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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중해의 바람결

                                                                                         손 정 모

   8월 중순의 지중해 해변이다. 벌써 사흘째의 광풍(狂風)이 해변을 휩쓸고 있다. 풍향마저도 잡히지 않는 매서운 바람결이다. 섬의 동남부에 자리 잡은 라가나스(Laganas) 해변이다. 대다수의 가파른 수직 해안들과는 달리 완만한 백사장으로 연결된 해변이다. 수심이 얕아서 거룻배가 아니면 접근이 어려운 지형이다. 그래서 유람선마저 피해 가는 지형이기도 하다.

   새하얀 백사장이 깔린 해변의 폭은 2km에 이를 정도로 광막하다. 백사장의 폭도 2km에 달하여 백사장의 사방이 아득하기 그지없다. 휘몰리는 광풍에 따라 백사장 중심에서도 모래 바람이 소용돌이친다. 처음에는 단순한 광풍 탓이려니 여겼지만 광풍 탓만은 아닌 듯하다. 광풍이 잦아든 시점에서도 소용돌이치는 모래 바람이 일곤 했기 때문이다.

   사흘 전부터였다.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서쪽에 위치한 섬인 자킨토스(Jakinthos). 반도와는 20km 떨어져 있으며 이오니아 제도에서는 세 번째로 크다. 백사장에는 묘령의 여인이 소용돌이치는 모래 바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얀 전통 의상을 입은 그리스 여인은 28살의 처녀다. 셀디아스(Seldias)라는 여인은 환상적인 미모로도 널리 알려진 상태다. 누구든 그녀를 대할 때면 심장이 터질 듯한 현기증을 느낀다. 이 세상의 미사여구로는 표현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게 세인들의 평가다.

   셀디아스의 시선이 여전히 백사장의 회오리바람에 머물러 있다. 아무리 봐도 뭔가 까닭이 있는 듯한 회오리바람이다. 두 시간 간격으로 십여 분씩의 회오리바람이 일곤 한다. 이전에는 이런 현상이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못했다.

   서글서글한 눈매의 셀디아스가 계속 회오리바람을 지켜본다. 그녀의 시선이 흐려지면서 머리 속으로 낯선 그림자가 일렁대며 밀려든다. 일렁대는 그림자의 형체는 한복 차림의 동양 여인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대나무로 만들어진 관악기를 부는 동양 여인의 모습이 남실댄다.

   저녁 9시 무렵의 전남 외나로도의 나로도해수욕장의 해변. 26살의 하얀 한복 차림의 백지선(白芝鮮)이 대금(大?)을 불고 있다. 지중해 자킨토스 섬의 해변에는 셀디아스가 머물고 있을 시각이다. 지선이 세 시간째 쉬지 않고 대금을 불고 있다. 음률이 너무나 슬퍼서 듣는 이의 심금을 뒤흔든다. 누구든 지나가다가 그녀의 악곡을 듣게 되면 심신이 뒤흔들릴 지경이다. 연주 시간이 16분에 이르는 평조회상(平調會相) 중의 상영산(上靈山)을 반복해서 연습한다.

   음률에 조예가 높지 않은 사람들의 심혼마저도 뒤흔들 듯한 악곡이다. 지선의 명성은 이미 세계적인 유명세를 누리고 있다. 그녀의 이름 하나만으로도 숱한 청중들이 몰려들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선은 대금의 수련에 혼신의 열정을 쏟는다. 잠시 대금 연주를 멈추고 지선이 호흡을 가다듬을 때다. 문득 석 달 전의 일이 지선의 머릿속으로 떠오른다.

   별들이 오색 전구처럼 허공에 매달려 빛을 뿜어대는 지중해의 해변에서였다. 야자수와 종려나무가 군락을 이루는 틈새로 올리브나무가 틈틈이 늘어선 해변에서였다. 언제부턴가 북아프리카 원산의 대추야자와 동양의 당종려(唐棕櫚)나무가 자킨토스에 자리 잡았다. 이들 수목은 비옥한 토질에 밀생(密生)하여 곳곳에서 장관을 이루었다. 아열대 건조 기후의 전형을 보이는 지중해성 기후. 여름이면 고온 건조하여 좀체 비가 내리지 않는 기후였다.

   열기(熱氣)가 백사장 속에서 여전히 들끓을 밤 7시 무렵이었다. 해변 가득 늘어선 종려나무 숲으로부터 클라리넷의 선율이 터져 나왔다. 음률이 한없이 맑고 청아하여 지선의 정신이 번쩍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대금을 연주하면서 무형의 장벽에 부딪혀 답답함을 잔뜩 느낄 때였다. 몇 번이나 듣고 들어도 심신을 매혹시키는 음률이었다. 지선이 음률을 청각에 기억해 두려고 애쓰다가 눈을 뜨니 꿈이었다.

   꿈에서 일어난 뒤에도 기억이 너무나 또렷하여 음률을 악보에 기록했다. 골똘히 정신을 집중시킨 결과로 대다수의 음률을 재생할 수 있었다. 이 날부터 소영은 대금으로 새로운 화음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

   지선이 꿈에서 처음으로 지중해를 본 것은 석 달 전이었다. 아직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이다.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가 본 듯한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누군가 지중해에 데려다 준다면 금세 그 장소를 찾을 듯싶었다. 파랗게 남실대며 굽이치는 바다. 백사장이 펼쳐진 해안을 따라 끝없이 펼쳐진 종려나무와 야자 숲. 그 사이로 숱한 별처럼 깔려 머리를 솟구친 올리브나무들. 생동감 넘치는 아열대숲의 정경이 너무나 생생하게 지선에게 떠오르곤 했다.

   밀림 속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꿈에서 보지 못했다. 하지만 연주자가 남긴 악곡만은 지선이 생생하게 기억했다. 대금으로서는 연주하기 어려운 화음이 곳곳에 깔린 신묘한 악곡(樂曲)이었다. 지선이 기를 쓰고 2주간을 노력하여 악곡을 완전히 연주하게 되었다. 대금에 잘 맞는 악곡으로 전환시켰다. 꿈에서 듣던 클라리넷의 음향보다 훨씬 부드럽고 장중한 느낌이 들었다. 연주를 하면 할수록 절정감과 환희를 느끼게 해 주는 악곡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나기만 하면 틈틈이 악곡을 연주했다. 지선이 그 악곡에 ‘몽환곡(夢幻曲)’이란 이름까지 붙였다. 몽환곡의 연주 시간은 십 분가량이었다. 악곡을 연주할 마음만 지녀도 마음이 그처럼 설렐 수가 없었다. 세상의 만물이 지선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주곤 했다. 특히 악곡을 연주할 동안은 그런 생각이 더욱 강렬하게 파고들었다.

   지선이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손거울로 얼굴을 비춰 본다. 자신이 봐도 감탄스러울 만큼 빼어난 미모다. 어쩌면 인간이라면 다 갖는 착각의 현상이 아닌지도 생각해 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만은 아닌 듯하다. 우선 주변 사람들의 반응부터가 범상한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다들 그녀가 가는 곳이면 탄성을 지르며 그녀를 바라보곤 한다. 심지어 여자들마저도 다들 부러운 시선을 던지며 탄성을 터뜨린다. 아무래도 미모만은 자타가 공인하는 수준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입장이다. 미모가 빼어나다 보니 여기저기로부터 시샘도 많이 받는다.

   빼어난 미모가 반드시 행복감만을 주는 건 아니라고 여기는 지선이다. 가능한 한 자신에게 장점으로 작용하도록 조심스레 노력하는 지선이다. 다시 손거울을 손가방에 넣은 뒤다. 지선이 재차 대금을 입에 가져간다. 다시 몰입의 상태로 몽환곡을 연주할 작정이다. 반복을 되풀이하여 달인의 신경지를 개척할 작정이다.

   한창 연주에 몰입할 때다. 슬그머니 의식의 창으로 한 달 전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대금 수련을 마치고 지선이 잠이 들었다. 눈만 감으면 나타나던 지중해의 장면이 꿈에 자연스레 나타났다. 꿈에서 종려나무 숲으로부터 묘령의 그리스 여인이 나타났다. 몽환곡을 만들 때까지는 꿈에서 만난 적이 없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리스의 여인이었다. 그녀가 클라리넷을 들어 연주하면서 지선에게 말했다.

   “요즘 줄곧 몽환곡은 잘 듣고 있어요. 참으로 음률이 아름다운 악곡이더군요. 클라리넷으로도 화음을 연주하기 어려운 곡이더군요. 하지만 음(音)의 경지에는 수련의 극한점이 있기 마련이에요. 경지를 확인하고 싶거든 그리스의 자킨토스 섬으로 저를 찾아오세요. 제겐 직접 동양으로 건너가지 못할 이유가 있어요.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자킨토스에서 세상의 달인들을 만나고 싶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대한테 이쪽으로 오라고 말하는 거예요.”

   지선은 꿈에서 그리스 여인의 얼굴을 기억하려 애썼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얼굴을 명확히 기억해 내려는 취지였다. 지선은 꿈결에서도 생각했다. 그리스 여인을 만난 것은 뇌파에 의한 감응 탓이라 여겼다. 꿈속의 여인은 실제로 존재하고 지선에게 강한 뇌파를 발출했다고 여겼다.

   꿈에서 깬 뒤였다. 그리스 대사관을 통해 자킨토스의 셀디아스의 존재를 파악했다. 그리고는 인터넷 컴퓨터 화상(畵像)으로 셀디아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화까지 나누었다. 과연 꿈에서 본 바대로 환상적인 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 화상의 셀디아스를 향해 지선이 조만간 자킨토스로 건너가겠다고 약속도 했다.

   꿈에서 깨어난 뒤부터였다. 지선은 영산회상(靈山會上)을 구성하는 9곡을 상세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상영산(上靈山), 중영산(中靈山), 세영산(細靈山), 가락덜이[加樂除只], 삼현도들이[三絃還入], 하현도들이[下絃還入], 염불도들이[念佛還入], 타령(打令), 군악(軍樂). 9곡의 정확한 분석만으로도 음률의 진수를 나타내기에 충분하다고 지선은 생각했다.

   일본 큐슈우(Kyushu) 남동부의 항구 도시인 미야자키(Miyazaki). 지선이 자킨토스의 여인으로부터 뇌파(腦波)로 유혹받던 7월 중순이었다. 26살의 미모의 처녀인 고교 체육 교사인 야스유키. 그녀는 다섯 살 때부터 검법(劍法)을 전수받아 세계적인 검객이 되었다. 워낙 타고난 실력자라 그녀의 명성은 세계에 알려졌다.

   야스유키의 집은 미야자키 항구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재력가인 부모의 덕에 별장에 가까운 그녀의 독립 가옥이 있었다. 전통 기와집에 집 주변으로는 폭이 넓은 연못을 배치한 집이었다. 야스유키의 부모는 그녀의 집에서 가까운 산장(山莊)에 살았다. 지선이 그리스 여인의 뇌파로 시달림을 받을 무렵. 야스유키도 그리스 여인의 줄기찬 뇌파의 유혹에 시달렸다. 야스유키도 다양한 통로로 셀디아스의 존재를 확인했다. 야스유키는 국제 전화로 셀디아스와 구체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야스유키가 8월 초순을 골라 그리스로 건너갔다.

   잠시 상념에 잠겼다가 지선이 대금을 들여다본다. 이미 밤 10시가 넘어선 시각이다. 아쉬움이 남지만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긴다. 지선이 해변의 승용차로 다가간다. 곧바로 차에 몸을 싣고는 천천히 해변을 벗어난다. 지선을 태운 승용차가 해변에서 완전히 벗어난 뒤다.

   해변의 솔숲으로부터 열 살의 허여멀쑥한 소년이 나타나 백사장으로 들어선다. 소년의 손에는 대금이 들려 있다. 소리도 제대로 흐르지 못하지만 대금의 선율이 곧바로 백사장으로 흘러든다. 소년이 대금을 연주하자마자 솔숲 아래 여기저기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지선이 연주하던 음률과는 너무나 다른 음색이며 서툴기 그지없는 선율이다. 하지만 소년은 기를 쓰고 대금을 불고 있다. 비록 부는 소리가 악곡을 이루지는 못하지만 절절함이 대단할 지경이다.

   솔숲 아래 어두컴컴한 그늘 아래에서 잡다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온다.

   “대금의 달인이 또 하나 늘었어.”

   “나이는 어려도 대금으로 발출하는 음력(音力)이 보통이 아냐.”

   “대금의 여자 달인과 소년은 무슨 관계일까? 소년을 불러서 어디 한 번 물어 봐?”

   솔숲 사람들의 목소리와 소년의 대금 소리가 파도 소리에 뒤섞인다. 밤바다를 수놓는 별빛이 더욱 또렷해질 무렵. 솔숲 여기저기서 감동에 젖은 듯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소년이 대금을 열심히 불 무렵의 그리스 자킨토스 섬. 섬의 면적은 402 평방킬로미터이고 해안선의 길이는 123 킬로미터이다. 자킨토스 섬 서쪽의 엘라티아(Elatia) 해변. 구릉(丘陵) 지대를 형성한 석회암으로 인하여 물빛이 연녹색으로 반짝인다. 오후 4시 무렵의 해변이다. 그리스는 한국에 비하여 지형적으로 6시간이 늦은 편이다. 인기척이라고는 거의 없는 지역이다. 해안에는 선착장이 없어서 지나다니는 배들조차 보기 힘든 곳이다.

