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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황색 갈매기 날다 손 정 모
10. 유출된 유전비록(遺傳秘錄)
제주 시내의 N모텔. 11월을 하루 남겨 둔 밤 10시 무렵이다. 그 때까지 술잔을 나누던 현준과 은하는 방바닥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신문지를 접고 방바닥에 떨어진 술안주와 음식들을 말끔히 치운다. 은하가 걸레를 빨아 방바닥을 깨끗이 닦는다. 창문을 약간 열어 환기시킨다. 그런 다음에 창문을 닫고는 커튼을 친다. 은하는 침대 시트를 반반하게 펼친다. 그리고는 소등을 하며 현준에게 말한다.
“오빠, 내일 일찍 출발하려면 자야죠. 아이, 또 뭘 망설이세요? 어서 침대로 올라와요.”
현준이 다소 당황한 듯이 말한다.
“너랑 어떻게 침대에서 같이 자? 너만 침대에서 자. 나는 방바닥에서 잘 테니.”
은하가 약간 언성이 높아지려는 기세로 말한다. 남매끼린데 침대에서 같이 못 잘 이유가 뭐냐고? 자칫 잘못하다간 고함이라도 지를 형세다. 현준은 잠시 갈등을 겪는다. 분명히 은하의 말에는 틀린 데가 없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은하의 잠옷 차림새와 음주 상태가 걱정스럽게 비친다. 게다가 둘 다 취기로 얼얼한 상태가 아닌가? 위험스런 요소는 사전에 제거하는 게 좋으리라는 게 현준의 생각이다. 하지만, 은하의 언색(言色)을 살피건대 이견(異見)을 말했다간 금세 펄펄 뛸 듯한 기세다. 제주까지 와서 의동생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은 현준이다. 그러면서 거듭 마음을 가다듬는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색정에 휘말리지 않겠다고. 마음을 가다듬자 은하에게 더블침대에 오르겠다고 응한다. 그러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는 현준이다. 어떤 상태에서도 자신의 마음만 돈독하다면 별 문제가 없으리라고 거듭 자위한다. 하지만, 왠지 자꾸만 가슴이 불안해지며 한숨마저 나올 지경이다.
현준은 체육복 차림으로, 은하는 잠옷 차림으로 더블침대에 오른다. 둘은 모포 2장으로 한 장은 바닥에 깔고 다른 것으로는 몸을 덮는다. 이 때에도 현준에겐 갈등이 생긴다. 모포를 바닥에 깔지 말고 각자 한 장씩 덮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바닥에는 시트가 있기 때문이라 여긴다. 그런데 은하의 고집이 세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아예 말을 접기로 한다.
둘은 같은 모포를 덮고는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는다. 현준이 은하를 향해 잘 자라고 말한다. 은하도 현준에게 잘 자라고 들려준다. 취침 직전의 인사를 서로 나눈 상태다. 현준은 잡념을 배제한 채 가만히 숨결을 가다듬는다. 몇 번의 고른 숨결을 내쉰 뒤다. 현준은 이내 잠의 세계로 빠져든다. 규칙적인 생활의 리듬 때문이리라.
현준의 고른 숨소리가 들리면서부터다. 은하의 눈빛이 잠시 허공을 더듬더니 가벼운 한숨을 내쉰다. 뭔가 고뇌가 잔뜩 서린 표정이다. 하지만, 은하도 이미 한계 주량을 넘긴 상태다. 뒷머리가 무거워지면서 그녀도 금세 잠들어 버린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코를 골며 자던 현준은 이상한 느낌에 움찔 놀란다.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이 자신의 아랫도리를 애무해대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자신의 몸뚱이는 발가벗겨져 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든 현준은 상대를 밀치려고 손을 내뻗는다. 손을 내뻗는 순간. 손길에는 발가벗은 여인의 뭉클한 젖가슴이 만져진다. 순간적으로 따스하고도 포근한 느낌이 왈칵 밀려든다. 거의 발작할 듯이 놀라 현준은 급히 일어나려고 한다. 현준의 두뇌에 비수가 박힌 느낌이다. 현준은 통곡하고 싶은 마음으로 일어나려고 버둥댄다.
‘아, 내가 무슨 망발인가? 여동생을 발가벗기다니?’
그 때다. 알몸의 은하가 잽싸게 현준을 덮쳐누르며 몸을 밀착시킨다. 탄력 있는 여체와 부딪힐 때마다 현준은 짜릿한 성감에 시달린다. 그 바람에 성기가 발기하여 터질 듯이 끄떡댄다. 이를 악다물며 몸을 일으키려 해도 소용이 없다. 자신도 몰래 목청에서 꺽꺽 울음이 터지려고 한다. 아무래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며 거듭 몸부림을 쳐댄다. 처절한 낭패감이 현준의 심장을 꿰뚫는 기분이다. 아무래도 지난밤에 술이 너무 과한 탓이리라. 분명 자신의 몸인데도 도무지 추스를 수가 없다. 그런데 사태는 점차 심각해지려는 국면이다. 현준의 성기를 애무하던 은하가 돌연 그녀의 사타구니를 한껏 벌린다. 그러면서 현준이 일어나지 못하게 위에서 덮쳐누른다. 은하는 사타구니를 벌린 채 현준의 성기를 그녀의 몸속으로 삽입시키려 한다. 현준이 발악적으로 일어나려고 할 때다. 현준의 어깻죽지로 은하의 손이 얹혀지더니 서서히 힘이 가해진다. 전신이 쩌릿쩌릿해지며 현준의 근육이 온통 마비되는 듯하다. 현준의 전신에 통증이 밀려들자 더욱 일어나 보려 애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근육이 마비된다. 팔로 은하의 손을 뿌리치려고도 해 보았지만 허탕만 칠 뿐. 그러다가 은하의 손이 자신의 귀두를 움켜쥐는 순간. 강한 정전기를 타는 느낌이 들며 현준의 몸이 굳는다. 그 순간이다. 현준의 성기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은하의 몸속으로 삽입되어 버린다. 아뜩한 절망감을 느끼며 현준의 의식이 방황할 때다. 현준의 어깻죽지에 매달린 은하의 손길에 점차 기가 강렬하게 실리면서부터다. 현준은 완전히 고문당하는 느낌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몸을 떨어대며 시달린다. 너무나 고통이 커 자신도 몰래 비명을 질러댄다. 그러다가 격분하여 반항하려 할 때다. 은하가 핸드폰 겸용의 전자 충격기를 현준에게 갖다대는 순간. 결국 현준은 고통을 못 견뎌 실신해 버린다.
