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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4회
            섬과 나그네
                                                                                                                      손 정 모

                                                    4. 휘감기는 바람결

  미란은 잠시 이야기를 하다 말고, 텐트 속의 촛불을 응시했다. 바람 한 점 들지 않는 듯했지만, 촛불은 일정한 진폭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민수는 흘낏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밤이 깊어, 자정을 막 지나고 있었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여인의 얼굴은 빼어난 미모였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어떻게 가족과 가정을 단숨에 떨쳐 버릴 수 있었을까? 그는 일렁이는 촛불을 지켜보며 한동안 깊은 상념에 잠겼다.
  '세상살이가 복잡하다고 하더니만, 이처럼 골이 깊을 줄이야? 일시에 직장과 아내를 잃은 나는 대관절 뭐란 말인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처절하기만 이 심사를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다가, 문득 미란과 아내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격렬한 노여움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남편 알기를 어떻게 알기에 여자가 가정을 걷어차 버린단 말인가? 뭐니뭐니 해도 남편이란 작자들이 잘못되었기에, 여편네들이 도망을 가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게 평생을 기약하고 세운 가정(家庭)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적어도 가정이란 일평생의 꿈과 사랑을 실을 터전이 아닌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다가 그는 자신도 몰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이, 왜 이러세요? 남은 실컷 진정을 다해 속내를 다 털어놓고 있는데도, 고작 한숨이라니요? 지금까지의 제 얘기가 지루하게 들렸어요?"
  여인은 사뭇 얼굴에 불쾌한 기색을 띠며 따지듯이 그를 향해 말했다. 그는 일시에 가슴이 철렁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일단 자신의 속사정이 답답했을지라도 이것을 바깥으로 드러낸 건 분명 실수라고 여겨졌다. 헌데, 바로 이 순간이었다. 도발적인 감정의 기류에 휩싸이게 되었다. 차라리 정직하게 괴로운 심사를 털어 내놓고 하소연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 실직자인 주제에 내가 무슨 체면을 따지고 야단이야? 쌓이는 울화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느냐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의 내가 대관절 사람이기는 할까?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비참해졌을까?'
  어느새 그는 또다시 상념의 너울에 휩싸여 들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만만치 않았든지 여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키려고 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는 내친 김에, 텐트의 지퍼를 조금 열어, 맑은 공기를 받아들였다. 금세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여인은 눈빛을 빛내며 한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자신의 신세를 되돌아보면서 여인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텐트 속에서 마주 바라보니, 어쩐지 느낌이 새로웠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뭔가 이야기 거리를 막 풀어내려고 할 때였다. 여인은 소매를 걷어 부치더니, 불시에 오른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렸다. 그러면서, 격앙된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민수 씨 ! 지금 나하고 장난하자는 거예요? 나에게 진호와의 관계를 이야기해 보라고 해서 이야기를 했으면 뭔가 얘기가 있어야 하잖아요?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도 수시로 눈빛이 흐려지면서 과거의 기억이나 추스르고 말이에요. 내가 보건대 도무지 사내다운 기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최소한 남의 얘기를 들어주는 기본은 되어 있어야 하잖아요?"
  그는 흠칫 놀랐다. 여인에게 따귀를 맞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군대 시절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따귀를 맞아 본 기억이 없는 그였다. 서서히 심통이 뒤틀리면서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결코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마침내 그는 여인을 향해 곱지 않은 억양으로 말했다.
  "저 잠깐만요. 설사 미란 씨의 생각이 그렇다고 하여, 남의 뺨을 마음대로 때릴 수 있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던 일이에요. 저를 그렇게 만만히 보셨나요? 지금 당장 제게 사과를 하세요."
  "절대로 나는 그렇게는 못 해요. 나의 생각으로는 댁이 오히려 내게 사과를 해야 마땅하다고 봐요."
  "뭐라구요? 내가 뭘 잘못했기에, 당신한테 사과를 한단 말이오? 내 참 살다 보니까, 별 희한한 일도 다 보겠네."
  그의 말이 막 끝날 무렵이었다. 순간적으로 노여움의 빛이 여인의 얼굴에 잔뜩 실렸다. 여인의 얼굴에서 노여움을 읽은 순간이었다. 그는 왜 그런지 모르게 온몸에서 설움이 끓어올랐다. 일단은 끓어오르는 울분과 설움을 추스를 필요가 있었다. 텐트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텐트의 지퍼에 손을 갖다 대는 순간이었다. 등뒤로부터 여인의 손길이 느껴지면서 속삭이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렸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현실에 너무 큰 의미를 두지 말란 말이에요. 어차피 삶이란 환상에 불과한 장면이 아닐까요? 지나고 나면 꿈 같은 그리움만 남는 게 삶이 아닐까 싶어요."
  여인의 손은 서서히 그의 상반신을 어루더듬고 있었다. 그에게 느닷없이 여인의 향수 내음이 진하게 밀려들면서, 그의 성기가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코끝이 맵싸해지면서, 그의 전신이 서서히 흥분되려고 했다. 섬광과도 같은 위기감이 일시에 그의 전신을 파고들었다.
  
