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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8회
섬과
나그네
손
정 모
8. 변산 해변의 연가
해변을 휩쓰는 파도 소리만이 한밤의 정적(靜寂)을 깨뜨리는 밤이었다.
민수는 단정한 자세로 책상 앞에 앉아, 하루 동안의 일들을 일기로 남겼다. 일기장에
한 바닥 가량의 일기를 쓴 뒤에 그는 경건한 자세로 일기장을 덮었다.
그는 잠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자정을 막 넘어서고 있었다.
그대로 잠자리에 들기에는 뭔가 허전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그는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눈을 감고는 쭉 허리를 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은 금방이라도 섬을 삼켜
버릴 것만 같은 파도 소리뿐. 철썩철썩 소리를 내며 파도는 연방 해변으로 엉겨들고
있었다. 한밤중이라 그의 청각은 멀리까지 뻗쳐 있었다. 바람 속을 뚫고 지나는 어떠한
소리도 읽어낼 정도였다.
헌데,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으려니
여겼다. 하지만, 점차 은밀히 목을 죄어 오는 듯한 기묘한 음향이 청각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어찌 들으면 갈매기들이 뭔가에 놀라, 종횡으로 활개를 치며 날아오르는
듯도 했다. 한편으로는 목이 쉴 대로 쉰 사람의 흐느낌 소리 같기도 했다. 현재로서는
그 혼자 있는 갈섬이었다. 의외로 낯선 음향이 청각에 잡히자마자 그는 은근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벽에 세워 둔 각목을 움켜쥐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실내의 불을 끈 뒤에 조용히 집을 나섰다.
바로 이 때였다. 갈섬의 북동쪽 해변으로부터 손전등의 불빛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불빛은 붉은 색의 섬광이 되어 사방으로 치솟고 있었다.
'대체 어떤 놈들일까? 분명 밤중에 누가 갈섬에 들어왔다는 얘긴데?
아무튼 수상한 일임에 틀림없으니 잘 살펴봐야지.'
그는 안주머니로부터 소형 망원경을 꺼내 들었다. 작은 크기였지만,
시계 10km까지는 30배까지 확대시켜 볼 수 있는 거였다.
이내 거뭇거뭇한 형체로 두 사람의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배율을
높이니, 남녀임이 밝혀졌다. 그는 망원경을 눈에서 떼어내며 생각에 잠겼다.
'더욱 수상한 일인데? 이 밤중에 남녀가 배를 저어 무인도에 찾아들다니?
생각할수록 묘한 일이로군.'
그는 망원경을 다시 꺼내 들고 남녀에게로 접근해 가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손전등을 비추며 배회하던 남녀는 잠시 불을 끈 채 말이 없었다. 광원으로 작용하던
손전등의 불빛이 사라지고 나니, 망원경은 의미 없는 물건이 되고 말았다.
그는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해변의 남녀에게로 바싹 접근해
갔다. 대략 십여 분이 지났을 때였다. 마침내 그는 남녀가 서성거리는 북동쪽 해변에
닿았다. 이제 남녀로부터의 거리는 대략 삼십여 미터에 이르렀다. 은폐물로는 높다랗게
치솟은 바위를 이용했다. 뾰족하게 치솟은 바위 자락에 몸을 숨긴 채, 그는 해변의
남녀를 주시했다.
어두움 속에서도 남자의 나이는 대략 40대 후반으로 보였으며, 여자는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남녀의 나이 차이는 대략 17∼18세로 벌어져 있어서, 첫눈에
불륜의 쌍으로 여겨졌다. 그는 남녀의 움직임을 잠자코 지켜보기로 했다.
남자는 키가 170cm 정도에, 씨름 선수와도 같은 거구의 다부진 체격이었다.
여자는 165cm 정도의 키에 날씬한 몸매를 지닌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한 마디로 사내 깨나 홀렸을 만한 미모였다. 그녀는 얇은 민소매 티에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팔을 들어올려 뒷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쉴새없이 와 닿는 바닷바람이
그녀의 스커트 자락에 매달려 파드득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반 팔 티에 코르덴 바지
차림이었다. 남자는 허리에 두 손을 갖다 붙인 채, 잔득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옆에서 조금만 말을 걸더라도 당장에 발작을 할
듯한 기색이었다.
'자식! 거 표정 하나 더럽게 고약하네. 상판을 보니까, 복을 받기는
틀린 얼굴이야. 뭐가 좋다고 저런 놈한테 여자가 붙어 다닐까? 참으로 세상은 요지경
속 같다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그는 이 번에는 여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묘한 것이 여자의
얼굴 모습이라고 여겨졌다. 처음 볼 때에는 예쁘장하다고만 여겼었는데, 점점 시선이
자주 끌리는 느낌이었다.
바로 이 때였다.
"석민 씨! 또 그 놈의 갯강구가 다리를 타올랐나 봐. 나, 짜증
나 미치겠어, 정말."
여자는 미니스커트를 훌렁 걷어올리면서 넓적다리 부분을 연방 손으로
털어 내고 있었다. 순간적인 변화에 대응하여, 민수는 쌍안경을 꺼내 여인의 넓적다리
부분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아마도 넓적다리 부근에까지 갯강구가 기어
오른 모양이었다. 기겁을 하며 여자는 더욱 스커트를 바싹 끌어올렸다. 하얗게 드러나는
낯선 여인의 넓적다리! 그는 자신도 몰래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자신도 몰래 한결
눈빛을 빛내면서, 여자의 뽀얀 속살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가 취한
듯이 여자의 사타구니 부분을 들여다보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잠시 되돌아보았다.
