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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황색 갈매기 날다

                                              4. 산악의 석동

                                                                                                                                                           손 정 모

  16명의 탐색 대원들. 이들이 완만한 동쪽 산비탈을 올라 능선에 올랐을 때다. 일제히 약속이라도 한 듯. 탄성을 질러대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세상에 이런 곳도 다 있었어?”

  “이야, 완전한 별천지로구나!”

  선경(仙境)으로서도 손색이 없는 곳이라는 둥. 미쳐 버릴 정도로 환상적이라는 둥. 갖가지의 찬사가 다 쏟아져 나온다. 다들 몇 마디씩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표정이다.

  잠시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은 뒤. 현준은 일행을 둘러보며 말한다. 손때가 절어 반들거리는 소나무 둥치를 가리키면서다. 소나무 둥치를 붙잡고 절벽 밑으로 내려가자고 제안한다. 소나무 아래쪽 어딘가에는 비밀 출구가 있을 거라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런 근거로서 소나무의 반들거리는 손때를 내세운다. 손때는 사람들의 수없는 통행을 뜻하는 것이라고 현준은 단언한다. 그리하여 비밀 출구를 발견하게 되면 돌발 사태에 대비해야 하리라 말한다. 현준은 덧붙여 비밀 출입구에 들어서게 될 때의 행동 지침을 설명한다. 각자가 안전에 최선을 다하고 유사시에는 호루라기로 연락하자고. 호루라기가 울리거든 일제히 발원지로 달려가자고 말한다. 현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본 뒤. 혹시 특별히 할 말이 있는 사람은 없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용수가 현준의 말에 손을 들더니 일행을 향해 말한다. 

  “비밀 출입구에 들어가면 비상사태가 발생할지도 몰라요. 그럴 경우에 대비하여 약 10분쯤 휴식 시간을 갖도록 해요. 그 동안에 다들 비상 연락처로 연락해 두는 게 어떻겠어요?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자신을 구조할 만한 사람들에게만 연락을 취하도록 하죠. 불필요하게 외부로 소문이 퍼지는 걸 막자는 취지예요.”

  용수의 말이 끝난 순간. 일제히 10분간의 휴식 시간에 들어간다. 그러면서 다들 비상 연락처에 연락을 취한다. 현준은 심 교수에게 전화를 한다. 심 교수는 현준에게 탐색할 지점의 위치를 상세하게 묻는다. 현준은 가능한 한 자세하게 핸드폰으로 설명해 준다. 심 교수에게 전화를 마친 후. 현준은 종학에게도 전화로 현재의 위치를 알려준다. 종학은 알았다고 확실히 응답한다. 24시간 동안 연락이 끊기면 곧바로 달려오겠다고 한다. 다들 사방의 연고자들에게 비상시의 도움을 요청한 모양이다. 현준은 가만히 시계를 들여다본다. 대략 5분쯤의 시간이 남아 있다.

  바로 이 때다. 현준의 핸드폰이 진동한다. 귓전으로 밀려드는 음성은 신림동 서민 아파트의 태희다. 이 시각에 태희가 웬 일일까 싶어 수화기를 든다.

  춘천에서 사고가 터졌다기에 궁금해서 전화한 거라고 한다. 서로 심드렁하게 지내면서도 안부 전화를 해 주는 태희가 아닌가? 절박한 중임에도 태희의 인간성에 고마움이 느껴진다. 곁에 있다면 손이라도 잡아 주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현준은 간단히 덧붙인다. 춘천에 온 김에 그냥 소양호 주변을 구경하는 중이라고.

  마침내 10분의 시간이 흘렀다. 다들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현준과 용수의 얼굴을 바라본다. 현준이 일행을 향해 말한다. 다들 차례차례 내려가자고. 그러면서 현준이 앞장서겠다고 말한다. 현준은 잠시 수직의 벼랑 아래를 내려다본다. 자욱한 안개에 휘감겨 으스스한 분위기다. 숨결을 가다듬은 후. 현준은 소나무를 잡고 절벽 아래쪽으로 발을 내딛는다. 돌출한 바위 모서리에 발을 옮겨 딛는 순간. 예상대로 오솔길이 드러난다. 그냥 위에서 바라보아서는 보이지 않던 길이다. 경사면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상태다. 헌데도 활엽수와 소나무들이 꽉 들어차 있다. 서너 걸음의 거리를 두고 일행이 뒤따른다. 20여m쯤 아래로 내려섰을 무렵. 무성한 다복솔 뒤에 바위 동굴(石洞)의 입구가 보인다. 입구는 6m의 폭에다가 높이는 2m에 이른다. 현준의 눈에 석동은 석회암 동굴로 여겨진다. 석회암 동굴에 대해서는 탐사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석동은 평면에서 아래 방향으로 20?의 경사로 기울어져 있다. 마침내 일행이 동굴 입구로 다가선다. 현준이 일행을 모아 놓고 목소리를 낮춰 말한다. 마침내 예상했던 비밀 출입구를 찾게 되었다고. 일행은 일제히 숙연한 표정으로 동굴 입구를 들여다본다.

  현준이 일행의 숙연한 눈빛을 대하자 가슴으로 싸한 느낌이 밀려든다. 동굴 탐색이 춘천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 중대한 작업이라는 느낌이 든 순간. 자신도 몰래 콧등이 시큰대며 눈물이 핑 돈다. 어느 결에 목청마저 떨리려고 한다. 잠시 숨결을 고른 뒤. 현준은 일행을 죽 둘러본다. 하나같이 긴장된 표정으로 현준을 바라보고 있다. 

  잠시 일행의 표정을 훑어 본 뒤에 현준이 말을 잇는다.

  “사내들이 새벽에 운반한 짐들은 어쩌면 실신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무술로 자신을 보호해야 할 상황입니다. 조금 전처럼 8개의 조로 나누어 이동하는 게 어떨까요? 각 조간의 간격은 10여m쯤으로 하도록 해요. 사람들이 몰려 있으면 무술을 제대로 펼치기도 어렵잖아요?”

  용수가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깜빡이더니 입을 연다.

