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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7회
섬과 나그네
손 정 모

7. 갈섬의 애환

  "이야앗!!"
  실내의 공기 층을 섬광처럼 찢어발기는 듯한 기합 소리였다. 민수는 기합 소리와 함께 몸을 허공으로 날렸다. 정식으로 입문한 적은 없었지만, 무술 서적을 통하여 무예에는 달인이 된 그였다. 사내들을 향해 떨어져 내리면서 양 발 옆차기에 이어, 왼발 뒤돌려 차기를 시원스레 날렸다. 십여 년의 세월 동안 부단히 수련해 온 발길질이었다. 넷 중의 둘이 즉시에 방바닥으로 배를 감싸쥐며 나뒹굴었다. 그를 향해 허리를 굽히며 덮쳐 드는 거구의 사내를 향해, 그는 몸을 솟구쳤다. 오른발 뛰어 앞차기로 사내의 턱뼈를 단숨에 걷어차 버렸다. 발길에 차이자마자 사내는 벌렁 뒤로 나뒹굴었다. 그는 착지와 동시에 왼발 휘돌려 차기로 나머지 한 명의 관자놀이를 내질러 버렸다. 그러자, 그 사내도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썩은 나무 등걸처럼 나뒹굴고 말았다. 글자 그대로 일격 필살(一擊必殺)의 위세였다. 그는 종업원들의 반격을 방지하려고, 각목을 손에 쥐고는 사내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 자식들이 손님 알기를 뭐로 알고 있어? 아, 그래 의견에 차이가 난다고 해서 폭력을 휘둘러? 폭력에 자신이 있으면, 어때 나랑 한 번 더 붙어 봐, 응? 까불기만 해 봐, 대가리를 확 으깨어 버릴라!"
  말을 하는 도중에도 그의 각목에는 힘이 잔뜩 실려, 부들부들 떨렸다. 급소만을 걷어차였던지 사내들은 맥을 못 추었다. 그는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아서 쓰러진 용환을 어깨에 둘러메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종업원들을 향해 눈을 부라린 뒤에, 서서히 산장을 걸어나갔다.

  갈섬에도 핏빛으로 타오르는 석양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산장을 떠난 지 이틀째였다. 위도의 남서쪽에는 소쿠리 모양의 만(灣)으로 이루어진 '심구미'가 자리잡고 있었다. 심구미의 남쪽으로 십여 km의 거리에는 허공으로 우뚝 치솟은 해안 절벽이 있었다. 이른바 '논금' 벼랑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갈섬은 논금 벼랑에서 3 km쯤 떨어진 서쪽 바다에 자리잡은 무인도였다. 갈섬은 위도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24개의 무인도들 중의 하나였다. 갈섬의 중앙에는 해발고도 50 m 가량의 얕은 야산이 형성되어 있었을 뿐. 주변에는 사방으로 탁 틘 평원이 아득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지형이었으나, 평원의 중심에는 수량이 풍부한 연못이 발달되어 있었다. 산자락에는 주로 관목과 동백나무가 어우러져 바람결에 나부끼고 있었다.
  이틀 전에 산장에서 빠져 나와, 민수와 용환은 곧장 위도 회관으로 갔다. 그리하여, 정미의 고종 오빠인 성찬호를 만나보았다. 마흔 살의 찬호는 얼굴이 넓적하고 체격이 다부진 사내였다. 뱃사람이라 그런지 팔뚝의 굵기가 여느 사람의 종아리 크기만했다. 그 날 밤에, 찬호는 두 사내를 흔쾌히 동업자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찬호는 한 가지의 조건을 덧붙였다.
  "두 분 모두 잘 오셨어요. 당신들의 골격도 무척 마음에 들어요. 원래 뱃일이란 게 무척 힘들거든요. 일단은 두 분 다 동업자로 받아들이겠는데, 단 조건이 있어요. 그 조건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별로 어려울 건 없지만,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그 과정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동업을 할 만한 자격을 갖추는 거예요. 어때요? 한 번 해 보겠소?"
  그 조건이란 게 갈섬에서 1년간 가두리 양어장을 운영하는 거였다. 갈섬에는 찬호가 운영하는 가두리 양어장이 섬의 해안을 따라 3천여 평이 조성되어 있었다. 일체의 조언이나 간섭도 않겠으니, 독자적인 계획을 세워서 운영해 보라는 거였다.

