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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죽도(風竹圖)

                                                                                                                                                 손정모

  차창 밖을 스쳐 가는 바람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명주천이 찢기는 듯한 예리한 음향이다. 퍼렇게 날이 선 음향의 분절마다 암울한 장면이 연상된다. 느닷없이 차의 바퀴가 튄다. 일순 몸이 일렁대며 균형이 무너진다. 브레이크 페달을 밟으며 잠시 전방을 살핀다. 교통이 다소 한산한 곳이라 차량의 행렬은 거의 안 보인다. 차창 밖을 더듬는 시선의 끝자락에 비상하는 까치의 날개가 잡힌다. 까치의 날개에는 강력한 힘이 실려 있다. 강력한 힘 말이다.

  친구랑 술잔을 나누다가 과음의 상태로 돌아온 지난밤의 잠결이었다. 핸드폰의 신호음이 새벽 공간을 뒤흔들었다. 눈도 뜨지 못한 채 폴더를 열었다. 나이 든 사내의 음산한 목소리가 밀려들었다. 아무리 기억해 내려고 해도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경태 씨 맞소? 꼭 만나야 할 일이 있소. 내일 저녁 7시에 쌍계사 계곡의 불일폭포(佛日瀑布)에서 만납시다. 풍죽도(風竹圖)에 관해 들려 줄 얘기가 있기 때문이오.”

  풍죽도란 말을 듣는 순간이었다. 찡하고 머리를 울려오는 게 있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전율감(戰慄感)이 체내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이었다. ‘찰칵’하는 음향을 남기며 교신이 끊겼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닌가 싶었다. 쇄진한 기력과 피로감 탓이었으리라. 곧바로 꿈의 나락으로 곤두박질하고 말았다.

  나는 하천에 서식하는 어종(魚種)의 분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요즘은 나날이 환경이 변하는 추세다. 하천에 인접한 축사(畜舍)라든지 음식점에서 배출되는 오염물에 의한 영향이 크다. 이전까지 문헌상으로 제시된 자료마저도 믿을 수 없는 현실이다. 그만큼 각종 수치가 현저히 달라졌다는 얘기다. 근래에는 섬진강의 수중 생물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여름 방학 기간을 활용한 연구 과정이다. 섬진강 가의 S초등학교 사택에 머문 지도 벌써 3주째다. 지도교수님의 제자라는 섬진강 가의 S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의 배려를 받았다. 사택의 방은 관리가 잘 되어 거울처럼 청결하다. S초등학교는 섬진강 서쪽의 매화마을과 섬진교의 중간지점인 신원리에 있다. 3주 동안 머물면서 자연스레 인근의 몇몇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기억에 날 만한 인상적인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런 상태에서 간밤에 받은 전화의 목소리는 확실히 생소했다.

  ‘풍죽도라? 어떻게 낯선 사내가 풍죽도에 대한 얘기를 내게 꺼냈을까?’

  어찌 생각하면 섬뜩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풍죽도에 관한 얘기를 하겠다니? 나는 고개를 돌려 뒷좌석을 둘러본다. 잠수 장비가 담긴 가방과 수중 촬영용 카메라가 눈에 띈다. 그 외에 필기도구와 휴대용 전자계산기가 든 가방도 보인다. 나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차를 몬다.

  내가 머무는 광양시 신원리의 S초등학교 사택 주변의 풍광은 수려하다. 인근의 섬진교를 건너면 하동에서 구례로 이어지는 19번 국도에 연결된다. 섬진강 주변에는 은어나 참게, 재첩 잡이의 명소들이 깔려 있다. 재첩은 수질이 깨끗한 모래톱에서 잘 잡히는 민물조개다. 다른 지역에서는 폐수로 인해 재첩의 양이 줄어드는 실정이다. 간 기능을 강화시키고 악성 빈혈에 효능이 좋은 재첩이다. 재첩에는 타우린, 메티오닌, 아르기닌 등의 아미노산이 풍부하다고 알려져 있다. 

  도사리에서 하류의 신원리까지 7km 구간의 강이 나의 작업 공간이다. 도사리는 섬진강의 서쪽에 있으며 신원리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도사리 동쪽인 흥룡초등학교 주변의 강가에 주차시킨다. 각 변의 길이가 2m에 달하는 정육면체의 그물틀도 꺼낸다. 그물틀은 조립식으로서 이동할 때에는 해체가 가능하다. 그물틀에는 양쪽으로 여닫는 장치가 달려 있다. 그래서 수중 생물들을 신속히 포획할 수가 있다. 그물틀은 수중 생물의 분포를 파악하는 데 강력한 장비이다. 이번에 특별히 관심을 갖는 대상은 민물 새우의 분포 상태이다. 강가에 이르러 잠수복에 수경을 착용한 차림새를 갖춘다. 수중 연구를 위해 전문적인 잠수 훈련까지 받은 상태다. 강 건너 마을을 바라보며 핸드폰을 꺼내 들 때다. 강의 서쪽에서 물그림자가 흔들리면서 다가서는 동력선이 보인다.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누르자 민수의 음성이 흘러든다. 민수는 광주광역시의 C대학에 재학 중인 대학원생이다. 나의 지도교수에 의해 공동 연구자로 위촉된 사내다. 민수는 나와 동갑인 25살의, 석사과정의 대학원 1학년생이다. 내가 재학 중인 진주 가좌동의 G대학과 광주 용봉동의 C대학. 두 국립대학은 자주 공동 연구를 잘 하는 편이다. 학문적인 성취를 위해서는 공동 연구가 꽤 효율적일 때가 많다. 공동 연구를 하는 사이에 민수와 나는 무척 친숙해졌다. 민수를 태운 동력선의 선주는 민수의 고향 마을의 주민이다. 연구 지원금 중의 일부를 대선료(貸船料)로 지불하고 있다.

