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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연의 물줄기

                                                                                                                                                 손정모

  새벽의 고단한 잠결에서였다. 느닷없이 무수한 유리파편에 고막이 찢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휴대전화의 메시지 음향이 예리하게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침대에서 팔을 뻗어 휴대전화의 폴더를 열었다.

‘내일 오전 10시 무렵에 무량암(無量庵) 법당에서 선생님을 기다릴게요.’

   메시지를 남긴 주인공이 누군지를 알 수가 없었다. 전화번호마저 의도적으로 지운 듯했다. 하지만 절해고도를 향해 떠나는 나의 행로(行路)를 아는 사람이라고 판단되었다. 나는 미궁에 빠진 듯한 느낌으로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전화번호의 단서는 없더라도 어차피 나는 무량암으로 갈 처지였다. 휩쓸리는 수마로 인해 나는 이내 잠들고 말았다.

  통영시 충무항(忠武港)을 벗어난 배가 남동쪽으로 두 시간째 달리고 있다. 줄곧 무인도였다가 근래에 세워진 사찰(寺刹)로 명성이 알려진 곳. 신불도(神佛島). 이제 절해고도(絶海孤島)가 지척의 거리에서 여행객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갑판 위를 둘러본다. 스물세 명의 여행객들이 하선(下船)할 준비를 하고 있다.

  뱃머리 갑판 부분의 말뚝에는 긴 밧줄이 돌돌 감겨 있다. 밧줄의 틈새마다 하얀 물방울이 매달려 떨고 있다. 물방울을 바라보는 순간이다. 잠긴 기억의 사슬이 풀리며 서울 왕십리의 모텔의 정경이 떠오른다.

  고함을 질러대고 싶어도 소리조차 못 낼 상황이었다. 털북숭이의 40대 중반의 탄탄한 몸매의 사내 때문이었다. 욕실에서 막 나오던 때였다. 사내한테 입이 틀어막혀 손바닥으로 마구 두드려 맞았다. 거의 실신할 지경까지 이르자 사내가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일체 교성(嬌聲)을 질러서는 안 된다고. 수긍의 뜻으로 내가 고개를 끄떡일 때였다. 일시에 아랫배로 뜨뜻한 느낌이 치솟았다. 나의 오줌 줄기가 사타구니를 타고 흘러내렸다. 사내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가는 금세 활짝 펴졌다. 그러더니 사내가 나를 껴안으며 지껄였다.

“음, 너도 마침내 내게 길들여지게 되었군. 이제부터는 네 스스로가 맞고 싶어질 거야. 더 맞고 싶거든 내 몸을 핥아 봐.”

나는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사내가 미친 듯이 나를 때려 주기를 교성을 질러대며 원했다. 나는 사내의 치모가 무성한 사타구니를 핥아대기 시작했다.

  밧줄의 물방울이 사내가 내뿜었던 성기의 분비물과 흡사하다고 여겨진다. 그 날 밤 내가 얼마나 사내의 분비물을 핥아대었던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떨린다. 생각만으로도 벌써 사타구니가 저릿하며 흥분되기 시작한다. 성 충동을 참으려는 일환에서다. 나는 갑판의 가장자리에 설치된 난간에 사타구니를 은밀히 밀착시킨다. 그리고는 마음을 가라앉혀 하선할 섬을 바라본다. 승객들이 다 내린 뒤다. 배는 뱃고동 소리를 울리며 천천히 섬을 빠져 나간다. 그것도 잠시다. 이내 발동선은 시야에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섬의 선착장 부근에만 가게들이 몇 채 보인다. 그리고는 섬의 중앙에 있는 사찰이 건물들의 전부다. 20여 분을 걸은 뒤다. 사찰의 산문(山門) 앞에 닿는다. ‘신불산 무량암(神佛山無量庵)’이라 쓰인 편액이 장중한 느낌으로 다가선다. 편액에 쓰인 힘찬 서체를 바라볼 때다. 서체에서 위압감을 느끼자마자 의식은 과거의 물결에 휩쓸린다.

  중학생이 되기도 전에 교통사고로 부모를 동시에 잃었던 나다. 결혼한 언니 댁에 머물면서 가까스로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이었다. 대학 진학을 결심할 무렵에는 유난히 형부와 언니의 불화가 잦았다. 그래도 나는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사학의 명문이라는 서울의 여대에 지원하여 합격했다. 합격의 기쁨에 들떠 감격하던 날 밤이었다. 응접실에서는 식탁 위의 밥그릇과 쟁반들이 형부에 의해 박살이 나고 있었다. 그릇이 박살날 때마다 언니의 절규하는 목소리가 실내를 뒤흔들었다. 그 날 밤이었다. 나는 깊이 생각을 한 뒤에 짐을 꾸렸다. 언니에게 쪽지 한 장을 남기고는 이튿날 새벽에 집을 떠났다.

  막상 집을 떠났지만 생계 해결이 막막했다. 며칠간을 굶다시피 하며 시간을 허비한 뒤였다. 그러다가 중앙의 일간지를 구입하게 되었다. 생활정보란에 눈길이 미칠 때였다. 거기에 눈에 동하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멋진 만남, 당일 주선. 미모가 빼어난 여성 회원 모집.’

