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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바람에 휩슬리는 능선

                                                                                                                                                 손정모

  아카시아의 향기가 골짜기에 눈발처럼 휩쓸린다. 향기에 취해 미연의 코가 얼얼할 지경이다. 군집을 이루어 발산하는 향기가 수락산 일대를 마취시킬 정도다. 미연은 고개를 내밀어 산야의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수락산 7부 능선의 남서쪽 산기슭 부근이다. 5월 중순이란 계절 감각이 너무나 실감나게 가슴으로 밀려든다. 하늘마저도 향기에 취해 파랗게 남실대는 듯하다. 바람이 일 때마다 아카시아 꽃들이 연신 눈발처럼 휘날린다. 탐스럽게 핀 아카시아의 꽃들을 볼 때다. 어제 해질 무렵에 핸드폰으로 받은 인준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내게 물었던 질문의 대답을 내일 들려줄게. 내일이 지나면 또 얼마의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르겠거든. 장소는 수락산의 석동(石洞)이고, 시각은 오전 11시가 괜찮겠지? 내일 봐.”

  5월 중순의 일요일 오전 10시 40분 무렵이다. 어디를 둘러 봐도 풍경이 아름다워 마음이 그지없이 평온하기만 하다. 들릴 듯 말 듯 여기저기서 산새 소리들이 숲으로 흘러든다.

  올해 25살의 처녀인 미연이다. 북악터널 옆의 K대학 영문과를 졸업하면서 대기업에 곧바로 취직한 그녀다. 그녀는 취직하면서 대외 물류 수송과의 통역 업무를 맡았다. 그녀가 인준을 처음 만난 것은 2년 전의 봄철이었다. 대학원 연구 과제에 필요하다면서 일련의 설문지 봉투를 내밀었다. 설문 조사의 의뢰는 더러 있는 일들 중의 하나였다. 대부분은 무응답으로 일관하지만 사람이 직접 방문했을 경우는 예외였다. 설문지의 설문 내용도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만약 당신이 30대 중반에 회사의 모든 경영권을 인수받게 된다면? 당신이 제일 먼저 착수할 일을 순서대로 5항목을 보기에서 고르시오. 거기에 딸린 사유도 제시된 보기 중에서 고르시오.”

  당시에 미연은 생각했다. 대부분의 설문은 아무리 짧아야 A4 용지로 2장의 분량은 되었다. 그런데, 인준이 가져온 설문의 항목은 너무 짧다고 생각되었다. 그 설문지가 계기가 되어 미연은 인준과 교류하게 되었다. 당시의 인준은 군 복무를 마친 상태의 석사과정 1년차의 학생이었다. 미연보다는 2살 연상의 인준이다. 미연이 인준을 대하면서부터 서서히 인준에게로 마음이 끌려들기 시작했다. 우선 느낌이 무척 맑다는 점에 호감이 일었다. 인준의 시선이 지나는 곳마다 청량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온갖 탐욕과 이해관계로 얽힌 여느 세인들의 인상과는 너무 달랐다. 마치 목마른 상태에서 시원한 석간수를 만난 듯했다.

  미연이 작성한 설문지를 훑어보던 인준이 눈을 크게 떴다. 자못 놀랍다는 표정이 여실했다. 그러더니 미연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능력자의 퇴출을 왜 첫째 항목으로 삼으셨어요?”

  미연은 생끗 미소를 짓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회사는 이윤을 창출하는 곳이잖아요? 이윤을 창출하려면 탁월한 능력이 있어야죠. 그냥 인간성이 좋다고 하여 능사는 아니죠?”

  인준이 약간 눈썹을 찌푸리며 미연에게 물었다.

  “능력 있는 사람의 첫째 요건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제게는 이 점이 꽤 궁금하거든요.”

  미연은 연신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인준을 향해 대답했다.

  “제가 보기로는 활달한 풍도라고 여겨져요. 활기라는 건 생명이 요동치는 걸 상징하는 거잖아요?”

  미연의 말을 듣는 순간 인준이 고개를 끄떡이면서 환히 웃었다. 미연의 말에 동의한다는 동작이 아닌가? 자신의 말을 선선히 인정해 주는 사내에게 미연은 마음이 끌렸다.

  경영학 교수를 꿈꾼다는 인준이다. 그를 만날수록 미연은 점차 황홀해진다. 만난 지 2년만에 석사학위를 받고는 곧바로 박사과정에 진학한 인준이다. 올해 박사과정 1년차인 인준은 더욱 의젓해져 듬뿍 신뢰감이 든다. 미연이 처음 대할 때의 느낌은 너무나 완벽한 인간형으로 비쳤다. 사내를 대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중얼대는 미연이다.

  ‘저 사내 같으면 허점이라곤 거의 없을 것 같네.’

 대외 물류 수송 업무에 숙달될수록 미연은 인준을 닮으려고 한다. 침착하면서도 유머 감각이 빼어난 사내. 단아한 풍도이면서도 늘 미소가 남실대는 얼굴. 자신과 남의 이해관계가 상충되면 남을 먼저 배려하려는 자세. 인준의 빼어난 성향이 어디 한두 가지랴? 그렇기에 미연은 인준의 품성을 닮으려 마음을 가다듬는다. 하지만 성품이란 게 어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겠는가? 선천적인 요인과 후천적인 노력이 다져져서 이루어질 터이리라. 그렇기에 미연은 인준의 품성에 서서히 동화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서울 노원구의 수락산(水落山)은 언제나 등산객으로 붐비는 편이다. 하지만 등산로가 아닌 곳은 한산하다 못해 적적할 지경이다. 미연이 인준과 만나기로 한 장소도 인적이라곤 뜸한 곳이다. 미연과 인준은 둘 다 등산을 즐기는 편이다. 사방의 산을 오르내리다가 문득 둘의 눈에 띈 명소가 수락산이다. 특히 둘이 만나기로 약속한 산기슭은 선경(仙境)의 아취가 느껴지는 곳이다. 치솟은 바위 능선 아래로 다복솔로 자욱하게 뒤덮인 산기슭. 다복솔로 뒤덮인 산기슭의 남동 방향에는 천연 석동(石洞)이 감춰져 있다. 석동의 입구에는 다복솔이 무성하며 석동 안에는 정갈한 반석이 깔렸다. 석동의 내부 생김새는 타원형이고 면적은 십여 평에 달한다. 석동의 높이는 2m가량이고 길이는 10여m에 달한다. 그래서 세속을 초월하여 수도하기에 적합한 지형이라 여겨지는 곳이다. 둘의 약속 장소는 바로 천연 석동이다. 석동에 들어서기만 하면 청량한 솔바람 소리에 심해(深海)에 잠긴 기분이다. 수락산의 7부 능선의 지형에 이런 곳이 있음을 몇이나 아랴? 때때로 둘이 석동을 찾건만 타인이 다녀간 흔적이라곤 없었다. 그래서 둘은 수락산의 천연 석동을 수락선동(水落仙洞)이라 부르기로 했다. 석동으로 향해 걷는 미연에게 인준의 목소리가 되살아난다.

