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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풍지대

                                                                                         손 정 모

   백사장 어디에도 바람 한 점 나부끼지 않는다. 물안개가 백사장 아스라이 드리워져 지척마저 분간키 어렵다. 하지만 안개자락의 어디엔가는 캔즐리(Kanjeuly)가 서성이고 있음이 틀림없다. 줄곧 그녀가 먼발치로 보이다가 농무(濃霧)로 인해 잠시 가려졌기 때문이다.

새벽에 캔즐리의 전화를 받을 때부터였다. 내겐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기분이었다. 외나로도 북동쪽의 청정한 바닷가. 신금 해수욕장의 백사장에서 오후 6시에 만나자는 전화였다. 사흘째 번민하다가 전화를 건다며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연구 업무로 연일 누적된 피로 탓이었으리라. 대화를 끝내기도 전이었다. 나는 그만 전화기를 놓친 채 잠들어 버렸다.

   외나로도(外羅老島) 우주 센터의 북서쪽 2km 지점의 예당 마을. 거기에는 해안에 인접하여 국제 천문 교역원(國際天文交易院)이 세워져 있다. 우주 센터와는 달리 국내 대기업체가 운영하는 우주 연구 기관이다. 나는 위성 궤적 연구실의 제2실장이다. 위성 궤적 연구실은 3개의 대형 실험실로 이루어져 있다. 각 실험실마다 실장이 하나씩 배치되어 있다. 각 실장 밑으로는 5명씩의 연구원들이 배치되어 일한다.

   나는 교역원 산하의 천문 접객청(天文接客廳)에 연결된 폐쇄회로 텔레비전을 들여다본다. 접객청은 교역원에서 300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다. 접객청은 해안에 세워진 고객용의 연구 및 휴양 시설이다. 단기일에 걸쳐 고객이 묵으면서 업무도 보면서 휴식하는 건물이다. 7명의 고객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 새로 구입한 위성 공간에 위성을 날리는 전산모사 프로그램이다.

   교역원에서는 위성이 비행하는 공간을 세계에 판매하고 항로를 관리해 준다. 습도와 온도와 광량(光量)에 따라 가상의 위성이 실제처럼 날아다닌다. 한국에서 다년간 연구하여 제시한 세계적인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을 산하의 접객청에서 고객들에게 선보이며 위성 궤도를 판매한다.

   연구실 바닥의 형광판이 번쩍인다. 새로운 고객이 연구실로 다가선다는 안내 장치다. 나는 이내 폐쇄회로 텔레비전에서 연구용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옮긴다. 형광판이 반짝일 때다. 머릿속으로 안개 속의 허공을 배회하는 고장이 난 비행기가 연상된다. 제대로 항로를 찾지 못한 채 허우적대다가 추락하고 마는 비행기.

   형광판이 반짝일 때마다 긴장해 보지만 대다수는 하청업체의 직원들이 들락거린다. 기름이 바닥까지 떨어진 채 흔들거리는 기체(機體)의 진동이 느껴진다. 또 다시 바닥의 형광판이 강하게 깜빡댄다. 그 바람에 배회하는 기체의 영상이 이내 사라진다.

   6개월 전의 정오 무렵이었으리라 기억된다. 캔즐리가 교역원을 찾던 날의 정경은 폐쇄회로 텔레비전에도 저장되어 있으리라. 안개가 스러지며 햇살이 밀려들듯 그 날의 정경은 경이로웠다. 네 명의 고객들과 휩쓸려 든 캔즐리는 환상적인 미모의 여인이었다. 그 누가 봐도 첫눈에 마음을 뺏길 정도의 매혹적인 용모였다. 초승달처럼 휘어져 올라간 눈썹과 오뚝한 콧날. 미풍에 남실대는 버들잎처럼 서글서글한 눈매. 석류 꽃잎같이 윤기 흐르는 입술과 뽀얀 살결. 이목구비가 잘 짜여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 용모였다. 시선이 마주치기만 해도 가슴속에 거센 파동을 일으킬 듯한 미모였다.

   그 날 교역원 곳곳에선 탄성이 꽃잎처럼 사방에 나풀대었다.

   “저 아가씨가 캐나다에서 온 과학자라고?”

   “국적만 캐나다이지 순수한 한국 혈통이라고 해. 너무 매력적이라 시신경이 놀랄 정도야.”

   당시의 캔즐리는 미국의 버클리대학교에서 최종 학위를 취득한 24살의 천문학자였다. 그녀와 나는 공교롭게도 박사학위를 취득한 곳이 같았다. 이런 시답잖은 연분으로도 내 마음은 캔즐리에게로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나에겐 4살 아래의 여인이 참 평온함을 안겨 주는 느낌이었다.

