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12회

장편소설 황색 갈매기 날다
손 정 모

7. 호수의 달밤

10월 하순의 산정호수. 눈부신 햇살에 호수의 수면은 거울처럼 반짝인다. 물속에는 고운 색채로 타오른 단풍든 잎사귀들이 거꾸로 드리워져 남실대고 있다. 오전 10시경부터 현준과 소연은 산정호수의 호반을 함께 거닐며 대화를 나누었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눈부신 햇살. 가을이 주는 이미지가 가슴 가득히 정감을 안겨 준다.

소연은 호반을 거닐면서 현준에 대한 느낌을 정리해 본다. 춘천의 학술 회의장에서 당당한 목소리로 연구 실적을 발표하던 현준. 신념에 찬 그의 눈빛은 눈부실 지경이다. 석 달 전인 7월 하순에 관악의 S대학 연구실을 방문했을 때를 떠올린다. 연구실을 처음 방문하는 데도 전혀 불편하지 않게 대해 주던 현준이다. 만난 순간부터 헤어질 때까지의 3시간 동안. 현준은 일관성 있게 친절했으며 따뜻이 배려해 주었다. 그리하여, 현준과의 토론의 시간이 참으로 값진 시간이 되도록 해 준 사내였다. 이런 현준을 바라보는 소연의 마음에도 서서히 어떤 정감의 기류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어떠한 이런 비슷한 감정도 느껴 보지 못한 소연이다. 그러다가 2주 전의 흑석동 고개 부근에서의 의외의 만남. 반시간이 지나도록 야멸차게 지나쳐 가 버리기만 하던 자동차의 행렬들. 그 때 소연은 적나라하게 보았다. 세상 사람들의 따분하고도 무관심에 젖은 표정들을.

그런데, 구세주처럼 흑석동 고개에 나타난 현준. 그렇게 절박한 시기에 나타나 적절한 조치를 취해 주던 사내. 그 날 밤. 소연은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첫눈에 확 들어올 정도의 빼어난 용모. 사내는 골격이 크고 신장만 크면 무조건 괜찮은 용모라 여기는 시대다. 소연에게는 그런 피상적인 개념보다는 어떤 사내보다도 한 눈에 매혹당할 정도의 용모라 여겨진다. 여인에게 한 줄기의 정감이란 무서운 용기로 이어지는 것일까? 소연은 춘천에서 시선을 끌던 현준에게 당시에 작정하고 말을 걸었다. 과연 생각했던 대로 깔끔하고 세련된 풍도의 사내라고 여겨졌다. 한두 마디의 말 속에서도 청정하고도 당당한 사내의 면모를 읽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썩 마음에 드는 상대로 여겨졌다. 소연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24살에 이르도록 그녀의 마음을 뒤흔든 사내는 없었다. 헌데, 춘천에서 현준을 바라본 순간. 그녀의 마음은 설레기 시작했다. 첫눈에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용모가 수려한 사내였다. 평균 신장에다가 단련된 몸매마저 가히 환상적으로 느껴졌다. 당장 연결의 실마리를 마련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춘천에서 의도적으로 현준에게 말을 걸었다. 과연 생각한 만큼이나 현준의 응대는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있었다. 소연은 며칠간을 두고 깊이 생각했다. 사내와 연분을 이루려면 사내의 잠재된 면모까지도 파악해 봐야겠다고 작정했다. 이런 생각에서 일부러 7월 하순에 관악을 방문한 터였다. 그 날의 함께 한 3시간 동안. 질문 내용에서나 실험 절차에서나 분명히 인내심을 넘어설 만한 요소들이 적지 않았다. 소연은 현준의 반응을 보기 위해 일부러 짓궂은 질문까지 했었다. 하지만 3시간 동안의 테스트에서 현준이 승리자였던 반면에 소연은 실패자였다. 끝까지 미소를 머금고 식당에 식사까지 함께 한 후에 전송해 준 사내가 아니었던가? 그 날 소연은 깊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사람들이 교묘해도 3시간 동안 줄곧 일관된 이미지를 갖출 수는 없으려니 여겼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확실히 현준은 범인이 아니었다. 현세에서는 드물게 보는 인격의 소유자라고 여겨졌다. 소연이 관악을 다녀온 뒤부터는 항시 마음속에는 현준을 향한 그리움이 피어올랐다. 어떨 때는 왈칵 달려들어 사랑한다고 말해 버릴까도 싶은 생각마저 일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얘기하지 않는가? 남자들의 마음은 끓는 물 위의 수증기처럼 지향점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소연은 언젠가는 직접 부딪쳐 현준의 마음을 읽어내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흑석동 고개에서 현준의 친절한 배려를 받은 셈이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사람의 인연이라고 했던가? 그 다음 날의 통화에서였다. 자신을 도와 달라던 현준의 목소리를 듣게 된 거였다. 구조 요청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소연의 가슴은 미칠 듯이 뒤설렜다. 전 날 흑석동 고개에서 받은 고마운 배려에 어떻게 철저히 보답해 줄까를 생각했다. 그래서 달뜬 마음으로 119에 신고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직접 차를 몰고 양평까지 달려간 터였다. 달리는 내내 현준이 혹시 많이 다치거나 생명이 위험하진 않을까 걱정도 했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현준의 상처는 경미하여 안심이 되었다.

양평의 병원에서 입원한 현준을 보는 순간. 남 몰래 그리움을 간직해 온 소연은 현준의 손이라도 덥석 잡고 싶었다. 하지만, 주위의 숱한 사람들이 문제였다. 현준의 지도교수와 선후배 대학원생들. 또한 용수의 지도교수와 동료 대학원생들. 이들 이외에도 경찰과 구경꾼들이 얼씬거리는 상태였다. 그러니 마음속의 감정을 조용히 삭일 수밖엔 없었다. 그 때 따스하게 손을 잡아주지 못했던 점이 늘 소연에게는 공허한 점이었다. 그런 세월 끝에 산정호수까지 오게 된 터였다. 등산을 하면서부터 가슴은 온통 들떠 주체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현준은 호반의 산책로를 소연과 함께 거닐며 잠시 상념에 잠긴다. 호수의 담록색 물빛을 바라보는 순간. 현준은 그윽한 물빛에 한없이 매료되는 심정이다. 숱한 물방울들이 모여서 호수의 수면을 이루듯. 현준 자신의 연구의 성과도 유전공학계에 커다란 기여가 되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과학도는 언제 어디서건 자신의 위치를 각성해야 하리라 다짐하는 현준이다.

