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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9회
            섬과 나그네
                                                                                                                          손 정 모

9. 신록의 갈섬

  5월 중순이었다. 어디를 가나 산야가 신록의 물결로 파랗게 굽이치고 있었다. 고개를 들면 호수의 물빛처럼 파란 하늘이 끝없이 드리워져 있었다. 후각에 와 닿는 바람결부터 이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뭔가 향긋하면서도 싱그러운 것이 사람들의 전신으로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그 동안에 민수와 용환은 천막집을 넓혀, 30여 평 규모의 슬레이트 벽돌집으로 개축했다. 방 세 개와 거실을 갖춘 어엿한 단독 주택이 만들어진 거였다. 전기와 수도 시설까지 다 갖춘 상태로, 이제 갈섬은 예전의 삭막한 무인도가 아니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흩날리는 오전 10시 무렵이었다. 뜰채를 갈무리하며, 민수는 용환을 향해 말했다.
  "어때 이제 김발은 잘 붙어요? 기승을 부리던 파래의 군락은 좀 덜해졌어요? 워낙 물로 사는 인생이라, 우리만큼 수성에 정통한 사람들도 아마 드물겠죠?"
  "헌데 그리 간단한 게 아니라구요. 이론으로야 뻔하지만, 실제로 잘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아요. 해수의 밀도와 수온과 플랑크톤의 양이 양식장을 경영하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변수예요. 이건 아마도 양어장을 운영하는 조건과도 일치될 거요. 인위적인 것보다는 자연적으로 조절되는 게 더 많은 것이 확실히 문제 거리예요."
  "내가 보기로는 양어장이나 양식장 모두 이제 안정 단계에 들어선 것 같아요. 아무리 험난한 ……"

  민수가 말하는 중간에 전화벨이 울렸다. 별 생각 없이 누군가 싶어 수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민수 씨! 내 목소리 기억나요? 기억 못해 내면 혼날 줄 알아요."
  "아, 별님!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화순으로 내려가 뵙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었어요."
  "흥, 내가 좀 젊었어 봐. 벌써 밤 차 타고 내려왔겠지."
  민수가 전화를 받으면서 용환을 바라보자, 용환은 양식장으로 나간다면서 손을 흔들었다. 민수도 한 손을 들어 답례하면서 전화기를 통해 말했다.
  "설마 나이로 나를 또 까뭉개고 싶으세요? 나는 나이 같은 건 이미 예전에 초월한 사람입니다. 젊기로 친다면야 별님도 젊잖아요? 여자 나이 마흔 다섯은 마지막으로 정염의 불꽃이 확확 이는 때가 아닌가요? 근데, 지금 어디세요?"
  "우와, 사람이 그새 말 펀치가 상당히 세어졌네. 우리 세속에 얽매임 없이 말 놓고 지낼까?"
  "잠깐만! 나도 재고 따지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거든요. 하지만, 사람의 관계란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에 경어를 그대로 써야 되겠어요. 불편하시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이야, 여전히 고집 센 건 변하지 않았군요. 하지만, 시원스런 풍도는 아주 내 마음에 들어요. 약사회에 친한 친구가 둘이 있거든요. 물론 여자지요. 둘을 데리고 조만간 거기로 한 번 놀러가도 될까요?"
  "물론이죠. 근데, 별님! 무슨 마음이 동해서 여기까지 다 오려고 생각했어요?"
  "그냥 당신의 심성이 너무나 좋기에,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이후부터는 날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 줘요."
  "알았어요, 문혜 씨. 근데 언제쯤 올 거죠? 날짜를 정해 놓아야, 내가 다른 볼일을 뒤로 조정할 수가 있지요."

"사흘 후의 오후 네댓 시 무렵이 될 거예요. 그럼 그 때까지 잘 있어요."

  민수는 전화를 끝낸 후에, 용환의 김 양식장으로 갔다. 썰물이 지고 있었다. 하얀 포말을 일구며 파도는 연신 섬의 기슭에서 휩쓸려 나가고 있었다. 물에 잠겼던 말목의 발치가 하얗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말목에서 말목으로 연결된 버팀줄 가득히 김의 포자가 잔뜩 엉겨 붙어 있었다.
  수영복 차림으로 말목을 손질하던 용환이 민수를 발견하자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통화는 다 끝났소? 느낌으로 아주 친한 사이 같던데? 솔직히 말해 봐요. 전국적으로 친한 여자 친구가 몇 명인지?"
  "나 원 참. 내가 무슨 한량이라고 전국적인 무대로 놀겠소? 남이 들으면 나를 진짜 유명한 바람둥이로 알겠네?"
  "웬 발뺌은? 사실이 사실이잖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지."
  "김발의 상태는 어때요? 파래의 군락은 현저히 줄어들었소?"
  "사람이 저렇다니까. 불리할 때면 화제를 슬그머니 다른 데로 옮겨 버리잖아? 반반한 얼굴에, 능란한 화술까지 갖췄으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수가 달려들어, 두 손으로 용환의 허리를 마구 간질였다.
  "아이고, 항복! 항복이라니까 글쎄? 무슨 사람이 말로 안 하고 그저 완력으로 해결하려고 해? 시방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 아이고, 항복!!"
  용환은 잠시 자세를 가다듬더니, 민수를 향해 말했다.
  "여기에 낀 파르스름한 이게 바로 파래죠. 요즘은 확실히 개체 수가 줄어든 편이오. 이전에는 이렇지 않았어요."
  용환은 민수에게 김발과 양식장의 상태를 가능한 한 상세히 설명했다. 김발에 손바닥을 들이대며 계속하여 말했다.
  "김발의 길이가 한 뼘 정도까지 자라기 전에 적어도 세 번은 뒤집어야죠. 한 두 개가 아닌 저 많은 말목마다 그렇게 한다고 생

