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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색 노선

                                                                                         손 정 모

   덜컹대는 창문을 여니 새벽달이 후원(後園) 동백나무 잎사귀에 걸려 있다. 갑자기 애잔한 마음이 들며 발걸음을 베란다로 옮긴다. 조심스레 베란다 창문도 천천히 연다. 차가운 12월 중순의 공기가 세차게 실내로 밀려든다. 하늘의 조각달을 올려다보며 노란 종이의 문구를 떠올린다.

   그대의 신통력, 하도 유명하다기에 밤중에 용왕묘에 들렀습니다.

   하늘의 선녀를 놓치기 안타까워 잠든 그대의 입술만 훔쳤습니다.

   저를 찾아 반려자가 될 만한지 판정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혹시나 못 찾을까 다소 우려되기에 우측 엄지의 지문을 남깁니다.

                                   - 백운 도사 -

   스스로 도사(道士)라고 밝힌 사내의 신원(身元)이 궁금하다. 밤중에 용왕묘(龍王廟)에 들렀다는 자체부터도 신비롭게 느껴진다. 용왕묘는 해안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세운, 굿을 하는 집이다. 용왕을 모신 신당(神堂)을 비롯하여 무녀(巫女)들이 거주하는 침실로 이루어져 있다. 용왕묘는 두 채의 기와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에는 용왕을 모신 신당이 있다. 사랑채는 침실 3개와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무녀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사랑채의 침실은 모두 남향이며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 사랑채의 침실마다 베란다가 달려 있다. 용왕묘 둘레로는 벽돌 담장이 에워싸고 있다.

   베란다의 문을 닫고는 옆 방 문을 열어 본다. 나와 동갑인 윤희가 잠들어 있다. 윤희와 나는 해변에 위치한 함평군 학산리 신안 마을의 무녀다. 아마도 늦게 들어온 윤희가 출입문을 잠그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기에 간밤에 불청객이 찾아든 모양이다. 대문과 사랑채의 출입문을 잠그고는 침상에 누워 잠자리에 든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는 마당을 쓴다. 그리고는 마당에서 중국식 체조인 태극권(太極拳)을 시연하기 시작한다. 전체 동작을 다 마치려면 대략 6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다. 부드러운 동작에 내재된 폭발적인 기운이 내게는 흥미의 대상이다.

   ‘폭발’이란 단어를 떠올리자 가슴속으로 화산(火山)의 영상이 밀려든다. 수천 도의 고열로 들끓는 마그마(magma)를 내뿜다가 형성된 산을 말함이다. 내 삶의 방향이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현대와 무녀라는 직업이 조화를 이루는 것일까? 나로 하여금 무녀의 길로 매진하게 만든 근원은 무엇인가? 생각할수록 내 발 밑에는 뜨거운 마그마가 요동치는 느낌이 든다. 언제 굉음을 터뜨리며 나를 함몰시킬지 불안하다. 점점 거무스레한 마그마의 덩어리가 발 아래로 몰려드는 기분이다. 점차 내 심장이 차갑게 굳어지려는 예감이 전해진다. 해풍이 강하게 휘모는가 싶자 추녀의 풍경이 일제히 소리를 낸다. 쟁그랑 쟁그랑. 풍경소리로 인해 나를 억압하던 마그마의 환상이 스러진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운동을 마무리 짓는다.

   운동을 마치고는 윤희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한다. 윤희와 나는 서울의 W대학교를 졸업했다. 윤희는 동양 철학과를, 나는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3학년 때였다. 둘은 65살의 스승인 운중신녀(雲中神女)의 강신굿으로 무녀가 되었다. 2년간의 혹독한 수련을 거쳐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용왕묘의 무녀로 배정받았다.

   내 나이 스물다섯 살. 무녀가 된 지 5년째에 접어든다. 윤희와 거실로 나와 컴퓨터를 켠다. 윤희는 거실의 책상 앞에 눈을 감고서 단정히 앉는다. 아마도 두 시간 동안 접신(接神) 수련을 할 것이다. 접신 수련은 무녀에게는 가장 중요한 수련 과정이다. 나는 컴퓨터에서 인터넷 지도를 검색한다. 인터넷에서 위성 지도를 펼친다. 지도의 배율을 달리하며 지도에 주사(走査)되는 진동수를 헤아려 본다. 지도를 이루는 화면(畵面)은 화소(畵素)라는 단위체의 복합체로 구성된다. 화면을 나타내려면 몇몇의 화소를 묶어서 전기 신호로 보내야 한다. 전기 신호는 전자기파인 빛에 실려 발신된다. 내가 하는 일은 인터넷 화면에 주사되는 빛의 진동수. 그 진동수 값을 알아내는 작업이다. 가시광선과 가청 주파수 범위의 음파는 인간의 뇌파(腦波)로 분석이 가능하다. 여기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나는 대학의 전자공학에서 익혔다.

