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장편소설 6회
            섬과 나그네
                                                                                                                        손 정 모

                                          6. 위도를 찾아서

  마침내 배는 풍광이 수려한 변산 앞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정월 초순의 오전 10시 무렵이었다. 이제 배는 격포항을 떠나, 햇살이 눈부신 서해의 위도를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하늘이었다. 민수는 이물(船首)에 우뚝 서서, 가슴 가득히 바닷바람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겨울 바람이건만, 한없이 감미롭게만 느껴지는 바람결이었다.
  '아, 이렇게도 바닷바람이 감미로울 수가 있을까! 이전에 나는 왜 이러한 세계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을까?'
  그는 여객선의 갑판을 서성거리며 서서히 과거의 상념에 잠겨 들었다.

  "민수 씨! 이게 바로 서해 변산 부근의 상세 지도예요. 변산반도의 돌출부인 여기가 채석강이고, 바로 남쪽 부분이 격포항이에요. 위도는 격포항 서쪽으로 10km 떨어져 있는 해상의 섬이에요. 네, 맞아요. 바로 여기에 있는 이 섬이에요."
  보름 전 창원의 성산 병원의 진료실에서였다. 민수가 취직을 위해 사방으로 쫓아다니다가 좌절하여, 정미를 찾은 날이었다. 정미는 지도를 펼쳐 들고는 그에게 위도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위도는 북동쪽으로 길쭉하게 드러누운 섬이거든요. 서쪽으로는 세 군데의 만이 발달되어 있죠. 그 중에서도 바로 이 부분, 보이시죠? 제일 아래쪽에 자리잡은 소쿠리 모양의 해안이 바로 '심구미'예요. 심구미의 남단은 '논금'이라고 해서, 이전에는 죄인들의 출입을 통제하던 곳이었어요. 심구미의 지형도를 잘 보세요. 만이 아주 깊숙이 파고든 형세이죠? 바로 이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이 부근에서 연안 어업이 잘 발달되어 있어요."
  정미는 그를 향해, 진지한 눈빛으로 열심히 설명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심구미는 경사가 급한 언덕으로 에워싸인 풍광이 수려한 만이었다. 가파른 지형으로 말미암아, 해변에는 인가라고는 별로 없었다. 거기 경치가 빼어난 곳에, '위도 회관'이라는 3층 짜리 대형 음식점이 있었다.
  "음식점의 주인이 바로 나의 고종 오빠예요. 이름은 성찬호이며, 나이는 민수 씨보다 9살이 더 많은 마흔 살이에요. 올케는 오빠보다 세 살 밑인데, 둘은 너무나 사이가 좋은 잉꼬 부부예요. 거기에 가서 한 번 부딪쳐 보세요. 어쩌면 가슴 설렐 새로운 세계가 열릴지도 모르잖아요?"
  정미로부터 설명을 들으면서도 연신 그의 가슴은 들끓고 있었다.
  '아, 어쩌다가 내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전자 기술자가 생선회를 다루는 음식점을 찾아 나서야 하다니? 정말 이제라도 나를 채용해 줄 전자 회사는 없는 걸까? 내가 심혈을 기울여 쌓아 온 전자 기술은 그만 사장(死藏)되어 버리고 마는 건가? 이렇게 찢어질 듯이 아픈 마음을 어떻게 추슬러야 한단 말인가?'
  자꾸만 가슴이 울렁거리다 못해, 설명을 듣다 말고 그는 외치듯이 말했다.
  "잠깐만요. 잠깐만 기다려 달란 말이에요. 아, 나 참 미쳐 버리겠네. 지금 왜 내가 그대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어야 하는 거죠? 왜? 왜? 왜냐구요?"
  느닷없는 그의 고함 소리에, 정미는 순간적으로 어안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무한한 포용력을 지닌 듯, 정미는 금세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서면서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무한히 자애로운 눈빛이었다. 그러다가 정미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의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릴 참이었다.
  그는 점차 그녀의 눈빛이 부담스러워, 그녀로부터 가만히 손을 빼 내려고 했다. 헌데도 쉽게 손을 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사랑이 듬뿍 담긴 얼굴로 그의 손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헌데, 손마저 쉽사리 뺄 수 없다는 사실이 순간적으로 그의 감정을 자극하고 말았다.
  '나 원 참! 내가 실직자라고 당신마저 나를 무시하는 거요? 내 아무리 실직자일지언정 당신한테까지 업신여김을 받을 수는 없단 말이에요.'
  그는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왈칵 힘을 주어 그녀로부터 손을 빼 냈다. 그러면서 얼굴 전체가 노기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도저히 더 이상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이내 몸을 돌려 진료실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바로 이 때였다. 정미는 선뜻 그가 자유롭게 나갈 수 있도록 진료실의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나는 당신의 마음을 알아요. 그래, 얼마나 마음이 괴롭겠어요? 나가서 바람이나 쐬다가 다시 들어오세요. 시간이 얼마가 흐르건 여기서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연인이 된 사이니까 말이에요."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성산 병원을 뛰쳐나갔다. 그런 뒤엔 성산 패총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디며 생각에 잠겼다.
  '아, 이다지도 내 마음이 술렁거릴 줄이야? 그래도 내가 너무 지나친 반응을 보인 게 아냐? 나의 연인에게 안 좋은 이미지를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게 뭐야? 일단은 나의 자존심을 죽이고 돌아가자. 이만한 일로 그녀의 마음을 서운케 해서는 안 될 일이야. 그래, 나의 자존심을 죽여야 해. 내 마음의 모든 자존심을 다 날려보내는 거다. 어렵더라도 제발 좀 그렇게 하자.'
  잠시 후에, 그는 쑥스러운 표정을 마저 수습하지 못한 채, 다시 진료실로 들어섰다. 정미는 금세 화사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두 손을 따뜻이 감싸 쥐었다.
  "민수 씨 ! 힘을 내세요. 영 일이 마음에 안 들면 우리가 전자 회사를 하나 세우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고 하잖아요? 가세요. 가서, 서해의 위도에서 한 번 시작해 보세요."
  "정미 씨! 낯선 저를 만나 이렇게 마음을 써 주셔서 너무나 감격스러워요. 내 비록 현재는 만신창이가 된 몸이지만, 반드시 새로운 모습으로 일어설게요. 당신의 말대로, 가서 한 번 열심히 일해 볼게요."
  