은하는 그런 현준을 향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생각에 잠긴다. 그러더니 현준의 관자놀이와 백회혈에 서너 차례의 지압을 가한다. 그러자 현준의 의식이 잠시 깨어나더니 이내 잠 속으로 빨려든다. 은하는 잠든 현준을 향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잠옷을 몸에 걸친다. 그리고는 담배를 꺼내 문다. 창문을 조금 열더니 담뱃불을 붙여 빨아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은하는 생각에 잠긴다.
‘이 녀석은 나의 정체가 누군 줄은 까마득히 모를 거야. 만약 안다면 또다시 실신해 버리겠지? 러시아의 이바노프 박사가 날 성형 수술시켜 공작을 진행하는 줄을 어찌 알겠는가?’
잠시 생각에 잠기던 은하는 한결 담배를 깊이 빨아댄다. 그러더니 또 다른 궁리를 한다.
‘이 녀석은 확실히 출중한 놈이야. 용모나 체격도 훌륭하고 거기다가 학식과 무술까지 겸비했으니! 당장 죽이지는 말아야지. 이 녀석한테서 이바노프가 바라는 ‘유전비록(遺傳秘錄)’을 탈취할 때까지만 데리고 놀아야지. 성적(性的)으로도 그만이어서 내가 흥분해서 미치겠는데?’
이내 은하는 담뱃불을 비벼 끄고는 입안을 물로 헹군다. 그런 뒤에 다시 잠옷을 벗고는 알몸의 현준을 향해 모포 속으로 기어든다.
아침 9시 무렵. 예정대로 비행기는 제주공항을 이륙하여 북상하기 시작한다. 현준은 옆 자리에서 혼곤히 잠든 은하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어쩌다가 내가 어젯밤에 은하를 취하게 되었을까? 온몸이 마비가 되어 버둥거렸던 것은 꿈이었을까 실제 상황이었을까?’
현준은 생각할수록 헷갈리는 일이라 생각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왜 은하와 섹스를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유일한 애인인 소연과도 섹스를 한 적이 없는 그이다. 그런 자신이 은하를 밤중에 범하고 말았다니! 부끄럽기 이를 데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아침 일찍 일어나 얼굴이 상기된 채 애교를 떨던 은하가 아니었던가? 그런 은하가 현준을 폭력으로 겁탈했다는 건 확실히 꿈이었으리라 현준은 여긴다. 그게 꿈이었다면 결국 현준 자신이 흥분하여 은하와 섹스를 한 게 아닌가 말이다. 현준은 잠결에 자신이 은하를 범해 버렸을 거라고 여긴다. 특히 아침에 은하가 냉장고에서 음료를 따라 컵에 내밀 때엔 처참한 심정이었다. 부끄러워서 차마 고개를 못 들 지경이었다.
모텔에서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도 모를 정도다. 모텔을 벗어나자마자 둘이 택시를 타고는 제주공항에 도착한 거다. 그리고 이내 비행기가 이륙했다. 비행기가 상공으로 치솟자마자 은하는 눈감고 잠들어 버린 터다.
현준은 은하의 잠든 얼굴을 흘깃 바라본다. 미태를 풍기는 갸름한 얼굴이 잠에 취해 발그레 물들어 있다. 현준은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다. 지난밤에 어쩌다가 그런 사고를 쳤던가? 생각할수록 피가 들끓어 죽고 싶은 심정이다. 현준은 침대에서 일어날 때 부끄러워서 은하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 못했다. 현준이 일어나자마자 은하도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현준의 눈망울을 응시했다. 시선이 맞닥뜨려진 순간. 현준은 알몸으로 은하의 앞에 무릎을 꿇어앉으며 용서를 구했다.
“은하야, 무조건 미안해. 어쩌다가 너를 범해 버렸는지......”
곧바로 은하의 교태스러운 말이 현준의 입을 막아 버렸다.
“오빠가 절 그처럼 사랑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요. 이제 절 가졌으니까 이제부터 전 오빠의 여자예요, 알겠죠? 헌데, 소연 씨는 어떻게 할 거죠?”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현준은 대답할 길이 막막했다. 현준이 벙어리마냥 대답을 못하자 은하가 말했다.
“오빠, 걱정 마세요. 제가 남의 애인을 가로챌 모진 여자는 아니에요. 하지만 이건 분명히 알아두어야만 해요. 절대로 절 외롭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구요. 수틀리면 사방에다 확 불어 버릴지도 모르니까요. 제 부탁은요. 저를 성적(性的)으로 외롭게 만들지만 말아 달라는 얘기예요.”
현준은 숨이 멎는 느낌이었다. 이제 은하의 손에 완전히 코가 꿴 상태였다. 오빠로서의 품위는 이미 허공으로 달아난 상태였다. 어쩌다가 자신이 그런 대실수를 저질렀는지 생각할수록 자신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수틀리면 불어 버리겠다고 은하가 자신을 협박까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한 마디 대꾸할 수조차 없는 현준이었다. 혹시나 하여 아침에 샤워를 하기 전에 아랫도리를 살펴봤다. 성기엔 엄연히 정액이 묻은 종이 조각이 달라붙어 있었다. 완전히 절망 상태를 넘어 발작해 버릴 지경이었다. 애인도 아닌 여인의 몸에 정액을 쏴 넣었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엄연히 정액을 쏜 사람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현준은 생각할수록 처참한 심경에 휩싸인다. 어쨌든 자신이 그녀를 범했기에 그녀도 자신을 애무했으리라고 여긴다. 현준이 잠결에 은하를 범하지만 않았어도 어떻게 그녀가 자신을 애무했겠는가? 언제 자신이 옷을 벗었던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은하의 옷은커녕 자신의 옷도 벗은 기억이 없다.