  10톤짜리의 동력선이 금세 내게로 다가온다. 배가 채 다가서기도 전에 민수의 목소리가 먼저 날아든다. 오전 10시가 5분가량 남은 시점이다.

  “경태야, 오래 기다렸어? 잠수 준비가 벌써 다 되었네?”

  “아직 약속 시간이 5분 남았잖아? 우리는 시간을 아주 잘 지키는 편이지? 나도 좀 전에 도착했어.”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선주(船主)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호흡용 산소통은 2통이 배에 실려 있어요. 그 외에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요.”

  배가 강심(江心)으로 들어서자 민수도 잠수복으로 갈아입었다. 나와 민수는 산소통을 등에 짊어지고는 물속으로 뛰어든다. 물속의 투명도가 대단하다고 여겨진다. 수경(水鏡)을 통해 비치는 물속은 30여m 정도까지 깨끗하게 보인다. 물속의 부유물이 의외로 적다는 사실에 놀라운 느낌이 든다. 수면으로부터 2m 아래쪽을 훑어 나가면서 수중을 관찰한다. 대략 십여 분이 지나면서부터 새우 떼가 보이기 시작한다. 거뭇거뭇한 색채의 새우들의 모습이 무척 자유스러워 보인다. 왼손에 들린 수중 카메라로 물속의 정경을 촬영한다. 때때로 수중 전등으로 광도를 밝히며 물속을 관찰한다. 허리를 굽혔다 폈다하며 자맥질하는 새우의 모습은 이채로운 느낌이 든다. 흘깃 눈길을 돌려 민수를 바라보니 민수도 사진 촬영에 열중이다. 공급되는 산소통에 달린 압력계를 살펴보니 기압은 여전히 높은 상태다. 앞으로 한 시간 정도는 더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이제 새우의 분포 밀도를 측정해야 할 단계다. 배에 연결된 밧줄을 흔든다. 곧바로 각 변의 길이가 2m인 정육면체의 그물틀이 물속으로 잠긴다. 수면으로부터 2m 떨어진 물속에 그물틀을 수직으로 세운다. 그물에 달린 양쪽 문을 활짝 열고는 매회 5분씩 기다린다. 그런 뒤에 그물틀의 문을 닫고는 사진을 촬영한다. 일정한 시차를 두고 십여 장면의 사진을 찍는다.

  점심때가 되었을 때다. 공동으로 준비한 음식들을 꺼내 선실에서 사내들 셋이 식사한다. 식사를 마치고 일제히 선실에 드러누워 반 시간가량을 쉰 뒤다. 다시 민수와 내가 오후의 작업에 몰입한다. 계획된 분량의 작업이 끝난 뒤다. 나는 물속에서 민수와 손바닥을 쳐서 신호를 나눈다. 둘은 곧바로 수면 위로 떠오른다. 해가 서쪽 수평선에 걸려 가물거리고 있다. 둘은 이내 동력선 위로 올라선다. 연이어 둘이서 그물틀도 배 위로 끌어올린다. 배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다. 민수와 나는 촬영된 디지털 화면을 훑어본다. 비교적 색상과 선명도가 깔끔하게 균형을 이룬 사진들로 비친다. 서서히 뱃전으로 휘몰리는 바람결의 강도가 높아진다. 셋은 강심으로부터 강변을 향해 동력선을 몬다.

  민수와 내가 오늘 구한 자료들을 갈무리한다. 배는 강변을 향해 미끄러져 나간다. 강변을 바라볼 때다. 문득 간밤의 사내가 하던 말이 떠오른다. 풍죽도(風竹圖)에 관해 말해 주겠다고? 왜 이전부터 풍죽도란 단어가 내게는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내가 풍죽도를 필요로 하는 줄을 어떻게 알았을까? 두려움이 일 정도로 놀라울 따름이다. 풍죽도란 바람에 휩쓸리는 대나무를 그린 그림이 아닌가? 시시각각으로 풍향에 따라 흔들리는 대나무 잎의 섬세한 움직임이 연상된다.

