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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황색
갈매기 날다
손
정 모
8. 대덕 연구단지
태희가 황급히 아파트 문을 빠져 나간 뒤다. 소연은 현준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방금 그 아가씨와 새벽까지 화끈하게 붙고는 했어요? 얼굴도 꽤 예쁘던데 어떻게 현준 씨의 마음을 휘어잡지 못했는지 궁금하군요.”
현준도 싱긋 웃으며 응답한다. 더러 새벽까지 화끈하게 붙고는 했다고. 방금 그 아가씨가 바로 태희였다고 들려준다. 마음이 공허하거나 심심할 때면 현준을 찾는다고 했는데 오늘도 심심했던 모양이라고 말한다. 현준을 방문할 때마다 현준 혼자였는데 오늘은 소연이 있어서 놀랐으리라고 덧붙인다.
저녁 시간이 되자 소연이 맛깔스런 갈치국과 가오리무침을 비롯한 몇몇 반찬을 선보인다. 마치 예비 주부로서의 평가를 받으려는 것처럼. 겸상을 하여 수저를 드니 둘은 마치 신혼부부 같은 느낌에 젖는다. 현준의 혀끝으로 느껴지는 갈치국의 맛이 일품이다. 그대로 내장으로 흡수되는 듯한 감미로움이 느껴진다. 현준이 미소를 지으며 소연에게 말한다. 소연은 참 재주 많은 여성이라고. 얼굴도 고운데다가 음식 솜씨까지 일품이어서 현준이 너무 상대를 잘 고른 모양이라고 들려준다. 그러자 소연이 응답한다. 정말이냐고? 앞으로 더 잘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식사와 설거지를 마치고 얼마간의 휴식을 취한 뒤다. 소연이 베란다에서 화분 2개를 거실의 서가(書架) 위로 옮겨 놓는다. 실내에는 풍란의 향기로 금세 남실댄다. 하얗고 깔끔한 꽃의 맵시가 현준에겐 선비의 풍도로 비친다. 풍란은 현준의 집을 방문하면서 소연이 들고 온 선물이다. 현준은 풍란의 은은한 향기로 한없이 평온한 느낌에 젖는다. 연구로 인해 곤두선 긴장 상태가 해소되는 기분이다. 식사가 소화될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다. 소연은 실험일지를 펼치며 현준에게 말한다. 지난번의 조언대로 전기 회로까지는 제대로 맞췄다고. 중요한 게 전기장의 펄스(pulse)를 조정하는 문제라고. 좀 쉽게 설명해 주면 고맙겠다고 말한다. 현준이 전기 회로의 구조를 떠올리며 연습장과 볼펜을 꺼내든다. 도면을 그려가며 천천히 소연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설명한다.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못한 눈치가 보이면 거듭 상세히 설명해 준다. 현준은 종이에 그림을 그려 가며 소연을 향해 말한다.
“전기장의 펄스는 결국 파동 에너지에 대한 기본 개념으로 다 귀결되거든요. 여기에 수직으로 전자파가 진행한다면 동일한 파장을 갖되 파동면이 수직인 자기파가 있어요. 모든 파동 에너지는 진동수에 비례하거든요. 달리 말하면 펄스를 조절하는 척도는 공급되는 전원의 에너지를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달린 거예요. 펄스는 순간적으로 잠시 흐르는 전류인데 짧은 시간 동안의 파형을 조절하는 게 중요하죠.”
현준은 벌써 다섯 장째의 B4 용지에 그림을 그리며 소연에게 설명한다. 소연은 너무나 행복한 느낌에 잠긴다. 이처럼 친절한 학문의 조력자가 있다면 어떤 연구라도 성공시킬 것만 같게 느껴진다. 충분한 설명을 듣고는 소연이 실험일지와 자료를 잘 갈무리하여 가방에 넣는다. 소연의 가슴은 연신 설렌다. 그녀에겐 벅찬 과제의 질문이라도 현준에게는 막힘이 없어 보인다. 생활과 학문과 연인에 대한 배려에 일관성이 있는 사내. 그 사내의 연인이라는 사실에 소연은 가슴이 뒤설렌다. 소연이 벽시계를 바라보니 밤 8시 무렵이다. 소연은 방바닥에 청결한 침구와 베개를 깐다. 그리고는 손짓으로 현준을 불러들인다. 현준은 미소를 지으며 소연에게로 다가간다. 다가오는 현준을 향해 소연이 말한다.
“딱 1시간만 당신의 품에 안겨 누워 있고 싶어요.”
현준도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이불 속으로 몸을 눕힌다. 몸을 옆으로 돌려 소연의 머리가 그의 오른팔을 베도록 한다. 그리고는 둘은 서로 마주 바라보며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며 깔깔거리기도 한다. 참으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의 만남은 의미가 있는 것이리라. 둘은 그럴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평온하고 아늑하기만 하다. 둘이 함께 하는 시간 동안에는 전쟁이 일어나도 두렵지 않을 것만 같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1시간이 흘렀다.
밤 9시다. 소연은 가방을 챙겨 현준의 아파트의 문을 나선다. 현준은 주차장까지 나가 소연을 배웅한다. 소연은 손을 흔들어 보이며 현준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소연이 떠난 주차장에서다. 현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소연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고아로 자란 설움이 일시에 스러지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그녀는 유전공학 연구의 동반자가 아닌가! 인생과 학문의 동반자인 소연. 현준은 그녀를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마음을 먹는다. 서서히 현준에겐 소연과의 관계가 Y2 유전자와 솜털 단백질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여겨진다. 조절 유전자와 촉진 단백질의 메커니즘만 밝혀진다면 분화 과정의 연구는 간단히 종결되리라. 현준은 떠나간 소연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며 아파트를 향해 걷는다. 현준은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와 이불에 드러눕는다. 조금 전까지 함께 있었던 소연의 체취를 맡아본다. 은은한 화장품의 냄새가 연하게 느껴지는 듯도 하다.