  “현준 씨의 제안이 좋다고 여겨지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들 좋다고 찬성한다. 1조의 구성원은 현준과 용호다. 그리고 마지막 8조의 구성원은 용수와 영복이다. 일행은 침묵을 유지하며 조심스레 석동으로 진입한다. 석동은 입구에서 10m쯤 진행되다가 왼쪽을 향해 직각으로 꺾인다. 동굴의 진행 방향은 산비탈의 서쪽 절벽 면에 나란한 북쪽이다. 대략 100m 정도나 진입했는데도 석동 안엔 햇살이 내비친다. 어찌 된 셈인지 동굴의 길은 절벽 면을 따라 뚫려 있다. 절벽 면으로 바싹 다가간 굴길에선 얇은 구멍이 뚫려 빛살이 내부로 밀려든다. 굴길은 이처럼 절벽 면을 따라 나란히 형성되어 있다. 경사 20?로 아래로 내닫는 굴길은 거의 800m가량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굴 입구로부터 800m쯤 떨어진 곳엔 커다란 화강암 입석이 있다. 화강암은 외부에서 들여온 것임에 틀림없다. 화강암 입석에는 글자 크기가 30cm에 이를 정도의 한자들이 새겨져 있다. ‘天下絶對石洞(천하절대석동)’. 글자마다 힘이 넘치는 서체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진다. 일행에겐 동굴의 이름이 말해 주듯 동굴 내부의 크기가 궁금해진다. 입석이 위치한 곳에서부터 동굴의 크기는 갑작스레 커진다. 천정의 높이는 50m에 이르고 폭도 30여m에 달한다. 천정 부분에는 곳곳에 물방울이 매달렸다가 흘러내린다. 또한 비대한 종유석도 곳곳에 매달려 있다. 동굴의 바닥에는 곳곳에 석순이 자라고 있다.

  입석을 지나면서부터는 바닥 면이 수평으로 발달되어 있다. 절벽 쪽에 뚫린 구멍을 통해 보이는 바깥에는 폭이 좁은, 푸른 강이 펼쳐진다. 일행에게 이제야 동굴 지형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되는 느낌이다. 석동은 원래 남북으로 기다랗게 형성된 계곡을 이루는 가파른 동?서면의 양쪽 산야들 중. 동쪽 산야의 내부에 생긴 석회 동굴인 모양이다. 입석에서부터 안쪽으로 펼쳐지는 동굴의 크기는 실로 장대하다. 입석에서부터 30여m 안(북쪽)으로 떨어진 지점에서다. 일행은 직경 30m에 이르는 연못을 만나게 된다. 연못의 중앙까지는 수직으로 세운 화강석의 징검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연못의 중앙에서는 다시 북쪽으로 다섯 갈래의 징검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북쪽으로 향한 징검다리의 끝 부분에서부터 동굴의 높이는 급격히 낮아져 3m에 이른다. 그러면서 각각 5개의 작은 동굴로 갈라져 나가는 지형을 이룬다. 징검다리가 화강암 석재라는 사실로부터 이런 배치는 인공적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행은 다섯 갈래의 길을 두고 잠시 의논한다. 인원을 5군데로 나누어 진입하기로 결정한다. 서쪽 절벽 면에서부터 들어오는 햇살 탓이리라. 연못에는 수련과 연꽃이 만발한 상태다. 절벽 면을 따라 펑펑 뚫린 구멍. 거기로부터 스며드는 바람결로 꽃들은 한껏 농염하게 간들거린다. 연꽃잎마다 개구리들이 올라앉아 울음주머니를 불룩거리고 있다. 아마 연꽃과 수련도 바깥에서 채취해 심은 듯하다. 척박한 동굴에 조성된 윤택하면서도 운치 있는 연못. 명백하게 인공의 힘이 가해진 동굴의 빼어난 풍광이다. 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힘은 어디까지 뻗치게 될까? 연못의 풍광에 매료되어 잠시 주위를 둘러본 뒤. 탐색 조원들은 일제히 징검다리에 올라선다. 그리하여 건너편의 소형 동굴로 진입한다. 일행이 징검다리를 건널 때 바람결에 휩쓸려 연잎이 흔들거린다. 연꽃의 향기가 콧속으로 스며드는 게 한껏 단아한 느낌마저 든다.

  헌데 뭐가 잘못된 걸까? 연못을 지나 소형동굴에 들어설 무렵부터다. 용호와 원태가 구토를 하기 시작한다. 토사물의 악취가 금세 현준의 콧속으로 밀려든다. 뜻밖의 일이라 현준은 다소 당황스럽다. 혹시 그들이 섭취한 음식에 문제가 있었을까를 헤아려 보는 찰나. 이 번에는 현준마저 속이 메스꺼워지며 현기증이 인다. 퍼뜩 현준의 뇌리에 위기의식이 느껴진다. 자신의 뺨까지 때리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쓴다. 그래도 연신 잠이 몰려든다. 위기감에 비명을 내지르고 싶을 정도다. 현준이 옆을 바라보니 용호와 원태는 이미 나뒹굴어진 상태다. 이 때야말로 호루라기를 불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호주머니로부터 호루라기를 꺼내려는 찰나다. ‘철썩’ 소리를 내며 현준도 실신해 버린다.

  한편, 다른 징검다리를 건너려던 나머지 일행의 신세도 마찬가지다. 하나같이 수마를 참아내려다가 나뒹굴고 만다. 그러다가 마지막 탐색원인 용수까지도 나뒹굴고 만다. 실내엔 죽음 같은 적막감만 감돌 뿐.

  한편, 하루 전의 학술회의가 있던 날. 점심때인 낮 12시 반쯤. 은정과 T교수는 식당에서 잠시 빠져 나왔다. 학술회의장 부근에서 바람을 씌기 위함이었다. 홀연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정복의 경찰관 2명이 그들에게 다가섰다. 경찰은 신분증을 내밀며 은정과 T교수에게 말했다.

  “혹시 T교수님과 장은정 씨입니까? 좀 전에 과기처 장관이 정문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다른 볼일 때문에 학술회의장에 들를 시간은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T교수님과 은정 씨만 잠시 만나고 싶다고 해서 모시러 왔습니다. 함께 가시죠.”

  경찰관들은 T교수와 은정을 차에 태우고는 정문을 향해 달렸다. 정문에서 차가 잠시 멈칫거리는 듯했다. 그러더니 경찰차는 곧장 정문을 통과하여 달렸다. 경찰관들은 정문을 통과했는데도 차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T교수는 언짢은 목소리로 경찰관들을 향해 물었다. 정문을 훨씬 지나쳤는데도 과기처 장관은 어디에 있느냐고. 여차하면 따질 듯한 강경한 기세였다. 하지만, 운전석의 경찰관 복장의 사내는 코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과기처 장관 좋아하네? 살고 싶거든 까불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어!”

  T교수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곁의 경찰 복장의 사내가 신속히 T교수의 팔에 수갑을 채웠다. 연이어 은정에게도 수갑을 채웠다. 그리고는 탈지면에 투명한 액체를 쏟더니 잠깐씩 T교수와 은정의 코에 갖다대었다. 둘은 이내 나른한 표정을 짓더니 마취되어 잠들어 버렸다.

