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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황색 갈매기 날다 손 정 모
11. 갈등하는 여심
현준은 점차 격정에 시달린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위험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절박감이 느껴진다. 현준은 필사적으로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럴수록 묘한 욕정만 불덩이처럼 치솟는다. 이제 현준의 시야는 온통 흐릿해져 버린 상태다. 좀 전에 은하가 유전비록을 문 밖으로 내보낸 줄도 모르는 현준이다. 오로지 느껴지는 건 구토할 듯한 현기증일 뿐. 현준의 버둥대는 모습을 은하가 한동안 즐기듯 바라본다. 그러다가 현준의 팬티까지 벗겨 버리고는 은하도 자신의 잠옷을 벗어 던진다. 은하가 침대에 들기 전에 흘깃 벽시계를 본다. 밤 9시를 슬쩍 넘기는 시점이다. 억눌렀던 성욕을 배출하러 은하가 현준의 알몸을 덮쳐누른다. 이윽고 알몸의 남녀가 침대 위에서 뒤엉키기 시작한다.
이 무렵의 서울 D대 화학과 물리화학 연구실. 심자연으로 위장한 은정이 E교수로부터 전자회로에 대한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학교에서 집이 가까운 E교수는 평소에도 밤 10시가 되어야 귀가한다. E교수의 제자들로는 박사과정의 사내인 배중수(裴重修)와 석사과정의 여학생인 자연이 있다. E교수가 지닌 대부분의 전자회로의 지식은 이미 중수가 배운 상태다. 자연으로 위장한 은정의 역할은 중수로부터 전자회로의 지식을 빼내는 거다. 성형수술을 받기에 앞서 테러 단원들에게 윤간을 당한 은정이다. 은정은 윤간을 당하면서부터 정상인의 정신을 상실한 상태다. 폭력과 협박에 시달려 마지못해 중수로부터 기술을 빼내려는 터다. 문득 은정에게 지난밤의 일이 떠오른다.
지난밤 11시 무렵.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은정이 원룸에 도착했을 때다. 한 달 전에 캘스가 은정을 위해 잡아준 원룸이다. 막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캘스가 원룸으로 들어섰다. 50대 초반의 정력이 강한 거구의 사내다. 은정에게 원룸을 잡아준 뒤론 수시로 은정과 색정을 나누는 캘스다. 혁대를 쥔 캘스가 다가서며 알몸의 은정을 향해 물었다.
“E교수와 중수의 연구 실적물은 어느 정도 빼 왔어? 말을 잘 안 해 주면 네 몸뚱이로 그들을 녹이란 말이야. 녹여서 제 흥에 겨워 기밀을 토하게 만들라고 했잖아? 그 말을 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지지부진이야? 그냥 말로 해선 못 따르겠다는 거지? 내가 너를 조금 손을 봐 줘야겠어. 아프더라도 너무 크게 소리 지르면 안 돼. 화가 치밀면 네 목을 꺾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말이 떨어지자마자 캘스는 알몸 상태의 은정의 등짝과 엉덩이를 혁대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아얏, 아야앗!’
자신도 몰래 은정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 은정의 등짝을 향해 혁대가 매섭게 날아들었다. 금세 은정의 등줄기에 벌건 자국이 생기기 시작했다. 눈물과 콧물이 은정의 얼굴을 금세 가려 버렸다. 어서 빌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은정에게 일었다. 은정이 알몸으로 캘스 앞에 무릎을 꿇고는 허둥대며 말했다. 무조건 내일은 꼭 해내겠다고 다급하게 부르짖었다.
그제야 캘스는 혁대를 거실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그러면서 은정을 향해 이죽거리며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들었어야지. 왜 매를 맞아야만 통해? 너희 민족의 근성이 원래 그런 거야?”
캘스는 지껄여대면서도 침대에 걸터앉아 발바닥으로 은정의 사타구니를 문질러댔다. 은정은 소리죽여 흐느끼면서 눈물을 마구 쏟았다. 그 순간엔 완전히 짐승이 된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반항의 감정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전에 반항하려다가 너무나 심하게 혼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자칫했으면 울대가 함몰되어 즉사할 뻔했다. 그런 뒤로 은정은 조금치도 반항의 마음을 갖지 못했다. 그뿐이랴? 그 날 이후론 캘스의 부하들이 은정을 미행하는 모양이었다. 미행당하는 생활이 시작되면서 은정의 사생활은 사라진 셈이다. 한 번도 미행자를 목격한 적은 없었지만 미행당하는 느낌이 은정을 옥죈다. 그런 중에서도 캘스의 테러단이 원하기만 하면 다리를 벌려 주어야만 하는 신세다. 반면에 E교수와 중수의 앞에만 서면 청정한 선비의 기품에 압도당하는 심정이다. 그런 청정한 사내들을 유혹해야만 하다니? 은정은 그 생각만 떠올려도 머리에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하다. 하지만 캘스의 폭력을 떠올리기만 하면 가슴이 떨린다. 원룸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쉴 새 없이 은정을 구슬리던 캘스였다. 소요 경비야 캘스가 충분히 대어준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E교수와 중수에게 술도 사고 아양도 좀 떨어 보라고. 아양 떠는 여자 싫다는 사내를 봤느냐고? 아마 절대로 없을 거라고. 그러니 제발 내일은 어떤 놈이건 꼭 유혹해야 한다고. 자신이 없으면 당장 유서를 쓰라고 고함쳤다. 언성을 높였다가도 슬그머니 눙치기를 잘 하는 캘스였다. 그런 캘스의 눈빛은 흡사 핏발선 늑대의 것과 흡사했다.
자정 무렵에 캘스가 떠나가고 적막감에 휩싸인 원룸. 은정은 삭막한 현실에 발광할 지경이었다. 어쨌든 다음 날엔 어떤 변신이라도 시도해야만 했다. 한동안 밤의 적막에 마음을 추스르던 은정이었다. 몇 번인가 입술을 깊게 깨물고는 은정이 잠자리에 들었다.
E교수가 집으로 떠나간 밤 10시경. 중수는 약간 졸린 듯한 표정이다. 은정은 찰나 간에 판단한다. 졸음은 사람의 판단 기능을 마비시키기 십상이라고. 캘스의 주문대로 중수를 유혹하기에 적절한 기회라고 여겨진다. 단아한 품격의 중수를 어떻게 유혹해야 할지? 은정은 안구를 좌우로 움직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일단은 부딪치고 볼 일이라 작정한다. 은정은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며 중수를 향해 입을 연다.