   전신에 검정색의 도복(道服)을 착용한 동양 여인이 장검(長劍)을 휘두르고 있다. 여인이 칼을 쥐고 흔들 때마다 칼날에서 강한 기력(氣力)이 발출된다. ‘야스유키’라는 이름의 여인은 일본을 대표하는 걸출한 검객(劍客)으로 알려져 있다. 26살의 여인은 다섯 살 때부터 칼을 쥐었다고 한다. 검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대적할 상대가 없다고도 알려진 여인이다.

   초승달처럼 곱게 내뻗은 눈썹에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갸름한 얼굴에 오뚝 솟은 코. 서글서글한 눈매가 단번에 사람들을 매료시킬 듯한 빼어난 미인이다. 칼을 휘두르고 몸을 치솟으며 발길질을 해대는 솜씨가 가히 환상적이다. 몸을 솟구쳐 칼로 상대를 휘갈기는 동작은 관찰하기조차 벅찰 지경이다. 일본에서는 그녀에게 이미 신검(神劍)이라는 별칭을 내린 지 오래다. 지난 십여 년간 그녀를 당해 낸 세상의 검객이 없다.

   “이야앗! 이야아앗!!”

   별안간 야스유키가 기합을 내지르며 검식(劍式)을 펼치기 시작한다. 야마토시대(大和時代: 250-710년)부터 전래되어 왔다는 일본검(日本劍)의 검식이다.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검식이라 기법이 정교하여 가히 위력적이다.

   칼날에 의해 발출되는 무형의 힘이 검기(劍氣)다. 검기는 검객의 정신적인 수련의 도에 따라 위력이 달라진다. 야스유키는 어릴 때부터의 수련으로 검기의 발출에 있어서 경지에 이르렀다.

   야스유키가 백사장에서 다섯 개의 탁구공만한 조약돌을 주워 든다. 돌연 숨을 들이키며 돌을 3미터 높이로 살짝 던져 올린다. 그러더니 칼을 주위로 휘두르며 검기를 싣기 시작한다. 백사장으로 떨어지는 돌을 향해 야스유키가 칼날에 기력을 실어 흩뿌린다. ‘치이익! 치이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조약돌이 차례대로 갈라져 버린다. 갈라진 5개의 돌들이 모래사장에 거의 나란히 떨어져 내린다.

   야스유키가 수련을 마친 뒤다. 그녀는 숨을 추스르며 칼을 서서히 칼집에 넣는다. 몸 주변으로 보자기를 내두르더니 금세 옷마저 도복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는다. 옷까지 갈아입은 뒤다. 칼을 보자기에 싸서 감추고는 야스유키가 해변의 올리브나무 숲으로 들어간다.

   야스유키가 올리브나무 숲으로 들어간 직후다. 야스유키가 사라진 반대편 숲으로부터 다섯 명의 사내들이 나타난다. 다들 40대 중반으로서 체격이 건장하며 험상궂기 이를 데 없다. 얼굴이 가장 넓적한 사내인 칸토르(Kahntor)가 입을 연다.

   “이야, 저 년의 칼 기술이 장난이 아냐. 걸리면 우리 모두 단칼에 사라지겠는걸. 내일 은행 터는 일을 미뤄야 할 것 같애.”

   키가 가장 크고 얼굴이 길쭉한 사내인 제카논(Jekanon)이 나지막이 말한다.

   “헛 칼질은 아무나 하는 것 아냐? 계집애의 헛 칼질을 보고 겁을 먹다니? 왜 자네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마음이 약해져?”

   말하지 않은 나머지 셋의 표정은 저마다 다르다. 하나같이 침통한 표정에 말을 아끼는 듯한 자세에는 공통점이 있다. 일당의 두목인, 체격이 비대한 사내인 탈랑소(Talangseau)가 말한다.

   “우리, 마음을 바꾸도록 하자구. 강도(强盜)로 생애를 유지하기는 인생이 너무 아까워. 야스유키의 제자가 되는 게 어때? 동양 검술의 제자라? 꽤 운치 있을 것 같은데?”

   키는 가장 작지만 근육이 발달한 사내인 샌토간(Santogan)이 곧바로 되받는다.

   “두목, 지금 우리가 장난할 때가 아니잖아? 어디 새파랗게 어린 년한테 검술 지도를 받겠다고 들먹거려? 나이 값을 좀 하게나. 차라리 그 년을 붙잡아서 성의 노리개로 삼는 게 낫잖아?”

   줄곧 침묵하던 사내인 유칸사(Eyoukansa)가 마지막으로 입을 연다. 사내는 무리들 중에서 가장 미남형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내 생각도 그래. 일본 년은 꽤 얼굴이 반반한 편이야. 붙잡아서 발가벗기기만 해도 금세 우리의 성기가 발기할 것 같애. 붙잡아서 우리의 종신 성 노리개로 삼자구. 그래도 우리는 여자들을 다루는 데에는 전문가들이잖아?”

   다섯 사내들의 의견이 순식간에 합의점에 도달한다. 말을 마치자마자 다섯 사내들이 검정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다. 그리고는 하나같이 기다란 쇠파이프를 손에 움켜쥔다. 두목인 탈랑소가 올리브나무 숲을 향해 손짓을 한다. 그러자 사내들은 날렵한 동작으로 야스유키가 머무는 통나무집을 향해 다가간다.

   해변의 올리브나무 숲 속의 통나무집 내부. 실내의 거실 바닥엔 야스유키가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다. 그녀의 곁에는 장검이 놓여 있다. 언제든 바로 쥘 수 있는 위치다. 눈을 감고 있던 야스유키의 머릿속으로 어지러운 뇌파가 잡힌다. 코웃음을 치며 야스유키가 장검을 움켜쥔다. 그리고는 서서히 거실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녀는 누적된 경험으로 알아차린다. 어지러운 뇌파가 잡힐 때엔 반드시 암습하려는 적들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신속히 신발까지 찾아 신고는 출입문 밖으로 나선다. 실내에서 적을 맞아들이면 재물상의 피해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집 밖으로 몸을 드러내자마자 신속히 올리브나무 아래로 몸을 감춘다. 나무 둥치에 몸을 숨긴 채 주변의 정세를 조심스레 탐지한다. 야스유키의 머릿속으로 이내 붉은 점들의 파동이 펼쳐진다. 붉은 점들의 파동은 적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뇌파가 보내는 신호다.

   코웃음을 흘리며 야스유키가 지그시 눈을 감고 거리를 추정한다.

   ‘흐음, 다섯 명이군. 밤도 아닌 시각에 나를 공격하려고 하다니 거의 환장한 수준이군. 가장 가까운 거리가 4미터쯤 되어 보여. 일단 칼등으로 후려쳐 죄다 실신시켜야겠어.’

   마음을 정하자마자 눈을 뜨고는 야스유키가 칼집에서 장검을 꺼내든다. 너무나 잘 닦여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반짝인다. 야스유키가 바닥에서 돌멩이를 두 개 주워 든다. 그리고는 이내 적이 숨은 지점으로 여겨지는 곳으로 돌을 던진다. 적의 위치를 파악하려는 의도로 여겨진다. ‘탁’ 소리를 내며 나무 둥치에 돌멩이가 적중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마자 사내들 다섯이 일제히 쇠파이프를 들고는 여인을 둘러싼다.

   여인이 유창한 그리스어로 사내들을 향해 말한다.

   “가소로운 것들. 내가 누군지나 알고 덤비는 거야? 잘 걸렸어. 너희들을 사로잡아서 평생 내 몸종으로 부리겠어.”

   여인의 말을 듣자마자 사내들이 일제히 허리를 꺾으며 껄껄 웃는다. 그러다가 두목인 탈랑소가 여인을 향해 말한다.

   “우리들을 몸종으로 삼겠다고? 그것 아주 구미당기는 말이야. 사실은 우리도 너를 몸종으로 삼고 싶거든. 누가 몸종이 되는지 겨루지 않을 수가 없겠네? 그런데 너는 혼자고 우리는 다섯인데 괜찮겠어?”

   미남형의 사내인 유칸사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대결을 하면 혹시라도 네 고운 살갗이 찢길지도 모르잖아? 저항하지 말고 순순히 옷을 벗으면 우리가 잘 해 줄게.”

   야스유키가 유칸사를 노려보며 한동안 미친 듯이 웃어젖히더니 말한다.

   “말버릇 하나 고약하군. 하지만, 네 기백은 마음에 들어. 너의 기백만큼 네 물건도 좋은지 모르겠어.”

   또 한 차례 사내들이 허리를 꺾으며 웃음을 쏟아낸다. 거의 발작할 정도의 웃음을 쏟아내며 난리를 친다. 사내들 둘은 얼마나 웃었던지 눈에 눈물까지 글썽인다. 느닷없이 혀가 잘 안 돌아가는 듯한 목소리로 유칸사가 말한다.

   “궁금해? 우선 한 번 보여 줘?”

   야스유키의 얼굴에 차디찬 미소가 서리며 칼자루에 힘이 실린다. 곧바로 칼을 휘두를 형세다. 키가 작은 샌토간이 기습적으로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야스유키에게 선제공격을 한다. 쇠파이프에서 이는 바람 소리가 귓전을 얼얼하게 만들 지경이다.

   그 무렵. 한국 나로도 해수욕장의 언저리에 있는 펜션에서다. 펜션의 열린 창으로는 남해 바다가 장중하게 펼쳐져 있다. 침상에 드러누운 채 지선이 바다를 내다본다. 펜션에 도착한 이후부터 줄곧 대금 소리가 귓전으로 밀려든다. 나로도 해수욕장의 방풍림으로 조성된 솔숲에서 들리는 소리다. 굵게 울려 퍼지다가 약하게 휘감기고 그러다가 다시 강약이 바뀐다. 소리를 들어보니 전문적인 지도를 받은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약의 음조가 하도 자연스러워 경탄스러울 지경이다.

   한동안 선율에 귀를 기울이다가 지선이 마침내 작정한다. 대금을 연주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만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침대 곁에 세워 둔 장검을 휴대한다. 지선은 15년 세월에 걸쳐서 수련한 검도 7단의 검객(劍客)이기도 하다.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본국검(本國劍)의 달인이기도 하다. 총 33개 동작들 중에는 격법(擊法) 12수와 자법(刺法) 9수가 들어있다. 본국검법(本國劍法)에는 칼을 휘두르고 찌르는 공격 동작이 21개가 들어있다. 나머지는 방어 동작과 기본자세로 이루어져 있다.

   비상사태를 대비하여 지선이 칼을 보자기에 싸서 은밀히 들고 나간다. 칼을 휴대하는 다른 이유는 남들이 잠든 밤에 수련하려는 의도에서다. 지선이 본국검을 수련하면서 느끼는 것은 실종된 검기(劍氣)의 발출 방식이다. 진정한 검법이라면 검기를 자유로이 발출(拔出)해야 한다고 여기는 지선이다.

   문헌상으로 전해져 온 것을 현대인들이 추정하여 맞춘 검법. 이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래서 검법을 수련함으로써 실종된 검기의 발출법을 터득하려고 애를 쓴다. 본국검법에 신라 시대의 검기만 실린다면 천하무적의 검법이 되리라 여긴다. 천하무적의 검법. 이것은 모든 검객들이 꿈꾸는 이상향의 실체이기도 하다. 지선도 다른 검객들과 이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마침내 지선이 나로도 해수욕장의 백사장으로 다시 들어선다. 백사장 중앙의 모래더미에 앉아서 소년이 대금을 불고 있다. 대금의 음색으로 봐서 제대로 만들어진 대금임에 틀림없다고 여겨진다. 시골 소년이 들고 나와 불기에는 상당히 고가(高價)인 악기라 생각된다. 소년의 주변에는 분명히 대금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 판단된다. 그러기에 그만한 악기를 들고 와 불겠거니 여긴다.

   지선은 잠시 머리를 흔들어 기억을 더듬는다. 자신의 주거지로부터 100킬로미터 이내의 거리에서는 그런 인물이 없다고 단정한다. 만약 그런 인물이 있었다면 그녀가 몰랐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생각할수록 묘한 의구심을 자아내는 소년이다. 지선은 백사장 주변의 솔숲에 몸을 숨기고 소년을 지켜보기로 한다. 소년의 연고자가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소년은 누가 자신을 지켜보는 줄도 모른 채 연주에 몰입한다. 숨결을 따라 밀려나온 음률이 백사장 곳곳에 섬광처럼 흩날린다.

   지선의 마음이 왠지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백사장을 찾아 나서서 솔숲에 들어설 때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소년의 음률을 가까운 거리에서 듣게 되면서부터 마음이 서서히 흔들린다. 다소 의아스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지선은 소년의 음률에 귀를 기울인다. 조수가 밀려들었다가 빠져 나가듯 선율의 변화가 지선에게는 훤히 읽혀진다. 지선은 점차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듯한 느낌에 빠져든다.

   그리스 라가나스 해변의 백사장에는 석양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석양이 드리워지면 다른 곳보다 땅거미가 일찍 찾아드는 곳이다. 저녁 무렵이 되자 그렇게 지속적으로 일던 회오리바람도 잦아들기 시작한다. 셀디아스가 백사장에 있던 텐트를 걷는다. 그리고는 백사장에 세워 둔 승용차에 텐트를 싣는다. 짐을 모두 승용차에 실은 뒤다. 셀디아스는 운전석 뒷자리에 세워 둔 장검을 슬쩍 훑어본다. 칼을 바라볼 때의 그녀의 눈빛은 예리하기 그지없다.

