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비상의 공간
손정모
새벽에 피클레이(Peclay)로부터 전화를 받는 순간에 나는 해변을 떠올렸다. 푸른 별빛이 무리지어 휩쓸리는, 전남 고흥군 외나로도(外羅老島)의 해변을 말함이었다. 누구든 금발의 미녀인 피클레이의 정서를 나만큼 알지는 못했으리라. 누적된 과로 탓이었던지 눈조차 뜨지 못했다. 잠자리에 드러누운 채 그녀의 전화를 받는 순간에 그랬다. 아무리 바빠도 약속 시간을 맞춰 달라는 부탁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전화기를 내려놓고 말았다. 자던 중이라 안면 신경이 너무 당겨서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애틋한 목소리가 마음에 잠시 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수면 부족으로 나는 이내 새벽 잠 속으로 빨려들고 말았다.
아침에 나는 연구소 3층의 창문으로 창 밖을 내려다보고 있다. 햇빛이 눈부시게 뒤엉켜 나뒹구는, 해변의 백사장이 보인다. 백사장에서 반사되는 햇살을 바라보던 중이다. 문득 신규 프로젝트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피클레이와 약속한 저녁 시간에는 신규 프로젝트(KSP-1)의 성공을 재확인하게 된다. ‘새로운 공간으로의 비상’을 의미하는 프로젝트이다. 지난주에 830km 고도로의 위성체의 발사 실험이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이 러시아에서 실시한 실험의 결과였다. 모조 위성체가 원형 궤도를 선회하다가 섬광을 내뿜게 예정되어 있다. 그 시각이 바로 피클레이를 만나는 저녁 7시 10분이다. 눈을 찌르며 달려드는 빛살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찰나다. 그만 신규 프로젝트에 대한 상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러다가 문득 미국의 플로리다 반도 남동부의 마이애미(Miami)의 백사장이 떠올랐다. 열대 야자수들이 줄지어 선 해변 아래로 펼쳐진 백사장. 숱한 남녀들이 반라의 몸으로 뒹굴던 백사장이 눈에 선히 잡혔다. 거기서 지난 2년간을 피클레이와 함께 시간을 나누던 추억이 떠올랐다. 바닷바람이 밀려드는지 연구실의 창문이 덜컹거린다. 덜컹거리는 단조로운 음향에서도 그리운 시간의 자취가 느껴지는 듯하다. 고흥군 봉래면의 외나로도 하반 마을에 위치한 우주 센터(Space Center). 한국 항공 우주의 미래가 담긴 요람이기도 하다. 면적이 26.47km2에 해안선의 길이가 45km인 외나로도. 우주 센터는 섬의 동쪽에 150만 평의 규모로 들어서 있다. 탁 틘 공간 탓으로 고개만 들면 바다의 정경이 밀려든다.
연면적 2,184평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인 발사 통제동. 이 건물 3층의 바다로 향해 열린 연구실이 나의 집무실이다. 발사 통제동의 인근 건물로는 추적 레이더동과 조립 시설동이 있다. 해안에 위치한 연구원들의 숙소동은 레이더동과 조립 시설동 사이에 있다. 고개를 들면 바다와 함께 인근 건물들이 대번에 밀려든다.
내게도 미항공 우주국(美航空宇宙局: NASA)에 2년간 몸담았던 시기가 있었다. 아마도 2년 전 봄날이었으리라. 객원 연구원으로 있던 내가 처음으로 피클레이를 만났던 날을 말함이었다. 미국의 금발의 미녀 연구원인 피클레이는 매혹적이었다. 오뚝한 콧날과 초승달같이 휘어진 눈썹. 윤택이 이는 희부연 피부에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 깔끔한 배열로 균형이 잡힌 단아한 이목구비. 어디를 바라보아도 금세 끌려들 것만 같은 흡인력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한 마디로 너무나 자색이 아름다워 현기증이 일 정도였다. 그녀를 만나면서부터 내 가슴엔 애틋한 연민(憐憫)이 싹트기 시작했다.
피클레이에 대한 연민의 정은 발사 추진체(發射推進體: launch vehicle)로부터 비롯되었다. 발사 추진체는 엔진의 추진력에 의해 대상물을 우주로 날리는 도구다. 주로 로켓 엔진에 의한 비행 물체이며 간단히 로켓이라고도 불린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 결코 몰랐을 터였다. 발사 추진체에 그처럼 깊은 애환이 서려 있었을 줄을.
햇살은 소담스런 느낌으로 반공에 떠올라 빛을 내뿜는다. 태양의 광구(光球)만 바라보면 끊임없는 에너지의 출렁거림이 피부로 느껴진다. 내가 피클레이를 처음 대하던 날도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를 대하면 전신의 피가 온통 요동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보다는 4살 밑의 피클레이는 당시에 25살의 처녀였다. 버클리대학에서 박사학위(Ph. D.)를 받자마자 미항공 우주국으로 뛰어든 터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학위 취득 후의 연수과정의 일환이었다.
책상에서 일어나 커피와 찻잔을 찾아든다. 끓인 물에 커피를 타니 금세 향기가 연하게 실내로 퍼진다. 우주 위성 추적 연구실. 나와 정권호 박사의 공동 연구실이자 실험실로 구획된 공간이다. 공동 연구원인 정권호 박사는 미국 출장중이다. 그래서 위성 추적 연구실은 당분간 혼자서 사용해야 할 처지다. 커피의 맛이 미뢰(味?)를 자극할 무렵이면 마음이 무척 평온해진다.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컴퓨터에 연결된 대형 액정 모니터를 들여다본다. 벌써 몇 개국에서 보낸 메시지가 모니터의 상단에서 깜박거린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러시아의 후르나호프(Hurnahoff) 박사의 발신문이다. 나와 동갑인 후르나호프는 2년 전에 스탠포드대학에서 함께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는 둘은 함께 2년간을 미항공 우주국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보냈다. 학위 취득 이후의 연수과정의 일환이었다(post-doctoral course).