현준은 벽시계를 바라보다가 일어나 운동복으로 갈아입으며 생각한다. 강이나 바다에 설 때마다 바람결을 생각한다. 과학에서는 ‘바람’을 공기의 수평 이동 현상이라고 한다. 반면에 ‘기류(氣流)’는 공기의 수직 상하 운동을 일컫는 것으로 정의한다. 공기가 이동하여 바람결을 형성하려면 기체 분자 몇 개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반드시 기압의 차이에 따른 기체 분자들의 조화로운 이동이 수반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자연 현상을 꿰뚫어 든든한 철학의 기반 위에 올려놓은 동양의 선현들. 특히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을 생각하게 되면 저절로 존경심이 생기게 된다. 노자 도덕경의 제8장의 일부를 잠시 떠올려본다. 상선(上善)은 물과 같으며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여 다툼이 없느니라(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상대와의 다툼이란 자신에게는 이로움이 상실되었다는 자각 현상으로부터 나타나기 십상이리라. 인간의 심리와 자연의 조화를 기묘하게 연관시킨 도덕경에 현준은 수시로 끌려든다. 현준은 이런 조화의 관점을 항상 잘 살펴본다. 문무겸비란 이런 조화로움을 실현하는 기반이라고 현준은 생각한다.
현준은 아령 운동을 끝내고 샤워를 마친 뒤 방으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일기장을 꺼내 하루의 진행과정을 기록한다. 일기를 다 쓴 뒤에 현준은 가만히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자리에 눕자마자 이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든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현준은 거실과 방 청소를 끝낸 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는 아파트 단지 주위를 십여 분간 달린 뒤에 집으로 들어선다. 집으로 들어서자 베란다의 창문을 열어본다. 거기에는 2개의 풍란 화분이 놓여 있다. 물을 주려고 내놓은 것이다. 화분마다 꽃이 만발한 상태다. 그윽한 향내를 맡으며 현준은 소연을 떠올린다. 현준에겐 소연을 떠올리는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한 느낌이다. 달뜬 느낌으로 베란다 창 밖을 내다본다. 거기에는 가없는 하늘이 펼쳐져 있다. 파랗게 남실대며 밀려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현준은 생각에 잠긴다.
‘얼굴도 모르는 부모님이시여! 지금 어디에 계신지는 모르지만 부디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처절한 외로움으로 자란 접니다. 다음 세대에는 절대로 저처럼 외로움에 잠기는 사람들이 없도록 성실하게 살겠습니다. 사람이란 본래 어떤 화두를 갖고 태어나는 모양입니다. 제가 애초부터 받은 화두는 ‘외로움’인 것 같아요. 언제나 외롭지 않게 살도록 노력할게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보니 눈시울에 물기가 맺혀 반짝인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는 않지만 혼자만 남게 되면 서글퍼지는 현준이다. 대관절 외로움이란 게 뭔지? 수시로 가슴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듯한 진한 공허감. 공허감에 휩쓸릴 때면 피눈물을 쏟고 싶은 현준이다. 외롭지 않게 자란 사람들만이 주변에 사랑을 나눠줄 수 있으리라고 전해진다. 그런 일반적인 논리를 부인하며 현준은 노력하는 삶을 산다. 노력한 만큼 현준은 대외적인 사교의 축이 되기도 한다. 학술회의든 동창 모임이든 동호인 모임에서건 현준은 활기찬 청년으로 알려져 있다. 절대로 사람들 속에선 외롭지 않을 터전을 확보한 셈이다. 하지만 혼자 남게 되면 곧바로 외로움에 허우적거리게 되는 현준이다. 혼자서 맞는 외로움엔 서슬 퍼런 슬픔이 수시로 가슴으로 소용돌이치곤 한다.
거실로 돌아서서 현준은 거실의 중앙에 앉아 신문을 펼친다. 2종의 일간지를 훑어본 뒤. 서가에서 과학철(科學綴)을 펼쳐 본다. 과학철에는 최근까지의 중요한 과학 기사가 스크랩되어 있다. 과학철을 서가에 꽂으며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초인종이 울린다. 시계를 보니 아침 8시 정각이다. 아파트의 문을 여니 혁진과 종학, 용수가 일제히 늘어서 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너는 마중도 좀 안 나오냐? 집에서만 손님을 맞이하기냐?”
현준은 싱긋 웃으며 응답한다. 들어서면서부터 누가 괜히 시비를 거느냐고? 불만이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말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며 미소를 머금는다.
일행이 거실에 들어선 뒤에 현준은 아침 밥상을 펼친다. 반찬의 대부분은 지난밤에 소연이 마련해 놓은 것이다. 용수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한다. 음식 차림새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고. 혹시 모르는 사이에 신부를 들인 건 아닌지 수상하다고도 말한다.
현준이 3친구들을 향해 어떻게 함께 오게 되었느냐며 물으며 서로 소개시키려고 한다. 그랬더니 3친구들은 아파트 입구에서 이미 통성명을 했다며 환히 웃는다. 현준은 만족스러워 흐뭇한 웃음을 띤다. 그는 잠시 생각해 본다. 친구의 친구들 또한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으려니 여겨진다. 일시에 친구 셋을 만나게 되니 현준은 기쁘기 이를 데 없다.
태희한테서 빌려온 밥상까지 합쳐 2개의 밥상이 펼쳐져 있다. 밥상을 사이에 두고 일상적인 이야기부터 화제로 올린다. 종학이 말한다. 현준이 관악산 주변에 사니까 폐는 아주 싱싱하겠다고. 숲이 우거진 산야 주위에 사는 사람들의 허파가 건강하리라고 덧붙인다. 현준이 채 대꾸도 하기 전에 혁진이 말한다.
“허파뿐이겠어? 얼굴색을 보니 사타구니 사이의 물건의 건강 상태도 아주 좋을 것 같구나.”
현준이 웃음을 터뜨리며 응답한다. 오자마자 음담패설부터 늘어놓을 작정이냐며 현준이 장난스레 혁진을 흘겨본다. 현준의 대꾸를 듣자마자 친구들이 일제히 허리를 꺾으며 껄껄거린다. 부담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일행은 식사를 즐겁게 마친다. 친구들에게 잠시 쉬도록 한 뒤. 현준은 신속히 설거지를 끝내고 커피를 끓여 일행에게 돌린다. 일행은 커피 향기를 맡으며 담소를 나눈다. 어느 정도의 휴식을 취한 뒤다. 혁진이 보름 후의 충남 대덕의 학술 세미나에 관한 화제를 꺼낸다. 알고 보니 참석자들이 다들 연관이 있는 사람이어서 다행이라고. 현준의 집에 모인 4명이 모두 참석자 명단에 있더라고. 이 번 회의의 성격상 국제 테러단이 개입할 가능성이 많다고 들려준다.
