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장편소설 황색 갈매기 날다
손 정 모

1. 기억의 소용돌이

화사한 보름달이 시린 빛줄기를 뿜어대는 밤.

연구실의 창가에서 현준(白賢俊)은 생각에 잠긴다. 도(道)를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이름(名)을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이름이 아니다(名可名, 非常名). 노자 도덕경(老子道德經) 제1장의 심오한 의미를 떠올리며 현준은 중천의 달을 올려다본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황송스러울 만큼 밝은 달이다. 누구를 위해 저리도 소담스런 빛줄기를 하염없이 내뿜는 걸까? 그간의 연구 실적에 대해 현준은 잠시 되돌아본다. 자신의 실적을 실적이라고 드러낼 수 있는 상태인지? 탐구에 대한 열정을 열정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상태인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개 깊은 골짜기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다.

서울 신림동의 S대학교. S대학교는 관악산의 북면 산기슭에 자리 잡은 학문의 요람이다. 북쪽의 교문 안쪽으로부터 500여 미터 떨어진 지점부터 건물들이 즐비하게 깔려 있다. 2005년 4월 중순의 밤 10시 무렵. 캠퍼스의 본관 건물의 남서쪽 방향에 위치한 자연과학대학 23동 건물. 곳곳에는 화학과(化學科)의 여러 실험실과 연구실에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 중 어느 한 곳. 우뚝 솟은 목련나무가 창가로 드리워진 대학원 3층의 연구실. 아까부터 서성이는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나이 28살의 박사과정 3학기째인 현준이란 사내다. 현준은 멍한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 서성이고 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 듯도 하다. 그의 머릿속으로 숱한 생각이 얽혀든다.

잠시도 멈추지 않으려는 국가간의 경쟁. 물이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르듯. 현준에게 경쟁의 숨결은 수시로 방향을 바꾸며 휘몰리는 듯하다. 전술적인 군사 무기에서의 경쟁. 전자 기술 분야의 경쟁. 생명공학 분야에서의 경쟁 등등. 게다가 걸핏하면 독도 문제를 꺼내어 한국에게 트집을 잡으려는 일본. 일본은 러시아와 중국과도 국경 문제로 시비를 걸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한 곳에서만 핑계거리가 생겨도 군국화를 추진하려는 속셈이 내비친다. 숱한 경쟁에 떠밀려 현준마저도 강박감에 시달릴 정도다.

지난해인 2004년 2월 12일자(木)였다. 매스컴은 일제히 S대 W교수가 세계 최초로 인간 배아 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현준이 소속된 S대의 영광이자 국가의 영예이기도 했다. 뒤설레는 세상의 움직임과는 달리 각 연구실에선 은연중 긴장감이 나돌았다.

그 날 오후 3시 무렵이었다. 지도교수인 심창룡 박사가 2층의 교수 연구실로 현준을 불렀다.

“백군! 소식 들었지? 수의학과에서 배아 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했다는 말?”

현준은 공손하게 그렇다고 응답했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놓으며 심 교수와 현준이 마주 앉았다. 52살의 심 교수가 입을 열었다. 상황이 대단히 다급해졌다고. 현준에게도 빨리 연구의 성과물을 내놓아 한다고 다그쳤다. 유전공학에 있어서는 같은 대학에서조차 연구의 경쟁이 치열한 상태였다. 유전공학을 연구하는 학과만 해도 다양하다. 화학과, 동물학과, 식물학과, 미생물학과, 수의학과 등등. 근래에 유전공학에서는 인간의 장기에 대한 연구가 한창이다. 인간의 장기(臟器)에는 일정한 수명이 있다. 간이든 콩팥이든 기능 장애가 심각해지면 난치병에 이르게 된다. 난치병을 치료하는 길은 기능이 상실된 장기 세포를 재생하는 일이다.

커피 잔을 다탁에 내리면서 심 교수가 말했다. 줄기세포는 210가지의 장기 세포로 전환될 수 있다고. 단순히 줄기세포를 손상된 장기에 넣는다고 하여 장기가 재생되는 것은 아니라고. 줄기세포를 장기 세포로 분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준도 잘 알고 있는 터였지만 새삼스럽게 들렸다. 인간의 5대 장기에 대한 분화의 방법을 찾으라는 얘기였다. 비록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서둘러 접근 방법을 찾으라는 거였다. 누가 먼저 그 방법을 찾느냐에 따라 유전공학의 진로가 결정되는 터였다. 수시로 힘의 논리에 지배를 받는 세상. 때때로 군사 강국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시대. 약소국에서 비상하는 길은 실력을 키우는 것이리라. 아무도 감히 넘보지 못할 분야의 개발. 유전공학의 신기술 축적이 절실한 현실이다.

현준은 심 교수의 연구실을 떠나 3층의 실험실로 되돌아왔다. 실험실이란 실험 장소이면서 대학원생들의 연구실이기도 했다. 실내에는 경통의 길이가 2m에 달하는 전자 현미경과 각종 광학 장비들과 실험대가 깔려 있었다. 현준은 어수선한 마음을 달랠 겸 전공 서적을 펼쳐들었다. 흘러내리는 활자들의 배열에 가만히 의식을 내맡겼다. 서서히 서책의 활자들이 현준의 의식계로 흘러들었다.

‘여성의 난자에서 핵을 제거하고 다른 세포의 핵을 삽입하는 것을 핵 치환이라고 한다. 근래에 치환용으로 주로 삽입되는 것은 체세포의 핵이다. 체세포란 생식세포(정자 또는 난자)를 제외한 모든 세포를 일컫는다. 치환된 핵과 난자의 세포질과의 융합을 촉진하는 데에는 전기 충격법이 이용된다. 치환된 체세포 핵에 의한 세포 분열 현상을 체세포 복제라고 한다. 세포 분열하는 수정란뿐만 아니라 체세포 복제 과정의 난자도 배아라고 한다. 수정란이란 정자가 난막을 뚫고 난자의 핵에 돌입한 개체를 일컫는다. 줄기세포란 장기로의 분화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배아를 형성하는 세포다. 줄기세포가 장기 세포로 변환되는 과정을 분화라고 한다.’