아래 검색 범위에 들어있는 우주 파편의 분포도를 전송 바람.
검색 위치: 적경 130도∼ 135도, 적위 53도∼ 58도 공간.
- 후르나호프(Hurnahoff) -
나는 즉시 컴퓨터의 위성 탐색 프로그램을 연다. 프로그램이 작동되자 위성 추적용의 전자 장비의 램프들이 깜박인다. 깜박이는 소형 램프들을 바라보며 후르나호프의 속셈을 헤아려 본다. 프로그램의 지령에 따라 천체용의 광학 장비가 자동으로 작동되기 시작한다. 천체 망원경의 경통이 미세한 기계음을 내며 자동으로 길이가 조절된다. 천체 망원경과 함께 광파 발진기가 일제히 작동한다. 일정한 진폭에 주파수만을 달리 하는 주파수 변조가 먼저 이루어진다. 연이어 일정한 주파수에 진폭을 변화시키는 진폭 변조가 실행된다. 설정된 주파수와 레이더에 도달된 반사파의 자료가 분류된다. 배율에 따라 시간의 함수로 우주 파편의 궤적이 그려진다. 3차원으로 표시되는 입체 좌표계이다.
제한된 수명을 벗어나 궤도를 이탈한 위성체들이 우주 파편을 형성한다. 우주 파편은 우주의 공간을 떠돌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궤도 위성과 파편이 충돌하게 되면 위성이 파괴되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숱한 비용으로 개발된 위성의 생명이 끝나 버린다. 지난 40여 년간 지구인들은 5,000여 개의 위성을 발사했다. 이들 중에서 대략 4,500여 개가 우주 파편으로 떠도는 실정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세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각종 위성체를 추적하고 있다. 추적된 정보는 유료 서비스 체계로 세계 각국에 제공된다. 추적 시스템이 잘 갖춰진 선진국들도 한국의 서비스를 자주 이용한다. 한국의 정보 제공에 소요되는 시간이 세계에서 월등히 빠른 탓이다. 나는 요청한 적경과 적위 범위 내의 비행체들을 파악해 본다. 20여 개의 비행 물체가 포착된다. 마우스를 움직여 배율을 바꿔 가며 비행 물체들을 감별해 낸다. 후르나호프에게 금세 정보를 제공한 뒤다. 컴퓨터에 연결된 소형의 수신 램프가 섬광을 뿜어댄다. 화상 모니터로 대화를 시도해 오는 국가들을 위해 설치된 장비다. 즉시 화상 디지털 카메라로 전원이 흐르면서 모니터에 영상이 잡힌다. 상대 국가는 인도다. 30대 중반의 인도의 과학자들인 라팔레스 부부의 얼굴이 나타난다. 화상으로는 자주 만나는 얼굴들이다. 컴퓨터에 연결된 마이크를 통해 라팔레스를 향해 말한다.
“라팔레스 박사님, 안녕하셨어요? 오늘은 한결 신수가 훤해 보입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보네요. 도움이 필요한 항목을 말씀해 주시면 최대한 빠른 서비스를 하겠습니다.”
라팔레스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싱긋 미소를 짓더니 응답한다.
“닥터 현, 안녕하세요? 어제 우리나라의 위성이 궤도를 벗어났거든요. 아마 수명이 다한 모양이에요. 위성의 위치를 가능한 한 빨리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H우주 연구원 수수료 안내문이 실린 화면을 화상으로 내보낸다. 곧바로 컴퓨터의 우측 단말기의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한다. 선납의 형식으로 수수료가 먼저 국제 금융 메일로 처리된 증표(證票)다.
3분가량의 시간이 지났을 때다. 인도의 실종된 위성의 위치가 모니터에 잡힌다. 위성은 남위 30?의 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레의 상공 6,700km 상공에서 포착된다. 곧바로 정보를 라팔레스에게로 날려 보낸다. 과제를 해결할 때마다 뭔가 가슴에 공허한 느낌이 밀려든다. 묘하게도 이 때 피클레이의 목소리가 귓전에 되살아난다.
“아무리 바빠도 약속 시간은 맞춰 주세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약속을 어긴 경우는 없었다고 여겨진다. 그럼에도 약속 시간을 맞춰 달라고 말했던 피클레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마도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아니면 그녀에게 언젠가는 내가 약속을 어길 사람으로 비쳤는지도 모르리라. 미국의 버클리에서 매달 두어 번은 야외에서 만나던 사이가 아닌가? 그것도 미항공 우주국에서 그녀를 처음 만난 날부터 2년간의 시간을! 피클레이 역시 학위 후 연수과정의 객원 연구원으로 만난 사이였다. 그녀는 버클리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한 후에 미항공 우주국에서 연수를 했다. 버클리대학은 나와 후르나호프가 졸업한 스탠포드대학과는 같은 버클리 시에 있다. 그랬어도 대학원 시절에는 서로를 알지 못했던 터였다. 만약 대학원 시절부터 알게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정이 듬뿍 들어 결혼이라도 하게 되었을까? 하지만 쉽게 그렇게 되지는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동양의 고정 관념의 틀이 내게도 무섭게 작용했을 테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혼혈아를 태어나게 해서는 불행해질 거라는 관념을 말함이다. 이런 관념의 벽도 피클레이의 가슴에까지 애잔한 슬픔으로 전달되었으리라 여겨진다.
