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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색 사슬

                                                                                         손 정 모

   눈 쌓인 산 속엔 인적이라곤 없다. 오솔길마저 눈에 파묻혀 순백의 공간만 펼쳐져 있을 따름이다. 널따란 물무늬 같은 눈의 능선이 한없이 펼쳐져 있다. 절명 계곡(絶命溪谷)으로 이어지는 산악의 능선에는 눈이 엄청나게 뒤덮여 있다.

   지난밤 늦게 태수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는 순간에 느꼈다. 미선이 또 절명 계곡의 골바람 소용돌이에 갇혀서 허우적대고 있음을. 미선은 눈금도 없는 생명줄의 촉수를 곡예를 하듯 더듬어대었을 것이다. 아마도 태수는 절명 계곡의 존재조차도 잊었을 터였다. 헤쳐 나가야 할 문제가 많았기에 전화기를 놓자마자 잠들어 버렸다. 너무나 산적한 번민에 또 하나의 시름을 얹은 꼴이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는 두 자루의 과도(果刀)를 숫돌에 간다. 과도를 갈면서도 눈앞의 솔숲을 노려본다. 서서히 새벽안개를 뚫고 햇살이 눈 덮인 솔숲으로 흘러내린다. 사냥의 방치로 숱한 산짐승들이 산록마다 들끓는다. 산을 타다가 어디에서 산짐승을 만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총기류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터라 과도만이 신변을 보호하는 수단이다. 문명이 발달한 현실에 과도로 산짐승과 생사의 신경전을 벌여야 하다니!

   새된 바람소리에 뒤덮여 사방으로 솔방울들이 떨어져 내린다. 탁탁탁. 둔탁한 음향의 끝자락엔 슬그머니 음산한 분위기마저 내풍긴다.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멧돼지의 발자국 소리로 때때로 들리곤 한다.

   툭툭툭. 아침 안개자락에 휩싸인 채 거대한 멧돼지 한 마리가 달려온다.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덩치를 가늠할 수 있을 지경이다. 세상의 불만 요소들을 단숨에 날려 버릴 듯이 위력적인 기세다. 멧돼지한테는 인간마저도 불만의 대상이 되는 모양인가? 거센 솔바람 소리가 밀려들면서 솔방울 하나가 얼굴에 떨어진다. 그 바람에 달려들던 멧돼지의 환영(幻影)이 일시에 스러진다. 나지막한 안도의 숨을 내쉬며 눈 덮인 능선을 굽어본다.

   미선이 겨울의 언 바람을 뚫고 산막(山幕)으로 들어서던 날의 정경. 눈 더미 같은 세월만 걷어 내면 생생하게 기억에 떠오르리라. 미선이 처음으로 나를 찾은 건 2년 전 12월 중순이었다. 그 날 어스름 때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나의 시선이 산악의 능선을 더듬던 때였다. 30대 초반의 초췌한 행색을 한 여인이 산막을 향해 다가왔다. 나와 같은 여인이면서 나이도 비슷해 보였기에 호기심이 일었다.

   삐꺽거리는 산막의 문고리를 잡은 채 미선이 나를 향해 말했다.

“절명 산장(絶命山莊)이란 곳이 여기에요? 저도 오늘부터 여기에 머물고 싶어요. 제가 싫게 여겨지지 않으면 함께 지내고 싶어요.”

   나는 차분한 자세로 여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세상의 일에 많이 찌들어 기력이라곤 없어 보였다. 하지만 미선의 감추어진 눈빛에 실린 강력한 집념이 내게 느껴졌다. 그 집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늠해 보며 그녀를 동거인으로 받아들였다.

   그 날 나는 내가 거주하는 옆방을 그녀에게 내주었다. 나와 동갑인 31살의 미선. 그 날부터 산막에는 두 여자가 거주하게 되었다. 그 날 나와 함께 거주하면서부터였다. 미선과 나는 서로 말을 놓고 지내기로 했다. 미선은 자신을 화가라고 밝혔다.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를 초월하고 한국화와 서양화의 경계를 초월한다고 했다. 오로지 그리고 싶은 것들을 그리는 화가라고 밝혔다.

   그 날 이후부터 미선과 나는 많은 시간을 공유했다. 그러면서 정황에 따라 많은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러다가 잠자리마저 함께 하기에 이르렀다. 미선과 나의 취향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세계에 관심이 쏠렸다. 은은히 끄는 힘이 대단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나는 눈 덮인 마당을 깨끗하게 쓴다. 겨울이 되면서 산장에는 부쩍 산새들이 많이 찾아든다. 산장을 빽빽하게 둘러싼 솔숲마다 숱한 산새들이 깃들어 산다. 산새들이 평온한 상태로 서식하기에 적당한 환경인 셈이다. 마당가에 비를 세워 두고 산막(山幕)의 마루로 올라선다. 마루는 세 개의 방으로 연결되어 있다. 침실 두 곳과 작업실이 그것이다. 작업실의 공간은 13평이며 미선과 둘이서 사용한다.