현준은 서적의 내용을 음미하며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창을 바라보곤 했다.

그로부터 해가 바뀌어 4월 중순이 된 시점이다. 살짝 열린 창으로는 짙은 목련의 향기가 실내로 스며든다. 이후의 1년 2개월 동안. 현준은 실내의 석사과정의 대학원생 넷과 함께 줄기세포의 배양액의 조성을 변화시키면서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배양액의 제조에는 가닥을 잡았다. 그 중에서 배양액의 표본을 30여 개를 선정하는 성과를 올렸다.

염화마그네슘(MgCl₂)과 질산칼슘(Ca(NO₃)₂) 등의 무기염류와 단당류 및 아미노산과 지방산을 포함하는 혼합물. 이게 배양액의 구성 성분들이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배양액의 적절한 농도를 찾는 일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이제부터 남은 건 조절 유전자를 찾는 일이다. DNA(deoxyribo nucleic acid) 사슬 중에서 조절 유전자의 가닥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지난 4월 1일자의 일간 신문들은 식물 줄기세포의 분화과정의 성과에 대하여 보도했다. 보도 대상은 ‘애기 장대’라는 식물의 줄기세포에 관한 거였다. 나티드원이란 매개 단백질이 주변 세포와 정보를 교환하면서 줄기세포를 특정 세포로 분화시키는 거였다. 나티드원 단백질의 이동을 돕는 물질이 호메오도메인이란 촉진 단백질이라는 사실까지 제시되었다.

현준의 연구 대상은 인간 배아 줄기세포의 분화에 관한 것이다. 근래에 연구 중인 것은 간으로의 분화에 관련된 조절 유전자의 탐색이다. DNA 사슬 중에서 조절 유전자의 가닥을 탐색하던 중. 현준은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을 동결시키려는 정황을 뉴스로 듣는다. 한반도에 대한 외세의 간섭에 현준은 피가 끓는 심정이다.

현준은 다시 시계를 흘깃 들여다보고는 실내를 서성거린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의 그의 행동 특성이다. 혼미한 의식 속으로 과거의 일들이 남실댄다.

2005년 2월 11일자의 일간 신문들은 일제히 발표했다. S대 W교수는 배아 줄기세포를 지난 2004년에 합법적으로 해외 연구소에 제공했다는 보도였다. 제공된 곳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피터슨 교수팀과 일본 고베 이화학연구소 니시카와 신이치 교수팀이었다. 줄기세포의 제공 조건으로는 공동 연구에 대한 특허권을 공유하겠다는 거였다.

외국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지난 3월말 교내에서 학술 세미나가 개최될 때였다. 수도권 내의 대학 교수들이 유전공학을 주제로 하여 실시한 세미나였다. 그다지 새로운 진전을 보인 논문은 없었다. 기존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는 자리로 여겨졌다. 120여 명이 참석한 발표장에는 교수들과 대학원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발표되는 논문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현준은 이따금씩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그가 앉은 두어 줄 뒤의 우측 지점이었다. 거기엔 현준의 가물거리던 눈이 번쩍 띌 정도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현준의 눈에 드물게 띄는 빼어난 미모였다. 여태껏 미혼으로 지내오면서 처음 대하는 미모의 여인이었다.

현준은 그녀 곁의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동행으로 여겨질 사람은 50대 중반의 교수밖에는 없었다. 아마도 그녀의 지도교수이려니 여겨졌다. 그 교수와는 여러 학술회의장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 T교수는 서울 D대학교의 유명한 생화학자였다. 이윽고 5시간 동안 진행된 세미나가 끝날 때였다. 시청각 영상물 때문에 다소 조명도를 줄였던 실내가 훤해졌다. 논문 발표자들과 참관자들 간에 인사가 오가면서 악수가 한창이었다. 대다수가 모처럼 만난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다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현준도 자리에서 일어나 연두색 원피스의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찰나 간에 여인의 눈과 맞닥뜨렸다. 여인의 시선이 시큰둥하게 현준의 얼굴을 슬쩍 비껴갔다. 마치 아무 것도 보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 순간적으로 현준이 받은 느낌은 묘했다. 신체의 외모에 있어서 항상 자신감에 넘치던 그였다. 야속하게도 그런 그를 대수롭잖게 흘려보내던 그녀의 눈빛이라니! 뭐라고 말이라도 걸어 보려던 그의 마음이 송두리째 식어 버렸다. 바쁜 듯이 출입문 밖을 빠져나와 운동장에 섰을 때였다. 여인은 그녀의 지도교수와 함께 주차장을 향해 사라졌다.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현준은 도리질하며 중얼댔다.

‘부질없는 일일 뿐이야.’

그는 하늘을 향해 또다시 고개를 내흔들었다.

언제나 가슴에 내재되어 술렁대던 공허감. 여인의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부터 공허감이 들끓기 시작했다. 삶의 의미가 뭔지를 새삼 떠올려 보고 싶었다. 연구를 하던 중에도 실험을 하던 중에도 여인의 얼굴이 생각났다. 허나, 황량한 사막으로부터 피어오르는 모래바람인양. 모순스럽게도 가슴속에서는 여인을 거부하려는 자존심의 불길도 활활 피어올랐다. 까짓 여인 하나에 마음이 흔들려서야?

눈에 안 차는 사람이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게 현준의 처세였다. 대학 시절부터 두어 명의 여인이 사랑을 고백해 왔지만 완곡하게 거절했다. 거절할 때마다 부인할 수 없는 우월감에 취하곤 했다. 지나고 나면 별 일도 아닌 터였는데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현준은 이제 자신이 거절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 나이라면 애인이 있거나 빠르면 결혼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에게 애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낼 수는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날짜를 확인하니 토요일이었다. 토요일엔 여인의 수업이 없거나 야외로 나가기 십상이라고 생각되었다. 여인이 대학원생인 것만은 틀림없을 듯했다. 세미나장에 지도교수와 함께 온 것만 봐도 명백한 일이었다. 월요일은 주초라 시간이 바쁠 것 같았다. 아무래도 다음 주 화요일이 적합할 듯했다. 다음 주 화요일에 D대학교로 가서 여인을 만나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일이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았다.

