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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상비보(無上秘譜)

                                                                                             손 정 모

   밤새 싸늘한 산바람이 골짜기를 훑어 내리고 있었다. 골짜기 가득 우거진 수목의 잎사귀들이 스산하게 몸을 떨어대었다. 내가 머문 곳은 지리산 북쪽 산록의 산막(山幕)이었다. 눈은 감았어도 밤새 들리던 바람소리를 벗어나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가방을 열어 위성 항법 탐색기를 꺼내 든다. 기상 관측 이래로 최대로 많은 눈이 내린 한반도다. 지리산 전체가 백설(白雪)로 뒤덮여 설산(雪山)이 되어 있다. 위성 탐색기가 없이는 약속 장소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리산의 팔선계곡(八仙溪谷)을 찾아 들어선다. 지리산 북쪽 7부 능선쯤의 칠선계곡(七仙溪谷). 칠선계곡을 지나면서부터 지형이 돌연히 급경사를 이루며 치솟는다. 암반이나 지세가 험준하기 이를 데 없다. 자칫 실수라도 할라치면 실족하여 죽음을 맞기 십상이다.

 “지리산 팔선계곡의 용소(龍沼)에서 오늘 오후 3시에 만나기로 해요. 제가 누구인지는 만나면 알게 될 거예요. ‘무상비보(無上秘譜)’에 대한 내용이니 반드시 나와 주세요. 그러면 나와 주시리라 믿고 기다릴게요.”

  새벽에 은방울처럼 맑은 목소리로 귓전을 파고든 여인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로 가늠해 보면 20대 중반의 나이로 여겨졌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는 산막의 마당에 나가 기본 체조를 한다. 그리고 나서는 공중 발차기 동작을 연습한다. 발차기 동작에는 내 인생이 송두리째 담겨 있다. 내가 추구하는 최대한의 자유로움의 표출 방식이 공중 발차기이다. 몸을 솟구쳐 공중에 머무는 시간을 이용하여 발차기 동작을 진행한다.

   무상비보(無上秘譜)라? 10년 전부터 세간에 전설처럼 소문으로 떠도는 책자다. 필적할 대상이 없을 정도의 신비한 기록이 담긴 서책을 말한다. 그것만 읽으면 분야를 초월하여 최상의 달인이 된다는 신비로운 책자다. 나도 소문을 쫓아 전국을 누빈 지 5년째다. 새벽의 전화를 받으면서도 부질없는 일이어도 좋다고 체념하며 마음을 다졌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상 끝까지 뒤져서라도 달성하고 싶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청아한 풍경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산사(山寺)가 지척에 있는 모양이다. 청아한 풍경소리를 듣자 푸른 연기(煙氣)가 떠오른다. 신비스러운 존재가 나타날 때면 배경으로 곧잘 등장하는 푸른 연기. 눈밭을 헤치며 어디선가 푸른 연기가 밀려든다. 푸른 연기가 점차 사방으로 내리깔리며 허연 수염의 노인이 나타난다. 그의 손에 작은 책자가 들려 있다.

  ‘혹시 저게 무상비보가 아닐까? 저 노인이 바로 최상의 달인인가?’

  풍경소리가 재차 울릴 때마다 노인이 점차 내게로 다가온다. 노인의 눈이 어디에 있는가? 노인의 눈을 찾으려고 할 때다. 솔숲에서 느닷없이 까치 소리가 크게 들린다. 아마도 낯선 사람이나 동물이 나타난 듯하다. 그 바람에 푸른 연기에 휩싸였던 상상(想像)의 노인은 사라져 버렸다. 찰나의 안타까움에 허둥대다가 자세를 바로잡는다.

   나는 고개를 들어 까치들을 살핀다. 대여섯 마리가 눈 덮인 솔숲 위를 날며 연신 지저귄다. 이른 아침이라 울음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필시 까치 주변에는 낯선 사람이나 동물이 출현했을 것 같다.

   2년 전의 겨울에도 군산에는 발목이 덮일 정도의 눈이 내렸다. 서해로 돌출한 지형 탓이었다. 내가 군 소재지의 말단 공무원으로 발령받은 지 6개월째였다. 당시의 내 나이는 26살로 젊은 피가 끓을 때였다.

   퇴근하여 내가 자취하는 민가에 닿았을 때였다. 해변 마을이라 해변에 딸린 조개 양식지가 집집마다 딸려 있었다. 논이나 밭처럼 개펄에도 경계가 있었다. 집 주인 여자는 개펄 경계로 이전부터 이웃과 다투곤 했다.

