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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5회
섬과
나그네
손
정 모
5. 창원으로의 여로
빛살이 유리 파편처럼 흩날리는 오후 3시 무렵이었다. 민수는 황정미를
따라 인근의 성산병원에 들어섰다. 병원은 3층으로 이루어진 현대식 종합 병원이었다.
29살의 정미가 자리잡은 곳은 내과 2층 병동이었다. 때가 때인지라, 환자들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정미는 잠시 옆방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오더니만, 대기중인 간호사에게
쾌활한 표정으로 말했다.
"김 선생님, 옆방의 닥터 최에게 오후 진료를 인계해 드렸거든요.
진료 카드를 최 선생님께 갖다 주시고, 환자들을 좀 안내해 주실래요?
그러자, 간호사는 상냥한 음성으로 대답을 하며 자리를 떠났다. 정미는
잠시 민수를 향해 고개를 내밀더니, 또랑또랑한 음색으로 말했다.
"잠시 이 쪽으로 들어오실래요? 여기서 잠시 저와 얘기 좀 하자구요."
진료실 내부에는 진료용 침대와 안락의자 2개가 놓여 있었다. 남쪽으로
난 커다란 창문을 통해, 밝은 햇살이 연방 실내로 날아들고 있었다. 상아 빛 커튼
자락에 휘감기는 햇살이 실내를 한없이 따사로이 적셔 주는 느낌이었다.
정미는 안락의자를 창문을 향해 나란히 배열하고는 그에게 먼저 자리를
권했다. 그가 자리에 앉자, 방금 끓인 모과차를 그에게 권하면서 그녀 자신도 앉았다.
잠시 후에 그녀는 불투명한 내부의 창문을 절반 가량 열었다. 그러자, 또 한 겹의
투명한 바깥 창문이 드러나면서, 맑은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창가의 귀퉁이에는
2층까지 치솟은 목련의 나뭇가지가 드리워져, 바람이 일 적마다 간들거리고 있었다.
시야에는 넓은 창문을 막아서는 다른 건물들은 일체 보이지 않았다. 다만, 가없이
널따랗게 펼쳐진 하늘만이 파랗게 얼어붙어 있을 따름이었다. 이따금씩 몇 송이의
하얀 구름장들만 나른한 모습으로 하늘에서 미끄러져 흘러 다니곤 했다.
탁 트인 하늘을 올려보자니까, 오랜만에 그의 숨통이 틔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그에게 한없이 포근한 어조로 말을 건넨 것은 바로 이 때였다.
"민수 씨! 이제 저랑 얘기 좀 해요. 저는 2년 동안 여기서 터를
잡으려고 애써 봤지만, 도대체 재미가 없었어요. 민수 씨의 한없이 우울하고도 나른한
기색이 왠지 첫눈에 저를 자극하고 말았어요. 그리고 또 하나. 저는 정말 마음에
맞는 배우자를 찾으려는 참이거든요. 그 첫 번째 요건이 어떤 형태로건 제게 진한
감동을 주는 남성이기를 원했어요. 다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차내에서 갑갑해
하던 모습이 제 가슴을 마구 뒤흔들었어요. 뭐가 그리도 답답하고 괴로운지 제게
들려주시겠어요? 혹시 제가 힘이 되어 드릴지도 모르잖아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 한참이 지나도록,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진한 허탈감과 상실감으로 인해 몸을 추스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자꾸만
걷잡을 수 없는 설움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잊자고
마음을 먹어도 집요하게 달라붙는 과거의 잔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어느새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 나는 과연 지금도 살아 있는가? 내가 살아 있다는 근거는 뭔가?'
생각할수록 자신이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고 여겨졌다. 당당하게 일어섰다고
생각한 순간에, 기업으로부터 퇴출이나 당하는 못난 자신이 가증스럽기까지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퇴출당할 정도의 존재로밖에는 여겨지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졌다. 게다가 아내로부터의 배신마저 받을 정도의 인물임에랴? 이런 처지에
뭐가 잘났다고 이력서를 들고 사방으로 뛰어다니겠는가? 생각할수록 가슴이 터져
버릴 듯이 죄어드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엉뚱한 곳에 이끌려 와서 안락의자에 앉은 지금의 신세는 또
뭐란 말인가? 더구나 눈앞의 여인은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고 엉뚱한 수작을 벌이는
걸까? 생각할수록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묘한 정경이 벌어진다는 느낌이었다.
"민수 씨, 왜 대답이 없으세요? 제가 영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저는 강제로 타인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에요. 정 싫으시면 관
두셔도 돼요."
"황 선생님, 그게 아니구요. 잠시 생각에 잠기느라고 대답이 좀
늦어졌어요. 저는 오갈 데가 없는 나그네가 된 신세가 되고 말았어요. 정착할 수
없는 나그네! 어때요? 좀 슬픈 느낌이 들지 않으세요? 사실은 이런 자리에 와서 한가하게
이야기나 늘어놓을 계제가 못돼요. 정녕 선생님이 제 얘기를 들어주시겠다면, 모든
얘기를 다 털어놓을게요."
그는 자신의 과거를 차근차근히 풀어놓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십여
군데에 이력서를 들이밀고 온 데까지를 죄다 말했다. 그녀는 눈빛을 빛내면서,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귀를 기울여 들었다.
"어머나! 총각 같아 보이는데, 벌써 결혼하신 경력이 있다구요?