'나 참, 못 말리겠구먼. 지금 때가 어느 땐데, 낯선 여자의 넓적다리나
지켜보고 있다니? 행여 내 눈알이 튀어나온 건 아니겠지?'
여자가 한동안 미니스커트를 걷어올린 채 난리를 떨었어도 남자는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송충이를 씹은 듯한 얼굴 표정이었다. 민수는 남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자식! 똥을 누려나? 거 되게 고약한 인상이네.'
줄곧 바다를 노려보고 있던 사내가 느닷없이 밤바다를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이야아앗! 이야아앗!!"
냅다 고함을 내지르더니만, 남자는 밤의 해변을 향해 마구 내달렸다.
연이어 여자도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남자의 뒤를 정신 없이 따라 달렸다. 남자는
달리면서, 광기 서린 목소리로 포효하기 시작했다.
"야, 말 좀 해 보란 말이야. 왜 이 나이에 내가 암에 걸려 죽어야
하냐구? 누구 마음대로 내 몸뚱이에 암을 함부로 심고 난리야! 아아아아 ……"
남자가 뱉어낸 음절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도 가슴에 시린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그래, 암은 현존하는 인간이 넘어야 할 마지막 관문이야. 그 누가 흙에서
난 인생은 다시 흙으로 되돌아간다고 했더뇨? 태양 에너지로부터 삶을 부여받은 인생이
종내는 자외선의 축적에 따른 암으로 일생을 마치다니! 모를 일이어라. 이 순간에도
혹시 내 몸 속에 종양 세포가 뿌리를 내릴는지는?'
그는 이제야 남자의 광기가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
그랬었구나. 그리도 강건해 보이던 남자의 몸 속에서 암 세포가 번창하고 있었다니!
남자는 해변의 언저리를 쉴새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덩달아 여자도
입술을 악물고 남자의 뒤를 쉬지 않고 달렸다. 갈섬에서 벌어지는 한밤중의 희한한
경주였다. 남자는 좀체 멈춰 설 기미가 없어 보였다. 여자는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남자의 그림자이기라도 한 듯, 집요하게 남자의 뒤를 따라 달렸다. 민수는 광란에
휩싸인 듯한 남녀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아, 저러다가는 제 풀에 지쳐 숨이 끊어지고야 말겠는데? 암이 문제야.
저 나이에 암이 나타났다는 건 확실히 충격적일 수밖에는 없어. 내가 저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일이야.'
그는 밤바다의 수평선을 그윽이 바라보았다. 여전히 밤바다의 바람결은
파랗게 날이 서 있었다. 피부를 스치는 바람결마다 하늘의 별들이 깨어나 몸서리를
치는 기분이었다. 섬뜩한 한기가 쉴새없이 전신을 내리 훑고 있었다. 잠시 후에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하늘 가득히 별들이 깨어나
빛을 뿜고 있었다. 어째 사는 것이 이 모양인가 싶기도 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자신의 삶 하나를 다스리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그는 암흑이 짙게 깔린 섬의
바위 섶에 몸을 눕히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처음에 관악에 자리잡은 대학에 들어갈
때만 해도 얼마나 가슴이 부풀어올랐던가? 그러던 것이 이제는 무인도에 틀어박혀
고작 물고기나 벗하고 사는 삶이라니?
그는 흘낏 시계를 바라보았다. 집을 나선 지 벌써 이십여 분이 흐른
시점이었다. 그는 흠칫 놀라 바위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섬의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 사이에 남녀의 자취는 온데간데없었다. 약간은 놀랍고도 허망한 생각이
들어, 그는 서서히 쌍안경에 눈을 갖다 대었다. 갈섬의 북반부 어디에도 남녀의 자취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바위를 떠나 섬의 중앙에 붕긋이 솟구친 언덕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갯내음이 물씬 담긴 바닷바람이 연신 그의 후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길섶의 작은 돌조각들이며 잎새들이 흐트러지곤 했다.
그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는 조심스레 섬 중앙의 언덕에 올라섰다. 그는 언덕 정상
부분에 자리잡은 해묵은 동백나무의 등걸에 올라, 쌍안경을 꺼내 들었다. 섬의 남동쪽
해변에서 불길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그렇찮아도 불안하던 판에, 해변에서 치솟는
불길을 보자 그는 섬뜩한 느낌에 휩싸였다. 그는 서둘러 망원경으로 그 곳의 정황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먼 거리 탓인지 치솟는 불길만이 시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쌍안경을 품에 넣고는 이내 동쪽 해변을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십여 분이 지나, 그는 가까스로 해변에 닿았다. 섬의 해변에서 피어오른
밤 안개로 말미암아, 지척을 분간키 어려웠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것은 하늘로 치솟는
시뻘건 화염뿐이었다. 불길을 제외하고는 온 세상이 안개에 뒤덮인 듯 인적이라고는
일체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점차 불길에 가까워지자, 고무 타는 역한 냄새가 그에게로
밀려들었다.
