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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달래꽃

                                                                                                                        손 정 모

   바람에 휩쓸린 물결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치솟다가 슬그머니 드러눕는다. 건너다보이는 강변에는 이제 인적조차 없다. 내 한 맺힌 눈물을 봐 줄 그 누구도 없다. 어스름에 사위는 점차 암흑 속으로 스러지는데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 어쩌다 어스름에 나는 잿빛으로 타는 울음만 훌쩍이게 되는가? 생사(生死)가 진정 허허롭다면 내 질긴 목숨을 바람결에 날리고만 싶다. 타는 듯한 안타까운 마음을 그 누가 알겠는가?

   윤희의 뼛가루를 설봉산에 묻은 지 두 달째 되는 날이다. 이제 다시는 불러줄 수 없는 이름이다. 나의 목소리로 더 이상 달뜬 모습으로 찾아들 여인은 없다. 윤희여! 내 서러움의 원천이 그대가 되리라고는 내 어찌 생각이나 했으리오? 속으로 타는 설움 덩이는 하얗게 바래져만 가는데 이를 어쩌지? 그리움에 버둥대다가 자칫 실신할 지경이다.

  3년 전이었으리라. 경기도 이천의 야외에 세워진 국립 조류(鳥類) 연구소에서였다. 조류학 전공자인 나를 찾아든 섬세한 감성의 여류 작곡가가 있었다. 여인은 연구원(硏究員)인 나를 찾아와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해댔다.

  “신 선생님! 종다리에 대해선 아주 잘 아시겠죠? 봄철이면 왜 그 새만 하늘에 떠서 봄의 물결을 일굴까요?”

   첫 대면인데도 연구소의 널따란 후원을 거닐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인은 고교 음악 교사였으면서도 작곡가였던 최윤희였다. 나보다 세 살 아래였던 여인의 당시 나이는 스물셋이었다. 윤희의 지대한 관심사는 악곡에 종다리의 섬세한 이미지를 심겠다는 거였다. 그녀가 작곡하는 노래 곳곳에 새의 영혼을 싣겠다는 거였다. 새의 영혼이라니! 생각할수록 묘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고 여겨졌다.

   윤희가 내게 던져 준 과제는 종다리의 영혼이 뭐냐는 거였다. 그 날부터 내겐 온갖 새의 영혼들이 교태를 부리기 시작했다. 문득 잠결에조차도 새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윤희와의 첫 대화를 새의 얘기로 열면서부터였다. 나의 내면에 조용히 잠들어 있던 탐미(耽美)의 숨결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윤희를 만나기 이전에는 미인(美人)의 존재를 결코 믿지 않던 나다. 그런 나의 눈에 비친 윤희는 전설로만 듣던 선녀(仙女)로 느껴졌다. 이 세상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신비스러울 만큼의 아름다운 용모였다. 어쩜 그렇게도 아름다운지 내 눈이 확 뒤집히는 느낌이었다. 그 날 이후로 윤희와 나는 자주 만나게 되었다.   

   나는 토요일 아침에 거주지인 여주를 떠나 이천으로 달리는 길이다. 손에 익은 승용차는 편안한 쿠션으로 나를 실어 나르는 중이다. 곧장 이천으로 달린 뒤에 설봉산(雪峯山)으로 향할 예정이다. 설봉산은 도심에서 3km가량 떨어져 있는 해발고도가 394m인 산이다. 이 산록에는 비구니 사찰인 암자가 있다. 2주 전에 윤희의 49재(齋)를 지낸 산사(山寺)다.

   윤희의 못 전한 유품이 있다며 다녀가라는 연락을 받은 터다. 주지승의 말로는 49재 때에 전해 주려고 했는데 잊었다고 한다. 이틀 전에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윤희의 49재를 거기에서 치른 줄을 아는 사람이 누구였던가? 아무리 더듬어 봐도 승려들을 제외하고는 나밖에는 없었다. 그랬는데도 주지승이 나 모르는 유품을 전하려 하다니? 잔뜩 의혹을 안은 채 나는 차를 몰 뿐이다.

   시야에 들어오는 산야엔 곳곳에 봄기운이 감돈다. 하지만 4월 초순이라 아직은 사방에서 찬 기운이 팽만하다. 논이나 밭두렁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새싹조차 보기도 쉽지 않다.

