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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황색 갈매기 날다
손 정 모
5. 착실한 진보
제1 실험실에는 3명의 사내들이 항온조를 점검하며 지키고 있었다. 10개의 항온조마다 다양한 시료( sample)가 배양되는 중이었다. 항온조마다 자동 온도 조절장치에 연결된 녹색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형광 게시판에는 항온조에 삽입된 시료의 이름과 실험 일정이 적혀 있었다. 기압계의 바늘도 1기압 근처에서 압력 평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청화는 은정과 함께 제2 실험실로 들어섰다. 실험실에 들어서는 순간 청화와 선영은 살균된 방진복을 착용했다. 실험실 내에는 7명의 사내들이 실험에 몰두하고 있었다. 실험실 내부에는 전자 현미경과 질량 분석기 등의 몇 종의 분광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들 분광기 곁에는 각종 전기장과 자기장을 변환시키는 장치도 갖추어져 있었다. 곳곳으로 휘몰아치는 과학 탐구의 물줄기. 언제부터였던가? 순수한 창의성과 발견의 영역으로 세계의 관심이 휘몰리기 시작한 것은? 창의력의 경쟁은 국가간의 또 다른 대결의 실마리가 될 게 뻔했다. 도화선의 불길 같은 절박감이 근래에 세상을 뒤덮는 듯했다. 이러한 기류는 산중의 석동에까지 굽이치는 듯했다.
연이어 청화와 은정은 제3 실험실에 들어섰다. 소형 벤치 유닛(bench unit)을 설계하여 자동화 시설에 이르도록 연구하는 곳이었다. 여기에는 6명의 사내들이 달라붙어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제품을 상품화하는 데 있어서는 제3 연구실의 기능이 아주 중요한 터였다. 청화는 실내의 형광 게시판에 적힌 공정의 진행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부족하다 부족해. 이걸로는 아무 것도 수행할 만한 게 없잖아? 어디 이래 가지고서야 어찌 중국과 미국으로부터 계속 지원금을 받을 수 있겠는가?’
청화와 선영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였다. 맑은 시그널 음악이 동굴 내의 건물 곳곳에 울려 퍼졌다. 선영이 시계를 확인하더니 청화에게 말했다. 식사 시간이 되었다며 식사하러 가자고. 청화도 시간을 확인하더니 시간이 빨리 흐르는 느낌이라고 탄식했다. 뭔가 생각하는 듯 잠시 고개를 숙이는가 싶더니 선영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면서 청화는 선영과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의 요리와 배식은 4명의 장사들이 맡아서 행했다. 청화가 2명의 사내에게 T교수와 은정에게도 식판을 갖다 주라고 당부했다. 흔쾌히 2사내가 일어나서 식판을 들고 갔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였다. 청화가 천왕문으로 선영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기술을 스스로 털어내도록 은정을 최대한 설득해 보라고. 청화 자신은 T교수를 맡아서 다 불게 만들겠다고 말했다. 청화의 말에 선영이 순순히 응답한 뒤였다.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선영이 청화에게 물었다.
“제가 보기에도 은정과 저는 너무 닮은 것 같아요. 혹시 탐슨(Thomson)으로부터 저의 내력에 대하여 들은 비밀 같은 건 없나요?”
선영의 말을 듣는 순간. 아주 찰나 간이었지만 청화는 섬칫한 표정을 지었다. 이 눈치를 놓치지 않은 선영이었지만 슬그머니 실내의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청화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덤덤히 말했다.
“얘가 느닷없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어디 다른 데서 무슨 소리라도 들은 일이 있니? 있으면 내게 말해 봐. 듣고 진위를 가려 설명해 줄 테니까?”
선영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렁 내려앉는 심정이었다. 청화에게 꼬투리를 잡히면 한없이 고초를 당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선영은 즉시 말을 돌리며 대꾸했다. 은정과 자신의 얼굴이 많이 닮았기에 그냥 물어봤을 뿐이라고. 전혀 남으로부터 무슨 말을 들은 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청화에게 말꼬투리를 잡힐까 봐 가슴이 두근댔다.
선영이 청화에게 대꾸를 하던 중이었다. 선영에게 문득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청화 몰래 은정의 혈액을 채취하여 유전자 검사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머리카락으로도 유전자의 분석은 가능하지만 보다 뚜렷한 결과는 혈액 쪽이 명료한 편이었다. 유전자의 검사는 다음 날 춘천의 F대학 연구실에 가서 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선영은 낮에는 F대학 대학원 석사과정의 학생 신분이었다. 그리고 F대학에선 근래에 유전자 염기서열 측정기를 구입한 거였다. 이 기계는 고가의 덩치가 큰 장비였다. 이 장비의 덕분으로 유전자 연구에 날개를 단 느낌이었다.
밤 10시 무렵이었다. 용왕문의 감옥엔 남옥(男獄)과 여옥(女獄)이 있다. 성기의 구조와 신체의 정도를 감안하여 만들어진 감옥이다. 남옥과 여옥은 10여m의 거리로 떨어져 있다. 남옥에서였다. 수갑을 찬 T교수를 향해 청화가 말했다.
“핵 치환할 때 사용되는 정밀한 전기 충격회로의 설계에 있어서 당신이 세계 제일이라면서요? 좋은 말로 할 때 그 기술 도면을 내게 넘기시오. 도면은 이미 당신 머릿속에 들어 있잖소? 종이와 볼펜을 줄 테니 순순히 그리세요. 자꾸 내 말을 거부하려다가는 온갖 쓴 맛을 다 볼 거요. 자, 여기에 볼펜과 종이가 있소. 수갑은 내가 당장 풀어줄게요. 손 이리 내 봐요.”
T교수는 한동안 비장한 표정을 짓더니 청화를 향해 말했다.
“충격회로 자체는 대단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재현성을 높이는 고정밀도의 충격회로는 국가 기밀에 해당되는 겁니다. 내가 당신네 조직의 정체를 모르는 판에 함부로 국가 기밀을 누출시킬 수는 없소. 내가 납치된 이상 되돌아갈 확률은 희박한 것 같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엔 사내답게 깨끗이 죽고 싶소. 잘 드는 칼 한 자루만 갖다 주면 고맙겠소. 당신 보는 앞에서 구차한 목숨을 접어 버리겠소.”