아무튼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일자리를 알아보러 중소
기업체를 기웃거릴 건가요? "
"네, 그래요. 젊은 나이에 놀고 먹을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하도
마음이 상해서 여기에 들른 거지, 그렇지 않다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황
선생님! 어때, 제 이야기를 듣고 나니 한없이 제가 못나 보이죠? 이렇듯 세상에는
잘난 사람들이 많은 반면에, 저처럼 못난 사람들도 있나 봐요. 어쨌든 저의 얘기를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그럼, 저는 이만 갈게요."
"잠깐만요. 사람이 왜 그리 성미가 급하세요? 물론 사방으로 이력서를
뿌리려면, 시간이 없을 줄은 잘 알아요. 하지만, 이력서를 뿌린다고 해서, 금방 일자리가
생기는 건 아니죠? 조금만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저의 얘기도 한 번 들어보셔야죠?
민수 씨는 학력과 경력에 지대한 자존심을 갖는 사람은 아닌가요? 물론 관악에 자리잡은
서울의 명문대를 졸업하신 것만으로도 자존심이 당당하시겠죠? 게다가 근무한 곳이
국내 굴지의 재벌 그룹에 직함도 과장이겠다 부러울 게 없었겠어요. 하지만,
지금의 심정은 어떠세요? 제가 드리는 말씀은 조금만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저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셨으면 해요."
여인은 잠시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이내 그를 향해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그녀의 고향은 전북의 변산반도에 자리잡은 격포항이라고 했다.
그녀의 가족으로는 부모와 세 살 터울의 여동생인 정선이 있었다. 아버지는 정미가
중1 때에, 서해의 해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러다가 2년 뒤에는 어머니마저
잠수 사고로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버지는 그들 자매를
소형 동력선에 태워 바다에 다니기를 즐겼다. 주로 석양 무렵의 바다의 경치를 유난히도
즐기던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들 자매들도 변산 해변의 절경에 곧잘
심취하곤 했었다.
자매는 뱃머리(船首)에 나란히 앉아, 변산 해변을 따라 펼쳐지는 절경에
넋을 잃곤 했다. 북으로는 고군산군도의 섬들이 수평선 위로 아스라이 떠서, 연신
초록빛으로 남실대곤 했다. 서쪽으로는 위도가, 남쪽으로는 칠산도와 송이도가 수평선에
남실거리며 떠 있었다. 변산의 북방으로는 하도 주변의 고사포 해수욕장 일대부터
배를 몰아 남하하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변산반도의 돌출한 적벽강과 채석강을 지나,
상록 해수욕장까지 배를 몰곤 했다. 이들 해안의 경치야말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격찬을
받는 변산 해변의 절경이었다.
"정미 씨,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하셨죠? 정미 씨는 모친이 별세한
뒤에는 어떻게 생계를 이어 나갔는지 궁금해요. 왠지 당신께 묻지 않고는 못 견딜
것만 같군요."
"네, 물론 들려 드리죠. 저도 이런 얘기를 아무한테나 하지는 않아요.
가슴속 깊숙이 묻어 두었던 얘기였기에, 새삼 가슴이 떨리는군요."
그녀는 잠시 눈시울이 젖어 드는가 싶더니, 이내 침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정미의 어머니가 잠수 사고로 생명을 잃은 날이었다. 어머니의 시신을 부둥켜 안은 자매의 가슴은 비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시에 고아가 된 처절한 슬픔으로, 도무지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잃었을 때만 해도, 이렇게 가슴이 메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어머니라는 믿음의 대상이 있었던 탓이었으리라. 하지만, 어머니마저 잃고 보니, 세상이 이처럼 암울하고 삭막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어머니의 숨결을 두 번 다시는 느낄 수 가 없었다. 더 이상은 해변에서 소쿠리를 헹구며 미소짓는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시신을 화장터에 가져 갈 때까지 자매는 도무지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처절한 슬픔으로 인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다음 날이었다. 중3의 정미와 초등학교 6학년생인 정선은 화장한 어머니의 유골함을 안고는 소형 동력선에 올랐다. 줄곧 아버지한테서 지도를 받았기에, 변산 해변의 뱃길에는 누구보다도 정통한 자매였다.
때는 7월 하순의 오후 5시 무렵이었다. 유골함을 가슴에 안고 배에
올라탄 뒤에, 자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정미의 고모부가 시동을 걸어, 마침내
배가 격포항을 통통거리며 출발하기 시작했다. 정미는 부모님과 잘 지내던 고모부에게
동력선의 엔진 조작을 부탁해 두었다. 아울러 고모부에게는 자매의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말고 끝까지 지켜 봐 주기만을 부탁했다. 배는 서서히 머리를 변산 해변의 북쪽으로
돌려, 통통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격포항을 벗어나자마자, 변산반도의 돌출부인 채석강의 절벽이 입체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만 권의 서책을 쌓은 듯한 해안 절벽이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었다. 평행선을 이루며 비스듬히 기울어진 층암절벽 위에는 곳곳마다 갈매기들이
하얗게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러다가 바람이 일기라도 하면, 일시에 해면을 하얀
목련꽃처럼 뒤덮곤 하는 갈매기 떼였다. 배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을 정도의 속도를
유지하며, 천천히 바다를 달렸다.
채석강의 절벽 앞에서부터였다. 자매는 유골함(遺骨函)을 풀어 뼛가루를
조금씩 바닷바람에 휘날리기 시작했다. 손아귀를 벗어난 뼛가루는 바람결에 휩쓸려
물안개처럼 뽀얗게 떨어져 내렸다. 해풍이 바다의 수면을 스칠 적마다, 수면은 금세
배를 하얗게 뒤집으며 부서지고 있었다. 중천에서 한껏 달아오른 빛살이 수면으로
곤두박질치면서 연신 미풍에 간지럼을 타곤 했다. 바다는 파란 색채로 끝없이 널브러져
물고기의 비늘처럼 파드득거리고 있었다. 청정하기만 한 바다의 수면은 잘 닦인 거울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출렁이는 물결이 끝없이 밀려드는 듯 하다가는 어느새 새로이 밀려드는
파도에 휘감기곤 했다.