   나는 작업실에 들어서며 창문을 활짝 연다. 맑은 공기가 금세 실내를 가득 메운다. 나는 물을 끓여 쌍화차를 마신다. 차를 마시며 중국의 장가계(張家界) 사진을 들여다본다. 오늘부터는 거대한 청옥(靑玉) 원석으로 장가계의 절경을 조각할 작정이다. 작업에 걸리는 시일을 30일로 산정한다. 마침 수요자가 생겼기에 작품만 완성하면 2,000만 원을 받게 된다.

   근래에 옥 공예품의 수요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1년에 서너 작품만 완성시켜도 안정한 생계가 보장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 착수한 옥 공예업이 어느새 9년째에 접어든다. 내 직업은 옥 공예업이며 직업에 대한 자긍심도 대단한 편이다. 국내에서 상설로 열리는 공예전에 출품만 하면 금세 경매로 팔린다. 언제나 수요에 비해 공급이 달리는 형편이다.

   자가 발전기에 연결된 중유의 양을 점검한다. 작업하기에는 충분한 상태라 여겨진다. 전원을 켜고 전동 그라인더에 전선을 연결한다. 전동 드릴로 5개의 기봉(奇峰)의 윤곽을 만들어 간다.

   “연주 씨죠? 미선 씨가 어제 오후에 사라졌어요. 휴대전화의 전원도 끊긴 상태라 도저히 연락이 안 돼요. 혹시 거기 산막으로 가면 제게 연락 좀 해 주세요. 정말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태수의 목소리엔 금세 질식할 듯한 위기감이 실려 있었다. 미선의 안부가 마치 내 손에 달린 듯이 여기는 듯싶었다. 내가 응답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산막으로 달려들 듯한 기세였다.

   2주 전의 석양 무렵의 장면이 불쑥 떠올랐다. 나와 동갑인 태수(閔泰洙)라는 낯선 청년이 산막에 찾아 들었다. 산막에 들어서자마자 미선을 향해 달려갔다. 미선에게 뭔가 구구절절한 사연을 말한 뒤다. 미선과 태수가 잠시 산책을 다녀오겠다며 산막을 나섰다. 서너 시간이 지난 뒤였다.

   미선과 태수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산막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뒤에 그들은 하룻밤을 산막에서 묵었다. 그 이튿날 새벽에 그들은 정다운 표정으로 산막을 떠나갔다. 그 이후로는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그랬는데 느닷없이 지난밤에 태수로부터 미선이 실종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는 순간에 미선이 절명 계곡을 서성이고 있음을 알았다. 절명 계곡에 들어서면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음을 잘 아는 터다. 절명 계곡 자체에 죽음의 기류가 감돌고 있음을 진작부터 알았다. 전화를 받는 순간에 전신에 섬뜩한 한기를 느꼈다.

   창문을 연 상태에서 방진 마스크를 착용한 뒤다. 소규모 구경의 작은 전동 절삭기를 청옥에 갖다 댄다. 섬광이 번쩍번쩍 일며 거대한 옥돌이 형상을 갖춰 나간다. 흘깃 시계를 들여다본다. 정오까지는 두어 시간이 남아 있다. 작업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다. 나는 오로지 예술성을 생각하며 작업에만 정신을 집중한다.

   나보다 두 살 위인 종택(宗澤)의 얼굴이 슬그머니 떠오른다. 그는 나로도 우주 센터의 위성 통제실의 선임 연구원이다. 총각인 그는 처녀인 내게 줄곧 관심을 보였다. 그는 나한테 이미 정식으로 구애도 했다. 그러기에 그는 나의 연인임에 틀림없다.

   종택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그럴 수 없이 어지럽다. 건장한 골격에 수려한 외모. 미국 버클리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공학박사의 연구원. 적(敵)이 없을 정도의 다정다감한 품성. 아무리 따져 봐도 그에게서는 단점을 찾을 수가 없다. 그 어디서건 내가 그만한 연인을 만나기는 어려우리라 여긴다. 그럼에도 내 마음이 종택을 완전히 수용하지 못하는 애로점이 있다.

