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풍향계의 신음
손정모
애잔한 설움을 자아낼 듯이 서늘한 보름 달빛이다. 어쩌다가 눈이라도 마주칠 양이면 금세 가슴으로 울음마저 밀려들 듯하다. 자오선에 내걸린 달은 밤안개 사이로 빛살을 사정없이 날려 보낸다. 동강의 은빛으로 반짝이는 물결마다 시린 울음이 스며 나오는 듯하다. 급격히 차가워지는 기류 탓인지 강바람 때문인지 영문을 모를 일이다. 울창한 산기슭의 강줄기라는 탓에서일까? 고사목의 삭정이마다 바람의 동결(凍結)된 울음이 휘감겨 있다.
의외로 영월 동강 기슭의 야영지는 사람들의 활기로 뒤설렌다. 제강인 연합 야외 수련회(製鋼人聯合野外修鍊會). 제강 산업 현장에서 근무하는 임원들의 수련회 행사다. 서해 군산에서 새롭게 뿌리를 내린 ‘우주제강(宇宙製鋼)’의 대표이사인 홍미연(洪美娟). 올해 마흔여섯 살의 독신녀인 미연도 취기로 얼굴이 불콰하다. 그녀의 우주제강은 국내 10대 재벌 그룹 중의 하나다. 벌건 숯불 위의 대형 석쇠마다 쇠고기가 구수한 냄새를 내풍긴다. 강변에는 관광버스 3대에서 내린 121명의 회원들이 이야기꽃을 피워댄다.
미연은 핸드폰의 진동으로 인해 잠시 자리에서 일어선다. 폴더를 여니 상민의 목소리가 흘러든다. 흘깃 시계를 들여다본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다.
“홍 회장님! 천상민(千尙敏)입니다. 회장님의 창업 성공담은 풍문으로 잘 들었어요. 내일 새벽에 비서를 보내 선물을 드릴게요. 저는 내일 오후에 안면도에서 회장님을 뵙도록 할게요.”
상민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미연은 가슴이 마구 설렜다. 가끔씩 연락하고 지냈지만 두어 달가량이나 연락이 뜸했던 상민이 아닌가?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려고 한다. 뭔가 애틋하면서도 그리움이 실린 감정의 소용돌이가 느껴진다. 게다가 여비서를 시켜 선물까지 미리 갖다 준다고 하지 않는가? 미연은 순간적으로 마음이 뒤설레어 갈피를 못 잡을 지경이다.
‘아직도 상민이 미혼 상태일까? 엊그제 귀국했다니까 아마도 틀림없는 일일 것만 같네?’
마음 통하는 부류들끼리 떠들어대는 굵직한 회원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다. 미연에겐 슬그머니 신림동 S대학의 입학식 때의 정경이 떠올랐다. 친척 이외의 하객들의 눈길이 미연에게 닿았을 때는 반응이 묘했다. 그러더니 나지막한 소리의 언어의 분절들이 바람결에 날려 다녔다.
“재능은 뛰어난 모양인데 얼굴이 안 받쳐 주어 영 별로네!”
“영 안타까워 죽겠네. 얼굴이 저렇게까지 박색(薄色)이라니!”
지난 세월 동안 미연이 숱하게 듣던 언어들의 편절이었다. 왜 자신의 모습이 남들에게는 박색(薄色)으로 비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적인 개념도 누구에게도 객관성으로 스며들어야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겠는가? 사람의 첨예한 자존심의 극한에 작용하는 미적 관점의 객관성이란 뭘까? 해답을 알 길이 없는 듯하다.
상민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뒤에 미연은 잠시 강변으로 다가간다. 수량이 풍부하면서도 기다란 강줄기를 바라보면 가슴이 탁 틔는 기분이다. 미연은 가만히 생각해 본다. 미연의 관점으로는 자신의 얼굴이 못 생겼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여태껏 자신의 얼굴이 못 생겼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춘기 시절에는 거울을 보며 감동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여기기도 했다. 아름다움에 대한 미연과 세속인들의 관점의 차이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미연은 객관화의 개념에 은근히 신경을 써 온 상태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객관화할 수만 있다면 이해하려는 자세다. 지금껏 미연에게 사회는 다소 복잡한 면모를 띤 조직체로 비쳤다. 그랬기에 어떨 때에는 객관성조차도 힘을 못 쓴다는 걸 체험했다. 미연의 경험으로 객관성을 뒤흔드는 요인들에는 대표적인 몇 가지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질투심과 시기심이 있다는 걸 알았다. 미연은 이런 기존 지식으로부터 스트레스를 적게 받으려고 애쓴다. 그리하여 어릴 때부터 타인들과의 관점의 차이를 초월해 버리곤 한다.