  마침내 함몰하기 직전의 상황에까지 이르렀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그는 여인의 몸에 서서히 손을 갖다 대려다 말고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면서 내심으로 생각에 잠겼다.
  '내가 가장 굴욕스럽게 생각하는 게 뭔가? 남에게 피상적으로 이끌림을 당하는 것이다. 나의 행동은 나의 판단 중추로부터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지, 남에게 이끌림을 당하다니? 지금 내가 취하려는 동작이 뭔가? 이건 본능적인 흐름이다. 아무리 본능적인 흐름일지라도 이것을 그대로 두어서는 될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여인을 가볍게 밀어내며 말했다.
  "잠깐만요. 왜 우리가 묘한 방향으로 이끌리고 있는지 저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어요. 부디 기분에 따라 움직이지 말았으면 해요."
  여인은 금세 싸늘한 눈빛을 띠면서 그를 향해 말했다.
  "참으로 답답해요. 무슨 사람이 그래요? 때로는 말보다 행동이 앞설 수도 있는 거잖아요? 반드시 행동마다 무슨 뜻을 새겨야만 하나요?"
  그는 일렁거리는 촛불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눈길을 돌려, 여인을 향해 말했다.

  "미란 씨! 만약 미란 씨가 저의 몸에 손을 대고 싶으면 제게 먼저 절을 하세요. 만약 그렇지 못하면 저는 당신의 접근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어요."
  "호호호! 매우 당당하시군요. 이제 좀 사내다운 면모가 보이네요. 좋아요. 지금 당장 원하는 대로 해 드릴게요. 텐트 안에서는 절을 할 공간이 못 되잖아요? 일단 바깥으로 나가시죠. 제가 당장 큰절을 올릴 테니까요."
  그는 말없이 텐트의 지퍼를 열고는 바깥으로 나섰다. 덩달아 여인도 바깥으로 나와서는 그를 마주 바라보며 섰다. 그는 흘낏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름에 가까운 달이 눈부신 빛살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렇게 밝은 달밤도 드물게 보는 느낌이었다. 여인과 그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인은 자세를 바로잡더니만, 이내 경건한 몸놀림으로 그를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여인의 절이 시작되자, 반사적으로 그도 여인을 향해 맞절을 했다. 여인이 한 번의 절로 끝내려고 할 때였다. 그는 두 번째의 절을 하기 위해 몸을 굽혔다. 여인은 움찔 놀라는 기색이더니 이내 맞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둘은 삼배(三拜)를 올린 뒤에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둘은 다가서자마자 힘껏 서로를 포옹했다.
  서로의 뺨이 맞닿으면서부터 불에 델 듯한 열기가 둘의 전신을 타고 흘렀다. 그는 달빛 아래 다시 한 번 여인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어디에도 견줄 데가 없는 빼어난 미모의 여인으로 느껴졌다. 그는 여인의 블라우스 자락을 살며시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이내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면서 덩그렇게 돌출한 여인의 탄력적인 젖무덤이 드러났다. 그는 여인의 뽀얀 젖가슴을 서서히 어루더듬기 시작했다. 이에 여인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두 팔을 돌려 그의 목을 껴안았다. 그가 여인의 상반신을 애무하자마자 여인은 점차 허물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여인은 여전히 그의 목을 두 팔로 껴안은 채, 서서히 숨을 할딱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여인을 텐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다시 찬바람이 드는 텐트의 지퍼를 닫고는 여인을 텐트의 바닥에 반듯이 눕혔다. 여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여인을 '큰 대(大)'자 모양이 되게 두 다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서서히 여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팬티에 닿으면서부터는 미란은 두 눈을 내리 감고는 가만히 숨을 추슬렀다.
  이윽고 알몸이 된 남녀는 서서히 서로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조금도 서두를 게 없는 듯했다. 풋풋하고도 향긋한 살 내음을 깊숙이 들이마시며 남녀는 서로의 살결을 조심스럽게 어루더듬었다. 촛불이 마지막으로 꺼지는 순간에, 마침내 남녀는 힘껏 몸을 벌려 상대를 깊숙이 받아들였다. 그에게는 참으로 오랜만에 접하게 된 여인의 속살이었다. 치를 떨 정도의 격렬한 절정감에 휘감긴 채, 둘은 숨마저 죽이고 서로를 얼싸안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 이제 주위는 죽음 같은 정적(靜寂) 속에 휩싸여 있을 뿐이었다.