  섬진강 동쪽의 강변에 도달한 후다. 민수와 나는 선주에게 내일 아침에 만나자고 인사를 건넨다. 물속 탐사 장비는 모두 동력선에 실린 상태다. 조사한 자료를 담은 서류 뭉치만 챙겨들고 둘은 식당을 찾는다. 선주는 배를 몰아 강 건너 서쪽의 마을로 돌아가 버린다. 강변에는 재첩국과 은어 요리를 다루는 음식점들이 많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초저녁 무렵이다. 음식점에는 별로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다. ‘원조 섬진 재첩’이라는 상호의 음식점을 찾아 들어선다. 음식점에 들어서자마자 구수한 재첩 국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강변이 바라보이는 창가의 식탁에 둘은 자리를 잡고 앉는다. 탄탄한 몸매의 50대 초반의 주인 남자가 음식을 날라다 준다. 주걱이 담긴 커다란 사기그릇 가득히 재첩이 담겨 있다. 덜어 먹을 수 있도록 작은 사기그릇도 두어 개 있다. 막걸리를 곁들여 재첩의 국물을 마신다. 국물과 술이 입 안에서 만나 스르르 녹는 느낌이 든다.

  민수가 술잔을 들면서 입을 연다.

  “나는 근래에 누님 때문에 걱정이야. 어떻게 너의 자문을 좀 구하고 싶어.”

  민수의 누나는 39살의 노처녀라고 한다. 서울의 W전문대 원예학과를 졸업했지만 취업도 못한 채 빈둥거린다고 한다. 취업 못한 반작용인지 엉뚱하게 사교춤을 수련한다고 들려준다. 민수의 말에 나는 잠시 끼어든다.

  “춤의 전문가는 아무나 되는 줄 아냐? 누나가 들으면 무척 서운해 하겠다. 춤을 잘 추어도 돈을 잘 벌잖아?”

  내 말에 민수는 갑자기 상기된 얼굴로 반박을 해댄다.

  “흥! 춤으로 돈을 벌어? 말은 똑 바로 하자구. 춤 전문가가 얼마나 많은 세상인데 춤으로 돈을 벌겠다구? 내 말을 자르지 말고 얘기나 더 들어.”

  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민수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누나가 춤을 춘 지가 벌써 10년이 넘었다고 한다. 그랬으면 춤 강사로도 취직이 되어야 마땅하리라 말한다. 아무래도 민수의 견해로는 엉뚱한 길을 걷는 느낌이 든다는 얘기다. 그런 처지에 얼굴까지 못 생겨서 안타깝다고 한다. 세상의 남자들이 눈길조차 주지 않자 열등감으로 춤만 춘다는 얘기다. 듣기가 점점 거북하여 내가 재차 끼어든다.

  “나처럼 너도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대학원생일 뿐이야. 그런데 누나는 사교춤을 수련하는 춤의 전문가이잖아? 세상의 관점을 자기 기준에서만 보라는 법이 어디 있냐? 그 어떤 분야에서건 최선을 다하는 자체가 소중한 삶이 아닐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민수의 안면이 슬그머니 충혈된다. 합기도의 달인이라 나와 한 판 겨루자고 할지 모르리라 여겨진다. 절대로 사양할 내가 아니다. 나로 말하더라도 태권도 사범의  무술인(武術人)이기도 하다. 민수와 나는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도 벌써 3번씩이나 겨루기를 했다. 원래 무덕(武德)이란 무술로서 친구를 사귄다는 데에 있지 않은가? 겨루는 과정을 통해 호적수(好敵手)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주 친해진 상태다.

  민수가 충혈된 눈빛을 슬쩍 눙치면서 껄껄거린다.

  “누나가 네 얘기를 듣는다면 아주 좋아하겠구나. 그래, 너의 관점도 존중한다, 됐어? 이제 나를 좀 도와 달라구.”

  열등감에서 표류하는 누나의 관점을 바꿀 착상이 있다면 알려달라고 한다. 남매로서 무척 안타까운 심정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누나에게 좋은 남자 친구를 찾아주는 게 해법일 듯이 여겨진다. 하지만 나는 이내 머리를 내젓는다. 설사 남자 자신들이 아주 못 생겼다고 자인(自認)하는 경우라도 말이다. 남자들이라면 누구든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를 찾지 않겠는가? 이런 특성은 남자들이 지닌 보편적인 속성이라 여겨진다. 이런 속성에 비춘다면 누가 못 생긴 노처녀를 거들떠보기나 하겠는가? 게다가 경제 능력까지도 없는 못 생긴 노처녀임에랴? 실현 가능한 의견을 제시해야지 입만 아프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민수의 눈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누나를 성형 수술시켜서 얼굴을 고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그래 봐야 결혼하면 자녀들에게 못난 유전자를 또 물려줄 텐데. 못 생긴 여자들일수록 못 생겼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든다고 하잖아? 거울 한 장이면 남들과 확연히 비교되는 데에도 불구하고서. 게다가 자신이 미인이라고 착각하는 과대망상증 환자들도 많으니 놀랍지 않은가? 사내들한테 미인의 얼굴은 강력한 마취제와도 같은 흡인력으로 작용할 거야. 자신이 미인이라면 얼굴을 감추려고 해도 사내들이 불나방처럼 따라다니겠지. 찾는 사내들이 없다는 사실은 절대로 미인이 아니라는 입증이 되리라. 자신이 못 생겼다고 인정하는 여자들은 그나마 양심적인 데라도 있지. 차라리 혼자 살도록 내버려 두는 게 적선(積善)하는 길일 거야.’