   그날따라 남동풍이 강하게 불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닷바람이 쉴 새 없이 육지로 밀려들었다. 해풍의 끝자락에 매달려 부원장이 캔즐리를 각 연구실마다 대동하여 소개했다. 연구실마다 탄성과 환호성이 터져 올랐다. 게다가 캔즐리는 한국어에 능통하여 연구원들의 가슴을 뒤설레게 했다.

   이윽고 캔즐리가 위성 궤적 연구실의 제3실장으로 임용되어 배치되었을 때다. 바로 내 옆 연구실이 그녀의 연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너무 기뻐 냅다 환호성을 질러대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 때부터 연구를 시작하던 캔즐리는 수시로 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추적하던 위성이 알지 못할 공간으로 실종되었을 때도 나를 찾았다. 한 잔의 차 대신에 캔즐리는 와인을 즐겼다. 실종된 위성을 찾았을 때에도 나를 찾았다. 역시 한 잔의 차 대신에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는 다시 연구실로 돌아가 연구에 매진했다.

   나에게는 캔즐리가 신(神)이 빚어낸 최상의 작품이라 여겨졌다.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환상적인 미모. 언제 어디서건 항시 우아한 미소를 짓고 상대를 대하는 일관성.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일체 화를 내지 않는 절제된 품성. 이론으로서만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표본이 내 곁에서 생활하다니? 내가 꿈을 꾸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어찌 생기랴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였다. 차츰 내게는 캔즐리가 인간이 아닌 신(神)이라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이후부터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캔즐리를 활신(活神)으로 대했다.

   보름 전에 캔즐리로부터 들은 얘기였다. 해안에서 둘이서 낚시를 마치고 술잔을 나눈 뒤였다. 고뇌에 잠겨 한참 망설이다가 캔즐리가 내게 마음을 열었다.

   ‘태평양의 별’은 캐나다 최대의 폭력 조직이었다. 그 조직의 부두목이 윤천수(尹穿搜)였다. 이민 간 부모로 인하여 캐나다에서 출생하여 성장했다. 나와 동갑인 천수의 혈통은 순수한 한국인이었다. 천수는 폭력 조직의 두목에게 우주 산업체를 운영하도록 건의했다. 그래서 상당수의 캐나다 우주 산업체가 ‘태평양의 별’과 연계되어 있었다.

   천수가 우주 산업체를 운영하다 보니 연구소의 캔즐리와 알게 되었다. 게다가 캔즐리가 순수한 한국인 혈통이라는 것까지도 알게 되었다. 캔즐리를 만난 뒤부터였다. 천수의 심신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든 캔즐리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부두목이었기에 두려운 상대가 없었다. 그가 꿈꾸면 뭐든 이룰 수 있는 처지였다.

   하지만 폭력으로 캔즐리를 굴복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천수는 자신의 배필이 곧 자기 자신이라는 관점을 지녔다. 그렇기에 어쨌든 캔즐리를 만나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줄곧 3년을 노력했어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결국 어느 날 비상수단을 쓰기로 작정했다. 천수가 비상수단을 쓰기로 하고 캔즐리를 찾아갔던 날이었다. 이미 캔즐리는 한국의 교역원으로 건너오고 없었다. 암담한 처지에 잠겨 생각을 거듭한 뒤였다. 천수는 마침내 엿새 전에 외나로도에까지 직접 찾아왔다.

   오전 10시 무렵이다. 7월 중순의 우기 탓일까? 바다에는 습기 찬 바람이 마구 불어댄다. 사방으로부터 바람의 목덜미가 치달아 몰려와서는 소용돌이로 화하면서 너울을 형성한다. 바다의 수면은 여기저기에서 커다란 능선을 만들어 파동이 되어 밀려나간다. 너울이 완화되면서 곳곳에서 파도가 심하게 치기 시작한다.

   폐쇄회로 텔레비전의 화면을 들여다본다. 천문 접객청의 현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접객청 제103호 별실 내부의 장면을 들여다본다. 전산모사 프로그램을 돌려 한국에서 구입한 위성의 궤도가 안정한지를 살핀다. 구입한 궤도와 다른 위성의 궤도가 겹치거나 관통하지 않는지를 살핀다. 접객청에서는 미니스커트 차림의 궤도 안내 도우미가 시청각 자료를 띄운다. 대형 스크린에 가상 위성이 공전하는 자취가 면밀하게 그려진다.

   “오후 6시에 신금 해수욕장의 백사장에서 기다릴게요. 며칠째 고민하다가 전화했어요.”