잡념을 없애려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연구실에 달라붙어 실험에 전념하기로 했다. 배양액 중의 염화마그네슘의 농도를 0.02M(몰농도)에서 0.03M로 끌어올려 보았다. 항온조에서 핵 치환 후 5일째 경과된 시험관을 꺼내 들었다. 외관상으로 윤택이 있는 게 배아가 정상적으로 보였다.

연구에 있어서는 핵 치환이란 것도 엄청난 변수들 중의 하나였다. 치환을 원하는 사람들로부터 채취한 세포로부터 핵을 채취해야 하는 거였다. 여성의 난자를 채취하는 일은 S대 병원의 산부인과 의사가 맡아서 했다. 일을 돕는 산부인과 전문의인 진인숙 박사는 심 교수의 친한 벗이다. 난자를 제공하는 여성들의 정성도 대단한 터였다. 일정한 주기로 병원을 방문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것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배양액 중에서 마그네슘 이온과 칼슘 이온의 농도는 상당히 중요한 실험 요소였다. 이들 두 종류의 이온은 핵산과 단백질로 이루어진 염색체와의 반응의 감도가 높기 때문이었다. 핵 치환 후 5일째 경과된 배아의 내막은 민활한 상태였다. 하지만, 내막의 세포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표면층에 적절한 살포제(撒布劑)를 부어 주어야만 했다. 여기에 사용될 적절한 살포제를 만들기 위해 연구를 해야만 했다. 살포제는 액체 혼합물로서 배양액과는 또 다른 약제였다. 세포가 나타내는 반응은 확연히 다른 거였다. 채취를 위해 절개된 이후와 절개 이전의 세포의 상태는 확연히 달랐다.

줄기세포에서 장기 세포로의 분화를 관찰하는 데에는 살포제의 개발이 중요하다. 살포제의 연구는 같은 연구실의 석사과정의 4명의 후배들이 진행하고 있었다. 새로 만들어진 배양액과 후배들의 살포제가 결합되어 다음 단계의 연구가 가능하다.

기존의 살포제를 배아의 내막에 미세 스포이트로 뿌렸다. 살포제는 즉시 세포의 여기저기로 일제히 흘러들었다. 문제는 세포의 채취를 위한 절단 과정이었다. 소독된 백금제의 미세 나이프로 서너 개씩의 줄기세포를 잘라 배양액이 든 시험관에 옮겼다. 헌데, 절개된 세포의 단면에서 급격히 거스러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어서는 다음 단계로의 연구가 어려운 터였다. 거스러미가 필 때마다 입술이 바짝바짝 타는 느낌이었다. 현준의 마음은 표류선에서 흔들리는 깃발 같았다. 언제 역풍에 휩쓸려 전복될지 모르는 운명. 아직도 파랗게 갠 하늘의 의미란? 언제 절망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침몰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의 이틀간의 실험은 완전 답보 상태였다. 실험 일지를 정리하면서도 내내 허탈한 심정이었다. 곳곳에 난관이 있는 줄은 알지만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월요일이 지나고 화요일이 되었다. 화요일 오후 1시쯤에 현준은 연희동의 D대학교에 도착했다. 학과 사무실에 들러 T교수 밑에서 수학하는 대학원생의 명단을 확인했다. 사진으로 확인된 여인의 이름은 장은정(張恩情)이며 석사과정 2학년 학생이었다. 해당 연구실을 찾아 노크를 했다. 대답과 동시에 여학생 둘이 얼굴을 내밀었다. 둘 다 은정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물어보니 은정은 하루 전 날 미국의 버클리 대학으로 떠났다는 거였다. 다른 동료 대학원생과 함께 지도교수를 따라 연구 시설을 둘러보러 간 거였다. 현준은 그만 맥이 탁 풀리는 심정이었다.

잠시 공허한 마음을 추스르며 발길을 돌이켰다. 되돌아서는 가슴에 암울한 그늘이 서리는 느낌이었다.

현준은 열린 창 밖을 내다본다. 밤 10시 무렵의 캠퍼스는 곳곳에 소등이 되고 있다. 연구실에서 실험하던 대학원생들이 귀가하는 모양이다. 생각 같아서는 현준도 귀가하고 싶다. 하지만 남들처럼 가정이 있는 처지가 아니다. 자기 또래의 친구들은 대부분 가정을 지닌 상태다. 집에 가면 자신을 반겨 줄 가족들이 있는 친구들이다. 그런데, 자신의 처지는 어떤가 싶어 울적해진다.

창 밖을 내다보며 스산한 심경에 빠져 잠시 머리를 내흔든다. 정녕 삶이 고행의 수련 기간만 같아 보인다.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온 삶이다. 수원 팔달구의 보육원에서 중학교육까지를 근근이 마친 뒤였다. 보육원을 나서야 할 판이었다. 지켜 본 관례가 그런 터였다. 그 어디도 손짓해서 불러줄 만한 데가 없었다. 보육원을 떠나겠다는 말을 비치자 원장은 봉투를 내밀었다. 10만원이 든 봉투였다. 다음 날 아침. 현준이 작별하러 원장 내외를 찾았지만 새벽부터 출타 중이었다. 그 동안 길러 주어서 감사하다는 쪽지를 남기고 일어설 때였다. 현준의 눈에선 자신도 몰래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막상 짐 가방 하나를 들고 거리에 나섰건만 갈 데라곤 없어 막막하기만 했다. 어쩌다가 잘못 태어나 이런 곤경을 치러야 하는지 설움이 괴어올랐다. 아무리 갈 데가 없어도 경찰서를 찾아서는 안 된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다. 경찰서를 찾기만 하면 금세 보육원으로 연락이 갈 터였다. 그래서는 원장에 대한 도리가 아니었다.

대형 입시학원을 찾아 몇 군데를 알아보았다. 혹시 청소와 잔일을 도울 테니 숙식을 해결해 주지 않겠느냐는 의중을 물었다. 보육원에서 나왔다는 소리만 듣고서도 대부분 외면해 버렸다. 점차 주유소로 목욕탕으로 중국 음식점으로 발길을 옮겨 보며 알아보았다. 헌데도 돌아오는 응답은 여전히 싸늘한 냉대와 의심의 눈초리들이었다. 한 마디로 뭘 보고 믿겠느냐는 기색들이었다.

