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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란(風蘭)의 계절

                                                                                        손정모

   눈이 시릴 정도의 쾌청한 날씨다. 연구실 창 밖으로는 바닷물이 하얗게 이빨을 드러내며 연신 밀려든다. 한없이 쾌적한 여름 날씨로 여겨진다. 내가 숨결을 고르다가 가만히 창문을 열어 본다. 파란 수평선이 한결 정겹게 시야로 다가든다. 서해의 환상적인 섬인 위도(蝟島)의 풍광으로서 가히 손색이 없을 정도다.

“선생님, 오늘 제가 찾아 갈게요. 아마 저녁 무렵이 될 거예요. 꼭 좀 저를 만나 주세요.”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도 못한 채 받은 전화에서였다. 밀려든 목소리는 소년의 청아하기 그지없는 맑은 목소리였다. 초등학교 4학년생이라고 했다. 뭐라고 용건을 밝힌 건 분명한데 잠결이라 확연치 않았다. 아침에 세 번이나 전화번호를 눌렀어도 연결되지 않았다. 수시로 궁금증이 들끓었어도 기다릴 수밖에는.

   아침 공기는 쾌적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심란한 마음일지라도 일시에 정화시킬 만큼 청량하다. 연구실의 실내를 잠시 둘러본다. 50여 평 규모의 연구실 가득히 분석용 기기(器機)가 들어차 있다. 전자현미경을 비롯하여, 질량 분석기와 핵자기 공명 분석기가 들어서 있다.

   실험 대상이 되는 재료라는 뜻의 시료(試料). 40분 전에 처리해 둔 시료를 경통(鏡筒)의 삽입구에 넣는다. 시료의 100만 배까지를 관찰할 수 있는 장치다. 배율을 2만 배가 되도록 맞춘다.

   전자현미경에 부착된 모니터 화면에 영상이 펼쳐진다. 복제 배아의 배반포(胚盤胞)에서 꺼낸 세포 덩어리(cell mass)들의 영상이다. 난자의 핵을 제거한 자리에 체세포를 끼워 넣어 만든 배아. 이게 수정란 배아와 구별되는 복제 배아다. 난할(卵割)이 상당히 진행된 복제 배아는 배반포 상태라 불린다. 세포 덩어리에서 세포 분리제를 써서 세포를 분리시키는 작업. 이 작업을 통해야만 줄기세포를 얻게 된다. 이렇게 얻은 배아 줄기세포로부터 주문형 장기(臟器)를 만든다.

   세포 덩어리에 묻혀 있는 세포는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다. 약제 처리를 했는데도 미세한 움직임을 보이곤 한다. 녹색 형광 물질로 염색된 세포가 밀물의 파래처럼 흐느적거린다.

   30대 중반의 엄마가 인근 마을의 부호에게 뭔가를 부탁했다. 부호는 50대 초반의 배불뚝이 사내였다. 하지만 갑부인 사내는 콧방귀를 뀌며 딴전을 피웠다. 엄마의 얼굴조차 아예 바라보지 않으려는 교만한 태도였다. 내가 존경하는 엄마를 감히 무시하려는 사내라니! 초등학교 4학년 소녀였던 나한테조차도 너무 고깝게 느껴졌다. 슬그머니 화가 나서 나는 엄마에게 집으로 그냥 돌아가자고 닦달했다. 엄마의 눈에는 눈물이 샘솟듯 흘러내렸다. 결코 그냥 돌아가서는 안 될 절박감이 진하게 느껴졌다. 엄마를 바라보는 내 가슴에 펑하고 구멍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랬어도 안간힘을 쓰며 그 집으로부터 벗어났던 날. 처절한 숙명의 그늘이 나와 엄마에게 드리워졌던 모양이다.

   세포 내부의 핵이 가볍게 일렁이는 장면도 보인다. 밀집한 염색체가 서서히 깃털처럼 오르내린다. 다시 배율을 조금 낮춘다. 1만 5천 배까지 배율을 낮춘다. 세포는 핵과 세포질의 경계를 선명히 드러낸다.

   잠시 후에 세포 분리 작업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자현미경을 벗어나 시료 보관용 냉동실 문을 연다. 서늘한 기운과 함께 시린 증기가 시야에 와 닿는다. 배반포에서 채취한 내부 세포 덩어리를 꺼내 든다. 세포 덩어리를 20℃로 맞춰진 작업대 위에 올려놓는다. 세포 덩어리로부터 세포 분리제(細胞分離劑)를 써서 세포를 낱개로 분리시킬 작정이다.

   병상에 누운 아빠의 얼굴이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노인도 아닌데도 얼굴이 누렇게 떠 기운이라곤 없었다. 시선이 마주쳐도 의식이 흐릿하여 가물댈 뿐이었다. 내가 아빠의 얼굴을 더 들여다보려고 애쓸 때였다. 복도를 울리며 총총거리는 간호사의 발소리가 들리더니 병실 문이 열렸다. 간호사가 엄마에게 뭔가를 말했다. 엄마와 간호사가 황급히 어디엔가로 달려갔다. 아마도 수술 비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엄마가 인근 마을의 부호를 찾아갔던 것도 병원비 때문이라 여겨졌다. 왠지 그 날 따라 자꾸만 슬픈 기분이 북받쳐 올랐다. 간호사에 떠밀려 병실 문을 나설 때 몸이 마구 떨렸다. 전신에 섬뜩한 기운이 마구 소용돌이쳐 올랐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들었다.