T교수의 말을 듣고 난 뒤였다. 갑작스레 청화의 얼굴엔 노화가 들끓는 듯했다. 느닷없이 오른손 손바닥으로 T교수의 뒤통수를 냅다 갈겼다. 그러면서 고함을 내질렀다. T교수가 아직도 혼이 덜 난 모양이라고. 사람이 알아듣게 말하면 말귀는 알아들어야 할 게 아니냐구. 격분해서 내뱉는 서슬에 청화의 침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청화의 눈빛에는 광기마저 내뿜겼다.
말을 마치자마자 청화는 손끝으로 T교수의 어깨를 짚었다. 거기에다 그녀의 기력을 발출하기 시작했다. 청하의 급변한 언행을 대하는 순간. T교수의 의식은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뭔가 일이 크게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찰나 간에 ‘이게 아닌데’하는 자각이 일었다. 안절부절못해 그래도 가슴이 터질 듯했다. 기력이 T교수의 체내로 흘러드는 순간. T교수는 순간적으로 전신이 뒤틀리는 느낌에 휩싸였다. 어느 정도 기가 발출될 무렵이었다. 청화가 전자 충격기를 T교수의 어깨에 갖다대었다. T교수에게로 휘몰리는 전기적 자극은 일시에 강도가 커졌다. 고통을 참으려고 T교수가 어금니를 악다물며 발버둥쳤다. 어깨와 가슴이 결려 오며 심장에 찢기는 듯한 충격이 밀려들었다. 전신의 근육이란 근육은 죄다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고통이 심해지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 으아! 으아아악!’
고통이 너무나 심하다고 느껴지자 T교수는 자신도 몰래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얼굴엔 땀방울이 줄지어 흘러내렸다. T교수가 바닥을 구르는 데에도 청화는 전자 충격기를 치우지 않았다.
‘아악! 으아아악!’
약간의 시간이 경과되었다. T교수의 모습을 바라보며 청화는 싸늘한 미소를 흘렸다. 이윽고 청화가 T교수의 어깨에서 전자 충격기를 떼었다. 손을 떼고 보니 T교수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물통에 담긴 물을 끼얹어 T교수를 다시 깨어나게 했다. T교수는 의식을 회복하고도 한동안 얼이 빠진 듯했다. 청화는 다시 T교수를 의자에 앉히고는 싸늘하게 말했다.
“나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어. 그냥 그릴래 아니면 혼이 더 나고서야 그릴래? 하루를 생각할 기회로 줄 테니 잘 생각해 봐.”
T교수는 재차 몸이 오그라드는 듯했다. 어쩌다가 이처럼 굴욕적인 상태에 내몰렸는지 억울했다. 여인의 협박에 이처럼 쩔쩔 매야 하다니? 비참할 정도로 처절한 심정이었다. 청화는 T교수를 다시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는 여옥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더니 여옥의 열린 창 틈새로 은밀히 선영의 동작을 지켜보았다. 여옥엔 선영이 은정에게 기공으로 혼을 낸 직후였다. 사지가 물에 빠진 듯 축 늘어진 모습의 은정이었다. 더 이상 저항하기는 어려울 듯한 표정이었다. 은정을 향해 선영이 다그쳐 말했다.
“이젠 순순히 그리는 거지, 응? 왜 말이 없어? 좀더 혼이 나 볼래?”
은정은 선영의 다그침을 받아도 일체의 반응이 없었다. 차갑고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이었다. 좀 전에는 격심한 고통으로 오줌까지 지렸지만 여전히 냉랭한 표정이었다. 제 풀에 격분한 선영이 또다시 은정에게 기공을 쓰려고 할 무렵. 여옥의 문이 열리면서 청화가 들어섰다. 그러더니 선영을 살며시 불러내어 선영에게만 들리도록 소곤댔다. 의외로 T교수와 은정이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둘을 감옥에 가뒀다가 이튿날 다시 구슬려 봐야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은정을 가둬 감시를 잘 하라고 선영에게 말했다. 선영은 즉시 응답을 하며 은정에게로 다가섰다. 은정마저도 옥에 가둔 후에 청화와 선영은 천왕문의 숙소로 향했다.
아늑한 공간의 포근한 침실이었다. 2여인은 얄따란 잠옷차림으로 침상에 드러누웠다. 투명한 잠옷으로 내비치는 여인들의 살결이 이를 데 없이 고왔다. 둘은 누운 채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이튿날 새벽까지 밀담을 나누었다.
선영이 청화에게 물었다. 납치된 T교수와 은정이 끝내 함구한다면 어떻게 처리할 거냐고. 선영의 말에 청화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노여움이 실렸다가 스르르 내풀렸다. 선영은 청화의 표정 변화에 잠시 긴장했다가 마음을 추슬렀다. 청화가 드러누운 채 오른발 뒤꿈치로 침상을 두 번 내려찧더니 응답했다. 정 말을 안 들으면 죽여 없애야겠다고. 이용 가치가 없을 땐 깨끗이 처리해 버려야 한다고 했다. 청화의 눈빛이 너무 날카로워 선영이 마주 바라보기 버거울 정도였다. 하지만 선영의 눈빛도 만만치 않은 듯했다. 뭔가 내면으로 많은 궁리를 하는 듯한 눈빛이기도 했다. 선영이 청화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혹시 한국의 수사기관에서 냄새를 맡지는 않겠느냐고? 청화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현재로선 일체의 추적을 당할 징후가 없다고 했다. 끝까지 선영만 조심하면 문제가 없으리라고 덧붙였다. 청화의 말에 약간 의외라는 듯. 선영이 맑은 음성으로 물었다. 혹시 선영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하리라 걱정하느냐고. 실수 없도록 최대한 조심하겠다고 덧붙였다. 청화는 잠시 선영의 눈동자를 말끄러미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물론 네가 많이 조심해야겠지. 너는 이 석동(石洞)을 하루에 2번씩은 드나들잖아? 대학원에 나다니기 위해서 말이야. 고용된 연구원 녀석들도 들락날락 하잖아? 아무래도 출입이 잦아지다 보면 동굴이 노출될 가능성이 커지겠지? 그런 가능성마저 최소한으로 줄여야만 해. 만약 외부인에게 동굴이 노출되면 곧바로 외부인은 죄다 죽여야 해. 그래야 우리의 신변이 보호되겠지. 그리고 네가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F대학 대학원으로 진학하게 된 거잖아? 세상 사람들은 너의 경력에도 은근히 관심을 쏟을 거야. 달리 말해 네게 조금이라도 허점이 드러나면 너는 엄청나게 위험해질 수도 있어. 한국의 수사기관에서는 춘천 사건과 결부시켜 너를 은밀히 주시하고 있을지도 몰라. 하여간 너는 모든 행동에 있어서 철저히 조심해야 돼.”