허겁지겁 불길이 미치는 현장 가까이 접근했을 때였다. 밤중인데도 새카만
연기가 불길과 함께 하늘로 흉흉하게 치솟고 있는 게 눈에 드러났다.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두 주먹을 말아 쥔 채, 불타는 현장에 닿았다. 불타는
물체는 소형 고무 보트의 몸체였다. 그는 급히 고개를 주위로 돌려 남녀의 행방을
찾았다. 하지만, 남녀는 어디에 있는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기야 동백나무
숲 속에 나란히 드러누워 있다면, 찾기란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숲이래야 사람의
배꼽 부분에 이를 정도의 관목 숲에 불과했다. 일부러 몸을 숨기기로 한 것이 아니라면,
눈에 띄어야 마땅했다.
그는 잠시 불타는 고무 보트는 내버려두기로 했다. 어디엔가 있을 남녀를
찾기로 했다. 그는 남녀를 찾으면서도 마음이 계속 불안하기만 했다. 불타는 고무
보트는 아마도 그들이 타고 들어왔던 교통 수단이었을 터였다. 그 중요한 교통 수단을
불태웠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슴이 저려 왔다. 간암 말기에 이르러, 목숨이
경각에 붙었다는 남자의 얼굴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렸다. 그리도 건강해 보이던 체격이었건만
암에는 어쩔 수가 없다니!
왠지 당장 찾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야 말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그는 손전등을 꺼내 들고는 주위를 비추면서 크게 고함을 질렀다.
"여보세요! 여기 아무도 없어요? 여기 아무도 없냐구요!!"
그는 몇 번이고 악을 써 가며 고함을 질러 보았다. 하지만, 그의 귓전에
밀려드는 것은 철썩거리며 와 닿는 파도 소리뿐. 주위는 죽음 같은 정적 속에 빠져
있었다. 그는 고함을 몇 번 지른 뒤에, 남녀의 이동 경로를 추정해 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불타는 고무 보트 주위에서 크게 벗어날 것 같지 않았다. 그의 가슴에 섬뜩하도록
지핀 것은 죽음의 색채였다. 뭐라고 꼬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가슴이 먹먹하도록
밀려들던 처절한 슬픔의 메아리였다. 아무래도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나도 가슴이
옥죄어 드는 일이었다.
이제 그는 예견된 직감을 믿기로 했다. 아무래도 서둘러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왜 그런지는 설명할 수 없을지라도 그냥 있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는 이제 굵은 나무 막대기를 구하여 풀숲을 헤치면서 사방을 탐색해 나갔다. 잠자던
새들이 놀라 깨어 하늘로 치솟고, 여기저기서 새들의 활갯짓 소리가 섬을 뒤흔들었다.
그는 왠지 마음이 다급해졌다. 굳이 그 이유가 뭔지는 말할 수 없었지만, 자꾸만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대략 탐색 작업을 한 지 십여 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보트가 불타는
지점으로부터 백여 미터 떨어진 북쪽 지점에서였다. 한없이 미약한 소리였지만, 분명한
사람의 신음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오고 있었다. 그는 돌연 머리카락이 하늘로 삐죽
치솟는 듯 가슴이 떨렸다. 어떤 실마리라도 찾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막상 신음 소리를
듣고는 가슴이 떨렸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은 뒤에, 곧바로 소리의 발원지를 향해
다가갔다.
신음 소리는 연방 입으로부터 피를 쏟고 있는 여자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곁에는 이미 동공이 풀려 버린 남자의 시신이 별빛을 받으며 나뒹굴고
있었다. 남녀의 발치에는 마시다 버린 살충제의 유리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어쩜 이런 일이? 암이라고 해서 이런 식으로 종지부를 찍을 수는 없는
일이야. 여기에는 뭔가 복잡한 사연이 있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일 거야. 우선
저 여자만이라도 살려낼 수는 없을까? 비상 약품이라고는 머크로큐롬과 과산화수소밖에는
없는데, 이 일을 어쩐다?'
그는 우선 손전등을 밝혀, 여자의 안색부터 주의 깊게 살폈다. 눈꺼풀부터
뒤집어 본 뒤, 숨쉬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았다. 소생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먼저 타진하고 볼 일이었다. 숨소리나 동공의 상태로 봐서 깨어나기가 어려울 것으로
여겨졌다. 군 수색대에 있을 때, 여러 번 인명 구조를 해 본 경험으로부터의 느낌이었다.
한밤중이라 격포항에 연락을 취해도 긴급 구조선이 바다에 뜰지도 의문이었다. 설사
구조선이 온다고 해도 배가 닿기도 전에 여자는 숨을 거둘 것 같았다. 그는 신속히
판단을 내렸다. 이왕 죽을 여인의 목숨임에랴 ! 숨을 거둘 때까지 고통을 덜 받게
해 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는 섬의 남서쪽에 있는 연못으로 여자를 업고 갔다.
연못에 닿자마자 수건을 물에 적셔, 여자의 피묻은 얼굴을 말끔히 닦아 내었다. 그리고는
여자를 일으켜 앉히고는 신발에 물을 떠서 강제로 여자의 입에 털어 부었다. 마시지
않으려고 발버둥칠 때마다 코를 잡아 물을 삼키게 했다. 세 차례를 반복한 뒤에 여자의
등을 가만히 주물러 주었다. 그는 다음에 일어날 반응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물을 한 신발 더 먹여? 물을 더 먹일지 어떨지를 막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자는
'왝'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토악질을 해 대기 시작했다. 역한 냄새와 더불어 희석된
농약 성분이 입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거의 신이 들린 듯이 여자의 등을
두드리며 문질러 주었다. 토악질이 웬만큼 끝났을 때였다. 그는 여자를 반듯이
눕힌 뒤에, 여자의 입술에 물에 적신 수건을 받쳐 주었다. 혹시나 모를 일이다 싶어
그는 자신의 주머니를 뒤졌다.