  "통통통! 통통통통!!"
  배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숨 가쁘게 서해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해면 위로 치솟는 뽀얀 포말들이 흰나비 떼들처럼 자욱하게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카페리의 스크루로부터 고물(船尾)로 배출되는 물줄기는 바다의 수면에 길다란 이랑을 만들어 나갔다. 물줄기가 나사 모양으로 하얗게 뒤틀리며, 배는 길다란 물 이랑을 만들며 지나가고 있었다. 북쪽으로는 고군산군도의 섬들이 산호초처럼 수평선 위에 점점이 떠서 남실거렸다. 남쪽으로는 송이도와 칠산도가 비취빛 보석처럼 수평선 위에 떠서 굽이치고 있었다.
  그는 이윽고 눈을 돌려, 서쪽 해상을 바라보았다. 점점 환상적인 섬이라 불리는 위도가 초록빛 색채로 점점 다가들고 있었다. 그는 겨울의 찬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가슴을 부풀리며 커다랗게 심호흡을 해댔다. 하도 날 선 바람결이어선지 갑판 위에는 승객들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은 선실 내의 좌석에 앉아 창유리를 통해 바깥을 조망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항구를 떠난 지 대략 20분이 지났을까? 배는 어느새 위도와 변산의 중앙 지점에 이르고 있었다. 이제는 완연한 다도해의 해상이었다. 주위 사방으로는 무수한 섬들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수평선 위에 떠서 남실거리고 있었다. 남실거리는 섬들의 형상은 파릇파릇한 봄 잔디와도 같은 정취를 안겨 주었다. 때때로 생각 난 듯, 하얀 갈매기가 떼를 지어 수면으로 날아 내리곤 했다.
  다시 20여 분이 지났을 때였다. 배는 어느새 위도의 북서쪽인 '벌금' 선착장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섬 전체가 북동쪽으로 길다랗게 드러누워 푸른 파도에 몸을 적시고 있었다. 연초록 빛깔의 섬은 자욱한 안개에 뒤덮여, 잔뜩 신비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는 호기롭게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배가 선착장에 닿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배가 선착장에 정박하면서, 수송된 차량이 섬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도 차례를 기다려, 시동을 켜고는 승용차를 몰고 벌금 선착장으로 내려섰다. 승용차는 선착장 공터에 주차시켜 놓고는 도보로 섬의 해안을 둘러보기로 했다. 먼저 마음을 추스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절대로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그는 일단 지도를 펼치고는 섬의 서쪽 해안에 있는 위도 해수욕장을 찾기로 했다. 선착장에서 위도 해수욕장은 걸어서도 이십여 분의 거리에 있었다. 천천히 마음을 다잡으면서 해변 길에 들어섰다. 그만 세상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대략 1 km에 달하는 백사장이 하얀 모시처럼 곱게 펼쳐져 있었다. 바다는 수평선 가득 파란 색채로 가라앉아 남실거리고 있었다. 해변에는 고운 모래로 바스러져 가는 백색의 조가비들로 널브러져 쉴새없이 물결에 휩쓸리고 있었다.