  “내게 물었던 질문의 대답을 내일 들려줄게. 내일이 지나면 또 얼마의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르겠거든.”

  미연이 인준에게 질문한 지 거의 한 달만이다. 한 달이 걸려서야 대답을 들려주겠다는 사내. 생각할수록 여간한 매력을 지닌 게 아니라 여겨진다. 그의 대답이 뭐든간에 신뢰감이 느껴지게 되는 터다. 신뢰감을 잔뜩 줄 수 있는 사내이기에 더욱 만나고 싶다. 미연은 고개를 들어 광활하게 펼쳐진 솔숲을 올려다본다. 탐스러운 다복솔이 어쩌면 끝없이 깔려 있는지 새삼 감탄스러울 정도다. 다복솔의 뾰족한 솔잎을 보는 순간이다. 가슴을 찌르르 울리며 파고드는 기억이 있다. 가슴이 일시에 서늘해질 만큼의 위력적인 기억을 말함이다.

  미연이 대학 2학년이던 가을철의 일이었다. ‘탐사(探査)’라는 대학 동아리가 있었다. 여성 회원 전용으로 운영되는 취미 동아리였다. 오후 4시 무렵이었다. 학교의 강의가 끝나 막 강의실 책상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강의실은 인문대학 2층 건물이었고 서클룸(circle room)으로부터도 가까운 거리였다. 마침 강의실에는 미연 혼자만 남아 있던 판이었다. 느닷없이 강의실 문이 왈칵 열렸다. 그러면서 일부의 동아리 회원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예상치 않은 일이라 미연은 다소 놀랐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앞서 들어온 3학년 선배 여학생들 둘이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더니 서로를 노려보며 곧바로 고함을 질러댔다.

  “이게 버르장머리가 없어. 내가 말하는 자리에서 어디서 불쑥불쑥 끼어들고 지랄이야!”

  이에 대꾸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뭐야? 네가 보스라도 되는 거야? 까부는 꼴을 도저히 못 봐 주겠네. 어때 불만 있으면 나랑 맞장을 뜰래?”

  말을 먼저 꺼낸 청바지 차림의 여학생이 표독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동아리 회원들을 향해 손짓을 한다. 교실로 들어선 동아리 회원들은 모두 9명이었다. 다투려는 2명을 제외한 7명의 회원들이 일제히 책걸상을 뒤쪽으로 밀친다. 강의실에서는 이내 굉음이 울리면서 겨루기에 적합한 공간이 마련된다. 7명의 회원들은 모두 미연과 같은 2학년들이었다. 미연도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7명의 여학생들에게 합류한다.

  3학년 여학생 선배들 간의 격투가 진행되려는 순간이었다. 둘 다 170cm 정도의 키에 체격도 비슷한 조건으로 보였다. 청바지의 여학생이 블라우스를 벗는다. 거추장스러운 것을 제거해 버리려는 몸짓이다. 이내 돌출한 젖가슴에 떠받쳐진 분홍의 브래지어가 나타났다. 청바지의 여인과 상대하려는 여인은 표범 무늬의 갈색 미니스커트 차림새였다. 미니스커트가 격투에는 불리하다고 판단한 모양으로 선뜻 미니스커트를 벗어 던졌다. 그러자 노란색의 삼각팬티가 드러났다. 둘은 이내 서로를 노려보며 대결 자세를 취했다. 청바지가 냅다 기합을 지르면서 오른발 앞차기를 내질렀다. 노란 팬티의 턱이 정통으로 맞아 노란 팬티가 뒤로 넘어졌다. 넘어진 노란 팬티를 바람처럼 따라가며 청바지가 내리눌렀다. 청바지에게 깔린 자세 그대로 노란 팬티가 오른손을 휘둘렀다. 노란 팬티가 청바지의 왼쪽 옆구리를 오른손의 수도로 연거푸 갈겼다. 통증이 심각한 듯 일순 청바지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이 때를 놓칠세라 노란 팬티가 청바지의 허리를 감아 돌렸다. 순식간에 청바지가 노란 팬티에게 깔린 형세로 바뀌었다. 그러자 노란 팬티가 주먹으로 청바지의 턱을 번갈아가며 두들겨 패댔다. 잠시 두들겨 맞던 청바지가 누운 채로 두 다리를 오므렸다. 그러더니 두 팔로 노란 팬티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바로 그 찰나였다. 느닷없이 자신의 배를 위로 솟구치면서 노란 팬티의 발목을 밀쳤다. 그러자마자 노란 팬티가 앞으로 굴러 넘어지면서 강의실 바닥에 나뒹굴었다. 생중계되는 격투기 대회의 동영상을 보는 듯했다. 손에 땀을 쥐는 듯한 격투의 장면이 이어졌다. 호적수(好敵手)를 만난 듯 둘의 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5분 동안의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말릴 생각을 못했다. 동아리의 규정상으로 선배의 일에 끼어들면 가혹한 기합을 받아야 했다. 이미 수차례나 경험했던 일이기에 재차 기합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스스로 해결하여 매듭을 지을 때까지는 지켜보아야만 했다. 5분이 경과될 무렵부터였다. 서로 치고받고 움켜쥐는 과정에서였다. 청바지의 브래지어와 노란 팬티의 팬티는 어느새 벗겨지고 말았다. 둘 다 얼굴에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쯤에서 싸움을 말려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미연에게 들었다. 미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주위의 7명의 동료들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이제 싸움을 말려야겠어.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다들 뛰어들어 싸움을 말려.”