   무엇을 떠올리는 듯 잠시 눈썹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문다. 그녀의 시선이 바다의 수평선에 잠시 휘몰린다. 그러다가 그녀가 입술을 깨문 채 머리를 흔든다. 아마도 어떤 답답한 상념 때문에 가슴이 답답한 모양이다. 넋이 나간 듯한 눈길을 수평선으로 보내더니 천천히 시동을 켠다. 그녀를 실은 승용차가 서서히 백사장을 빠져 나가기 시작한다.

   셀디아스가 백사장에서 사라진 뒤다. 백사장으로 땅거미가 짙게 깔린다. 그러자 두더지 떼들이 백사장으로 몰려든다. 금세 여기저기서 모래 지형이 불룩불룩 치솟는다. 저녁 무렵이 되자 바람결이 차갑게 변하며 기온이 곤두박질한다. 백사장 주변으로 두더지 떼들이 파서 일구는 골이 물결처럼 퍼진다.

   느닷없이 두더지 떼들이 잠적해 버리듯 백사장의 요동치던 굴곡이 멈춘다. 아무래도 무슨 변동이 감지된 모양이다. 들릴 듯 말 듯한 괴음(怪音)이 백사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모래 속으로부터 일제히 두더지 떼들이 빠져 나온다. 그러더니 일제히 백사장을 벗어나 종려나무 숲으로 내달린다. 단 몇 분 사이에 이루어진 미묘한 변화다.

   8월 초순 무렵이었다. 야스유키는 그리스의 자킨토스 섬의 서쪽 엘라티아(Elatia) 해변에 도착했다. 그녀는 엘라티아 해변의 통나무집을 두 달간 임대했다. 그리스에 온 김에 아예 그리스에서 휴가를 보낼 작정이었다. 햇살이 따가운 낮에는 수영복 차림으로 해수욕을 즐겼다. 서늘한 아침과 저녁 시간이면 매일 다섯 시간씩 검술을 수련했다. 장검을 소지하여 여행할 수 없기에 그리스에서 장검을 주문하여 제작했다. 뛰어난 장인이 만든 작품인 탓에 장검은 야스유키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일주일째 야스유키가 엘라티아 해변에서 검술 수련을 하던 날이었다. 그리스 전역을 떠돌며 범죄를 저지르던 5명의 강도들이 야스유키와 대결했다. 다섯 명의 강도들은 모두 40대 중반의 건장한 사내들이었다. 강도들과 야스유키는 대결하기에 앞서서 조건을 제시했다. 이기는 편이 진 사람들을 몸종으로 삼겠다고. 양쪽은 흔쾌히 동의한 가운데 대결을 벌였다.

   동양 검술의 검기(劍氣)라는 개념이 뭔지도 모르는 강도들이었다. 강도들은 다섯 명이나 되는 사내라는 사실만으로 야스유키를 농락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야스유키가 칼집에서 칼을 빼 든 직후부터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검기라는 무형(無形)의 강력한 힘에 의해 사내들은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일단 땅바닥으로 쓰러진 사내들은 도저히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결국 다섯 사내들은 죄다 기진맥진한 몸으로 야스유키에게 무릎을 꿇었다.

   야스유키는 검술뿐만 아니라 가라테(空手道)의 달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근육도 사내들 못지않게 기나긴 세월에 걸쳐서 단련했다. 그래서 맨손으로도 사내들 몇 명 정도는 동시에 제압할 수준이었다. 강도들은 야스유키를 상전으로 떠받들기로 했다. 언제 어디서건 야스유키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기로 했다.

   강도들은 당분간 자킨토스에 머물면서 강도 행위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확보한 자금은 죄다 야스유키에게 바친 다음에 재분배를 받았다. 야스유키는 강도들의 기둥 마나님이었다. 야스유키가 지나가는 곳에는 강도들이 호위병 노릇을 했다. 야스유키는 그리스 최고의 검객인 셀디아스와의 대결에만 신경을 쓰기로 했다.

   라가나스 백사장에는 더욱 어둠이 깃들어 주변이 깜깜하다. 하늘마저 어둑어둑하여 해변 일대가 암흑으로 뒤덮여 있다. 지나다니는 선박마저 없어서 해변의 백사장은 거의 암흑에 뒤덮인 상태다.

   바로 이 때다. 해변의 종려나무 숲 동쪽과 서쪽으로부터 사람들의 무리가 몰려나오기 시작한다. 양쪽 방향에서 몰려나오는 인원은 각각 30여 명에 달한다. 동쪽으로부터 몰려나온 인원은 정확히 서른두 명이다. 그들 중의 대표자인 듯한 40대 중반의 사내가 고함을 지른다.

   “다들 빨리 정렬해! 저네들이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은 몰랐어. 저들을 오늘 확실하게 박살내야 해. 우리 조직의 존망이 오늘의 대결에 달려 있어.”

   흑표범의 가죽 상의를 입은 사내는 조직 ‘혜성(彗星)’의 부두목인 아르노(Arno)이다. 종려나무 숲의 동쪽에서는 32명의 사내들이 몰려나온다. 혜성의 조직원들이다. 혜성의 전체 조직에는 무술의 달인인 5명의 부두목이 있다. 아르노는 부두목 중에서 3번째 서열로 알려진 실력자다. 숲의 동쪽에서 몰려나온 32명 중의 부두목은 아르노뿐이다. 어느 누구든 그와 대면하여 마음이 편한 사내는 드물 지경이다. 그 누구든 아르노가 분노를 터뜨리면 부쩍 긴장하게 된다. 탁월한 무술 실력에 강력한 통솔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한편 종려나무 숲의 서쪽에서도 33명의 사내들이 몰려나온다. 이들이 속한 조직은 파트라스(Patras)에 본부를 둔 ‘흑룡(黑龍)’이다. 흑룡의 인솔자는 조직에서 4번째 서열로 알려진 실력자인 테나미(Thenami)이다. 테나미가 이끄는 대로 흑룡의 패거리들이 백사장에 벌려 선다. 그들의 눈빛에 실린 매서움이 백사장의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든다.

   두 조직원들이 광활한 백사장에서 4미터쯤의 거리에서 대치하고 있다. 혜성과 흑룡은 그리스 최대의 두 폭력 조직이다. 악명이 높은 만큼 두 조직끼리는 항시 대결이 잦다. 걸핏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칼부림을 해대며 다툰다. 그러다 보니 사망 사고도 비교적 자주 발생하곤 한다. 다부진 체격의 40대 중반의 테나미가 조직원들에게 말한다.

   “누구든 내 지시를 따르지 않고 행동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어. 오늘 싸움에 우리 조직의 운명이 결정될 거야.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저네들을 끝까지 응징해야만 해. 다들 잠시만 기다려.”

   테나미가 목소리를 높여 아르노를 향해 말한다.

   “우리 또 만났구먼. 아무래도 오늘은 우리 둘 중의 하나는 사라지게 될 거야. 어차피 양립할 수 없는 처지라 이해하겠지?”

   아르노가 테나미를 향해 다가서며 응답한다.

   “모처럼 내 마음에 드는 말이야. 유감없이 맞장을 뜨자구.”

   아르노와 테나미가 서너 걸음씩 서로 물러나며 자신들의 패거리들에게로 걸어간다. 곧 부하들에게 공격 명령을 지시하려는 듯하다.

   바로 이 때다. 백사장에서 가까운 올리브나무 숲으로부터 절박한 비명이 연거푸 터져 나온다. 이어서 상당히 소란한 음향이 들려온다. 아르노와 테나미의 시선이 잠시 교차한다. 잠시 둘의 대결 관계를 보류하자는 무언의 의사 교환이 이루어진다.

   백사장에 모여 있던 65명의 사내들이 올리브나무 숲으로 달려간다. 소요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려는 의도에서다. 올리브나무 주변으로는 종려나무와 야자나무가 길길이 자라고 있다. 땅바닥에는 기다란 덩굴 식물인 빈카(Vinca)가 빼곡히 자란다. 다섯 갈래의 하얀 통꽃을 피우는 프라길리스(Fragilis)도 땅바닥을 뒤덮고 있다. 월계수나무와 무화과나무도 빈 곳을 채우며 밀림의 정취를 북돋운다. 백사장의 사내들이 막 올리브나무 숲으로 들어설 때다.

   그리스 북동부의 카발라(Kavala)에서 온 차량 2대가 눈에 띈다. 차량에는 커다란 독수리의 날개가 새겨져 있다. 폭력 조직들 중의 ‘독수리’파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거처가 수시로 바뀌므로 악행이 심하다고 알려진 조직이다.

   묘한 것은 비명 소리는 들리는데 정확한 위치가 잡히지 않는다. 백사장에서 숲으로 달려간 65명의 폭력배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정작 카발라의 차량 가까이에 접근한 백사장의 사내들은 십여 명에 불과하다.

   종려나무 숲의 중앙에는 두 채의 낡은 건물이 있다. 백사장에서 달려온 사내들이 사방으로 흩어진 뒤다. 백사장의 사내들 십여 명이 카발라의 승합차로 다가갈 무렵이다. 승합차를 지키던 20여 명의 독수리파의 사내들이 달려 나온다. 그들은 하나같이 적대감을 띤 눈빛으로 각목이나 쇠파이프를 들고 나온다. 이전에 승합차를 빠져 나갔던 40여 명은 낡은 건물로 달려들었다.

   독수리파의 40여 명의 조직원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낡은 건물을 둘러싼다. 낡은 건물은 오래된 독립가옥으로서 다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건물 내부에서도 자체 경비를 맡은 듯한 사내들이 달려 나온다. 건물 내부의 사내들은 다들 청색 상의를 착용하고 있다. 그들도 손에 각목과 쇠파이프를 단단히 움켜쥔 상태다.

   독수리파의 40여 명과 건물 내부로부터 나온 60여 명이 격돌한다. 서로 상대를 향해 몽둥이로 내리치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날린다. 금세 여기저기서 고함과 비명 소리가 터지면서 핏방울이 사방으로 틘다.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뒤엉켜 사정없이 폭력을 휘두른다.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자칫 목숨을 잃기 십상인 상황이다. 오로지 싸워서 상대를 제압하는 것만이 전부인 사내들의 무리다.

   순식간에 쌍방에 피해자가 줄지어 발생한다. 얼굴의 피부가 찢겨 살점이 떨어진 사내들. 팔과 다리가 부러져 나뒹구는 사내들. 두피가 찢겨 피를 흘리며 달아나는 사람과 뒤쫓는 사내들. 순식간에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며 숱한 부상자가 발생한다. 언제부터 이런 폭력적인 대결이 예정되어 있었는지 생각할수록 아연해진다.

   하지만 대결의 결과는 일방적으로 치우치는 양상을 드러낸다. 독수리파가 거의 일방적인 승리를 취한 편이다. 독수리파의 20여 명이 심하게 다쳐 나둥그러져 있다. 그렇지만 건물에서 나온 60여 명의 사내들은 거의 다 쓰러졌다. 겨우 무사히 달아난 인원은 대여섯에 불과할 따름이다. 독수리파의 사내들은 차가운 눈을 번뜩이며 낡은 건물 내부로 들어선다. 격투가 일어나기 전까지 청색 잠바 차림의 사내들이 머물던 곳이다.

   독수리파들이 건물 내부를 수색한 뒤에는 곧바로 불을 지른다. 금세 화염을 내뿜으며 앙상한 건물이 무너져 내린다. 그런 뒤다. 독수리파의 사내들이 가슴에 숨겨 둔 칼을 빼어 든다. 그런 뒤에 곳곳에 나뒹구는 청색 잠바를 향해 달려든다. 칼로 아예 생명을 끊어 버리려는 듯하다. 신음을 흘리며 나뒹굴던 청색 잠바의 사내들이 기를 쓰고 일어난다. 그러더니만 죽을 힘을 다해 줄달음질친다. 눈에 핏발이 돋은 독수리파가 그들을 놓아 둘 리가 없다. 사력을 다해 달아나는 그들을 독수리파가 집요하게 뒤쫓는다. 땅바닥에 쓰러졌던 청색 잠바들은 어느새 대부분 다 달아나 버렸다. 운수 나쁘게도 청색 잠바의 사내 둘이 붙잡혔다.

   독수리파 사내들 중에도 심한 부상자들이 있다. 너무나 호되게 공격당한 세 사내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다. 독수리파의 사내들 다섯이 부상당한 세 사내들을 즉시 병원으로 옮긴다. 나머지 독수리파의 사내들이 올리브나무 숲 아래로 집결한다. 두 대의 승합차 옆의 광장에서 두목으로 여겨지는 사내가 말한다.

   “요즘은 사냥하기도 무척 어려워졌어. 놈들의 아지트였다고 여겼는데 물건은 어딘가로 다 빼돌린 뒤였어. 다행스레도 미끼 둘이 눈앞에 있으니까 족쳐 봐야겠어. 당장 애들을 나무에 매달아.”

   즉시 대답 소리가 들리며 사내들 다섯이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이내 청색 잠바의 사내 둘을 나무에 거꾸로 매단다. 연이어 무지막지한 고문이 진행된다. 격렬한 고문에 시달리다 못해 두 사내가 입을 연다.

   한편 해수욕장의 서쪽 종려나무 숲으로 달려간 대다수의 흑룡파들. 이들은 숲에 설치된 미로(迷路)에 갇혀 헤매다가 어디론가로 흩어져 버렸다. 숲 속에는 의외로 낯선 구조물들이 많다. 석회암 퇴적층이 침식되면서 생긴 석동(石洞)이 여기저기 뚫려 있다. 석동의 주변에는 철거하다가 그만둔 낡은 시멘트 건물들이 깔려 있다. 이들 낡은 건물들이 범죄인들의 도피처가 되고 있다. 전국을 떠도는 부랑배들이나 마약 밀매 조직이 상습적으로 드나드는 곳이다.