   단순한 이론 같으면 내가 종택에게 푹 빠져 있어야 한다. 그만큼 종택은 누구에게도 호남(好男)으로 비치는 사내다. 그런데도 내 마음이 자꾸만 번민에 휩싸여 버둥댄다. 내가 종택과 연인이 된 지는 벌써 3년째다. 종택은 결혼까지 들먹일 정도로 절실한 마음으로 나를 대한다. 종택을 볼 때마다 가슴속에서 심한 파동이 인다.

   가공하는 옥의 높이는 80cm이며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1m에 이른다. 거대한 옥의 원석(原石)이다. 5개의 기봉을 만들기 위해서는 옥을 파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동 드릴로 옥의 곳곳에 구멍을 뚫어야 한다.

   내 마음을 통제할 수 없게 만든 현준(賢俊)이 그립다. 대학 2학년 때에 경남 통영에 갯바위 낚시를 떠났다. 여름철의 해상의 기상은 예측하기 어려웠다. 밤중에 갯바위 낚시를 하다가 내가 졸던 중에 실족하게 되었다. 느닷없이 차가운 파도 속으로 내 몸이 추락한 거였다. 갯바위에서 내가 의식을 차렸을 때다. 갯바위 곁에는 현준의 시신이 물속에 반쯤 잠겨 있었다. 깜짝 놀라 전후 사정을 헤아린 뒤였다. 나는 터져 나오는 오열을 금할 수 없었다.

   현준의 수영 실력은 내가 잘 아는 터였다. 현준이 나를 구조하여 억지로 물가로 밀어내고는 탈진하여 사망한 거였다. 서로 연인이 된 지 6개월 만에 생긴 참극이었다. 그 순간에 나는 세상을 잃은 느낌이었다. 나도 덩달아 바닷물 속으로 몸을 날려 버리고 싶었다. 나를 살린 현준의 마음을 생각하여 참아야 했다.

   그 날의 사고 이후로 나의 가슴은 빙벽처럼 얼어붙어 버렸다. 세상의 어떤 따스한 기류를 만나도 따뜻하게 감응하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종택의 경우다. 빼어난 외모와 우아한 덕성과 번듯한 조건을 갖춘 사내가 아닌가? 굳이 단점을 찾으려고 해도 단점이 드러나지 않는 사내다. 그런데도 현준의 상실을 경험한 내게 세상은 참담하게만 비친다.

   대자연은 영원히 내게서 웃음을 거두어 간 느낌이다. 웃음뿐이랴? 두 번 다시는 내게 가슴 설레는 일이 없을 듯했다. 이 세상의 어떤 가옥도 따스한 보금자리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고향인 경북 군위의 부모님께도 편지를 보냈다. 이 세상에서 다시는 딸을 만날 생각을 하지 말라고. 그 편지를 보낸 뒤부터는 옥 공예에만 전념했다.

   나한테는 옥을 만지는 시간이 황폐한 영혼을 추스르는 시간이다. 단단한 옥을 다듬는 일은 내 영혼을 닦는 일이다. 분명히 어떤 면에 있어서도 종택은 훌륭하기 그지없는 청년이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아량까지 충분히 갖춘 종택이 아닌가?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 옥의 명산지를 찾으러 세계를 여행하곤 했다. 중국의 계림과 티벳을 비롯한 중국의 전역을 둘러보다시피 했다. 중국을 드나들며 옥의 명산지를 확연히 파악하게 되었다. 그런 뒤부터는 국제 통상으로 원하는 옥만을 구입하게 되었다.

   내가 주로 구입하는 옥은 장가계에서 산출된 것들이다. 빛이 밝고 광택이 짙으며 은은한 분위기를 드러내는 물품이다. 옥의 원석(原石)을 대할 때부터 그 빼어난 색상에 감탄하곤 한다. 좋은 옥을 대하면 마치 현준을 대한 듯한 느낌이 든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런 느낌에는 변화가 없다.

   9개월 전 4월 중순의 봄철이었다. 종택과 함께 외나로도의 신금 해수욕장을 거닐 때였다. 마침 썰물이 져 해변에는 하얀 백사장이 광활하게 펼쳐졌다. 다른 갯벌과는 달리 모래가 꽉꽉 두껍게 다져진 해변이었다. 장갑차가 달려도 빠져들지 않을 듯이 다져진 갯벌이었다. 해변 가득히 입자가 고운 흰 모래의 갯벌이 깔려 있었다.

   잠시 3개월간 미국에서 머물러야 한다며 시간을 함께 하자던 종택이었다. 미국 연구소에서 미국과 공동으로 진행하는 국책 연구 때문이었다. 출국하기에 앞서서 나랑 시간을 함께 가지기를 원한 종택이었다. 종택에겐 내가 상당히 매력적인 여인으로 비친 모양이다. 그의 눈빛과 목소리가 줄곧 그러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내게 무한한 정감이 담긴 시선을 던지는 그가 내게도 좋았다. 그랬기에 서로의 마음과 몸까지도 열게 되었다.

