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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류 변화

                                                                                             손 정 모

   덜컹대는 바람 소리에 잠시 의식이 깨어난 새벽이다. 영혼의 노폐물까지 말끔히 씻어줄 듯한 청량한 바람 소리다. 나는 침상에서 일어나 가만히 방을 벗어나온다. 거실을 거쳐 베란다 창문을 살며시 열고는 밖을 내다본다. 굵은 눈발이 사선을 그으며 마구 쏟아진다. 의외에도 이 때 휴대전화가 울린다. 귀에 갖다 대니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든다.

   “나, 홍영이야. 기억나니? 오늘 오후 7시에 형태랑 같이 어머님 댁으로 와. 어떻게 괜찮겠어? 그럼, 약속한 것으로 알게, 안녕!”

   홍영은 스승의 딸로서 나와 동갑인 처녀다. 서로 격조했던 처지라 얼빠진 자세로 창 밖을 내다본 뒤다. 침실로 돌아와 침상에 드러눕는다.

   나는 승용차로 안산시 상록구에 있는 해양 연구원 건물로 내달린다. 내가 선임 연구원으로 근무하는 부서는 해양 자원 연구부다. 해양 동식물의 서식처 파악과 자원 활용에 관한 연구가 주대상(主對象)이다.

   차를 연구원 주차장에 세우고는 곧장 연구실로 올라선다. 2층 연구실에는 배양 중인 각종 해양 식물이 진열되어 있다. 해양에서 채취한 식물을 수조(水槽)에 넣어 영양물을 주입하여 기르는 중이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세포를 잘라내어 조직 배양을 시도할 작정이다. 미래의 식량이 될 만한 새로운 갈조류. ‘갈색 털구름(brown cirrus)’도 최근에 발견하여 배양하는 중이다. 12개의 항온 수조에 담긴 조류(藻類)는 윤기를 내뿜으며 잘 자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의 실험대를 살핀다. 조직 배양에 대한 착상을 하려는 때다. 휴대전화가 큰 소리로 울린다. 슬라이드를 밀어 올리니 형태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든다.

   “기철아, 나다. 오늘 새벽에 홍영의 전화를 받았지? 나중에 함께 가자구. 다시 전화할게.”

   나는 곧바로 응답한다. 나중에 만나자고.

   형태의 목소리를 듣자 혜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휘휘 감긴 수초더미 속에서 발견된 반짝이는 은화처럼 머릿속으로 살아났다. 아마도 2년 전이었으리라. 형태의 ‘동양 체육관’으로 괴여인(怪女人)이 찾아와 난동을 부렸다. 형태가 도장을 개관한 지 5년 만의 일이었다. 괴여인의 이름이 혜진(惠珍)이었다. 하늘의 색조가 온톤 핏빛으로 물들었던 석양 무렵의 일이었다. 당시의 혜진은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여자 친구 둘과 함께 동양 체육관으로 난입했다. 이들은 체육관에 들어서자마자 기물들을 내던지며 파괴하기 시작했다. 관장인 형태가 가까스로 여인들을 달래어서 탁자에 마주 앉았다.

   “오늘 오후 7시에 형태랑 같이 어머님 댁으로 와. 어떻게 괜찮겠어?”

   새벽에 얼음장처럼 차디차게 귓속을 파고들던 홍영의 목소리였다. 느닷없이 새벽부터 전화한 건 무슨 일 때문일까? 혹시 누가 아픈 건 아닐까? 혹시 사모(師母)의 신상에 무슨 변고가 생겼을까? 섬광처럼 의문이 내 머릿속을 스쳐간다.

   혜진과 나란히 앉은 여자 친구들은 눈을 희번덕거릴 뿐 침묵했다. 그렇지만 조금만 수가 뒤틀려도 난동을 부릴 듯한 기세였다. 혜진이 형태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봐요, 양 관장! 당신 사매(師妹) 이름이 홍영이지? 좋은 말을 할 때 홍영을 내 놔. 좀 전에 이리로 피신하는 걸 봤다니까 그래.”

   형태는 화가 치밀었지만 차분히 대응했다. 그 날 도장에 홍영이 나타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탁자에 놓인 전화기로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곧바로 2명의 경찰관이 도장에 들어섰다. 여인들은 경찰관 2명과 함께 도장을 샅샅이 수색했다. 하지만 홍영의 자취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경찰은 세 여인들을 기물 파손죄로 처벌하기를 원하느냐고 형태에게 물었다. 형태가 처벌할 의사가 없다고 말하며 경찰을 돌려보냈다. 경찰이 떠난 뒤다. 여자 친구들도 돌려보내고는 혜진이 형태와 단 둘이 남았다. 혜진이 형태에게 술을 한 잔 하자고 제안했다. 형태가 둘이서는 어색하니까 친구인 나를 동참시켜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혜진이 쾌히 수락했다.