대학을 졸업한 뒤엔 대그룹의 몇 군데 회사에서 연락을 받았다. 서류와 필기시험에선 합격이 되었으니 면접을 보러 오라는 거였다. 해당 회사를 찾아가 면접에 임할 때마다 느끼는 현상이었다. 면접관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미연을 향해서는 무척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력은 빼어난데도 얼굴이 받쳐 주지 못하여 안타깝다는 표정들로 비쳤다. 얼굴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이기에 여자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 야속했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남의 것과 비교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초승달처럼 단아하게 휘늘어진 눈썹, 우뚝하게 치솟은 콧날. 수정처럼 맑은 눈과 선홍색으로 촉촉하게 젖은 입술. 갸름한 얼굴 윤곽선에 윤기 흐르는 뽀얀 살결. 어느 것을 따져 봐도 남들에게 뒤질 면모는 없다고 여겨졌다. 그런데도 남들의 눈엔 박색으로 보일 뿐이라니 졸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다가 무려 17번째로 지원 서류를 낸 중소기업체에 겨우 합격되었다.
태산금속(泰山金屬). 미연이 대졸 이후의 십년 세월을 뿌리 내렸던 일터였다. 태산금속에서 만난 세련된 외모와 품격을 지닌 사내가 상민이었다. 당시에 상민은 미연보다 3살 연상의 대리라는 직책의 사원이었다. 미연에게 향하는 눈길에서는 항상 따스함이 내재되어 있었다. 가족 이외의 사람으로서 평생 남들에게서 처음으로 느끼는 따스한 느낌이었다. 긴 세월 동안 얼어붙었던 가슴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미연도 상민에게는 최상의 정성을 기울여 대했다. 만난 지 2년쯤 된 가을 저녁이었다. 미연이 상민에게 결혼할 상대가 있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상민은 자신이 사업체의 관리자가 될 때까지는 독신으로 지내겠다고 말했다. 관리자가 된 뒤에 결혼을 고려해 보겠다고 했다. 언제쯤 관리자가 되리라고 예상하느냐고 미연이 물었다. 상민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신중하게 말했다. 적어도 20여 년은 흘러야 가능하리라고.
가을의 서릿발처럼 단호한 상민의 말투. 이것이 미연에게 주는 효과는 엄청난 신뢰도로 작용했다. 그토록 결기에 찬 남자의 말이라면 충분히 신뢰할 만하다고 여겼다. 일단 신뢰하기로 한 사람은 끝까지 믿는 게 미연의 습성이다. 당장 결혼하자고 하고 싶은 데도 상대가 내뱉는 언어의 결기. 그것을 존중하여 미연은 상대의 뜻에 쉽게 동의해 버리곤 한다.
세상의 일이 양면성에 갇혀 얼마나 허우적거리는 게 많은가? 때로는 양면성의 내재된 의미까지를 점검해야만 안전해질 수가 있을 테리라. 상대에 대한 신뢰감의 부여와 자신의 보호를 위한 안전성의 확보. 미연의 가장 흔들리는 마음의 요소는 신뢰감과 안정성의 균형 감각이리라.
미연과 상민은 회사에서 일하면서도 서로 호흡이 척척 잘 맞았다.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둘이 모이면 쉽게 해 치웠다. 미연이 상민을 만난 지 3년째 되던 봄의 3월이었다. 상민은 세계적인 영국의 철강회사에 5년 임기의 연수 파견자로 선발되었다. 물론 태산금속 경영진의 배려 덕분이었다.
상민이 영국으로 떠난 지 몇 개월 후였다. 미연도 자신의 입지 구축을 위하여 다른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자리를 옮길 때마다 직책이 높아졌고 그녀의 처세술도 눈부시게 향상되었다. 미연도 언젠가는 독립된 사업체의 장이 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젊은 날에 여러 회사를 전전하면서 기술과 경험을 축적해 나갔다.
회사를 옮긴 뒤였어도 상민과는 이따금씩 소식을 주고받았다. 영국에 건너가서도 의욕에 불타는 상민이었다. 애초에 계약된 5년이 되기도 전이었다. 상민은 영국의 다른 철강회사에 물색되어 자리를 옮겼다. 그러면서 태산금속과는 인연을 끊고 말았다. 그랬어도 한국의 미연과는 이따금씩 소식을 주고받았다.
미연은 강물을 굽어보며 중얼댄다.