  생각은 이렇게 했지만 차마 말로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종 쓴웃음만 웃으며 대답을 미루는 정도가 고작의 처신이다. 결국 민수에게 뚜렷한 대답도 들려주지 못한 채 음식점에서 일어선다. 민수도 내게서 온전한 해답을 구할 기대는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오후 6시다. 쌍계사 뒤쪽의 불일폭포를 찾아나서야 할 때다. 일방적인 약속일지라도 사내를 만나고 싶다. 만나서 풍죽도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싶다. 민수는 곧바로 강 건너편의 자신의 숙소를 향해 차를 몬다. 그가 떠나는 걸 본 뒤에 나도 차의 시동을 건다.

  차는 십여 분만에 19번 국도에서 화개천(花開川) 가의 지방도로로 들어선다. 19번 국도는 하동에서 구례를 지나도록 되어 있다. 화개천은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화개천을 따라 대략 7km를 거슬러 오르면 쌍계사(雙磎寺)에 이른다. 쌍계사에서 2km 거리에 높이가 60m에 달하는 불일폭포(佛日瀑布)가 있다. 불일폭포는 규모면으로 지리산 제일의 폭포다. 가까스로 산길을 서둘러 7시 정각에 폭포 앞으로 다가선다. 폭포 앞에 다가서기도 전에 시원한 물소리가 골짜기를 가득 메운다. 전신에 상쾌한 느낌이 든다.

  내가 폭포 앞에 다가설 때다. 폭포 앞에는 과연 낯선 사내가 보인다. 나를 바라보자 팔을 번쩍 들어올린다. 다가서면서 사내의 면모를 살핀다. 50대 중반의 키가 크고 깡마른 체격의 사내다. 검정색 면 티셔츠에 갈색 바지를 걸치고 있다. 첫 인상이 너무 스산하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시체를 꺼내 세워 둔 듯이 음산하다. 나도 모르게 긴장되는 심정이다. 내재된 무인(武人)의 속성 탓일까? 내가 사내를 바라보는 순간 유사시에 어떻게 제압할지를 궁리해 본다. 무인이 자신을 보호할 대책을 세우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사내는 뒷짐을 진 채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를 한동안 주시한다. 그러더니 눈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약속을 정확히 지켜 주어서 고맙소. 나를 만난 것만으로도 분명한 이득이 있을 거요.”

  나는 의아스런 표정을 지으며 사내를 향해 다가선다. 2m쯤의 거리를 두고는 사내와 마주 보고 선다. 사내는 잠깐 묘한 미소를 짓느라고 입술을 꿈적인다. 사내는 뒷짐을 진 채로 말을 잇는다. 나는 사내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원래 사내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장기간 머물던 신세였다. 사찰의 보수나 수리를 맡거나 불목하니로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보름쯤 전의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바람까지 강하게 불어 천하 명승지의 고찰(古刹)의 지붕이 들썩거렸다. 들썩이는 기와를 바라보며 사내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부리부리한 눈매의 낯선 객승이 사찰에 들렀다. 그러면서 유독 사내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전하려고 했다. 객승으로부터 어떤 얘기를 들은 뒤였다. 사내는 객승을 향해 엎드려 절을 했다. 그리고는 객승에게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먼 길까지 오셔서 깨우쳐 주셔서 너무나 고맙습니다. 제게 부탁한 일은 때를 맞춰 곧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사내는 그 날 이후로 나를 찾으려고 했다. 의외로 객승이 나에 대한 정보를 제시해 주더라고 했다. 정보의 내용대로 대학에 전화를 거니 금방 찾게 되더라고 했다. 풍죽도와 나의 관계를 알고 나서부터는 나를 빨리 만나려고 했다.

  말을 끝내자 사내는 품속에서 낡은 종이 뭉치를 꺼낸다. 누렇게 물든 한지(漢紙) 두루마리를 사내가 펼쳐든다. 은은한 묵향(墨香)이 흘러들면서 대나무 그림이 펼쳐진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림에 다가선다. 나의 손이 막 한지에 닿을 찰나다. 사내가 두어 걸음 물러서며 나의 동작을 제지한다.

  “귀한 그림을 그렇게 경솔하게 보려고 해서야 되겠소? 내가 풍죽도를 틀림없이 가지고 있다는 걸 확인시켰을 뿐이요. 그림은 격식을 갖추어 경건한 자세로 봐야만 하오.”

  바로 이 때다. 폭포 인근의 골짜기에서 뭔가 탁탁 치는 소리가 연거푸 터진다. 음향으로 판단할 때 사람이나 짐승이 의도적으로 내는 소리 같다. 무슨 소리일까 궁금해지는 판이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나는 소리라 신경이 곤두선다. 그래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을 때다. 소리가 난 지점으로부터 수많은 벌 떼들의 날갯짓소리가 밀려들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숱한 벌들이 떼를 지어 사내와 나를 향해 몰려든다. 탁 틘 공간이라 벌들의 공격 목표로는 안성맞춤으로 노출된 셈이다. 의외로 사내는 태연한 표정으로 주변을 휘둘러본다. 그러더니 사내는 금세 한지의 그림을 접어 품속에 넣어 버린다. 사내가 자세를 막 바로잡을 때다. 둘을 향해 새카만 점들이 연기처럼 몰려든다. 유년기의 경험상으로 틀림없는 벌 떼다. 저녁 무렵에 벌 떼가 무더기로 몰려든다면 예사롭지 않다. 반드시 어떤 대상이 벌집에 충격을 주었음에 틀림없다고 여겨진다. 과연 어떤 대상이 무슨 이유로 벌집을 건드렸을까? 일단 벌 떼를 피하고 볼 일인데 당장 막막하기만 하다. 헌데 사내가 가방에서 신문지와 가스라이터를 꺼내 든다. 그러더니 곧바로 신문지를 태워 연기를 피우기 시작한다. 사내가 나를 향해 말한다.