   “사흘 뒤에는 미국 플로리다주로 떠나. 거기에 가면 석 달 동안은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돼. 우리의 사랑을 영원히 기리는 뜻으로 갯벌 위에 심장을 그리자구.”

   종택과 나는 백사장에서 꼬챙이를 주워 갯벌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두꺼운 테두리를 가진 심장 그림이었다. 그림 아래에 나란히 권종택(權宗澤)과 서연주(徐姸珠)란 이름을 꼬챙이로 깊게 새겼다. 그 날은 바닷바람이 예사롭지 않았다. 온 세상을 휩쓸어 버리려는 듯 바람의 날이 날카로웠다.

   드센 바람결을 맞으면서도 신금 해수욕장 부근의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새벽에 문득 종택이 내게 말했다.

   “지난밤에 새겨 놓았던 우리의 그림을 보고 싶어. 하도 갯벌이 단단해서 파도가 밀려왔어도 남아 있을 거야.”

   종택과 내가 새벽에 갯벌을 찾아 달려갔다. 썰물로 해변은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난밤에 그림을 새겼던 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림의 자취는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잔뜩 안타까운 표정으로 종택이 가느다란 한숨을 연신 내뱉었다.

   너무나 청순한 자태와 고운 마음을 가진 종택이었다. 나는 그의 뺨을 어루더듬으며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새벽이라 하늘과 바다의 경계만이 아슴푸레하게 드러날 따름이었다.

   서서히 5군데의 봉우리 형상이 갖추어지기 시작한다. 봉우리 사이의 옥을 다 쪼아 내려면 상당히 시간이 걸리리라. 인내심을 갖고 도를 닦듯 꾸준히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얼굴에 안구 보호용 안경을 착용한다. 작업 도중에 날아든 파편에 안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드릴이 옥을 깨뜨리며 파고들 때마다 화려한 섬광이 일어난다. 문득 태수의 얼굴이 떠오른다. 미선과 나와 동갑이기도 한 사내다.

   미선과 연인이 되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떠났던 사내다. 미선은 태수에 관해 가능한 한 조금씩의 얘기만 전했다. 마음의 속내가 조금씩 단어를 통해 슬쩍슬쩍 내게로 전해지곤 했다. 태수는 박수의 꿈을 실현시키려 부단히 자신을 갈고 닦곤 했다. 남자 무당인 박수에겐 접신(接神)이 중요한 수련과정이다. 죽은 자의 영혼을 불교 용어로 영가(靈駕)라고 한다. 영혼이나 영가의 진동수와 자신의 진동수를 맞추는 일이 접신 현상이다.

   정신 작용을 일으키는 파동 에너지와 동일한 진동수를 찾는 일. 과학적으로는 주파수 동조(同調) 현상이라 불린다. 박수가 접신이 가능해지면 자신의 두뇌로 타인을 읽게 된다. 타인의 현재뿐 아니라 미래까지도 예견할 수가 있다. 미래의 영역은 신장(神將)이라 불리는 판독 매체로 읽게 된다. 신장이란 현재까지 누적된 정보로 특정인의 미래의 결과를 유추하는 매체다. 무당이나 박수에게 필요한 절대적인 매체다.

   문득 미선이 들려준 얘기가 떠올랐다. 태수가 미선을 알게 된 건 진도의 해변에서였다. 태수가 해변에서 접신 수련을 마치고 돌아서던 길이었다. 진도 해변을 화폭에 담으려던 미선이 태수의 눈에 띄었다. 우연히 둘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태수의 걸음이 흔들거릴 정도로 태수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실제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며 태수가 미선에게 얘기했다고 한다. 또한 미선도 강력한 충격을 받았다고 들려준다. 한 마디로 둘 다 마음에 끌리는 대상을 만난 터였다.

   곧바로 둘은 음식점으로 직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타인의 인생을 꿰뚫어 운명을 예측하는 박수. 그림을 통해 감춰진 정감을 털어내는 화가. 둘 사이에는 상당한 영역의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 날부터 둘은 마음을 열고 연인이 되었다.

   미선에게는 표현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들끓었다. 그래서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지리산의 절명 계곡에까지 오게 되었다. 절명 계곡의 초입에 산막이 자리 잡고 있다. 산막에서 절명 계곡까지는 600여 미터쯤 떨어져 있다. 절명 계곡의 중앙에는 높이 70미터가량의 낭떠러지가 마주 서 있다. 낭떠러지 사이의 간격은 대략 20미터에 이른다.