  민수와 용환은 우선 갈섬의 지형을 파악한 뒤에,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두 사내는 지금 석양이 지는 갈섬의 해변을 굽어보고 있었다. 갈섬 서쪽으로 아스라이 펼쳐진 수평선 위로 석양이 마지막 빛살을 뿜어내고 있었다. 바다는 수천 수만 마리의 물고기 떼처럼 황금빛으로 파드득거리며 치솟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는 자줏빛의 저녁놀이 온통 수평선을 뒤덮으며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강한 겨울 바람이었건만, 사내들에게는 조금도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피부로 계절을 느끼고 다닐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민수는 종이를 펴서 갈섬의 지형도를 그려 나갔다. 어떻게 하면 주변의 지형을 잘 활용할 수 있겠는가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섬의 둘레는 대략 5 km에 달했다. 섬의 모양은 남동쪽만 굽이진 만으로 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둥근 형세였다. 섬의 중앙에는 높지 않은 야산이 솟아 있고, 야산의 주변은 평원이었다. 만(灣)이 형성된 곳으로 하천이 열려 있고, 남서쪽 평원의 중앙에는 연못이 자리잡고 있었다. 원형에 가까운 연못의 직경은 30 m에 이르렀고, 연못 가득 물이 남실거리고 있었다. 이 정도의 수량이면, 야산의 어디엔가는 물이 분출되는 곳이 있음 직했다.
  용환은 가두리 양식장에 들어 있는 물고기의 종류와 숫자를 점검해 나갔다. 서해 바다는 수심이 얕고, 대체로 양질의 모래로 이루어진 편이었다. 맑은 모래 속에서 서식하는 물고기로는 넙치, 서대기, 놀래미, 우럭 등이 있었다. 용환은 3000여 평의 가두리를 면밀히 점검해 보았다. 설치된 7군데의 가두리 중의 4곳은 가두리의 그물이 크게 찢겨져 나가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 부분의 그물은 새로 사거나 기울 수밖에는 없었다. 그물을 새로 교체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금액이 소요될 터였다. 맨손으로 갈섬에 들어선 사내들에게 넉넉한 자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찬호가 1년간 자금을 지원해 준다는 아무런 언질도 없었다. 오로지 사내들만의 힘으로 어떻게 해결해 보라는 거였다.
  민수는 갈섬에 대한 지형도를 마무리짓고는 용환을 향해 말했다.
  "일단은 우리의 출발 자금을 확인해 봅시다. 내게 남은 것이 정확히 75만 원이거든요. 수중에 있는 것 다 털어 내 봐요. 어라, 제법 되는데요. 55만 원이구먼요. 도합 우리의 재산은 130만 원이라는 얘기요."
  갈섬에 들어서기 전에 찬호는 사내들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들의 사업 수완을 모르고서는 동업할 수가 없잖소? 내가 바라는 것은 고용원이 아닌 동업자란 말이오. 두 분의 자금이 얼마가 남았든 나는 거기에는 일체 신경 쓰지 않겠소. 대신 내가 당신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일 따름이오. 갈섬과 거기에 있는 가두리 양어장 및 바다를 건너갈 나룻배 한 척이오. 갈섬은 물론 나의 사유지가 아니오. 단지 일시적으로 내가 시험 삼아, 거기에서 양어장을 운영하고 있을 뿐이오. 하지만, 거기에 다른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이미 조처를 취해 두었소. 또한 나룻배란 것도 무동력선(無動力船)이오. 즉, 배에 엔진이 장착되지 않은 배란 말이오. 당신들이 바다를 건너다가 익사를 할지라도 나를 탓해서는 안 되오. 왜냐하면, 뱃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그 정도의 거리는 노를 저어 건널 만하기 때문이오."

  용환이 석류 꽃잎처럼 붉은 색채로 타는 석양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건 냉혹한 시험이오. 130만 원을 가지고 뭘 하라는 얘기요?"
  "알아요. 밥 먹고 잠자고, 물고기도 먹여 살려야 하잖아요? 보다시피 섬에는 집 한 채도 없어요. 1년간을 여기에서 견뎌 내면서, 일어서야 한다는 거예요."
  사내들은 곧 참담한 심정이 되어, 들끓는 석양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용환이 다시 민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참으로 우리는 등신 같은 사람들이오. 이럴 줄 미리 알았더라면, 서해 산장이란 해괴한 곳을 들르지 않았을 것 아니오? 제기랄, 돈만 내고 계집년들의 사타구니도 제대로 주물러 보지 못하고 쫓겨나다니! 생각할수록 돈이 아까워 죽겠네, 정말."
  "허허 참! 살다가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요. 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예견할 수가 있겠어요? 기왕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지난 일은 일체 덮어두기로 합시다."
  "에이 참! 우리가 거기에 들르지만 않았더라도 출발 자금이 현재의 두 배는 넘었을 거요. 그 연놈들 생각만 해도 치가 다 떨리네."
  민수는 더 이상 대꾸는 하지 않고, 묵묵히 저녁 노을만 바라보았다. 때마침 서쪽 하늘을 가르며, 갈매기 한 마리가 허허로이 날고 있었다. 작은 체구였지만 당당하게 서쪽 하늘을 가르며 날고 있지 않는가! 민수는 자신도 몰래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적어도 내겐 갈매기가 하늘을 날 수 있을 만큼의 자유는 있겠지. 부여된 자유를 얼마나 잘 활용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내가 수감된 무기 징역수가 아닌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 일이지 않는가! 그리고 내겐 선녀처럼 잘 생긴 신부감도 있지 않는가? 그래, 정미를 생각해서라도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어.'
  흘낏 용환을 바라보니, 그도 말없이 사색에 잠겨 있는 눈치였다. 이 때였다. 문득 민수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생각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아, 이 섬에는 선착장이 없었어. 외진 섬일수록 여행객들이 찾아들 수 있도록 선착장을 만들어야 해. 선착장이 없는 섬은 대문이 없는 집이나 마찬가지야. 다른 일을 못 해도 선착장부터 만들고 봐야지.'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마자 그는 용환에게 말했다.
  "먼저 선착장부터 만들지 않겠소? 사람 사는 집에 대문이 있듯이, 섬에는 선착장이 있어야 되지 않겠소?"

  당장 무슨 반박이 들어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선선히 용환이 말했다.
  "그래, 그 말이 맞소. 선착장부터 먼저 만듭시다. 떠도는 나그네들이 쉬었다가 가려면, 섬에는 그들을 맞는 선착장이 있어야 해요. 비단 나그네들뿐만이 아니라, 태풍이 불고 파도가 치솟으면 배가 머물 곳이 어디겠소? 더구나 여기는 무인도요. 무인도에서 배를 상실하면 죽은목숨과 다름이 없어요. 그런데, 아까 야산을 둘러보니 동굴 하나 없던데, 우리의 주거지는 어떻게 하죠?"
  "흐음, 확실히 나보다 인생을 더 많이 산 분이라 틀리군요. 나 같으면 먼저 집부터 짓겠다고 바로 반박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도, 먼저 저의 의사를 존중해 주셨으니, 저는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그래, 먼저 집을 지은 뒤에 선착장을 만듭시다."
  나룻배에서 톱과 망치를 비롯한 기본 장비들을 땅바닥에 부려 놓고는 그들은 산으로 향했다. 걸어가면서 용환이 민수를 향해 말했다.
  "우선 간단히 비와 바람을 피할 정도로만 지읍시다. 그런 다음에 본격적으로 모양을 갖추도록 하지요."
  이미 상대를 존중할 마음이 되어 있던 터라, 민수는 기꺼이 동의했다. 산에 오른 지 세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기둥과 각목으로 사용될 소나무와 동백나무 50여 그루를 베어 날랐다. 나무를 한 곳에 쌓아 둔 뒤에, 민수가 용환을 향해 말했다.
  "집을 지어야 잠을 잘 테니까, 밤을 새는 한이 있더라도 작업을 해야겠죠?"
  "그래, 지금부터 바로 시작해요."