하도 답답하여 인왕산 입구의 점집을 찾아 앞날의 운명을 물었다. 의외로 빼어난 미모였지만 눈시울에 설움이 깃든 무녀였다. 정확한 생일을 모른다는 현준의 대답에 잠자코 고개만 끄떡이던 무녀. 가련한 처지라 현준에게서 복채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이윽고 40대 중반인 무녀의 입에서 찬바람이 흘러내리는 듯했다. 무녀는 궁하면 통한다고 혹시 알아보겠으니 기다려 보라고 했다. 얼마 전에 초등학교에서 정년퇴직한 부부 교사의 집이라고 했다. 자식은 물론이요 일가친척도 없이 외로운 집이라고 했다. 혹시 양자 삼아 키워 줄 용의가 없겠는지를 알아보겠다는 거였다. 얼어붙은 현준의 마음에도 순간적으로 감동의 물결이 일렁였다. 생면부지의 무녀가 이다지도 마음을 써 주다니! 가슴 한 귀퉁이가 와락 허물어지는 듯한 심정이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휩싸여 하루 동안을 기다려 보았다. 사람의 일은 알 수가 없다는 무녀의 말을 위로 삼으면서. 그랬지만 역시 결과는 예상대로 거절한다는 응답이었다. 살 만큼 살다가 죽게 되면 재산은 국가에 기부한다는 유언을 남겼다는 거였다. 혹시나 했지만 거절당하는 설움은 피를 마르게 했다. 무녀는 잘 되면 갚아 달라면서 현준에게 5만원을 찔러 주었다.

보육원을 나온 지 어느덧 석 달째였다. 가진 돈을 아껴 가며 식사는 주로 빵과 우유로 때웠다. 잠은 공중 화장실에서 신문을 깔고 해결했다. 새벽마다 화장실 문틈으로 파고들던 혹독한 바람결이란? 화장실 문을 잠그지 않고서는 잠들 수가 없었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불량배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오그려 자느라고 발조차도 제대로 내뻗지 못했다. 성장기였지만 얼굴엔 윤기가 사라지고 버짐마저 피어올랐다. 몸에서 내뿜는 악취를 막으려 한밤에야 공중 화장실에서 수건에 물을 적셔 몸을 닦았다. 소등을 한 채 목욕을 하는 중이었어도 조금이라도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면 숨을 죽였다. 물소리마저 마음껏 내지 못하고 목욕을 하는 신세란? 생각할수록 서러움에 가슴이 저려올 따름이었다. 문득 한겨울에 알몸으로 벌판에 내몰린 심정이었다. 눈시울에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수시로 입술을 깨물었다. 중학교 때 배웠던 숱한 지식들이 사용처를 알지 못하고 흐느끼던 날들.

정녕 그 누가 냄새나는 대변기를 신문지로 가리고 잠잔 일이 있었을까? 현준에게는 자신의 신세가 말할 수 없이 서러웠다. 좁은 화장실 변기 칸에서 그 누가 잠잔 적이 있었으랴 의심스러웠다. 새벽에 목욕을 마치고 내닫던 골목 어귀에서쯤에서였다. 문득 불이 켜진 채 영업하던 ‘LG25시’란 곳에 들렀다. 앳된 아가씨 둘이 가게를 지키며 뭘 찾는지를 현준에게 물었다. 빵과 우유를 구입한 뒤에 문득 생각나는 질문을 던졌다.

“주인 아저씨는 가게로 언제 나오세요?”

의아한 듯 현준을 응시하며 그들은 찜찜한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대략 오전 10시쯤이라고. 그러면서 그런 건 왜 묻느냐고 빈정댔다. 현준은 가슴에 들끓는 기류를 달래야만 했다. 어디에나 할 말은 가슴 그득한 현준이었다. 하지만, 현준은 그저 고개를 끄떡이며 가게를 나섰다.

마침내 현준이 가게의 주인을 만난 건 오전 11시 무렵이었다. 주인은 50대 중반의 우람한 골격의 사내였다. 현준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더니만 현준의 얼굴을 말끄러미 들여다보았다. 현준에게는 주인이 관상을 보려는 것으로 느껴졌다. 주인은 몇 마디의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핸드폰으로 그의 아내를 불렀다. 미용실의 여주인인 그의 아내는 힐끔 현준의 인상을 살폈다. 현준을 가게에 앉혀 둔 채 부부가 잠시 가게 밖에서 뭔가를 의논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되돌아 와 주인의 아내가 몇 가지 질문을 해댔다. 현준에게 가장 하고픈 일이 뭐냐는 거였다. 숙식만 해결된다면 고등학교 공부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랬더니 주인의 아내는 기초 학력에 가까운 수학과 영어의 지식까지 질문했다. 일생에 되풀이 못할 공부라 여겨졌기에 중학교 과정의 공부는 열심히 했던 현준이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주인이 현준에게 다음 날 오후 3시쯤에 가게에 들러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시간을 잘 지켜야 한다고 했다.

연구실에서 현준이 잠시 시계를 들여다본다. 밤 11시가 가까워오고 있다. 창문을 열어 목련꽃의 향기를 한껏 들이 마쉰다. 매캐하면서도 진한 향기가 가히 매혹적이다. 보름달은 어느새 중천에 껑충 치솟아 눈부신 빛을 뿜어댄다. 언제 봐도 우아하고도 청량한 기품의 달빛이다. 달빛에 빨려들 듯 의식은 어느새 과거로 줄달음친다.