   그 날도 개펄 문제로 안주인은 이웃집 여자와 심하게 다투었다. 서로 자기 땅이라 주장하며 싸우다가 옆집 여자가 안주인을 구타했다. 머리채도 당기고 뺨도 때리고 팔도 잡아 비틀었다. 그래서 안주인의 상반신에 여러 군데 상처가 생겨 피가 흘렀다. 그랬는데도 옆집 여자는 잠시 후에 벽돌을 들어 자해(自害)를 했다. 그리고는 경찰서에 안주인을 폭행죄로 고소했다.

   증거 불충분으로 사건이 무혐의 처리된 지 얼마 뒤였다. 퇴근 후에 자취 집 안주인의 개펄에 가 보았다. 문득 개펄의 모습이 어떤지 궁금하여 가 봤다. 그랬는데 마침 옆집 여자가 안주인을 마구 구타하는 중이었다. 해안가 방풍림에 숨어서 그 장면을 디지털 사진기에 담았다.

   억울해 하는 안주인에게 폭행 장면의 사진을 내밀었다. 억울해 치를 떨던 안주인이 곧바로 가해자를 고소했다. 얼마 후에 옆집 여자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사진 때문에 처벌받았다며 옆집 부부가 나를 찾아 왔다. 50대 초반의 여자가 다짜고짜 내 팔을 손톱으로 할퀴었다. 금세 팔뚝이 찢겨 핏방울이 흘렀다. 그의 남편이 내 멱살을 잡으면서 뺨을 때렸다. 순간적으로 울컥 노여움이 치솟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눈가루가 실연기처럼 허공으로 피어오른다. 하얀 색채가 허공으로 흩날리면서 파르스름한 빛으로 변하곤 한다. 바람의 허리를 가르듯 때때로 풍경소리가 아늑하게 귓전으로 밀려든다.

  “무상비보(無上秘譜)에 대한 내용이니 반드시 나와 주세요.”

  간결하면서도 청아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왠지 무척 신뢰가 가는 목소리였다. 잡다한 설명할 필요 없이 느낌으로 전해지는 여인에 대한 신뢰였다.

  아침 운동을 하며 산기슭 아래를 내려다본다. 설산을 등반하려는 등산객 셋이 산을 오르는 장면이 보인다. 여태껏 까치가 우짖은 원인이었으리라 여겨진다.

나는 여인에 대한 의아스러움을 떨칠 수가 없다. 하필이면 왜 지리산 팔선계곡에서 만나자고 했는지? 내가 지리산 산막에 머물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산막에서 팔선계곡까지는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다. 내 거처를 알 만한 사람이라고는 거의 없는 상태다. 그래서 여인이 누구인지 무척 궁금하다.

   격분을 참지 못해 옆집 부부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내의 턱뼈와 갈비뼈가 바스러지고 여자의 이가 세 개 부러졌다. 두 달의 기간이 흐른 뒤였다. 징역 1년에 집행 유예 2년의 선고를 받았다. 그리하여 나는 공직 생활을 접게 되었다.

   당시의 시점에서 4년이 지나야만 임용 시험에 재도전이 가능했다. 공무원 시험 자체가 치열하여 4년 후를 기약할 수가 없었다. 4년 뒤에 다시 합격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벌써 세월은 2년이나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암담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28살의 나이에 이를 갈며 내면을 다스리는 나의 실체는 뭔가? 어쩌다가 직장까지 잃고 삶을 방황하게 된 걸까? 솔숲 위로 치닫는 바람결에 떠밀려 눈더미가 파도처럼 출렁댄다. 나무마다 눈으로 두껍게 휘감겨 온통 새하얀 색채로 흔들린다. 눈더미가 눈보라를 일으키며 공중으로 휘말려 오를 때마다 가슴이 떨린다.

   해난사고(海難事故)로 유년기에 부모를 잃고 고아 신세로 전국을 떠돌던 나다. 수시로 고향인 속초가 망막에 잔영으로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고향에는 친척이라곤 아무도 없어서 타향과 마찬가지다. 세상을 떠돌면서도 검정고시를 거쳐 대입 응시 자격까지는 갖추었다. 이런 상황에서 직장을 잃고 미아로 떠도는 마음이 황량하기 그지없다.

   짝짝짝짝!

   느닷없이 귓전에 박수갈채가 흘러들며 말소리가 들린다.

  “대단하십니다. 무술 사범이신가요?”

  “매트도 깔지 않고 위험하지 않으세요?”

  “완전한 예술의 경지라 어떤 분인지 궁금했어요.”

   고개를 돌려 보니 세 사람의 등산객이 산막에 막 들어선다. 생각에 잠기며 무의식적인 공중 발차기 동작을 한 셈이다. 수없이 반복된 수련이라 생각만으로도 동작이 취해진다. 나는 동작을 멈추고 등산객들을 바라본다. 다들 20대 중반의 청춘 남녀들로 보인다. 둘은 여인이고 하나는 사내다.

   따끈한 칡차를 끓여 등산객들에게 내밀며 내가 입을 연다.

