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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황색 갈매기 날다 손 정 모
9. 천제연을 찾아
대덕의 유혈사고가 있던 날. 심 교수와 현준이 서울에 도착한 건 자정 무렵이다. 심 교수를 배웅하고 돌아온 뒤 현준은 친구들에게 전화를 건다. 한참 현준이 친구들과 전화 통화를 할 때다. 텔레비전에서는 긴급 방송이 흘러나온다.
수사 본부의 발표 내용이다. 파악된 사망자에는 내국인 10명과 외국인 1명이 있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환자들까지 고려하면 사망자는 증가될 전망이다. 살해된 외국인은 미국 G유전 연구소의 소장인 58세의 탐슨(Thomson)이다. 미국인이 살해된 것은 자기네 조직원들 간의 암투 탓이라고 밝힌다. 현준은 방송 내용에 귀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긴다. S대에서 제공한 줄기세포로 지난해부터 연구에 들어간 서너 곳의 해외 연구 단체가 있다. 이들 단체는 한국의 S대와는 합법적인 공동 연구 기관들이다. 연구한 모든 결과의 특허권을 공유하기로 한 협력 기관이기도 하다. 이런 합법적인 연구로 서로의 국익을 거두려고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가 되는 건 정당하지 못한 방식의 연구를 꾀하는 무리들이다. 이들 무리들 중의 대표적인 존재가 탐슨이나 청화 등의 인물이다. 현준은 계속하여 방송에 귀를 기울인다.
사건의 조짐이 보인 것은 행사의 마지막 날인 11월 17일 오후 3시 무렵이었다. 그 무렵. 소강당의 둘레를 순찰하던 경찰관들이 차례차례 의식을 잃고 나뒹굴었다. 병원에서 환자의 가검물(可檢物)을 조사한 결과 중독 현상임이 드러났다. 중독의 원인 물질은 공기 중을 떠돌 수 있는 부유성 알칼로이드였다. 부유성 알칼로이드를 조사한 결과 춘천의 사건에서 검출된 것과 동일종이었다. 비상한 촉각을 곤두세운 당국은 부유성 알칼로이드의 경로를 추적하기로 했다. 그 결과로 사건의 윤곽이 확연히 드러났다. 당초에 부유성 알칼로이드를 국내에 살포하도록 지시한 사람은 살해된 탐슨이었다. 탐슨은 춘천 사건을 일으킨 주모자로 드러났다. 탐슨은 국내의 폭력 조직인 X폭력단을 매수하여 한국의 기밀급 기술을 빼내려 했다. 탐슨은 공모자인 청화를 통해 춘천 사건에서 T교수와 은정을 납치했다. 그리하여 둘을 통해 기밀급 기술을 토설하도록 시도했다. 하지만 2피랍인(被拉人)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춘천 사건에서 아무런 수확을 거두지 못한 탐슨은 대덕에서 재차 뜻을 이루려고 시도했다. 처음에는 폭력단을 대학생들로 가장시켜 순찰 중인 경찰들을 향해 부유성 알칼로이드를 은밀히 살포했다. 순찰 중인 경찰들에게 허점이 생기자 폭력단을 세미나장으로 진입시켰다. 폭력단은 세미나를 청취하는 체하고 은밀히 발표자들의 연구 실적물을 상당량 빼내는 데 성공했다. 막 폭력단이 세미나장을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탐슨과 단교를 한 청화가 사주한 폭력배인 U해결단의 기습 공격을 받게 되었다. U해결단은 흑색 그랜저 6대에 25명의 대원들을 싣고 와서 곧장 세미나장으로 진입했다. 진입과 동시에 전원을 차단하며 각목으로 X폭련단과 주변인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팼다. 그 소란을 이용해 연구 실적물을 X폭력단에게서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U해결단에게 내몰리던 X폭력단은 2대의 흑색 지프로 달아나려고 했다. 첫째 지프는 그대로 도주해 버렸다. 둘째 지프엔 X폭력단을 지휘하던 탐슨이 탑승해 있었다. 둘째 지프가 달아나려는 걸 보고 흑색 그랜저의 U해결단이 총격을 가했다. 그러자 X폭련단도 일제히 U해결단을 향해 응사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들도 총격을 가하고 군용 헬기에서도 기총소사를 했다. 먼저 달아나던 X폭련단은 뒤쫓는 헬기를 향해 2발의 이동식 미사일을 날려 격추시켰다. 나머지 4대의 헬기가 뒤처진 흑색 지프에게 기총소사를 하여 전복시켰다. 확인된 사망자들 중의 유일한 외국인은 탐슨이다. 내국인 사망자 10명의 인적 사항은 다음과 같다고 자막으로 발표된다. 경찰이 3명, X폭력단이 3명, U해결단이 3명, 지나가던 대학생이 1명이다. 경찰은 U해결단과 X폭력단을 전원 구속 수사할 방침이라고 한다. 또한 중국인 교수 청화를 지명 수배 중이라고 한다.
현준은 경찰의 신속한 수사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지난번의 춘천 사고 때에 비하여 수사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 거였다. 현준에겐 이만하면 사건의 전모는 밝혀진 셈이라고 여겨진다. 현준은 안도의 숨을 쉬고는 잠자리에 든다.
어느새 11월 하순이다. 현준은 문득 1년 전 11월의 일간지의 기사 내용을 떠올린다. 현준은 국내의 D일보에서 줄기세포에 관한 새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제목은 ‘인간배아 줄기세포를 이용한 신경 난치병 치료술의 개발’이었다. 실험 내용은 손상된 닭 배아의 척수에 줄기세포를 이식하여 상처를 치료한다는 내용이었다. 연구의 성과는 배아 줄기세포를 척수 신경계 질환 부위에 이식한 최초의 시도였다는 점이었다. 이 연구 결과는 이미 세계의 논문지에도 발표되어 공인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이 기사를 들여다보며 현준은 생각에 잠긴다. 동일한 논제라도 다루는 영역에 따라 연구 내용이 크게 달라지리라고 여긴다. 병원 계통의 논문 같으면 이 정도면 완성품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화학의 관점에서 보면 제시되어야 할 영역이 많이 남은 상태다. 왜냐하면 치료과정에 대한 메커니즘이 제시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조절 유전자와 어떤 효소에 의해 상처가 어떤 방식으로 치료되는지 제시되지 않았다. 화학의 관점에서 보면 결과만 제시된 것이지 아무런 알맹이가 없는 셈이다.