  경찰차가 정문을 빠져 나올 무렵. 검정 승용차 한 대가 바람처럼 뒤를 쫓았다. 쫓고 쫓기는 차량의 흐름. 뭔가 사고를 일으키고야 말 듯한 기세. 막힌 수로(水路)가 뚫리듯. 2대의 차량은 숨막힐 정도의 고속 질주를 한다. 검정 승용차의 운전자는 달리면서 핸드폰으로 어딘가로 연신 연락을 취했다. 경찰차가 춘천호반의 춘천역을 지나 56번 국도를 타고 달릴 때였다.

  운전석의 경찰관 복장의 사내가 뒷좌석의 사내에게 물었다. 아까부터 검정색 승용차가 따라붙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뒷좌석의 사내가 심드렁하게 응답했다. 모른 척하고 그냥 달리라고. 느랏재 터널을 지나 상걸리에 갈 때까지만 그대로 몰고 가라고. 일단 상걸리에 이르거든 차를 세우라고 했다. 거기는 호젓한 곳이기에 간단히 총으로 없애 버리자고 했다. 운전석의 사내가 곧바로 동의했다. 뒷좌석의 사내의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지만 총성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뒤에 다른 차가 안 보일 때 신속히 처리하자고 덧붙였다.

  경찰차에서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도 모른 채 검정 승용차는 줄기차게 뒤쫓았다. 한편 56번 국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검정 승용차를 새로 나타난 백색의 승용차가 뒤쫓았다. 검정 승용차의 썬 글라스의 사내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들며 명령 투로 잘라 말했다.

  “느랏재 터널을 통과하면 곧바로 놈들의 차를 세워야 해. 그리고는 놈들을 개머리판으로 실신만 시키라구. 그런 후엔 내게 뒤처리를 맡겨. 납치된 둘은 너희들이 트렁크에 싣고 곧장 인천항으로 달리라구, 알았어?”

  경찰차가 막 느랏재 터널을 통과하자 헌병 셋이 바리케이드로 차를 세웠다. 헌병 둘은 장전된 캘빈 총을 들고 있었다. 여차하면 발사할 자세였다. 경찰차가 멎는 순간 헌병 둘이 개머리판으로 경찰복 차림의 사내 둘을 실신시켰다. 그러더니 T교수와 은정을 군용 지프로 옮겨 실었다. 둘을 태우더니 군용 지프는 상걸리 방향으로 곧장 질주했다. 잠시 후 검정 승용차가 정차된 경찰차 곁에 와서 멈춰 섰다. 도로의 차선 바깥으로 경찰차를 옮겨 놓고는 운전자는 금세 검정 승용차로 달아나버렸다. 멀리 떨어진 채 망원경으로 지프와 검정 승용차를 감시하던 백색 승용차가 과속으로 내달렸다. 백색 승용차의 운전자는 놀랍게도 춘천 F대학교의 대학원생인 선영이었다. 그녀의 말소리가 강력한 음색으로 발산되었다.

  “내 말 잘 들어! 놈들이 느랏재 터널에서 헌병으로 위장해서 먹이들(피랍인들)을 재탈취했어. 지금쯤 상걸리로 진입하고 있을 거야. 깨끗이 처리해, 알았지?”

  56번 국도의 느랏재 터널에서 상걸리 방면으로 가면서 도로는 점차 협소해진다. 그러다가 상걸리 직전에서부터는 완연히 폭이 좁아진다. 바로 이 부분에 통나무로 덧댄 임시 바리케이드가 좀 전에 설치되었다. 달리던 지프가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차가 멈추자 도로변 텐트 속에 숨어 있던 복면 괴한들이 차를 덮쳤다. 괴한들은 정확히 열 명이었다. 괴한들은 각목으로 헌병 복장의 세 사내의 뒤통수를 때려 실신시켰다. 그리고는 지프를 차선 바깥에 주차시켰다. 괴한들은 T교수와 은정을 그들의 승용차에 옮겨 실었다. 이윽고 3대의 괴한들의 차량과 선영의 백색 승용차가 합류한 뒤였다. 4대의 승용차는 상걸리에서 좌회전하여 지방도로 들어섰다. 거기서부터는 곧장 북상하여 신이리까지 차를 달렸다. 신이리는 도로의 종착점이었다. 신이리에서는 여객선만이 소양호까지 이르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선영과 괴한들은 차를 주차장에 세웠다. 공영 주차장은 무료 주차장이며 선영과 괴한들의 차량 이외의 다른 차량은 없었다. 주차장에 내린 직후의 시각은 오후 3시 무렵이었다. 원래 신이리 선착장 주변은 인적이 뜸한 곳인 듯. 부근의 주차장마저도 정적에 잠긴 상태였다. 죽음처럼 고요한 공간. 대기의 흐름마저 정지된 듯한 현장이었다. 3분쯤 주변을 망원경으로 살펴서 인적이 없다고 확인한 뒤. 괴한들은 차내에서 T교수와 은정의 수갑을 풀었다. 선영은 T교수와 은정이 못 알아보게 검정색 썬 글라스와 중절모를 깊숙이 눌러 썼다. 그런 후에 괴한들은 T교수와 은정의 머리에 찬물을 끼얹어 의식을 찾게 했다. 의식을 찾자마자 반항하려는 T교수와 은정에게 괴한들은 칼날을 들이대었다. 돌연히 다가온 극한 상황에 T교수와 은정은 질식할 듯했다. 극한으로 휘몰리는 현실의 물줄기에 둘은 익사할 지경이었다. T교수와 은정에게 충분히 공포심을 안긴 뒤. 괴한들은 T교수와 은정을 데리고 신속히 하차했다. 괴한들은 주차장 북서쪽의 풀숲에서 고무보트를 꺼내 선착장에 띄웠다. T교수와 은정을 먼저 실은 뒤에 선영과 괴한들도 함께 탔다. 도합 13명이 보트에 오른 거였다. 괴한 중의 하나가 고속용 엔진을 켜며 핸들을 조작했다. 경쾌한 반동과 함께 쾌속선은 신이리 선착장에서 북쪽으로 물살을 가르며 달렸다.

  10분쯤 지났을까? 새골 선착장에 닿았다. 오후 3시가 지난 시각이라 선착장에는 그들 이외에 인적이라곤 없었다. 괴한들과 선영이 먼저 배에서 내린 뒤에 T교수와 은정을 하선시켰다. 괴한들 6명이 보트를 머리 위로 들어올려 평평하게 균형을 맞추었다. 그러더니 곧장 서쪽 산기슭으로 달려갔다. 나머지 괴한들 넷은 T교수와 은정을 데리고 보트를 멘 괴한들을 뒤쫓았다. 선영은 맨 뒤쪽에서 사방을 휘둘러보며 조심스레 괴한들을 따라갔다.