   형태의 부탁으로 두 달 전에도 사모(師母)를 만나러 인천에 갔다. 바다가 보이는 산자락에 위치한 고층 아파트였다. 열린 창 밖으로 서해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거실 피아노 위에는 스승의 사진이 액자에 담겨 세워져 있었다. 형태와 나는 세상을 떠난 스승을 향해 나란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뒤에 거실에서 사모를 향해 절을 올렸다. 허리를 펴고 사모와 마주 앉으면서 홍삼 음료수 상자를 건네었다.

   “그냥 올 것이지, 올 때마다 뭘 사 들고 오니? 어쨌든 오랜만이야.”

   일흔둘의 나이인데도 기력이 왕성한 노파였다. 노파의 눈빛에는 한없이 인자한 기품이 듬뿍 서려 있었다.

   사모를 만나 한동안 얘기를 나눈 뒤였다. 나와 동갑인 31살의 형태가 사모를 향해 힘들여 입을 열었다. 입을 열면서 내게도 지원 요청을 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모님, 정말 어려운 부탁입니다만 한 번만 더 말씀 드릴게요.”

   스승이 남긴 무술도록(武術圖錄)을 형태한테 넘겨 달라는 부탁이었다. 형태가 말을 꺼내자마자 냉엄한 표정으로 사모는 거절했다. 예전에 나와 형태한테 들려주었던 말을 반복하면서.

   스승은 태권도 7단의 무인(武人)으로서 생전에 국내에서는 대적 상대가 없었다. 폐암만 아니었으면 오래도록 살 건강한 무인이었다. 최승희(崔丞熙). 그 누가 감히 스승의 적수가 될 수가 있었겠는가? 이름 석 자만으로도 스승이 가는 곳에는 위세가 넘쳐흘렀다. 학처럼 단아한 모습에 겸허하기까지 하여 무선(武仙)으로까지 추앙받던 절대적인 실력자였다. 평소의 겸허함과는 달리 대결에 임해서는 철저히 상대를 굴복시키던 스승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스승을 알게 되어 스승으로부터 무술 지도를 받았다. 칭찬에 인색하던 스승이었으나 내 무술 동작마다 감탄을 연발하곤 했다. 술잔을 마주 들고 대화를 나눌 때마다 스승은 말하곤 했다.

   “서군(徐君)! 자네는 나를 거쳐 간 숱한 제자들 중에서도 제일이야. 자네의 동작을 볼 때마다 탄성이 저절로 터져. 특히 공중 발차기의 현란한 동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야. 천부적인 자질에다가 후천적인 노력까지 갖춰서 출중하다고 생각해. 어때? 연구원이라는 직업을 버리고 순수한 무인이 될 생각은 없니? 그렇게만 하면 자네는 무술계에서 대성하리라 생각해.”

   유년시절부터 고향인 속초의 바다는 내게 많은 영감으로 속삭였다. 석양이면 자줏빛으로 남실대던 강렬한 색채가 내 마음을 뒤흔들곤 했다. 수시로 가슴을 뒤흔드는 파동 같은 힘의 발산. 강렬한 힘을 발산할 합리적인 분야는 운동이었다. 가슴에 힘이 치솟을 때마다 나는 석양의 해변을 무작정 달렸다. 숨이 차서 백사장에 맥없이 쓰러질 때까지 질주하곤 했다. 자연스레 종아리의 근육이 발달하여 도약하는 동작에 힘이 실리곤 했다.

   자라면서 내면에 실리는 기력을 자연스레 배출할 영역을 찾고 싶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 그게 무술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고1 때부터였다. 나는 태권도의 유파 중에서 청도관(靑濤館) 관할의 무술을 수련하게 되었다. 그게 인연이었던지 나중에는 청도관 최고의 달인이었던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인천에서 ‘동양 체육관’이라는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는 형태다. 형태와 나는 관악 캠퍼스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형태는 체육교육과의 학생이었고 나는 해양학과의 학생이었다. 둘은 취미 동아리인 ‘관악 태권’의 회원으로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동갑내기인 형태와 나는 신입생 시절부터 잘 지냈다. 신입생 시절에 나는 태권도 3단이었으며 형태는 4단이었다. 둘은 틈만 나면 교수 회관 부근의 잔디밭에서 겨루기를 했다. 때로는 발길질에 맞아 서로 코피를 쏟으며 나뒹굴 때도 있었다. 겨루기를 통해 무술의 오묘한 이치를 나날이 터득해 나가곤 했다.

