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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선계곡(八仙溪谷)

손 정 모

청정한 하늘이 호수처럼 파랗게 드리워진 가을이다. 지리산을 굽이쳐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청아하기 그지없다. 칠선계곡을 지나 남쪽의 바위 능선을 오르기 시작한다. 발에 느껴지는 지형의 험준함이 예사롭지 않다.

새벽의 잠결에서였다. 눈도 뜨지 못한 채 받은 전화기에서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였다.

“허동현 씨죠?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리산 팔선계곡(八仙溪谷)을 찾으세요. 거기 마검루(磨劍樓)를 방문하면 반드시 해답을 찾을 거예요. 시한은 내일 오후까지예요.”

전혀 낯선 40대 후반의 목소리로 들렸다. 누구냐고 물을 사이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구식 전화기라 발신자 번호마저 알 수 없었다. 위기에 몰린 내 처지를 아는 여인이라 느껴졌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초막(草幕)의 문을 열고 마당에 내려선다. 서울 수락산(水落山)의 외진 골짜기에 세워진 초막이다. 초막 주위에는 소나무와 오리나무가 뒤엉켜 울창하기 그지없다.

나는 마당 언저리에 세워진 사각의 합판을 향해 선다. 합판에서 5미터 떨어진 지점에서다. 주머니로부터 세 자루의 과도(菓刀)를 꺼내 든다. 20cm가량 길이의 칼이다. 마음을 집중시켜 과도의 끝을 손바닥 중앙에 놓이게 칼을 쥔다. 숨을 멈추며 곧바로 칼을 날린다. 파공성(破空聲)을 울리며 칼이 날아 합판 중앙에 박힌다.

칼날이 일으키는 파공성을 들을 때다. 40대 중반의 두 사내의 울대에 칼날이 박히는 장면이 연상된다. 연이어 피를 줄줄 흘리며 그들이 시신으로 나뒹구는 장면이 펼쳐진다. 이윽고 나도 그들의 시신 위에 자결해 쓰러지는 정경이 펼쳐진다.

느닷없이 합판이 푹 쓰러진다. 단도(短刀)에 실린 힘에 의해 합판이 균형을 잃은 탓이다. 쓰러지는 합판에 의해 시신들의 환영(幻影)이 사라진다.

작성된 진술서를 확인하는 과정에서였다. 경찰이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더 이상 피해자 가족들과 만나려고 하지 마세요.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나한테 거듭 부탁했어요.”

나는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느낌에 휩싸였다. 결국 피해자와의 합의의 길은 끊긴 셈이었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합의가 되지 않는다면 결국은 함께 죽는 길밖엔 없군. 내 운이 이밖에 되지 않는 걸까?’

얼음장처럼 가슴이 파랗게 냉동되는 느낌이었다. 원치 않는 세 사람의 동반 죽음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온 신경세포가 마비되는 듯하여 자꾸만 안구(眼球)가 충혈되었다.

합판을 다시는 쓰러지지 않게 일으켜 잘 붙들어 맨다. 그리고는 다시 합판을 향해 칼을 날린다. 40대 중반의 두 사내인 김종호와 전권수. 이들의 목이 내가 투검(投劍)하는 과녁의 실체다. 이들의 목을 과도로 꿰뚫은 뒤에 나도 자결할 작정이다.

폭우가 천지를 무너뜨릴 듯 난무하던, 엿새 전의 밤이었다. 치솟는 혈기를 추스르기 어려워 체육복을 차려 입고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 단지의 접경지에 수락산으로 열린 등산로가 뚫려 있었다. 등산로가 시작되는 초입에는 작은 공터가 있었다. 밤이라는 시점과 폭우로 인하여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기에 안심하고 무술의 발차기 동작을 연습했다. 거의 도취 상태로 뛰어 뒤돌려 차기를 해댈 때였다.

어디선가 여인의 절박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내가 급히 동작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비명소리는 등산로에서 들렸다. 나는 즉시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40대 중반의 두 사내가 20대 초반의 처녀를 겁탈하려고 했다. 사내들이나 여인은 모두 등산복 차림새였다. 사내들은 둘 다 근육질의 체격이 건장한 편이었다. 여인의 아랫도리가 막 벗겨져 치부가 드러나는 찰나였다. 순간적인 판단이었다. 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여겼다. 게다가 나는 사범 자격을 지닌 태권도의 유단자였다. 사내가 둘이라고는 하지만 대수롭게 여겨지지 않았다.