호수를 반 바퀴쯤 돌아 유람선 선착장에 이르렀을 때다. 현준이 소연을 향해 말한다.

“어때 배 한 번 탈까요? 노 젓는 연습을 한 번 해 보면 어떨까요?”

소연은 가슴이 들떠 있는 판이다. 현준이 어떤 제안을 한대도 기꺼이 응할 상태다. 소연은 노를 못 젓는다면서도 배를 타고 싶다며 동의한다. 그러면서 소연은 파랗게 남실대는 호수의 수면을 바라본다. 현준의 시선도 소연의 눈길 따라 잠시 호수의 수면을 더듬는다. 청아한 물빛을 대하자 둘의 가슴에 포근한 정취가 밀려든다. 현준이 소연을 향해 말한다. 자신도 노를 잘 젓는 편은 아니라고. 단지 가고픈 곳에 배를 무사히 몰고 갈 정도일 뿐이라고. 노는 혼자 저어도 되기에 소연에게 함께 타자고 권한다.

현준이 승선료를 지불하고는 소연과 함께 배에 오른다. 작은 배는 두 사람의 발걸음에도 가벼이 흔들거린다. 마침내 현준이 노를 저어 배를 호수의 중심으로 몰고 간다. 현준이 호수의 중심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참으로 절경이라고 생각한다. 동서남북의 사방이 모두 산이다. 글자 그대로 산봉우리에 갇혀 만들어진 호수가 산정호수다. 가을이면 억새 숲으로 명성을 드날리는 명성산이 호숫가에 우뚝 솟아 있다. 일부러 호반의 길을 만들지 않았다면 일주할 수 없는 지형이라 여겨진다. 현준의 생각에 인간의 힘이란 무한하다고 여겨진다.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의 손길. 배를 사이에 두고 소연과 현준은 서로 마주 앉아 있다.

“어쩜 배도 그처럼 잘 저어요? 전혀 진동이 안 느껴질 정도예요.”

현준은 빙그레 웃으며 묻는다. 혹시 진동이 안 느껴져 심심하냐고? 원한다면 배를 요동치게 해 보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소연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한다. 사람 놀라게 하지 말라고. 기복이 심한 세상보다는 안정된 세계를 원한다고 말한다.

“우와, 도인 같은 말씀이군요. 근데 기복이 심한 세상도 인격 수련을 위해서는 때로 필요할지도 모르잖아요?”

소연이 즉시 응답한다. 듣고 보니 현준이 진짜 도인 같다고. 기복이 심한 세상마저 좋아할 정도라면 도인이 아니고서는 어려울 거라는 얘기다.

호수를 스치는 바람결은 햇살에 의해 달뜬 체온을 식혀 주는 역할을 한다. 쐬면 쐴수록 시원한 느낌의 바람결이다. 바람결을 떠올리자 현준에게는 문득 변산반도의 바람결이 떠올랐다. 성종 부부와 태호와 함께 한 휴가의 시간들. 어린 종업원에 불과한 자신을 그다지 알뜰하게 돌봐 주던 사람들이지 않던가? 그 분들이 아니었으면 어찌 오늘의 현준이 있었으랴? 현준은 거듭 마음속으로 감사를 드린다. 현준은 자신에게 다짐한다. 자신이 은혜를 입은 이상으로 반드시 타인들에게도 베풀겠다고.

“호수의 수면은 단풍든 나뭇잎들로 꽉 찬 듯해요. 어디를 봐도 비치는 건 단풍든 나뭇잎들이잖아요?”

소연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현준은 호수의 주위를 빙 돌기로 한다. 가능한 한 천천히 노를 젓기로 한다. 힘도 덜 들거니와 배의 진동도 느껴지지 않게 된다. 그러면서 호반의 수려한 경치를 듬뿍 감상하기로 한다. 현준은 배를 몰면서도 빼어난 절경에 자못 취하는 기분이다. 호수를 에워싼 산자락의 불타는 단풍잎들이 수면 가득히 드리워져 흔들린다. 남실대는 물결마다 고운 태깔의 단풍이 교태를 부리는 듯하다. 숱한 단풍 잎사귀 위를 나룻배가 바람에 휩쓸려 가는 느낌마저 들 지경이다. 문득 삶 자체가 아름다운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수면에 드리워진 현란한 단풍의 물결. 색채의 조화가 가슴 아릴 정도의 매력으로 남실대는 물결을 들여다보는 순간. 현준에겐 며칠 전의 실험 장면이 떠오른다. 분화 과정의 줄기세포에서 펼쳐지던 Y2 유전자와 갈색의 솜털 단백질의 어우러짐. Y2 유전자는 인간의 5번째 염색체를 구성하는 유전자다. 솜털 단백질은 Y2 유전자의 활성을 촉진하는 갈색의 단백질이다. 주변의 세포들로부터 세포 분열의 정보를 받아들여 Y2 유전자의 기능을 촉진시킨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유전자와 단백질의 현란한 어우러짐만큼이나 단풍든 수면은 허허로워 보인다. 단풍잎의 율동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을 때다.

느닷없이 핸드폰이 울어댄다. 소연의 것이다. 소연은 전화를 받더니 잠시 현준의 눈치를 보는 듯하다. 현준은 일부러 시선을 돌려 먼발치의 화려한 단풍을 감상한다. 시선은 다른 데로 돌렸지만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무나 조용한 상태라 그런 모양이다. 상대의 목소리는 청년의 굵직한 목소리다. 하지만 현준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가만히 노를 젓는다. 배는 뒤로 잘도 밀려가는 느낌이다. 이처럼 배가 말을 잘 들으리라고는 상상이 안 될 정도다. 마음을 주변의 풍광에 기울이기로 했지만 귀가 문제라고 여겨진다. 괜히 소연과 상대의 전화 목소리에 신경이 쓰인다. 들어본즉 사내가 소연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인데 소연이 관심조차 안 준 모양이다. 그래서 만나 달라고 사내가 애걸하는 전화인 듯하다. 소연이 차분하고도 분별 있는 목소리로 응답하는 말이 들린다. 이미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 신경을 꺼 달라는 얘기다.