   두 달 전에 사모는 형태와 나에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들의 사부가 말했어. 무술도록은 서군한테만 전하라고 했어. 서군이 아니면 설사 무술도록을 봐도 시연할 수가 없다고 했어. 나는 자네들 사부의 유언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어. 왜냐하면 나는 자네들 사부의 아내이기 때문이야. 언제라도 서군이 받으러 올 때만 주라고 했어. 서군이 무술을 직접 전승할 때라야만 주라고 했어. 내가 죽을 때까지도 서군이 받지 않으면 무술도록은 태우라고 했어. 딸인 홍영에게도 넘겨주지 말라고 했어.”

   그 날 사모의 집에서 물러나온 뒤였다. 형태가 나를 불러 술 한 잔 마시자고 했다. 둘이 포장마차에 앉아서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형태가 울분을 삭이지 못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기철아, 생각 좀 해 봐. 너와 나, 홍영 모두 스승님의 제자이잖아? 그런데 하필이면 무술도록을 왜 너한테만 전하라고 하는 거야? 너는 무술도록을 수령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렇다면 무술도록을 원하는 사람한테 주는 게 도리이잖아? 왜 하필이면 자네한테만 주겠다고 못을 박는지 모르겠어. 도대체 스승님과 무슨 비밀 약속이라도 했니? 비밀이 있다면 죄다 속 시원히 말 좀 해 봐.”

   나는 형태에게 할 말이 없었다. 형태와 나는 둘 다 당당한 면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형태와 나는 지금까지 지기(知己)로 지내게 되었다. 형태는 술이 취해 나에게도 마구 울분을 토했다.

   “내가 너한테 뒤지는 게 뭔데? 나는 체육을 전공한 사람이라구, 체육 전공자 말이야. 게다가 7년을 넘게 태권도 도장을 운영해 왔어. 그뿐이냐? 너는 태권도만 4단이지만, 나는 태권도 5단에 합기도가 4단이야. 이런 나한테 무슨 결격 사유가 있다는 거야? 스승님과 사모님은 왜 너한테만 무술도록을 전하라고 했느냐 말이야. 정말 이런 식으로 사람 차별을 해도 되는 거야?”

   형태의 말을 듣는 순간에 나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형태야, 무슨 망발이야? 사부님 내외가 무슨 사람 차별을 했다고 그래? 단지 당신들의 소신을 말했을 뿐이잖아? 아무리 취기가 올라도 이런 식의 망발은 피해 줘. 나도 듣기가 상당히 거북해.”

   내 말에 형태가 불을 토하듯 고함을 질러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라고? 네가 지금 나한테 망발했다고 했냐? 내가 망발했다고?”

   형세가 자못 험악했다. 나 자신도 모르게 발이 움직이려고 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참았다. 그 날 형태와 나는 서로 감정이 쌓인 채 작별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격투까지 벌일 뻔했다. 그랬다가 오늘 형태의 전화를 받았다.

   퇴근할 시각까지 열심히 조직 배양에 대한 전처리 작업에 매달렸다. 퇴근하려고 자리에서 일어설 무렵에 휴대전화의 메시지 수신음이 들린다. 오후 6시 50분에 동인천 전철역 1번 출입구 에서 만나자는 내용이다.

   나는 승용차를 몰아 곧바로 동인천역을 향해 달린다. 거기에서 형태를 태워 사모(師母)의 집으로 같이 갈 작정이다.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동인천역에 닿았을 때다. 1번 출입구에서 형태와 홍영이 나란히 손을 흔든다. 나는 그들을 태워 곧장 산복 도로를 골라 차를 몬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사모의 집이 있기 때문이다.

   2년 전 혜진을 처음 만났던 날이었다. 당시의 혜진은 나와 동갑인 29살의 처녀였다. 혜진은 인천 남동부에 체육관을 차려 수련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당시의 혜진은 태권도 5단의 실력자였다. 스승의 딸인 홍영은 당시에 태권도 4단이었다. 홍영은 인천의 북서부에서 도장을 차려서 수련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바닷가 포장마차에서 셋이 작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소주와 닭똥집을 주문하여 술잔을 나누기 시작했다. 혜진이 차분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홍영은 아주 나쁜 계집애야. 나한테 애인이 생기기만 하면 가로채려고 발버둥을 쳐. 이번에도 내 남자 친구를 꼬드겨 둘이서 달아나 버렸어. 세상에 이런 악질 같은 계집애를 봤어? 그래도 무술을 숭상한다는 무인(武人)이 되어 가지고 말이야. 형태의 체육관으로 연놈들이 가는 걸 봤다고 친구가 알려 주었어. 제보자와 나는 상당히 친한 친구 사이야. 그래서 확신을 갖고 덮쳤는데 결과적으로는 실수하고 말았어.”