각해 봐요. 조금만 소홀히 하면 그 땐 거둘 게 하나도 없어지는 거죠."
민수는 용환의 설명에 따라 말목이 줄지어 선 양식장을 쭉 둘러보았다. 확실히 많은 인력이 동원되지 않고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여겨졌다. 민수도 빠져나간 썰물을 뒤좇으며, 수영복 차림으로 광활한 갯벌을 둘러보았다. 점차 물이 무릎을 지나 아랫배에 차 오르는 높이까지 걸어나갔다. 모래가 너무나 맑아 그 위에서 노니는 물고기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났다. 물고기 떼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반대편 해변의 양어장의 상황이 궁금했다. 하지만, 잠시 그런 마음을 억누르고, 자연인의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쉴새없이 굽이치는 바다. 이러한 굽이치는 바다의 원동력의 근원은 어디인가? 바라볼수록 새삼 신비로워지는 느낌이었다. 대자연을 단숨에 뒤덮어 버릴 듯한 위세였다가도, 바람이 없는 날이면 호수처럼 가라앉는 바다. 잡다한 세사에는 초탈하여 언제나 넉넉한 풍도로 굽이치는 바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장중한 위세로 하늘과 대립하여 늘어선 바다. 그러면서도, 미풍에도 즐거이 미소짓는 듯한, 다정다감한 성향이 한결 돋보이는 바다였다.

  바다의 아름다움에 취해, 수면에 얼굴을 가만히 들이대고 있을 때였다. 용환의 느닷없는 고함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이 봐. 저기 저쪽에 웬 나룻배야?"
  민수는 흠칫 놀라 허리를 폈다. 갈섬의 동쪽 해변으로 낯선 나룻배가 접근해 오고 있었다. 민수는 흘낏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전 11시를 막 지나는 시점이었다.
  "용환 씨! 빨리 몸을 물에 헹구고, 뭍에 올라 옷을 입읍시다."
  민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내는 수영복을 벗고는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뭍에 올라선 후에, 민수와 용환은 쌍안경을 꺼내 나룻배를 살펴보았다. 500여 미터쯤 떨어진 해상이었다. 사공으로 보이는 한 사내와 세 처녀가 타고 있었다. 나룻배는 파도를 따라 출렁거리며 점점 갈섬의 해변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배가 100여 미터까지 접근해 왔을 때였다. 유행하는 낙낙한 중절모를 눌러 쓴 세 처녀들의 모습이 어딘가 눈에 익다고 느껴졌다. 민수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용환도 덩달아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바로 이 때였다. 민수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하, 바로 그 아가씨들이오."
  "혹시 서해산장의 아가씨들 아니오?"
  "맞았소. 바로 그 처녀들이오. 헌데 아무런 연락도 없이 여긴 웬 일일까요?"
  점차 배가 섬에 가까워짐에 따라, 처녀들은 일제히 모자를 벗어 들고는 흔들며 소리쳤다.
  "오빠! 서해산장에서 왔어요. 우리 알아보겠죠?"
  용환은 이전의 격투 장면이 떠올랐던지 잠시 씁쓰레한 표정을 지으며 난감해 했다. 그랬지만, 이내 손을 흔들며 처녀들을 반겼다. 민수도 뒤질세라 크게 손을 흔들며 처녀들을 환영했다. 나룻배의 선주는 아마도 선금을 받은 듯, 처녀들을 해변에 내려놓자마자 곧바로 배를 돌렸다.

  처녀들은 발이 섬에 닿기가 무섭게 호들갑을 떨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호호호! 오빠들 그 동안에 잘 지냈어요? 나, 색을 되게 밝히는 명주예요."
  "몸매로 죽이는 민정이에요. 벌써 넉 달이나 되었군요. 우리가 만난 지가."
  "갸름한 얼굴의 동양적인 미인인 연희를 몰라보지는 않으시겠죠?"
  순식간에 폭죽처럼 터져 오르는 처녀들의 말소리였다. 그녀들의 목청 높은 말소리로 한동안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그 사이에 몇 차례 처녀들로부터 섬으로의 전화 통화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곧바로 찾아오리라고는 예측을 못했다. 하나도 아닌 세 처녀가 일제히 섬을 찾은 것도 예사롭지 않았다. 민수는 궁금증이 일자마자 곧바로 처녀들에게 물었다.
  "어쩐 일이야? 온다면 온다고 무슨 기별이라도 해야 우리가 마중을 나가지. 이렇게 섬에 주저앉아서 손님을 맞으니, 상당히 미안한 느낌이 들었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단체로 휴가라도 얻었어?"
  처녀들은 경이로운 표정을 지으며 연방 섬의 둘레를 휘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유방이 선정적으로 돌출한 민정이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어머, 정말이세요? 그럴 줄 알았더라면 진작 마중 나와 달랠 걸 그랬어요. 우린 오빠들을 놀래게 하려고, 불시에 들이닥친 거예요. 산장의 주인 여자가 중국 여행을 떠난대나 봐요. 7박 8일의 일정이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저희들에게 생색이라도 내는 듯이, 그 기간 동안 자유롭게 쉬라고 했어요."
  전체적인 이미지가 동양적인 미인의 표상인 듯한 연희가 민수를 향해 말했다.
  "오빠가 저희들을 잘 대접해 준다면, 오늘부터 일 주일간은 무상으로 서비스해 드릴게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용환의 얼굴 근육이 씰룩거렸다. 순간적으로 이전에 있었던 서해산장에서의 불유쾌했던 장면들이 떠올랐던 탓이리라. 찰나간에 용환의 얼굴 가득히 불쾌한 기색이 잔뜩 서렸다. 민수가 즉시 용환에게 눈짓을 보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용환에게 빨리 표정을 바로잡으라는 뜻이었다. 그에 따라, 용환도 금세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민수는 즉시 여유 있는 음색으로, 처녀들을 향해 말했다.
  "잠깐만. 내가 너희들에게 잘 해 줄 게 뭐가 있겠냐? 하지만, 양어장과 양식장에서 풍부한 견문을 쌓게 해 줄 수는 있어."
  처녀들은 눈빛을 빛내며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민수가 처녀들을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자, 그녀들은 일제히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민수가 앞장을 섰고, 처녀들이 뒤따랐으며 용환은 맨 뒤에서 묵묵히 따라 걸었다.
  하늘은 가을 호수의 물빛처럼 맑았으며, 가장자리엔 흰 구름이 솜털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쏟아지는 햇살은 수목들의 잎새에 부딪혀 은빛 섬광이 되어 사방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신록이 무성한 갈섬은 잎새들의 물결로 굽이치는 거대한 수목의 바다였다. 어느 방향에서 밀려드는 바람결에도 잎새는 금세 물굽이를 이루며, 아득히 사라져 가곤 했다.