  어느새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포장마차 덮개용 합성 천막을 사용하여, 10평 가량의 집을 만든 직후였다. 장난감 같은 집 한 채를 꾸미는 데에도 적지 않은 노력이 든 거였다. 기둥을 세우기 위해선 괭이로 땅을 파야만 했다. 합성 천막을 반듯이 펼치려면, 나무의 표면을 매끈히 다듬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낫으로 곁가지와 삭정이를 쳐내야만 했다. 그리고, 나무에 못질을 하기 위해선, 나무와 나무의 틈새가 맞도록 짜 맞추어야만 했다.
  마침내 두 사내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는 가쁜 숨길을 토하며 서로를 격려해 주었다.
  "용환 씨! 정말 수고 많았소. 공무원께서 평소 이런 일은 못해 보셨을 거잖아요?"
  "당신도 마찬가지요. 당신이 전자 기술자지 건축 기술자는 아니잖소? 이렇게 만나 동고동락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소. 당신이야말로 참으로 수고했소."
  혹시라도 밤에는 비가 올세라, 나룻배에 실린 물건들을 천막집 안으로 죄다 날랐다. 제법 생필품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어서 당분간은 견딜 만했다.

  갈섬에 닿은 지 두 달째인 2월말이었다. 그 사이에 화장실도 만들고, 그럴싸한 우물도 하나 팠다. 생계를 해결하는 일환으로 새벽 4시면 일어나서, 인근의 해역에서 바다 낚시를 했다. 처음에는 식사용으로만 출발했던 것이 어느새 위도의 수협 공판장에 내다 파는 정도가 되었다. 겨울철의 바다 낚시가 가장 잘 되는 시간대는 새벽 4시에서 아침 6시까지였다. 어종(魚種)에 따라 시간이 좀 다를 수는 있을 터였다. 하지만, 놀래미, 우럭, 도다리, 감성돔, 볼락의 경우는 주로 이 시간대가 낚시의 절정기였다.
  그 동안에 일의 분업화도 상당히 잘 진행되었다. 2시간 동안에 낚싯줄에 걸려 올라오는 물고기는 아이스박스(ice box)로 두 상자에 이르렀다. 이것들은 싱싱하여 공판장으로 가져가기가 바쁘게 금세 팔려 나가 버리곤 했다. 여기서 얻는 총수익은 한달 평균 400만 원에 이르렀다. 각 개인으로는 200만 원에 해당하는 소득이었다. 이 정도면 생계 자체를 걱정할 단계는 넘어선 셈이었다.
  두 사내는 아침을 먹고 양어장을 둘러보러 가는 길이었다. 양어장에서 기르는 물고기로는 넙치와 우럭이 주종이었다. 도다리라든지 볼락은 식성이 까다로운 편이어서 양식이 어려운 어종이었다. 그 동안에 양어장에 관련된 일체의 문헌 조사와 기술의 입수는 민수가 도맡았다. 반면에, 섬 주변의 해변에 말목(抹木)을 세우고, 김발을 이어 붙이는 작업은 용환이 맡았다. 오염되지 않은 무인도라, 김의 포자는 2주가 멀다 않고 금방금방 달라붙었다. 김발에서 성가신 게 있다면 파래의 포자였다. 파래와 김이 섞이면 김의 품질이 저하될 뿐 아니라, 값도 격감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김을 채취하기 전에 수시로 말목을 돌려세우며 김발을 점검해야만 했다. 물 속에서 이루어지는 양식인지라, 때를 넘기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리하여, 김은 한 달에 한 번씩만 채취하기로 했다. 김의 채취 작업은 워낙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그리하여, 김발을 갈아붙일 때마다 위도의 부녀자들을 십여 명씩 고용하기로 했다. 천여 평에 이르는 김 양식장은 이제 양어장을 능가할 정도의 소득원으로 부상하였다.
  드넓은 양어장에서 길길이 치솟는 물고기 떼를 바라보며 용환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지난번에 물고기에 잘 생겨, 폐장(閉場)의 원인이 된다던 물고기의 질병은 어떻게 해결되었어요?"
  "아, 비친스키(Vichinskii) 질병 말이군요. 수온이 5 ∼ 10℃일 때, 감염 속도가 가장 빠르다는 세균에 의한 질환이에요. 소련의 과학자인 비친스키에 의해 병균의 존재가 밝혀진, 어류의 질병이기도 해요. 이 병의 특징은 지느러미 밑에 포도상 구균이 번식함으로써 지느러미가 썩기 시작한다는 점이에요. 그리하여, 나중에는 물고기의 비늘마저 검정색으로 변하면서 물고기가 죽어 가는 질병이지요."
  "치료가 잘 안 되는 병이라던데, 어떻게 해결했어요?"
  "맨입으로는 좀 곤란한데요. 어떻게 나한테 근사한 ……"
  민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을 희번덕거리며 용환이 말을 잘랐다.
  "보소. 민수 씨! 당신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내 다 알아요. 또 그 서해 산장에 가고 싶다는 얘기 아냐? 빈대도 낯짝이 있지. 개망신을 당한 처지에 내가 어찌 거길 또 가겠소? 그 때 당신 없었으면 아마도 나는 맞아 죽었을 거야."
  "쳇 누가 서해 산장이라고 했나요? 거기 말고도 산장이 다섯 군데나 더 있어요. 혹시 요즘 몸이 근질근질하진 않소?"