   뒤에 이어지는 언어의 토막들은 듣지 못한 채 전화기를 놓쳤다. 마침 그녀의 출장 기간이라 낮에 연구소에서도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알지 못할 안타까운 그녀의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안내 도우미가 각 장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한다. 궤도를 도는 인공위성의 고도와 지표면과의 각도. 순환 주기에 대한 설명을 한다. 주변을 지나는 다른 위성들의 속도와 주기에 대한 자료도 제시한다. 위성의 공간을 구입한 업체의 주인이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 시선이 도우미의 미니스커트 자락으로 이끌린다. 접객청의 도우미들은 연구소 직원들과는 별도의 운영 조직을 갖는다.

   업체의 고객과 도우미의 마음이 통하면 곧장 성행위로 이어진다. 103호 실의 숙소 커튼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폐쇄회로에서도 안 잡히도록 조처해 놓은 부분이다. 나는 그 안에서 일어날 상황을 잠깐 떠올리다가 얼굴을 붉힌다.

   갯바위에 파도가 휘감기는 날이면 왠지 전신의 기운이 고갈된다. 심한 열병이라도 앓다가 맥을 못 쓰는 형세 같다. 내면에 잠재된 역마살을 추스르기 힘들 지경이다. 고향인 속초를 벗어난다는 게 고작 나로도에 정착했다. 파도가 드센 날은 바닷물이 연구실 유리창까지 와 닿는다. 세상을 쓸어버릴 듯이 흉흉한 기세의 바닷물. 연구실 두꺼운 창유리에 매달려 고통의 땀방울처럼 흘러내린다. 어쩌다가 내가 공허한 가슴의 신열을 때때로 앓는지 자괴심을 느낀다. 이러다가는 황량한 섬의 파도더미에 묻혀 질식해 버릴 것만 같다.

   캔즐리와는 틈틈이 대화를 나누곤 했다. 파도가 해안으로 유난스레 휘말려 올라오던 일주일 전이었다. 근무를 마친 뒤의 석양 무렵이었다. 둘은 낚싯대를 챙겨 들고는 갯바위에 올라섰다. 갯지렁이를 낚시에 매달아 바다에 낚싯줄을 드리웠다. 청정한 해역 탓인지 물고기가 곧잘 낚였다. 노래미와 볼락이 주종을 이루었다.

   두 시간쯤 낚시를 한 뒤였다. 낚인 물고기를 살림망에서 건져 올려 회를 뜨기로 했다. 처음으로 시도하는 거였지만 어렵지 않게 해결되었다. 갖고 간 소주와 된장을 꺼내 캔즐리와 해안에서 술잔을 나누었다. 술이라곤 와인밖에 못 마신다는 그녀였지만 소주도 잘 마셨다. 사방으로 내리깔리는 땅거미 탓이었을까? 술이 취하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단순한 술이 아니라 둘의 영혼을 잇는 신성한 액체로 여겨졌다. 술잔을 통해 가슴으로 전해지는 캔즐리는 환상의 선녀(仙女)처럼 느껴졌다. 그녀로 인해 세상이 도원경(桃源境)으로 비쳤다.

   “오늘은 한계량 이상으로 술을 마셨어요. 청환 씨와 술을 마시니 한결 술맛이 나더군요. 우리 둘이 조금 가까워져도 되겠죠?”

   나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좋다고 고개를 끄떡였다. 나에게 캔즐리는 활신이었다. 살아 있는 신과 가까워진다는 게 얼마나 큰 영광인가?

   어둠에 싸인 물빛을 바라보며 캔즐리가 입을 열었다.

   “영원히 가릴 수 있는 비밀은 없나 봐요. 청환 씨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이세요?”

   나는 내가 느낀 바를 곧바로 캔즐리에게 들려주었다. 완전히 이상적인 인간상이라고 여겨진다고. 내 말을 듣자마자 캔즐리가 폭발적인 웃음을 내리쏟았다. 내가 무슨 잘못된 발언을 했나 싶어 몸이 움찔거릴 정도였다. 한동안 웃음을 그치지 않던 그녀가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 얘기를 듣되 실망하거나 놀라지는 마세요. 내가 마음에 안 들면 안 사귀면 되잖아요.”

   캔즐리의 얘기를 듣는 순간이다. 문득 전신으로 왈칵 차가운 기류가 느껴진다. 캔즐리가 꺼낼 얘기의 정체가 나를 긴장시킨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내면으로 마음을 추스른다. 어떤 얘기를 들어도 그녀를 존중하는 마음은 변치 않을 것이라고.

   의외에도 캔즐리는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해외로 입양된 아이였다. 미국에서 대학에 입학하던 때였다. 인도네시아로 여행 갔던 양부모(養父母)가 지진(地震)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그 때부터 그녀에게는 힘든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녀 스스로 경제력을 구축해야만 했다. 여간한 부직으로는 생계 유지가 어려움을 통감했다. 그러던 무렵에 중국인 여자 친구인 쿠이치엔이 은밀한 정보를 일러주었다. 은밀히 깔려 있는 대학생 매춘 조직에 대한 정보였다.