“형, 나가는 길에 맥주 한 잔씩만 해요.”
대학에선 남녀간에도 선배를 ‘형’이란 칭호로 곧잘 부른다. 의외의 말을 들은 듯. 중수가 은정을 향해 말한다.
“네가 맥주를 마실 줄도 알아? 내가 알기로 지금까지는 한 번도 마신 적이 없잖아? 좋아, 오늘은 내가 한 잔 살게. 딱 한 잔씩만 하고 일어서자구.”
중수와 함께 교문을 빠져 나가면서 은정은 미니스커트의 주머니를 더듬는다. 그 속에는 종이 약봉지가 들어있다. 지난밤에 캘스가 준 가루약이다. 미국에서 최근에 개발한 강력한 최음제라고 한다. 지난밤에 캘스가 은정의 코에 살짝 냄새를 맡도록 했다. 그러자마자 은정은 곧바로 오르가즘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캘스가 몸을 밀치는 데에도 찰거머리처럼 캘스에게 달라붙었던 은정이었다. 최음제를 생각하면서 은정은 살며시 얼굴을 붉힌다.
교문을 나서서 20분쯤 걸어간 거리에 시장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둘은 ‘호프 킬리만자로’라는 상호의 맥주 집으로 들어선다. 500cc 용량의 컵에 생맥주를 신청해 마주 앉는다. 중수가 쾌활한 음색으로 말한다. 모처럼 바깥에서 단둘이 앉아 보기도 처음이라고. 여태껏 실험한다고 너무 힘들지 않았느냐고 중수가 묻는다.
“아니에요. 줄곧 형이 많이 도와주었잖아요? 항상 도움만 받는 입장이어서 미안한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근데 이렇게 마주 앉아 형을 보니 ‘꽃 미남’ 같아요.”
농담이 많이 늘었다고 중수가 껄껄대며 대꾸한다. 중수가 무슨 꽃 미남이냐고? 진짜 꽃 미남들이 들으면 열 받지 않겠느냐고 짐짓 너스레를 떤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둘은 어느새 4잔째의 500cc 컵을 비운다. 그러다 보니 둘은 취기로 얼굴이 불콰하다. 은정이 중수의 팔짱을 끼며 인근의 노래방에 가자고 유혹한다. 이윽고 둘은 노래방에 들어선다. 계산을 끝내고 음료수 캔을 받아들고는 출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방으로 들어선다. 12호 실이다. 중수가 책자를 들고 곡목을 고를 무렵. 은정이 잠시 볼일이 있다며 12호 실을 나온다. 카운터에 가서 캔 맥주 4개를 추가로 주문한다. 그리고는 화장실에 들러 잠시 동정을 살핀다. 마침 아무도 없다. 은정은 얼른 가루약을 꺼내 자신의 목 주변의 티에 슬쩍슬쩍 뿌려댄다. 그런 뒤에 곧장 12호 실로 들어선다. 도어를 닫자마자 노래 부르는 중수의 곁으로 다가간다. 가능한 한 중수와의 거리를 바짝 좁히며 손뼉을 쳐댄다. 중수가 2절을 부르고 마이크를 은정에게 넘기려는 순간. 중수는 은정의 몸에서 향긋한 냄새를 맡는다. 그냥 향수려니 여기고 마이크를 은정에게 건넨다. 은정이 마이크를 받아들고는 ‘카사블랑카’를 부른다. 은정은 노래를 부르면서도 연신 중수의 곁에서 애교를 떤다. 은정의 동작이 율동적일 때마다 최음제가 중수의 콧속으로 빨려든다. 은정이 막 2절을 부르기 시작할 무렵. 중수가 심하게 재채기를 해댄다. 그러면서 자꾸만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최음제를 뿌린 뒤부터 중수의 행동을 주시하던 은정이다. 마침내 중수에게 증상이 나타날 시기임을 알아차린 거다. 이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순간. 은정은 마이크를 든 채 중수에게 다가간다. 그러면서 중수의 목을 껴안으며 입을 연다. 현준의 컨디션이 안 좋으냐고? 은정이 중수의 어깨를 안마해도 괜찮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어느새 은정의 손길이 중수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더듬는다. 은정의 말에 중수가 고개를 흔들면서도 속삭이듯 중얼댄다.
“이상한 일이군. 네가 자꾸만 여자로 느껴지려고 해.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은정은 중수의 표정을 모니터의 불빛을 통해 흘깃 바라본다. 중수의 얼굴이 복사꽃처럼 달아올라 열기가 화끈 느껴질 정도다. 은정이 마이크의 스위치를 내리고는 메들리 곡을 찾아 몇 곡을 입력한다. 금세 노래가 순서대로 흘러나온다. 그리고는 욕정을 참아내려 쩔쩔 매는 중수의 사타구니를 슬쩍 더듬어본다. 성기가 찌를 듯이 꼿꼿하다. 때가 왔다고 여기며 중수의 등에 은정이 젖가슴을 바짝 밀착시킨다. 그러면서 중수의 옆에 나란히 앉은 채 다리를 중수의 무릎에 걸친다. 미니스커트 차림의 은정의 핑크빛 팬티가 중수에게 드러난다. 최대한 참아 보려고 노력한 중수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일까? 은정이 자신의 등에 젖가슴을 문지르며 다리까지 걸치지 않는가? 아마도 은정의 취기 때문이리라 여기는 중수다. 취한 상태의 은정을 끝까지 보호해야겠다고 중수는 다짐한다. 고운 얼굴, 아름다운 자태의 여인인 후배. 그녀를 끝까지 보호해야 할 의무가 중수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중수는 12호 실을 벗어나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중수가 은정을 바깥으로 데려나가려는 순간. 은정은 심한 절망감에 휩싸인다. 은정을 가까스로 그녀의 원룸에 들이민 뒤에 중수는 곧장 되돌아 나간다.
중수가 떠난 지 한참이 지나서야 은정은 거실에 주저앉는다. 은정의 얼굴에 눈물이 마구 흘러내린다. 강력한 최음제마저 거뜬히 이겨내는 중수라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는 일이다. 캘스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를 일이다. 은정은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살해당하지 않으려면 상대를 죽여야만 할 상황이다. 번민에서 벗어나는 길이란? 번민이 격심해지면서 서서히 죽음을 떠올리게 되는 은정이다. 죽음에 생각이 이르자 은정의 전신에서 피가 식는 느낌이다. 위기에 몰렸을 때의 대처 방법이란? 세상의 원수들을 사살해 버리거나 자신도 원수들과 함께 죽는 길이리라. 은정은 펼친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입술을 깨문다. 이젠 떠밀릴 대로 떠밀려 벼랑 앞에 선 심정이다. 정조를 유린당하면서부터 정신이 망가진 자신이 아닌가? 은정은 단순한 자살로 끝내기에는 너무나 억울한 삶이라 여긴다. 은정은 불현듯 침대 밑의 상자를 떠올린다.