사내들은 각자 흑색 등산모와 갈색 등산모를 착용하고 있었다. 흑색 등산모가 여인의 아랫도리를 막 벗기고 있었다. 곧장 흑색 등산모에게로 달려가 옆구리를 차서 넘겼다. 연이어 공범인 갈색 등산모의 턱을 발로 차서 쓰러뜨렸다. 그 사이에 여인은 넋이 빠지게 달아나 버렸다. 두 사내가 상처 입은 야수의 표정을 지으며 내게로 달려들었다. 부단히 수련했던 발차기 동작을 차분히 펼쳤다. 발을 날릴 때마다 사내들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재차의 반항을 막기 위해 다부진 공격을 퍼 부었다. 땅바닥에 나뒹군 흑색 등산모의 가슴을 발로 짓밟았다. 연이어 갈색 등산모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서면서 수도(手刀)로 사내의 목을 연거푸 갈겼다. 갈색 등산모가 창백한 표정을 짓더니 재차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래서 몸을 일으켜 막 아파트로 되돌아오려는 찰나였다.

순찰 중이던 경찰 셋이 즉시 사내들과 나를 에워쌌다. 경찰이 오기 전에 벌써 여인은 종적을 감추었다. 내가 여인에 대한 정황을 얘기해도 믿을 근거가 사라져 버렸다. 사내 둘과 나는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만약 여인만 남아 있었어도 내가 곤욕을 겪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런 상황에선 대다수의 여인들은 당연히 달아나리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어디에 사는 사람이었을까? 정신적인 피해에 시달리지는 않는지 궁금했다. 그 날의 일로 나만 사고를 친 셈이 되고 말았다.

십여 분이 지날 때까지 투검 연습을 마친 뒤다. 내 마음은 지리산 칠선계곡으로 내려가 봐야겠다고 결정을 내린다. 초막 안으로 들어가 짐을 챙긴다. 짐이라고 해야 고작 가죽 가방 하나다. 그 속에 내의와 양말과 세면도구들이 들어 있다. 나는 곧장 전철을 이용하여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이윽고 오전 10시에 진주행 우등고속에 몸을 싣는다. 진주까지는 대략 4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오후 2시 무렵이면 진주에 닿으리라 여겨진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차창 밖의 경치를 구경할 계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폭행치상죄로 입건당한 상태다. 어떻게 하면 무사히 난관을 해결할 것인지 그것만이 주된 관심사다.

사고 당일. 결국 나는 폭행치상죄의 현행범으로 입건되었다. 피해자가 끊어온 진단서에는 전치 10주의 진단이 내려져 있었다. 상해의 내용은 턱뼈 골절 및 갈비뼈 골절이었다. 전치 4주를 넘기면 원칙적으로 구속된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친척 중의 변호사를 찾아 상담했다. 500만원의 공탁금을 내면 구속은 면하게 된다고 들려주었다. 공탁금은 나중에 피해자가 찾아간다고 했다.

친척은 일단 피해자와 합의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고향에 연락하여 500만 원도 송금을 받았다. 그런 뒤에 합의를 하려고 피해자를 찾아 나섰다. 피해자는 둘 다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정오 무렵에 고속버스가 금산의 인삼랜드에 정차한다. 기사가 15분간 정차한다고 거듭 방송을 한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식당으로 가서 잔치국수를 사 먹는다. 따끈따끈한 국물에 고춧가루를 뿌려서 국수를 먹는다.

그 날은 폭우가 내리는 상황이어서 휴대전화를 지참하지 않았다. 휴대전화만 지참했었어도 여인이 겁탈당하는 장면을 촬영했으리라. 그랬다면 오히려 범행을 저지른 사내들이 입건되었으리라. 휴대전화가 물에 젖으면 안 된다는 생각. 바로 그 생각 때문에 일이 뒤틀렸다고 여겨졌다. 처벌받아야 할 사람은 멀쩡하고 오히려 나만 억울하게 입건되다니!

고속버스에 올라타자 기사가 인원 점검을 시작한다. 좌석 벨트를 매라는 당부를 하더니 곧바로 차를 출발시킨다. 착잡한 마음으로 나는 다시 눈을 감는다. 세상의 일이 다 부질없이 여겨진다.

