보였다. 첫 번째로 알아본 차량에는 여분의 좌석이 없었다. 그래서 두 번째의 차량으로 다가가 정황을 살폈다. 차량을 대절한 대표자가 여인이라는 사실을 한 승객으로부터 알아내었다. 대절 차량의 기사가 차에 막 올라타려고 할 때였다.

   대표자 여인도 마침 버스에 오르려고 했다. 성준이 여인에게로 다가가 먼저 명함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처지를 진솔하게 얘기하면서 도움을 청했다. 여인이 성준의 명함을 들여다보며 성준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성준의 얘기를 차분히 듣고 난 뒤였다. 여인이 말끄러미 성준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회사원이면서 화가이시군요. 도곡동에 사신다고 하셨죠? 태워 드릴게요. 나중에 매봉역에 내려 드리면 되겠죠? 저희들은 대치동 마을 사람들이에요.”

   성준은 과거의 상념으로부터 깨어나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어떻게 제게 전화할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여인이 대답 대신에 미소를 머금으며 찻잔을 들어 앞으로 내민다. 성준이 술잔을 부딪듯 여인의 찻잔에 자신의 찻잔을 갖다 댄다. 그러다가 둘이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깨문다. 찻집 통유리 벽 바깥에는 정방형의 돌확이 놓여 있다. 거기에는 다섯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꽃을 매달고 바람결에 나부끼고 있다. 돌확 부근에는 두 소년들이 눈에 띈다. 그들은 초등학교 2학년 정도의 아이들로 보인다. 의외로 플라스틱 제품의 장난감 칼을 둘 다 지니고 있다. 하도 정교하게 만들어져서 얼핏 보기엔 진검으로 착각할 지경이다.

   플라스틱 칼을 바라본 순간에 성준의 가슴에 파동이 일기 시작한다. 중국의 무당산(武當山)에서 만났던 처녀 도인(處女道人)인 친샤이펑(Chinshypung)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3달 전인 겨울철이었다. 자소궁(紫?宮)의 관광객을 위한 무술 공연장에서였다. 20대 중반의 도인이 진검(眞劍)을 빼 들고 검술을 시연하고 있었다. 팔을 내밀었다가 거두어들이면서 몸을 뒤채는 동작이 유려하기 그지없었다. 여인의 동작이 펼쳐질 때마다 성준의 가슴에 파동이 이는 느낌이었다. 구름 속을 떠다니며 헤엄치는 한 마리의 학처럼 우아한 동작이었다.

   이윽고 도인이 동작을 멈추었을 때다. 성준이 도인에게로 다가서며 영어로 말했다.

   “정말 눈부시게 유려한 동작이었습니다. 검술을 수련하신 지가 얼마나 되세요?”

   도인이 대번에 유창한 영어로 응답했다.

   “11년째에 접어들었어요. 검술은 제 영혼의 숨결과도 같아요. 댁도 검술에 조예가 있어 보이는데 시범을 부탁해도 될까요?”

   말을 마치자마자 성준에게로 장검을 내밀었다. 여자치고는 꽤 성미가 급한 사람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얼결에 성준이 장검을 받아들었다. 취미생활의 일부로 수련하는 본국검(本國劍)을 시연하기로 했다. 성준이 자세를 취하자마자 도인이 곧바로 말했다.

   “오호, 한국의 본국검의 품새로군요. 잘 부탁드릴게요.”

   첫 자세만 보고도 본국검의 품새임을 알아차리는 도인이 아닌가? 성준이 검술을 끝냈을 때였다. 성준 스스로도 평소 때보다 모든 품새가 매끄럽게 진행되었다고 여겼다. 친샤이펑이 감격한 눈빛으로 박수를 치더니 성준에게 말했다.

   “검의 달인(達人)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에요. 진심으로 선생님과 교류하고 싶어요. 잠시 후에 제 사부님을 만나보고 가지 않을래요?”

   성준은 단체 여행이었기에 단체에서 이탈하고 싶지 않았다. 처녀 도인에게 정중하게 거절의 뜻을 전하고는 하산했다. 작별 인사를 하는 성준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가에 물기가 비쳤다. 여인의 눈가에 서렸던 애잔한 느낌이 광풍(狂風)이 되어 성준에게 회오리쳤다.

   39세의 서연(瑞姸)의 얘기를 들으면서 성준이 창 밖을 내다본다. 여인보다 8살 연상의 사내의 눈에 소년들의 모습이 밀려든다. 두 소년이 장난감 칼을 놓아두고는 동화책을 뒤적인다. 그러다가 서로 쫑알대며 열심히 떠들어대곤 한다. 성준이 시선을 창 밖에서 탁자로 돌릴 때다. 종업원이 파전과 동동주를 식탁 위에 갖다 놓는다. 둘은 술잔을 맞대어서 서로의 만남을 축하하며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여 일주일에 3번씩 어학원 강사로 뛴다는 서연이다. 대치동 마을의 부녀회장을 맡고 있다는 그녀다. 4월 초순의 토요일에 그녀는 부녀회원 가족들과 고창을 다녀왔다고 들려준다. 선운사에서 십여 km 떨어진 산자락의 암자(庵子)를 찾았다고 한다. 암자에는 말기 암환자인 승려들이 집단으로 요양하고 있다고 한다. 암 환자의 수는 9명에 이른다고 했다.