   석동에는 내부에서 길이 서로 얽혀 다양한 통로로 연결된다. 일부는 해안 절벽 아래의 바다로도 연결되어 있다. 입구는 달라도 출구는 같은 곳도 더러 있다. 그 반대로 입구는 하나인데도 출구는 여러 곳인 데도 많다. 흑룡파와 혜성파 무리의 대다수가 석동의 미로에서 헤매다가 흩어져 버렸다. 도저히 더 이상 길을 찾기가 버거웠기 때문이다. 독수리파를 발견하고 뒤쫓아 간 혜성파의 일부마저도 길을 잃었다.

   올리브나무 숲에는 오직 독수리파만이 남았을 따름이다. 포로인, 청색 잠바의 두 사내가 핏물을 쏟으며 비밀을 털어낸다.

   해변의 올리브나무 숲속 지하에는 곳곳에 석동(石洞)이 발달되어 있다. 발달된 석동은 해변에서부터 내륙까지 다양한 곳으로 연결되어 있다. 미로처럼 뒤엉킨 동굴 곳곳이 마약의 은닉처로 사용되고 있다. 밀매단들끼리 비밀 지도를 만들어 마약을 은밀한 장소에 감춘다. 그리하여 당국의 감시로부터 안전하게 벗어난다.

   독수리파에게 붙잡힌 청색 잠바의 사내들도 밀매 조직들 중의 하나다. 흉기를 가진 폭력 조직과도 연계된 밀매 조직이라 한다. 42명의 독수리파 사내들이 일제히 석동의 마약 은닉처를 찾아 나선다. 포로를 앞세워 금세 은닉처에 도착한다. 하지만 이미 마약은 흔적 없이 사라진 뒤다. 도주한 청색 잠바의 사내들이 이미 마약을 가지고 달아나 버렸다. 닭 쫓던 개가 된 심정으로 독수리파의 사내들이 한숨을 내쉰다. 여기저기서 사내들의 수건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족쳐 봐야 이미 끝났군.”

   “에이, 재수 없어.”

   “저것들이 거짓말했을지도 모르잖아? 포로들을 더 족쳐야 되겠어.”

   독수리파의 사내들이 격분하여 사방에서 쑤군댈 때다. 막 포로들을 향해 가혹한 폭력 행사를 하려는 찰나다.

   어디선가 새된 음향이 일시에 석동으로 몰려든다. 들어 넘기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음향이다. 그러면서 마치 소나기가 쏟아지는 듯한 기세로 음향의 강도가 드세어진다. 점차 음향이 밀려들수록 올리브나무의 숱한 나뭇가지들이 부러져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나뭇가지들마다 주렁주렁 매달렸던 푸른 빛의 올리브들도 떨어져 나뒹군다. 푸른 빛으로 길쭉길쭉하게 생긴 올리브들이 땅바닥에 무질서하게 깔려 있다. 술패랭이꽃과 마당비의 재료가 되는 식물인 댑싸리(地膚)의 줄기도 잘려 나뒹군다. 단순한 자연 현상은 아닌 듯한 느낌이 든다.

   독수리파 사내들의 얼굴 표정에 일제히 긴장한 기색이 서린다. 다들 가슴으로부터 칼을 꺼내 든다. 그리고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주변을 노려보기 시작한다. 처음에 미약하게 들렸던 예리한 음향들이 점차 강도가 높아진다.

   사방에서 예리한 음향이 일어 청각을 자극할 무렵. 어쩐 일인지 석동으로부터 쥐 떼들이 몰려나온다. 석동 입구는 물론이고 숲 주변 일대에 쥐들이 들끓기 시작한다. 숫자가 수백을 넘어 수천을 헤아릴 정도다. 다들 어디에 숨어 살았는지 경이로울 정도다. 독수리파의 사내들도 일제히 긴장 상태에 빠진 듯하다. 쥐들이 몰려다니다가 서 있는 사내들의 발등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분명히 이변이 생긴 것은 분명한데 원인이 뭣인지 신비스럽게 느껴진다.

   쥐 떼들을 대규모로 이동시킬 만한 음향의 정체는 무엇일까? 석동의 여기저기로부터 발출되는 음향 배출의 근원은 무엇일까? 독수리파 사내들이 서로의 표정을 살피지만 누구도 시원스레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더욱 궁금증이 증폭되어 주변은 온통 음산한 분위기로 남실댄다.

   밤이 되자 서서히 해변의 바람결이 드세어진다. 파드득거리는 음향을 토해 내며 수목의 잎사귀들이 허리를 굽히며 떨어댄다. 잎사귀마다 날선 바람이 매달려 벌판에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킨다. 깨진 유리병에 철판이 긁히는 듯 날카로운 음향이 고막을 짓뭉갠다. 땅의 곳곳에 잘려 꺾인 나뭇가지들이 수북이 쌓인다. 누가 나뭇가지를 잘라 던지는지 생각할수록 예측하기 어렵다.

   어디선가 고막을 마구 짓이기는 듯한 통렬한 굉음이 마구 쏟아진다. 라가나스 해변의 숱한 석동들로부터 숱한 들쥐들이 떼를 지어 몰려나온다. 그런데 쥐들의 상당수가 안구(眼球)가 터지고 다리가 잘려 허둥거린다. 수시로 ‘휙휙’거리는 소리를 내며 서늘한 바람이 동굴로부터 터져 나온다.

   연이어 야단스런 굉음이 연속적으로 터지더니 싸늘한 광풍(狂風)이 터져 나온다. 그러더니 동굴 속으로부터 사내들마저 상처를 입고 쏟아져 나온다. 동굴로 사라졌던 불량배들이 창자가 터지고 얼굴이 찢겨 쫓겨 나온다. 상처를 입고 내쫓기는 사내들은 혜성과 흑룡 및 독수리파의 불량배들이다.

   양철이 병조각에 긁히는 듯한 귀 따가운 굉음이 터진 뒤다. 전신에 검정 복장을 한 괴인들이 장검을 휘두르며 동굴로부터 나온다. 그들의 칼날이 가리키는 곳마다 잘리거나 부상을 당하곤 한다. 불량배들은 미친 듯 달아나며 고함을 내지른다.

   “동양 검술의 검기(劍氣)가 사람들을 마구 죽여! 검기에 맞기 전에 어서 달아나자고.”

   쉭쉭! 쉬이익!! 요란스럽던 굉음의 근원은 검객들의 검풍(劍風)이 일으킨 음향임이 드런난다. 복면 괴인들이 칼을 휘두를 때마다 무서운 검기가 쏟아져 나온다. 검기에 맞은 사람이나 짐승들의 살갗이 찢기고 피가 흐른다. 사방의 동굴을 휘젓고 다니는 검객들로 인해 부상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흑의의 복면 검객들은 제 정신이 아닌 듯 마구 날뛴다. 그들이 지나는 곳은 어디나 상처 입은 사람들이 비명을 쏟아낸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다. 마라티아스(Marathias)에 있는 대규모의 석회 동굴 내부에서다. 여섯 명의 복면 검객들이 동굴 바닥에서 둘러앉는다. 서서히 복면을 벗는다. 야스유키를 비롯한 다섯 명의 강도들이다. 다섯 사내들은 최근에 야스유키로부터 일본검법을 전수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복면을 쓰고 다니며 수시로 검기 발출 연습을 했다. 복면 검객들이 지나는 곳은 공포의 바다가 되어 출렁인다. 야스유키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면서도 강도들의 수련 과정에 애정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야스유키의 가슴속에는 셀디아스만이 관심사로 존재한다.

   어느새 새벽 1시에 접어드는 시점이다. 나로도 해수욕장의 해변에는 소년과 지선만이 남았을 따름이다. 지선이 솔숲에 숨어서 계속 소년을 지켜본다. 소년이 대금을 불다가 말고 모래사장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린다. 목소리를 낮추어 흐느끼기 시작한다. 흐느끼면서 자세를 낮추다가 급기야 모래바닥에 배를 대고 바싹 엎드린다. 지켜보던 지선의 마음이 급격히 애잔해진다. 무엇이 소년으로 하여금 흐느끼게 만들었는지 궁금해진다.

   지선은 보자기는 풀지 않은 채 검을 들고 백사장으로 들어선다. 음력 날짜를 헤아려 보니 열나흘이다. 눈부신 빛살을 내뿜는 만월(滿月)이 허공에 허허로이 떠 있다. 마침내 지선의 발이 달빛이 쏟아지는 백사장에 들어선다. 극도로 조심하며 지선이 소년을 은밀히 살핀다.

   소년은 이제 기운이 다 빠진 듯 모래에 엎드려 있다. 지선이 서서히 발걸음을 옮겨 소년의 곁으로 걸어간다. 밤 시간이 되자 육풍(陸風)이 사납게 분다. 육지에서 바다로 불어가는 바람을 말함이다. 바람의 날이 얼마나 매서운지 귀가 얼얼할 지경이다. 마침내 소년으로부터 서너 걸음의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다. 그 때까지도 소년은 잠을 자는지 전혀 미동도 없다. 언제까지나 그대로 드러누워 있으려는 듯이 보인다.

   헌데 지선이 소년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서려는 찰나다. 어디선지 돌멩이가 구르는 음향이 지선의 귓전으로 흘러든다. 지선이 움찔 놀라며 칼자루에 손을 갖다 대며 고함을 지른다.

   “누군지 숨어 있지 말고 썩 나와. 상대해 줄게.”

   솔숲에 이는 바람 소리만 드높아졌을 따름. 지선의 말소리에 응답하는 사람은 안 보인다. 소년조차도 지선의 말소리에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그대로 있다. 지선은 완전히 무시당한 느낌이 들어 어깨를 가벼이 뒤흔든다. 지선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차디찬 빛이 섬광처럼 흐른다. 지선이 소년을 향해 입을 막 열려는 순간이다. 소년이 눈물에 젖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지선을 바라본다. 소년에게서 미묘한 눈빛이 읽힌다. 소년은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 태연한 자세다. 그러면서 지선을 향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한다.

   “누나가 대금의 달인이죠? 기다랗게 보자기로 싸서 든 것이 대금인가요? 벌써부터 만나고 싶었어요.”

   지선이 까닭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이 대답한다.

   “이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니? 아니면 오늘 내가 여기로 나올 줄 알고 기다렸어? 궁금해. 네 이름부터 말해 줄래?”

   소년이 엎드린 자세에서 일어나 단정하게 손을 모으고 목례를 한다. 그러더니 지선을 향해 입을 연다.

   “누나, 절 좀 도와주세요. 진작 만나고 싶었어도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

   지선이 소년을 데리고 일단 백사장을 벗어난다. 혹시라도 숨어서 지켜 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까닭에서다. 둘은 마침내 솔숲 아래의 너럭바위를 찾아 마주 앉는다. 지선이 소년의 눈을 바라보며 소년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소년은 다섯 살 때에 해난사고(海難事故)로 부모를 잃었다. 소년에게는 연고자가 없었다. 그 날 이후로 산사(山寺)에 있는 주지승이 소년을 맡아 길렀다. 산사엔 주지승을 제외하고는 다른 승려는 없었다. 공양주 보살마저 없는 사찰이다. 주지승이 사찰 주변의 경작지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 사찰을 운영한다.

   주지승은 법호를 운청(雲靑)이라 하며 63살의 사내다. 그는 소년인 수철(李秀哲)에게 항시 깊은 애정을 쏟고 있다. 운청은 수철을 대하자마자 귀재(鬼才)임을 알아보았다. 장차 무엇을 하더라도 손을 대는 분야의 달인이 되리라 여겼다. 결코 운청이 수철의 앞길에 영향력을 미치고 싶지는 않았다. 수철이 스스로의 안력(眼力)으로 자신의 진로를 개척해 나가길 바랐다. 하지만 근래에 수철의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싶었다.

   운청은 어릴 때부터 불문에 귀의한 덕승(德僧)이다. 청정한 마음으로 기나긴 세월을 수련하며 불도(佛道)를 닦아 왔다. 작은 사찰이지만 시골의 절에 머무는 숭고한 뜻이 있었다. 지극한 마음으로 수행하여 진정한 부처의 경지에 이르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수철이 산사로 뛰어 들어왔다. 수철을 처음 본 순간에 운청은 마음속으로 크게 놀랐다. 수철의 몸은 소년이지만 경지에 달한 성인(聖人)의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감히 수철을 내치거나 거절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여겨졌다. 이런 생각이 들자 수철을 공손히 사찰로 맞아들였다.

   이 날부터 수철은 운청 밑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운청의 배려로 인근의 초등학교에도 다니게 되었다. 일반 가정에서 다니는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수철도 학교 수업에 임했다. 전혀 사찰에 얽매여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운청은 그만큼 수철과 대화를 자주 나누며 수철에게 신경을 썼다.

   운청은 승려 생활을 하면서 체력 단련의 차원에서 무술을 수련했다. 선무도(禪武道)라는 사찰에서 전래되는 전통 무술이었다. 기력(氣力)을 향상시키고 내장 기관의 활력을 증진시키는 무술이었다. 무술을 수련하다 보니 다채로운 능력에까지 연결됨을 느꼈다. 어떤 대상에 마음만 써도 기력이 곧장 발출되곤 했다. 이전에는 결코 체험하지 못했던 영역이었다. 어떤 대상을 떠올리기만 해도 상대의 움직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무술 전문가들이 얘기하는 감지 능력이라는 거였다.