   실험실 내부의 온도를 18℃로 맞춘 뒤다. 소독된 비닐장갑을 끼고 호흡을 가다듬은 뒤다. 미세한 백금 집게로 세포 덩어리에 살짝살짝 충격을 가한다. 작업대 옆의 전선을 전기 영상 액정 모니터에 연결한다. 영상 조절 단자를 이용하여 배율을 1,300배로 맞춘다. 그러자 모니터에 곧바로 확대된 세포들의 영상이 꿈틀댄다. 동작마다 생동감이 넘쳐 흐른다. 소독된 비커에 세포 분리제 10mL를 따른다. 분리제의 농도를 맞추기 위해 디에틸에테르 5mL를 비커에 추가시킨다. 소독된 가는 유리막대로 분리제를 서너 차례 휘젓는다. 비커 내의 액체를 모두 주사기로 빨아들인다. 모니터의 영상을 들여다보며 세포 덩어리를 작은 덩어리로 절단한다. 세포가 두 개만 포함되도록 조심스럽게 자른다. 섬세한 작업이라 금세 숨결이 가빠진다.

   마침 휴대전화가 진동음을 토해 낸다. 슬라이드를 밀어 올리니 연인인 규호의 목소리가 들린다.

“연구 작업은 잘 되고 있지? 방학 때라 찾아가고 싶은데 언제가 좋아? 모레쯤이 좋겠다구? 알았어. 모레 저녁 배로 섬으로 들어갈게. 안녕!”

   갑작스레 전신에 활력이 치솟는 기분이다. 규호와 함께 할 시간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전부터 위도의 해수욕장을 함께 거닐고 싶다던 규호다.

   2주일 전 대덕 연구단지에 있는 어떤 국립 연구소 밀실에서였다. 중앙 부처 고급 공무원인 국장과 밀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50대 중반의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국내에서는 2009년 4월 29일에야 배아 줄기세포의 연구가 허가되었어요. 워낙 외국에서 기승을 부려대니 우리도 대응책을 세울 수밖에는 없었겠죠. 허 선생님이 연구하는 모든 과제는 일체 극비 사항입니다. 거듭 보안에 각별히 신경을 써 주세요. 연구 결과의 정기적인 보고는 당분간은 여기로 와서 해 주세요.”

   사내의 얘기에 따르면 인터넷으로는 유출될 위험이 엄청나게 많다는 얘기였다. 기밀 서류를 통해 직접 전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장은 내게 은밀하게 속삭였다.

   심장으로의 분화 기술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줄기세포를 만드는 데까지는 국제적인 기술을 인정받은 터였다. 줄기세포로부터 장기로의 전환 과정은 분화라고 알려져 있다. 분화의 세부 과정만 밝혀지면 주문형 심장의 배양이 가능하다. 그래서 세계 각국이 분화제의 연구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심장 분화의 핵심적인 기술을 축적해 가는 ‘서해 유전 연구원(西海遺傳硏究院)’. 전북 변산반도에서 서쪽으로 15km 거리에 위치한 섬인 위도.

   위도 중앙에서 남서쪽 산악 지대에 자리 잡은 연구원 건물이다. 연구원 건물의 북서쪽에는 아담한 연못이 자리 잡고 있다. 야생 습지 식물이 많이 자라는, 풍광이 수려한 연못이다. 그래서 학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다.

   국가적인 이해관계가 많아 살벌한 경쟁을 갖는 기술이 분화 기술이다. 미국 버클리대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건너온 것도 작은 사건은 아니었다. 국가적인 이해관계로 미국과 한국 정부 간의 신경질적인 대립이 컸었다. 내가 지닌 기술이 지닌 위상은 대단한 터였다. 금액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판정되었다. 그래서 미국에서 상당히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곤 했다. 하지만 유전공학의 선진국을 꿈꾸는 한국의 의지 또한 만만치 않았다. 우유곡절 끝에 내가 자리 잡은 곳이 서해 유전 연구원이다. 사람들은 나를 일컬어 국가 두뇌라고 부른다. 상당히 부담스러운 용어임에 틀림없지만 나도 흔쾌히 수용하는 입장이다.

   유년기에 엄마와 마을 부호를 만나고 왔던 다음 날이었다. 결국은 병원에서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수술비용만 있었어도 살릴 수 있었을 거라는 얘기였다. 수술에 당장 들어갈 혈액 비용과 고가의 장비 이용료가 문제였다. 엄두도 못 낼 비용으로 고스란히 아빠를 잃고 만 터였다. 39살의 아빠를 땅에 묻던 날의 소녀였던 나. 내 가슴에 펑 뚫린 공허감은 해가 지나도 해갈되지 않았다. 그 때서부터 나는 웃음을 잃은 소녀가 되고 말았다. 얼굴에서 미소를 상실한 소녀는 결코 주위에 매력적일 수가 없었다. 그 때부터 내 가슴에는 건조하고 삭막한 기류만 들끓었다. 세상에서 유일한 낙이 있었다면 연구에 매진하는 일이었다.