  그러자 일제히 달려들어 두 선배를 갈라놓았다. 일단 선배들을 갈라놓은 뒤였다. 미연은 7명의 동료들을 밖으로 내보내 버렸다. 미연 혼자 두 선배를 상대로 얘기를 꺼내려고 했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두 선배는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미연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들은 후배가 건방지게 자신들의 일에 개입한다고 여긴 듯했다. 그래서 순식간에 자존심이 많이 상한 듯했다. 그러더니 미연에게로 다짜고짜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몸매 관리 차원에서 태권도를 2단에  이르기까지 수련한 미연이었다. 그대로 맞기에는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기합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무력으로 응징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만 참고 견뎌 보기로 했다. 5분이 경과될 때까지는 선배들의 공격을 방어하기만 했다. 그랬는데도 미연이 맞지 않고 건방지게 방어를 한다며 노여움을 드러냈다. 입에 거품을 물며 선배들이 미연을 공격했다. 마침내 미연의 인내의 한계점이 무너지고 말았다. 방어하면서도 할 말이 있다며 동작을 멈춰 달라고 선배들에게 부탁했었다. 부탁을 들어 주기는커녕 광기(狂氣)를 발산하면서 둘이서 미연을 공격했다. 마침내 미연이 고함을 지르며 둘을 상대로 주먹과 발을 휘둘렀다. 오랜 세월을 쉬지 않고 수련해 온 주먹질과 발길질이었다. 유사시를 대비하여 실전과 마찬가지 수준으로 연습을 반복하던 동작들이었다. 치고 내지를 때마다 선배들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연은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 강의실을 벗어나야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선배들에게 옷을 입힌 뒤였다. 선배 둘과 함께 강의실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학교 정문을 빠져 나와 북악산 계곡을 오르려고 했다. 북악산 계곡에서 가슴을 열고 대화를 나눌 참이었다. 그랬는데도 의외로 두 선배들이 완강히 거부했다. 차라리 이태원으로 가자는 거였다. 시골에서 올라와 청순한 자세로 삶을 살던 미연이었다. 이런 미연에게 되는 대로 쉽게 끌려갈 선배들이 아니었다. 미연은 잠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장소는 어디라도 좋다고 여겨졌다. 진정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배들을 따라가기로 작정했다.

  선배들의 이름을 알고 보니 청바지는 진희였고 미니스커트는 현주였다. 둘 다 고교 시절에는 폭력 서클에서 놀던 가락이 있었다. 한 마디로 불량기가 몸에 밴 여대생들이었다. 택시를 달려 도착한 곳은 이태원의 유흥가였다. 그 중에서도 ‘카사블랑카(Casablanca)’라는 여성 전용의 바(bar)가 보였다. 바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진희가 잠시 약국에 들렀다 왔다. 카사블랑카는 3층 건물이었다. 세 여인이 찾아든 곳은 3층의 ‘갤럭시 룸(galaxy room)'이었다. 룸은 대여섯 명이 들어갈 만한 밀실이었다. 바텐더가 두어 번 다녀가자 실내엔 양주와 안주가 그들먹해졌다. 진희가 바텐더와 주고받는 말을 들으니 기본료가 20만원부터 시작된다는 거였다. 미연은 지갑 속을 떠올렸다. 고작 2만원이 전 재산이었다. 그런데 술값을 어떻게 해결할지 순간적으로 걱정이 되었다. 미연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던 모양인 듯 현주가 말했다.

  “야 뭘 그렇게 두려워하니? 술값은 진희와 내가 낼 테니까 너는 술만 마시면 돼.”

  맥주에 양주를 타서 서너 잔이 돌았을 때다. 미연에게 취기가 울컥 밀려들었다. 미연이 속이 불편하여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 두어 차례 토악질을 하고 세수를 한 뒤에 밀실로 들어섰다. 진희가 술잔을 또 권했다. 이미 술이 가득 차 있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미연은 술잔을 단숨에 반쯤 비웠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평소의 음주 때보다도 훨씬 빨리 졸음이 쏟아졌다. 정신을 차리려 할수록 꾸벅꾸벅 고개가 숙여졌다.

  “얘, 눈 좀 떠 봐. 영 술이 약한 편이구먼.”

  진희와 현주가 함께 미연을 보며 떠들어대었다. 미연은 흠칫 놀라며 자세를 가다듬으며 눈을 떴다. 그 사이에 얼마나 졸았던지 모른다. 눈앞에는 검정 양복에 넥타이를 맨 바텐더가 서 있었다. 진희가 바텐더를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며 말했다. 바텐더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얘, 술값과 봉사료는 나중에 계산하면 되지? 이건 특별 팁이니까 네가 알아서 잘 해 줘.”

  진희가 바텐더에게 수표 한 장을 건네준다. 미연의 추측으로 아마도 10만 원짜리 수표일 것 같았다. 수표를 건네받는 순간이었다. 바텐더가 곧바로 진희에게 무릎을 꿇고 앉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사모님들을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러더니 이내 세 여인들의 앞에서 혁대를 풀며 바지를 벗었다. 그러더니 금세 알몸이 되어 여인들의 앞에 재차 무릎을 꿇었다. 여인들의 눈이 훤해졌다. 청년은 근육 운동으로 다져진 듯한 멋진 근육형의 체격을 갖췄다. 청년은 알몸인 상태로 세 여인들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미연의 느낌으로 진희와 현주는 카사블랑카의 단골인 모양이었다. 그녀들의 부모님으로부터 받는 용돈의 수준이 어마어마한 모양이었다. 진희와 현주는 청년의 사타구니에 자연스레 손을 뻗쳤다. 그러더니 수시로 청년의 성기를 번갈아가며 애무하곤 했다. 금세 청년의 성기가 발기하여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청년은 전혀 불쾌한 표정이나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마치 그렇게 해 주어서 고맙다는 듯이 쾌활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맞이하는 낯선 환경이라 미연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미연은 진희와 현주의 표정을 번갈아가며 살폈다. 마음 같아서는 그만 주점을 빠져 나가 버리고도 싶었다. 하지만 함께 모여 대화를 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아직 서로 정식으로 화해하는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단지 술만 벌컥벌컥 마셔댔을 따름이다.