  “추운 날씨에 어떻게 산행할 마음을 먹었어요? 상당히 위험하기도 할 거구요.”

  사내가 활짝 웃으며 응답한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사내의 말이 전혀 농담 같지가 않아 가슴이 섬뜩해진다. 그래서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울음을 억누르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창졸간에 놀라 여인들의 표정도 함께 살펴본다. 놀랍게도 여인들의 표정에도 시린 설움이 엉겨 붙어 있다. 나는 청춘 남녀를 산막의 방으로 안내한다. 석유난로의 불길을 한껏 올리며 청춘 남녀들과 통성명을 한다.

  “산에서 만난 것도 연분인데 알고 지냅시다. 저는 권수종(權秀宗)이에요.”

   내가 통성명을 시도하자 남녀들도 일제히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얼굴이 갸름하고 피부가 고운 여인은 문은지(文恩芝)라고 밝힌다. 키가 크고 얼굴이 둥글고 살결이 흰 여인은 신수연(申修淵)이라 알린다. 80kg 정도의 건장한 체격을 가진 사내는 최덕준(崔德俊)이라 말한다. 청춘 남녀들은 다들 27살이라고 들려준다.

   산막의 부엌에서 소주와 도토리묵과 간장을 밥상에 챙겨 방으로 가져온다. 밥상에 넷이 둘러앉아 술잔에 술을 채운다. 술잔을 나누며 서로의 사연을 얘기하며 가슴을 연다. 세 남녀가 먼저 나에게 산막에 머무는 사연을 묻는다. 내가 고초를 당한 얘기를 차분히 그들에게 들려준다. 그러자 그들도 일제히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문다.

   그들의 차례가 되자 덕준이 얘기를 한다.

  “동계 수련회에 동아리 학생들을 데리고 무주로 갔어요. 그랬는데 ??”

   그들 셋은 같은 중학교의 교사였다. 스키 동아리 학생들의 요청으로 학생들을 인솔하고 무주로 갔다. 동행했던 학생들 중의 둘이 경사로를 타고 내려오다가 맞부딪혀 넘어졌다. 창졸간에 한 학생은 목이 부러졌고 한 학생은 뇌진탕을 일으켰다. 병원으로 옮기기도 전에 학생 둘은 현장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결국 인솔 책임의 문제로 셋은 징계를 받아 해임되었다. 지난해 연말의 방학 중에 벌어진 일이라고 밝혔다.

   얼굴이 고운 은지가 말한다.

  “다시 임용고사를 봐서 교단에 서기란 거의 불가능해요. 경쟁률이 어디 만만해야 말이죠. 날이 갈수록 경쟁률은 치열해지는데 도저히 대책이 없어요. 그래서 생명을 내걸고 지리산 산행을 하기로 작정했어요.”

   내가 술잔을 비우며 응답한다.

  “어쩜 처지가 다들 고약해졌는지 모르겠네요. 전생에 쌓은 공덕이 부실한 탓이라 할까요?”

   수연이 곧바로 대답한다.

  “하여간 꼴이 그렇게 되고 말았어요. 수종 씨는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 작정이세요?”

   나는 대답 대신에 수연의 술잔에 술을 채운다. 그러면서 암담한 표정으로 일행을 바라보며 말한다.

  “미래의 일은 차차 생각하기로 했어요. 당장은 오늘 오후 3시까지 팔선계곡으로 가기로 했어요. 거기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어요.”

   세 남녀가 썰렁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 쳐다본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약속 장소에 간다는 내가 웃기는 모양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미 약속을 했기에 취소할 수도 없는 일이다. 더구나 나는 상대의 연락처도 모르는 처지다.

   덕준이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하여간 이렇게 만난 것도 소중한 연분이니 서로 친하게 지냅시다. 우리들의 연락처를 알려 드릴게요. 수종 씨도 전화번호를 알려 주세요. 설혹 우리들의 연락처가 마지막 교신처가 될지라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합시다.”

   덕준의 마지막 음절에는 눈물이 실린 듯하다. 생명을 내걸고 사지(死地)로 뛰어드는 비장한 기운이 내 가슴으로 전해진다. 누가 먼저 죽을지 모르리라 생각된다. 팔선계곡까지 올라가야 하는 내게도 죽음의 신이 달려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차피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어쩌겠는가? 운명을 비켜 갈 수는 없을 것이리라.

   술병을 죄다 비운 뒤다. 일행은 산막의 마당에서 작별 인사를 나눈다. 어쩐지 이승에서는 다시 못 만날 듯한 느낌이 든다. 산악에 쌓인 눈이 등산을 하기에는 아주 위험한 수준이라 여겨진다.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굳이 등산을 하려는 그들의 마음이 눈물겹다. 등산하려는 그들보다 내 표정이 심각했던 탓일까? 그들 일행의 표정이 숙연해지더니 잠시 눈빛을 교환하는 모양이다. 뭔가 눈빛으로 의사를 주고받은 듯하다. 그러더니 덕준이 나를 향해 말한다.