혁진의 얘기를 듣는 3사람들은 잠시 긴장한 기색이다. 그러면서 혁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혁진은 일행을 둘러보며 연이어 말한다. 이 번 학술 세미나의 주제는 ‘통합적인 국책 연구’라는 거라고. 11월 중순의 사흘 동안이나 진행되는 행사라고 한다. 유전공학, 전자산업, 군사무기, 신약개발 등의 연구 분야가 총망라된 행사라고 들려준다.
혁진이 이야기를 진행함에 따라 나머지 셋은 모두 경청하고 있다. 지난 춘천의 학술회 때처럼 일체 외국인의 출입을 차단한다고 한다. 혁진은 국책 연구 세미나 주최의 실무자 중의 한 사람과 교분이 두텁다고 한다. 그 사람으로부터 소상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현준은 생각에 잠긴다. 관심의 영역에 있어서는 대외적인 교분을 통해서까지 최선을 다하는 혁진이 아닌가? 학문뿐만 아니라 주변의 영역에까지 골고루 관심을 기울이는 혁진. 현준에겐 매사에 있어서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친구가 믿음직스럽게 여겨진다. 3일간의 행사기간 동안. 발표자는 30명, 발표자를 제외한 시청자(학술 전문인)들은 52명이 배정되어 있다고 한다. 혁진이 참가 관련자들의 명단이 적힌 서류를 펼치며 말한다. 명단은 그 자리에서 보는 것만으로 끝내야 한다고.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혁진이 펼친 명단을 4명이 함께 들여다본다. 4명 중의 발표자는 현준과 용수다. 시청자 명부에는 종학과 혁진의 이름이 실려 있다. 종학은 국제 특허를 주로 다루는 업무 측면에서 시청자로 선정된 모양이다. 현준이 소속된 S대에는 심 교수와 W교수만 시청자로 선정되어 있다. 서울 J대학에는 성소연과 지도교수인 B교수가 시청자로 선정되어 있다. T교수와 은정이 소속된 서울 D대학의 학자들은 참가자 명단에 들어있지 않다.
넷은 일제히 명단을 들여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모양이다. 이윽고 실내 분위기가 조금 숙연해진 듯하자 종학이 의문점을 말한다. 당국에서 발표자와 시청자로 구분하여 명단을 확정한 이유가 뭣이겠느냐고? 굳이 명단을 발표하지 않더라도 세미나 책자에 명단이 실릴 게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여기에 관해 N과학원의 용수가 응답한다. 행사의 주제가 국책 연구라는 점에 주목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참가자의 신변 보호 측면에서 명단을 사전에 조절했으리라 여겨진다고 말한다.
이 문제를 두고 넷은 이런저런 얘기를 자유로이 풀어 놓는다. 6월말의 춘천 학술회의와 11월 중순의 대덕의 세미나. 국가적인 차원으로 근래에 학술과 연구를 끌어들이는 절박한 상황에 대해 다들 궁금하게 여긴다. 과연 그만큼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느냐에 따른 의문 같기도 하다. 어쨌든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는 활기찬 분위기다. 식사 후 반시간이 지난 시점이다. 현준은 어느 정도의 소화가 된 시간이라 여긴다.
다시 실내에 밥상을 깔고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낸다. 친구들도 일제히 손을 놀려 현준을 돕는다. 맥주 글라스를 진열하고 마른 안주류를 펼친다. 오징어, 땅콩, 쥐포, 노가리, 구운 문어 다리 등. 또한 소연이 가져온 가오리무침도 함께 펼친다. 싱싱한 가오리회가 무채와 초장에 어우러진 가오리무침은 산뜻한 맛이 특징이다. 일행은 서로의 잔에 맥주를 따라 주며 술잔을 나눈다. 두어 순배의 술이 돌자 용수가 화제를 바꾼다.
“미사일 발사의 양평 사고 때에 어떤 추적 전파가 있었다면서?”
혁진이 기다렸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그렇잖아도 거기에 관해 막 얘기하려던 참이었어. 여기에 관한 제보자는 고위급 어떤 인사이므로 공개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제시된 정보는 그대로 믿어도 좋은 내용이야.”
셋은 혁진이 말하는 내용에 귀를 기울인다. 용수와 현준이 20일쯤 전에 양평에서 미사일을 발사한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한반도 상공을 비행하던 미국의 관측위성이 그 현장을 포착하고 말았다. 관련 근거를 문제 삼아 따지려고 주한 미군들이 발사지점을 수색까지 했다. 하지만 이동식 발사 장치였기에 미사일 발사에 관한 근거자료는 어디에도 없었다. 표적물이었던 하천 옆의 절벽도 무너져 버린 터였기에 수색대는 허탕을 치고 말았다.
문제는 관측위성의 자료 분석을 담당한 누군가는 사전에 용수의 계획을 파악했으리라는 거였다. 이런 추측은 제보자에 의해 제시된 거라고 했다. 발사된 세 발의 미사일 중. 셋째 것만 유일하게 불발이 되었다. 미사일 발사가 이뤄지던 부근에는 누군가가 용수와 현준을 감시했으리라고 제보자는 추측했다. 그 감시인은 미사일 발사시점에 맞춰 교란 전파를 관측위성으로 보냈으리라는 거였다. 셋째 미사일이 발사됐을 때에 관측위성에서 반사된 교란 전파가 탄두를 교란시켰으리라고 제보자는 예견했다. 제보자의 말에 의하면 현준과 용수의 뒤를 누군가가 꾸준히 미행하리라고 했다. 만약에 용수가 국가적인 신무기를 개발하게 될 때엔 용수의 생명마저도 위태로우리라는 거였다. 이 말이 떨어지자 얘기를 듣던 셋의 표정은 일시에 달라졌다.
현준도 전신에 섬뜩한 느낌 든다.
‘누군가가 미행을 하고 있다니! 그렇다면 현재의 모임도 누군가가 감시하고 있다는 말인가?’