은정은 비장한 각오로 침대 밑의 상자를 꺼낸다. 상자를 풀고는 몸체가 반들거리는 권총을 꺼내 든다. 언젠가 세상을 정리할 때 쓰기로 마음먹고 준비해 둔 것이다. 권총을 품속에 고이 갈무리한다. 그리고는 상자 속의 편지를 펼쳐 든다. 은정의 눈길이 편지의 활자를 더듬는다. 편지는 죽은 탐슨이 무청화에게 보낸 것이다. 청화는 은정을 자신의 제자로 거둘 마음을 품었다. 은정의 마음을 구슬리기 위해 탐슨의 편지까지 은정에게 건네준 거였다.
편지의 내용에는 복잡한 사연이 실려 있다. 편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은정이 읽어보는 중요한 문서다. 거기에는 은정의 출생에 관한 비밀이 적혀 있다. 그걸 처음 들여다보는 날. 은정은 하염없는 울음을 터트렸다. 울음이 없이는 편지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23년 전인 1982년 4월 13일. 그 날은 언니인 장은정과 동생인 장선영의 공동의 생일이다. 장은정과 장선영은 제주의 천제연 계곡의 마을에서 출생한 쌍둥이 자매다. 자매가 3살이 되던 해. 부모는 해난 사고로 숨졌다. 자매를 잠시 이웃에 맡겨 두고 소형 동력선을 몰고 나갔다가 전복된 거였다. 일본 해상으로 스쳐가던 폭풍에 휘말린 거였다. 부모 이외에는 일체의 연고가 없던 자매들이었다. 이웃에서는 사회 복지 센터로 자매를 보냈다. 은정은 서울의 어떤 재력가가 입양했다. 선영은 미국인 부부에 의해 입양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선영은 미국으로 입양되면서 샌드럴 채플린(Sandral Chafline)이라는 이름으로 고쳐졌다. 선영을 입양한 미국인 부부는 탐슨 박사의 어린 후배들이다. 선영이 미국의 대학원에서 공부하다가 외국인 교수로 강의를 하던 청화를 만나게 되었다. 청화를 만난 뒤부터 선영은 청화에게서 학문적인 지도를 많이 받았다. 당시에 청화는 중국 북경대학의 교수로 2년간 객원교수(客員敎授)로 머물던 중이었다. 장선영의 이름을 주선영으로 고친 사람은 청화다. 청화는 선영의 성씨를 바꾸면서까지 자신의 수제자로 삼고자 한 거다. 여기까지가 편지에 실린 내용으로 은정이 틈틈이 읽는 내용이다. 은정은 생각에 잠긴다.
‘어떻게 하면 동생인 선영을 만날 수 있을까? 만나서 회포를 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대전 학술 회의장에서 실종된 주선영을 떠올린다.
‘혹시 선영이 아직도 춘천 F대에 비밀스레 나다니는 건 아닐까? 당장 춘천 F대로 달려가서 사실을 확인해 봐야겠어.’
은정은 날이 밝는 대로 춘천으로 달려가려고 작정한다. 일단 마음을 정하자 소리 없이 잠자리에 몸을 눕힌다. 하지만, 쉽사리 잠들 수 없는 심정이라 몸을 뒤챈다. 만약 변고만 없었다면 교수(敎授)를 꿈꾸며 살아갔으리라. 그런데 왜 느닷없이 봉변을 당하여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었는지? 어찌 꿈에서조차 잊겠는가? 캘스 일당에게 당한 능욕의 통한을. 능욕을 당하면서부터 학문 연구의 꿈을 상실해 버린 은정이다. 게다가 강제로 시행된 성형 수술로 얼굴마저 바뀌지 않았는가? 이제 꿈이라곤 송두리째 상실한 자신이다. 그녀에겐 삶의 의미 자체가 완전히 소진된 상태다. 어쩌다가 횡액을 당한 건지? 생각할수록 비감스러울 뿐이다. 눈시울 가득 눈물을 글썽이며 어깨를 들먹인다. 그러면서 거듭 생각에 잠긴다. 절대로 캘스 일당을 살려둘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입술을 깨문다. 흔적 없이 차례차례 암살해 버리겠다고 마음을 굳힌다. 일당을 제거한 뒤엔 은정 자신도 자살하리라 작정한다. 결단을 내린 은정의 눈엔 광기마저 일렁이는 듯하다. 새어 나오려는 울음소리를 이빨을 악물며 억누르는 은정이다. 너무나 기력이 빠진 탓일까? 어느새 고른 숨소리를 내며 은정이 잠들었다. 그녀의 베갯잇에는 흘러내린 눈물로 촉촉이 젖어 있다.
은정이 잠든 새벽. 은하로 위장된 선영은 현준의 전신을 애무해댄다. 그런데도 식물인간이나 된 듯. 현준은 의식 불명인 상태다. 최음제와 알코올의 상호작용으로 거의 의식을 잃어버린 듯하다. 선영은 얼른 현준의 배를 왼손으로 내리누른 채 기력의 강도를 높인다. 기력을 받자마자 현준은 비명을 내지르며 침대 바닥을 나뒹군다. 그러면서도 현준은 위기 상황임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고통에 버둥거리면서도 두 손에 힘을 모은다. 힘을 모으는 중에서도 강력히 어깨로 떠밀리는 전기 충격에 의식을 잃을 정도다. 현준이 무인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떠올린 순간. 그는 누운 채 두 손으로 배에 걸터앉은 선영의 두 발목을 잡는 순간. 그의 양 다리를 신속히 오므리면서 배를 위로 불쑥 튕겨 버린다. 그러자 선영이 고목 등걸처럼 침대에서 방바닥으로 날아 떨어진다. 신속히 일어선 현준이 곧바로 선영의 오른팔을 그녀의 등 뒤로 비틀어 쥔다. 조금이라도 반항할 기색이 보이면 팔을 비틀어 버릴 참이다. 비튼 팔에 힘을 가하며 현준이 선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여겼어. 너의 정체가 도대체 뭐냐?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팔을 그대로 분질러 버릴 거야. 그래도 말 못 해?”