바지 주머니에 뭔가 하얀 알약 두 개가 보였다. 얼마 전에 몸살을 앓아
먹다 남은 아스피린 두 알이었다. 그는 아스피린을 으깬 다음, 여자의 입에 털어
넣고는 물을 마시게 했다. 그는 조심스레 여자의 안색을 살폈다. 그리고는, 여자의
눈꺼풀을 뒤집어 보았다. 아직까지는 동공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미약하나마 숨소리도
규칙적으로 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의식은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여자를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갈등에 휩싸였다.
'여자가 소생할 가능성은 완전히 제로(零)인가? 내가 의사도 아니면서,
응급 조치를 취하고 아스피린을 복용시켰는데 문제는 없을까? 이제라도 핸드폰으로
구조 요청을 해야 옳은가? 아니면, 의식이 깨어나길 기다려 유언이라도 들어주는
게 좋은 일인가? 한밤중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렵지는 않을 텐데. 이게 무슨 일이야?'
그는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 왔다. 그리하여, 먼저 119를 눌러 교신이
되기를 기다렸다. 다섯 차례나 반복하여 누른 뒤에야, 가까스로 통화를 했다. 하지만,
응답의 내용은 예상한 대로였다. 사정은 딱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어쩔 수
없는 사유로는 비상 연락선도 없는데다가 해상에 내보낼 인원이 없다는 거였다. 다음으로는
114를 통해 야간 진료 병원을 알아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배를 대절해서라도
육지에까지는 환자를 데려와야 한다는 거였다.
대절선이라는 말에 그는 벌떡 땅바닥에서 일어섰다.
'지금 이 시각에 대절선을 어디에서 구한단 말인가? 나의 나룻배로는
위도에 건너가기도 전에, 여자는 숨을 거둘 지도 몰라. 어쩌면 내게 이런 난감한
일이 벌어져 나를 괴롭히는 걸까?'
그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보았다. 도저히 승산이 없는 일에 손을 대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육지로 여자를 데리고 나가는 데는 문제가 적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여자를 편안히 눕혀 놓고는 연못에서 가까운 숙소로 달려가서
녹음기를 가져왔다. 만약의 경우에 여자가 깨어날 경우를 대비하여, 소형 녹음기를
준비해 온 거였다. 혹시라도 여자가 유언을 남기게 되면 연고자를 찾아 넘겨줄 작정이었다.
녹음기를 찾아들고 막 여자의 곁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여자의 눈꺼풀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즉시 그는 여자를 일으켜 앉혔다. 그러고도 한동안이 지나서야
여자는 눈을 떴다.
"어머, 제가 지금 살았나요? 석민 씨는요? 역시 그랬구나. 댁이
저를 구하셨나요?"
"잠깐만요. 아직 댁은 회복되었다고는 볼 수가 없어요. 잠시 더
경과를 지켜봐야만 해요."
"그럼, 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요? 어떻게 된 건지 조금 설명해
줄래요?"
그는 여자를 발견한 뒤부터 구출할 때까지의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던 여자는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댁이 저를 살린 분이시군요. 또한 저의 순간적인 판단 착오도
저를 되살리는 데에 한몫 한 셈이구요."
여자는 나른한 신색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른 두 살의, 여자의 이름은 백인숙(白仁淑)이라고 했다. 그녀는
3년 전부터 49세의 윤석민(尹碩敏)과 교제를 시작했다.
"석민 씨는 부인을 교통 사고로 사별한 홀아비였어요. 그와는 동종의
업계 근무를 통해 자주 만나곤 하는 사이였어요. 그러다가, 석민 씨가 단독 사업체를
차리겠다기에, 편법으로 돈을 유통시켜 주곤 했죠."
"편법으로 돈을 유통시키다니요? 혹시?"
"네, 그랬어요. 고객의 예탁금을 타인 명의로 이전시키는 듯이
서류를 변조하여, 금액을 빼돌려 왔어요. 딱 한 번만 하자고 다짐한 것이 5억 원대에
이르고 말았어요."
"그런데, 석민 씨와 굳이 자살할 마음까지 먹은 건 쉽게 납득이
안 되거든요."
인숙은 잠시 허공을 올려다본 뒤에 서서히 입을 열었다.
"그래요. 누구든 내 입장이 아니고서는 쉽게 저를 이해하지는 못할
거예요. 석민 씨의 사업만 잘 되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렇게 궁지에 몰리지는 않았을
거예요. 나는 도중에라도 석민 씨만 경제력이 회복되면, 감쪽같이 원상 복귀시킬
작정이었거든요."
그는 흘낏 해변을 바라본 뒤에, 인숙을 향해 말했다.
"네, 이해가 될 듯해요. 그런데, 석민 씨가 암에 걸린 것은 언제였어요?"
"바로 작년 연말 무렵이었어요. 여간해서는 병원 신세를 지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작년 연말에 직장에서 갑자기 쓰러져 일어나지를 못했어요.
처음에는 업무로 인한 단순 과로로 여겼거든요. 하지만,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면서부터
암이란 게 밝혀졌죠. 그것도 말기에 가까워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라는 거였어요."