  “뭐 해요? 마른 나뭇가지들을 좀 주워 오소. 연기를 피워야 벌 떼들을 막을 수 있지.”

  나는 하천가에 버려진 마른 나뭇가지를 신속히 주워 모은다. 불붙은 신문지를 마른 나뭇가지 위로 쉴 새 없이 던진다. 마른 나뭇가지라 금세 불이 옮겨 붙으며 연기를 내뿜는다. 천지를 뒤덮을 듯 몰려들던 벌 떼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난다. 연신 나뭇가지를 불더미 속에 채워 넣으면서도 나는 궁금해진다. 도대체 어떤 동물이 벌집을 건드린 것일까? 마음속으로 한창 궁금증이 일 때다. 사내가 나를 향해 말한다.

  “일단 벌 떼는 막았으니 일단락이 되었소. 그러니 우리 얘기나 계속해서 나눕시다.”

  나는 궁금증에 머리를 갸웃거리며 사내를 향해 말한다.

  “솔직히 궁금하군요. 풍죽도와 제가 무슨 관련이 있죠? 아저씨의 상세한 얘기를 듣고 싶어요.”

  사내는 나를 바라보며 싱긋이 웃더니 말한다.

  “진정으로 풍죽도에 관해 알고 싶소?”

  나는 당연하다는 듯 사내를 바라보며 당당히 말한다.

  “아저씨가 제게 먼저 전화를 해서 풍죽도에 관해 말하겠다고 했잖아요? 그랬으면 당연히 말씀하셔야죠.”

  사내의 얼굴에 잠시 비웃는 듯한 표정이 비치는 찰나다. 사내는 불타던 불을 갑작스레 끄기 시작한다. 하도 동작이 빨라 금세 불길이 다 잡혀 꺼진다. 그러자 잠시 물러났던 벌들이 일제히 사내와 나를 향해 달려든다. 나는 비명을 지를 듯 다급한 심정이다. 왜 갑자기 사내가 불을 껐는지 연유를 모르겠다. 벌 떼가 하늘이 새카맣게 몰려들 때다. 우선 피해야겠다는 마음밖에는 없다. 본능적으로 상의를 벗어들고는 휘둘러댄다. 그러면서 사내를 슬쩍 바라본다. 사내는 손에 나무 막대기 하나를 들고 여유 있게 휘젓는다. 전혀 다급한 표정이 실려 있지 않은 얼굴이다. 과연 사내가 벌들을 격퇴하는지를 흘깃 바라본다. 벌들이 사내에게는 아예 접근하지도 못하는 듯하다. 반면에 벌들이 나에게는 폭풍우처럼 맹렬한 기세로 달려든다. 옷을 휘두르는 사이에 등과 팔이 따끔거린다. 벌써 벌에 쐬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벌에 쐬자 전신이 가렵고 따끔거려 미칠 지경이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픈 상태에서도 사내를 살펴본다. 느릿느릿 휘두르는 막대질만으로도 벌들이 아예 접근을 못하는 상태다. 나에겐 충격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나도 더욱 옷을 휘둘렀지만 벌들의 극성은 점점 지독하게 치닫는다. 내가 경황없이 허둥댈 무렵에야 사내가 재차 불을 붙인다. 연기가 자욱이 피어오르면서부터 벌들이 슬슬 달아나기 시작한다. 나는 울컥 화가 치솟는다. 그래서 사내를 향해 볼멘소리로 말한다.

   “불을 그대로 두지 왜 껐어요? 어디 말 좀 해 봐요!”

  사내는 내 말은 들은 척도 않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더니 휘파람을 분다. 벌이 몰려나왔던 숲으로부터 내게도 안면이 있는 소년이 나온다. 쌍계사로 진입하는 마을 입구에서 만나 본 적이 있는 소년이다. S초등학교 3학년에 다닌다고 밝힌 적이 있는 소년이다. 소년의 얼굴에는 커다란 그물 모자가 씌워진 상태다. 손에도 고무장갑이 착용되어 있다. 미리부터 준비한 차림새라는 게 명백히 드러난다. 사내가 내게 들려준다. 며칠 전부터 학교에 내려와 소년이 벌집을 건드리도록 꾀어 왔다고.

  벌들이 완전히 물러간 뒤다. 사내와 소년과 내가 함께 산을 내려간다. 소년마저 소년의 집으로 돌려보낸 뒤다. 사내랑 불일폭포를 지나 쌍계사로 내려선다. 잠시 쌍계사의 경내를 둘러본 뒤에 둘은 산문(山門)을 빠져 나온다. 둘은 쌍계교(雙磎橋)를 건너서 1023번 지방도로를 타고 화개 삼거리에 도착한다. 둘은 화개 삼거리 부근의 음식점을 찾아 든다. 삼겹살과 소주를 시켜 둘은 마주 앉는다. 술잔을 서로 건네며 대화를 시작한다.