  광고주의 연락처는 핸드폰으로 되어 있었다. 전화를 해 보니 50대 초반의 아주머니였다. 면담이 필요하다고 하여 목욕을 한 뒤에 만나보았다. 서울역 앞의 카페에서였다. 몇 마디 말을 나눈 뒤였다. 아주머니가 이끄는 대로 따라간 곳은 노래 주점이었다. 노래 주점에 이르자마자 아주머니가 턱짓으로 남자 종업원을 불렀다. 알고 보니 아주머니는 주점의 여주인이며 포주(抱主)였다. 20대 중반의 청년이 다짜고짜 나를 밀실로 끌고 들어갔다. 그러더니 곧바로 주먹으로 내 젖가슴을 쥐어박았다. 숨이 멎는 듯한 느낌에 잠시 버둥거릴 때였다. 날렵한 손놀림으로 청년은 어느새 나를 알몸으로 만들어 놓았다. 청년이 나의 젖가슴을 슬슬 어루만지자 아랫도리가 저릿하며 분비물이 흘러내렸다. 그 때부터였다. 나는 적응에 익숙한 인간형으로 탈바꿈했다. 무릎을 꿇으라면 무릎을 꿇었다. 사타구니를 벌리라면 사타구니를 활짝 벌렸다. 청년에게 이틀간 붙들려 길들여진 뒤였다. 나는 여주인이 내미는 일방적인 계약서에 무조건 날인을 했다. 나는 여주인을 위해 돈을 물어 나르는 신여성(新女性)으로 변신했다. 포주가 정해 준 모텔에서 손님을 받는 앳된 처녀들. 이런 처녀들을 세간에서는 신여성이라 불렀다. 신여성의 모든 이동 통로에는 감시하는 종업원의 눈길이 따라붙었다. 그래서 마음대로 도망갈 수가 없었다.

  산문(山門)의 입구에 선 채 한참 상념에 잠겨 있을 때다. 사찰로 갔던 손님들의 일부가 벌써 해변으로 몰려나오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어정거릴 기분이 안 되어 산문에 들어선다. 다시 십여 분이 지난 뒤다. 나는 경내에 들어선다. 법당의 불상이 먼발치에서 바라보이는 위치다. 석탑 옆에 서 있던 동자승이 살짝 미소를 짓는다. 7∼8세가량의 소년이다. 시원스런 눈매와 맑은 얼굴이 청순한 인상을 안겨 준다. 나는 말없이 동자승의 눈을 들여다본다. 동자승 역시 나를 향해 마주 바라본다. 눈빛이 타인들에게 전혀 눌리지 않는 당당한 기색이다. 나는 조심스레 동자승에게로 다가선다. 동자승도 활짝 웃으며 나를 올려다본다.

  맑게 부서진 얼음 조각을 대하는 느낌의 소년의 미소. 승복이 너무나 몸에 어울리는 소년. 전생의 어느 굽이에서 떠돌다가 현생으로 나온 삶일까? 소년을 눈앞에 둔 채 소년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소년을 손짓으로 불러 그에게 묻는다.

“얘야, 너는 원래 중이니? 아니면 마을에서 올라와 잠시 승복을 입은 거니?”

소년이 활짝 웃으며 응답한다.

“오늘도 비슷한 질문을 더러 받았어요. 저는 통영시의 K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에요. 절에 생활 체험 교육 프로그램이 있거든요. 그래서 주말의 이틀간만 여기에서 머물기로 엄마한테 허락받았어요. 승복은 사찰 거예요.”

나는 무심결에 소년을 향해 묻는다.

“생활 체험을 한다고? 지금까지 얼마나 체험했니?”

소년은 갑자기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응답한다.

“별로 체험하지 못했어요. 이 절에는 고작 이틀째거든요.”

  내게는 소년의 시원스런 눈매가 어쩐지 낯이 익은 듯하다. 제법 오랜 기간을 함께 지낸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리하여 소년을 향해 들릴 듯 말 듯 속삭인다.

“나랑 반시간만 함께 있어 주겠니? 난 네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래.”

소년이 시원스런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응답한다.

“좋아요. 저도 누나가 참 마음에 들어요. 부탁할 일이 있으면 제게 말해요. 뭐든 시키는 대로 할게요.”

  사내들 여섯 명을 받아들여 몸이 부대끼던 날이었다. 포주에게 벌어들인 금액을 내민 뒤에 욕실로 들어섰다. 전신을 씻어도 몸에 달라붙은 사내들의 분비물의 냄새는 지워지지 않았다. 사방에서 분비물의 냄새가 풀풀 날리는 듯했다. 소음순(小陰脣)에는 찰과상마저 생겨 따갑기 그지없었다. 20만 원씩의 금액을 내게 넘겨주었다고 하여 기고만장하게 날뛰던 사내들. 그렇게 돈을 받아들이면 무엇하랴? 다들 포주의 손아귀로 흔적 없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한껏 나른한 신색으로 욕실에서 나온 뒤였다. 포주의 귀공자(貴公子)가 나를 불렀다. 포주의 유일한 자식인 사내 아들을 말함이다. 심드렁한 낯빛으로 그를 만나러 별실로 들어섰다. 귀공자가 주점에 뜨는 날은 포주가 자리를 비울 때에 한해서였다. 귀공자는 대학을 나온, 30대 중반의 자영업체의 사장이었다. 결혼도 하여 사내자식을 둔 가장이기도 했다. 그가 대뜸 내게 손가락질로 옷을 벗으라는 시늉을 했다. 거역할 수 없는 절대 명령이었다.