  죽은 듯이 드러누워 있던 여인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왜 제가 댁의 뺨을 때렸는지 알겠죠? 저의 속마음으로는 어떻게든 민수 씨와 교접을 하고 싶었거든요. 가장 확실한 것이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었는데, 그 수단으로서 택한 게 그거였어요. 저는요, 민수 씨가 뺑 돌아서 저를 강간해 주기마저 바랐어요. 그만큼 저는 민수 씨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그와 여인은 옆으로 누워 서로를 포옹한 채,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눈빛을 빛내며 여인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일단 맺어진 인연에 대해서는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보다 따뜻이 여인을 감싸 안으며 여인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영원히 여인은 진호를 사랑할 거라고 했다. 그리하여, 힘든 가운데서도 반드시 새로운 가정을 이루겠다는 거였다. 비록 그녀 자신의 행동이 사회의 지탄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당당히 맞서겠다는 거였다.
  "이기적으로 들리겠지만, 분명 인생이란 자신을 위해서 사는 거라구요. 왜 남의 이목에 신경을 써야 하느냐 말이에요. 결코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일생에 한 번뿐인 자신의 삶을 구태의연한 굴레 속에서 살 이유가 없더라구요. 그렇게도 사회적인 시각이 중요한가요? 대관절 사회가 뭐냐구요? 어차피 사람들이 모여 일궈 내는 삶의 현장이 아니겠느냐 이 말이에요.
  진호의 신부로부터 진호를 빼앗아 온 것은 저의 이기심의 소산이지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만약 진호의 신부가 나만큼 진호를 사랑한다면 실력껏 나랑 겨루어 보자는 거예요. 어쨌건 진호를 붙잡고 있는 내가 어느 점에서건 신부보다 낫다고 보지 않으세요? 진호가 내 주위에 머문다는 건 분명히 내가 신부보다 낫다는 얘기예요."
  여인은 계속하여 열변을 토했다. 다른 것이라면 얼마든지 남에게 양보를 할 수도 있는 문제라고 했다. 하지만, 사랑만큼은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고 했다. 여인은 대들 듯이 그를 향해 사례를 들어가며 얘기했다.
  "저 있잖아요? 우리나라는 옛 날부터 유교의 문화권 속에 살지 않았어요? 그런 유교의 도리라면, 어찌 친족간의 살해가 이루어질 수 있느냐 말이에요. 예컨대, 왕위 찬탈에 관한 부분인데요. 왕위가 소중하다고 부모 형제의 목숨마저도 가볍게 빼앗아 버리곤 했잖아요? 그렇다면 왕위 찬탈자들이 윤리나 도덕 같은 교육을 못 받았을까요? 일반 백성들보다는 월등히 많이 인륜이나 도덕에 대해 공부를 했으리라고 믿어요. 안 그렇겠어요? 그네들이 소중하게 여긴 왕위란 것이 모든 인륜을 잠시 잊게 만든 것뿐이라구요. 제게 있어서 사랑이란 왕위와 마찬가지라구요. 아시겠어요?"
 
  그는 확고 부동한 여인의 가치관에 숙연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생각에 여인은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개성 있는 삶을 산다고 여겨졌다. 개성 있는 삶이라 ? 남의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 넣으면서까지도 자신의 사랑을 내세우는 것이 진정한 사랑일까 ? 분명 그녀의 삶을 일방적으로 어떻다고 말하기에는 곤란한 면이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녀의 삶에 대해 어떤 종합적인 판단을 내리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의 생활 양식을 분석해 봄으로써, 자신의 삶에 참고로 삼고 싶을 따름이었다.
  "미란 씨! 그런데 왜 저와 육체 관계를 가지고 싶었죠? 저는 아직도 그게 완전히 이해가 안 되거든요."
  미란은 다시금 손을 뻗쳐 그의 사타구니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꼭 말을 해야만 하나요? 우선은 저의 심사가 너무나 괴로워서 힘들었다는 게 첫 번째 이유라면 이유예요. 괴롭고 울적한 심사를 어딘가에 하소연하기는 해야겠는데 마땅한 곳이 없다면 어떻겠어요? 가슴이 송두리째 흔들려 터져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제겐 댁에게 구조되어, 처음으로 눈을 뜬 순간에 전율할 듯한 강렬한 인상을 받았어요. 마치 며칠째 갈증에 시달려 사막을 헤매다가 눈부신 오아시스를 만난 듯한 느낌이었어요. 눈을 뜬 그 순간에 나는 생각했어요. 나는 이 남자에게 몸을 주어야 되겠다고 말이에요. 꼭 몸을 주는 데 이유가 있어야만 되는 건 아니죠? 하지만, 제가 댁을 처음 본 순간부터 솔직히 반해 버렸다는 말이 진심일 거예요. 진호도 꽤나 미남이라고 여겼지만, 댁을 본 순간에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요. 어쩜 세상에 이렇게 잘 생긴 남자가 다 있을까하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아름다움의 인식이 모든 사랑의 근원이 아닐까요?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돋보였구요. 이래저래 저는 마음이 뿅 가 버린 상태가 되고 말았죠. 저는 지금도 댁을 사귀게 된 걸 진심으로 축복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만 하면 대답으로 충분한가요?"
  그도 어느새 손을 뻗어 여인의 젖가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래, 참으로 세상을 산다는 게 묘하다는 느낌이 들군요. 이렇게 탄력 있는 여인의 젖가슴을 오랜만에 만지게 되니 우선 살 것만 같아요. 물론 매춘부들의 유방도 있겠지만 그런 데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어요. 왜 남자가 여자를 찾을까요? 그냥 단순히 육체적 쾌락만을 위해 여자의 알몸을 만질까요? 나의 생각으로는 결코 그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요. 창녀를 안아본 경험은 없느냐구요? 나도 남자라구요. 본질적으로 수컷들은 암컷을 찾기 마련이지 않겠어요? 왜 없었겠어요? 나도 창녀를 찾아 골목을 헤맨 적이 많아요. 하지만, 창녀와의 교접의 뒤끝은 언제나 진한 공허감으로 가슴속에 남곤 했어요. 마치 갈증 난 사람이 소금물을 마신 경우와 같다고나 할까요.
  미란 씨! 이왕에 제게 몸을 열어 주었으니, 오늘밤은 오래오래 저와 대화를 나눠주셨으면 해요. 어? 쉽게 승낙을 해 주시네요. 너무나 고마워요."
  