   2주 전의 49재를 치르던 날. 오전 9시부터 치른 행사가 11시 반에야 끝이 났다. 나는 주지승에게 사례를 표하고는 곧장 산사를 떠났다. 점심이나 먹고 가라는 주지승의 배려도 물리치고 절을 나섰다. 행사 간간히 여승들과 경내에서 마주쳤지만 예사로 봐 넘겼을 뿐이다. 경내를 벗어나 윤희의 뼛가루를 묻은 골짜기로 찾아 나섰다. 나는 산골짜기의 길을 더듬어 오르면서 줄곧 중얼거렸다.

  ‘살아 있다고 사는 것이 아니야. 산다는 건 죽음을 잠시 보류한 상태일 뿐이야. 내게 남겨진 삶은 의미는 무엇인가? 내게 남겨진 삶의 의미란 뭐란 말인가?’

  똑 같은 내용의 말을 골짜기를 찾아갈 때까지 중얼댔다. 잔뜩 정신이 피폐해져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처지였다.

   어릴 때부터 고아로 맡겨져 육아원을 거쳐 자립한 윤희였다. 성실한 자세로 학원 강사를 하며 대학을 졸업한 그녀였다. 그래서 49재 때에도 나 말고는 아무도 행사장을 찾지 못했다. 교사로 임용되고 게다가 작곡까지 한 여인이지 않은가? 윤희의 입지적인 노력만 생각하면 나는 항상 탄성을 터뜨린다. 내가 연구원이 된 길도 만만치 않은 길이었다. 나 역시 빈농(貧農) 출신이라곤 하지만 부모가 생존한 처지다. 거기에 비해 윤희는 성장하면서 정서적으로 얼마나 외로웠을까? 외로움의 절절한 마음을 승화시켜 당당히 자신의 길을 개척한 거였다.

   42번 국도의 차창 밖으로는 연신 진달래의 군영이 바람결에 휩쓸린다. 연분홍의 연약한 맵시가 보는 이의 마음을 애절하게 한다. 어쩜 그리도 한없이 연약한 이미지를 자아내는 꽃일까 싶다. 차는 능서면 사무소 근방을 지나가고 있다.

   윤희가 나를 찾은 첫날에도 사방에는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설봉산에도 연분홍의 색채가 온 산야를 뒤덮고 있었다. 새도 많은데 하필이면 종다리의 소리를 반영하겠다고 하느냐고 내가 물었다. 윤희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먼 하늘 끝자락까지 봄이 왔다고 알려대는 새라는 점 때문이에요. 날개가 아프면 나뭇가지에라도 앉을 텐데도 땅바닥에만 내려앉는 새. 둥지로 돌아올 때는 몸을 옆으로 흔들어대는 독특한 성향이 있죠. 이러한 점 때문에 봄의 전령사로 인정되어 악곡에 반영하려고 해요.”

   그처럼 새에 애정을 지닌 사람이 일반인에게도 있었다니? 나는 조류 연구원의 입장을 초월하여 그녀가 친밀하게 느껴졌다. 새들에게 관심을 지닌 연구원한테 있어서 새를 사랑하는 그녀가 나타나다니! 생각할수록 마음에 흥이 저절로 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나의 연구실로 데려가서 녹음된 종다리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자음과 모음으로 구별되는 ‘음절’과 그렇지 못한 ‘음향’의 차이. 종다리의 지저귀는 소리를 아무리 비슷하게 묘사하려고 해도 어렵기만 하다. 그런 어려운 음향을 열심히 반복하여 듣던 그녀였다. 그렇게 첫날은 종다리의 소리만 듣고는 그녀가 떠났다.

   묘한 것은 그녀가 떠나고 난 뒤부터였다. 그 전까지는 여인들을 봐도 별다른 감흥이 없던 나였다. 나 자신은 평범하게 생긴 얼굴이면서도 상대는 아름다운 여인이기를 원했다. 그 누구든  나와 연인이 되는 여인은 아름다운 사람이기를 원했다. 나의 이런 소망의 조건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랬는데 윤희를 만난 순간에 느닷없이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마치 얼어붙었던 가슴이 탁 틔는 느낌이었다. 나의 그런 마음이 전달되었던지 그로부터 2주일쯤 뒤에 연락이 왔다. 핸드폰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황금 햇살에 부서지는 풍경 소리만큼이나 청아했다. 

  “이번에는 강물을 보금자리로 삼는 물새들의 소리를 듣고 싶어요. 제가 초대할게요. 여주 부근의 남한강변으로 나오지 않을래요?”