  상경한 지 2주일이 못 된 시점에 겪은 나의 상황이었다. 아직 대학 등록금 납입 시점이 1주일이 남겨진 시점이었다.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귀공자에게 대학을 다니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의외로 귀공자는 흔쾌히 대답했다. 포주에게 말하여 나를 그의 회사로 데려가겠다고 밝혔다. 농담이겠거니 여겼는데도 그 이튿날 나는 귀공자의 회사로 넘겨졌다. 나의 근무 부서는 비서실이었다. 비서실에는 이미 두 명의 앳된 처녀들이 귀공자에게 알랑대고 있었다. 놀랍게도 귀공자는 내게 대학 등록금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부터였다. 나는 더 이상 거리의 여인이 되지는 않았다. 나는 귀공자의 애첩 역할만 하라고 명령을 받았다. 알고 보니 비서실의 세 처녀들은 모두 귀공자의 애첩들이었다. 세 명의 애첩들은 죄다 대학에 적을 둔 학생들이었다. 어쨌든 세월이 흘러 나도 귀공자의 덕으로 대학을 마쳤다.

  대학을 졸업하던 날이었다. 귀공자는 비서실로 나를 불러 말했다.

“진작부터 부모의 악업에서 벗어나려고 했어도 잘 안 돼. 속죄하는 뜻으로 애첩들한테는 잘해 주고 싶었어. 절대로 여기에서 있었던 일은 무조건 비밀로 붙여 줘. 지금부터는 절대로 나를 찾아서도 안 돼. 여기 얼마 되지는 않지만 이걸 갖고 뭐든지 해 봐.”

  귀공자가 내밀고 간 봉투에는 3천만 원짜리의 수표가 들어 있었다. 퇴직금의 금액을 확인하는 순간에 나는 현실감을 잃고 말았다. 나는 그 길로 포주의 그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5년간을 형부네 가족과는 단절된 생활을 하게 된 나였다. 막상 포주의 그물을 벗어났어도 갈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사방으로 이력서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약학대학 제약학과. 이게 내가 여대에서 취득한 학력이다. 제약 업체에는 거의 빠뜨리지 않고 서류를 내밀었다. 하지만 여자 사원을 뽑는 곳은 드물었다. 아무래도 회사로의 취직은 어렵기만 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공무원 임용고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경쟁률이 만만치 않아 시작도 하기 전에 기가 꺾일 지경이었다. 그래도 용기를 내었다. 신설동의 고시 학원에 등록하여 열심히 1년간을 공부했다. 두 차례나 시험을 쳤어도 번번이 낙방이었다. 세 번째 도전하여 실패하던 날이었다. 나는 극도로 좌절하여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좌절이 극한점에 달했을 때다. 묘하게도 귀공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귀공자의 비서실에서 일할 때였다. 어느 날 귀공자가 몹시 술에 취해서 괴로워하던 정경이 떠올랐다. 사무실의 집기물의 거의 절반을 부순 채 울부짖으며 괴로워하던 귀공자였다.

“부모가 나한테 도와 준 게 뭐야? 왜 반성하지도 않고 악업을 되풀이하느냐구? 꼭 누구한테 칼침을 맞아야만 그만둘 거냐구? 내 마음이 망가진 건 죄다 부모 탓이야. 그래도 꼴에 부모라고! 나를 정신병자 같은 신세로 만들어 놓고도 후회할 줄 모르다니! 내 가슴에 광기가 치밀면 죄다 뒈지는 줄 알아라구.”

  한동안 광기를 부리다가 나중에는 나를 비롯한 비서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꼭 대학을 마치게 해 줄게. 너희들한테만은 속죄하는 의미로 잘해 주고 싶다. 너희들에 대한 나의 최선의 배려임을 알아 줘.”

  세월이 흘러도 귀공자의 실체는 악인인지 광인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내게 남겨진 길은 노래방이나 단란주점의 도우미 정도밖에는 없었다. 그나마도 내 나이가 한 살이라도 젊을 때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여자 나이가 마흔을 넘어서면 찾는 사람들이 없다는 거였다. 27살의 처녀인 내가 선택할 길이 고작 도우미밖엔 없단 말인가? 도우미의 길을 선택하기에 앞서서 내게는 생각의 기간이 필요했다. 그런 차에 관광 여행사의 기획 여행 프로그램을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무조건 여행에 합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랬지만 낯선 여행 프로그램에 합류하려니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그래서 줄곧 번민하다가 결국은 홀로 여행길에 나서게 되었다.

쨍그랑 쨍그랑!

  법당의 추녀에 매달린 풍경이 해풍을 맞아 청량한 음향을 흩날린다. 맑은 음향을 듣는 순간 전신에 개운함을 느낀다. 소년이 방긋 미소를 지으며 나의 손을 이끈다.

“누나, 일단은 법당에 들렀다가 가시죠. 절에 왔으면 당연히 부처님을 뵙는 게 도리라고 들었어요.”