내가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임용된 지 7개월째다. 27살의 나이로 사회생활의 기초를 잡아 나가려던 때다. 이런 시기에 폭행치상죄로 입건되어 꼴이 말이 아니다. 아직 미혼이라 결혼에도 신경을 써야 할 시기다. 그런데 입건되어 정신이 없는 상태다. 사건이 불리하게 끝나면 타의에 의해 사직원을 낼 수밖에는 없다. 참으로 세상 일이 왜 이리 재미가 없는지 한심할 지경이다.

‘그런데 내게 연락한 여인은 대체 누구일까? 목소리로 판단해서는 40대 후반으로 여겨졌어. 사고 당일의 피해 여인일 리는 없어. 그렇다면 내게 연락한 여인의 정체는 뭘까?’

내가 무술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하교길에 거리에서 들은 뉴스 내용 때문이었다. 야외 유원지로 놀러 갔던 일가족이 강도에게 집단 살해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살해된 일가족은 자가용을 이용하여 놀러갔다. 그랬는데 흉기를 든 강도에게 집단 살해를 당하고 말았다.

적어도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는 무술을 단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을 거쳐 태권도 4단의 실력을 갖추었다. 적어도 가족의 안전을 보호할 정도는 된다고 여겼다. 그랬는데 선한 일을 하려고 하다가 가해자로 입건되고 말았다. 생각할수록 억울하지만 피해 여인이 달아났기에 대책이 없어진 셈이다.

오후 2시 무렵에 차가 진주에 도착했다. 시외버스 터미널로 이동하여 함양행 버스로 갈아탄다. 그리하여 오후 3시 30분 무렵에는 칠선계곡에 도착했다.

칠선계곡을 거쳐 남쪽의 바위 능선을 지나야 한다. 줄곧 1km의 거리를 더 가야 팔선계곡에 도착한다.

오후 4시 반. 마침내 나는 팔선계곡에 들어선다. 계곡의 정상 부근에 단아한 누각이 한 채 보인다. 여인이 말한 마검루(磨劍樓)로 여겨진다.

새벽에 잠깐 목소리를 들려준 여인의 말이 떠오른다.

‘눈앞 건물이 마검루인데 여기에서 어떻게 문제가 해결될까? 만약 여인의 농간에 놀아난 꼴이 된다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 과연 내가 여기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산골짜기에 단풍의 색조가 남실댄다. 붉고 파랗고 노란 색채의 나뭇잎들이 바람결에 춤을 춘다. 색채의 아름다움이 현란하게 가슴으로 스며들 정도다. 단풍잎에 배어든 붉은 색은 화선지에 번지는 핏물처럼 색상이 곱다.

골짜기로 내닫는 바람결이 남실댈 때마다 단풍의 색조가 현란하게 남실댄다. 남실대는 단풍을 바라보다가는 그만 눈이 멀 지경이다. 그만큼 햇살이 눈부시고 청아하기 그지없다. 숱한 잎사귀들에서 반사되는 햇살이 단풍의 너울이 되어 출렁인다.

단풍을 둘러보며 누각으로 다가설 때다. 누각의 편액이 멀리서도 보인다. 예측했던 대로 마검루(磨劍樓)라고 적혀 있다. 용이 승천하듯 편액의 서체에 힘이 담뿍 실려 있다.

헌데 누각은 2층으로 축조되어 있다. 2층 누각의 중앙에는 누군가 바닥에 앉아 있다. 혹시 전화를 한 여인이 아닐까 싶어 가슴이 두근댄다. 마침내 목적지까지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살짝 가슴이 들뜬다. 점차 누각을 향해 거리를 좁혀 간다. 달려가고도 싶지만 짐짓 품위를 생각해서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는다.

나흘 전에 피해자들이 입원한 병원에 들어섰다. 두 피해자는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마음을 죄다 비우고 합의를 시도하려 했다.

일부러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병실에 들어섰다. 피해자는 주변 환자들과 한껏 떠들다가 나를 보자마자 냉소를 지었다. 일이 쉽지 않을 듯이 여겨졌다. 하지만 모든 걸 초월하여 꼭 합의를 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우선 45살의 김종호를 만났다. 여인의 아랫도리를 벗기다가 나에게 옆구리를 맞아 쓰러진 사내였다. 재차 나에게 덤비다가 갈비뼈 3개가 부러져 버렸다. 종호가 한껏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나는 당신 같은 뻔뻔한 사람하고는 말도 하고 싶지 않아. 합의를 하러 왔다고? 개 똥 같은 얘기는 집어 치우고 그만 꺼져. 나는 네 직장이 떨어질 때까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겠어. 그쯤 알고 당장 꺼지란 말이야. 당장!”