  미연의 표정을 알아차린 듯 진희가 미연에게 말했다.

  “이런 데 처음 와 봤어? 왜 그리 안절부절못하고 그래? 오늘은 마음을 서로 까놓고 잘 지내보자고 청한 날이야. 촌스런 표정을 짓지 말고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는 거야.”

  진희가 내뱉는 ‘촌스런 표정’이라는 말이 미연의 가슴에 독소로 박혔다. 촌스런 표정이라니?  슬그머니 미연의 내부에서 강한 반발심이 일어났다.

  ‘그래 좋아. 너희들이 서울 토종이라고 뭐가 다른지 한 번 보자꾸나. 내가 너희들에게 밀릴 것이 뭐가 있겠어? 끝까지 너희들의 꼴을 내가 지켜봐 줄게.’

  심정의 변화가 일자마자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미연이 응답했다.

  “좋아요. 모처럼 언니들이랑 까놓고 한 번 얘기해 봐요.”

  현주가 미연의 모습을 귀엽다는 듯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래, 이제야 대화가 될 듯한 분위기네.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계속 술잔이 서너 순배 돌았다. 식탁 위에는 양주병이 2개에다가 맥주병이 2박스째 까발려 있었다. 미연은 토악질이 몇 번씩이나 나오려고 했지만 오기로 견뎠다. 어쨌든 선배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대등해야만 무슨 협상이라도 할 터였다. 어쨌거나 선배들에게 폭력을 가한 일이 마음에 걸렸다. 당장 좋게 해결하지 못하면 무슨 후유증이 생길지 모를 터였다. 끝까지 까다롭게 굴면 함께 퇴학해 버릴 각오까지 했다. 일단 마음을 강하게 먹자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현주가 진희를 흘깃 보더니 미연에게 말했다.

  “이제 오늘 일어난 일을 마무리 지어야지? 설사 선배가 잘못한 일이 있다고 쳐! 그랬더라도 어디 후배가 선배한테 폭력을 휘둘러? 따지면서 해명할 거야 아니면 무조건 사과할 거야? 우선 그것부터 얘기해 봐.”

  미연은 선배들의 눈치를 빠르게 간파했다. 자신이 먼저 사과하면 흔쾌히 화해하자는 분위기가 아닌가? 게다가 알몸의 바텐더까지 불렀을 때엔 화해를 전제로 했을 터였다. 미연은 잠시 자존심을 버리기로 했다. 일단 물러서면서 선배들의 반응을 보기로 했다. 끝내 취기를 구실로 화해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 때엔 그 때 가서 해결책을 찾기로 했다. 일단 먼저 사과하기로 했다.

  “두 분 언니께 먼저 사과드릴게요. 언니들이 먼저 제게 공격하지 않았다면 저도 대들지 않았을 거예요. 분명히 폭력을 먼저 휘두른 건 언니들이었어요. 이 세상에서 누가 자신을 죄 없이  때리는데 가만히 있겠어요? 하지만, 후배로서 언니들께 폭력을 휘두르게 되어서 정말 죄송해요.”  

  미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희의 눈빛이 번뜩였다. 불만이 가득하다는 표정이었다. 바로 이 때 현주가 미연에게 말했다.

  “미연아, 사과하려면 그냥 잘못했다고 할 일이지 왜 토를 달아? 네가 그렇게 자존심이 강해? 그냥 후배로서 사과하면 안 되는 거야, 응?”

  미연이 잠시 생각했다. 일단 따지지 말고 좋게 지내는 것도 좋으리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재차 정중하게 사과했다. 두 선배들은 그제야 입이 찢길 듯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미연은 이 때에 확실히 선을 그어야겠다고 작정했다. 오늘 화해를 한 뒤에는 후배들에게 기합을 들먹이지 말라고 부탁했다. 선배들은 만족한 듯 크게 고개를 끄떡이면서 동의했다.

  화해가 이루어진 뒤였다. 진희가 핸드백을 열더니 뭔가를 꺼냈다. 미연이 뭔가 살펴보니 콘돔이었다. 바에 들어서기 전에 진희가 잠깐 약국에 들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마 그 때 콘돔을 샀으리라 여겨졌다. 진희는 청년을 부르더니 청년의 성기에 콘돔을 씌웠다. 그러면서 현주와 미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다들 옷을 벗고 서비스를 받자구!”

  현주도 당연하다는 듯 옷을 벗기 시작했다. 미연도 취기가 이제 가득 오른 상태였다. 덩달아 옷을 벗어 던졌다. 덩그렇게 돌출한 젖무덤의 부피가 셋 중에서 가장 컸다. 선배들의 눈에 감탄의 빛이 역력했다. 취기가 오른 중에서도 미연은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청년의 콘돔이 질 내에서 터져 버리지는 않을지? 아직 한 번도 이성과는 성교해 본 적이 없는 미연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인준에게 몸을 주는 건데 잘못했어. 하필이면 바텐더에게 내 순결을 바치다니 말도 안 되잖아? 지금이라도 자리에서 일어서 버릴까? 인준도 숫총각이라고 어떻게 보장해? 사내들한테는 배설할 곳이 많다고 하잖아? 노래방 도우미라든지 마사지 걸(massage girl) 등의 대상이 그렇다고 했지? 내가 여태껏 처녀성을 지킨 것만도 천연 기념물적인 요소가 아닐까? 에라, 모르겠다.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오늘은 마음껏 즐기자. 그런데 혹시 처녀막이 파열되어 피가 비치면 어떡하지? 모든 여자에게 다 처녀막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잖아? 피가 비치면 비치는 거고 지금은 따지지 말기로 하자. 설사 피가 비치더라도 멘스가 덜 끝난 모양이라고 둘러대면 되겠지.’