  “쌓인 눈이 아무래도 부담스럽기는 하네요. 하지만 우린 끝까지 산을 오를 거예요. 생사를 초월하여 우리가 여기서 마지막으로 만났다는 증표를 갖고 싶군요. 우리를 차례대로 한 번씩만 안아 주지 않을래요?”

   덕준의 말을 듣는 순간이다. 뭔가 약정된 비극의 냄새가 느껴지는 듯하여 전신이 섬뜩해진다. 하지만 마음을 추스르며 덕준의 말에 응답한다.

  “어차피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나는 법이죠. 여기서 헤어지면 이승에서는 아마도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생사를 초월하여 오늘의 만남을 가슴속에 아름답게 간직할게요.”

   대답을 마치자 나는 천천히 팔을 옆으로 벌린다. 덕준과 먼저 힘껏 포옹을 한다. 그러면서 무사하기를 바란다며 격려해 준다. 비장한 표정으로 덕준이 고개를 끄떡인다. 다음으로는 은지가 내게 다가오며 포옹한다. 그녀에게도 무사하기를 빈다며 격려해 준다. 마지막으로 수연이 천천히 팔을 들어 올린다. 내가 다가가 그녀를 힘껏 안아 준다. 마지막 격려의 전갈과 함께.

   포옹을 끝내고서도 한동안 먹먹한 눈길로 서로를 바라본다. 이윽고 남녀 셋이 먼저 지리산 자락을 타고 올라간다. 그들과 나는 일제히 손을 흔들며 서로를 떠나보낸다. 그들을 전송하는 나나 떠나는 그들이나 마음이 허망스럽기는 마찬가지이리라.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눈가에 눈물이 실려 흔들거린다.

   눈이 쌓인 상태와 거리를 감안하여 정오에 산막을 출발하기로 작정한다. 세 시간 만이면 충분히 팔선계곡에 도달하리라 여겨진다. 하늘은 맑게 개어 햇살이 눈부시게 흩날린다. 차가운 기온에 쌓인 눈은 조금도 녹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또 한 차례 산바람이 강하게 분다. 눈송이가 하늘을 뒤덮으며 뽀얗게 흩날린다. 솔잎은 여전히 굳은 명태처럼 뒤엉켜 있을 따름이다. 산악의 곳곳에서 하얀 불꽃이 치솟는 듯한 장관이 펼쳐진다. 광막하여 끝자락이 안 보일 정도의 울창한 삼림이다. 울창한 삼림을 뒤덮고 출렁대는 눈의 물결이 볼수록 장관이다.

   나는 흘깃 시계를 들여다본다. 오전 11시를 갓 지나고 있다. 서서히 산행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라 여긴다. 속옷과 양말 등속을 가방에 간추려 넣는다. 짐이 얼마 안 되기에 준비하는 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는다. 라면을 꺼내 끓이기 시작한다. 라면이 끓은 뒤다. 라면을 점심 식사로 삼아 차분히 먹는다. 설거지를 마치고 그릇을 깨끗이 씻어 부엌에 갖다 둔다. 누군가 다음에 산막을 이용할 사람에 대한 배려의 일환이다.

   내가 개펄 옆집 부부로 인하여 처벌받아 직장을 잃은 직후였다. 당장 옮겨 갈 곳이 없었다. 하지만 짐을 챙겨 자취집을 나섰다. 그리고선 해변의 민박집에서 달포를 지내기로 했다. 텅 빈 가슴을 추스르기 어려워 슬리퍼 차림으로 해변을 거닐었다. 거닐다가 지치면 술집에 들러 소주를 들이키곤 했다. 그러다가 술에 취하면 하염없이 해변을 거닐곤 했다.

   해변을 떠돌던 비닐 조각이 소나무 가지에 매달려 굉음을 내질렀다. 해묵은 노송 아래에서 소나무를 올려다보며 술병을 빨아대었다. 사무친 설움이 전신으로 피어올라 곧잘 눈이 충혈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민박집으로 흐느적대며 걸어 들어섰다. 방을 열고 몸을 자리에 눕히려고 할 때였다. 방바닥에는 누군가 누워 잠들어 있었다. 깜짝 놀라 불을 켜고 이불을 치켜들었다. 내가 자주 드나드는 술집 주인의 딸이었다. 25살의 여인은 고졸 학력에 얼굴도 반반하게 생겼다. 직장이 없다는 이유로 배척당하는 게 무척 서러웠다고 푸념을 해대었다. 한 번도 대작(對酌)한 적은 없었어도 내 이야기는 들은 모양이다. 여인의 머리맡에는 먹다 버린 소주병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여인을 보자 그만 가슴이 답답해지며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기척을 내지 않고 조용히 방을 빠져 나오려고 등을 돌렸다. 막 문지방에 발이 닿을 때였다. 자던 여인이 벌떡 일어나 뒤에서 나를 껴안으며 흐느꼈다.