합의를 시도할 작정으로 끝까지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하지만, 절박한 내 처지를 비웃으려는 듯 일부러 약을 올렸다. 종호의 정황을 분석해 보니 절대로 합의할 기미가 없어 보였다. 끝까지 법대로 하자는 의도가 역력했다.

어쩔 수 없이 김종호는 포기한 상태였다. 나는 다른 병실의 전권수를 만나러 발걸음을 옮겼다. 나를 보자마자 전권수 역시 실쭉실쭉 웃었다. 노골적으로 비웃으려는 의도가 완연했다. 나를 향해 권수가 말했다.

“당신 조폭이지? 사람을 그렇게 때리고도 무사하길 바래? 나도 네 능력이 받쳐 주면 합의하고 싶어. 정신적인 피해 위자료까지 포함하여 딱 10억 원만 가져 와. 그러면 두 말 않고 합의해 주겠어. 10억이 아니면 아예 합의할 생각도 하지 마.”

권수의 말을 듣는 순간이었다. 끝까지 인내하며 합의를 하겠다는 마음이 단번에 짓밟힌 기분이었다. 설사 끝까지 노력한다고 해도 조롱거리로밖에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

문중의 숙부뻘 되는 변호사의 조언이 떠올랐다.

“가능한 한 합의하도록 해. 무서운 게 법이야. 합의하지 않으면 엄청난 벌금액을 물게 돼. 하여간 무조건 합의하도록 해. 운이 나쁘면 실형까지 선고받을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자네의 공직 생활의 꿈은 영원히 사라지는 거야. 내 말을 잘 명심해 듣길 바래.”

문중 숙부의 조언을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내가 공직 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면 삶의 의미가 없어. 살아 있어도 결코 산 게 아니란 말이야. 내 삶의 꿈이 사라진다면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야. 그렇다면 나 혼자 죽을 수는 없는 일이지. 김종호와 전권수의 목숨을 내가 거두어 갈 수밖엔 없어. 예리한 칼로 단숨에 목숨을 끊어 버려야지. 부득이한 정황으로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면 원거리에서도 생명을 빼앗아야 해. 여기에 합당한 것이 바로 투검(投劍)이야. 당장 칼 던져 맞히기를 제대로 익혀야겠군.’

병원을 찾은 날 이후부터였다. 나는 내가 머물던 전세 아파트를 떠나 서울의 수락산(水落山)으로 들어갔다. 어느 기인으로부터 수락산에 초막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서울 시내의 시장을 돌며 예리한 과도(果刀) 세 자루를 샀다. 그런 뒤에는 곧바로 초막에 묵으면서 투검 수련을 시작했다. 김종호와 전권수를 죽이고 나선 나도 당연히 자살할 작정이었다. 막상 자살하기로 작정하고 나니까 마음이 한없이 홀가분했다.

세상의 일이 하찮아 보이고 세상 사람들이 좀스러워 보였다. 너무나 하찮은 일로 신경전을 벌이는 세상 사람들이 안타까워 보였다. 마치 나 혼자 경지에 달한 달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마음가짐과 함께 투검의 실력도 단시일에 현저히 향상되었다. 10미터 전방에서도 과녁을 정확히 맞힐 수 있었다.

발걸음을 천천히 마검루로 옮긴다. 이윽고 누각 2층으로 올라선다. 누각 중앙에는 백색 도복 차림의 노인이 가부좌로 앉아 있다. 흰 눈썹과 하얀 수염의 노인은 품격이 우아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70대 중반의 노인은 한동안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마루에 들어설 때 노인이 눈을 번쩍 뜬다.

눈을 뜬 노인을 바라볼 때다. 맑은 눈송이를 뒤집어쓴 듯한 상쾌감이 전신을 엄습한다. 노인이 맑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어서 오세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 기뻐요. 어떻게 해서 이리로 왔는지는 잠시 잊도록 하세요.”

노인이 누각 귀퉁이의 원형의 목제 상자를 가리킨다. 목제 상자 속에는 장검(長劍)이 30여 자루나 들어 있다. 그러더니 거기에서 칼 한 자루만을 고르라고 나에게 말한다. 내가 마침내 칼 한 자루를 찾아든 뒤다. 노인이 내게 숫돌을 가리키며 입을 연다.