   서연이 성준을 만났던 날이었다. 부녀회 회원 가족들은 정오 무렵에 사찰에 도착했다. 그 날 부녀회장의 남편은 회사 일로 참여하지 못했다. 그 때부터 시작하여 다섯 시간 동안 봉사 활동을 펼쳤다. 여자들은 공양간을 들락거리며 음식을 만들거나 환자들의 빨래를 했다. 남자들은 승방(僧房) 청소를 하거나 환자들을 목욕시켰다. 쾌청한 날씨를 이용하여 환자들의 이불도 씻어서 말렸다. 봉사 활동을 마치고는 상경 길에 올랐다가 서산 휴게소에 들렀다. 거기에서 넋을 잃고 배회하던 성준을 서연이 만나게 되었다.

   대절 버스가 매봉역에 성준을 내려줄 무렵이었다. 성준이 서연에게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달라고 말했다. 전시회를 열 때마다 제작하는 도록(圖錄)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서연은 별다른 생각 없이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매봉역에 성준을 내려준 뒤에 대절 버스는 대치역으로 내달렸다.

   이틀 뒤인 월요일 오전이었다. 성준이 도록을 익일 특급 우편물로 발송했다. 화요일 오후에 서연이 우편물을 열어 도록을 펼쳐 들었다. 표지를 젖히자 화가의 자필 서명과 낙관이 가지런히 찍혀 있었다. 도록의 중앙에는 A4 용지에 적힌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냥 버스를 태워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 차원의 편지였다. 한데 알지 못할 것은 편지를 읽고 난 뒤의 느낌이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흡인력이 편지의 문장에서 느껴졌다.

   편지를 받은 지 3주가 지난 5월 초순의 토요일인 오늘이었다. 볼일이 있어서 인사동을 다녀오겠다고 회사에서 남편이 연락했다. 그래서 서연은 남편한테 전화로 말했다. 그녀도 인사동에 볼일이 있으니까 나중에 인사동에서 만나서 귀가하자고 약속했다. 남편과 통화를 끝낸 뒤였다. 서연이 성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쾌활한 성격이라 문득 장난기도 발동하여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장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신서연이에요. 오늘 저녁 10시에 인사동에서 만날까요? 보내주신 도록과 편지는 잘 받았어요. 그럼 나중에 봐요.”

   오늘 그녀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 순간이었다. 성준은 마침 동료 화가들 셋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기꺼이 대답을 하고는 찻집 이름을 알려 주었다. 인사동에는 도처에 전통 찻집이 깔려 있었다. 전통 차만 파는 것이 아니라 술과 음식까지 다 팔았다. 그래서 부담 없는 만남의 장소로 인사동을 잘 이용하곤 했다.

   성준은 통유리 벽의 바깥 골목을 내다본다. 돌확에는 여전히 복사꽃이 흘러드는 바람결에 나부낀다. 두 소년이 이제는 플라스틱 칼을 빼어들고는 칼싸움을 벌이고 있다. 영화를 많이 본 탓인지 몸이 날렵하기 그지없다. 서연과 둘이서 동동주를 마신 지 반시간이 지날 무렵이었다. 느닷없이 서연이 고개를 뒤로 발칵 젖히며 성준에게 말했다.

   “고려 시대에 해동 제일의 시인이라는 김황원(金黃元)을 아시죠? 그 분이 부벽루(浮碧樓)에서 쓴 두 줄의 시구(詩句)도 아실 거구요. 거기에다가 우리가 2줄의 시구(詩句)를 덧붙여 완성시키면 어떨까요?”

   여인이 식탁 맞은편에서 성준의 왼쪽 옆 자리로 옮겨 앉는다. 그러더니 손가방을 열어 종이와 볼펜을 꺼내 든다. 그러더니 종이에 한자로 휘갈겨 글을 쓴다. 필체가 예사롭지 않은 달필이다.

   天下風光紛紛流

   서연이 종이를 성준에게로 내밀며 마지막 구를 완성시켜 보라고 말한다. 성준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볼펜을 받아든다. 그러고는 넷째 줄에 한자로 적는다. 한자로 적어 조합하니 다음과 같이 된다.

長城一面溶溶水(장성일면용용수)

大野東頭點點山(대야동두점점산)

天下風光紛紛流(천하풍광분분류)

心中殘閔漠漠送(심중잔민막막송)

평양성 한쪽으로는 굽이굽이 남실대는 물줄기요

평야 동쪽으로는 점을 뿌린 듯 산이 깔려 있구나.