  괴한들은 새골 선착장에서 400여m 떨어진 억새 숲에 고무보트를 뒤집어 감추었다. 그런 뒤에 일행은 산비탈을 따라 상부의 능선까지 그대로 올랐다. 능선에 오르자마자 수직 절벽으로 치솟은 서쪽의 산비탈면이 드러났다. 그 산비탈 절벽 아래로는 좁은 폭의 강이 남북으로 흘러내렸다. 강 건너편에는 높이가 400여m, 길이가 대략 2km에 달하는 거대한 산줄기가 치솟아 있었다. T교수와 은정은 창졸간에 별천지를 맞는 느낌이었다. 괴한들에게 납치된 현실이 혹시 꿈은 아닌지 의아스러웠다. 악몽이라면 제발 빨리 깨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절망적일 정도로 괴한들의 억압은 극심했다. 괴한들에게 이끌려 T교수와 은정은 능선의 서쪽 산비탈의 수직 경사면 위에 섰다. 깎아지른 듯한 경사면을 내려다보자 T교수와 은정은 슬그머니 위기의식을 느꼈다. 혹시 괴한들이 자신들을 밀어뜨려 죽이지는 않을지 왈칵 겁이 났다.

  그런데 절벽면을 따라 우뚝 치솟은 소나무 둥치를 잡고 괴한들이 내려서고 있었다. 괴한들이 수직 절벽 아래로 왜 내려가는지 T교수와 은정에게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20여m쯤 아래로 내려서자 놀랍게도 석동(石洞)의 입구가 나타났다. 그제야 T교수와 은정은 비밀 장소로 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T교수와 은정의 눈에 비친 석동은 전형적인 석회암 동굴이었다. 입구에서부터 동굴은 수평면에서 대략 20?의 각도로 아래로 내려가는 지형이었다. 굴길은 입구에서 10m까지는 동쪽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10여m 지점부터는 굴길이 왼쪽 직각으로 꺾여 북쪽을 향하고 내리달렸다.

  800여m쯤 계속하여 내려간 지점부터는 굴길의 방향이 수평으로 바뀌었다. 이 지점에는 화강암의 커다란 입석이 있었다. 입석에는 ‘天下絶對石洞(천하절대석동)’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입석이 있는 곳부터는 높이가 50여m에 폭은 30여m에 달하는 동굴의 크기를 드러내었다. 입석에서부터 30여m 떨어진 지점에 이르니 직경이 30여m에 달하는 연못이 있었다. 연못의 주변엔 3m 높이의 화강암 입석에 ‘봉연(鳳淵)’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연못에는 연꽃과 수련이 한창 만발한 상태로 뒤엉켜 있었다. 동굴은 계곡에 나란한 방향으로 기다랗게 뚫려 있었다. 계곡을 향한 방향의 동굴 벽면의 곳곳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 곳을 통해 햇살과 함께 바람도 밀려드는 상태였다. 연못에는 다섯 갈래로 화강암 지주로 이루어진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다. 징검다리가 끝나는 연못의 건너편엔 동굴의 천정이 낮아지면서 5개의 작은 동굴이 눈에 띄었다. 5개의 동굴을 향해 징검다리를 건너기 직전이었다. 선영과 괴한들이 가방에서 일제히 방독면을 꺼내어 썼다. 그러면서 T교수와 은정에게도 방독면을 씌워 주었다. 다섯 갈래로 갈라진 징검다리들 중의 한가운데로 선영이 올라섰다. 그 뒤를 따라 괴한들과 T교수와 은정도 따라갔다. 그리하여 일행은 줄지어 징검다리를 건넜다. 징검다리가 끝나는 곳엔 높이가 3m에 불과하고 폭이 4m쯤 되는 작은 동굴이 있었다. 작은 동굴에 들어서면서부터 일행은 일제히 방독면을 벗었다.

  작은 동굴의 입구를 통과하여 10여m쯤 들어설 때였다. 돌연 직경이 50여m에 해당하는 원형의 화원(花園)이 나타났다. 화원을 이루는 광장의 높이는 20여m에 이르렀고 천정은 돔(dome)형이었다. 토양을 보니 외부에서 인공적으로 가져다 나른 것 같았다. 연못에서 5갈래로 갈라져 5개의 작은 동굴에 이르던 길. 이 길들은 결국 화원에서 모두 만나도록 조성된 거였다. 화원에는 중심점을 지나는 16개 방향의 직선으로 형성된 징검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화원의 천정에는 20개의 형광등이 매달려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T교수와 은정은 깜짝 놀랐다. 선영과 괴한들의 일행이 동굴 내부에까지 전기 시설을 해 두었을 줄이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T교수와 은정에게 동굴은 하나의 독립 왕국처럼 느껴졌다. 납치되어 온 상태이긴 했지만 동굴에 조성된 환경에 넋을 잃을 정도였다. 화원에는 중심을 지나는 64개의 직선으로 균등하게 분할된 영역마다 다양한 종류의 기화요초가 물결쳤다. 미세하게 뚫린 계곡 방향의 벽면을 통하여 숱한 벌과 나비들이 날아들어 이리저리 춤추었다. 종류를 알 수 없는 각종 식물에선 다채로운 꽃이 피어 눈을 현란하게 만들었다. 미세하게 뚫린 벽면을 통해 바람결이 휩쓸릴 때마다 꽃들이 물결처럼 남실댔다. 설치된 스프링클러에선 일정 시간 간격마다 물줄기가 분사되곤 했다. 분사되는 물줄기는 동굴 바깥 계곡의 강물을 끌어들인 모양이었다. 물줄기가 분사될 때마다 진하고 그윽하고 매콤한 향기들이 실내에 그득했다. T교수와 은정에게는 별천지에 들어선 것처럼 쇄락(灑落)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들이 납치된 건지 거듭 의구스러울 지경이었다. 이런 쾌적한 환경을 조성할 인물들이라면 악인들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둘은 잠시 사고 기능마저 마비되는 듯했다.

  화원의 중심으로 연결된 징검다리를 건너 화원을 관통하는 지점. 거기엔 높이 3m에 이르는 작은 동굴이 연결되어 있었다. 작은 동굴의 길이는 30여m에 이르렀다. 작은 동굴이 끝나는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T교수와 은정은 또다시 탄성을 지를 뻔했다. 작은 동굴이 끝나는 부위에는 파랗게 남실되는 연못이 있었다. 직경 50여m, 둘레가 180여m에 달하는 연못이었다. 연못 주위엔 3m의 화강암 입석에 ‘용연(龍淵)’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연못의 수면은 화원의 바닥면에 비하여 10여m쯤 아래에 있었다. 연못의 물은 괴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신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뚫린 벽의 구멍을 통하여 계곡의 강물로 흘러나가는 모양이었다. 연못에 괴는 물은 석회암층을 통해 스며든 빗물이 수맥을 이루어 연못으로 흘러드는 모양이었다. 대자연의 현상이란 너무나 오묘한 느낌이 들 정도로 숙연하기만 했다.