   형태가 파손된 기물들의 피해액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을 때다. 혜진이 눈빛에 성깔을 드러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형태야, 피해액을 말해. 내가 다 물어줄게.”

   형태가 한동안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혜진을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네가 나를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 어쩌면 도장의 기물을 다짜고짜 박살낼 수 있니? 이게 관장으로서 할 만한 처신이야? 내가 너한테 잘못한 일이 뭐냐? 있으면 솔직히 말해 봐. 이번 일은 단순히 배상만으로 해결될 성질은 아닌 것 같아.”

   혜진이 갑자기 술잔을 ‘탁’하는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언성을 높였다.

   “단순한 배상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어쩔 건데? 나와 맞장을 뜨겠다는 얘기야, 지금? 원하는 대로 다 해 줄게. 내 참 더러워서.”

   순간적으로 형태의 눈에 광기(狂氣)가 서렸다. 말리지 않으면 사고를 일으킬 눈빛이었다. 나는 다짜고짜 형태를 끌고 포장마차 밖으로 나갔다. 형태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형태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내 말 들어! 내가 대신 해결할게! 내 말 안 들으면 우린 친구가 아냐, 알겠어?”

   억지로 형태를 택시에 태워 먼저 보낸 뒤였다. 나와 혜진은 포장마차를 나와 노래방으로 향했다. 내가 노래방을 제안했을 때다. 혜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기철아, 너하고는 대화가 될 것 같네. 좋아, 노래방에 가자구.”

   노래방에서 충분히 노래를 불러 억압감을 해소시키려는 의도였다. 둘이 노래방에 들어선 뒤였다. 말이 필요 없이 내가 먼저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마이크를 혜진에게 넘겼다. 혜진이 마이크를 잡자 노래를 기분대로 불렀다. 이런 방식으로 서너 차례를 반복하여 노래한 뒤였다. 내가 혜진에게 형태와 화해하라고 권했다. 그런 뒤에 형태에게 전화를 걸어 둘이 통화하게 했다. 의외로 둘이 선뜻 화해하여 즐거운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내가 할 역할이 끝났다고 여겼다. 노래방을 벗어나 헤어지려 할 때였다. 혜진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면서 조금만 더 같이 있어 달라고 했다. 나는 가만히 혜진의 눈빛을 살폈다. 욕정이 들끓기 시작한 탁한 눈빛이었다. 조금 더 머물러 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선약이 있어서 대단히 미안하다는 뜻을 정중히 나타내었다. 그리고는 그녀와 악수를 나누고는 헤어졌다. 그리고는 그녀를 만날 일이 다시는 없겠거니 여겼다.

   마침내 산등성이를 깎아 만든 택지로 들어선다. 거기 가운데쯤 사모의 집이 있다. 아파트 9층의 사모의 집에 들어선다.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피아노 위의 스승의 사진 앞에 고개를 숙인다. 그런 뒤에 형태와 내가 사모에게 절을 한다. 홍영이 주방에서 따뜻한 인삼차를 끓여 일행에게 내놓는다. 홍영이 먼저 입을 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벌써 3년이 지났잖아? 무술도록 얘긴데 오늘은 결론을 내어 주었으면 좋겠어.”

사모가 딸을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린다. 홍영이 말을 잇는다.

   “아버지의 유언으로는 책자를 기철에게 전하라고 했지? 그런데 기철은 받지 않겠다고 했어. 그러면 책자를 원하는 형태나 나에게 주는 게 마땅하잖아? 기철이 받지 않는다고 해서 책자를 태워서야 되겠어? 아무리 유언이라도 그렇지 필생의 역작을 재로 만들 수는 없어. 여기에 대해 엄마는 어떻게 생각해?”

   사모가 방바닥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입을 연다.

   “나는 유언대로 해야 할 이유가 있어. 영감이 유언대로 해 달라고 눈을 감기 직전까지 부탁했기 때문이야.”

말을 마치고 나서도 한참을 궁리하는 모양이더니 결심한 듯 말한다. 2주 후의 주말인 토요일 오후에 제부도에서 함께 일박(一泊)하자고 말한다. 그런 뒤 일요일 새벽 5시에 해결책을 들려주겠다고 한다. 그 때까지 각자 무술 수련을 잘 하라고 일러준다. 사모의 말이 끝난 뒤다. 형태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모의 집을 떠난다. 홍영은 오랜만에 사모와 함께 시간을 갖겠다고 한다.