천하의 빼어난 절경이 함께 어우러져서 흘러가니

가슴속의 번민마저도 아득하게 흘려보내겠구나.

   성준이 글을 완성한 직후다. 서연이 완성된 시편을 들여다보더니 환희에 찬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감탄하는 어조로 말한다.

   “그 분이 미완성으로 남겼던 시편이 오늘에야 완성작이 되었어요. 정말 제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이에요. 평양 대동강의 풍광이 확 살아나는 느낌이에요. 갑자기 당신한테 뿅 가는 느낌이 들어요.”

   말을 마치자 활짝 미소를 짓더니 성준의 왼팔에 팔짱을 낀다. 성욕을 자극하는 강력한 향수 냄새가 성준의 후각으로 치닫는다. 그녀가 속삭이듯 성준에게 말한다.

   “우리 길게 사귈까요? 짧게 사귈까요?”

   성준이 순간적으로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서연을 바라본다.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 어렵다는 표정이다. 서연이 오른손을 성준의 넓적다리 깊숙이 갖다 올리며 말한다.

   “선수들끼리 왜 이래요? 짧게 사귀는 것은 모텔로 직행하는 것이라는 것쯤은 아실 텐데요?”

   갸름한 얼굴에 늘씬한 몸매까지 갖춘 미인형의 서연이다. 길게 사귀겠다고 얘기하면 총알처럼 내뺄 듯한 자세다. 성준이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그녀를 향해 낭랑한 목소리로 말한다.

   “제게도 당신은 환상적일 만큼 매혹적인 여인으로 보여요.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것은 당신의 맑은 영혼과 아취(雅趣)예요. 당신과 나의 부부가 서로 좋은 이웃으로 지내면 어떨까요? 제 마음을 밝혔으니 판단은 당신한테 맡길게요.”

   서연이 묘한 미소를 짓다가 집게손가락으로 성준의 코끝을 톡톡 친다. 그러면서 속삭이듯 말한다.

   “선수인 듯하면서도 모범생 같아 보였는데 관상이 맞네요. 나도 당신이 마음에 썩 들어요. 약간은 아쉽지만 길게 사귀는 걸로 받아들일게요. 아주 길게 말이에요. 그러면 이번 주 일요일에 양가(兩家) 부부가 남양주 계곡에서 만날까요? 거기에는 맑은 물과 공기가 참 좋아요.”

   여인은 동동주를 한 병만 더 마시자고 성준에게 말한다. 성준이 고개를 끄떡이며 종업원을 부른다. 어느 정도 취기를 느끼는 성준이다. 성준이 술에 취하면 두 가지의 취향을 드러낸다. 그림을 그리거나 검술을 시연한다.

   성준이 서연에게 잠시 바람을 쐬겠다고 말하고는 찻집을 빠져 나간다. 성준이 밖에 나가니 돌확 부근에 있던 소년들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앉았던 자리에 장난감 칼이 놓여 있을 따름이다. 성준이 장난감 칼 하나를 주워 든다. 술을 깰 겸 장난감 칼로 본국검의 검식을 시연할 작정이다. 본국검(本國劍)은 조선의 병서(兵書)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실린 한국 고유의 검술이다.

   성준은 천천히 칼집에서 검(劍)을 빼 든다. 열두째 검식인 발초심사(撥艸尋蛇)의 동작만 되풀이할 작정이다. 이 동작을 취하며 돌확의 복사꽃송이를 향해 칼을 겨눈 순간이다. 복사꽃잎이 서너 장 나비처럼 뱅글거리며 떨어져 내린다. 칼에서 복사꽃까지는 3m가량이나 떨어진 거리다.

   성준이 의아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복사꽃 가까이에는 소년들은커녕 다른 행인들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3m 이상 떨어진 거리의 꽃잎이 성준의 칼짓에 떨어진 셈이다. 의아한 느낌에 휩싸여 성준이 재차 검식을 시연하며 칼을 겨눈다. 그러자 이번에도 3m 거리의 복사꽃잎이 서너 장 떨어져 내린다. 성준이 재차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주위를 둘러본다. 주위에는 분명 사람의 그림자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성준은 칼집에 칼을 꽂아 원래의 위치인 돌확 곁에 놓아둔다.

   어느 정도 술이 깬 느낌이 들자 성준이 찻집으로 들어선다. 성준의 얼굴에서 주기(酒氣)가 사라졌음을 확인한 뒤다. 서연이 성준에게 말한다. 주말의 일요일에 양가(兩家)의 부부가 서로 만나도록 하겠느냐고 재차 확인한다. 성준이 그러겠다고 확실히 대답한다. 그러자 서연이 성준의 팔을 끌고는 조계사 입구로 걷기 시작한다. 거기의 승용차 안에서 그녀의 남편이 기다리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이윽고 조계사 입구에 이르자 시동이 켜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서 검정색 승용차에서 성준 또래의 체구가 우람한 사내가 내려선다.