   대학 2학년 때의 여름철이었다. 서울에서 부업으로 학원 강사로 뛰다가 잠시 고향에 들렀을 때다. 고향인 경남 산청에서 부모님과 닷새 동안을 함께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집 앞의 경호강(鏡湖江) 다리를 건넜다. 다리만 건너면 마을로 내려서게 되는 지점이었다. 느닷없이 여인들의 이야기 소리가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내일 아침부터 폭우가 내릴 거야. 내일 밤에는 저 다리 밑에서 여러 명이 죽을 거야. 넌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기는? 죽을 때가 되면 당연히 죽어야지 뭐.”

   나는 고개를 급히 휘둘러 다리 주변을 살폈다. 그렇게 캄캄한 밤이 아니었는데도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다리 아래쪽까지 내려가 봤지만 어디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갑자기 전신에 무서움증이 밀려들었다. 거기서부터 얼마 안 되는 거리의 집까지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다리 부근에서 들었던 말을 집의 부모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우선 나 자신부터 못 믿을 정황이기 때문이었다.

   그 이튿날이 되자 정말 아침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점심나절에 부모가 산청 읍내의 혼사에 참가한다며 다리 건너로 외출했다. 하늘에서 물통으로 물을 들이붓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정오를 넘겨서도 여전히 폭우는 계속해서 쏟아졌다. 그 날 저녁 7시경이었다. 읍에서 마을로 진입하던 완행버스가 다리 난간을 들이받으며 강으로 추락했다. 강물이 불어 버스가 물속에 잠긴 채 떠내려갔다. 그러다가 버스가 물살에 떠밀려 물속에서 뒹굴며 굴러갔다. 결국 23명의 마을 사람들이 죽고 말았다. 23명의 사망자 속에는 놀랍게도 나의 부모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날의 사고 이후부터였다. 나는 서울의 숙부 댁에 머물게 되었다. 친척이라곤 유일하게 숙부 내외가 있었을 따름이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회한으로 남는 게 있다. 경호강 다리에서 귀에 들린 말을 부모에게 전했다면 부모는 살았을까? 외출을 말리려고 나섰다면 부모는 외출하지 않았을까? 집에만 머물러 있었다고 해서 경호강 다리를 건널 일은 없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해답을 들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겨진다.

   경호강 다리의 사건 이후부터였다. 나는 죽은 영혼들인 영가(靈駕)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사고 전 날에 들렸던 말은 영가들의 언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영가들이 아니고서야 사고를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리라 믿었다. 그래서 점차 전자공학에서 무속(巫俗)으로 전공의 영역을 바꾸게 되었다.

   나는 15평의 거실 공간을 둘러본다. 윤희는 여전히 단정히 앉아 접신 수련을 하느라 몰두하고 있다. 나는 지도 축적비에 따른 주파수 감응 수련을 반복한다. 감응 수련이 제대로 되어야만 접신 수련도 원활하게 이루어진다. 내가 무녀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세상을 떠난 부모 때문이다. 딸이란 인연을 통해 부모의 영가를 편안한 곳으로 안내하고 싶었다.

   마루를 통해 마당을 건너온 향 냄새가 콧속으로 밀려든다. 안채 신당의 향로에 피운 향내가 마당을 건너 사랑채로 흘러든다. 안채인 신당에는 운세를 보려는 사람들이 올 때에 건너간다. 그 이외에는 윤희와 사랑채의 거실에서 끝없는 수련을 한다. 운세를 봐 주고 얻는 복채는 윤희와 공평하게 나눈다.

   대문에 매달린 요령 소리가 나더니 다섯 사람이 마당으로 들어선다. 운세를 보러 온 사람들이다. 윤희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 손님들을 맞는다. 눈빛은 따사롭게 목소리는 우아하게. 윤희와 내가 거의 동시에 입을 연다.

   “어서 오세요. 운세 보러 오셨죠? 저랑 같이 신당으로 갑시다.”

   인원은 5명이지만 가족으로는 두 가족이다. 한 가족 3명은 내가 맡고, 2명 가족은 윤희가 맡는다. 무녀 생활을 한 지 이미 5년째다. 고객이나 매스컴의 광고를 통하여 윤희와 나는 꽤 알려진 무녀들이다. 연중 용왕묘의 출입문은 닫힐 날이 없다.

   “손님들은 이쪽으로 앉으세요. 어느 분부터 운세를 보시겠습니까? 자, 그럼 음력 생년월일과 출생 시각을 알려주세요. 여기 종이에 적어 주셔도 됩니다.”