  본격적인 애무를 받기 전에 진희가 콘돔을 2개 더 꺼낸다. 그러더니 현주와 미연에게 건네준다. 청년은 단련된 몸짓으로 익숙하게 진희를 황홀경으로 몰고 갔다. 교성을 질러대던 진희가 나뒹군 뒤였다. 이내 청년이 콘돔을 갈아 낀 뒤였다. 연이어 청년은 현주의 몸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현주도 나뒹굴었다. 청년은 미연의 앞에서 재차 콘돔을 갈아 끼웠다. 그러더니 미연의 젖가슴을 어루만지면서 유두를 빨기 시작했다. 미연의 전신이 저릿거리면서 금세 오줌이 마려운 기분이 들었다. 마치 오줌을 쌀 듯한 흥분이 전신을 휩쓸었다. 어느새 자신의 팔이 청년을 바싹 안고 있음을 느꼈다. 잠재된 본능이 폭발되려는 듯했다. 앞의 선배들은 나뒹군 채 기척이 없었다. 취기와 흥분이 극점에 달해 그대로 잠들어 버린 듯했다. 쓰러진 여인들을 흘깃 둘러보며 청년은 더욱 미연을 정성스레 애무했다. 처음에는 청년의 손길이 금세 하체에 닿으려니 여겼다. 하지만 청년의 손은 좀체 허리 아래로 넘어오지 않았다. 넘어올 듯 말 듯 긴장감만 잔뜩 고조시키곤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청년의 따뜻한 입김이 하체를 달구기 시작했다. 황홀하기 이를 데 없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황홀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만 다리를 벌렸다. 그러는 어느 순간이었다. 하체에 묵직한 느낌이 들면서 청년이 미연의 몸속으로 들어섰다. 미연도 얼마 안 되어 자신도 모르게 나뒹굴고 말았다.

  그 날 후부터였다. 미연은 두 선배들을 절친한 친구로 사귀게 되었다. 처녀성과 맞바꿀 만큼 의 충분히 좋은 친구들이라고 여겼다. 어디로 가건 수시로 연락을 취하여 안부를 물었다.        

  수락산의 뾰족한 다복솔의 솔잎을 볼 때다. 미연에게는 탱탱하게 발기된 청년의 성기가 떠올라 잠시 얼굴을 붉힌다. 미연은 이태원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다가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뒤흔든다.

  ‘한 때의 불장난치곤 제대로 된 친구들을 얻은 셈이었지.’

  미연은 수락선동(水落仙洞)을 향해 다가선다. 온통 다복솔로 뒤덮여 솔향기가 전신에 배어든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 마침내 동굴 입구에 다가선다. 막 동굴 입구로 들어설 찰나다. 아무래도 느낌이 좀 이상한 듯하여 좌우를 살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부단히 무술 수련을 한 미연이다. 산속에서 어지간한 사내를 만난다 하더라도 두렵지 않은 미연이다. 미연의 후각에 상당히 미묘한 냄새가 느껴진다. 미연은 본능적으로 다복솔 숲으로 몸을 숨기며 주위를 살핀다. 그리고 살며시 바지 주머니 안을 더듬어본다. 거기에는 유사시를 대비한, 잘 갈린 과도(果刀)가 들어 있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는 강력한 수단이다. 어떤 상태에서 적에게 잡힐지라도 과도만 움켜쥐면 자신이 이기리라 여겨진다.

  일단 울창한 다복솔의 숲에 몸을 감춘 뒤다. 미연은 조심스레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어떤 느낌이 자꾸만 전해져 온다.

  ‘도대체 뭘까? 누가 날 노리는 게 아닐까? 내가 여자라서?’

  생각에 잠긴 중에도 서늘한 기운이 자꾸만 피부에 와 닿는다. 유사시를 대비하여 보다 은밀한 장소에 몸을 숨긴다. 그러면서 최대한 주변의 사태에 귀를 기울이려 정신을 집중한다.

  느닷없이 다복솔의 숲이 깔린 곳으로 발자국 소리들이 들린다. 그러면서 떠들어대는 목소리들이 들린다.

  “아까부터 쭉 지켜봤어. 분명히 갈치 하나가 산을 타고 올라왔어. 너도 봤지?”

  “그럼, 좀 멀리서 보긴 했지만 싱싱해 뵈는 먹갈치 종류였어.”

  잠시 정적이 일더니 또 다른 음성이 들린다.

  “야, 떠들지만 말고 빨리 찾아야 할 것 아냐? 시간 없는데 빨리 찾자구.”

  “먼저 찾는 놈이 임자야. 원래 먹갈치는 계절에 무관하게 맛있는 어종(魚種)이야.”

  미연은 ‘먹갈치’라는 은어(隱語)를 듣자 움찔 놀란다. 먹갈치란 성교가 가능한 젊은 여인을 일컫는 말로 통용되는 은어다. 누군가는 몰라도 미연이 입산할 때부터 지켜봤다는 얘기가 아닌가? 오늘의 일이 예사롭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솔숲이 더욱 짙은 곳을 찾아 몸을 납작하게 엎드린다. 신속히 핸드폰을 진동 양식으로 전환한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꺼내 인준에게 신호를 보낸다. 몇 번씩 신호는 가는데도 연결이 되지 않는다. 분명 핸드폰은 켜져 있는데도 전화를 받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면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음이 분명하다. 진동 양식에서는 간혹 진동을 못 느낄 경우도 있지 않은가? 미연의 마음이 점차 초조해진다. 통화 연결이 되어야만 뭔가 얘기할 수 있지 않는가? 서너 차례 연이어 신호를 보내보지만 결과는 무응답이다. 미연은 생각에 잠긴다.

  ‘일단 나는 여자이고 상대는 여러 명의 사내들이다. 사내들이 흑심을 품고 있지 않는가? 눈에 띄면 겁간을 당할 뿐만 아니라 살해될 수도 있으리라. 호젓한 곳에서 근거를 남기지 않으려면 무슨 짓을 못 하겠는가?’

  미연은 손가방 속의 과도를 꺼내 칼날을 더듬어 본다. 혼자 입산하는 경우여서 비상으로 준비한 과도다. 상대가 사내들이기에 문제가 생긴 터다. 신체적인 구조로 볼 때 사내들이 여자들보다는 근육질이 아닌가? 따라서 힘도 사내들이 세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명을 상대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무리한 일이다. 미연이 다시 핸드폰을 꺼내들 찰나다. 발길에 채어 돌이 하나 비탈길로 굴러 내리며 소리를 낸다. 곧바로 미연의 지척에서 사내의 말소리가 들린다.