  나는 어릴 적에 경남의 산청의 산골에서 자랐다. 쉽게 말하여 산청은 내 고향이다. 집 앞으로는 남강의 지류인 경호강이 흘러가는 곳이다. 내가 일곱 살 때에 부모를 여의었다. 내가 외가인 사천에 머물렀던 밤에 일어난 산사태 때문이었다. 나를 외가에 잠시 맡기고 돌아서는 부모님의 얼굴이 어둡게 느껴졌다. 잠깐 동안만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던 부모님이었다. 왜 그 날 밤에 부모님은 마을로 돌아가야만 했는지 궁금했다. 나랑 하루만 외가에 머물렀더라도 참변은 피했으리라 여겨진다. 여름철이라 고향 마을에는 비가 억수로 내렸다. 사흘째 폭우가 내리던 한밤중에 마을 뒷산이 허물어져 내린 터였다. 고향 마을은 완전히 흙더미로 뒤덮여 사람들은 거의 떼죽음을 당했다. 마을이 복구되고 난 뒤다. 나는 마을에서 3km가량 떨어진 동네의 삼촌댁에 맡겨졌다.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 나는 삼촌댁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독립 생활을 위해선 학비가 싼 국립대학을 택해야만 했다. 입학하자마자 학원 강사 생활로 학비를 벌어 대학을 다니게 되었다.

  살다 보면 사람들마다 가치관이 다르기 마련이다. 관점의 차이로 이곳저곳의 학원으로 강사 자리를 옮기던 날은 서러웠다. 그 서러움을 학문을 갈고 닦는 데로 승화시키기로 한 나였다. 사내를 불일폭포에서 만나던 날부터 나는 새로운 활력을 찾게 되었다. 풍죽도에 관해 숨겨진 얘기를 듣느라고 몰입하다가 실신할 지경이었다. 멀어져 가는 사내를 전송하고서도 나는 한동안 목이 메도록 서러웠다. 상실된 줄만 알았던 과거의 중요 부분이 재생된 날이기도 했다. 살다가 그날처럼 잠을 못 이룬 밤도 없었다. 사내는 내게 가물거리던 존재의 실체를 일깨워 준 사람이었다. 그런 사내가 환기시킨 부모의 얼굴이 떠올라 밤을 지새우며 흐느꼈다.   

  섬진강에 어스름이 필 때다. 식물성 플랑크톤의 개체 수가 증가하는 저녁 시간대다. 물고기들이 물속으로 잠겨들면서부터 유입되는 플랑크톤의 양은 많아지게 된다. 빛살의 세기가 떨어질 무렵이면 물고기들이 강바닥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민수와 내가 관찰의 주된 시간으로 설정한 시간대가 있다. 구체적으로 저녁 5시 반부터 6시 반까지다. 이 시각의 수중 생물의 분포 변화가 논문 연구의 주제다. 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석 달째 섬진강에 매달린 상태다. 아직도 달포가량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섬진강의 강심에 이르러 정육면체 모양의 그물틀을 던진다. 그물틀과 함께 민수와 나도 잠수한다. 둘의 호흡이 아주 중요하다. 수면으로부터 2m 아래의 지점에서다. 5분씩 그물틀의 문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하며 사진을 찍는다. 플랑크톤을 제일 먼저 감지하는 무리가 민물 새우다. 그래서 일정한 시간마다 거뭇거뭇한 민물새우의 분포 밀도를 측정하는 터다. 지난 석 달 동안 실험은 일정한 수면 높이에서 진행되었다. 강에서의 실험 측정 장소는 30m씩 떨어진 7군데로 선정했다. ‘염분의 종류와 농도에 따른 플랑크톤의 분포 밀도에 대한 연구.’ 민수와 나의 공동 연구 논문의 제목이다. 서너 편의 공동 연구 논문은 학위 논문의 기초가 된다. 공동 연구 논문을 바탕으로 지도교수로부터 연구 방향을 지시받게 된다. 이런 지속적인 연구의 성과가 나중에 학위 논문으로 연결되게 된다. 이런 연유로 공동 연구자라 할지라도 학위 논문은 달라지는 터다. 수중 생물의 생명에 위협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다. 조심스레 각 성분에 따른 시약(試藥)을 희석시켜 물에 푼다. 시약을 푸는 지역은 관측 지점의 상류로 200m 떨어진 지점이다. 그래야 염분이 물속으로 자연스레 스며들게 된다. 인체의 내부에서 중요한 완충 작용을 하는 아세트산 이온(CH₃COO^-). 완충 작용은 산(酸)이나 염기(鹽基)에 영향을 덜 받도록 하는 현상이다. 아세트산 이온을 공급하기 위해 아세트산나트륨을 희석시켜 수중으로 내보낸다. 현장 실험의 경우엔 안전도가 높은 이온에 대해 선택적으로 수행한다. 황산 이온(SO₄^2-)과 같은 위험한 이온의 경우에는 실험실의 수조(水槽)에서 진행된다. 이번 실험의 중요한 핵심은 체내와 수중을 넘나드는 이온(ion)의 효과이다.