누군가 연구실의 문을 똑똑 두드리며 들어선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27살의 신혜원 박사다. 지난 4달 동안 나와 함께 러시아를 방문했던 처녀 연구원이다. 활짝 미소를 띤 얼굴은 언제 봐도 평온한 느낌이 든다. 러시아의 모스크바 북쪽의 리빈스크에 있는 우주 개발원에서였다. 4달간의 발사체 실험에서 혜원과 나는 공동 작업을 많이 했다. 그런 관계로 인하여 둘은 스스럼없이 지내는 처지다. 혜원은 연구실로 들어서면서 입을 연다.
“기섭 씨, 무슨 일에 그렇게 열심이세요? 좀 쉬었다 하세요. 제게 차 한 잔도 주시구요.”
나는 뜨거운 커피 잔을 혜원에게 권한다. 그리고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혜원과 마주 앉는다. 혜원은 연이어 내게 말한다.
“러시아 다녀온 후에 연구는 잘 진척되나요?”
혜원은 입가에 미소를 흘리며 커피를 마신다. 액체 엔진의 개발이 혜원과 나의 주된 업무 영역이다. 액체 엔진의 생명은 지속적인 연소를 유지하는 일이다. 액체 엔진은 걸핏하면 연소가 중단되는 일이 허다하다. 자칫하면 연료가 엔진 바깥으로 새어나가 연소시키는 순간에 폭발하곤 한다. 이런 난점을 해소하려면 각별한 연구가 필요한 처지다. 액체 엔진에 대한 토론의 대상자로 혜원은 나를 자주 찾는다.
나는 습관적으로 벽시계를 흘깃 바라본다. 어느새 오전 11시 무렵이다. 혜원은 아니나 다를까 도면이 그려진 수첩을 펼친다. 액체 연료를 연소실에 지속적으로 흘려보내려면 2가지 기술이 필요하다. 하나의 기술은 가압 탱크와 연료 탱크를 잘 잇는 방법이다. 가압 탱크에는 헬륨과 같은 액화 가압제가 채워진다. 액체 추진 과학 로켓(KSR-III)의 경우에 연료로는 등유(kerosene)가 사용되었다. 등유는 상온에서도 액체다. 등유를 산화제인 액체 산소와 연소실에서 섞어서 연소를 지속시켜야 한다. 액체 헬륨이 기화할 때에는 압력이 증가하게 된다. 전자 제어 시스템에 의해 일정량의 헬륨을 조금씩 발출하면 된다. 이 때의 헬륨의 압력으로 연료가 연소실로 이동하게 된다. 둘째의 기술은 액체를 연소실로 흘려보내는 미세 노즐(nozzle)의 개발이다. 미세 노즐의 경우에 재질과 강도가 탁월해야 한다. 더불어 노즐의 직경이 균일해야 하며 노즐이 막히지 않아야 한다. 노즐이 막히게 되면 액체 산소나 연료의 공급이 차단되게 된다. 이런 경우가 발생하면 엔진의 연소 중에 엔진이 터져 버린다. 균일한 직경을 갖는 미세 노즐로 이루어진 액체의 유출 시스템. 마치 사람의 실핏줄에 해당되는 미세 노즐의 제조는 핵심 기술이다.
혜원이 나를 향해 말한다.
“사람으로 치면 실핏줄 다발과 같은 게 노즐 망(網)이죠. 미세 노즐의 다발 속을 흐르는 유속을 조절하는 계기(計器)가 필요해요. 그것도 아주 정밀한 부품이 아니면 어려울 거예요. 1주일 전의 발사체의 발사 성공에 힘을 얻기는 했지만요. 보다 더 정밀한 계측기를 만들 필요가 있어요. 여기에 관한 아이디어가 필요한 시점이에요.”
나는 혜원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2007년부터는 독자적으로 위성 발사체를 쏘아 올려야 하는 한국의 실정임에랴! 나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바짝 긴장이 되곤 한다. 이전부터 생각해 둔 액체 배출의 미세 노즐의 모형을 그린다. 그려진 모형을 통해 혜원과 나는 토론을 한다.
혜원과 토론하다가 보니 어느새 정오에 이르렀다. 점심시간이다. 혜원과 나는 연구실을 떠나 식당으로 내려간다. 식탁에는 수십 명에 달하는 연구원과 종업원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서로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분위기에 젖는다. 식판을 들고 배식을 받으니 따끈한 삼계탕이다. 혜원과 나는 마주 앉아 식사를 시작한다.
맑은 음향처럼 피클레이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되살아난다. 약속 시간을 맞춰 달라니? 오늘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생각할수록 궁금해지기만 한다. 피클레이가 한국에 온 지는 2달째에 접어든다. 미국이 세계의 위성 개발 실태를 파악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었다. 관련 과학자들에게 특정 국가를 지정하여 세계로 내보낸 거였다. 한국의 경우에는 피클레이가 담당자로 선정되어 파견되었다. 한국 정부에서도 피클레이에 대한 배려를 했다. 외나로도의 남서쪽인 염포 해수욕장의 해안가에 외국인 숙소를 마련해 주었다. 외국인 숙소는 통나무 재목을 써서 별장식으로 축조된 건물이었다.
“식사 도중에 무슨 생각을 그리 많이 하세요?”
혜원이 식사를 하며 내게 말을 건넨다. 내가 피클레이에 대한 생각을 너무 깊이 한 모양인 듯싶다. 나는 혜원의 말에 즉시 웃음을 머금고 응답했다.
“삼계탕이 너무 맛있기에 맛을 음미하느라고 잠시 넋을 잃었나 봐요.”