   조영 단자를 조절하여 황색 영역의 가시광선을 세포 덩어리에 쬔다. 금세 컴퓨터 영상면으로 세포 덩어리들의 입체 영상이 드리워진다. 연녹색 형광 단백질이 투입된 세포 덩어리들이다. 세포의 절단을 위해 형광 단백질을 미리 넣어둔 경우다. 생각대로 잘 진행이 되지 않아 버거운 느낌이다. 붙어 있는 두 개의 세포를 떼어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묘한 형상으로 세포가 달라붙어 떼어내기가 쉽지 않다. 위쪽을 떼어내면 아래쪽으로 밀려 내려가 붙어 버리곤 한다. 분리제를 주사기로 더 투입시켜 보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측하지 못한 세포들의 접합 현상이 나를 괴롭힌다. 이전에는 별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영역이다. 세포를 분리하려는 시점에서 찰거머리처럼 서로 뒤엉켜드는 세포들의 접합 현상. 마치 감각기관이라도 지닌 양 세포가 마구 뒤엉키곤 한다. 하나의 세포만을 살리려 해도 조건이 만만치 않다. 백금 미세 면도날이 세포의 하나를 죽이면 분출액이 문제를 야기시킨다. 파괴된 세포의 분출액이 주위로 퍼져 작업 진행을 어렵게 한다. 그렇게 되면 세포 덩어리로부터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건 불가능해진다.

   잠시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내다본다. 서해의 장중한 바다가 파랗게 드리워져 있다. 섬 내륙에 위치한 연구원 건물에서도 바다가 가깝게 보인다. 마치 손에 잡힐 듯 파도가 시선을 간질인다. 연구원 건물이 높다랗게 지어진 탓이라고 여겨진다. 웅장한 7층 건물의 연구원. 연구원 주변으로 건물이라곤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런 특이한 지형 조건으로 인해 연구원의 전망은 대단히 좋다.

   아무래도 자칫 잘못하다가는 줄기세포의 추출(抽出)에 실패할 것 같다. 작업 기기의 조건을 그대로 보존한 뒤다. 나는 잠시 해변을 산책하며 활력을 얻기로 작정한다. 해풍을 감안하여 외출용 가운을 착용한다. 외출용 가운은 녹색이며 봄과 가을의 날씨에 어울리는 의류다.

   해변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면 족한 거리다. 천천히 연구원 건물을 벗어난다. 해변에 가까워지자 동백나무의 숲이 파랗게 펼쳐진다. 해변을 뒤덮듯 쫙 깔린 동백 숲마다 햇살이 눈부시게 흩날린다. 박새들과 갈매기들의 지저귐이 서로 뒤엉키며 묘한 풍정(風情)을 자아낸다.

   휴대전화가 느닷없이 흔들어댄다. 슬라이드를 밀어 올리니 소년의 목소리가 흘러든다.

“선생님, 제 이름은 김민준이에요. 저를 만나게 되면 자연스레 많은 걸 이해하게 되리라 생각해요. 나중에 뵐게요. 아마 저녁 6시 무렵이 될 거예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김민준이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김 씨가 누구일까? 누군데 소년이 나서서 나를 만나고자 할까? 하여간 뭔가 궁금한 데가 없지는 않구먼.’

   내 기억의 범위에서는 친척이라곤 없었다. 명절이 되어도 엄마와 나 이외엔 집에 없었다. 명절이 되어도 어디 찾아갈 데가 없었다. 친구들이 죄다 들떠 맞이하는 명절이건만 내겐 친척이라곤 없었다. 엄마에게 물어도 별다른 대답은 없었다. 이래저래 체념의 늪에서 의미를 찾는 건 공부하는 길이었다. 지내고 보니 공부란 삶의 활력소였다. 정당한 경쟁을 통하여 상대를 제압하는 묘미가 아주 좋았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책을 즐겨 읽곤 했다. 그러다가 단순한 독서에서 공부를 하는 양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내게 꺾여 자리를 양보하는 급우들을 대할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 점차 나의 의식계에는 상층부를 향해 비상하는 기류가 일고 있었다.

   해변을 산책하다 보니 20대 후반의 청년이 눈에 띈다. 얼핏 봐도 ‘형선(炯鮮)’이란 사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3년째 취업 시험에 실패했다는 사내다. 처절한 실패감을 추스르기 위해 섬을 찾았다는 사내다. 나보다 한 살이 많은 29살의 청년이다. 한 마디로 청년이 무척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의 명문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취업 시험을 뚫지 못해 빌빌거리다니! 안 되면 될 때까지 공부에 매진해야 할 판에 떠돌다니! 그의 미래가 안타깝게 생각된다.

   형선이 내 마음의 변화는 무시한 듯 시원스런 목소리로 말한다.