“칼을 가는 것이 그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입니다. 숫돌에 일정량의 물기를 적셔 칼날을 세우는 과정에 해답이 있어요.”

나는 노인의 인상을 거듭 눈여겨 살핀다. 세상에는 위선자들이 얼마나 깔려 있는지 모를 정도다. 노인 역시 알량한 말 재주로 사기를 치는 사람은 아닌지? 그래서 더욱 매서운 눈초리로 노인을 쏘아 본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노인의 눈빛에는 평온함이 서려 있다. 세상을 초탈한 듯한 무한한 평온함이 느껴진다. 나는 고개를 갸웃대며 노인의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노인은 장검 하나를 들더니 물에 적셔 숫돌에 갈기 시작한다. 칼을 가는 자세가 무척 안정되어 있다. 마치 십 년 전부터 계속 칼을 갈아온 듯한 자세다. 슥삭 슥삭 슥삭! 칼과 숫돌이 마찰하면서 내는 소리다. 잠시 칼을 가는 시범을 보여준 뒤다. 노인이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해답을 찾는답시고 절대로 서둘지는 마세요. 숫돌 사용료를 비롯한 일체의 체재 경비를 받지 않아요. 중요한 건 칼을 가는 도중에 해답이 떠오르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해요. 평온한 마음과 집중력, 이것만이 문제 해결의 길잡이가 될 겁니다.”

나도 곧바로 장검을 들어 누각에 깔린 숫돌 하나를 고른다. 숫돌은 누각 마루에 스무 개가 깔려 있다. 숫돌마다 물통이 다 딸려 있다. 동시에 스무 명이 칼을 갈 수 있는 곳이다. 칼을 길쭉한 물통에 담가 물을 적신다. 칼은 여러 번 갈린 듯 날이 잘 서 있다. 하지만 내가 새롭게 칼을 갈아야 한다.

칼을 갈아서 어떻게 문제가 해결될 길이 생기겠느냐는 의아심이 치솟는다. 근거를 대라고 노인에게 요구하고 싶은 충동이 울컥 치솟는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른다. 마음을 안정화시킨 뒤에 이윽고 칼을 갈기 시작한다. 숫돌과 칼날이 접촉하여 갈리는 느낌이 꽤 좋게 느껴진다. 갈면 갈수록 칼날은 더욱 예리해질 것이다. 칼을 갈면서부터 노인의 존재마저 내 의식에서 사라져 버린다. 넓은 누각을 나 혼자 차지한 듯한 느낌이 든다.

병원에서 합의를 시도할 때였다. 김종호와 전권수. 이들이 악의적으로 나를 향해 날리던 비웃음의 색채. 사고 당시에 내 힘이 약했더라면 사내들은 내게 중상을 입혔으리라. 그뿐이랴? 사내들은 여인을 겁탈하여 마구 짓밟았으리라 생각된다.

무조건 직장을 그만두고 나가라고 윽박지르던 김종호였다. 10억 원을 내놓으라며 야유를 퍼붓던 전권수.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응징을 제대로 해 줄 것인가? 생각만 해도 피가 끓는다.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격투 이외에는 해결의 방안이 없었다. 겁탈 직전의 상황에서 여인을 구할 길이라곤 오로지 격투뿐이었다. 사내들한테 맹렬한 공격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여인이 달아나 버려 나만 처벌받게 되었다.

‘내가 진실로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인가? 턱뼈와 갈비뼈를 반드시 부러뜨리려고 손발을 썼던 가? 격투를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내 몸을 보호하려다 보니 사내들을 가격(加擊)하게 되었다. 이런데도 나 혼자만 처벌받는 게 옳은 일인가?’

칼날에 억울함이 잔뜩 휘감긴 듯하다. 칼날에 물을 더 묻힌다. 칼날에 뒤덮인 억울함을 갈아서 허공에 날려 버리고 싶다. 서서히 칼을 쥔 손에 힘이 실린다. 칼을 두 손으로 잡아 천천히 숫돌에 밀었다가 당겼다가 한다. 금세 마찰음을 내며 칼이 갈리기 시작한다.

공탁금 500만 원을 걸어 용케 구속은 면한 상태다. 남은 것은 처벌의 수위다. 피해자들과의 합의가 안 되는 것이 영 마음에 걸린다. 영락없이 정식 재판까지 거쳐야 할 상황이다. 합의만 되면 별 문제가 아니겠는데 합의가 정녕 문제다.