말을 끝내면서도 팔에 한껏 힘을 가한다. 그러자 은하가 팔 좀 풀어 주고 얘기하자고 한다. 현준은 싸늘히 대꾸한다.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은하가 기공의 수련자인 줄을 여태껏 몰랐다고 현준이 말한다. 그러면서 엉뚱한 수작하면 팔을 분질러 버리겠다고 윽박지른다. 점차 은하의 팔에 현준의 힘이 세게 실린다. 그러자 몹시 고통스러운 듯. 선영이 진저리를 치며 다급히 말한다. 그렇다면 힘의 강도만 조금 줄여 달라고. 죄다 털어놓겠다고 사정을 한다.
현준은 더욱 긴장하며 약간만 힘을 푼다. 이 때 문득 S대에 잠입했던 러시아인들의 말을 떠올린다. 이바노프가 주선영을 성형 수술시켜 어느 대학으로 비밀스레 들여보냈다는 말을. 그러자 갑작스레 팔에 힘을 왈칵 가하며 윽박지른다.
“네가 바로 주선영이지? 알고 묻는 거니까 시침 떼려 하지 마! 맞아, 안 맞아?”
말을 마칠 무렵에 왈칵 강한 힘을 쏟는다. 선영의 팔이 심하게 비틀리는 느낌이 현준에게 전해진다. 바로 그 순간. 선영이 비명을 질러대며 현준의 말이 맞다고 실토한다. 그러면서 죄다 말하겠으니 제발 움켜쥔 현준의 팔 힘을 좀 빼달라고 하소연한다.
예상했던 대로 선영은 이바노프가 은하로 위장시켜 성형 수술시킨 여인임이 밝혀진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유전비록을 떠올린다. 보통 문제가 아님을 느낀다. 첩자인 선영을 은하로 생각하여 유전비록을 빌려준 자신이 아닌가? 당장 유전비록을 회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현준은 은하에게 유전비록을 당장 내놓으라고 고함친다. 독촉하는 현준의 눈빛에 살기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당장의 응답이 없자 이내 현준의 손에 힘이 실린다. 비명을 질러대며 선영이 실토한다. 유전비록은 새벽이긴 하지만 공항을 향해 차량으로 이동 중일 거라고. 현준의 전신에서 혈관이 죄다 파열되는 느낌이다. 중대한 국가 기밀이 유출된 상황이 아닌가? 일시에 현준의 전신으로 오한이 이는 듯하다. 심장 박동이 멈출 듯 경직된 현준은 핸드폰을 꺼낸다.
현준은 더 이상 꾸물거릴 여유가 없다고 판단한다. 선영을 왈칵 앞으로 밀쳐 버리고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를 한다. 공항을 폐쇄시켜 달라고. 중요한 국가기밀이 유출되기 직전이라면서 긴박한 사태임을 일깨운다. 신고를 끝내고서야 현준은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는다. 이 때 선영도 옷을 말끔히 차려 입고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잠시 후에 경찰관 넷이 원룸으로 들이닥친다. 선영에게 수색 영장을 내보이며 공항과 항구는 이미 봉쇄된 상태라고 알려준다. 그리고는 면밀히 가택 수색을 한다. 몇 차례나 뒤져 보았지만 실내에는 유전비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선영과 현준도 경찰차에 실려 경찰서로 이동한다.
경찰서에 도착한 지 채 한 시간도 못 되었을 때다. 경찰서로 전화가 걸려오고 경찰관이 전화를 받는다. 공항로를 통과하는 차량을 불심검문(不審檢問)하다가 유전비록을 지닌 일행을 검거했다고 한다. 정지 신호를 보냈는데도 도주하는 것을 차바퀴에 총격을 가하여 정차시켰다고 한다. 체포된 도주범은 3명이었다고 밝힌다. 이 모든 게 현준에겐 비현상계의 일로 여겨질 정도다. 하마터면 유출되고 말 뻔했던 유전비록이 아닌가? 만약에 유전비록이 해외로 유출되었다면? 그 후유증을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릴 정도다. 유전비록이 도중에 회수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대자연의 배려라 여겨진다. 연행된 도주범으로부터 현준이 유전비록을 회수하려 했지만 경찰로부터 제지를 받는다. 수사가 종료될 때까지는 근거물로 보관해야 한다는 경찰의 설명이다. 현준은 풀이 죽은 채 신림동으로 향한다.
현준이 경찰에 신고한 지 3주째 되는 날이다. 벌써 해를 넘겨 2006년 1월 중순이 된 상태다. 심야에 텔레비전을 본다고 보는 순간. 충격적인 보도에 현준은 바싹 긴장한다. 현준의 신고를 받고서부터 경찰은 집요한 수사를 벌인 거다. 현준은 긴장한 표정으로 수사 상황에 귀를 기울일 따름이다. 현준이 경찰에 신고한 그 날. 현준이 신림동으로 돌아온 뒤다. 그 이튿날 오전에 경찰은 선영을 일시적으로 귀가시킨다. 증거도 확보되었고 선영의 주거도 확실하며 공항도 폐쇄되었기에 도주의 우려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헌데 선영의 귀가 이후부터 문제가 발생된 거였다. 귀가한 그 날 선영은 종적을 감추었다. 경찰에선 2명의 형사에게 선영을 미행시켰다. 헌데도 선영은 교묘히 미행하는 형사를 따돌린 터였다. 그 후 선영의 행적은 묘연하기만 했다. 그랬는데 은정이 춘천의 F대학에 가서 선영의 행방을 묻는 일이 생겼다. 현준의 친구인 F대학의 혁진은 은정의 행색이 수상하여 은정에게 접근했다. 수상한 점을 포착한 혁진은 은밀히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에선 선영을 찾기 위해 은정을 미행하기만 할 뿐. 직접적으로 은정에게 얼굴을 드러내진 않았다.