인숙은 작년 연말의 일을 떠올리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지난 해 12월 초순의 일이었다. 경희대 의료원에서 암 치료를 받으면서부터
점차 석민은 자신감을 상실해 갔다.
"인숙아! 나 때문에 힘들지? 나는 이왕 오래 살지 못할 목숨이야.
그러니, 너라도 정신 차려, 이 좋은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야 되지 않겠니?"
석민은 항암 치료에 들어서면서부터 부쩍 현실 생활을 못 견뎌했다.
인터페론을 비롯한 항암제를 주사 맞기 시작하면서부터 석민은 극도의 절망감에 휩싸였다.
침상에 드러누워서도 수시로 창 밖을 올려다보며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때때로 그는
환자복 차림으로 병실을 나와 방문자 대기석에 앉아 있곤 했다. 석양이 커튼 자락에
드리워질 때면 유독 서쪽 하늘을 올려다보며 우울해 하곤 했다. 석민은 입원한 지
이 주일째부터는 인숙을 만나도 크게 즐거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인숙이 석민을 찾을 때마다 석민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인숙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인숙이 자리를 뜰 무렵이면, 석민은 조용히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 배웅하곤 했다.
항암제로 인해, 머리카락이 빠진 대머리로 환자복만 걸치고 있던 석민이
인숙을 향해 말했다.
어느새 2주가 지난 12월 하순이었다.
"인숙아! 나 이제 여기엔 그만 머물고 싶어. 모든 게 지겨워. 제발
날 좀 퇴원시켜 줘."
그 때는 주입되는 항암제의 농도가 점차 증가될 때였다. 사람의 골수
속에서 만들어지는 인터페론은 그 약리 작용도 강했지만, 후유증 또한 컸다. 인터페론의
농도 증가로 인해, 곧바로 머리카락 및 손톱, 발톱이 빠져나가곤 했다. 머리카락
한 올 달리지 않는 대머리에 환자복 차림으로 석민은 곧잘 긴장하곤 했다.
아침부터 간호사를 통해, 인숙을 불러달라고 수차 부탁을 한 석민이었다.
어디에서건 바쁜 업무로 인해, 잠깐씩 일이 지체되는 경우도 있는 터였다. 석민은
바로 이러한 점을 못 견뎌했다.
"간호사 선생님! 제가 핸드폰이 없기도 하려니와 환자 신분이라
아까 인숙 씨를 불러달라고 부탁 드렸죠? 혹시 잊으셨으면 한 번만 더 연락해 주시겠어요?"
"아, 물론이죠. 아까도 줄곧 연락해 봤는데요,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태라는 메시지가 계속 떴어요. 결국 음성 메시지로 녹음시켜 두었거든요.
헌데도 아직까지 연락이 없었나요?"
"감사합니다. 제 신경이 상당히 예민해졌나 봐요."
석민은 말을 하면서도 환자용 침대의 철골 구조물을 자꾸만 쥐고 흔들려고
했다.
"그 날 그는 나를 몹시도 기다렸나 봐요. 내가 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무척 나를 반기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지요. 이제 제발 그를 좀 병원에서 퇴원시켜
달라는 거였죠. 헌데 당시는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나가면 불과 2개월을
못 넘긴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했거든요."
여전히 사위가 적막에 잠긴 한밤중이었다. 언제 숨을 멈출지 모르는
인숙의 얘기를 듣고 있으려니까 그는 가슴이 아려 왔다. 우선 급한 대로 중요한 부분부터
먼저 알아두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는 인숙이 잠시 숨을 추스르는 틈을 타서 그녀에게
질문했다.
"궁금한 게 있거든요. 어째서, 석민 씨는 숨을 거두었는데, 댁은
지금까지 견뎌낼 수 있었는지 상당히 궁금해요.
"아, 그 말이군요. 거기에 대해 간단히 설명 드릴게요. 석민 씨는
살충제의 전액을 다 마셔 버렸구요. 나도 죽기로 작정하고 약병을 열고 마셨죠. 하지만,
액체의 맛이 하도 거북했기에 도저히 다 마실 수가 없었어요. 추측컨대 대략 사분의
일 가량은 마셨을 거예요."
그에겐 이 모든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 어쩜 이것도 운이라면 운임에 틀림없어. 그러나, 농약이 넘어간
식도라든가 위장은 틀림없이 적잖게 손상되
었으리라. 날이 밝을 때까지만, 인숙이 죽지 않는다면 격포의 정미에게 연락을
취하면 될 거야."
그는 인숙을 향해 제안했다. 아무래도 내용물을 토해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물을 더 마실 것을 권했다. 인숙은 선선히 그의 제안에 따랐다. 그는 천막집에서
가져온 바가지로 물을 떠서 인숙의 입에 부어 주었다. 아직도 기력이 쇠진하여, 스스로
마시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그는 억지에 가깝게 독려를 하여, 그녀에게 세 바가지의
물을 더 먹였다. 대략 3분쯤 지나자 인숙은 또다시 토악질을 해 대기 시작했다. 그는
토악질이 다 끝날 때까지를 기다렸다가 물을 적셔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안고 천막집으로 들어섰다. 방바닥에 이불을 펴고는 그녀를 편안히 눕혔다.
그리고는 날이 밝을 때까지를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다.
인숙은 눈을 감더니 이내 고른 숨을 내쉬며 잠이 들었다. 그도 연방
수마에 시달렸지만, 잠시라도 방심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인숙의
곁에서 벽에 등을 기댄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행여나 잠이 들어 버릴까 봐
부쩍 신경을 썼다.