  민수의 말을 듣자, 용환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당신과 나 둘만 있으니 솔직히 암내가 그립지 뭐. 어떤 날 새벽에는 그걸 추스르느라고 밤을 지샌 적도 있다구요.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도 여자를 생각하면 죄받을 일이지. 열심히 일하여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일체의 잡념을 배제하기로 했소."
  "용환 씨! 내가 지난번에 배를 맞추려다가 만 여자들 셋을 여기로 오라고 그럴까? 그녀들이 와도 전혀 도인인 척 초월할 수 있겠소?"
  "농담도 심해지면 안 좋은 법이오. 그보다는 물고기 질병을 어떻게 해결했느냐니깐?"
  "아, 미안! 그건 경기도 안산의 해양연구소에 문의를 해서 해결을 했어요. 내가 잘 모르면, 잘 알 수 있는 곳을 찾아서 답을 구하는 거죠. 연구소의 처방대로 약제를 투입하였더니, 일체의 부작용이 없이 가볍게 해결되었어요. 하지만, 여기에도 약간의 변화는 있었어요."
  "변화라면?"
  "아무리 연구소의 해양학자의 말이지만, 그걸 어떻게 여과 장치 없이 곧바로 시행했겠어요? 수천 마리의 물고기의 생사가 달린 문제잖아요? 그래서, 약제의 농도도 대폭 묽히고, 물고기의 적용 범위도 십여 마리에 국한시켰어요. 네, 맞아요. 물고기를 상대로 한 임상 실험이었지요. 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데 필요한 조절 인자를 변인이라고 하거든요. 변인에는 독립 변인과 종속 변인이 있지요. 즉, 독립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인자를 독립 변인이라고 하지요. 반면에, 독립 변인에 의하여 저절로 결정되고 마는 인자를 종속 변인이라고 하지요. 이를테면, 물고기를 10마리로 고정하고, 약제의 농도를 변화시킨다면 농도의 효과를 알 수 있겠죠? 이 때의 독립 변인은 농도라는 거예요. 만약에 약제의 농도를 고정하고, 물고기의 숫자를 변화시킨다면 ……"
  "에헤, 무슨 복잡한 과학 용어를 쓰고 난리요? 좀 알아듣기 쉽게 말할 수는 없소?"
  "내 참! 세무과장이라 머리가 좀 똘똘하려니 여겼는데, 그게 아닌 모양인데요. 그래, 쉬운 말로 설명할게요. 연구소의 처방보다도 약제의 농도를 대폭 묽혀서 양어장에 살포를 했더니, 병든 물고기가 되살아났었소."
  "그 봐! 설명을 그렇게 하면 금방 알아들을 수 있잖소? 그걸 가지고 해괴망측한 용어를 구사하고 난리였소? 그래서, 내 얘긴데,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는 말이오. 항시 남에게 설명할 때는 쉽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해 봐요. 동일한 내용을 쉽게 설명한다는 자체가 또 다른 실력이 아니겠소?"

  민수는 용환의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섬뜩해졌다. 자신이 느끼지 못했던 바를 지적해 준 거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허물을 소신 있게 지적해 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참다운 친구라고 했잖은가? 민수는 자신도 몰래 용환을 바라보는 시각이 점차 달라졌다. 엄청난 장점을 가졌는데도, 서해 산장에서의 일은 우발적인 일이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만약 이전에 이러한 친구가 곁에 있었더라면 퇴직을 당했겠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분명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과거사였다. 하지만, 과거사가 떠오를 적마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민수는 자신의 생각이 이렇게 정리되자, 곧바로 용환을 향해 말했다.
  "고맙소. 내게 부족한 점들을 때때로 일깨워 주는 당신이 너무나 고맙소."
  "그 봐! 만날 입으로만 때우고 만다니까 그래. 그래 뭘 좀 사 주면서 고맙다느니 어쩌니 해야 되지 않겠소?"
  "에이, 잘 나가다가 꼭 사천으로 빠지고 그래? 사천이 어디냐고요? 옛 날 지명으로는 삼천포라 했어요. 그렇게 당신이 물욕에 눈이 뒤집힌 줄은 미처 몰랐소. 다음에 위도에 나갈 때면 여자들을 꼭 붙여 줄게요. 그럼, 되겠어요?"
  "그래, 이제야 얘기가 좀 통하구먼. 당최 어린애를 곁에 둔 것 같더니, 이제는 뭘 좀 안다니까!"
  마침내 3천여 평 가량의 양어장에 도착했다. 참으로 방대한 넓이였다. 치어(稚魚)를 방류해서, 공판장에 팔기까지에는 평균 4년의 세월이 걸리는 터였다. 양어장의 길다란 가두리 제방 길을 따라 걸으며, 수질 상태를 살펴보았다. 겨울철이라 수질은 한없이 양호해 보였다. 제일 중요한 것은 갈섬에서 주위로 배출되는 오염원이 없다는 점이었다. 또한 둘만 쓰는 화장실도 일 주일 전에 정화조를 묻어, 수세식으로 전환한 상태였다.
  제방 길을 따라 걷다가 용환이 민수를 향해 말했다.
  "어라, 저 가두리 그물 아래쪽에 없던 구멍이 보이는걸. 저건 또 뭐야? 상어같이 생겼는데?"
  용환의 말을 듣자마자 민수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리하여, 놀란 얼굴로 가두리의 그물을 눈여겨보았다. 아닌게아니라, 근래에 보지 못했던 커다란 구멍이 곳곳에 숭숭 뚫려 있었다. 놀라서 그만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이었다. 제방 길 쪽으로는 괜찮은 편이었지만, 바닷물이 들고나는 바다 쪽의 그물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 쪽으로는 둑을 막을 수 없는 상태였기에, 그물로 된 가두리가 보호막이었던 터였다. 문제는 그 보호막에 상당히 큰 구멍들이 숭숭 뚫려 있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구멍이 뚫렸다면 상당량의 양식어들이 바다로 빠져나갔을 터였기 때문이다. 민수는 순간적으로 안색이 홱 변했다. 그러면서, 제방 길이 닿아 있는 끝까지 걸으면서 물밑의 그물을 살폈다. 아무래도 잠수질을 배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멍 난 그물을 기우려면, 바다 밑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잠수질을 하지 않으려면 잠수부를 고용하여 일을 시켜야만 했다. 잠수부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으려니와 인건비도 예사롭지 않은 터였다. 인건비를 절감하려면 자신이 직접 잠수부로 나서지 않고는 안 될 일이었다.
  구멍 난 그물의 손질을 미룰 수 없는 상태였다. 민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현재 그물을 새로 교체할 자금은 없는데, 이를 어쩌지? 대안은 구멍을 기우는 방법인데, 많은 인력과 정교한 손 맵시가 필요해. 솜씨가 정교하기로는 여자들을 당할 수가 없는 법이지. 구멍을 기우는 데는 여자들의 인력이 필요해. 어디서 여자들을 구하나? 위도의 부녀들을 고용하려면 인건비가 적지 않는데? 구멍 날 때마다 인건비를 들인다면, 이는 적자를 면치 못할 거야. 그물의 생긴 꼴을 보니, 적어도 5년은 더 된 것 같거든. 살짝 외부의 충격만 가해도 찢어질 판인데, 이빨이 강한 상어의 공격임에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용환은 슬그머니 그의 김 양식장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공동 작업을 할 때엔 동료였지만, 각자의 영역에 들어서면 엄연한 경쟁자였다. 눈에 띄지 않게 경쟁이란 개념이 싹터 올랐다. 햇살은 너무나 곱게 퍼져, 아침 바다는 한없이 따사로울 지경이었다. 비록 뼛속을 시리게 할 만한 해풍이 섬 자락을 적셔대곤 했지만. 민수는 섬 안에 펼쳐진 풍광을 눈으로 쓱 훑어보았다. 소나무와 동백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그 외에 관목들이 쫙 펼쳐져 섬을 뒤덮고 있었다. 섬 주변의 평원에는 띠와 수크령을 포함한 마른 풀잎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 풀밭 위로 해풍이 밀려들 때마다 풀잎들은 끝없이 파도를 일으키며 나부끼곤 했다. 풀잎들의 군락들이 빚어내는 파도는 또 다른 생명 현상의 연출 같기도 했다. 풀밭을 타고 흐르는 바람결을 볼 때마다 봄이 얼마 남지 않음을 느끼기도 했다.