현준은 시계를 흘깃 들여다본다. 오전 11시 무렵이다. 그 날의 전공과목의 수업도 끝난 상태다. 실험에 매달리는 일만 남은 셈이다. 줄기세포로부터의 간 조직으로의 분화에 대한 재현성. 허파의 분화 과정에 대한 연구와 병행해서 근래에 시행하는 작업이다. 설정된 온도 구간에서 일정 시간 간격에 따른 반복적인 작업 절차. 여기에 관련된 시료의 촬영 사진과 검출 실험 일지들이 좀 많은가? Y2 유전자와 촉진 단백질의 상호작용과 어우러짐. 마치 하나의 몸체처럼 수소결합에 의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2물질. 이들의 상호작용만 철저히 규명해도 독립된 학문 영역이 될 지경이다. 현미경 영상으로 몇몇 분화 과정의 줄기세포를 비교하여 관찰하던 중이다.
불쑥 머리를 헤치고 떠오르는 의문점이 있다. 혁진의 말에 따르면 청화와 탐슨은 춘천 사건의 공모자들이다. 그런데 왜 청화가 탐슨을 죽였을까? 청화와 탐슨 사이의 알력이 언제부터 발생된 건지 현준에겐 의아스럽게 여겨진다. 이전에 혁진이 자신의 의견을 말해 준 적이 있다. 청화는 탐슨과 중국 당국으로부터 엄청난 자금을 지원받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그런데 자금줄인 탐슨을 왜 죽였는지 현준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고 여긴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이긴 하지만 쉽게 납득되기 어려운 일이라 생각된다.
다시 연구에 몰입하고 있을 때다. 핸드폰이 울린다. 귀에 갖다대니 간드러진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든다. 현준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가를 알 수가 없어 잠시 당혹스러워한다.
“지은하(池銀河)예요. W교수 밑에서 일하는 줄 아시잖아요?”
은하는 같은 S대학 소속의 W교수의 제자인 대학원 석사과정의 학생이다. 현준은 알 듯하면서도 더욱 멍한 심정이다.
‘이상한데? 목소리가 영 달라진 것 같잖아? 이전의 그녀의 목소리는 허스키였는데 지금 들리는 목소리는 너무 매끄럽지 않은가? 하긴 그 동안에 발성 연습으로 목청을 가꾸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현준은 이내 생각을 정리하고는 반갑게 전화를 받는다.
“네, 오랜만이네요. 연구는 잘 되세요?”
은하의 말은 잠시 후에 현준의 실험실로 들르겠다는 얘기다. 현준은 생각해 본다. 이전에 은하가 현준의 연구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던가? 여태껏 몇 차례 그런 적은 있었다. 하지만 빈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그런 은하가 현준의 연구실을 방문하겠다니? 약간 의심스러우면서도 관심이 기울어지기도 한다. 더구나 은하는 W교수의 수제자가 아닌가? 학문의 세계에서도 자존심과 경쟁심은 섬세하게 작용한다. 선뜻 마음의 문을 열기에는 만만치 않은 관념의 벽들이 적지 않다. 그 모든 걸 초월해서 현준은 은하를 반가이 맞이할 작정이다. 연구 분야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마음까지도 열 수 있는 문제다. 혹여 누가 알겠는가? 마음이 통한다면 연구의 든든한 조력자도 될 수 있으리라. 마음을 한껏 가다듬으며 현준은 은하를 맞을 준비를 한다.
이윽고 은하가 현준의 연구실로 들어선다. 현준이 예의를 갖추어 친절히 맞이한다.
“미인이 왕림하셔서 영광입니다. 뭘 도와드릴까요?”
은하가 미소로 응답한다. 실내가 금방 훤해지는 듯하다. 현준이 금세 끓여 주는 커피 잔을 받아들며 은하가 의자에 앉는다. 현준을 향해 앉으면서 그녀는 다리를 꺾어 무릎 위에 올린다. 평소의 은하는 무릎선이 감춰지는 치마를 입는 취향이다. 그런데 눈앞의 은하는 어떤가? 아주 짤막한 미니스커트인데다가 한쪽 다리를 꺾어 무릎 위에 올리지 않았는가? 얼핏 눈길이 스치는 데도 그녀의 노란 색 팬티가 눈에 띈다. 그뿐이랴? 별로 우습지도 않은 얘기에도 까르르 웃음을 흘리며 상체를 마구 흔들어댄다. 그 바람에 타이트하게 차려 입은 티의 표면으로 돌출한 젖가슴이 어지럽게 출렁댄다. 현준은 거듭 이상한 느낌이 들어 생각에 잠긴다.
‘점점 이상하잖아? 얼굴은 분명한 은하인데 행동이며 말투며 목소리까지 달라졌잖아? 사람이 변할 수는 있겠지만 이처럼 급격히 변할 수도 있을까?’
마침 연구실에는 석사과정의 후배들이 자리를 비우고 없는 상태다. 그들은 떼를 지어 전공서적을 구입하느라고 오전부터 광화문에 나갔기 때문이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현준을 찾을 때마다 석사과정의 후배들은 실험실을 비운 상태다. 현준은 기억을 더듬어 본다. 은하가 현준의 연구실을 찾게 된 지가 얼마나 되는지를. 불과 1년 전부터였다고 기억된다. 그 이전에는 은하가 현준의 연구실을 찾은 적이 없다. 반대로 현준이 이따금씩 은하의 실험실을 찾은 적은 있다. 그것도 심 교수의 지시에 따라 부득불 W교수의 협조가 필요할 때에 한해서다. 현준이 은하를 볼 때면 그녀는 언제나 예절이 바르다. 언제나 밝게 활짝 웃으며 머리를 깍듯이 숙여 인사한다. 항상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며 차분하게 얘기한다. 단 한 번의 대화로도 청아한 품격을 여실히 보여주는 유형의 여인이다. 그런데, 3주 전부터 현준을 방문하는 은하는 이전의 그녀가 아닌 듯하다. 예법이나 태도 및 발출하는 이미지에 있어서 아무리 봐도 예전의 은하와는 너무 다르다.
현준은 은하의 달라진 태도를 두고 달리도 생각해 본다. 근래에 은하가 혹시 현준을 이성으로 느끼고 접근하는 건 아닐까도 생각하고서. 그렇다면 상대가 혼선을 빚지 않게 해 주어야 마땅하리라고 현준은 생각한다. 그래서 얼마 전엔 연인으로서의 소연의 얘기를 약간 은하에게 들려준 일도 있다. 그 뒤론 은하의 발길이 뜸하리라고 현준은 예견했다. 하지만 현준의 예측은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오히려 은하의 발길은 더 잦아지고 복장은 더욱 선정적으로 변해 간다. 이러니 현준에겐 무슨 영문인지 모를 일이라고 여겨진다.