거의 음식 그릇을 다 비워 가는 혜원을 바라볼 때다. 지난 4달 동안을 러시아에서 함께 애쓰던 정경이 떠올랐다. 2007년 10월에 계획된 발사체(KSLV-1호) 엔진의 공동 개발과는 별도의 프로젝트였다. 러시아와 액체 엔진을 공동 개발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기술. 이것을 한국에서는 별도의 후속적인 발사체 개발 프로그램(KSP-1)에 삽입하기로 했다. 러시아와 공동으로 KSLV-1호의 액체 엔진을 개발하는 기간 내에서였다. 한국은 중형의 위성을 쏘아 올릴 액체 엔진을 개발하려는 거였다. 그것도 러시아에서 익힌 기술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기술로 개발하려는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의 실무 담당자가 혜원과 나였다.
한국에서 제조된 엔진은 수시로 러시아로 옮겨서 발사 시험하기로 했다. 리빈스크(Rybinsk) 야외에서 엔진을 점화할 때였다. 비행기로 공수해 간 5개의 발사체의 엔진을 차례대로 점화할 때였다. 엔진의 점화는 매일 1개씩을 발사대에서 실시하기로 했다. 엔진이 만들어진 순서대로 점화시키는 거였다. 보통의 경우에는 1주일에 1번씩 발사하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하루라도 빨리 자립 기반에 올라야 했다. 그래서 은밀한 외교적 협력 체제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 결과로 매일 1발씩의 발사체를 발사하기에 이른 거였다. 이것은 유례가 없는 배려였다. 러시아가 한국과 손잡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한 결과이리라. 첫 번째 발사체의 엔진 점화에서였다. 점화되자마자 발사체는 폭음을 내며 발사대에서 그대로 터져 버렸다. 미처 공중으로 날아올라 보지도 못한 채 터진 거였다. 이럴 때의 액체 엔진이란 단순한 폭약에 불과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순간이었다. 혜원과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주변국 과학자들의 시선에 아랑곳하기에는 너무나 슬픔이 컸기 때문이었다. 무려 몇 개월간을 공들여 만든 액체 엔진이 아니었던가? 하늘을 날아오르기도 전에 산산 조각으로 터져 버리다니? 한국 자체의 기술로 대형의 위성 발사체를 띄우겠다는 일념이 아니었던가? 그런 정신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엔진이 폭발해 버리다니? 더 이상 체면이고 위신이고를 따질 겨를이 없이 울음이 터졌다.
도전의 현장에서 실패를 할 때의 슬픔이란 처절한 터였다. 누가 누구를 달래고 위로해 줄 처지가 아니었다. 국민들의 기대를 단숨에 저버린 현실의 처지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생각할수록 앞날이 난감하기만 했다. 시차를 두고 꾸준히 개량한 5개의 엔진 모두가 실패로 끝난다면? 그 때는 정말 돌아갈 자리가 없으리라 여겨졌다.
1주일이 흘러 다섯 번째의 발사 실험마저 실패로 끝난 날이었다. 혜원과 나는 광막한 리빈스크 호반에 앉아 술잔에 술을 채웠다. 울분에 휩싸인 뇌신경으로부터는 분노의 전파가 우주로 발산되고 있었으리라. 분노의 전파에 운 나쁘게 부딪히는 날짐승이란 날짐승은 변사체로 나뒹굴었으리라. 울화로 인하여 가슴은 벌렁대고 동공에는 광기가 일렁거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정신이 온전히 배겨 나질 못할 듯했다. 호반에는 빈 술병들이 박스째로 나뒹굴기 시작했다. 혜원은 음주로 머리가 어지럽다며 먼저 숙소로 쉬러 갔다. 나는 도저히 울화를 달랠 길 없어 광활한 호반을 거닐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의 처녀 연구원인 히타루스(Hitarous)와 의외의 장소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피클레이와 동갑인 그녀를 처음 만난 곳도 미항공 우주국이었다. 그녀는 미국 시절부터도 남녀와의 교제에는 자유분방한 기질로 소문난 상태였다. 얼굴도 피클레이만큼이나 수려한 편이었다.
내가 술이 취하여 호반의 돌출된 언덕을 감돌아 지날 때였다. 느닷없이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오토바이가 수면으로 곤두박질쳤다. 엉겁결에 달려가 보니 히타루스가 오토바이와 함께 수면으로 나뒹군 상태였다. 오토바이 전복 사고였다. 응급 구조를 하고 알아보니 히타루스는 술로 만취된 상태였다. 러시아에는 후르나호프를 만나러 온 거였다. 후르나호프는 미항공 우주국에서 함께 지냈던 러시아 연구원이다. 후르나호프와 사랑을 나누었지만 후르나호프가 최근에 변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슬퍼 음주 상태로 오토바이를 몰다가 호반에서 나뒹군 거였다. 호반에서 가까운 숙소로 가던 중이었다고 했다. 다행스레도 히타루스의 외상은 거의 없었다. 실의에 빠져 극도의 공황감에 시달리던 히타루스였다. 그런 그녀가 나를 알아보더니 성에 굶주린 마녀가 되어 달려들었다. 평소부터 그녀의 자유분방한 성향을 잘 알던 나였다. 그랬기에 굳이 그녀를 마다하며 몸을 사리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 날 밤의 나의 심리 상태도 최악이지 않았던가? 호반에서 알몸으로 뒤엉켜 둘은 미치도록 서로를 탐하며 나뒹굴었다.
