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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황색 갈매기 날다
2. 선의(善意)의 경쟁
손
정 모
온 산야가 녹음의 물결로 남실대는 5월 하순이다. 짙게 겹쳐진 나뭇잎들의 색조가 신비롭기 그지없다. 어디를 둘러봐도 아늑하고 포근한 기운이 충만한 느낌이다. 현준은 오전 9시에 맞춰 약속 장소인 수원화성(水原華城)의 서장대에 오른다. 팔달산 정상에 세워진 정자는 전시 때의 지휘 본부로도 사용되던 곳이다. 이 정자는 화강석 받침돌 위에 세워진 단아한 2층 누각이다. 현준이 주위를 둘러보니 누각 아래에서 천용수(千庸修)가 손을 흔들며 다가선다. 용수는 현준과 동갑인 28살의, 국립 N과학원의 연구원이다. N과학원은 군사 무기를 개발하고 연구하는 대학원 과정의 연구소다. 자연계 박사과정에 있는 용수는 2년 전부터 현준을 알게 되었다. 국립 P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다가 서로 알게 된 사이다. 서로의 취향이 비슷하여 통성명을 하자마자 친구가 되었다. 용수가 다가서며 입을 연다.
“약속 시간을 잘 지켜 마음에 들어. 사실은 나도 방금 왔지만.”
현준도 웃으며 응답한다.
“정말 눈부신 날씨야. 이런 장소에서 만나게 되어 새로워.”
둘이 서장대에서 내려다보니 수원성의 전역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사적 제3호인 수원성은 조선 정조 때(1796년) 축성된 것으로 둘레가 5.7km에 이르는 성곽이다. 1997년 12월에 유네스코에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었다. 정조의 지시에 따라 다산 정약용의 설계로 이루어진 성곽. 거중기라는 근대식 장비를 이용하여 석조물을 쌓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수원성에는 남북을 관통하는 하천이 있으며 북쪽의 수문이 화홍문(華紅門)이다. 성곽의 재질은 화강석이며 축조 방식은 반듯이 다듬은 돌을 쌓는 양식이다. 성곽은 근대식으로 축조되었으면서도 과학적이며 예술적인 아취가 골고루 스민 작품이다. 휘어진 성곽의 선들의 조화. 때로는 곡선이었다가 곡선이 풀리면서 내닫는 직선의 조화. 호쾌하면서도 자연스러움이 듬뿍 밴 배열 방식이기도 하다. 현준의 뇌리에 잠시 정조의 기상이 떠오른다. 국가에게 새로운 힘을 싣기 위해 단호한 결단을 내린 국왕. 주변국의 위협이 극심한 현 시대를 이끌 대통령에게도 정조와 같은 기개가 있다면? 실현되기 어려운 현실에 현준은 고개를 뒤흔든다. 하지만 언제든 국가의 원수에게도 강력한 힘이 실리기를 현준은 바랄 뿐이다. 둘은 서장대에서부터 남쪽의 팔달문까지 거닐면서 대화를 나누기로 한다. 둘은 금세 자유로이 마음을 연다. 둘에겐 지기와 만나는 시간만큼 즐겁고 소중한 때는 없다고 여겨진다. 둘은 서장대 아래의 벤치에 나란히 앉는다. 용수가 수원 시내를 내려다보며 입을 연다.
국가나 개인에게 있어서 힘은 반드시 필수적이거든. 어떤 국가가 아무리 이상적인 정치를 한대도 군사력이 없다고 쳐 봐. 당장 외세로부터 공격을 받아 어이없이 유린될 수가 있어.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공격을 받은 이라크의 경우야. 부시의 명령으로 이라크가 초토가 되어 버렸잖아? 이라크의 선량한 국민들에게 무슨 죄가 있어? 미국이 주장하는 9?11 폭탄 테러의 주범이 빈 라덴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빈 라덴만 잡으면 될 일 아냐?
국가가 군사력을 갖지 못하면 얼마나 비참할지 모를 거야. 예컨대, 올해 초부터 부쩍 일본이 시비를 걸고 있는 독도 문제를 살펴보자구. 우리 땅인 독도를 일본이 몇 척의 군함을 끌고 와 점유한다고 치자. 어떻게 할 건데? 비록 독도 경찰이 있다곤 하지만 몇 시간이나 버틸 거라고 생각해? 또 울산 앞바다에서 천연가스 이외에 원유가 채굴된다고 치자. 원유가 얼마나 생산된다는 보도나마 우리가 제대로 할 수 있겠어? 만약 그렇게 해 봐. 일본에서는 당장 자기네 해상의 거라고 우기며 시비를 걸어올 거라구. 내 생각인데 우리나라에도 매장된 원유가 확인되었을 거야. 천연가스란 원유의 상부에 형성된 메탄을 비롯한 저분자량의 탄화수소를 말하거든. 천연가스는 생산되는데 왜 원유는 매장되어 있지 않겠느냐구? 내 말 알아듣겠어?
일본이 시비를 거는 것은 우리나라에 국한된 건 아니야.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의 해상에서도 영유권의 시비를 걸고 있잖아? 그러다가 일본은 어느 곳에서라도 전쟁이 터지기만을 바라고 있을 거야. 그걸 빌미로 과거의 영광이었던 군국화를 합법적으로 추진하려는 속셈이 드러나잖아? 아마도 언젠가는 일본이 주변국에게 위기감을 조장하여 전쟁을 일으킬 게 뻔해. 이런 울화 치미는 양상을 따지자면 대포동 미사일을 쏜 북한의 처사가 어땠어? 게다가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했다고 공개 선언까지 하지 않았어? 일본에 대해선 차라리 속 후련한 일이라고 여겨져. 남한에서도 미사일 발사에 사용될 액체 시료를 최근에 개발했잖아? 미사일의 사정거리가 300km로 제한된 연구를 하는 남한의 처지가 여전히 안타깝지만.
약소국의 비애라고 들어 봤어? 약소국이 따로 있어? 군사력이건 경제력이건 힘이 없으면 약소국이야. 근래에 남한이 연구했던 핵 물질을 두고 국제적으로 시비를 걸어온 일이 있었지? 일본이 농축해 둔 플루토늄의 양이 얼마인지 알아? 무려 38.6t에 이르는 양이야. 4,825 ∼ 9,650개의 핵무기를 제조할 만한 양이지. 이 자료는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이 올해 3월에 발표한 거야. 이런 일본에게는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잖아? 그런데도 유독 한국만 핵 개발에 있어서 시비의 대상이 되어야 해? 이처럼 사소한 일에서도 힘이 없으면 굴욕스러운 꼴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야.