‘상민이 귀국한 지 며칠도 안 되지 않는가? 아직 결혼했다는 얘기도 없었잖은가? 게다가 여비서를 내게 보내 선물까지 할 정도라면? 분명 그는 아직도 노총각 신세일 거야. 끝장을 보지 않고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는 상민이지 않는가? 그런 그가 내게 여비서를 시켜 선물을 미리 보낸다구? 내일 안면도에서 직접 내게 전달해도 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라도 빨리 내게 선물을 전달하겠다는 그의 의도라면? 더 이상 따질 것도 없이 그는 독신남일 게 뻔해.’
미연의 의식 속으로는 하늘의 달무리가 연상된다. 달의 세력 범위를 한껏 떨치려 해 보려는 듯한 형세. 그렇다고 실제로 힘이 발휘되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리라. 힘이 미치든 미치지 못하든 일단의 세력을 가꿀 필요는 있으리라. 사랑을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상응하는 노력이 있었어야 옳다고 여겨진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미연은 잠시 입술을 굳게 깨문다. 사업에는 매사에 저돌적이었건만 정작 사랑 문제만큼은 몸을 사리지 않았던가? 혹시라도 생길 자존심의 손상에 지나치게 민감한 터였었다. 왜 마음을 열고 상민에게 지속적으로 사랑을 확인하지 않았던지 후회스럽다. 이 모든 걸 수락산의 청년 탓이었다고 떠넘겨야 옳단 말인가? 미연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그러면서도 내심으로는 말할 수 없는 애틋한 심정이 끓어올라 고통스럽다. 미연이 허탈한 심정에 잠겨 한동안 강물을 굽어볼 때다. 느닷없이 미연의 귓전으로 간드러진 목소리가 파고든다.
“어머, 홍 회장님, 여기 나와 계셨네? 저기 통나무 휴게방으로 함께 가시죠. 독신의 여성 기업인 23명이 거기에서 모여 술잔을 나누자고 해요.”
미연이 고개를 돌려보니 옥천철강의 회장인 윤금숙이다. 미연과는 성향이 비슷하여 각별히 잘 지내는 사이다. 미연이 금숙을 따라 A호의 통나무 휴게방으로 들어설 때였다. 통나무로 건조된 야외용 휴게 시설이다. 폭우가 쏟아져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도록 잘 지어진 건물이었다. 마치 대형 원두막과 같은 분위기를 주는 목조 건물이다. 강변 주위엔 이 같은 통나무 휴게방이 3군데나 설치되어 있다. 그 중의 두 곳인 B호와 C호는 남자 회원들 전용이다. 23명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미혼의 독신녀들이다. 이른바 결혼이라곤 해 본 적이 없는 노처녀들이다. 미연과 금숙이 휴게방으로 들어서자 일제히 환호성을 내지르며 말한다.
“둘이 혹시 흑나비들을 먼저 만나고 오는 건 아냐?”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그렇지?”
이구동성으로 떠들어대는 함성이 대단하다. ‘흑나비’란 해외에서 기반을 굳힌 독신 남자들을 일컫는 속어(俗語)로 통한다. 미연과 금숙이 자리에 앉고 난 뒤다. 남자 같은 성향의 걸걸한 목소리의 혜진이 제안을 한다. 혜진은 49살의, 동해제철의 회장이다.
혜진은 아무래도 열정적인 여걸형의 기업인인 듯하다. 혜진의 제안에 의해 회원들 중의 흑나비 14명을 불러오기로 한다. 그리하여, 싫다는 사람을 제외한 11명이 A호로 찾아든다. 이내 흑나비들과 독신녀들 간에 술판이 새롭게 차려진다. 주기가 달아오르면서 남녀간의 대화의 불꽃이 핀다. 미연의 마음으로는 상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은근한 걱정이 생긴다.
‘만약 상민이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해외에 있었다고 하여 결혼하지 못했으리라고 어떻게 단정하겠는가? 해외의 거주 교포나 유학생과도 결혼할 수 있지 않는가? 괜히 나 혼자만의 빗나간 상상으로 혼자서만 좋아하는 건 아닌가? 혹시 애초보다 더 크게 상심하여 우는 꼴이 되지는 않을는지?’
미연은 흑나비들의 거동을 무심한 척 살펴본다. 저마다 얼굴이 고와 보이는 독신녀를 찾아가 술잔을 건넨다. 11명의 흑나비들 중에서도 미연에게 술잔을 건넨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래저래 미연의 심사는 점차 불편해진다. 제대로 술 한 잔도 건네지 않은 흑나비들에게는 고함치고 싶다. 빨리 바깥으로 나가 버리라고.