  원래 우리나라의 석회암층은 고생대에 형성된 퇴적암층으로 바다의 융기에 의해 현재의 육지가 되었다. 대표적인 석회동굴은 충청도 단양 지역이나 강원도의 삼척 지역에 발달되어 있다. 특히 삼척의 환선굴(幻仙窟)은 동양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석회동굴이다. 강원도의 춘천 지역은 마그마의 분출에 의한 화성암이 대부분의 지표를 덮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춘천의 소양호 부근에 석회동굴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아마도 고생대의 퇴적암 지층을 미처 신생대의 화성암층이 뒤덮지 못했던 영역이었으리라.

  연못에서는 뜨거운 증기가 치솟고 있었다. 원래 이 지형은 석회동굴이었지만 동굴 하층에 신생대에 마그마의 관입을 받았다. 그리하여 화성암 하부의 불안정한 부분에서 방출되는 열기가 수시로 석회동굴로 분출되었다. 용연을 사이에 두고 화원과 정반대편엔 두 곳의 작은 동굴이 있었다. 두 동굴의 입구엔 철제문이 육중하게 매달려 있었다. 좌우 동굴에는 각각 ‘천왕문(天王門)’과 ‘용왕문(龍王門)’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다. 재질로 볼 때 철제문(鐵製門)과 편액은 근래에 제작된 모양이었다.

  선영은 천왕문 앞에 이르러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천왕문이 자동으로 열리며 2명의 흑의 청년이 허리를 굽혀 일행을 맞았다. T교수와 은정은 천왕문을 통과하며 실내를 훑어보았다. 천왕문에서부터 안쪽으로 20여m까지는 콘크리트로 축조된 현대식 통로였다. 통로는 높이가 3m, 넓이가 5m가 되도록 사각 터널 형으로 만들어졌다. 통로의 끝엔 가로, 세로가 각각 10m에 이르는 커다란 방이 하나 있었다. 방바닥엔 페르시아 융단이 깔려 있었다. 방의 중앙 후미엔 비파나무로 만들어진 기다란 책상과 몇 개의 의자가 놓였다. 책상 위에는 10대의 대형 액정 컴퓨터와 무선 유도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또한 해외에서 발신되는 전파를 자동으로 수신하여 동영상으로 전환하는 설비마저 갖춰져 있었다. 10대의 컴퓨터의 화면에는 동굴 곳곳의 정경이 적나라하게 번갈아가며 떠오르고 있었다. 그뿐이었으랴? 해외 곳곳에서 날아드는 영상 신호가 자동으로 제어되어 화면에 비쳐지고 있었다. 한 마디로 천왕문이 동굴의 중앙 통제실에 해당하는 모양이었다. 의자엔 30대 중반의 곱상한 중년 여인이 앉아 있었다. 확실히 중년 여인은 누구에게나 첫눈에 탄성을 자아내게 할 정도의 미모를 지녔다. 나이보다 10년은 더 젊어 보이는 우윳빛 살결. 가녀린 초승달처럼 휘어져 운치 있게 내뻗은 눈썹. 오뚝한 콧날과 윤기 흐르는 입술. 청정한 기운이 가득 실린 흑백이 또렷한 눈. 얼굴 전체로 이목구비가 갸름하게 조화를 이루어 가히 눈부실 정도였다. 여인은 중국 북경대학의 교수로 1년간 휴직하여 국내에 체류하는 중이었다. 여인의 이름은 무청화(武淸華)라 했다. 청화는 책상 위의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더니 이내 건장한 체격의 20대 중반의 붉은 옷차림의 네 사내들이 실내로 들어섰다. 네 사내들의 등엔 한자로 각각 天(천), 地(지), 玄(현), 黃(황)의 글자가 찍혀 있었다. 청화는 선영을 불러 낮은 목소리로 뭔가 지시를 내렸다. 선영은 즉시 T교수와 은정을 데려온 괴한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용왕문 감옥에다가 우선 이 년을 가두어 놓고 잘 감시해. 혹시라도 이 년에게 엉뚱한 마음을 품고 집적대는 놈이 있으면 없애 버릴 거야. 동굴 내의 모든 곳은 감시 카메라로 감시당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해. 알았으면 나가 봐!”

  괴한들은 허리를 굽혀 예절을 표하더니 은정을 데리고 천왕문 밖으로 나갔다. 천왕문 안에는 청화와 선영, T교수와 4명의 사내들만 남았다. 사내들의 체격은 체중이 평균 90kg에 달할 정도의 거구들이었다. 사내들은 ‘장사(壯士)’라고 불리었고, 서열의 순서는 천지현황의 글자 순이었다. 청화는 중국인이었지만 한국말에 있어서는 여느 한국인들만큼 유창했다. 청화는 장사들을 향해 말했다. 당장 T교수를 무릎 꿇려 앉히라고. 또한 팔을 등 뒤로 돌려 수갑을 채우라고 했다. 장사들은 대답과 동시에 신속히 T교수의 무릎을 꿇리고는 수갑을 채웠다. 장사들이 깔끔하게 동작을 마무리 짓자 청화는 4명의 장사들을 흘깃 바라본 뒤. 그들을 향해 말했다. 이제 용무가 끝났으니 선영이만 남고 장사들은 나가도 좋다고. 무척 두렵다는 표정을 지으며 장사들은 허리를 90?로 꺾어 절을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장사들이 일제히 물러가자 청화는 옆의 의자를 가리키며 선영에게 말했다. 의자에 와서 앉아 있으라고. 선영은 경건히 고개를 숙이며 신속히 의자에 앉았다. 청화가 싸늘한 눈빛으로 선영을 흘겨본 뒤다.

  청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꿇어앉은 T교수의 뒤로 다가섰다. 팔이 뒤로 돌려져 수갑이 채워진 T교수를 잠시 내려다본다. 그러더니 T교수의 왼쪽 어깨를 그녀의 오른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T교수! 당신은 납치된 사람이오. 당신의 목숨은 오로지 내 손아귀에 달렸소. 납치된 이상 모든 자존심을 버리시오. 조금이라도 자존심을 세우려다간 곧바로 목숨이 끊길 거요. 우선 내 말의 신뢰도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시켜 주겠소.”

  말을 마치는 순간. 서서히 T교수의 어깨에 얹힌 그녀의 손에 기력(氣力)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물리학(物理學)에 의하면 ‘기(氣)’란 일종의 체내에 축적된 전자기(電磁氣) 에너지(energy)를 의미한다. 일정한 진동수를 가지며 수직으로 교차하는 진동면을 갖는 전기파와 자기파로 이루어진 파동 에너지. 이것을 전자기 에너지라고 한다. 전자기 에너지의 크기는 플랑크(Planck) 상수와 진동수의 값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물리량이다.