현준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비행기 내에서 잠든 은하를 바라보며 현준은 지난밤의 일을 되짚어 따져본다. 가장 큰 취약점은 만취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는 점이다. 처음엔 얌전히 자리에 누웠다 치더라도 취몽 중에 은하를 벗겼을지도 모른다. 평소에 얌전한 은하였기에 그녀가 설마 자신을 벗기지는 않았으리라 여긴다. 더구나 결정적인 건 자신이 정액을 터뜨렸다는 점이다. 어디다 대고 변명할 여지라곤 전혀 없는 상태다. 이러니 미쳐 죽을 노릇이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서도 현준은 지난 7월 31일의 일을 떠올린다. 정부는 2005년 1월 12일에 S대 W교수의 배아 줄기세포의 연구를 공식 승인했다. 이어 지난 7월에는 마리아 생명공학 연구소를 국내 2번째 줄기세포 연구 기관으로 승인했다. 이런 정부의 승인은 각 종교나 윤리 단체의 반대를 일소에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더 이상 생명이나 윤리라는 통념으로 줄기세포의 연구에 제동을 걸지 말라는 정부의 뜻이리라. 현준에겐 유전공학 분야의 기술적인 우위를 선점하려는 국가의 강력한 관심이라 여겨진다. 자신은 이러한 정부 차원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 유전공학의 과학도가 아닌가? 이런 중대한 시점에서 자신이 은하를 발가벗기다니? 이러한 상태로 어찌 연구나마 온전히 수행할 수 있겠는지? 생각할수록 자꾸만 서러움이 들끓는다.
지난밤의 일에 현준이 당당할 수 없는 결정적인 취약점이 또 있다. 아마 대학 1학년 때였으리라. 동해 해변으로 남학생 10명이 몰려 여행을 떠났다. 그러다가 해변의 야영장에 5개의 텐트를 치고는 둘씩 짝을 이루어 잠들었다. 피곤한 탓이었든지 현준은 잠자리에 들자마자 온갖 꿈에 얽혀 들었다. 그러다가 어떤 예쁜 여대생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서로를 애무하는 꿈을 꾸었다. 헌데 잠결에 자신의 손길이 옆의 남학생의 속살을 마냥 더듬어대지 않는가? 놀랍게도 옆의 남학생의 반응도 가관이었다. 잠자다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으려니 여긴 듯했다. 이미 현준의 애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친구도 현준의 팬티 밑으로 손을 넣어 성기를 주물러댔다. 까마득히 사라진 옛 날의 기억. 그 기억이 문득 되살아나 현준을 괴롭히는 요인으로 등장했다.
현준은 거듭 동해안 텐트 속의 일을 떠올린다. 남자끼리였으니 그냥 웃어넘기고 만 일이다. 그랬던 게 은하와의 동침 때 불상사가 터진 이후부터 현준을 괴롭히는 요인이 되었다. 어쩌면 잠결에 소연의 몸을 더듬는다고 생각하며 은하를 애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문제는 이런 위험 상황에 충분히 대비를 못한 자신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젠 대상이 남자 친구가 아니다. 어엿한 처녀, 그것도 여동생으로 정한 여인을 범하고 만 것이다. 총이라도 있으면 깨끗이 자살해 버리고픈 심정이다.
그래서 그 날 아침에 은하의 앞에 알몸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랬는데 은하는 현준에게 은근히 협박까지 했다. 수틀리면 사방에 불어 버리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은하가 내뱉은 말이란? 남의 애인을 가로챌 마음은 없다고 했다. 다만 성적(性的)으로 외롭지 않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젠 은하에게 오빠가 아닌 노리개 감으로 전락된 꼴이었다. 생각할수록 은하의 말에는 맹랑한 데가 느껴졌다. 애인을 가로챌 마음이 없다는 건 무슨 뜻인가? 현준이 당당한 사내라면 처신을 제대로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처신을 제대로 하는 길이란? 소연과는 애인 간이라고는 하지만 육체관계가 없는 사이다. 반면에 은하와는 성교를 하지 않았는가? 경우에 맞게 처신을 하는 길이란? 연인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뜻함이다. 현준이 사랑하는 사람은 소연이지 않는가? 은하에게는 애초부터 사랑의 감정이 없었다. 그랬던 건데 어쩌다 보니 사랑하지도 않은 은하를 범한 터다. 사고 치고는 대형 사고임에 틀림없다. 현준에겐 추호도 소연과의 연인 관계를 청산할 마음은 없다. 반면에 자신이 범한 은하에 대한 처리는? 전혀 배상이라곤 은하가 바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냥 넘길 성질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은하는 여전히 잠든 상태다. 비행기의 운항 상태가 그만큼 안정하다는 뜻이리라. 은하를 떠올리기만 해도 현준은 얼굴이 달아오른다. 자신의 그릇된 행동으로 수많은 남성들이 은하의 눈에는 야수로 비칠지도 모르리라고 생각된다. 생각할수록 이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은 심정이다. 자신도 몰래 현준의 눈시울에 눈물이 실려 그렁그렁하다. 사나이답게 생명을 끊어 버린다면? 차마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 여겨진다. 유전비록의 완성 문제도 있고 연인인 소연과의 약속 문제도 소중한 터다. 앞으로 헤쳐 나가기에는 너무나 벅찬 현실이지만 슬기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하리라 스스로 생각한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셔틀 버스에 오르니 오전 10시 반이다. 일단 연구서적을 사러 광화문에 들러야 한다. 둘은 광화문의 서점에 들러 유전공학의 서적들을 몇 권 산다. 그런 뒤에 둘은 지하철을 갈아타며 신림동 S대학에 도착한다. 각자 지도교수를 뵙고 잘 다녀왔다는 인사를 한다. 현준은 잠시 은하를 잊고 실험 장치를 점검한다. 현준이 지금껏 실험한 결과물은 국제적인 기밀 수준이라고 이전에 심 교수와 W교수는 평했다. 교수 둘은 현준의 유전비록에 대한 보안 관리를 철저히 하라고 당부했다. 그리하여, 현준은 실험한 내용을 전산화하여 ‘유전비록(遺傳秘錄)’이란 이름으로 정리해 두었다. 어느새 유전비록의 두께는 A4 용지 1,000여 장에 이를 정도다.
점심식사를 마친 뒤다. 현준은 유전비록을 쭉 훑어보며 점검할 시간을 갖는다. 우선 서책의 목차를 훑어본다.