“허 선생님! 이 시각에 어쩐 일이세요? 잠시 시간 내어 주시면 제가 음식을 살게요.”

   내 차디찬 눈빛이 거절의 의사를 나타내리라 여기며 형선을 바라본다. 그런데도 형선이 여유스런 미소를 짓더니 길을 안내한다. 잠시 후에 해변의 간이 음식점 앞에 도착한다. 원형의 플라스틱 식탁이 하나 있다. 간이 음식점에는 손님 맞이 의자가 딱 4개 있다. 부대 장치라고는 파라솔 하나와 플라스틱 물통 5개가 전부다. 40대 초반의 아주머니의 눈매가 꽤 예쁘다는 생각이 내게 든다. 처녀 시절에는 꽤 남자들이 따라다녔을 듯한 분위기로 비친다. 아주머니가 은방울이 짤랑대는 듯한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한다.

“어서 오세요. 해삼과 전복, 멍게도 있어요. 싱싱한 오징어나 문어도 있어요.”

   형선이 문어 2마리를 가리키며 데쳐 달라고 한다. 능숙한 솜씨로 문어 2마리를 금세 데쳐서 내어 놓는다. 스티로폼 접시에 칼로 썬 문어들을 올려 놓으며 초장도 내민다. 둘은 식탁에 마주 앉아 문어에 젓가락을 갖다 댄다. 형선을 향해 내가 먼저 입을 연다.

“벌써 며칠째 되었지요? 어떻게 마음은 많이 가라앉았어요?”

   형선이 맑은 미소를 입가에 피워 올린다. 어찌 보면 세상을 초연한 풍도마저 내풍긴다.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머금더니 서서히 응답한다.

“벌써 보름이 지났어요. 하지만 위도의 풍광이 좋아 무기한 여기서 더 머물고 싶어요. 헌데 선생님이 연구 중에 건물 밖을 다 나오셔서 놀라워요.”

   원래가 육지와는 격리된 연구 시설물이다. 육지의 건물처럼 연구 활동에 담이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언제든 출입이 자유로운 이점(利點)이 섬의 연구 시설에는 보장되어 있다. 내가 빙긋 웃으며 형선을 향해 말한다.

“공무원 임용 고시는 나이 상한선이 철폐되어 심리 부담이 없어졌죠? 마음을 일단 가다듬은 연후에는 정신없이 또 매진해야 되겠죠?”

   형선이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돌려 대답을 피한다. 사내의 마음을 괜히 불안하게 만들었나 싶어 사내를 바라본다. 형선이 이내 표정을 바꾸며 내게 말한다.

“공부가 끔찍해요. 상대적인 경쟁을 벌인다는 게 참으로 두려워요. 이런 두려움에 휘말릴까 봐 몸을 사렸는데도 벗어날 수가 없군요.”

   문득 형선을 대하면서 사내의 행동적 특성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말을 하고 나면 반드시 나의 눈을 들여다보는 성향이 있다. 묘한 버릇이라고 여기며 나도 형선의 눈을 들여다본다. 세월의 무게에 휘청거리면서도 청순함이 유지된 맑은 눈빛이다. 상대적인 경쟁에 떠밀리면서도 청순함을 잃지 않은 사내한테 애잔함을 느낀다.

   문어를 먹으면서 형선의 처지를 떠올려 본다. 취업의 벽을 뛰어넘는 건 본인의 과제일 따름이다. 곁에서 내가 도울 건 아무 것도 없다. 경쟁의 기류에 떠밀리는 현시대의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안타깝지만 경쟁을 통해 서로의 발전을 찾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세포 덩어리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하지 못해 쩔쩔 매는 나도 불안하다. 그 누가 나의 일을 단순하다고 하랴? 이론과 연구를 통한 마지막 난관에 접합 현상이 애를 먹이리라고는? 사실은 문어를 먹으면서도 접합 현상을 극복할 실마리를 찾는 중이다.

   눈치를 보니 사내는 사내대로 미래의 정황을 그려보는 듯하다. 미래에 대한 완벽한 대책과 거기에 상응하는 노력이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절대로 자신만의 견해로 미래를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될 처지다. 나는 가만히 형선의 눈매를 들여다본다. 형선도 이내 나의 눈을 그윽이 들여다본다. 찰나 간에 많은 교감이 이루어진 듯하다.

“저보다 한 살 아래인데도 선생님은 박사님이며 국가 두뇌이시니 놀랍습니다. 저는 취업 시험에도 통과하지 못해 쩔쩔 매게 되어 한심스러워요. 저 같은 사람은 선생님 같은 분과는 짝이 되기 어렵겠죠?”

   내게로 밀려드는 형선의 시선에 끈적거리는 느낌이 묻어난다. 불필요하게 가까워지는 걸 원치 않는 나의 성미다. 나는 곧바로 형선에게 말한다.

“내겐 따로 애인이 있어요. 마음에 맞는 상대를 만나려면 거기에 맞도록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연구원인 아내를 만나려면 어디든 연구소를 찾으면 되겠죠. 그런데, 시급한 건 자신의 경제 능력부터 갖춰야 하지 않을까요?”