   서연의 소개로 사내와 성준이 악수를 나누며 통성명을 한다. 이내 서연을 태운 사내의 승용차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서연이 사라지자 성준은 허탈해진다.

   성준이 안국역으로 발길을 옮기려는 찰나다. 느닷없이 눈앞에 20대 중반의 두 여인들이 시야를 막는다. 성준이 몸을 비키려고 할 때다. 여인들이 성준에게로 다가와서 목례를 하며 말한다.

   “선생님, 잠깐만 시간 좀 내어 주시겠어요? 저희들은 '신라검(新羅劍)'의 회원들이에요. 잠깐만 선생님께 말씀드릴 게 있어요.”

   얼굴이 갸름한 주현(珠炫)과 이마가 넓은 정미(貞美)가 이름을 밝히며 말한다. 성준의 검기(劍氣) 발출로 복사꽃잎이 떨어지는 현장을 동영상으로 촬영했다고 들려준다. 그러면서 신라검 총관까지 동행해 달라고 정중히 요청한다. 주현의 승용차에 정미와 성준이 동승한다.

   일행이 회색의 5층 빌딩 앞에 선다. 도곡동 ‘성창 빌딩’이란 곳이다. 3층 복도에 들어서니 '신라검 총관(新羅劍總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복도의 출입문이 열리고 성준이 안내된 곳은 회장실(會長室)이다. 시각으로는 자정이 가까운 시점이다. 성준에게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일행을 맞는다. 회장이 입을 열기에 앞서서 주현이 말한다.

   “회장님, 마침내 우리가 그토록 찾던 진인(眞人)을 만났어요. 저와 정미가 현장에서 촬영한 동영상 사진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회장이 동영상 장면을 바라볼 때다. 순간적으로 눈썹에 차가운 기운이 서리더니 놀라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다가 간단한 고갯짓으로 회장이 주현과 정미를 실외로 내보낸다. 회장이 성준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성준도 그제야 정신을 차려 회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둘의 시선이 교차한 순간이다. 둘의 사이가 3m가량 떨어진 상태다. 회장이 양손을 교차시키더니 슬쩍 성준에게로 미는 동작을 취한다. 바로 그 찰나다. 성준의 우측 어깨에서부터 가슴을 거쳐 아랫배로 차가운 기운이 밀려든다. 돌발적인 현상에 성준이 놀라 회장을 흘깃 바라본다. 그러다가 성준이 손바닥으로 막는 듯한 동작을 무의식적으로 펼친다. 그러자 회장의 얼굴에 극도로 긴장하는 표정이 서린다. 회장의 긴장한 표정을 대하자 성준이 황급히 자세를 가다듬는다. 곧바로 낭랑하기 그지없는 회장의 목소리가 성준의 귀에 밀려든다.

   “선생님, 사범들의 견해가 맞는 것 같아요. 본관에서 선생님을 특별 사범으로 모시고 싶어요.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추후로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회장이 깍 듯이 경건한 자세로 성준을 대한다. 택시비까지 챙겨서 사범들을 시켜 성준을 택시에 태워 전송한다.

   순식간에 며칠이 흘렀다. 서연 부부의 제안으로 성준 부부는 남양주의 야산 골짜기로 향한다. 거기 개천이 흐르는 물가에서 양가의 부부가 만나기로 약속했다. 오전 9시 무렵에 양가 부부가 물가에서 마주 앉는다. 바닥에 폴리비닐 자리를 펴고는 넷이 둘러앉는다. 서연의 남편인 재홍(齋弘)은 대기업 간부 사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성준은 자신이 화가이면서 회사원이라고 밝힌다. 서연은 중국어 강사라고 소개하며, 성준의 아내는 대학병원의 간호사임을 밝힌다. 넷이 어울려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눈다.

   인사를 마친 뒤다. 넷이 폭이 넓은 개울에 들어선다. 미리 준비했던 족대를 이용하여 물고기와 새우를 잡기 시작한다. 대략 반시간쯤 작업했을 때다. 플라스틱 물통 가득 새우와 물고기들이 잡혔다. 여인들이 휴대해 간 이동식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인다. 밥과 매운탕이 거의 비슷한 시각에 끓는다. 넷이 둘러앉아 반찬을 꺼내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눈다. 정겨움에 취해 자연스레 서로 이야기보따리를 담뿍담뿍 풀어 놓는다.

   한참 대화를 나눈 뒤다. 수석(壽石)이 눈에 띄려나 싶어 개천가를 성준이 둘러볼 때다. 절벽 하단 언저리 부근에서다. 갈대가 유난히 무성한 곳을 나무 막대기로 젖히는 순간이다. 평평하게 수직으로 드리워진 바위에 뭔가 특이한 무늬가 보인다. 천연적인 무늬이려니 여겨 들여다보니 돌에 새긴 글과 그림이다. 성준이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디지털 사진기로 촬영한다.