1. 플라스미드를 이용한 재조합 기술
2. 재조합 유전자 기술을 이용한 식물의 형질 개선
3. 핵 치환에 대한 전자 충격파의 활용
4. 핵 치환 후의 전사와 번역에 대한 연구
5. 인간배아 줄기세포의 형성
6. 체세포 복제
7. 줄기세포의 장기로의 분화
8. 분화에 기여하는 조절 유전자의 검색 (5대 장기를 중심으로)
9. 미토콘드리아 DNA 내의 분화 조절 유전자
10. 인간 장기에 대한 배양 자동화 시스템의 벤치 유닛(bench unit)의 제조
목차는 위의 10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항목마다 현준의 심혈이 담긴 실험 결과가 제시되어 있다. 현준의 실적은 그 동안 학술지에 논문으로 꾸준히 발표되어 왔다. 국가 기밀에 해당하는 것은 심 교수와 협의하여 발표를 제한해 왔다. 현준은 근래에 배양 자동화 시스템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는 중이다. 현준은 서너 시간 동안이나 유전비록의 내용을 읽고 재점검하는 중이다. 유전비록은 연구실 내의 대형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다. ‘황색 갈매기(yellow gull) 2006’이란 암호를 달고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컴퓨터로 출력해서도 모아 둔다. 이제 5대 장기로의 분화의 연구는 상당히 진척된 편이다. 다만 심장에 대한 조절 유전자의 연구가 조금 남은 상태다. 일주일 중의 이틀은 조절 유전자의 연구에 소모된다. 또한 나흘은 배양 자동화 시스템의 연구에 소모된다. 일요일은 에너지의 회복을 위해 충분한 휴식을 취한다. 심 교수와 W교수는 언제나 자주 만나 열띤 토론을 한다. 그러면서 서로를 격려하며 연구의 방향을 잡아 나간다. 이런 교수들의 분위기가 연구에 있어서 현준과 은하에겐 큰 격려가 된다. 제주를 다녀온 이후에 현준과 은하는 연구에 더욱 몰입하는 상태다. 마치 몰입을 통해 이전의 불미스러운 일을 잊으려는 듯이.
오후 5시 반이다. 현준은 저녁 식사를 하러 교내 식당으로 향한다. 식당에서 밥을 갈비탕 국물에 말아 천천히 먹는다. 식사를 끝내고는 천천히 식당 문을 빠져나온다. 식당 문에서 북서쪽으로 도보로 5분쯤 떨어진 잔디밭을 지날 때다. 러시아 유학생들 셋이서 자기네들끼리 영어로 얘기하다가 목소리를 낮춘다. S대에는 다른 나라에서 유학 온 외국인들이 영어로 주고받는 일이 허다하다. 왜냐하면 영어는 세계어라 할 정도라 자기네들끼리 있을 때에도 영어를 연습하려는 측면인 모양이다.
현준이 러시아인들의 곁을 지나치는 순간. 그들의 입에서 캘스 교수의 이름을 듣게 된다. 현준은 순간적으로 긴장한다.
‘하필이면 세계의 테러 부대가 들끓는 때가 아닌가? 이 때 러시아인들로부터 캘스가 거론되다니? 대단히 수상한 일인데? 잠시 동태를 지켜볼까?’
현준은 그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바위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꺼내든다. 핸드폰을 꺼내들고 허공에 자연스레 원호를 그리는 찰나다. 현준은 3사람의 얼굴 모습을 카메라폰에 담는다. 그리고는 러시아인들과는 등을 돌린 채 핸드폰을 귀에 가져간다. 짐짓 통화를 하는 채 러시아인들의 말을 엿들으려는 거다. 러시아인들은 현준의 동정을 잠시 살피는 기색이다. 그러더니 누군가 수군댄다.
“저 애는 통화할 작정이지 설마 우리의 대화를 엿듣겠어?”
그러면서 이내 자신들의 화제로 몰입한다. 현준의 귓전에 그들의 얘기가 시냇물처럼 맑게 들려온다. 현준은 최신 기종의 핸드폰의 녹음 버튼을 누른다. 귓전으로 흘러드는 러시아인들의 목소리가 죄다 녹음되리라.
시카고 C대의 교수인 캘스는 미국의 테러 부대의 수괴다. 보름 전인 11월 중순 무렵일 때였다. 이바노프가 이끄는 러시아 테러단과 청화가 거느린 중국 테러단은 북한산 산록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북한산 교외에서 뭔가 비밀 작업을 하던 중에 서로 충돌한 거였다. 초반에 이바노프는 우수한 총기 덕분에 중국 테러단을 제압하는 듯했다. 러시아 테러단은 납치되어 청화의 연인이 된 T교수를 살해하고 주선영을 납치했다. 헌데 청화가 부유성 콜로이드를 공중에 살포하면서 반전이 일어났다. 이바노프의 실신한 한국계의 여제자인 똘마니치를 청화가 납치했다. 똘마니치에 잇달아 부유성 콜로이드로 러시아 테러단 20명이 실신하여 나뒹굴었다. 그러자 이들을 중국 테러단이 달려들어 모조리 사살해 버렸다. 잔여 40여 명의 러시아 테러단이 발악적으로 중국 테러단을 향해 발포할 때였다. 누군가 총소리를 들은 시민의 제보 탓이었으리라. 몇 대의 경찰차가 도착하는 와중에서 은밀히 도주하는 장은정을 캘스가 목격했다. 당시에 캘스가 거느린 테러단은 숲 속에 잠복하여 총격전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캘스가 장은정을 납치하고는 유유히 자취를 감췄다. 도주하던 러시아 테러 부대원의 하나가 캘스가 은정을 납치하던 장면을 지켜본 터였다. 이렇게 하여 이바노프는 캘스의 행위를 알게 된 터였다. 마침내 이바노프는 캘스의 테러단까지도 은밀히 제거하기로 작정했다. 러시아 유학생 셋은 이바노프 휘하의 테러단의 일원이다. 얘기를 엿들으며 현준은 서서히 긴장되는 느낌이다.
현준은 여전히 핸드폰을 귀에 댄 채 러시아인들의 말을 엿듣는다. 이따금씩 대화하는 흉내를 내느라고 뭐라고 중얼대기도 하면서. 점차로 귀에 들리는 내용이 예사롭지 않다고 여겨진다. 시간을 다투는 중요한 사건임에 틀림없다고 여겨진다. 점차 마음속으론 국정원이나 경찰에 신고해야겠다고 생각을 굳힌다. 신고하려면 보다 정확한 정보와 자료를 입수해야 할 판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더욱 신중한 자세로 러시아인들의 말을 엿듣기로 한다. 러시아인들의 말은 계속 현준의 귓전으로 밀려든다. 러시아인들의 영어 단어의 발음이 매끄럽지 못하여 현준의 귀에 이따금씩 거슬리기도 한다.