용수가 잠시 말을 끊고 주위를 둘러본다. 보다 은밀한 얘기를 할 눈치인 모양이다.
“사람들이 서서히 성곽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네. 우리, 벤치에서 일어나 팔달문 쪽으로 성을 따라 내려가는 게 어때? 내려가면서 이야기하자구.”
오전 10시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인파가 불어난 상태다. 세계문화유산인 만큼 관광객들의 관심도 높아졌으리라. 둘은 벤치에서 일어나 성을 따라 남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러면서 용수가 말을 잇는다.
유도탄(missile)과 탄도탄(ballistic missile)이 어떻게 다른지 알지? 유도탄에는 격발의 유도 장치가 내재되어 있거든. 대기권 내에서 유도장치에 의해 끌려가다가 폭발하는 거란 말이야. 그런데, 탄도탄은 대기권을 벗어났다가 다시 대기권에 진입하는 발사체야. 그러니까 명중의 정밀도가 아주 중요할 수밖에는 없지. 대륙간 탄도탄의 경우에 명중의 정밀도가 떨어진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제 아무리 대륙을 건너가는 폭탄이라도 그렇지. 대륙을 건너가기만 하면 뭘 해? 목표물을 정확히 명중시켜야만 의미가 있지 않겠어?
성곽을 따라 내려가는 길목마다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관광객들도 끊임이 없다. 서로 잠시 몸을 틀어 길을 비켜 주곤 하면서 발길을 옮긴다. 바람결에 연신 휩쓸리는 수목(樹木)의 향기가 향긋하기만 하다. 하늘마저 쾌청하여 눈이 부실 지경이다. 여행하기에는 이를 데 없이 좋은 날씨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용수가 얘기를 계속했다.
“현준아, 네 일도 잘 돼 가니? 부디 줄기세포에 관한 연구에 빠른 결실이 있길 바란다. 그럼, 이제부터 본론을 얘기해 볼게.”
용수의 구변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현준은 가만히 고개를 끄떡인다.
세상의 힘은 폭포의 물줄기와도 같다고 생각해. 엄연히 우리 땅인 독도에 일본이 시비를 거는 데도 대응할 힘이 없다면? 이건 완연한 무능력의 표상이 아니고 뭐겠어? 일본 따위가 감히 넘보지 못할 정도의 국력을 갖추는 게 시급한 과제야. 중국과 러시아마저 합동으로 해상 기동 훈련을 하는 세상이잖아?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물. 물분자와 생긴 모습이 비슷한 것에는 오존이 있잖아? 산소 원자 3개가 굽은 형태로 이어진 분자의 모습. 이게 오존 분자의 모습이지. 근래에 내가 맡은 연구는 레이저 광선에 쬔 들뜬 상태의 오존의 분포 상태야. 지표면에 존재하는 오존은 에너지를 받으면 들뜬 상태로 전환이 돼. 들뜬 상태로의 전환에 필요한 에너지는 레이저 광선의 에너지로 공급되거든.
용수가 가방 속에서 도시락 크기만한 장치를 꺼내며 말을 잇는다.
“이게 뭔지 알아? 최근에 내가 만든 발명품이야. 발사 장치를 작동하면 금세 허공으로 발사돼. 잘 봐.”
말을 마치자마자 또 다른 기구를 눈앞에 펼친다. 현준의 눈에는 소형 레이더 장치로 여겨진다. 용수는 성곽을 향해 발사 장치를 겨눈다. 호흡을 가다듬는 순간 용수는 발사 장치에 슬쩍 힘을 가한다. 새된 발사음을 내며 두 개의 로켓이 허공을 난다. 하나는 수직 상공으로 날고 다른 것은 포물선을 그리며 수평으로 치닫는다. 거의 로켓이 시야를 벗어날 무렵에 용수가 설명을 덧붙인다.
수평으로 나는 로켓에선 레이저 빛줄기가 성곽으로 분출돼. 곧바로 성곽 주변의 오존들이 레이저 광선을 받아 들뜬 상태로 되거든. 이러한 오존의 분포가 수직 로켓 내에 장치된 감지 센서로 분석돼. 수직으로 치솟던 로켓이 하향할 때 저장된 정보를 소형 레이더로 보내는 거야. 소형 레이더에 연결된 액정 컴퓨터를 통해 지형도가 선명히 그려지게 돼. 이 지형도를 통해 거리와 면적이 깔끔하게 계산되거든. 이러한 장치가 최근의 나의 고안품이야. 이 장치를 이용하면 어떤 낯선 곳의 지형과 위치마저도 정밀하게 알아낼 수가 있어.
용수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을 잇는다. 낯선 곳의 지형도가 미사일 유도장치와 연결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날리는 족족 미사일은 명중될 거야. 미래의 전쟁은 전면전보다는 국지전에서 끝나고 말거야. 그렇게 되면 제한된 물적 자원에 얼마나 정확하게 공격하는가에 승패가 달릴 거야. 우리나라처럼 자원이 빈약한 나라일수록 속전속결에서 이겨야 하거든. 문득 현준의 머릿속으로 과거의 일들이 생생히 밀려든다. 세계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보조를 맞춰 이라크에 파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 국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일을 말함이다. 약소국의 비애를 극복하려면 한시바삐 국력을 강화시켜야 함을 통감하는 현준이다.
용수는 잠시 숨을 추스르고는 액정 컴퓨터의 화면을 들여다본다. 용수의 말이 이어진다. 현재까지의 관측 결과만을 가지고 수원 성곽의 지형도를 만들어 볼게. 문헌상으로 성곽의 길이가 5.7km이고 성 안의 넓이가 1.3km2이라고 알려져 있거든. 이게 맞는지를 알아볼 참이야. 자, 잠시 후에 확인 좀 해 보자구.
현준은 수직 로켓에서 들어온 정보를 3차원 그래프로 전환하는 프로그램의 진행과정을 지켜본다. 커서가 깜박이면서 쉴 새 없이 지형도의 폐곡선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성글더니 차츰 치밀해지며 입체적인 형상을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그래프 상단에 최종 출력의 값이 드러난다. 용수는 숫자를 들여다보며 현준을 향해 입을 연다.
계산으로는 성곽의 둘레가 5.5km로군. 200m 정도의 편차라면 당국에서 꽤 정밀하게 잰 것 같군. 면적은 1.8km2로 나왔어. 면적 측정에 보통 오차가 크게 나타나거든. 하지만, 이 정도라면 당국에서도 꽤 공을 들여 측정했다는 얘기야.