현준은 생각한다. 이럴 때엔 귀가 너무 밝아도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은 적당히 듣지 않아도 될 정도의 경지라면? 하지만 이미 들을 건 다 들은 셈이다. 소연에게 이미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런데 하필 오늘 나랑 같이 산정호수에 있을 게 뭐람? 도대체 소연은 뭐 하는 여자일까? 그런 은밀한 전화는 안 받거나 적당히 따돌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일부러 들으란 듯이 전화를 받는 심보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민다. 이럴 때엔 다시 원래의 고아로 되돌아간 심정이 된다. 인간이 죽을 때엔 모두 외롭게 죽는다고는 하나 어쩐지 고아만큼 외로우랴 싶다. 숱한 인간들이 고아만큼 쓰라린 눈물을 흘려본 일이 있을까? 아무리 처절하고 공허하다고 엄살을 부려도 고아만큼의 처절함과 공허함을 느낀 사람들이 있을까? 현준에겐 생각된다. 세상에는 ‘상식선(常識線)’이라는 척도가 무서운 법이라고. 애매한 ‘상식’이란 단어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잔혹하게 다가서는지를 때때로 체험하곤 한다. 고아들이 아무리 외로움에 젖어 비틀거려도 그들을 다독거릴 사람들은 세상에는 없는 터다. 단지 스스로 참고 견디는 방법 이외에는 길이 없음을 느끼다가 사회인이 되고 만다. 소연의 전화 통화로 인해 극심한 공허감을 느끼게 된 현준이다. 현준은 단풍 든 산야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깨문다. 갑자기 가슴에 구멍이 펑 뚫린 기분이다. 순식간에 자신의 몸뚱이마저 아스라한 지평선으로 스러지는 듯하다. 지금껏 부단히 노력해 온 연구의 결실들마저 의미가 상실되는 느낌이다. 자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처럼 일시에 행복감이 소진되어 버리는 걸까? 현준의 마음은 느닷없이 삭막한 공간으로 내몰려 회한에 휩싸인다.

하마터면 현준의 눈에 물기가 밸 뻔했다. 현준은 고개를 흔들어 명성산에 드리워진 단풍의 색채를 둘러본다. 그러면서 현준은 내심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래, 부모도 없는 고아가 안 죽고 산 것만 해도 고마운 일 아닌가? 그런데 무슨 욕심을 더 부리느냐구?’

현준은 고개를 흔들어 호수의 바람결을 느껴 본다. 배는 흐느적거리며 잘도 호반을 따라 미끄러진다.

전화를 끝낸 소연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현준에게 말을 건네려 한다. 그랬는데 현준의 시선은 한껏 풀려 명성산 위의 구름장을 더듬고 있다. 이 장면을 본 소연은 가슴이 멎는 느낌이다. 마치 인생을 다 산 듯한 사람이 짓는 듯한 눈빛. 소연이 흘깃 바라본 순간의 현준의 눈빛은 바로 그것이다.

‘아니 이럴 수가? 젊은 사내의 눈빛에 어쩜 이다지도 깊은 경륜이 실려 있을까? 절대로 젊은 나이로서는 지을 수 없는 표정이 아니겠는가?’

소연은 대관절 현준의 정체가 뭔지 묻고 싶을 지경이다. 그러면서 현준의 그런 눈빛이 나오게 된 배경이 뭔가 생각해 본다.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인데도 의식의 폭은 엄청나게 차이가 남을 소연은 느낀다. 현준이 눈치 못 채게 소연은 현준의 거동을 살핀다. 한동안은 하늘의 구름에 어느 순간은 핏빛의 단풍에 현준의 시선이 얽히곤 한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인간이 아닌 도인을 보는 느낌이다. 어떻게 사람으로서 저 정도의 품격을 지니랴 싶어 소연은 머리를 내젓는다.

현준은 주변의 풍광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긴다. 언제부터 소연을 알았다고 이처럼 마음이 흔들릴까? 소연의 신상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헛물을 켠 자신이 비참하게 여겨진다. 그는 문득 자신에게 반문한다. 외롭게 자란 사람은 사랑을 이루기도 어려운가? 정말 그런 것일까? 켜켜이 심층으로부터 흩날리는 공허한 숨결들. 어떤 여인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 휩쓸리는 상념으로부터 벗어나려다가 잠시 주변으로 귀를 기울인다.

주위가 너무나 고요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현준은 문득 소연의 통화가 끝났음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시선이 먼발치의 경치에 머물고 있었음도 알게 된다. 잠시라도 상대를 무료하게 해서는 안 되리라고 생각하는 현준이다. 현준은 잠시 수면을 응시하다가 입을 연다. 수면에 닿는 순간의 현준의 눈빛은 완연한 도인의 것이라 여겨질 정도다. 바로 그 순간. 현준의 목소리가 소연에게 밀려든다. 혹시 현준으로 인하여 소연이 통화하는 데에 불편하지는 않았느냐고? 소연에게는 이를 데 없이 평온한 목소리로 들린다. 소연은 내심으로 감탄한다. 어쩜 상대에 대한 배려를 그처럼 따스하게 하겠는가하고. 그리하여, 소연이 곧바로 응답한다. 현준이 전혀 통화에 방해되지 않았다고. 별 안면도 없는 사람이 만나자기에 거절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현준이 뭐라고 대꾸를 하려는 순간. 이 번에는 현준의 핸드폰이 울린다. 전화번호를 보니 태희의 것이다. 호수의 수면이라서 멜로디가 더 크게 울리는 듯하다. 음량을 최대로 키워 놓았기 때문이다. 뜻밖이라 여기고 현준은 덤덤한 심정으로 핸드폰을 귀에 갖다댄다.

“현준 씨, 태희예요. 지금 뭐 해요? 나는 간식을 먹고 난 뒤에요. 제 취향은 아시죠? 그냥 심심하면 아무 때든지 전화하는 것 말이에요. 뭐 화끈한 게 없을까요?”

현준은 덤덤한 목소리로 응답한다. 화끈한 게 왜 없겠느냐고? 남녀간에 사랑을 나누는 것도 화끈한 일일 거라고. 또 얼큰한 매운탕을 곱빼기로 먹는 것도 화끈할 일일 거라는 대답이다. 현준의 핸드폰도 소리를 최대한 키워 놓은 상태라 태희의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이 번에는 소연이 경치를 감상하는 체하고 딴전을 피운다. 그러면서 들리는 소리는 놓치지 않고 다 듣는다.

“그럼, 우리 언제쯤 만나 화끈하게 한 번 붙어 볼래요? 제가 젊으니까 충분히 그 정도야 해 드리죠? 어때요? 저랑 겨루어서 주눅이 안 들 정도는 되죠? 뭐 아직 결혼도 안 했잖아요?”