합의에 대한 희망이 결렬되었을 때다. 김종호가 퇴원했을 경우를 가상하여 투검의 실전 훈련을 하기로 했다. 김종호가 사는 중계동 마을 언덕에 올랐다. 거기에는 언덕에 방치된 지 오래인 컨테이너 박스가 놓여 있었다. 밤 8시 무렵에 컨테이너 박스 뒤에 몸을 숨겼다. 가로등이 없는 지역이라 늘 주변이 어둑어둑한 상태였다. 언덕 위로 청년 둘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미리부터 칼 대신에 물로 반죽한 흙덩이를 준비했다. 주먹 뭉치만한 흙덩이를 두 개 집어 들었다. 청년들을 종호와 권수로 가정하고는 청년들의 목을 향해 흙덩이를 겨누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후에 곧바로 흙더미를 날렸다. ‘퍽퍽’ 소리가 나더니 청년들 모두 정확하게 목에 흙뭉치를 맞았다. 돌발 상황이라 청년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 그들을 정확히 맞힌 것을 확인한 뒤였다. 나는 곧장 어둠의 공간 속으로 내달렸다. 어둠 속을 내달릴 때였다. 이승에서 사라지는 내 목숨을 떠올리며 바지에 오줌을 주르륵 지렸다.

칼을 들기에 앞서서 나는 마음을 최대한으로 정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칼을 반복하여 갈면서도 노여운 감정을 해소시키려고 애쓴다. 죄도 없이 중계동에서 흙덩이를 맞은 사내들에게도 마음속으로 용서를 구했다.

마검루에서 칼을 갈기 시작한 그 이튿날이다. 노인이 나를 향해 말한다.

“아마도 벌써 칼을 간 효험이 나타나는 모양입니다. 아마도 모든 정신력을 쏟은 결과라 여겨집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영검(靈驗)이 있으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어요. 젊은 남녀가 산을 오르는 게 보여요. 곧장 마검루를 목표로 해서 올라오거든요. 아마도 그대와 관련이 있으리라 믿깁니다.”

노인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별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단순히 산을 찾는 사람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젊은 남녀라고 하지 않는가? 젊은 연인이나 부부가 산을 오르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노인이 무슨 근거로 나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는지 궁금하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금세 드러나리라 여기고 잠자코 칼을 간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녀가 이윽고 마검루에까지 올라온다. 여인이 유심히 나를 바라보더니 금세 나를 향해 다가선다. 다가서는 여인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이다. 여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현기증을 느낄 정도다. 여인이 내게 다가서며 입을 연다.

“저를 알아보시겠어요? 주선영이에요.”

나는 칼을 갈던 동작을 멈추고 여인을 바라보며 인상을 확인한다. 아무래도 겁탈당하려던 여인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진정으로 내가 내심으로 애타게 찾던 여인이다. 겁탈당하기 직전에 내가 구해 준 처녀다. 내가 칼을 갈던 동작을 멈추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그러면서 여인을 향해 입을 연다.

“여기는 어떻게 해서 찾아오게 되었어요? 무척 궁금해요.”

조금 전까지도 누각을 지키던 노인은 멀리 대숲에 머물고 있다. 같이 누각으로 찾아온 청년을 데리고 대숲을 구경시키는 모양이다. 누각에는 여인과 나 둘만이 남아 있다. 여인이 나를 향해 말한다.

“누각 아래 저 편 개울로 가서 얘기하죠. 여기서는 아무래도 좀 말하기에 불편해요.”

나는 여인의 제안에 따라 누각 아래의 건너편 개울로 간다. 개울가에는 앉기에 편한 너럭바위까지 깔려 있다. 개울에서는 누각이나 대숲마저 보이지 않는다. 너럭바위에 앉아 숨을 고른 뒤에 여인이 입을 연다.

여인은 서울 P여대 2학년에 재학 중이라고 밝히며 입을 연다. 선영은 폭우가 내리던 날 하산하는 길에 예정된 등산로를 놓쳤다. 아파트 단지가 눈에 보여 안심하려던 찰나였다. 느닷없이 두 사내가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마도 등산로를 놓친 그녀를 한참 미행했으리라 여겨졌다. 그러다가 두 사내가 그녀를 겁탈하기로 작정했다.