수원성의 성곽 둘레와 면적 측정을 마치니 정오 무렵이었다. 현준도 용수의 측정에 대해 감탄할 따름이었다. 간단한 장비로 쉽게 길이와 넓이를 측정해 버리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둘은 어느새 팔달문의 아래 부분에 도착해 있었다. 시내 식당에 들어서서 둘은 설렁탕을 주문한다. 식사를 하며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눈다. 혹시라도 기밀 사항이 다른 데로 유출되지 않게 신경을 쓰면서.
남은 과제는 적대국에서의 지형도의 작성이라고 용수가 말한다. 적대국으로 지형 측정용 레이저 로켓을 어떻게 발사하느냐가 문제라고 한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다단계형의 발사 로켓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폭약이 터지기 전에 지형 탐지 로켓이 먼저 지형을 탐색한다. 지형을 탐지한 정보가 폭약이 장착된 탄두로 전송된다. 탄두는 지형도의 정보에 따라 목표물로 다가서게 된다. 문제는 다단계 로켓이 적의 요격용 미사일을 잘 피해 내야만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관하여는 적의 미사일이 보내는 전파를 차단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중이라고 한다. 말하기는 쉽지만 난관이 적지 않다며 용수가 긴 이야기의 결론을 맺는다.
문득 현준에게는 국내 최근의 과학적 성과가 떠오른다. 며칠 전인 5월 20일에는 S대 W교수의 커다란 연구 결과가 보도됐다. 맞춤형 줄기세포의 배양에 성공했다는 내용이었다. 지난해 2월의 연구에서는 난자 제공자의 난구 세포만이 핵 치환에 사용되었다. 반면에 최근의 연구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세포가 핵 치환에 사용되게 되었다. 게다가 줄기세포의 배양 성공률을 5.9%까지 높인 개가를 이루었다. 참고로 지난해의 배양 성공률은 0.5%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현준도 진행하는 연구의 애로점을 용수에게 털어 놓는다. 첫 단계는 줄기세포에서 세포를 채취하는 데 필요한 살포제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들려준다. 다음으로는 줄기세포에서 장기 세포로 분화하는 조절 유전자를 찾는 일이라고 밝힌다. 잠자코 현준의 얘기를 듣더니 느닷없이 용수가 질문을 던진다.
“조절 유전자와 염색체 속의 핵산과는 어떤 관계야? 기억이 약간 희미하여 묻는 거야.”
슬며시 웃으며 현준이 대답한다.
염색체란 핵산과 단백질이 뒤엉켜 있는 혼합체야. 핵 속의 핵산은 주로 DNA(deoxyribo nucleic acid)를 가리키지. 하나의 DNA 사슬에는 여러 종류의 조절 유전자가 결합되어 있을 수도 있어. 그렇기에 하나의 줄기세포에서 210종의 장기 세포가 만들어지게 되거든. DNA 내의 염기의 배열 순서는 유전정보를 결정하잖아? 알다시피 DNA에는 A(아데닌), G(구아닌), C(시토신), T(티민)의 네 종류의 염기가 있거든. 이 네 종류의 염기가 3단위씩 연이어 배열되어 유전정보를 결정해. 이걸 ‘트리플릿 코드(triplet code)’라고 하잖아? DNA의 유전정보는 m RNA(messenger ribo nucleic acid)에 의해 전사(description)가 돼. 전사란 유전정보를 고스란히 복사해 나가는 걸 말해. m RNA는 핵을 빠져나가 세포질에서 전사된 염기서열에 따라 단백질 합성을 하거든. RNA 사슬에서 염기가 3개씩 배열되어 하나의 정보를 이루는 단위를 코돈(codon)이라고 해. 각 코돈은 하나씩의 아미노산을 합성하는 명령문이기도 하지. DNA 사슬에서는 TAC로 배열된 염기서열이 m RNA 사슬에서는 AUG로 전사되거든. m RNA 사슬의 코돈이 AUG라고 찍힌 부위. 즉, DNA 사슬에서는 TAC로 배열된 부위가 조절 유전자의 개시 부위가 돼. 유전자의 개시 부위란 그 부분에서부터 단백질 합성이 시작되는 자리라는 뜻이야. m RNA의 AUG 코돈은 세포질에서는 메티오닌(methionine)이란 아미노산을 불러들이게 된다구. 결국 조절 유전자를 찾는 작업은 배양액으로 세포분열을 일으키면서 진행하는 거야. 메티오닌을 배양액에 첨가시키면서 시간에 따른 메티오닌의 변화량을 측정해야 돼. 그래야 DNA 사슬 중의 어느 염기서열에서 메티오닌을 불러들이는지를 알게 되는 거야. 사슬의 길이가 길다 보면 동일한 염기서열이 더러 중복이 되거든. DNA 사슬상의 위치는 세포질에서의 m RNA의 변화를 보고 알게 돼. 이러한 연구는 부단히 변인(factor)을 조절하면서 진행해야 하기에 무척 신경 쓰이는 작업이야. 결론적으로 하나의 염색체에는 수백 종 이상의 조절 유전자가 포함될 수도 있지. 예컨대, 인간의 X염색체는 1,098개의 유전자로 이루어져 있잖아?
수원성에서 작별을 하기 직전이다. 용수와 현준은 악수를 나누며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자고 다짐한다. 그래서 나약한 나라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자고 결의한다.
수원에서 국철로 현준이 귀경하는 중이다. 신문을 펼치다가 고딕체로 다가서는 활자에 시선이 멈춘다.
‘갈라파고스에 대형의 변종 이구아나 출현하다’
현준은 자신도 몰래 움찔 놀란다.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신문에 신경을 바싹 쓰며 들여다본다. 종래의 이구아나와는 비교가 안 되는 거구의 이구아나가 늘어나고 있다는 보도다. 체장이 3m에 달하는 이구아나라! 확실히 놀라운 일임에 틀림없다. 직감적으로 현준에겐 누군가 공룡의 유전자로 장난을 친 거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현준은 인터넷으로 비슷한 뉴스를 검증한 일이 있었다. 네덜란드의 자연사 박물관에 는 보존된 몇 개의 공룡 알의 화석이 있다고 했다. 최근에 두어 개가 연구용으로 학계에 기증된 일이 있다는 거였다. 공룡을 가장 닮은 현존하는 동물은 이구아나다. 근래에 학자들은 공룡 알의 화석으로부터 유전자를 추출해 보려고 은밀히 애썼다. 그랬어도 어느 누구도 성공한 사람은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랬는데도 갈라파고스에 대형 이구아나가 나타났다는 게 의아스럽다. 보도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누군가는 공룡 알에서 유전자를 추출했을 가능성이 크다. 오랜 세월 동안 공룡의 알은 압력과 온도로 변형될 대로 변형되었으리라. 그런 판에 어느 누가 공룡의 알로 장난을 치겠는가 싶어 느낌이 묘하다. 어쨌거나 변종으로 보이는 이구아나가 출현했다는 사실이 현준에게는 놀랍게 느껴진다.