탁 트인 바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파랗게 가라앉은 눈부신 하늘. 배는
엔진음을 토하며 한낮의 바다를 거침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배가 일구는 파도에 휘감겨
바다는 연방 하얀 속살을 드러내면서 요동치고 있었다.
정미와 정선은 서서히 불어오는 바람결에 따라, 유분(釉粉)을 수면에
흩날려 보냈다. 어머니의 주검을 처음으로 맞던, 하루 전의 상황이 문득 뇌리에 떠올랐다.
3교시 수업을 막 마친 직후였다. 담임 선생님이 경직된 얼굴로 정미를
불러,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미야, 지금 당장 집으로 가 봐. 어머니가 사고를 당했다는구나."
어느 정도냐고 물었을 때, 선생님은 물기 젖은 눈으로 가 보라는 손짓만
했다.
정미가 막 동구에 도착했을 때에는 정자나무 아래의 공터에 사람들이
울을 이루고 있었다. 다가오는 정미를 보자,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용내림 절벽 아래에서, 물질을 하다가 변을 당했댔지? 자식이라곤
두 딸밖엔 없다는 청상이 어찌 이렇게도 팔자가 기구할꼬?"
사람들의 울타리 안에는 어머니의 주검만이 하염없이 드러누워 있을
따름이었다.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띈 순간이었다.
"흐흑! 엄마!!"
정미는 새된 소리를 내지르며, 어머니를 향해 곧장 달려들었다. 순간적으로
왈칵 흙 냄새가 후각으로 밀려들면서, 그녀는 곧바로 실신해 버리고 말았다. 끌어안은
모녀의 얼굴이 그렇게 평온해 보일 수가 없다며, 아낙들은 연방 눈시울을 적셨다.
배는 층암절벽이 드높이 치솟은 적벽강 앞을 누벼 흐르기 시작했다.
절벽이 치솟는 끝자락마다 윤기가 흐르는 다복솔들이 탐스러운 모습으로 뒤엉켜 있었다.
녹색의 솔숲과 회색의 바위가 조화롭게 내뻗은 지세는 엄연한 별천지를 이루고 있었다.
명승지인 중국의 지형을 그대로 닮았다고 하여, 이름마저 적벽강인 해안 절벽. 적벽강도
조수간만이 심한 서해 변산의 지세로 볼 때는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었다. 절벽 높다랗게
치솟은 다복솔 위로는 갈매기들의 무리가 눈송이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강렬한 햇살을
맞아, 시시각각으로 달라져 보이는 절벽의 색조는 언제 보아도 예사롭지가 않았다.
절벽 밑으로부터 아슴푸레하게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보고 있으려니,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미의 기억으로는 그 언제나 평온한 표정에 미소가 가득
실려 있던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으리라. 정미의 집엔 수령이
십여 년이 되는 커다란 매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해마다 3월 말경에는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온 정원은 눈송이로 뒤덮인 듯했다. 봄철에는 집안에만 들어서면
향긋한 꽃향기로 그렇게 감미로울 수가 없었다. 수령에 비해서는 키가 작은 편이었지만,
정미의 키에는 닿지 않는 높이의 매화나무였다. 매화꽃이 하도 탐스럽기에, 윙윙거리는
꿀벌들을 지켜보며 가만히 매화꽃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누군가의
손이 등뒤로부터 정미의 눈을 살며시 가렸다. 정미는 가만히 눈을 가린 손을 더듬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 엄마는? 놀랬잖아? 지금 바다에서 돌아오는 길이야?"
어머니는 가린 손을 풀고는 입가에 미소를 가득 실은 채, 정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대답 대신에 탐스럽게 달린 매화송이를 꺾어 정미에게 가만히
내밀었다. 정미는 한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꽃송이를 든 채로 어머니를 꼭 껴안았다.
그 뒤로는 매화송이를 볼 때마다 방긋거리는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
배는 어느새 하도 주변의 고사포 해수욕장 일대에까지 북상하고 있었다.
정미의 기억으로 아버지는 항상 이 지점에서 배를 남쪽으로 되돌리곤 했었다. 겨울철에
핀 하도의 동백꽃이야말로 변산의 절경 중의 절경이라고 극찬하던 아버지였다.
배가 하도의 물굽이를 막 돌아서고 있을 때였다. 하도의 짙푸른 동백
숲 주변으로 살짝 물안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면서 문득 그럴 수 없이 자애로웠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두 딸을 배에 태우고 다니면서 변산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던 아버지였다.
"애들아, 저기 물안개가 가득 서린 곳이 보이지? 그래, 하늘 높이
치솟은 병풍 같은 바위 절벽 일대를 가리키는 거야. 저기가 채석강이라는 곳이거든.
옛 날 중국의 천재 시인인 이백이란 사람이 있었지. 보름달이 비친 강을 배로 저어가다가,
달을 움켜잡으려고 물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지 뭐냐? 이 곳의 지형이 중국의 채석강을
닮아서 그렇게 부른다는 거야. 그 일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고들
하지. 한 마디로 죽어서 신선이 되어 날아갔다는 얘기야."