실험실의 이곳저곳을 훑어보더니 은하가 배양실의 설계 도면에 대한 얘기를 슬쩍 비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현준은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느낌이다. 설계란 실험 장치를 배치하고 관련된 장치들의 기능을 엮어서 하나의 골격을 만드는 작업이다. 여기에 관련된 도면을 설계 도면이라고 하는 거다. 설계 도면에는 실험에 관련된 거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기 십상이다. 이렇게 중요한 도면에 대해 얘기하는 은하가 순간적으로 섬뜩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현준은 내색하지 않고 가볍게 장치에 대한 원리를 설명하며 넘긴다.
현준은 11월 하순이라는 시점에 대해 언제나 경각심을 지닌다. 며칠만 지나면 1년의 기간이 1달밖엔 남지 않는다는 절박감 때문이기도 하다. 은하의 선정적인 태도와는 달리 그녀의 학문적인 깊이는 현준에게도 늘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W교수의 제자로서 손색없는 인재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배양실 내부를 둘러보며 몇 번이나 뜸을 들이다가 은하는 현준을 향해 말한다.
“현준 씨! 저는 어려서 일찍 부모님을 여의었거든요. 그래서 주변엔 친척이라곤 없어요. 고향에 한 번 내려가 보고 싶어도 혼자라는 사실에 망설여지기만 해요. 모처럼의 부탁인데요, 제 부탁 하나만 안 들어줄래요?”
은하의 모처럼의 부탁이라니? 현준은 생각에 잠긴다. 줄기세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부터 얼마나 숱한 난관을 만났던가? 난자의 핵을 제거한 뒤에 다른 체세포의 핵을 삽입하는 과정에서다. 난자가 찌그러지거나 늘어나지 않게 변형을 최소화시켜야 한다. 다음으로는 난자에 치환된 핵과 세포질 간의 활착을 증가시키는 문제다. 이것은 전기 충격파를 이용하는 방법인데 전자 회로의 구성부터 만만치 않다. 미세한 충격파를 야기할 수 있는 장치라야 한다. 어떤 진동수의 파동이 최적 상태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활착 시점을 놓치고 나면 배아는 세포 분열도 못한 채 말라붙기 마련이다. 배아가 말라붙을 때의 암담하고 스산한 느낌이란? 실험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막막한 느낌에 몸을 떨지 않을 수 없다. 제대로 진행도 못 시킨 채 시료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 신산스러운 심정.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숱한 좌절감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이런 좌절감마저 잠시 떨쳐 버리고 은하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작정한다.
현준은 은하가 어려서 부모를 잃었다는 얘기를 듣자 그만 가슴이 저려든다. 그러면서 은하가 불쌍하게 여겨지면서 아껴 주고픈 마음이 일시에 솟구친다. 마음이 이렇게 굳혀지자 현준은 즉시 은하를 향해 말한다. 무슨 부탁인데 그렇게 뜸을 들이느냐고? 그냥 말만 하면 충분히 들어주겠다고 현준이 말한다. 현준의 시원스런 응답이 은하에게는 무척 반가운 모양이다. 은하의 눈빛에 잠시 감격스런 표정이 실린다.
“다름이 아니구요. 제 고향은 제주도의 천제연 계곡이거든요. 요즘은 공원이 되어서 계곡에 인가가 없지만 예전엔 초가가 몇 채 있었대요. 아주 옛 날의 흑백 사진이긴 한데 초가의 모습이 뚜렷이 나타나 있잖아요? 비록 이젠 아무런 연고지도 없겠지만요. 부모님의 숨결이 살아 있었던 거기를 꼭 좀 둘러보고 싶어요. 제 혼자서 가긴 두렵기도 해서 현준 씨께 어려운 부탁을 드리는 거예요.”
현준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어라? 은하의 고향이 제주도의 천제연 계곡이라구? 이 바쁜 와중에 천제연까지의 동행이라? 무슨 부탁이든 들어준다고 했으니까 기꺼이 들어주어야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현준은 선뜻 은하에게 대답한다.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날짜만 잡으면 기꺼이 동행해 주겠다고 응답한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난 듯. 지난번에 현준에겐 애인이 있다고 은하에게 얘기한 기억이 나느냐고 묻는다.
은하는 지체 없이 응답한다.
“그 얘기는 분명히 들었어요. 그런 걱정은 않으셔도 돼요. 제가 남의 애인이나 가로챌 못된 여자로 보이세요? 제가 네 살이나 밑이니까 저를 여동생으로 여기면 안 될까요?”
현준은 마침 자신의 마음과도 일치하는지라 흔쾌히 응답한다. 현준이 은하에게 존댓말은 쓰겠지만 여동생으로 삼아 잘 보살펴 주겠다는 대답이다. 현준의 시원스런 대답은 은하에게는 감동적인 모양이다. 은하가 감격한 눈빛으로 현준에게 묻는다. 지금 한 말이 정말이냐고? 은하의 물음에는 가녀린 정감이 물살처럼 남실댄다. 목소리로 판단건대 현준에겐 은하가 간절히 원하는 내용으로 여겨진다. 현준도 자신의 마음을 다시 한 번 가다듬으며 대답한다. 확실히 그렇다고 대답한다. 현준의 대답을 들은 직후다. 은하는 입술을 깨물며 찰나 간에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 은하는 잠시 연구실 창 밖의 목련나무를 바라보더니 말한다.
“그렇다면 오늘 저녁은 제가 살게요. 사랑하는 오빠를 위해서예요. 잠시 시내에 나가 책방을 둘러보다가 나중에 제가 전화 드리면 곧바로 나오세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종종걸음을 치듯 연구실을 빠져나가 버린다.
현준은 다시 마음을 추스르며 실험대를 향해 앉는다. 일단 허파 조직으로의 분화 과정까지를 규명한 상태다. 남은 건 심장과 콩팥에 대한 분화 과정만 규명하면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심장과 콩팥 때문에 숨졌는가를 생각해 본다. 그만큼 심장과 콩팥은 5대 장기 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한 터다. 2장기에 대한 연구가 끝나는 대로 내년 봄에는 세계의 논문지에도 발표할 예정이다. 현준이 배아세포의 보존 상태와 세포분열의 상태를 면밀히 지켜본다. 그런 다음 실험 일지에 꼼꼼히 기록해 둔다. 벤치 유닛(behch unit)으로 제작된 세균 배양실의 각종 계기들도 점검하여 기록해 둔다.