  나는 갑자기 부끄러워져 숨결이 가빠진다. 어쩌면 소년보다도 생각이 못 미쳤을까? 일순 마음을 가라앉힌 뒤다. 소년을 향해 입을 연다.

“나도 너랑 얘기한 뒤에 예불을 올릴 생각이었어.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금방 갔다가 올게.”

  법당 안에는 이미 향불이 피워져 있고 향내가 자욱하다. 나는 시주함으로 가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넣는다. 법당을 잘 관리하는 데 쓰라는 의미다. 배례용 방석을 찾아서는 그 위에 선다. 불상(佛像)으로 상징된 내 마음을 향해 세 차례의 경배를 올린다.

  절을 마치고 일어서려고 할 때다. 나는 문득 오늘 새벽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시계를 들여다본다. 오전 9시 50분이다. 아직 약속 시간인 10시가 못 된 시점이다. 법당에서 나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조심스레 기다려 본다. 법당에서 10시 30분까지 기다렸으나 나를 찾는 사람은 없다. 기다리다가 지쳐서 법당의 문턱을 막 내려설 때다. 소년이 신발을 내게 내민다. 어떻게 내 신발인 줄 알았는지 기특한 생각이 든다. 내가 입을 열려 할 때다. 소년이 내게 말한다.

“아까 누나와 대화하면서 누나의 신발을 봐 두었죠. 스님께 물어 보았더니 지금부터 세 시간까지는 자유 시간이라고 했어요. 누나랑 최대한 세 시간까지는 함께 지낼 수 있어요.”

  법당을 벗어나 절 마당에 이르자 어디로 가야 할지 난감해진다. 이것을 눈치챈 듯 소년이 내게 말한다.

“강원(講院)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무성한 솔숲이 나와요. 솔숲은 너무나 울창해서 낮에도 무서울 정도예요. 누나랑 함께 가면 무섭지 않을 것 같아요.”

  창졸간에 내가 중얼댄다.

‘무성한 솔숲이 있다고?’

  느닷없이 솔향기를 맡고 싶다. 소년을 향해 흔쾌히 웃으며 강원을 돌아나간다. 강원을 끝까지 돌아나가자 눈앞에 짙푸른 솔숲이 바다처럼 펼쳐진다. 솔숲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다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가슴이 탁 틔는 느낌이 들어 양 팔을 번쩍 들어올린다. 소년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솔숲에 경탄하는 내가 색다르게 보인 모양이다.

  소년과 내가 나란히 솔숲을 향해 걸어 나간다. ‘쏴아쏴아’하는 음향을 토해 내며 솔바람이 솔숲을 넘나들고 있다. 바람에 휩쓸리는 솔가지마다 햇살의 반사로 은백색의 섬광을 내뿜으며 요동친다. 출렁대는 솔숲을 들여다보느라고 세상을 잊을 정도다. 너무나 물결치는 모습이 장관이어서 가슴이 먹먹할 지경이다. 멀리까지 솔향기가 밀려들어 온다.

  솔숲은 500m가량 이어져 있다. 솔숲을 관통하면 섬 북동쪽의 해안(海岸)으로 연결된다. 해안은 돌출한 바위가 많은 절벽으로 된 언덕이다. 해안에서 해변으로 내려서기가 힘든 지형이다. 해수면으로부터 70m가량의 높이로 치솟은 언덕이 해안이다. 해안으로 이어지는 곳곳마다 바위 터널이 보인다. 숨바꼭질하듯 겨우 몸을 들이밀어야만 빠져 나갈 수 있는 곳들이다. 문득 주머니에서 전자음이 크게 울린다. 휴대전화에서 들리는 소리다. 진열창을 들여다보니 메시지가 수신되었다. 오후 2시까지는 선착장으로 나와야 한다는 선장의 메시지다. 휴대전화의 전지는 아직도 충만한 상태다. 마침 사찰의 전화번호도 알고 있기에 크게 걱정되지는 않는다. 돌발 상황이 생겨도 연락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점차 해안으로 다가갈수록 청량한 바람이 불어든다. 마치 동화의 세계를 걷는 느낌마저 드는 장소다. 어떻게 이런 곳이 늦게까지 무인도로 존재했는지 의아스러울 지경이다.

  간발의 점수 차이로 시험에서 낙방할 때의 아픔이란? 되돌려 생각하기조차 싫은 뼈아픈 기억이 아닐 수 없다. 무려 세 번씩이나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니! 실패의 경험이란 가슴에 비수를 꽂는 형세다. 실패의 빈도가 거듭될수록 점차 자신감은 상실되기 마련이다. 합격자들은 얼마나 노력했기에 그 어려운 난관을 통과해 나갈까? 올려다보면 올려다볼수록 높아만 보이는 시험의 아성(牙城)이다. 내게 이토록 패배감을 가져다주는 현실이 슬프게 여겨진다. 헤쳐 나갈 길은 없어 보이고 자신감은 감소하여 울부짖고 싶어진다.