   내 말이 사내의 자존심을 심하게 건드렸음일까? 나를 바라보는 형선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안정을 찾는다. 형선이 나를 바라보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한다.

“맞는 말이에요. 오늘의 조언, 언제나 고맙게 간직할게요. 언젠가 때가 되면 고마움의 표시를 나타낼게요.”

   간이 음식점에서 일어서자마자 형선과 나는 자연스레 작별한다. 혼자 거닐면서부터 연구 과제를 떠올린다. 어떻게 하면 줄기세포의 추출을 성공적으로 진행할 것인가에 생각을 집중한다. 데치기 전까지 뒤엉키던 문어의 형상이 떠오른다. 몸을 뒤채느라 꾸물대며 자꾸만 뒤엉키던 문어의 몸짓. 무한히 반복될 것 같던 단조로운 몸짓이 자꾸만 의식계를 파고든다.

   젓가락질! 젓가락으로 뒤엉킨 문어의 살을 떼어내어 분리시키지 않았던가? 병합(倂合)의 순간을 잘 제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젓가락질과 유사한 역할을 해낼 분리제를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분리제의 화학적 활성에 대한 보완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방향을 잡는다. 탄력성을 키우되 접착성은 줄일 만한 약품을 찾아야겠다고 작정한다. 분자량 3,000가량의 폴리부타디엔을 용질로 첨가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연구실로 돌아와 폴리부타디엔을 분쇄하여 서서히 벤젠에 녹인다. 벤젠에 녹이면서 상대 농도를 반복하여 측정한다. 용액의 농도가 0.65몰농도에 이를 때에 용액의 농도를 고정시킨다. 고정된 농도의 용액을 주사기에 흡입하여 세포 덩어리에 주입한다. 서서히 주입하면서 컴퓨터에 연결된 영상 장치를 지켜본다. 아까처럼 세포들이 마주 뒤엉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세포들의 활성이 대단히 떨어져 버려 경각심을 자아낸다. 또 다시 가슴이 탄다. 의도하는 방향으로의 조절 인자를 찾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한다.

   시계를 본다. 햇살이 상당히 약해진 상태다. 오후 네 시 무렵이다. 구내 식당에서 먹은 오리탕은 속에서 소화된 지가 오래이다. 벌써 배에서 꾸르륵대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린다. 연구를 하다 보니 체력 소모가 큰 편이다. 잘 먹어야만 잘 버텨내리라 여기고 먹는 데는 적극적인 편이다.

   음식의 소화를 위해 잠시 텔레비전을 켠다. 화면에 흐르는 주요 뉴스들을 훑어본다. 그러다가 대덕 연구단지의 소식에 눈길이 멈춘다. 생명공학 연구소의 김선태(金膳泰) 연구원의 기사가 화면을 메운다. 김선태라? 어쩐지 많이 들어본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머릿속에서 갑작스레 현기증이 인다. 머리의 일부가 기울어지는 듯하더니 초등학교 시절의 갑부의 얼굴이 떠오른다. 배불뚝이 갑부의 이름이 뭐랬더라? 김영택(金永澤)이라는 이름이 기억난다. 나보다도 10살 위였던, 갑부의 아들이 있었다. 귀티가 나는 용모라 먼 마을까지 이름이 알려진 아들이었다. 아마도 그 아들이 서울대를 거쳐서 미국 유학까지 갔었다고 알려졌다. 그 아들의 이름이 김선태였다고 어렴풋이 생각난다.

   현기증이 이는 와중에서도 나는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한다. 주문형 장기의 인공 배양 기술로는 최고의 실력자로 알려진 김선태다. 분화 과정을 거친 장기는 죄다 배양할 수 있다는 김선태다. 동물 장기의 실험자로서 그 명성을 세계적으로 누리는 과학자이다. 김선태가 바라는 간절한 소망은 분화된 장기를 넘겨받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배아 줄기세포로부터 만들어진 장기를 넘겨받는 일이다.

   현재로서는 세계의 어느 누구도 배아 줄기세포로부터 분화를 시키지 못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김선태가 유전공학자들을 주시하고 있는 터다. 최초의 분화 연구자를 만나고 싶은 게 김선태의 꿈이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김선태가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털어놓고 있다. 그러다가 김선태가 내게 대한 발언을 한다.

   문득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귀를 기울여봐야겠다. 김선태가 입을 연다.

“학문적 성취에 있어서 저는 허유경(許悠敬) 박사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과학자가 된 이후로는 대면한 적도 없지만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시간 나는 대로 한 번쯤 만나 의논할 일이 있습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되는데 일단은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머리를 내두른다. 어쩌면 공개 방송에서 내 이름을 마구 들먹이는지 다소 불만스럽다. 더 깊은 생각은 않기로 마음을 돌려 먹는다.