  생각에 잠겨 풀밭을 보고 있을 때였다. 문득 서해 산장의 세 여인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녀들은 앞으로 3년간은 계속 위도에 남아, 자금을 모을 터였다. 민수와 시간을 함께 했던, 연희, 명주, 민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주 편안하게 돈을 벌려고 위도에 들어온 그녀들을 갈섬으로 한 번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민수는 이내 머릿속으로 궁리를 해 보았다.
  '혹시 아는가? 그녀들이 의외로 나의 조력자가 되어 줄 수도 있지 않을지? 아냐! 이건 아냐! 사람을 어떤 목적 의식을 갖고 사귈 수는 없어. 그냥 그녀들에게 무공해의 무인도를 한 번 구경시켜 줄 수는 있지. 아무리 현실이 어려울지라도 마음의 중심을 잃어버릴 수야 없지. 가능한 한 순수한 관점으로 사람을 사귀도록 해야지.'
  민수는 스쿠버 다이빙에 대한 체계적인 지도를 받고 싶었다. 생각이 떠오르면 곧바로 실행에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그였다. 물 속에 잠긴 그물의 손질을 위해선 반드시 수중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핸드폰을 들어, 위도 선착장을 비롯한 몇 군데에 전화를 걸었다. 마침 파장금에 있는 수상 센터에서 잠수 훈련생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민수는 양어장을 좀더 샅샅이 둘러본 뒤에, 당장은 두 명의 잠수부를 고용하기로 했다.

  이틀이 지난 뒤였다. 구멍 뚫린 그물은 고용된 잠수부들에 의해 말끔히 손질되어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난 직후에 천막집에 앉아, 민수는 용환을 향해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잠수 교육을 좀 받아야 할까 봐요. 그래서, 내일부터 정기적으로 위도의 파장금으로 나가 지도를 받을 생각이거든요. 어때요 ? 나랑 함께 배워 볼 생각이 없소?"
  "아니, 됐어요. 나는 나대로 할 일이 원체 많은 편이라서. 양질의 김을 뜨기 위해선 해태 기술자들도 만나야 하는 등의 일이 제법 많아요. 또 정기적으로 손질되지 않은 김발에는 김의 포자가 붙지를 않아요. 해양 식물들의 생태도 알면 알수록 무척 복잡하게 느껴지더라구요. 이런 일을 해 보기 전엔 전혀 몰랐죠. 그저 바다에서 김이 나는 줄로만 알았죠."
  둘은 대화를 통하여, 의견을 조절했다. 민수가 잠수 훈련을 받을 동안에, 갈섬은 용환이 지키기로 했다. 반면에 용환이 격포로 나갈 때에는 민수가 갈섬을 지키기로 했다. 격포에는 전국적인 규모의 해태 가공 공장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하여, 용환은 거기에 가서 김의 가공에 대한 기술을 익히기로 했다. 둘 다 훈련 및 지도를 받는 기간을 6개월로 기약하고 열심히 노력하기로 했다.