  오전 11시 무렵의 화창한 날씨였다. 해수욕장에는 여행객들 몇몇이 쪼그려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며 얘기를 늘어놓을 뿐. 완전히 호젓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그는 처연한 심정으로, 서쪽으로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장중한 바다. 그 어떠한 근심조차도 포근하게 감싸줄 수 있는 바다. 그 어떠한 소용돌이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바다. 그에겐 그러한 바다의 풍도(風度)가 한없이 그리운 시점이기도 했다.
  그는 모래사장을 두리번거리다가 하얗게 드러난 바위를 찾아 앉았다. 해변에 인접한 바위였지만, 바닥과는 다소 격차를 이루고 솟구친 형세였다. 그는 바위에 올라앉아 멀리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마음의 각오를 새롭게 다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도 몰래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나는 심판대에 올려진 사람이다. 나의 값어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오로지 나의 역할에 달린 게 아니겠는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간에 이제는 이 길밖에는 없는 거야.'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왠지 발길이 선뜻 옮겨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바위 밑동을 적시는 파도를 흘낏 바라보고는 또다시 허탈한 심사에 휩싸였다.
  '아, 세상이 이다지도 험할 줄이야. 차라리 깨끗이 눈을 감고 저승으로 가 버려?'
  생각에 골똘히 잠기다가, 그는 자신도 몰래 푹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는 왼 손을 활짝 편 채, 마치 손금이라도 보려는 듯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러한 자세로 얼마나 있었을까? 문득 귓전을 파고드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보소. 이 추운 날씨에 바위에 앉아서 그 무슨 청승이오? 혹시 일자리를 잃었소? 요즘에는 부쩍 당신 같은 사람들이 이 섬을 많이 찾는단 말이오."
  그는 섬뜩한 느낌이 들어 급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대략 40대 중반쯤 되어 보였을까 ? 두상 중앙의 털이 거의 빠져 번쩍거리는 머리를 가진 사내였다. 키는 그와 비슷한 180 cm 가량이었고, 체중은 75 kg 정도 되어 보였다. 그는 사내가 그에게 던진 말투를 떠올리다가 슬그머니 불쾌한 느낌에 휩싸였다.
  "왜요?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요? 남이야 해변에 앉아 있건 누워 있건간에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어요?"
  "어라, 대단히 당차게 나오시는군. 나도 사실은 일자리를 잃고 이 주일째 이 섬에서 죽치고 앉은 사람이오. 이 주일씩이나 별의 별 궁리를 다해 보았건만, 손에 잡히는 묘안이라곤 없었소. 어때요? 나랑 같이 가서 술 한 잔 하지 않겠소?"
  그는 사내의 말이 끝날 때까지 줄곧 예리한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보았었다. 사내의 정체를 보다 명확히 파악하고자 함이었다. 일단 사내의 옷차림이나 행동을 통해, 사내의 말을 일단 믿어 보기로 했다.
  "좋아요. 건달 둘이 외진 섬에서 만난 셈이군요. 마침 정오 무렵이라, 술잔을 나누며 통성명이나 하고 지내지요. 저기 저쪽 해변가에 식당이 보이죠? 저리로 가시죠."
  "흠, 보기와는 달리 시원스런 면도 없지는 않구먼. 그래, 같이 가서 건달들의 회포를 한 번 풀어 봅시다."
  '벌금 반점'이라는 상호를 단 음식점에 아직 때가 일러서인지 별로 손님들이 들지 않았다. 대형의 해물탕 하나와 풍란주(風蘭酒)를 주문하여, 해변이 바라보이는 창가의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먼저 병 뚜껑을 따서 사내에게 술을 따랐다. 뒤이어 사내가 술병을 받아서 그의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45살의 최용환(崔容煥)이라는 이름의 사내는 전직이 세무 공무원이라고 했다. 그는 물 좋은 서울 강남 지역의 세무과장이었다. 교량 보수 공사에 관련하여, 건설업체로부터 거액의 뇌물은 받은 죄로 지난해에 면직된 거였다. 그는 벌금형을 선고받았기에, 다시는 관계(官界)에 진출할 길이 없어진 터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관계는 물론이고 기업체에도 취직할 나이를 넘어서고 만 터였다.
  "민수 씨! 세상의 일이란 참으로 알 수가 없었소.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감쪽같이 세상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었소.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정말 알 수가 없는 거였소. 일체 기밀을 지켜 주기로 약속한 놈들이 전부 나를 궁지로 몰아넣은 거요. 평소에 내 앞에선 그렇게도 호인인 척 우호적인 척하는 놈들이 죄다 나를 배신했었소. 이제 나 자신 말고는 아무도 믿지 않기로 했소."
  "아니, 용환 씨! 아무도 믿지 못한다면서, 그럼 나랑 술은 왜 마시는 거요? 10년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나는 사람들도 서로간에 친구가 될 수가 있다고 믿소. 그래서 말인데, 절대로 내 앞에서는 나이 많은 티를 내지 마세요. 나도 한 번 성질이 나면 나이 같은 건 아예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오."
  "이야, 이 사람 보기와는 달리 당찬 데가 있는데? 그래, 좋소. 당신이 내 마음에만 든다면, 나이를 초월하여 당신을 나의 친구로 삼겠소. 어때 당신의 과거사도 내 앞에서 털어놓아 보겠소?"
  그들은 동병상련의 입장에 처하여, 실컷 술을 마시기로 했다. 설사 술을 마시다가 한 사람이 잘못되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끝까지 마시기로 했다. 원래 술이 잘 받는 체질의 사내들이었다. 둘은 세상을 요절이라도 낼 듯이 술병을 움켜쥐고는 마구 기염을 토했다. 마실수록 감칠맛이 나는 위도 특산의 풍란주였다.
  "우리가 만나 다섯 시간 이상 술을 마셨으니까, 이제 장소를 한 번 옮겨 봐?"
  "용환 씨! 이 섬에도 2차를 갈 곳이 있어요?"
  "그럼요. 이 곳 위도는 원래 조선시대에는 각광받는 유배지였소. '벌금'이니 '파장금'이니 하는 '금'자가 붙는 지명은 죄수들의 발걸음을 통제하는 한계선이었소. 한 마디로 지세가 험악하기로 친다면 여기보다 더한 곳이 없는 곳이오. 그런 내력까지 있는 이 섬인데, 그 무엇인들 여기에 없겠소? 1차는 당신이 샀으니까, 2차는 마땅히 내가 사겠소. 자, 이제 나를 따라 밖으로 나갑시다."
  "용환 씨! 장소가 어딘지 미리 알려줄 순 없겠어요?"
  "어, 그 참! 아니 아무런 장소면 어때? 혹시 산막(山幕)이라고 들어 봤소?"
  "물론 말 뜻 정도야 알고 있죠. 원래 산막이란 사냥꾼이나 약초를 캐는 사람들 내지는 초부(樵夫)들이 산에 지은 임시 주거지이잖아요?"
  "흐음, 제법 학교 때 공부는 열심히 한 모양이군. 요즘은 산기슭에 자리잡은 숙박 및 휴게 시설을 총칭하는 말이 되었소. 나랑 한 번 가 보면, 운치를 듬뿍 느낄 거요."
        