  “쉿! 방금 저 앞에서 무슨 소리가 났어. 이 근처를 잘 찾아 봐야겠어. 먼저 찾는 놈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 알지?”

  사내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르르 몰려드는 사내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미연은 이제 과도를 꺼내 손에 움켜쥔 상태다. 누구든 접근하면 그대로 찔러 버릴 작정이다. 자신이 살해되지 않으려면 상대를 죽여야만 될 상황이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 든다. 과도를 든 채 주변을 살핀다. 마침 가까운 곳에 억새풀이 길길이 치솟은 부분이 보였다. 대략 십여m에 이르도록 억새가 우거져 있다. 억새 숲은 다복솔과 몇몇의 바위들이 선 지점부터 펼쳐져 있다. 높이가 3m 가량 되는 바위 부근에서다. 높이가 70cm 가량 되는 다복솔이 바싹 땅까지 밀착해 있다. 다복솔 주변으로는 억새가 길길이 치솟아 있다. 땅과 다복솔 사이는 무성한 솔잎으로 틈새가 안 보일 정도다. 미연은 본능적으로 다복솔의 솔가지 밑으로 들어서서 납작하게 쪼그려 앉는다. 미연의 생각으로 몸을 숨기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로 여겨진다. 다복솔의 무성한 솔가지 밑에 뛰어들었어도 불안하기 그지없다. 사내들의 발길이 바위 근처로 오면 끝장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무성한 솔가지 밑에 숨긴 자신의 몸뚱이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여간 세밀한 관찰력이 없이는 발견되기 어려우리라는 생각이 든다. 솔잎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어서 어떤 빈틈마저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숨은 입장에서는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다. 혹시 옷의 색깔이 바깥으로 내비칠까 두렵기 때문이다.

  쉴 새 없이 바람이 산악을 휩쓸고 있다. 사내들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한다. 아마도 눈에 불을 켜고 집요하게 찾는 모양이다. 아마도 미연이 몸을 숨긴 부근에서 끝까지 찾으려는 의도 같았다.

  “야, 마지막으로 여기 억새밭을 훑어보는 게 어떻겠어? 여기에 뒤져도 없으면 눈치를 채고 어딘가로 내뺐을 거야.”

  “맞아, 사방을 다 뒤졌는데도 아무런 단서가 없잖아? 억새밭을 몇 군데로 나누어 세밀히 찾아보자고. 도망을 못 갔으면 겁이 나서 오줌을 지리고 있을 거야.”

  왁자지껄할 소리로 추측컨대 사내들은 최소한 서너 명은 될 듯하다. 창졸간에 사내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들 이리 와 봐. 여기에 웬 손수건이 떨어져 있어. 여자용이 틀림없어. 아무래도 이 주변에 갈치가 있을 것 같지 않아?”

  또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손수건에서 향수 냄새까지 나네? 틀림없이 갈치의 것이 분명해. 빨리 찾자구.”

  미연이 다복솔 밑에 숨어 있다가 왼손을 살핀다. 들고 다니던 손수건이 안 보인다.

  ‘그렇다면 내 손수건임에 틀림이 없는데 이를 어쩌지? 그 손수건은 인준이 신경을 써서 백화점에서 골라준 게 아닌가? 점점 일이 꼬이네.’

  미연의 어깨로 뭔가 굵은 것이 꿈틀대는 느낌이 든다. 고개를 돌려보니 연두색의 송충이가 블라우스 위의 어깨에서 기어간다. 빳빳한 독침이 묻은 털이 곧장 목에 닿으려 하고 있다. 다급한 김에 손가락으로 곧장 튕겨 버린다. 송충이는 금세 미연의 시야를 벗어나고 만다. 미연이 몸을 숨긴 다복솔 위를 보는 순간이다. 적어도 대여섯 마리의 송충이가 솔가지에 매달려 있다. 그걸 바라보는 순간이다. 누적된 불안감으로 오줌이 두어 줄기 질금거리며 분출된다. 미연은 입술을 깨물며 가까스로 오줌을 참는다. 자칫 방뇨를 하다가 오줌 누는 소리라도 들리게 되면 끝장이리라.   

  미연이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을 때다. 핸드폰이 연거푸 떨어댄다. 액정 표시창을 살펴보니 낯선 번호다. 인준의 핸드폰 번호가 아니다. 연이어 걸려오는 세 전화도 모두 다른 번호다. 누군가 핸드폰으로 자신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을지 모르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자 갑작스레 전신이 후들거리면서 견뎌 내기 힘들 지경이다. 미연은 부디 무사히 하산할 수 있기만을 간절히 비는 심정이다. 어떻게 인준으로부터는 전혀 연락이 없는지도 불안하다. 혹시 인준이 사내들에게 피해를 입은 건 아닌지도 염려스럽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미연의 귓전으로 바람결에 인준의 목소리가 들린다. 인준이 격분하여 고함을 내지르며 격투하는 소리가 들린다. 인준의 목소리를 알아들자마자 미연은 다복솔 밑에서 밖을 내다본다. 청년들을 향해 인준이 고사목 몽둥이를 휘두르며 고함을 지르고 있다. 검도의 달인답게 인준이 기합을 내지를 때마다 사내들이 나뒹군다. 대다수가 정수리나 옆구리를 몽둥이에 맞아 나뒹굴고 있다. 동작이 너무나 깔끔하고 민첩하여 매서울 정도다. 간혹 실신에서 깨어난 사내들이 몸뚱이를 뒤척인다. 인준이 다가가 몽둥이로 목의 측면을 치자 재차 실신해 버린다. 땅바닥에는 3명의 사내들이 실신 상태로 널브러져 있다. 미연이 달려 나가면서 인준을 부르자 인준도 반갑게 달려온다. 둘은 만나자마자 꼭 껴안고는 얼굴을 맞비빈다. 인준이 달뜬 음성으로 미연에게 말한다.

  “너의 손수건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숨어 있었다니 하늘이 너를 보살펴 준 것 같네.”

  미연은 왈칵 울음이 터질 듯했지만 가까스로 참고는 나지막이 말한다.

  “오늘 무서워서 죽는 줄만 알았어. 왜 이제 왔어, 응?”

  그러다가 낮은 목소리로 재차 입을 연다.