  세월은 거침없이 흘러, 어느새 4월 초순이었다. 온 대지에 봄기운이 완연한 시기였다. 하늘에는 종달새가 떠서 이른 아침부터 뭐라고 쉴새없이 지저귀다간 풀밭에 내려앉곤 했다.
  서해 다도해에도 봄의 기운은 무르익어, 가는 곳마다 파릇파릇하게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하늘은 가을날의 맑은 호수처럼 파랗게 드리워져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해상에 점점이 떠서 남실거리는 다도해의 섬들은 녹색의 보석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섬의 어디에든 개나리, 목련, 진달래, 산수유의 꽃들이 앞 다투어 활짝 피어나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거리는 꽃잎으로 인해, 사람들은 향수처럼 아늑한 세계로 젖어들곤 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꽃잎을 볼 때면, 사람들은 잊었던 고향의 봄을 떠올리곤 눈시울을 적셨다. 따사로운 바람결에 휘감기던 어머니의 행주치마로 감미롭던 유년기를 어이 잊을쏜가?
  민수는 오전에 잠수 훈련을 마치고는 위도의 내원암의 경내를 정미와 함께 거닐고 있었다. 내원암은 위도 남쪽의 대리에 자리잡은 사찰이었다. 400여 년 전 숙종 때에 자장에 의해 창건된 고찰로서, 유명세를 누리는 절이었다. 내원암은   특히 여성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유명한 절이었다. 내원암의 지세가 여인의 자궁을 닮은 탓으로, 치성을 드리면 득남한다는 믿음이 전승되어 왔다. 게다가 법당 옆에는 수질과 물맛으로 명성이 높은 약수가 연중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뿐이랴? 절 주변의 잡목 숲을 타고 휘늘어진 인동덩굴은 예로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인동덩굴은 상록 활엽 덩굴 식물로서 예로부터 한약재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한겨울에도 말라죽지 않는 타원형의 잎새를 가진 식물이고 보니, 절개로 높이 평가받곤 했다. 5월경이면 길다란 자루 모양의 꽃이 나비처럼 매달려 춤춘다는 점도 경이로운 일이었다. 게다가 백색과 황색의 꽃송이가 한 그루에 어우러져 꽃피는 유별난 식물임에랴! 꽃의 향기 또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감미로워, 세인들에겐 대단한 관심사였다.

오후 2시 무렵이었다. 굳이 봄을 타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마음이 뒤설렐 정도로 바람결이 부드러웠다. 마침 보름 전에, 정미가 창원의 직장을 정리하고는 격포항으로 왔다. 그녀는 격포의 변산 병원이라는 종합병원의 내과의사로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당초의 약속대로 창원을 떠나 격포에서 자리를 잡은 거였다. 그리하여, 연인으로서의 그와 자주 만나면서 미래를 함께 설계할 계획이었다.