생각할수록 기가 질리는 일이다. 모든 행동이 감시당하고 있다면 정신적으로 얼마나 피곤한 일이겠는가? 현준은 문득 생각해 본다. 혁진에게 미사일 교란의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누구일까를. 혁진이 청화 밑에서 일을 한 건 엄연한 사실이다. 과연 혁진은 동굴 붕괴 사고 이후로는 청화와 일체의 교류를 끊고 있는 것일까? 혹시 지금까지도 2중 간첩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갑작스레 가슴에 한기가 이는 심정이다. 조금이라도 혁진과 불신의 벽이 생긴다면 엄청난 불행이라고 여겨진다. 틈나는 대로 혁진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어야겠다고 작정한다. 갑작스레 현준은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술맛이고 분위기고간에 다 의미가 없어지려는 판이다.
이런 심경의 변화는 용수의 경우도 다를 바가 없다. 다소 의심스런 면은 있었지만 항시 남의 미행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치가 떨릴 정도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면서 주위의 동료들과 친구들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종학도 생각에 잠긴다. 현준을 친구라고 사귀었는데 현준이 당장 자신을 의심할지도 모르리라고 여겨진다. 또한 현준이 미행당한다면 친구인 자신마저도 미행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일시에 술맛을 잃고 만다. 이제 더 이상 술잔을 기울일 때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혁진도 실내 분위기를 둘러본다. 다들 자신이 던진 말에 심각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혁진은 자신을 돌이켜 본다. 결코 술자리의 분위기를 망칠 의도로 한 얘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그런 식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제보자가 누구라고 밝힐 입장도 아니다. 만약 발설한다면 더 큰 문제가 야기될지도 모르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발언으로 이렇게 삽시간에 분위기가 바뀌리라고는 혁진이 예측하지 못했다. 혁진도 마음속으로는 무척 억울한 생각이 든다. 혁진은 이야기하지 않고 넘길 문제는 아니라고 여전히 생각한다.
현준은 술자리의 분위기를 살펴본다. 이 분위기를 쇄신할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신은 친구들을 초청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현준은 일부로 걸걸한 목소리로 말한다.
“자, 다들 잠시 주목해 줘. 내가 하나의 제안을 할게.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 중에 서로를 못 믿겠다는 사람은 손을 들어 봐.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지금 조용히 떠나도 좋아. 하지만 서로를 믿을 수 있다는 사람은 지금까지처럼 터놓고 계속 지내기로 해. 어떤 제보자의 말 한 마디로 우리의 우정이 시험대에 오를 정도라고 생각해?”
혁진도 가라앉은 음색으로 입을 연다.
“나도 현준의 성품을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이야. 여기 모인 사람들은 다 현준의 친구이잖아? 서로를 못 믿을 게 뭐가 있겠어? 내가 제보자를 밝힐 수는 있지만 그 사람과의 약속으로 말하지 않겠어.”
현준은 실내의 분위기가 그 정도면 수습된 거라고 여긴다. 그래서 일부러 목소리에 활력을 실어 너스레를 떤다. 어떤 잡지를 읽고 알게 된 거라고. 기분이 우울할 때엔 노래를 부르는 게 최고라고 들려준다.
현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구동성으로 셋이 떠들어댄다. 확실히 그 말은 일리가 있는 것 같다고. 일단 술 좀 마시고 흥이 오른 뒤에 노래방에 가자고 말한다. 노래란 가슴 속의 앙금을 제거하는 청량제가 되리라 다들 여기는 듯하다.
일단 분위기를 수습하자 모두 원래의 당당한 모습을 되찾은 듯하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넘기는 중에도 현준은 잠깐씩 생각에 잠긴다.
‘그 날 내가 양평에 간 사실을 미리 안 사람은 누군가?’
현준의 생각에 미리 안 사람은 용수밖엔 없다. 용수와 현준은 불발탄의 엄연한 피해자들이다. 연구를 위해 애쓰는 용수가 불발탄을 터뜨려 자살할 이유가 없다고 여겨진다. 소연이 알게 된 건 사고가 일어난 후다. 또한 소연은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다. 연인을 죽일 여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시간이 흐른 뒤에 용수에게만 살짝 물어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용수가 양평에 간다는 사실을 미리 안 용수의 주변 사람들이 있는지에 관하여.
현준의 생각으로는 용수가 자신의 계획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릴 리는 없다고 여겨진다. 용수가 미사일 발사의 계획을 알릴 유일한 사람은 현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왜냐 하면 둘은 지기(知己)이기 때문이다. 지기끼리는 때로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관계이기에 비밀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된다. 혹시 정황이 다급하여 용수가 현준에게 말하지 않은 얘기는 있을지도 모르리라.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현준은 용수를 베란다로 불러내어 살며시 물어본다. 혹시 그 날 발사 계획을 미리 알려준 주변 사람이 있는가를. 용수는 단호히 대답한다. 절대로 그런 인물이나 대상은 없었다고. 용수도 현준에게 되묻는다. 현준이 혹시 주변인들에게 사전에 얘기한 일은 없는가를. 현준도 전혀 그런 적이 없었다고 용수에게 밝힌다.
신뢰의 악수를 나눈 뒤. 둘은 곧바로 거실로 가서 종학과 혁진의 대화에 합류한다. 종학이 근래의 특허의 동향에 관해 얘기를 늘어놓는다.
“예전에는 변리사 자격증만 빌려 줘도 호황을 누렸던 때가 있었지. 근데 요즘은 특허 취득의 요건이 까다로워 검증되지 않고는 거의 다 탈락이 돼. 예전에는 서류로서만 대충 넘길 일도 요즘은 컴퓨터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세세히 검증을 하거든.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위촉해서까지 말이야. 이런 판국이니 특허 등록의 실적이 잘 오르겠어? 요즘은 정말 먹고 살기도 힘들어.”
종학의 말에 혁진이 질문을 던진다.
“우리나라에서 특허에 출원하는 것 말고 외국에서 접수되는 건 어때? 특히 유전공학 쪽은?”
종학이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열변을 쏟는다. 어디나 다 마찬가지라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못하는 일에 관해 외국인들이라고 해서 무슨 묘책이 있겠느냐고. 그래서 요즘엔 국내나 국제가 모두 힘들다고 한다.
