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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지 장치
손 정 모
한기(寒氣)가 유리 파편처럼 살갗으로 파고드는 한낮이다. 해가 바뀐 지 벌써 열 이레째다. 북서풍이 밀려들 때마다 눈가루가 나비 떼처럼 흩날려 소용돌이친다. 근래에 보기 힘든 눈보라가 며칠째 지속되고 있다. 북태평양 고기압과 북서 태평양 기단이 뒤엉켜 쏟아지는 폭설이라고 한다.
대전시 유성구 외삼동 서당골의 ‘관측기술 연구원(觀測技術硏究院)’. 국방과학 연구소에서 남서쪽으로 1.6킬로미터의 거리만큼 떨어진 사설 연구 기관이다. 관측기술 연구원은 세계적인 전자기술을 보유한, 국내의 R그룹 산하 기관이다. 이 기관은 탐지 장치를 개발하는, 세계적인 전자 기술의 연구원이다.
종국(崔種菊)은 3층 연구실 창 밖을 하염없이 내다본다. 그러면서 새벽 2시 무렵에 걸려온 전화의 여운을 생각해 본다.
“나는 국방부 장 국장(張局長)이오. 오늘 실험에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하오. 각하께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지켜볼 것이오. 성공을 비오.”
언제 들어도 얼음 덩어리 같은 한기가 밀려드는 목소리였다.
종국은 잠시 시계를 들여다본다. 오후 2시가 갓 넘은 시점이다. 종국은 다시 상념에 잠긴다.
‘아직도 5시간의 여유는 있어. 이번에 확실히 실력을 보여주어야지.’
마침내 결단이 선 듯 종국이 내부 전화를 든다. ‘탄성파 실험실’과 ‘위성 항법 추적실’로 신호음이 전해진다. 신호가 가자마자 곧바로 성태(尹星態)와 용철(朱容哲)이 종국의 연구실로 들어선다. 종국의 연구실 현판에는 ‘탐지 장치 설계실’이라 적혀 있다.
셋이 원탁에 둘러앉으면서 컴퓨터를 광선 투사기(beam projector)에 연결시킨다. 곧바로 전동 영사막(映寫幕)에는 실험 동영상(動映像) 녹화 자료들이 펼쳐진다. 자료의 영상 장면이 펼쳐질 때마다 셋의 시선이 예리하게 뒤엉킨다.
종국의 머릿속으로 작년에 진행되었던 장면들이 밀려든다. 천리안을 적도 상공에 배치하기 두 달 전인 4월 중순이었다. 연구원 건물에 두 대의 검정색 승용차가 들이닥쳤다. 4명의 사내들이 원장실로 찾아 들어갔다. 사내들이 돌아간 뒤였다. 원장이 전체 6개 연구실 중의 관련 3개 실장들만을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50대 중반의 원장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국가 고위층 인물들이 다녀갔어요. 마침내 국방과학 연구소에서 우리 연구원에 연구 협조를 요청했어요.”
그 때 참석한 실장들은 다들 30대 초반의 과학자들이었다. 다들 미국의 유명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연구원(硏究員)들이었다. 종국과 성태와 용철은 다들 관악 캠퍼스에서 학문을 닦은 동문들이었다. 또한 나이마저 서른한 살의 동갑인 친구들이었다. 셋 다 미혼이며 연구 열정이 높은 과학자들이었다.
이어지는 원장의 말에 3명의 실장들은 귀를 기울였다.
“지난달의 천안함 사건 이후로 국내 선박들의 안전이 걱정거리가 되었어요. 선박에 설치된 탐지 장치의 신뢰도가 문제점으로 떠올랐어요. 그래서 ?.”
그 날 이후부터였다. 3개 연구실 상호간에 밀접한 기술적 교류가 왕성히 진행되었다. 특히 종국과 성태와 용철은 더욱 긴밀히 기술 교류를 했다.
종국이 전동 영사막(映寫幕)의 특정 화면을 정지 상태로 만든다. 적에 의해 교란당한 전파를 정상대로 되돌리는 작업 도면이다. 전파를 교란당하면 위성으로부터 정확한 위치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다. 교란당한 전파를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전파 증폭 장치가 필요하다.
종국이 화면을 바라보며 일행에게 말한다.
“자료의 이 부분이 교란당한 전파의 파동을 나타낸 그림이지? 지금껏 십여 차례나 모여서 개선 대책을 세웠잖아? 이번에는 현장에서 전파를 정상대로 되돌리는 작업까지 마쳐야 하잖아? 국방과학 연구소에서 우리한테 연구를 부탁했을 때는 심각한 상태라고 여겨져. 오늘의 야외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겠니?”