정미는 흘낏 눈을 돌려, 정선을 바라보았다. 정선도 아버지의 생각이
나는지 하도의 동백림에 시선을 고정시키고는 상념에 잠겨 있었다. 정미는 소리 없이
한숨을 삼키며, 조용히 유분을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한없이 청정한 바다는 흩날려
떨어지는 뼛가루를 아무런 흔적도 없이 흡수해 버리곤 했다.
배는 하도를 지나 적벽강에서부터 격포를 경유하여, 상록 해수욕장까지의
해변을 따라 남하할 작정이었다. 하도를 지나자마자 서쪽 수평선 위로는 위도가 연초록
빛으로 남실거리고 있었다. 위도는 황홀한 석양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섬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은거를 하게 되면 찾아갈 마지막 장소가 거기가 될 정도라는 섬이었다.
정미는 흘낏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다섯 시 반을 막 지나고 있었다.
점차 태양의 각도가 기울어지면서부터였다. 해안 절벽의 색채가 자줏빛에서 보라색으로
다양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물안개에 이어 서서히 해무(海霧)까지 엉겨 들면서 변산
해변은 신비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배는 어느새 적벽강과 채석강을 지나, 격포항 부근을 지나고 있었다.
격포항은 서해의 주요 도서로 향하는 각종 여객선들의 출항지이자 기항지(寄港地)이다.
그런 만큼 항구는 사시사철 여행객들의 방문으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하여,
항구의 입구에는 중국의 선박을 비롯하여, 각국의 어선들이며 여객선들로 끊임이
없었다. 바로 이러한 떠들썩한 분위기와는 좀 다른 산기슭에 정미의 집이 자리잡고
있었다. 산기슭이라고는 하지만, 포구까지는 도보로 채 이십여 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다.
항구에서 날아드는 발동선의 엔진음과 뱃고동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었다. 정미는 꿈에서조차 변산의 고향 바다에 취하곤 했다.
정미에게도 온 세상이 무지개 꿈으로 피어오르던 유년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변산의 절경에 취하기도 하고, 물고기를 건져 올리기도 하면서 꿈을 키웠다. 석양
무렵이면 바다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고운 자태로 너울지곤 했다.
석양의 바다는 자줏빛 노을에 취해, 수만 마리의 황금빛 물고기 떼처럼
파드득거리곤 했다. 해변의 동백 숲으로는 바닷바람이 하얗게 일어서며, 발길질을
해대곤 했다. 해변이 불길처럼 달아오를 무렵이면, 바다 갈매기들은 무리를 지어
해안 벼랑으로 날아오르곤 했다.
마침내 꿈과 추억이 아롱졌던 격포의 고향 바다를 지나게 된 순간이었다.
정미와 정선은 나란히 일어서서 자신의 집을 먼발치로 올려다보았다. 격포의 북동쪽
산기슭에 자리잡은 한옥이 먼발치에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집으로 들어서는 언덕의
초입에, 커다란 엄나무가 한 그루 치솟아 있었다. 수령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옛
날부터 당산나무로 숭배되어 오던 나무였다. 자매가 학교에서 귀가할 무렵이면, 언제나
당산나무 아래에는 그녀들의 어머니가 서 있곤 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언제나
거기에는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어머니가 기다리곤 했다.
뱃머리에 나란히 섰던 자매가 일제히 일어서서 당산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바로 그 때였다. 정미가 유골함을 놓아둔 채, 고모부에게로 달려가서는 큰 소리로
외쳤다.
"고모부님! 여기서 저 당산나무를 향해 뱃고동을 가능한 한 크게
세 번을 울려 주세요. 저기는요, 매일같이 어머니가 서 있던 자리거든요. 비록 형체는
안 보일지라두요. 지금도 저 자리에서 어머니는 분명 미소를 머금고 손을 흔들고
계실 거예요. 자, 어서 뱃고동을 울려 주세요, 네?"
정미의 눈을 들여다보던 고모부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물기가 뽀얗게
서렸다. 정미도 '훅'하고 슬픔이 끓어오르면서, 코끝이 먹먹해져 왔다. 이윽고 뱃머리로
돌아와 자매가 일어서서 당산나무를 올려다보며, 두 손을 모으고 있을 때였다.
"부우웅! 부우우웅! 부우우웅!!"
이를 데 없이 우렁찬 뱃고동 소리가 높고도 길게 세 번을 거듭해서 울어댔다.
뱃고동이 울리면서부터였다. 자매는 약속이나 한 듯, 일시에 오열하며 허리를 꺾었다.
기관실의 고모부마저도 목이 메어 어깨를 들먹거리며 흐느끼고 있었다. 바로 이 때였다.
해변에서 떼지어 서성거리던 수백 마리의 갈매기 떼가 일제히 수면 위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일시에 치솟는 갈매기 떼들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정미 자매와 고모부는
갈매기들의 비상(飛翔)이 빚어내는 환상적인 장면에 매료되어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순식간에 대기에 파공음(破空音)이 이는 순간이었다. 수만 송이의 만발한
목련 꽃송이가 강풍에 일제히 떨어져 내리는 듯한, 현란한 장관이었다. 창졸간에
펼쳐진 숨막힐 듯한 장관에 압도되어, 그들 자매는 완전히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제 포구의 하늘은 온통 갈매기의 활갯짓으로 인해, 백색의 천지가 되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지난날들의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실타래처럼 풀려 하늘에 흩날리는 듯했다.
그런 어느 순간이었다. 나부끼는 갈매기 떼들의 틈새를 비집고, 파란 하늘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이 때였다. 푸른 하늘 가득히 미소짓는 어머니의 얼굴이 잠깐 하늘에 은은히
펼쳐지는 듯도 했다. 정미는 걷잡을 수 없이 설움이 끓어오르면서, 입술을 깨물며
가만히 울음을 삼켰다.