“네, 저도 잘 명심하고 있어요.”
어느새 새벽 2시가 되었다. 동굴의 전등을 모두 끄고는 청화와 선영은 같은 방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수면 중에도 사내들로부터의 안전을 꾀하려는 일환이었다. 방의 출입문에도 이중 잠금 장치가 된 상태였다. 잠들기 직전이었다. 선영의 의식 속으로 스산한 바람이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청화에게 강제로 시달리는 현실이 무형의 위기감을 자아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끝없는 낭떠러지로 내몰리는 심정이었다.
석동에 일제히 자명종이 울어대었다. 어느새 새벽 4시였다. 청화와 선영, 4명의 장사, 16명의 연구원들. 총 22명이 석동의 식구들이었다. ‘석동의 식구들’을 청화는 ‘혈인(穴人)’이라 불렀다. 혈인은 언제나 새벽 4시가 되면 기상을 했다. 이 시각에 일어나서 아침 식사는 오전 4시 30분에 치러졌다. 아침 식사가 완료되면 오전 5시 무렵이 되었다. 혈인들이 출입할 때 주변인들에게 보안을 유지하려고 오전 5시까지 외출을 허용했다. 밤에는 11시 이후에 한하여 귀환을 허용했다. 하지만 특별한 일(납치 사건 등)이 있을 때에만 출입에 융통성을 부여하는 정도였다. 청화를 제외한 모든 혈인들은 춘천의 몇 개 대학에 재학 중인 대학원생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무술의 분야에 있어서도 2단 이상의 유단자들로 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문무를 겸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학비 조달과 외국 직장으로의 취업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고용된 사람들이었다. 헌데 선영의 경우에만 사내들과는 다른 특수한 배경을 가진 상태였다.
그 날 새벽 4시 40분가량의 시각이었다. 자가 발전소에 사용될 기름을 사러 나갔던 7명의 혈인들이 석동으로 돌아왔다. 7명의 혈인들은 학교에도 나가야 하기에 새벽 일찍 주유소로 나가 기름을 구한 거였다. 묘하게도 현준과 용수가 혈인들이 새골 선착장에 내리던 광경을 목격하게 된 터였다. 그 날 오전 5시를 기하여 청화를 제외한 혈인들은 모두 외출했다. 기름을 사 왔던 7명의 혈인들도 곧바로 외출했다. 혈인들은 각 대학원의 연구실로 학업을 수행하러 떠난 터였다. 청화만 혼자 남아 커다란 동굴을 지키게 된 셈이었다. 며칠 동안의 축적된 피로 때문이었으리라. 춘천 학술회의와 관련된 납치 사건으로 신경을 많이 썼던 후유증 때문이었으리라. 게다가 지난새벽에는 잠마저 설치지 않았던가? 청화는 천왕문과 용왕문을 잠근 채 깊은 수면으로 빠져 들었다. 오전 5시부터 잠자리에 들었건만 정오를 넘기고 오후 5시를 넘기도록 여전히 취침 중이었다.
청화 혼자 깊은 수면에 빠진 그 날. 현준을 포함한 16명의 탐색원들이 석동에 잠입한 거였다. 오후 4시 무렵. 징검다리를 통해 봉연을 지나다가 일행이 변을 당한 거였다. 16명의 전원이 수련과 연꽃에 혈인들이 발라둔 부유성 알칼로이드를 흡입하여 중독된 거였다. 1시간이 지나서야 한둘씩 의식을 차리고 일어나게 된 터였다. 오후 5시 반에는 전원 깨어나 어찌 된 영문이었던지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현준의 의견에 일행은 탐색을 계속하기로 한다. 다섯 개의 작은 동굴을 거쳐 직경이 50여m인 화원에까지 도달한다. 이 때 화원에는 전등이 꺼진 상태다. 새벽 5시에 청화가 잠들면서 전원 스위치를 내린 때문이다. 따라서 일행의 눈엔 전혀 전기 시
설이 눈에 띄지 않는다. 일행은 화원을 지나 직경 50여m에 이르는 용연까지 구경을 한다. 그러다가 일행은 용연의 반대편에 세워진 2개의 작은 동굴문을 발견한다. 손잡이를 돌려보려 했지만 잠긴 상태다. 이윽고 현준과 용수는 손잡이 주변의 상태를 점검한다. 자주 사용한 모양으로 빛이 날 정도다. 둘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철제문에 노크를 한다. 아무리 노크를 해댔지만 기척이라곤 전혀 없다.
일행은 천왕문 앞에 모여 잠시 의견을 교환한다. 동굴에 아무도 없는 모양이니 밤 10시 무렵에 다시 가자고 의결한다. 일행은 신속히 굴에서 빠져 나와 잉어골의 텐트로 집결한다. 경찰에 신고를 하여 수사를 맡기자는 측과 자신들이 직접 해결하자는 의견이 잠깐 맞선다. 의견 대립의 순간. 잘못되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문제다. 모험이란 왕왕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잠시 전신에 진저리를 치며 현준은 마음을 추스른다. 하지만 의논을 거듭하여 직접 해결해 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정해진다. 저녁을 든든히 먹은 뒤 일행은 호반에서 충분히 몸을 푼다.
수사를 경찰에 맡기자는 쪽은 혹여 발생할지 모르는 불상사를 방지하자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직접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쪽은 춘천 학술회의 사건의 진원지를 찾아야 한다는 사람들이다. 그래야 유사한 사건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측면이다.
폭력 대결에 대처하기 위해 서로 다른 무술을 한 사람끼리 조를 편성한다. 합기도와 유도, 태권도와 쿵푸, 공수도와 선무도 등. 작전을 세우고도 일행은 백사장에서 한 시간가량을 실전과 유사하게 겨루기를 했다. 격투의 지침은 상대를 제압하는 데 있을 뿐. 상대를 골절시키거나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일은 피하기로 한다.