   폴리부타디엔이 녹은 분리제를 세포 덩어리에 주사기로 주입한다. 다시 펼쳐진 영상 화면을 보며 조심스럽게 백금제 면도날을 옮긴다. 수파(水波)가 일 듯 잔잔한 파동(波動)이 세포 덩어리로 전해진다. 세포의 활성 상태에 생동감이 느껴진다. 아주 양호한 상태라고 여겨진다. 면도날이 세포 사이에 접근해도 세포들 간에 병합이 일어나지 않는다. 상당히 상태가 좋게 느껴진다.

   가슴이 떨린다. 얼마나 꿈꾸어 오던 순간인가? 이 추세라면 줄기세포의 추출은 시간 문제일 것 같다. 가슴을 졸이며 백금 면도날을 세포 사이로 집어 넣을 때다. 휴대전화의 진동음이 귓전을 울린다.

“허 선생님! 아침에 전화 드린 민준이에요. 잠시 후면 배가 위도의 선착장에 닿을 거예요. 저를 기다려 주실 거죠?”

   나는 시계를 흘깃 바라본다. 오후 5시 50분이다. 나는 연구실 전등(電燈)을 끄고 문을 잠근 뒤에 주차장으로 내려선다. 흰 색 소나타를 몰아 해안도로를 타고는 선착장에 도착한다. 선착장에 닿으니까 격포를 출발한 여객선이 막 도착한다.

   하선(下船)하는 승객들을 살펴보고 있노라니까 소년이 손을 흔드는 게 보인다. 정확히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소년의 나이는 10살가량이다. 한 눈에 시선을 확 끌 만큼 귀티 어린 얼굴이다. 뚜렷한 이목구비의 윤곽과 뽀얀 살결과 별처럼 반짝이는 눈빛. 조화를 잘 이룬 외모에 청순한 인상이 돋보이는 소년이다.

   소년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며 내게 입을 연다.

“허 선생님이시죠? 만나뵈려고 이제껏 기다렸어요.”

   나는 호수의 맑은 물빛을 보는 느낌에 취해 소년을 바라본다. 아무리 봐도 잘 생긴 얼굴이다. 전형적인 청순한 소년의 외모라 여겨진다.

   나는 소년의 주변을 살핀다. 혹시 소년과 동행한 다른 사람들은 없는지를 살핀다. 승객들이 다 내렸는데도 소년의 곁에는 나 말고는 없다. 나는 소년에게 손을 내민다. 소년이 당당하게 내 손을 맞잡으며 내 눈을 들여다본다. 악수의 예법을 아는 소년이라 여겨진다.

“네가 민준이니? 너 혼자서 여길 어떻게 찾아 왔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으며 소년이 내 눈을 들여다본다. 눈빛이 너무 맑아서 자칫 내 마음이 흔들릴 지경이다. 나는 소년의 손을 잡고는 내 승용차로 이끈다. 이윽고 소년이 조수석에 얌전히 앉는다. 나는 곧장 연구원 건물로 차를 몬다. 연구원 광장의 주차장에 차를 댄 뒤다. 나는 연구원 남서쪽의 해변으로 소년을 데리고 산책을 나선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낀 해안이 곳곳에 펼쳐진 지형이다.

   7월 중순의 해변 풍광은 어디를 가나 절경을 이룬다. 위도 남서쪽 해안 일대를 소년과 산책하기로 한다. 소년도 꽤 바다의 풍광에 매료된 눈치다. 발그레 상기된 얼굴에 눈빛이 시종 흔들린다. 감격에 벅찬 표정이 역력하다. 하늘색 반팔 티셔츠에 보라색 면바지 차림새의 소년이다. 고개를 들어 수평선을 멀리까지 바라보려고 애를 쓴다. 해안에 마련된 목제 벤치가 눈에 띈다. 소년과 나란히 벤치에 앉는다.

   소년이 입을 연다. 자신이 김선태의 아들이라고 밝힌다. 소년의 얘기를 듣는 순간에 나는 화들짝 놀라 벤치에서 일어선다. 소년을 향한 내 시선이 곱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소년이 무슨 얘기를 꺼낼지 잠자코 들어볼 작정이다.

“제가 선생님을 뵈려고 온 건 순수한 저 자신만의 뜻이에요. 결코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왔다거나 남들의 부탁으로 온 건 아니에요. 저도 미래에 과학자가 되려고 해요.”

   소년이 입을 연다. 소년의 눈빛이 아무래도 너무나 맑다. 따사롭고도 평온한 눈빛이 상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듯하다. 선태가 주문형 장기의 배양 전문가로는 세계적인 실력자다. 세계가 이미 그렇게 인정하고 있는 터다. 하지만 여지껏 주문형 장기가 만들어진 적은 없다. 배아 줄기세포로부터 장기로의 분화가 완전히 연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나를 분화 기술의 제일인자로 공인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장기 하나마저 분화에 성공시킨 적은 없다.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만으로 다들 전문가라는 환상으로 몰아가고 있다.

   어떤 순간에도 내가 세계 제일의 분화 전문가라고는 자인하지 않는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전문가들이 세계의 도처에 존재하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감히 쉽게 넘겨짚지 못할 능력을 지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소년은 나를 세계 제일의 분화 전문가로 확신하고 있다. 아마 그의 아빠인 선태의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라 여긴다.