갈매기 떼들의 비상이 잦아들 무렵까지, 자매와 고모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갈매기 떼들이 해안으로 날아 내린 다음에서야, 배는 선수를 남으로
돌렸다.
수면은 여전히 수만 마리의 황금빛 물고기의 비늘처럼 파드득거리며
요동치고 있었다. 수면으로 내리꽂히는 석양의 빛살은 수천 갈래의 물 무늬를
일구며 파동이 되어 나부꼈다. 멀리서 저음이 되어 흘러드는 뱃고동마저 아늑한 석양의
정취를 한껏 부풀리고 있었다. 격포 남쪽의 상록 해수욕장 부분까지 가서야, 유분들을
바람에 죄다 흩날릴 수 있었다. 이제는 흩날려 뿌릴 뼛가루도 없는 터였다. 여전히
배는 통통거리며 바다의 수면을 하얗게 갈아엎고 있었다. 이제 태양은 수평선에 맞물려
마지막의 열기를 쏟아내며 작렬하고 있었다. 이제 온 바다는 황금빛에 휘감겨 하늘과
함께 타오르고 있었다.
점차 배가 황혼에 휘감겨 격포항으로 접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정미와
정선은 다시 한 번 당산나무를 올려다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엄마, 부디 편히 눈을 감으세요. 저희들 때문에 걱정되시죠?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 볼게요. 그런데, 엄마가 보고 싶을 땐 어떻게 하죠? 세월이 아무리 흐른들
당산나무 밑의 엄마의 모습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거예요."
배가 완전히 선착장에 닿기 직전이었다. 자매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다시는 변산의 바다를 못 볼 것만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하여, 또다시 변산의 바다로 배를 되돌리고도 싶었다. 정미는 변산의 바람결에
귀를 기울이며, 가슴 떨리는 심정으로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이제 세상 그 어디에서도
어머니를 볼 수는 없는 터였다. 그녀의 자애로운 눈빛과 맑은 미소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리워졌다. 지난 14년 동안의 사랑이 변산의 바람 속으로 스러져 가고 있었다.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과거의 정점에서 멈춰 버리고도 싶었다. 진한 상실감이 전신으로
엄습해 오며 가슴속으로부터 또다시 울음이 치솟아 오르려고 했다.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또다시 눈시울을 적시며 뚝뚝 떨어져 내렸다. 문득 나부끼는 변산의 바람결에서
자매를 지켜보는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또다시 밀려드는 바닷바람에 맞서, 정미는
강하게 고개를 흔들며 눈물을 삼키려고 했다. 창졸간의 느낌 때문이었다. 왠지 자신마저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상심한 어머니를 위로하고 달래야
할 자신마저 눈물을 쏟는대서야! 정미는 '훅'하고 치솟는 흐느낌을 가까스로 억누르느라고
잠시 버둥거렸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자꾸만 코끝이 먹먹해져 오며, 하염없이
눈물만 방울져 흘러내릴 뿐이었다. 떠나는 마당에까지 눈물을 보여 어머니의 마음을
슬프게 할세라, 손끝으로 눈물을 지우며 속삭였다.
"엄마, 이제야 엄마를 놓아 보낼게요. 생시에 그다지도 좋아하던
변산의 바람 속으로 ……. 한 많고 설움 많은 세상을 떠나 ……. 그래요, 엄마와의
추억이 변산의 바람이 될 때까지만 엄마를 기억할게요. 절대 외로워하진 마세요,
네? 그럼, 잘 있어요, 안녕!"
여태껏 잔잔하게 남실거리기만 하던 바다였다. 그 바다 위로, 점차 해풍(海風)이
기세를 올리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제 바다는 석양의 극점에 치달아, 마지막의
신열을 토해 내며 선홍빛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민수 씨! 저는 그리하여 엄마를 일찍 여의게 되었어요. 지금도
변산의 바다를 떠올리기만 하면, 마구 가슴이 뒤설레거든요. 엄마를 여의면서부터는
위도에 계신 고모 내외의 도움을 받아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어요. 저와 동생은 고등학교
때까지만 신세를 지고, 대학부터는 입주식 가정교사로 학비를 해결했었어요. 그리하여,
저는 오늘날 의사가 된 거예요. 이만하면 어느 정도는 자수성가한 셈이죠?"
그는 정미의 얘기를 들으면서부터 머릿속으로 변산 해변의 정경과 그녀의
어머니를 그려보았다. 비록 남의 이야기였지만, 가슴 사무치는 슬픔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문득 자신도 몰래 변산의 바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잖아도 울적한 가슴인데, 바다에 가서 시원하게 풀어 버리고도 싶었다. 잠시
상념에 잠겼을 때였다. 어느새 정미의 맑은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민수 씨! 언제까지나 구직을 위해 떠돌아다닐 생각이세요? 혹시
직업을 바꿔 볼 생각은 없으세요? 예컨대, 해산물 식당 경영이나 물고기 양식업 같은
건 어떠세요? 열심히 일자리를 찾다가 마음에 맞지 않으면 제게로 오세요. 그럴싸한
곳으로 소개시켜 줄 테니까요."
"정미 씨! 절 위해 걱정해 주는 것은 다 좋은데요. 직업이 애들
소꿉놀이처럼 금방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만약에, 제가 정미 씨한테 의사
직업 그만 두고 물고기 양식업을 하라고 하면 하겠어요? 제게 생각해 볼 기회를 주셔야죠."