   손님들의 관상. 운세를 보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사항이다. 손님들의 감춰진 눈빛을 빨리 읽어 내어야 한다. 교묘히 위장하려는 눈빛을 분석하지 못하면 운세의 판독이 어려워진다. 사람들은 자신의 시선이 운명을 예지하고 있음을 잘 모른다. 자신은 자신의 눈빛을 모르지만 상대에게는 쉽게 간파될 수 있다. 영혼의 기능이 가장 섬세하게 작용하는 곳이 시신경이 몰린 부분이다. 쉽게 말해 눈빛에 개개인의 미래의 진로가 제시되어 있다. 감춰진 눈빛을 잘 판독해야만 유능한 무녀가 될 수 있다.

   50대 중반의 여인이 장남에 대한 운세 풀이를 부탁한다. 나는 장남을 얘기하는 순간부터의 여인의 눈빛을 쫓고 있다. 눈빛의 암영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지켜본다. 색채가 뚜렷하지 않다. 허공으로 잠겨 버리는 모래바람 같은 느낌이다. 금방 접신이 가능할 것 같다. 자신감이 서면 입에서 자연스레 신장(神將)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게 된다.

   운세 풀이를 하는 중에 또 다른 영혼이 뇌파에 잡힌다. 이런 일은 금기(禁忌)에 속하는 일이다. 즉시 접신을 중단해야 한다. 접신을 당장 멈추지 않으면 감응 중추부에 손상을 입게 된다. 접신을 멈추게 되면 손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게 된다. 난감한 상황에서 약간 무리한 시도를 하기로 한다. 두 영혼을 동시에 영접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무녀로 일한 지 처음 당하는 일이다. 추가로 감응된 영혼은 30대 초반의 미남형의 사내다.

   느낌만으로도 전신이 짜릿할 정도의 미남이라 여겨진다. 현실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외모다. 비록 일방적이긴 하지만 나는 사내의 움직임을 지켜보기로 한다. 반면 50대 중반의 아주머니한테는 신장의 예언을 들려준다. 아무래도 늦게 감응된 사내의 영향이 크다. 아주머니 일행에게 운세 풀이를 빨리 끝내고는 배웅한다. 배웅한 뒤에 자리에 앉아서는 뇌파에 달라붙는 사내의 영혼에 감응한다. 내가 한껏 우아한 표정으로 미소를 실어 보낸다.

   사내의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이 대번에 느껴진다. 나는 재차 미소를 짓는 표정을 뇌파에 매달린 사내에게 보낸다. 느닷없이 격렬한 진통이 내 머릿속으로 몰려든다. 단순히 육체적인 불균형에서 생기는 진통이 아니다.

   일주일 전의 금요일이었다. 출항하는 원양 어선단에서 용왕제를 올려달라고 신청해 왔다. 토요일 저녁 6시부터 태안 앞 바다에서 굿을 시작했다. 자정 무렵이 되어서야 행사가 끝났다. 1,500만 원의 대금을 받고 진행한 행사였다. 무녀로는 스승과 윤희와 나의 셋이 참여했다. 남자 무당인 박수로는 2명을 일시적으로 고용해서 행사를 치렀다. 행사가 잘 끝나서 스승을 택시에 태워 태안읍의 숙소로 보냈다. 윤희와 나는 해변에 가까운 모텔 방을 구해 들어갔다. 피곤하다며 윤희는 세수를 하자마자 금세 잠들었다.

   나에게는 해변의 파도소리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모텔 부근의 해변을 잠시 걷다가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그래서 간편한 차림새로 해변의 백사장으로 걸어 나갔다. 백사장을 조금 걸었을 때다. 울창한 해송(海松) 수풀 아래에서 사내들의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로 판단해서는 꽤 술이 취한 듯했다. 걸으면서 조금 더 귀를 기울여보기로 했다.

   “물체가 등속 원운동을 하려면 일정한 힘이 실려야 되잖아요? 위성이 지구 둘레를 등속도로 돌려면 위성에게 일정한 속도를 부여해야겠죠? 이런 기능은 위성을 실은 로켓에 의해 결정이 돼요. 지난번의 나로호 발사가 실패한 요인이 페어링 문제라고 했는데 의심스러워요. 아무래도 나의 관점으로는 2단 로켓인 킥 모터의 결함이라 여겨져요.”

   다소 깐죽거리는 맵시로 응답하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로 판단해서는 20대 후반의 청년들 같았다.

   “항공우주 연구원에서 그렇게 발표했으면 믿어야죠.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어요?”