은정이 귀가하려고 정문을 나설 때였다. 줄곧 은정을 미행하던 선영이 잠시 얘기를 나누자며 은정에게 접근했다. 은정을 만나는 순간. 선영은 택시를 불러 간단히 경찰의 미행을 따돌려 버린다. 택시에 내린 뒤에도 신속히 은정과 함께 골목길로 위치를 옮겨 버린다. 둘은 주점에 들러 음식과 술을 주문하여 마주 앉았다. 천천히 선영이 은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전에 석회 동굴에 있을 때 선영은 은정의 혈액으로 유전자 검사를 실시했다. 춘천 F대학에 설치된 최신 기계에 의존한 검사였다. DNA 제한 효소를 혈액에 넣고 전기영동을 하면 분자량의 순서대로 유전자가 분류되는 터였다. 이걸 유전자 지문이라고 하는데 은정과 선영의 것이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다. 즉, 둘은 쌍둥이 자매임이 확연히 드러난 터였다. 그랬음에도 내색할 수 없었던 건 주변의 여건 때문이었다. 청화가 눈을 부라리고 선영을 감시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때부터 선영은 은정을 가혹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선영의 얘기를 듣던 은정은 선영을 끌고 주점의 밀실로 향했다. 얼굴은 완전히 달라졌어도 서로가 자매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밀실로 향하던 복도에서 둘은 감격에 찬 포옹을 했다. 밀실에서 본격적인 술잔을 들며 자매는 지난날의 애달픈 사연을 얘기하며 울먹였다. 그러다가 은정이 선영을 향해 말했다.
“불쌍한 계집애 같으니라구. 어쩌다가 너와 난 이 모양이 되었지? 자신의 얼굴을 상실한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죽은 목숨이야. 나는 캘스의 테러단원들에게 유린되어 완전히 창녀가 된 신세야. 그런 처지에서도 D대학에 잠입하여 기밀을 훔쳐 내야 하는 기구한 신세야. 이렇게 살아서 무슨 미래가 있겠어? 나는 완전히 절망해 버린 상태야. 너는 좀 어때?”
은정의 손을 맞잡은 채 한참 눈물을 글썽이던 선영이 말했다.
“나도 언니와 다를 바가 없어. 이미 내 얼굴을 상실해 버렸는걸. 이바노프의 제안을 안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었어. 비록 금전적인 대가는 받는다고 받았지만. 우리나라에 태어난 우리가 어쩌다가 기술 매국노가 돼야 하냐구? 나도 이제 언니를 만나 봤으니 아무런 원이 없어.”
둘은 얘기를 나누다가 의문점을 느꼈다. 둘이 쌍둥이였음을 청화가 선영한테만 왜 알려주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청화가 은정에게 탐슨의 편지를 공개한 시점도 의문이었다. 왜 대전 학술 행사 직전에야 공개했는지도 궁금했다. 그러다가 공교롭게도 대전에서 자매가 동시에 납치되지 않았던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의문점은 증폭되었지만 이미 되돌리지 못하는 과거의 일임에랴! 둘이 웬 만큼 대화를 나눈 뒤다. 둘은 사흘 뒤에 강화의 석모도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 때까지 정리할 것은 다 정리하자고 약속한 터였다.
사흘 뒤의 석모도 서쪽 해변. 오후 6시 정각에 둘은 해변에서 만났다. 저녁놀이 공작의 깃털처럼 현란하게 흩날리는 석양 무렵이었다. 자줏빛에 선홍색과 보라색이 켜켜이 뒤엉켜 왈칵 설움을 자아낼 듯한 분위기였다. 농염한 저녁놀이 해풍에 휩쓸릴 때마다 둘에겐 설움의 정한도 길길이 치솟는 느낌이었다. 둘은 한 시간가량이나 바닷물에 발을 담근 채 서로의 몸을 포옹했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 상의의 옷섶을 풀고는 엄마가 아기의 젖살을 어루만지듯. 서로의 상반신을 하염없이 어루더듬으며 세상 떠난 부모의 향기를 더듬어 보려 애썼다. 의례적인 말보다는 과거의 그리움을 떠올리는 눈물만이 하염없이 자매의 눈시울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 어느 순간이었다. 일제히 둘의 핸드폰으로부터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시각을 확인하니 8시 정각이었다. 둘은 선약에 따라 일제히 손가방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선영이 은정을 보고 물었다. 정말 죽음 이외에는 다른 돌파구가 없겠느냐고? 다른 나라로 잠적하여 삶을 이어가는 길은 없겠느냐고? 은정이 처연한 표정으로 응답한다. 삶에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다면 선영 혼자서라도 그렇게 해 보라고. 절대로 동반 자살을 강요하는 건 아니라고. 은정의 말에 선영이 눈시울을 붉히더니 급기야 흐느낀다. 자기 혼자 남겨지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면서. 이윽고 선영이 숨결을 추스르며 은정을 향해 말한다.
“언니, 정말 불러보고 싶었어. 이제 잠시 후엔 우린 한 줄기의 바람이 되겠지? 그간의 모든 첩보의 기밀 서류들은 경찰서로 잘 보냈지? 저 바위 위에 얹힌 유서는 내일쯤 세인들이 펼쳐 보겠지? 내일쯤에는 세인들까지도 테러단에 의한 첩보의 실상을 세세하게 알게 되겠지. 너무나 긴 시간이었어. 참고 견디기에는 너무너무 긴 인생이었어.”
“선영아,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됐지? 자, 내 머리를 겨누어! 우리 저승에서는 부디 행복하게 지내보자꾸나.”
자매는 서로의 관자놀이에 동시에 권총을 들이댄다. 둘은 거의 동시에 침을 꼴깍 삼키며 경직된 표정에 입술을 깨문다. 그러면서 왼손은 서로 마주 잡아 서서히 위로 들어올린다. 이윽고 둘이 마주 잡은 왼손을 왈칵 내리는 순간. 동시에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서로가 서로의 머리를 향해 쏜 거였다. 자매는 선혈을 쏟으며 바다의 품으로 쓰러졌다. 바다는 이내 그녀들을 포근하게 어루더듬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들의 삶이 너무나 고달팠으리라 위로하며 다독거리리라도 하는 듯.
그 이튿날. 유서가 공개되면서 세상이 떠들썩했다. 국내에 잠입한 수십여 명의 테러단원들이 그녀들의 총기에 차례대로 피살되었다고 밝혀졌다. 하지만 청화나 캘스 및 이바노프의 행적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라는 거였다.
현준은 텔레비전의 화면을 지켜보다가 자신도 몰래 눈물을 글썽인다. 불현듯 선영과의 제주 여행 장면이 떠올랐다. 춘천에서 수려한 미모로 시선을 끌던 은정의 얼굴도 잠시 밀려들었다. 그러자 현준은 맥없이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쉰다. 참으로 허망한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며 현준의 가슴이 젖어든다.