이구아나라면 우리나라에도 애완동물로 적지 않게 보급된 파충류다. 굳이 갈라파고스가 아니더라도 공룡의 유전자를 실험할 대상이 있는 셈이다. 문제는 공룡의 유전자를 어디서 채취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어디서라도 공룡의 뼈만 얻을 수 있다면 아주 좋을 테다. 중생대에 한반도의 남부 지방은 얕은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그게 나중에 지형의 융기를 거쳐서 치솟게 된 터였다. 경남 고성의 상족암(床足岩) 군립공원의 해변에는 뚜렷한 공룡의 발자취가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어딘가에 공룡의 뼈가 화석으로 출토도 되리라 여겨진다. 부디 공룡의 뼈를 찾을 수만 있다면? 현준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생각에 잠긴다. 공룡에 대한 학자로는 부산의 국립 P대학교의 C교수가 유명하다고 알려져 있다. 현준은 가만히 생각을 더듬는다.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누군가 공룡의 유전자로 장난을 친다면 국내에서도 그럴 가능성이 있으리라고 여겨진다. 아무래도 국내 학자들 중에서도 누군가 은밀히 작업을 진행하리라고 여겨진다. 작업의 골격은 이구아나의 유전자의 일부를 잘라내고 거기에 공룡의 일부 유전자를 결합시키는 방식. 현준에게는 이른바 재조합 유전자를 만드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완전한 공룡의 유전자를 이용할 수가 없는 경우. 재조합 유전자로도 얼마든지 형질 변형이 된 이구아나를 만들 수도 있는 일이다. 실험동물을 마구 만들다가 뒤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현준에겐 그것도 상당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현준이 신림동에 도착한 건 저녁 8시경이다. 수원화성에 다녀온 시간이 꽤나 소모된 셈이다. 일단 학교 밖에서 식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식사를 하고는 입주식 가정교사로 번 돈으로 구입한 13평 서민 아파트로 갈 작정이다. 규모야 엄청나게 작지만 현준에겐 궁궐처럼 느껴지는 보금자리다. 우렁이 된장찌개로 저녁을 해결하고는 5층의 그의 집으로 들어선다.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과거에 중국에게 빼앗긴 북간도나 일본에게 빼앗긴 대마도를 되찾는 듯한 느낌에 휩싸인다. 실지(失地)나 고토의 회복. 이에 못지 않은 게 국력 신장이라는 생각이다. 거실과 방 청소를 익숙한 솜씨로 끝낸다. 간단히 샤워를 끝내고는 실내용 평상복으로 갈아입는다. 책상용으로 쓰는 사각 밥상을 거실에 펴고 그 앞에 단정히 앉는다. 그리고는 가만히 눈을 감는다. 주변의 숲으로부터 새 소리가 흘러들고 있다. 이를 데 없이 청량한 울음소리다. 마치 풍경소리에서 흩어지는 청아한 선율 같기만 하다. 마음이 개운해지고 날아갈 듯하다. 새의 울음소리에 취해 있다가 문득 악기를 켜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방으로 가서 클래식 기타를 거실로 가져온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조용히 연주한다. 이어서 ‘다뉴브 강의 잔물결’도 연주를 한다. 수없이 반복하여 연주하던 곡이다. 그 외에도 연주하고픈 악곡으로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라든지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 등이 있다. 특히 ‘겨울 나그네’란 악곡집의 ‘보리수’라든지 ‘까마귀’ 등의 매혹적인 악곡이 현준의 마음에 끌린다. 하지만, 현준은 시간을 아끼느라고 단지 두 곡만을 연주하고는 기타에서 손을 뗀다.
기타를 벽에 세우고 밥상 앞에 앉는 순간이다. 느닷없이 핸드폰이 울린다. 가만히 귀에 대니 친구인 종학(吳宗鶴)의 목소리가 흘러든다. 현준과 종학은 학과의 동기이며 종학은 현재 강남에서 변리사로 일한다.
“내일이 일요일인데 나랑 바람 좀 안 씌겠니? 서해 군산의 망해사(望海寺)를 거쳐서 심포 항에서 회 좀 먹고 오자구. 연구를 하려면 바람도 좀 씌면서 아이디어를 떠올려야 되잖아?”
종학으로부터의 모처럼의 제안인데 거절할 수가 없다고 현준은 생각한다. 선선히 그러겠다고 응낙을 한다. 핸드폰을 놓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오늘 수원화성을 둘러본데 이어 내일은 망해사까지 내려간다면? 너무 시간을 빼앗기는 건 아닐까? 어쩌다가 모처럼 제안한 종수의 의견이라 응낙은 했지만. 앞으로 시간 관리를 좀더 철저히 해야겠군.’
현준은 일기장을 펼쳐 하루 동안의 일정을 기록한다. 일기만이 지난 시간들을 재현해 주는 느낌이 든다. 만약 일기를 쓰지 않는다면 어떤 자취도 기억되지 못하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람의 기억이란 한계가 있기 마련이리라. 일기를 쓴 뒤에는 신문을 펼쳐든다. 하루 동안에 새로운 일이 벌어진 건 없는지? 숱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지 않는가? 사람들이 많다 보면 나날이 새로운 일이 벌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 세계적으로 금리가 어떻고 주가가 어떠니 하는 등의 기사가 눈에 띈다. 식상한 느낌이 드는 내용이다. 정치 뉴스를 둘러본다. 어떤 정당이 다른 정당을 향해 숨겨진 부조리를 폭로하여 떠들어댄다. 공격을 당한 정당에서도 다른 반론을 제시한다. 하나도 기억해 둘 만한 기사거리가 없다고 여겨진다. 현준의 가슴에 찬바람이 일렁인다. 외국에서 우리나라 근로자가 피살되었어도 속수무책이던 정치인들이 아니던가? 왜 다들 협력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정치인들은 못 되는 것일까? 현준은 의학과 과학 방면의 기사거리를 본다. 뭔가 꾸준히 연구를 하는 족적(足跡)이 드러난다. 이처럼 성실히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만날 하찮은 비난이나 싸움질만 일삼으며 국민의 세금이나 축내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랴?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현준이 신문을 접는다.