주인이 말한 대로 다음 날 오후 3시에 가게로 들어섰다. 가게로 가는 길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렵겠다는 대답이 나오면 어쩔까 두려웠다. 지금까지의 쓰라린 경험으로 보아 그러한 대답이 십상이려니 여겨졌다. 문득 유리 파편을 밟은 듯한 통증이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이래저래 내쫓김만 당하는 신세. 언제 울음다운 울음 한 번도 울지 못하는 신세. 짜증을 내려다가도 주변 사람들이 먼저 짜증을 낼까 봐 두렵던 시간들. 정녕 학업만 계속할 수 있는 길만 주어진다면? 환생한 기분으로 삶을 열심히 살겠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가게를 찾기 전에 옷도 말끔히 씻고 신발도 빨아 말렸다. 설사 또다시 좌절을 맛본다 할지라도 부딪혀 보고 싶었다. 나날이 겪는 좌절이 언젠가는 행운의 씨앗이 될 수도 있으려니 생각했다. 마침내 뒤설레는 마음을 억누르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주인의 앞에 섰다.

헌데 예측하지 못한 장면이 벌어졌다. 주인 내외가 함께 활짝 웃으며 현준을 반기는 거였다. 마치 오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현준을 향해 주인의 아내가 입을 열었다.

“이리 와서 앉아. 그 동안 몹시도 고생했겠구나.”

그러면서 현준의 얼굴을 말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시선이 맞부딪히자 현준은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차분히 여자와 시선을 나누었다.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자신도 몰래 현준은 침까지 꿀꺽 삼켰다. 잠깐 동안의 정적이 가히 숨 막힐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비록 주인 내외의 표정은 밝지만 거절하는 말이 튀어나온다면 어쩔 것인가? 그러기에 잠시 뜸을 들이는 건 아닌지? 형벌이 따로 없는 느낌이었다. 어서 이 순간이 지나갔으면 싶었다. 이윽고 여자의 목소리가 재차 밀려들었다.

“마침 태호(주인의 외아들)가 대학을 마치자마자 취직이 되었기에 시기가 맞아떨어진 셈이야.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4시간씩만 일해 준다면 숙식과 학비를 해결해 줄게. 고등학교에도 다니도록 해 줄 테니 열심히 해 보겠니?”

이어서 주인 사내도 말을 덧붙였다.

“너의 심성이 선량한 듯하여 받아 주는 거니까 열심히 해야 돼, 알겠지?”

“정말 고맙습니다. 너무너무 고마워서......”

현준이 말을 채 잇지도 못한 채 터지려는 울음을 삼키려다가 어깨를 들먹인다. 그런 현준의 모습을 보자마자 주인 내외의 눈시울에도 눈물이 핑 돈다. 내외는 현준의 손을 동시에 감싸 쥐며 속삭이듯이 말한다.

“그래, 사내란 눈물을 쉽게 보여서는 안 된단다.”

주인의 이름은 김성종이고 부인의 이름은 오연희였다. 성종 내외는 매달 한 번씩은 태호와 현준을 데리고 여행을 즐겼다. 부부는 현준을 막내아들로 여기는 듯 지극한 애정을 나타내었다. 현준이 고1 때였다. 여름을 맞아 넷은 전북의 변산반도로 여행을 갔다. 격포항에서 유람선을 타고 북쪽의 변산 해수욕장에서 남쪽의 모항 해수욕장까지를 감상했다. 현준은 변산반도를 향해 중얼대었다.

‘남한 제일의 절경이라는 변산반도여! 내 삶은 언제쯤이나 너만큼 아름답게 피어날까?’

성종의 내외는 현준에게 각별히 애정을 쏟는 느낌이었다. 언제나 태호와 동격으로 대접하려고 애쓰는 눈치였다. 사진을 찍을 때도 넷이 다 촬영되도록 카메라 설치대를 세우곤 했다. 변산반도의 수려한 풍광을 가리키며 그 내력을 성종은 소상하게 현준에게 들려주곤 했다. 말을 할 때마다 눈에는 맑고 잔잔한 애정이 실려 있었다. 부부란 다 닮는 법인지 연희 역시 마음이 따뜻한 여인이었다.

유람선에서 내려 격포항의 방파제를 거닐다 보니 곳곳에 횟집이 널려 있었다. 주로 조개와 굴 및 산 오징어 종류가 주종이었다. 시야가 확 트인 방파제의 간이 횟집에 넷이 둘러앉았다. 횟감이 보기만 해도 푸짐하게 여겨졌다. 성종은 태호와 술잔을 주고받다가 현준에게도 한 잔 하겠느냐고 물었다. 학생이라 안 된다고 말했더니 성종은 껄껄거리며 고개를 끄떡였다. 태호가 현준을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네가 진짜 내 동생인 것만 같구나. 힘들지 않아?”

“제게도 친형 같은 생각이 들어요. 언제나 감사할 따름이죠.”

성종 내외의 시원스런 미소가 해변에 눈부실 지경이었다. 그처럼 따뜻하고 행복한 분위기 속에서도 현준의 눈시울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나머지 셋이 눈치 못 채게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자신의 신세를 회상했다.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신의 신세. 보육원을 떠나면서부터 여기저기서 받은 수많은 괄시의 나날들. 훗날 언젠가는 반드시 성공한 인물이 되어 괄시당한 날을 설욕하리라고 별렀다. 아직도 앞날은 불투명하기만 한데 살얼음을 밟는 기분으로 조심해야겠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현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한 번 태어나는 삶인데 보람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작정했다.

끊임없이 해변으로 밀려들었다가 부서지는 물결들. 하얀 포말들이 흩날릴 때마다 현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왠지 포말들마다 자신이 흘린 눈물 같기만 하여 목이 메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날을 울먹이며 견뎌야 할지 몸이 떨렸다. 금세 눈시울에 눈물이 비칠 듯하여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꽤나 포만감을 느낄 때였다. 성종과 태호의 얼굴은 취기로 발그레 물들어 있었다. 취흥으로 무척 황홀한 듯했다. 이 때 성종이 현준을 향해 말했다.

“현준아, 자신 있니? 너의 수면이 부족하지나 않을까 그게 염려스러워. 공부만 잘 하면 약속대로 고등학교는 틀림없이 졸업시켜 줄게. 그 이후의 문제는 그 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변산 여행 이후에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가족 여행이 이루어졌다. 그 때마다 따사로운 가정의 분위기에서 현준은 많은 감화를 받았다. 원래 화목한 가정이란 이런 거구나 싶었다.