석동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일행은 각자 친구들에게로 비상 연락을 취한다. 유사시에는 도우러 오라는 연락인 셈이다. 이런 조치가 끝난 뒤. 일행은 마침내 밤 9시 20분경에 텐트를 출발한다. 그리하여 40분이 지난 밤 10시 무렵에는 예정대로 석동의 입구에 진입한다. 직경 30여m의 봉연에 이르러서는 일행은 일제히 마스크를 2중으로 착용한다. 그리고는 최대한 신속하게 징검다리를 지나 작은 동굴에 들어선다. 각자 작은 동굴 내를 걸으면서 지난번과 같은 부작용은 없는지 점검한다. 그 어디도 결리거나 불편한 데가 없다. 일행 모두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어린다. 연이어 직경 50여m의 원형 화원에 이르렀을 때다. 동굴 전체에 전등이 켜지면서 흑색 의상의 혈인들이 떼 지어 몰려나온다. 하나같이 몸매가 다부진 사내들이다. 나이는 탐색원들과 비슷한 상태다. 현준과 용수는 차분히 상대의 인원수를 헤아려 본다. 정확히 스무 명이다. 탐색원들보다 4명이 더 많은 상태다. 어쨌든 일은 벌어진 상태다. 이제는 오로지 앞으로 밀고만 나가야 하는 상황이다.
혈인들 중의 4명의 장사가 일제히 입을 연다.
“당신들은 뭐야? 여긴 뭘 하러 왔어?”
현준이 주변을 힐끗 살펴보더니 응답한다.
“최근에 우리가 분실한 물건이 혹시 여기에 있는지 들어와 봤소. 대단히 미안하지만 내부를 샅샅이 좀 보여주겠소?”
혈인들의 얼굴에 일시에 격분의 빛이 일렁인다. 그러더니 다른 혈인의 입에서 야유하는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이 동굴이 어떤 곳인 줄 알기나 하고 떠드는 말이냐고 윽박지른다. 원래부터 예상된 거였지만. 그냥 말로만 협조를 얻기는 불가능한 상황이라 여겨진다. 침묵 속에서도 피를 부르는 듯한 기류가 술렁댄다.
잠시 쌍방간에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탐색원들은 그냥 밀어붙여 탐색하기를 원하는 표정이다. 반면에 혈인들은 어떻게 하든 핑계를 대고 탐색원들을 내쫓으려는 눈치다. 다시 혈인들 중의 장사에 해당하는 자가 묻는다. 도대체 분실된 물건이 뭐냐고? 왜 현준 일행의 물건이 자기네의 동굴 속에 있으리라 여기느냐고 묻는다. 잔뜩 노기를 띠면서도 엄청나게 절제하고 있는 듯. 내뱉는 음절마다 몹시 떨리는 느낌이다. 약간의 핑계거리만 있어도 폭발할 듯한 분위기다. 혈인들의 기색을 예리하게 살펴본 뒤. 용수가 분위기를 눙치려는 듯한 음색으로 응답한다. 용수 일행의 물건이 분실된 지점이 동굴과 가깝기에 물어보는 거라고. 그렇기에 조금만 찾아보면 안 되겠느냐고 묻는다.
이 때 장사 중의 한 명이 핸드폰을 귀에 댄다. 누군가로부터 지시를 받는 모양이다. 통화를 끝내더니 손바닥을 수직으로 세워 탐색원들을 향해 내리치는 자세를 취한다. 그 신호를 계기로 혈인들은 저마다 맞은편의 탐색원들을 향해 싸움을 걸어 왔다. 탐색원들도 기다렸다는 듯 그대로 달려들며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댄다. 졸지에 실내가 종횡무진으로 날고뛰는 폭력의 현장으로 변한다. 순식간에 사방으로 핏방울이 틘다. 싸우다 보니 탐색원과 괴한들마저 구별하기 힘든 상황이다. 무의식적으로 주먹이 나가며 발길질이 들어간다. 느닷없이 현준은 쓸쓸한 느낌에 휩싸인다. 창졸간에 뭉클 눈물샘이 터질 듯한 현기증을 느낀다.
서로 치고 공격하느라고 천왕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아무도 모르는 모양이다. 2명의 여인이 2개의 커다란 가방을 끌고 천왕문을 나서더니 용연 서쪽편의 벽면으로 달린다. 뭔가 벽면의 장치를 누르는가 싶자 벽면에 직경 1m가량의 구멍이 드러난다. 구멍을 통해 계곡으로 빠져나간 2여인이 재차 동굴을 향해 리모콘 스위치를 눌러댄다. 그러자 천왕문과 용왕문이 폭음을 내며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 바람에 직경 1m가량의 출입 구멍도 사라지고 만다.
탐색원들과 혈인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소리나는 곳을 바라본다. 천왕문과 용왕문이 폭파되어 무너지는 위세가 너무나 위력적이다. 잠시 후엔 화원 쪽의 2개의 소동굴도 폭파되어 무너져 내린다. 그제서야 탐색원들과 혈인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아우성을 질러댄다.
“동굴이 무너진다.”
“우리도 돌덩이에 깔려 죽게 생겼다.”
사방의 동굴 천장에서 돌무더기가 쏟아져 내린다. 돌의 파편이 커서 맞기만 하면 즉사할 지경이다. 돌의 파편과 함께 일시에 자욱한 먼지까지 피어오른다. 급박한 위기 상황에 처하여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다. 일시에 여기저기서 극심한 소란이 벌어진다. 이런 중에서도 뜻밖의 말이 들렸다.
“저기 동굴 밖의 강변을 보라구. 2여자가 가방 한 개씩을 들고 헬기에 오르고 있어.”
아닌 게 아니라 혈인들의 눈에는 청화와 선영이 헬기에 오르는 중이다. 그녀들의 손에는 각각 대형 트렁크가 한 개씩 들려 있다. 막 헬기의 문이 닫히면서 헬기가 계곡의 상공으로 날아오른다. 헬기가 돌연 동굴쪽으로 날아들면서 청화가 리모콘을 두어 번 더 조작한다. 거기에 맞춰 동굴 곳곳에 내장된 폭탄이 터지면서 동굴이 무너져 내린다. 계곡으로 향한 동굴의 벽면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젠 정말 탐색인들과 혈인들의 생명은 경각에 달린 상태다. 여인들이 빠져 나간 계곡 쪽의 벽면으로 사내들은 우르르 몰려든다. 곳곳에 빛살이 들어오는 잔구멍은 많았어도 동굴 벽면은 두꺼운 암석이다. 암석을 깨뜨리지 않고는 빠져 나갈 길이 없을 것 같다. 혹시 여인들이 빠져나간 비밀통로는 없을까 여겨 사내들은 벽면의 여기저기를 더듬는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럴 만한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중에서도 동굴 폭파의 후속 현상으로 사방에서 돌덩이가 떨어져 내린다. 그 바람에 머리와 몸통, 가슴 등이 돌에 맞아 어찔어찔할 지경이다. 이 때 현준이 사내들을 향해 외친다.