   그 날 캔즐리는 윤천수(尹穿搜)에 대한 두려움을 떠올리며 얘기했다. 캐나다 폭력 조직의 부두목인 윤천수. 은밀한 거래를 하다가 우연하게도 윤천수를 알게 되었다. 윤천수는 몇 차례나 캔즐리와 육정을 나누면서도 자신의 신분을 숨겼다. 캔즐리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신상을 불필요하게 밝혀서 좋을 일이 없었다. 그랬지만 천수에게는 캔즐리가 마음에 쏙 들었다. 부하들을 시켜 캔즐리를 미행하기에 이르렀다.

   캔즐리가 매춘 조직에서 몸을 팔았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이었다. 나는 울컥 구토증이 일어날 듯 역겨웠다. 그런데 묘하게도 캔즐리를 발가벗기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활신의 알몸은 그 자체가 예술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역경에서도 훌륭히 학업을 마친 캔즐리가 돋보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육체를 두고 내 마음에 섬광처럼 갈등이 주기적으로 들끓었다. 그녀와 함께 알몸이 되어 그녀를 재차 활신으로 승화시키고도 싶었다. 내 영혼을 캔즐리의 영혼과 접응(接應)시키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여겼다.

   캔즐리는 대학생 매춘 조직의 인기 있는 여인으로 알려졌다. 미국으로 건너가서까지 매춘 조직에 드나들며 최종 학위를 수여받았다. 학위를 수여받고 과학자로 취업하면서부터는 매춘 조직을 떠났다. 확실히 정리하기 위해 한국으로 건너왔다. 그리하여 외나로도의 천문 교역원에 취업하게 되었다.

   그랬는데도 천수는 다양한 통로로 캔즐리의 행적을 추적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교역원까지 오겠다는 연락을 취했다. 캔즐리한테 천수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캔즐리가 말하면서 훌쩍거렸다.

   참으로 마음이 두렵고 갈피를 못 잡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게 무슨 해결의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캔즐리를 바라보며 내 관점을 말했다.

   “피하지 말고 그의 마음의 본질을 들여다보세요. 본질을 파악하기만 하면 문제가 풀리리라 여겨져요.”

   캔즐리는 한숨을 거듭 내쉬며 반복해서 중얼댔다.

   “마음의 본질이라? 마음의 본질이라??”

   빈 술병을 든 채 수평선을 굽어보며 한동안 캔즐리가 중얼대었다. 극도의 번민에 시달리는 여인의 안타까움이 처절할 정도로 느껴졌다.

   나흘 전 점심 무렵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 캔즐리가 나에게 말했다. 마침내 천수를 만났다고. 거기에 관련한 자세한 얘기는 저녁에 해변에서 들려주겠다고. 게다가 사흘 전부터 캔즐리가 어딘가로 출장 신청을 했다. 사흘 전부터 캔즐리의 얼굴을 교역원에서는 대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오늘 새벽에 캔즐리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다. 만나려는 장소는 차도(車道)로 교역원에서 북서쪽 10km쯤의 거리에 있다. 나는 시간에 맞춰 신금 해수욕장으로 차를 몬다. 신금 해수욕장은 외나로도에서는 가장 폭이 넓은 해수욕장이다. 썰물이 지면 가장 넓은 백사장이 펼쳐지는 곳이기도 하다.

   차창 밖으로는 연신 외나로도의 수려한 풍광이 펼쳐지고 있다. 해상 국립공원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는 절경이다. 해변에는 방풍림으로 동백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바람이 일 때마다 잎사귀들이 나부대면서 햇살을 어지러이 반사시킨다. 풀숲에서 치솟은 방울새의 무리들도 때때로 활개를 치며 허공을 난다.

   캔즐리가 나를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할지 무척 궁금하다. 천수를 만난 얘기도 이미 들려준 적이 있다.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녀는 여전히 나에게는 활신으로 여겨진다. 이미 경지에 이르렀기에 추종이 불가능해 보이는 존재. 그런 존재로서 그녀는 여전히 내 가슴에서 살아 춤춘다.