  마침내 집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머나,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집도 다 있네요."
  "이야, 이건 단순한 집이 아니라 동화 속의 궁전이네요."
  "선경(仙境)이 따로 없군요. 여기가 이처럼 별천지일 줄 미처 몰랐어요."
  나무들이라고 해야, 허리까지 오는 관목들이 대부분이었다. 겨울철의 정경과는 달리, 신록의 계절에 드러난 섬의 풍광은 확실히 빼어난 바가 있었다. 한 마디로, 동서남북이 아득하게 연초록으로 굽이치는 거대한 수목의 바다였다. 바람이 일 때마다, 우뚝 선 집은 수해(樹海) 속에 떠오른 하나의 새로운 섬이었다. 나부끼는 바람결에 따라 수시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하는 살아있는 섬이었다. 집 주위로는 바람결에 휩쓸린 잎새의 파동이 빛살처럼 섬을 종횡으로 누벼 흐르곤 했다.
  일행이 집의 거실에 자리잡고 앉았을 때였다. 민수는 처녀들에게 사내들의 작업복을 던져 주며 말했다.
  "잠시 너희들 모두 작업복으로 갈아입도록 해 봐. 그래야, 내가 자세하게 양어장과 양식장을 안내할 수 있으니까."
  말을 마치자마자 두 사내는 집을 나와 바깥에서 처녀들을 기다렸다. 그녀들은 싫은 기색이 전혀 없이 사내들의 작업복으로 갈아입고는 순서대로 바깥으로 나왔다.
  사내들의 작업복이라, 크기와 길이가 안 맞을 터였지만 어느 하나도 군소리가 없었다. 오히려 우스꽝스런 서로의 모습에 허리를 꺾으며 깔깔거리느라고 경황이 없었다.
  민수는 처녀들에게 가지고 갈 어구(漁具)들을 알려주었다. 뜰채, 대나무 막대기, 물통, 소형 어망, 클로르칼크(Chlorkalk), 핀셋, 세숫대야, 세척용 수세미 등등. 제법 한 꾸러미를 챙겨 들고 양어장으로 향했다.
  민수는 바다 쪽으로 떨어져 있는 일곱 번째 가두리 쪽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그러면서, 민수는 일행을 바라보며 차근차근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 다들 주목해 봐. 이 하얀 고체 덩어리가 뭐냐 하면, 클로르칼크라고 하는 물질이야. 이건 우리말로는 표백분이라고 하는데, 주로 물고기의 세균성 질환을 다스리는 약제로 사용돼. 원래 표백분에 염산을 가하면, 물 이외에 염화칼슘과 염소 기체가 발생되거든. 살균이라 함은 세균을 죽여 없애는 작용을 말해. 세균이란 서양에서는 박테리아라고 불리는 생물체라는 건 다들 알고 있지? 표백분이 살균 작용을 하는 과정을 잠시 말해 볼 테니 들어 봐. 표백분에서 생성된 염소가 물에 녹으면, 염화수소와 하이포아염소산이라는 물질을 만든다구. 하이포아염소산이 물에 녹으면 다시 염화수소와 발생기 산소라는 물질을 만들거든. 발생기 산소는 반응성이 대단히 큰 산소 원자를 말해. 이 발생기 산소는 강력한 산화제로 작용하여……"
  이 때였다. 용환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허리를 잘랐다.
  "잠깐만요. 말을 중단시켜서 미안한데요, 여기가 무슨 대학 강의실이오? 꼭 그 어려운 용어를 들먹거려야만 되겠소? 전문 용어만 나온다 싶으면 머리가 띵해 온단 말이오. 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좀 쉽게 설명해 줄 수는 없소?"
  민수는 약간 불쾌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좀 생소하겠지만, 어느 영역에서건 최소한의 이론 무장이라는 말이 있어. 좀 생소하다고 치더라도 꼭 알아야 할 내용이니 참고 들어주었으면 해. 발생기 산소는 강력한 산화제로 작용하거든. 여기서, 산화제라 함은 다른 물질을 산화시키는 능력을 말해. 산화라는 것은 물질이 전자를 잃는 현상이야. 결국 표백분이 하는 일은 발생기 산소를 배출하여 세균의 점막을 헐도록 만드는 일이야. 세균의 점막이 훼손되면, 유전자가 빠져 나와 생명을 잃지 않을 수가 없는 거야."
  민수는 계속하여, 표백분의 희석 농도와 처리 시간 등을 상세히 설명해 나갔다. 이어서, 뜰채를 이용한 양식어들을 포획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설명해 나갔다. 처녀들은 제법 귀를 기울여 듣는 자세를 취했다. 우선 양식어들에게 먹이를 넣어 주는 법부터 처녀들에게 훈련시켰다.