"좋아요. 얼마든지 기다릴게요. 저도 의원 노릇이 천직이라고 생각하고
뛰어들었지만, 이건 단순한 직업이 아닌 것 같아요. 의사란 신을 대신하여, 사람의
생명을 다스리는 신성한 직업이에요. 이러한 신성함이 저를 주눅들게 할 때가 적지
않았어요. 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여자일 뿐이거든요. 항상 신성함에
머리를 조아리며 일을 해 나가려니, 가슴이 벅차고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지금까진 저의 직업에 대해 심한 회의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죠.
민수 씨! 물론 자신의 직업을 간단히 바꿀 수 있는 성질은 아니죠. 저도 그 점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아요. 제가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민수 씨의 처지를 도와 드리려는
측면이었어요. 어때요, 제 마음 아시겠죠?"
정미는 흘낏 시계를 보더니 그를 향해 말했다.
"어머, 시간이 벌써 다섯 시가 되었군요. 이제 저랑 같이 드라이브나
하시죠. 우선 기아기공 앞의 '성산 패총'으로 안내해 드리죠.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
줄래요? 옷 갈아입고 금방 나갈게요."
이윽고 정미는 깔끔해 보이는 검정색 원피스 차림새로 진료실 문을 열고
나왔다. 간호사를 불러 몇 마디 이야기를 하더니, 곧장 그를 데리고 병원을 나섰다.
병원의 주차장에 내려섰을 때였다. 정미는 그를 향해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민수 씨! 댁의 차는 잠시 여기 주차장에 세워 두시고, 제 차로
같이 가시죠. 민수 씨와 드라이브를 마치고는 저 역시 이곳으로 되돌아올 거니까요.
패총은 여기서 걸어가도 될 만한 가까운 거리예요. 단순한 조개더미가 아니라, 제법
볼 만한 게 있는 곳이라구요."
정미의 검정색 그랜저가 멈춘 곳은 진해선 철도의 남창원역에서 가까운
성산동이었다. 성산 패총은 기아기공에서 도보로도 십여 분의 거리에 있었다. 패총은
유물 전시관과 보호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산만의 바닷물이 창원 시내의 반송동까지
들어와서 곳곳에 적지 않은 패총을 이루고 있었다. 성산 패총은 1974년의 창원공단
조성 사업 중에 발견된 선사 시대의 주거 지역이었다. 조개더미와 함께 발굴된 수백
점의 유물은 고대사 연구의 중요 자료가 되는 터였다. 유물들 중의 토기를 위시하여,
석기와 화살촉 등은 대단히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어 있었다. 또한 보호각은 고대부터
형성된 창원의 야철지(冶鐵地)를 원형 그대로 보존해 놓은 거였다. 모든 철제 금속의
제련 작업이 이루어진 고대 산업의 현장임을 입증하는 장소였다.
정미는 패총을 거닐면서, 온화한 음색으로 말했다.
"여기가 고대 국가 시절에는 가야에 속했나 봐요. 가야에서 생산되는
철의 제련 장소가 바로 여기였다는 거예요. 참으로 신기한 것은 어떻게 돌 속에서
철만을 뽑아낼 생각을 했느냐는 점이에요. 제가 굳이 댁을 여기로 데리고 온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단지 조상들의 삶의 현장이자 고뇌의 터전을 찾아, 그들의 체취를
느껴 보자는 거였어요."
유물 전시관과 보호각을 둘러본 뒤에, 그가 느낀 바는 적지 않았다.
바닷물의 흐름이 있는 곳에서 사람이 군집 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나날이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해변에서 왜 사람들은 무리를 짓게 되었을까?
단순히 해산물의 채취가 용이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여겨졌다.
학설에 의하면, 모든 생물체의 시조는 바닷물에서 만들어진 코아세르베이트(coacervate)라고
하지 않는가? 이산화탄소가 많이 용해되어 바닷물의 수온이 많이 올랐을 때에, 형성된
최초의 생명체라지 않는가?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고향은 바다였으리라.
태어난 바다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이 지금까지 사람들을 해변으로 끌어들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미 씨! 저를 역사의 현장으로 안내해 주어서 고마워요. 저는
여태껏 이해가 잘 안 되는 게 하나 있거든요. 그게 뭔 줄 아세요?"
"제가 어찌 댁의 마음속을 헤아릴 수 있겠어요? 하지만, 대략 감은
잡히는데요. 왜 제가 과잉 친절을 보이는가하는 점 아니에요?"
"어이쿠! 어쩌면 사람의 마음까지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지 놀라울
뿐입니다. 혹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니라면, 제게 이야기해 주시지 않을래요?
기꺼이 귀를 기울여 듣겠습니다."
"민수 씨, 이제 유물은 다 둘러보셨죠? 보다 은밀한 얘기는 장소를
바꾸어서 하기로 해요. 자, 차에 오르세요. 행선지는 도청 앞에 있는 용지공원이에요."
차는 공단로를 지나, 삼성항공 부근에서 대방로를 타고 경남도청으로
향했다. 이십여 분이 지나자, 도청의 정문이 가까워졌다. 차는 도청 앞에서 좌회전을
하더니, 도청의 남서쪽 2 km 지점의 용지공원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공원으로
들어서니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이색적인 장면은 공원의 중앙에 아담한 크기의
용지호수가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일반 연못보다야 크지만, 호수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선뜻 동의할 수 없는 규모였다. 하지만, 호수의 수면은 맑고 깨끗했으며,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그와 정미는 호수를 향해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된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일정한 거리마다 심겨진 관상수들의 잎새를 스쳐 가는 바람결도 한없이 부드럽게만
느껴졌다. 호수의 수면에는 줄지어 유영을 하는 비단 잉어 떼들로 이따금씩 거품이
치솟곤 했다. 그는 모처럼 아늑한 기분이 되어 정미에게 막 뭐라고 말을 건네려고
할 때였다.