다음 날 오전 4시에 일어나려면 밤 10시에는 취침해야겠다고 현준은 생각한다. 시계를 보니 20분의 여유 시간이 있다. 밥상을 치우고 거실의 중앙에 선다. 다리를 한 일자로 쫙 벌려 자리에 살며시 앉는다. 이른바 스트레칭이다. 몸을 일으킨 다음 앞 차기와 뒤돌려 차기 동작을 5분가량 반복한다. 그런 후에 가볍게 숨결을 고른다. 현준에게 발차기는 건강 수련의 기본 과정이다. 발차기를 하고 나면 혈액 순환이 원활하고 축적된 피로가 말끔히 해소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유사시에는 호신의 수단이 되기에 정신 건강에도 좋은 편이다. 그래도 5분가량의 시간이 남기에 화장실에 들렀다가 잠자리에 든다.
새벽 4시 반에 현준은 집 앞에서 종학의 차에 탑승한다. 차는 새벽 공기를 가르며 서해안 고속도로에 진입한다. 서울을 떠난 지 3시간만에 군산 인터체인지에 들어선다. 둘은 오전 8시경에 망해사(望海寺) 경내의 주차장에 도착한다. 서해바다의 드넓은 갯벌의 가장자리에 웅크리듯 서 있는 작은 사찰. 망해사는 누각도 몇 채 안 되고 면적도 협소한 편이다. 그래도 바닷가에 위치한 사찰이라 전투 부대가 주변에서 경계를 서고 있다.
차를 경내 주차장에 주차시키고는 종학과 현준은 썰물이 진 광활한 갯벌을 바라본다. 펼쳐진 갯벌을 통해 현준과 종학은 도약하는 국가의 미래를 떠올린다. 지금은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머지않아 힘찬 비상을 하리라 여겨진다. 갯벌이 내려다보이는 경내 언덕에서 둘은 신문지를 깔고 나란히 앉는다. 현준이 종학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요즘 과학 분야의 특허 신청은 좀 들어와? 국내에 접수되는 외국의 특허 출원 상황은 어때?”
종학이 빙긋 웃더니 주저 없이 응답한다.
“네가 관심을 갖는 줄기세포 분야는 거의 없어. 국내외가 모두 비슷한 상황이야. 앞으로 2 ∼ 3년이 경쟁의 해가 될 거야. 그 기간 안에 너도 어떤 연구 결과를 만들어 내놓을 수 있겠지?”
좁은 사찰의 면적 때문인지 관광객들은 금세 되돌아서곤 한다. 둘은 거뭇거뭇한 갯벌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광막한 갯벌을 대하면서부터다. 둘은 국력을 신장하는 데 기여하리라는 결의를 거듭 다진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진정으로 보람 있는 일을 하고픈 의도에서다. 의기가 상통하는 지기가 만난 자리가 아닌가? 둘의 가슴은 힘찬 기류로 소용돌이친다.
현준은 종학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분자식이 HCN으로 표시되는 물질인 시안화수소. 수소와 탄소와 질소. 이들은 단독의 원소로서는 사람에게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는 물질이다. 그런데 3종류의 원자가 결합되어 시안화수소(HCN)가 되면 독극물이 되고 만다. 이것은 사람의 생명마저 단숨에 결딴을 내버리는 무서운 독극물이다. 3종류의 원자를 따로 떼어 놓으면 인체에는 전혀 해롭지 않다. 원자들의 결합과 분리에 따른 묘한 현상은 그저 신비로울 따름이다. 그에게 대자연은 생각할수록 무한히 신비롭게 여겨진다.
얼마 전에 현준은 독실한 종교인인 후배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사람에게 사후(死後)의 세계는 과학적인 관점에서 존재하는 거냐고? 쓴웃음을 지으며 죽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고 현준이 응답해 준 일이 떠오른다. 그랬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평범한 질문의 의미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어떤 사물을 보기 위해서는 최소한 안구(眼球)라든지 시신경 따위가 필요하다. 이런 감각기간이 갖춰져야만 사물을 보게 된다. 유령이나 귀신에게 무슨 감각기관이 있겠는가? 온전한 감각기관을 갖춘 인간일지라도 별 수 없을 경우도 허다한 법이다. 가치관이 엉뚱한 데로 편향될 때가 더욱 그런 상태이리라. 힘으로 약소국을 억누르려는 주변 강국들의 관점은 온전할 리가 있겠는가?
둘은 1시간가량을 망해사에서 보낸 뒤에 남서쪽으로 2km쯤 떨어진 심포항으로 달린다. 10여 분 후에 심포항에 닿는다. 전국적으로 해산물을 관광객들에게 싸게 파는 항구로 알려진 곳이다. 항구에는 횟집들이 늘어서고 횟집 사이로 파출소가 자리 잡고 있다. 둘은 횟집으로 들어서서 광어회를 주문하고는 마주 앉는다. 온돌방이라 대화하기가 아늑하고 편한 느낌이 든다. 자리 잡고 앉아 반시간쯤 대화를 나눌 무렵. 떠들썩한 소리와 함께 다섯 명의 사내들이 횟집으로 들어선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현준과는 대각선 방향의 방바닥에 놓인 앉은뱅이 식탁에 둘러앉는다. 하나같이 20대 중반의 청년들이지만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현준과 종학을 흘깃 훑어보더니만 눈빛을 슬쩍 눙치는 듯하다. 한 마디로 서로 비슷한 연령층의 사내들만 횟집에 든 상태다.
현준과 종학은 목소리를 낮춰 일상적인 얘기를 주고받기로 한다. 은연중에 형성된 두 사람 간의 묵계다. 어디서든 대화는 조심스러워야 하고 그래야 후환이 없기 때문이다. 혹여 도청을 당하여 낭패를 보지 않으려는 의도다. 일부러 현준이 잔잔한 음색으로 취미 생활을 얘기한다.
“3년 전부터 나는 풍란(風蘭)을 가꿔 오고 있어. 물 주기와 온도 맞추기가 예사로 까다롭지가 않더군. 그 꽃의 향기를 맡아본 적이 있냐?”
종학도 현준의 의도를 알아차리곤 성의 있게 대답한다.
“풍란의 향기. 그것 아주 끝내 주잖아? 하얀 꽃 색도 그윽한 선비의 아취를 풍기더라구.”