   운청이 향림사(香林寺)의 법당에 앉아 눈을 감고 있을 때다. 수철을 떠올리자 백사장에 쓰러져 있는 수철의 영상이 머릿속으로 펼쳐진다. 게다가 낯선 여자가 수철의 곁으로 다가가는 영상까지 밀려든다. 운청이 이마를 찌푸리며 마음을 추스르자 머릿속의 영상이 사라져 버린다. 수철을 재차 떠올리자 여인이 수철에게로 접근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멀리 떨어진 거리라 여인의 세세한 얼굴이나 복장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지만 대략의 나이와 형체 정도는 간파할 수 있을 정도다. 뇌파(腦波)에 의한 탐색 과정 중의 하나다.

   뇌파에 의한 탐색에는 많은 에너지 소모가 따른다. 30초 이상은 영상을 포착하기 어렵다. 금세 머리에 피로감이 와 닿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뇌파 수련자들인 무녀(巫女)들과는 경우가 다르다. 무녀들은 1시간을 넘길 정도로 영상 탐색 능력이 탁월하다. 운청은 무술을 수련하다가 우발적으로 뇌파에 의한 탐색 기능을 터득했다. 그랬기에 전문적인 수련자들인 무녀들과는 상황이 달랐다.

   운청은 잠깐씩 일렁이는 탐색 기능에 의존해서라도 수철을 살피고 있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위기 상황이라 여겨져 곧바로 승용차를 몬다. 종단에서 내려준 주지 전용의 차량이다. 수철이 잘 가는 곳이 나로도 해수욕장임을 아는 운청이다.

   십여 분쯤 지난 시각이다. 해변에 운청의 승용차가 도착한다. 승용차에서 운청이 막 내리는 순간이다. 해변의 솔숲에서 20대 중반의 불량배 셋이 처녀를 겁탈하려고 달려든다. 처녀가 연신 울먹이는 목소리로 불량배들에게 사정을 한다. 제발 그냥 좀 보내 달라고. 불량배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엉큼한 미소를 교환한다. 처녀는 미니스커트 차림의 20대 초반으로 보인다. 불량배들은 다들 덩치가 우람하며 인상이 우락부락한 편이다.

   불량배 중의 하나가 처녀의 입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땅바닥으로 쓰러뜨린다. 그 순간에 처녀의 몸에 부딪힌 돌 부스러기들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처녀가 발버둥질을 치자 다른 사내가 손바닥으로 뺨을 연거푸 후려친다. 처녀가 저항을 멈추자 사내가 스커트 밑으로 손을 밀어 넣는다.

   이를 지켜본 승려가 곧바로 불량배들에게로 달려가며 몸을 솟구친다. 시원스런 앞차기 동작에 이어 왼팔의 수도가 바람을 가른다. 사내 둘이 턱과 목을 맞아 땅바닥으로 나뒹군다. 남은 사내를 향해 승려가 몸을 솟구치며 뒤돌려 차기를 한다. ‘퍽’하는 소리가 일며 안면을 발꿈치에 맞은 사내가 실신해 버린다. 승려는 추가적인 주먹질과 발길질을 불량배들을 향해 퍼붓는다. 불량배들을 저항 불능의 상태로 만든 뒤다. 주위를 둘러보니 처녀는 기회를 찾아 이미 달아나 버렸다. 승려는 달아나는 불량배들을 버려 둔 채 솔숲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그런 어느 순간이다. 불량배들이 쓰러진 지점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다. 해변의 솔숲 너럭바위에 앉아 있는 수철과 여인이 눈에 띈다. 고목의 나무 둥치에 몸을 숨긴 채 수철과 여인을 지켜본다. 수철이 뭔가 얘기를 하고 있으며 여인은 가만히 듣고 있다. 운청에겐 의아심이 인다. 평소에 이야기라곤 좀처럼 하지 않던 수철이다. 그런데 낯선 여인 앞에서 무슨 얘기가 저렇게 늘어졌을까? 어쩜 쉬지도 않고 이야기를 줄줄 쏟아내는지 놀라울 정도다.

   운청이 여인을 조심스레 살펴본다. 말로만 듣던 천하 절세의 미인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처럼 빼어난 미인을 본 적은 없었다. 생각할수록 놀라워 입을 다물 수 없을 지경이다. 말로만 전해지던 선녀의 모습이 바로 저런 것이겠구나 싶을 정도다. 눈이 시릴 만큼 하얀 한복 차림인 여인. 혹시 이야기 속의 여우가 둔갑한 것은 아닌지 머리가 어지럽다.

   소년이 거의 이야기를 끝냈을 때다. 여인과 소년은 다시 백사장으로 나란히 걸어나간다. 보름에 가까운 달이 눈부신 달빛을 흩날리며 둘을 맞는다. 둘은 짧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백사장의 중앙으로 걸어간다. 거기에서 소년이 재차 대금을 꺼내 불기 시작한다. 대금의 선율이 유려하게 흐르다가 어느 극한점에서 휘감겨 흐느적거린다. 여인의 눈빛이 반짝인 건 바로 이 때다. 여인은 보자기로 감쌌던 장검의 칼등으로 소년의 대퇴부를 후려친다. 후려치기 시작하자 연속적으로 후려친다. 소년의 입에서는 자지러질 듯한 비명소리가 백사장으로 터져 나온다.

   이 장면을 바라보던 운청이 깜짝 놀라 백사장으로 달려들며 고함친다.

   “거기 잠깐만 멈추세요!”

   여인이 힐끗 승려를 바라본다. 하지만 칼등으로 소년의 대퇴부를 후려치는 동작은 멈추지 않는다. 소년도 자지러질 듯한 비명소리를 연거푸 쏟아내며 백사장에서 허청거린다.

   이윽고 여인의 곁에까지 온 승려가 몸을 솟구치며 여인에게 달려든다. 아마도 기다란 칼을 싼 보자기를 빼앗으려는 의도로 여겨진다. 달려드는 승려를 보고도 여인은 태연하게 소년을 후려친다. 소년은 쉴 새 없이 비명소리를 터뜨린다. 소년의 비명소리가 밤하늘을 마구 뒤흔든다. 솔숲에 머물던 뭇 새들마저 달아나 버릴 정도다. 승려가 칼을 빼앗으려고 여인의 오른팔을 향해 발길질을 한다. 차는 발길질의 맵시가 대번에 무술의 달인임을 드러낸다.

   날카로운 음향을 일으키며 승려의 오른발이 여인의 손목을 걷어차려고 한다. 여인이 팔을 움츠리더니 왼손의 수도로 승려의 발목을 내리치려고 한다. 날렵하면서도 힘이 실린 동작이다. 승려가 혀를 내두르며 즉시 허공에서 몸을 뒤집는다. 승려가 몸을 뒤집는 순간이다. 여인이 몸을 옆으로 돌리며 곧바로 승려의 오른팔을 붙잡으려고 한다. 여인의 손이 막 승려의 팔에 닿을 무렵이다. 승려가 자세를 낮추며 몸을 옆으로 돌리며 여인으로부터 벗어난다.

   백사장에서 눈부신 접전의 동작이 십여 차례 순식간에 치러진다. 마침내 승려가 여인의 팔에 팔목을 붙잡혀 백사장으로 내동댕이쳐진다. 쓰러지는 승려의 모습을 지켜보며 여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다.

   “대단한 선무도의 권법이군요. 스님처럼 완숙하게 쓰는 사람을 여태 못 만났어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저를 공격한 이유는 알겠거든요. 잠시만 제 설명을 들어주세요.”

   승려는 여인을 나포하려다가 오히려 내동댕이쳐졌기에 상당히 자존심이 상한 표정이다. 하지만 금세 마음을 가다듬으며 웃는 얼굴로 여인에게 합장하며 말한다.

   “보살님의 솜씨가 너무 대단해서 제가 당해낼 수 없었어요. 저 애의 보호자는 접니다. 저 애의 비명소리가 들려서 달려 왔으니 해명해 주세요.”

   여인이 잠시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아, 그러셨군요. 제가 명확히 설명 드릴게요.”

   승려는 여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소년의 대금 곡조에서 흐트러짐이 발생하는 것은 기파가 불완전한 탓이다. 파형이 매끄러운 음파를 발산하려면 날숨 동작이 원만해야 한다. 날숨 동작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흐트러지는 원인이 따로 있다. 그 원인은 혈액의 내부 순환 계통에 장애가 생긴 탓이다. 칼등으로 대퇴부를 후려갈겨 정맥혈을 자극하면 영구적으로 해소된다고 들려준다. 다소의 통증이 수반되더라도 상처가 생기지 않기에 계속 후려갈겼다고 말한다.

   말을 마치자마자 여인이 소년을 향해 말한다.

   “어때? 칼등으로 맞은 곳이 많이 아파? 정말 많이 아파서 비명소리를 크게 질렀니?”

   소년이 수줍은 듯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한다.

   “처음에만 아팠어요. 그 뒤로는 아프지 않았어요. 그랬는데도 계속 소리를 질렀던 건 날숨의 능력을 재려는 측면이었어요. 맞을 때마다 확실히 숨의 배출 능력이 향상된 기분이 들었어요. 기분만 그랬는지 다시 한 번 대금을 불어 확인하고 싶어요.”

   여인과 소년의 말을 듣자 승려의 표정이 확연히 달라진다. 사뭇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 역력히 드러난다. 소년이 곧장 대금을 입에 갖다 대고 불기 시작한다. 천 겹의 안개더미를 떠밀어 보내는 듯한 장중한 선율이 흘러나온다. 소년의 입에서 어쩌면 그렇게도 장중한 선율이 흘러나올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승려와 여인은 물론 대금을 부는 소년마저도 놀라는 눈치다. 누구보다도 놀란 건 소년이다. 여태껏 땀을 흘리며 장벽을 넘겠다고 허둥거렸는데 뜻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소년이 감사의 뜻을 나타내려고 백사장에서 여인에게 엎드려 절을 한다. 여인이 근엄한 자세로 소년한테서 절을 받는다. 승려도 여인에게 감격에 찬 감사의 말을 건넨다. 여인이 다소곳이 허리를 굽혀 답례의 인사를 한다. 여인은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더니 이내 백사장을 떠나 버린다. 여인이 사라질 때까지 황송한 표정으로 소년과 승려가 여인을 지켜본다. 이윽고 승려도 소년을 차에 태우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8월 중순이 끝나려는 시점이다. 3주간 연속적으로 지선은 몽환(夢幻)의 세계를 접한다. 눈만 감으면 그리스의 자킨토스 섬이 나타난다. 지중해가 자랑하는 그리스의 빼어난 명승지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쪽의 섬으로서 풍광이 수려하기로 너무나 유명한 곳이다. 자킨토스를 관광하지 않은 사람은 지중해를 말하지 말라고 할 정도다. 북으로는 파랗게 가라앉은 이오니아 해(ionian sea)가 있다. 서쪽과 남쪽으로는 시야가 탁 틔어 지중해가 송두리째 굽이치는 정경이다.

   잠만 들면 자킨토스 섬에서 묘령의 여인이 지선에게 눈웃음을 친다. 그리고는 클라리넷을 꺼내 중후한 음량의 깊이를 들려준다. 그리고는 장검을 빼들어 검법을 펼친다. 장면의 마지막은 너희 나라에도 이만한 검법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유혹한다. 어떤 날은 강압적인 표정으로 그녀에게 무릎을 꿇어야 한다며 야단이다. 이틀 정도 꿈이 되풀이될 때에는 개꿈이려니 여겼다. 사흘째 같은 꿈을 꾸면서 셀디아스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입수했다.

   셀디아스는 확실히 타고난 절세적인 검술과 음률의 달인임이 밝혀졌다. 그래서 셀디아스가 온 세계로 뇌파를 날려 실력자들을 부른다고 했다. 마침내 지선에게도 그 여인을 만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그래서 8월 하순에는 그리스행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그리스로 건너가기에 앞서서 지선은 본국검법에 관한 연구를 많이 했다. 대금 연주곡도 자세히 분석하여 그리스의 여인과 대결해 보리라 작정했다. 비행기 표를 예매한 뒤다. 지선은 틈만 나면 소년인 수철을 불러 그녀의 연주법을 전수했다. 검법도 소년에게 상세하게 전수해 주었다.

   혹시라도 모를 그녀 자신의 사망 사고를 예측한 대책이다. 지선은 주변에 친척이라고는 없는 외로운 신세다. 그래서 유사시를 대비하여 자신의 모든 재능을 수철에게 전수해 주었다. 수철은 천품(天品)이 뛰어나 단시일에 그녀의 기량을 다 물려받았다. 그러면서도 겸손한 품이 지선에게는 아무래도 타고난 달인으로 느껴진다. 지선은 비행기를 타기에 앞서서 유서까지 작성했다. 그리하여 8월 하순에는 나로도를 떠나 그리스로 향할 작정이다.

   9월 초순의 날씨가 쾌청한 날이다. 야스유키는 강도들 중의 탈랑소가 셀디아스로부터 받아 온 답신을 들여다본다. 다음 날 낮 11시에 라가나스 해변에서 대결하자는 내용이다. 야스유키가 탈랑소에게 셀디아스에 대한 도전장을 보낸 데 대한 답신이다. 강도들을 호위병으로 거느린 채 야스유키가 엘라티아의 백사장으로 향한다. 거기 백사장에서 검정 도복으로 갈아입은 후에 검술 수련을 시작한다. 수련이 진행되는 다섯 시간 동안 사내들은 경호하느라고 미동조차 없다. 수련이 끝나자마자 사내들이 일제히 한숨을 쉬며 야스유키에게로 달려간다.