  관측점의 상류에서 민수가 시약을 서서히 뿌리고 있다. 완만한 유속(流速)과 시약의 확산 속도(擴散速度)를 고려해야 한다. 10분이 지난 후에 그물틀에 갇힌 새우들의 사진을 촬영한다. 수중 카메라의 성능은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하기만 하다. 색상이나 해상도에 있어서 탄성을 자아낼 지경이다. 시약을 푼 이후에 사진을 촬영할 때다. 세 번째의 촬영에서부터 진기한 장면이 포착된다. 그물틀 내의 새우들의 배치가 풍죽도와 흡사하게 닮은 터다. 대나무 잎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뒤집힌 형상들의 배치와 아주 흡사하다. 한지에 그려진 풍죽도의 장면은 모두 다섯 장면이다. 아침부터 밤까지의 시차를 둔 그림이다. 묘하게도 시차가 났는데도 그림에는 일정한 질서가 드러나 있다. 이 질서를 사내가 꿰뚫어 본 터다. 그래서 불일폭포 앞의 계곡에서 막대기로 벌을 내쫓은 거였다. 무리를 지은 형상일지라도 풍압(風壓)을 받으면 일정한 질서로 반응하는 모양이다. 외부에서 제시된 어떤 요인에 흡사한 변화를 보인다는 점. 이런 점은 단연 특이하다고 느껴진다. 뭔가 깊이 생각할 점을 드러낸 것이 아닐 수 없다. 풍죽도의 다섯 장면에서의 대나무 잎사귀들의 분포. 이들 분포들과 유사하게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되풀이하는 새우들의 움직임. 자연계에는 드러나지 않는 질서가 뿌리 내리고 있음이 느껴진다. 나는 마음속으로 궁리한다. 이들 규칙들만 제대로 찾게 되면 활용도가 높으리라 생각된다. 해파리의 증가로 인한 어류의 분포가 크게 영향을 받는 현실이다. 그 외에도 바다를 뒤덮는 적조 현상도 문제가 된다. 규칙들만 찾게 되면 이런 문제들도 해결되리라 여겨진다. 

  마지막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인 6시 반경이다. 나는 머릿속에서 재현되는 풍죽도의 장면을 떠올려 본다. 그러다가 생각지 못했던 점이 떠올라 가슴이 섬뜩해진다. 풍죽도는 사진이 아닌 그림이다. 그림임에도 어찌나 대나무 잎들의 형상이 섬세하게 표현되었던지 감탄스럽기만 하다. 바람결에 휩쓸린 정도나 뒤집혔다가 펴지려는 모양새 등등. 생각할수록 풍죽도는 단순한 인간의 그림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그물틀 속의 새우들의 운집(雲集) 장면을 보며 카메라를 들이밀 때다. 평온하게 몰려 있던 새우들이 배를 뒤집으며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진다. 기세가 너무나 격렬하여 잠시 혼이 빠질 정도다. 이 때에 사내의 말이 떠오른다.

  “당시에 나를 찾아온 객승의 얼굴은 신들린 표정이었소. 뭘 봐도 흔들리지 않는 내 마음을 단숨에 뒤흔든 사람이었소.”

  찾아온 객승과 사내가 이전에 만났던 적은 없었다. 사내에게 객승은 완벽한 타인일 따름이었다. 객승이 사내를 향해 물었다. 혹시 ‘바람의 골짜기’에서 달아난 적이 있느냐고. ‘바람의 골짜기’란 말을 듣는 순간이었다. 사내 자신의 죽음이 목전에 닿았음을 느끼고는 객승에게 무릎을 꿇었다. 바람의 골짜기란 사내가 이탈한 조직 폭력단의 이름이었다. 폭력단에서는 이탈자를 죽음으로 다스릴 뿐이었다. 지금까지 살려 둔 경우가 없다는 걸 사내는 알았다. 사내는 자신을 죽이러 온 폭력 단원이 객승으로 위장했다고 여겼다. 그런 상황에서는 일단 무릎을 꿇는 게 폭력단에 대한 예의였다. 비장한 마음으로 사내가 객승을 따라 나가 대결하려고 할 때였다. 의외로 객승이 사내한테 풍죽도를 내밀며 나지막이 중얼대며 사라졌다.

  “살고 싶다면 그림 속에 담긴 규칙을 발견하세요. 그 규칙만이 당신을 살릴 거요. 원래는 내가 당신의 목숨을 거두기로 되어 있었소. 하지만 풍죽도의 주인이 나를 교화시킨 정신적인 스승이었소. 스승을 생각해서 당신만은 예외로 해 달라고 단주에게 간절하게 빌었소. 그랬더니 사흘의 여유를 더 주겠다고 했소. 사흘이 지나면 단원들 몇 녀석이 여기로 닥칠 거요. 풍죽도에 담긴 그림의 질서를 찾기 바라오. 그림의 질서만 찾으면 아무도 당신의 적수가 못 될 거요. 나는 당신이 잘 해 내리라 믿소. 겨루다가 조무래기들이 피살되더라도 당신한테는 책임을 묻지 않겠소. 절대로 달아날 생각만은 버리길 바라오. 달아나려다가는 하루도 못 넘기고 피살될 거요. 절대로 내 말을 잘 새겨들으세요. 풍죽도의 주인은 산청의 지리산자락에 따로 있소. 돌아가신 박승법 스승님의 아들인데 이름은 박경태라고 들었어요. 현재의 신분은 진주 G대학의 자연과학 분야의 대학원생이라고 들었어요. 틈이 나거든 꼭 풍죽도를 전해 주길 바라오.”