   낭떠러지 사이에는 2개의 통나무 다리가 허공에 걸려 있다. 계곡으로부터의 높이가 70여 미터에 이르는 위치다. 2개의 통나무를 20여 미터 거리에 어떻게 걸쳤는지 의문스럽다. 하여간 엄연히 2개의 통나무는 절벽 사이를 연결하고 있다. 통나무 다리를 건넌다는 건 엄청난 위험을 내포한 상태다. 건너지는 못해도 절벽을 연결해 놓았다는 상징성이 높게 부각된다.

   미선이 그림으로써도 해결하지 못하는 난제는 그녀에게 번민으로 남는다고 한다. 그런 번민을 해소하려고 미선이 극한 상황에 몸을 맡기려는 듯하다. 미선은 절명 계곡의 통나무 다리까지 걸어가 계곡을 굽어보곤 했다. 70여 미터의 높이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일 정도다. 계곡 아래로 몸을 던질 상황까지 예측하며 고뇌하는 듯하다.

   미선이 계곡을 찾는 빈도가 증가할수록 내게까지 두려움이 전해지곤 한다. 언젠가는 미선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지도 모르리라는 생각마저 든다.

   태수의 유일한 결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과도한 바람둥이 기질이었다. 여자를 안고 있으면서도 가슴속으로는 새로운 여자를 꿈꾸는 습성이었다. 동물 수컷의 보편적인 성향이겠지만 정도가 심하여 문제가 되었다. 바람둥이 성향을 은밀히 조절만 했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으리라.

   절명 계곡을 휩쓰는 바람소리가 한결 음산스럽게 들린다. 계곡 곳곳에 귀기(鬼氣)마저 서릴 정도다. 석양의 햇살이 치솟은 바위 절벽으로 간간히 흩날리곤 한다. 저녁놀 속에 치솟은 계곡의 바위 절벽 위의 통나무 다리. 그 다리 앞에 미선이 서서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다. 통나무 다리로 한 걸음만 내디뎌도 생명이 위태로울 지경이다.

   내가 계곡에 들어서자마자 통나무에 발을 걸친 미선이 눈에 띈다. 자칫 판단을 잘못하면 죽음을 맞을 수도 있는 정황이다. 일체 소리를 질러서는 안 될 것 같다. 미선의 가슴에 내재된 충동적인 성향이 곧바로 작용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판단했다. 일체 소리를 지르지 말고 그녀에게 신속히 접근해야 되겠음을. 위기 상황이라 판단한 순간부터였다. 나는 미선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숨을 헐떡이며 3분가량을 달린 뒤다. 나는 마침내 미선의 바로 곁에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미선도 내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면서 가느다란 미소를 잠시 얼굴에 띠며 말한다.

   “연주야, 여기는 웬 일이니? 산막에 무슨 일이 생겼니?”

   나도 기다렸다는 듯 응답한다.

   “나도 계곡의 경치가 보고 싶었어. 지척의 거리임에도 여기에는 잘 올라오지 못했거든.”

   일단 미선을 통나무 다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부터 별다른 사고가 생길 확률은 희박하다고 여긴다.

   미선이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속삭이듯 말한다.

   “왜 이 계곡의 이름이 ‘절명(絶命)’인지를 확연히 알 것 같아.”

   이렇게 말머리를 시작하고는 계곡의 낭떠러지 꼭대기까지 올라온 사연을 들려준다. 나는 미선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미선의 얘기를 통해 미선의 행적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선의 얘기를 들으면서부터다. 마치 내가 미선이 된 듯 과거의 공간으로 치닫는다.

   2주일 전에 태수와 함께 산막을 떠난 뒤였다. 미선은 줄곧 태수와 함께 변산 해변을 떠돌았다. 태수가 용왕묘(龍王廟)에서 무녀들과 함께 풍어를 기원하는 굿을 하곤 했다. 그러다가 사흘 전에 미선이 태수와 크게 말다툼을 했다. 서로의 자존심의 뿌리를 뒤흔드는 격렬한 말다툼이었다. 너무나 정도가 심한 터라 다시는 화해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미선은 태수를 떠나왔다. 태수 곁을 떠났지만 마땅히 갈 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절명 계곡을 찾아 들어왔다.

   절명 계곡에는 들어왔지만 차마 절명 산장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좋은 일로 태수와 헤어진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낮에만 계곡 언저리를 배회하다가 저녁이면 함양읍으로 내려가곤 했다. 함양읍에 며칠간 민박을 잡아둔 거였다. 오늘도 함양읍을 빠져 나와 계곡을 마냥 배회했다. 그러다가 절명 계곡의 꼭대기까지 오른 거였다.