마침내 천막집의 창 밖으로 여명이 밀려들고 있었다. 그는 흘낏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새벽 5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 때까지도 인숙은 별다른 일
없이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인숙은 여명 무렵부터는 간헐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전신을 떨어대곤
했다. 그 때마다 온몸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흘러내리곤 했다. 그녀는 때때로
헛소리도 내지르곤 했다. 목이 타는지 목소리의 여운마다 짙은 한숨이 배어나고 있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인숙은 자꾸만 방바닥을 손으로 할퀴기 시작했다. 관자놀이
부분에 파란 실핏줄이 내비치면서부터, 인숙은 점점 더 일그러진 표정으로 버둥거렸다.
그녀의 머리카락 부근에서도 굵은 땀방울이 방울져 흘러내리곤 했다.
그녀의 전신은 땀으로 젖어, 온통 시큼한 땀내를 풍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시간당
두어 차례의 버둥거림이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버둥거리는
빈도와 헛소리를 내지르는 빈도가 높아만 갔다. 몸부림을 치는 빈도가 잦아질수록
점차 팔과 다리도 현저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에 보았던 시계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새벽 다섯
시 반을 갓 넘어서고 있었다. 어째 시간이 이렇게 더디 흐를까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살며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바다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동이 트고 있었다.
그토록 간절하게 기다리던 햇살이었다. 이제 바다의 수면은 수천 수만 마리의 물고기
떼처럼 파드득거리며 치솟고 있었다. 눈부시게 나부끼는 햇살로 인해, 바람에 휩쓸리는
잎새마다 빛살이 은빛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그는 핸드폰으로 인숙의 정황을 정미에게
들려주며,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정미는 그에게 아침 6시 출발의 첫 배로 인숙을
격포항까지만 데려 달라고 했다. 그 이후부터는 그녀가 알아서 하겠다면서 간단히
전화를 끝냈다.
위도에서 격포를 향해 떠나는 첫 배는 정확히 아침 6시에 있었다. 가까스로
선실까지 인숙을 옮겨 실은 그는 그 때부터 서서히 가슴이 떨려 왔다. 시선은 줄곧
인숙의 얼굴에 고정시킨 채, 그는 상념에 잠겼다. 과연 지금의 자신의 행위가 바람직한
건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죽으려던 사람에게는 필시 이승을 하직해야만 할
처절한 고뇌가 있었으리라. 그 처절한 고뇌를 헤아리지도 못한 채, 무조건 생명을
구하는 일이 선일까 의심스러웠다.
그는 자신도 몰래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사뭇 험상궂은 눈빛이 순간적으로
분출되었다. 그는 입술을 두 번 가량 질겅질겅 깨물고는 선실 주변의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이른 아침부터 수산 시장에 나가는 50대 중반의 아주머니들이 대여섯 모여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외 나른한 표정의 노인 둘이 가만히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다시 인숙의 초췌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왜 남의 일에 휩쓸려 귀한 시간을 허비하는 걸까? 까짓 것 죽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대관절 저 여자의 무엇이기에, 이렇게 나서서 설치는
걸까? 저 여자가 만약 깨어나서 자신을 왜 살려 놓았냐고 포악을 떨면 어쩔 것인가?
그럼, 내가 저 여자를 살렸다고 해서 칭찬을 바라고 있는가? 그건 정말이지 아니다.
문제는 보다 심각한 데에 있지 않을까?'
그는 통통거리는 발동선의 엔진음을 들으며, 여객선이 일구는 하얀 포말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주먹을 말아 쥔 채, 허공을 올려다보며 고뇌에 잠겼다.
'사람이라면 때때로 죽고 싶을 때가 더러는 있지. 나의 경우만 해도
얼마나 그런 충동이 많았던가?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그 사람 고유의 가치관이요
권리이리라. 만약 저 여자가 꼭 죽고 싶었고 그래서 그 길을 택했다면? 그랬는데,
나의 눈에 띄어 그녀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면? 그리하여, 그녀가 깨어나서 걷잡을
수 없는 절망감에 휩싸인다면? 그 때를 맞아, 나는 저 여자에게 뭐라고 나의 행위를
설명할 건가? 무슨 이런 개 같은 일이 다 있어? 아예 원 위치에 갖다 놓아 버려?
이제는 그럴 수도 없는 일이지 않는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러면서, 머리가 가려운
듯 머리를 북북 손톱으로 긁었다. 그는 아침마다 섬의 둘레를 달리고는 샤워를 하여
머리에 기름때가 낄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머리가 가렵다고 여겨졌다.
긁으면 긁을수록 더욱 머리가 가려워지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선실 바닥에서 훌쩍 일어나 갑판으로 뛰어나가고 싶었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 도무지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의 돌발
사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잠시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말고는 주춤거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착잡한 그의 마음과는 달리, 아침 바다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워 보이기만
했다. 그는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하고 잠시 고개를 내흔들었다. 하지만, 워낙 절경으로
이름난 변산 반도였다. 바다는 수면으로 부서져 내리는 빛살을 연방 허공으로 되돌려
보내고 있었다. 바람이 일 때마다, 바다는 수만 갈래의 파문을 일으키며 부서지고
있었다. 호수의 물빛처럼 파랗게 드리워진 하늘, 감청색으로 물굽이 치는 바다. 간간이
바람결을 쫓아, 갈매기 떼들이 눈송이처럼 수면으로 떨어져 내리곤 했다.