   그러다가 사내들의 말이 뚝 끊겼다. 내게 갑자기 궁금증이 밀려들었다. 허리를 굽혀 살금살금 해송 숲으로 파고들었다. 모래사장의 바닥을 뒤덮은 다복솔의 솔가지를 젖혔을 때다. 나는 일시에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발가벗은 두 사내가 엉겨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궁둥이에 자신의 성기를 삽입하여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만화책에서나 보던 엽기적인 장면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 곧바로 모텔로 되돌아왔다.

   모텔 침상에 드러누웠어도 청년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애인이 없어서 사내들끼리 성행위를 한다는 말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사춘기 학생들이어도 문제였을 텐데, 20대 후반의 나이라면 심각하다고 여겼다. 대화 내용을 들어 봐도 상당한 엘리트로 여겨진 청년들이었다. 참으로 세상은 희한하다고 생각하다가 잠들었다.

   오후 5시 무렵까지는 운세를 보러 손님들이 용왕묘를 찾는다. 하루 소득이 많을 때는 250만 원에 이를 때도 있다. 내가 선택한 직업에 대해 만족감을 느낄 정도다. 다만 기복이 심한 것이 결점이라면 결점이다. 윤희와 나는 동갑인 25살의 처녀다. 윤희에게는 교제하는 사내들은 많은데 애인은 없는 모양이다. 슬쩍슬쩍 비치는 내용만 듣고도 충분히 정황이 파악되기 때문이다. 윤희는 성(性)에 대해서도 상당히 개방적인 성향을 보인다. 하지만 사내들이 떠나갈 때마다 무척 괴로워하곤 했다.

   오후 6시 무렵무터 나는 다시 인터넷 지도를 펼친다. 염력(念力)을 발산하여 지도 축적비에 따른 주파수를 식별하는 수련을 한다. 지도의 화면을 외나로도(外羅老島)로 이동시켜 본다.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의 일부인 섬이다. 외나로도의 동쪽 해안에 우주 센터가 자리 잡고 있다. 우주 통제동 건물로 지도를 이동시켰을 때다. 어쩐지 강력한 감응(感應)이 느껴진다. 이전과는 아주 다른 세기이다. 눈을 감고 이유가 뭣인지를 궁리해 본다.

   문득 닷새 전의 장면이 연상된다. 용왕묘에서 500미터 떨어진 거리에는 마을의 항구인 함평항이 있다. 인근의 목포나 별처럼 깔린 섬으로 출항하는 배가 드나드는 곳이다. 초저녁에 마을 산책을 하는 것은 나의 습관 중의 하나다. 5톤급의 작은 어선이 선착장에 막 도착하고 있었다. 어선에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 혼자만 눈에 띄었다. 최소한 네댓 명씩은 어울려 배를 타기 십상이다. 그랬는데 혼자서 배를 몬 청년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청년이 누구인지 보려고 발걸음을 어선 쪽으로 옮길 찰나였다. 청년이 돌연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말한다.

   “안녕하세요? 용왕묘의 무녀님이시죠? 오늘은 제가 선물을 드릴게요.”

   청년은 말과 함께 비닐봉지를 내게 내밀었다. 비닐봉지를 받아들고 보니 물고기가 봉지에 그들먹했다. 배낚시를 통해 건져 올린 것이라고 했다. 마을의 주민들은 웬 만큼 아는 편인데 청년은 낯설었다. 그래서 내가 청년을 향해 말했다.

   “선물 고맙게 잘 받겠습니다. 그런데 댁은 처음 보는 느낌이 드는데요? 어디 계셨다가 오셨어요?”

   역시 예상한 대로의 대답이 들렸다. 마을 주민임에는 틀림없는데 줄곧 객지 생활을 해 왔다고 한다. 얘기를 듣고 보니 작년도의 마을 반장의 아들이었다. 청년이 저녁 식사를 함께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항구가 딸린 작은 마을이라 사람들의 소문이 두렵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청년에게 윤희와 함께 셋이서 식사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청년이 좋다며 활짝 웃었다.

   항구 부근의 작은 음식점에 들어섰다. 조기 매운탕을 시켜 저녁을 먹으며 셋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윤희와 나는 청년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청년이 저녁을 사는 것에 대한 예우 차원이기도 했다. 청년은 29살의 석유화학 회사원인 장태민(張泰珉)이라고 자신을 밝혔다. 전남의 여천공단에서 근무한다고 했다. 주로 주말에만 마을을 찾아왔다.