  둘은 어느새 마음이 하나로 일치되었다. 이 아까운 밤을 그냥 잠으로만 보낼 수는 없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예 사랑을 나누며 밤을 지새우리라고 서로들 작정을 했다. 둘의 마음을 알았던지 촛불마저도 마지막으로 연기만 남기고는 꺼져 버리고 말았다.
  둘은 막 사춘기를 맞은 남녀들처럼 새삼스레 마음이 전율과 같은 흥분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둘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앉아 서로를 마주보며 껴안았다. 따스한 체온이 전신을 부드럽게 적셔 주고 있었다. 그에게는 순간적으로 '이전에 내게도 이렇게 감미로운 때가 있었던가?'하고 생각이 들었다.
  묘하게도 미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진호와의 교접 때와는 또 다른 감흥이 치솟는 거였다. 이게 참다운 사랑인지 아니면 지극한 일탈(逸脫)의 끝인지? 뭐라고 선명히 선을 그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여태껏 맛보지 못했던 감흥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는 여인을 향해 가만히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이제 황량한 겨울의 극점에서 참다운 지기(知己)를 만난 느낌입니다. 미란 씨! 오늘 이후로는 죽을 때까지 변함 없는 친구가 되기를 원해요."
  "민수 씨! 저도 마찬가지예요. 저의 영원한 친구가 되어 주신다면 저도 더 바랄 게 없겠어요."
  "미란 씨! 우리가 느닷없이 이렇게 맺어지고 보니, 세상이 더욱 복잡하게 느껴지네요. 하나만 묻겠는데요, 미란 씨는 세상살이가 어떻다고 느껴져요?"
  "다소 황당한 질문이기는 하지만, 별로 어려운 질문은 아니군요. 제가 보기로는 결코 만만치는 않는 것 같아요.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살아갈 충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저의 관점으로는 산다는 자체가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느껴져요. 그런데, 댁의 관점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막상 제가 대답하려니까 입이 안 떨어지네요. 저도 삶 자체에 대해서는 무한히 살아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삼라만상 중에서 사람만큼 신비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했지만, 저는 생명의 근원은 전자(electron)라고 말하고 싶어요. 진공에서의 전자의 속도는 빛 속도와 같거든요. 쉽게 말해, 1초 동안에 지구의 둘레를 7바퀴 반을 도는 속도라구요. 전자 자체는 색도 없지만, 전자의 운동 에너지가 줄어들 때엔 빛을 내뿜거든요. 오늘날 우리가 컴퓨터니 인터넷이니 하는 등의 문화 혜택을 누리는 근원이 뭐겠어요? 결국은 전자의 파동 현상을 이용한 전기 신호의 해석의 소산이 아니겠느냐 하는 점이에요. 내가 너무 어려운 말을 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하여간 모든 생명 현상의 기저에는 반드시 전자들의 움직임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점이에요."
  미란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그를 향해 말했다.
  "민수 씨! 솔직히 나에게 전자니 뭐니 하는 등의 얘기를 해 봐야 알아들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대충 감으로 짐작할 수는 있어요."
  
  그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왜 내가 굳이 미란과 교접을 해야만 했던가? 교접을 않고서는 친구가 될 수 없었던가? 내가 그렇게도 여인들의 알몸에 걸신들린 사람이던가? 혹시 미란이 나와의 교접으로 가정에 풍파를 일으키기라도 한다면 어쩔 것인가? 지금의 관계가 나중에까지도 계속 좋은 관계로 지속될 것인가?'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혼돈의 세계로 마구 치닫고 있었다. 민수는 머리를 들어 생각을 하다가 문득 입 밖으로 불쑥 내뱉고 말았다.
  "왜 우리가 교접을 했죠? 교접을 하지 않으면 친구가 될 수 없었나요?"
  그의 말이 막 끝나는 순간이었다. 미란의 얼굴에는 형언할 수 없는 노여움이 잔뜩 서려 있었다. 그러면서, 약간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듯도 했다. 그는 순식간에 불안한 마음이 일며 자세를 가다듬으려고 했다. 또 뺨을 얻어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어,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이 번에는 그게 아니었다. 여인은 땅바닥이 꺼질 듯이 길다랗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어두움 속이라 세세하게 바라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흐느끼는 느낌이었다.
  슬그머니 그의 머릿속으로는 뭔가 분위기가 묘한 쪽으로 바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새어 나온 말로 인하여, 둘 사이의 분위기가 엉망진창이 된 느낌이었다. 분위기 쇄신을 해야만 하겠는데 마땅한 방법이 그에게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 때였다. 처연하면서도 다소는 울먹울먹한 음색의 목소리가 그의 귓전에 휘감겨 들었다.
  
  "왜 금세 후회가 되세요? 어찌 나 같은 잡년과 관계를 가졌는지 죽도록 억울한가요? 이러한 말을 꺼낸 의도가 뭔지 시원하게 좀 털어놓아 보세요. 그렇지