   나흘 전 저녁나절의 교역원 부근의 해변에서였다. 그 날도 해변에는 물안개가 뽀얗게 피어올라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내가 백사장에 도착했을 때 캔즐리는 모래더미에 누워 있었다. 캔즐리가 번민으로 기운이 빠져서 백사장에 누웠다가 일어선 뒤다. 한참 시선을 허공에 두며 마음을 정리한 뒤에 입을 열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천수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의 어스름 무렵의 백사장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있던 바닷바람이 기승을 부리며 일어섰다. 그러더니 광막한 백사장을 향해 연이은 파동을 일으키며 몰려들었다. 벌써부터 백사장 변두리에서 서성거리던 천수가 마침내 캔즐리를 발견했다. 캔즐리를 향해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천수가 신호를 보냈다.

   마음은 부들부들 떨렸지만 캔즐리가 조심스레 천수에게로 다가갔다. 천수는 안타까움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붉혔다. 캔즐리는 천수의 속내를 몰라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불안한 마음으로 캔즐리가 천수를 바라볼 때였다. 28살의 천수가 결단을 내리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캔즐리를 향해 말했다.

   “무척 가슴이 타.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들어줘. 오늘 이후로는 너를 다시는 찾지 않을게. 어떻게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니?”

   천수로부터 제안 내용을 들은 뒤였다. 캔즐리가 호흡을 가다듬고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를 제안이었다. 맨 정신으로는 쉽게 착수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하지만 캔즐리는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혀 숙고해 보기로 했다.

   썰물이 빠져 나간 탓이었으리라. 광막한 백사장에는 물안개가 먹구름처럼 차올랐다. 서너 발 이상의 거리에서는 상대의 형체가 식별되기 어려운 상태였다. 캔즐리는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영원히 천수로부터 벗어나려면 약간의 모멸감은 감수해야 하리라 여겼다. 대략 5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결단을 내린 듯 캔즐리가 광막한 백사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캔즐리의 뒤를 천수가 천천히 뒤쫓았다. 달리면서 캔즐리가 블라우스를 벗어서 백사장으로 내던졌다. 그것을 천수가 달려가며 주워들었다.

   이윽고 캔즐리가 달리면서 브래지어마저 풀어서 백사장으로 내던졌다. 브래지어를 뒤쫓던 천수가 주워들었다. 캔즐리는 상반신을 완전한 알몸으로 드러낸 채 내달렸다. 그녀의 봉긋한 젖무덤이 그녀가 달릴 때마다 탄력적으로 흔들렸다. 그녀가 젖무덤을 드러낸 채 십여 분을 달리던 끝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가 백사장에 쓰러져 나뒹굴었다. 그러다가 이내 캔즐리가 일어섰다.

   그런 그녀의 앞에 천수가 무릎을 꿇으며 천천히 주저앉았다. 캔즐리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천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랫도리는 치마 차림이고 상반신은 완전히 드러낸 모습이었다. 천천히 팔을 내뻗고 거두어들이는 동작이 한국의 전통 춤사위였다. 천수는 금세 황홀한 표정으로 캔즐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가장 느린 박자의 춤사위 동작이 진양조에서 시작되었다. 휘모리 장단을 거치면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춤사위가 격렬해졌다. 천수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캔즐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캔즐리의 춤동작을 멈추게 하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무리 봐도 너는 참 대단해. 너를 완력으로도 갖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하지만 사랑이란 서로의 마음이 통해야 하는 것이기에 내가 물러나마. 다시는 너를 찾지 않을게. 부디 행복하기 바란다. 잘 지내.”

   그녀의 블라우스와 브래지어를 건네주자마자 천수는 백사장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안개더미 속으로 자취를 감추더니 이내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의외로 쉽게 천수가 백사장을 떠나가자 캔즐리의 마음이 오히려 불안했다. 헤어지기 직전까지 적지 않은 애를 먹일지도 모르리라고 예상했다. 그랬는데 깔끔하게 결별하는 자세가 사내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캔즐리는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렇게 천수를 떠나보낸 뒷날이었다. 이번에는 모순스럽게도 캔즐리의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천수를 거절한 게 평생의 후회할 일은 아닌지 두려웠다. 그녀에 대한 천수의 사랑의 감정만큼은 진실한 것이라는 믿음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캔즐리의 취향과 천수의 것은 너무나 달랐다. 그래서 천수의 사랑을 거절했다.

   서서히 그녀가 기력을 찾을 무렵이었다. 그녀의 의식을 뚫고 서서히 자리를 잡는 것은 나의 영상(映像)이었다. 교역원에 들어온 뒤부터 나에 대한 기억을 추슬러 보았다. 언제나 일관된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신뢰감이 일었다. 문제는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의 진정성이라 여겼다. 문득 그녀는 내 마음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

   캔즐리는 마음을 정하자 서서히 내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말한 뒤였다. 한껏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캔즐리가 나를 향해 말했다.