미연은 다시 상민을 떠올린다. 절대로 성공적인 경영인이 되기 전에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상민의 말. 상민의 결기에 찬 목소리가 세월을 건너뛰어 미연에게 희망을 준다. 상민이 영국에 지내다가 아직 독립했다는 말은 듣지 못한 상태다. 그랬기에 상민이 결혼했을 확률은 희박하다고 여겨진다.
‘그래 지금껏 참았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기다린 결과가 만족스럽건 불만스럽건 그건 운명의 탓으로 돌리자. 그 이상 해 볼 게 뭐가 있겠는가?’
흑나비들과 노처녀 기업인들간의 대화의 열기가 제법 뜨겁게 달아오르는 분위기다. 흑나비들은 제법 기염을 토하며 너스레를 피워댄다. 여기에 호응하여 노처녀 기업인들은 마치 신흥 교주들을 대하는 제스처다. 하여간 흑나비들과 노처녀들 간의 상응하는 열기가 미연에게는 이채롭게 느껴진다. 그들 사이의 연분이 잘 맺히기를 바라면서도 신산스런 마음이 든다.
상민에 대하여 미연 혼자서 자꾸만 유리한 방향으로만 생각하는 듯하다. 언제 상민이 경영인으로 독립하지 못했는지 확인한 적이 있었던가? 지금껏 왜 직접 상민에게 물어보지 못했는가? 그러면서도 한갓 사소한 근거를 바탕으로 유리하게만 추측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서서히 미연의 마음속으로는 불안감이 커지는 느낌이다.
갑자기 실내가 웅성거리는 분위기다. 이곳저곳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더니 꽃 배달원이 큰 소리로 미연을 찾는다. 미연이 의아한 듯 배달원에게로 다가선다. 그러자 배달원이 포장된 장미꽃 다발을 들이민다. 적어도 50송이가량은 될 만한 장미꽃 다발이다. 배달원은 지참된 메시지도 건네주고는 시야에서 사라진다. 미연이 장미꽃 다발을 받아드는 순간이다. 사방에서 우레 같은 박수갈채가 터진다. 좀 쑥스럽긴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은 상태다. 메모지에 담긴 내용으로 상민이 보낸 꽃임을 알아챈다. 꽃다발을 채 갈무리하기도 전에 또 다른 방문자가 들어선다.
“여기에 혹시 홍미연 회장님 계세요?”
미연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이내 응답한다.
“전데 왜 그러세요?”
방문객은 20대 초반의 앳되어 보이는 미모의 아가씨다. 아가씨의 얼굴엔 기쁜 빛이 역력하다. 찾으려던 사람을 찾게 되었다는 만족감이 실린 표정이다.
“천상민 회장님이 보내서 왔어요. 여기 이것은 중국산 공작선(孔雀扇)이에요. 이걸 직접 홍 회장님께 갖다 드리라더군요.”
그러면서 뭐가 급한지 금세 승용차로 돌아가 버린다. 공작선이라? 미연이 듣기에는 공작선은 중국 사천성 성도의 제품이 최상급이라고 한다. 공작선에는 중국 사천성 성도의 제품임이 한자로 새겨져 있다. 공작선은 특별히 마음을 주고받는 연인간에만 주고받는 예물이라고 전해지는 물건이다. 미연이 공작선을 받아들자 다시 실내에는 박수갈채가 터진다. 너무 소리가 커서 귀가 먹먹할 지경이다. 금숙이 잔뜩 부러운 눈길로 선물 보낸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 미연이 얼굴만 붉힐 뿐 말이 없자 사방에서 채근하느라고 야단이다. 미연은 실내에 머물다간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두려워진다. 취기로 엉뚱한 대꾸라도 하게 될까 봐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는 강변을 따라 혼자가 되어 조용히 거닐며 생각에 잠긴다.
밤이 되자 강가에 부딪혀 울리는 물살의 소리가 더욱 크다. 동강은 사방에서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강물이 흘러내린다. 한낮에는 래프팅을 한답시고 수없이 고무보트를 띄우던 열기였다. 밤이 되자 그럴 수 없이 적막한 상태가 된 것이다.
미연은 지난 세월을 추슬러 본다. 만약 그 누군가 다가와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만 했더라면? 상대의 가문이나 학력에 불구하고 기꺼이 배우자로 맞았으리라 생각한다. 살아오면서 괜찮아 보이는 사내들이 몇이 있기는 했다. 허나 미연이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사내들 곁에는 여인들이 있었다. 이미 여인들은 사내를 위해 정조마저 바친 모양이었다. 그런 현장을 대할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슬펐던가?