 않으면 울화가 쌓일지도 몰라요."
  그는 일단은 손을 뻗어 여인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흥, 이 손 놓아요. 내 손을 잡는 의도가 뭐예요? 혹시 나로부터 뺨을 얻어 맞지나 않을까 싶어 예방하는 거예요, 지금?"
  그는 어이가 없어, 일단은 껄껄거리며 웃고 말았다. 헌데, 바로 이 순간이었다. 섬광처럼 여인의 손길이 허공을 가르더니 연거푸 두 차례씩이나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가 느끼기에도 이 번에는 정말 뺨이 따가워서 화끈거릴 정도였다. 껄껄거리던 웃음소리를 뚝 끊은 채, 그는 미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미란은 그의 턱밑에까지 바싹 입술을 갖다대고는 말했다.
  "왜 좀더 웃지 그쳤어요? 사내란 게 아무래도 미덥지가 않아요. 나는 마음이 심란해서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지경인데, 약 올리는 거예요, 지금? 아이, 신경질 나!"
  그는 참으로 난감했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꼴이 되어,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헌데, 기습적인 따귀가 오히려 그의 오성을 자극했다. 그는 살며시 미란을 옆으로 밀치고는 탄성을 질렀다.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공감대의 형성이 가장 큰 원인이었어. 그걸 왜 내가 깨닫지 못했을까?"
  그는 미란을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요. 엉뚱한 이야기로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요. 근데 걸핏하면 뺨을 때리는 건 좀 고치도록 하세요. 그건 영 안 좋아요."
  "걸핏하면 때리다뇨? 댁이 맞을 행동을 했기에 맞았지 안 그래요? 하여간 알았어요.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여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그를 바라본 뒤에 말을 이었다.
  "그리고, 민수 씨가 조금 전에 말씀하셨죠? 바로 그거예요. 공감대의 형성 때문이에요. 공감대를 형성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요. 성감을 함께 나누는 것만큼 확실한 것도 별로 없겠죠? 제가 보기로는 민수 씨도 바람기가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러기에, 우리가 쉽게 어울릴 수 있었잖아요? 제 생각으로는 이왕 우리가 이런 관계를 맺은 이상, 더 따지지 말았으면 해요. 앞으로 우리가 좋은 관계를 지속해 나간다면, 우리는 인생을 곱으로 살 거예요. 왜냐구요? 민수 씨가 일궈 나가는 삶이 하나의 세계라면 저의 세계가 또 하나 있잖아요? 각자의 삶에 충실하다가, 때대로 한 번씩 만나 서로의 세계를 교환하자구요. 그렇게만 해도 우리는 두 배의 삶을 사는 게 아니겠어요?"

  그는 새로운 관점에서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떡거리면서 여인을 향해 말했다.
  "우린 정말 만나야 할 사람들이었던가 봐요. 미란 씨가 생각하고 느끼는 모두가 나와 비슷해요. 그래, 우리는 절대 앞으로도 흔들림이 없는 친구가 되자구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둘은 어느새 따뜻이 포옹을 하고는 나란히 자리에 누웠다. 참으로 어디서 이런 지기를 얻었을까 싶은 마음들이었다. 그는 이제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조용히 다음 날의 일정을 떠올렸다.
  '이제 한 사람의 친구를 얻었으니, 내일은 여기를 떠날 차례군. 그래, 뭔가 하나의 깨달음 내지는 소득이 있어야지. 암, 그래야 하고 말고.'
  그는 문득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다. 내일 진양호를 떠나면 갈 곳이 어디란 말인가? 어느 곳에서 그가 오도록 목을 빼어서 기다리고 있겠는가?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일단은 직장부터 구해야 할 텐데 어디 가서 직장을 구하나? 어디 그럴 만한 중소 기업체를 찾아 이력서를 내밀어 봐야지. 직장이 있고 나서 삶이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일할 곳을 찾아야 돼.'

  그는 머릿속으로 내일의 일정을 떠올리며 차분히 상념에 잠겼다. 내일은 아무래도 신흥 도시로 규모가 큰 창원을 더듬어 봐야 할 것 같았다. 창원시의 외곽 지역에는 전자 제품을 다루는 중소 기업체들이 즐비한 터였다. 그가 여태껏 작성해 놓은 이력서를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대략 백여 통 가량은 족히 되었다. 이것들을 들고 차례차례로 중소 기업체를 방문할 작정이었다.
  진주까지 내려오는 동안에는 도무지 마음의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어디에도 이력서를 내밀지 못하고 말았다. 진양호에 도착한 이후로 별님도 만났고, 미란도 만났다. 이들 두 여인이 던져 준 힘이 그에겐 작지 않았다. 이제는 다소 좀 힘이 들더라도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인생이니 꿈이니 하는 것도 다 일자리가 있을 때에 하는 소리가 아닌가? 당장의 일자리를 찾아 내일은 동쪽으로 떠나야만 하는 거다. 사실상 창원으로 찾아간댔자, 반드시 취업하리라는 보장도 없잖은가? 원래 중소 기업체란 빈궁하지 않던가? 과거에 내가 중소 기업체의 사람들을 안중에도 두었던가? 그처럼 하찮게 여기던 중소 기업체를 찾아 내가 길을 나설 줄이야?'