"저, 잠깐만요. 저기 가서 맛있는 아이스크림 두 개만 사 올게요."
"아니, 제가 다녀올게요."
"호호호 ! 그러실래요 ? 그럼 전 여기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을게요."
잠시 후에 그는 종이컵에 나선형으로 수북히 쌓아올린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 가져왔다. 이윽고 그들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는 가볍게 미소를 주고받았다.
밤이 되자 호숫가에 세워진 수은등이 은은한 불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호숫가에 조성된 솔숲에서 이는 청아한 바람소리마저도 한없이 감미롭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서서히 호수의 수면 위로 하늘에서 깨어난 별들이 교태를 부리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아주 끝내 주는데요? 아직도 저는 얼떨떨한 기분입니다.
오전 내내 일자리를 알아본답시고 정신 없이 회사를 뛰어다녔잖아요? 그런데, 오후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데이트를 하다니 황홀할 따름입니다."
"민수 씨! 아직도 저를 만난 게 실감나지 않으세요? 이제부터 왜
제가 댁을 여기까지 데려왔는지를 말씀 드릴게요."
"좋아요. 아까부터 궁금했던 일이었어요."
밤이 되면서부터 호수의 물빛은 더욱 그윽한 깊이로 신비함을 더해 갔다.
밤이 빚는 분위기로 말미암아, 하늘마저 태고의 신비 속에 휩싸인 느낌이었다. 이제
대부분의 하늘은 하얗게 깨어난 별들로 인하여,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정미는 잠시 고혹적인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는 여태껏 댁만큼 개성적인 인물을 만나보지는 못했어요. 어쩜
그렇게도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가 있나요? 저는 처음엔 몸이 불편한
환자인 줄만 알았거든요. 그런데, 대화를 나눠 본 순간에, 저는 그만 가슴이 얼어붙는
줄만 알았어요. 저의 마음을 뒤흔든 직접적인 요인은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끌어들이는
매력 때문이었어요. 그러한 매력의 근원이 무엇인지 저도 명확히 알 수는 없어요.
댁의 미모도 드물게 보는 미남형이지만, 그게 매력의 근원은 결코 아니었어요. 외모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묘한 심리적인 분위기가 매력의 근원이 아니었나
해요."
그는 정미의 얘기를 듣고 나서도 다만 얼떨떨할 뿐이었다. 상대가 그를
그렇게 여긴다는 것과 그가 실제로 그런 매력을 지녔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리라. 하지만,
상대가 그렇게 본다니까, 그로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민수 씨! 이 번에는 댁이 저를 따라 순순히 여기까지 온 내력을
설명해 주시겠어요?"
"그건 간단해요. 정미 씨의 솔직하고 활달한 성품이 저의 마음을
끌었기 때문입니다. 정미 씨처럼 활달한 성품을 지닌 여인을 이전에는 별로 보지
못했거든요."
밤이 주는 은은한 분위기와 함께, 솔바람 소리는 그윽한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공원의 여기저기에는 젊은 연인들이 밀어를 나누며 아늑한 분위기에 젖어들고
있었다. 그는 간간이 정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주 빼어난 얼굴은 아니지만,
얼핏 보기에도 비교적 잘 생긴 축에 속했다. 그는 자신에게 반문해 보았다.
'내가 일찍이 별님과 미란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 정도의 얼굴에도
미인이라며 감탄을 했으리라. 분명 정미의 얼굴은 별님이나 미란의 미모와는 견줄
수 없어. 하지만, 그녀의 얼굴도 쉽게 만날 수 없는 미모임에는 틀림이 없어. 아무튼
이러한 미인과 공원에서 밤 시간을 갖게 되다니, 묘한 인연이군.'
그는 정미를 대하면서부터 묘하게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내란
여인들의 미모에 우선적으로 혹할 가능성이 큰 거였다. 게다가 활달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을 대하고 보니, 어느새 친밀감마저 강하게 일었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자,
금방 씁쓰레한 감정의 기류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나 자신의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누구를 넘겨다보고
야단이야? 그렇지만, 정말 오랜만에 내 마음에 쏙 드는 여인임에는 틀림없어.'
한편 정미는 정미대로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처음 보는 빼어난 미남이야. 어쩜 이다지도 잘 생긴 사내가
다 있을까? 게다가 명문대학 출신에 과장 경력까지 지니지 않는가? 이만한 사내라면,
충분히 교제해 볼 만한 가치가 있어. 부모님이 작고한 내 처지에, 검사나 교수가
나의 배우자가 될 순 없잖은가 ? 설사 교제의 가능성이 있더라도, 내가 원하는 배우자의
직업은 그런 게 아니라구. 배우자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상대라야 해.'
정미는 어떻게든 그와 확실한 교분을 맺고 싶었다. 언뜻 머리에 떠오른
것이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이었다. 그러자, 용지공원 부근의 언양각이란 음식점의
상호가 눈에 띄었다. 정미는 그녀의 생각대로 공원을 떠나, 그를 곧장 언양각으로
데려갔다.