천하의 절경이라 불리는 변산 반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꿈에서라도
가보고 싶어하던 선경이었던가! 그 신비로운 변산 반도가 고운 자태를 드러내며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연한 안개로 뒤덮여, 변산 반도는 미풍이 일 때마다 파르스름한
색채로 굽이치고 있었다. 갑판에 서기만 해도 해변의 정취가 이슬처럼 녹아 내리는
변산의 절경이었다. 잎새에 부서지는 황금빛 빛살. 수면에 휩쓸리는 간드러진 바람결.
해변에 늘어선 동백 숲에서는 파도가 일 때마다, '쏴아쏴아'하는 맑은 음향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렇게 빼어난 풍광을 바라보면서도, 그의 가슴은 고뇌에 휩싸여 그저 먹먹하기만
했다. 그는 하염없이 시선을 멀리 수평선으로 내던졌다가도 금세 긴장하며 인숙을
바라보곤 했다.
긴장한 상태로 가슴을 졸인 지 20여 분이 지났을 때였다. 마침내
배가 격포항에 닿았다. 인숙을 안아들고 막 배에서 내렸을 때였다. 핸드폰이 울려대고
있었다.
"나, 정미예요. 선착장 입구에 구급차를 대기시켜 놓았어요. 기사에게
얘기만 하면, 금세 이리로 올 거예요. 기다릴게요, 안녕!"
인숙은 응급실을 거쳐, 곧바로 내과 병동에 입원했다. 정미와 동료 의사
둘이 진료를 마치고 나오면서, 들려준 얘기는 이외로 간단했다.
"입원 전의 응급 조치가 잘 되었더군요. 환자의 생명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요. 이틀 후면 완쾌될 거예요."
정미의 동료 의사들이 물러가고 난 뒤, 정미는 그를 향해 말했다.
"그래, 저 환자는 언제부터 알고 지냈어요?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좀 시원하게 얘기해 줄 수 없나요?"
그는 정미의 진료실에서 그 동안의 경위를 그녀에게 상세하게 들려주었다.
그의 얘기를 듣던 정미의 눈에서 돌연 뽀얀 이슬이 맺혀 흘렀다. 그러면서 그녀는
컵에 냉수를 받아, 소리 없이 천천히 마셨다. 물을 마신 뒤에,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잠자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한동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어느새 고개를 들어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부질없는 일을 하셨군요. 정황을 듣고 보니, 그냥 죽도록 내 버려
두었어야 했어요. 내가 저 여자라 해도, 이후부터는 당신을 줄곧 원망하고 지낼 거예요.
무조건 생명을 살리는 것만이 선(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때로는 상대를 죽이는
것이 더 상대를 위하는 경우도 있어요. 대표적인 경우가 안락사의 경우예요."
정미는 그로부터 시선을 거두더니, 진료실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보아 온 당차고 활달한 정미의 품성은 분명 아니었다.
"당신은 너무 선량해서 탈이에요. 산다는 건 물론 좋은 일이지요.
그런데, 이백 년쯤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배우자나 자손까지도 흙 속에 들어가 누웠는데,
자기 혼자서만 산다고 생각해 봐요. 그 얼마나 삶이 삭막하고 적적하겠어요? 저 여자도
마찬가지예요.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저승에 가서나마 이루어 보겠다고 동반
자살을 시도했잖아요? 그런데, 당신이 그걸 방해했어요. 대체 무슨 권리로 저들의
이상적인 탈출구를 봉쇄했나요? 엄연히 공금 횡령은 범법 행위인 줄 알면서도 애인을
구하려고 했잖아요? 그 애인은 죽고 없는데, 혼자서만 처벌을 받고 교도소 생활을
하라는 얘기예요?"
정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의 표정을 살핀 뒤에 말을 이었다.
"아, 나는 당신이 어쩌면 이런 중대한 일에 휩쓸렸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이제 저 여자가 깨어나서 자신을 책임지라고 윽박지르기라도 한다면
어떡할 작정이세요? 극한 상황에서는 당신더러 남편이 되어 달라고 떼를 쓸 수도
있는 일이에요. 여자란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구요. 당신을
배우자로 삼기 위해선, 여자라면 얼마든지 가증스런 방법을 다 동원할 수도 있어요.
가령 인숙 씨가 법정에 서서 당신한테 강제로 추행당했다고 진술한다면 어떻게 대응하겠어요?
당신의 결백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고 주장하실 건가요? 만약 그 따위로 진술을
했다간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다 비웃을 거예요. 나도 여자이지만요, 여자란 함부로
넘겨 볼 수 없는 독종일 수도 있어요. 나는 당신의 행위에 대해 이해가 안 되는 면이
너무나 많아요. 응급 조치를 취하기 위해, 여자를 연못으로 데려간 것까지는 납득할
수 있어요. 그런데, 왜 방으로 데려갔나요? 보온 유지를 위해서라구요? 지금이 한겨울이에요?
밖에 그대로 두면 얼어죽으리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나는 당신의 말을 믿어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시각도 생각해 봤어야죠. 모든 행위에는 그렇지 않으면 안 될 명분이
있어야만 해요. 내가 보기로는 당신의 행위에 있어서 명분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아, 이렇게 가슴 답답한 일이 어째서 당신에게 일어났단 말이에요? 전화상으로는
미주알 고주알 떠들 수가 없어서 참았지만, 글쎄 이게 무슨 불상사예요?"