“선생님, 분화 기술을 완성한다면 저희 아빠를 만날 생각은 없으세요? 아빠가 늘 걱정하셨어요. 3년 전에 세상을 떠나신 할아버지에 대한 일 때문이었어요. 할아버지가 병원비를 빌려 주지 않아서 선생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서요?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제가 선생님을 뵈려고 왔어요.”

   사고의 깊이와 말하는 품이 예사롭지 않은 소년이다. 호랑이는 호랑이 새끼를 낳는다고 했던가? 선태의 아들로서 손색이 없을 당당함이 소년의 전신에서 내풍긴다. 과학자가 되겠다는 소신이라든지 미래를 내다보는 관점이 결코 만만치 않다.

   문득 소년의 기선을 제압해 버리고픈 내면의 충동이 인다. 소년의 기상이 만만치 않다는 게 내 마음을 자극한다.

“나는 과거의 허상(虛像)을 붙잡고 연연하는 사람은 아니야. 네 할아버지가 내게 어떤 악영향을 주었어도 이미 과거의 일이야. 과거의 일은 과거로 묻어야지. 결코 들추어 낼 필요가 없지 않겠어?”

   소년의 맑은 눈이 나의 눈을 정면으로 들여다본다. 눈동자를 건너 소년의 마음이 여과 없이 전해지는 느낌이 든다. 나는 소년이 내게 하고픈 얘기를 일단은 들어주기로 한다. 이야기를 들어본 다음에 대처할 작정이다.

   소년은 소년의 아빠인 김선태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았다. 과학자의 위상이 어떤 것인가를 잘 지켜보았다. 그래서 소년은 과학자가 되려고 마음먹었다. 과학자가 되기 위한 소양을 나름대로 가꾸려 노력했다. 유전공학이 국가의 장래에 많은 영향을 주리라 판단했다. 그래서 아빠의 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아빠의 일이 결정적인 꽃을 피우려면 조력자가 필요함을 알았다.

   아빠의 전공은 주문형 장기의 대량 배양이다. 장기를 대량으로 배양하기 위해서는 분화 기술자와 제휴해야 한다. 그런데 아빠의 연구가 진척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원인이 뭔가를 헤아려 보니 조력자와의 인간관계가 문제점으로 드러났다. 아빠인 김선태에게 가장 유력한 조력자는 과학자인 허유경으로 밝혀졌다. 허유경이 나라는 것과 자신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안 김선태는 막막했다. 수술비를 빌려 주지 않았기에 아빠 없는 소녀로 자란 나였다. 만나서 대화로 풀어 보려고 선태가 세 번이나 나한테 전화했다. 하지만 나의 싸늘한 대응으로 대화의 통로가 막혀 버렸다. 그랬지만, 결코 나를 탓해서는 안 될 일이라 여기는 나다.

   바닷가에 방풍림으로 조성된 동백나무 숲이 쫙 깔려 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뭇잎들이 파드득거리며 우쭐대곤 한다. 동백나무 아래로는 해묵은 해송(海松)들이 해안을 따라 늘어서 있다. 해송의 솔잎이 휩쓸리며 내는 솔바람 소리가 청아하기 그지없다.

   소년이 내 눈을 투시하듯 들여다보며 차분히 말한다.

“허 선생님, 제 말이 끝날 때까지만 제 얘기를 들어주시겠어요?”

   나는 소년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소년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 간다. 대화의 기법이 선천적으로 탁월하다고 여겨진다. 배워서 그 정도가 되기는 어려우리라 생각된다.

   소년의 꿈은 과학자라고 들려준다. 아빠인 김선태를 지켜보며 과학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유전공학은 무한한 도전 영역으로서 꿈을 실현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김선태가 진행하는 일과 업적이 나날이 세상에 알려질수록 신이 났다. 근래에 소년은 분화와 주문형 장기의 배양이 접맥되어야 함을 알았다. 분화의 전문가라 알려진 나를 찾으러 왔다. 어떤 얘기가 오가더라도 반드시 나를 만나고 싶어서 왔다고 밝힌다.

   내가 소년에게 묻는다.

“혹시라도 부모님이 시켜서 온 건 아니니? 만약 그렇다면 더 하고 싶은 얘기는 없어!”

   소년은 차분히 나의 눈을 들여다본다. 눈빛이 어찌나 따사롭고 온화한지 놀랄 정도다. 이 세상의 모든 원망(怨望)과 한탄(恨歎)마저도 말끔히 씻어 줄 듯하다.

   소년의 관점에서 차분히 말한다. 나라가 힘을 가지려면 나라에 돈이 많아야겠다는 것을 느꼈다고 들려준다. 미래의 금전은 강력한 기술력에 의해 좌우되리라고 확신한다고 말한다. 강력한 기술력 중의 하나가 유전공학에 관한 거라고 믿는다고 한다. 소년이 애원하듯 말한다.