  청화의 손에 기력이 흐르는 순간. T교수의 전신이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자신도 몰래 부르르 몸이 떨렸다. 금세 숨결이 가빠지며 심장이 멎을 듯했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여 청화의 손길을 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T교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반항하려는 기색이 간파되자 더욱 기(氣)가 세차게 밀려들었다. 구토가 치밀며 심장이 터질 듯했다. 이 때 T교수의 어깨에서 청화가 손을 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동안에 불과했다. 연이어 T교수의 등줄기로 뭔가가 와 닿았다. T교수는 직감적으로 전자 충격기임을 알아차렸다. T교수는 순간적으로 암울한 기분에 휩싸였다. 자신이 전자파로 심하게 시달리게 되리라 생각되었다. 그러면서 긴장이 되어 방광이 터질 지경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금세 사정될 듯한 위기감마저 느꼈다. 어느 순간. T교수는 전자파의 충격이 너무 커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면서 몸을 일으켜 전자 충격기를 든 청화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헌데 일어서기는 고사하고 청화의 손을 떨칠 수가 없었다. T교수의 표정을 지켜보며 청화가 충격기의 전압을 조금 더 높였다. 감전으로 죽을 듯한 예감으로 T교수가 땅바닥에 나뒹굴며 발버둥질을 쳤다. 살아야겠다는 원초적 욕망만 남았을 뿐. 거기에는 유명한 대학의 교수라는 자존심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순간적으로 그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에 휩싸이기까지 하며 바지에 정액을 내갈겼다. 이 때에야 청화가 전자 충격기를 거두어 들였다.

  잠시 후에 창백한 모습으로 T교수가 일어나 앉았다. T교수는 당면한 위험 요인이 청화의 놀라운 기력 때문임을 알았다. T교수는 경황이 없는 와중에서도 잠시 기의 본질을 떠올려보았다.

  나일강의 전기메기나 전기뱀장어는 체내에서 전기에너지를 발출(拔出)하여 다른 생물체를 감전시켜 먹이를 잡는다. 생물학(生物學)적으로는 체내에 발전 기관(發電器官)이 있어서 순간적인 고전압의 전기에너지를 발출한다. 사람의 신체에는 이런 발전 기관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헌데 특이 체질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 순간적인 혈류의 변화로 인한 뉴런의 반응으로 고전압에 상응하는 전기에너지를 발출할 수도 있다. 이를 세간에서는 ‘기(氣)’라고 일컬으며 아주 특수한 현상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청화의 전기에 대한 체질적인 특성은 어릴 때부터 유다른 데가 있었다. 유년 시절의 비 내리던 날. 마을 정자나무 밑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비를 피할 때였다. 고막이 찢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번갯불이 번쩍이던 순간. 벼락을 맞아 정자나무가 타서 쓰러지는 바람에 대다수의 친구들은 화상을 입었다. 그런데도 청화는 전신이 멀쩡하기만 했다. 그 이후부터 청화에게는 전기에 관한 특이성이 발현되곤 했다. 그런 차에 기공(氣功) 수련을, 어릴 때부터 기공(氣功)의 달인으로부터 체계적으로 지도받았다. 그래서 청화는 자타가 공인하는 기공의 달인이 된 거였다. 어쩌다가 괴물 같은 여자에게 걸려들었는지? T교수는 생각만 해도 전신이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그의 목숨은 오로지 청화의 손에 달린 셈이었다. 그런 청화에게 어깨를 짚혔으니 T교수가 어찌 견뎌냈겠는가? 이전에 석회동굴 내의 여인이라곤 청화와 선영밖엔 없었다. 부하로 거느린 거구의 사내들이 스무 명이었다. 여인 둘이서 스무 명의 사내를 다스리는 비결이 바로 기공에 있었다. 묘하게도 선영도 유전적으로 청화와 유사한 체질의 소유자였다. 선영은 청화의 눈에 특이 체질임이 드러나 어릴 때부터 청화의 체계적인 지도를 받았다. 기공이란 대단한 거였다. 어떤 도검(刀劍)의 위협 하에서도 초연할 수 있는 강점이 있었다. 수갑이 채워진 상태의 T교수. 청화가 기공으로 재차 어떤 장난을 칠지 두려웠다. 무척 불안하여 눈마저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T교수의 불안한 얼굴 표정을 흘깃 바라보며 청화는 선영에게 지시했다. 수갑을 풀어 주고 T교수가 앉을 의자도 갖다 주라고 했다. 선영은 상냥한 표정으로 응답하며 즉시 몸을 놀렸다. 곧바로 T교수의 수갑을 풀고는 의자에 앉도록 권했다.

  수갑이 갓 풀린 채 의자에 앉혀진 T교수였다. 극도의 공포심으로 인해 T 교수의 가슴은 연신 떨렸다. 비록 5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느낌은 으스스하기만 했다. 언제 청화의 손에 죽음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청화는 눈썹을 찡끗하더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T교수! 내 말 잘 들으세요. 나는 중국 북경대학의 교수요. 교수가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니오. 알량한 자존심을 빨리 버리는 게 당신의 신상에 이로울 거요. 내 말 알겠소?”

  T교수는 핏기 없는 얼굴로 알았다며 고개를 끄떡였다. 눈두덩까지 움푹 팬 모습이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청화는 다소 냉랭한 표정으로 T교수에게 물었다. T교수와 은정을 1차로 납치해 온 경찰관들이 누군 줄 아느냐고. 질문하면서 청화는 T교수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추호도 거짓말할 생각을 말라는 듯한 경고처럼 여겨졌다. T교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응답했다. 얼떨결에 당한 일이라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잠시 T교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 뒤. 청화는 다소 비웃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연히 그랬겠죠. 경찰관으로 위장한 녀석들은 영국 X대학의 로첸(Swat Rochen) 교수의 끄나풀들이었소. 나이 60세의 로첸은 정치에도 손을 뻗쳐 행정 각료까지 지낸 사람이오. 그런 그가 막대한 정치 자금으로 한국에 산업 스파이들을 보낸 거요. 산업 스파이들은 금전으로 한국인들을 매수하여 일을 꾀하려고 했던 거죠. 한국인들을 통해 성과물을 탈취함으로써 자기네들의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거요. 문제는 스파이들의 미묘한 움직임조차도 나의 정보망을 비켜가지 못한다는 거요.”