오후 6시 무렵. 현준의 핸드폰이 울린다. 현준이 핸드폰을 귀에 갖다댄다. 은하의 목소리가 맑은 샘물처럼 흘러든다. 관악구청 앞 골목으로 나오라는 얘기다. 현준은 실험실 내를 둘러본 뒤 곧바로 교내 정류장으로 향한다. 현준은 걸으면서 생각에 잠긴다. 지난 10월 19일의 일이었다. 보건복지부와 S대 병원은 서울 혜화동 S대 병원 내에 세계 줄기세포 허브를 개설했다. 세계 줄기세포 허브(World Stem Cell Hub)란 줄기세포 연구의 중추 기관을 의미한다. 네트워크를 통해 해외의 줄기세포 은행들과 숱한 정보 교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허브는 척수 손상과 파킨슨 씨 병 등 신경계 질환의 환자 등록을 받는다. 등록된 환자는 줄기세포의 실용화에 대비하여 체세포를 보관할 수 있다. 허브의 개소식에는 영국 로슬린 연구소와 미국 피츠버그 의대의 과학자들도 참가했다. 허브의 소장으로는 S대의 W교수가 임명되었다. 현준은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가슴에서 불타는 연구의 열정을 가다듬는다. 심장과 콩팥에 대한 분화 과정만 규명한다면? S대 본관 건물 북쪽의 널브러진 잔디밭의 끝부분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광활한 잔디밭에 바람이 인다. 잔디들이 물결처럼 요동치는 장면이 현란할 지경이다.
현준은 교내의 대기 중인 좌석버스에 오른다. 정문을 거쳐 고갯길로 넘어서서 관악구청 앞에서 현준이 내린다. 거기서부터 그 주변으로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현준이 차에서 막 내리자마자 은하가 손을 들며 나타난다. 아마도 정류장 부근에서 현준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현준이 다가서자 자연스레 현준의 왼쪽으로 팔짱을 낀다. 현준도 부담스럽지 않은 느낌이다.
값싸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곳은 돼지갈비 집이다. 현준은 예사로 돼지갈비 집으로 갈 작정이었지만 은하는 횟집으로 들어선다. 둘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횟집의 방바닥에 앉는다. 은하가 현준에게 말한다. 오늘은 은하가 살 테니까 현준더러 많이 먹으라고 한다. 현준은 즐거운 듯 고개를 끄떡인다. 현준이 미소로 응답하자 은하가 주인을 부른다. 광어회를 중(中)으로 하나 주고 소주 한 병만 달라고 주문한다.
이윽고 음식이 배달되자 은하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술병을 딴다. 그러더니 현준의 술잔에 술을 따른다. 현준도 은하의 술잔을 가득 채운다. 이윽고 둘은 술잔을 부딪친다. 잔을 들어 입술만 조금 축인 뒤에 잔을 내려놓는다. 천천히 술을 마시려는 것이다. 회를 젓가락으로 찍어 상추에 싸면서 은하가 입을 연다.
삶은 유한하기에 값지고 아름답지 않느냐는 얘기다. 놀랍게도 현준의 견해와 정확히 일치되는 관점이다. 삶이 무한하다면 굳이 아등바등 연구를 한다거나 일할 필요가 없으리라 여겨진다. 유한한 삶이기에 순간의 시간들이 소중하고 의미가 있는 거라고 현준에겐 생각된다. 관점이 유사한 사람끼리의 만남이라? 현준은 생각할수록 묘한 인연 같기만 하다고 생각한다. 점차 마음이 은하에게로 열려 감을 느끼며 현준은 은하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그 순간. 은하의 말이 귓전으로 밀려든다.
“오빠! 지금부터 제게 말을 놓으세요. 지금 이 순간부터 진정한 의남매가 되고 싶어요.”
현준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현준은 은하를 진정한 여동생으로 삼고 싶다. 그렇다면 당연히 은하의 말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그도 고개를 끄떡이며 그녀의 말에 응답한다. 당장 그렇게 하겠다고. 그러면서 의남매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로 한 잔을 쭉 들이마시자고 말한다. 은하도 상쾌한 웃음소리를 내며 고맙다는 말로 응답한다.
이렇게 해서 둘은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게 된다. 어려서부터 일찍 부모를 잃은 은하와 부모의 얼굴조차 모르고 자란 현준의 만남. 둘의 만남은 참으로 서로의 공허함과 외로움을 달랠 계기를 형성한다. 서로 통하는 마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이랴? 둘은 그 행복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진정한 마음을 열어 대화를 나눈다.
2병째의 술을 주문하여 술잔을 나누면서부터다. 은하는 중국 당나라의 시인인 백낙천(白樂天)의 비파행(琵琶行)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
“참으로 인간의 삶은 그 의미가 뭘까요? 중국의 백낙천은 비파행이란 시에서
轉軸發絃三兩聲(전축발현삼양성)에
未成曲調先有情(미성곡조선유정)이라.
‘비파의 축을 바로 세워 두어 번 튕겼더니
미처 곡조를 이루기도 전에 정감이 먼저 생기더라.’
위와 같이 노래를 했어요. 한 번 죽고 나면 덧없이 스러질 삶이잖아요? 사람들은 어찌 가슴의 정감 하나를 추스르지 못하여 설움을 삼키고 눈물을 뿌려야 할까요?”
은하의 눈시울에 서서히 물기가 배어들고 있다. 현준은 그녀의 모습이 안타까워 그녀의 뺨을 양 손으로 감싼다. 은하가 중국의 시문(詩文)에도 조예가 깊음을 보고는 더욱 마음이 끌리는 상태다. 현준도 은하의 정서에 화답하려고 백낙천의 장한가(長恨歌)로 응답한다.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이어도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이라.
‘아무리 천지가 오래 간다고는 하나 유한한데 끊임없이 지속되는 이 한은 없어질 날이 없겠 구나.’
백낙천은 위와 같이 말했지. 삶은 유한한 반면에 사람의 정감이란 언제까지나 아련한 추억거리로 남겠지.”