사내들에게 팬티가 벗겨져 내리게 되었을 때다. 또 다른 사내인 내가 뛰어들었다. 하지만 당시에 선영의 판단으로는 나 역시 사내들의 일행으로 여겨졌다. 일부러 일행끼리 짜고서 자작극을 연출하는 것이려니 여겼다. 어쨌든 잠시 탈출의 기회가 주어지자 전력을 다해 달아났다. 엄청난 충격에 집에 도착하고서도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나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녀가 나를 떠올렸다.

정말 그녀 자신을 구조한 사람이 억울한 피해를 보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사고가 일어났던 구역의 지구대와 경찰서에 문의를 해 봤다. 가해자가 어떤 여인을 구조하려다가 폭행치상죄로 입건되었다고 주장하는 곳이 있었다. 그래서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은밀히 해당 경찰서로 갔다. 가해자로서 취조받는 사내의 얼굴을 먼발치에서 선영이 은밀히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그 사내가 나였음을 알았다. 선영의 법조계 친척을 통해 나와 관련된 입건 내막을 조사했다. 그 결과로 내가 억울하게 가해자로 처벌받게 될 지경임을 알았다. 당장 찾아와서 진상을 밝혀야 했지만 선영에게는 갈등이 생겼다. 사내들에게 팬티까지 벗겨진 것이 드러나 입에 오르내릴 것이 두려웠다. 자신만 모르는 체하면 끝날 일이었다. 비록 어떤 사내가 억울하게 가해자가 되어 처벌받기는 하겠지만. 그것도 그 사내의 운으로 돌려 버리면 되리라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선영을 엄습하는 번민의 골이 깊어졌다. 어떤 사내만 아니었어도 자신은 겁탈당하여 임신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위기의 상황을 구해 준 사내가 처벌받을 지경이라고 들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양심이 그녀를 자유롭게 놓아 주려고 하지 않았다. 며칠을 극도로 괴로워한 뒤였다.

어느 날 아침부터였다. 낯선 40대의 여인이 선영의 의식 속으로 밀려들었다. 그러면서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양심의 가책에 버둥대지 말고 지리산의 마검루(磨劍樓)를 찾아 가라고. 여인의 영상이 사라지고 나면 나의 영상(映像)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눈을 감은 자세로 단정히 칼을 갈고 있는 모습이었다. 칼날에서 섬광이 일 정도로 칼을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칼을 가는 나의 영상을 대하고부터였다. 도저히 양심의 가책을 견뎌낼 길이 없었다. 그래서 친척들 중의 흥신소 사람을 시켜 나의 위치를 추적했다. 내 위치를 확인한 뒤였다. 놀랍게도 환영(幻影)의 형태로 40대 여인이 선영에게 말했던 팔선계곡이었다. 그래서 곧장 지리산을 찾기로 작정했다. 신변의 안전을 위해 육촌 남동생과 함께 마검루를 찾아왔다.

선영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생각에 잠긴다. 이제 사건의 역전은 시간 문제일 따름이다. 나는 정말 마검루에 잘 찾아왔다고 느낀다. 칼을 가는 도중에 문제가 정말 해결된 셈이다. 문득 의아심이 생겨 선영에게 묻는다.

“내가 이틀 전에 마검루로 내려가 보라는 여인의 권유를 받았거든요. 40대 후반의 목소리로 들렸는데 혹시 선영 씨가 아는 사람인가요?”

선영이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응답한다.

“저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제겐 사흘 전부터였어요. 환영(幻影)의 상태로 제 의식으로도 파고들어 제게 팔선계곡을 찾게 만들었어요. 추측컨대 마검루의 노인과 관련된 봉사 단체의 회원인 것 같아요. 피의자들 중에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골라 안내를 하는 모양이에요. 인간의 부류 중에서도 특히 영적(靈的)인 교감(交感)이 뛰어난 사람일 거예요. 아마도 유명한 무녀(巫女)이거나 심령학자(心靈學者)일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듣고 보니 선영의 말이 합당하게 여겨진다. 사건을 종결시키려면 아무래도 함께 상경하는 게 좋으리라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노인과 작별하는 게 어떻겠느냐며 의향을 묻는다. 그런 후에 재차 개울에서 만나자고 한다. 내 판단으로도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나는 선영과 함께 천천히 마검루로 올라간다. 나는 마음을 추스르며 여태껏 갈던 칼을 수습하여 노인에게 반납한다. 칼을 반납하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어떻게 나의 칼을 가는 영상이 선영에게로 전해졌을까? 칼을 가는 행위와 영상의 전달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뚜렷한 해답은 찾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추정(推定)해 본다. 아마도 정신 집중과 관련된 느낌이 든다. 진심으로 자신을 되돌아보며 정화하는 과정이었기에 선영에게도 영향이 미쳤으리라 여겨진다. 선영도 극도의 번민에 휩싸이는 과정에서 감수성이 예민해졌으리라 생각된다. 예민해진 감수성의 뇌파에 나의 영상이 잡힌 것이라 추정된다.