  산다는 게 왜 이다지도 고달플까 생각된다. 왜 남들처럼 때가 되어 취직도 못하고 시집도 못 갈까? 노력 부족이라고? 그래, 그 말도 맞겠지. 합격자들이 기울인 노력에 비해서는 어딘가에서 명백하게 모자랐을 거라고 여겨진다. 모자람의 크기가 얼마 정도인지 알지 못하여 안타깝다. 그렇다 치더라도 억울한 느낌이 드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여섯 번째의 바위 터널을 지나자 마침내 해안에 닿는다. 청정한 바다의 물빛이 시야 가득히 밀려든다. 70여m 높이로 치솟은 해안 절벽이 장벽처럼 펼쳐진 곳이다. 바닷물이 연신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해안 절벽으로 달려든다. 그랬다가는 무수한 물거품이 되어 허공으로 흩날려 떨어진다. 연녹색에서 감청색에 이르도록 다양한 빛깔로 물결치는 바다. 바다의 수면을 굽어보며 한동안 목이 메어 침묵한다. 이런 나의 모습을 소년이 잠자코 지켜본 모양이다.

  어느 때부터였을까? 내겐 소년이 위대한 스승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마치 나를 깨우치기 위해 전생의 누군가가 파견한 스승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시종 일관 미소를 띠는 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뿐이랴? 뒷짐을 지고 말하는 의젓한 자세도 소년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년이 한껏 바다를 굽어본 뒤에 천천히 입을 연다.

“바다는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왜 푸를까요? 시냇물이나 강물은 금세 황톳물이 되어 흘러내리잖아요? 바다를 지켜보면서 살았어도 아직 이유를 모르겠어요. 아신다면 제게 좀 알려 줄래요?”

  스승이 제자의 능력을 시험하는 관문 같아 숨이 턱 막힌다. 하지만 그다지 어렵지 않은 질문이라 자신 있게 들려준다.

“흙탕물을 걸러내는 시내와 강이 있기 때문이지. 육지의 물이 곧바로 바다로 흘러내리면 바다도 황톳물이 될 거야. 걸러내는 과정은 그만큼 청정한 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하게 돼.”

  문득 대답을 해 놓고는 나도 모르게 진저리가 쳐진다. 정말 내가 대답한 말이 맞나 싶어 의아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대자연의 영령(英靈)이 내게 대답을 대신 알려준 듯한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이내 소년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내 나약함을 여과시킬 시내와 강은 없는가? 자신의 실력에 대한 불신감을 걸러낼 시내나 강은 없는가? 남들에게 다 있는 시내나 강이 나한테만 없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예전에 깨닫지 못했던 힘의 근원을 되살린다. 실력이 없었다면 약학대학의 제약학과에 합격했겠는가? 그것도 한국 굴지의 대학에 말이다. 서서히 자신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힘의 근원을 깨닫는다. 소용돌이치는 힘. 왜 예전에는 이런 근원에 신경을 쓰지 못했는가? 서서히 전신으로 자신감이 치솟는다. 안 되면 될 때까지 도전하겠다는 의욕이 치솟는다. 더구나 근래에 응시 연령의 제한마저 철폐되지 않았는가? 생각할수록 전생의 어떤 인연이 내게 강하게 작용한 듯한 느낌이다. 강렬한 힘의 근원을 느낀 순간이다. 나는 바다를 향해 냅다 고함을 내지른다.

“이야앗! 이야아앗!”

  소년은 여전히 뒷짐을 진 자세로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말한다.

“왜 바다한테 고함을 지르세요? 바다에 누가 보여요? 고함을 지르니 누가 대답을 해요?”

  나는 다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연약한 소년이 갑자기 두려워질 정도다. 치솟는 기운을 함부로 방출해서는 안 된다는 깨우침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마침내 깨달음의 세계에 빠져 황홀함에 젖어든다. 결코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이다. 깨달음이 이처럼 커다란 황홀한 느낌을 안겨 주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나는 극도의 황홀경에 빠져 소년을 향해 무릎을 꿇는다. 소년이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내게 달려오며 묻는다.

“누나, 어디 아프세요? 어디가 결리세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흔들며 소년을 향해 절을 한다. 소년은 자신의 뒤를 돌아다보며 다른 사람이 있는지를 살핀다. 아무리 봐도 다른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소년에게는 내가 좀 이상한 여자라고 여겨진 모양이다.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되자 내가 갑자기 무서워지는 모양이다. 서서히 내게서 거리를 두려 하고 있다.

  나는 급히 자세를 가다듬는다. 내가 즐겁다고 하여 소년을 불안하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나는 소년에게 좀 전의 상황을 슬쩍 돌려서 설명해 준다. 바다의 공기가 몹시 상쾌했기에 바다를 향해 절했다고 들려준다. 소년은 눈을 잠시 깜빡이더니 이해가 간다는 듯이 활짝 웃는다. 그러더니 소년도 이내 바다를 향해 절한다. 절을 하고 나서 소년이 슬쩍 말을 덧붙인다.

“절에 돌아가면 스님한테도 절을 한 차례씩 더 하라고 해야겠어요.”