   그의 할아버지를 용서해 주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김선태와 내가 공동 연구해 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면 소년으로서는 다음 세대를 뒷받침할 과학자가 되겠다고 밝힌다. 소년이 내미는 서류에는 분석 자료들이 쫙 깔려 있다. 소년의 나이에 어떻게 그런 분석이 가능했던가를 헤아려 본다. 의외로 소년의 어학 실력이 대단하다. 영어의 구사 능력이 최상위급에 해당할 정도다. 빼어난 영어 실력으로 세계의 전산망을 통해 유용한 정보를 인출했다. 장기 개발 완료 시각의 위치가 국익에 미치는 영향. 여기에 관해 세세한 분석 자료를 제시한다. 늑장을 부렸다가는 막대한 자원을 타국(他國)에게 송두리째 넘겨 줄 정황이다.

   내가 소년에게 일부러 깐깐한 목소리로 윽박질러 본다.

“다른 나라가 우리나라를 앞설 수도 있는 문제지. 왜 굳이 우리나라만이 유전공학의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네 희망대로 국익(國益)이 늘어난다고 치자. 그래서 너한테 생길 이득이 뭔데? 나랑 너희 아빠랑 제휴하면 뭔가 뾰족한 수가 생긴다고 믿니?”

   소년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소년이 말을 삼킨 채 잠자코 나의 눈을 그윽이 들여다본다. 벤치에서 일어서더니 내 앞으로 서서히 다가온다. 소년의 가냘픈 몸매에서도 상대를 제압하는 정기(精氣)가 느껴진다. 몸매와는 다르게 작은 거인임을 느끼게 하는 단아한 풍도가 느껴진다.

“제 할아버지 때문에 선생님의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셨다면서요? 제가 할아버지 대신에 사과드릴게요. 진심으로 사죄하는 절을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올릴게요.”

   말을 마치자마자 소년이 단정한 자세로 나를 향해 절을 한다. 얼마나 진심이 서려 있던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하다. 소년의 가슴 저릿한 진심(眞心)이 그만 내 가슴을 뒤흔든다. 순간적으로 코끝이 시큰거리더니 눈물이 흘러내리려고 한다. 두 번째 절을 하려고 할 때다. 나는 급히 벤치에서 일어나서 소년을 안아 든다. 눈물 비친 내 눈을 소년이 들여다보더니 나의 목을 껴안는다. 소년의 눈시울에도 맑은 물기가 비친다. 소년의 눈물을 본 순간이다. 그만 내 가슴에 구멍이 펑 뚫리는 심정이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알싸하게 젖어들며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소년을 품에 와락 끌어안은 채 나는 솟구치는 울음을 터뜨린다. 세상 떠난 아빠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설움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가까스로 내 설움을 추스른 뒤다. 비로소 소년에 생각이 미쳐 소년을 바라볼 때다. 내 품에 안긴 채 소년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 기다란 속눈썹마다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있다. 나는 소년을 벤치에 가만히 내려놓으며 속삭이듯 말한다.

“그래, 나도 이제 너의 할아버지를 용서할게. 이후부터 너의 아빠랑 정식으로 연구를 같이 할게. 솔직히 개개인의 자존심을 따질 시기는 아니야. 시기를 놓치면 국익에 막대한 손해를 입게 돼. 너의 통찰력이 놀라워. 너의 아빠와 나도 국익의 손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너만큼의 용기가 없었어. 네 용기가 정말 놀라워. 너의 아빠랑 진지하게 협력 방법을 찾아볼게.”

   해변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낸 뒤다. 소년을 연구원 건물로 데려간다. 하룻밤을 함께 묵으며 아팠던 과거의 추억을 추스른다. 날이 밝아 소년이 육지로 돌아갈 시기가 되었을 때다. 나는 승용차로 소년을 태워 선착장으로 향한다. 소년이 배에 올라서는 모습을 내가 미소를 지으며 바라본다. 부끄러운 듯 미소 짓는 소년의 모습이 풍란의 자태처럼 곱다. 해안 절벽에 흐드러지게 핀 풍란이 일제히 까르르 웃는 듯하다. 다소의 시간이 흐른 뒤다.

   동녘 하늘 아래 위도를 향해 떠나는 배가 형체를 드러낸다. 줄기줄기 발출되는 햇살이 수평선을 빨갛게 물들인다. 배의 갑판에서 소년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배가 일구는 물결이 하얀 포말을 이루며 허공으로 흩날린다. 소년이 천천히 두 팔을 들어 올려 나를 향해 흔든다. 흔드는 손짓마다 눈송이처럼 청아한 마음이 담겨 전해진다. 후각을 간질이는 풍란의 향기 같은 그리움마저 울컥 가슴에 드리워진다. 곁에 소년이 있다면 소중히 안아 주고픈 충동마저 인다. 통통거리는 엔진 소리마다 소년의 순수한 열정이 흩날리는 듯하다. 마치 그윽한 풍란의 향기가 소년의 청정한 열정으로 느껴진다. 어느새 배는 수평선에 가려서 묻혀 버린다. 그러자 문득 아빠에 대한 알싸한 그리움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솟구치는 눈물을 감추려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에는 하얀 솜털 구름 몇 조각이 허허로이 떠돈다. 새하얀 구름송이마다 소년의 미소 짓는 얼굴이 어른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