잠시 현준과 종학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던 다섯 사내들은 자기들의 화제에 몰두하는 눈치다. 사내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려다가 낮아지고 하는 게 아무래도 현준과 종학에겐 수상하게 느껴진다. 둘은 사내들의 얘기에 은근히 귀를 기울인다. 그러면서 둘은 자연스레 술잔을 주고받는다. 반시간이나 흘렀을까? 서너 군데의 자리에 손님들이 더 들어서면서부터 실내는 번잡스러워진다. 사내들은 더 이상 현준과 종학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다. 주위가 소란하여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인 듯하다. 어느 순간부터다. 사내들의 화제는 갯벌에 자라는 특이종의 갈조류에 대한 것으로 전환된다. 밀물 때면 바닷물에 잠기지만 썰물이 되면 드러나는 해초라고 한다. 공기 중에 드러날 때 줄기가 마르면서 줄기 표면에서 미세한 가루가 날린다는 얘기다. 그 가루를 채취하는 게 그들의 임무인 듯하다. 그 가루의 용도나 채취의 지시를 내린 사람이 누군지는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부분에서 그들이 목소리를 한껏 죽였기 때문이다. 헌데 의심스런 부분은 채취 단가가 예상 외로 비싸다는 점이다. 그들이 찾는 해초가 군산 갯벌에서만 자생한다는 것도 수상한 일이다. 현준과 종학은 나름대로 생각에 잠긴다. 해초의 가루가 혹여 마약 성분은 아닌지? 제시된 단가로 보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보인다. 뭔가 분명해야만 파출소에 신고를 하든지 미행을 하든지 하겠는데 오리무중이다. 강제로 물어 보고 싶어도 수적으로 열세다. 현준의 견해로는 해초라는 단서가 잡힌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둘에게는 해초로부터 어떤 문제가 야기될지 은근한 관심사가 된다. 어수선한 국내 정황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된다. 사내들은 이내 식당을 나서더니 그들의 산타페에 몸을 싣고는 길을 달린다. 둘에게 더 이상의 추적은 어려울 듯이 여겨진다. 둘도 곧바로 서울로 향해 차를 몬다.
저녁 6시 무렵. 둘은 곧바로 신림동의 현준의 집에 도착한다. 도착하자마자 둘은 인터넷과 백과사전을 통해 특이종의 갈조류를 검색한다. 그냥 형상과 번식 방법이 실린 정도일 뿐. 건조할 때 줄기 표면에서 가루가 날린다는 얘기는 일체 없다. 그러니 가루의 주성분이 뭔지는 더욱 알 수가 없는 상태다. 심포항을 떠나기 전에 어촌의 몇몇 여인들에게 질문해 봤다. 하지만 잘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이제는 더 알아볼 여지도 없어진 셈이다.
잠시 후 종학은 현준의 집을 떠난다. 종학을 전송하고는 현준은 집으로 되돌아온다. 책상용의 밥상을 펴고는 단정히 앉는다. 하루 동안에 축적한 게 뭔가를 생각해 본다. 머리에 남는 건 특이종의 갈조류다. ‘갈색 성운’이라 불리는 특이종의 갈조류는 남한에서도 분포 범위가 극히 제한된 해조류다. 자생지는 동남아의 열대지방의 얕은 바다인데 포자가 파도에 휩쓸려 국내까지 번식한 모양이다. 그러니 심포의 어촌 주민들도 그 해초를 잘 모를 수밖에 없었으리라.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현준은 사내들의 인상을 머릿속에 새겨 두었다.
어느새 저녁 7시다. 현준은 식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자 저녁도 먹이지 못하고 떠나보낸 종학을 떠올리자 미안한 마음이 든다. 냄비에 물을 올려 가스를 튼다.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린다. 라면 2봉지를 털어 넣고 달걀도 한 개 깨어 넣는다.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밥상에 앉는다. 라면을 훌훌 불어가며 현준은 식사를 한다. 이윽고 얼큰한 국물까지 먹어 치운다. 양치질과 설거지를 마친 뒤에 눈을 감고 거실을 배회하기 시작한다. 식사 후의 현준의 습관이다. 소화도 시킬 겸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붙잡는 시간이기도 하다.
영화나 예술 분야는 한류열풍이 일본을 비롯해 동남아시아로 진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액정 디지털 기술이나 전자회로 및 핸드폰에 관한 기술 수준도 세계적이다. 영화 분야와는 달리 산업계의 발전은 값싼 노동력의 동남아시아란 무대에 떠밀려 붕괴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각종 산업 스파이가 국내에 몰려 기술을 빼 가려고 기를 쓰는 추세다. 기술이 빠져 나가면 전자 산업은 연이은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마련이다. 남은 분야는 어느 영역인가? 유전공학의 기술 개발이 막강한 경제력의 근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현준은 계속 생각에 잠긴다.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기술자를 우대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임진왜란 때만 해도 비격진천뢰나 천지현황의 각종 총통들이 개발되어 실전에 사용되지 않았던가? 만약 그 때부터 기술자를 우대했어도 우리나라의 위상은 달라졌으리라 여겨진다. 정치인들이 원대한 국책을 세우지는 못할지언정 상대 정당의 흠집이나 까발리려 드는 현실일진대야? 못내 안타까운 마음에 현준은 가슴이 저릴 정도다.
한편, S대의 W박사는 어떤가? 외국에서 거대한 금액으로 빼 갈려고 유혹해도 국가를 위해 단연히 거절하지 않았던가? 현준에게는 진실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현준은 거실을 서성이며 거듭 생각에 잠긴다. 사람은 단 하루를 살더라도 사람다운 향기를 지녀야 하리라고 생각하는 현준이다. 사람다운 품격. 이건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여긴다. 부단히 심성을 다스리고 가꾸어 나갈 때라야만 가능성이 있으리라고 여겨진다.
마침내 거실을 서성이는 동작을 멈추고는 책상용의 밥상 앞에 앉는다. 밥상 위에 백색의 용지를 펼쳐든다. 다음 날의 연구 계획을 나름대로 적어 나간다. 시료(sample)의 이름, 사용 약품명, 실험 도구, 실험 착수 예정 시각 등등. 실험 계획표의 작성을 마치자 현준은 주먹을 불끈 쥐어 자신감을 나타낸다. 다음 해 전반기까지는 5대 장기(臟器)에 대한 조절 유전자를 찾을 계획을 세운다.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할 때 쓰일 살포제는 올해 6월까지는 마무리 지을 계획이다. 살포제에 쓰일 시약 편람을 펼쳐 들여다볼 때다.