탄성파 실험실장인 성태가 일행을 향해 입을 연다. 종국과 용철이 성태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벌써 작년이 되고 말았네. 작년 8월 23일부터 사흘간 서해의 항법 체계가 교란당했어. 전파 교란으로 인하여 선박들이 위성의 안내마저 받지 못했어. 한국 정부에서는 전파를 교란한 주체가 북한이라고 매스컴에서 밝혔잖아? 한국 정부에서는 당장 선박의 항해에 위험 부담을 안게 되었어. 당장 전파 교란 문제부터 해결해야 돼. 대처하지 못하면 북한이 남한 해역 전체를 마비시킬지도 모를 일이야.”
종국과 용철은 계속해서 성태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전파 교란 문제는 국가 위기 수준에 이를 정도다. 아무리 이지스함인 세종대왕함과 율곡 이이함이 있더라도 비상 상태다. 전파가 교란당하면 레이더와 음파 탐지기의 기능이 마비되고 만다. 말 바꾸면 위성의 안내를 받는 추적 장치들의 기능이 마비된다. 적의 위치를 추적하지 못하면 전투는 이미 패한 것과 마찬가지다. 북한은 이전부터 러시아에서 전파 교란용 신무기를 도입해 왔다. 그러다가 작년 8월에 서해(西海)에서 점검해 보았다. 점검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남한의 전자 유도 장치를 무력화(無力化)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때가 되면 언제든 남한을 선제공격하기로 대책을 세웠을 것이다. 선제공격에 앞서서 대대적으로 전파를 교란시키리라 예상된다. 영사막의 화면을 바꾼 뒤에 성태가 말을 잇는다.
“지금부터 방영되는 동영상은 3개월 전에 서해에서 촬영한 거야. 대략 15분간에 걸친 전파 교란과 대처 장면이 펼쳐질 거야. 실험에는 국방과학 연구소, 항공우주 연구원, 과학기술원 및 해양 연구원. 이들의 연구진들이 우리와 동참했어.”
대형 영사막 위로 두 대의 헬기가 커다란 모습으로 날아든다. 헬기 내부에는 전파 교란 장치가 실려 있다. 헬기 아래로는 해양 연구원 소속의 500톤급 연구선 3척이 이동한다. 전파 교란이 시작되자 3척의 동력선들 내부에서 실험이 진행된다. 녹화된 장면을 천천히 돌리며 성태가 계속해서 설명한다.
“지금 보이는 해양 207호에서는 약화된 전파를 증폭하는 작업이 진행돼. 교란당한 탄성파의 진폭을 키우는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이루어져. 원래 파동을 교란하는 적의 파동을 알아내는 단계가 첫 단계야. 적의 파동을 알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곳의 자료가 필요해. 적어도 시간에 따른 세 곳의 교란파(攪亂波)의 자료가 필요해. 이들 자료를 통해 교란파의 원래 파장과 진폭을 알게 돼. 다음 단계는 교란 파동의 세기만큼의 역파동(逆波動)을 발신하는 작업이야. 이 작업에 이어 감지기에 도달되는 파동을 증폭시키는 작업이 진행돼. 이게 최종 단계야.”
자료의 화면에서는 3척의 연구선이 신속히 원래의 파동을 읽어낸다. 헬기를 통한 연거푸 다섯 차례의 전파 교란이 진행된다. 그 때마다 신속히 원래의 전파를 되찾는 장면이 펼쳐진다. 영사막을 지켜보는 종국의 머릿속에 두 달 전의 일이 떠오른다.
작년 11월 중순이었다. 초겨울의 강풍이 관측기술 연구원의 뒷산자락을 어지럽게 뒤흔들어대고 있었다. 바람이 지나는 길목마다 솔숲과 잡목들이 허옇게 배를 드러내며 휘청거렸다. 기온마저 차가워 산자락의 사물들이 죄다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가벼운 방한복 차림으로 종국이 연구원에서 600미터가량 떨어진 뒷산을 탐색했다. 종국의 머릿속에 잡힌 묘한 영상 때문이었다. 종국의 휴대용 전파 탐지기에 닷새 전부터 괴전파(怪電波)가 포착되기 시작했다. 그것도 일정한 저녁 시간대에 간헐적으로 수신되곤 했다. 종국은 연구원의 장비로 전파의 발신처를 은밀히 추적해 보았다. 서당골에서 600미터가량 북동쪽으로 떨어진 산은 해발고도 201미터인 박산(朴山)이었다.