얼추 1시간쯤 술잔을 기울였을까?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울대역 사거리에서 봉천동 고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몇 발자국인가 발걸음을 옮기다가 둘은 디스코텍(discotheque)으로 들어선다. 거기서 남은 열정을 다 태우듯 서로 마주보고 춤을 춰댔다. 디스코텍을 빠져나오기 전에서였다. 은하가 현준에게 한 번만 세게 안아달라고 조른다. 현준과 은하는 연인처럼 힘껏 포옹한 뒤에 골목 밖으로 나선다. 밤의 정서가 별빛을 타고 점차 정화되는 시각인 듯하다. 현준은 은하를 택시에 태워 배웅하고 자신도 집으로 향한다. 현준은 피곤하여 세수를 마치고는 곧바로 잠자리에 든다.
어느새 나흘이 지났다. 목요일 오후 3시 무렵이다. 마치 후배들을 어떻게 매수하기라도 한 듯. 실험실 후배들이 인근 대학의 학술행사에 참여하러 간 뒤다. 은하가 현준의 연구실에 들러 말한다.
“제주도의 왕복 항공권 2장을 어떤 행사에서 상으로 받은 게 있어요. 내일 오전 8시 비행기로 제주도로 가지 않을래요?”
“그래, 네 덕에 제주행 비행기 한 번 타겠구나.”
현준이 비행기의 탑승 장면을 떠올리는 순간. 문득 8,000m 상공의 구름층보다 더 높이 나는 비행기를 연상한다. 그러면서 무척 평온한 느낌에 잠긴다. 세계가 합법적인 방식으로 줄기세포를 연구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헌데도 청화와 같은 해외 연구원들이 불법으로 국내 기밀을 엿보지 않는가? 삶의 방식에 정의와 불의가 공존하는 세상이지만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지는 현준이다. 얼마든지 합법적인 방식으로 연구를 함께 한다면 인류에 기여하는 속도는 절대적으로 빨라지리라. 그런데도 일부의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선 한국의 줄기세포의 허브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일부의 연구 단체들은 독자적인 연구를 진행하기도 한다. 반면에 그럴 정도의 기술적 배경이 없는 곳에선 불법적인 연구를 꾀하고 있다. 불법적인 연구의 대표적인 사례가 기밀 서류의 탈취에 관련된 것이리라. 이미 국내에선 춘천 학술회의장과 대전의 학술회의장에서 피해를 보지 않았던가? 현준은 비행기를 타듯 평온한 연구의 기류를 바라는 심정이다. 그러다가 문득 은하의 태도에 생각이 미친다.
무엇보다 현준에게 좋게 느껴지는 건 의남매를 맺은 이후의 은하의 태도다. 다시 이전처럼 예절 바르며 재치 있는 여인으로 되돌아간 듯이 여겨지기 때문이다.
은하를 바라보자 문득 소연의 얼굴이 떠오른다. 현준과 연인이 된 후부터 소연은 간간이 현준의 아파트를 찾아들곤 한다. 찾아올 때마다 시장 봐 온 물품들을 부려서 냉장고에 채워 놓는다. 그리고는 1시간씩 현준에게 안겨 함께 누웠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한다. 소연이 집안에서 움직이면 집안은 금세 활기찬 공간이 되곤 한다. 거실과 방은 물론이요 시선이 미치는 곳은 어디나 잘 닦여 빛난다.
현준은 상념에서 깨어나 다시 은하를 바라본다. 얼굴 전체에 화색이 만연하다. 어디에도 그늘진 행색이 엿보이지 않는다. 현준은 내심 감탄한다. 사람의 마음이 인상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하는지 확연히 느낄 정도다. 은하도 이제는 어엿한 실험의 조력자라 할 만하다. 마치 자신의 실험실인 양 익숙하게 현준을 돕곤 한다. 재조합 유전자를 만드는 기술에 있어서도 은하는 충분히 조언할 수 있을 정도다.
은하가 돌아간 뒤. 현준은 실험일지를 차근차근히 정리한다. 언제 어디서나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인다. 실험일지의 정리가 완료되자 현준은 심 교수의 연구실을 찾는다. 심 교수가 마침 커피를 타는 중이다. 현준은 커피를 마시면서 심 교수의 얼굴 표정을 살핀다. 언제 봐도 호인 기질의 활달한 풍도다. 현준은 며칠간의 휴가를 신청하기에 앞서 잠시 마음을 가다듬는다. 은하와의 일은 함부로 얘기할 수가 없기에 다른 핑계를 댄다.
“선생님, 저는 내일 지방에 다녀올 일이 좀 생겨서 다녀올까 합니다.”
심 교수는 의외라는 듯 대뜸 말한다.
“그럼, 당연히 다녀와야지. 언제쯤 올라올 건가?”
현준은 되도록 빨리 다녀오도록 하겠다고 응답한다. 심 교수는 생각에 잠긴다. 좀체 휴가라곤 신청한 적이 없던 현준이 아닌가? 그런 현준의 신청이니 흔쾌히 수락한 상태다. 언제 어디서건 자신의 연구에 있어선 열정적인 제자이기에 심 교수는 흡족한 심정이다.
심 교수의 방을 물러나온 뒤. 현준은 가방을 챙겨 실험실을 빠져 나온다. 내일의 여행을 위해 약간의 금액도 찾아야 한다. 은행의 현금 인출기를 통해서 여행 자금으로 얼마간의 금액도 인출한다. 비상금 규모의 금액이다. 여행용 배낭을 구입하여 갈아입을 내의와 세면도구를 챙겨 넣는다. 그리고는 일기를 쓴 뒤에 잠자리에 든다.
오전 8시 10분에 비행기가 공항의 활주로를 서서히 미끄러져 나가기 시작한다. 고속으로 달리기 시작하여 25초가 지날 무렵에 비행기의 몸체가 허공으로 치솟는다. 좌석은 비행기의 날개 부근이어서 바깥 경치를 조망하기엔 적합한 편이다. 현준은 은하가 바깥 경치를 구경하도록 은하에게 창쪽의 자리를 권한다. 바다를 건너 제주에 가까워질수록 비행기의 고도가 점차 낮아진다. 구름층을 통과하여 하강하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그렇게 장관일 수가 없을 지경이다. 마치 거대한 얼음 조각 같은 구름덩이들이 시야를 온통 가릴 정도다.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건지 설곡(雪谷)으로 곤두박질치는 건지 잠시 혼란스러울 정도다. 비행기는 9시 무렵에 제주공항에 도착한다. 공항을 빠져나가자마자 렌터카 회사를 찾아 승용차인 산타페를 빌린다. 차의 뒷자리에 여행용 가방과 짐을 채우고 은하를 조수석에 앉힌다. 그리고는 신제주를 지나 서귀포 시로 뚫린 99번 국도로 차를 몬다. 현준은 자가용은 갖지 못했지만 면허증과 수년간의 운전 경력을 지닌 운전자다. 북에서 남쪽으로 한라산을 횡단하는 제2 횡단도로이다. 관광 목적이기에 차는 제한속도로 맞춰 달린다. 횡단도로의 끝자락은 서귀포의 중문동이다. 거기에 이르면 관광 명소인 중문단지가 펼쳐져 있다. 현준은 곧바로 천제연 폭포를 찾아 차를 몬다.