  나의 목소리는 나 자신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그럼요, 꼭 갈게요.”

   두 번째로 그녀와 만난 남한강변에서였다. 여주에서 하류 쪽으로 내려가면 세종대교가 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다리는 ‘하리’라는 섬 위를 거쳐 건너편 강변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주선으로 하리라는 섬까지는 고무배로 건너가게 되었다. 하리라는 섬에는 갈대가 지천으로 어우러져 있었다. 다양한 물새들의 보금자리로 이용되는 듯했다. 논병아리, 해오라기, 왜가리, 중백로, 뜸부기, 물닭이 보였다. 이들 중의 다수는 여름 철새들인데도 일찍 남한강을 찾아든 모양이었다. 또한 가창오리, 알락오리, 고방오리, 비오리, 알락도요, 개꿩 등도 보였다. 이들 중에는 겨울철에만 찾는 철새들도 들어 있었다. 강변에서 하리 섬까지는 80여m가량 떨어져 있었다. 이런 관계로 하리 섬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하리 섬의 둘레는 3km에 달하고 최장 길이는 1.3km에 달했다.

   몸길이가 30cm에 달하는 텃새인 논병아리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뺨에서 목까지만 붉은 색이고 나머지는 검정 깃털로 뒤덮인 새다. 물에 떠서 한가로이 헤엄을 치는 모습이 아늑한 정취로 느껴졌다. 나는 준비해 온 망원경의 초점을 맞춘 뒤에 윤희에게 넘겼다. 윤희는 매료된 듯 물에 뜬 새들을 관찰했다. 그러면서 녹음기를 꺼내 물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녹음했다. 물새들을 관찰하고 녹음하는 열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동안 작업을 진행하더니만 만족한 듯 작업물들을 추슬러 챙겼다. 녹음기와 사진기 등의 짐을 손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는 윤희는 나의 손을 이끌어 갈대숲이 무성한 곳으로 갔다. 거기에 자리를 깔고 앉으니 세상으로부터 차단된 느낌이 들었다. 귓전에 들리는 건 흘러내리는 강물 소리와 물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뿐. 일체 세상으로부터 차단된 느낌이 들어 별천지로 느껴졌다. 윤희와 나는 휴대용 자리 위에 앉아 과자류와 음료를 꺼냈다. 그리고는 과자를 나눠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비록 교편을 잡고 있지만 항시 외롭다고 했다. 유년기에 부모를 모른 채 지낸 후유증이 상흔으로 남았다고 했다. 그녀의 얘기를 들으니 가슴이 타는 듯했다. 그녀의 애잔한 정서가 여과 없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래서 언제나 비상하고픈 심정에서 작곡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작곡을 할 때마다 환청처럼 이끌리게 되는 게 있었다. 지상에서 하늘로 치솟는 새들의 울음소리였다. 새의 울음에는 근원을 알 수 없는 흡인력이 느껴지더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충분히 공감했다. 새의 울음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매료시키는 음향이 실려 있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애절한 단면도 있었다. 아마도 이런 점이 그녀의 마음을 뒤흔든 계기가 된 듯했다.

   윤희는 참 잘 생긴 얼굴을 지닌 여인이었다. 한번 시선만 마주쳐도 가슴이 설렌 정도로  빼어난 미모였다. 지금껏 내 마음을 끈 여인은 없었다.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지 여기고 묵묵히 살아온 삶이었다. 그런데 윤희를 만나고 나면서부터 세상이 달라져 보였다. 나의 내면에 잠겨 있던 삶의 활력이 돌파구를 찾은 듯했다. 이 세상의 숨결이 온통 아름답게 나의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진정으로 세상을 사는 맛을 알게 되는 느낌이었다. 하리 섬에서만 세 시간가량을 윤희와 함께 보낸 날. 그녀와 나는 갈대숲에서 처음으로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속삭였다. 누가 시킨 것처럼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에게 이끌렸던 터였다.

   차는 복하 교차로에서 3번 국도에 진입하여 이천으로 내달린다. 점차 산사가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자 서서히 내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최대한 추슬렀던 슬픔이 서서히 다시 깨어나려는 듯하다.

  ‘주지가 내게 건네주겠다는 유품이 대관절 뭘까? 뭐기에 찾아오라고 전화까지 했을까?’