금요일 저녁 7시 반경이었다. 종국 혼자서 전파 추적기를 꺼내 들고 조심스레 산을 올랐다. 박산의 8부 능선의 지점에서였다. 마침내 전파 발신처를 파악해 낼 수 있었다. 소나무 아래의 반석에 엎드린 사람이 발견되었다. 숨을 죽여 조심스레 다가가다가 쌍안경으로 상대를 살펴보았다. 등산복 차림의 사내임이 드러났다. 쌍안경을 품에 넣고는 조심스레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종국이 바싹 다가설 때까지도 사내는 휴대용 기기를 조작하고 있었다. 마침내 종국이 사내의 곁에 바짝 접근하여 인기척을 보냈다. 사내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공격 자세를 취하며 종국을 노려보았다. 사내는 40대 초반의 얼굴이 뽀얗고 허우대가 큰 러시아인이었다. 이전부터 국내로 은밀히 드나들던 사내임을 종국이 알아차렸다.
사내도 찰나 간에 종국임을 알아차렸다. 사내가 종국을 향해 러시아어로 말했다.
“서로 잘 아는 처지니까 일단은 하산해서 얘기하자구. 여기서는 아마도 우릴 감시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야.”
종국도 곧바로 사내를 향해 응답했다.
“호얀스키, 오랜만이야. 왜 이 곳에서 위험한 행동을 했어? 내가 지리를 잘 아니까 나를 따라 와. 시간이 지체되면 둘 다 위험해질 수 있어.”
잠시 뒤에 둘은 산 아래의 호젓한 음식점에서 마주 앉았다. 둘 다 아주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헤어졌다.
호얀스키(Hoyanskie)가 사라지고 나서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낯선 러시아의 여인이 종국의 연구실로 찾아들었다. 여인은 수수한 외모를 지닌 20대 중반의 처녀로 보였다. 종국이 의아스런 눈빛으로 여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긴장했던 여인의 눈빛이 점차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여인이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으로부터 유창한 한국어가 터져 나왔다.
“호얀스키 씨를 알죠? 그가 촬영한 사진을 통해 종국 씨의 얼굴은 이전부터 알았어요. 오늘도 그 사람 심부름으로 왔어요. 제 이름은 라트비아(Latvia)예요.”
종국의 가슴에 불안한 물결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뭔지 모르게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연구원 건물을 벗어나야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곧바로 부원장에게 적당한 핑계를 둘러대고는 여인과 함께 연구원에서 벗어났다.
호젓한 카페에서 여인과 마주 앉았을 때였다. 여인이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종국에게 내밀었다. 종국이 조심스레 보자기를 풀기 시작했다. 이윽고 종국의 앞에 어떤 전자기기(電子器機)가 드러났다.
물건은 러시아 제품의 이동식 고주파 발신기였다. ‘아침’을 뜻하는 ‘우우뜨라(yTpo)’ 상표의 러시아 전자 제품이었다. 이 전자 상표는 세계적인 정밀도를 자랑하는 제품을 상징했다. 종국은 고주파 발신기의 구조를 흘깃 보고는 신속히 갈무리하며 말했다.
“이 최신 기종(機種)을 북한도 근래에 러시아로부터 수입했단 말이죠? 북한의 도발을 막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요구 조건이 뭐죠? 결코 만만치 않은 조건이라 여겨지는데요?”
여인이 주위를 살짝 둘러보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선수들끼리라 확실히 잘 통하네요. 아무래도 여기서는 기밀 유지가 안 되겠어요. 우리, 다른 장소로 이동해요.”
러시아 여인과 헤어진 뒤였다. 종국은 여인에게서 받은 고주파 발신기를 그의 연구실로 가져 갔다. 여인에게서 건네받은 설계 도면을 꺼내 세밀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전문가의 입장에서 회로의 도면을 훑어본 뒤였다. 종국은 대단히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그런 뒤에 러시아제의 고주파 발진기를 작동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주파수에 따른 전자기파(電磁氣波)를 내보냈다. 연구실에 있던 국산 장비로는 일정한 진동수의 전자기파를 내보냈다. 국산 발신기로 방출되는 전자기파에 러시아제의 발신기로 전자기파를 날려 보냈다. 휘하 5명의 연구원들을 동원하여 종국이 전자기파 교란 실험을 했다. 실험이 다 끝난 뒤였다.
종국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고는 라트비아가 알려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종국의 귓전으로 이내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안녕하세요? 라트비아의 소개로 저한테 전화하는 거죠? 저는 옥경진이에요. 기밀 관계로 아무래도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게 낫겠군요. 장소와 시각을 정해 주시면 곧바로 달려 나갈게요.”
종국이 잠시 생각하다가 장소와 시각을 알려주었다. 여인이 좋다며 쾌히 승낙했다. 기밀이라는 말에 대부도 해안의 호젓한 암벽 아래에서 만나기로 했다. 거기에는 해산물 회를 파는 간이 음식점이 서너 곳 있었다. 차라리 그런 곳이 은밀한 얘기를 나누기에는 적합하다고 여겼다.