  어느새 오후 6시를 넘어서는 시점이었다. 두 사내는 음식점을 나선 뒤에는 곧장 진리에 있는 산막(山幕)을 찾아 나섰다. 벌금에서 10여 km 떨어진 산기슭에 통나무로 만들어진 별장식 건물이 여섯 채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산꼭대기 부근에 자리잡은 곳에, '서해 산장'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건물의 담장은 싸리나무로 이루어진 생나무 울타리였다. 겨울철이어서인지 싸리나무는 앙상한 골격만을 드러내고 있을 뿐, 그 어디서도 생기라곤 느껴지지가 않았다. 대문은 아예 없이 출입구의 양쪽으로 커다란 두 그루의 동백나무가 드리워져 있었다. 동백나무엔 빨간 동백꽃이 가지마다 넘칠 듯이 매달려 바람결에 나부끼고 있었다. 또한 동백나무의 가지마다 풍경이 줄줄이 매달려 바람결에 춤을 추고 있었다.
  

"뎅그렁 뎅그렁!!"
  해풍이 밀려들 때마다 청아한 풍경 소리가 솔숲에 휘감기곤 했다. 맑은 음향에 취해 있자니까, 세속의 풍진이 일시에 씻겨 내리는 기분이었다. 두 사내는 청아한 음향에 취해 잠시 풍경을 올려다보며 숨을 죽였다. 풍경을 건너 뛰어, 시선이 미끄러져 내린 곳에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거기에는 녹색의 나뭇잎과 선홍색의 동백 꽃잎이 절묘한 맵시로 어우러져 있었다.
  그들이 출입구를 통과하여 막 산장의 마당에 들어섰을 때였다. 출입구를 들어서면서 우측으로 꺾이는 지점에 7층의 석탑이 자리잡고 있었다. 탑은 전형적인 백제형의 밋밋한 축조 양식을 취하고 있었다. 헌데, 탑의 1층 탑신에는 근래에 음각으로 새겼음직한 글귀가 커다랗게 굽이치고 있었다.
  
  정녕 구하고자 하거든 너 자신을 버려라.

  "어라! 이건 또 무슨 뜻이야?"
  그들은 일제히 이구동성으로 소리를 지르며, 탑신의 글귀를 눈여겨보았다.
  "이 봐! 민수 씨! 자신을 버린다는 뜻이 뭐야? 콱 뒈져 버리라는 말인가?"
  "용환 씨!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은 다 하시오? 나의 견해로는, 탐욕을 버리라는 말인 것 같소."
  두 사내는 탑신의 글귀를 두고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며 한참 떠들어대었다.
  "에이, 당신이 무슨 철학자라고 개 방귀 같은 소리만 자꾸 지껄여?"
  "그럼, 나이 많은 당신이 저 글귀의 뜻을 해석해 봐요."
  "진작 그렇게 나올 일이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무슨 개 폼을 재고 난리야? 삼라만상은 자기 수준만큼의 깊이로 보인다고 했어. 누가 그런 소리를 했냐고?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어떤 놈이 이런 글을 써 놓았는지 모가지를 콱 비틀어 버리고 싶어."
  두 사내가 술이 잔뜩 취하여, 탑신을 올려다보며 주절대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은방울 소리가 쩔렁거리며 두 사내의 귓전에 부서지고 있었다. 두 사내는 급히 자세를 가다듬으며 소리나는 곳을 주시했다.

  거기엔 선녀(仙女)가 있었다. 전설의 고향이나 선계(仙界)에서만 볼 수 있는 선녀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황금빛으로 반짝거리는 은방울이 들려 짤랑대고 있었다.
  "이야, 선녀 아냐?"
  "맞아요, 맞아. 진짜 선녀는 처음 보네?"
  고주망태가 되도록 취해 버린 사내들이었지만, 그들의 눈에는 틀림없는 선녀였다.
  "호호호! 두 분 손님, 꽤 취하셨나 봐요? 초저녁부터 어디서 그렇게 약주를 많이 드셨나요? 우선 여기서 인동차를 한 잔씩 드시죠. 그런 다음에는 저기 2층 별실로 가세요. 거기 가면 안내하는 애들이 있을 거예요."
  여자의 미모에는 유난히 감각이 빼어난 민수였다. 일찍이 진양호에서 만난 문혜와 미란만큼 빼어난 미모의 여인을 본 적이 없는 그였다. 눈을 감으나 뜨나 그의 머릿속에는 절세적인 미인의 상징으로서, 두 여인의 얼굴이 일렁거렸다. 더러는 꿈에서조차 그녀들을 만나, 넋을 잃기가 일쑤였다. 다음 순위로 아리따운 여인이 정미였었다. 세 여인들과의 만남이 일생에 있어서의 대사건(大事件)일 거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헌데, 눈앞의 여인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민수는 너무나 경탄스러워서, 여인의 몸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글자 그대로 심장의 박동이 멎어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이 참, 이 아저씨들 웃기네? 다들 무인도에서 오셨나? 왜 그렇게 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세요? 설마 제 얼굴에 뭐가 묻은 건 아니죠?"
  여인의 나이는 갓 스물이 넘을락말락해 보였으며, 수려하기 그지없는 미모였다. 민수의 눈에는 정녕 여기가 선계가 아닌지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여인의 미모에 매료당하기로는 용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여성 편력이 대단하여, 어지간한 여자는 그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밥을 굶을 수는 있지만, 여자는 거를 수 없다는 사내였다. 그렇다고 그가 대단한 재력가는 아니었다. 재력가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자를 걸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용환이었다. 여태껏 삶을 살면서, 그의 몸을 거친 여인들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한 그였기에, 당연스럽게도 어지간한 여자는 눈에도 차지 않았다. 헌데, 이러한 용환도 눈앞의  여인의 미모를 대하자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이었다.
  '으흠, 정말 놀랍구나! 어쩜 이다지도 아름다운 여인이 있을까? 내 평생 이런 미인은 처음인걸.'
  완전히 넋을 잃고 선 사내들을 향해, 여인은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아이, 나 참 기가 막혀서. 왜들 이러세요? 어디서 약주를 드셨기에, 이렇게도 맥을 못 추고 그러세요? 하마터면 두 분의 눈알이 흘러내릴세라, 조마조마해 죽겠어요. 여기서 이러시지 말고, 산장 2층으로 올라가세요. 거기에 가면 저와는 비교도 안 될 빼어난 미녀들이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제발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2층으로 올라가세요, 네?"
  민수와 용환은 떼밀리다시피 하여, 몸을 비틀거리며 산장 건물의 본관에 들어섰다. 본관의 각층은 대략 객실의 수가 십여 개에 달했다. 1층에 들어서자마자 20대 초반의 여인이 날렵한 동작으로 사내들을 맞았다. 겨울철인데도, 여인은 분홍색 민소매 티와 연두색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방긋거리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외지 사람들이군요. 2층으로 올라가세요."
  실내 계단을 따라 2층에 막 올랐을 때였다. 또 다른 20대 초반의 아가씨가 미소를 띠며 사내들을 영접했다. 여인은 속살이 훤히 비치는 얇은 한복 차림으로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손님,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 프런트로 와서 원하는 방을 골라 주시겠어요?"
  술에 취한 두 사내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여인의 전신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여인의 몸에는 브래지어라든지 팬티 같은 것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홑으로 된 얄따란 한복만이 전부였다. 그랬기에 젊은 여인의 속살이 숨김없이 드러나 보였다. 게다가 젊은 아가씨라, 여인의 향긋한 살 냄새만으로도 이미 사내들의 성기가 발기되기 시작했다. 사내들은 자신들도 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 사내들은 무형의 인력에 이끌리듯, 프런트 데스크(front desk)로 다가섰다. 사내들은 별실 안내 내용보다는 내비치는 여인의 젖무덤에 완전히 매료된 표정이었다. 커다란 목련 꽃송이처럼 탐스럽게 돌출한 여인의 젖무덤이었다. 터질 듯한 젖무덤이 사내들을 향해 쉴새없이 탄력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사내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 터질 듯이 붕긋한 젖무덤이여! 어쩜 이렇게도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아, 정말 미치겠네. 저걸 당장 주물러 터뜨려 버려?'
  이윽고 사내들은 마음을 잠시 가라앉히며 프런트에 놓인 안내 책자를 살펴보았다.
  