   “내가 들려 드릴 얘기는 남김없이 말씀 드렸어요. 충분히 생각해 보세요. 진정으로 나를 사랑할 자신이 있다면 내게 말해 주세요. 조만간 우리가 해변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는 연락해 주세요. 연락이 없으면 저는 외나로도에서 다시 캐나다로 돌아가고 싶어요. 어쨌든 충분히 생각한 뒤에 연락 주세요. 그 때 내 마음을 알려 드릴게요.”

   캔즐리로부터 도전적인 발언을 들은 날이었다. 내겐 심한 마음의 상실감과 좌절감이 일시에 밀려들었다. 결점이라곤 전혀 없을 듯한 여인이 창녀로 생활했다니? 얼마나 매혹적이었으면 천수가 캐나다에서 한국까지 그녀를 찾아왔을까?

   닷새 전, 천수를 만났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외나로도 북동쪽 신금 해수욕장 해변의 백사장에서였다. 오후 6시에 해변에서 만나고 싶다고 천수가 한국말로 전화했다. 시간에 맞춰 내가 차를 몰아 해변으로 나갔었다. 둘이 만나 통성명을 하고 백사장 곁의 음식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음식점에서 자리를 잡고 몇 잔의 술을 마신 뒤였다. 천수는 온통 괴로움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심한 좌절감에 빠졌어요. 내일 저녁 시간이면 비행기로 한국을 떠납니다. 내 괴로움을 누군가에게 꼭 털어놓고 싶었어요.”

   그리하여 하루 전날 캔즐리를 만난 일에 이르기까지 내게 말했다. 나한테는 캔즐리가 백사장에서 반라의 몸으로 춤을 추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어쩌면 살아 있는 신이 그런 일을 했을까하고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천수의 표정을 보니 허황된 말만은 아닌 듯싶었다. 천수의 긴 얘기를 들은 직후였다. 나는 캔즐리가 얘기하지 않으면 천수의 얘기는 비밀로 붙이기로 작정했다. 괜히 캔즐리의 약점을 캐낸 기분이어서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씁쓸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눈 뒤였다. 천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백사장을 떠나갔다. 나는 천수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의 잔영을 지켜보았다.

   백사장에서 사라져 가는 천수를 바라볼 때였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언뜻 떠올랐다. 나한테는 캔즐리에 대한 연정은 없는지 의문이 생겼다. 내가 그녀를 활신으로 대한다는 자체에 이미 연정이 담겼으리라고 여겨진다. 내가 캔즐리에게 연정을 내보였다가 거절당했더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나 역시 깔끔한 모습으로 단념하고 떠날 수 있었겠는지? 왠지 자신이 없어졌다. 그러한 내가 천수보다 못하다는 느낌이 들면서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일로 마음이 쓸쓸해지자 마음이 마냥 비감스러워졌다. 백사장에서 자취를 감추는 천수의 모습이 미래의 내 모습은 아닐는지? 나라고 하여 캔즐리의 취향에 맞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랬기에 마음이 더욱 신산스러웠다. 이제라도 백사장을 끝까지 달려 나가 천수를 만나고도 싶었다. 그리하여 캔즐리를 포기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를 묻고도 싶었다.

   천수가 캔즐리와 작별한 백사장이다. 이후에 천수가 나하고도 작별한 신금 해수욕장의 백사장이다.

   시계를 들여다본다. 오후 6시를 갓 넘어서는 시점이다. 백사장의 상공에는 저녁놀이 잔뜩 붉게 깔려 있다. 바람결이 휘몰릴 때마다 자줏빛 공작의 깃털처럼 저녁놀이 나부낀다. 해변에는 사방에서 습기 찬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아마도 밀려나간 바닷물의 영향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점차 안개가 농밀해지더니 지척의 거리도 안 보일 지경이다. 나는 잠시 긴장을 하며 캔즐리의 행적을 찾는다. 조금 전까지도 시야에 와 닿았는데 물안개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나는 백사장을 향해 다가서며 사방을 둘러보며 그녀를 찾는다.

   한참 사방을 둘러보며 이리저리 헤맬 때다. 느닷없이 신음소리 같기도 하고 울음소리 같기도 한 음향이 들린다. 몹시 아픈 것을 억지로 참는 듯한 음색이다. 음색만으로도 나는 캔즐리임을 알아차린다. 나는 당황하여 급히 고함을 질러댄다.

   “캔즐리, 어디에 있어요? 대답해 줘요.”

   잠시 망설이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응답 소리가 들린다.

   “청환 씨, 이쪽이에요. 조금만 더 앞으로 오세요.”

   짙은 안개를 뚫고 나가니 캔즐리가 모래더미에 앉아 훌쩍이고 있다.