밤 8시 무렵이었다. 석쇠 불고기와 함께 참이슬을 곁들여 들면서,
그들은 마주 앉았다. 두어 순배의 술잔이 오간 뒤였다. 정미는 자신의 마음속의 얘기를
털어놓을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녀의 삶의 특징은 무슨 일이든 언제나 과감하고도
확실하게 진행하는 데 있었다. 한 번 결정한 일에 대해선 절대로 후회하거나 번복하지
않았다. 그와 마주 앉은 지금의 상황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 나름대로의
사람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안목에 자신감을 갖고
있는 편이었다. 그녀는 말하기에 앞서 거듭 신중하게 생각한 뒤에, 서서히 입을 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렇게 댁과 마주 앉게 될 줄은 몰랐어요. 우리
지금부터 친구가 되지 않을래요? 민수 씨와 저는 두 살 차이죠? 이 정도의 나이 차이라면
충분히 친구로 교분을 맺을 수도 있잖아요? 어때요?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어요."
"좋습니다. 저도 정미 씨를 친구로 사귀게 되어서 너무나 기쁩니다.
저를 이처럼 높이 평가해 주셔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정미는 술잔을 들면서,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가 일자리를
알아볼 만큼 알아본 뒤에, 일이 안 풀리면 그녀를 찾아달라고 했다. 설사 일이 잘
풀리더라도 그녀는 그와 계속 교분을 갖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
그가 그녀에게 조심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만약 제가 일자리를 못 구하면, 제게 소개해 줄 만한 일자리가
있어요? 혹시 그럴 만한 자리가 있으면 미리 소개해 주시면 안 돼요?"
"민수 씨! 제 얘기를 듣고 화를 내시면 안 돼요. 좋아요, 그럼
제가 말씀 드릴게요. 위도에는 저의 고종 오빠 내외가 살고 있거든요. 오빠는 마흔
살인데요, 위도에서 3층 짜리 횟집을 운영하고 있죠. 그런데, 부쩍 지난해부터 일손이
달린다며, 평생 형제처럼 함께 일할 사람을 찾는대요. 함께 일한다는 것은 단순한
고용원이 아닌 동업자를 찾는 모양이에요. 또한 바다에서 발동선을 끌며 어로 작업마저
함께 할 수 있는 동업자를 찾는댔어요. 어때요, 한 번 해 보지 않을래요? 만약 제가
남자였으면, 기꺼이 병원을 떠나서 바다를 찾았을 거예요. 아무래도 제겐 뱃사람의
피가 끓고 있나 봐요. 하지만, 저는 여자라 무엇을 하겠어요? 뱃사람들은 완력이
강해야 한단 말이에요. 만약 민수 씨가 오빠의 동업자가 된다면, 제가 댁에게 청혼할
수도 있어요. 조만간 저도 여기를 떠나서 격포에 가서 병원을 차릴 예정이에요. 정말이지
저는 마음만 먹으면 금방 실행에 옮기는 여자예요, 아시겠죠?"
"정미 씨! 만약 제가 정미 씨의 오빠랑 동업하지 않는다면, 저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이세요? 정미 씨의 활달하고 솔직한 성품이 제 마음에
들었어요. 정미 씨만 저를 괜찮게 보신다면, 우린 연인이 될 수도 있어요."
"우와! 모처럼 사내다운 면모를 보여 주셨군요. 좋아요, 이제부터
우리 연인이 되기로 해요. 대신 삶에 최선을 다하셔야 돼요, 아시겠죠? 그럼, 제가
댁의 차가 있는 성산 병원까지 모셔다 드리죠."
그는 성산 병원 주변의 여관에서 혼자서 외롭게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는 또다시 이력서를 들고 주위의 회사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회사의
분위기는 어디서나 한결같이 냉담하기만 했다. 도저히 이런 식으로는 일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방침을 바꾸기로 했다.
단독으로 회사 창업을 하든지, 아니면 동업자를 구해 회사를 세우는
일밖에는 없을 듯했다. 창업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해 봤을 때, 여전히
문제는 만만찮게 남아 있었다. 경제 한파를 맞아, 하루에도 쓰러지는 중소 기업체의
수가 수백을 헤아리지 않는가? 이 어렵고 힘든 때에 창업이라니? 창업을 하려면 명료한
사업 구상과 자금이 비축되어 있어야만 했다. 그는 현재의 자신의 처지로서는 도저히
꿈도 꾸지 못할 일이라고 여겼다. 그렇다고 대책도 없이 세월만 죽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래저래 가슴이 벌렁벌렁 뛰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세월은 거침없이 흘러, 창원을 찾은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날짜를
헤아려 보니, 12월 중순에 이르고 있었다. 그 동안에도 일자리를 구하러 창원을 거쳐,
진해, 마산, 부산에 이르기까지 집요하게 찾아다녔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희망은 엷어지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점점 자신감마저 상실되는 기분이어서, 영 죽을
맛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에, 문득 위도를 찾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모든
망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고 싶었다. 여태껏 자리잡지 못한 것은 현재의
직종이 자신과는 인연이 없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정미 씨를 찾아가자. 그녀한테 그녀의 오빠를 소개받기로 하자.
그리하여, 나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이제 뭘 망설이고 있겠는가? 가자!
가서 정면으로 한 번 맞닥뜨려 보는 거야.'
정미의 진료가 끝나는 오후 3시 무렵에 맞추어 그는 성산 병원을 찾았다.
정미는 아주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업무가 끝난 진료실로 그를 불러들였다. 예전처럼
둘은 창문을 향해 나란히 안락의자에 앉아, 창 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가을날의 호수처럼 파랗게 개어 있었다.
"민수 씨! 왠지 저를 금세 찾아오리라는 예감이 들었어요. 잘 찾아오셨어요.
제가 고종 오빠를 소개시켜 드릴 테니, 위도에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해 보세요. 일단
제가 소개시켜 드린 다음에는 마음이 변하시면 안 돼요. 또한 임의로 제 곁을 떠나서도
안 돼요, 알겠죠?"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떡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