이바노프는 곧바로 첩보원을 시켜 캘스에게 납치된 은정의 행적을 알아보게 했다. 은정은 캘스에 의해 강제로 성형수술을 받게 되었다. 은정의 성형수술의 표본이 된 사람은 서울 D대의 여자 대학원생이었다. 납치된 여자는 E교수의 신뢰를 받는 대학원생이었다. 여자의 납치는 은정이 성형수술을 받기 하루 전에 이루어졌다. D대학에서 납치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려는 측면이었으리라. 캘스는 납치된 여자에게 강제로 E교수에게 전화를 하도록 했다. 심신의 피로로 인해 며칠간만 휴식을 취하겠다는 내용이었다. E교수는 흔쾌히 납치된 여자의 의견을 수용했다. E교수는 해외 테러단이 눈독을 들이는 중요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전자회로 부분의 설계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캘스는 납치된 대학원생의 얼굴로 변모된 은정을 E교수 밑으로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은정을 D대로 들여보내기에 앞서서 캘스는 납치된 여자의 언행을 은정에게 거듭하여 연습하도록 했다. 테러단의 예측대로 E교수는 은정을 납치된 여자로 오인하게 되었다.
한편. 첩보원으로부터 은정의 성형수술을 알게 된 이바노프는 무릎을 쳤다. 그도 즉시 기술 탈취의 대상인 서울의 어떤 대학을 선정했다. 그리고는 그 대학의 여자 대학원생을 납치했다. 이바노프가 여기에 고용한 사람들은 한국인 폭력배 셋이었다. 납치된 여자를 비밀 장소에서 만나서 인수하는 순간. 이바노프는 권총으로 한국인 폭력배 셋을 처치해 버렸다. 소위 완전 범죄를 노린 터였다. 그리고는 납치된 여자의 얼굴에 맞춰 선영의 얼굴에 성형수술을 했다. 은정이 D대학에 비밀스레 접근하여 E교수 밑을 드나들 무렵. 비슷한 시기에 선영도 어떤 대학의 유명한 교수 밑을 비밀스레 드나들기 시작했다. 헌데, 선영이 어느 대학을 비밀스레 나다니는지는 러시아의 테러 대원들도 알지 못했다. 이건 다름 아닌 이바노프의 강력한 보안 대책 때문이었다.
현준이 계속 러시아인들의 말을 청취하려고 할 때. 러시아인들이 몸을 일으키려는 기색이 느껴진다. 현준은 더욱 자세를 낮추면서 핸드폰을 바싹 귀에 갖다댄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행동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만약 그들 중의 누군가가 현준을 의심할지도 모를 일이리라. 만약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자칫 격투까지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현준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면서도 그들과는 시종 반대편을 바라본다. 점차 그들의 발자국이 현준 쪽으로 다가서는 느낌이 든다. 약간 긴장되는 마음이다. 긴장될지라도 일체 내색을 해서는 안 될 판이다. 현준은 상대가 무기를 쓸지도 모르리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그런 경우엔 상대의 거동을 몰라서는 개죽음당하기 십상이라고 여겨진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현준도 임기응변의 동작을 취하기로 한다.
“야, 정말 사람 혈압 올릴 거야? 내가 그만큼 얘기했으면 알아들어야지 네가 사람이냐, 응?”
핸드폰에다 대고 거짓으로 고함을 내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킨다.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는 체하다가 러시아인들의 기색을 살핀다. 러시아인들과 현준의 시선이 찰나 간에 허공에서 맞닥뜨려진다. 러시아인들은 현준이 내질렀던 말뜻을 짐작한 듯. 약간 미심쩍은 눈빛만 잠시 내보이더니 그들은 이내 건물 뒤편으로 사라진다.
현준도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에 젖는다. 현준은 선영을 지척에서는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선영이 성형수술을 하지 않았어도 몰라볼 입장이다. 하지만 어느 대학엔가 선영이 성형하여 침투하고 있다지 않은가? 현준에게는 참으로 무서운 현실이라 여겨진다. 현준은 실험실에 도착한 뒤에 생각을 정리해 본다. 러시아인들을 경찰서에 신고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한참 동안 골똘히 검토해 본다. 현준은 이 번만큼은 경찰에 신속히 신고하여 국가의 피해를 막아야겠다고 작정한다. 두 번 다시 소양호 석회동굴에서의 일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으리라 작정한다.
현준은 잠시 기억을 더듬는다. 올해인 2005년 2월 11일자로 일간지에 발표된 내용이다. 러시아인들과는 달리 합법적인 연구를 하는 단체에 대한 기억이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로저 피터슨 교수팀과 일본 이화학 연구소의 니시카와 신이치 교수팀에 한정된다. 이들 연구팀은 S대 W교수와 함께 줄기세포의 실용화 연구를 진행 중이다. 피터슨 교수팀은 줄기세포의 유전적인 이상 유무를 판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피터슨 교수팀은 W교수로부터 제공받은 줄기세포를 대상으로 유전자 결함 등의 부작용을 연구한다. 한편 니시카와 교수는 줄기세포로부터의 췌장과 신장으로의 분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종래에 니시카와 교수는 주로 신경 조직으로의 분화에 대한 연구를 해 왔다. 현준은 이들 합법적인 연구자들에겐 깊은 관심과 격려를 보낸다.
하지만, 불법 단체에 대해서는 언제나 피가 들끓는 심정이다. 불법 단체를 철저히 분쇄해야 하리라고 생각하는 현준이다. 우선 S대에 잠입한 러시아인들부터 신고해야겠다고 작정한다. 현준은 카메라 폰으로 몰래 촬영한 러시아인들의 모습을 훑어본다. 곧바로 현준은 대학 정문 주변의 사진관에 문의한다. 핸드폰으로 촬영된 영상을 사진으로 인화하는 데 얼마나 걸리느냐고. 1시간이면 충분하다는 대답이 들린다. 현준은 카세트 녹음기를 써서 핸드폰에 녹음된 내용을 고스란히 옮긴다. 테이프 1개면 충분한 분량이다. 그리고 난 뒤. 후배의 자전거를 잠시 빌려 사진관으로 내닫는다. 핸드폰을 맡긴 뒤에 한 시간 뒤에 찾기로 하고 실험실로 되돌아온다. 실험 일지를 충분히 정리한 뒤다. 시계를 보니 사진을 찾으러 가도 될 시간이다.