태희와 이전에 고스톱을 심심풀이로 쳐 본 일이 있다. 태희가 하도 지루하고 따분하다며 일요일 오후에 현준의 집으로 놀러온 적이 있다. 태희의 손에는 의외에도 화투가 들려 있었다. 그 날 이후 이따금씩 태희와는 고스톱을 치는 편이다. 태희가 화끈하게 붙는다는 일은 고스톱 치는 일을 말한다. 태희가 젊으니까 그 정도는 해 준다는 말은, 진다면 맥주를 충분히 사겠다는 뜻이다. 결혼도 안 한 사람이라고 몰아붙이는 건 현준을 곯려 주자는 태희의 습성이다. 왜냐하면 술이 약하다며 몸을 사리는 현준을 윽박지르는 태희 고유의 전술인 셈이다.

그런데, 태희의 말은 제3자가 듣는다면 충분히 오해하고도 남을 수준이다. 태희의 목소리는 현준의 귀를 거쳐 소연의 귀에까지 또렷이 들린다. 소연은 생각에 잠긴다.

‘여인과 현준이 화끈하게 붙는다는 건? 남녀 사이에 화끈하게 붙을 건 섹스 말고는 없잖아? 아니 두 사람은 연인 사인가? 젊으니까 그 정도는 해 준다고? 누군지는 몰라도 정욕이 대단한 여자구나. 둘이 겨루어서 주눅이 안 들겠느냐고? 이 년이 순 화냥년 아냐? 남자를 벌써부터 주눅 들게 할 정도라니? 결혼도 안 했다고 다그치는 건 또 무슨 뜻인가? 벌써부터 남자가 빌빌거려 여자를 만족시키지도 못한다는 소리 아냐? 나 참 기가 막혀서. 그렇다면 지난 7월에 3시간 동안 내가 관찰한 인상은 잘못 짚었던 건가? 어디서 순 바람둥이를 만나 이렇게 시간 낭비를 하는 건 아냐? 이거 완전히 돌아 버리겠네, 응?’

한 번의 그릇된 선입관념이 박히면 후속의 연출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리라. 이후의 현준과 태희의 통화 내용은 들리지도 않는다. 여인의 목소리가 훨씬 또랑또랑한 소리로 흘러들지만 외국어로만 느껴질 따름이다. 슬그머니 가슴에 울화가 치솟는 소연이다. 그녀의 귓전으로 현준의 목소리가 거침없이 밀려든다. 어제도 집에 있었는데 언제 현준의 집의 벨을 눌렀느냐고? 상대와 화답하는 현준의 목소리가 소연에게는 천연덕스럽게 느껴진다. 일부러 주변 사람에게 약을 올리려는 듯 태평스럽게만 여겨진다. 소연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분노의 감정이 피어오른다.

‘이것들이 정말 잘 놀고 있네. 그럼, 현준은 뭔가? 아예 집에도 잘 안 들어가고 동네방네 바람이나 피우고 다녀? 그렇다면 흑석동 고개에서 나의 차바퀴를 갈아 끼워준 일은 뭔가? 그것도 밤에 나돌아 다니다가 우연히 나를 만나서 모처럼 선심을 쓴 것이로군. 아, 짜증나고 재수 머리가 없네, 정말!’

치솟는 분노의 감정을 추스르고 소연이 현준을 바라볼 때다. 현준은 어느새 전화 통화가 끝난 모양이다. 천연덕스레 주변의 단풍을 바라보는 현준의 모습이 소연의 눈에는 역겹게 느껴진다. 게다가 듬뿍 미소를 띤 얼굴로 소연을 바라보지 않는가? 소연은 순간적으로 발작할 것만 같았지만 정확히 따져볼 일이라 여기며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하여 소연은 현준에게 차분히 묻는다.

“좀 전의 아가씨와는 혼전에도 열심히 겨루곤 했나 봐요?”

이 말을 듣자 현준은 폭소를 터뜨리며 말한다.

“열심히 겨루는 정도뿐이겠어요? 새벽 늦게까지도 쉬지 않고......”

느닷없이 벼락 치는 듯이 소연이 소리를 내지른다.

“그만해요! 나쁜 인간 같으니라구! 나를 빨리 내려 줘요.”

현준은 잠시 아연한 느낌이다. 소연이 발작하듯 소리를 내지른 이유를 잠깐 동안은 알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소연에게 말한다. 현준이 뭘 잘못했는지 알려달라고? 실수한 게 있으면 용서를 구하겠다고 조심스레 말한다.

현준의 대꾸에 더욱 격분한 듯. 소연은 얼굴까지 새파래진 채 바르르 떨며 고함을 내지른다. 소연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면서 빨리 배를 선착장에 갖다 대라고 야단이다.

현준이 소연의 표정을 보니 더 이상의 말이 안 통할 것만 같다. 그래서 선착장으로 배를 몰기 시작한다. 배를 선착장 방향으로 돌리고 나서 생각해 보니 원인을 알 것만 같다. 여인의 질문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혼전에도 아가씨랑 열심히 겨루었느냐는 물음이었다. 태희랑 겨룬다는 말은 고스톱을 치는 일이다. 태희와의 통화를 엿들은 소연이 ‘겨룬다’는 용어를 썼기에 너무나 우습다. 그래서 장난기가 발동하여 막 익살스레 설명하는 중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소연이 고함까지 내지를 줄은 정말 뜻밖이다. 원인을 파악하자 현준은 마음이 담담해진다. 소연이 자신의 말을 듣건 듣지 않건 설명은 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일단 원하는 대로 배는 선착장으로 끌고 가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소연에게 잠깐만 현준의 말을 들어보라고 한다. 설명을 들으면 금세 오해가 풀릴 거라고. 현준은 호수의 둘레를 바라보며 잠시 숨결을 가다듬는다. 그래야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리라 여기기 때문이다.

현준은 고개를 돌린 소연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차근차근히 말한다. 태희는 같은 아파트 이웃집에 사는 주민이라는 말. 그냥 둘 다 심심풀이 말 상대라는 점. 때때로 둘이 앉아 고스톱을 칠 경우가 있다는 걸 들려준다. 현준의 해명을 듣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소연은 느닷없이 바위에 짓눌린 느낌에 휩싸인다. 섣불리 혼자 생각하고 판단한 결과란? 이미 현준에게 격분하여 고함까지 지르지 않았는가? 왜 화를 내기 전에 물어볼 생각을 못했던가? 어떻게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단정을 내렸던가? 생각할수록 자신의 섣부른 행동에 대해 심한 자괴심(自愧心)을 느낀다.