한 번은 너무나 청순해 보이는 사내를 눈여겨보았다. 적어도 그 사내에게는 애인이 없을 줄만 알았다. 아무리 분석해 봐도 그렇게만 판단되는 사내였기 때문이었다. 모처럼 용기를 내어 사내를 찾아 가기로 했다. 사내가 사는 곳은 수락산 기슭의 한적한 고가였다. 사내를 찾을 당시의 미연은 대학 3학년생이었다. 시냇물의 징검다리를 건너 호젓한 고가의 뜨락을 찾은 날이었다. 그 날은 여름방학 때였으며 집안의 어른들은 외출한 것 같았다. 사내는 군복무를 마친 복학생으로 성품이 너무나 고와 보였다. 같은 캠퍼스를 다녔어도 사내가 친구들에게 떠들어대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캠퍼스에서 용기를 내어 사내를 찾으려고 할 때마다 자존심이 문제였다. 사내로부터 거절받는다면 이만저만한 창피가 아니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타인들이 눈치 못 채게 사내에게 접근하고 싶었다.
남학생의 신원에 대해 알아본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자칫 소문이 새어 나가면 상대에게 관심을 두었다고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래서 어지간히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면 간접 질문은 삼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의 사내에게는 애인이 없다는 대답들이 압도적이었다. 그래서 미연은 수락산의 사내를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다. 사내를 찾아 나서기 직전에는 목욕탕에 들렀다. 그리고는 향수 가게에도 들렀다. 사내의 야성을 은근히 자극할 만큼의 향수도 몸에 뿌렸다. 감춰진 사내들의 야성은 처녀들에게는 감미로운 활력소로도 작용할 터였다.
방학을 맞은 지 둘째 주 토요일이었다. 그 날 오후에 사내가 집에 있으리란 확실한 정보를 얻었다. 그리하여 말끔히 단장한 맵시로 사내를 찾아갔다. 기와집의 대문은 변두리 지방의 풍습대로 열려 있었다. 수락산도 서울의 변두리였고 당시에는 시골로 인정되던 때였다. 대문에 닿아 몇 번 큰 소리로 사내를 불렀다. 한낮의 고요한 정적만 감돌 뿐. 대꾸하는 목소리는 그 어디에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천천히 조심스레 안채를 지나 사랑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채는 댓돌에 신발이 없는 것으로 봐 사람이 없는 듯했다. 사랑채엔 남녀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게 보였다. 그 중에는 최신형의 굽 높은 여인의 구두도 보였다. 여인의 구두를 보자 미연의 가슴이 본능적으로 떨렸다.
이튿날 아침에 3대의 관광버스는 충남의 안면도를 향해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버스의 바퀴가 천천히 돌며 동강의 야외 수련장을 벗어난다. 간밤에 마신 과도한 양의 술 탓일까 미연의 머리가 지끈거린다. 머리를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도 머리의 통증은 가라앉으려고 하지 않는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비치는 창 밖은 연이은 송림의 터널이다. 솔향기가 은은하게 콧속으로 밀려들면서 점차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그러다가 미연은 의식을 잃고 숙면에 빠져든다.
주변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미연이 눈을 떴을 때다. 이미 버스는 안면대교를 건너고 있다. 안면대교를 건너면 안면송(安眠松)이라 불리는 적송(赤松)이 줄지어 나타난다. 온 섬이 적송으로 뒤덮인 곳이다. 오후 1시 무렵에 3대의 관광버스가 대형 펜션 앞에 멈춘다. 승언리의 숙소에서 20여 분간의 짐 정리 시간이 끝난 뒤다. 일행을 실은 버스는 곧장 방포 해수욕장으로 달려간다. 해수욕장에 있는 해산물 음식점의 예약된 장소에 주차한 뒤다. 121명의 인원이 ‘해변식당’이란 상호의 1층과 2층을 가득 채운다. 속초 해동제강의 회장인 박원준이 큰소리로 인사말을 한다. 이 번 행사의 총괄 회장을 맡기도 한 52세의 사람이다.
“여러 회원님들, 다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지금부터 오후 5시까지 여기에서 머물다가 펜션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 때까지 해수욕을 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들거나 마음껏 즐기세요. 그래야 펜션에 가서 얘기할 추억거리가 생기지 않겠어요? 지금부터 자유 시간임을 선포합니다.”