   꼭대기에 올라서니 세상이 달라보였다. 야속하게도 세상은 미선의 존재에 아랑곳하지 않고 잘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미선의 존재가 없어도 세상은 조금도 불편해 보이지 않아 보였다. 한 마디로 미선의 존재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 세상이라 여겨졌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 세계라니! 느닷없이 세상에 대한 지독한 환멸감이 부풀어 올랐다. 세상을 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자신보다 불우한 환경에 놓였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마저 활기롭게 살지 않는가? 학력이나 건강 상태나 미모로 따져서도 꿀릴 게 없이 살았다. 그랬는데도 세상은 미선의 편이 되어 주지 않았다고 여겼다. 세상에 대한 극도의 환멸감을 느끼게 된 상태였다. 자신에게 관심도 없는 세상에 억지로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깨끗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목숨만 날려 보내면 한없이 자유로워지리라 여겨졌다. 해탈이 딴 게 아니라 목숨을 끊는 게 해탈이라 여겨졌다.

   그래서 몇 시간째 고뇌에 잠겼다가 유서를 써서 품에 간직했다. 혹시라도 자신으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이 의심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미선이 70여 미터의 절벽 꼭대기에 올라섰을 때다. 20미터 떨어진 맞은 편 절벽 사이의 통나무가 눈에 띄었다. 두 개의 통나무가 절벽 사이에 걸쳐져 있었다. 아마도 실제로 누군가 건넌 것은 아닌 듯했다. 절벽을 건널 수 있으리라는 상징성을 부여한 듯했다.

   미선이 절벽에 올라 통나무 다리를 굽어볼 때부터서였다. 어떤 강한 영감 같은 것이 전신을 파고들었다. 처음에는 절벽에서 뛰어내리려고 절벽 꼭대기에 올랐다. 하지만 통나무 다리를 굽어보면서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건너편에서 이쪽까지 내뻗은 통나무 다리가 운명의 돌파구를 제시하는 듯했다. 새로운 운명의 돌파구! 미선에게는 점차 통나무 다리가 새로운 운명의 돌파구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능하다면 인생을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으려던 각오를 새로운 비상의 세계에 집중시키고 싶었다. 새롭게 비상하여 우주와 세상에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이러한 마음으로 계곡을 한동안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문득 절벽으로 올라서는 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나를 만나서 계곡을 찾은 자초지종을 들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미선의 얘기를 듣고 난 뒤다. 일단 미선과 함께 통나무 다리를 벗어난다. 혹시라도 발생할 우발적인 사고를 막자는 취지다. 미지의 불상사를 방지했다는 안도감이 드는 찰나다. 순간적으로 종택의 얼굴이 밀려든다.

   3주 전의 토요일 아침이었다. 종택이 나로도 해변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나로도의 그를 찾아 갔다. 외나로도 서쪽의 염포 해수욕장 부근의 모텔에서였다. 둘이 나란히 욕조에서 샤워를 마치고는 알몸으로 침대에 누웠다. 서로의 체향에 이끌려 둘이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체열을 나누었다. 둘 다 전신에 땀방울을 흘리며 격렬하게 육정(肉情)을 나눈 뒤였다.

   종택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결혼하자고 말했다.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자고 했다. 연인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겠지만 내겐 탐탁지 않은 정황이 연상되었다. 결코 종택 탓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내면에 기인한 원인 때문이었다.

   내면의 괴로움을 추스르기 위해서였다. 나는 종택의 양해를 구하여 모텔에서 나와 해변으로 내달렸다. 종택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공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광풍에 휩싸여 소용돌이치는 숱한 모래 알갱이처럼 스산하게 갈라지는 눈빛이었다. 그의 눈빛을 대하는 순간에는 나 자신마저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나는 연신 진저리를 치며 해변에서 토악질을 해대었다. 더 이상 게워낼 음식물도 없으면서 계속해서 토악질을 해대었다.

   머리에 통증이 일며 전신에 피로가 몰려들었다. 앉아 있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쭈그려 앉아 있을 때였다. 어느새 종택이 달려와서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심신이 괴로운 중에서도 종택이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쪼그린 자세에서 힘들게 일어섰다. 그런 상태에서 내가 종택에게 말했다.

   “종택 씨, 우리 오늘은 여기에서 헤어져. 내 마음이 왠지 자꾸만 흔들리거든. 딱 한 해만 기다려 줘. 마음을 가다듬은 뒤에 당신의 아내가 될게. 내 마음 알겠어?”

   안개 낀 허공을 더듬는 듯한 그의 눈길에서 실망감이 묻어났다. 무척 낙심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종택이 내게 말했다.