히타루스를 호반 근처의 그녀의 숙소까지 데려다 준 뒤였다. 새벽에 나는 리빈스크에 있는 공관 숙소에 들어섰다. 공관 숙소는 러시아에서 설립한 외국인 거주용의 소형 아파트였다. 숙소는 같은 출입문에 2개씩의 침실을 갖춘 호실들로 이루어졌다. 혜원과 내가 지급받은 3호실의 출입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섰을 때였다. 놀랍게도 혜원이 거실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혜원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거실용 탁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녀의 곁으로 마시다 남긴 술병들이 나뒹굴었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아직까지 잠자지 않았어요? 혜원 씨의 침실로 가서 주무셔야죠.”
혜원은 넋 잃은 듯 고개를 흔들더니 칭얼대듯 말했다.
“지금까지 어디 있다 왔어요? 나 혼자 이렇게 버려두고 말이에요.”
혜원의 말을 들은 순간이었다. 순간적인 부끄러움이 치밀어 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혹시 히타루스와 뒤엉킨 사실을 알아차린 건 아닌지 가슴이 벌렁거렸다. 마치 몰래 알몸으로 거실로 들어서다가 혜원에게 들킨 듯한 심정이었다. 찰나간의 반작용이었을까? 나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대꾸의 말이 튀어 나왔다.
“혜원 씨가 제 행적까지 알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한 번이라도 같은 시간에 취침하기로 약속한 적이 있었어요? 어디 우리 사이가 그럴 사이나 돼요? 바랄 걸 바라도록 해야죠, 안 그래요?”
나는 비칠거리며 거실 곁의 욕실에 들렀다가 나의 침실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이내 잠자리에 들었다. 피곤했던 탓이었으리라. 금세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새벽에 요의(尿意)를 느껴 눈을 떴을 때다. 침실 바깥의 거실에서 예상치 못한 혜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며시 침실문을 열고 거실을 내다보았다. 놀랍게도 혜원은 나의 침실문 앞의 거실에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그것도 얇은 담요 위에 속옷 차림으로 다리를 벌린 자세였다. 숙취한 상태의 일이기에 이해가 되었다. 혜원은 새벽에 그녀의 침실로 가지 않았던 거였다. 얇은 담요만 깔고서 거실 바닥에 잠들어 잠꼬대를 하는 중이었다. 순간적으로 애잔한 마음이 일었다. 그녀를 깨워서 그녀의 침실로 가게 할까도 싶었다. 하지만 도중에 잠을 깨우는 것도 결례라 여겨졌기에 그만두기로 했다. 소리 죽여 화장실에 다녀온 뒤에는 이내 나의 침대에 올랐다. 닫힌 침실문 바깥으로는 짬짬이 혜원의 흐느끼는 듯한 잠꼬대가 흘러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애잔한 마음이 일어 가슴이 쓰렸다. 그 날 새벽처럼 가슴이 무거웠던 날도 없었던 것 같다.
혜원이 마침내 수저를 식탁에 내려놓는다. 점심 식사가 끝났음을 알려주는 그녀의 몸짓이다. 식당에서 빠져 나와서는 둥굴레 차를 마시고는 그녀와 헤어진다.
연구동 건물을 오르면서부터 서비스를 신청한 나라가 얼마일지 추측해 본다. 아마도 적지 않게 신청했으리라 여겨진다. 잠시도 쉬지 않고 경쟁해 가는 것이 국제 정세가 아닌가?
오후 1시부터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조작한다. 컴퓨터 화면의 상단에는 서비스를 신청한 국가들이 순서대로 표시되어 있다. 잠깐 사이에도 수십 명에 달하는 인원들의 메시지가 적혀 깜박인다.
컴퓨터 화면에 줄줄이 흘러드는 명단을 바라볼 때다. 숱한 이름의 명단에서 문득 계곡에서 북적대는 사람들이 연상되었다. 특히 피클레이와 함께 두 번째 나들이를 하던 날이 떠올랐다. 콜로라도 강의 하류로부터 상류를 따라 승용차로 달렸다. 그러다가 미드호(湖)에서 포웰(Powell)호(湖)까지 형성되어 있는 계곡을 거슬러 올랐다. 대규모의 침식 지형인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의 장관이 펼쳐졌다. 콜로라도 강의 물줄기가 이루어 낸 대자연의 신비에 감동하고 말았다. 그 날의 벅찬 감정으로는 피클레이와 어떤 대화도 나눌 듯했다. 25살의 젊고 발랄한 성격의 미녀인 피클레이였다. 차에서 내려 인파들로 북적대는 강변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녀는 오른팔로 나와 팔짱을 끼고는 함께 걷기 시작했다. 함께 걸을 때마다 젊은 여인의 체취(體臭)가 전신을 흥분시키곤 했다. 나는 점차 고조되려는 마음의 열기를 추스르기 어려웠다.
저녁이 되어 석양이 질 무렵이었다. 침식 협곡을 따라 걷다가 호젓한 석동 앞에 이르렀다. 슬슬 땅거미가 지면서 주변에는 인적조차 없었다. 너무나 빼어난 절경이라 온갖 세상의 번뇌마저 일시에 사라지는 듯했다.