  그의 팔짱을 낀 채, 정미는 내원암의 경내를 벗어나서 오솔길을 걷기 시작했다. 덩달아 그도 정미의 어깨를 오른팔로 가볍게 휘감고 발길을 옮겼다. 오솔길은 봄의 향기로 쾌적했지만, 한낮이라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편이었다.
  "정말 대단해요. 그 동안에 갈섬에서 그렇게까지 열심히 노력했을 줄은 몰랐어요. 사람에게는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주어진다고 하잖아요? 어때요? 이제는 섬사람이 되어도 후회가 없겠어요?"
  "정미 씨, 그 동안에 무척 당신이 보고싶었어요. 어떻게 의사들은 금방 자리를 옮길 수 있나 봐요? 이제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당신의 얼굴을 대할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아요. 반드시 올해 안에 입지를 굳혀, 자랑스런 섬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점차 심구미 쪽으로 치닫는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내원암과 심구미는 산등성이를 경계로 정반대 쪽에 자리잡은 형세였다. 심구미의 해변을 보려면, 아직도 1시간 정도는 산길을 타야만 했다. 산길에 접어들면서부터는 행인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낮의 아늑하고도 포근한 정취에 젖어 둘은 마냥 깔깔대며 대화를 늘어놓았다.
  "정미 씨, 저는 당신을 만난 게 아직도 꿈만 같이 느껴져요. 어떻게 첫 만남에서 서로간에 연인이 될 수가 있었죠?"
  "원 별 말씀을! 그럼, 연인이 될 때까지 반드시 몇 년씩 걸려야 하나요? 그건 아니라고 봐요. 서로 마음이 통하고, 상대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으면 되는 거잖아요? 저는 당신의 이력서를 보고 당신의 신원을 믿었어요. 당신도 저의 근무처에 왔을 때, 저의 신원을 확인했을 거구요. 그만하면 충분하잖아요?"
  점차 오솔길 위엔 갈참나무와 솔잎으로 어우러진 낙엽 더미가 늘어나고 있었다. 숲이 깊어지는 느낌이었다. 수령이 오래 된 고목들이 산기슭마다 울창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점점 멀어져 가는 내원암의 풍경 소리가 귓전을 적시곤 했다. 간들거리는 솔잎들이 허공을 휘저을 때마다 간간이 산새의 울음소리가 귓전에 밀려들곤 했다. 산등성이를 오를 때마다 응달진 곳곳에는 진달래의 군영이 불을 뿜는 듯이 만발하여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수줍은 듯이 하늘거리는 연약한 꽃잎들. 응달진 산기슭마다 진달래의 군영이 연분홍의 색채로 물결치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도 서서히 달떠 올랐다. 호젓한 산길을 타는 동안에는 손을 맞잡고 나란히 걸어 올랐다. 30여 분이 지났을까? 마침내 심구미와 내원암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산의 분수령에 이르렀다. 솔숲은 울창하여, 오래된 노송들의 군락이 웅장한 산색을 자아내고 있었다. 해는 중천에 떠서 눈부신 빛살을 사방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아름드리 굵은 노송 아래의 반석에 그들은 올라앉아, 위도의 전경을 굽어보았다. 섬 주변으로는 끝없이 파랗게 펼쳐진 바다가 드러누워 있었다. 때때로 섬 주위를 유람선이 그림처럼 떠서 흐르곤 했다. 하늘은 쾌청하여, 멀리 고군산군도의 섬들과 왕등도까지도 한눈에 들어왔다. 소나무 위에는 아까부터 두 마리의 박새가 앉아, 맑은 음향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정미는 흑색의 윤기가 나는 긴 머리에, 등산용 갈색 점퍼와 청바지 차림이었다. 흑백이 선명한 눈과 오뚝한 코와 해맑은 피부를 가진 여인. 눈썹은 초승달처럼 살짝 휘어져 올라가 보면 볼수록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민수의 눈에는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비쳤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청순한 상태로 전해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이었다. 수정처럼 맑은 서로의 눈빛이 잠시 허공에서 만나 떨어질 줄을 몰랐다. 찰나간이었다. 누가 먼저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둘은 나란히 앉은 자세에서 서로를 향해 몸을 돌리며 포옹했다. 얼굴과 얼굴이 닿는 순간이었다. 후끈하고 열기가 얼굴로 치솟으며 불에 덴 듯이 얼굴이 달아올랐다. 둘은 눈을 감은 채, 뺨의 열기가 식을 때까지 서로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눈을 뜨면서 정미를 향해, 속삭이듯이 말했다.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해요. 우리의 사랑이 영원히 변치 않기를 바래요."
  "저두요. 그간 무척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당신의 일에 혹시 방해가 될세라, 지금까지 섬을 방문하지 못했어요. 이제는 자신이 있으시죠?"
  "기다려 주세요. 내 반드시 기업을 이루어, 당당한 위치에서 당신을 나의 아내로 맞아들일 테니까요."
  "좋아요. 언제까지라도 기다릴게요. 이미 제 가슴속에는 당신만으로 우주가 꽉 차 있다구요."
  오후 5시 무렵이 되어 그들은 진리에 닿아, 이른 저녁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는 다음 달의 만남을 기약하며, 그는 정미를 격포로 떠나보냈다. 그는 여객선의 자취가 바닷물의 색채에 흡수되어 아득히 사라질 때까지 정미를 배웅했다. 그리고는 갈섬을 향한 포구가 열려 있는 심구미의 해변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후 5시 반이 막 지났을까? 이윽고, 그는 심구미의 해변에 정박시켜 두었던 나룻배를 저어, 갈섬으로 향했다. 이제 노를 젓는 데에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 나룻배의 중앙에는 화사하게 핀 진달래나무가 자리잡고 있었다. 한낮에 산등성이 위에서 정미와 대화를 나누면서 지켜보던 그 진달래나무였다. 갈섬에 옮겨 심고 가꾸면서 언제나 정신적 위안을 삼기로 했다. 20여 분이 지나자, 마침내 갈섬에 닿았다. 천막집 뒤쪽의 응달에다 진달래를 옮겨 심었다. 진달래는 철쭉과는 달리, 일조량이 적은 응달을 선호하는 식물이기 때문이었다. 작업을 마치고, 그는 발걸음을 양어장으로 옮겼다. 때마침 용환은 김 양식의 기술 지도를 받느라고, 부산의 수산대학으로 내려가고 없었다. 용환은 떠나면서 그에게 말했었다. 기술 지도를 제대로 받으려면 적어도 한 달은 지나야 될 거라고 했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그의 기억으로는 아침까지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양어장 안의 물고기 떼들이 하얗게 배를 뒤집은 채, 물위에 떠 있었다. 일시에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그는 급히 잠수복을 입고는 양어장 안으로 뛰어들어가 상황을 살폈다. 치어는 물론이고, 3 ∼ 4년이 지난 양식어들까지 일제히 배를 뒤집고 죽어가고 있었다. 양어장의 수면에는 온통 죽어 가는 물고기 떼들로 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3 ∼ 4년이 지난 물고기들은 찬호로부터 인수한 물고기들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건재했던 4군데의 가두리 부분을 다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온전한 곳이 없었다. 수면에는 인근 해역에서 침몰된 선박으로부터 흘러나온 벙커시유의 기름 막으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지난밤에 침몰된 배는 인도네시아 선적의 외국 선박이었기에, 어디다가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의외의 일로, 펑하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 심정이었다. 그는 참담한 심정에 휩싸여, 헤엄도 제대로 못 칠 지경이었다. 그는 비트적대면서도 가까스로 헤엄쳐 가두리의 제방 위에 올라섰다. 제방에 올라서자마자, 왈칵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뚝뚝 방울져 흘러내렸다. 그러면서 마구 울음이 터졌다. 어깨가 마구 들썩거리며 처절한 울음소리가 해변의 적막을 내몰고 있었다. 여태껏 소리 내어 울어 본 적이 없던 그였다. 하지만, 너무나도 억장이 무너지는 상황에 처하여, 그도 결국 나약한 인간일 수밖에는 없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쥔 채, 발악적으로 바다를 향해 울부짖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시련을 받아야 돼? 대관절 내가 잘못한 게 뭐냐구? 왜 자꾸 나만 시달림을 당해야 하냐구? 왜 하필 나냐구?"
  그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양어장의 수면을 손바닥으로 마구 쳐 갈겼다. 그러자, 수면 가득히 물방울이 튀어 올라 자욱한 물보라를 이루었다. 손바닥이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는 한동안 동작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아, 그는 잠수복을 벗어 젖혔다. 몸에 끈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열이 뻗쳐오르던 판인지라, 내친 김에 속옷마저 죄다 벗어버렸다. 대낮에 느닷없이 발가숭이가 된 거였다. 그래도 그는 울분을 삭이지 못하여, 알몸으로 괴성을 질러대며 제방 길을 마구 달렸다.
  "신이 있다면 말 좀 해 봐! 왜 나만 만날 시련을 받아야 해? 왜 자꾸 나만 미워하냐고? 마음대로 인간 차별하면서도 신이냐?"
  광인이 따로 없었다. 이 순간의 그는 누가 보더라도 완전 광인이었다. 그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며, 제방 길을 쉬지 않고 반복하여 내달렸다. 한동안 그는 동작을 멈출 수가 없었다. 동작을 멈추기만 하면, 머리가 진짜 돌아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달리면 달릴수록 슬픔이 마구 끓어올라 눈물과 땀방울이 엉망으로 뒤엉켜 흘러내렸다. 흐르는 눈물과 콧물마저도 뒤범벅이 되어, 입술을 지나 턱을 타고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마음이 잔뜩 허탈해