일제히 장내를 뒤흔드는 박수갈채가 터져 나온다. 그러자 해변으로 달려가려는 사람들과 음식으로 배를 채우려는 사람들로 나누어진다. 미연도 수영복을 챙기고는 해변을 향해 나선다. 답답한 가슴에는 시원한 감각의 마찰이 적격인 셈이라고 여긴다. 이런 관점에서 바닷물에 몸을 담그는 것은 후련한 일로 여겨진다. 500여 미터 길이의 해변에는 인파가 제법 몰려 아우성을 친다. 젊은 남녀들의 매끈한 몸매들이 수시로 시선을 끈다. 역시 젊음이란 좋기는 좋다는 생각이 어느새 든다. 나란히 붙어 거니는 청춘 남녀들을 미연은 부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그러다가 미연도 수영복 차림으로 바닷물로 뛰어든다. 수영의 자세를 평영으로 바꾸면서 미연은 상념에 잠긴다. 어느 날엔가 뉴스에서 본 대형 호수의 유실 사건이 떠오른다. 호수 아래의 지반이 함몰되면서 순식간에 호수가 사라진 거였다. 혹시 미연이 생활하는 공간도 불안정한 지맥(地脈)은 아닐는지 궁금해진다. 단 한순간도 자신이 못 생겼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박색으로 여기기에 불만스럽다. 관점의 차이가 하찮게 여겨지면서도 거울을 대할 때면 긴장하게 된다. 혹시 자신의 미적 관점만 남들과는 동떨어지게 퇴화된 건 아닌지? 정말 우주에서 자신만 못 생긴 건 아닌지 잠시 혼란스러워진다. 그런 생각도 잠깐일 뿐. 미연은 자신의 미적 안목에 스스로 자신감을 부여한다. 절대로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는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은 폐경기에 접어들지 않은 미연이다. 폐경이 되기 전에 짝을 찾아야 할 일이다. 폐경을 맞고 나면 생리적인 여자의 생명은 끝장난 상태이지 않는가? 바닷물에 뛰어들어 금숙과 혜진과 함께 얼마간 수영을 한 뒤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미연이 백사장으로 올라선다. 햇빛에 달궈진 모래알이 발바닥에 따갑게 엉겨 붙는다. 하염없이 백사장을 거닐 때다. 불쑥 수락산의 사내를 찾은 날의 일이 재차 머릿속에 떠오른다. 미연에게는 좀체 잊힐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인상이었기 때문이리라.
사랑채의 댓돌 위에 놓인 잘 닦인 여인의 구두. 게다가 굽이 높은 구두였다. 미연은 숨을 추스르며 조심스레 사랑채로 발걸음을 옮긴다.
‘분명 사내한테는 애인이 없다고 알고 있는데 웬 여자야? 사내한테는 부모 이외에 남동생이 하나 있다고 들었어. 혹시 친척들 중의 아는 여자가 찾아온 건가?’
온갖 상념으로 머릿속이 혼란해지면서도 미연은 발길을 살금살금 사랑채로 옮겼다. 사랑채의 창호지는 새로 바른 것으로 환한 빛이었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창호지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가쁜 숨소리의 남녀가 뒤엉켜 함께 내뱉는 답답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절정감에 취해 질러대는 여자의 교성도 터져 나왔다. 잠자코 숨을 죽였던 미연에게 확인할 그 무엇도 없어진 상태였다.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지울 새도 없이 미연은 기와집을 뛰쳐나왔다. 이후부터는 미연이 먼저 사내들을 찾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뼈가 시릴 정도의 결기로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 터였다.
그 날 이후부터였다. 세상의 그 어떤 사내도 미연에게 먼저 눈길을 주지는 않았다. 미연은 짜증이 나서 발작할 지경이었다. 어쩜 세상 사내들의 안목이 고작 그 정도인지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얼굴과 몸매 그 어디에서도 자신감에 넘치는 미연이었기 때문이다.
오후 다섯 시까지 실컷 해변에서 음식과 해수욕을 즐긴 뒤다. 오후 다섯 시 정각을 기해 관광버스 3대가 해수욕장을 떠난다. 옆 자리의 금숙이 미연을 향해 입을 연다.
“홍 회장님의 몸매가 젊은 처녀들만큼이나 아름다운 줄 몰랐어요. 바닷물에 뛰어들 때 황홀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미연은 곧바로 응답했다.
“사람을 놀리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요? 남이 뀐 방귀마저 다 마시게 된다고 하잖아요? 어때 내 방귀 한 번 마셔 볼래요?”
호들갑을 떨며 금숙이 깔깔거린다. 눈가에 눈물까지 질금질금 맺힐 정도다. 곧바로 차가 휴양림 내의 주차장에 닿는다.
‘어쩌다 내 나이가 마흔여섯이나 되었을까? 남은 다들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거느렸는데 외톨이 신세로 나뒹굴다니?’