마침내 녹음테이프와 사진을 증거물로 국정원에 신고를 한다. 신고인 조서에 몇 가지 인적 사항을 기록하여 제출한 뒤에 국정원을 나선다. 국정원에선 즉시 K경찰서에 연락을 취해 수사를 의뢰한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S대의 러시아 유학인 셋도 이내 체포된다. 그 새, 현준도 2번씩이나 경찰서에 호출되었다. 당국에선 국가적인 중요성으로 인해 수사를 암암리에 진행하는 모양이다. 경찰에선 심자연(沁紫娟)으로 위장한 은정과 D대학 E교수도 은밀히 연행한 상태다. 경찰은 캘스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은정을 취조하는 중이다. 한편 이바노프의 행적을 알아내려고 러시아인 셋을 집중적으로 수사하고 있다. 현준이 알 수 있는 범위도 이 정도일 뿐. 수사가 어떤 방향으로 세부적으로 진행되는지는 알기 힘든 상태다. 캘스와 이바노프의 은신처를 찾으려는 듯. 수사가 진행되면서도 매스컴을 통한 일체의 발표가 없는 점이 특이할 정도다. 현준도 당국에 신고를 한 이상 경과를 지켜볼 따름이다.
어느새 신고를 한 지도 벌써 3주째다. 어느덧 12월 하순이 된 상태다. 당국에선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글자 그대로 은밀히 수사를 진행할 뿐인 듯하다. 현준에겐 진행된 수사의 결과가 꽤 중요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당국이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현준도 당국을 지켜볼 따름이다. 확실한 건 D대학 E교수의 기술은 유출되지 못하게 이미 보호된 상태라는 점이다.
12월 24일. 거리의 곳곳은 캐럴 송으로 물결친다. 대학의 연구원과 대학원생들도 대다수 시내로 휩쓸려 나간 상태다. 현준은 이른 아침부터 정오까지는 실험에 몰두했다. 점심식사를 한 뒤부터는 유전비록의 내용을 보완하는 중이다. 오후 4시 무렵. 은하가 현준의 실험실로 들어선다. 후배 대학원생들은 오전부터 자리를 비운 상태다. 심 교수도 지방에 모임이 있다면서 좀 전에 학교를 떠난 상태다. 넓은 4층짜리 실험 연구동 건물엔 현준과 은하 둘만 남겨진 상태다. 세상이 고요 속에 휩싸인 듯하다. 실험실을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은하가 말한다.
“오빠, 정말 대단해요. 이젠 심장을 제외하곤 5대 장기의 분화에 대한 연구가 끝났다면서요?”
현준이 응답한다. 가까스로 분화의 메커니즘만을 밝혔을 뿐. 아직도 해결할 과제는 많이 남은 상태라고 한다. 현준에겐 정말 혼신의 열정을 바친 시간들이라 여겨진다.
현준은 저물어 가는 2005년도를 되돌아본다. 지난 4월 1일자의 일간지엔 식물 줄기세포의 분화 과정의 소식이 발표되었다. ‘애기장대’라는 식물의 분화 과정에 관한 거였는데 동물 세포에도 유용한 정보가 제공된 터였다. 4월 30일자의 일간지엔 유전자 대량 분석 기술이 일제히 보도되었다. 안티센스(antisence)를 이용한 초고속 유전자 분석 시스템이 국내에서 개발된 거였다. 안티센스란 전령 RNA에 선택적으로 결합하여 유전정보의 흐름을 차단하는 물질이다. 새 기술은 기존의 선진국이 보유한 기술에 비하여 500배 이상으로 속도가 빠르다. 또한 지난 5월 20일에는 맞춤형 줄기세포의 기사가 일제히 보도되었다. 이에 뒤질세라 심 교수와 현준은 심장을 제외한 5대 장기의 분화 과정을 규명했다. 현준에겐 2004년 2월 이후부터 2005년까지는 줄기세포의 연구가 가속화된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현준은 은하를 바라보면서 지난날의 성과를 잠시 떠올려 보았다. 그러다가 은하의 맑은 눈빛에 시선이 이끌린다.
현준은 은하에게 평어를 쓰면서도 여전히 미안한 느낌이다. 은하를 대할 때마다 제주의 일이 떠올라 마음이 불편하다. 그런 현준의 마음을 불식시키려는 듯. 은하가 종이 봉지로부터 포도주 2병과 마른 안주류를 꺼낸다. 현준의 마음이 잠시 부담스러워진다. 실험실에서 음주는 절제해야 할 항목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차마 박절하게 은하의 행동을 제지하지는 못한다. 현준의 어색한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 은하가 응석을 부리듯 말한다. 포도주는 술이 아닌 음료수일 뿐이라고. 고작 포도주 2병인데 뭘 두려워하느냐고 말한다. 현준의 생각으로도 그 정도라면 괜찮겠다고 여겨진다.
실험대 위를 은하가 깨끗이 걸레질한 뒤. 넓은 흰 종이를 펴고 포도주와 안주류를 펼친다. 은하가 실험대를 임시 식탁으로 전환하는 사이. 현준은 출력물을 마저 수습하여 대형 호치키스로 철한다. 중간 점검을 하려고 유전비록의 모든 내용을 1시간 전부터 출력한 거였다. 그 출력 작업이 방금 종료된 상태다. 현준은 유전비록을 매주 한 번씩은 중간 점검하는 편이다. 점검할 때마다 그릇된 항목은 수정하고 보완 사항을 첨가하곤 한다. 현준이 출력물을 모아 정성껏 호치키스로 철한 뒤. 자신의 책상 위에 단정히 놓아둔다. 시간이 날 때마다 꼼꼼히 점검해 두려는 뜻에서다. 마침내 임시 식탁을 마련한 뒤에 은하가 현준에게 말한다.
“우리 포도주 한 잔씩 해요. 일도 좀 쉬어 가면서 해요. 그러다가 건강이라도 나빠진다면 어쩌실려구요?”
현준이 식탁으로 다가서며 응답한다. 은하가 포도주를 들고 오니 실험실 분위기가 운치 있게 변한 듯하다고. 임시로 마련된 정갈한 식탁을 보니 피로가 한결 풀리는 듯하다고 들려준다.