   태민에게는 근래에 꿈자리가 부쩍 사나워졌다. 10년 전에 함께 배낚시를 하다가 실족해서 태민의 사촌형이 숨졌다. 그 사촌형이 근래에 부쩍 꿈에 나타나서 태민을 괴롭혔다. 태민에게 욕을 하며 심지어 주먹질까지 해댔다. 반복되다 보니 꿈인 줄 알면서도 괴롭힘을 당했다. 아무래도 그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사촌형이 실족했던 곳으로 배를 몰고 갔다 왔다고 들려준다. 그러면서 무녀인 나와 윤희에게 물어볼 참이라고 말했다. 음식점을 빠져 나오면서 태민의 생년월일과 출생 시각을 물었다. 그리고는 조만간 대답을 들려주겠다고 말했다.

   태민의 생각이 떠오르자 내가 윤희에게 묻는다.

   “태민의 꿈자리 문제를 알아봤어? 본인한테 원인을 알려주어야지. 네 생각은 어때?”

   내 말을 듣자마자 윤희가 내게로 다가오며 입을 연다.

   “각박한 현실로부터의 도피 욕구가 사촌형의 죽음으로 형상화되었을 뿐이야. 10년이 지나서 사촌형의 꿈을 꾼다는 자체가 도피 욕구를 의미해. 네 생각은 어때?”

   나는 윤희의 말을 듣는 내내 흡족한 마음이 든다. 전문가의 관점은 같다는 말을 떠올리면서. 나는 곧바로 윤희에게 응답한다.

   “내 생각과도 정확히 일치해. 현실에 대한 적응을 제대로 하도록 대책까지 제시해 주자구.”

   사흘 전 무안군의 용왕제 행사 때였다. 바다를 다스리는 용왕에게 풍어를 기원하는 대규모의 굿판을 벌였다. 많은 동네 사람들과 타지에서 온 구경꾼들이 굿판을 지켜보았다. 행사가 지속되는 동안에도 무리에서 멀리 떨어져서 구경하는 사내가 있었다. 처음에는 예사로 여겼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궁금증 섞인 호기심이 생겼다.

   ‘구경하려면 가까운 데서 할 일이지 왜 떨어져서 볼까?’

   굿판을 벌여 접신하는 과정에서는 정신을 몰입시켜야만 했다. 접신 과정이 끝나고 의식이 현실로 돌아올 찰나였다. 딱 두 번 머리에 심한 통증이 일었다. 떨어져서 나를 바라보던 사내가 그 때마다 허청댔다. 내가 통증을 느낄 때마다 허청댔던 사내에게 의구심이 일기 시작했다. 내 뇌파의 진동수에 감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었다. 행사가 끝날 무렵에는 꼭 사내를 만나보겠다고 작정했다.

   헌데 행사가 끝났을 때, 사내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소중한 것을 상실한 듯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틀 전의 자정 무렵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우주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과학 특집물을 방영하고 있었다. 무심코 화면을 지켜보던 중이었다. 위성을 정해진 궤도로 유도하는 선진 기술들이 소개되었다. 과학에 관한 것이라 나도 관심을 기울여 들었다. 어느 순간이었다. 청년 연구원의 옆 모습이 흐릿하게 비쳤다. 모자이크 처리 방식에 대응하는 영상이었다. 목소리만은 변조되지 않은 청아한 음색이었다.

   묘한 것은 청년 연구원의 인상에 낯익은 면이 느껴졌다. 비록 흐릿하게 처리된 옆 모습에 불과했지만. 청년 연구원의 말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위성을 일정 궤도에 묶어 두려면 부단히 통제해야 한다. 위성을 통제하는 수단은 위성에서 방출되는 전자기파다. 전자기파는 빛(light)이라 불리는데 위성 통제소와 수시로 정보를 나눠 갖는다. 위성 통제소에서 방출한 빛의 주파수와 동일한 주파수를 위성이 찾는다. 동일한 주파수를 골라내는 현상을 동조(同調)라고 한다. 위성은 동조된 광선이 이끄는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

   설명을 듣던 중에 내게 돌연한 생각이 떠올랐다. 무녀가 영가(靈駕)나 영혼의 주파수와 동일한 주파수를 찾아내는 현상이 접신(接神)이다. 접신과 동조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연구원의 옆 모습이 사흘 전 굿판의 사내와 닮았다고 생각된다. 굿판에서 내가 크게 통증을 느꼈을 때 사내도 허청거렸음이 생각난다. 혹시 사내가 우주 센터의 연구원이 아니었을까? 위성의 궤도를 유도하는 연구원을 말함이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나는 급히 종이에 메모를 남겼다. 방송사의 이름과 청년 연구원의 연구 분야까지 기록했다. 나는 풀리지 않은 어떤 의문에 대해 거듭 생각했다.

   ‘굿판에서 사내는 왜 멀리 떨어져 있었을까? 단순히 내 시선을 끌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특별히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상념은 다른 상념의 골을 깊게 만드는 법이다. 무녀들이 접신할 때엔 곁의 일반인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일반인들의 뇌파에 대한 감응 능력은 지극히 무디다. 그래서 속 편히 살아가는 이점도 지닌다.