   형태를 태워준 뒤에 나는 곧바로 내 아파트로 향한다. 이윽고 내 아파트에 들어선다. 세수를 마친 뒤에 커피포트로 물을 끓인다. 하루의 시간이 꽤 빨리 흐른 듯한 느낌이다.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착상(着想)을 하려는 터다. 커피를 마실 때면 더러 좋은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 이런 생각을 붙잡는 것이 나의 재능 중의 하나이다.

   작년 5월 하순 무렵이었다. 산야마다 눈송이처럼 나부끼던 아카시아 꽃이 무더기로 떨어질 무렵이었다. 홍영이 내게 함께 여행을 하자고 제안했다. 일요일 새벽에 승용차를 몰아 포천의 산정호수로 갔다. 호수에 도착하니 아직도 해가 뜨지 않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호숫가를 산책하기 시작했다. 170cm가량의 키에 늘씬한 몸매를 가진 홍영이었다. 얼굴도 빼어나게 아름다워 사내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러다 보니 혜진의 말대로 남의 애인이었던 사내들까지 홍영에게 매달렸다. 홍영은 그만큼 매력적인 미모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애인이 없었다. 사랑을 시작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랬기에 홍영과의 여행도 덤덤한 마음으로 임했다. 아침 햇살이 퍼진 뒤에 둘은 음식점을 찾아 들어섰다. 쏘가리 매운탕에 소주를 곁들여 아침 식사를 했다. 체육대학을 나와 도장을 개설한 홍영의 체험담을 듣는 중이었다. 자꾸만 취기가 올라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안간힘을 쓰며 버텨내려고 노력했다.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어 양해를 구하고 혼자서 호숫가로 나갔다. 술에서 깨어나기 위한 일환이었다. 하지만 좀체 취기는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술잔을 많이 비운 탓이라 여겨졌다. 자꾸만 몸이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려고 했다. 눈을 반듯이 떠도 금세 감겨 버리곤 했다.

   바로 이 때였다.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나의 귓속으로 밀려들었다.

   “어, 기철이 어쩐 일이야? 술이 많이 취했네? 나, 혜진인데 알아보겠어?”

   여인의 부드러운 팔이 나를 끌고 어디인가로 이동함을 느꼈다. 도착할 때까지는 눈을 가물거리며 그냥 허청거리며 걸었다. 어느 곳에 도착하여 남자 종업원의 부축까지 받으며 또 이동했다. 음주 이후의 내 의식은 거기까지 기억했을 따름이다.

   상쾌한 느낌으로 술에서 깨어난 뒤였다. 눈을 떠 보니 곁에는 혜진이 알몸으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갑자기 소스라쳐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완전한 발가숭이였다. 얼이 빠진 느낌으로 침대의 하얀 시트를 살펴보았다. 성기에서 배출된 물질들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나는 절망 상태에 빠져 안절부절못했다. 한참 고개를 숙여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귓전으로 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보같이 겁먹은 거야? 네가 좋아서 내가 덮쳤을 뿐이야. 일방적이어서 미안한데 지금부터 우리 사귀면 어때? 정 네가 싫다면 할 수 없고.”

   마시다 만 커피를 입술에 가져갈 때다. 머릿속으로 아늑한 기운이 스며들며 과거의 기억이 밀려든다. 갈색 털구름의 조직 배양에 매달리려던 의식의 방향이 바뀐다. 그러면서 아스라한 과거의 기억에 뒤엉키고 있다.

   대학 신입생 시절이었다. 봉천동 고개를 넘어 신림동 골짜기를 내려오려던 때였다. 당시의 봉천동 고개는 전국에 알려진 달동네 중의 하나였다. 도로 여건이 안 좋아서 걸어서 내려갈 참이었다. 석양이 스러지고 사방이 땅거미로 덮여 갈 무렵이었다. 담벼락이 상당히 무너진 고가 앞을 지나갈 찰나였다. 가까운 곳에서 제지를 받는 듯한 답답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앳된 여자의 목소리로 들렸다. 혈기 왕성한 때라 즉시 소리 나는 곳으로 내달렸다. 20대의 불량배 둘이 교복 차림의 여고생을 막 겁탈하려고 했다. 한 명은 여학생을 뒤에서 껴안으며 입을 손으로 막고 있었다. 다른 사내는 학생의 치마를 막 걷어 올리려는 중이었다. 주변은 으슥하여 다른 보행인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고함을 질러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는 어려운 장소였다. 그랬기에 불량배들이 안심하고 학생을 겁탈하려 했던 모양이다. 상대가 둘이라는 게 별로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태권도 3단의 유단자라는 자만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량배들에게 다가가기 전에 냅다 고함부터 질렀다.