99번 국도의 끝자락에서 12번 국도를 만나 우회전하여 1.2km를 달리니 천제교(天帝橋)가 나타난다.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 무렵이다. 천제교는 중문천이란 하천에 드리워진 교량이고 그 아래로 형성된 폭포가 천제연 제1폭포다. 차를 주차장에 세운 뒤. 둘은 관광 안내판을 따라 천제연 계곡을 더듬어 내려간다. 입구에서 10여 분쯤 내려갔을 때다. 돌연히 와 닿는 우렁찬 물소리와 함께 제1폭포의 웅장한 위용이 드러난다. 참으로 ‘폭포다운 폭포’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폭포로 흘러드는 수량은 우천시에 소양호에서 방류되는 물줄기처럼 거대하다. 폭포의 높이가 22m이며 그 아래 형성된 천제연(天帝淵)이란 못은 수심이 20여 m에 달한다. 폭포의 폭 또한 10여m에 이르기에 충분히 장엄한 느낌이 들 정도다. 폭포와 못 주변에는 증발된 수증기가 남실대어 신비한 분위기를 연신 자아낸다. 답답한 현준의 가슴이 일시에 뚫리는 기분이다. 현준에겐 오랜만에 웅장한 폭포를 대하는 느낌이다. 고작 가는 물줄기 몇 가닥이 흐를 뿐인데도 폭포라 불리는 곳이 좀 많은가? 저수되기 어려운 지형인 제주도에서 모처럼 거대한 물줄기를 만나니 경이로울 지경이다. 중문천으로 흘러든 물줄기가 흘러내리면서 만든 천제연 폭포. 아무리 봐도 현준에겐 이름에 걸맞은 폭포라고 여겨진다.
현준은 은하의 손을 잡아 이끌며 제2 폭포를 향해 계곡을 내려선다. 천제연에서 제3 폭포까지는 인공으로 조성된 관광로가 운치 있게 잘 발달되어 있다. 제2 폭포를 지나서 계곡을 내려서니 멀리서도 한 눈에 띄는 웅장한 건축물이 보인다. 다름 아닌 선임교다. 거대한 계곡을 가로막아 어엿한 구름다리를 만든 것이다. 그 다리를 건너 서쪽으로 가면 천제루와 여미지 식물원이 나타나게 된다.
둘은 제3 폭포까지 내려가 본다. 제3 폭포를 지척에서 관망할 수 있도록 관망대까지 조성되어 있다. 관망대는 폭포가 있는 계곡에 세워져 있다. 관망대로 내려서는 길은 가파른 언덕길인데 그 언덕의 좌측 편. 거기의 건너편 위쪽 언덕 편에는 사원건물들이 바라보인다. 건물의 형태를 보니 오래된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 사원과 골짜기를 한참 바라보던 은하가 흑백 사진 몇 장을 꺼내든다. 한참 뚫어지게 지형을 관찰하다 말고 현준에게 말한다.
“오빠, 저기 저 도도록한 지형이 이 사진의 지형과 닮지 않았어요? 잘 좀 봐 주세요.”
현준도 그 지형과 사진을 꼼꼼히 대조해 보더니 손뼉을 ‘탁’ 치며 응답한다.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능선 자체의 모양은 그대로야. 저기 도도록한 윗부분에 너의 집이 있었겠구나. 일단 여기까지 온 김에 한 번 들렀다 가자구.”
은하의 눈시울엔 어느새 물기가 서려 반짝인다. 되돌아갈 수 없는 옛 날의 기억 저편을 더듬는 모양이다. 현준은 은하가 마음껏 상념에 잠기게 일부러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린다. 둘은 고개의 갈래 길에서 좌측으로 꺾어서 사원의 경계까지 걸어 올라간다. 마침내 도도록한 지형의 언저리에서 둘은 주위를 샅샅이 살펴본다. 과거로의 기억의 여행이 아닌가? 현준에겐 그 누가 출생지를 함께 찾아줄 사람이나 있으랴? 출생지나 출생 일시도 모르는 현준이 아닌가? 그래도 출생지의 단서를 찾으려는 은하가 부러울 지경이다. 출생지마저 모르는 자신의 신세를 떠올리며 현준은 가만히 입술을 깨문다. 멀리서 낯선 새의 울음소리가 현준의 청각으로 밀려든다. 아스라한 그리움에 젖어 그만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현준이다. 인가 부근이라 산죽(山竹)이 곳곳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또한 산죽 이외에 잘디잔 기와의 파편들이 여기저기로 널브러져 있다. 나무가 타서 오래 된 숯이라든지 구들장으로 사용된 듯한 돌무더기들이 즐비하다. 골짜기를 따라 100여m를 뒤져봐도 인가를 이뤘으리라고 생각되는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다. 그렇다면 사진에 제시된 은하의 마을은 둘이 멈추어 선 곳임에 틀림없으리라 여겨진다. 마침내 은하가 치솟는 슬픔을 못 견뎌 울음을 터뜨린다. 은하의 울음소리를 들으니 현준의 마음도 극도로 공허해지는 느낌이 든다.
부모의 사진은 고사하고 단서가 될 그 어떤 것도 갖지 못한 현준이다. 과연 부모가 있기는 한 건지 그것마저도 알 수 없는 일이라 여겨진다. 현준도 우울한 마음에 휩싸여 천제연 계곡의 서쪽 능선에 줄지어 선 야자수들을 바라본다. 그 야자수들은 여미지 식물원에서 재배하여 인공적으로 심은 것으로 보인다. 처음의 격렬한 울음과는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은하는 울음을 삼키고 있다. 아마 다시는 못 돌아올 땅이라도 되는 듯 은하는 거듭 땅을 쓰다듬는다. 그러면서도 쉴 새 없이 어깨를 들썩인다. 현준도 착잡하기 이를 데 없는 마음이었지만 내뻗은 능선의 야자수들을 보며 자신을 추스른다.