   “그래, 충분히 기다려 줄게. 우리는 단지 결혼식만 남겨 두었을 뿐이야. 사랑해!”

   그래서 그 날 종택과 나는 해변에서 헤어졌다.

   나는 미선을 데리고 산장으로 들어선다. 저녁 무렵이라 산안개가 골짜기 가득 피어오른다.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산장의 작업실에 들어선 뒤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저녁 준비를 시작한다. 미선이 밥을 짓고 내가 국을 끓인다. 잠시 후에 둘이 식탁에 마주 앉아 식사를 한다. 시래기 된장국 냄새가 실내에 아늑하게 퍼진다. 서로 마음을 열고 편안하게 대화를 나눈다.

   미선이 태수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태수가 여인들의 운세를 보며 색정을 느낀다고 한다. 단순히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여인들에게 내재된 색정을 자극한다고 한다. 운세를 보러 온 젊은 여인들이 태수에게 금세 매료된다고 한다. 자신들의 답답한 상황마저 망각해 버리고는 막무가내로 태수에게 달려든다고 한다. 태수의 뇌파에는 묘하게도 여인들의 색정이 잘 탐색된다고 한다. 심지어 가정주부들마저 색정이 들끓어 태수의 품으로 달려들 정도다. 하지만 태수는 나름대로 주관을 지녔다.

   여인들의 색정을 다스리는 것도 운세를 다스리는 일환이라 여긴다. 이런 소신으로 여인들에게 내재된 색정을 죄다 발산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태수가 여인들과 뒤엉켜 성교를 하지는 않는다. 상대의 내재된 성적 욕구 불만을 근원적으로 해소시켜 주려고 한다. 그래서 여인들이 태수의 몸에 살갗을 밀착시키는 정도는 눈감아 준다. 성적인 욕구 불만을 다스려 운세가 잘 풀리게 한다는 방식.

   이러한 점이 미선에게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기만 하다. 그래서 미선이 태수에게 정색을 하고 물었다. 운세 풀이에서 성욕 불만의 항목을 빼면 안 되겠느냐고? 태수의 대답은 완강했다. 프로이트도 정신 질환을 성욕 불만으로 분석하지 않았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서양 정신분석학에 있어서의 태두인 프로이트의 견해는 미선도 알고 있다. 결코 태수가 헛된 말을 하지는 않음을 알았다. 하지만 여인들이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태수에게 몸을 밀착하는 정경이 끔찍스러웠다.

   생각할수록 미심쩍은 요소가 적지 않았다. 과연 살갗만 밀착하고 말 것인지? 단 둘이 있는 상황에서 성교한다고 해도 누가 알겠는가? 설혹 성교했다고 하더라도 서로 합의된 의사로 했다면 어쩌겠는가? 절대로 외부에는 비밀 사항으로 유지되리라 여겨진다. 이런 점이 마음에 걸려 미선이 태수에게 불만을 얘기했다.

   한동안은 태수가 인내심을 가지고 차근차근 조리 있게 미선에게 설명했다. 하지만 미선의 관점과 달라서 미선의 불만이 해소되기 어려웠다. 거듭 인내심을 갖고 태수가 미선을 이해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미선은 태수에게 여자들의 성욕 부분은 건드리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성실히

   인내심을 갖고 이해시키려 노력하던 태수였다. 끝내 미선이 그녀의 견해만을 강조하려 들자 둘은 불만이 커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서로의 자존심을 뒤흔드는 발언까지 마구 내뱉기 시작했다. 그러자 둘은 극도로 화가 나서 헤어지고 말았다.

   둘이 헤어지고 난 뒤였다. 태수가 마음을 추슬러 미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미선은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도저히 통화 연결이 되지 않자 태수가 내게 전화를 했다. 그것도 지난밤 늦은 시각에.

   미선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난 뒤다. 객관적인 입장에서도 뭐라고 조언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다. 언쟁의 발단을 알게 되었으면 응당 조언해 주어야 할 입장이다. 하지만 조언할 만한 착상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대로 가만히 있기가 부담스럽다. 뭔가 입을 열어 조언해야만 하겠는데 입이 열리지 않는다.

   어느 순간이다. 내가 가볍게 입을 열 수 없는 근원이 종택임을 깨닫는다. 완전히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종택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구하고 익사한 현준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다. 현준만 살아 있다면 나는 이미 현준의 아내가 되었을 것이다. 현준에게 쏠린 내 연정 탓에 아직도 마음이 표류한다. 얼마나 세월이 흘러야 추슬러질지 기약이 없다. 내가 남한테 조언을 받아야 할 처지가 아닌가? 이런 처지에서 내가 미선을 위해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내가 암담한 심정으로 미선을 바라보며 입을 열려고 할 때다. 미선의 목소리가 먼저 내 귓전으로 밀려든다.