   “경찰 아저씨, 이 쪽입니다! 경찰 아저씨, 바로 여깁니다!”

   마치 경찰을 미리부터 불렀던 것처럼 보이려는 취지였다. 이렇게 하면 불량배들이 틀림없이 달아나겠거니 여겼다. 하지만 불량배들은 능청스러울 정도로 여유 만만했다. 힐끔 나를 노려보더니 둘이 눈짓을 교환했다. 그러더니 한 명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깨달았다. 법이 통하지 않는 장소임을. 우선 나를 보호하기 위해 무술을 쓰기로 했다. 나도 사내를 향해 달려들며 힘껏 몸을 솟구쳤다. 그 순간에 사내의 턱을 앞차기로 걷어차 버렸다. ‘딱’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내가 턱을 싸안고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는 재차 여학생을 안고 있는 불량배에게로 달려들었다. 내가 가까이 가자 여학생을 밀치면서 불량배가 공격 자세를 취했다. 불량배와 나와의 거리를 잰 상태였다. 고개를 약간 좌측으로 꺾으며 몸을 솟구쳤다. 사내의 면상을 내 머리로 받아 버렸다. ‘퍽’하는 소리를 내며 불량배가 땅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여학생이 우려되어 고개를 돌려보니 여학생은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불량배들로부터 신속히 벗어날 생각으로 막 달리기 시작했을 때다. 호루라기를 불며 경찰관 둘이 달려와 나를 붙잡았다.

   잠시 후에 불량배 둘과 나는 파출소로 연행되었다. 곧바로 신분증을 제시하고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나는 여학생이 위난을 당한 상황을 말하며 경위를 설명했다. 불량배 둘이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그런 사실을 아예 부인했다. 내가 주장하려는 근거를 대라며 경찰관이 내게 윽박질렀다.

   나는 폭행 치상죄의 현행범으로 파출소에 연행되었다. 한 명은 코뼈가 부러진 것 같다고 했다. 다른 한 명은 턱이 깨진 것 같다고 주장했다. 불량배들은 잠시 후에 진단서를 끊어서 파출소에 제출했다. 다행히 골절 상태는 아니지만 코뼈와 턱뼈에 금이 갔다는 진단이었다. 전치 3주간의 진단서였다. 경찰이 내게 종용했다. 피해자와 합의하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불량배들은 비웃는 눈빛으로 씩 웃었다.

   운에 맡기는 수밖엔 없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여학생을 구해 주려다가 나만 처벌받게 되었기에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여겨졌다. 경찰이 사고 현장에 그렇게 가까이에 있을 줄은 몰랐다. 비록 내가 거짓 연기로 경찰들을 불렀다고는 하지만.

   연이은 상념에서 깨어나자 나는 종이와 연필을 든다. 갈색 털구름의 조직 배양 방법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영양물을 넣어 인위적으로 만든 합성배지에 조직을 넣고 온도를 맞춘다. 배지(培地)에 투입하는 영양물의 종류는 일반 농작물의 수경 재배용과 유사하다. 원소로는 질소, 인, 칼륨, 마그네슘, 칼슘이 많이 든 물질들이다. 수소 이온 지수의 값은 6.5에 맞추는 것이 보통이다.

   종이 위에 함량별 분포 곡선을 그려본다. 분포곡선은 예비 실험을 하는 데에 중요한 지침이 되는 자료다. 대략 두 시간쯤 생각해 보니 진행 방향이 예측된다. 진행 방향만 잡으면 나머지는 순조롭게 추진된다. 머릿속으로 짜낸 도면을 봉투에 넣는다. 다음 날 출근할 때 연구실로 갖고 갈 작정이다.

   대학 신입생 시절에 나한테 선고된 벌금액은 100만 원이었다. 당시의 나한테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어쩔 수 없이 시골의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영세한 어선을 모는 아버지로부터 벌금액을 받아야만 했다.

   그 때부터 무술에 대한 내 관점이 달라졌다. 일단 어떤 경우가 생겨도 남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고. 상처를 입히지 않고 적을 제압하는 방법. 이것을 위해서는 빠른 손놀림과 발동작으로 급소를 공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나의 특기는 공중 발차기였다. 그랬기에 짧은 접촉 시간에도 강한 힘이 실리기 마련이었다.

   어느새 자정 무렵이다. 창 밖을 두들기는 바람소리가 너무도 강렬하다. 나는 침상에 몸을 눕혀 눈을 감는다. 어느새 의식이 잠결에 휩쓸려 버린다.