  여인의 손길은 쉼 없이 허벅지와 사타구니를 더듬으며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도 덩달아 미란의 유두에 입술을 갖다 대며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삶이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도전의 한 형태이리라. 내가 허우적거릴 때에는 다른 사람들도 허우적거릴지 모르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건강한 신체를 타고났다는 데에 항상 감사를 드리며 살아야지, 안 그런가? 내일의 일정은 내일에 따르기로 하고, 오늘밤은 미란과 함께 태우는 거다. 설사 오늘밤에 내가 여기에서 동사(凍死)를 한다고 하더라도 후회할 게 뭐가 있는가? 하찮은 건 다 털어 버리는 거다. 모든 쓸데없는 것은 다 바람결에 날려 버리는 거다, 알겠어? 그리고, 현실은 현실대로 소중하게 받아들여야지. 현실에 충실하고, 가능한 한 잡념은 버려야지.'
  그는 마음을 다잡자마자, 보다 미란에 대해 적극적인 애무를 시작했다. 이윽고 애무의 강도가 더해지면서 서서히 여인의 교성(嬌聲)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여인은 마침내 온몸을 뒤틀며 흥분에 휩싸인 채 비릿한 신음을 마구 내뱉고 있었다. 여인도 그의 마음을 읽었음인지 적극적으로 사내의 알몸을 애무해 대기 시작했다. 이제는 온통 육체적인 애무로 인해 환락적인 분위기만이 텐트 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는 행위를 하면서도 이것은 마치 술꾼이 술을 마시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오늘밤은 모든 과거를 불식시킬 정도로 탐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뜨거운 숨결인 듯, 가는 한숨인 듯한 입김들이 오가며 새벽을 맞았다.
  그가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새 새벽 4시 무렵이었다. 이제 확실히 잠은 달아나 버린 상태였다. 이 때부터는 서로들 단정히 옷을 갖추어 입기 시작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단정한 옷맵시를 갖추고 마주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조금 전의 환락적인 것과는 확연히 달라진 느낌이었다. 그럴 수 없이 경건한 분위기가 실내를 뒤덮기 시작했다. 여인이 자신의 미래에 대한 애환을 호소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여인은 눈빛을 빛내며, 그를 향해 그녀의 미래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미란에게 제일 괴롭고 근심스러운 것은 그녀와 진호의 미래였다. 한 마디로 암담한 현실이요 불투명하기 그지없는 미래였다.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감도 가질 수 없는 답답함이 수시로 목을 죄어 왔다. 미란은 시간이 나는 대로 자신의 처지를 되새김질해 보았다.
  두 자식에 대한 짙은 연민이 없지 않지만, 과감히 무시해 버리기로 했다. 그 애들 때문에 자신의 행복을 단념할 수는 없는 터였다. 보다 나은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까짓 남편이나 애들은 무시해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시로 애들의 얼굴이 슬쩍슬쩍 눈앞에 떠오르는 것조차 막을 수는 없었다. 한 때는 애들의 얼굴이 떠오를 적마다 가슴 한편이 섬뜩하도록 저리곤 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를수록 점차 강도가 약해지는 느낌이었다. 근래의 기억으로는 애들의 얼굴은 고사하고 이름마저도 잊어 버릴 지경이었다. 여인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산다는 게 뭔지? 왜 내가 애초부터 진호 같은 사내를 남편으로 맞아  들이지 못했을까? 이제라도 내게 밝은 기운이 뻗친다면 원이 없으련마는.'
  여인은 그를 대하면서 자신의 심정이 심하게 흔들린다고 느꼈다. 이럴수록 그녀 자신의 위상을 제대로 정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나는 이 사내를 왜 여기에서 만나 몸과 마음을 주게 된 걸까? 이 사내가 자꾸만 나의 마음을 끄는 근원이 무엇일까? 혹시 나중에 내가 이 사내의 덕이라도 보려는 걸까? 내가 이 남자를 언제 봤다고 이렇게까지 마음이 흔들렸을까? 나는 원래부터 정조 관념이 헤픈 여자였을까? 누가 뭐래도 그건 절대로 아니야. 아니라면 아니지 누가 토를 달겠는가? 아, 어쩌다가 내 마음이 이렇게 마구 뒤흔들리게 되었을까?'
  여인은 그를 향해 방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달 한 번씩 만나기로 해요. 만나는 장소와 시각은 상황에 맞춰 정하기로 하자구요. 왜 한 달에 한 번씩이냐구요? 이렇게 몸과 마음으로 교류를 했는데, 어찌 단순한 친구이기만 하겠어요? 우리의 특별한 연분을 길이 지켜 나가려면 아무래도 자주 만나야 되겠죠? 이제는 어쩔 수 없어요. 혹시 댁이 절 탐탁지 않게 여길지라도 이제는 저의 부탁을 들어주어야만 할 거예요."
  여인은 상당히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확신에 찬 단정적인 말소리엔 범접할 수 없는 위엄마저 서려 있는 듯했다. 미란은 한 달에 한 번씩은 만나서, 서로의 삶을 진지하게 주고받자고 그에게 제안했다. 그의 생각도 여인의 생각과 마찬가지였다. 여인과 매달 만나서 삶을 관조할 수 있다는 건 커다란 즐거움일 수도 있었다. 여인의 제안에 반대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기꺼이 여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서서히 바깥이 밝아지고 있었다. 흘낏 시계를 보니, 오전 다섯 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날밤을 지샌다더니, 참으로 둘은 밤샘을 하고 만 거였다. 밤샘을 할 정도로 할 이야기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요인은 그저 함께 있는 것이 가슴 설레었다는 점이었다.