  “가지 마세요. 나를 여자로 만들어 주지 않을래요? 아무런 보답도 안 바랄게요.”

   여인의 말을 듣는 순간에 나는 고개를 흔들며 짐을 챙겼다. 그리고는 곧바로 새벽에 길을 떠났다. 떠나는 발걸음마다 까닭 모를 설움이 끓어올라 눈물을 뿌렸다. 결혼 상대가 없어서 자신을 방치하려는 여인의 모습이 측은해 보였다. 대자연이 내 나약함을 술집 여인을 보내 일깨우려했던 것이었을까? 정녕 마음을 다스려 공무원 시험에 재도전하라는 대자연의 일깨움이었을까? 아무래도 내가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컸다. 그래서 마음은 더욱 공허해졌다.

   정오가 되자 마침내 위성 항법 탐색기를 꺼내 산행을 시작한다. 사방이 눈으로 뒤덮인 공간을 위성의 안내를 받아 등산하려고 한다. 과학이 인간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여긴다.

   무상비보를 들먹인 여인의 목소리는 은방울 소리처럼 맑게 들렸다. 한없는 신뢰감을 주던 목소리. 어떻게 하면 처음 통화하는 사람에게 신뢰감을 느끼게 만들었을까? 생각할수록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은 발목이 푹푹 빠질 정도로 깊이 쌓여 있다. 미끄러지지 않게 최대한 조심해야 할 상황이다. 미끄러지지 않게 신경을 쓰려니까 등산 속도가 느려진다. 약정된 시각까지는 팔선계곡에 도착해야 한다. 절대로 약속을 어겨서는 안 된다. 어쩌면 내게 부여된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세상의 시간을 단축시켜 보다 빨리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 돈을 많이 벌거나 커다란 명예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향기로운 인간의 풍도를 얼마나 빠른 시간에 지니게 되느냐가 문제다.

   힘겹게 팔선계곡을 찾아 막 골짜기로 들어설 때다.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폭포 소리가 골짜기를 꽉 채운다. 귀청이 얼얼할 만큼 폭포 소리가 장중하게 들린다. 추운 날씨임에도 폭포수는 흐르는 기세를 늦추지 않고 있다. 폭포 아래에 거대한 용소(龍沼)가 드러누워 있다. 동시에 십여 명은 족히 목욕할 수 있는 크기다. 시계를 보니 3시 10분 전이다. 가까스로 약속 시간을 맞춘 셈이다.

   용소 둘레를 둘러볼 때다. 맑은 휘파람 소리를 울리며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내닫는다. 점차 얼굴이 내 시야에 들어올 무렵이다. 내 심장이 서서히 얼어붙는 느낌이다. 일찍이 세상에서는 보지 못했던 빼어난 미모의 여인이다. 얼굴 전체에 미소가 그득 실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뒤설렌다. 초승달처럼 휘어져 올라간 눈썹과 흑백이 선명하여 별처럼 반짝이는 눈. 오뚝하게 치솟아 단아한 기품을 드러내는 코. 석류 꽃잎처럼 매혹적인 입술과 뽀얀 살결. 이목구비의 배치가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여인이다.

   여인이 용소에 도착하자마자 내게 손을 내민다. 나도 여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한다. 여인이 내게 간단히 자신의 소개를 한다. 나는 호감을 갖고 여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여인은 25살의 황윤지(黃潤芝)이라고 밝힌다. 제약 회사의 회사원으로 있으면서 그림 그리기를 취미 생활로 즐긴다. 그림의 소재를 찾기 위해 여행을 즐기곤 한다. 세상을 살다 보니 힘든 것이 대인 관계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단시일에 대인 관계를 원만하게 해결할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전국을 유람하던 중에 ‘무상비보’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 책자만 읽으면 최상의 달인이 된다고 했다.

   세상에서는 의외로 오래 전부터 그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어느 날 행려병 환자를 병원으로 데려다 준 적이 있었다. 행려병 환자는 70대의 노인이었고 보물처럼 간직한 것을 윤지에게 주었다. 손수건 크기의, 아주 오래 된 쇠가죽이었다. 거기에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무상비보가 소장되어 있는 지도라는 거였다.

   노인이 임종 직전에 윤지에게 들려주었다. 무상비보가 소장된 지점은 지리산의 팔선계곡의 석동이다. 노인이 직접 무상비보를 찾으려고도 했지만 나이 탓으로 포기했다. 그러다가 자신에게 덕을 베푼 윤지에게 지도(地圖)를 주기로 했다. 무상비보를 찾아 부디 달인이 되라며 노인이 눈을 감았다. 왠지 무상비보가 그녀 자신에게 많은 도움이 될 듯했다.