“방금 여자들이 화원 전후의 출입구를 모두 폭파시켜 버렸소. 유일한 탈출 방법은 계곡을 향해 늘어선 동굴 벽면을 뚫는 일이요. 전부 번갈아가며 계곡 쪽의 벽면 중 가장 얇은 곳을 발로 차기로 합시다. 잠깐만 여길 봐 주세요. 바로 여기예요. 이곳이 가장 얇아 보이군요. 내가 동그라미 표시를 한 여기를 한 줄로 서서 번갈아가며 발로 찹시다. 자, 그럼 저부터 먼저 찰게요.”
현준은 10여m 전방에서부터 힘차게 달려와 몸을 껑충 치솟으며 2단 옆차기를 날린다. 누가 보더라도 감탄할 정도의 현란한 발차기다. 전신의 체중이 다리와 발에 실려 벽면을 차는 거다. 연이어 용수를 비롯한 40여 명의 인원이 동참하여 몸을 날려 벽을 찬다.
그러는 사이. 또다시 헬기의 소리가 가깝게 들리더니 폭음 소리가 크게 인다. 그런 직후였다. 계곡을 향한 벽면에 뚫린 구멍을 통해 강물이 노도처럼 몰려들기 시작한다. 동굴에 조금만 더 지체하다간 일제히 익사해 버릴 지경이다. 다들 안색이 창백해지며 어쩔 줄을 모른다. 폭발하기 직전의 가스통을 껴안은 듯. 경황이 없이 나뒹굴 지경이다. 현준도 말로만 듣던 죽음의 냄새를 맡은 느낌이다. 순식간에 처절한 절망감에 휩싸여 진저리를 친다. 이 때 용수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다. 얼마 전에 실험을 하려고 사 둔 마그네슘 금속 분말을 싼 종이 봉지다. 용수는 화원에 뿌려진 숯 토막을 빻아 마그네슘 분말과 섞는다. 그리고는 신발 끈을 풀어 혼합 가루에 심지로 넣는다. 분말을 싼 흰 봉지를 격파하려는 얇은 벽면의 구멍에 꽂고는 사내들을 둘러본다.
“잠시만 주목해 주세요. 신발 끈을 도화선으로 삼아 벽면을 폭파할 작정입니다. 지금 동굴 내엔 천정의 바위가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가속되고 있어요. 이제 마그네슘 폭약이 터지면 동굴 전체가 왕창 무너질지도 몰라요. 폭약이 터지는 순간에 모두들 사력을 다해 계곡 밖으로 뛰쳐나가세요. 지금 강둑에 설치한 폭약마저 여자들이 헬기에서 리모콘으로 방금 터뜨린 것 같군요. 강둑이 무너지면서 물줄기가 동굴로 밀려들고 있어요. 조금만 더 지체한다면 전부 다 익사할지도 몰라요. 자, 그럼 점화합니다. 모두의 건승을 빕니다.”
용수가 라이터로 신발 끈에 불을 붙이고는 신속히 뒤로 물러났다. 신발 끈의 불길이 폭약에 닿을 무렵. 사내들은 일제히 몸을 엎드리며 손으로 고막과 안구를 누른다.
콰르르 콰캉!!
폭음과 함께 천정의 바윗돌들이 폭우가 쏟아지듯 떨어져 내린다.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사내들은 생명을 내걸고 파열된 벽면으로 뛰어들어 계곡으로 몸을 피한다. 사내들이 다 빠져나왔을 때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리며 석회동굴은 완전히 함몰하고 만다. 여태껏 그 속에 있었다면 뼛가루도 추스르지 못할 정도다. 36명의 사내들은 하나같이 얼이 빠진 표정으로 함몰된 산악을 바라본다. 지형마저 완전히 변한 상태다. 이제 그 누구일지라도 그 자리에 동굴이 있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행은 안도의 한숨도 잠깐일 뿐. 금세 노도가 되어 밀려드는 강물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가까스로 일행은 서편의 산기슭으로 대피하고는 기진맥진해 한다.
이 때 현준이 혈인을 향해 입을 연다. 이제 한 시름 놓은 것 같다고. 어쨌든 살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동굴 내에 다른 잔류자는 없겠느냐고 현준이 묻는다. 현준의 말을 듣자 혈인 중의 한 명의 장사가 응답한다. 천왕문 속에 납치된 2사람이 있었다고. 아마도 2여자가 들고 나간 2개의 트렁크 속에 있었으리라고 말한다. 현준이 연이어 장사에게 질문한다. 이전에 2여인이 동굴 내에 폭탄을 장치한 줄을 알았느냐고? 또한 여인들이 헬기를 가진 사실도 알고 있었느냐고 묻는다. 장사가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혈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아뇨, 전혀 몰랐어요. 정말 동굴 내에 폭탄을 장치했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어요. 헬기는 이전에 더러 본 적이 있지만 여인들의 소유는 아니에요. 아마도 여인들에게 커다란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는 미국인 세력가의 헬기임에 틀림없어요. 아마 우리가 화원에서 난투 중일 때 여인들이 핸드폰으로 헬기를 불러들인 것 같아요.”
이 번에는 용수가 혈인들을 향해 말을 꺼낸다. 동굴 속에 폭약을 장치한 건 여인들의 강력한 비상 대책이었으리라고. 바로 오늘과 같은 상황에 대한 비상 조처였으리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러면서 용수는 혈인들의 얼굴을 죽 둘러본다.
용수의 말을 듣고 보니 혈인들은 아무런 할 말이 없다. 자신들이 생각해도 너무나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혈인들이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서더니 용수에게 다가가 고맙다며 다들 손을 내민다. 용수가 폭약으로 동굴 벽을 뚫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바윗돌에 깔려 전신이 으깨어졌거나 강물에 수장되었을 터였다. 상황이 이럴진대 혈인들에게 용수가 고맙게 여겨지지 않을 수 없으리라. 조금만 더 늦게 동굴을 벗어났더라면? 하나같이 수장(水葬)되어 싸늘한 주검이 되었으리라. 그랬다면 줄기세포의 분화에 대한 연구도 한낱 꿈이 되었으리라 여기는 순간. 문득 설움으로 인해 눈물이 핑 돌았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며 현준이 혈인들에게 입을 연다. 드러난 정황으로 판단컨대 2여인들은 해외의 스파이들이 아니냐고 묻는다. 동굴에 아지트를 구축하고 폭발물까지 설치한 점에서 스파이로 느껴진다고 덧붙인다.