  마침내 둘은 텐트에서 빠져 나와 호반에 나란히 섰다. 차가운 호수의 바람결이 만만치 않았다. 그와 여인은 나란히 손을 맞잡은 채, 호수의 물결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이제 여기서 헤어지면 한 달 후에 어떤 모습으로 만날지 두려웠다. 착잡한 심사를 가눌 수 없는 시점이기도 했다. 마냥 이대로 굳어서 차라리 화석이 되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기도 했다. 호수의 바람결에 머리카락을 적시며 한동안 말없이 서 있을 때였다.
  미란이 먼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민수 씨, 힘 내세요. 사내가 그 만한 일로 풀이 죽어서야 되겠어요? 어려울 때마다 심호흡을 열심히 하는 거예요.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결국은 노력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고 봐요. 만약에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없다고 할지라도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핸드폰 번호 좀 알려 주실래요? 그리고 제 번호도 적어 둘래요? 제게 이야기하고 싶을 때에는 언제나 망설이지 말고 전화 주세요. 자, 그럼 다음에 봐요."
  말을 마치자마자 크게 손을 흔들더니, 여인은 이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여인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급격히 마음이 공허해져 오며, 그의 가슴속으로 외로움이 치솟아 올랐다. 갑작스럽게 가슴이 하얗게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휙휙거리며 달려들던 바람결이 제법 매섭게 얼굴을 할퀴곤 했다. 피부에 알싸한 느낌이 들 정도로 피부에 찬바람이 느껴졌다. 그는 갑작스럽게 세상 속에서 혼자가 되어 버린 느낌에 휩싸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이 세상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데 자신만 소외당한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자신의 텐트를 향해 걸어갔다. 텐트에 이르자마자 손을 뻗쳐 텐트를 접기 시작했다. 금세 텐트를 접고는 잘 말아서, 승용차의 트렁크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말끔히 잘 정리되어 있었다. 이제는 진양호의 호반을 떠날 만반의 준비가 된 셈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채근을 했다.
  '그래, 이제는 진양호를 떠나 현실 세계에 부딪쳐 보는 거다. 천하에 어려운 일이 있을지라도 사지 육신이 멀쩡한 내가 아닌가? 때가 좀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인생 공부를 한다고 치자. 예로부터 철 덜 든 사람이 공부를 하게 되는 법이라고 했어. 내가 너무 늦게서야 세상이 험하다는 걸 알게 된 거야. 지금이라도 내게 주어진 현실을 고맙게 받아들이고 노력해 봐야지. 세상의 흐름이 항상 나의 편이 될 수는 없다는 것도 인정해야지. 이제 미련 없이 진양호를 떠나는 거다.'

  잠시 후에, 그는 승용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는 서서히 차를 몰기 시작했다. 진양호를 떠나 강변 도로를 타고 천수교를 지나 새벼리 절벽 아래를 지났다. 옛 날에 진주에서 동부 경남으로 빠져나가는 유일한 출구이기도 한 길이었다. 절벽 아래로는 파랗게 굽이치는 남강물이 무척이나 이채로웠다. 절벽을 통과하여 개양 검문소를 지나, 곧장 남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창원으로 차를 몰았다.
  대략 한 시간이 지났을까? 차는 창원시의 시내 중앙로에 진입하고 있었다. 차도의 우측에 차를 정차시키고는, 잠시 도로 지도를 펼쳐 들었다. 가야 할 곳은 중소 기업체가 비교적 많이 자리잡고 있는 성산동 일대였다. 그는 금세 위치를 파악하고는 차를 돌려 길을 찾아 나섰다.
  성산동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에 전자 계열의 중소 기업체가 난립하여 있었다. 차를 아예 한적한 골목 귀퉁이에 주차를 시키고는 가방을 챙겨 들고  나섰다. 가방을 열어 보니, 공을 들여 쓴 이력서들이 삐죽이 머리를 내민다. 전신에 한기가 서리면서 가슴이 묵직해져 왔다.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계는 오전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회사를 찾아보려면, 최소한 오전 9시는 넘어서야 할 일이었다.
  '어이쿠, 그 동안에 시간을 어떻게 보내지? 우선 식당에 들러, 아침 식사를 하고 볼 일이야. 그리고, 나서 방문 순서를 정하고 순서에 따라 이력서를 내미는 거야. 이 나이에 이력서를 들고 쫓아다닐 줄이야?'
  정갈해 보이는 식당을 찾아, 우선 설렁탕 한 그릇을 시켜 먹었다. 식사를 하면서 생각하니, 식사도 시키지 못한 채, 미란을 떠나보낸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지난 사실을 떠올려 보아야 하등 그에게 이로울 게 없었다. 식사를 끝내고 난 뒤에, 신문을 사 들고는 승용차 안으로 들어섰다.
  막상 신문을 펼쳤지만, 그에게 신문의 활자들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대충 사진들을 건성으로 보아 넘기면서 신문의 내용을 추측하는 정도로 그쳤다. 그것도 잠시였을 뿐. 시간은 한참이나 느릿느릿하게 흐르고 있을 따름이었다. 자꾸만 그의 눈이 감기려고 했다.
  '아, 어디 가서 좀 눈이나 붙여 볼까? 나중에 잘 때 자더라도 지금은 잘 때가 아니잖아? 전신을 파고드는 피로감과 불안감 때문에 미쳐 버릴 지경이야. 아, 시도도 해 보기 전에 이렇게 정신적인 고뇌에 휩싸이다니?'
  민수는 쏟아지는 잠을 극복하기 위하여, 억지로 팔을 앞뒤로 흔들어댔다. 그랬어도 잠은 좀처럼 달아날 것 같지가 않았다. 고개도 흔들고 손바닥으로 배도 마구 쳐 대었다. 그래도 효력이 없기에, 이 번에는 뒷머리를 등받이에 대고 자꾸만 부딪치면서 소리를 내질렀다.
  "아, 왜 이렇게 힘들어, 엉? 왜 자꾸 잠까지 나를 덮치지 못해서 안달이냐구? 참으로 미쳐 버리겠네."