體氣拔出修鍊圖(체기발출 수련도)

   7글자 아래에 6가지의 동작에 대한 그림이 상세히 새겨져 있다. 다리를 일자(一字)로 펴서 앉는 자세가 첫 번째 동작이다. 두 번째는 일어서서 허리를 굽혀 머리를 발목에 대는 동작이다. 세 번째는 벽에 다리를 붙여 물구나무서기를 한 동작이다. 네 번째는 앉아서 편 다리에 머리를 발목에 대는 동작이다. 다섯 번째의 동작은 보다 상세히 새겨져 있다. 달려든 자세에서 몸을 솟구쳐 양발로 벽을 차는 동작이다. 마지막은 두 손을 짚고 몸을 옆으로 돌리는 동작이다. 동작의 마지막 부분에는 두 줄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日間三十回而三年修鍊達氣拔出之境 內禁衛將 李哲雄

(일간삼십회이삼년수련달기발출지경 내금위장 이철웅)

매일 삼십 회씩 3년간을 지속하면 기를 발출하게 된다. 내금위 장군 이철웅

   성준은 소중한 보물을 얻은 느낌으로 감격에 휩싸인다. 만난 지 네 시간이 지났을 때다. 그제야 아쉬운 듯 두 부부가 작별한다. 봄철에는 민물고기를 잡기로 하고 가을에는 바다낚시를 함께 떠나기로 정한다. 새로운 이웃을 만난 기쁨으로 양쪽 부부는 행복한 표정으로 작별한다.

   서연을 만난 지 일주일이 지난 5월 중순 무렵이다. 성준이 팔을 크게 휘돌리던 중이다. 느닷없이 몸이 시큰거리면서 우측 어깨로부터 힘이 쑥 빠지는 듯하다. 베란다 부근이어서 그의 오른팔이 난초 잎사귀를 향할 때다.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도 느닷없이 잎사귀들이 서너 차례씩이나 크게 흔들거린다. 그러다가 도장을 운영하는 친구인 검도 관장에게 의견을 구한다. 관장인 영호(榮浩)는 쓴웃음을 지으며 일축해 버린다. 하지만 성준의 견해로는 아무래도 기의 발출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제야 성준이 도곡동의 신라검 본관을 찾는다. 검도가 7단인, 오명희(吳明熙) 회장이 성준을 반가이 맞는다. 41세의 얼굴이 고운 여인인 회장의 얼굴은 차가운 얼음장 같다. 회장이 진검을 성준에게 건네주며 본국검을 시연해 보라고 청한다.

   검기의 발출 현상을 관장이 은밀히 관찰하려는 기색이 비친다. 성준이 12번째 검식인 발초심사의 동작을 취하려 할 때다. 도장 입구로 두 여인들이 들어선다. 여인들의 출현에 무관하게 성준이 칼을 왼쪽 어깨로 들어올린다. 그러다가 오른쪽 아래 방향으로 서서히 칼을 내리뻗는다. 칼날의 끝은 연탁(演卓) 위의 10자루 촛불을 겨누고 있다. 바로 이 무렵이다. 성준의 우측 어깨가 시큰대며 힘이 일시에 왈칵 빠지는 듯하다. 칼끝이 촛불을 가리킬 때마다 촛불이 맥없이 꺼져 버린다. 칼끝과 연탁의 거리는 족히 5m에 이른다.

   순서대로 10자루의 촛불이 모두 꺼지는 찰나다. 사방에서 박수갈채가 일제히 터져 나온다. 성준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안면이 익은 얼굴이 밀려든다.

   친샤이펑(Chinshypung)과 50대 중반의 낯선 여인이 눈에 띈다. 성준이 놀란 눈으로 친샤이펑에게로 다가서며 입을 연다.

   “친샤이펑, 여긴 어쩐 일입니까? 정말 반가워요.”

   친샤이펑이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제 사부님을 모시고 왔어요. 자소궁을 찾으셨던 날에 제가 사부님을 뵙고 가라고 부탁 드렸잖아요? 그냥 가셨기에 결국 제가 사부님을 모시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친샤이펑 곁의 50대 여인이 성준을 향해 다가서며 손을 내민다. 성준도 경건한 자세로 여인과 악수를 나눈다. 여인이 유창한 영어로 성준에게 말한다.

   “제자가 하도 극찬하기에 어떤 분인지 만나고 싶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검기의 발출 현장까지 제대로 보게 되어 무척 기뻐요. 결코 제자의 판단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게 되어 기쁩니다.”

   친샤이펑의 사부(師父)인 53세의 헝요우밍(Hungyowming)과 성준이 만나 새삼스레 악수를 나눈다. 성준의 눈에 비친 헝요우밍은 수려한 미모의 여인이다. 젊은 시절에는 미모가 더욱 출중했으리라 여겨지는 얼굴이다.