어쨌든 정신을 집중시켜 칼을 간 것이 해결의 근원이었다고 여겨진다. 마검루로 안내한 여인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내겐 한없이 고맙게 비친다.

햇살이 눈부신 오후 1시 무렵이다. 선영의 6촌 동생은 해결할 과제가 있어서 마검루에 남겠다고 한다. 마검루를 떠나기에 앞서 선영과 나는 노인에게 경건하게 절을 한다. 문제 해결에 많은 도움을 준 데 대한 감사의 뜻에서다. 노인도 즉시 선영과 나에게 답례를 한다. 누각을 떠나기 직전에 나는 노인을 찬찬히 살펴본다. 숱한 번민에 쌓인 사람들에게 해법을 제시하는 선각자(先覺者).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문제를 풀게 만드는 도인(道人). 아무튼 나에게는 세상의 절대 경지에 도달한 달인으로 여겨진다.

누각을 벗어나 30여 미터쯤 내려간 지점에서다. 들릴 듯 말 듯 노인의 목소리가 내 귓전을 파고든다.

“그대들 역시 달인이 될 만해요. 살아가면서 달인이 되도록 부단히 수련하기 바랍니다.”

대답하려고 고개를 돌려 보니 노인이 누각에서 손을 흔들며 내려다본다. 선영과 나는 일제히 목청을 높여 대답한다.

“문제를 해결해 주고 격려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선영도 노인에 대해 많은 고마움을 느낀 듯하다. 노인을 올려다보는 눈빛에 경건한 마음이 실린 듯하다.

선영과 함께 마검루를 한참 내려온 뒤다. 마검루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개울에 도달했을 때다. 흘러가는 청정한 개울물을 둘이서 잠시 바라본 직후다. 돌연히 선영이 나를 향해 무릎을 꿇으며 말한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동현 씨가 아니었으면 저는 정신병원에 갔을지도 몰라요. 저를 구해 주셔서 진심으로 고마워요. 이런 만남도 연분인데 우리 사귀면 안 될까요?”

나는 선영을 일으켜 세우며 선영의 손을 마주 쥔다. 그 찰나다. 나 자신도 모르게 콧등이 시큰거리더니 눈에 눈물이 핑 돈다. 나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선영을 향해 말한다.

“좋아요. 우리, 연인으로 사귑시다.”

절박한 시기에 나를 도우려는 그녀가 아닌가? 더 이상 무엇을 따지랴? 늦게라도 용기를 내어 나를 찾아온 그녀가 아닌가? 나는 이미 그녀를 용서했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을 알았던지 선영도 왈칵 달려들며 나를 껴안는다. 그녀의 맑은 눈망울에도 이슬이 맺히더니 눈가에 눈물이 그득 실린다. 나도 떨리는 가슴을 추스르며 그녀를 소중히 감싸 안는다.

언어 이상의 언어. 말이 없어도 가슴의 심층부를 관통하며 의미가 전달되는 듯하다. 내가 손을 내뻗어 그녀의 뺨을 만지며 눈을 들여다본다. 선영도 내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친 찰나다. 내 가슴에서 그녀를 향한 뜨거운 격랑이 일기 시작한다. 맑은 영혼끼리의 교감인 듯 선영의 눈빛에도 감동의 너울이 일렁인다. 달아오른 뺨들이 맞닿아 타는 듯한 열기에 서로의 몸이 떨린다. 어느새 그녀의 눈시울과 나의 눈가에도 정화(淨化)된 이슬이 맺혀 일렁인다.

한낮이라 골짜기에서 골바람이 피어올라 산봉우리로 밀려든다. 바람이 일 때마다 솔숲이 드러누우며 청아한 음향을 발산한다. 청아한 솔바람 소리에 한껏 가슴이 틔는 듯하다. 박새와 방울새도 허허로운 몸짓으로 허공을 난다. 나는 팔선계곡의 대자연을 향해 마음속으로 진정 어린 경배를 올린다. 화답이라도 하듯 수목의 잎사귀들이 반사된 햇살을 눈부시게 내뿜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