   어느새 하루해가 새롭게 떠올랐다. 자킨토스 남부의 라가나스 해변에서다. 오전 11가 되었을 때다. 백사장에서 장검을 든 채 기다리던 두 여인이 서로에게로 달려든다. 야스유키는 곧바로 일본검법을 펼치기 시작한다. 셀디아스는 그리스 전통 검법인 스파르타 검법을 펼치며 맹렬히 공격한다. 내재된 무형의 강력한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동양의 검술이다. 검풍(劍風)에 휩쓸릴 때마다 울부짖는 듯한 파공음(破空音)이 들린다. 자칫 기선을 제압당할 듯한 위기감을 느끼며 셀디아스가 전력을 기울인다.

   백사장 십여 미터 이내의 공간이 모래 바람으로 소용돌이친다. 적이 어디쯤 있는지 위치조차 파악하기 힘들 정도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야스유키와 셀디아스는 전력을 다해 장검을 휘두른다. 실수하게 되는 순간에 목숨을 잃게 되어 있다. 둘 중의 하나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다. 누구든 상대가 죽을 때까지 대결하자고 야스유키가 도전장을 보냈기 때문이다. 생명을 건 검법의 시연장(試演場)이며 죽음을 부르는 결투장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를 죽여야만 한다. 결투에 앞서 둘은 그렇게 약속했다.

   결투를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날 무렵이다. 둘 다 얼굴과 몸 전체에 땀을 흘리며 발악을 한다. 그런 중에서도 검기를 많이 발산한 야스유키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이대로 가다가는 셀디아스의 장검에 목숨을 잃으리라 야스유키가 예상한다. 끝까지 겨루다가는 자신의 발언으로 목숨을 잃게 생겼다.

   야스유키는 장검을 휘두르며 생명의 가치를 얼핏 생각한다. 이대로 죽는다면 무척 억울하다고 여긴다. 어쨌든 살아나야겠다고 작정한다. 야마토 시대에 전해진 최상의 검기를 발출할 작정이다. 이 검기에 휩싸이면 무조건 상대는 생명을 잃게 된다. 절대로 상대가 검기를 피할 길은 없다고 여긴다. 또한 검기를 발출한 자신도 죽게 되어 있다. 이 사실을 부인하지 못하는 야스유키다.

   이제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 검기를 발출하려고 할 때다. 어디선지 낯선 여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백사장으로 와 닿는다.

   “둘 다 당장 멈추세요. 멈추지 않으면 둘 다 죽어요!”

   말과 함께 어마어마한 세력의 검풍(劍風)이 백사장으로 휘몰아친다. 야스유키와 셀디아스. 두 여인들은 검풍을 맞자마자 동시에 3미터가량 몸뚱이가 치솟았다가 곤두박질친다. 여인들 둘 다 의식을 잃고 만다. 검풍이 가라앉자 백사장으로 몸을 드러낸 사람은 지선이다. 조금 전에 지선이 사용한 검식(劍式)은 본국검법(本國劍法)의 발초심사(撥艸尋蛇)다. ‘발초심사’란 풀을 젖혀서 숨은 뱀을 찾는다는 의미를 지닌 검식이다.

   전체 33세(勢)로 이루어진 동작 중의 12번째에 해당하는 동작이다. 비틀어 찌른 칼을 뽑아내어 잠시 왼쪽 어깨에 올린다. 그랬다가 곧장 우측 하부로 칼을 내려 베는 검식(劍式)이다. 검기(劍氣)의 축적은 칼을 뽑을 때에 이루어진다. 그러다가 칼을 내려 벨 때에 자신의 검기가 상대에게로 발출된다. 반복적인 기공(氣功) 수련과의 연계가 없이는 높은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대략 이십여 분의 시간이 흐른 뒤다. 지선에 의해 야스유키와 셀디아스가 의식을 되찾는다. 둘 다 쓰러지기 직전을 떠올리다가 몸을 떤다. 만약 지선이 둘의 대결을 중지시키지 않았다면 둘 다 죽었으리라.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야스유키와 셀디아스다. 그녀들은 마음속으로 이미 지선에게 굴복한 상태다. 대결을 중지시킬 만한 검술은 야스유키와 셀디아스도 지니지 못한 까닭이다. 둘은 대결하지 않고서도 무조건 지선에게 마음속으로 굴복해 버렸다.

   이제 명실상부한 검(劍)의 달인은 지선으로 결정된 셈이다. 사선(死線)까지 떠밀렸다가 살아난 야스유키와 셀디아스는 지선의 말에 따르기로 한다. 야스유키는 음률에 대해서는 수련하지 않았으니 라가나스 해변에서 떠나겠다고 한다. 지선과 셀디아스는 백사장을 떠나가는 야스유키에게 손을 흔들어 전송한다.

   자존심이 강한 야스유키가 눈물을 글썽이며 백사장을 떠난 뒤다. 지선이 셀디아스에게 제안한다. 사흘 뒤에 관악기를 사용해서 음률의 대결을 하자고 말한다. 지선은 대금(大?)을, 셀디아스는 클라리넷을 사용하기로 약속한다. 정확히 사흘 뒤의 오후 다섯 시에 백사장에서 대결하기로 한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내심으로 탄성을 터뜨린다.

   ‘어쩜 저리도 얼굴과 몸매가 환상적으로 아름다울까?’

   ‘아무리 그리스의 여인이라지만 전설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미녀로군.’

   둘은 자연스레 악수를 하고는 발걸음을 돌려 헤어진다.

   어느새 사흘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오후 다섯 시의 라가나스 백사장은 눈부시게 하얗다. 마침내 지선과 셀디아스가 백사장의 중앙에 자리 잡고 앉는다. 둘은 5미터 거리만큼 떨어져 서로 마주 앉는다. 지선이 먼저 셀디아스에게 말한다. 음률의 대결에 있어서는 이상적인 화음의 형성이 핵심이라고 밝힌다. 하지만 서로의 악기에서 발출되는 음률이 뒤엉키기 십상이라고 들려준다. 이럴 경우엔 음파끼리의 간섭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고 말한다. 간섭 현상이 일어나면 에너지의 기복이 급격히 커진다고 알려준다. 과학 현상을 말하는 거라고 밝힌다.

   셀디아스가 눈빛을 빛내며 귀를 기울인다. 계속해서 지선이 설명한다. 음파의 에너지는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하기에 외상(外傷)보다는 내상(內傷)을 입히기 쉽다고 들려준다. 인체의 내장(內臟)을 이루는 것은 약한 점막(粘膜)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파동 에너지에 의한 부상은 내상이 외상보다 크다고 들려준다. 혹시 대결하다가 몸이 불편하면 무리하게 끝까지 버티지는 말라고 충고한다.

   마침내 둘은 악기를 꺼내 든다. 둘이 일제히 함께 악기를 불기 시작한다. 셀디아스는 클라리넷을 쇼팽의 야상곡부터 불기 시작한다. 지선도 대금을 입에 대고 ‘영산회상’의 곡조부터 불기 시작한다. 서서히 상대의 음률에 끌려들며 둘은 서서히 긴장하기 시작한다. 십여 분쯤 지난 뒤다. 둘은 긴장과는 무관하게 수시로 상대의 악곡에 휘감겨 허덕이기 시작한다.

   클라리넷의 선율과 대금의 선율이 휘감긴 지 반시간쯤 흐른 뒤다. 라가나스 해변의 백사장에는 소용돌이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소용돌이의 강도가 점차 심해지는 듯하더니 올빼미가 땅바닥에 나뒹굴기 시작한다. 땅바닥에 떨어진 뒤에는 제대로 날지도 못해 버둥댄다. 바로 그 무렵이다. 극저음으로 클라리넷을 연주할 무렵부터였다. 자꾸만 셀디아스의 체내에서 기혈(氣血)이 들끓기 시작했다. 연주를 하는 중에서도 호흡이 가빠지며 구토증이 일곤 했다. 가까스로 구토증을 달랠 무렵쯤에는 또 다른 구토 증세가 치밀었다.

   지선의 몽환곡(夢幻曲) 중의 ‘월하주금(月下奏?)’이 2분가량 연주될 때다. 클라리넷을 입에 문 채 셀디아스가 가는 신음을 쏟기 시작한다. 얼굴에 고통의 빛을 감추려고 안간힘을 쓰는데도 자꾸만 신음이 높아진다. 여태껏 클라리넷의 화음으로 가까스로 대금의 선율을 견뎌냈지만 한계를 느꼈다. 대금의 선율이 클라리넷으로부터 발출되는 음파를 기묘하게 상쇄시켜 버린다. 셀디아스가 열심히 연주를 하건만 정작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30여 초 전부터 고막에 들리는 게 없었다. 뭔가 선율이 이는 느낌은 드는데도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다. 셀디아스의 눈에 대금을 부는 지선의 자태가 하늘의 천사(天使)처럼 보인다. 너무나 고와 같은 여인임에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뒤흔들릴 정도다.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백사장을 에둘러 병풍처럼 펼쳐진 방풍림을 바라본다. 5장씩의 갈래꽃으로 이루어진 협죽도(夾竹桃)의 꽃이 만발하여 바람에 나부낀다. 협죽도의 색채가 세상 떠난 영혼들의 서러운 미소로 느껴지는 듯하다. 협죽도의 농염한 색채에 젖어 마음이 울적해지려고 한다. 이 때다. 세상을 떠난 셀디아스의 음악 스승의 얼굴이 창졸간에 떠오른다.

   “셀디아스야, 어찌 망념(妄念)에 빠져 허우적대느냐? 어서 극저음으로 음계를 낮춰 드뷔시의 야상곡(nocturne)을 연주하려무나. 마음을 잘 다스려야 달인이 되느니라.”

   스승의 말을 떠올린 순간 셀디아스의 표정이 확 달라진다. 그녀가 곧장 클라리넷의 음계를 극저음으로 떨어뜨리면서 야상곡(夜想曲)을 연주한다. 이 때부터다. 잠시 들리지 않았던 숱한 음률들이 폭포수처럼 셀디아스의 귓전으로 흘러든다. 셀디아스가 연주하는 클라리넷의 극저음을 듣는 순간이다. 지선의 자세가 잠시 흐트러지는 기미를 보인다. 허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자세를 가다듬으며 몽환곡의 마지막 소절인 ‘환풍(幻風)’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이내 야상곡과 환풍의 선율이 서로 뒤엉키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다. 셀디아스의 전신에 걷잡을 수 없는 오한(惡寒)이 일기 시작한다. 원래 스산한 밤의 정경을 피아노 가락으로 나타내던 악곡이 야상곡이다. 그런데 드뷔시에 이르러 관악기 연주용으로도 많이 작곡되었다. 관악기로 연주되는 야상곡에는 훨씬 정감이 짙게 표현되는 매력이 있다. 심금을 마구 뒤흔들 정도로 선율의 배합이 절정을 이루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려고 할 때에는 야상곡을 연주하곤 한다. 음률에 통달한 셀디아스의 손길에 연주되는 야상곡이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래도 클라리넷의 지속적인 연주가 쉽지 않을 듯하다. 그래도 안간힘을 쓰고 버텨 내려고 한다. 조금만 방심해도 대금의 선율이 가슴으로 파고들곤 한다. 대금의 선율에 휩쓸릴 때마다 가슴이 저릿거리며 가슴에 통증이 인다. 결코 이전에는 체험하지 못했던 현상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셀디아스가 목구멍으로부터 조금씩 피를 토하기 시작한다. 피를 토하지 않고는 숨을 제대로 못 쉴 지경이다. 피를 토하고 나면 가슴이 상당히 개운해지는 느낌이 든다. 바로 이 무렵에 셀디아스의 기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석양이 수평선 끝자락에서 가물거리며 가녀린 빛살을 내뿜는다. 셀디아스의 야상곡은 너무나 처량하여 사람의 눈물을 왈칵왈칵 쏟게 만든다. 심지어 햇빛마저 호흡을 멈추고 선율에 귀를 기울이는 듯하다. 얼마나 그 슬픔이 절절한지 음률에 휘감겨 몸이 휘청댈 정도다. 언제부턴가 대금과 클라리넷의 선율이 뒤엉키면서 백사장에는 불협화음이 일기 시작했다. 불협화음의 빈도가 커질수록 가슴을 꼭꼭 찌르는 듯한 압박감이 커진다.

   묘한 증상이 일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느닷없이 ‘찍찍’거리는 소리를 내며 삼십여 마리의 두더지 떼들이 나타난다. 모래더미 속으로부터 머리를 쑥쑥 내밀더니 백사장 위를 이리저리 치달린다. 끝없이 달리지는 못하고 일정한 반경 이내에서 정신없이 맴돌고 있다. 그뿐 아니다. 야행성 조류인 올빼미도 수십 마리씩 무리를 지어 백사장으로 몰려든다. 일부는 두더지들을 눈에 띄는 대로 잡아먹는다. 묘한 것은 두더지 떼들이다. 맹금류에게 잡혀 죽은 만큼 땅 속에서 금세 몰려나온다.

   셀디아스의 전신에 대금의 선율이 몇 차례 강하게 뒤엉킨 뒤다. 급기야 셀디아스의 안색이 하얗게 바래지더니 연주하던 클라리넷이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내 셀디아스의 몸이 크게 허청거리더니 그녀가 의식을 잃고 나뒹군다. 더 이상 클라리넷의 선율은 흘러나오지 않는다. 사방은 흐느끼는 듯한 대금의 선율만 물결처럼 출렁인다.