   캔즐리의 훌쩍이는 모습을 바라본 순간이다. 천수로 인한 간접 결별로 가뜩이나 캔즐리에게 주눅이 든 상태다. 그런 판국에 캔즐리의 훌쩍이는 모습을 대하니 그만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 무슨 요인이 캔즐리를 울적하게 만들었는지 원망스러운 기분이다.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생각할 수 있는 전부를 생각하고 싶다. 이승에서는 보기 힘든 환상적이고도 절세적인 미모. 따사로운 햇살처럼 언제나 입가에 서리는 포근한 미소. 그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는 경이로운 절제력. 몇 번을 만나도 처음과 같은 따사로운 표정을 짓는 일관성.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매료되지 않을 수 없는 여인이라 생각된다. 이런 여인이 훌쩍이고 있다니? 혹시 불길한 징조는 아닐지 두렵다. 게다가 새벽의 전화에서도 사흘째 번민하다가 전화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녀의 고통이 뭔지는 몰라도 최소한 백사장에서만이라도 보살펴 주고 싶다.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스레 그녀의 표정을 살핀다. 하지만 캔즐리는 망연히 모래바닥만 바라본 채 눈물을 그치지 않는다. 그녀가 한동안 모래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입술을 깨물며 일어선다. 그러더니 내 앞에서 얇은 외투를 벗는다. 그러자 놀랍게도 전신이 훤히 노출되는 투명한 잠옷이 드러난다. 잠옷 속에는 브래지어나 팬티마저 제거된 상태다. 그녀는 투명한 천 한 겹으로 알몸을 감싸고 있을 뿐이다. 봉긋하게 탄력적으로 돌출한 젖가슴과 사타구니의 치모가 선명히 드러난다.

   여인은 서서히 신발마저 벗어 던진다.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몸을 돌리기 시작한다. 점차 빠른 속도로 몸을 돌리더니 가쁜 숨을 토하며 나뒹군다. 해풍이 수시로 밀려들어 망사 같은 그녀의 잠옷자락을 걷어 올린다. 그럴 때마다 까만 치모가 가려졌다가 드러나기를 반복한다.

   모래바닥에 나뒹군 그녀를 대할 때다. 마음이 처참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녀를 안아 일으켜야 할지 고개를 돌려 달아나야 할지 신산스럽다. 차라리 달려들어 그녀의 잠옷을 벗기는 게 사내답겠다는 느낌마저 든다. 어쩌다 이런 지경에 빠졌는지 내 자신이 원망스럽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헤어나자면 뭐라도 말을 해야만 할 처지다. 하지만 언어의 머리는 이미 바람에 잘려 나가 버린 듯하다. 생각할수록 착잡한 심정이라 차라리 죽고 싶을 지경이다.

   내가 고뇌에 휩싸여 버둥거릴 때다. 캔즐리의 싸늘한 목소리가 내 귓전을 파고든다.

   “청환 씨, 이게 내 실상이에요. 벗어나고 싶기는 한데 고뇌가 너무 무거워 감당이 되지 않아요.”

   그녀와 숱하게 나누었던 언어의 편절들이 바람에 표류하며 의식으로 밀려든다. 나더러 어쩌라고 나한테 알몸을 드러낸 걸까?

   이 때다. 섬광처럼 어떤 생각이 내 의식을 스쳐 지나간다. 위기에 내몰린 심정으로 그렇게 하는 길밖에는 방법이 없겠다고 여긴다. 내 생각에 확신을 가지자 나는 그녀를 향해 달려든다. 그녀의 서늘한 눈빛이 내 눈을 응시하고 있다. 내 동작의 어떤 부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겠다는 눈치로 비친다.

   나는 달려가 그녀를 단번에 가슴에 안아 든다. 혹시 그녀가 거부하는 몸짓을 할지라도 과감하게 안으리라고 작정했다. 그랬는데 그녀는 일체 반항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표정을 보니 오히려 평온한 느낌이 전해진다. 그녀를 안아 들고는 천천히 백사장을 거닐며 입을 연다.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서 일침을 놓은 행위라 여겨요. 하지만 나는 적지 않게 놀랐어요. 내게 시간을 주지 않을래요? 백사장을 벗어날 때까지만요.”

   캔즐리가 의외로 담뿍 미소를 머금으며 응답한다.

   “백사장을 벗어나기 직전까지 마음의 정리가 가능하세요? 정말 놀라운 생각이 드네요. 나 같으면 몇 달이 흘러도 쉽지 않을 거예요.”

   아무리 날씬한 여인이라고는 하나 점차 팔에 체중이 느껴진다. 나는 벌써부터 완력에 한계를 느꼈기에 그녀를 내려놓는다. 그리하여 그녀와 나란히 백사장을 거닐며 대화를 나눈다. 암울했던 과거를 지녔지만 새롭게 비상하려는 의지를 높이 평가한다. 게다가 천수를 만나던 날의 얘기를 조금도 숨김없이 말하지 않았던가?