시험 기간에는 성종이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여 현준이 학업에만 전념하게 해 주었다. 현준은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어쩜 세상에 이런 부부가 있을 수 있으랴 싶었다. 현준은 서서히 자기 자신의 위치를 각성했다. 이왕 하는 공부. 열심히 하여 반드시 주인 내외에게 보답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현준은 살얼음을 밟는 기분이었다. 친가족 관계가 아니라면 이런 평화스런 기간이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예컨대, 부부가 돌연한 교통사고로 사망한다거나 중병으로 입원하게 된다면 어쩌겠는가? 부부의 마음이 어느 날 아침에 돌변할 수도 있는 터였다. 이런 게 불완전한 인간들의 속성인지도 모를 일이리라. 현준은 언제나 비상시를 대비하여 매사에 최선을 다했다. 경제 여건의 악화로 주인 부부의 마음이 돌변한다고 할지라도 실망하지 않기로 했다. 설혹 그럴 경우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간의 은혜에 보답하기로 마음먹었다. 현준은 마음이 술렁댈 때마다 거리의 은행나무 밑으로 갔다. 아스라한 중생대의 역사를 간직한 나무. 그 나무 아래에서 청정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맹세했다. 비록 형체가 없는 듯해도 나무처럼 견실히 살아가겠다고.

가게의 청소에서부터 물품의 반입과 점검에 이르기까지 마치 주인처럼 일했다. 가게를 찾는 손님들에게도 되도록이면 밝은 표정으로 대하도록 노력했다. 가게의 시설 점검까지도 주인을 대신하여 주기적으로 행했다. 금전에 대해서도 일체 청정하기로 했다. 그래야만 그의 생활이 지속될 수 있는 터였다.

현준은 고2가 되면서부터 틈틈이 중국의 철학서도 탐독했다. 노장사상에 대해서도 깊이 뜻을 헤아려 보려고 노력했다. 노자와 장자가 일깨워 주려 한 것이 어떤 내용인지? 그 사상이 현실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건지? 나름대로 의식이 깨어 있을 때마다 생각해 보곤 했다. 우선 생각의 범위가 넓고 웅장한 데 대하여 마음이 한없이 매료되었다.

현준은 수시로 ‘장자의 나비’라는 고사를 떠올리곤 했다. 숱한 희망과 절망으로 점철된 현실의 세파. 그 세파 위를 공허한 마음으로 날아다니는 자신의 신세.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환상일지도 모르리라는 생각이 때때로 들곤 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느닷없는 생각이 현준의 머리를 아연케 만들었다. 장자의 고사를 읽고 생각에 잠긴 현준이야말로 현대판 장자의 분신은 아닐까 여겨졌다. 철학의 세계에서는 명쾌한 답이 없는 것 또한 일상적인 터였다. 스스로 장자라고 생각해 보니 세상이 더욱 오묘하며 신비롭게 느껴졌다. 바쁜 일상의 흐름 속에서도 고2의 생활은 노장사상의 명상 기간이었다. 머릿속에 하나의 사상의 씨앗이 맺히면서 서서히 품격이란 걸 갖추게 되었다. 사람이란 나이에 어울리는 풍도를 지녀야 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생각에 잠기면서부터 현준의 마음에는 생기가 감돌았다. 과거에 그 얼마나 부모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자학해 왔던가? 물론 영원히 이런 생각이야 지워지지는 않으리라 여겨졌다. 하지만 사고의 관점이 바뀌면서부터 지극히 마음이 평온해지기 시작했다.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는 다채로웠다. 고2 때 화학(化學)을 배우면서부터였다. 이 세상의 물질의 기본 단위는 분자(molecule)다. 또한 분자를 이루는 작은 알갱이는 원자(atom)라고 불린다. 심지어 사람조차도 고작 몇 종류의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을 따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원자란 것은 사람이 죽어 화장(火葬)을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단지 원자들의 배열 방식만 달라질 뿐. 원자에 관련된 사고의 전환으로 현준은 마음을 최대한 넓히기로 했다.

‘마음의 작용’을 크게 간주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마음이란 것도 원자들의 결합체가 토해내는 단순한 작용이려니 생각했다. 그러자 부끄러움이나 설움이나 원망 등의 감정이 씻은 듯이 소멸되는 듯했다. 이런 관점의 변화는 일찍부터 현준의 마음을 탁 틔워 주는 역할을 했다. 마음을 틔우면서부터는 근심거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고3이 되면서부터 주인 부부의 배려는 더욱 컸다. 항시 신경을 써 주고 돌봐 주려고 애썼다. 거기에 대한 보답으로 현준은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반드시 좋은 성적으로 원하는 대학에 붙고 싶었다. 개별적인 시간을 쪼개어 학업에 전념했다. 그랬어도 밤 시간의 4시간 동안의 업무는 꾸준히 해 나갔다.

3년 세월을 꾸준히 노력했던 결과였으리라. 현준은 누구든 가고파 동경하는 S대학교 화학과에 합격하게 되었다. 과학자가 되리라는 소망의 첫 단계가 이루어진 셈이었다. 주인 부부는 마치 친자식이 합격한 것만큼이나 기뻐했다. 합격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는 주인집을 떠날 준비를 했다. 2월 중순 무렵, 신문에 가정교사의 광고를 내었다.

‘S대 재학 중. 영수 책임 지도. 011-9776-xxxx'

신문이 나가던 오후 6시 무렵부터 사방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입주식 가정교사를 원하는 사람들만 골라 몇 군데를 만나기로 했다. 그렇게 하여 고3에 올라가는 남학생을 둔 집에 거처를 정했다. 주인집을 떠나던 날. 주인은 등록금을 하라며 300만원을 주었다. 굳이 그 돈이 아니어도 등록금을 낼 정도는 되어 있었다. 그래서 현준은 처음에는 사양하려고 했다. 그랬더니 주인 부부의 안색이 몹시 서운해 하는 기색을 보였다. 마지못해 봉투를 받아들 때였다. 훅하고 설움이 끼치면서 현준의 눈시울에 눈물이 핑 돌았다. 부모가 아니어도 이처럼 덕을 베푸는 사람들이 있다니! 이후에 삶을 살면서 현준도 남을 위해 덕을 베푸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주인 부부를 친부모와 다름없이 받들기로 했다.