   그 무렵. 지선은 클라리넷의 선율에 대응하여 무의식적으로 대금을 연주하고 있었다. 지선으로서도 대금을 연주하기가 이처럼 힘든 적은 없었다. 거의 기력이 고갈되어 영혼이 신체로부터 이탈할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즐겁던 악곡이 그처럼 고통의 결정체로 자신을 옥죌 줄은 몰랐다. 전신의 기력이 고갈되는 상황에서 사력을 다하여 대금에 기력을 싣는다. 그러다 보니 가슴이 답답해지더니 숨을 쉬기가 어려워진다. 숨 쉬는 자체가 고통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심정으로 대금에 기력을 실어서 분다.

   점차 머리가 어찔어찔하며 전신에 기력이라곤 없어진다. 가까스로 대금에 입술을 갖다 대고 불 때다. 맞은편의 셀디아스가 의식을 잃고 땅바닥으로 쓰러져 버린다. 지선도 쓰러지기 직전의 상황이었지만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린다. 셀디아스에게로 가려고 막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다. 지선도 입술로 한 모금의 피를 울컥 쏟는다. 내장(內臟)에 상처가 생겨 피가 식도를 타고 넘어 왔기 때문이다. 아마도 기력을 발출하는 과정에서 내장에 다소의 상처를 입은 모양이다.

   지선이 가까스로 발걸음을 옮겨 셀디아스에게로 다가간다. 의식을 잃은 그녀를 옆으로 눕힌 뒤에 오른뺨을 힘껏 내리친다. ‘찰싹’하는 소리가 나며 셀디아스의 뺨에 손가락 자국이 생긴다. 그러자 이내 셀디아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식을 되찾는다. 의식을 찾자마자 그녀가 일어나려고 버둥대다가 땅바닥으로 다시 쓰러진다. 지선이 다가가 셀디아스를 부축해 일으킨다. 셀디아스가 힘겹게 일어서더니 지선을 향해 팔을 벌린다. 지선이 자연스레 셀디아스를 포옹한다. 셀디아스도 조심스레 지선을 껴안는다. 셀디아스가 지선에게 입을 연다.

   “대단해요. 몽환곡으로 제가 연주하는 야상곡의 기파(氣波)를 깨뜨리다니요. 저는 지금도 꿈을 꾸는 느낌이에요. 지금까지 악기의 기파로 저를 제압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요. 하늘 밖에 새로운 하늘이 있음을 오늘 절실히 느꼈어요.”

   말을 하면서도 셀디아스가 현기증을 일으키며 몹시 고통스러워한다. 지선이 나지막한 소리로 셀디아스를 향해 말한다.

   “제 대금의 기파에 의해 당신의 내장도 부상을 입었을 거예요. 잠시만 말하지 말고 기다리시면 체력이 회복될 거예요. 잠깐만 이대로 저랑 같이 서 있을래요?”

   두 여인이 포옹한 채 백사장 위에 서 있다. 둘은 말을 중단한 채 서로의 체온을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두 여인들에겐 상대가 무척 따사롭고도 포근한 느낌이 든다. 조금 전까지도 전력을 기울여 기파로 대결하던 여인들이었다. 대결이 끝나자 상대를 포옹하며 진심으로 상대를 격려해 준다. 결코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일어난 대결이 아니었다. 음률의 절대 경지를 개척하는 국면에서 치러진 대결이다. 이런 대결에서는 자칫 목숨을 잃을 소지도 있는 터다. 새로운 경지란 범인에게 쉽게 길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대략 반시간의 시간이 흐른 뒤다. 지선과 셀디아스는 함께 백사장 주변을 둘러보기로 한다. 둘이서 기파를 겨루던 반경 삼십여 미터 이내의 거리에서다. 숱한 두더지와 들쥐들이 입에 피를 쏟으며 쓰러져 있다. 아마도 기파로 인해 실신한 듯하다. 생사를 감별하려고 두더지와 들쥐들을 건드려 보니 의식을 되찾고는 달아난다. 이 때부터다. 쓰러져 있던 두더지와 쥐들이 무리를 지어 깨어나 달아나곤 한다.

   그런데 1시간이 지나도 백사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쥐와 두더지들이 발견된다. 지선과 셀디아스는 경각심을 가지고 쥐와 두더지들을 살핀다. 지선과 셀디아스 주변에서 계속 배회하는 쥐들과 두더지들은 열세 마리다. 자세히 살펴보니 쥐들의 각막이 파열된 상태다. 두더지들은 청각이 파열된 증세를 나타낸다. 쥐들은 시력을 잃었기에 백사장을 떠나지 못한다. 한편 두더지들은 소리를 듣지 못해 땅 속으로 파고들지 못한다.

   대금과 클라리넷이 일으킨 음파의 파동 에너지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다. 에너지(energy)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에너지가 클수록 주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파괴를 나타내는 경우에는 훨씬 큰 파괴력을 나타낸다. 에너지는 파동(波動)의 진동수(振動數)에 비례하고 파장(波長)에 반비례한다.

  대금과 클라리넷이 토해 내는 음률의 파동이 간섭 현상(干涉現象)을 일으켰다. 진동 방향이 같은 곳은 에너지가 커지고 반대 부분은 작아졌다. 간섭 현상이 주기적으로 일어나면서 에너지가 급격히 증폭되었다. 이 결과로 음파의 파동이 미치는 공간의 생명체는 부상을 입게 되었다. 지선과 셀디아스가 부상을 입은 원인도 파동의 간섭 현상 탓이었다.

   지선과 셀디아스는 상처를 입은 쥐와 두더지들을 지켜본다. 안타깝지만 지선과 셀디아스는 이들을 치료시킬 능력이 없다. 셀디아스가 지선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의견을 묻는다. 지선이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입을 연다.

   “우리에겐 두더지와 쥐들을 치료시킬 능력이 없어요. 시력과 청력을 상실한 동물들은 생존하기 힘들어요. 시간이 문제일 뿐 결국 죽게 되어 있어요. 고통에 시달리게 하느니 깨끗이 죽여서 모래 속에 묻어 줍시다.”

   셀디아스가 곧바로 응답한다.

   “쥐와 두더지는 농작물에 해를 입히기에 죽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기 세 마리의 산토끼들은 어떻게 하죠?”

   지선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회색의 산토끼들이 보인다. 셀디아스의 말대로 시각과 청각을 잃은 상태라 여겨진다. 산토끼들의 눈에는 피가 상당히 많이 흐르고 있다. 각막 아래의 안구(眼球)를 뒤덮는 실핏줄이 터진 모양이다. 지선도 산토끼들의 이런 꼴을 보고는 말문이 닫힌다. 입술을 깨물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것도 잠시였을 뿐. 이내 입을 열어 대답한다.

   “저 토끼들은 내가 동물병원에 데려다가 치료를 시킬게요. 쥐와 두더지들은 죽여서 묻고 토끼들은 치료를 시키면 어떨까요?”

   셀디아스가 곧바로 응답한다.

   “토끼는 치료하고 쥐와 두더지들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어떻겠어요? 곧 죽을 동물들인데도 굳이 우리가 죽인다면 잔인한 생각이 들어요.”

   지선이 셀디아스의 말을 듣더니 맞잡은 그녀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지선도 대자연의 흐름에 거스를 생각은 없다고 밝힌다. 고막이 터져 먹이를 찾지도 못해 굶어 죽을 두더지. 시력을 잃어 먹이를 잡지도 못해 굶어 죽을 쥐. 이들의 고통이 예상되기에 죽여서 고통을 단축시켜 주려는 의도였다고 들려준다. 이들의 고통이 너무나 눈물겹게 여겨지리라 예상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지선의 말을 들은 순간이다. 미물에까지 깊은 배려를 하는 지선의 태도에 셀디아스가 감동을 느낀다. 단순한 논리보다 본질을 꿰뚫어 생각하는 사고의 태도에 존경심이 인다. 자킨토스 섬에 도착한 이후의 지선의 언행을 깊이 분석해 본다. 하나에서부터 끝까지 철저히 상대를 배려하는 자세였다는 걸 느낀다. 상처 입은 동물들의 처리 문제에 있어서도 셀디아스의 의견을 반영했다.

   셀디아스가 강적을 만나기 전까지는 진정한 실력자를 만나기를 원했다. 그랬는데도 강적을 만나 패하고 나니 상실감이 커서 죽고 싶을 정도다. 강적을 불러들이기 위해 십여 년 전부터 뇌파(腦波)를 단련시켰다. 하루에 다섯 시간씩 명상의 자세를 취하여 뇌파를 날려 보냈다. 반응이 있건 없건 꾸준히 십년 세월이 넘게 뇌파를 수련했다.

   그러다가 운이 좋게도 동양의 실력자들을 불러들이게 되었다. 일본의 야스유키와 한국의 지선이 바로 동양의 실력자들이었다. 하마터면 검술 대결을 하다가 야스유키에게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게다가 지선의 대금과 맞대결을 했다가 실신하기에 이르렀다. 검술이나 음률에 있어서 동양의 수련의 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았다.

   해변을 나란히 걸을 때다. 별안간 천둥소리가 연거푸 들리더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여기저기서 번개가 치면서 연이어 섬광(閃光)을 쏟아낸다. 그뿐이랴? 해변에 있는 아열대림의 숲에 벼락이 떨어져 곳곳에 불길이 치솟는다. 벌써 일주일 전부터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낀 상태였다. 하지만 아열대 전형의 날씨답게 좀처럼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적된 구름의 양이 급기야 폭우를 동반한 모양이다. 빗방울도 굵어서 우박 덩이 같은 빗방울이 쏟아져 내린다.

   하늘이 금세라도 무너질 듯 우레를 쾅쾅 연거푸 토해 낸다. 폭우가 내리면서부터는 세상이 캄캄하여 대관절 앞이 보이지 않는다. 지선과 셀디아스의 옷도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젖은 옷에 급격히 한기(寒氣)가 몰려들어 실신할 지경이다. 번개에 맞아 벌겋게 타오르는 월계수나무를 바라본 직후다. 셀디아스가 다급한 표정으로 지선을 향해 말한다.

   “벼락 맞기 전에 빨리 여기를 떠납시다. 우리 저쪽 올리브나무 숲 속의 석동(石洞)으로 가요. 거기에 가면 비를 충분히 피할 수 있어요. 유사시를 대비해 거기에는 갈아입을 옷도 숨겨 둔 게 있어요. 같이 거기로 갑시다. 지선 씨가 그리스어에 유창해서 대화가 순조로와 참 좋아요. 언제 그처럼 그리스어를 한국어처럼 능통하게 익혔어요?”

   지선이 곧바로 응답한다.

   “어차피 외국어라는 것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 아니겠어요? 중요한 건 마음을 열고 대해 주니까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느껴져요. 제가 느끼기로는 일본의 야스유키의 그리스어 실력도 대단한 수준으로 여겨지던데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둘이 금세 석회동굴에 들어선다. 올리브나무 숲에 깔린 석회 동굴의 수가 수십 개에 이른다. 그 중 하나의 석동으로 두 여인이 미끄러져 들어간다. 동굴 내부로 십여 미터를 걷다가 모래더미를 헤치며 옷가방을 꺼낸다. 셀디아스가 모래 속에 감춰 둔 옷가방이다. 셀디아스가 수건을 꺼내 지선에게 건넨다. 셀디아스도 다른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닦는다. 하얀 한 벌의 깨끗한 그리스 전통 의상을 지선에게 내민다. 브래지어와 팬티까지 건네준다. 지선이 미소를 머금으며 비에 젖은 옷을 벗기 시작한다.

   셀디아스도 여벌의 전통 의상으로 갈아입으려고 젖은 옷을 벗는다. 둘 다 발가벗었을 때다. 셀디아스가 미소를 머금으며 지선의 두 손을 맞잡는다. 두 여인은 알몸뚱이로 선 채 손을 맞잡고 미소를 짓는다. 그러다가 수건으로 각자의 알몸을 닦기 시작한다. 몸을 닦는 도중에 셀디아스가 입을 연다.

   “사물에 대한 인간의 정감(情感)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선이 활짝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한다.

   “거기에 대해서는 저도 오래 전부터 생각해 봤어요. 결국은 인간의 두뇌(頭腦)가 사물에 대해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허상(虛像)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의 두뇌마다 축적된 경험에 따라 해석하는 허상이 당연히 다르겠죠. 하지만 이들 허상이 개개인의 관점에서는 절대적인 참(眞)의 세계라고 생각돼요.”

   셀디아스가 지선의 말을 음미하며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정감이란 허상이요, 허상이 곧 참된 세계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난해한 소리로 여겨지네요.”

   지선이 셀디아스를 향해 보완적인 설명을 들려준다. 동일한 대상이라도 인간이 느끼는 정감은 개인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살아온 개인의 자취에 따라 축적된 경험도 다를 것이다. 아무리 정감이 다양해도 정감의 대상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가? 대상의 실존이야말로 가식 없는 참된 세계가 아니겠느냐고 셀디아스가 말한다.

   셀디아스의 관점으로 공감하기는 쉽지 않지만 상당히 체계적인 사고라고 생각된다. 사람이 태어났다가 죽는 것도 허상이라면 허상일 듯하다. 죽고 난 뒤에 흔적조차 못 느끼는 사례가 얼마나 빈번한가? 혹시 지선과 알몸으로 나란히 서 있다는 것도 허상이 아닐까? 비록 겉으로는 알몸이어도 마음속으로 옷을 입었다고 여긴다면? 알몸으로 제시된 현상 자체가 허상 중의 허상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문득 허상의 경계가 셀디아스에게 모호하게 느껴진다. 문득 지선과 함께 하는 시간의 존재마저 허상인지 의심스럽게 여겨진다. 그래서 셀디아스가 지선의 눈을 들여다보며 손바닥으로 지선의 젖가슴을 어루더듬는다.