지면서, 슬며시 요의(尿意)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입술을 깨물며 여전히 알몸으로 질주를 계속했다. 한동안 달려 기진맥진한 다음에야, 그는 멈춰 서서 오줌을 갈겼다. 한동안 참아 왔던 오줌 줄기였다. 오줌 줄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수면으로 내리꽂혔다. 자꾸만 흐느껴지는 울음을 추스르면서, 잠시 후에 그는 평상복을 찾아 입었다. 옷매무새를 대충 가다듬은 뒤에, 그는 뜰채를 꺼내 죽어 나뒹군 물고기들을 건져 올렸다. 뜰채 가득히 죽은 물고기의 몸뚱이로 그들먹했다. 그는 혼백이 달아나 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야. 어쨌든 빨리 손을 써야지. 빨리 격포의 해양 경찰에 연락하여, 기름 막 제거에 관공서의 협조를 얻어야 해. 그러면 관청에서 나와 기름 막을 제거하든지 아니면 유화제를 살포하겠지. 그리고, 위도에 나가 사람들을 고용하여, 죽은 물고기를 수거하여 뭍에다 묻어야지. 죽은 물고기를 그대로 두었다간 새로운 오염원이 되고 말 테니까. 하여간 어서 서둘러야 되겠어.'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였다. 그는 언뜻 불안한 느낌이 들어, 갈섬의 북서쪽 해변으로 내달렸다. 거기는 용환이 심혈을 쏟는 김 양식장이 자리잡은 곳이었다. 마침내 숨을 헐떡거리며 거기에 도착하여, 김 양식장을 휘둘러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거기에까지는 기름 막이 흘러들지 않고 있었다. 지형상으로 양식장과는 거의 정반대 쪽에 자리잡은 탓이기도 했다. 하지만, 좁은 면적의 무인도라, 언제 거기에까지 기름 막이 밀려들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즉시 핸드폰을 열어, 114를 통해 해양 경찰서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격포에는 해양 경찰이 상주하지 않는다고 했기에, 군산으로 연락을 취하였다. 전화 접속이 되자, 이미 해군과 해양 경찰에서 현장에 장비와 인력을 투입했다는 거였다. 중대 사안이라, 국가 차원에서 두 시간 전에 동원 명령이 내려진 터였다. 나룻배를 타고 무인도를 한 바퀴 둘러보는 사이에, 커다란 해군 선박과 헬기가 나타났다. 해군 선박의 통신병에게 핸드폰으로 갈섬의 위치와 기름 막의 분포 범위를 알려 주었다. 기름 막의 제거 작업이 끝난 뒤에, 그는 나룻배를 저어 위도에 올랐다. 곧장 위도 회관에 들러 찬호에게 진행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로부터 기름 유출 사건을 듣고 나서, 찬호는 그에게 말했다.
  "그 경우는 일종의 재해에 해당하는 상황이오. 죽은 물고기 떼의 처리에 드는 인부라든지 소요 경비는 죄다 내가 감당하겠소. 그러니, 이 길로 곧장 돌아가서, 김 양식장의 상황은 괜찮은지 살펴주세요. 용환 씨가 돌아오려면 한 달은 지나야 하니까, 대신 좀 점검해 주세요."
  두 시간이 지난 뒤였다. 갈섬의 양어장에는 나룻배 다섯 척에 인부가 스무 명 가량이 투입이 되었다. 작업은 대단히 신속히 진행되어, 두 시간이 경과되자 말끔히 정리되었다. 위도로 떠나가는 나룻배와 인부들을 지켜보면서, 그는 생각에 잠겼다.
  '큰 근심은 벗어났는데, 이제부터 어떻게 만회를 하느냐가 문제로군.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하필이면 그 배가 여기에 와서 침몰할 건 뭐야? 거 인생 공부 한 번 똑똑히 하게 생겼네.'
  물고기가 사라진 양어장은 그야말로 폐허에 불과했다. 일을 하고자 해도 전혀 윤곽이 잡히지 않았다. 출발할 때에, 기존의 물고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엄청나게 큰 의미를 가진 거였다.
  "이제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할 때로군. 마음이야 쓰리고 아릴지라도 새롭게 출발할 수밖에는?"
  마음이야 새롭게 출발한다고 다잡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려니까 말할 수 없이 막막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게다가 사방으로 열린 바다가 아닌가? 언제 또다시 바다에 기름이 유출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일단은 숙소인 천막집으로 들어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천막집 가까이 다가설 무렵에는 바다 가득히 어스름이 지고 있었다. 그랬어도, 그는 집 뒤에 심긴 진달래꽃을 바라보았다. 일부의 꽃잎이 물기를 흡수하느라고,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일시적으로 늘어진 꽃잎은 밤을 새고 나면 싱싱한 모습으로 깨어날 터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일시적으로 시든 꽃잎이 다음 날이면 생기를 되찾듯이 반드시 자신도 소생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서서히 천막집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까지나 걱정만 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천막집 안은 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방 하나에는 잡다한 생필품 및 생활 도구들이 산재해 있었다. 다른 하나는 용환과 민수가 잠을 자는 곳이었다. 그는 숙소에 들어서면서 양초에 불을 붙여 세웠다. 금세 불꽃이 실내를 환하게 밝혀 주었다.
  그는 머리맡에 있는 일기장을 펼쳐 들었다. 이전에는 일기 한 줄 쓴 적이 없던 그였다. 하지만, 갈섬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날짜와 요일 및 날씨를 기록하고는 펜을 들고 생각에 잠겼다.
  '아, 오늘만큼 많은 일이 벌어진 날은 없었어.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시간의 흐름을 좇아, 순서대로 써야지. 아무래도 그게 가장 무난할 것 같애.'
  그는 자세를 바로잡고는 경건한 마음으로 일기를 써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