현준이 식탁 위의 술잔을 보는 찰나다. 문득 세포질 속의 조면 소포체의 영상이 떠오른다. 조면 소포체는 소포체의 곳곳에 리보솜을 매단 구조물이다. DNA의 유전정보를 전사한 전령 RNA는 핵공(核孔)을 통해 핵을 빠져 나온다. 전령 RNA가 조면 소포체에 이르게 되면 리보솜이 전령 RNA로 엉겨들게 된다. 이 때부터 고유한 단백질이 만들어지면서 세포 분열에 대비하게 된다. 세포가 분열하려면 분열 이후에 세포가 필요로 하는 단백질이 먼저 갖춰져야 하기 때문이다. 세포질의 유동성에 따라 조면 소포체도 미세한 유동성을 갖는다. 이런 유동성에 따라 전령 RNA가 소포체에 접근하게 된다. 그러다가 리보솜이 전령 RNA에 달라붙으면서부터 단백질의 합성이 시작된다. 식탁을 조면 소포체에 비유한다면 술잔은 리보솜에 비유된다고나 할까? 현준이 술잔을 바라보며 잠시 리보솜을 떠올린 직후다.
이윽고 현준은 은하와 마주앉는다. 술잔이 서너 차례 오간 뒤다. 평온한 마음으로 스며드는 여인의 향기는 매혹적인 듯. 현준은 마음이 더욱 포근해지며 은하의 맑은 눈으로 시선이 끌리곤 한다. 은하도 마음이 달뜨는 듯. 때때로 현준의 손을 쓰다듬으며 애교를 부린다. 그러면서 맞은편의 자리로부터 현준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다. 옆 자리로 은하가 옮겨 앉는 순간. 은하의 상체에서 향긋한 냄새가 현준에게로 밀려든다. 연하면서도 강한 여운으로 파고드는 향수 냄새. 그 향기와 더불어 은하가 현준의 손을 감싸 쥐며 입을 연다.
“유전비록의 전산 입력은 다 했어? 여기에 출력된 것은 어느 날짜까지 정리된 거야? 하도 일에 열심이기에 묻고 싶어.”
어느새 말투가 달라진 상태다. 존댓말이 아닌 평어로 전환된 거다. 너무 자연스러운 어투라 현준에게도 전혀 반감이 일지 않는다. 마치 이전부터 그래 온 듯한 느낌마저 든다. 잠시 현준의 의식계로 불안한 그늘이 드리워진다. 그러면서 현준은 생각에 잠긴다.
‘내가 은하를 범하면서부터 의남매 사이는 끝나 버린 건가? 이제 둘 다 평어를 쓰잖아? 이러다간 남들에게 애인 사이라고 오해받기 십상이겠군.’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현준이 은하에게 묻는다. 현준과 은하 사이엔 아직도 의남매 관계가 유효하냐고? 현준의 물음에 은하가 묘한 미소를 흘리며 응답한다.
“섹스를 나누는 남매가 어디 있니? 네가 날 일방적으로 가졌잖아? 그랬으면 당연히 책임져야 할 거 아냐? 왜 날 책임 못 지는데? 소연이 때문에 그래? 어디 말해 봐!”
현준은 우려하던 사태에 직면했음을 느낀다. 언젠가는 은하가 이런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리라고 예측했던 바다. 그런데 막상 당하고 나니 정신이 얼얼하다. 현준은 경황없는 중에 무의식적으로 말한다. 그 때 현준이 무릎을 꿇고 빌지 않았느냐고? 아직도 현준을 용서해 주지 못하겠느냐고 묻는다. 현준의 말을 듣는 순간. 은하는 무척 격분한 기세다. 곧바로 바르르 떠는 듯 은하가 현준을 몰아세운다.
“그냥 빌어서 될 일이야? 내 처녀성은 무엇으로 책임질 건데? 남의 몸을 망쳐 놓고 빈다고 끝나겠니?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어떻게 그냥 넘기려고 그래, 응?”
은하의 몸을 망가뜨린 주제에 무슨 말이 많으냐고 윽박지른다. 피해를 입혔으면서도 왜 곧바로 보상하지 않느냐고 채근한다. 그런데도 넉살 좋게 입만 놀리는 현준이 가증스럽다며 은하가 치를 떤다.
현준에겐 전신의 피가 식는 느낌이다. 과거를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은하와의 제주 여행의 시간은 삭제하고 싶은 현준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현준은 은하를 향해 말한다. 지난 과오에 대해 거듭 용서를 구하겠다고. 용서받지 못하면 은하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현준이 말한다. 현준이 은하에게 말한 직후다. 현준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으로 인해 얼굴이 달아오른다. 예상 못했던 굴욕감마저 들어 자칫 사정할 듯한 위기감마저 느낀다. 일순간 사타구니에 저릿저릿한 느낌이 휘몰린다. 살아가면서 두 번 다시는 그런 실수는 않겠다며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몰래 입술을 깨문다. 입술에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현준은 은하의 눈매를 그윽이 바라본다.
현준의 눈치를 슬쩍 살피던 은하는 당당하게 말한다.
“너무 떨지 마. 내가 너를 위계에 의한 강간범으로 고소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것만으로도 넌 내게 충분히 고마워해야 돼. 또한 소연과의 애인 관계를 포기하라고도 하지 않을게. 다만 내가 원하는 것에만 응해 주면 돼. 내가 너무 관대하지 않아? 널 사랑하기 때문이야, 알겠어?”
불안에 시달리던 현준의 마음이 생기를 되찾는다. 고소도 하지 않고 소연의 관계에도 개입하지 않겠다니! 얼마나 현준이 듣고픈 말이었던가? 그런 조건이라면 은하가 무슨 요구를 하더라도 현준은 기꺼이 감수하리라 작정한다. 잠시 현준의 눈치를 보더니 은하가 말을 잇는다.
“우선 유전비록의 출력물을 하루만 빌려 줘. 그리고 분당의 나의 오피스텔로 함께 가 줘. 지금 당장에 말이야. 이 정도야 충분히 들어주겠지?”
현준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유전비록은 국가 기밀에 속하는 문서다. 외부로 유출하는 게 아니라 대학원생끼리 연구의 자료로 삼으려는 게 아닌가? 그것도 같은 대학 소속의 대학원생들 간의 일이 아닌가? 현준에겐 유전비록에 관하여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학문의 선후배로서 그녀의 오피스텔로 못 갈 이유도 없다고 여긴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친 순간. 현준은 실험실을 금세 정리하고는 출력물을 가방에 챙겨 넣는다. 그리고는 은하의 그랜저의 조수석에 실려 학교의 정문을 벗어난다.