  언제나 고마운 바다의 공기를 쐬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년의 생각이 기특하여 나도 모르게 소년을 들어 올려 안는다. 내 품에 안긴 소년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소년의 해맑은 웃음이 내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문득 신화 속의 영상이 머릿속으로 흘러든다. 뽀얀 안개 성벽 위로 치솟은 구름 누각의 규방. 선녀의 목소리에 따라 창가에 매달린 수정 주렴이 간들거린다. 시리도록 투명한 수정 구슬로 이루어진 수정 주렴. 수양버들처럼 바람을 타며 요염하게 교태를 부리는 수정 주렴. 숱하게 매달린 수정 구슬마다 발산되는 빛살이 소년의 미소만큼이나 청정할까?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아 머리를 갸웃거릴 때다. 섬의 산등성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청량한 솔바람이 머리카락에 부서진다. 그러자 잠시 머릿속에서 일렁대던 환상의 누각이 일시에 스러진다. 내 눈으로 소년의 환한 미소가 재차 휘감겨 들어온다.

‘어쩜 웃음이 호수의 물결처럼 청정할까?’

  소년한테서 얻은 깨우침으로 인해 소년을 즐겁게 해 주고 싶다. 내가 소년을 업어 주겠다고 하자 소년이 흔쾌히 응한다. 그러면서 내게 속삭이듯 말한다.

“언제든지 힘들면 살짝 내려주세요. 남에게 업히기는 처음이지만 누나한테는 왠지 업히고 싶어요.”

  나는 소년을 업은 채 조용히 해안을 따라 거닌다. 발 아래로는 파랗게 굽이치는 바다. 머리 위로는 탁 틘 하늘.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상쾌한 기류가 피부에 휘감겨 남실댄다. 소년의 팔이 나의 목을 감고 있다. 나의 등에 상체를 바싹 밀착시킨 상태로 편안히 업혀 있다. 어느 별에서 온 영혼인지 한없이 감싸 안아주고픈 소년이다. 나 자신도 모르게 소년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툭툭 친다. 소년이 까르르 웃으며 나를 향해 말한다.

“누나가 그렇게 저를 대하니 제가 정말 어린애가 된 기분이에요. 누가 저를 보고 사찰 체험하는 학생인 줄 알겠어요? 하지만 누나가 참으로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뭔가 다른 사람들과는 분위기부터 달라 보여요.”

  나는 가슴이 뜨끔해진다.

‘분위기부터 달라 보이는 여자라고? 내가 풍기는 분위기가 어떤 것일까?’

  내가 상념에 잠겨 거닐 때다. 소년이 코를 고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늦은 식사로 식곤증(食困症)에 휘몰려 잠이 쏟아진 탓이라 여겨진다. 나는 말없이 소년을 업고는 사찰로 발길을 옮긴다.

  그렇게 몇 걸음을 걸어갈 때다. 문득 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형부와 다퉈 가면서도 나를 지원해 주려던 언니가 아니었던가? 형부가 마음에 안 들어서 언니마저도 내팽개치고 떠나온 자신이 아닌가? 소년의 미소 같으면 뭐든 수용하리라 여겨진다. 소년도 그럴진대 내게도 주변을 포용할 힘이 있으리라 여겨진다. 그래서 잠든 소년을 잔디 위에 가만히 내려놓은 뒤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언니에게 신호를 보낸다. 두어 번 신호음이 떨어지자마자 언니의 목소리가 귓전으로 흘러든다. 너무나 반가워서 울컥 목이 메는 느낌이다. 언니도 울음을 터뜨리며 전화를 받는다. 한동안 격앙된 감정을 추스른 뒤다. 차분히 지난 세월에 대한 경과를 언니에게 들려준다. 언니는 통곡을 하며 정말 미안하다고 연거푸 사과를 한다. 나는 언니를 향해 말한다.

“대학은 졸업했지만 아직 내가 안정된 자리를 잡지 못했거든요. 언젠가 자리가 잡히면 그 때에 형부와 언니를 만나러 갈게요. 너무 걱정 마시고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 주시면 고맙겠네요. 안녕히 계세요.”

  통화를 마치기 직전이다. 언니는 다급한 목소리로 현재의 내 위치가 어디냐고 묻는다. 나는 미소로 흘려보내고는 천천히 폴더를 접는다. 그런 뒤에 나는 다시 소년을 조심스레 등에 업는다. 그리고는 사찰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수시로 가슴을 억죄던 것이 언니와의 통화였다. 언제쯤에나 마음을 열고 통화를 할까 줄곧 망설여 왔다. 무거운 짐을 내린 느낌에 전신이 개운해지는 듯하다.

  경내에 들어서서 주지승을 만나 소년을 인계한다. 주지승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으며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되풀이한다.

  이제 내 마음속에는 노선이 결정된 상태다. 합격될 때까지 공무원 임용고사에 응할 생각이다. 절대로 마음을 약하게 먹지 말고 끝까지 노력하리라 작정한다. 이미 주지승에게 작별 인사도 끝냈다. 소년이 잠든 상태였기에 소년과는 작별 인사를 나누지 못하여 서운하다. 아쉬운 듯 경내를 몇 바퀴 순회할 때다. 휴대전화가 크게 울어댄다. 귀에 갖다 대니 20대 초반의 청년의 목소리가 흘러든다.