장사들 중의 한 사람이 응답한다. 어떻게 대번에 간파했는지 놀랍다고. 2여인 모두 한국인 같기에 해외 스파이라고는 쉽게 추측하지 못하리라는 견해다. 35살의 여자는 중국인으로서 북경대학의 교수이고 24살의 여자는 국적이 미국으로 되어 있다고 밝힌다. 중국인의 이름은 무청화이며 24살의 여인의 이름은 샌드럴 채플린(Sandral Chafline)이라고 들려준다. 채플린은 아무래도 한국인 입양아 같다고 장사가 덧붙인다.
장사의 말에 잠자코 귀를 기울이던 용수가 혈인들을 향해 묻는다. 2여인이 스파이인 줄 알았다면 왜 계속 그 밑에서 일했느냐고? 당국에 신고를 하든지 그들 밑에서 일하는 걸 그만두든지 했어야 옳지 않느냐고? 기술이 그들에게 넘겨지면 우리나라는 허수아비가 되지 않느냐고? 연달아 따지듯 질문해서 기분 나쁘게 생각지는 말라고 용수가 덧붙인다. 장사들을 포함한 혈인들의 얼굴에 부끄럽다는 듯 슬쩍 홍조가 인다. 잠시 숨 막힐 듯한 고요가 흐른 뒤. 다른 장사가 대답에 응한다.
“실로 그 점을 두고는 부끄러워서 할 말이 없군요. 하지만 그네들의 충분한 자금 공세는 가히 환상적이었어요. 세상에 돈 싫다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 그네들은 충분한 자금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거였어요. 우리가 동굴에서 일하며 받는 수당은 대기업 부장의 급료 수준 이상이었다면 믿겠어요? 그네들은 이렇게 자금으로 사람의 정신을 곧잘 장악해 버리는 것 같아요. 좀 늦은 감이 들지만 이제부터라도 견실히 국가를 위해 열심히 연구할 작정입니다.”
대화가 이렇게 부드럽게 흘러가자 여기저기서 일제히 하나의 제안이 흘러나온다.
“이렇게 만난 것도 커다란 인연이니까 새 출발하는 기념으로 술 한 잔 합시다.”
이 제안에 추호도 마다할 사람은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일행은 춘천 시내로 몰려가기 시작한다. 몰려가서 새벽이 밝을 때까지 대화를 나누며 젊음의 열기를 발산하려 한다. 사내들은 비상 상태를 대비하여 주변에 도움을 청했던 사람들에게 무사하다며 안부를 전하며 안심시킨다. 춘천 시내의 호젓한 전통 주점에 다들 모여 식탁에 둘러앉는다. 구호인 ‘밤부터 새벽까지’를 크게 선창하며 사내들은 일제히 술잔을 든다. 잠깐 동안 금전의 유혹에 빠졌던 과거를 청산하려는 자리다. 또한 새로운 열정으로 과학 연구에 진력해 과학 왕국의 주역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자리다. 그래저래 젊음의 패기가 한껏 끓어오르는 판이다.
현준은 여기서 춘천 F대학의 박사과정 3학기째인 고혁진(高赫進)과 지기(知己)로 사귀기로 한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서로 강한 흡인력을 느끼게 된 터다. 지기를 사귀는 데는 반드시 긴 세월이 필요한 건 아니라고 믿는 현준이다. 진정으로 마음이 통한다면 첫 만남에서도 지기가 될 수 있다는 게 둘의 관점이다. 한 사람의 지기를 얻는다는 건 새로운 세상을 얻은 것과 다름이 없으리라. 둘은 지기가 된 기쁨에 겨워 서로를 끌어안으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현준은 혁진을 통해 청화와 선영에 의해 진행된 납치 사건의 전모(全貌)를 파악하게 된다. 식탁을 둘러앉은 사내들과 새벽 1시까지 술잔을 나눈 뒤다. 다들 새 날을 향해 힘차게 비상할 것을 다짐하며 헤어진다. 현준은 혁진과도 아쉬운 작별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토록 위험을 무릅쓰고 석동(石洞)을 탐색했던 보람을 혁진에게서 찾는 현준이다.
현준은 새벽에 소양 호반에 있는 여관에서 일박하기로 한다. 용수는 석동에서 빠져 나오면서 텐트와 낚시 장비를 모두 차에 옮겨 실었다. 그랬기에 회식 자리가 끝나자마자 차를 여관까지만 이동시켰다. 애초에는 새벽에 경춘가도를 거쳐 서울로 달릴 예정이었다. 그러던 것이 술이 과하여 운전대를 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일박하기로 한 거였다.
호반의 여관은 청결하게 느껴진다. 곳곳을 깨끗이 청소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프런트에서 칫솔과 1회용 면도기를 받아들고는 잡아둔 방으로 올라간다. 소양 호반이 시원하게 바라보이는 새벽 정경이 너무나 산뜻하다. 현준은 용수와 함께 맥주 한 병씩을 더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가 용수는 잠자리에 들자마자 이내 잠들어 버린다. 현준은 떠오르는 상념을 추스르기 위해 소양 호변을 따라 산책한다. 소양 호변을 따라 피어오른 물안개가 거대한 괴물처럼 흐느적거린다. 현준은 자신의 위치를 떠올린다. 언제 어디서건 유전공학의 연구자로서 최선을 다해야 할 입장임을. 스러지지 않는 연구의 열정이 다시금 현준의 가슴을 일깨운다.
그의 머릿속에 문득 은정이 떠오른다. 은정은 실종되어 어디로 간 걸까? 청화와 선영의 트렁크로 옮겨져 어디 다른 데에서 구금을 당하고 있는 걸까? 차라리 경찰에 신고했더라면 T교수와 은정을 무사히 찾을 수 있었을까? 헬기 운전사와 청화와의 관계는 어떤 사이일까? 생각할수록 안개 속을 헤매는 느낌이 든다. 현준은 아직도 직접 탐색을 나섰던 것이 잘 한 일이었는지를 판단할 수가 없다. 성과를 거둔 일이란 혈인들을 만나게 된 점이다. 그들을 통해 T교수와 은정의 납치범은 청화와 선영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선 2여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또한 납치된 T교수와 은정의 행방은 더구나 알 수 없는 상태다. 현준은 생각할수록 이 번에 행한 일이 엉망진창이 된 느낌이 들어 안타깝기만 하다. 한동안 호반에서 상념에 잠기다가 새벽 3시 무렵에 잠자리에 든다.