정미의 말소리에는 사정없이 상대를 내모는, 강력한 기력 같은 것이
넘쳐흘렀다. 그녀가 서슬 퍼렇게 자신의 의견을 늘어놓아도 그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단순히 그냥 듣는 자세가 아니었다. 단 한 마디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듯이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 듯이 기세를 올리던 정미가 한숨을 내쉬며 침묵에
잠기는 순간이었다.
단 둘만이 있는 밀폐된 진료실 안의 공간이었다. 그는 정미의 두
손을 가만히 감싸쥐며 말했다.
"전적으로 당신의 말이 옳아요. 내게도 할 말이 많지만, 다음에
할게요. 우선은 경찰에 연락을 취하고, 내가 섬에서 녹음한 테이프를 증거물로 보관을
해야 해요. 이 테이프가 있는 한, 법적으로 별로 문제 될 것은 없어요. 또한 어떤
경우를 맞더라도 나는 당신의 변함 없는 배우자로 남을 거요. 자, 그럼 당신은 당신의
일을 보세요. 나는 지금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하니까요. 위독한 생명을 살려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순식간에 사흘이 흘렀다. 인숙은 예상보다 하루가 더 지나서야 퇴원할
수 있었다. 병원에서는 시기 적절한 응급 조치 덕분에, 인숙이 생명을 되찾게 된
거라고 했다. 인숙의 의식이 점차 회복됨에 따라, 정미와 그의 불안은 증폭되어 갔다.
입원한 지 사흘째 되던 아침이었다. 인숙은 어느 부위에서도 결리거나
불편한 곳이 없다고 했다. 그 사이에 경찰에서는 갈섬의 현장 조사도 마쳤다. 인숙의
이름이 컴퓨터에 입력되자마자, 공금 횡령죄로 도피중이라는 내용의 글이 화면에
떴다. 일단 치유가 끝나는 대로, 인숙은 경찰에 가서 조사를 받기로 했다.
퇴원 수속이 끝나자, 인숙은 조용히 그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미와 그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써늘하게 변했다. 아닌게아니라,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짧은 순간에, 많은 상념이 섬광처럼 그의 가슴을 휩쓸고
지나갔다.
격포의 해변에 자리잡은 '카사블랑카'라는 상호의 카페였다. 약속
시간인 오후 2시에서 아직도 십 분이 남은 시점이었다. 카페의 문이 열리면서, 근심이
그득한 얼굴로 인숙이 실내에 들어섰다. 그는 자리에 앉은 채, 손을 크게 한 번 휘저었다.
그들은 대추차를 한 잔씩 주문하여 마주 앉았다. 그는 칵테일을 마시고 싶었지만,
갓 퇴원한 인숙을 배려하여 대추차를 주문한 거였다.
인숙은 창 밖으로 파랗게 드리워진 서해 바다를 굽어보며, 가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찻잔을 양손으로 받쳐 든 그녀의 시선은 수평선 끝자락에서 머물고
있었다. 서서히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처벌받아야 마땅하죠. 나는 댁에게 고맙다거나
원망스럽다거나하는 일체의 감정도 없어요. 솔직히 처음에는 죽여 없애 버리고 싶도록
댁이 가증스러웠어요. 겨우 이제야 내 마음이 정리가 되었어요. 나는 댁을, 세상
사람들이 내 죄를 다스리도록 내보낸 특사라고 믿고 싶어요. 그러니, 어떻게 내가
댁에게 사사로운 감정을 지닐 수 있겠어요? 하지만, 하찮은 나의 생명에까지 신경을
써 준 댁의 순수한 마음만은 영원히 간직할게요.
말을 마치고 일어서는 그녀의 눈에는, 뽀얗게 안개가 서렸다. 자리를
떠나기 바로 직전이었다.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그녀는 아무래도 끓어오르는 슬픔을
가눌 길 없다는 듯. 그녀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그를 바라보며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조금씩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급기야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다.
"민수 씨! 제가 언제 다시 변산을 찾겠어요? 다시는 못 볼 연인과
변산에 대한 정한을 시로 남기고 싶군요. 오전 내내 마음을 담아 쓴 시예요. 우리가
만난 것도 인연이라면, 댁이 나의 마지막이며 유일한 청중이 되어 주지 않을래요?"
그녀의 목소리엔 가슴을 찢을 듯한 애절함이 배어 있었다. 너무나 숙연한
분위기라, 그는 자신도 몰래 고개를 끄떡이면서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인숙은 천천히
종이 쪽지를 펴든 채, 정한을 담아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변산 해변의 연가>
충혈된 석양 울먹이며
고개 돌리려는 건
뿌리쳐도 뿌리쳐지지 않는
만경창파다.
파도를 꿰뚫고
치솟는 건
잊으려도 잊혀지지 않는
그리움뿐.
삭정이에 찢겨
흐느끼던 해풍
시린 등을 타넘던
달밤이면
파르스름한 달빛 속에서
서글프게 미소짓는
너의 환영을 본다.
이제 어디서 만나랴?
너를 못 잊는
나의 시린 눈물
변산의 한 줄기
청정한 바람이 된다.
낭송을 마친 직후였다. 눈시울이 붉게 물든 인숙은 더 이상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그를 향해 목례를
하고는 다소곳이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떠난 카페의 창 밖으로, 창백한 얼굴의 해무(海霧)가
자욱히 밀려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