  * 정신 수련실
  * 극기 고행실
  * 목욕 안마실
  * 육체 환락실
  * 사교 무도실
  (모든 금액은 선불로 계산되며 카드 사용이 가능합니다.)

  사내들은 한동안 안내 책자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참으로 각 실의 상황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여인은 연신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사내들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이 때였다. 무척 답답하다는 듯이 용환이 여인을 향해 물었다.
  "아가씨, 각 실에 대해서 화끈하게 설명 좀 해 줄래? 우린 술이 좀 되었거든. 이런 상태에서는 어디 활자를 제대로 볼 수가 있어야지?"
  "네, 알겠습니다. 지금 곧바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우선 이 쪽으로 오셔서 의자에 앉으시죠."
  여인은 익숙한 솜씨로 시원하게 설명해 나갔다.

  정신 수련실은 실의와 좌절당한 사람들을 위한 최상의 서비스가 주어지는 곳이었다.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다채로운 장비가 갖춰져 있기도 했다. 잉꼬, 앵무새, 구관조, 십자매 등의 조류의 숫자도 꽤 많았다. 또한 비단잉어, 거북이, 자라 등의 어류와 파충류들도 있었다. 그림이나 글씨를 쓰거나 조각을 할 수 있는 장비도 골고루 갖춰져 있었다. 쉽게 말해 취향에 맞는 어떤 취미 생활도 할 수 있는 휴식의 공간이었다.
  극기 고행실은 냉온 및 한증 장치가 되어 있는, 극기력을 기르는 곳이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폭포수가 되어 떨어져 내리도록 실내에 장치가 되어 있었다. 여인은 순식간에 각 별실에 대한 설명을 익숙한 자세로 마쳤다. 그리고 나서는 생글거리는 눈빛으로 사내들에게 어디를 원하는 거냐며 묻고 있었다.
  용환이 커다란 눈을 끔벅거리며 말했다.
  "우린 여기에 도를 닦으러 온 게 아니란 말야. 듣자니까 육체 환락실이 제일 마음에 들거든. 우리를 그리로 안내해 줘."
  예서체로 '육체 환락실'이라고 쓰인 별실로 사내들이 막 들어섰을 때였다. 눈앞에는 해서체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 모든 환락의 기본은 약속을 소중히 함을 근본으로 한다.
* 여기를 떠난 뒤엔 일체의 추억을 마음속으로만 간직해야 한다.