“최 선생님, 상호예요. 한 때 선생님한테 잠시 과외 지도를 받은 적이 있잖아요? 제가 오늘 새벽에 선생님께 메시지를 보냈어요. 당초에는 제가 법당에서 조카인 인수를 소개시켜 줄 작정이었거든요. 그런데 어떤 영감이 밀려들었어요. 굳이 제 소개가 없더라도 인수와 선생님은 만날 거라고 말이에요. 인수를 통해 선생님을 만난 사실을 확인했어요. 선생님의 번민이 많이 해소되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인수는 저희 문중에서도 성인(聖人)이 되리라 인정하는 소년이에요. 부디 오늘의 여행에서 많은 수확을 얻었으면 해요. 안녕히 계세요.”

  귀공자의 비서실에서 일하며 대학에 다닐 때였다. 귀공자의 부탁으로 성적이 빼어난 아이들 을 학원에서 지도한 적이 있다. 그 때 두각을 드러내어 명문대에 진학한 학생이 상호였다. 인연이란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상호가 신경을 쓴 것도 결국은 귀공자의 배려라 여겨진다. 귀공자가 비서들한테 대학을 졸업시키고 퇴직금까지 챙겨 주었던 일. 그 일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놀라운 일이었다. 이윽고 나는 마음을 정리한 뒤에 산문을 벗어난다. 정말 신불도를 잘 찾은 느낌이 든다. 나는 시간에 맞춰서 선착장으로 내려선다.

  산문을 나선 지 두 시간이 지나서다. 그 때서야 통영으로 나가는 배가 들어온다. 가뿐한 마음으로 통영을 향하는 뱃전에 올라섰을 때다. 나는 잠시 놀라 선착장을 내려다본다. 어느새 소년과 주지승이 배웅을 나와 손을 흔든다. 소년과 주지승의 미소가 단풍잎에 휘감기는 햇살처럼 따사롭게 느껴진다. 나도 팔을 크게 들어 힘껏 휘저어 답례를 한다. 오후 4시 무렵의 햇살이 따스하게 피부로 날아와 박힌다. 소년의 청정무구한 진심이 내 마음에 파고들어 파동을 일으킨다. 나 자신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거려지며 눈시울에 눈물이 맺힌다. 나는 시야를 벗어난 섬의 소년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숙인다. 배는 한창 엔진 소리를 드높이며 바다를 질주한다.

  배가 점차 한산도 부근으로 내닫는다. 청정 해역인 통영의 바다가 살아서 꿈틀대는 곳이다. 저녁의 시간이 가까워오자 석양의 햇살이 수면으로 흩날린다. 핏빛의 햇살이 물결에 스며들어 수천수만의 물고기가 되어 파드득거리는 듯하다. 수면을 바라볼수록 가슴이 먹먹해지도록 진한 감동이 피어오르는 듯하다.

  내 마음속에는 임용고사 준비에 대한 두려움이 잔뜩 서려 있다. 어떻게 하면 이들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될지 그게 남겨진 과제다. 다만 소년이 깨우쳐 준 대로 열심히 노력할 작정이다.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의젓하게 행동하던 소년. 소년과의 만남이 이처럼 삶에 활력을 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소년이란 거울을 통해 내 마음의 동력을 찾아낸 게 소득이다. 마침내 충무항으로 배가 도착할 시점이다. 배가 도착할 시점에 맞춰 뱃고동이 크게 울어댄다. 통통거리는 발동선의 엔진 소리가 더욱 커지는 시점이기도 하다.

  마침내 배가 항구에 도착하자 승객들이 부산하게 하선한다. 나는 굳이 서둘 필요가 없겠기에 천천히 배에서 내려선다. 배에서 내린 승객들 중에서는 내가 제일 마지막 손님이다. 어디로 향할까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이다. 느닷없이 낯익은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든다. 나는 즉시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다가 심장이 멎는 듯 놀란다.

  언니와 형부가 나란히 달려오며 내 이름을 불러댄다. 아까 통화할 때 분명히 나는 내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랬음에도 나를 찾아온 것은 위치 추적 서비스를 이용한 듯하다. 예정에 없던 만남이었지만 그만 콧잔등이 시큰거려지며 눈시울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어떻게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왔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언니에 앞서 형부가 내 손을 맞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사과한다.  

  "정말 면목이 없어. 알량한 금전 문제로 혈육 간의 정리(情理)마저 끊고 말았으니. 한 번만 나를 용서해 줄 수는 없겠니? 무릎을 꿇고라도 용서를 빌고 싶어.”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출 생각도 없이 입술을 질겅질겅 깨문다. 내가 겪었던 처절한 시련이 어찌 한두 마디의 말로서 용서되랴? 당장은 가슴에 쌓인 울분으로 인하여 형부로부터 손을 거두며 돌아선다. 고개를 돌리니 언니가 내 손을 붙잡으며 흐느껴 운다. 어떤 치례상의 말보다도 진심이 드러나 보이는 정감의 전달이었다. 누가 뭐래도 언니와 나는 자매간이다. 혈육만큼 강한 구심력이 있겠는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언니만큼은 용서해 주고 싶은 나다. 형부와 싸워 가며 나를 도우려 애쓰던 언니였기 때문이다. 나는 언니의 등을 두드리며 가볍게 용서의 말을 들려준다.

“언니의 마음만큼은 내가 왜 모르겠어? 언니는 미워하지 않으니까 염려하지 마.”