   나는 내면으로 중얼대며 차를 설봉산 방향으로 몰고 간다. 설봉산 입구의 주차장에 차를 맡긴 뒤다. 부근의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아 마신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후에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윤희의 죽음을 최초로 내게 알려온 건 경찰이었다.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가 보니 윤희의 시신이 담요로 덮여 있었다. 잠수부가 어렵게 건져냈다며 온몸이 잔뜩 불어 있었다. 그녀의 핸드폰에 찍힌 전화번호가 연락의 실마리가 된 터였다. 혹시나 했지만 그녀임을 확인한 순간에는 강한 현기증이 일었다. 그러면서도 사인(死因)이 뭔지를 확인했다. 수면에 인접한 경사지에서의 추락사라는 거였다. 시신의 목에는 마지막까지 사진기와 녹음기의 멜빵이 걸려 있었다고 했다. 아마도 사진을 촬영하다가 실수로 추락한 듯하다고 경찰은 말했다. 추락한 뒤엔 곧바로 물에 빠져 질식한 것으로 추정했다. 정확한 감식 절차가 필요하나 결과는 변동이 없으리라 여긴다는 견해였다. 설명을 듣고 나자 내재된 눈물이 흘러내렸다. 연이어 억제할 길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 날처럼 울어 본 기억은 평생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 법적인 감식 절차가 끝나고 시신을 넘겨받은 뒤였다. 이중 쇠가죽으로 만들어진 핸드백 속에 넣어 두었던 탓일까? 용케 그녀의 핸드폰에는 물이 배어들지 않았다. 만약 핸드폰까지 고장이 났다면 나는 그녀의 사고조차 모를 뻔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섬뜩할 지경이었다. 화장터에서 그녀의 뼛가루를 받아들고는 설봉산의 산사를 찾았다. 그녀가 핸드폰으로 교신한 빈도가 높은 전화번호는 설봉산의 산사였기 때문이다. 산사를 찾고 보니 주지는 윤희에 대해 설명했다. 어느 날부터 얼굴 모르는 부모를 위해 법당을 찾더라고 했다. 법당에 들어서서는 경건하게 부모를 향해 경배를 올렸다고 한다. 특이한 방문이라 주지는 틈틈이 윤희와 통화를 하곤 했다고 한다. 주지와 만나던 날에 49재를 산사에서 올리기로 했다. 산사를 내려오면서 윤희의 뼛가루는 진달래나무로 우거진 골짜기에 묻어 주었다. 일종의 수목장(樹木葬)이 된 셈이다. 윤희를 처음 만나던 날의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의 군영들. 이런 자태를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설봉산 자락을 연분홍으로 불태우는 진달래의 군영을 바라볼 때다. 그만 콧잔등이 시큰거리며 눈시울이 젖어든다. 윤희의 아리따운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가슴을 추스른 뒤에 산사로 찾아든다.

  이윽고 나는 산사의 승방에서 주지를 만난다. 얼핏 보아 40대 중반에 이르는 여승이다. 주지가 종이에 싼 물건을 내게 내밀며 말한다.

  “이게 남겨져 있었기에 돌려 드리려고 불렀어요.”

   종이를 풀어 보니 윤희의 핸드폰이다. 반가움과 슬픔이 일시에 가슴으로 밀려든다. 어디에다 두었던지를 몰라 한참 찾던 물건이기 때문이다. 윤희를 다시 만난 듯한 환상이 일며 울컥 목이 멘다. 떨리는 손으로 윤희의 핸드폰을 건네받는다. 승방을 일어서면서부터는 급기야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린다.

   수연은 나중에야 당시의 내 모습을 줄곧 지켜보았다고 내게 말했다. 수연은 49재를 치르는 날에 내게 자신의 이름을 밝힌 여승이다. 49재의 제물을 차리느라고 법당과 공양간을 드나들면서 나를 지켜봤다고 한다. 내가 수연의 애인과 너무나 닮은 모습이어서 무척 놀랐다고 한다. 처음에는 죽은 사람이 환생한 줄 착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외모뿐만 아니라 이미지까지도 닮아 가슴이 뛰었다고 한다.