  처녀들은 가두리의 둑에 올라서서, 양식어들에게 먹이를 쏟아 주며 물고기들의 이동 현상을 살폈다. 넙치, 가자미, 도다리, 서대기 등의 몸이 넓적하면서도 얇게 퍼진 물고기들의 이동이 이채로웠다. 넙치는 광어라고 불리며, 일반적으로 양식이 잘 안 되는 어종으로 알려진 터였다. 반면에 다른 무리들은 비교적 양식이 잘 되는 편이었다. 이들은 이동할 때에 모래 바닥을 휩쓸며 서서히 움직이는 성향이 있었다. 비슷한 모양새와는 달리, 이들이 속하는 분류상의 과는 제각기 달랐다. 발육을 촉진하는 뼛가루 성분의 칼슘과 복합 아미노산의 중합체로 만들어진 사료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중간의 수중에서부터는 감성돔, 놀래미, 돌돔, 우럭, 전어 등이 먹이를 향해 돌진했다. 모래 바닥 부근에서는 도다리 등의 넓적한 어류가 먹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끓는 물 속의 기포가 부글거리며 치솟는 듯. 바닷물 속에서는 수많은 물고기 떼들이 몸통을 뒤흔드는 통에 반사되는 빛살이 쉴새없이 치솟았다. 먹이를 포획한 물고기들은 기염을 토하는 듯한 자세로, 서서히 자맥질해 들어가고 있었다.
  이 때, 민정이 물 속을 들여다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어머나, 저기 저 감성돔 좀 봐. 완전히 물 속의 귀족이네. 가시가 돋친 듯이 나란히 배열된 저 등지느러미를 좀 보라구."
  민정의 환호성을 듣자마자, 연희와 명주도 덩달아 손뼉을 치며 난리였다.
  "우와! 어쩜 저렇게도 의젓할까? 온몸에 광이 번쩍번쩍하잖아?"
  "이야, 저 유연한 몸짓! 저 여유로운 자태를 보라구. 와 죽인다 그지?"
  처녀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 떼들처럼 정신 없이 활개를 치며 쏘다녔다. 천 년의 침묵인 듯, 언제나 적막에 휘감겨 있던 갈섬이었다. 이러한 갈섬이 돌연히 활기를 찾아 깨어난 느낌이었다. 정오 무렵이 되자, 일행은 잠시 점심 식사를 하려고 집으로 들어섰다.
  뜰채로 건진 광어며 우럭의 회를 곁들인 점심 식사였다. 다들 일하느라고 시장했던 터라, 구미가 돋아 음식의 그릇들이 순식간에 말끔히 비워졌다. 다들 차례대로 포만감에 휩싸여 게슴츠레한 눈빛이었다.
  어느새 오후 1시에 접어들고 있었다. 민수는 널찍하게 치워진 거실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동편은 처녀들에게 휴식의 장소로 제공했다. 서편에는 사내들 둘이 자리를 잡고는 드러누웠다. 비교적 힘든 노동의 탓인 듯, 일행의 눈에는 스멀스멀 잠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바로 이 때였다. 연희가 앉은 자세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휴식 시간을 이용하여, 서로간에 좀더 깊은 대화를 나누면 안 될까요? 이렇게 만난 것도 얼마나 큰 인연인지 모를 일이에요. 자신의 지나온 자취들을 이야기하며 서로간의 느낌을 교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인데 다들 어떠세요?"
  용환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대답했다.
  "이건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인데? 내게도 무척 좋은 일이라고 여겨져. 그럼, 다들 마음을 털어놓고 지금까지의 인생 역정을 토로해 보자구."
  민수도 시원스런 어조로 말했다.
  "갈섬은 원래 무인도였어. 그런데, 나와 용환 씨가 나그네로 찾아 들었다가 주인이 된 거야. 이제 이 섬을 찾는 나그네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 그래서, 그들이 던져 주고 가는 메아리를 벗삼아 활기찬 인생을 영위하고 싶어. 너희들에 앞서 벌써 두 사람의 나그네가 다녀갔었지. 그 중의 하나는 죽고 하나는 지금 교도소에 복역중이야. 하여간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를 바래."