어느새 2006년의 5월 중순이다. S대에선 5대 장기의 분화 과정을 규명하는 데 성공했다는 보도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다. 또한 줄기세포의 배양 성공률도 90% 수준까지 향상시킨 상태다. 그리하여 세계의 과학자들의 이목이 국내에 쏠려 감탄을 연발하는 상태다. 이런 변화에 보조를 맞추려는 듯. 정부에서도 강원도 지역에 특성화 사업을 구축한 상태다. 삼척의 대이리(大耳里)에 있는 환선굴(幻仙窟). 사방에는 신록이 어우러져 어디를 가나 풋풋한 수목의 향기가 드맑다. 거대한 산악으로 이어지는 대이리의 험산준령. 치솟은 산악의 수직 중앙 부위에 거대한 석회동굴이 형성되어 드러누워 있다. 길이가 4km에 해당하는 환선굴에 이어진 1.2km의 관음굴. 관음굴은 이전까지는 세인들의 출입을 통제했던 동굴이다. 이 동굴들은 충청도 단양지역이나 강원도의 영월지역과는 규모부터가 다르다. 동굴의 높이가 70∼80m에 이르고 폭은 40∼50m에 이른다. 그뿐이랴? 동굴 내부에는 경사를 달리하여 굽이치는 3단의 폭포수가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동굴 출구의 거대한 선녀폭포 아래로는 독립 하천이 기다랗게 뻗어 있다.
정부에서는 5월 1일을 기해 관음굴의 개방을 발표했다. 여기에 따라 전세계의 이목이 관음굴로 쏠리고 있다. ‘쥐라기 공원을 연상케 하는 환상적인 세계’라고 매스컴에서는 일제히 보도한다. 관음굴을 여행하려고 세계 각국에서 관광 문의가 폭발적으로 쇄도하는 상태다.
진기한 풍문의 전파 속도는 빠른 법이다. 관음굴이 왜 유명해졌는지 가는 곳마다 화제 거리로 술렁댄다. 현준은 춘천의 혁진으로부터 관음굴을 다녀온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본다. 중생대의 익룡(翼龍)을 닮은 황금빛 거대 박쥐가 출현했다고 한다. 쫙 펼친 날개의 길이는 3∼4m에 이른다. 수효도 자그마치 수백 마리가 넘는다. 또한 동굴 바닥에는 길이가 1km에 달하는 연못이 형성되어 있다. 못가에는 기다란 꽁지깃이 달린 극락조(極樂鳥)가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다. 긴 꽁지깃의 극락조는 수시로 허공을 날아다니기에 봉황(鳳凰)을 연상시킬 정도다. 그뿐이랴? 연못에는 각종 열대성 희귀어(稀貴魚)들이 가득 서식한다. 동굴 내에는 열풍과 냉풍이 주기적으로 휘몰아치는 진풍경마저 연출된다.
현준은 혁진의 얘기를 선뜻 믿지 못할 정도다. 하지만 과학도인 혁진의 이야기가 아닌가?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 극락조가 국내에 서식한다는 자체부터가 이변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극락조는 열대성 산야에서만 서식하는 조류가 아닌가? 그런데 온대지방인 한반도 내에 극락조가 서식하다니? 생각할수록 현준에겐 믿기지 않는 현실로 여겨진다.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누군가 유전자 조작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현준은 용수와 소연과 함께 관음굴을 찾아볼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용수와 소연에게 전화를 건다. 둘 다 흔쾌히 대답한다. 용수는 그의 애인이며 대학원 후배인 권민혜(權旻慧)와 함께 오겠다고 한다.
다음 날 오전 6시. 용수의 승용차에 민혜와 소연과 현준이 탑승하고 서울을 출발한다. 동서울 톨게이트를 거쳐 중부고속도로로 진입하여 달리다가 호법에서 영동고속도로로 올라탄다. 강릉에서 동해까지를 동해고속국도를 타고 달린다. 동해에서 삼척으로 남하하다가 38번 국도를 타고 대이리에 도착한다. 대이리 매표소 앞 주차장에 도착하니 오전 10시경이다.
매표소에서 동굴 입구까지의 거리가 도보로 반시간이 족히 걸린다. 매표소에서 동굴 입구까지는 경사 10?가량의 오르막길이다. 매표소부터 시작된 숱한 인파가 기다랗게 물결치고 있다. 외국인들이 거의 절반을 이룰 정도다. 해외에까지 관음굴 개방에 대한 홍보가 된 모양이다. 외국인들의 표정에도 잔뜩 호기심이 서린 듯하다. 동굴 주변에선 또다시 철제 고가계단(高架階段)이 300∼400m 높이로 치솟아 동굴 입구에 이르게 된다. 동굴 입구 근처에 이르자 느닷없이 커다란 폭포수가 쏟아진다. ‘선녀폭포(仙女瀑布)’라 불리는 폭포다. 석회동굴 내부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폭포를 만든 것이다. 선녀폭포를 지나는 입구에 아름드리의 엄나무가 치솟아 있다. 몸뚱이마다 가시가 돋아서 범인들의 접근을 막는 듯한 형상이다.
이윽고 현준의 일행은 환선굴 입구에 들어선다. 입구를 향해 내부에서 바깥으로 쏟아지는 물줄기가 기운차다. 동굴 입구에서 바깥으로 배출되는 수량에 위압감을 느낄 정도다. 500여 명이 일시에 모일 수 있는 광장을 지나면서 용수가 말한다.
“참으로 규모면에서는 동양 최대라고 할 만하죠? 높다란 천정도 그렇고 좌우의 폭이 넓어서 시원한 느낌이 들지 않아요?”
소연과 민혜와 함께 현준도 고개를 끄떡이며 탄성을 지른다. 영월이나 단양 지역의 동굴 규모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동굴이다. 우선 70 ∼ 80m에 이르는 동굴의 높이가 장중한 느낌이 들게 한다. 경사를 이루며 동굴 내를 3단으로 굽이쳐 흐르는 웅장한 폭포를 대하는 순간. 일행은 그 위용에 놀라 말을 삼킨 상태다. 동굴 내부를 따라 펼쳐진 종유석과 석순의 화려함도 일대 장관이다. 일행은 동굴의 장관에 매료된 채 발걸음을 옮긴다.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잠시 멈춰 서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입구에서부터 4km를 걸어 들어갔을 때다. 레이저 광선이 분사되며 관음굴 입구를 치장하고 있다. 입구의 안내판(영문과 한국어로 표기된 것)에 많은 외국인들이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다.
Information for the cave
This cave was made for the rainwater by soaking into the geologic strata of limestone which were formed in the Paleozoic. While the rainwater was soaking into holes of the rock which was penetrated in several places of a ravine, and dissolving the underground strata of limestone, then the cave was formed. After the stream forms several falls in the cave because the amount of water which soaks into the cave is abundant, the water in the cave streams out through the mouth of the cave. The Whanseon cave, which ranges from the mouth of the cave to four kilometers away, is the place which has been developed before. The Kwaneum cave which was opened to the public at first this year is the inner cave ranging from the mouth of the Whanseon cave to one point two kilometers away.