  "이야, 정말 멋진 말만 골라서 적어 놓았구먼."
  "글귀만으로도 뭔가 잔뜩 기대되는데?"
  이윽고, 액자 뒤의 담황색 커튼이 걷히면서, 여섯 명의 여인들이 나타났다. 여인들은 하나같이 속살이 훤히 내비치는 담청색의 태깔 고운 한복을 차려 입고 있었다. 여인들은 하나같이 스물 두셋의 나이로 보였으며, 눈부시게 아리따운 얼굴들이었다. 사내들은 여인들의 빼어난 미모에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쩐 일일까? 미인이라면 몇 년을 줄곧 찾아 헤매도 눈에 띌까 말까한 일이잖는가? 그런데, 여기서 만나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절색의 미모를 지녔으니 ! 원래 변산의 여인들이 미인들인지 아니면 미인들만 위도로 몰려온 건지?'
  민수가 의아심을 갖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용환도 비슷한 느낌이었는지 급기야 여인들을 향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설마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것은 아니겠지? 어쩜 여자들이 하나같이 선녀처럼 고울 수가 있지? 내 평생 오늘처럼 빼어나게 아름다운 여자들은 처음 봤다니까! 아무래도 수상한데? 여기가 미인들의 왕국인가?"
  여인들 중의 보라색 반지를 낀 여인이 말했다.
  "호호호! 혹시 손님들께선 저 아래의 벌금 반점에 들렀어요?"
  여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들의 표정은 놀라서 안색이 홱 변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녀를 향해 반문했다.
  "아니, 우리가 거기에 들른 걸 어떻게 알았어? 혹시 거기에 첩보원이라도 깔아 놓았어? 도대체 어떻게 알았냐구? 제발 말 좀 해 봐."
  사내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인들은 일제히 허리를 꺾으며 까르르 웃음을 토했다. 그러더니 녹색 반지를 낀 여인이 말했다.
  "거기에서 나오는 '풍란주(風蘭酒)'라는 술을 마시기만 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바로 손님들처럼, 눈에 띄는 여자들은 무조건 월궁의 선녀처럼 아름다워 보이는 거예요. 근데, 술이 깨고 나면 다들 미인들은 어디로 가고 호박들만 남았냐며 툴툴거린다니까요. 일부의 손님들은 밤에 같이 잠잔 여자들을 다시 데리고 오라며 호통을 치곤 해요. 아마 밤새 우리가 짝을 바꾼 줄로 아나 봐요."
  민수와 용환은 거듭 두 눈을 말똥거리며 여인들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처럼 잘 생긴 여인들을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눈에 띄는 현상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고 믿는 터였다. 보면 볼수록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대로 목숨마저 내맡기고 싶을 정도였다.
  
  별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실내를 향긋하게 적시고 있었다. 잠시 후에 민수와 용환은 각자 다른 별실로 배치를 받아 헤어졌다. 한 사내마다 세 여인이 시중을 드는 셈이었다.
  민수가 들어선 별실에는 풍란의 화분이 바구니에 줄줄이 매달려 허공에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실내의 오디오에선 여민락의 한 소절이 바람에 흩날리는 향기처럼 실내를 적시고 있었다. 한없이 장중하면서도 운치 있는 국악의 음률이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 소리만큼이나 맑았다. 천장의 곳곳에 매달린 풍란의 꽃은 마치 고고한 선비의 풍도를 나타내는 듯했다. 길다란 꼬리를 지닌 하얀 꽃송이 자체만으로도 그윽한 품격일진대, 향기마저 일품이라니!
  산장에 배치된 20대 초반의 아가씨들은 모두가 대학생이거나 대학을 갓 졸업한 여인들이었다. 여인들의 설명에 따르면, 30대 초반의 산장의 여주인은 전직 음대 교수라고 했다. 타고난 색정을 추스를 수가 없던 것이 문제가 되어,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한 거였다. 여주인의 이름은 주청혜(朱淸慧)였다. 그녀는 연이어 대학에도 구미가 맞지 않아서, 스스로 물러났다. 그리하여, 위도에 와서 세운 것이 산장이었다. 원래 재력가의 후예였기에 자금은 넉넉한 편이었다. 그리하여, 전국에 광고를 내어 자신의 사업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여인들을 찾았다. 하나같이 3년 계약으로 끝나는 거였다. 남자들은 나이든 여인들에게는 비정할 정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꿰뚫어 본 거였다. 근래에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하는 원조 교제란 것도 바로 이러한 측면이리라.
  여인들의 설명에 따르면, 3년만 지나면 결혼 자금 정도는 충분히 확보하고도 남는다는 거였다. 서로 공생의 관계랄까? 사업주로서의 청혜는 상당한 부와 쾌락을 얻고, 고용된 여인들도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는 관계였으니까.