바로 그 때에 피클레이의 탄식하는 목소리가 가늘게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놀란 가슴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변에는 점차 사람들이 빠져 나가 한적한 상태가 되었다. 탄식하는 이유를 물어보니 사별한 연인 때문이라고 했다. 한동안 아름다운 계곡만을 주시하던 그녀가 과거사를 얘기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슬그머니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그녀의 연인인 마이클(Michael)은 대학 동문으로 함께 졸업한 사이라고 했다. 피클레이가 대학원에 진학한 반면에 마이클은 곧바로 우주 산업체에 취직했다. 그러면서 줄곧 교제를 해 왔다고 한다. 피클레이가 박사학위를 받기 6개월 전에 마이클이 사고를 당했다는 거였다. 위성 발사체의 엔진을 점검하던 중의 폭발 사고로 즉사했다고 한다. 가슴 저린 슬픔으로 인해 피클레이는 그만 죽어 버리고도 싶었다. 학위를 받고 미항공 우주국에 연구원으로 들어서면서 나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 나를 만난 날 그녀는 심한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왠지 전생에서부터 기약된 연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더라고 했다. 처음 대한 순간에 마이클마저 잊힐 정도로 매력적으로 느꼈다고 한다. 그런 말을 내게 들려준 직후였다. 그녀는 왈칵 나의 목을 끌어안았다. 나 자신도 겉으로 표현만 안 했을 뿐. 피클레이의 빼어난 미모와 고결한 품성에는 언제나 친밀감을 느끼던 터였다. 그런 그녀가 사랑의 고백에 가까운 얘기를 하는 게 아닌가? 나도 모르게 심장이 벌떡거리며 뛰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수동적인 자세를 취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피클레이, 나도 당신이 참 좋았어요. 내게 당신의 마음을 솔직히 고백해 주어서 너무나 고마워요.”
“기섭 씨, 우리 이제부터 연인이 되기로 해요. 저를 사랑해 줄 수 있겠어요?”
나도 달뜬 목소리로 응답했다.
“그럼요. 저는 이미 당신의 연인인 걸요.”
나의 말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고 작정하기라도 한 듯. 그녀는 천천히 나의 입술에 그녀의 입술을 갖다대었다. 나도 와락 그녀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입술에 뜨거운 숨결을 토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살갗과 접촉되자 한없이 감미로운 촉감이 밀려들었다. 콧잔등의 실핏줄이 다 터질 듯한 진한 흥분이 전신을 휩쓸었다. 그 순간 콧속으로 샤넬 계통의 향수 냄새가 파고들었다. 색정을 순간적으로 불러일으키는 향내이기도 했다. 순간적으로 말초신경이 자극되면서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전신을 어루더듬기 시작했다.
수십 명에 달하는 메시지의 내용을 처리하는 데에도 시간은 충분했다. 그만큼 광학이나 전자장비의 성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반시간도 되기 전에 처리를 끝내고 난 뒤다. 홍삼차를 한 잔 마시려고 티 백(tea bag)을 주워들 때다. 컴퓨터의 화상 모니터에 녹색 불빛이 깜박이더니 여인의 얼굴이 나타난다. 여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의 화상 단자에도 전원이 켜진다. 화상 카메라가 작동되면서 나의 얼굴도 상대에게 전송되게 된다. 화상 얼굴의 주인은 러시아에서 나와 몸을 섞었던 히타루스(Hitarous)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재능이 탁월한 미모의 연구원이기도 하다. 화상 마이크를 통해 그녀의 음성이 귓전으로 흘러든다.
“닥터 현, 잘 지냈어요? 미국에서 함께 머물던 시절이 그립군요. 요즘도 피클레이랑 잘 지내세요?”
나도 기다렸다는 듯 반가운 응답을 했다.
“네, 반가워요.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이네요. 오늘은 뭘 도와 드릴까요?”
이스라엘이 구상중인 우주 정거장 설치에 대한 자문이 필요하다고 한다. 우선 설치 위치부터가 문제가 된다고 말한다. 숱한 위성체의 파편으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잡겠다고 한다. 의당 옳은 얘기라고 생각된다. 기존의 여러 국가에서 만드는 우주 정거장과의 거리도 살펴야 한다. 왜 이스라엘이 단독으로 우주 정거장을 만들려는지 과거에는 의아심이 일었다. 히타루스의 얘기로는 유럽 연합의 갈릴레오 프로젝트에 상응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은 단독으로 위성 망(衛星網)을 구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 전초 기지로 삼으려는 게 우주 정거장이라고 한다. 히타루스가 원하는 것은 지난 3개월 동안의 우주 파편들의 궤적이다. 그 궤적들만 봐도 위치 선정에는 상당한 도움이 되리라 여겨진다. 대략 자료 검색에 필요한 시간을 헤아려 본다. 전산 입력된 자료를 검색만 하면 되는 상태다. 많이 걸려도 5분이면 충분한 시간이다. 수수료 입금 후 5분 이내에 자료를 송출하겠다고 히타루스에게 알려준다. 히타루스는 고맙다면서 은근한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지난주의 소형 위성 발사체의 실험은 잘 끝났어요? 후르나호프한테 들었는데 결과도 성공적이었다고 하더군요. 정말 짧은 시간 내에 이룬 성과가 놀라워요. 그건 그렇구요. 당신과 함께 했던 리빈스크의 호반의 추억이 그리워요. 자꾸 당신이 그리워지면 나 어쩌죠?”
지난주의 발사체의 발사 성공은 혜원과 나의 공동 작업의 소산이었다. 액체 연료를 연소실로 수송하는 미세 노즐의 직경에 변화를 주었다. 연소실에 가까운 부분의 노즐의 직경을 0.40mm로 했다. 연소실과 액체 연료통의 중간 부분의 노즐의 직경은 0.30mm로 바꾸었다. 연료통에 인접한 부분의 노즐의 직경은 0.35mm로 제작했다. 그리고 노즐 뭉치의 3곳에 압력 게이지와 감지 센서를 달았다. 그리하여 액체 연료의 송출 유압을 측정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측정되는 유압은 감지 센서를 통해 전기 신호로 변화시켰다. 전기 신호로 변환된 자료가 그린 그래프로 유속의 안정성을 파악했다. 이렇게 제작된 미세 노즐 뭉치에 대한 연료 송출 실험에서였다. 수십 회씩의 실험을 되풀이하며 유속의 안정화를 측정했다. 이런 작업을 하느라고 혜원과 나는 밤을 함께 지새우기도 일쑤였다.