소연은 자세히 알지도 못한 채 화를 낸 자신의 꼴이 비참할 정도다. 모처럼 잘 보이고 싶은 상대에게 원색적인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았는가?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폭 숨어 버리고 싶을 정도다. 그렇지만 마음을 추슬러 자신의 입장을 설명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래서 자신이 오해하게 된 경위를 현준에게 자세히 설명한다. 한 번 오해를 하고 보니 현준의 모든 행동이 위선적으로 보여 격분했다고 들려준다. 현준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부분이라고 여긴다. 현준은 평온한 자세로 소연의 해명에 귀를 기울인다. 소연은 진심으로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렇든 말든 배는 이미 선착장을 향해 곧바로 나아가고 있다. 현준에겐 십여 분 후엔 도착되리라 여겨진다. 문득 현준에게 아까 소연에게 걸려온 핸드폰의 통화의 내용이 떠오른다. 잠깐 망설이다가 알아보기는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며 현준이 차분히 소연에게 묻는다.

“제 귀에 들렸기에 그냥 묻는 거예요. 연인이 정해져 있다고 하셨나요?”

현준의 말을 듣자 소연은 화들짝 놀란 심정이다. 처음엔 무척 당황스런 느낌이 든다. 전혀 남의 말을 엿듣지는 않을 것 같던 현준의 질문이 아닌가? 그런 반면 현준의 목소리에서 진한 질투심이 묻어 있는 걸 느낀다. 그뿐이랴? 어투엔 상당히 무뚝뚝한 음조마저 실린 느낌이다. 확실히 평소의 평온하고 청아한 현준의 목소리가 아니라고 소연에겐 생각된다.

‘이 사내가 내게 질투심을 느끼다니?’

소연은 이 점을 간파하자 내심 크게 마음이 뒤설레기 시작한다. 현준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엉뚱한 질문이 불쑥 현준에게로 내닫는다.

“전화 걸려온 아가씨와는 단순히 고스톱만 친 관계일 뿐인가요? 새벽까지 고스톱을 쳤다는 건 서로에 관한 관심이 없고서는 어려울 듯한데요? 제게 좀더 솔직하게 말해 주실 순 없나요?”

현준은 또다시 황당한 느낌에 잠겨든다. 자신의 질문에는 대꾸도 없이 소연이 재차 태희에 관해 질문했기 때문이다.

‘이건 뭔가? 소연이 태희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현준에게도 뛸 듯이 기쁘다는 느낌이 찰나 간에 든다.

‘그렇다면 소연이 나를 좋아한다는 건가? 그랬기에 아까 그처럼 화를 내며 배를 돌리라고 고함을 쳤던가?’

현준이 생각해 보니 새삼 가슴이 벅찰 일이다. 소연과 같은 애인만 있다면 세상에 남부러울 게 없을 것 같다. 현준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까 밝혔듯이 태희와 현준은 아파트의 이웃 주민이며 심심풀이의 얘기 상대일 뿐이라고. 추호도 서로에 대한 정감을 품은 사이는 아니라고 들려준다.

말하는 사이에 배는 이미 선착장에 닿았다. 현준과 소연은 배를 반납하고는 호반으로 올라선다.

현준이 시계를 들여다보니 정오 무렵이다. 현준이 소연에게 말한다. 아직 점심 식사시간은 좀 남았으니 걸어서 명성산 맞은편의 호반을 거닐자고 제안한다. 명성산 맞은편의 호반. 거기에는 노송으로 뒤덮여 아직도 포장되지 못한 오솔길이 기다랗게 펼쳐져 있다. 드나드는 사람이라고는 한낮에도 거의 없는 곳이다. 현준은 두근대는 가슴으로 소연과 오솔길을 걷는다. 솔바람 소리가 밀려들 때마다 청량감에 몸이 떨리는 듯하다. 현준은 잠시 생각에 젖는다. Y2 유전자와 솜털 단백질의 어우러짐처럼 자신과 소연이 연인이 된다면? 생각만 해도 너무나 행복하게 여겨진다. 분화 과정에서 유전자와 단백질이 최선을 다해 호흡을 맞추듯. 자신도 소연과 아름다운 인연을 맺고 싶어진다. 현준의 마음이 소연에게 전달되기라도 한 듯. 소연이 호반을 거닐면서 다소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현준 씨, 저는 정말 오늘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에요. 사실은 제가 춘천의 학술 회의장에서 어떤 분을 본 그 날. 이미 저는 그 분께 마음을 바치고 말았어요. 그 이후로 어떤 장소에서건 그 분을 향한 그리움으로 마음을 졸였는데......”

말을 하다 말고 흐느끼더니 나지막이 말을 잇는다.

“제가 마음을 드린 그 분께 오늘 제 추한 성격을 드러내고 말았어요.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소연은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낀다. 현준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진다. 소연의 진정 어린 사랑에 전신이 감전된 느낌이다. 그러자마자 자신도 몰래 왈칵 소연을 두 팔로 껴안으며 말한다.

“미안해요, 소연 씨! 당신이 마음을 바쳤다는 사람은 우둔하여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당신의 선택에 보답하여 저도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게요.”

소연은 감격에 젖어 잠시 몸을 떤다. 현준도 팔을 잠시 풀었다가 서서히 소연을 껴안는다. 소연의 얼굴이 점차 발그레 물든다. 소연의 가쁜 숨결이 현준의 귓바퀴를 간지럽힌다. 현준이 두 손으로 소연의 얼굴을 감싸며 서서히 입술을 가져간다. 두 사람의 입술이 파르르 떠는 듯. 잠시 입술 언저리에서만 맴돈다. 그러더니 서서히 입술이 열리며 상대의 혀를 받아들인다. 그럴 때마다 소연의 돌출한 젖무덤이 현준의 가슴으로 밀려든다. 현준의 심장은 흥분되어 마구 쿵쿵거린다. 비포장인 관계로 한낮에도 인적이 드문 노송으로 뒤덮인 호반의 산책로다. 두 사람의 뺨이 스칠 때마다 불덩이처럼 뜨겁다. 이처럼 가슴 설레며 달뜬 시간들도 조금씩 스러진다. 오솔길에는 이따금씩 푸드덕거리는 산새들의 날갯짓 소리만 들릴 뿐. 주위는 죽음 같은 적막으로 뒤덮여 고요할 따름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둘은 화끈거리는 얼굴의 열기를 삭이며 서서히 포옹한 몸을 푼다. 그러면서 앞날의 얘기를 나누며 조용조용히 발걸음을 옮긴다. 오솔길은 솔향기가 짙어 온몸이 파르스름하게 젖어들 지경이다.