화창한 입학식 날이었다. 주인 가족 셋이 모두 관악 캠퍼스에 참석했다. 태호는 친형처럼 기쁨에 들떠 현준의 손을 시종 꼭 잡고 다녔다. 태호가 장미꽃이 화려한 꽃다발을 주인 가족을 대신하여 선물했다. 정녕 환희에 벅찬 순간이었다. 얼었던 발등에 따스한 물줄기를 뿌리듯. 현준의 가슴에 따사로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한결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에 눈시울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하여, 때때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감추곤 했다. 앞으로 어떤 난관을 맞더라도 인생을 긍정적이며 적극적으로 살기로 했다. 입학식이 끝나고 주인 가족 셋을 떠나보내려고 관악구청 고갯길까지 올랐다. 작별에 앞서 주인 가족 셋이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악수를 하고 앞날에 대한 격려의 내용이 담긴 덕담을 들려주었다. 승용차로 떠나가는 그들이 시야에서 안 보일 때까지 현준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갑작스레 전신에 맥이 풀리면서 현기증이 일려고 했다. 다시 외로운 고아가 된 기분이었다. 이제 자력으로 4년간의 대학 생활을 헤쳐 나가야 하는 사회인이 된 거였다. 현준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반드시 해 내고야 말겠다는 무언의 다짐이었다.

관악산 기슭에 위치한 탓일까? 4월임에도 연구실에 밀려드는 밤바람이 차갑게 느껴진다. 현준은 창을 더욱 활짝 열고 손을 뻗어 목련꽃을 더듬는다. 3층 높이까지 치솟은 목련나무 줄기마다 목련꽃이 무더기로 매달려 있다. 손에 잡히는 대로 한 송이를 꺾어 손에 쥔다. 9장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하얀 꽃. 내부에서는 진하고 매콤한 향기가 흘러나온다. 꽃의 품격과 향기가 적합하게 어울리는 꽃이라 여겨진다.

현준은 잠시 상념에서 깨어나 실험실의 목조 장식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미 연방 K연구소의 헌츠 브라운(Hunts Brown) 박사로부터 기증받은 전시물이 있다. 기증받은 때는 4년 전인 2001년 9월이었다. 기증품은 중생대 백악기의 날개 달린 파충류인 익룡(翼龍)의 등뼈다. 한국에 유전공학의 논문을 발표하러 온 자리에서 브라운이 기증한 거다. 당시에 50대 초반의 대머리 박사인 브라운은 익살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잘 한 번 연구해 봐요. 한국에서 먼저 익룡이 날아다닐지 누가 알겠어요?”

말의 취지는 유전자 연구를 통하여 익룡을 재현시킬 수 있겠는가하는 관점이다. 흔히 가상적인 소설로도 꾸며진 적이 있었지만 실현되기 어려운 영역이다. 그런데 2002년 3월에 익룡의 등뼈 분말의 일부를 채취해 간 연구소가 있었다. 20대 재벌 그룹 안에 소속된 인천의 J연구소와 대전의 R연구소였다. 어쩌면 비밀리에 익룡에 대한 모종의 연구가 진행되는 중인지도 모를 일이다.

현준은 익룡의 척추 뼈의 분말을 통해 유전자 분석을 시도한 연구원들을 알고 있다. 이들 연구원들에게 그 용도를 물은 적이 있다. 하나같이 익룡의 유전자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여 연구해 보려는 것일 따름이라고 했다. 하지만 느낌상으로 연구원들은 뭔가를 감추고 있는 듯했다.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들 연구원들 중의 한 사람과 친교를 맺어 정보를 입수했다. 어떤 동굴 박쥐의 난자에 익룡의 유전자의 일부를 주입하려고 시도한다는 거였다. 즉, 박쥐의 유전자의 일부를 잘라내고 거기에 익룡의 유전자를 접합시키는 기술. 재조합 유전자를 만들어 박쥐의 난자의 핵에 삽입하려고 한다는 거였다. 유전자와 유전자를 서로 섞어서 재조합 유전자를 만드는 기술은 유전공학상의 새로운 기술이다. 이런 기술을 바탕으로 하여 혼합종의 생물체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박쥐의 난자에 재조합 유전자를 삽입하여 박쥐의 자궁에 착상시킨다면? 어떻게 변형된 박쥐가 출생될지 자못 궁금하게 여겨진다. 익룡의 날개를 떠올리는 순간. 현준은 아스라한 세월을 건너뛰는 듯한 환상에 잠시 잠긴다. 허나, 아무리 세월을 거슬러 봐도 부모의 얼굴은 알 수 없는 현준이다. 익룡의 뼈를 어루더듬다가 현준은 대학 시절의 추억을 떠올린다.

S대학으로 진학한 기쁨은 하늘에 오른 만큼이나 벅찼다. 예전부터의 말이 있었다. S대학에 진학하는 사람은 행정구역의 단위인 군(郡)에서도 한 명이 나올까 말까한 숫자라고. 그런 S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으니 그 기쁨이 오죽했으랴.

부모가 누군 줄도 모른 채 살아온 현준이었다. 이따금씩 부모의 존재가 가슴을 애잔하게 적셔주곤 했지만. 현준은 슬픔마저도 승화시켜 나가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입학한 뒤 3월이었다. 열심히 입주식 가정교사를 하면서 학창생활에도 최선을 다했다. 신입생 시절엔 이성과의 미팅에도 자주 참여했다. 이성과의 미팅은 얼굴 모르는 어머니의 잠재된 숨결을 찾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미팅이 거듭될수록 공허감만 가슴에 쌓일 따름이었다.

2학년에 접어들면서부터 전공학과와 관련된 지도교수를 배정받았다. 그 때 만나게 된 사람이 심창룡(沈昌龍) 교수였다. 생화학을 전공하는 학자였는데 첫인상이 현준의 마음에 쏙 들었다. 묘한 것은 심 교수에게도 현준이 발군의 제자라고 인식된 점이었다.