통화한 지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종국은 해안 절벽 아래에서 여인을 만났다. 종국의 눈에 띄는 여인들의 얼굴은 너무나 개성이 없어 보였다. 고정적인 눈썹의 모양에 잡티를 제거한 얼굴 피부가 하나같이 비슷했다. 그래서 때로는 절세(絶世)의 미모를 지닌 여인을 만나고도 싶었다. 당장 죽어도 좋으니 미인을 한 번이라도 만나고 싶었던 종국이었다. 하지만 ‘미인(美人)’이란 단어는 전설적인 어휘에 불과함을 느꼈다. 결코 살아서는 영원히 못 만날 존재가 미인이라고 생각되었다.
다섯 명이 겨우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의 음식점이었다. 이동식 천막으로 천장과 벽을 두른 간이 음식점이었다. 바닥에는 합판으로 제작된 앉은뱅이 식탁이 두 개였다. 바닥은 비닐 장판을 깔아 놓은 데였다.
종국이 여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라트비아와는 어떻게 알고 지냈죠? 또한 호얀스키와는 언제부터 알고 지냈어요?”
여인이 주위를 은밀히 둘러본 뒤에 목소리를 낮춰서 대답했다.
“오늘은 탐지기에 대해서만 얘기하도록 해요. 우리한테 닥친 상황이 예사롭지 않거든요. 판단에 조금이라도 착오가 생기면 다 죽을 수도 있어요.”
종국은 여인의 말을 중단시키며 개불과 소라 회를 주문했다. 둘이 회를 먹으며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려진 먹구름 같았던 기밀의 실체가 서서히 밝혀졌다.
은밀히 토해 내는 여인의 얘기에 종국이 귀를 기울였다. 여인은 대전시 유성구의 사설 전자기기 연구소에 근무하는 28살의 처녀였다. 여인의 이름은 옥경진(玉景珍)이며 미국 피츠버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연구원이었다. 여인은 전자파 교란에 대해 예전부터 각별한 관심이 생겼다. 북한이 서해의 선박들을 상대로 전파 교란을 실시하기 훨씬 이전부터였다. 소문으로 러시아 전자 제품의 기능이 탁월하다고 들었다. 그래서 비밀리에 러시아를 드나들며 관련 제품을 구입했다.
구입한 제품을 무사히 국내로 반입하기 위해 중국을 이용했다. 상해의 전자 상가의 주인인 친짜오핑(Chinzzaoping)과는 친숙하게 지냈다. 친짜오핑은 50대 중반의 사내로서 노련한 국제 무역상이었다. 경진이 러시아에서 물건을 구입하면 상해의 친짜오핑에게로 보냈다. 그러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친짜오핑이 경진에게 물건을 보내 주었다. 친짜오핑에게 경진은 중요한 고객들 중의 하나였다. 경진의 얘기를 듣다가 종국이 그녀에게 물었다.
“얼마 동안이나 저희 연구원의 통신망에 교란 시험을 했어요? 두어 달 전부터 관측 기기들이 오작동(誤作動)되곤 했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누군가 외부에서 전자파를 건드리나하고 의심했어요. 그랬는데 오늘 그 현장을 제가 발견하게 되었어요.”
종국의 말을 들은 직후였다. 경진이 말끄러미 종국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확실히 놀라운 감각이시군요. 전파 교란을 시작한 지가 대략 석 달째예요. 교란에 가담한 사람으로는 저를 비롯해서 호얀스키와 라트비아였어요.”
종국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경진이 종국의 술잔에 술을 부으며 말했다.
“오늘이 참 묘한 시기군요. 종국 씨와 저는 친구가 되든지 원수가 되든지를 결정해야 해요. 그렇지 않고는 일이 조금도 진척될 수 없어요.”
종국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경진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종국과 술잔을 부딪치며 둘은 마음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들려준 말들이 종국의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경진이 해안에서 종국을 처음 만난 순간이었다. 경진의 시야가 활짝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러시아와 중국을 수시로 오가던 경진이었다. 그러면서 많은 사내들을 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종국만큼 기품이 있으면서 단아한 자태의 사내는 처음이었다. 종국의 얼굴을 처음 대하는 순간에 가슴이 급격히 뒤설렜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평범하고 수수한 외모임에도 외부로 발산되는 은은한 기품의 향취. 안개 낀 밤중에 야광주를 대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종국의 눈에 비친 경진의 심성은 의외로 좋아 보였다. 충분히 평범한 외모를 초월할 정도라 여겨졌다. 그래서 서서히 경진에게 관심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둘은 서로 마음이 통하는 느낌이었지만 보다 신중을 기하기로 했다. 일주일 뒤의 주말에 재차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50분의 제한된 시간으로 제작된 동영상이었다. 동영상이 종료되자 일행이 원탁에서 서로 마주 바라본다. 종국이 먼저 입을 연다.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와 실험은 성공적이라고 여겨져. 하지만 오후에 치를 해상 실험에서도 성공해야만 성공으로 받아들일 거야.”