반시간이 지났을 때다. 그제야 은하는 눈시울을 닦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여전히 눈망울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다. 충혈된 은하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현준은 생각에 잠긴다. 은하가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을 때까지는 잠자코 기다려야겠다고 여긴다. 그녀의 과거 공간으로의 여행에 그가 방해를 해서는 안 되리라 여긴다. 그러면서 현준도 자신의 과거를 더듬는다. 어쩌면 일체의 출생의 단서가 없었을까? 생각할수록 가슴만 타오를 뿐이다. 혹여 모래 폭풍에 떠밀리는 사막의 전갈이라면 어땠을까? 몇 발자국을 옮기다가 모래에 떠밀려 버둥대다가 날짐승을 만나면 죽음을 당할 뿐이리라. 전혀 미래라곤 예측하기 어려운 전갈의 삶이지 않는가? 반면에 우주에 사람으로서 출현한 것이 그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그 축복의 순간의 실마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슬픔에 잠기는 은하 못지않게 현준도 허망함의 소용돌이에 휩쓸린다.
다시 한참만에야 은하가 땅바닥에서 몸을 일으킨다. 영혼이 모두 다 빠져나간 듯한 신색이다. 그러면서도 다시 한 번 주변의 지형들을 하나하나 새겨 담듯 둘러보고 있다. 그녀의 충혈된 눈망울을 비껴 속눈썹으로 바닷바람이 밀려든다. 소금기 절은 해풍이 계곡의 발치로부터 자꾸만 밀려드는 모양이다. 해풍의 강도에 따라 그녀는 유년기를 더듬어 내려가는 듯. 얼굴의 저변에서부터 과거로 줄달음질치는 공허한 소용돌이가 이는 느낌이다. 은하의 눈썹이 자꾸만 파들거리며 떨어댄다. 현준은 그러한 은하와 동행하고 있다는 데 대해 더욱 암울해지는 듯하다.
‘은하야, 너무 슬퍼하지 마. 너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실은 너무 외로워. 너만 울 줄 알고 네게만 눈물이 있니? 아니잖아? 그게 아니잖아!’
현준은 상념에 잠긴 채 잠자코 은하의 행동을 지켜볼 따름이다. 그 동안 혼자서는 용기가 없어서 고향을 못 찾았다는 그녀. 어쩜 이 번에 찾은 고향을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를 일이리라. 서울과 제주의 거리가 얼마이며 누가 시간을 선뜻 함께 하겠다며 할애해 주겠는가? 모르기는 해도 현준의 생각으로 그녀가 다시 고향을 찾기는 어려우리라고 여겨진다.
한참 주변을 반복하여 둘러보던 은하가 파리한 모습으로 현준에게 다가선다. 그러면서 속삭이듯 말한다.
“오빠, 느닷없이 기운이 빠지면서 현기증이 일려고 하네요. 저를 저기 갈래 길까지만 좀 업어 줄래요?”
은하의 공허한 목소리가 밀려드는 순간. 현준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온통 하얀 거스러미가 이는 느낌이다. 자신의 공허함도 추스르기 힘든 상태인데 은하가 도움의 손길까지 내밀다니! 따스한 해변의 햇살마저 슬픔을 부추기는 듯하다. 삶이란 정녕 뭣이기에 자신과 은하와 같은 기구한 사람들도 있으랴 싶다. 살얼음과도 같이 떨리는 내면의 슬픔을 감춘 채. 현준은 은하를 향해 흔쾌히 등을 내민다.
은하는 말없이 현준의 등에 업힌다. 헌데 은하를 업는 순간. 현준에게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평소에 볼 때도 은하의 체중이 비쩍 마른 편은 아니다. 그냥 날씬한 유형의 여인들의 체격이라고 현준에게는 여겨진다. 그런데 은하를 업는 순간. 등에는 전혀 체중이라곤 실리지 않는 느낌이 든다. 체중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라니! 마치 현준이 형체가 없는 물건의 그림자만을 업는 느낌이 든 것이다. 두 손을 등 뒤로 돌려 은하의 엉덩이 부위를 추켜 업는다. 30여m를 걸어갔어도 체중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하다. 문득 유령을 업은 건 아닐까도 싶다. 그것도 찰나의 생각이었을 뿐. 현준은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은하를 정성스레 업고 발걸음을 내닫는다.
현준은 은하를 갈래 길까지의 50여m를 업고 간다. 마지막 부분에는 약간 힘이 들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느낌이 다르다. 갔던 길을 되돌아갈 때까지 은하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수가 적어진다. 현준은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이 든다. 계곡으로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은하의 상태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주차장으로 되돌아 나오니 오후 2시다. 괜찮다는 은하를 억지로 데리고 종합병원에 들른다. 몇 가지 기초 검사 자료를 들여다보며 내과 전문의는 말한다.
“별 이상은 없어요. 다만 정신적인 긴장감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부적응 현상이라고 생각됩니다. 금방 나아질 겁니다.”
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병원을 빠져 나온다. 점심식사를 하고는 둘은 중문단지의 여미지 식물원으로 간다. 풍부한 종류의 식물을 보유한 열대 식물원이다. 다양한 색상을 가진 식물들을 일일이 둘러보며 탄성을 지르며 대화를 나눈다. 1시간가량 식물원을 둘러보고는 차를 서쪽으로 몬다. 서남 해변의, 종(鐘) 모양으로 생긴 기생화산인 산방산에도 들른다. 불상과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는 석제의 수조(水槽)가 있는 산방굴사에도 들른다. 산방산을 출발하여 서남쪽 해변의 송악산 선착장에 차를 세운다. 거기서 둘은 최남단인 마라도까지 가는 유람선을 탄다. 마라도는 너무나 좁아서 차량이 못 들어가는 곳이다. 그냥 1시간 정도로 섬을 빙 둘러보며 돌아다니는 것이 고작이다. 풍력 발전소도 있고 숲을 이룬 억새풀의 군락지도 있다. 시간이 되면 송악산 선착장으로 되돌아가는 유람선을 타면 된다. 둘이 송악산 선착장에 내리면서 바라보니 산방산의 모습이 너무나 가깝게 보인다. 흡사하게 사원의 동종(銅鐘)을 닮은 모습이다.