  말을 하다 말고 청화는 흘깃 선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선영을 향해 말했다. 당장 용왕문에 가 있으라고. 거기에서 은정이 잘 갇혀 있는지를 살펴보라고 했다. 또한 사내들이 쓸데없이 은정에게 추근추근하지는 않는지도 잘 지켜보라고 했다. 혹여 문제가 생기면 즉시 벨을 누르라고 했다. 선영은 곧바로 응답하며 허리를 굽혔다. 절대로 토라곤 달아보지 않은 듯한 어투였다. 선영마저 청화 곁을 떠난 뒤였다. T교수의 가슴에 불안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T교수는 더욱 처연한 심정이 되었다. 청화와 단독으로 대면한 자리이지 않는가? 말하다가 혹시라도 그녀의 기분을 언짢게 할까 봐 두려움이 앞섰다. 그녀의 분노는 T교수에 대한 생명의 위협과도 직결될 것이리라. 그리하여 T교수는 경직된 얼굴로 청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T교수! 내 말 잘 들으시오. 지금은 우리 둘만 남겨진 상태요. 노파심에서 하는 얘기지만 혹시라도 내게 기습을 하겠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요. 모험해 보는 것도 좋겠지만 당신의 생명과 직결되는 모험은 삼가는 게 좋을 거요.”

  T교수는 남자라는 관념을 버렸다. 이미 청화의 기세에 눌린 상태였다. 시키는 대로 따르기로 체념한 처지였다. 문득 가슴속으로 문무를 겸비한 과거의 선비들이 떠올라 착잡한 심정이었다. 

  청화의 말을 듣는 순간. T교수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요즘 세상에 무술이 어디에 필요하냐면서 무술을 경멸해 오던 자신이었다. 군복무 시절에 유격 훈련을 받으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짓던 T교수였다. 남들과 주먹 대결이라곤 거의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유독 폭력에 대한 공포로 어쩔 줄 모를 지경이었다. 청화는 잠시 모니터를 통해 용왕문 내의 선영의 모습을 지켜보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나선 고개를 돌려 T교수를 향해 말했다.

  “당신을 도중에 가로챈 헌병들은 누구일 거라고 생각하오? 당연히 당신은 알 수가 없겠지요. 걔들은 일본 Z대학 다나까 박사가 보낸 스파이들의 끄나풀들이오. 내가 어떻게 다 아느냐고요? 아까도 말하지 않았소? 나의 정보망을 벗어날 스파이들은 별로 없을 거라고 말이오. 나에 관해서는 북경대학의 교수란 것만 알고 있으면 되오. 대학의 이름을 숨기지 않고 구체적으로 밝히는 건 한국을 개똥으로 여기기 때문이오. 중국이 오죽하면 고구려사(高句麗史)를 부인한다고 선언했겠느냔 말이오. 그래서 나 또한 한국을 개똥으로 여긴단 말이오. 불만 있소?”

  T교수는 황급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청화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면서도 비감스런 마음에 눈시울에 눈물이 맺히려고 했다. 이런 표정을 알아차린 청화의 눈에 슬쩍 경멸의 빛이 스쳐 흘렀다. 곧바로 청화의 인상이 표독스러워지며 입에서 독설이 흘러나왔다. 꼴에 눈물을 흘리느냐고. 교수라고 존댓말을 써 주려고 했더니 꼴값을 떤다고. 청화가 한국을 개똥으로 여긴다는 말을 못 들었느냐고 윽박질렀다.

  청화의 독설을 듣는 순간. T교수는 청화의 목을 와락 꺾어 버리고 싶었다. 그 자신뿐만 아닌 한국에 대한 모독의 발언까지 청화가 해대지 않았던가? 울분에 휩싸인 T교수의 표정은 처참할 정도였다.

  말을 하다 말고 격분한 기색으로 청화가 책상 위의 벨을 눌렀다. 그러자 4명의 장사들이 신속히 나타났다. 벨을 누른 시간과 장사들이 나타난 시간이 같았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장사들은 청화에게 손가락으로 T교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영수(領袖)님, 이 놈이 혹시 반항했어요?”

  얼굴에 잔뜩 경멸감이 감도는 얼굴로 청화가 장사들에게 말했다. T교수를 용왕문 내의 감옥에 가두라고. 아직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작자가 T교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선영에게 은정을 데리고 청화에게로 오라고 전하라고 했다. 사내들은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T교수를 감옥으로 데려갔다.

  선영이 은정을 데리고 천왕문의 청화 앞에 나타났다. 청화는 선영에게 눈짓을 보냈다. 선영은 은정의 팔을 등으로 돌려 수갑을 채워 바닥에 꿇어 앉혔다. 무술로 단련된 몸이라 동작이 이를 데 없이 신속하며 정확했다. 그런 뒤에 청화의 좌측 뒤에 가만히 섰다. 청화는 선영을 향해 말했다. 수고했다면서 아까처럼 용왕문에 가서 T교수가 잘 있는지 살펴보라고 했다. 수고했다는 말을 모처럼 듣는 선영이었다. 하지만, 언제 역정을 터뜨릴지 모르는 청화라 두렵기만 했다. 선영은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천왕문을 빠져 나갔다. 선영이 나간 뒤에 청화는 은정의 왼쪽 어깨에 핸드폰 겸용의 전자봉을 올려놓았다. 그러면서 은정을 향해 말했다. 은정에게서 반항심을 제거해야겠다고. 다소 고통스럽더라도 잘 견뎌보라며 윽박질렀다.  

  말을 마치면서 서서히 계기판의 눈금을 높이기 시작했다. 전자파가 은정의 몸에 실리는 순간. 은정은 ‘아’ 소리를 지르며 움찔했다. 정전기를 타는 느낌에 움찔 놀랐던 탓이었다. 그런데 서서히 통증이 커지면서 급격히 전신의 근육이 마비되는 느낌마저 들었다. 처음에는 안간힘을 쓰고 견뎌보려 했다. 그러나 통증은 급격히 심하여 자신도 몰래 비명을 내질렀다. 그뿐이었으랴? 어떻게든 몸이라도 일으켜 보려 했지만 근육이 찢기는 듯한 통증에 주저앉고 말았다. 전신의 근육이란 근육은 다 찢기는 듯하여 비명을 지르다가 그만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은정의 몸에서 지린내가 피어올랐다. 은정의 지린내를 맡자 청화는 서서히 전자봉을 은정에게서 뗐다. 은정의 눈에는 공포의 빛이 역력히 배어 있었다. 죽음 직전까지 떠밀렸다가 되돌아온 사람의 처절한 행색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표정이었다.

  청화는 은정의 몸에서 수갑을 풀고는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는 은정의 치마를 걷어 올려 팬티가 젖었음을 확인했다. 그러자 옷장 서랍에서 팬티 한 장을 꺼내 은정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청화의 말에 순순히 응하면 고통이 적을 거라고. 혹여 반항할 마음을 품으면 곧바로 죽게 될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린내로 고약하니까 빨리 팬티를 갈아입으라고 덧붙였다. 