   그런데 처녀의 몸으로 혼자 지리산을 찾기는 위험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지리산 국립공원 관리 사무소에 도움을 청했다. 사무소에서는 젊은 도인(道人)이 지리산 산막에 기거한다고 알려주었다. 그 도인이 나였고 사무소에서는 신뢰할 만하다며 나를 추천했다. 당시에 나의 인적 사항은 사무소에 신고된 상태였다. 윤지의 생각으로도 나와 함께 한다면 문제가 없으리라 여겼다. 도인이기에 당연히 무상비보에 관심이 많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사무소로부터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내게 자신감을 갖고 전화했다고 한다.

   여인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난 뒤다. 나도 간략히 내 이름을 비롯한 내 소개를 했다. 여인이 눈빛을 반짝이며 내게 말한다.

  “댁의 얼굴이 하도 수려하여 눈이 부실 지경이에요. 혹시 애인이 있으세요?”

   애인이 없다는 내 대답을 듣자 그녀한테도 애인이 없다고 들려준다. 그러면서 한층 호감이 실린 눈빛으로 윤지가 나를 본다. 윤지의 눈부신 시선과 마주치자 자칫 눈이 멀 지경이다. 윤지의 제안으로 즉시 용소 근방을 뒤져 석동을 찾는다. 석동(石洞)은 칡덩굴로 가려진 채 폭포 상단에 자리 잡고 있다. 폭포수를 몸에 맞으며 아슬아슬하게 둘이 석동 안으로 들어선다. 동시에 서너 명이 나란히 서서 들어갈 만한 크기의 동굴이다. 동굴 안을 들어서서 얼마 되지 않아 보자기가 눈에 띈다. 책자를 싼 보자기 같다. 보자기는 정방형의 바윗돌 위에 놓여 있다.

   보자기를 드니 보자기 아래에는 한 장의 한지(漢紙)가 눈에 띈다. 거기에는 무상비보를 마련한 내력을 설명한 저술인의 말이 담겨 있다. 저술인은 동양 경전을 읽으며 평생 수련한 도인(道人)이라 밝힌다. 한지의 끝에 새겨진 그의 도호(道號)는 ‘운청(雲靑)’이라 되어 있다. 도호 이외에는 출생 시기나 출생지를 추정할 만한 근거가 없다.

   동양 경전의 요체를 32자의 글자로 무상비보에 남겼다고 밝힌다. 도인은 인척이 없는 관계로 책자를 동굴에 남겼다. 임종 직전에 무상비보에 보관된 지도를 쇠가죽에 그렸다. 쇠가죽 지도는 남해 보리암의 쌍홍문(雙虹門)의 석벽(石壁)에 남겼다. 천하의 절경을 찾은 사람에게 행운을 주려는 취지였다. 지도는 10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드러난다.

   윤지와 내가 설명문을 읽고는 잠시 서로를 바라본다. 나와 마찬가지로 윤지의 마음도 두근대는 모양이다. 마음을 가다듬고는 내가 보자기에 싸인 책자를 풀기 시작한다. 여인도 숨을 죽이며 내 행동을 지켜본다. 황색 보자기를 푸니 안에는 청색 보자기가 나타난다. 책자를 2중의 보자기로 싸 놓은 것이다. 청색 보자기를 조심스레 푼다. 색깔이 누런 빛깔의 오래된 한지로 제본된 책자가 눈앞에 드러난다.

   무상비보(無上秘譜).

   한자(漢字)로 쓰인 네 글자가 시선을 확 끈다. 경건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긴다. 첫째 장은 비어 있다. 둘째 장도 비어 있다. 예감이 이상하여 신속히 책을 빠르게 넘겨본다. 끝내 책자 속에는 글자가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 내가 윤지에게 책자를 내밀자 그녀도 신속히 책장을 넘긴다. 윤지도 멍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마주 바라보며 말한다.

  “이상하네요. 왜 글자가 하나도 안 보이죠? 혹시 먹(墨)이 한지에서 다 증발한 것일까요?”

   나는 고개를 흔들며 윤지를 향해 내 생각을 말한다.

  “비밀스런 고문서에는 먹이 아닌 화학 물질로 글을 쓴다고 들었어요. 물에 담그거나 불에 갖다 대면 글자가 나타난다고 했어요. 일단 동굴을 나가서 물로 먼저 시험해 보도록 합시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방에 매달린 거미줄이 옷에 마구 달라붙는다. 켜켜이 쌓인 먼지도 잔뜩 일어나 숨을 쉬기 답답할 지경이다. 가까스로 석동을 겨우 빠져 나간 뒤다. 윤지가 개울에서 플라스틱 생수병에 물을 담아 온다. 책자를 천천히 넘기며 물을 조금씩 끼얹어 본다. 전혀 글자라곤 나타나지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불이다. 만약 불에 넣어도 글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끝이다. 책만 태워 버리는 셈이 된다. 계곡 바닥의 반석 위에 마른 나무로 불을 지핀다. 금세 불길이 일며 마른 나뭇가지가 타들어간다. 내가 윤지를 향해 말한다.