   내가 산문을 막 벗어날 무렵. 윤희 또래의 젊은 여승인 수연이 내게로 달려온다. 그러면서 내게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한다. 주지에게도 미처 얘기를 못하고 떠나왔다고 말한다. 가능하다면 남한강의 강변에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여승이 내게 말한다. 나는 여승에게 말한다. 당장 내겐 볼일이 있다고. 시간이 바쁘지 않다면 저녁 6시에 만나자고 말한다. 여주의 세종대교 부근의 남한강변에서 만나면 어떻겠느냐고 여승에게 묻는다. 여승은 아쉬운 듯한 눈치를 잠시 보이더니 고개를 끄떡이며 돌아선다.

   나는 이제 설봉산에 잠든 윤희의 곁으로 가 봐야 한다. 윤희의 뼛가루를 묻은 산골짜기를 기억에 잘 새겨 둔 상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진달래나무는 곳곳에 무성하다. 윤희를 묻은 골짜기에 들어서는 순간이다. 숨이 멎을 만큼의 진달래꽃의 장관이 눈에 밀려든다. 당시에 뼛가루를 묻을 때만 하더라도 진달래가 피기 전이었다. 그랬는데 어느새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터다. 마치 윤희가 환생하여 나를 반기는 듯하여 금세 눈물이 맺힌다. 나는 시큰대는 콧잔등이로 바람결을 맞으며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 어딘가에서 윤희가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을 것만 같다. 나는 서러움이 배어든 감정의 날을 달래며 묵묵히 무릎을 꿇는다. 남이 뭐라든 말없이 윤희의 곁에 머물고 싶은 심정이다. 윤희가 묻힌 진달래꽃의 군영 아래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무릎을 꿇는다.

  ‘새의 울음소리로 그리움의 정한을 풀어내려던 그대여! 그대를 뒤덮는 진달래꽃의 군영으로 환생했는가! 무척 보고 싶은데 나 어떡하면 좋아?’

   새를 촬영하겠다고 가파른 언덕을 타올랐을 윤희의 외로움이 서럽게 비친다. 일에 몰두하다가 잠시 균형을 잃었으리라 여겨진다. 얼마나 성실한 여인이었던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된 나다. 삶을 그처럼 열정적으로 살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휴일에는 자다가도 새의 울음소리에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이제 그녀의 온화하면서도 아리따운 얼굴 모습을 그 어디서 보겠는가?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이런저런 생각에 묻혀 있을 때 핸드폰의 알람이 운다. 오후 5시에 산을 떠나려고 맞춰둔 경보 장치다. 어느새 몇 시간이 흘렀어도 슬픔이 좀체 가라앉지 않는다. 하지만 여승과의 약속을 지키러 산을 내려간다.

   여주를 지나 강변으로 들어서자 세종대교 부근에서 서성이는 여승이 보인다. 여승을 싣고는 세종대교와 능북초교 사이의 333번 강변도로를 달린다. 그러다가 진달래의 군영이 흐드러진 강변에 차를 세운다. 여승과 함께 차에서 내려선 뒤다. 여승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여승과 떨어져서 강변의 진달래꽃을 망연히 바라본다.

   석양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진달래의 꽃잎이 흔들린다. 따사로운 햇살은 잠깐일 뿐. 이른 봄의 잔영이 짙게 드리워진 한기(寒氣)가 강변을 따라 밀려든다. 폭이 넓은 남한강에 물결이 점차 드세어진다. 강가에는 바싹 마른 갈대숲이 바람결에 떠밀릴 때마다 소리를 질러댄다. 언제나 새싹이 돋으려는지? 아직 바람을 타지 못한 갈대꽃이 지저분한 행색으로 꺾여 흐느적댄다.

   나는 석양의 잔광에 연분홍으로 흔들리는 진달래의 꽃잎을 들여다본다. 손으로 건드리면 금세 녹아들 것만 같은 연약함이 느껴지는 꽃. 꽃잎마다 실핏줄같이 은은하게 굽이치는 혈흔마저 느껴진다. 앙증스러울 정도로 작은 꽃잎에서도 애틋한 정감이 뭉클뭉클 묻어난다. 꽃잎이 바람결에 나부낄 때마다 윤희의 미소가 느껴진다. 꾀꼬리의 화려한 음색을 오선지에 재현하고 싶다던 그녀가 세상에는 없다. 미처 음반으로 펼쳐 내기도 전에 그녀는 이승을 떠났다. 그녀가 없는 이승은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나의 여생을 맡길 만한 더 이상의 공간은 없어 보인다.