   본관의 회장인 명희는 41세의 독신녀다. 명희도 미모가 대단히 빼어나 성호의 눈이 부실 정도다. 그 외모에 여태껏 독신녀로 지냈다니 이해가 안 될 정도다. 헝요우밍과 명희가 잠시 대화를 나눈다. 그러더니 세 여인들이 하나같이 성준에게로 다가들어 뭔가 말하려고 한다.

   바로 이 순간이다. 성준의 호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심하게 떨어댄다. 귀에 갖다 대니 검도관 관장인 영호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난번에 네가 한 말을 생각해 봤어. 아무래도 네 몸에서 검기가 발출되었던 것 같애. 당장 나한테 좀 들러 줄래?”

   성준이 세 여인들에게 한 시간만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한다. 그러고는 곧바로 삼성동의 극동 검도관으로 달려간다. 도장에 도착하니 영호가 관장실에서 나오면서 성준을 반가이 맞는다. 둘이 원탁을 사이에 두고 커피를 마실 때다. 영호가 성준을 향해 말한다.

   성준이 돌아간 뒤에 영호가 인사동 돌확을 직접 찾았다고 한다. 그러고는 복사꽃송이들을 살폈다. 매달린 복사꽃잎에는 예리한 면도날로 자른 듯한 자국이 있었다. 검기가 아니고서는 나타날 수 없는 형상이었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검기 발출 현상을 확인한 뒤였다. 성준은 서울대학교의 규장각 도서관을 찾아 고문서를 열람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검기를 발출하는 문헌이라도 있는지를 알아볼 작정이었다. 연사흘을 집요하게 훑었지만 그런 문헌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청(淸)나라의 검법을 다룬 고서인 '운검요해(運劍要解)'에서 다음 구절을 발견했다.

   조선 내금위의 검법 수련에서는 검기의 발출이 강조되었다. 특히 이철웅(李哲雄)은 조선 제일의 검객으로서 검법에 있어서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어느 해에 중국의 자객이 내금위에 잠입한 적이 있다. 검기 도법이 실린 돌을 안고 도주하려다가 내금위 병사들로부터 공격당했다. 그러다가 중상을 입고 피를 흘리며 달아나다가 산골짜기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그 골짜기가 경기의 어느 야산 골짜기였다.

   영호로부터 설명을 들은 뒤다. 성준이 거듭 시계를 보더니 영호에게 양해를 구한다. 그런 뒤에 곧바로 몸을 돌려 도곡동으로 향한다.

   성준이 도곡동 신라검 총관에 들어선다. 주현이 기다렸다는 듯 성준을 안내한다. 총관 건물 옆의 기와집 모양의 한식집으로 성준을 데려간다. 회장의 제의로 일행이 식사를 하며 술잔을 나누기 시작한다. 헝요우밍이 먼저 입을 연다. 올해 정월에 성준이 무당산을 다녀간 뒤다. 제자인 친샤이펑이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스승이 제자의 윗도리를 벗겨 보니 두 곳의 멍이 발견되었다. 단순한 멍이 아닌 검기(劍氣)에 의해 혈류가 막혔던 흔적이었다. 스승이 깜짝 놀라 경위를 제자에게 물었다. 놀랍게도 한국인이 본국검을 시연했을 뿐이라고 했다.

   스승은 생각에 잠겼다.

   ‘현대 검술에서 실전(失傳)된 검기를 발출하는 사람이 있다니? 반드시 만나봐야겠다.’

   마음이 정해지자 제자가 받았던 명함을 바탕으로 한국을 찾았다고 한다. 한국에 와서는 성준을 만나기에 앞서서 신라검 총관을 찾기로 했다. 신라검 총관은 중국과 교류하는 유일한 한국의 검술 단체라고 들려준다. 그러다가 우발적으로 신라검 총관에서 검술을 시연하는 성준과 만나게 되었다. 헝요우밍이 한국을 찾은 이유는 성준을 중국의 검도관으로 초청할 의도였다. 경위를 설명하면서 무당산으로 갈 의향이 없느냐고 묻는다. 성준이 고개를 흔들면서 거절의 뜻을 명확히 전한다.

   이번에는 회장이 좌중을 향해 말한다.

   “장 선생님이 시연한 본국검의 원래 이름은 신라검(新羅劍)이었어요. 맥을 계승한다는 차원이라면 장 선생님은 총관에서 일해야 마땅해요. 일단 본인인 장 선생님의 의견에 따르기로 합시다.”

   여인들이 일제히 성준의 눈을 들여다본다. 성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응답한다. 아무래도 검술에 몰두하기는 어렵겠다고. 그러자 여인들이 한숨을 내쉬면서 허탈한 표정을 짓는다. 여인들에게서 가까스로 성준이 벗어난다. 여인들에게서 벗어나자마자 깊은 안도감에 젖어드는 성준이다.

   여인들로부터 벗어난 뒤다. 그 날의 밤이 깊도록 성준은 침실에서 생각에 잠긴다. 성준은 검기의 발출은 결국 상대를 살상하는 것이라 여긴다. 실전된 검기를 복원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을 살상하는 것이라니? 하필이면 사람을 해치는 능력의 복원이라 여겨져 가슴이 답답해진다.