  은정은 청화로부터 팬티를 건네받고는 뒤돌아서서 금세 팬티를 갈아입었다. 팬티를 갈아입는 순간에도 은정의 가슴은 부들부들 떨렸다. 극단적인 공포로 질액마저 움찔움찔 분비되었다. 은정은 순간적으로 공황감에 빠졌다.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얼빠진 모습의 은정을 청화가 재차 의자에 앉혔다. 그러더니 청화가 벨을 울려 선영을 불렀다. 청화는 오줌에 젖은 은정의 팬티를 선영에게 들려서 빨래터로 내보냈다. 둘만 남게 되자 청화가 으스스한 웃음을 띠며 은정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양 손으로 은정의 목을 왈칵 죄었다. 은정의 숨길이 ‘헉’하고 막히려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손을 풀고는 은정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그 찰나였다. 은정의 혼백마저 다 달아나 버리는 기분이었다. 은정이 질겁하여 몸서리칠 때였다. 이 번에는 청화가 왼손으로 은정의 뒷머리카락을 슬슬 쓸어 올렸다. 은정은 전신에 와락 소름이 끼치는 듯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대로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은정은 넋이 빠진 형색으로 청화의 손길에 시달릴 따름이었다.      

  “은정아, 너는 납치된 사람이란 걸 잊어서는 안 돼. 네 목숨은 언제든 내 손에 달려 있을 뿐이야. 너는 더 이상은 자유인이 아니야. 내 말 알아듣겠어? 내가 누군 줄 알겠니? 나는 중국 북경대학의 교수야. 너도 알고 있지? 얼마 전에 중국이 고구려사(高句麗史)를 부인한 일 말이야. 중국이 얼마나 한국을 업신여기면 그런 발언을 공공연히 했겠어? 나 역시 한국인들은 철저히 무시하고 경멸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야.”

  잠시 말을 끊고 은정의 반응을 지켜보더니 청화는 말을 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네가 살아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 말에 순종하는 거야. 기습하거나 반항하려고 하면 곧바로 목숨을 잃게 되고 말아. 인간의 생명은 단지 하나일 따름이야. 부질없는 가치관에 얽매이지 말란 말이야.”

  은정은 이 비참한 현실이 진정 야속하기만 했다. 죄도 없이 곤욕을 당하는 자신이 한없이 비감스러웠다. 생각할수록 설움이 치밀어 올라 어깨선이 흔들렸다. 그러는 사이 자신도 몰래 눈시울에 눈물이 괴었다. 은정의 눈물을 보는 순간 청화가 책상을 ‘탁’ 소리가 나게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청화에게 눈물은 격분을 일으키게 만드는 요소였다. 눈물은 힘없고 나약한 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기는 청화였다. 특히 자신을 즉천무후(則天武后)인 무조(武照)의 후예라고 여기는 청화임에랴! 청화는 마치 당나라의 여황제라도 된 듯. 은정을 노려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네가 방금 눈물을 흘렸어? 네가 너희 나라를 위해 뭘 했다고 눈물을 짜고 있느냐구? 정녕 네가 눈물을 흘릴 만큼 나라를 위해 행한 업적이 있어? 왜 말을 못해?”

  은정은 눈물을 지우고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뭘 잘못해서 납치되었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왜 하필이면 T교수와 은정이 납치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물었다. 두려워서 한없이 몸뚱이가 떨렸지만 청화의 눈을 응시하며 또박또박 물었다. 이런 은정의 자세가 청화에겐 한없이 건방지게 보였다. 금세 불길같이 격분한 얼굴로 청화가 말을 잇는다.

  “그걸 물어보려면 나한테만 묻지 말고 영국의 로첸이나 일본의 다나까에게도 물어 봐야지. 분명히 납치는 로첸이나 다나까의 졸개들이 먼저 했잖아? 지금 네가 그걸 내게 따질 상황이냐? 완전히 분수를 모르는구먼.”

  청화가 씩씩대며 말을 끝내자 책상 위의 벨을 눌렀다. 이내 4명의 장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을 흘깃 바라보며 청화가 말했다. 당장 은정을 다시 감옥에 집어넣으라고. 붙잡혀 온 주제에 돼 먹지 못하게 말이 많다고 역정까지 냈다. 청화의 얼굴에 서린 서릿발 같은 냉기로 인해 장사들도 기가 질린 듯했다. 덩달아 은정을 노려보는 사내들의 눈빛에도 차가움이 일렁였다. 감히 청화를 화나게 만든 은정이 용납될 수 없는 심정이었다. 장사들은 곧바로 허리를 굽히며 천왕문 밖으로 은정을 데리고 나갔다. 천왕문이 닫히자 청화는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러면서 생각에 잠겼다.

  ‘잡혀 온 연놈들이 만만찮아 보이는데? 어떻게 구박을 하여 정보를 캐 내지?’

  청화의 얼굴에 섬뜩한 살기가 서렸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파르스름한 불길이 치솟을 정도였다. 살짝 눈썹을 찌푸리더니 입술마저 질끈 깨물었다. 그러다가 청화는 책상 위의 벨을 눌렀다. 선영이 금세 천왕문을 열고 들어섰다. 선영이 눈앞에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청화가 입을 열었다. 잠시 함께 용왕문 내의 연구실을 둘러보러 가자고. 실험의 진행 상황을 점검해 보겠다고 했다. 선영은 양순한 표정을 지으며 청화를 안내할 자세를 취했다.

  둘은 천왕문을 걸어 나와 천왕문 곁의 소동굴의 출입구인 용왕문 앞에 이르렀다. 흑색 의상 의 2사내가 허리를 굽히며 2여인을 맞았다. 청화가 앞서고 선영이 한 걸음쯤 뒤처진 상태로 2여인은 걸음을 옮겼다. 걸으면서도 스승에 대한 배려를 하는 모양이었다. 용왕문의 실내는 천왕문보다 훨씬 더 넓었다. 용왕문의 실내에는 대형 연구실 2개와 3개의 실험실이 있었다. 또한 그 곁에는 대형 욕실과 식당이 있었다. 식당 곁에는 자가 발전소가 있었고 거기에 관련된 유류 저장 탱크도 있었다. 동굴 내의 전기는 자가 발전소에서 기름을 태워 공급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용왕문이란 출입문에서 50여m 떨어진 안쪽에는 쇠창살로 제작된 감옥이 2채가 있었다. 남자와 여자 죄수를 따로 수용하도록 제작된 거였다.

  청화와 선영은 제1 실험실에 들렀다. 거기는 각종 세균과 배아세포를 증식시키는 배양실이었다. 삼중의 내압 유리가 장착된 10L 금속제 항온조가 20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각 항온조마다 고압에 견딜 수 있는 금속 재료가 사용되었다. 항온조를 연결하는 내압 파이프들이 기다란 행렬을 이루었다. 시료 주입구 주변에는 부착된 압력계 및 각종 감지 센서가 복잡하게 매달려 있었다. 항온조의 뚜껑을 열면 내부에는 시험관 꽂이들이 동심원으로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다. 시험관마다 고유한 레테르가 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