   여승인 수연이 잠자코 내 곁으로 걸어온다. 나의 상념을 깨뜨리지 않으려는 듯 한동안 멀찍이서 기다리던 여승이다. 내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나를 향해 걸어온다. 나로부터 두어 걸음쯤 거리가 떨어졌을 때 발걸음을 멈추며 말한다.

  “이렇게 마음이 스산하리라고는 미처 몰랐어요. 왜 내가 댁과 만나기로 했을까요? 댁을 본 뒤부터 마음이 뒤흔들려 미칠 것만 같았어요. 이제 저는 어떡하면 좋죠?”

   수연의 얼굴을 바라보자 슬며시 마음이 언짢아진다. 얼굴에 드리워진 바람기가 피부로 느껴지는 자색(姿色)이 부담스럽다. 한 마디로 색정(色情)이 넘치는 미모가 내겐 부담스럽게 여겨진다. 수연은 반석(盤石)을 바라보며 내게 손짓을 한다. 함께 나란히 앉지 않겠느냐는 의사 전달이다.

  강물을 바라보며 수연과 나란히 앉는다. 서로의 시선이 서로의 눈매를 잠시 더듬는다. 이 때 수연이 입을 연다.

  “숱한 49재 시중을 들었지만 댁을 만난 건 운(運)이었어요. 어쩜 세상 떠난 그이와 흡사하게 닮았던지 숨이 멎는 듯했어요. 그이가 현신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죠.”

  수연의 얘기를 듣자 내 마음이 공허해진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 얘기를 여기까지 와서 들려주는 이유는 뭔가?’

   나의 눈길이 공허하게 허공을 더듬는 듯하자 수연이 나를 응시한다. 그러더니 또렷한 목소리로 그녀의 마음을 얘기한다. 이처럼 만난 것도 인연이지 않겠느냐고? 이런 인연을 통해 미래를 재설계할 의향은 없느냐고 묻는다. 그냥 질문이 아니라 간절한 애달픔이 묻어난 하소연에 가깝게 느껴진다.

   석양빛에 휘감기는 남한강의 물빛이 너무나 처연하다는 느낌이 든다. 윤희의 잔상이 스러지기도 전에 새롭게 밀려드는 설움의 느낌이다. 나는 수연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말한다.

  “스님! 물빛이 무척 애잔하게 가슴으로 스며드네요. 우리 강변을 거닐며 얘기를 나눌까요?”

   수연은 흔쾌히 고개를 끄떡이더니 함께 강변으로 내려선다. 어스름이 내린 강변길엔 말라붙은 갈대숲이 널리 펼쳐져 있다. 갈대숲 사이사이로 진달래꽃이 고개를 내밀고 활짝 피어 있다. 갈대숲 아래로는 아직도 신록(新綠)은 돋아나지 않은 상태다. 이른 봄철이라서 여전히 겨울 같은 삭막함이 사방에 깔려 있다. 수연이 나를 향해 말한다.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갈 인생이 아닌가요? 저도 2년간을 수도 생활을 했으나 마음이 잡히지 않아요. 이럴 때에 마침 죽은 그이와 흡사한 댁을 만나게 되었어요. 어쩜 전생의 인연이 댁을 만나게 한 건 아닐까 싶어요.”

  수연이 쓰는 ‘댁’이라는 용어마저 자연스럽게 들리니 이상할 노릇이다. 나도 걸으면서 수연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한다.

  “세상 떠난 애인에 대해 좀 들려주실래요? 지금의 우리에겐 그게 스님의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리라 여겨져요.”

   수연은 나의 눈을 들여다보며 서서히 입을 연다. 애인은 수연과 같은 대학을 졸업한 선배였다. 중국어를 전공한 둘은 중국에서 기반을 잡으려고 마음먹었다. 먼저 애인이 졸업하고 이듬해에 수연이 졸업했다. 중국의 상하이로 가서 둘이 전자회사에 취직할 작정이었다. 둘 다 대학에서 부전공으로 전자공학을 이수한 터였다. 그리하여 무난히 중국 회사에 취직이 된 터였다. 중국으로 들어가기로 한 2주일 전이었다. 둘이 국내 스키장에 들러 스키를 타던 중이었다. 한참 경사로의 눈 위를 타고 내려오던 중이었다. 느닷없이 애인의 자세가 흐트러지더니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채 미끄러졌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과 부딪혀 곤두박질치다가 목이 부러진 터였다. 병원으로 옮겨 보기도 전에 현장에서 절명한 거였다. 묘하게도 스키장에 가자고 제안한 사람은 수연이었다. 정신적인 충격을 감당할 길이 없어 한 달여의 시간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삭발하고는 불가(佛家)에 귀의했다. 그리고는 번민에서 벗어나려고 주야로 열심히 수행을 했다. 누가 보더라도 아주 모범적인 여승(女僧)으로 비쳤다. 하지만 여승이 되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1년간의 행자승(行者僧) 생활이 끝나면 2년간의 사미니(沙彌尼) 생활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2년간의 식차나마라는 수행 과정을 거친다. 이런 다음에 348계의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비구니(比丘尼)인 여승이 되는 터다. 차라리 비구니가 되려는 노력으로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애인과 비슷한 이미지의 나를 만나게 되었다고 들려준다.