현준은 시계를 들여다본다. 오후 1시 무렵이다. 어느새 점심때가 된 것이다. 현준은 전단지에 실린 전화번호로 음식을 주문한다. 십여 분 후에 설렁탕 2그릇과 육개장 2그릇이 아파트로 배달된다. 넷은 거뜬히 점심식사를 해결한 뒤에 잠시 거실에 드러누워 눈을 붙이기로 한다. 몰려드는 식곤증을 다스리려는 터다. 잠들기 전에 현준은 의문점을 떠올린다. 자신과 용수도 사전에 계획을 주위에 말하지 않았다면 과연 누가 미사일을 교란시켰을까? 오로지 누군가에 의한 철저한 미행의 결과로만 야기된 것일까? 혼란한 생각도 잠시일 뿐. 점차 눈꺼풀이 감기려고 한다. 다들 피곤했던 탓인지 자리에 드러눕자 콧소리를 내며 잠이 든다.
현준은 눈을 뜨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를 살핀다. 시계는 오후 4시 무렵을 가리키고 있다. 잠깐 휴식하기로 한 게 어느새 3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현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들 차례대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대로 다들 아파트를 빠져 나간다. 아파트 단지로 내려가는 동안. 혁진이 현준만을 따로 불러 나직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혁진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람의 말을 은밀히 전하는 터다. 미사일 교란에 사용된 전파의 파장 분석이 중요한 단서라고 한다. 그 날 양평에서 발사된 교란 전파의 진동수와 교란 시각이 분석되었다고 한다. 위성에 탑재된 전파 분석기가 보내온 자료였다고 한다. 놀랍게도 교란용으로 사용된 전파의 진동수는 청화 일동이 즐겨 쓰는 진동수임이 드러났다는 얘기다. 이 사실로 유추할 때. 현준과 용수를 미행하는 세력은 청화 일당의 가능성이 크리라는 견해다. 청화 일당으로 유력한 사람들로는 청화나 선영일 확률이 크리라고 들려준다. 혁진의 말을 듣는 내내 현준의 가슴에선 시린 바람이 소용돌이치는 느낌이다. 일행은 아파트 단지에서 멀찍이 떨어진 유흥장 주변의 노래방으로 몰려간다. 거기에서 스트레스를 좀 발산해야겠다고 다들 생각하는 모양이다. 1시간을 신청하고 음료를 주문하는데 주인이 현준에게 묻는다. 혹시 노래 도우미가 필요하냐고? 다들 젊은 아가씨들이며 1인당 2만원씩을 받는다고 알려준다.
변리사인 종학이 주인에게 눙치며 말한다. 노래는 일단 1시간만 넣고 젊은 도우미 넷만 보내달라고. 시간을 끌지 말고 빨리 보내 달라고 말한다. 주인이 물러가자마자 용수와 혁진이 이구동성으로 종학에게 말한다. 돈 한 푼이라도 보다 소중한 곳에 써야지 도우미들한테 왜 쓰느냐고? 용수와 혁진이 정색을 하고 종학에게 말한다.
취기가 오른 종학은 일부러 너스레를 떠는 듯. 셋을 향해 목청을 낮춰 말한다.
“무슨 소리야? 도우미들한테 쓰는 돈은 소중한 돈이 아니라구? 너희들이 도우미들을 알아? 도우미들은 노래에 영혼을 담아 손님들의 아픈 정서를 씻어 주는 사람들이야. 사람들은 어차피 죽을 때엔 따로따로 죽는 거야. 아무리 살아선 떠들썩했던 사람들도 죽을 때엔 외로이 저승길을 떠난다구. 알아들었으면 내 말에 토를 달지 말고 다들 따라 와.”
현준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누군가 자신들을 미행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고 여겨진다. 현준에겐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현준은 다시 온화한 목소리로 달래듯 종학에게 말한다.
“종학아, 네 마음은 알겠는데 그냥 오늘은 노래만 하자, 응? 내가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도 해야만 되겠군. 고아인 내가 여자였다면 나도 어쩌면 도우미가 되어 나타났을지도 모르잖아? 정서가 착잡할수록 더욱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종학은 그윽한 눈길로 현준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떡인다. 자신이 잠시 잘못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노래만 부르기로 하자고 한다. 종학은 주인에게 주문 사항을 변경한다. 노래 시간은 1시간만 넣고 음료수 캔은 4개만 갖다 달라고. 주인은 잠시 일행의 눈치를 살피더니 알았다며 고개를 끄떡인다. 그러면서 일행에게 8호실로 가라고 얘기한다. 보너스로 30분간을 더 넣었다고 덧붙이며 싱긋 웃는다.
노래방에 들어서자 넷은 울적한 마음을 노래로 날려 보내기로 한다. 노래방 책을 펴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냥 입력되어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고함을 질러댈 뿐이다. 그러다가 입력된 시간이 끝난 뒤 다들 집으로 흩어져 간다. 현준은 사람들이 흩어질 때마다 진한 공허감을 느끼게 된다. 눈시울에 눈물이 맺히려는 걸 고개를 흔들어 지워 버리곤 발걸음을 옮긴다.
현준은 기나긴 시장 골목을 걸어 혼자서 아파트에 올라선다. 하루의 시간을 떠올려 본다. 멀리 떨어져 있던 친구들이 일시에 모인 날이다. 하나같이 유전공학의 연구와 관련 있는 친구들이지 않는가? 아무리 세계의 과학자들이 국내의 연구 성과를 추월하려든대도 친구들이 있는 한 든든하다고 여겨진다. 현준에게 문득 Y2 유전자의 율동이 떠오른다. 핵 내의 5번 염색체를 이루는 Y2 유전자. 핵에서 Y2 유전자를 전사한 m RNA는 Y2 유전자의 분신이다. Y2 유전자의 분신은 핵을 빠져 나와 세포질로 스며들게 된다. 세포질 내의 Y2 유전자의 분신. 이것마저도 현준은 세포질 내의 Y2 유전자라고 간단히 부른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이르렀을 때다. 심신이 무척 피곤하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현준은 생각한다. 심신이 피곤할 때의 최선의 처방은 잠을 자는 것이라고.
‘자, 이제 잠을 자야지. 혹시라도 꿈속에서 슬기로운 답을 찾게 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현준은 이내 침구를 펴고는 잠자리에 든다.