세월이 흘러 햇살이 쨍쨍한 7월 중순이다. 춘천 학술회의 사건이 터진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다. T교수와 은정의 행방은 미궁에 빠진 채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간다. 현준은 T교수와 은정의 납치범인 청화에 관해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즉시 공항 과 항구를 폐쇄하여 청화와 선영의 해외 도주를 막았다. 그 사이에 현준과 용수는 경찰서에서 두어 번 참고인 진술을 했다. 국내에선 청화와 선영의 정체에 관해 추측이 난무했다.
현준은 머릿속을 맑게 하여 관악 캠퍼스에서 실험에 몰두한다. 진행하는 실험의 주제는 줄기세포에서 장기로의 분화과정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5대 장기에 대한 분화과정만 알아도 유전공학에 있어서는 세계적인 강국이 되는 셈이다. 실험상으론 손상된 간에 줄기세포만을 넣어줄 경우 극히 일부만 재생이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손상 부위를 전체적으로 재생시키려면 분화과정에 접어드는 줄기세포를 삽입해야 한다. 이게 난치병 치료의 우선 과제이다.
이런저런 요인으로 분화과정의 연구는 절박한 당면과제다. DNA 사슬 중의 어느 부위가 분화과정과 관련된 조절 유전자인지도 밝혀야 한다. 현준은 근래에 제조한 30개 배양액의 유형에 따른 실험 계획서를 작성한다. 메티오닌 첨가 시약의 변화를 잴 수 있는 착색제. 착색제에 의해 착색된 초기 세포 내의 메티오닌의 양과 세포분열이 진행된 후의 양. 이들에 대한 관계를 근적외선 액정 카메라로 촬영한 뒤에 영상 분석을 해야 한다. 영상 분석은 채색된 면적을 적분 프로그램으로 면적비를 산출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진행된다. 영상 분석을 위한 대표적인 컴퓨터 프로그램은 파스칼(Pascal) 언어로 작성된 그래픽 프로그램이다. 전체 작업에 대한 계통도(flow chart)는 잘 짜여 있지만. 구체적인 시행과정이 너무나 까다롭고 체크하기 버거운 상태다.
현준은 히스톤 단백질로부터 분리된 DNA를 원심분리기로 분자량별로 분류한다. 분자량별로 분류된 DNA에 제한효소를 가하여 일정한 단위별로 절단하는 작업을 한다. 특별한 유전자는 이렇게 분류되는 소단위체 중에서 발견된다. 분석에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분자량의 분포 범위를 25,000 ∼ 27,000의 값으로 제한시킨다. 화학(化學)에 의하면 분자(molecule)는 물질의 특성을 유지하는 최소 단위체로 규정된다. 또한 분자량이란 분자 1몰(6.02 x 1023개)의 질량 값을 말한다. 그리고 유전자가 동종의 유전자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염기서열을 결정해야 한다. 유전자 내의 염기서열의 결정에는 신형 염기서열의 결정화 기계의 도움을 받으면 간단히 해결된다.
현준은 아침부터 실험에 착수하여 여념이 없을 정도다. 실험의 방향 설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핵 치환의 성공률과 재현성을 높이는 것이다. 핵 치환이 성공될 확률은 아주 저조한 편이다. 그래서 복제 양 ‘돌리’의 경우도 227번만에 겨우 성공한 경우에 해당된다. 둘째는 줄기세포에서 장기로의 분화과정을 체계화시키는 작업이다. 이 과정을 해결하기 위해 조절 유전자를 찾아야 한다. 또한 세포분열에 따른 착색된 메티오닌의 변화량도 분석해야만 한다.
핵이 제거된 난자에 체세포의 핵을 삽입하는 작업을 핵 치환이라고 한다. 핵 치환을 하게 되면 치환된 DNA의 유전정보에 따라 세포질에서 단백질을 합성하게 된다. 간혹 치환된 핵의 DNA의 정보가 세포질로 정확히 전달되지 못하는 수도 있다. 여기와 결부되어 핵 치환된 배아가 세포분열을 하지도 못하고 고사해 버리게도 된다. 그래서 핵 치환의 성공률이 극히 저조한 편이다. 이런 저조한 확률을 증대시키고 재현성을 높이는 일이야말로 유전공학의 중요한 과제다. 현준은 명확한 목표를 세운 상태다. 8월 하순까지는 간(肝) 조직으로의 분화과정에 대한 조절 유전자를 규명하겠다고 마음먹는다. 일단 뜻이 세워지면 어떤 일이라도 해결되기 마련이다.
다시 세월이 흘러 7월 하순에 접어들었다. 그 동안에 현준은 아침부터 밤이 늦도록 실험에 매달렸다. 춘천 학술회의의 사건 이후. 현준이 20여 일 동안에 진행한 실험적인 성과는 중요한 거였다. 현준은 메티오닌에 대한 선택적이고도 안정된 착색의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또한 제한효소에 의해 잘린 DNA 절편들의 분자량에 대한 분포도의 재현성을 높였다. 그리하여 특정한 DNA 절편을 이용하여 조절 유전자를 찾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한편 간(肝) 세포로의 분화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도 중간성과를 얻었다. 사람의 5번 염색체 중의 DNA 절편을 이용하여 분화에 접근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연구 결과는 나날이 심 교수와의 토론을 통해 더욱 심화시켜 나갔다. 일정 기간이 흐른 만큼 연구 결과도 쌓이게 되었다.
새로운 결과에 관해 심 교수와 토론을 마치고 실험실에 올라온 직후다. 핸드폰이 울린다. 오전 10시 무렵이다. 서울 J대학 화학과 석사과정의 소연의 목소리다. 춘천 학술회의장에서 만난 이후로는 만나지 못한 상태다. 그 사이 날씨는 더욱 무더워졌고 곳곳마다 물놀이가 한창인 계절이다.
“현준 씨, 제가 누군지 알겠어요? 어머 고맙기도 해라. 기억해 주셔서 고마워요. 연구를 하다가 약간의 의문점이 생겨 질문하고 싶거든요. 지금 제가 있는 위치는 22동 수위실 앞이에요. 제가 금방 23동으로 걸어갈게요.”
현준이 23동의 입구에 서 있으려니까 소연이 다가오며 살짝 손을 든다. 소연의 치켜든 손을 바라보는 순간. 현준에겐 왠지 학문 연구의 강력한 벗을 만난 느낌이 든다. 질문을 하러 J대학에서 S대학까지 올 정도의 여인이라면? 열정이 없으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현준에겐 생각된다. 그랬기에 현준은 다가오는 소연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본다. 이윽고 현준은 소연을 실험실로 안내한다.