   나는 그녀에게 나의 생각을 전한다. 단순히 이미지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의 유대가 성립되기는 어려우리라 말한다. 설혹 그런 관계로 인연을 맺는다 치더라도 달갑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이전 애인의 이미지와 비교되는 게 싫기 때문이다. 고유한 나의 이미지가 수시로 타인의 이미지와 비교되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도저히 나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이러한 마음을 전하자 수연이 돌연 한숨을 내쉬며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눈에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향해 말한다.

  “어쨌든 우리 둘은 애인과 사별한 신세이잖아요? 이런 처지끼리 이렇게 만난다는 것도 새로운 인연이라 여겨지거든요. 기존의 애인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우리 새롭게 사귀면 어떨까요? 제가 싫게 비치면 굳이 매달리지는 않을게요.”

   나는 일단 수연을 일으켜 세운다. 승복을 입었어도 향긋한 여인의 체취가 느껴진다. 하지만 덤덤한 표정으로 나는 잠시 강물의 바라본다. 왠지 이러한 만남은 여기서 끝내야 할 것으로 비쳐진다. 상처 입은 영혼끼리의 결합이 무슨 위안이 되겠는가 싶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단호히 입장을 밝혀 주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래야 수연이 헛된 망상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직한 내 심정을 수연에게 털어 놓는다. 내 말을 듣고 난 뒤다. 수연의 표정이 침울해지더니 나의 눈을 말끄러미 들여다본다. 순간적으로 나의 마음이 저려 온다. 그녀의 시선을 마주 바라보기에는 섬뜩한 기운마저 들기 때문이다. 한없이 착잡한 표정을 짓더니 수연이 손을 내민다. 작별하겠다는 뜻이리라. 내가 그녀에게 말한다. 설봉산의 산문(山門)까지는 태워다 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녀는 차디찬 낯빛으로 사양하겠다고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간다. 순간적으로 내가 중대한 실수를 한 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내 마음도 주체하기 어려운 처지가 아닌가? 이런 처지에 남 생각을 다 하다니?

   착잡한 심경으로 땅바닥만 보며 걷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본 순간이다. 섬뜩한 예감이 가슴을 얼얼하게 하는 기분이다. 문득 수연의 자취가 염려스러워진다. 이미 시야에는 수연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떤 불안감으로 나는 신속히 승용차에 올라 시동을 건다. 그리고는 이내 수연이 걸어간 강변도로로 차를 내달린다. 십여 분쯤 차를 몰고 갔을 때다. 강가에서 강물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여승의 모습이 보인다. 다른 사람이 아닌 수연임에 틀림없다. 무릎 정강이가 이미 물에 잠긴 상태인데도 멈추지 않는다. 나는 차를 바싹 강가에까지 몰고 간 다음에 차에서 뛰어내린다. 그리고는 강물을 향해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간다.

  “수연 씨, 잠깐만요. 제가 할 말이 있어요.”

  강심(江心)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수연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말한다.

  “이젠 필요 없어요. 저를 내버려 두세요. 더 이상 세속의 번뇌를 감당할 힘이 없어졌어요.”

   어느새 수연의 허리까지 물에 잠긴 상태다. 나는 기겁하여 강물로 달려든다. 오랜 세월로 수영에는 자신이 있는 나다. 거의 수연의 목에까지 물에 잠길 무렵이다. 나는 수연의 허리를 껴안고는 뒷걸음질로 강물로부터 벗어난다. 저녁 바람이 차가운 이른 봄의 강변에서다. 둘 다 물에 젖은 몸뚱이가 되어 마주 서 있다.