   나는 다시 종이를 펼친다. 내가 유추한 생각들을 옮겨 적는다. 위성 유도의 동조 현상과 접신 현상은 동일한 원리를 갖는다. 사내가 구경꾼들로부터 떨어져 있었던 이유는 구경꾼들을 보호하려는 측면이었을 것이다. 사내는 필시 뇌파를 교란할 정도의 장치를 지녔을 것이다. 휴대용 소형 발진 장치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내가 접신하는 시기만을 골라 발진 장치를 가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생각이 여기까지 정리되었을 때다. 나는 컴퓨터의 인터넷을 통해 우주 센터의 조직도를 들여다본다. 최소한 업무 영역만 파악해도 탐색은 어렵지 않다. 노란 종이에 적힌 별호(別號)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백운 도사(白雲道士)라고? 위성이 지나가는 궤도가 우주 공간이잖은가? 우주 공간의 길을 찾는 사람이 백운 도사의 참뜻이 아닐까? 우주 공간은 먼지를 비롯한 구름을 포함하니까 백운(白雲)이라고 지칭한 걸까? 도사란 도교의 입문생을 말하는 용어다. 하지만 ‘도(道)’의 의미가 길이 아닌가? ‘사(士)’는 선비를 지칭하는 말로서 학식을 갖춘 사람을 나타낸다. 결국 ‘백운 도사’란 ‘위성 유도 전문가’의 비유적 표현이 아닐까?

   태민의 제안으로 토요일 오후마다 배낚시를 하기로 한다. 낚시배는 태민이 몰고 윤희와 내가 함께 타기로 한다. 마을의 함평항에서 직선거리로 23km 떨어진 서쪽 바다. 상낙월도와 임자도의 중간 해역에서 배낚시를 하기로 한다.

   낚시점에서 살아 움직이는 탐스러운 갯지렁이들을 구입한다. 담배 상자만한 종이 상자에 갯지렁이들이 꽉 차 있다. 낚싯대는 태민이가 윤희와 내 것까지 마련해 준다. 셋은 말을 놓고 편하게 지내기로 한다.

   마침내 상낙월도와 임자도의 중간 해역에 도착한다. 태민이 배의 닻을 내린다. 시각은 오후 3시 무렵이다. 밤 7시까지의 4시간 정도는 낚시할 수 있다. 수심과 수온을 따져 보면 잡히는 어종은 노래미와 볼락, 고등어다. 전문 낚시꾼들은 잡어(雜魚)라고 치부하는 대표적인 어종이다. 이들 물고기들은 계절에 무관하게 꾸준히 잘 잡힌다.

   셋이 거의 비슷한 시점에 낚싯대를 바다에 드리운다. 5∼6분 간격으로 꾸준히 물고기들이 낚여 올라온다. 물고기가 낚시에 걸려 바르르 떠는 느낌. 이런 느낌이 전해질 때마다 쾌감에 젖어든다.

   ‘아, 사람들이 이 맛으로 낚시를 하는 거군.’

   셋은 꾸준히 물고기를 낚아 플라스틱제의 아이스박스에 담는다. 태민이 노래미의 입을 벌려 낚시 바늘을 꺼내며 말한다.

   “낚시질을 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야. 낚싯대를 든 신(神)에게 사람이 낚일 때가 사람이 사망하는 때라고. 하늘의 신은 계속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을 거야. 그러다가 인간을 낚을 때마다 쾌감을 느낄 거야.”

   윤희와 내가 거의 동시에 까르르 웃는다. 생각하는 방식이 좀 엉뚱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을 낚아 올려 어디에 사용하겠는가? 황당한 생각이었지만 분위기를 살리는 데는 좋았다고 여긴다. 한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낚시를 하다가 태민이 회를 장만한다. 고무 두레박을 바다에 던져 바닷물을 길어 올린다. 물고기를 바닷물에 씻은 뒤에 칼로 비늘을 벗긴다. 먼저 칼로 머리와 꼬리지느러미를 잘라 낸다. 칼끝을 물고기의 꽁무니에 꽂아 배의 앞쪽으로 들이민다. 배가 갈라지면 창자를 꺼낸다. 다음으로 등뼈도 발라낸다. 그런 뒤에 살을 얇게 칼로 썬다. 스티로폼 쟁반에 물고기회를 가지런히 올려놓는다. 가지고 간 나무젓가락과 고추장을 꺼내 둘러앉는다.

   저녁 7시 무렵이면 닻줄을 감아올린다. 항구에 도착한 뒤에는 음식점에서 저녁을 함께 먹고 헤어진다. 헤어지기 직전에 어떤 영혼의 울림이 내게 전해진다. 내가 태민에게 입을 막 열려고 할 때다. 태민이 먼저 내게 말한다.