  이 때였다. 차의 유리창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창졸간에 놀라 신속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랬더니, 20대 후반의 여인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창유리를 두들기며,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저씨! 어디 아프세요? 구급차를 불러다 드릴까요? 길을 걷다가, 하도 아저씨의 몸 동작이 격렬하기에 들여다본 것뿐이에요."  
  말을 듣고 보니, 잠을 쫓으려고 버둥거렸던 동작들이 이상하게 비쳤음직도 했다. 그는 당혹스런 모습으로 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거 오해를 하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몸에 피로가 쌓였기에, 어떻게든 풀어 보려고 취한 몸놀림일 따름입니다."
  "그래요? 정말 아무 문제가 없겠어요? 혹시 돈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여인은 170 cm 가량의 키에, 서글서글한 용모를 지닌 아리따운 아가씨였다. 여인은 손가방으로부터 명함을 한 장 꺼내더니만, 그에게 내밀었다. 건성으로 힐끗 명함을 들여다보다 말고, 그는 놀란 눈으로 여인을 다시 쳐다보았다.
  '내과 전문의, 의학박사 황정미'라는 명함의 글귀는 충분히 사람의 주의를 끌기에 족했다. 하지만, 현재의 그에겐 여인이나 여인의 명함에 신경을 쓸 만한 여유가 없었다. 대충 명함을 호주머니에다가 챙겨 넣고는 간단히 여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여인도 이내 손을 흔들며, 쾌활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기 명함에 전화번호가 있으니, 나중에라도 연락하실 일이 있으면 연락 주세요. 그럼, 볼 일 잘 보세요."
  어쩌다가 여인이 나의 차 옆을 지나게 되었을까하고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하여, 고개를 들어 골목을 내다보다가 그 원인을 금방 깨닫게 되었다. 여인의 근무처로 명시된 '성산병원'이 바로 지척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여인의 일은 찰나간의 일로 금세 잊혀져 버렸다. 또다시 취업에 대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으면서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식사를 마치고는 오전 9시가 될 때까지 차내에서 눈을 감고 기다렸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불안에 떨며, 그렇게 오전 9시까지 초조하게 보냈다. 마침내 오전 9시가 되자 가방을 챙겨 들고, 동림전자로 향했다.
  오전 9시 30분 무렵에야, 담당 부장을 만날 수 있었다. 부장은 상당히 짜증이 실린 표정으로, 그의 이력서를 훑어보았다.
  "아니, 이 좋은 직장을 왜 그만 두었어요? 중소 기업체에서의 급료는 대기업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열악해요. 이력서에 적힌 연락처로 조만간 연락 드릴게요. 제가 이사님께 말씀은 드려 보겠지만, 워낙 어려운 시기라서 취업은 사실상 힘들 거예요. 안녕히 가세요."
  일단 각오는 했지만, 이렇게 싱겁게 내쫓김을 당하고 보니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다음은 제법 알려진 홍성전자를 향해, 부지런히 길을 재촉했다. 오전 10시 무렵에, 생산부장인 최인국을 만나 면담을 했다. 50대 중반의 최 부장은 그래도 이력서를 관심 있게 읽어보는 흉내는 내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최 부장은 쓰고 있던 금속제 안경을 벗어들며, 난감한 듯이 입을 열었다.
  "우리 회사는 글자 그대로 중소 기업체일 따름입니다. 강 과장님과 같은 탁월한 재능을 갖춘 분을 모실 여건이 못 되어 죄송합니다. 혹시라도 이사님께 말씀 드려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곧바로 연락 드릴게요. 늦어도 다음 주까지는 꼭 연락 드릴게요. 그럼, 잘 살펴 가십시오."
  또 하나 살갗에 금이 가며 살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랬어도, 오후 2시까지 창원에서만 무려 십여 군데의 회사를 더 들렀다. 하나같이 검토해 보고 다음 주까지 연락해 주겠다는 거였다. 전신에서 기력이 다 흩어지는 느낌이 들며, 도저히 몸을 가눌 길이 없었다. 누가 건드리지 않더라도 스스로 나뒹굴 지경이 되어 버렸다.

  이제 정말 환자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이 때였다. 문득 성산병원의 여의사인 황정미를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직도 그녀가 건네준 명함에는 당당한 위풍이 서려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차내에서 몸을 뒤로 눕혀, 병원을 어떤 구실로 찾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럴 듯한 명분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병원을 한 번 찾아 달란다고 해서, 방문한다고 하기에는 뭔가 쑥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참으로 머리가 번쩍 띄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실의에 푹 젖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찾아가는 거야. 이 나이에 무슨 가식을 떨고 있을 필요는 없잖은가 ? 심신이 피곤할 때, 혹시라도 아는가 ?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길이 열릴지 그 누가 알겠는가 ? 일단은 나의 처지가 너무나 고달프고 착잡하니까, 기분 전환할 겸 찾아가 보는 거다.'
  그가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스르르 눈이 감기려는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누군가 자동차의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눈을 치뜨며 바깥을 노려보았다. 그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차창 밖에는 황정미의 얼굴이 미소를 띤 채,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꿈을 꾸는 것은 아닌지 의아스럽게 여기며 차의 문을 열었다.
  "이리 나오세요. 아무래도 얼굴에 깊은 수심이 드리워진 게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날 것만 같아요. 마음의 근심을 잠시 잊고, 일단 저를 따라 병원으로 갈래요? 강제로 환자로 만들어 진료비를 받을 생각은 아니니까, 걱정 말고 따라오세요."
  말을 마치자마자, 여인은 경쾌한 걸음걸이로 병원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어느새 그의 발걸음도 여인의 뒤를 부지런히 좇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