  사내의 말을 듣는 순간에 나도 사내를 향해 말했다.

  “이처럼 먼 길을 찾아 돌려 주셔서 고마워요. 이전에 저의 선친도 무술을 수련했다는 얘기는 어렴풋이 들었어요. 그랬는데 선친이 폭력 단원인 줄은 전혀 몰랐어요.”

  사내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선친이 풍죽도의 주인이라고 했지 폭력 단원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소. 어렴풋이 전해 듣기로는 선친은 무술의 신화적인 달인이었다고 해요. 폭력단의 숱한 실력자들을 교화(敎化)하기 위해 풍죽도를 소지했다고 들었어요. 풍죽도를 그린 사람은 유명한 화백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화백만의 솜씨는 아니었소. 무술의 전문가가 대나무 잎의 음영과 농담에까지 관여했다는 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풍죽도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진귀한 무술의 비록(秘錄)이라 생각되었소.”

  나는 비로소 풍죽도의 실체를 알게 된 느낌이다. 선친이 무술의 신화적인 달인이었다니! 내가 무술 사범이 된 것도 혈통 탓이려니 여겨진다. 무술의 동작을 다스리는 풍죽도가 내 논문의 연구에도 영감을 주다니! 생각할수록 신비스러운 느낌이 들 뿐이다. 사내는 이틀만에 풍죽도의 질서를 알아냈다고 밝혔다. 사흘만에 찾아든 다섯 명의 단원들을 단숨에 제압해 버렸다고도 했다. 대나무 잎사귀들의 움직임의 변화가 신묘(神妙)한 무술 동작이 되었다. 또한 수중 생물인 플랑크톤과 새우의 분포 상태와도 연관이 되었다. 이럴진대 우주에는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신묘한 부문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전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던 나였다. 그랬는데도 풍죽도를 만난 순간부터 가치관이 바뀌려고 한다. 과학만으로는 풀이할 수 없는 신묘한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함이다.

  나는 한동안 넋을 잃고 그물틀 속의 새우들의 움직임을 들여다본다. 이때에 내 몸통을 연결한 줄이 흔들린다. 배로 올라오라는 신호다. 마침 사진 촬영도 끝났기에 장비를 추슬러 배에 오른다. 민수와 거의 같은 시각에 배에 올라선다. 피곤한 몸을 추슬러 보려고 눈을 감고 있을 때다. 핸드폰의 신호음이 크게 울려 퍼진다. 폴더를 여니 사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당신한테 고마움을 전해야겠소. 당신한테 찾아가느라고 절을 나온 이튿날 밤에 화재가 났다고 했소. 당신과 불일폭포 앞에 머물렀던 그 날 밤이었던 모양이오. 내게 연락을 준 곳은 경찰서였소. 절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죄다 불에 타 죽었다는 연락이 왔어요. 나의 핸드폰 추적만으로도 사찰(寺刹)에 대한 나의 알리바이가 확인된 모양이오. 내 생명을 살린 사람이 바로 당신이오. 오늘 이후부터는 보다 좋은 일을 하며 살도록 노력하겠소.”

  나는 갑판에 서서 저무는 석양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문다. 그러면서 처량한 심정으로 울컥  목이 멘다. 산사태로 인한 부모님의 죽음과 화재로 인한 산사 승려들의 떼죽음. 잠깐의 시차로 생사(生死)가 엇갈리는 것도 풍죽도와 관련은 없겠는지? 점차 무거워지는 머리로 하염없이 석양만 바라본다. 오늘처럼 쓸쓸한 날이면 부모와 함께 세상을 바라보고 싶어진다. 다정한 친구가 곁에 있음에도 채울 수 없는 공허감이 인다. 오랜 세월을 부모 없이 걸어온 현실이 나를 울적하게 한다. 나는 빨려들기라도 할 듯 석양을 향해 다가서며 뱃전을 움켜쥔다. 마침 섬진강으로 날아 내리던 백로 무리가 슬픈 음색으로 운다. 나의 달아오른 뺨을 타고 두어 줄기의 눈물이 맺혀 흐른다. 까마득한 세월을 마음속에 묻고 살았던 부모님의 얼굴이 사무치게 그립다. 느닷없는 풍죽도의 출현으로 부모님의 얼굴이 새로운 그리움으로 가슴에 밀려든다. 형언 못할 그리움에 젖어 자꾸만 뺨이 달아오른다. 나만 혼자 외가에 남겼던 날의 부모님의 얼굴이 마냥 그립다. 먼 옛날의 기억을 추스르는 듯 뱃고동이 안개처럼 섬진강을 뒤덮는다.  

<200자 원고지 7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