   “참, 잊을 뻔했네? 닷새 전에 함평항 부근에서 용왕제를 지냈지? 그 때 나로 우주 센터의 연구원 이십여 명이 몰려왔어. 대부분 구경꾼들에 합류하여 구경을 하더군. 한 사내만 멀리서 줄곧 사진을 찍고 있었어. 굿판을 내내 찍고 있었어. 나중에 그 사내가 나를 불렀어. 자신은 나로 우주 센터의 연구원이라고 밝혔어. 그러면서 그들이 타고 왔다는 차를 가리켰어. 버스에 나로 우주 센터라고 적혀 있었어. 대뜸 너희들을 잘 아느냐고 묻더군. 그래서 그렇다고 대답했지. 그 사내가 내게 너희들의 이름과 내력을 묻더구나. 내가 잘 설명해 주었지. 그랬더니 무척 호기심이 담긴 표정으로 조만간 너희들을 찾아가겠다고 했어. 혹시 만난 적은 없니?”

   태민의 말을 듣자 나의 유추가 적중했음을 알고는 흐뭇하다. 의외로 태민이 확실한 정보를 제공해 줄 줄은 몰랐다. 태민과 헤어져서 돌아오면서 내가 윤희에게 묻는다.

   “네가 어젯밤 늦게 용왕묘에 들어왔었지? 그 때 왜 문 단속을 안 했니? 새벽에 일어나 보니 대문과 사랑채 출입문이 죄다 열려 있었어.”

   윤희가 싱긋 웃으며 말한다.

   “아, 최근에 사귄 남자 애가 엄청나게 술을 좋아하더군. 그래서 함께 취하도록 마셨어. 나중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와서는 그대로 잠들었던 모양이야. 혹시 뭐 잃은 것은 없니?”

   나는 용왕묘에 들어서며 윤희를 향해 재차 말한다.

   “내가 내일은 외나로도의 우주 센터에 좀 다녀올게.”

   윤희가 궁금한 듯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태민이가 말한 연구원 때문이니? 차가운 네 심장에도 불이 붙었나 보군. 잘 해 봐. 내가 지켜봐 줄게.”

   윤희가 먼저 잠자리에 든 뒤다. 나는 컴퓨터를 켜서 우주 센터까지의 거리를 계산해 본다. 대략 200km의 거리로 추정된다. 소요 시간을 대략 3시간으로 잡는다. 다음 날 아침 7시경에 용왕묘를 출발할 작정이다. 나는 우주 센터의 조직도를 다시 한 번 점검한다. 위성 통제부의 연구원 명단을 검색한다. 태민으로부터 들은 정보에 따라 나이도 30대 초반으로 검색한다. 유력한 대상자가 검색된다. 장성준(張誠俊). 위성 궤도 유도의 선임 연구원이라는 직책이 부여되어 있다.

   나는 가만히 미소를 짓는다. 이 정도의 추적이면 충분히 백운 도사를 만나리라 여긴다.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댄다.

   ‘호호호! 백운 도사 장성준님! 내일 아침에 만나기로 해요. 무단 주거 침입죄를 냉혹하게 다스려 드릴 테니까요.’

   나는 잠자리에 들자마자 이내 수마에 휩쓸린다.

   아침에 눈을 뜬 뒤에 윤희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한다. 필요에 의해 내가 작년에 흰색의 승용차를 구입했다. 마침내 승용차의 도움을 받을 때다. 차 내의 내비게이션을 켠다. 이내 소요 시간과 거리가 계산된다. 컴퓨터의 인터넷 지도로 구한 값과 비슷한 값이다. 오전 7시에 외나로도를 향해 승용차로 용왕묘를 출발한다.

   차가 우주 센터에 진입하니 오전 10시 무렵이다. 센터 출입문 입구의 대기소에서 내린다. 방문자의 이름에 서현주(徐賢住)라는 내 이름을 일러준다. 잠시 센터 내부와의 통화가 이루어진 뒤다. 직원이 나에게 내부 전화기를 넘겨준다.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대니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든다.

   “여보세요? 제가 장성준입니다. 혹시 학산리 신안 마을의 무녀님이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곧바로 영접하러 갈게요.”

   밝고 쾌활한 목소리를 듣자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내겐 연인은커녕 이성 친구조차 없었다. 생활이 바빴다는 핑계를 대며 살아왔다. 이제는 내게도 수시로 그리워할 사람이 필요한 처지다. 내 나이 스물다섯 살. 내 나이에 연인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여긴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며 사내를 기다릴 때다.