‘딩동’하며 초인종이 울린다. 흘깃 시계를 보니 저녁 7시 반이다. 아직까진 밤이 깊지 않은 시각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파트의 문을 살며시 연다. 계단과 5층 통로에서 더러 마주치던 태희(金泰喜)라는 아가씨다. 현준의 맞은 편 503호에 사는 25살의 회사원이다. 다니는 회사는 구로동의 전자계열의 회사라고 한다. 고향인 충청도를 떠나와 서울 G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여 혼자 살고 있다. 현준이 태희와 알고 지낸 지는 석 달째다. 이따금씩 찾아와 각종 생활 잡사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돌아가기 일쑤다. 그렇다고 서로가 애인이나 친구 관계는 아니다. 그냥 심심하고 따분할 때 잠시 만나 대화를 나누는 상대일 따름이다. 거실로 들어서면서 태희는 현준을 향해 입을 연다.
“그 새 애인은 생겼나요? 아님 아직도 독야청청(獨也靑靑)의 신세예요?”
현준은 잠시 쓴웃음을 짓더니 여유로운 모습으로 응답한다.
“저야 남자니까 애인이 좀 늦게 생겨도 되죠. 그런데 태희 씨한테는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났나 보죠?”
“피! 요즘 세상에 백마 탄 왕자가 어디 있어요? 백마는커녕 겁이 나서 똥개도 못 타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똥개(土種犬)라는 말을 듣는 순간. 현준의 마음이 침울해진다. 사람들(특히 주인 가족)에 대한 일관된 행동을 보이는 똥개. 현준에겐 적어도 일관성에 있어서는 똥개와 비견될 만한 사람들이 거의 없으리라 여겨진다. 기분이 좋으면 살갑게 굴다가도 언짢으면 곧바로 성깔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좀 많은가? 혹여 주인으로부터 발길질을 당해도 다음 날이면 꼬리를 흔들면서 주인을 반기는 똥개. 현준에겐 똥개만큼의 품성을 지닌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적어도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는 현준은 똥개를 표본으로 삼을 정도다.
불현듯 1주일 전의 일이 떠올랐다. 핵 치환된 배아가 세포 분열을 시작한 지 사흘째였다. 예상대로라면 Y2 유전자와 솜털 단백질이 어우러지기 시작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조직을 형성할 특성화 단백질을 만들어야만 했다. Y2 유전자는 간 조직을 배양하리라 예상되는 조절 유전자의 DNA를 전사한 전령 RNA다. 또한 솜털 단백질은 세포질에서 Y2 유전자의 활성을 촉진하는 단백질이다. Y2 유전자와 솜털 단백질의 어우러짐을 개선하려는 실험의 수행이 80회를 넘긴 상태였다. 만약 실험이 실패로 끝나면 핵 치환에서부터 실험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터였다. 실험을 다시 시작하는 데에는 적어도 2주일간의 새로운 시간이 필요한 터였다. 새로운 난자의 준비와 특정인의 체세포의 채취. 치환된 핵의 활착을 위한 전자회로의 재구성. 세포 분열 단계별에 따른 배양액의 조제. 여기에다가 배양기에 부착된 압력계와 온도계의 단계별 조작의 상세한 지침도 필요한 터였다. 그뿐이랴? 단계별의 진행 상태를 점검할 분석용 기기(器機)의 조작에 소요되는 시간도 고려해야만 했다. 실험이 예상된 경로를 벗어날 때마다 현준은 피를 말리는 듯한 압박감에 시달리곤 했다.
1주일 전의 실험에서도 현준의 신경은 극도로 곤두선 상태였다. 예견되는 실수는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각별히 신경을 썼다. 관찰용 기기를 조작할 때도 낭비되는 시간을 줄이려고 애썼다. 시료(試料)의 준비와 측정에 관한 치밀한 유통도(flow chart)를 언제나 미리 준비했다. 제시된 유통도에 따라 실험을 차분히 진행했다. 마침내 세포질의 조면 소포체 부근. Y2 유전자와 솜털 단백질이 만나려는 순간이었다. 현준은 숨을 죽이며 전자 현미경에서 펼쳐진 영상을 들여다보았다. 시료의 전처리(前處理) 작업에 소요되는 시간마저도 최소화시키도록 신경을 썼다. 전처리 작업이란 선명한 현미경 영상을 얻기 위해 시료에 미리 가하는 작업이다. 전처리 시간이 단축될수록 보다 잘 연계된 현미경 영상을 얻게 된다. 흡수된 배양액으로 판단컨대 서너 시간은 더 활성 상태에 있으리라 여겨지던 줄기세포에서였다. 솜털 단백질이 좀처럼 Y2 유전자와 어울리려 들지 않았다. 강력한 분자간 힘인 수소결합을 통해 둘은 마땅히 어우러져야 할 상황이었다. 그랬음에도 Y2 유전자와 단백질의 거리는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았다. 단순한 거리만의 문제가 아닌 듯했다. 2물질의 동작이 현저히 느려지더니 거의 정지된 영상을 보여 주었다. 솜털 단백질의 3차원 사슬의 말단부가 미세하게 좌우로 떨 뿐이었다. 이것은 분화 과정의 단절을 의미하는 거였다.
눈을 부릅뜬 채 현준은 현미경의 영상을 거듭 살폈다. 서너 시간은 더 활성을 보일 수 있는 물질이 정지 상태에 빠져들다니? 벌써 84번째에 이르는 실험의 실패 장면이었다. 현준의 가슴으로 울음이 치밀려고 했다. 새로운 작업을 위해서는 또 다시 2주일간의 암담한 시간이 흘러야만 할 터였다. 현준은 감정이 격하여 주먹으로 실험대를 ‘꽝’하고 내리쳤다. 그러면서 냅다 고함을 내지르며 유리창 밖을 노려보았다. 유리창에는 이성을 상실한 괴인의 얼굴이 어른댈 뿐. 그 어디에도 고아한 인품의 과학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실험실에는 현준밖엔 없었기에 아무도 현준의 격앙된 모습을 보지 못했다. 얼얼하게 느껴지는 주먹의 통증을 추스르며 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튿날엔 심 교수와 토론을 하기로 약속된 상태였다. 그랬음에도 실험 결과는 연이은 실망만 안겨줄 따름이었다. 성공으로 향하는 길목은 철저하게 검은 장막으로 가려져 있는 듯했다. 자신과 같은 미약한 존재가 주제넘게 도전할 영역이 아닌 듯도 했다. 전자 현미경으로부터 시료를 빼내는 순간. 현준의 눈시울 가득 눈물이 매달려 일렁였다.