친구들 셋이 아파트를 다녀간 지 벌써 사흘이 지난 시점이다. 현준이 오전에 수업을 마치고 오후 1시부터는 실험실에 달라붙어 있다. 대덕에 가서 발표할 과제의 자료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벌써 실험에 매달린 지 3시간째다. 배양실을 통해 대장균이 엄청나게 증식되었는데도 예정된 단백질의 양은 많지 않다. 플라스미드에 내재된 재조합 상태가 제대로 안 된 탓이라 여겨진다. 원심 분리관으로 추출된 단백질의 평균 분자량도 재어 본다. 분포 그래프를 보니 아무래도 원하던 단백질이 아니라는 게 드러난다. 피가 식는 느낌이다. 물론 단번에 원하던 결과를 얻기란 어려우리라. 하지만 실패를 확인할 때마다 허탈감이 꼭뒤에까지 내뻗친다. 분자량 분포에 있어서 제동이 걸린 게 벌써 몇 번째인가? 주먹을 불끈 쥐고는 그래프 출력지(出力紙)를 구겨서 내던져 버린다.
달력을 본다. 벌써 11월 초순의 수요일이다. 줄기세포로부터 허파 조직으로의 분화에 대한 조절 유전자들의 역할. 이게 대덕에서 발표할 현준의 연구과제이다. 10여 그룹의 조절 유전자들의 특성이 이미 규명된 상태다. 남은 것은 미처 규명되지 못한 몇몇 유전자들의 조직에서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유전자의 작용을 살필 배지의 혼합물의 조성을 면밀히 검토한다. 20종의 필수아미노산들은 충분히 확보되어 있다. 단당류 중의 포도당과 과당도 실험에 사용할 정도로는 충분하다. 올리고당에 대한 조성을 살핀다. 실험의 승패에 간혹 엉뚱한 인자로 떠오르는 올리고당의 조성도 면밀히 점검한다.
어느새 11월 보름이다. 다음 날부터 3일간은 대덕 연구단지에서 세미나가 개최되는 날이다. 현준은 오후에 지도교수의 차에 합승하여 대덕으로 내려가게 된다. 그 동안 축적된 연구실적과 시청각 자료를 가방에 정성 들여 챙긴다. 실험을 하면서도 틈틈이 창 밖을 내다보는 게 현준의 습성이다. 눈에 쌓인 피로를 풀려는 현준의 습성이기도 하다. 그런데 창 밖 목련나무 아래 낯선 사내가 서성이는 게 눈에 띄곤 한다. 우연인 척 시선이 맞부딪기도 하고 슬쩍 비껴가기도 한다. 그렇지만 수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현준은 실험실 후배인 인태와 준영을 불러 말한다.
“잘 봐. 아까부터 저 사내가 목련나무 밑에서 서성댔거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사내의 모습을 촬영해 놔. 일단은 사내가 눈치 못 채게 해야 돼. 일단 너희 둘의 독사진을 찍는 체하고 슬쩍 함께 찍을 수도 있겠지. 방법은 많을 테니까 사내 몰래 이 액정 카메라에 좀 담아 와.”
현준이 낯선 사내의 사진을 확보해 두려는 건 혁진이 들려준 말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방비 대책을 잘 세우려는 것이다. 현준은 유사시를 대비하여 용호를 비롯한 7명의 무술 친구들을 대덕으로 데려갈 작정이다. 7명의 무술 친구들이야말로 무술계에선 널리 알려진 달인들이다.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고성능인 소형 카메라도 휴대한다. 연구실 바깥으로 후배들을 내보낸 뒤에도 현준은 연구실을 면밀히 점검한다. 기밀문서는 반드시 특제품의 금고에 보관한다. 컴퓨터 내에는 방화벽을 설치하고 파일마다 비밀 번호를 설정해 둔다. 또한 비밀 번호도 이틀 간격으로 바꾸며 파일을 보호한다.
실내의 실험 장치에 대한 점검이 끝날 무렵. 잠시 바깥으로 나갔던 후배들이 낯선 사내의 사진을 찍어 온다. 5장면이나 액정 카메라에 담겨 있다. 사진을 확대하며 들여다본즉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사내다. 특징적인 건 사내의 나이가 20대 중반이고 날카로운 눈매를 지녔다는 점이다.
오후 5시가 되자 심 교수가 현준에게 말한다. 준비됐으면 출발하도록 하자고. 주차장에 있을 테니까 그리로 오라고 말한다.
준비물을 담은 가방을 들고 주차장에 들어서려니까 측백나무 울타리 밖으로 누군가 자리를 옮긴다. 무심한 척 시선을 돌려 뒷모습을 봐 둔다. 액정에 잡혀 있는 낯선 사내의 몸뚱이임에 틀림없다.
마침내 지도교수는 시동을 켜서 차를 출발시킨다. 차는 부드럽게 앞으로 내닫는다. 조수석에 앉은 현준은 은근히 주변을 살핀다. 혹시 지나는 길에 낯선 사내의 행적을 찾게 되지나 않을까하고.
저녁 8시 무렵이다. 차는 회덕 분기점을 막 지나 호남고속도로에 접어든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엑스포 인터체인지를 지나 57번 지방도에 진입한다. 대덕단지를 그대로 통과하여 서구청이 있는 곳에서 우회전하여 달린다. 잠시 후에 유성온천 지역에 차를 멈춘다. 심 교수는 현준에게 말한다.
“내가 예약해 둔 곳은 저기 A여관이야. 방 2개를 잡아 놨거든. 작은 방 1개는 자네가 사용해. 큰방 1개는 C대 교수인 친구 둘을 데려와서 나랑 함께 시간을 보낼 거야. 여기까지 온 김에 온천에 들렀다가 식사를 하자구.”
현준은 공손히 알았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유성 지역의 관광 지도를 펼쳐 제시된 관광 정보를 살펴본다. 유성은 온천지역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광물질이 많아 피부 미용에 좋다는 곳이기도 하다. 심 교수와 1시간가량을 탕에서 보낸 뒤에 몸을 씻고는 밖으로 나온다. 출출한 판에 심교수가 낚지 철판구이와 공기 밥을 주문하고 술 1병을 청한다. 식사를 하며 심 교수가 입을 연다. 오랜만에 탕에 들렀더니 기분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현준의 기분도 좋았느냐고 묻는다.