  “준아, 여기서는 빨리 빠져 나가야 할 것 같아. 저 패거리들의 잔당이 어디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잖아?”

  인준은 완강히 고개를 내저으면 반대 의사를 나타낸다. 실신한 사내들이 깨어나 재차 덤벼도 대수롭지 않다고 말한다. 청년들은 실신 상태에서 깨어나는 대로 도망치리라고 단언한다. 단지 실신만 시켰을 뿐 부상을 입힌 건 아니라고 밝힌다. 이제 낯선 사내들이 정리되었으니 수락선동(水落仙洞)으로 찾아 들어가자고 미연에게 말한다. 미연은 여전히 두렵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떡이며 동의한다.

  기다란 터널 같은 다복솔 숲을 헤치고 30여m를 그들이 걸어간다. 그러자 칼날처럼 예리하게 치솟은 바위의 무더기들이 시야에 나타난다. 바위들 곁엔 다복솔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다. 높이가 3m에 이르는 바위 곁에 둘이 다가선다. 바위 곁에는 구들장처럼 얇은 판 모양의 바위가 세워져 있다. 높이가 2m에 이르는 판상(板狀)의 바위를 인준이 살며시 옆으로 밀친다. 그러자 높이가 1.5m에 달하는 동굴의 출입구가 드러난다. 동굴은 퇴적암이 물줄기에 침식되어 형성된 지형적 특징을 보여 준다. 들어갈수록 천장의 높이가 높아져 최대 높이는 5m에 달한다. 동굴 내부의 면적은 10여 평쯤 되어 보인다. 내부에는 화강암질 석상(石床)과 석좌(石座)까지도 보인다. 석상과 석좌는 아마도 외부에서 옮겨 놓은 듯하다. 아마도 예전부터 도인(道人)들의 수행 장소였던 곳으로 여겨진다. 석좌는 침상으로도 사용될 만하게 2m가량 기다랗게 만들어진 상태다. 예전에 그 누가 옮겨다 놓았는지 놀라운 생각이 든다. 다수의 인원이 아니고는 절대로 옮기지 못할 크기다. 돌의 재질은 좋아 보이건만 숱한 세월에 방치된 듯하다. 석좌의 곳곳에 살아 있는 돌이끼가 무성하게 깔려 있다. 동굴의 천장으로도 물기가 서려 이끼가 잔뜩 낀 상태다. 쉴 새 없이 천장으로 물기가 배어드는 모양이다. 동굴 내에 들어서면서 둘은 석판으로 동굴 입구를 막는다. 미연이 손가방을 열어 양초와 가스라이터를 꺼낸다. 곧바로 양초에 불을 붙여 석상 위에 세운다. 분위기가 은은하여 한결 아늑한 느낌이 든다.  ·     

  미연이 아직도 두렵다는 듯 말한다.

  “근데 오늘 왜 통화가 안 된 거야? 내게 전화도 없었고 말야.”

  인준이 미연의 동공을 들여다보며 차분하게 경과를 들려준다. 수락산을 향해 인준이 집을 나선 지 반시간이 되었을 때였다. 전동차 안의 사람들이 핸드폰 교신을 해대었다. 인준도 문득 주머니를 더듬었다. 있어야 될 핸드폰이 안 보였다. 내방 전철역 부근의 집까지 되돌아가기는 너무 먼 거리라 여겨졌다. 체념한 채 지갑 속을 더듬었다. 비상용으로 간직해 둔 전화카드가 눈에 띄었다. 아쉬운 대로 공중전화를 이용하면 되겠거니 위안을 삼았다. 하지만 공중전화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막막한 느낌이었다. 새로 구입한 옷으로 갈아입으려다가 핸드폰을 빠뜨린 듯했다.

  지하철 7호선의 차량이 청담대교의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였다. 전동차의 속도가 급격히 느려지더니 전동차가 우뚝 멈춰 버렸다. 전동차가 멈춤과 동시에 차 내의 전등마저 꺼져 버렸다. 전동차의 자동문마저 닫힌 채 열 수가 없었다. 전원이 끊겨 일체의 안내 방송마저 없는 상태였다. 전동차의 의자 밑에는 강제로 문을 여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사람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더니 여기저기서 강제로 전동차의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철교 위에 올라서지만 전동차를 떠나지 못했다. 언제 전동차가 수리되어 출발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지하철 역무원들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전동차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불만을 터뜨리며 다리를 건너겠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볼멘소리에 밀린 듯 역무원들이 비켜섰다. 사람들은 청담대교의 양쪽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인준도 청담대교의 북단을 향해 걸어갔다.

  30여 분이 지나서야 인준은 ‘뚝섬유원지’ 전철역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약속 시간을 맞추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그래서 뚝섬유원지에서 수락산 전철역까지 택시를 타기로 했다. 40여 분이 지나서야 인준이 수락산 전철역 앞에 도착했다. 이미 약속 시간을 넘기고도 20분이 지난 상태였다. 인준이 수락산 전철역 주변에서였다. 지나가는 고등학생의 핸드폰을 잠시 빌려 전화를 시도했다. 20여 초가 지나자 학생이 짜증을 부리기에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지나가는 또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핸드폰을 빌려 전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30초가 넘도록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결국 전화 걸기를 단념한 채 약속 장소를 향해 달려갔다. 이미 약속 시간이 늦었기에 달려가도 만나게 될지 의문이었다. 최선을 다해 달려가며 하산하는 등산객들의 얼굴을 살폈다. 혹시 하산하는 대열 속에 미연이 낀 건 아닐까를 살폈다. 쉬지 않고 달린다면 약속 장소까지는 20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리하여, 인준은 전력을 다해 약속 장소를 향해 달려갔다.

  인준이 수락산 능선을 향해 치달린 지 20여 분만이었다. 마침내 약속 장소인 수락선동(水落仙洞)이 지척에 보이는 지점에서였다. 20대 초반의 낯선 청년들 셋이 뭔가를 찾는 기색으로 비쳤다. 사내들의 서성거리는 지점이 수락선동의 부근이었다. 혹시 이들이 미연에게 해를 입히지는 않았는지 문득 의심이 되었다.