  ‘죽겠다는 사람을 살렸으니 내가 책임질 수밖에는 없잖은가?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뒤틀렸을까? 죽으려던 사람을 보고도 지나칠 수는 없는 상황이었잖아? 여기에는 필시 인간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뭔가가 작용했을 거야. 도대체 그 실체가 뭐였을까?’   

   수연을 보자 나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지려고 한다. 나의 표정 변화를 살폈음인지 윤희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준다. 내겐 윤희마저 아직 마음속으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다. 이런 판에 수연까지 떠안게 되어 그만 울음이 터진다. 그 동안 윤희의 죽음으로 억눌러 왔던 설움마저 폭발된 듯하다. 도저히 울음을 멈출 수가 없을 것만 같다. 한참 울어 기진맥진할 때다. 수연이 갈대숲에서 간들거리는 진달래꽃을 꺾어 내게로 걸어온다. 소담스레 핀 진달래 꽃가지를 꺾어 품에 가득 안고서 말한다.

  “혹시 저를 살린 게 후회스러우세요? 후회스럽다면 지금이라도 절 죽게 내버려 두세요. 괜한 동정심으로 명줄을 늘렸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요. 진정으로 저와 새로운 삶을 살겠다면 이 꽃을 받아 주세요. 제가 당신께 먼저 청혼할게요.”

  말을 마치자 수연이 조심스레 진달래 꽃무더기를 내게 내민다. 나는 곧장 손을 내밀지 못 한 채 생각에 잠긴다.

  ‘생명을 담보로 말하는 수연에게 뭘 더 따질 것인가? 가던 발길을 돌려 강변으로 차를 몬 것도 운명이지 않겠는가? 수연은 이미 사미니계에서 정한 계율을 어기고 나를 만난 상태이잖은가? 수연은 다시 산사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어. 그러기에 기꺼이 목숨마저 버리려 드는 것이리라. 어디 인연이 따로 있겠는가? 오늘의 인연도 얕지 않은 인연임에 틀림없으리라.’

   잠시 갈등의 굽이에서 버둥대던 나는 현실을 직시한다. 이미 운명의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고 여겨진다. 운명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작정한다. 기왕이면 나 스스로 즐거운 심정으로 승화시켜 받아들이고 싶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내 나는 선녀(仙女)를 맞아들이듯 경건한 자세로 진달래꽃을 받아든다. 어쩌면 진달래꽃은 윤희가 수연으로 환생한 실체일지도 모르리라 여겨지기도 한다. 창졸간에 어떤 영감(靈感)이 대자연으로부터 내게 전해진 느낌마저 든다. 하도 슬퍼하는 내가 불쌍하게 여겨져 대자연이 내린 조처라고도 생각된다. 하늘에 영혼이 있다면 윤희도 나의 정황을 이해해 주리라 여겨진다. 어쩐지 내 마음도 자꾸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진다. 그래야만 윤희에 대한 마음의 정리가 깨끗해지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 수연을 새롭게 받아들이고 싶은 터다. 49재를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 마음에 걸린다. 여인의 애정에 굶주렸던 듯이 곧바로 수연을 맞는 꼴은 아닌지? 내 마음이 당당하다면 전혀 구애받을 건 없다고 생각된다. 아무리 봐도 오늘의 일은 정해진 운명이 아닐까 여겨진다. 거듭 생각해 봐도 해석의 길은 한 가지밖에 없는 듯하다. 이왕 받아들일 처지라면 확실하게 받아들여야겠다고 작정한다. 나는 진달래꽃을 땅바닥에 내려놓고는 수연에게로 다가간다. 그리고는 경건한 마음으로 수연의 상체를 끌어안는다. 수연도 이내 나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나를 포옹한다. 나는 수연을 향해 말한다.

  “오랫동안 윤회하다가 사람으로 환생한 진달래꽃으로 여기고 당신을 맞아들일게요. 살다가 서로 힘들더라도 오늘을 잊지 말고 삽시다.”

  수연도 곧바로 응답한다.

  “네, 알았어요. 저도 오늘을 영원히 잊지 않을게요.”

  온 몸이 물에 젖어 차갑기 그지없었지만 왠지 포근하게 여겨진다. 석양도 지평선 너머로 잠겨 버린 시각. 찰랑대는 물소리만 끝없이 내 가슴으로 휩쓸려 들 뿐이다.

<200자 원고 70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