현준은 흔쾌히 대답하면서도 시선을 주위로 돌리며 경계한다. 어떤 상태에서도 심 교수의 신변과 연구물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할 만큼의 시간 간격. 여기에 신경을 써서 주기적으로 주위를 살피곤 한다. 그러면서 되도록이면 학술 내용에 관한 것을 말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심 교수도 현준의 마음을 헤아린 듯. 온천탕의 느낌과 수질 상태를 얘기하며 즐거운 표정을 짓는다. 현준의 느낌에 식당에는 타지(他地)에서 온 듯한 사람들로 더러 눈에 띈다. 그들의 가방을 비롯한 휴대품들을 통해 쉽게 알아차릴 정도다. 현준은 주위를 살핀 다음 목소리를 낮춰 심 교수에게 말한다.
“두 친구분들을 어디서 만나기로 하셨죠? 제가 거기까지 함께 갈게요. 낮에 말씀드렸듯이 위험한 일을 막아 보려는 거죠.”
심 교수는 흔쾌히 대답한다. 현준이 그처럼 신경을 써 주어서 고맙다고. 그러면서 차를 몰면서 위치와 지형을 현준에게 상세히 알려준다.
음식점에서 차량으로 십여 분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서다. 거기서 심 교수의 친구라는 50대 중반의 2교수를 만났다. 친구들과 함께 있는 걸 확인한 뒤에 현준은 거기를 떠났다. 현준은 핸드폰을 꺼내 용호에게 전화를 건다. 지금 어디쯤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현준의 뒤에서 10m쯤 떨어진 곳에 있다는 용호의 대답이 들린다.
현준은 전화하다 말고 왼쪽 뒤의 10m쯤 떨어진 거리를 슬쩍 살핀다. 거기에 검정색 승용차가 세워져 있고 용호가 운전석에서 번쩍 손을 든다. 현준은 용호의 차에 합승하며 나지막하게 말한다. 나머지 6명의 친구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용호가 주위를 둘러보며 대답한다. 항상 용호가 움직이는 곳에서 20m 이내의 거리에 있다고 들려준다. 현준은 용호의 주도면밀(周到綿密)한 배려에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현준은 주변을 조심스레 둘러본 뒤에 A여관으로 가자고 용호에게 말한다. 용호는 고개를 끄떡이며 이내 차를 몬다. 십여 분 뒤에 현준은 숙소에 도착한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용호와 약속한다. 숙소 근처에 머물다가 신호를 보내면 곧장 달려올 수 있도록 하라고 부탁한다. 대덕에 오기 전부터 이루어진 약속이다. 숙소엔 현준의 자료와 연구 실적물이 가방 속에 들어 있다. 혹시라도 현준을 노리는 괴한이 있으면 숙소에 잠입할 것이라는 예측에서다. 용호는 선선히 대답한 뒤 조용히 시야에서 사라진다. 아마도 같은 여관 다른 호실에서 친구들 6명과 함께 있으리라 여겨진다.
현준은 숙소의 불을 일찍 끄고는 조용히 창문을 연다. 그리고는 바깥과 주변의 정경을 살펴본다. 심 교수가 묵기로 한 방에는 아직 기척도 없다. 술자리가 아직 파하지 않은 탓이리라. 현준은 주변을 살피면서 조용히 무술 수련을 한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현준은 소리를 죽여 핸드폰으로 용호와 통화를 시도한다. 즉시 용호의 음성이 들린다. 벌써 무슨 조짐이 나타났느냐고 묻는다. 말만 하면 금방 달려가겠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다. 현준은 용호의 마음 씀씀이에 무척 고마움을 느낀다. 말과 행동의 일치가 어떤 건가를 보여주는 듯하다. 현준은 주위를 둘러보며 나지막하게 말한다.
“내 말 잘 들어. 연락하기만 하면 곧바로 달려와야 해.”
용호가 밤의 정적으로 몸을 감춘 뒤. 현준은 창문과 출입문에 대한 점검을 꼼꼼히 한다. 그러면서 액정 카메라 속의 낯선 사내의 얼굴을 재차 확인한다. 현준은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지만 다음 날의 발표를 위해 잠자리에 든다.
이튿날 오전 9시 무렵이다. 대덕 연구단지의 V동력연구소. 세미나장은 연구소 건물 중의 소강당에 자리 잡고 있다. 세미나장에는 80여 명의 발표자와 시청자가 착석한 상태다. 소강당 주변과 주차장 곳곳에는 정복 차림의 경찰관들이 순회를 한다. 다들 허리에는 권총을 차고 있다. 상당히 보안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표시다.
오전 9시의 첫 발표자는 대덕 단지의 인공위성의 권위자인 P박사다. 인공위성을 통해 다른 나라의 인공위성의 기능을 혼란시키거나 마비시키는 비책을 설명한다. 그 설명을 듣고 있자니 양평에서의 관측위성에 의한 탄두의 교란 현상이 이해가 된다. P박사의 비책 같으면 충분히 탄두를 교란시키겠다는 믿음이 생긴다. 강연을 들으면서 현준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혹시 제보자가 P박사일까? P박사와 혁진의 교분은 어떤 관계일까? 가능성은 있겠지만 단정을 내릴 만한 근거는 없잖은가?’
현준은 강연을 들으며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은밀히 참석자들의 자세를 살펴본다. 특별히 눈에 띄는 상대는 없는 듯하다. 시종일관 발표자의 내용을 정리하여 메모해 둔다. 4명의 발표자가 강연을 마친 뒤에 점심식사 시간으로 이어진다. 점심시간 동안에도 현준은 은밀히 주변을 둘러본다. 심 교수와 점심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면서도 시종 주변을 은밀히 살핀다. 의심 이 갈 만한 인물이나 광경은 눈에 띄지 않는다.