어느새 오후 1시 무렵이다. 둘은 선착장에서 조금 떨어진 횟집인 음식점에 들어선다. 둘은 송어 회와 술을 주문하고는 온돌방의 식탁에 마주 앉는다. 창 밖에 드리워진 호수의 풍광을 바라보며 현준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간으로의 분화 과정에 있어서다. Y2 유전자가 핵공(核孔)을 거쳐 세포질에 들어선 직후. 주변 세포들의 세포질로부터 솜털 단백질이 서서히 Y2 유전자 주변으로 밀려든다. 솜털 단백질의 이동은 언제 관찰해도 활기차면서도 여유 있어 보인다. 몸체가 도르르 말렸다가 내풀리고 그러다가는 미끄러지듯 뒤집혀지기도 한다. 어떤 상황에서건 솜털 단백질은 Y2 유전자의 움직임에 호흡을 맞춘다. 솜털 단백질인양 현준은 소연의 숨결에 자신이 이끌림을 느낀다. 현준이 경쾌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끝까지 뱃놀이를 즐겁게 해 주지 못해 죄송했다고. 현준에게 다소 고까운 점이 드러났더라도 곱게 봐 달라고 말한다.

그러자 소연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더니 응답한다. 소연이 먼저 사과해야 마땅하지 않느냐고? 사과하는 마음으로 소연이 먼저 술잔에 술을 채우겠다고. 그러면서 내민 현준의 잔 가득히 소연이 과실주(果實酒)를 따른다. 현준도 소연의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운다. 둘은 술잔을 부딪치며 첫잔을 살짝 입에 대었다가 놓는다. 회를 들면서 술잔을 조금씩 입에 갖다대는 빈도가 잦아진다. 서서히 주기가 오르자 소연의 혈색이 달아오른 화롯불 같다. 그렇잖아도 고운 얼굴에 혈색마저 붉으니 여간 이채롭지 않다. 보는 이마다 눈이 번쩍 띌 정도의 미태를 풍기는 소연에게 넋을 잃는 듯하다. 그러자니 자연히 드나드는 여행객들의 눈이 소연의 얼굴에 머물렀다간 떨어지곤 한다. 여행객들은 저마다 잠깐씩 감탄하는 듯한 표정이 역력하다. 소연은 낮은 목소리로 현준에게 말한다.

“왜 사람들이 드나들며 저를 말끄러미 바라보는지 모르겠어요.”

현준은 껄껄거리며 흡족하다는 듯이 말한다. 소연이 미인인데다가 주기(酒氣)로 만발한 작약 같으니 쳐다볼 수밖엔 없지 않겠느냐고. 현준의 말에 소연은 더욱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다. 현준까지 덩달아 놀리면 어떻게 하느냐며 소연이 쫑알댄다. 현준에겐 아무리 봐도 소연이 요염하기 그지없을 정도다. 잠시 쫑알대던 소연이 수줍은 듯 살짝 웃으며 애교를 부린다. 현준은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얼이 빠진 듯하다.

대략 2시간을 음식점에서 대화를 나눈 뒤다. 현준은 소연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현준이 계산을 마치고 다시 호반으로 향한다. 기다리던 소연이 현준의 왼쪽 팔에 팔짱을 낀다. 아직도 햇살은 충만한 셈이다. 음식점 밀집 구역을 지나면서부터 포장이 된 산책로가 펼쳐진다. 호반의 산책로 곳곳에 세워진 벤치를 찾아 이따금씩 앉아 둘은 대화를 나눈다. 취기에 이따금씩 소연이 뺨을 가만히 현준의 뺨에 갖다대곤 한다.

현준은 이제 영원한 숙제가 해결된 셈이다. 고아로 자라 어떻게 배우자를 만날 것인지가 언제나 현준의 숙제였다. 현준은 성장 배경은 다르지만 마음 통하는 연인을 만나고 보니 천하를 얻은 기분이다. 현준은 생각할수록 소연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만 같다. 어디다 대고 평생의 애인을 얻었다고 고함을 지르고도 싶다. 이런 느낌이야 소연도 현준에 못지않다. 지금껏 그녀의 눈에 차는 사내가 없었는데 확실하게 상대를 정할 줄이야! 중요한 건 끝까지 이런 소중한 느낌을 간직하여 결혼하는 일이라고 여긴다. 소연은 현준을 왜 이제야 만났는지 지난날들이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그래서 대화를 하다가도 그녀의 뺨을 현준의 뺨에 밀착시키곤 한다.

현준은 잠시 실험실의 정경을 떠올린다. 지금쯤 배양균은 잘 자라고 있는지? 배양액 속에 잠긴 줄기세포의 증식도 잘 되고 있는지? 혹여 자동 제어 장치에 정전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는지? 소연과의 만남 또한 연구 작업에 활력이 되리라 여겨진다. 어떤 상황에서도 연구의 성과는 외국에 추월당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기에 현준의 뇌리에는 수시로 연구 장면이 떠오른다.

아름다운 시간들은 빨리 흐르는 법일까? 어느새 저녁 6시 무렵이다. 그 때까지 둘은 호반을 산책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어느덧 저녁 식사 시간이 된 것이다. 둘은 메기 매운탕과 과실주로 저녁 식사를 끝내고는 호반의 산책로에 들어선다. 현준과 팔짱을 끼고 걷다가 소연이 현준을 향해 말한다.

“현준 씨! 우리 둘이 오늘 여기서 묵으면 안 될까요?”

소연의 말을 듣자마자 현준의 마음이 급격히 뒤설렜다. 둘이서 산정호수에서 묵자고 하다니! 소연에게 어떤 충동이 일었는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현준이 나지막한 소리로 소연에게 묻는다. 여기서 묵는다는 건 둘이 밤을 함께 보내자는 거냐고? 소연은 현준의 눈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떡인다. 혹시 두렵지 않느냐고 현준이 묻는다. 오늘 마음을 열었는데 밤까지 함께 보내려니 두렵지 않느냐고 재차 묻는다.

두렵지 않느냐는 현준의 질문을 받은 순간. 소연은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른다. 소연의 마음은 마구 들떠 추스르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런 마음이 얼굴에도 드러나 소연의 얼굴이 진한 홍조를 띤다. 그러면서도 소연은 현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또렷한 목소리로 응답한다. 진정으로 마음을 통한 날이기에 오래오래 현준과 함께 있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소연의 대답을 듣자 현준은 더욱 마음이 뒤설렌다. 현준의 심장의 박동소리가 점차 거세어지며 얼굴이 달아오른다.

‘이제껏 경험한 적이 없는 여체의 향기를 맡게 되다니! 그것도 밤을 지새면서까지.’