  “만약 책을 태워도 아무런 글자를 발견하지 못하면 어쩌죠? 책만 태웠다고 저를 원망하지 않겠어요?”

   윤지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한다.

  “절대로 수종 씨를 원망하진 않을게요. 아무런 글자가 없어도 그 자체로서 어떤 의미를 전달하리라 생각돼요. 일단 불로 시도를 한 번 해 봅시다.”

   물에 젖은 책자를 불길에 가까이 갖다 댄다. 책에 불을 붙이기 전에 일단 열(熱)을 가해 볼 작정이다. 물이 증발하며 책의 종이가 오그라든다. 그러면서 종이의 색깔이 갈색으로 변한다. 종이의 색깔이 갈색으로 다 바뀔 무렵에 놀랍게도 글자가 나타난다. 한자로 된 글자가 책의 둘째 장에만 기록되어 있다. 책의 뒷부분은 전부 공백으로 되어 있다.

   達者不言 言者不達(달자불언 언자부달)

   世上難事 必作於努(세상난사 필작어노)

   世上大事 必作於心(세상대사 필작어심)

   無上之道 不分彼我(무상지도 불분피아)

   통달한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달인이 아니다.

   세상의 어려운 일도 인간의 노력에서부터 시작된다.

   세상의 큰 일은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최상의 도(道)는 주변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지 않는 데서 이루어진다.

   문장을 대하고 뜻을 해석한 순간이다. 내 마음이 강한 충격을 받아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다. 32자의 한자에 최상의 달인의 도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삶을 살면서 어떤 역경도 슬기롭게 극복할 비법을 알게 되었다. 정말 마음에서 찾고자 했던 진정한 해답을 얻은 심정이다. 너무 기뻐서 어딘가 하늘을 향해 포효를 터뜨리고 싶을 지경이다. 이제 내 앞의 어떤 역경도 당당히 극복할 자신이 생겼다.

   나는 윤지의 얼굴을 흘깃 바라본다. 윤지도 지극한 감동에 젖은 표정이다. 얼굴이 발그레 상기되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듯한 표정이다. 나는 윤지를 향해 가슴을 떨며 말한다.

  “혹시 비보의 문장을 통해 터득한 바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윤지가 곧바로 나를 향해 말한다. 자신이 회사 생활을 하며 주변 사람들과 마찰이 많았다고 한다. 마찰의 근원이 남과 자신을 지나치게 구분한 탓임을 알았다고 한다. 남과 자신이 다를 바가 없다고 여기면 분쟁이 사라지리라고 말한다. 남들과 자신의 경계를 지나치게 구별했기에 이기심이 작용했으리라고 말한다. 그 깨달음만으로도 그녀는 무상비보를 찾은 보람을 느낀다고 들려준다. 이번에는 윤지가 내게 묻는다.

  “수종 씨가 깨달은 바에 대해서도 들려주세요. 그래야 둘이 공평하잖아요?”

   내가 감명받은 부분은 세상의 큰 일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부분이다. 어떠한 일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먹으면 이루어질 수가 있다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만 있으면 세상의 일을 능히 헤쳐 나가리라 여긴다. 진리는 자신의 주변 가까이에 있는데도 발견하지 못한다고들 한다. 정말 무상비보의 글은 최상의 달인이 되는 길을 제시하는 듯하다.

   불분피아(不分彼我). 이 부분에 대해서도 나는 깊이 생각해 본다. 나를 고소하여 직장을 잃게 만든 부부를 용서할 수 있겠는지를. 누구든 인간으로 출생하게 된 데는 엄청난 인연의 결과라 여겨진다. 그런 엄청난 인연을 개인의 안목으로 미워해서는 안 되리라 생각된다. 살면서 어쩌다가 이해관계로 뒤엉켰던 결과라 여겨진다.

   대자연의 관점에서 소중한 인간 개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 부부도 처벌에 이어 폭행을 당한 울분을 토했으리라 간주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진정으로 그들 부부를 용서해 주기로 한다.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홀가분해짐을 느낀다.

   게다가 조직체의 수장(首長)한테도 필요한 덕목이라 생각된다. 조직원들 개개의 입장에 처해서도 조직을 파악할 필요가 있으리라 판단된다. 그래야 경계를 초월하여 조직을 원만하게 운영할 수 있으리라 여긴다.