   “미안해. 네 마음도 추스르기 어려울 텐데 나까지 성가시게 굴어서. 억지로 얘기를 하려고 하지는 마.”

   나는 말없이 미선과 손을 마주 잡는다. 이럴 때는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키는 것이 슬기로우리라 여겨진다. 한참 미선의 손을 잡고 있으려니까 예전의 기억이 밀려든다.

   2년 전 겨울 오후였으리라. 절명 계곡에 처음 와서 산장을 둘러볼 때였다. 산장을 이룬 한 채의 오두막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슬레이트 지붕은 곳곳에 금이 가 있었다. 벽돌로 이루어진 벽은 곳곳이 무너져 있었다. 종택과 나는 두 사람의 인부를 사서 일을 시켰다. 무너진 벽돌도 쌓고 슬레이트도 새 것으로 교체했다. 산장 내에 전기와 수도 시설은 갖춰진 상태였다. 건물 내에 보일러도 달아 난방 시설까지 갖추었다. 건물의 잠금 장치도 대폭 보완하여 장기 체류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사흘간에 걸친 공사가 끝났다. 인부들마저 산을 내려간 뒤였다. 그 날 오후에 종택마저 하산하려고 했다. 하산하기에 앞서서 종택이 내게 말했다.

   “꼭 여기서 힘든 생활을 해야겠니? 지금이라도 나랑 나로도로 내려가면 어때? 함께 결혼해서 살자구. 혼자 두고 떠나려니까 가슴이 무거워.”

   가슴이 무겁다던 종택의 말이 진한 여운으로 남았다. 가슴이 무겁다고? 현준 때문에 내 가슴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종택이 생각해 봤을까? 죽은 현준의 몫까지 충실하게 살아야 할 내 입장이었다. 가슴이 무겁다고? 가슴이 무겁다고??

   내가 미선의 손을 놓고는 커피포트의 스위치를 올린다. 이윽고 따뜻한 커피를 다탁에 올려 놓고 미선과 마주 앉는다. 내가 미선의 눈을 들여다볼 때다. 미선도 나의 눈을 말끄러미 들여다본다. 커피를 마시며 둘은 상념에 잠긴다.

   느닷없이 주변의 시야가 암흑세계로 잠긴다. 그러더니 사방에서 바람소리가 휘말려들며 폭설이 쏟아진다. 창 밖을 내다보니 엄청나게 굵은 눈송이가 마구 쏟아진다. 이 때 미선이 입을 연다.

   “누가 이 골짜기를 절명(絶命)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여기에서 죽어 나간 사람들이 과연 있기는 있었을까?”

   미선의 말을 들은 직후다. 나의 전신에 섬뜩한 느낌이 감겨든다. 그러면서 오래토록 얻지 못했던 해답을 얻었다는 느낌에 잠긴다. 문득 불사조에 대한 생각을 떠올린 터였다.

   ‘500년마다 불에 타서 새롭게 환생하는 영물(靈物).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하나같이 불사조가 아닐까? 불사조들끼리는 서로를 관통하는 영혼이 있기 마련이리라. 내 영혼에 현준이 지녔던 불사조의 영혼이 접응되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단지 나만 모르고 안타까움에 버둥대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쳤을 때다. 자연스레 종택의 숨결에서도 현준의 맑은 영혼을 떠올리게 된다. 미선과 태수도 서로 불사조라고만 이해한다면 어떨까? 진실로 서로를 불사조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장벽이 없어지리라 여겨진다. 그래서 내가 슬그머니 미선에게 불사조의 얘기를 꺼낸다.

   내 입에서 불사조라는 말을 듣는 순간이다. 느닷없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떨며 미선이 말한다.

   “묘한 일이야. 네가 말하기 전부터 내게도 불사조의 영상이 나부꼈어. 절명 계곡을 오래토록 선회하며 나를 내려다보는 불사조를 말이야. 어쩜 대자연이 너의 입을 통해 내게 가르침을 주는 모양이야. 나도 네 말에 공감이 가. 태수의 견해마저 충분히 수용할 수가 있겠어. 그가 안타까울 정도로 간절하게 그의 견해를 이해시키려고 한 본질. 그 자체는 순수한 사랑이었지 결코 무분별한 색정의 발산은 아니었어. 내게 분별력을 깨우쳐 주어서 진심으로 고마워.”

   미선의 말을 듣는 순간이다. 내 귀에도 폭우를 뚫고 들리는 불사조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계곡에 들어선 날부터 줄곧 상공을 배회하던 불사조의 울음소리가.

<200자 원고지 8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