현준은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생각에 잠긴다. 자신이 혹여 꿈을 꾸는 건 아닐까도 싶다. 이게 꿈에서 깬 어느 날의 환상이라면 얼마나 슬플까 싶다. 현준은 새삼 생각에 잠긴다. 모든 우주의 시간은 소중한 법이라고. 사람이란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결혼을 비롯한 모든 관혼상제도 하나의 의식을 존중하는 틀이라고 여겨진다.

현준은 당당히 S파크텔로 들어서서 방 한 칸을 잡는다. 프런트에서 대실(貸室)할 것인지 숙박할 것인지를 묻는다. 현준은 당당한 목소리로 숙박하겠다고 밝힌다. 숙박료를 치르고는 일회용 칫솔과 면도날을 받아들곤 소연과 함께 숙소로 오른다. 3층의 호반 쪽으로 열린 방이다. 전망이 좋아 절로 탄성이 터질 지경이다.

침대 곁의 다탁을 사이에 두고 둘은 마주 앉는다. 둘은 고개를 돌려 함께 창 밖을 내다본다. 호수가 거뭇거뭇한 색채로 남실대고 있다. 밤 시간인데도 연인들의 행렬은 여전히 산책로로 이어지고 있다. 서울서도 찾을 정도니 호수 가까운 곳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소연은 손을 내밀어 현준의 손가락과 깍지를 낀 채 현준의 눈을 들여다본다. 흑백이 선명한 눈망울이라 여겨진다. 현준도 소연의 눈망울을 들여다본다. 흑백이 너무나 선명히 드러나는 맑은 눈이다. 잠시 둘은 눈빛으로만 대화를 나눈다. 말을 생략한 채 눈빛으로만 오가는 대화. 비록 상대의 정확한 의사는 모른다고 할지라도 그 나름으로 의미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소연이 입을 연다.

“오늘 제 가슴이 너무 설레는 것 있죠? 터지지나 않을지 걱정스러울 지경이에요.”

소연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던 현준은 벽면의 달력을 바라본다. 음력을 보더니 반가운 듯 말한다.

“소연 씨! 오늘은 음력 보름이에요. 바깥 날씨가 맑은 걸 보니 보름달이 훤하게 떴겠는데요. 원래 보름달은 저녁 6시경에 떠서 아침 6시경에 지거든요. 아마 지금이 가장 하늘 높이 떠 있을 거예요. 우리 바깥으로 산책하러 가지 않겠어요?”

둘은 낮에 첫 입술을 나눈 오솔길로 걸어간다. 밤 시간이지만 현준은 무술의 유단자라 두렵지가 않다. 보름달 아래 놓인 호수의 정경은 몽환의 상태 같다. 수면에서는 안개가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다. 그러다가 새벽이 되면 온 하늘을 안개로 뒤덮어 버리리라. 마침내 낮에 처음으로 서로를 포옹했던 자리에 둘은 잠자코 선다. 낮과 마찬가지로 둘은 또 한 번 격렬하게 서로를 포옹한다. 밤안개 피는 호반을 따라 거닐며 둘은 영원한 미래를 설계한다.

절대로 이 날 밤의 체류가 단순한 육체적 향락이 아니기를 다지는 것이리라. 밤안개 피는 호반은 한결 신비롭기만 하다. 빽빽이 늘어선 노송나무 가지마다 청아한 솔바람이 휩쓸리고 있다. 잠자코 서 있기만 해도 우주에 흡수될 듯한 분위기다. 문득 현준의 머릿속에 스승의 말이 떠오른다. 서로에 대한 존경심이 없이는 부부가 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서로를 향한 존경심이 영원히 지속되어야만 가정이 이뤄진다는 뜻이리라. 현준은 속삭이듯 소연에게 말한다. 진정으로 소연은 현준의 아내가 될 작정이냐고? 혹여 앞으로도 후회가 없겠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소연은 현준의 눈을 들여다보며 응답한다. 그렇기에 오늘밤을 함께 보내려는 게 아니겠느냐고. 진정에서 우러나는 소연의 목소리엔 한없는 정감이 서려 있다. 진정어린 소연의 감정 표현에 현준의 마음도 몹시 흥분된 상태다. 그런 중에서도 마음을 가다듬어 현준이 소연에게 말한다.

“앞으로 우린 섹스를 나눈 이후로도 지금처럼 서로 존댓말을 쓰면 좋겠어요. 섹스는 육체적인 사랑의 표현일 뿐인데 그걸 계기로 연인들이 말을 놓아 버리거든요. 다음으로는 우리의 섹스는 반드시 결혼식을 올린 뒤에 하자는 얘기에요. 대신에 섹스를 제외한 모든 애무는 자유로이 나눌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요?”

소연은 잠시 말이 없더니 고개를 끄떡이며 대답한다.

“좋아요. 저는 이미 당신의 연인이기에 당신의 말을 따를게요.”

현준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소연의 블라우스를 걷어 올린다. 그러자 소연의 눈썹이 흥분으로 가늘게 떨리며 양 손으로 현준의 뒷머리를 얼싸안는다. 밤이 이슥해서야 둘은 숙소로 들어선다. 숙소에 들어선 뒤엔 나란히 목욕을 끝내고는 침대에 드러눕는다. 한동안 둘은 흥분하여 몸을 뒤채다가 마지막 선은 지킨 채 잠자리에 든다.

다음 날 아침 6시에 둘은 산정호수의 주차장을 떠난다. 그리하여 오전 8시 무렵에는 각자의 학교에 들어선다. 현준은 실험실에 도착하자마자 벽면에 부착된 시간표를 본다. 수업은 2시간짜리 연강이 1?2교시에 있다. 2시간만 열심히 수업을 하고는 나머지는 연구 업무에 몰두할 수가 있다. 1?2교시의 강좌 이름은 분자 분광학이다. 마침 외국인 교수가 강의를 하는 날이다. 외국인 교수의 강의가 끝나는 대로 영어로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게 되어 있다. 한 번이라도 보고서가 누락되면 칼같이 F학점이 떨어진다. 외국인 교수는 질량 분석법에 대한 강의를 끝내고는 교실을 나선다. 증기 상태의 시료에 전자를 충돌시키면 시료는 전자를 잃고 양이온이 된다. 이들 양이온을 분석 장치로 보내어 질량 대 전하량의 비로 분석을 한다. 이 분석에 의하면 양이온의 분포 상태까지도 깔끔하게 알아낼 수 있다. 외국인 교수가 설명한 내용은 이런 정도다. 현준은 보고서의 골격을 메모해 둔 다음 곧바로 컴퓨터를 이용해 영문으로 작성하기 시작한다. 영문으로의 작성이 끝난 뒤에는 곧바로 외국인 교수의 연구실로 제출해 버린다.