  세 처녀는 모두 23살의 동갑내기들이었다. 연희가 냉수를 한 잔 마신 뒤에 자신의 과거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나의 고향은 전남 진도 남단의 남동리에 있는 석성(石城) 마을이에요. 사적 제127호로 지정된 남도 석성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죠. 이 석성은 둘레가 526m요, 높이가 4m에 이르는, 돌로 쌓은 성곽이에요. 이 성은 고려 원종 때 삼별초가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이죠. 성의 보존 상태가 아주 양호하여, 지금도 성안에는 마을이 번듯이 남아 있어요."
  연희의 부모는 바다에만 생사를 내맡긴 전형적인 어부였다. 어부 치고 부유한 집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형제로는 남매가 전부였다. 3살 위인 오빠는 외항선을 탄 선원이었다. 연희는 고등학교를 가까스로 졸업한 뒤엔, 서울의 모 여대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여대에 입학한 뒤부턴 생계의 수단으로, 짬짬이 누드 모델이 되곤 했다. 주로 대학의 전속 모델이기도 했지만, 때때로 개인 화가를 상대로 하기도 했다. 모델이란 꽤 신경이 쓰이는 직업이긴 했지만, 소득은 일정 수준으로 보장되어 온 터였다. 4년간을 모델 생활을 한 뒤에, 얻는 것은 대학 졸업장이었다. 반면에 잃은 것은 가슴속에 타오르는 순수한 열정이었다.
  이 세상의 그 무엇을 대해도 새로운 것이 느껴지지 않는 그녀였다. 그 동안 애인이 되어 보겠다고 그녀에게 접근해 온 남학생도 셋이나 있었다. 하지만, 도무지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감정이 일어날 여지가 없었다. 그리하여, 번번이 결별을 하고 만 터였다.
  "그래서, 저는 제일 중요한 게 순수한 정서라고 생각해요. 이 세상에는 취하고자 싶은 것이 워낙 많지만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게 순수한 정서라고 생각해요. 저는 모델 생활을 영위하면서 이것을 상실해 버렸다고 믿어요. 비록 경제적인 자립을 통해, 대학은 졸업했지만 가슴에는 공허함만 가득할 뿐이에요. 이게 바로 제가 위도를 찾은 참다운 이유예요. 보다 철저히 저의 허상을 비워 버리고 새로운 삶을 여는 계기로 삼고 싶었어요."
  잠시 한숨을 내쉬고 나서, 연희는 말을 이었다.
  "물론 여기서 바깥 세상으로 나간다면, 더 이상의 방종한 생활은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서해산장에서의 생활을 통해서도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조직 관리라든가 철저한 승부 근성은 그 어디서도 쉽게 익히지 못할 것들이었어요."
  연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 머리를 끄떡거리며, 연희의 인생 여정을 그려   보는 모양이었다. 이어서, 색을 밝히는 여자라고 자신을 밝힌 명주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명주는 서울의 왕십리가 고향이라고 했다. 자신의 부모는 한국 굴지의 대기업의 임원이라고 했다. 종사하는 업체는 달랐지만, 아버지는 전무이사였고 어머니는 상무이사였다. 그런 집안에서 명주는 무남 독녀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도무지 부족함이라곤 모르고 자란 처녀였다.
  "저는요, 뭐든 원하면 제 손에 금방 쥐어졌어요. 남들의 경우에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경우가 절대적이었는데도, 내겐 곧바로 해결이 되곤 했거든요. 저는 물론 저의 능력이 특출해서 그런 줄로 한 때는 우쭐거리기도 했어요. 하지만, 점차 사유의 폭이 넓어질수록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자꾸만 들었어요. 그리하여, 부모님께 2년간만 유랑 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씀 드렸어요."
  용환이 듣고 있다가 불쑥 끼어 들었다.
  "어떻게 쉽게 허락해 주었어? 만약 흔쾌히 허락해 주신 부모들이라면 참으로 존경할 만한 분들이야."
  명주는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슬며시 지우며, 일행을 둘러보았다. 그러면서 눈빛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누가 쉽게 허락해 주겠어요? 당연히 씨도 안 먹힐 말이라고 여기면서도 말씀을 드렸죠. 그랬더니, 부모님의 눈빛이 금방 홱 변하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당혹한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끝까지 관철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녀의 아버지는 사려 깊은 방식으로 그녀를 설득시키려고 했다. 왜 그 나이에 유랑 생활이 위험한 거냐에 관한 거였다. 간혹 얼굴에 노여움의 빛이 묻어 났지만, 금세 애써 지우고는 다시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반면에 어머니는 다혈질이었다. 두어 차례 늘어놓은 자신의 말이 안 먹혀들자, 곧바로 명주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래도 명주가 수그러들지 않자, 급기야는 머리채를 싸잡아 당기려고 했다. 결국 그 날 저녁에 몇 자의 글을 남기고는 유랑의 길을 나선 거였다.
  유랑의 길에 올랐어도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당장 돈이 궁하여, 일간지의 생활 정보면의 광고를 보고 전화를 하게 되었다.
  <화끈한 만남, 당일 주선>!
  광고의 문구는 이랬다. 문구의 뒤에는 핸드폰의 번호가 적혀 있었다.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하니, 광고의 여주인은 장소를 지정하며 거기에서 만나자고 했다. 지정된 모텔에서 광고의 여주인을 만났을 때였다. 여주인의 나이는 40대 후반으로 보였고, 꽤 다부진 체격이었다. 한 마디로 힘깨나 쓸 만한 체구였다. 여주인은 명주를 만나자마자 대뜸 반말을 시작했다.
  "얘, 너 경험이 많아? 어디 내 앞에서 한 번 벗어 봐. 여자란 일단 몸매가 좋아야 상품 가치가 있다구. 야, 내 말이 안 들려? 빨리 훌떡 벗어 보란 말이야."
  그 날 이후로 명주는 2주 동안을 '포주'의 살 떨리는 지도를 받았다. 광고를 보고 찾아든 여자들을 규합하고 상품화하여, 돈을 버는 여자들을 세간에서는 '포주'라고 불렀다. 포주는 대기업체의 회장과 맞먹는 사업 수완이 있는, 괄괄한 성미의 여자였다. 1년간을 그 짓으로 돈을 번 뒤에야 명주는 포주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익힌 버릇이 그 짓이라, 명주는 좀체 다른 일에 손대기가 어려웠다. 그녀가 좀 멀리 떨어진 곳을 찾아다닌다는 게 위도에까지 흘러든 거였다. 위도의 서해산장은 또 다른 면모를 보여 주었기에, 그녀는 한동안 심취해 있었다. 어쨌거나 명주는 자신의 유랑 생활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여겼다. 오히려 많은 견문을 쌓은 계기가 된 거라고 믿었다.