   날이 밝자 일찍 연구원으로 출근한다. 연구실 창문을 열어 실내 공기를 환기시킨다. 그리고 난 뒤에 실험대 앞에 앉는다. 조직 배양이 진행되는 항온조를 들여다본다. 섭씨 27도를 유지하며 조직들이 배지(培地) 내에 잘 분산되어 있다. 문득 의식 속으로 최근의 연구 성과가 물결처럼 떠오른다.

   갈조류인 갈색 털구름의 조직 배양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단위 질량당의 열 함량도 무척 높은 영양물임이 밝혀졌다. 그래서 갈색 털구름은 차세대 영양 자원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에 관한 결과는 연구 논문으로써 해외 논문지에도 게재되었다. 해양 자원 연구부에도 국가의 지원금이 듬뿍 들어왔다. 해양 연구원의 성과를 자축하는 분위기가 며칠간 지속되었다.

   어느새 2주가 흐른 주말이다. 새벽 5시의 제부도 해변이다. 딱 4사람만이 해변의 기둥 바위 옆에 서 있다. 사모(師母)와 홍영과 형태와 나. 사모를 제외하고는 다들 도복 차림이다.

   사모가 무술도록을 싼 보자기를 푼다. 황색 비단으로 2중으로 감싼 보자기가 풀린다. 그러자 그 안에 해서체로 ‘武術圖錄(무술도록)’이라 적힌 책자가 보인다. ‘崔丞熙(최승희)’라는 스승의 이름도 한자로 적혀 있다. 책자의 크기는 A4 용지 크기다. 두께는 50여 면에 불과할 뿐이다. 각 면마다 무술 동작의 설명과 4장씩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50종의 무술이 집대성되어 있다. 정말 무술의 비록(秘錄)이라 여겨지는 책자다. 보자마자 탐욕을 유발시키는 물건이다. 사모가 입을 연다.

   “내가 책자 속의 3가지 동작을 지정해 주겠네. 세 사람은 최선을 다해 동작을 시연해 주기 바란다. 나를 스승이라 여기고 이 자리에서는 최선을 다해 주기 바란다. 일부러 동작을 서투르게 해서 서열을 조작하는 일이 없기 바란다. 공정한 평가를 위해 청도관 출신의 원로 5분을 모셔 왔어. 내가 전화를 하면 곧바로 나오시기로 했으니 기다려 주게. 우리가 묵었던 여관 아래층에 그 분들을 내가 모셨어. 너희들이 모르도록 내가 정중히 숙박비까지 치르면서 초대했어. 연락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도관의 달인급의 원로 5명. 이들이 사모의 곁에 나란히 서서 형태와 홍영과 나를 지켜본다. 무인들이라 원로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바위마저도 관통해 버릴 듯한 매서움이 실려 있다. 사모가 지정한 동작은 도록의 3식, 17식, 29식의 3가지다. 3가지 동작의 사진 복사물은 원로들이 이미 가지고 있다. 아마도 사모가 미리 준비해서 원로들에게 준 모양이다. 원로들이 상당히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형태와 홍영과 나를 지켜본다.

   형태가 먼저 백사장에서 자세를 취한다. 7년을 넘게 체육관을 운영하며 제자들을 길러온 형태다. 현재는 태권도가 5단이며 합기도가 4단인 전문 무술인이다. 나지막한 기합을 지르는 찰나에 3식을 시연한다. 3식은 팔과 손만을 이용한 무술 동작이다. 17식에는 팔과 다리를 조화롭게 쓰되 도약(跳躍)하는 동작은 없다. 29식에는 공중 발차기가 포함되어 있다. 먼저 바닥에 손을 대지 않고 뛰어서 뒤로 공중제비를 넘는다. 그런 뒤에 신속히 자세를 바로잡는다. 그리고는 연속해서 3차례의 뛰어 뒤돌려 차기를 해야 한다. 뒤돌려 차기의 방향은 좌우 방향으로 번갈아 가며 진행한다. 어느 동작도 만만한 것은 없지만 29식이 난이도가 높다고 여겨진다. 형태가 29식을 진행하다가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해 무척 비틀거린다. 다음으로는 스승의 딸인 홍영이 시연을 한다. 마찬가지로 17식까지는 무난하게 마친다. 29식에 이르러 공중제비를 넘다가 바로 서지 못해 땅바닥에 쓰러진다. 그러나 이내 일어나 뛰어 뒤돌려 차기까지를 끝낸다.