위성 항법 추적실장인 용철이 원탁 위에 도면을 펼친다. 도면은 그가 탐지 장치 설계실로 들어올 때 가져온 것이다. 도면에는 한반도 상공의 위성의 궤도가 복잡하게 그려져 있다. 궤도들 중의 한 곳을 가리키며 용철이 입을 연다.
“이게 작년 6월 27일에 쏘아 올린 정지궤도 위성의 궤도야. 지상 고도 36,000미터의 적도 상공에서 한반도를 관측하고 있잖아? 다른 위성들보다는 천리안 위성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 한반도 근해의 잠수함이나 비행기, 선박에 이르기까지 교신의 중추부로 작용해. 그런데 천리안 위성이 보내는 전파를 교란시키면 숱한 문제가 발생해. 천리안이 아닌 다른 위성들의 전파 교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야. 이제 전파 수신 고도에 따른 교란의 해결책을 얘기할게.”
용철의 얘기에 종국과 성태가 귀를 기울인다. 용철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전파를 교란시키려면 새로운 전자기파를 발신하는 발진기가 있어야 한다. 발진기는 전자기파의 진동수에 따라 발진 에너지가 다르다. 전자기파를 멀리까지 내보내려면 진폭을 키워야 한다. 진폭을 키우는 데에 따라 소모되는 에너지가 다르다. 선박이나 항공기의 탐지 장치에서는 일정한 전자기파를 사방으로 날려 보낸다.
발신된 전자기파가 교란되면 정보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교란당한 전자기파를 원상태로 신속히 회복시켜야 한다. 교란당한 전자기파를 회복시키는 설명이 진행될 때다. 종국의 머릿속으로 과거의 상념이 흘러든다.
경진과의 첫 번째 만남이 이루어진 뒤였다. 종국은 경진을 만나기 전에 점검할 부분이 있었다. 그가 소속된 연구원의 정보 누출 상태를 점검하기로 했다. 경진에 의해 모르게 빠져 나간 정보가 있는지를 세밀히 점검했다. 경진이 휴대한 러시아제의 휴대용 고주파 발진기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규모는 소형이지만 성능이 강력한 것으로 알려진 거였다. 그래서 종국의 연구원 정보에 이상이 있었는지를 알아보려는 거였다. 연구원 건물 안팎으로 드나든 모든 전자기파의 이동 통로를 조사했다.
하지만 어떤 정보도 유실된 게 없다는 게 밝혀졌다. 결론적으로 경진에게 별다른 첩보에 관련된 의혹은 없다고 판단했다.
종국이 경진을 세 번째로 만난 것은 한 달 전이었다. 작년 12월 중순의 날씨가 차가운 날이었다. 주말이라 대부도 해안의 벼랑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을 때였다. 그녀도 함께 낚시를 하고 싶다면서 낚싯대를 들고 해안에 나타났다. 낚시질에 있어서는 종국을 오히려 뛰어넘는 기술을 지닌 경진이었다. 종국이 한창 낚싯줄에 신경을 집중할 때였다. 경진이 살그머니 나타나서 뒤에서 종국을 껴안으며 말했다.
“많이 잡았어? 나도 낚싯대를 가져 왔어. 오늘은 해변에서 매운탕을 끓여 봐야겠어.”
종국도 경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한테 안기니까 전기가 마구 통하는 느낌이야. 애초에 친구로 사귀기로 했는데 잘못하다가는 노선이 바뀌겠는데?”
종국의 말이 끝나자 둘이 손을 맞잡고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용철의 설명이 끝났을 때다. 셋이 자리에서 일어나 5층에 있는 탄성파 실험실로 올라간다. 거기에서 직접 이론에 맞춰 실험하려는 취지다. 전파의 전달거리가 짧은 공간에서 실험하려는 취지다. 탄성파 실험실은 학교의 강당 규모다. 전자기파의 반사에 적용시키려고 높이를 십여 미터로 높였다.
실험실에 도착하자마자 성태가 버튼을 누른다. 벽면에 있는 커튼이 일제히 내려가며 유리창을 차단한다. 성태 아래의 일반 연구원 다섯 명이 실험을 준비한다. 한 연구원이 발진 장치로 교란파를 만들어 내보낸다. 실험실 내부에 있는 세 대의 감지 장치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전자기파의 간섭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모니터에서는 복잡한 파형이 그려진다. 다른 파동이 만나 세기가 강해지거나 약해지는 것이 간섭 현상이다. 기존의 파동에 간섭이 일어났을 때 교란된 파동의 파형(波形)을 분석한다.