태희로부터 똥개라는 말을 듣는 순간. 현준은 1주일 전의 실험 장면을 떠올렸다. 만약 자신의 마음 상태가 똥개처럼 일관성만 있다면? 크게 충격을 받을 일도 없으리라 여기는 현준이다. 돌연 심각해진 현준의 얼굴을 대하더니 태희는 웃음을 참지 못해 깔깔거린다. ‘똥개’라는 말에 충격을 받은 거냐고 태희가 장난기 실린 목소리로 현준에게 묻는다. 그러자 현준이 곧바로 응답한다. 똥개는 현준이 숭상하는 대표적인 동물이라고. 현준의 대답을 듣는 순간. 태희가 까르르 웃음을 깨물며 현준의 눈망울을 응시했다. 그러면서 현준을 향해 물었다. 숭상할 대상이 없어서 하필이면 똥개를 숭상하느냐고? 현준이 정색을 하면서 똥개의 품격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했다. 현준의 설명을 듣더니만 태희가 불쑥 말했다. 똥개를 극찬하는 걸로 봐서 현준이 지금껏 연구한 게 줄기세포가 아닌 똥개였느냐고? 마침내 현준과 태희는 웃음을 참지 못해 깔깔거린다.
태희가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밤 9시 무렵이다. 태희를 배웅한 뒤 현준은 침실로 들어선다. 다음 날은 아침 이른 시각부터 학교에서 실험을 진행할 작정이다. 그러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한다. 포근한 느낌에 취해 자리에 드러눕자마자 현준은 금세 잠이 든다.
현준이 습관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니 새벽 4시다. 일어나자마자 방과 거실의 청소를 끝낸 뒤에 현준은 아령을 든다. 무게 10kg짜리 아령으로 30분간 근육 운동을 한다. 운동을 마치자 샤워를 하고 식사를 끝내고는 등교 준비를 한다. 학교의 연구실에 닿으니 아침 6시다.
지난밤에 기록해 둔 실험 계획표에 맞춰 실험 장치를 꾸민다. 전자 현미경의 전원 장치도 켜둔다. 전자 현미경을 바라보자 감회가 새로워진다. 지난해에 전자 현미경을 다루기 위해 일본 동경대학에서 2주일 동안 교육을 받았다. 합성 고분자인 폴리스티렌이나 폴리에틸렌의 고체 박편 시료 관찰을 위한 교육이었다. 관찰용의 시료(sample)의 두께는 최소한 10만 분의 1mm의 두께가 되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두께로 시료를 깎는 기구에는 다이아몬드 날이 장착되어 있다. 시료를 깎는 기구 내에는 순도 100%인 액체 물질이 채워져 있다. 전원을 넣으면 절단 기구 내의 액체 물질이 팽창하게 된다. 팽창하는 액체가 담긴 용기에 매달린 다이아몬드 나이프가 상하로 진동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앞으로 조금씩 진행하는 나이프에 의하여 시료는 10만 분의 1mm까지도 훌륭히 절삭된다. 이렇게 깎인 시료를 루비가 달린 시료 꽂이에 넣어 전자 현미경 내부로 삽입한다. 이런 상태에서 전자 현미경은 수만에서 100만 배율에 이르는 영상까지도 보여준다.
전자 현미경을 보며 잠시 회상에 잠겼던 현준은 항온조의 시험관을 꺼내든다. 맑고 투명한 색채로 미루어 오염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광학 현미경의 전원 장치를 켠다. 전자 현미경으로 관찰하기 전의 대략적인 정보 수집은 광학 현미경으로부터 획득된다. 멸균실에 들어 있던 백금제 나이프도 꺼낸다. 시료의 세포분열 상태를 잠시 확인한다. 이윽고 시료의 일부를 예리한 나이프로 절단한다. 도말액(塗抹液)을 뿌린 후에 슬라이드글라스 위에 나이프로 채취한 줄기세포를 조심스레 펼친다. 줄기세포 위로 조심스레 커버글라스를 덮는다. 시편을 제물대 위에 올려놓고는 저배율에서부터 관찰하기 시작한다. 왼쪽 눈으로 관찰하고 오른쪽 눈으로 스케치를 신속히 끝낸다. 세포의 외형적인 관찰이 끝나자 시편을 광학 현미경에서 꺼낸다. 비록 3,000배 정도밖엔 볼 수 없는 광학 현미경이지만 작업할 땐 대단히 유용하다. 시편에서 커버글라스와 슬라이드글라스를 제거한 시료는 소독하여 폐기 처분한다. 항온조 속의 시험관에는 간으로 분화시킬 용도의 줄기세포가 충분히 들어있다. 대략 20여 분쯤. 줄기세포가 배양액과 잘 융화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세포질에서의 메티오닌의 함량의 변화를 관찰해야 한다.
메티오닌의 함량의 변화. 여기서부턴 정교한 실험 절차가 수립되어야 한다. 용액에서의 농도 측정 같으면 간단한 일이지만 세포질 속의 상황임에랴? 우선적으로 착수되어야 할 게 메티오닌 분자만 착색시키는 일이다. 다음으로는 착색된 메티오닌의 초기의 양과 탈색된 양의 비를 구해야 한다. 일단은 현미경에 드러난 형상을 촬영하여 디지털 영상으로 전환해야 한다. 촬영한 디지털 영상으로부터 면적에 대한 비를 구하는 것은 응용 프로그램에 의해 수행된다.
투입할 메티오닌을 착색할 때다. 연구실의 인터폰이 울어댄다. 수화기로 들려오는 음성은 심 교수의 목소리다.
“백 군, 며칠 전에 내가 얘기했지? 이틀 후에는 국내 유전학자들이 춘천의 K대학교에 모여 학술 발표회를 열어. 이것은 여러 대학의 연구 실적을 종합하여 한국이 먼저 개가를 올리자는 취지야. 여기에 대해선 국가적인 중요성이 있기에 타국의 과학자는 배제된 상태야. 먼저 연구 성과를 내놓는 국가만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거든. 자네도 지금까지 개발한 모든 연구 자료를 하나의 파일로 정리해 주기 바라겠네. 시간은 충분하겠지?”
“네, 잘 알겠습니다.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현준은 잠시 심호흡을 한다. 그러더니, 철제 문서함을 연다. 지금까지 연구한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