수업을 마치고 연구실에 들어서니 오전 11시 무렵이다. 석사과정의 후배들이 실험에 몰입해 있다. 그들에게 격려의 말을 던지며 현준도 실험에 착수한다. 우선 세균 배양실의 압력계를 들여다본다. 대기압과 같은 상태다. 밤새 세균의 증식에 커다란 변화는 없는 상태라고 여겨진다. 배양실 내의 균주 배양 시험관을 빼내 일부를 채취하여 현미경에 올린다. 단위 면적당 증식된 대장균의 수가 전날에 비해 4배가량 늘어나 있다. 대장균 내의 플라스미드가 그만큼 증식된 것이다. 플라스미드는 세균의 핵에 존재하지 않는 원형의 DNA이다. 이 원형의 DNA의 일부를 제한효소로 자른 다음에 붙이고자 하는 새로운 유전자를 접합시킨다. 새로 접합된 DNA는 대장균과 같은 세균의 몸속에 넣어 대량으로 증식시킨다. 이를 위해 세균 배양실이 필요하다. 현준은 재조합 플라스미드의 구조를 면밀히 관찰한다. 원하는 위치에 새로운 유전자가 잘 부착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이틀 전의 플라스미드 구조와의 차이점으로 볼 때 개선된 것은 틀림없다.

이 번에는 허파로의 분화를 촉진하는 조절 유전자 그룹에 대한 연구 자료물을 펼친다. 십여 개의 유전자 그룹이 주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까지는 규명이 된 상태다. 각 유전자가 나타내는 염기서열의 자료를 살펴본다. 최근에 수입된 기계로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유전자의 염기서열의 분석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종래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는데 신종의 장비가 들어서면서 분석 시간이 단축된 상태다.

현준은 3시간 동안은 핸드폰을 진동 상태로 전환해 둔 뒤에 조절 유전자를 분석한다. 10여 개의 조절 유전자 그룹의 염기서열까지를 꼼꼼히 점검해 나간다. 염기서열이 찍힌 필름을 나란히 줄지어 세워 상호간의 비교를 한다. 이 번의 결과를 가지고 보름 뒤에는 대덕 연구단지로 가야 한다. 거기서 그 동안 국내에서 연구한 항목에 대한 발표가 있을 예정이다. 현준은 허파로의 분화에 대한 10여 조절 유전자 그룹에 대한 발표를 할 예정이다. 나름대로 골격은 이미 갖춰진 상태라 몇몇 부분의 자료만 보완하면 되는 상태다.

오후 4시 무렵이다. 핸드폰이 울린다. 전화번호를 보니 소연의 것이다. 현준은 얼른 전화를 받는다. 맑고 시원스런 소연의 목소리가 흘러든다. 오늘 연구할 때 졸지는 않았느냐고? 소연은 졸음 때문에 휴게실에서 눈을 좀 붙였다고 한다. 현준에게도 몸에 피로가 쌓이지 않게 하라고 전화했다고 말한다. 소연의 따스한 마음에 고마워하며 현준이 응답한다. 소연의 배려 덕분에 학교에 잘 도착했다고. 오늘의 연구 목표는 끝난 상태라고. 잠시 후에 귀가할 예정이라고 들려준다. 곧바로 응답하는 청량한 소연의 목소리가 들린다. 수고했다며 들어가서 편히 쉬라고 말한다. 경쾌하고도 명료한 소연의 목소리를 음미하며 현준이 전화 마무리를 한다. 전화 주어서 고맙다며 소연에게 작별의 인사를 한다.

토요일의 오후 4시여서 집으로 돌아갈 시각이다. 막 아파트에 들어서서 거실에 앉으려 할 때다. 핸드폰이 울어댄다. 귀에 갖다대니 춘천의 혁진이다.

“지난번의 미사일 불발 사고에 관해서야. 좀 전에 어떤 정보를 입수했거든. 미사일을 불발로 만든 게 청화와 선영의 짓일 것만 같애. 만나서 자세한 얘기를 들려주고 싶어. 내일이 일요일이니까 내가 아침 8시까지 신림동의 네 집까지 달려갈게.”

현준이 미처 고맙다는 말도 하기 전에 전화가 끊긴다. 전화가 끊기자 현준은 생각에 잠긴다. 미사일을 불발로 만든 게 청화와 선영의 짓이라고? 돌연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다. 혁진의 말이라면 절대적으로 신빙성이 크다는 걸 아는 현준이다. 하지만, 이젠 청화와 선영의 행적마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실종된 T교수와 은정의 행방은? 서서히 현준의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일단 혁진을 만나고 볼 일이다. 혁진을 만난다면 모르던 정보를 혹여 알게 될지도 모를 일이리라. 현준은 혁진을 맞아들이기 위한 몇 가지 물품을 슈퍼에 나가서 산다. 맥주 상자며 땅콩, 아몬드, 오징어, 쥐포 등의 안주류가 대부분이다. 이튿날이 일요일이기에 기왕이면 용수와 종학도 부를 작정이다. 현준은 핸드폰으로 용수와 종학에게 연락을 취한다. 둘 다 쾌히 오겠다고 대답한다.

현준이 냉장고에 맥주를 넣고 맥주잔을 챙기느라 거실을 오갈 무렵이다. 현관의 초인종이 울린다. 태희라는 생각이 들어 문을 열었는데 의외로 소연이다. 현준은 너무 반가워 소연을 꼭 껴안는다. 소연도 짐을 한 보퉁이 들고 온다. 냉장고에 들어갈 젓갈류와 가공된 통조림과 반찬 들이다. 소연이 집에 들어서자 현준은 가슴이 들뜬다. 괜히 휘파람소리라도 내고 싶어진다. 현준은 생각한다. 고아로서 유년 시절을 겪으면서 처절한 외로움을 삼키며 살아온 터다. 이제 연인도 생겼고 마음 통하는 친구들도 있다. 그뿐이랴? 각별한 애정을 베풀었던 성종의 일가족 및 존경하는 스승과 동료 대학원생들까지 있다. 이제는 사람들과의 외로움은 사라진 상태로 여겨진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다. 또다시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고 보니 태희다. 태희가 실내를 둘러보더니 소연을 보고는 움찔 놀라는 눈치다. 그러면서 현준을 향해 말한다. 오늘은 손님이 있어서 다음에 들르겠다고. 말을 마치고는 태희가 황급히 빠져 나가 버린다. 소연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