  나는 고개를 돌려 형부에게로 다가선다. 내가 점점 다가서는 데에도 형부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른다.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항구의 수평선을 바라본다. 마침 서쪽 하늘에는 석양의 노을이 잔뜩 들끓고 있다. 온 하늘을 불 지르듯 보라색과 선홍색의 노을이 잔뜩 피어오른다. 그 처연한 색조를 올려다볼 때다. 처연한 색조가 눈물을 흘리는 언니의 얼굴에 깔린 슬픔처럼 느껴진다. 어쨌든 형부는 언니가 사랑하는 배우자임에 틀림없다.

  창졸간에 언뜻 소년의 미소가 떠오른다. 이 세상의 어떤 고뇌마저도 따사롭게 녹일 듯한 청정함. 아무래도 대자연의 영령이 소년을 통해 내게 깨우친 느낌이 든다. 내가 신불도를 찾은 일이라거나 무량암을 찾았던 일. 그 어느 것도 예사롭지 않은 인연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대자연이 소년을 보내 나를 깨우쳤다면? 나 역시 소년의 미소를 지을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청정무구하여 모든 악(惡)을 씻어 버릴 듯한 소년의 미소.

  나는 거듭 무량암의 소년의 미소를 되새긴다. 시선을 편안히 한 채 형부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런 자세로 형부와는 한 걸음의 거리까지 가까이 다가간다. 형부의 눈빛이 흔들리다 못해 당혹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다. 한 걸음 간격의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형부의 눈매를 들여다본다. 젊었던 눈매에도 주름이 실려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듯하다. 마침내 형부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쳐 서로를 향할 때다. 형부의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을 스쳐 물방울이 비치기 시작한다. 가뜩이나 충혈된 안색도 숨김없이 드러난다. 이 때다. 누군가 내게 속삭여대는 듯한 환청이 귓전을 울린다.

“네가 잘한 일은 뭐였지? 뭘 잘했다고 그렇게까지 심사가 비틀려 있니?”

  갑작스레 전신으로 현기증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가만히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머리가 어지럽다. 혼란한 정신 상태로 번민에 휩싸여 있을 때다.

  형부가 재차 용서의 손을 내민다. 오랜만에 보는 형부의 정맥혈관이 팔뚝에 파랗게 가라앉아 있다. 넉넉지 못한 영세 자영업으로 가족을 부양하려고 애쓰던 팔이 아닌가? 친족만으로도 벅찰 처지에 처제의 대학 학비까지 신경을 쓸 처지였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그런 처지의 세월을 속으로 삭이며 지내온 형부의 팔이 아닌가? 파르스름한 형부의 정맥혈관에서 형부에 대한 연민의 정이 피어오른다. 처제에게 용서를 구하게 된 형부의 입장마저 고려해 본다. 가냘픈 자존심마저 바람결에 날리고 용서를 비는 중년 사내가 아닌가? 자존심마저 날려 버린 중년 사내가 나의 형부라니! 안쓰럽다는 느낌이 들면서부터 형부가 무척 가련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극심한 고뇌를 거듭하다가 가까스로 손을 내뻗어 형부의 손을 맞잡는다. 손이 맞닿는 순간이다. 서슬 퍼런 슬픔이 가슴으로부터 울컥 치솟는다. 연이어 콧등이 시큰거리며 눈시울 가득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형부의 눈에서도 시린 안개가 서리기 시작한다. 서로가 부들부들 몸을 떠는 찰나다.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둘은 서로를 얼싸안으며 오열한다. 둘을 바라보는 언니의 눈동자도 어느새 붉게 충혈되더니 눈시울이 젖어든다. 알싸한 슬픔이 석양의 세 사람에게 휩쓸려든다. 극한적인 전환기의 시기에 내내 가슴에 드리워졌던 독기. 시린 한(恨)이 용서의 물굽이에 융화되는 감회에 젖어 나는 진저리친다. 전신의 뼈가 가루가 되도록 몸을 떨어 불사조로 환생하고도 싶어진다.

  사람들이 다 빠져 나간 항구의 해변. 석양은 타오를 대로 타올라 물빛은 핏빛으로 굽이친다.

“용서해 드릴게요. 형부도 이전처럼 저를 받아주세요.”

  형부가 포옹했던 나를 풀어 주며 청량한 산울림처럼 속삭인다.

“다시는 신뢰를 잃지 않도록 노력할게. 다시 돌아와 주어서 고마워.”

  여태껏 가슴을 옥죄었던 반목(反目)의 얼음덩이가 시원스레 녹아내리는 듯하다. 충격으로 명치끝이 잠시 뻐근해지더니 이내 전신이 개운해진다. 깃털처럼 날아오를 듯 마음이 허허롭다.

  여태껏 자신감이라곤 없던, 무기력한 내가 아닌 듯하다. 아무리 험한 난관이라도 하늘 끝까지라도 도전하고 싶어진다. 사방에서 내 몸으로 활력이 흘러드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나는 출렁대는 바다를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쥔다. 정착지에 도착하면서부터는 전력을 기울여 새로운 도전에 임하겠다고. 내 마음을 알아차렸음일까? 해변에서 비상하는 갈매기의 날갯짓조차 바람을 가르며 한껏 청량하게 들린다.

<200자 원고지: 84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