마침 같은 실험실을 사용하는 현준의 후배 대학원생들은 인천의 U연구소로 가고 없다. U연구소는 S대 출신의 Q선배가 책임 연구원으로 근무하는 곳이다. 마침 Q선배가 석사과정의 후배들을 불러들여 실험 시설을 견학시키는 중이다. 후배들 넷은 다음 날이 되어야 관악의 실험실로 돌아올 예정이다.
소연은 가방 속에서 실험일지와 메모가 적힌 노트 등을 펼쳐 꺼낸다. 질문할 준비를 갖추고는 상냥스런 표정으로 입을 연다.
“현준 씨! 지난번에 춘천의 K대 학술회의장에서 뵌 이후로 20일쯤 지났죠? 치밀하고도 성의 있게 만들어진 영상물이 제겐 아주 인상 깊었어요. 그 때 보여준 전자 현미경 사진에 뿅 가는 줄 알았어요.”
소연은 말을 하면서 노트를 펼쳐든다. 거기엔 시료에 대한 스케치와 메모 내용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현준은 단숨에 소연의 성향을 알아낼 만하다고 생각한다. 노트의 기록만으로도 소연이 연구에 어느 정도 열성인가를 추측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노트를 몇 장 넘겨 어떤 스케치 그림을 보여준다. 현준이 얼핏 보기에도 핵 치환용 전자 충격회로를 그린 그림이다. 핵이 제거된 난자에 체세포의 핵을 삽입시키려면 크게 두 가지의 방식이 있다. 하나는 주사침으로 체세포 핵을 흡입한 뒤에 난자에 직접 주입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체세포의 핵과 난자를 근접시켜 전자 충격파를 일으키는 방법이다. 이 방법에 의해 체세포 핵은 난자의 내부로 파고들어 자리 잡게 된다. 2가지의 방식 중 전자의 방식이 훨씬 간단한 편이다. 하지만 핵과 세포질의 융화에 있어서 문제점이 많은 방법이다. 반면에 후자의 방법은 충격파의 조절이 힘든 단점은 있지만 전자에 비해 안정된 방법이다.
현준은 잠시 의식에 혼란을 느낀다. 문득 실종된 은정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은정이 납치된 건 T교수의 세계적인 전자 충격회로의 장치 때문이다. 지금 그녀의 행방도 모르는 채 의외로 소연에게서 충격회로의 도면을 봤기에 마음이 심란하다. 단 한 번도 은정에게는 말을 붙여 본 적이 없는 현준이다. 그런데도 은정을 찾아 석회동굴을 탐색했던 그다. 묘한 것은 첫 인상이요 첫 느낌인 모양이다. 한없이 차가우면서도 기품 있어 보이던 은정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현준에게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현준은 마음을 추스르며 소연에게 말한다.
“이 회로는 누가 설계한 거죠? 혹시 기존의 논문에 발표되어 있던가요?”
소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노트를 펼쳐 보이며 응답한다.
“설계는 제 지도교수인 K교수님이 하셨어요. 여기를 좀 보세요. 이 자료는 충격파를 일으킬 때의 전기장의 세기와 진동수를 나타낸 거예요. 문제는 그래프의 이 부분이에요. 파동이 형성되다 말고 급격히 단절되어 버리거든요. 이렇게 되면 일정한 에너지를 공급하지 못하잖아요? 당연히 핵이 세포질로 융화해 들어가는 데에 장애가 되겠죠? 이 현상을 극복할 방법이 없을까요?”
현준은 기꺼이 대답한다. 미세 충격파를 조절하는 데에는 전압을 증폭시키는 회로가 필요하다고. 이를 위해서는 2개의 코일과 철심을 써서 전압을 조절하면 어렵지 않다고. 그러면서 현준도 이전부터 고심해 왔기에 해법을 터득하게 되었다고 들려준다.
현준이 잠시 실험대 위로 고개를 돌리더니 볼펜을 집어 든다. 그리고는 백지에 코일 2개와 철심을 나란히 그린다. 그리고는 코일에 감긴 도선의 회수에 상응하는 전압의 증폭 효과를 소연에게 설명한다. 그리고 원형 코일에 도체를 삽입했다 빼면서 변환되는 전기장의 변화까지도 상세히 설명한다. 소연은 연신 고개를 끄떡이며 열심히 현준의 설명을 듣는다. 설명을 듣다 말고 감탄한 듯 소연이 잠시 묻는다. 어쩜 전자기 회로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박하느냐고? 그녀는 전자 회로의 도면만 봐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라고 덧붙인다.
현준은 씽긋 웃으며 들려준다. 물리(物理)는 학부에서 그가 부전공으로 이수했다고. 과학의 실험 시설을 장치하자면 물리의 전자기 이론도 많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실제로 근래에는 부전공의 덕을 상당히 보는 셈이라고 현준이 말한다.
근 3시간에 걸쳐서 현준과 소연은 실험 장치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현준에겐 소연의 용모가 깔끔하고 그녀의 이미지는 지적으로 세련되어 있다고 느껴졌다. 오후 1시 무렵. 교내 식당에서 소연과 식사를 한 뒤에 현준은 소연을 배웅하고는 연구실로 돌아온다.
연구실 책상 앞에 앉아 현준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그러면서 잠시 소연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꽃술 위를 허허로이 넘나드는 꿀벌과 같은 풍도로 학문에 임하던 여인. 어떤 난관마저 그녀에겐 향기로운 아취로 느껴질 듯한 분위기. 생각할수록 소연의 이미지에 매혹되는 기분이다. 한편, 현준은 현재까지 계획한 일의 진행 상태를 점검하여 도표로 작성해 본다. 의지와 열정을 쏟은 곳에는 반드시 그만큼의 성과가 있었다. 바로 이런 점들이 노력하는 사람들에겐 커다란 기쁨으로 작용하는 것이리라. 어느 정도의 도표를 완성한 뒤다. 현준은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자기 최면을 걸며 중얼댄다.
‘현준아! 너라면 해낼 수 있어. 어떤 난관인들 못 헤쳐 나가겠어? 시간을 충분히 아껴 쓰되 절대로 조급하게 굴어서는 안 돼. 최후의 승리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반드시 보여 주겠어.’
현준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주먹 쥔 팔을 허공으로 내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