시간에 따른 진동수와 진폭의 값이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분석된다. 그러면 곧바로 교란파의 파형이 분석되고 교란된 파동이 재생된다. 탄성파 실험실 공간에서 서너 차례나 반복 실험이 이루어진다. 실험은 성공적으로 끝난다. 어떤 변칙 파동이 원파동(原波動)을 교란시켜도 곧바로 원래의 파동을 재현한다.
선임 연구원 셋이 탄성실을 빠져 나올 무렵이다. 오후 4시를 막 넘어서는 시점이다. 셋은 일제히 주차장으로 나가 평택 항으로 차를 몬다. 평택 항에는 해양 탐사선 세 척이 기다리고 있다. 2대의 헬기도 탄성파 실험에 참여할 예정이다.
오후 5시 40분에 배가 평택 항을 떠나 서해로 나간다. 덕적도에서 서쪽으로 80km, 북방 한계선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진 지점이다. 이 지점에서 훈련이 아닌 과학 실험이 행해진다. 해양 연구원의 500톤급 탐사선 세 척이 바다에 배열해 선다. 각 탐사선마다 십여 명씩의 일반 연구원들이 배치되어 있다. 각 배마다 선임 연구원이 한 명씩 배치되어 실험을 지휘한다. 한국의 초계함과 구축함이 북방 한계선 언저리를 순행하고 있다.
두 대의 헬기가 하늘에 떠서 전자기파를 내보낸다. 선박에 딸린 탐지 장치가 내보내는 전자기파를 교란할 용도의 전자기파다. 세 척의 탐사선에서 교란 전자기파가 발신되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러자 탐지 분석실의 연구원들이 즉시 발진 장치를 조작한다. 교란당한 파동을 정상적으로 회복하기 위한 조처를 진행하기 시작한다.
종국도 연구원들의 조작 상태를 지켜본다. 원만하게 잘 진행되어야 할 부분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선박들이 북방 한계선을 넘을지도 모른다. 전자기파가 교란당한 순간부터 위성 항법 장치로부터 안내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국이 연구원들의 조작 과정을 지켜볼 때다. 그의 의식 속으로 2주일 전의 일이 떠오른다. 경진이 종국에게 상세하게 얘기했던 장면들이 머릿속으로 펼쳐진다.
눈발이 서해상에 흩날렸던 올 정월 초사흘이었다. 바다 가득 해무(海霧)로 뒤덮인 오후 2시 무렵이었다. 변산반도 서쪽의 섬인 위도(蝟島)의 남서 해안에서였다. 위도는 변산반도에서 서쪽으로 14km 떨어져 있는 섬이다. 섬의 남동쪽 해변으로 50대 초반의 두 사내가 나타났다. 동백나무와 사철나무로 뒤엉킨 수풀 속으로 두 사내가 나타났다. 경진이 그녀 회사의 남자 동료 연구원과 함께 사내들을 만났다. 사내들이 러시아 말로 경진과 열심히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의 동료 연구원도 아주 유창한 러시아어로 러시아인들과 대담했다.
덩치가 큰 러시아인이 말했다.
“이미 6개월 전부터 계약했는데 부품 공급을 못해 주겠다는 겁니까? 부품을 공급받지 못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기나 해요?”
경진의 동료 연구원이 곧바로 응답했다.
“지금까지 서류와 인터넷으로 충분히 의사를 전달했잖아요? 부품 공급을 못하는 사유를 말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억지를 부리는 이유가 뭐예요?”
덩치는 작지만 키가 큰 러시아인이 짜증스런 목소리를 내뱉었다.
“지키지 못할 계약을 왜 한 건데? 계약을 파기하는 처지에 무슨 잔말이 많아?”
경진이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
“상황이 달라졌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어요? 중국이 한국에게 희토류 금속(稀土類金屬)의 공급을 중단했기 때문이라구요.”
중국과 한국의 기류가 근래에 부쩍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천안함 사건에서부터 비협조적이었던 중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부정적인 시각. 정지궤도 위성인 천리안의 발사, 1500km급 순항 미사일인 현무의 개발. 이런 여러 요인들이 중국의 군사력을 자극했다는 측면이었다. 느닷없이 중국이 일방적으로 희토류 금속의 대한 수출을 중단해 버렸다. 희토류 금속(rare-earth metal)은 스칸듐, 이트륨, 란탄, 루테튬을 포함한 17종의 원소들이다. 지하 매장량이 대단히 적은 반면에 용도가 다양한 원소들이다. 특히 전자 제품 제조의 중요한 재료가 된다.