   마지막으로 내가 사모와 원로들 앞에 선다. 시연을 하기에 앞서 마음속으로 대자연에게 경건히 기도한다. 스승의 창작 무술에 대하여 최선을 다해 시연하겠다고. 온 정신을 시연하는 데만 집중시켜 3식을 전개한다. 이어서 17식을 시연한다. 마지막으로 숨을 들이마시자마자 찰나의 순발력으로 몸을 뒤집는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며 몸이 허공을 구르는 느낌이 든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3연속 뛰어 뒤돌려 차기를 한다. 사모와 원로들 및 형태와 홍영까지 박수갈채를 일제히 내게 보낸다.

   원로들 중의 판정 대표자로 지적된 사람이 입을 연다.

   “5사람이 위촉을 받아 심사한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세 분 모두 무술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년간의 수련 없이는 흉내 내기 어려운 동작들을 잘 소화했습니다. 작고한 최 선생님의 필생의 작품으로서 정말 손색없는 동작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세 사람 중의 한 분을 정하도록 위촉받았습니다. 우리들의 견해로서는 만장일치로 서기철 씨를 오늘의 우승자로 결정했습니다. 결과가 마음에 안 들지라도 우리들의 결정을 존중해 주기 바랍니다.”

   말을 마치자 사모는 택시를 불러 원로들을 먼저 보낸다. 그런 뒤에 사모가 형태와 홍영과 나를 곁에 불러들인다. 다 모이자 숙연하면서도 자상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무술도록은 서군에게 넘기겠네. 사부의 필생의 역작이라 여기고 소중히 전승시켜 주길 바란다. 양군과 홍영도 섭섭하게 생각지 말고 서군을 위해 격려해 주게.”

   그래서 무술도록을 내가 인수하게 된다.

   제부도에서 돌아온 뒤였다. 나는 며칠간을 고심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일단 스승의 무술 동작을 점검하기로 했다. 거의 한 달에 걸쳐서 시연을 해 본 뒤였다. 타격에 앞서서 힘의 균배를 조절하는 동작의 배치가 절묘하게 느껴졌다. 무술도록의 동작은 위력적이지만 상대의 생명을 위태롭게 내몰지는 않았다. 반드시 격렬한 동작 이전에는 기운의 균배를 조절하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무술을 통한 상대의 신체에 대한 섬세한 배려가 깔린 동작들이었다. 나는 무술도록의 내력을 파악한 순간에 무술도록을 향해 삼배(三拜)를 올렸다. 무술의 달인인 스승의 결정체에 대한 진정한 존경심 때문이었다.

   무술도록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한 날. 나는 형태와 홍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태와 홍영을 만나 무술도록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서 형태의 도장에서 사범으로서 수련생들을 지도해도 되겠는지를 물었다. 매주 주말에만 한 시간씩 할애하기로 했다. 형태가 흔쾌히 받아들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홍영도 무척 기쁜 표정으로 나를 격려해 주었다.

   그 날 형태가 홍영과 나를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나는 스승님의 무술로 무술계에서 이름을 떨칠 생각에 빠져 있었어. 태권도 최고의 달인이 되겠다는 야망이 컸지. 기철의 얘기를 듣고 나서야 왜 스승님이 기철만을 고집했는지를 알았어. 인간의 내면에는 누구에게나 신성(神性)이 조금씩은 있다고 간주되거든. 진정한 신성은 상대에 대한 배려로부터 발원된다는 것을 느꼈어.”

   홍영도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아버님의 무술이 단절될까 두려웠는데 전승의 길이 열려 기뻐. 나도 매주 한 번씩은 무술을 전승시키는 데에 합류할게.”

   나도 그들을 향해 말했다.

   “무술도록은 조만간 책자로 발간하여 전국의 대학 도서관에 기증하도록 하겠어. 그래서 스승님의 역작을 연구 자료용으로 남기고 싶어. 당연히 사모님과 너희들한테도 한 권씩 주고 말이야.”

   내 말을 듣자 형태와 홍영이 모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무술도록의 무술 전승을 시작한 지 한 달째의 일요일 아침이다. 홍영과 형태와 나는 새벽 4시에 도장에 모였다. 50수의 모든 동작을 함께 시연해 보자는 의견 때문이다. 모든 동작을 세세히 토론해 가며 시연을 해 나간다. 아침 8시가 되어서야 모든 시연을 마친다. 시연을 마친 순간이다. 셋이 거의 동시에 중얼댄다. 시연을 마치자마자 따스한 기류가 머릿속으로 폭포수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고. 세 사람은 흠칫 놀라 서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라본다. 그러다가 휩쓸리던 기류가 가라앉을 시점이다. 세 사람은 손바닥을 함께 맞대고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린다.

   “이게 화합의 경지야!”

   세 사람은 가슴 벅찬 느낌으로 아침을 맞는다. 이전에는 이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풍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 회상하면서.

<200자 원고지 8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