   온갖 상념에 뒤엉켜 좀체 잠을 못 이루었다. 회장의 서릿발처럼 차가운 표정에서 흘러나오는 은밀한 흡인력. 친샤이펑의 온화하고 따사로운 분위기의 호소력 있는 눈빛. 세상을 초월한 듯 달관한 표정의 헝요우밍의 자애로운 표정.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시선이라 여겨지는 성준이다.

   성준이 회장과 중국 여인들을 떠올릴 때면 가슴이 저려 온다. 심장이 마비될 무렵이면 슬그머니 유령(幽靈)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이가 무척 많은 노인을 닮은 유령이다. 유령이 매서운 눈빛을 발하며 성준의 내면을 향해 호통을 쳐댄다.

   “네 이놈! 고작 검기를 빙자하여 사람들을 살상할 궁리나 하다니!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망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어? 덜 떨어진 녀석아! 제발 정신 좀 차리라구.”

   성준이 상념의 타래에 얽혀 끙끙거리다가 마침내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날이 밝았다. 눈부신 빛살이 천지를 내리누르며 쏟아지고 있다. 밤새 번민을 겪다가 마침내 결론을 내린 게 있다. 지압술에 검기를 실어 암 환자의 치료에 나서기로 한다. 굉장히 확률이 희박하지만 그렇게 해 보기로 결론을 내린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기능을 최대한 살리고 싶은 성준이다. 어떤 시련과 난관이 닥쳐도 반드시 이룩해 보리라 작정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곧바로 성준이 서연에게 전화를 건다. 통화한 다음 주말에 양가(兩家) 부부가 고창의 산사를 찾기로 한다.

   마침내 산사를 찾은 날이다. 주지의 동의를 구하여 말기 암환자인 노승들을 병원으로 데리고 간다. 9명의 종양 조직 사진을 모두 촬영시킨다. 그러고는 환자들과 함께 다시 산사로 돌아간다. 성준은 한방 병원을 통하여 지압술을 익힌 전문가이기도 하다. 취미로 시작한 것이지만 경력으로는 십여 년째에 접어든다.

   성준은 환자들의 정수리 부근인 백회혈(百會穴)에 지압술로 기력(氣力)을 주입한다. 매달 하순마다 절을 찾아 기력을 주입하면서 조직 사진을 점검한다. 생명이 경각을 다투는 환자를 제외하곤 서서히 변화가 나타난다. 종양 조직의 크기가 점차 축소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말기에서 허우적대는 노승인 상곡(上谷)의 경우에는 전혀 차도가 없다.

   어느새 산야마다 단풍의 색조가 화려하게 뒤엉키는 11월 하순이다. 정기 방문 일정에 맞춰 성준과 서연의 부부가 고창을 찾는다. 주지가 미소를 머금고 성준 일행을 반긴다.

   승방에 들어서서 방에 환기를 시키고는 암 환자들에게 지압술을 펼친다. 주지가 성준에게 암 환자가 두 명이 늘었다고 들려준다. 검기가 난치 환자의 병든 세포를 고치게 되기를 바라는 성준이다. 벌써 3달 동안의 관측 결과였다. 기력을 주입한 환자의 경우에 종양 세포가 눈에 띄게 축소되었다.

   폐암 말기의, 여든 살의 노승인 상곡(上谷)의 병세를 살필 때다. 너무나 병이 깊어 근래에는 자주 의식을 잃는다고 주지가 들려준다. 성준이 상곡을 대할 때엔 박동이 막 멈춘 상태였다. 성준이 긴급히 상곡에게 인공호흡을 시도한다. 상곡의 가슴을 눌러대며 노승의 입으로 강제로 숨을 불어넣기를 되풀이한다. 미약하나마 점차 박동이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기 시작할 때다.

   나이가 10살인 동자승(童子僧) 둘이 승방(僧房)에 내닫는다. 얼굴이 길쭉한 소년은 심천(深川)이며 둥근 얼굴의 소년은 보원(寶源)이다. 심천과 보원은 근래에 상곡(上谷)으로부터 사미계를 받아 노승(老僧)을 보살펴 왔다.

   산 아래 학교에 다녀온 모양이다. 둘이 쾌활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며 승방에 들어서며 상곡을 부른다.

   “큰 스님, 학교에 다녀왔어요. 몸은 좀 …”

   말을 하다 말고 둘의 표정이 급격히 변한다. 의식을 잃고 방바닥에 쓰러져 누운 상곡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제히 몸을 날려 상곡을 향해 달려든다. 성준이 신속히 제지하며 말한다.

   “잠깐만 기다려라. 잠깐이면 돼.”

   성준이 점차 기력을 우측 손끝으로 끌어 올린다. 그러다가 식지와 중지를 나란히 세워 상곡의 백회혈에 갖다 댄다. 점차 손가락으로부터 기가 빠져 나와 상곡의 몸뚱이를 파고든다.