   참으로 과거를 진솔하게 반성하고 새롭게 비상하려는 자세라고 여긴다. 이럴진대 과거의 허상을 문제로 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생명이 붙어 있는 그 언제까지라도. 이런 마음을 조심스레 그녀한테 전할 때다. 그녀가 파르르 몸을 떨며 내 마음이 진정이냐고 묻는다. 내가 결연한 자세를 취하며 진정한 마음이라고 응답한다.

   캔즐리가 활짝 미소를 짓더니 나를 향해 팔을 벌리며 말한다.

   “나의 과거마저도 완전히 받아들일 자신이 있으세요? 숱한 사내들과 육정을 나눈 과거 말이에요. 만약 조금이라도 께름칙하게 여긴다면 지금이라도 저를 단념하세요. 괜히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후회하지 마시구요. 과거를 초월하여 나를 받아들인다면 나도 진정한 사랑을 당신께 바칠게요.”

   먹먹한 정서를 추스르며 나도 팔을 벌려 다가가 그녀를 껴안는다. 캔즐리의 얘기를 듣는 순간이다. 과거의 자취는 의식의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관념을 지닌 나다. 색정 탓이 아니라 생계 해결을 위한 수단이지 않았던가? 과거의 공간으로 스러진 그 수단을 문제로 삼고 싶지는 않다. 추호라도 말이다. 잠시 포옹을 풀고 내 마음을 진솔하게 캔즐리에게 전할 때다.

   그녀가 하늘과 바다를 한껏 바라보더니 나를 향해 마주 선다. 그리고는 천천히 양 손을 내게로 내민다. 그녀의 뽀얀 피부에 드러난 파란 정맥이 애잔하게 가슴으로 밀려든다. 살아 보겠다고 마음에도 없이 몸을 열었을 여인의 슬픔이 소용돌이친다. 숱한 밤을 번민으로 가슴 태웠을 여인의 과거가 먹먹하게 느껴진다. 슬픔과 서러움의 덩어리였을 여인이 재기하려는 정신을 지녔다는 사실이 감동스럽다.

   생각이 여기에 미쳤을 때다. 내 가슴에 시린 바람결이 느껴지며 콧등이 시큰거린다. 나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에 눈물이 가득 실린다. 그녀의 시린 과거가 너무나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의 격랑을 알아챘음일까? 나를 바라보는 캔즐리의 눈가에도 파르스름한 물기가 맺힌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가 서로의 눈으로 스며들 찰나다.

   급기야 그녀의 눈시울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그녀의 눈물을 본 순간이다. 서슬 퍼런 슬픔이 왈칵 가슴으로 밀려든다.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 둘이 왈칵 달려들어 서로를 껴안는다. 천 년 전에 약속된 만남인 듯 마구 가슴이 저려든다. 눈물로 얼룩진 서로의 뺨을 더듬으며 밀어(密語)를 토해 낸다. 캔즐리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청각으로 밀려든다.

   “청환 씨, 당신에게 오기까지 먼 하늘을 날았어요. 먹구름과 안개가 짙게 낀 하늘이었는데도 의외로 밝은 햇살을 만났어요. 비로소 당신을 마음 편히 바라볼 수 있게 되어서 행복해요. 이제부턴 내 사랑의 정화를 당신한테만 바칠게요.”

   캔즐리의 말을 듣는 순간이다. 문득 의식계로 난기류를 만나 줄곧 추락하던 비행기의 환영(幻影)이 펼쳐진다. 여태껏 수직으로 낙하하던 비행기가 다시 안정한 항공로로 진입한다. 급격히 지상으로 곤두박질하던 기체가 가뿐히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다. 조종간을 움켜쥐고 미소 짓는 나의 모습이 물결처럼 일렁댄다. 왈칵 피부에 와 닿는 해풍에 환영에서 깨어나 백사장을 둘러본다.

   홀연 어디선가 어선의 뱃고동 소리마저 은은히 들린다. 점차 바닷물이 발밑에 느껴지기 시작한다. 바닷물이 많이 밀려든 느낌이다.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그녀의 몸에 외투를 입힌다. 그리고는 그녀와 나란히 해변의 승용차로 다가선다. 여태껏 잔뜩 몰려 있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한다. 연안에 정박한 어선에서 흘러드는 불빛이 시야로 흘러든다. 그러면서 장중한 남해의 파도소리가 청량하게 귓전을 파고든다. 마치 앞날을 축하하려는 듯이 갈매기 떼가 눈송이처럼 비상한다.

<200자 원고지 8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