다혈질의 러시아인 둘이 끝까지 억지를 부렸다. 그러다가 키가 큰 러시아인이 냅다 고함을 질렀다.
“좋아! 우리는 지금 떠나겠어. 오후 3시까지 부품 공급의 응답이 없으면 비상수단을 취하겠어. 할 말은 이게 전부야.”
두 러시아인들은 덩굴 숲을 지나 위도 해안으로 걸어갔다. 경진과 동료 연구원이 망원경으로 사내들의 행적을 주시했다. 해무(海霧)에도 무관하게 장거리를 투시할 수 있는 특수한 망원경이었다. 러시아인들은 위도 부근에서 거룻배에 올라 노를 저어 갔다. 위도 남서쪽 해안에서 서쪽으로 곧장 300미터쯤 저어 갔을 때였다. 수면 위로 잠수함이 떠올랐다. 그러더니 러시아인들이 잠수함으로 신속히 올라탔다. 순식간에 거룻배가 사라지면서 타고 갔던 거룻배만 바다에 떠돌기 시작했다.
경진과 동료 연구원은 신속히 해군과 해양 경찰대에 신고했다. 경진과 동료 연구원은 러시아인들이 밀입국해 왔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랬는데 의외로 러시아인들이 해무를 틈타서 잠수함으로 밀입국해 왔었다. 곧바로 바다에는 해군의 구축함과 헬기가 잠수함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두 대의 헬기가 동서로 교차하면서 교란 전파를 내뿜어댄다. 그럴 때마다 선박들이 표적을 잃고 바다를 표류한다. 선박들이 표류하면서도 북방 한계선의 구축함들을 기준으로 신속히 거리를 조절한다. 선박들이 북방 한계선을 넘게 되면 북침이 되기 때문이다. 북침은 북한의 군사력 도발의 불씨가 되기 마련이다.
세 척의 탐사선 내의 연구원들의 조절 작업은 신속히 이루어진다. 금세 교란 전파의 진동과 진폭의 값을 계산해 낸다. 그리고는 곧바로 위성항법 장치로 선박의 신호를 접속시킨다. 대단히 신속한 처리 작업이 이루어진다. 종국이 바다의 수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이 정도의 대응 능력이라면 전시(戰時)에서도 충분히 승산(勝算)이 있겠어.’
이 때 종국의 머릿속으로 경진이 들려준 잠수함 사건이 떠올랐다.
올 정월 초사흘 오후 3시 무렵이었다. 빠른 속도로 제주도 남쪽의 공해(公海)로 빠지려던 잠수함이었다. 거기에서 항로를 돌려 동해의 공해를 거쳐 러시아로 가려는 거였다. 40분에 걸친 격렬한 해군 구축함들의 추격이 진행되었다. 추격과 동시에 갖은 통신을 시도했다. 그랬음에도 러시아의 잠수함은 교신에 불응하고 달아나기만 했다. 그러다가 제주도 남쪽의 공해로 막 들어서려고 했다.
공해로 접어들기 직전이었다. 구축함에서는 ‘홍상어’로 알려진 어뢰가 발사되었다. 하늘을 날아올랐다가 잠수함 인근 바다에 떨어져서 수중에서 폭파하는 어뢰다. 어뢰가 발사된 지 십여 초 후에 수면으로 물기둥이 치솟았다.
경진으로부터 당시의 정황을 얘기로 전해 들었을 때다. 경진 못지 않게 종국도 형언하기 어려운 안타까움을 느꼈다. 러시아인들을 태운 잠수함이 수중으로 사라진 직후였다. 한국 해군에서는 곧바로 러시아 잠수함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금세 구축함이 동원되고 헬기가 서해 상공에 날아올랐다. 구축함 내부에는 러시아어에 정통한 통역 장교가 올라탔다. 추격하면서 잠수함 내부로 교신을 시도했다. 즉시 도주를 멈추고 조사에 응하라는 전언(傳言)을 계속 내보냈다. 하지만 구축함 내부로 돌아온 회신은 상당히 호전적이었다.
“계속 따라오면 전함(戰艦)을 죄다 침몰시켜 버리겠어. 빨리 되돌아가라니까!”
중령인 함장(艦長)들로부터의 의견을 받아들여 해군 사령부로부터 공격 명령이 하달되었다. 도주하는 잠수함을 향해 홍상어가 하늘을 날아올랐다. 잠수함이 달아나는 근처의 바다로 홍상어가 날아 내렸다. 그런 뒤 수초가 지났을 무렵에 폭발음과 함께 물기둥이 치솟았다.