  민수는 기간이 길건 짧건 자신과 접촉하는 사람들과는 깊은 교분을 가지려고 했다. 여인들도 그의 심성을 대번에 파악했는지,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신들의 이름을 밝혔다. 얼굴이 갸름하며 눈썹이 아름다운 여인은 '연희'였다. 피부의 색이 해맑으며 오뚝한 콧날이 돋보이는 여인은 '명주'였다. 셋 중에서도 얼굴이 가장 예쁘고 젖가슴이 가장 두드러지게 돌출한 여인은 '민정'이었다. 여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면서, 또한 그의 이름도 알려달라고 했다. 여인들 셋이 일제히 그를 향해 말했다.
  "민수 씨! 산장에서는 종업원들의 이름을 밝히지도 않거니와 손님의 이름도 묻지 않아요. 단지 손님들은 자신들의 욕구만 충족시키고 떠나면 그만이거든요. 그런데, 댁의 경우만은 예외적이네요. 지금은 우리를 미인이라고 생각하고, 이름을 묻곤 하셨지만, 문제는 내일 아침이에요. 내일 아침에, 잔뜩 실망한 모습으로 허우적거릴 댁의 표정이 가관일 텐데요?"
  여인들은 연한 녹색을 띤, 훤히 속살이 내비치는 잠옷을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자, 당신의 옷을 벗고, 이걸로 갈아입으세요."
  그는 일순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아니, 잠시 후면 섹스를 할 텐데, 옷은 왜 갈아입어? 괜히 뜸들이지 말고 너희들도 모두 홀랑 벗어. 성기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것도 옷이라고 입고 있냐?"
  "호호호! 이 아저씨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네? 발가벗은 것보다는 뭔가 은은히 내비치는 것이 더욱 선정적이래요. 나중에 발가벗을 때 벗더라도 지금은 이걸로 갈아입으세요. 자, 어서요."
  그는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여인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씩 옷을 벗었다. 마지막으로 팬티를 까 내리기 전에 잠시 여인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여인들은 피부가 백옥처럼 해맑은, 영준한 청년의 알몸을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눈빛과 마주치자마자 다소 당황한 듯했으나, 이내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마침내 그가 팬티를 벗겨 내리는 순간이었다. 발기되어 끄떡거리는 그의 성기가 벌겋게 드러났다. 그의 성기를 보자마자 일제히 호들갑을 떨어댔다.
  "어마나, 제법 그럴싸한데요. 힘이 아주 좋아 보이네요."
  그가 대꾸할 말이 궁색하여 순간적으로 멋쩍은 웃음을 띠자, 여인들은 자지러질 듯이 깔깔거렸다.
  이윽고 명주가 건네준 옷을 그가 입었을 때였다. 연녹색의 망사에 가까운 잠옷을 차려입고 나니, 이를 데 없이 선정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곤두선 성기로 말미암아, 사타구니 부근이 우뚝 치솟아 있었다. 실내의 중앙에는 쿠션이 대단히 좋아 보이는, 정갈해 보이는 더블 베드가 놓여 있었다. 여인들은 그를 침대 위에 드러눕혔다. 음악은 어느새 오카리나(ocarina)에 의해 연주되는 소지로(宗次郞)의 '대황하(大黃河)'라는 악곡으로 변하여 실내를 적시고 있었다. 황토 빛처럼 서민적이고도 애잔한 정서가 실린 음률이 다양한 기복을 이루며 흐르고 있었다. 오카리나의 선율이 때때로 애잔한 정서로 밀려들면서 가슴 밑바닥에 설움을 피워 올리기도 했다. 때로는 타는 듯한 목마름이었다가 바람에 묻혀서 사라지는 낙타의 울음 같은 황량함이기도 했다. 어쩜 이다지도 시린 선율일까 싶기도 했다.

  "어머, 대황하에 심취된 듯한 표정이네요. 지금 흐르는 악곡이 겨울에 쏟아진 눈송이로 뒤덮인 강변의 정경을 묘사한 '동설초(冬雪草)'예요. 대황하는 모두 21곡으로 이루어진 장편 서사시에 해당하는 음악이죠? 물론 풍부한 서정도 깔렸구요. 자, 이제 눈을 편안히 감으세요. 지금부터 우리가 댁의 전신을 안마를 겸하여 애무해 드릴게요. 애무 도중에 절대로 30분이 경과되기 전에는 사정을 해서는 안 돼요. 이를 어길 때에는 처음의 약정액보다 저희들에게 백만 원을 더 주셔야 해요, 아시겠죠? 자, 그럼 지금부터 시간을 잴게요."
  세 여인의 손길이 성기를 건드리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그의 머리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여인들의 섬세한 손길이 오르내리면서도 성기만은 요리조리 비켜 갔다. 그의 배꼽과 가슴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는가 하면 목덜미를 휩쓸 듯이 지나가곤 했다. 여인들의 감미로운 손길이 무릎과 사타구니 사이를 지날 때마다 그는 쾌감으로 몸을 떨어댔다. 그럴 때마다 사정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시달리면서 몸을 떨어야 했다. 그는 서서히 갈등에 휩싸였다.
  '아, 이건 쾌락이 아니라 바로 사람을 잡는 거로군. 절제하는 데 이렇게 고통이 따를 줄이야? 그래서, 입구에 약속을 지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던가 봐. 나의 의사와 달리, 정액이 분출되어 버린다면 비상금이 다 달아날 수밖에는 없겠지. 차라리 비상금도 다 털리고 팬티 바람으로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터뜨려 버려? 아, 마구 터지려고 불끈거려서 미치겠네 정말.'
  생각에 잠겼다가 여인들의 표정이 궁금하여 슬그머니 눈을 뜨고 싶었다. 상념에 휩싸여 눈꺼풀이 조금 진동할 기미가 보이자, 즉시 여인의 질책이 날아들었다.
  "눈을 뜨면 안 돼요. 절대로 30분이 경과될 때까지는요. 그 이후에는 저희들을 마음대로 다루셔도 돼요. 여기서는 오로지 약속을 지키느냐 아니면 쫓겨 나느냐하는 문제만 남아 있을 뿐이에요. 30분을 넘길 수 있어야만 저희들이 당신의 몸을 받아들일 수가 있어요. 돈도 돈이지만, 절제하는 데에서 오는 쾌감 또한 이루 말할 수 없거든요."
  그는 가쁜 숨을 삼키며, 대꾸도 못한 채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느낌으로는 그랬다. 여인들의 손길은 밀밭을 스쳐 가는 봄바람보다도 더 감미로웠다. 넓적다리에 있는 혈관들이란 혈관은 하나같이 달아올라 벌떡거리고 있었다. 곧추선 성기는 분출 직전의 상태에까지 몰려, 연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상황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그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잠깐만. 정말 시간 전에 사정이 되면 성교도 못하고 쫓겨 나냐? 누가 나를 쫓아낼 거냐구? 들어오면서 보니, 종업원이라곤 여자들 말고는 안 보였거든."