둘은 저녁을 먹고는 차를 몰아 제주 시내로 들어간다. 이튿날 아침 9시 비행기를 타려면 저녁에 차를 반납해야 한다. 둘은 차를 반납하면서 주변의 모텔에 숙소를 정한다. 둘은 사방으로 걸어 다니다가 시내의 사라봉 공원에 오른다. 시민 공원인 사라봉에는 밤에도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댄다. 공원에서 내려다보이는 시가지의 전등불이 과수원의 복사꽃처럼 화사하게 느껴진다. 현준은 은하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어둠에 잠긴 바다를 바라본다. 현준은 제주의 명승지를 둘러본 느낌을 은하와 담소를 나누며 공유한다. 그러던 어느 순간. 시가지의 전등 불빛에 점차 어떤 상념이 맺혀서 끌려들기 시작한다. 불빛이 있는 곳은 사람의 생명이 숨쉬는 현장이 아닌가? 불빛이 스러지면 사람의 생명도 소진되어 갈 것이리라. 혈관에서 펄떡이는 생명의 색채는 얼마나 진한 빛일까? 많은 할 일을 육신의 병으로 인해 그만두어야 했던 사람들의 영혼들을 떠올린다.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얼마나 안타까운 시간들을 간절히 원했을까? 아무리 시간이 충분할지라도 스러져 가는 생명체에겐 환상적인 찰나에 불과할 따름이리라. 현준이 줄기세포의 분화 과정을 연구하는 일도 스러져 가는 생명의 빛을 되살리려는 측면이다. 병든 장기를 소생시키거나 교체할 근원을 제공하는 일이다. 여기에 현준의 사명이 드리워진 셈이리라. 한동안 야경을 감상한 뒤다. 둘은 택시를 타고 숙소 골목에 내린다. 은하가 잠시 슈퍼에 들러 맥주 2병과 마른안주를 사 온다. 둘은 프런트에서 열쇠와 칫솔을 받아들고는 숙소로 걸어간다.
애초에 방을 잡는 데 있어서 둘 사이에 약간의 의견 대립이 있었다. 현준은 방 2개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은하가 대들듯 따졌다. 남매간에 왜 방을 따로 잡으려느냐고? 그래서 방을 하나만 구했다.
숙소에 들어서자 은하가 방바닥에 신문지를 펴고는 맥주와 마른안주를 펼친다. 그런 뒤에 은하는 옷을 꺼내 욕실로 들어선다. 잠시 후에 욕실 문이 열리며 은하가 나온다. 머리를 수건으로 감고 나오는 그녀는 잠옷 차림새다. 여인의 잠옷을 대하자 현준은 잠시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마치 못 볼 걸 본 느낌 때문이다. 그랬지만 현준은 신속히 마음을 추스른다. 그리고는 속옷과 체육복을 들고 욕실로 들어선다. 욕조에는 적당한 온도로 은하가 수도꼭지를 열어 둔 상태다. 따뜻한 물이 중간쯤 차오르고 있다. 현준은 마음을 평온하게 가라앉히며 알몸을 충분히 수온에 적응시킨다. 목욕을 마친 뒤다. 현준이 체육복 차림으로 침실로 들어서자 은하는 드라이기로 머리까지 말끔히 말린 상태다.
은하가 술잔에 맥주를 채우며 말한다. 은하 자신은 이전부터 구로의 디지털 단지에 야간 직장이 있었다고 알려준다. 현준에게도 묻고 싶은 게 있었다며 잠시 운을 뗀다. 그러더니 현준에게 학비며 생계비는 어떻게 마련하느냐고 묻는다.
현준은 싱긋 웃으며 말한다. 맨입으로는 알려줄 수 없는 거라며 뜸을 들이며 은하의 표정을 살핀다. 은하는 즉시 현준에게 달려들듯 교태를 부린다. 잠시 숨결을 가다듬더니 현준이 대답한다. 은하는 현준의 눈을 응시하며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현준은 신림동의 아파트 주위에 있는 입시학원의 강사로도 뛴다. 일주일에 3번씩 저녁 시간대의 3시간씩을 강의하곤 한다. 학원의 원장하고도 교류한 지 오래다. 매달 말에 원장이 현준의 통장으로 강사료를 입금시키곤 한다. 현준이 나가는 입시학원의 수강자들은 많은 편이다. 그래서 현준의 통장으로 입금되는 금액도 적지 않다.
현준은 마주 앉은 은하를 바라본다. 속살이 훤히 내비치는 잠옷 차림새다. 게다가 착용된 속옷으로 성기만 겨우 가려진 채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지극히 난감하다. 자신도 몰래 현준의 성기가 발기하여 끄떡댄다. 현준은 최대한 침착성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어떤 경우에도 품위를 잃어서는 안 되리라 생각하는 현준이다. 그러다가 현준은 잠시 생각해 본다. 차라리 시선이 불편하다며 은하에게 다른 옷으로 갈아입도록 권할까도 싶다. 하지만, 그랬다가 은하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될까 두려운 현준이다. 은하가 떳떳하게 입은 옷차림이지 않는가? 그런 옷차림에 대해 현준이 불편하다고 말한대서야? 여인은 사소한 데서도 쉽게 자존심을 상하는 인간임을 잘 아는 현준이다. 자신만 떳떳하다면 괜찮으리라 여기며 현준은 마음을 추스른다.
둘은 대화를 나누면서 맥주잔을 부딪친다. 그리고는 맑은 눈길로 잠간씩 서로의 표정을 더듬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은하는 천제연 계곡에서의 느낌에 대해 얘기를 풀어놓는다.
“고향이란 누구에게나 활력의 근원지라고 생각되겠죠? 아무리 현실이 버겁고 고달파도 고향만 떠올리면 누구에게든 힘이 솟구치지 않겠어요? 저도 그런 걸 바라고 고향의 흔적을 찾았는데......”
은하의 목소리에 설움이 배어들면서 말이 잠시 끊긴다. 허나 이내 은하가 감정을 추스르며 말을 잇는다.
“제 손에 느껴진 고향의 의미는 전설 속의 신화 같은 거였어요. 그토록 간절히 그리움을 키워 왔건만 전혀 가슴에 느껴지는 게 없었어요. 이를 어떻게 표현해야죠?”
현준은 은하의 말뜻을 충분히 헤아리고도 남을 지경이다. 당연히 그랬으리라 여겨지기에 은하가 참 불쌍하다고 생각된다. 은하가 그 얼마나 방문하려고 별렀던 곳이었을까? 그랬는데도 정작 그 곳에서마저 부모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지 않았던가? 다만 흔적이라면 언제 적에 내버려진 것인지도 모를 잔해들뿐이지 않았던가? 그런 황량한 현실을 확인하러 제주까지 갔었던가를 떠올리자 은하는 서러웠다. 은하의 서글프고 허탈한 마음이 전신에 퍼지면서 그만 맥을 못 추게 된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