  인준은 유사시를 대비하여 사내들을 제압할 방식을 궁리했다. 신장 180cm에 체중 90kg에 달하는 당당한 체격의 인준이다. 또한 합기도 3단의 유단자이기도 한 인준이다. 팔굽혀 펴기를 단숨에 300회씩을 너끈히 해 치우는 완력의 소유자다. 누구든 인준의 주먹에 턱을 한 대만 맞으면 끝장이다. 이전에 폭력배 네 명과 대결해서도 순식간에 해 치운 실력자다. 인준은 무술을 숭상하여 검도에 있어서도 2단의 유단자다. 막대를 들기만 하면 몇 명이든 꺾을 수 있는 실력자다.

  인준이 은근히 청년들을 의심하며 청년들에게로 다가갔다. 청년들 셋은 인준의 출현에 긴장한 듯 적의를 드러내었다. 어떤 청년의 손에 들린 손수건에 인준의 시선이 미친 순간이었다. 무척 눈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더듬어 보니 손수건은 미연의 것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손수건은 인준이 백화점에서 사서 미연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그래서 곧바로 기억에 떠오른 거였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필시 미연이 해를 입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일시에 격분이 치솟았다. 곧바로 손수건을 든 청년에게로 달려가 손수건을 가로채며 물었다.

  “이 손수건 어디서 났어?”

  청년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땅바닥에 침을 뱉았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불같이 화가 치민 인준이 뛰어 앞차기로 청년의 턱을 걷어찼다.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청년이 땅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주변의 두 청년을 향해 인준이 냅다 달려갔다. 몸을 치솟으면서 팔꿈치로 청바지 청년의 경부(頸部) 대동맥을 갈겨 버렸다. 청바지 청년도 곧바로 실신하여 나뒹굴었다. 막 덤벼드는 상아색 바지의 청년을 향해서는 무릎으로 아랫배를 내질렀다. 힘이 실린 상태로 급소를 가격한 터라 청년들은 무기력하게 나뒹굴었다. 잠시 의식을 잃었던 세 청년들이 일어나 재차 덤비려 했다. 인준은 길가에 버려진 길이 1m가량의 소나무 몽둥이를 움켜쥐었다. 소나무 몽둥이의 굵기는 성인의 팔뚝 크기만했다. 일단 몽둥이를 손에 들게 되자 냅다 기합을 내질렀다. 그리하여, 인준의 목소리를 듣고 미연이 다복솔 밑에서 나타난 거였다. 

  인준이 경위를 차근차근히 설명하자 그제야 미연이 고개를 끄떡인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오해할 뻔했어. 오늘 네가 아니었으면 난 죽었을지도 몰라.”

  미연의 얘기를 듣고 인준이 말한다.

  “당초에 수락선동 부근엔 인적이라곤 거의 없었잖아? 그래서 우리가 만날 장소로 정했던 건데 큰일 날 뻔했어. 다음부터는 미리 만난 다음에 함께 입산을 해야겠어.”

  인준이 배낭을 풀어 펼친다. 바나나와 사과를 비롯한 과일과 숱한 과자류들을 늘어놓는다. 미연은 생각할수록 거듭 가슴이 뛴다. 만약 아까 불량배들에게 붙잡혔더라면?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채 알몸으로 나뒹구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어쩌면 호젓한 곳이라 살해되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할수록 발작을 일으킬 만한 일이라 생각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미연은 인준을 향해 말한다.

  “준아, 오늘 내게 말해 준다는 대답은 잊지 않았지?”

  인준은 의외라는 듯 잠시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응답한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만났잖아? 내가 대답하기 이전에 알고 싶은 게 있어. 혼전의 성관계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 이유가 뭐야?”

  미연이 달뜬 음색으로 말한다.

  “흔히들 서로 사랑하면 몸을 서로 열잖아? 다른 특별한 뜻은 없어. 다만 네 뜻이 어떠한지  궁금했어. 대답하기 거북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

  인준이 온화한 표정으로 대답 대신 미연을 껴안는다. 인준에게 안기면서 미연은 생각에 잠긴다. 바텐더에게는 몸을 주었으면서도 인준에겐 몸을 주지 않은 상태다. 자신의 삶의 패턴이 왜 그랬던가를 반추해 본다. 지금이라도 인준이 원하면 몸을 열어 주리라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는 인준의 상반신으로 몸을 밀착시키며 안긴다. 인준의 후각으로 미연의 향긋한 살 냄새가 밀려든다. 인준에게도 문득 육정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는 스스로를 다스린다.

  ‘평생의 연인인 배우자가 될 미연이잖아? 아무 데서나 발가벗길 수는 없지.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 기다려 멋진 출발을 하고 싶어.’

  미연이 젖무덤을 인준의 가슴에 밀착시키면서 가쁜 숨결을 토해 낸다. 그랬어도 인준의 표정엔 미소만 흐른다. 하도 미연이 열기를 내뿜자 인준의 호흡도 가빠진다. 미연이 슬쩍 인준의 손을 끌어 그녀의 블라우스 안으로 들이민다. 마침내 인준도 달뜬 숨결을 토하며 미연을 알몸으로 만들어 간다. 미연이 결정적인 시기를 기다릴 무렵이다. 꿈결처럼 인준의 목소리가 밀려든다.

  “연아, 너를 아무 데서나 갖고 싶지는 않아. 마지막 접촉만큼은 결혼식 날에 하는 게 좋겠어. 우리의 긴 여정에 깊은 의미를 심고 싶어. 괜찮겠어?”

  미연은 왈칵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다. 이처럼 배려심이 큰 인준이 아닌가? 이태원에서의 객기가 이처럼 부끄러움이 될 줄이야? 미연은 인준의 목을 껴안으며 말한다.

  “진심으로 널 사랑해. 나를 그처럼 아껴 주어서 너무 고마워. 언제나 오늘의 네 마음 잊지 않을게.”

  미연은 마음속으로 인준에게 무릎을 꿇으며 다짐한다. 평생 인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고결한 아내가 되겠다고. 동굴 밖에서는 솔바람이 ‘쏴아쏴아’ 청량한 소리를 내며 하염없이 밀려든다. 미연과 인준의 눈빛이 허공에서 만나 재차 서로의 동공으로 파고든다. 미래를 향한 청춘 남녀의 청정한 숨결만이 동굴에 남실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