   백회혈을 거친 기류가 곧장 동맥을 거쳐 허파로 휩쓸려 든다. 두뇌에 강한 충격을 가할 만큼의 격렬한 기파(氣波)가 우르르 몰려든다. 상곡의 허파 꽈리에 섬광이 일듯 전기적 충격이 가해진다. 충격은 미미한 상태에서 점차 격렬하게 허파로 굽이치고 있다. 대략 2∼3분이 경과했을 무렵이다. 상곡의 눈가에 경련이 일기 시작한다. 성준을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일제히 달라진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고 믿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있다. 반면에 설마 변화가 있으랴하고 비웃는 자세로 지켜보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도 일제히 놀란 기색이 역력히 드러난다.

   마침내 상곡이 눈을 뜨면서 몸을 버둥거린다. 그러자 동자승들이 곧바로 상곡을 부축하여 일으켜 앉힌다. 상곡이 거친 숨결을 추스르며 동자승들을 향해 말한다.

   “얘들아, 너희들하고 작별 인사를 못 나누고 떠날 뻔했구나. 내게 이런 기회를 준 장(張) 처사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불도에 몸을 담았으니 부지런히 수행하여 큰 그릇이 되어야 한다. 모쪼록 너희들에게 장도의 발전을 빈다. 이제 너희들을 만났으니 …”

   미처 말을 끝내지도 못한 채다. 상곡의 고개가 푹 꺾이더니 호흡마저 끊기고 만다. 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입멸(入滅)한 거였다. 장내가 갑자기 숙연해지더니 금세 사방에서 울음소리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입멸을 애통해 하는 동자승들의 피 끓는 울음소리가 실내에 터진다.

   “으으흑! 큰 스님! 숨 좀 쉬어 보세요.”

   “흐흐흐흑! 큰 스님요, 눈 좀 떠 보세요.”

   법당 추녀에 매달린 풍경이 파랗게 젖어 쨍그렁거리며 울음을 쏟아낸다. 풍경소리에서 피어나는 음향이 승방을 거쳐 산골짜기를 먹먹한 정취로 휘감는다.

   심천이 가냘픈 어깨를 파들대며 상곡의 목을 껴안고 흐느껴 운다. 어디에 감춰졌던 눈물인지 하염없이 방울방울 떨어져 상곡의 얼굴을 적신다. 보원이 상곡의 뺨에 그의 뺨을 문지르며 뽀얀 눈물을 뿌려댄다. 둘러선 주변 사람들의 눈에도 방울방울 이슬이 맺혀 흘러내린다. 종교를 초월하여 세상을 떠난 이에 대한 작별의 눈물이 번진다.

   동자승들인 소년들에게서 분출되는 눈물. 방울방울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성준이 대할 때다. 성준의 가슴에 시린 칼날이 박히는 느낌이 든다. 마치 자신의 잘못으로 소년들이 애꿎은 눈물을 뿌리는 느낌마저 든다. 이때다. 가슴 밑바닥을 차고 올라오는 서늘한 기류가 느껴진다. 그러면서 문득 산청(山淸)의 산사에서 세상 떠난 어머니의 얼굴이 밀려든다.

   성준 부부에게 드리워진 원천적인 횡액을 방지하느라고 치러진 용왕제 행사에서였다. 새벽에 성준이 어머니를 찾아 법당에 들어섰을 때였다. 벽에 얼굴을 기댄 채 숨져 있었다. 용왕제를 치르기 전에 무녀가 어머니와 성준에게 예견한 대로였다. 용왕제를 치르고 나면 어머니가 생명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무녀가 예견했다. 팔순 중반의 무녀는 무속계의 여황(女皇)이라 불릴 만큼의 신통력의 소지자였다. 벽에 얼굴을 기댄 어머니의 눈가에는 눈물이 말라붙어 먹먹한 느낌이었다. 당시의 검시의는 중첩된 수면 부족으로 인한 심장마비가 사인(死因)이라고 밝혔다.

   소년의 눈물과 어머니의 눈물을 관통하는 슬픔의 너울이 일기 시작한다. 서슬 퍼런 슬픔의 격랑이 성준의 가슴으로 광풍(狂風)처럼 밀려든다. 일시에 가슴에 구멍이 펑 뚫리는 느낌이 드는 찰나다. 성준의 눈과 소년들의 시선들이 맞닿는다. 소년들의 눈빛에서 분사된 슬픔의 너울이 서러운 정감의 포말로 치솟는다. 창졸간에 섬광처럼 감전된 기류에 휩쓸린 듯 성준이 동자승들을 껴안는다. 소년들의 흐느끼는 울음이 백색의 빛줄기로 갈라지면서 풍경소리로 쨍그렁댄다. 사방은 광막한 산안개에 뒤덮여 풍경소리만 아스라이 물결친다.

<200자 원고지 9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