  관능미가 가장 빼어난 민정이 상체를 가볍게 좌우로 흔들었다. 탄력적으로 치솟은 젖무덤이 덩달아 일렁거렸다. 민수는 순간적으로 숨이 딱 막히는 느낌이었다.
  '아, 어쩜 저리도 육체가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냥 발가벗겨 버리고 싶어 죽겠네.'
  여럿이 둘러앉은 마루였기에, 은은히 사람들의 열기가 퍼져 흐른 느낌이었다. 민정은 잠시 덥다는 듯이 양손을 펼쳐 보이더니, 민소매 티를 벗기 시작했다. 티를 벗자마자, 우유 빛의 속살과 함께 하얀 순면의 브래지어가 덩그러니 드러났다. 가일층 젖무덤이 앞으로 덩그러니 치솟아 사내들의 욕정을 자극했다. 민수와 용환은 거의 동시에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민수는 민정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야, 정말 각선미가 빼어난 여자로군. 이 여자와 한 번만 교접해도 다른 여자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겠군.'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민정이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나의 고향은 호반의 도시인 춘천이에요. 부모님은 두 분 다 약사로, 시내 중앙에서 제법 번듯한 약국을 운영하고 있어요. 저는 부모님께 제 스스로 학비를 벌어 대학을 마치겠다고 허락을 받았죠. 입주식 가정 교사를 하면 무난할 거라고 말씀 드렸죠."
  민정은 서울의 명문 대학 산업 디자인과에 입학을 했다. 그녀는 처음 한 해 동안은 입주식 가정 교사로서, 고등학생을 지도하며 학비를 벌었다. 그러다가 몸을 파는 친구들을 알게 되면서부터 점점 그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대학 2학년 때부터는 주로 유부남을 상대하는 매춘 클럽에 여성 회원으로 등록을 했다. 민정에게 느껴지기로 유부남은 확실히 매력 만점의 남성들이었다. 이해심과 배려에 있어서, 유부남을 따를 남성들은 보지 못했다.
  "확실히 유부남들은 달랐어요. 여성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전혀 서두는 법이 없었어요.

충분히 어르고 달랠 줄도 알며, 마음이 확 끌리도록 녹여줄 줄도 알았어요."
민정은 그 후로 유부남들을 주로 만나 성행위를 나누며, 학비를 벌어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유부남들의 매력을 잊을 길 없어, 위도에까지 오게 된 거였다.
민수와 용환도 그들의 내력을 쭉 처녀들에게 들려주었다. 처녀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 5시에 접어들고 있었다. 민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자, 서로간의 내력을 들었으니, 이제부터는 서로에 대해 경어를 쓰도록 하는 게 어때요?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게 얼마나 심오한 우주의 조화인지 아세요? 이러한 인간의 존엄성을 함부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어때요? 지금부터 상호간에 경어를 쓰는 게 어떨까요?"
  "네, 좋아요."
  "아이, 좋아라."
  "오빠들 정말 멋지세요."
  처녀들은 하나같이 환호성을 질러대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용환도 주위의 움직임을 간과할 수 없었던지 고개를 끄떡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순식간에 다른 세상으로 온 느낌이 들어요. 하기야 과거에 연연하여 의미 없는 삶을 살기보다는 새로운 안목이 필요하겠지요."
  민정이 호들갑을 떨어대며 말했다.
  "어머나, 정말 멋진 남성들은 다들 갈섬에 있었군요. 우리가 이렇게 훌륭한 두 분을 만나게 되다니 꿈만 같네요."
  갑자기 실내엔 활기가 가득 넘쳐흐르는 기분이었다. 명주가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게 좋은 오후에 그냥 실내에만 머물 수는 없잖아요? 이제 해변을 거닐면서 낙조를 감상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때요?"
  일행은 명주의 제안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섰다. 5월 중순의 바다는 파랗게 펼쳐져 끝없이 굽이치고 있었다. 신록에 닿아 휘감기는 바람결은 사람들에게 걷잡을 수 없는 황홀한 느낌을 안겨 주었다.
  일행은 갈섬의 해변을 따라 나란히 거닐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해는 아직도 서쪽 수평선 상공의 중반에 떠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민수는 제일 앞장서서 갈섬의 해변을 따라, 발길을 옮기며 바다의 장관을 감상했다. 민수를 뒤쫓아 민정이 따랐고, 그 다음으로는 연희와 명주가 따랐다. 그리고 맨 뒤쪽에서 용환이 대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민수는 뒤를 쓱 둘러보며 불쑥 말을 던졌다.
  "나를 따르는 여자들이 셋이나 되다니, 이거 그저 입이 쫙 찢어지겠는데요?"
  민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말대꾸가 쇄도했다.
  그러자, 처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마구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어머나, 누가 민수 씨를 따라간다고 그래요?"
  "참, 착각도 그 정도면 프로 수준이네요."
  "민수 씨, 나랑 함께 팔짱껴요, 우리. 나는 민수 씨의 활달한 태도가 마음에 들어요."
  민정이 민수와 팔짱을 낀 채, 다정한 눈빛을 민수에게 실어 보내며 미소를 지었다. 이 장면을 지켜보자, 연희가 장난기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구, 참 못 말려요. 언제부터 알고 지냈다고 저렇게 다정한 티를 낼까? 나는 용환 씨에게라도 매달려야지."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용환이 배알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관둬요. 난 뭐 자존심도 없는 사람이오? 누가 나에게 매달려 달라고 했소?"
  그러자, 이 번에는 명주가 용환의 허리에 팔을 감고 걸으면서 애교를 부렸다.
  "용환 씨! 설마 그만한 일에 삐치신 건 아니죠? 나는 용환 씨의 그윽한 눈빛이 너무나 맘에 들어요. 마치 황야를 굽어보는 서부 활극의 주인공 같은 눈빛 말이에요."
  연희도 뒤질세라, 용환의 팔짱을 끼고는 키득거리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뭔가 살아 있는, 아늑한 정감이 펼쳐진 인간의 행렬인 듯했다.