미연은 배우자를 찾지 못한 채 놓친 세월에 울화가 치민다. 괜찮은 사내들은 자신이 미처 다가서기도 전에 연인을 두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느낌만 가중될 뿐이다. 미연은 사람들과의 교류 관계나 사업에 있어서는 다들 공인하는 실력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자를 만나지 못했으니 가슴에 응어리가 맺힐 노릇이다. 외모가 추하다면 그러려니 받아들이겠는데 그것도 아니기에 미칠 지경이라고 여긴다.
대략 30분 정도의 휴양림 산책이 끝난 뒤다. 일행은 야외용 석쇠에서 굽힌 고기들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야외광장의 대화가 시작된 지도 2시간이 지날 때다. 문득 미연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떨어댄다. 진열창에 드러난 번호를 보니 상민의 번호다. 폴더를 여니 잠시 후에 휴양림에 도착하겠다는 상민의 목소리가 흘러든다.
거의 8시 무렵에 천상민의 승용차가 휴양림의 주차장으로 들어선다. 상민이 나타날 때까지 얼마나 미연이 숨죽여 기다렸는지 아무도 몰랐으리라. 미연이 반가운 마음으로 상민을 향해 달려갈 때다. 상민의 승용차의 조수석에서 30대 후반의 여인이 땅바닥으로 내려선다. 갸름한 얼굴에 썬 글라스를 착용한 세련된 기품의 여인으로 느껴진다. 여인은 차에서 내리더니 이내 썬 글라스를 벗어든다. 썬 글라스를 벗은 얼굴은 한결 우아한 기품을 드러낸다. 미연은 여인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다. 정신이 멍하여 상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상민이 어느새 다가와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내민다. 도저히 손을 맞잡을 수 없는 기분의 미연이다. 그렇지만 꾹 참고는 손을 내밀어 상민의 손을 잡는다. 악수를 마치자 상민이 곁의 여자에게 말한다.
“앞에 계신 분은 내가 자주 당신에게 얘기하던 홍 회장님이요. 인사하세요.”
상민의 말이 끝나자 부인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민다. 그러는 사이에 미연에게는 곁의 여인이 아내라고 소개하며 인사를 권한다. 미연은 재차 수락산 밑의 사랑채에서 떠밀린 심정이다. 상민의 부인과 인사를 나눌 때다. 일시에 콧등이 찡 울리며 눈물이 맺히려고 한다. 미연이 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얼굴 표정을 수습한다. 그리고는 입에 발린 몇 마디의 인사말을 건네고는 이내 돌아선다. 상민도 다소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아내와 함께 시야에서 멀어진다.
반시간쯤이 지난 뒤다. 걸려온 핸드폰을 받으니 상민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루 앞당겨 장미꽃과 선물을 보냈던 의중을 설명한다. 태산금속에 함께 근무했던 동료로서의 반가움을 선물로 나타냈다고 한다. 장미꽃으로는 상봉의 기쁨을 전했다고 한다. 공작선은 친한 동료에 대한 우정의 상징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가 결혼할 때 미연을 떠올려 봤다고 한다. 세월이 많이 흘렀기에 그는 미연이 응당 결혼했으리라 여겼다고 한다. 그러면서 상민은 영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한다. 영국에 보금자리를 구축했다며 국내에는 일시적으로 귀국했다고 한다. 그의 아내는 영국 교포의 2세라고 알려 준다. 나중에 단독으로 미연을 찾아와 자세히 설명하겠다고 한다.
상민의 핸드폰 연락을 받고도 반시간의 시간이 흐른 뒤다. 미연은 도저히 마음을 달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래서 휴양림 관리인에게서 승용차를 잠시 빌려 해변으로 차를 몬다. 달리다 보니 승언리 남쪽으로 12km 떨어진 장삼포 해수욕장에 이른다. 해수욕장 곁에 차를 세워 놓은 채 해변의 벼랑으로 올라선다. 억새와 띠를 비롯한 초목들이 우거져 있다. 미연이 한참 바다를 굽어볼 때다. 엔진 소리가 들리며 상민의 승용차가 해변으로 내닫는다. 그러더니 미연의 차 곁에 멈춘다. 미연이 휴양림을 떠날 때부터였으리라. 상민이 단신으로 승용차를 몰아 따라 나선 모양이다. 이윽고 승용차로부터 내린 상민이 미연을 향해 벼랑으로 올라선다. 서로를 확인한 순간이다. 자연의 힘이 시키기라도 한 듯 둘은 서로를 향해 달려든다. 다가서자마자 서로를 힘껏 포옹한다. 살결이 닿자마자 가슴이 떨려 서로가 미칠 지경이다. 미연이 상민에게 안기는 순간 콧등이 찡하게 울리며 눈물이 맺힌다. 미연은 속으로 외친다. 울지 않으려는데 왜 눈물이 자꾸만 비치지? 상민의 눈가에도 어느새 물기가 촉촉이 배어 있다. 미연은 터지려는 울음을 추스르며 생각에 잠긴다.