러시아 측에서 간절히 바랐던 것이 탐지 장치에 사용되는 부품이었다. 이들 부품은 초정밀 전자 기술로 만들어지는 전자 집적회로였다. 이 회로에 사용되는 부품은 희토류 금속원소였다. 이들 재료의 공급은 여태껏 중국에서 제공되었다.
경진은 전자 집적회로의 제작 기술에 있어서 세계적인 권위자였다. 국가 연구기관에서도 과거에 경진을 몇 차례나 초빙하려고 했다. 하지만 경진과 그녀의 회사 경영자와의 유대 관계로 인해 사양했었다. 러시아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경진에게 부품을 공급받아 기술을 확장하고 싶었다. 이런 찰나에 한국과 중국과의 외교 관계가 껄끄러워져 버렸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한국에 희토류 금속원소의 수출을 중단해 버렸다.
본의 아니게 러시아에게 부품을 공급하지 못하게 되었다. 문제는 러시아 협상진의 생각 때문이었다. 경진의 말을 단순한 거절의 뜻으로 오해하여 반감을 드러내었다. 아마도 한국이 기술 제공을 하지 않으려는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잠수함이 격침된 날, 경진이 종국에게 말했다.
“나 때문에 잠수함에 탔던 러시아인들이 수장(水葬)되어 가슴이 아파. 어쨌든 소중한 인명인데 결국은 그 지경이 되고 말았어. 이럴 줄 알았다면 잠수함을 신고하지 말 걸 그랬나 봐.”
종국이 경진을 달래려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괴롭게 생각하지 마. 만약 잠수함을 신고하지 않았다면 너는 지금쯤 수감(收監)되어 있을 거야. 국가 간에 이해(利害)가 엇갈리면 어차피 적이 될 뿐이야.”
종국의 말에도 불구하고 경진이 입술을 깨물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해양 탐사선 1호에서 경적이 울린다. 모든 실험 일정이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소리다. 헬기도 공중에서 두 번을 선회하고는 평택의 기지로 돌아간다. 세 척의 해양 탐사선은 덕적도를 거쳐 회항할 예정이다. 종국이 평택 항에 내리기 직전이다. 탐사선 내부에서 성태와 용철을 비롯한 연구진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다. 종국이 평택 항에 내려선 뒤다. 종국이 시급히 주차장으로 나가 그의 승용차에 올라탄다.
두 대의 헬기와 세 척의 탐사선이 평택에 닿은 뒤였다. 종국은 승용차를 몰고 해변으로 달린다. 경진과 약속한 호젓한 해변에서 검정색 승용차를 멈춘다. 차에서 내린 뒤에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고작 몇 걸음을 옮겨 놓았을 무렵이다. 경진의 흰 색 승용차가 해변에 도착한다. 그러더니 이내 경진이 차에서 내려 종국을 향해 손을 흔든다. 종국이 곧바로 경진을 향해 달려간다. 종국과 경진이 서로 만나 포옹한다. 이내 종국이 경진을 안아들고는 한 바퀴를 선회한다. 그리고는 경진을 살며시 내려놓는다. 이윽고 둘이 서로를 마주 바라보며 가까이 다가선다. 그러다가 서로 손을 맞잡고는 기쁜 표정으로 소곤댄다. 경진이 먼저 종국을 향해 말한다.
“연구소 내의 원격 장치로 해상 실험 장면을 잘 봤어. 아주 성공적인 실험 장면이었어. 정말 너희 연구원에서 확실하게 눈부신 실적을 거둔 것 같더구나.”
종국이 경진의 두 뺨을 어루더듬으며 말한다.
“오늘의 실험이 성공을 거둔 데에는 너의 격려의 힘이 컸어. 너를 어떻게 해 줄까? 고마운 심정을 너의 가슴속 깊이 전해 주고 싶어.”
종국의 얘기를 듣자 경진이 얼굴을 붉히며 종국의 눈을 들여다본다. 둘의 시선과 시선이 만나 뜨거운 기류가 형성된다. 그러다가 강한 인력으로 둘이 서로 바싹 끌어안는다. 달뜬 숨결이 터져 나오면서 둘이 처음으로 입맞춤을 나눈다. 때마침 해변에는 석양이 짙게 드리워져 세상이 자줏빛 물결로 굽이친다. 하늘마저 핏빛으로 타는 저녁놀로 공작의 깃털처럼 바람결에 나부낀다.
지금껏 낮게 속살대던 파도소리가 점차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한다. 기류에 휩쓸리듯 보금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갈매기의 날갯짓이 눈송이처럼 눈부시다. 포옹한 남녀의 귓전으로 발동선 소리가 포근한 기류가 되어 밀려든다.
<200자 원고지 84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