  일행이 한창 호들갑을 떨어대며 선착장 부근에 닿았을 때였다. 언제나 갈무리를 잘 하여, 윤기가 나는 나룻배에 이르렀을 때였다. 민수가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갈섬을 찾기가 쉽지 않을 텐데, 어때 내가 갈섬 주변을 일주시켜 드릴까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처녀들이 쾌재를 부르며 난리였다.
  "어머나, 좋아라! 역시 민수 씨가 최고야. 참, 용환 씨도 민수 씨의 친구니까 덩달아 최고예요."
  용환도 처녀들의 애교에, 두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나룻배에 처녀들을 배치시킨 뒤에, 민수와 용환은 나란히 노를 잡았다. 해면은 말할 수 없이 잔잔하기만 했다. 섬의 주변을 한 바퀴 돌기에는 최상의 날씨였다. 출발에 앞서, 민수는 흘낏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오후 여섯 시 무렵이었다. 이제 바다는 석양에 휩싸여 핏빛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남실대는 바다의 수면은 수만 마리의 은빛 물고기 떼처럼 연방 파드득거리며 치솟곤 했다. 바람이 일 때마다, 파동 치는 길다란 물 이랑이 생겼다가 슬그머니 스러지곤 했다.
  막 배를 저어 선착장을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용환이 처녀들을 향해 뭐라고 소곤대자, 처녀들은 일제히 용환을 따라 나섰다. 용환은 민수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눈짓을 보이더니, 이내 집을 향해 달려갔다. 잠시 후에 줄지어 나타난 그들의 손에는 술과 음식더미가 가득 들려 있었다. 민수도 가볍게 고개를 끄떡거리며, 그들로부터 음식물을 받아 배에 옮겨 실었다.
  마침내 배는 바다를 가르기 시작했다. 눈부실 정도로 쾌청한 날씨였다. 신록의 계절이라, 갈섬을 뒤덮은 수목들의 잎새들이 연초록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바람에 휩쓸릴 때마다 초목은 수목의 이랑을 이루었다가는 금세 연두색의 평원으로 드러눕곤 했다. 배는 갈섬의 남동쪽에서 출발하여 동쪽 해안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돌 작정이었다.
  크게 파도가 일지 않는 터라, 배를 몰기에는 최상의 날씨라고 여겨졌다. 민수와 용환은 뱃머리의 좌우에 앉아, 나란히 노를 잡았다. 배는 갈섬의 남동쪽에서부터 동쪽과 북쪽을 거쳐 서쪽을 돌아 일주할 예정이었다. 처녀들은 무척 기대에 부푼 모습들이었다.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듯한 눈빛이 실려, 한결 젊음을 아름답게 만드는 듯했다.

  배는 점차 선착장에서 멀어지면서 푸른빛이 감도는 갈섬의 주변 해역을 미끄러져 나가고 있었다. 바다의 수면은 석양으로 말미암아, 수만 갈래의 자줏빛 물 무늬를 이루며 일렁이고 있었다. 물 무늬가 남실거릴 적마다 빛살이 반짝거리면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보면 볼수록 점점 경이로움에 빨려들게 만드는 아늑한 정취를 불러일으켜 주는 정경이었다.
  배는 이제 몸을 돌려 갈섬의 동쪽 해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동쪽 해역에는 해변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들이 성벽처럼 줄지어 치솟아 있었다. 대략 30여 분을 저어 나가자, 절벽 아래쪽으로 해식 동굴이 커다란 입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굴의 크기는 두 척의 동력선이 나란히 드나들 수 있는 폭과 높이였다.
  동굴을 처음 발견한 순간, 민수와 용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놀라는 눈빛이었다. 그 동안 줄곧 갈섬을 지켜 왔지만, 해식 동굴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었다. 배를 타기 전에는 결코 발견해 낼 수 없는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경이로운 것은 동굴이 천연의 예술품처럼 너무나도 아름다운 형상을 지녔다는 점이었다.
  거울같이 매끄럽게 반짝이는 수면. 수면에 그윽하게 드리워진 높다란 절벽. 절벽의 바위 틈새마다 새파란 색채로 매달려 간들거리는 풍란의 군영들. 바람이 일 때마다 하얀 깃털을 나부끼며 활갯짓을 하며 두리번거리는 갈매기 떼들. 동굴은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내부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듯했다.
  이 때였다. 민정이 갑작스레 목소리를 높이며 제안을 했다.
  "동굴 속으로 배를 몰아, 동굴의 비경을 한 번 감상하는 게 어때요?"
  그러자, 이구동성으로 처녀들은 다 같이 입을 모아 구경을 시켜 달라고 했다. 용환은 흘낏 민수를 바라보았다. 이에 민수도 알았다는 듯이 잠자코 고개를 끄떡거렸다. 배는 금세 항로를 바꾸어 동굴 속으로 천천히 진입하기 시작했다.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향긋한 풍란의 향기로 코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동굴의 벽면과 천장의 바위 틈새에는 하나같이 풍란이 싱싱한 꽃을 피우고 있었다. 퇴적암으로 형성된 바위의 지층이 수평면과 약 15도의 각도로 기울어 있었다.
  동굴의 입구로부터 50여 미터쯤 안쪽으로 들어서자, 태양 빛이 엷어지며 어둑어둑해졌다. 시야가 가려져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굴은 계속 섬을 관통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다시 십여 미터를 더 저어 나아가니, 굴은 거기에서 막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배를 되돌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민수와 용환은 나란히 힘을 써서 배를 돌리기 시작했다. 나룻배라 별다른 어려움 없이 금세 방향을 되돌릴 수 있었다.