  그가 질문을 던지자 여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나서며 대답을 했다.
  "그럼요. 저희들의 규정상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일반 창녀촌과 산장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구요. 굳이 섹스만을 밝히려면 여기에까지 올 필요도 없잖아요?"
  "옛 날에는 대부분 타의에 의해, 여자들이 남자에게 몸을 팔았죠. 성폭행을 당했다거나 불량배에게 겁탈당한 뒤에 사창가로 몸을 팔려서 매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하지만, 요즘은 세상이 완전히 변했죠. 멀쩡한 여자들이 은밀히 몸을 파는 거예요."
  "거 있잖아요? 생활 정보지 같은 걸 보면, '멋진 만남, 당일 주선'이라는 글귀 보셨죠? 대다수가 멀쩡한 처녀들이고 일부는 가정 주부들도 있어요. 어떻게 잘 아느냐구요 ? 저희들도 다 그런 수련 과정을 겪고 이런 데에 온 게 아니겠어요?"
  "그리고, 쫓아낼 만한 사람들이 없을까 봐 걱정해 주셨죠? 이 곳 산장에도 무예로 단련된 남자 종업원들이 은밀히 대기하고 있거든요. 그러기에, 소리만 지르면 즉시 달려와서 수준 미달의 손님들은 간단히 쫓아내 버리죠."

  그는 여인들의 대답을 듣고 보니, 충분히 그러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영업과 조직을 운영하는 데에 남자가 없을 수가 없지. 갈수록 태산인걸. 만약에 시간 전에 분출되면, 돈은 돈대로 내고 섹스도 못한 채 내쫓기지 않는가? 이건 분명히 고도로 수련된 고승이라 할지라도 통과하지 못할 난관인걸. 물론 고승 같으면 이런 데 찾아올 리도 없겠지. 하여간 별스런 일로 다 속을 썩이게 되었군.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차라리 곧바로 정미의 고종 오빠를 찾아갈 걸 아무래도 잘못했어.'
  바로 이 때였다. 옆방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야, 무슨 이런 개 같은 일이 다 있어? 추가로 50만원을 더 내라면서 왜 섹스가 안 된다는 거야? 누굴 봉으로 알았어? 산장에다 불을 확 질러 버려, 응? 돈은 받고 싶고, 다리는 못 벌려 준다 이거지? 에라, 이 똥 같은 년놈들아! 나는 돈도 줄 수가 없고, 이 방에서 나가고 싶지도 않단 말이야. 너희들이 규정을 만들어 놨다고? 언제 나한테 동의를 구했는지 말해 봐. 내가 동의했다는 근거를 대 보란 말이야. 근거가 없으면 당장 당신들을 사기 행위로 고소하겠어."
  "이 봐요, 아저씨. 왜 약속을 못 지키고 이렇게 발뺌을 하세요? 약속을 어겼으면 순순히 돈을 내놓고 나가셔야죠. 정 내놓기 싫다면, 우리가 경찰을 부르겠어요. 당신이 동의한 부분은 여기에 다 녹음되어 있어요. 누가 잘못했는지 경찰을 불러요? 우린 다 그만한 것은 충분히 감안하여 허가받았다구요, 아저씨."
  "이 새끼들이 몇 번 말해야 알아듣겠어? 돈은 돈대로 내놓으라면서, 왜 사람을 내쫓는 거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될 거 아냐? 확 한 번 뒤집어엎어 버려, 응?"
  "이 새끼 이 거 진짜 말 안 통하네.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 여기에 와서 강짜를 부리고 지랄이야? 정말 뒈지고 싶어?"

  "어라? 이것들이 정말!"
  연이어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격투가 시작된 모양으로, 쿵쾅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건 분명 용환의 목소리야. 정황으로 봐선 달려나가 봐야겠는데, 약속을 어긴 게 분명하니 그럴 수도 없잖아 ? 내겐 약속을 어긴 사람은 친구가 될 수가 없어. 이건 산장의 규정이 아닌 나의 규정이야. 안 됐지만, 너 스스로 해결하라구. 설사 네가 약속을 어겨 맞아 죽는다더라도 내가 알 바가 아니라구, 알았어?'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무렵이었다.
  "어머나, 민수 씨! 축하해요. 산장에서도 이런 일은 좀처럼 없던 일이에요. 그런데도, 마침내 30분을 가뿐하게 넘기시다니 정말 놀라워요. 이젠 저희들을 마음대로 다루셔도 돼요. 물론 추가 비용을 안 내셔도 되구요."
  여인들의 말이 막 끝난 순간이었다.
  "사람 살려요! 어이구 이것들이 사람 죽인다!! 아아악!!!"
  절박하기 그지없는 비명 소리였다. 용환의 일에는 일체 초연하기로 한 그였다. 하지만, 절박한 비명 소리를 듣고부터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급히 몸을 일으켜 세워 바깥으로 달려나가려고 했다. 헌데, 이 때였다. 세 여인들이 억척스레 달라붙어 그의 몸을 붙잡으면서 말했다.
  "민수 씨! 바깥일에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저런 일은 더러 있는 일이에요. 우리 일에나 신경 써 주세요. 자, 우리를 어떻게 해 주셔야죠, 응?"
  순간적으로 그는 격분되어 몸을 떨면서 냅다 고함을 내질렀다.
  "이것들이 왜 이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는 절박한 상황인데, 나더러 모른 체하라고?"
  그러면서 몸을 솟구쳐 간단히 여인들을 뿌리쳐 버리고는 곧바로 옆방으로 향했다. 단숨에 문짝을 걷어차고는 곧장 격투가 벌어진 곳으로 내달렸다. 용환의 둘레로 남자 종업원들 넷이 번갈아 가며 주먹과 발을 날리고 있었다. 좀처럼 남이 보는 장소에선 무술을 쓰지 않던 민수였다. 하지만, 눈앞의 상황이 그를 격분시키고 말았다. 그는 사내들을 향해 몸을 치솟으며 냅다 기합을 질렀다.
  "이야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