   여인이지만 셀디아스의 손길이 닿자 지선의 의식이 하얗게 얼어붙는다.

   ‘아니, 이 여자가 왜 이래? 혹시 변태 아냐?’

   순간적으로 놀라 거부감이 느껴졌지만 이내 지선이 마음을 추스른다. 그러면서 셀디아스가 지선의 알몸에 손을 댄 원인을 유추해 본다. 그러다가 둘의 대화가 ‘허상’이라는 단어에서 멈췄음을 깨닫는다. 그러자 창졸간에 셀디아스의 의중을 확연히 알아챈다.

   ‘아하, 둘이 함께 있는 현실도 허상이냐고 묻는 거구나. 내가 괜히 오해할 뻔했군.’

   셀디아스의 진심을 헤아리자 미소를 머금으며 가만히 몸을 내맡긴다. 마음이 통했음일까? 셀디아스가 지선의 맑은 눈을 들여다본다. 포근한 기류가 서로의 가슴에 맞닿자 서로를 얼싸안는다. 둘은 거의 동시에 눈을 감고는 생각에 잠긴다. 묘하게도 상념에 잠기려는 사고의 근원이 비슷하다. 둘 다 인간의 존재와 사물에 대한 정감에 대해 생각한다.

   지선이 비행기를 타고 자킨토스까지 날아온 것이 단순한 대결 때문이었던가? 검술과 음률이 반드시 맞겨루기를 해야 할 만큼 절박한 관심사였던가? 대결에서 이긴다는 진정한 의미는 뭐였던가? 누가 상대에게 이기라고 했던가? 상대에게 진다면 무슨 큰 난리라도 생긴다고 했던가? 지선은 계속해서 명상에 잠겨 주변 현상을 헤아려 본다.

   누구든 살아가면서 주위의 사물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을 하기 마련이다.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의 해석이 다르기 마련이다. 동일한 대상에서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는 것은 허상의 존재를 일깨운다. 근원적 본질에 대한 숱한 해석 자체가 허상의 세계를 시사한다. 그렇지만 숱한 허상 자체가 참된 세계를 바탕으로 존재하지 않는가? 지선은 거듭 자신의 상념에 잠기며 인간 존재의 의미를 생각한다.

   반면에 셀디아스는 그녀의 관점으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그녀 자신의 출현에 우주의 지대한 관심이 작용했던가? 얼마나 오묘한 조화였기에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그녀를 향해 동양의 두 달인이 달려오지 않았던가? 지금은 그 달인 중의 하나와 알몸으로 포옹하고 있다.

   셀디아스는 거듭 상념의 깊은 골짜기로 잠겨 든다. 중국 은허에서 발굴된 용골(龍骨)에서 마지막으로 발견된 상형문자. 거기엔 만류동원(萬流同源)이란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만 가지의 흐름도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발원된다는 뜻의 말이다. 생각할수록 그 뜻이 심오하기 그지없다고 셀디아스도 생각한다. 동양과 서양. 고대인과 현대인. 이들의 근원은 모두 하나임에 틀림없었으리라 여겨진다.

   지중해까지 날아와 석동에서 함께 포옹하고 선 동양의 여인인 지선. 셀디아스는 지선을 만난 것을 커다란 행운이라 여긴다. 클라리넷의 화음의 벽을 넘어 세상 밖의 소리를 연주하고 싶었다. 그랬는데 지선을 만나서 대금의 심오한 화음에 감동하여 꿈을 이루었다. 이제 클라리넷으로 서양의 소리가 아닌 우주의 소리를 내게 되었다. 전설처럼 내려온 스파르타의 신검(神劍)의 내력을 동양의 검술에서도 찾게 되었다. 그녀가 찾은 신검의 내력은 너무나 확실한 사실이라 여긴다.

   셀디아스는 좀 전의 상황을 되돌아본다. 지선의 체온을 느낀 순간부터 셀디아스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 기분이었다. 새로운 세계를 접한 마음으로 셀디아스가 지선의 젖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창졸간에 잠시 지선이 망설이더니 이내 몸을 내맡겼다. 지선의 젖가슴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셀디아스가 명상에 잠겼다. 그러던 어느 순간에 마음이 통하여 서로 포옹했다.

   지선에게 문득 야스유키의 얼굴이 떠오른다. 라가나스 해변에서 셀디아스와 검술 대결을 한 뒤에 패했을 때였다. 스스로 극도의 절망감과 수치심을 느껴 안절부절못하던 야스유키였다. 상심이 컸던 나머지 눈시울 가득 눈물을 쏟고는 해변에서 사라졌다. 눈물을 뿌리며 사라지던 야스유키의 모습이 너무나 애잔하게 느껴졌다.

   셀디아스가 문득 자세를 낮추는 바람에 포옹의 자세가 풀린다. 아마 포옹하면서도 어떤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다. 자세를 가다듬어 허리를 펴더니 셀디아스가 지선에게 말한다.

   “여태껏 마음을 열어 주어서 고마워요. 이제 옷을 입어도 돼요.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셀디아스가 덧붙여 말한다. 잠시 지선의 젖가슴을 애무한 연유를 밝힌다. 어느 순간부터였다고 들려준다. 애무하는 자신이 실체인지 애무당하는 상대가 실체인지 모호해졌다고 한다. 애무하는 느낌과 애무당하는 느낌에 관한 근원적인 차이. 바로 이 점에 허상(虛像)의 실체가 있으리라 여겼다고 한다. 결국 ‘애무’라는 개념을 통하여 세상의 본질을 확연히 통찰했다고 들려준다.

   사물에 대한 마음의 작용이 ‘정(情)’임을 공감했다고 말한다. 정감의 본질은 불변의 실체에 관한 다변적인 해석임도 깨달았다고 한다. 불변의 실체를 ‘진(眞)’이라 하면 다변적인 해석은 ‘환(幻)’으로 간주되리라고 말한다. 이런 사실을 깨달아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며 셀디아스가 감격한다.

   셀디아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지선도 감격하여 셀디아스의 손을 쥔다. 마치 막혔던 뇌혈관이 펑 뚫린 느낌이 든다. 단단한 나무로는 누구나 인장(印章)을 새길 수 있기 마련이다. 썩은 나무를 가지고도 인장을 새길 수 있는 기술자. 이런 기술자야말로 달인급(達人級)의 기술자가 아니겠는가? 우아하고 고상한 소재로는 누구든 구도(求道)의 목표로 삼을 수가 있다. 하지만 ‘알몸의 애무’와 같은 소재로도 득도를 하려는 사람이 많겠는가? 절대로 그렇지 못하리라고 지선에게는 생각된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지선이 그녀의 내면에 담겼던 말을 들려준다.

   “그대에 대한 내 믿음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알았어요. 여태껏 알몸을 애무하던 그대의 행위가 심오한 구도 과정이었음을 통감했어요. 알몸 상태야말로 인간의 모든 가식이 제거된 정화의 극점임을 느꼈어요. 자칫 진정한 달인을 몰라볼 뻔한 제 소양에 부끄러움을 느껴요. 진실로 그대를 제 스승이자 지기(知己)로 받아들일게요. 이렇게 소중한 인연을 맺게 되어 너무나 행복해요.”

   둘은 숙연한 자세로 옷을 입고는 모래 위에 마주 앉는다. 모래는 사람들이 백사장에서 일부러 석동으로 운반한 모양이다. 석동 곳곳에 모래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옷가방을 가볍게 숨길 정도로 모래가 두껍게 쌓여 있다.

   한동안 대화를 나눈 뒤다. 이제는 비가 그쳤을 거라며 셀디아스가 지선에게 해변으로 가자고 말한다. 둘은 나란히 손을 잡고 해변을 향해 걸어 나간다. 길이와 폭이 2킬로미터에 이르는 백사장은 아무리 봐도 광막한 지형이다. 광막한 백사장을 향해 두 여인이 석동의 출구로 빠져 나온다. 눈부신 햇살로 눈을 뜨기가 힘들 정도다. 어느새 폭우가 그쳐 하늘이 파랗게 출렁인다. 일주일 내내 먹구름이 끼었던 하늘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셀디아스와 지선이 다시 라가나스 해변에 나란히 선다. 저녁 6시 반이다. 해변에는 마침 석양이 수평선 아래로 넘어가려는 중이다. 핏빛으로 타는 저녁놀이 지중해의 수평선을 뒤덮고 있다. 바다는 수만 마리의 금빛 은빛의 물고기 비늘처럼 눈부시게 파드득거린다. 출렁대는 자줏빛 수면으로 저녁놀이 공작의 날개처럼 펼쳐져 남실댄다.

   문득 셀디아스가 깜짝 놀란 듯 백사장 위를 가리킨다. 셀디아스의 손가락 방향으로 지선이 눈길을 옮기니 토끼의 시신이 보인다. 지선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신속히 둘러본다. 곳곳에 쥐와 두더지들도 죽어 있다. 사체들을 살펴보니 각막이 파열되었거나 귀에서 피가 흘러내린 것들이다. 지선과 셀디아스와의 음률 대결에 있어서 음파에 의해 다친 것들이다.

   지선은 나뒹군 토끼의 시신을 눈앞에 두고 훌쩍이며 말한다.

   “내가 치료해 주기로 했는데 벼락을 피하려고 허둥대다가 깜박 잊었어요. 모두 내 잘못이에요. 이 미물들도 살려고 세상에 나왔다가 나 때문에 죽고 말았어요. 무엇보다 미물들에게라도 약속을 못 지킨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파요. 약속도 못 지키는 사람이 무슨 달인이 되겠어요? 절대 경지나 달인도 이젠 싫어요. 이후로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어요.”

   셀디아스도 지선의 곁에서 나란히 무릎을 꿇고 토끼의 시신을 내려다본다. 그러더니 그녀의 눈시울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그녀도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당신 탓만은 아니에요. 우리가 대결할 때 발생한 음파에 의해 죽은 거잖아요? 제게도 절반의 책임이 실려 있어요. 당신이나 야스유키를 뇌파로 불러들인 장본인이 저예요. 앞으로 다시는 헛된 명예를 탐하지 않겠어요. 진정으로 강한 자는 실력을 드러내지 않고서도 향기로 제압한다고 들었어요. 저는 당신을 알게 된 연분으로 이제부터는 향기를 가꿀게요. 그리하여 영혼이 외로운 숱한 생명들이 안정을 찾도록 돕겠어요.”

   셀디아스의 말에 곧바로 지선이 응답한다.

   “우리가 굳이 지중해에서 만난 것은 향기 때문인 것 같군요. 저도 지금부터는 검이나 악기로서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생각을 버릴게요. 그리하여 당신처럼 아름다운 향기를 가꾸는 사람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둘이 거의 동시에 일어서면서 서로를 깊이 끌어안는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부의 광막한 지중해가 자줏빛으로 곱게 펼쳐져 남실댄다. 둘이 마음이 통했음일까? 지선이 셀디아스를 향해 눈빛을 반짝인다. 셀디아스가 흔쾌히 고개를 끄떡인다. 서로의 뺨에 뜨거운 입맞춤을 한다. 뺨에 서로의 숨결이 밀려들자 심장이 멎을 듯 가슴이 뛴다. 둘은 마치 술에 취한 듯 잠시 몸을 떤다. 그리고는 서로의 눈을 한동안 들여다보다가 서로를 놓아 준다.

   둘은 곧장 해변에 나뒹구는 동물들의 사체를 백사장에 묻는다. 그리고는 함께 꿇어 앉아 영혼을 위로하려고 기도한다. 그런 뒤에 지선의 제안으로 서로 맞절을 한다. 맞절의 의미가 영원히 변함없는 교류임을 떠올리며. 그리고는 일어나 재차 서로 포옹한 뒤에 손을 흔든다.

   서로 작별하려고 손을 흔들 때다. 서로의 손등에 파랗게 비치는 정맥 혈관을 보는 순간이다. 서슬 퍼런 슬픔이 불길처럼 둘의 가슴으로 훅 치솟는다. 그러자 지선과 셀디아스의 콧등이 시큰거리며 눈물이 핑 돈다. 어느새 둘의 눈시울에 뽀얀 이슬이 서리며 목이 멘다. 아무리 지기가 되었다지만 동양과 서양의 거리는 여전히 멀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만나랴? 새삼스레 가슴이 북받쳐 둘이 뺨을 맞대고 눈물을 글썽인다.

   다소의 시간이 흐른 뒤다. 둘은 눈물을 지우고 애써 미소를 띠며 서로를 놓아 준다. 가슴에 구멍이 펑 뚫리는 듯한 허전함을 느끼며 서로 돌아선다. 셀디아스는 라가나스 남서쪽의 마라티아스(Marathias)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지선은 라가나스 북동부의 칼라마키(Kalamaki) 공항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둘은 모래 능선이 끝날 무렵에 거의 동시에 돌아선다. 그리고는 서로를 향해 팔을 들어 올려 손을 크게 흔든다. 그리고는 각자 먹먹한 눈빛으로 모래 능선 아래로 내려선다.

   태양을 삼킨 지중해의 물빛이 핏빛으로 끓어오른다. 해변의 길길이 자란 야자나무의 숲에도 자줏빛 안개가 층층이 밀려든다. 둥지를 찾아가는 콩새(hawinch)와 찌르레기(gray starling)의 울음소리에도 먹먹한 정취가 느껴진다. 자킨토스의 바실리코스(Vassilikos) 곶을 감돌아 지나는 여객선의 물무늬가 꿈결처럼 흔들거린다. 지중해의 바람결에 떠밀리는 뱃고동 소리마저 여인들의 작별을 아쉬워하는 듯하다.

<200자 원고지 23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