   세상난사 필작어노(世上難事 必作於努). 여기에 관해서도 감회가 새롭다. 술집 주인의 딸을 떠올리자 마음이 한없이 암울해진다. 그녀에게서 떠나오기 전에 따스하게 격려해 주었어야 마땅하다고 여긴다. 인간 자체가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량한 편견에 젖어 함부로 대했으니 너무나 후회스럽다. 이후에는 세상의 어느 누구를 만나도 경건한 마음으로 대하겠다고 작정한다.

   윤지가 느닷없이 정색을 하고 나한테 어떤 얘기를 하려고 한다. 나 역시 그 순간에 얘기해야 할 절박한 것을 떠올린다.

   윤지가 먼저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다. 책자에서 211장의 공간을 공백으로 둔 이유에 대해서. 달자불언(達者不言)의 의미라고 해석한다. 시시콜콜히 설명한다면 그 자체가 통달을 완성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다. 책자의 1장에만 글을 남겨 둔 사유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끝까지 깨닫지 못할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라는 견해를 들려준다. 나의 생각과 정확히 관점이 같아서 나도 흔쾌히 동의한다.

   윤지에 이어 내가 화학 물질의 사용 배경을 추론하여 말한다. 책 제목은 먹을 사용하고 책 내용은 감춘 사유. 여기에는 집요한 구도 정신(求道精神)을 갖추었는지를 검증하는 절차라는 견해를 들려준다. 구도 정신이 없으면 쉽게 책자를 팽개치고는 터득하지 못하리라 말한다. 내 얘기를 듣자마자 윤지도 그녀의 견해와도 일치한다고 말한다.

   책자에 대한 토론의 최종 관문이 끝난 시점이다. 윤지와 나는 진심으로 책자의 심오한 의미에 경탄하며 서로를 바라본다. 어쩐지 윤지와 내 마음의 경계가 사라진 느낌이 든다. 그래서 확인하고 싶어 윤지를 향해 다가선다. 윤지도 내 눈을 응시하며 곧바로 나를 향해 걸어온다. 윤지의 시선과 마주치자 내 가슴이 마구 설렌다. 느닷없이 가슴속으로 격렬한 폭풍이 밀어닥치는 기분이 든다.

   한 발자국의 거리만큼 유지한 채 서로 마주 선다. 내가 먼저 윤지에게 말한다.

  “책자의 의미를 깨달은 순간부터 마음이 급격하게 설레었어요. 심지어 윤지 씨께 다가서는 순간까지도 가슴이 마구 뛰었어요. 윤지 씨 경우는 어때요?”

   얼굴을 살짝 붉힌 채 윤지도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저도 이전에 없던 마음의 기류 변화를 느꼈어요. 어쩐지 우리가 깊이 사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제 마음이 왜 이렇게 달아오르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서로가 마음으로 말을 한 것은 여기까지였던 모양이다. 말을 마치자마자 둘이 서로를 향해 달려든다. 윤지를 껴안아 든 채 서너 바퀴를 단숨에 맴돈다. 마치 대자연의 거대한 힘이 둘을 그렇게 하도록 시킨 듯하다. 오랜 세월 동안 사귀었던 연인처럼 윤지가 아늑하고 평온하게 느껴진다. 둘의 뺨이 살짝 부딪히자 마치 불길에 닿은 듯이 뜨겁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윤지의 얼굴이 온통 불길처럼 탄다. 그러자 내 뺨도 술에 취한 듯 뜨거운 불길에 휩싸인다. 취한 듯한 기분으로 내가 윤지에게 말한다.

  “우리, 지금부터 연인으로 사귀지 않을래요?”

   윤지가 방그레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응답한다.

  “좋아요. 기꺼이 따를게요.”

   윤지의 대답을 들은 이후부터다. 서로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박동소리가 커다랗게 울린다. 둘이 한동안 뺨을 맞대며 서로를 껴안고는 행복감에 젖는다. 이제 앞날이 탁 틔는 느낌이 든다. 그 어떤 난관도 내겐 극복할 자신이 생겼다.

   골짜기로 밀려드는 솔바람 소리가 한없이 청아하게 느껴진다. 눈 쌓인 팔선계곡에서 윤지와 나는 무상의 달인이 된 느낌이다. 솔바람이 불 때마다 눈가루가 흰 나비 떼처럼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차가운 바람이 귓바퀴를 아리게 해도 가슴은 더 없이 달아오른다. 팔선계곡에는 가슴 벅찬 감동의 시간이 눈송이처럼 소담스럽게 쌓인다. 윤지를 만나 천하를 얻은 듯한 느낌에 잠겨 하늘을 올려다본다. 박새 몇 마리가 힘찬 날갯짓을 하며 솔숲을 타 넘는다. 새의 비상이 앞날의 축복인 듯 마냥 감격스럽기만 하다.

<200자 원고지 8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