  헌데, 이 때 용환이 뭔가를 발견한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저기 벽면에 시커먼 물체가 뭐야?"
  다들 용환의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오른쪽 절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아닌게아니라 커다란 괴물체가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물 속에 잠겨 있었다. 그것을 한동안 주시하던, 민수와 용환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아니, 이건 고물이 된 선박이잖소? 언제부터 고물 덩어리로 여기에 와 있었는지 모르겠군요."
  비상용으로 배에 부착해 놓은 랜턴을 켰다. 금세 불빛이 환해지면서 폐선박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거의 대부분이 물 속에 잠겨 있었고, 뱃머리의 일부만이 수면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민수가 용환을 향해 말했다.
  "적어도 이 배는 부식 상태로 봐서, 3년은 넘게 여기에 방치된 모양이오. 용환 씨의 생각은 어떻소?"
  "나도 동감이오. 틀림없이 그 정도의 세월은 흘렀을 것 같소. 선체를 이룬 부분의 부식 상태가 이만저만이 아니오. 그런데, 이 배가 무슨 연유로 여기에 와서 침몰했을까요?"
  민수도 랜턴을 빼 들고는 동굴의 벽면을 샅샅이 비춰 나갔다. 바로 이 때였다. 동굴의 천장으로부터 퍼덕거리는 활갯짓 소리가 들리면서, 수십 마리의 박쥐 떼가 허공을 날았다. 귀에 거슬리는 '끽끽'거리는 음향을 토해 내며, 박쥐 떼가 나룻배 위를 마구 선회했다. 이에 처녀들은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이를 보자, 용환이 처녀들을 향해 말했다.
  "소리를 지르지 마세요. 흡혈 박쥐일 가능성이 커요. 자, 지금부터 조용히 하세요."
  처녀들은 얼굴이 경직된 채,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공포에 질린 표정들이었다. 이 때 민수는 처녀들을 향해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됐어요. 이젠 괜찮을 겁니다. 우리가 먼저 박쥐들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돼요. 만약 공격해 오더라도 산탄 공기총이 있으니까 별로 문제는 없어요."
  이 말을 듣고 나서부터 처녀들의 얼굴에 서렸던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박쥐들은 여전히 나룻배의 상공을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끽끽'대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듯한 엄연한 시위로 여겨질 정도였다. 민수가 박쥐 떼로부터 눈길을 거두고 용환을 흘낏 바라보았다. 용환은 랜턴을 몇 차례씩 반복하여, 폐선박 부근의 암벽에 비추어 대고 있었다. 그러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민수를 향해 말했다.
  "저기 저 바위 틈새를 잘 봐요. 사람의 발자국 같지 않소?"
  민수도 경각심을 갖고, 바위 틈새의 경사진 부분을 바라보았다. 폐선박 측면에서부터 경사를 따라 천장으로 향해 발자국의 흔적이 줄지어 있었다. 아래에서 보니, 천장은 기복이 심했고 기복이 심한 곳에서부터 발자취는 끊겨 있었다. 민수는 용환을 향해 말했다.
  "잠시 나룻배를 폐선박 주위에 갖다 댄 후에, 암벽을 한 번 살펴봅시다. 뭔가 미심쩍은 요소들이 적지 않은 느낌이오."
  이윽고, 두 사내는 배를 폐선박 근처에 정박시키고는 배에서 내려 암벽에 올라섰다. 처녀들에게는 배 위에 머물러 있으라고 당부를 한 뒤에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폐선박 주위에는 대여섯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의 암반이 자리잡고 있었다. 두 사내는 랜턴을 켜서 발자국을 더듬어 나갔다. 열 걸음쯤 걸었을 때, 암벽 뒷면으로부터 좁다란 바윗길이 나타났다. 겨우 한 사람이 빠져나갈 수 있는 폭이었다.

  이 때였다. 용환이 랜턴의 각도를 높여 멀리까지 비추며 말했다.
  "저기 저 위를 좀 봐요. 천장 내부에 작은 석실이 있어요. 이건 전혀 예상 못했던 지형인데요."
  민수도 용환의 설명을 들으며 앞으로 고개를 내밀어 바라보았다. 용환의 말대로, 작은 바윗길이 끝나는 곳의 천장에 작은 석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가파른 경사를 따라 바윗길을 올라서니, 다섯 평 가량의 반듯한 석실이 시야에 나타났다. 두 사내는 서로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석실로 올라섰다. 석실의 중앙에는 세 구의 해골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상당히 오래 되었는지 입고 있던 의상마저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석실의 뒷면 벽면 아래에는 돌로 된 제단이 차려져 있었다. 제단 뒤에는 사람의 앉은 키만한 석불 세 개가 자리잡고 있었다. 제단 위에는 양초가 줄줄이 꽂혀 있었고, 쌀을 채운 봉지도 두어 개 있었다. 쌀 봉지를 치우니, 단서가 될 만한 누군가의 일기장으로 보이는 공책이 드러났다. 두 사내는 눈빛을 빛내며 공책을 향해 서서히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