The Kwaneum cave has not been opened to the public so far, for various experimental tests for animals have been carried out in the cave mentioned above. Experimental tests are those which reform the species of animals, then adapt and breed new animals, by using a series of restructured genes. Based upon the achievement of the experimental tests, the Korean Government wants to present the Kwaneum cave to you as one of world-famous scenic spots. While hoping that the cave will be remembered as the new place where you can refresh the memory of the Mesozoic forgotten, the Korean Government opens the cave to everyone at home and abroad.
동굴 안내
이 동굴은 고생대에 형성된 석회암층(石灰巖層)에 빗물이 침투하여 만들어졌다. 골짜기 곳곳에 뚫린 암혈(巖穴)로 빗물이 배어들어 지하의 석회암층을 용해하면서 동굴이 형성되었다. 용출되는 수량이 풍부하여 동굴 내부에서도 폭포를 이루다가 동굴 입구를 통해 바깥으로 분출된다. 동굴 입구에서부터 4km 구간의 환선굴은 이전부터 개방되어 온 곳이다. 올해 처음으로 공개되는 관음굴은 환선굴에서 1.2km 구간의 내부 동굴이다.
관음굴이 그 동안 공개되지 못했던 것은 이곳에서 다양한 동물 실험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실험은 일련의 재조합 유전자를 이용한 동물의 종을 개량하고 이들 동물들을 적응?번식시키는 거다. 이 실험의 성공을 통하여 관음굴을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제시하고자 한다. 사라진 중생대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새로운 장소로 기억되기를 바라며 동굴을 개방한다.
관광객에겐 뭔지 모르지만 잔뜩 기대가 되는 문구라고 여겨진다. 현준도 카메라로 안내 팻말을 촬영해 둔다. 용수가 앞을 서고 민혜, 소연, 현준의 순서대로 관음굴에 들어선다. 관음굴 입구에서부터 기다란 연못이 펼쳐진다. 길이가 1.2km에 넓이가 40m에 이른다. 연못 가장자리엔 폭이 20m에 이르는 포장된 이동로가 동굴 벽면을 따라 늘어서 있다.
이동로 곳곳마다 여자 안내 도우미가 늘어서 있다. 영어와 우리말, 프랑스어, 독일어, 에스파냐어, 아랍어, 중국어, 일본어 등의 도우미가 활약하고 있다. 현준 일행이 연못을 따라 50여m쯤 이동했을 때다. 물속에서 온갖 색채의 열대어들이 헤엄치는 모습들이 보인다. 열대 바다 중 심해가 아니고서는 보기 드문 진풍경이 연출된다. 유난히 꼬리지느러미가 넓고 큰 어종도 있고 측면의 색채가 현란한 어종도 많다. 몸체가 1m에 달하는 것도 있고 치어들도 많은 상태다. 연못을 바라보며 탄성을 지르는 관광객들이 적지 않다. 물고기들의 이동이 환상적인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이다. 수면 밖으로 치솟는 어종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 그럴 때마다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오르곤 한다. 또한 사방에서 카메라의 플래시도 마구 터지곤 한다.
그런 어느 순간이다. 동굴 벽면에서 녹색의 레이저 광선이 수면으로 드리워지다가 딱 멈춘다. 그러자 난리가 난 듯 사방에서 함성이 불길처럼 치솟는다. 현준 일행도 일제히 소리의 발원지로 눈길을 돌린다. 현준은 자신도 몰래 마음속으로 부르짖는다.
‘아니 이럴 수가? 어쩜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커다란 날개를 휘저으며 길이 5m가량의 극락조(極樂鳥)가 수면을 따라 날아오른다. 원래 긴 꼬리를 지닌 큰극락조나 쇠극락조는 뉴기니 섬이나 호주의 북부에 자생하는 조류다. 또한 극락조에게는 적도에 가까운 다습한 열대의 산야가 번식의 터전이다. 꽁지깃털을 5m에 이르도록 늘린 것은 재조합 유전자에 의한 품종 개량의 결과이리라. 개량된 부분은 꽁지깃털의 길이뿐이 아니다. 꽁지깃털의 색상마저도 얼마나 다채롭고 화려한지 넋을 잃을 지경이다. 정녕 전설상의 봉황이 환생한 느낌이 들 정도다. 일행은 주변의 구경꾼과 함께 극락조가 날아오를 때마다 손뼉을 쳐대며 환호성을 내지른다. 한편 느닷없이 동굴의 벽면에 네온사인이 번쩍댄다. 숱한 구경꾼들의 시선이 벽면으로 쏠린다. 거기엔 ‘익룡(翼龍)과 봉황의 환생’이란 대형 전광판이 빛을 내뿜는다.
현준은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현준이 이런 프로젝트가 진행된다는 말은 이전에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설마 이 정도에 이르리라곤 미처 예측하지 못한 상태다. 현준이 이 정도일진대 일반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용수와 민혜와 소연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사방을 둘러보며 야단이다.
느닷없이 보라색의 레이저 광선이 벽면에서 수면으로 조사된다. 그러자 긴 꼬리 극락조들의 비상이 딱 멈춰진다. 연못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인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나 빠른 편이다. 긴 꼬리 극락조들의 행동 조절에 레이저 광선이 사용되다니! 레이저 광선의 파장의 변화에 대처하는 긴 꼬리 극락조라! 현준은 생각할수록 대단하다는 느낌에 휩싸인다. 적어도 긴 꼬리 극락조의 아이디어가 어디로부터 연유된 걸까? 멀리 날기 위해서는 새의 몸체가 가벼워야 마땅하다. 현준에겐 긴 꼬리 극락조를 멀리 날게 만든다는 착상부터 경이롭게 느껴진다.
혼란이 다소 잦아들 무렵. 이 번에는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이 동굴 내에 흘러든다. 부드럽고 경쾌하기 그지없는 선율이다. 사람들은 이제 무슨 반응이 일어나려는지 잔뜩 긴장해서 주위를 둘러본다. 대략 5초가량은 잠잠한 상태다. 사람들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쥐 죽은 듯한 고요만이 밀려들 뿐. 사람들의 흔한 기침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일상적인 평정을 찾으려 들 찰나다. 돌연 동굴 천정의 어두컴컴한 틈새로부터 빨간 점들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끽끽’거리는 괴성이 사방으로부터 터져 나온다. 괴성뿐만 아니란 요란한 움직임이 사방으로 빛줄기처럼 흩어지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알지 못할 두려움에 빠져드는 기색이다. 이윽고 사방에서 놀라움에 가득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저 불덩이 같은 점들을 봐. 우르르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은데?”