지난주의 성공 사례를 떠올리며 나는 벅찬 심정으로 히타루스에게 응답한다.
“당신처럼 격려해 주는 분들이 많아서 성공한 것 같아요. 지금도 꿈을 꾸는 느낌이에요.” 이전에 플로리다 해변에서 피클레이와 내가 여름철 휴가를 즐길 때였다. 수영복 차림으로 함께 해변을 나뒹굴며 사랑의 정감을 나눌 시기였다. 그 때 우연히 백사장에서 수영복 차림의 히타루스를 만나게 되었다. 히타루스는 친구들 셋과 함께 여름철 휴가를 즐기던 중이라고 했다. 히타루스는 놀란 눈으로 피클레이와 내가 연인 사이였느냐고 거듭 물었다. 반복해서 묻는 그녀의 얼굴엔 까닭 모를 안타까움이 실린 듯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야 히타루스도 내게 연정을 품었었다고 고백하며 울먹였다.
뻐꾸기시계가 오후 5시를 알려준다. 저녁 이맘때면 해풍이 세차게 일곤 한다. 잠시 후면 혜원이 연구실에 들를 것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노크 소리와 함께 그녀가 실내로 들어선다. 혜원이 물을 끓여 커피를 타서 잔을 내민다. 그런데 묘한 것은 심리 상태인 모양이다. 혜원을 바라볼 때마다 피클레이의 얼굴과는 대조가 됨을 느낀다. 피클레이의 수려한 미모에 익숙해진 눈에는 상대적으로 못난 얼굴은 불만스러워진다. 마음속으로는 대단히 미안한 일이지만 혜원을 볼 때마다 착잡하기만 하다. 그녀와는 발사체 문제로 러시아까지 몇 차례나 동행한 사이가 아닌가? 그랬음에도 업무 이외의 영역에 있어서는 전혀 교감이 없는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능력은 너무나 빼어나다는 점이 모순스럽기만 하다. 한국 우주의 미래를 위해서는 그녀의 두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그렇기에 언제나 오후 5시 무렵의 그녀의 내방은 기다려지는 터다. 순수한 과학 및 기술 개발에 관한 대담이라면 무조건 환영이다. 커피를 감미롭게 마시다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혜원이 말한다.
“1주일 전의 발사 성공이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혹시 우리 지금 꿈을 꾸는 건 아니죠?”
나도 무의식적으로 응답한다.
“제게도 꼭 꿈만 같게 느껴져요. 어쩜 그렇게도 깨끗이 성공할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해요.”
지난 4달 동안 무려 5차례나 러시아를 왕복했다. 1차례의 왕복 때마다 5개의 발사체 엔진이 발사장으로 수송되었다. 지난주에도 5개의 발사체 엔진을 갖고 러시아를 찾았다. 리빈스크 발사대에서 2번째까지의 엔진이 폭음 소리를 내며 터져 버렸다. 반복되는 실패였기에 온몸의 신경이 마비가 되는 심정이었다. 초창기에는 너무 슬퍼서 통곡도 했다. 그렇지만 울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기에 울면서도 과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서 언제나 창자가 타는 듯했다.
지난주의 화요일 오전 10시 10분경이었다. 가지고 간 3번째의 발사체를 발사대 위에 장착했다. 러시아의 발사체 점화 전문가들이 부산하게 오간 뒤였다. 점화를 해도 좋다는 깃발이 움직였다. 전기 스파크에 의한 원격 점화 방식이었다. 발사대로부터의 안전 반경 바깥에서 혜원과 나는 망원경으로 발사체를 지켜보았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서 나의 가슴은 극도로 전율했다. 나지막하면서도 지극히 귀에 거슬리는 점화의 음향이 이는 순간이었다. 또 폭발하는 건 아닌지 가슴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발사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발사체 추적 전자 장비에 딸린 액정 화면에서였다. 실시간으로 엔진의 연소 개시와 종료의 시간이 분석되어 화면에 제시되었다. 그뿐이랴? 각 시간에 따르는 발사체의 높이가 GPS에 의해 정확하게 제시되었다. GPS(global positioning system)란 미군에 의해 구축된 위성 항법 장치다. 발사에 성공한 발사체는 고도 830km 상공까지 진입하는 데에 성공했다. 1단의 액체 엔진이 640초간 연소되어 고도 480km 상공까지 올라갔다. 그런 뒤에 관성에 의해 780km 높이까지 치솟았다. 2단 고체 엔진인 킥 모터(kick motor)가 20초간 연소되었다. 킥 모터의 연소 종료 고도는 800km였다. 관성에 의해 830km의 고도까지 치솟다가 모조위성을 분리시키면서 실험은 성공했다. 모조위성은 2,500kg의 질량체로서 중형의 위성의 질량과 같게 만들어졌다. 당초 2007년 10월의 목표는 고도 300km에서의 위성의 타원궤도의 진입이었다. 지난주의 성과는 고도 830km에서의 위성의 원형궤도의 진입이었다. 이것은 2010년대의 목표마저 단숨에 뛰어넘은 개가였다.
연이어 4번째 발사체부터 5번째 발사체까지가 모두 성공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혜원과 나는 감격에 벅차 포옹을 한 채 울먹였다. 순수한 성취의 기쁨으로 인한 포옹이었을 뿐. 다른 이성적인 요소는 철저히 배제된 포옹이었다. 발사 성공의 소식이 한반도에까지 전해진 순간이었다. 한국 정부와 과학계는 환희로 인한 흥분의 절정에 도달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발사체의 제작에 재현성을 높이는 문제다. 재현성만 확보되면 계획된 위성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추진될 수가 있다.