‘아, 내가 바보였어. 결혼했는지 왜 진작 묻지 못했을까? 알량한 자존심 탓에 또 울어야 하나?’
포옹한 채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바닷바람이 차갑게 살결로 파고든다. 하늘의 별들도 시린 빛을 내뿜는 시각이다. 미연은 여전히 마음을 추스를 수는 없지만 억지로 미소를 머금는다.
“부르지 않아도 와 주셔서 고마워요. 게다가 예쁜 꽃다발까지 주시다니요. 우리는 이승의 벽을 넘기 전에는 아마도 만나기 어렵겠죠? 부디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사세요.”
상민도 떨리는 목소리로 미연의 행복을 기원한다며 작별의 인사를 한다. 이윽고 상민이 작별의 발걸음을 옮기기 전이다. 악수하기 위해 손을 내민다. 상민의 손등에 튀어나온 파르스름한 정맥 혈관을 볼 때다. 다시는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느끼는 찰나다. 서슬 퍼런 슬픔이 창졸간에 미연의 전신으로 밀려든다. 그러면서 급기야 울음이 터지려 한다. 미연은 터지려는 울음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악수에 응한다. 미연의 격동하는 몸짓이 상민에게까지 감응된 찰나다.
잠시 서로의 시선이 맞부딪히는 순간이다. 서로의 눈동자가 서로의 눈망울에 어려 섬광처럼 흔들린다. 그러자마자 둘의 가슴이 일시에 울려오며 서로의 손을 바싹 잡는다. 일시에 서로의 뺨이 붉게 달아오르며 숨결이 급격히 가빠진다. 재차 서로를 얼싸안으며 서로의 뺨을 밀착시킨다. 마치 불에 덴 것처럼 따갑다. 상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지난 시간들이 너무 안타깝군요. 미연 씨, 더 늦기 전에 가정을 꼭 이루세요.”
미연도 상민의 목을 얼싸안은 채 나지막이 말한다.
“이게 어쩜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인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 자꾸만 울먹거려지네요.”
미연이 말이 끝나고부터다. 둘의 눈시울을 타고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린다. 일시에 온 세상이 애잔함의 물결로 출렁대는 느낌이다. 어느 정도 슬픔이 추슬러진 뒤다. 둘은 서서히 포옹을 풀고는 서로를 바라본다. 상민이 미연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한다.
“마지막 작별이어도 당신처럼 멋진 여인을 알게 된 것이 자랑스러워요. 어떠한 어려운 일이 생겨도 잘 이겨내고 행복하게 사세요.”
미연도 상민의 눈망울을 응시하며 대답한다.
“제 마음도 당신과 같아요. 타국에서도 꿋꿋하게 잘 견디시고 가족과 행복하게 지내세요.”
둘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은 채 서로를 응시한다. 상민의 눈가에는 점차 눈물줄기가 굵어진다. 외국에 나가서도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그리워했던 얼굴인가? 하지만 상대적으로 젊은 여인에 이끌리는 본능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그랬어도 오랜 세월 가슴으로 그리워했던 미연이 쉽게 잊힐 리야? 얼마나 가슴 타도록 번뇌했던 지난날이었던가? 한동안 손을 맞잡고 있던 남녀가 손을 놓고는 헤어진다. 그러자 재차 미연의 가슴에 구멍이 펑 뚫리는 느낌이다. 어깨가 처진 채 언덕을 내려가던 상민이 돌아서서 손을 흔든다. 미연도 크게 팔을 흔들어 응답한다. 이윽고 상민의 승용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다. 미연은 추락 방지용으로 세워진 철조망을 붙잡고는 바다를 굽어본다. 달랠 수 없는 공허감이 시린 해풍이 되어 밀려드는 듯하다. 미연은 고개를 흔들어 울음을 삼키며 철조망을 움켜쥔다. 철조망의 예리한 가시들이 별빛을 받아 한기를 내뿜는 밤. 미연은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손등에 이마를 갖다 대고는 철조망에 기댄다. 해안에 바싹 다가선 모래톱 근처에서다. 언제부터인지 목 고개가 푹 꺾인 풍향계가 바람결에 버둥대고 있다. 녹이 잔뜩 슬었음인지 풍향마저 잡지 못한 채 신음소리만 내뱉는다. 시린 눈물이 방울져 소리 없이 미연의 손등을 적시는 시각. 밤바다에는 울부짖는 파도소리만 하염없이 들끓는다.
(200자 원고지 76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