조수석에 몸을 실은 순간부터다. 현준은 몸뚱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듯한 착각에 잠긴다. 그만큼 마음이 공허한 현준이다. 은하와 함께 있어도 전혀 즐겁지가 않다. 괜스레 그녀의 눈치만 살피게 되는 듯하여 현준의 자존심마저 꿈틀댄다. 극도로 마음이 뒤엉킨 상태라 현실과 환상이 구별이 안 될 정도다. 그런 와중에서 은하는 현준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게 뭘 뜻하는지 생각할수록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단순한 회유책인지 아니면 또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건지? 생각할수록 은은한 불안감마저 느끼게 되는 현준이다.
1시간쯤 지났을 무렵. 은하의 그랜저는 성남시 분당구의 수내동에 들어선다. 이윽고 분당구청을 지나 H오피스텔 주차장에 차가 멎는다. 은하에 이끌려 현준은 5동 316호에 들어선다. 37평의 공간이 호사스럽게 치장되어 있다. 대다수의 전자제품과 가구류가 거의 외제다. 진열창마다 크리스털 유리로 장식된 정경이 예사롭지 않다. 하다못해 바닥에 깔린 카펫만 해도 천만 원대를 넘기는 이란 제품이다. 현준은 실내 장식물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일개 대학원생이 그랜저와 37평의 오피스텔을 소유하다니? 게다가 실내 장식물의 대다수는 값비싼 외제이지 않은가? 실내 장식물의 비용만 해도 억대가 넘어설 지경이 아닌가? 대관절 은하의 정체가 뭘까? 어릴 때 부모를 잃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런 고가의 시설물을 스스로 번 돈으로 장만했을까? 절대로 그럴 수가 없으리라. 그렇다면 은하의 진정한 정체는 뭘까?’
현준은 찰나 간에 치솟는 의아심을 떨치기 어려운 느낌이다. 현준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다. 은하가 식탁에 30년 숙성의 발렌타인 양주를 펼치며 말한다. 가까이 와서 앉으라며 이브에 긴장을 풀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현준도 정신적인 긴장을 해소하는 건 좋은 일이리라 여기며 흔쾌히 응답한다. 쌓인 스트레스를 말끔히 풀어 버리자고. 그래서 새롭게 비상하는 것도 좋을 거라고 대답한다. 말을 하면서도 현준은 가슴이 저려듦을 느낀다. 30년 숙성의 양주라? 제주도에서 실수했던 원인도 술 때문이라 여기는 현준이다. 게다가 도수도 높은 양주라 하지 않는가? 현준은 어떤 경우에서건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될 일이라 여긴다. 그러면서 은하가 양주를 꺼내드는 의중을 헤아려 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피는 게 없다. 현준이 슬쩍 눈앞의 식탁을 둘러본다.
금세 식탁 위에는 싱싱한 우럭회와 고추장이 펼쳐진다. 은하가 주방용 선반에서 양주잔을 꺼내 오느라고 잠시 뜸을 들인다. 이윽고 식탁을 사이에 두고 둘은 의자에 마주 올라앉는다. 현준이 둘러보기에 둘이 먹을 양으로는 횟감이 너무 많은 느낌이다. 평소에도 은하가 회를 좋아하는 모양이라고 여길 뿐. 현준은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이 때 은하가 미소를 머금으며 술병을 기울인다. 그녀가 주인이니까 현준에게 먼저 술잔을 받으라고 권한다. 그러면서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현준의 눈을 응시한다. 자칫하면 은하의 숨결 속으로 빨려들 지경이다.
현준이 답례로 술병을 받아 은하의 잔에 술을 따른다. 은하가 더욱 생긋거리며 술잔을 받는다. 향긋한 냄새가 은은히 실내에 깔린다. 현준이 5잔째의 술잔을 입에 댈 때부터다. 뭔가 느낌이 묘하다고 여겨진다. 다른 날과는 완연히 다른 느낌이다. 예상치 않게 현준의 얼굴이 달아오르며 숨결이 점차 가빠진다. 그러면서 걷잡을 수 없는 성적 충동이 치솟는다. 현준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이다. 현준은 고개를 격렬히 흔들면서 마음을 추슬러 보려고 애를 쓴다.
일순 강렬한 열기가 훅하고 머릿속으로 치솟는다. 현준은 불현듯 위기 의식을 느끼며 부르르 몸을 떤다. 곧바로 베란다로 나가 맑은 공기를 들이 마쉰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순간부터 얼굴이 급격히 달아오른다. 얼마나 아찔한지 숨조차 못 쉴 정도다. 가까스로 거실로 들어섰지만 화끈거리는 열기는 더욱 심해지는 듯하다. 얼굴에 열기가 치밀어 오르면서부터 성기마저도 발기되어 끄떡인다. 당혹한 상태라 현준이 주춤거릴 때다.
“현준 씨, 겨우 5잔째에 왜 그리 비실거려? 빨리 이리 와.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 했잖아?”
현준에게 다가선 은하를 보는 순간. 현준은 기겁할 지경이다. 어느새 갈아입었을까? 은하는 속살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얄따란 잠옷 차림새다. 은하의 잠옷을 바라본 순간. 현준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다.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느낌에 휩싸인다. 어떻게 해서든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현준이 허둥댄다. 하지만 그럴수록 현준의 의식으로는 터질 듯한 성욕이 마구 차오른다. 그러면서도 현준은 머리를 뒤흔들며 정신을 수습해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거실에서 버둥대는 현준을 바라보는 은하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서린다. 그러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중국산 최음제의 효과는 과연 대단하구나. 소량을 술잔에 뿌렸는데도 저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는데? 녀석이 허둥거릴 동안에 연락을 취해야지.’
은하가 화장실로 살며시 들어가더니 핸드폰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누군가가 즉시 알았다며 잠시 후에 들르겠다고 대답한다. 현준은 욕정을 이겨내려고 버둥대다가 마침내 거실 바닥으로 나뒹군다. 이제 현준의 얼굴은 완전히 불타는 상태다. 시선마저도 방향을 못 잡아 어지럽기 그지없다. 현준이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마구 뒤흔들 때다. 은하의 핸드폰에 메시지음이 들리는 순간. 은하가 유전비록을 싼 보자기를 오피스텔 문 밖으로 내민다. 그러자 기다리던 사내가 얼른 보자기를 받아들고는 은하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