심 교수를 만나는 순간. 현준은 심 교수로부터 전율할 듯한 절정감을 느꼈다. 심 교수와 함께라면 뭔가 커다란 성과를 거둘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찰나 간에 열망의 벽을 뛰어넘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진정한 자신의 자리를 찾아든 느낌이었다. 당시에 심 교수는 미국에서 건너온 지 3년밖에 안 된 상태였다. 그랬기에 전공 학과의 직속 제자는 3학년생 1명과 2학년생인 현준밖에는 없었다. 그나마 나중에 세월이 흘러 당시에 3학년이었던 선배는 졸업 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근래에 대학원생만 하더라도 박사과정의 1명과 석사과정의 4명이나 되는 것과는 비교가 되었다.

현준이 대학 2학년 때부터였다. 심 교수는 매주 전공서적을 읽어 오도록 2제자에게 과제물을 안겼다. 그리고선 매주 토요일 오후 1시부터는 제자들에게 학습 내용을 발표시켰다. 그런 후에 1시간가량을 공을 들여 부족한 부분에 대해 지도를 했다. 지도가 끝나는 오후 3시 무렵이면 관악산 뒤쪽의 계곡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갔다. 심 교수는 연구실에서 등산복으로 갈아입고는 제자들에게도 간편한 복장을 취하게 했다. 언제나 배낭을 메는 사람은 현준이었다. 심 교수가 사전에 준 돈으로 음료와 과일과 과자류를 사서 채워 둔 거였다.

캠퍼스 뒤쪽의 교수회관을 거쳐 소형 저수지를 지나면 지형은 가파른 계곡으로 이어진다. 계곡의 물 흐르는 곳의 돌멩이 아래로는 가재들과 송사리들이 헤엄쳐 다녔다. 붕어말 위를 헤엄쳐 다니는 가재들과 송사리들. 현준은 이들의 모습에서 세파를 헤쳐 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관악산 계곡은 돌멩이가 바스러진 사질(砂質)의 토양이라 물이 괴어 있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그런데도 수중의 너럭바위나 기다란 골이 팬 암석 지대에는 비교적 수량이 풍부한 편이었다. 관악 캠퍼스의 뒤쪽 산록에는 그런 곳이 서너 군데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통행이 거의 없는 곳이라 언제나 한산한 곳이었다.

심 교수는 전공 이외에 동서양의 철학과 문학 및 역사에도 두루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유교 경서들의 지식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학자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기본적인 교양을 갖춰야 한다는 게 심 교수의 지론이다.

셋이서 처음으로 관악산을 오른 날이었다. 수량이 풍부한 계곡에 자리를 잡고 심 교수는 2명의 제자와 마주 앉았다. 배낭에서 꺼낸 음료들 중에는 청량음료 이외에 소주도 1병이 들어 있었다. 현준은 과일과 과자류 등의 안주도 꺼내 펼친 다음 술잔을 따랐다.

“흐음, 자네는 술잔 따르는 법부터 제대로 배워야겠군. 자네가 상대편의 술잔을 손에 쥐고 술을 따른 뒤에 건네려고? 그렇게 해서는 안 돼. 자, 보라구. 이렇게 오른손으로 술잔을 쥐고는 왼손으로 손목을 살짝 받쳐 봐. 이런 자세로 상대에게 내미는 거야. 상대가 술잔을 받으면 그 때 술잔에 술을 채우는 거야. 어디 한 번 해 봐.”

심 교수는 제자들에게도 술잔을 채우게 했다. 그리고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솔숲이 무성한 관악산에 올랐으니 이백의 시가 저절로 떠오르네. 산중문답(山中問答)이란 시 알지?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하니

笑而不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이라

桃花流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에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이라.

‘누군가 내게 왜 산중에 사느냐고 묻는다면

미소만 짓고서 대답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한데

흐르는 물줄기에 복사꽃잎이 아득히 떠서 흘러가니

여기야말로 인간 세상이 아닌 별천지가 아닌가?’

하는 내용인데 느낌이 어때? 노장 사상에 심취한 이백의 넉넉한 아취가 느껴지지 않아?”

일행은 행복한 느낌에 젖어 들었다. 평소에 검술을 좋아하여 진검 대결까지 사양치 않았던 이백의 풍도에 일행은 감탄했다. 문무의 겸비를 통해 진정한 달인이 되려 했던 이백의 정신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실험실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공간이었다. 가슴에 내몰리던 중압감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삶의 또 다른 측면을 생각하게 되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이후로도 스승과 제자는 계곡에 모여 세상의 새로운 의미를 대화를 나누며 찾곤 했다. 심 교수의 영향 때문이었으리라. 제자들도 틈틈이 중국 고전을 숙독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장구한 세월 동안에 형성된 중국인들의 지혜와 아취를 익히려고 했다. 심 교수를 통해 제자들은 동양사상의 장중한 물줄기에 합류하게 된 터였다. 그러는 중에도 세상의 힘겨룸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약소국은 언제나 군사 강국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그렇잖으면 외교 경로를 통해 정치적이나 경제적인 보복을 받기 십상이었다.

상념에서 깨어나 현준은 시계를 들여다본다. 새벽 시간에 항온조의 온도를 변화시킬 일이 있다. 백금 면도날에 잘린 세포들이 배양액과 잘 활착(活着)되도록 조건 변화를 주기 위함이다. 새벽에 작업하려면 눈을 좀 붙여야 할 상태다. 의식이 맑은 상태에서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그래야 실수를 예방하게 되리라. 연구실에서 잠을 자겠다고 학교에는 유숙계(留宿屆)를 내놓은 상태다. 자명종을 새벽 4시에 맞춘 다음 화장실에 다녀온다. 담요 2장을 유숙용의 기다란 실험대 위에 정갈하게 깐다. 소등을 하고 막 자리에 누우려는 순간이다. 느닷없이 핸드폰이 울린다. 약간 움찔하며 귀에 갖다댄다.

“현준아, 용수다. 아직 잠 안 들었지? 내일 오전 9시에 수원화성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 잊지 않았지? 최종 확인하려고 전화했어. 그럼, 내일 봐!”

현준의 얼굴엔 기쁜 표정이 역력하다. 환하게 미소를 짓더니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