오후 1시부터 오후의 발표가 진행된다. 발표자는 세포 융합에 있어서 잘 알려진 대덕 C대의 K교수다. K교수가 강연하는 내내. 현준은 수시로 주변을 은밀히 살피며 경계한다. 테러단에게는 어떤 경계 상태에서도 침투할 수 있는 특성이 있기 마련이리라. 그들은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혹독한 연습을 했으리라. 조금이라도 이상한 징후가 보이면 곧바로 바깥으로 연락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K교수의 다음 발표자가 현준이다. 현준은 차례가 되자 연단에 올라 또박또박 강연한다. 전자 현미경 사진과 실물 화상기로 촬영된 동영상 자료들도 차례대로 보여준다. 강연이 끝나자 두 사람의 교수로부터 질문을 받고는 곧바로 대답해 준다. 발표를 끝내고는 자신의 자리로 들어가 착석한다.
다시 자신의 자리에 착석한 뒤부터다. 현준은 시종 은밀히 주변 사람들의 동향을 살핀다. 그러면서 발표자의 논점도 빠뜨리지 않고 메모한다. 학술 내용의 파악과 주변의 경계. 양쪽에 마음을 쓰느라고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다. 어떤 미세한 소리마저 곧바로 알아차릴 정도다.
오후 6시가 되자 첫날의 일정이 종료되고 식사시간으로 이어졌다. 현준은 식사를 마치고는 심 교수와 함께 숙소로 돌아갔다. 심 교수가 대전 시내의 동료 교수들을 만나러 가겠다고 현준에게 말한다. 현준은 4명의 무술 친구들에게 심 교수를 미행하여 보호하라고 부탁한다. 심 교수를 떠나보낸 뒤에 현준은 용호를 비롯한 3명의 무술 친구들을 만난다. 그들을 만나자마자 세미나장에서 있었던 상황을 알려주고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숙소를 꾸준히 살펴달라고 부탁한다.
시간의 흐름은 눈부실 정도다. 벌써 세미나가 3일째 진행된 날이다. 앞의 이틀 동안에는 아무런 사고가 생기지 않았다. 당국과 매스컴에서는 별다른 논평은 없지만 은근히 세미나장을 주시하고 있는 모양이다.
오전의 일정도 무사히 끝나고 점심시간으로 이어진 시간이다. 식사를 하던 사람들 간에 쑥덕거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린다. 현준도 무슨 내용인가 싶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경찰관 다섯이 벌써 바뀌었어. 바뀐 경찰관들은 아예 보이지를 않아.”
그 말을 듣는 순간 현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심상치 않은 조짐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였다. 세미나장의 전등이 일시에 꺼져 버린다. 순간적으로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에 뒤덮인다. 행사장 바깥에서도 호루라기 소리가 연방 들리더니 ‘펑, 펑’하는 사격 소리가 뒤를 잇는다. 그러면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연달아 일어난다. 정전된 소강당 안을 어떤 부류의 사내들이 각목을 들고 난입한 모양이다. 어둠 속에서도 ‘퍽, 퍽’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러자 세미나장 안의 상황은 급변한다. 다들 급히 강당 안을 벗어나려고 아우성이다. 달리는 사람, 밀치는 사람, 밀려서 넘어지는 사람들의 고함소리로 실내는 난리법석이다. 현준은 우선적으로 심 교수의 위치를 찾아낸다. 심 교수를 가슴에 밀착시켜 안은 채 현준은 행사장을 가까스로 벗어난다.
소강당 바깥마당에는 응급차가 와서 총격을 당한 사람들을 싣고 있다. 현준도 신속히 행사장 밖으로 벗어나면서 주위를 둘러본다. 주차된 차량 몇 대가 파손되어 나뒹군다. 누군가 작심하고 사고를 일으킨 모양이다. 순식간에 전투경찰들이 소강당 주변을 2중 3중으로 에워싸 버린다. 현준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가 심 교수와 함께 신속히 행사장 밖으로 벗어난다. 현준은 핸드폰으로 7명의 무술 친구들의 행방도 알아본다. 다들 행사장 밖에 있어서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다.
이윽고 사이렌이 울려대며 경찰차들이 속속 들이닥친다. 하늘에는 4대의 헬기가 떠다니며 방송을 해댄다. 도주하는 차량은 즉시 정차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다시 한 번 경고한다는 강한 메시지가 대기를 뒤흔든다.
헬기의 회전날개 소리에 뒤덮여 방송소리가 불협화음으로 울려 퍼진다. 그러더니 헬기에서 기총소사를 해댄다. 2대의 헬기로부터 기총소사를 당한 흑색 지프가 길가로 나뒹군다.
현준은 생각한다. 가장 큰 일은 무사하게 행사장을 벗어나는 일임을. 그래서 좌충우돌하며 심 교수를 무사히 모시고 행사장을 벗어난 상태다.
이틀간 묵었던 숙소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켠다. 아나운서가 신들린 듯 속보를 떠들어댄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대덕 세미나장에서 유혈 납치극이 발생하여 최소한 십여 명이 총격을 받아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총격을 가한 범인들은 외국인들의 사주를 받은 X폭련단임이 드러났습니다. 이 번 사건을 사주한 해외 단체의 정체는 금세 밝혀지리라 예상됩니다.”
현준은 세상이 왜 이리 살벌해졌는지 속상할 정도다. 급기야 총기까지 동원한 사건이지 않는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현실이 참담할 따름이다. 현준은 발표 자료와 연구 실적물을 가방에 꾸린다. 심 교수의 물품도 함께 거들어 수습한다.
오후 8시 무렵이다. 대전을 빠져 나오려 심 교수가 차를 몬다. 가는 곳마다 바리케이드가 쳐져 검문검색이 한창이다. 그랬기에 얼마나 걸려야 대전을 벗어나게 될지도 의문이다. 차 내의 라디오에선 치안 유지의 책임을 물어 경찰청장을 해임하라고 야단이다. 현준에겐 황급히 흩어졌던 친구들의 얼굴이 일시에 밀려든다. 혁진과 종학과 용수. 다들 사고 현장에서 잘 벗어났는지? 세상이 왜 이리도 소란스러워졌는지 현준에겐 비감스럽기만 하다.
현준은 조수석에 앉아 살며시 핸드폰을 꺼낸다. 소연의 행방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통화 버튼을 눌러 귀에 갖다댄다. 문득 소연이 운전 중은 아닐까 염려가 된다. 신호가 두 번째 들어가자 소연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무사하시죠? 저도 막 전화 드리려고 했어요. 운전 중이라 나중에 전화할게요.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