“이야, 익룡이다!”
“익룡이 날아다닌다!!”
현준은 또 한 번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다. 동굴 천정으로부터 일시에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건 거대한 날짐승이다. 현준의 첫눈에는 틀림없는 익룡들이다. 뻘건 점으로 보인 건 이들의 눈에서 발출되던 빛인 터다. 펼친 날개 길이가 3m에 달하는 거대한 날짐승들. 익룡으로 보인 수백 마리의 날짐승들이 동굴 천정을 뒤덮으며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휙휙’거리는 날개의 음향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들릴 수가 없다. 현준의 머리 위를 스쳐가는 날짐승을 자세히 들여다본 순간. 현준은 날짐승이 흡혈박쥐임을 알아차린다. 화석으로부터 채취한 익룡의 유전자로 재조합된 신종의 흡혈박쥐임에 틀림없다고 여겨진다. 벽면에 부착된 익룡의 설명문에 현준의 시선이 이끌린다. ‘자바큰박쥐(Pteropus vampyrus)’의 평균적인 몸통 길이는 40cm이며 날개 펼친 길이는 1.7m에 해당된다. 또한 평균 체중은 900g에 이른다. 열대성 동굴에 서식하는 자바큰박쥐에 재조합 유전자 기술을 도입하여 품종을 개량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황금빛 박쥐에 ‘익룡’이란 애칭이 부여되었다. 익룡의 날개 편 길이는 평균 3m에 이르고 몸통과 날개(飛膜)의 색깔은 황금빛이다. 설명문의 내용을 읽고 나자 구경꾼들은 하나같이 머리를 끄떡이며 탄성을 내지른다. 그런데 묘하게도 변형 박쥐는 사람들의 머리 위를 선회하기만 할 뿐. 일정한 높이 이하로는 내려오지 않는다. 현준의 생각으로 여기에도 무슨 조절 방식이 있으리라 여겨진다. 대략 10여 분이 흐른 뒤다. 슈베르트의 가곡집 ‘겨울 나그네’ 중의 제19 악곡인 환상(Erstarrung)이 동굴 전체에 울려 퍼진다. 영혼을 파괴당한 사나이의 절망감을 다독여 주는 따사로운 노래라고 현준에게는 여겨진다. 그러자 사방을 정신없이 날아다니던 박쥐 떼가 다시 천정의 안식처로 되돌아가기 시작한다. 이윽고 박쥐들은 모조리 시야에서 사라지고 안 보인다. 현준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는 느낌이다. 그 동안 정부에서도 얼마나 관음굴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는가를 추측할 정도다.
극락조와 레이저 광선의 교감 방식. 여기다가 박쥐와 음악의 교감 방식까지 연구를 마치다니! 이건 절대로 단시일에 이루어진 성과는 아니리라. 현준은 내심으로 거듭 탄성을 질러댄다. 현준에게는 이 정도만으로도 족히 놀라울 지경이다. 그런데, 관음굴의 거의 끝 지점에는 수직으로 내뻗친 동굴이 보인다. 거기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치솟고 있다. 현준은 쌍안경을 꺼내 수직 동굴을 내려다보곤 움찔 놀란다. 그 동굴은 마그마의 관입으로 생긴 용암동굴이기 때문이다. 용암동굴의 균열면을 통해 휴면기의 마그마의 열기가 치솟는 모양이라 여겨진다. 현준은 비로소 이해가 되는 느낌이다. 이 열기 때문에 석회동굴 내의 연못에 극락조와 열대어들이 서식할 수 있음을. 어쩜 이렇게도 관음굴은 천혜의 요지인지 현준은 놀라운 생각에 잠긴다. 관음굴의 끝 부분은 수직 동굴에서부터 밀려드는 열기와 관음굴의 한기가 서로 어우러지는 부분이다. 교차점에서 상충하는 기류에 휘감길 때다. 관광객들은 일제히 황홀한 탄성을 질러댄다. 마치 따스한 증기로 전신의 안마를 받는 기분마저 들기 때문이다.
용수는 현준에게 말한다.
“사우나탕보다 훨씬 감미로운데? 어쩜 이런 곳이 다 있지? 관광객들이 몰려들 수밖에는 없겠군.”
현준도 싱긋 웃고는 일행을 둘러보며 묻는다.
“익룡과 봉황의 프로젝트는 누구의 발상이었는지 혹시 아세요?”
민혜가 용수와 현준과 소연을 향해 들려준다. 자신의 지도교수로부터 들은 내용이라며 일러준다. 익룡과 봉황의 프로젝트는 대덕 연구단지의 과학자들이 맡았다는 얘기다. H화학 연구소의 S교수와 K에너지 연구소의 V교수, W생명공학 연구소의 U교수가 주역들이라고 한다. 현준과 용수와 소연은 일제히 감탄을 하며 가슴 벅찬 표정이다.
일행이 동굴의 여기저기를 바라보니 외국인 기자들이 열심히 현장을 취재하고 있다. 아마도 본국으로 영상을 보내 세세하게 보도하려는 것이리라. 현준 일행도 열심히 비디오카메라에 동영상을 저장해 둔다.
일행이 관음굴의 관광을 마치고는 차를 달려 속초 시내로 들어선다. 절경의 하나인 죽서루에 일행이 둘러앉는다. 오십천을 굽어보는 관동팔경 중의 하나인 죽서루. 대나무 숲이 일부 상징적으로 남아 휩쓸리는 누각. 거기에서 넷은 둘러앉아 관음굴을 둘러본 의견을 교환한다. 먼저 민혜가 일행을 둘러보며 의견을 들려준다. 관음굴의 이벤트는 한국의 유전공학적 위상을 세계에 알리는 커다란 이벤트로 여겨진다고. 그리하여, 곧바로 해외 관광객들이 한국을 찾게 될 것이라고. 아울러 줄기세포의 성과도 해외 관광객들에 널리 알려질 계기가 되리라는 관점이다. 현준과 소연과 용수도 크게 고개를 끄떡이며 수긍하는 표정이다.
일행이 오후에 서울로 되돌아 올 무렵. 차 내의 라디오 방송에선 관음굴에 대한 보도의 열기가 한창이다. 서울에 도착하여 헤어지기 전. 일행은 아쉬움을 갈무리하며 서로서로 작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