   곧바로 흑색 승용차가 대기소에 도착한다. 승용차의 문이 열리더니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사내가 내린다. 사내를 바라본 순간이다. 그만 가슴이 마구 두근대기 시작한다. 전형적인 선풍도골형(仙風道骨形)의 귀티가 나는 인물이라 여겨진다. 매스컴에서는 하찮은 얼굴을 두고서도 한류 스타니 꽃미남이니 떠들곤 한다. 척 훑어보는 순간에 밥맛이 떨어질 지경이다. 그랬기에 꽃미남을 들먹이는 사람은 과대망상증 환자라 여겨질 정도였다.

   그런데 사내는 세속에서는 도저히 존재하리라 믿기지 않는 미모를 지녔다. 한 마디로 절세적으로 환상적인 아름다움. 이런 수려한 용모를 갖춘 사내라고 여겨진다. 사내를 본 순간부터 마음의 파도에 광풍(狂風)이 부는 느낌이다. 사내를 봤기에 이제는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사내의 품에 안겨 그대로 죽어 버리고 싶을 정도다.

   ‘아, 완전히 미칠 지경이야. 아무래도 내가 미치지 않고 나로도를 벗어나기는 힘들겠어. 신장님, 제게 이렇게 과분한 복을 내려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신장님의 오른 뺨에만 살짝 뽀뽀를 해 드릴게요, 쪽!’

   이윽고 위성 통제동의 건물 2층에 오른다. 거기에 장성준의 연구실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지난밤에 컴퓨터에서 본 성준의 경력을 떠올린다. 미국 버클리대학교 출신의 공학박사이며, 세계적인 위성 유도 전문가다. 31세의 미혼 남성이며 취미는 패러글라이딩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사진 자료는 없었다. 그랬기에 얼굴은 볼품이 없을지도 모르리라 여겼다. 그랬는데 너무나 환상적인 사내를 만나다니? 게다가 반려자가 되어 주겠느냐며 노란 종이를 남기지 않았는가? 그뿐이랴? 내 입술까지 훔쳤다고 하지 않았는가? 어찌 오늘 내가 미치지 않겠는가?

   성준이 우아한 미소를 머금는다. 나는 자칫 졸도할 지경으로 마음이 흔들린다.

   ‘우와, 환상적으로 우아한 저 미소! 정말 여기서 죽어 버릴까 보다.’

   성준이 나를 향해 말한다.

   “현주 씨의 명성은 매스컴으로 익히 알고 있어요. 지난번에 직접 대면하고 싶어서 용왕묘까지 갔죠. 주무시기에 일방적인 정표만 남기고 나왔어요. 이렇게 빨리 찾아 주리라고는 미처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근무 중입니다. 혹시 제가 싫지는 않으시죠? 바쁘지 않으면 오후 6시에 섬 서쪽의 염포 해변에서 만납시다.”

   성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가 곧바로 응답한다.

   “좋아요, 거기에서 기다릴게요.”

   외나로도(外羅老島) 서쪽의 염포 해변. 석양 무렵의 남해 바다의 절경이 광막하게 펼쳐져 있다. 바다는 황금빛 비늘을 지닌 수천수만 마리의 물고기처럼 눈부시게 파드득거린다. 성준과 나는 나란히 손을 잡고 서쪽 수평선을 바라본다. 천년의 신비를 간직해 온 듯한 파도 소리. 그 파도 소리가 귀청이 얼얼할 정도의 청량한 소리로 밀려든다. 파도가 연신 포말(泡沫)을 흩날리며 해안으로 밀려들었다가 빠지곤 한다. 성준이 나를 향해 황홀한 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너무 환상적인 미모라 첫눈에 선녀(仙女)로 느껴졌어요. 그래서 메모지에까지 선녀라는 용어를 남겼어요. 노란 종이만으로 저를 찾아낸 당신의 능력도 마음에 들구요. 게다가 저를 여기까지 찾아 주셔서 한없이 감격스러워요.”

   나는 성준의 두 손을 마주 잡고 그를 바라보며 말한다.

   “서로의 관점이 다른데도 이렇게 마음을 열어 주어서 고마워요. 우리,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을 나누도록 해요.”

   성준과 내가 서로를 바라보며 팔을 벌려 포옹한다. 성준의 숨결이 가빠지며 속눈썹이 가늘게 떨린다. 나와의 만남이 감격스럽다는 느낌으로 전해진다. 그와 나의 뺨이 닿는 순간이다. 가열된 쇠붙이에 닿은 듯 화끈거리는 열기가 뺨으로 전해진다. 때마침 핏빛으로 달아오른 저녁놀까지도 성준과 나를 포근히 감싸주는 듯하다.

   <200자 원고지 8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