지난주의 일을 떠올리면서 혜원과 담소를 나눈 뒤다. 혜원은 몇 가지의 연구 자료를 넘겨준 뒤에 집무실로 돌아갔다. 나는 시계를 들여다본다. 오후 6시 10분이다. 어느새 퇴근 시간은 지난 상태다. 이제 피클레이를 만나러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 피클레이가 자주 찾는 곳은 섬의 남서쪽인 염포 해수욕장이다. 그녀가 국내에 들어온 지도 벌써 2달째다. 지난 2달 동안의 기간이었다. 틈이 날 때마다 나는 그녀와 함께 해수욕장을 거닐었다. 그러면서 나는 그
녀와 함께 숱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약속 시간에 맞춰 염포 해수욕장에 들어선다. 별빛이 쏟아지는 백사장에는 금발의 미녀인 피클레이(Peclay)만이 배회하고 있다. 그녀와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녀를 소리쳐 부른다.
“피클레이, 나예요!”
내 말을 듣자마자 피클레이는 신발마저 벗어들고 달려온다. 나도 그녀를 향해 달려간다. 만나는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둘은 얼싸안고는 맴을 돈다. 가쁜 숨결을 추스르며 피클레이가 내게 속삭인다.
“이제 한국의 위성체 개발의 파악 업무는 끝났어요. 내일 새벽 비행기로 미국을 향해 떠날 거예요. 저를 데리러 온 비행기가 목포 공항에 대기 중이에요.”
그녀와의 포옹을 풀고는 아늑한 정취에 젖어 함께 해변을 거닌다. 정겨운 미소와 함께 반시간가량의 대화를 나눈 뒤다. 한동안 뜸을 들이는 눈치더니 그녀가 말한다.
“기섭 씨, 사랑이란 확실히 상대에 대한 배려인 것 같아요. 저는 당신만을 온 우주로 생각하고 사랑했거든요. 그런데, 당신은 2세인 혼혈아가 자라면서 받게 될 스트레스까지 배려했잖아요? 이제 우리의 사랑은 여기서 끝내기로 해요. 줄곧 당신은 내 눈치만 보는 것같이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제가 당신을 대변하여 말씀드리는 거예요. 혹시 그 사이에 생각이나 관점이 달라진 부분은 없죠?”
피클레이의 말을 듣는 내내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녀의 말이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말을 마치면서 그녀는 또 한 번 쓴웃음을 짓는다. 울음보다 더 진한 슬픔이 느껴지는 쓴웃음이다. 이윽고 그녀는 단호한 낯빛으로 손을 내민다. 작별의 악수를 하자는 뜻이리라. 나는 착잡한 감회에 젖어 백사장을 잠시 둘러본다. 그러다가 고개를 휘저어 마음을 달랜 뒤다. 천천히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마주 잡는다. 그녀의 섬세한 손에 정맥 혈관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녀의 깨끗한 손을 들여다볼 때다. 갑자기 가슴에 구멍이 펑 뚫린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 서슬 퍼런 슬픔이 전신을 휘감는다. 나 자신도 모르게 콧잔등이 시큰거리며 눈시울에 눈물이 배어든다. 어느새 그녀의 눈에도 뽀얀 안개가 일며 눈시울이 젖어든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밤 7시 8분경이다. 2분만 지나면 대기권 상공에서 섬광이 분출되어야 한다. 적경 127?30?, 적위 34?30? 부근의 대기권에서다. 2분의 시간이 지날 때까지 피클레이와 나는 숨죽여 하늘을 올려다본다. 예정된 시간이 되자 거짓말처럼 예상 공간에서 섬광이 분출된다. 그것도 폭죽처럼 다발로 이어지는 폭발성 섬광이다. 피클레이와 나는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터뜨렸다.
“기섭 씨, 축하해요. 정말 한국의 과학 기술도 만만치 않군요.”
“고마워요. 모두 주변에서 지켜봐 준 덕분이죠.”
이것으로써 새로운 공간으로의 비상이라는 신규 프로젝트(KSP-1)는 확실하게 성공한 셈이다. 그토록 꿈꾸었던 한국 우주 기획(Korea Space Project-1) 1호. 대기권의 눈부신 섬광의 발출을 통하여 성공을 재입증한 터다. 지상 830km에서 원형 궤도를 지나가는 모조 위성체에서 발출된 섬광이었다. 외나로도 상공에서 관측할 수 있게 날짜와 시각을 설정한 거였다. 생각할수록 너무 기뻐 가슴이 벅차오를 일이다. 헌데 기쁨도 찰나간이다. 이제 그녀는 떠나야 할 시점이다. 잠깐 기쁜 표정을 짓던 피클레이의 눈시울엔 어느새 눈물이 반짝인다.
울먹이던 그녀가 백사장 곁의 임대한 승용차에 오른다. 목포행의 승용차가 굽이 길을 돌아서서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에서다. 그녀가 열린 창문으로 팔을 한껏 들어올린다. 나도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올려 작별 인사를 한다. 그러자 서서히 승용차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져 간다.
승용차의 모습이 시야에서 막 사라진 직후다. 이제 어디서 그녀를 만나랴? 마지막 작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부터다. 영혼이 송두리째 어딘가로 빠져 나가 버린 기분이다. 갑자기 미아가 된 느낌이 들면서 마음이 신산스럽기 그지없다. 언제부터 밀물이 시작된 걸까? 작별에만 몰두했던 탓인지 밀려드는 파도 소리가 드높게만 들린다. 이제 백사장에는 별빛에 휩쓸리는 바람결만이 허허로이 서성댈 뿐이다.
(200자 원고지 90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