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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3회
           섬과 나그네
                                                                                                                          손 정 모

                                                    3. 호반의 텐트

  서슬 퍼렇게 휘감기는 달빛이었다. 청아한 음향의 솔바람은 솔숲에 연신 물굽이를 치며 윙윙 울어대고 있었다. 솔바람이 스칠 적마다 서늘한 기운이 점차  뼛속까지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민수는 여전히 솔숲에 몸을 숨긴 채, 쌍안경을 들어 폐가를 주시하고 있었다. 50대 초반의 중절모를 쓴 사내가 다가오는 다섯 사내를 향해 슬며시 손짓을 했다. 폐가의 무너진 담장 밖으로 다섯 사내가 금세 우루루 몰려 섰다. 사내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상처 입은 야수의 잔혹스러운 눈빛을 닮아 있었다. 잠시 후에 흰색의 중절모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사내들의 앞에 우뚝 섰다.

  그가 흘낏 시계를 보니, 밤 8시 무렵이었다. 그는 세찬 바람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볍게 몸을 떨어댔다. 그러자, 그는 청색 점퍼를 벗고는 작은 손가방으로부터 면티를 꺼내어 입었다. 그리고는 다시 청색 점퍼를 그 위에 받쳐입었다. 그 정도면 완전할 거라며 자신의 옷매무새를 세심하게 점검했다. 그런 뒤에, 살짝 쌍안경을 내리고는 몸 풀이 동작을 취해 보았다. 날아갈 듯한 상쾌함이 전신을 엄습해 왔다. 그는 이내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으음, 이 정도면 완벽한 준비가 될 거야. 이제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의연히 대처해 나가기만 하면 돼.'
  그는 가쁜한 차림새로, 다시 쌍안경을 들어올려 폐가를 바라보았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였다. 어느새 폐가 주위로는 한 대의 대형 버스가 와 머물러 있었다. 버스 주위로는 언제부턴가 32 명에 달하는 남녀가 무질서하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 때였다. 밤 공기를 가르며, 저음의 힘이 실린 중절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리가 좀 떨어진 편인데도 밤이라서 그런지 그의 귓전으로 생생하게 흘러들고 있었다.
  "아니, 뭣들 하고 있어? 사람들을 편한 장소로 데리고 가서 일을 진행시켜야 할 게 아냐?"
  "아, 네! 알았습니다. 즉시 저쪽으로 데리고 가서 진행할게요. 자, 다들 주목! 이렇게 웅성거리지만 말고, 저를 따라 와 주세요."
  서른 둘에 달하는 남녀는 일제히 갈색 양복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중절모는 연이어 네 명의 사내를 향해 뭔가 작업 지시를 하고 있었다. 곧바로 네 사내는 버스 안으로 들어가 뭔가를 꺼내 들고는 남녀의 대열로 합류했다. 그는 잔뜩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서서히 쌍안경의 각도를 바꾸었다. 그에게는 아무래도 다섯 사내들이 중절모의 부하들로 여겨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처럼 공손히 지시를 따를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이내 시선을 돌려, 32 명의 남녀들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폐가로부터 가까운 호숫가의 널브러진 갈대 숲 부근에서였다. 일행은 갑자기 동작들을 멈칫거리면서, 여덟 명씩의 네 무리로 흩어지고 있었다. 신속한 몸놀림을 볼진대, 이전부터서도 줄곧 이러한 일에 길들여져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네 사내가 각각 여덟 명씩의 인원을 인솔하고는 다시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이 번에도 여전히 신속한 몸놀림들이었다. 그에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는 쌍안경의 각도를 조금 낮추어, 갈색 양복의 인도를 받는 무리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5분쯤 호반을 걷던 일행은 일제히 갈색 양복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둘러섰다.

  갈색 양복의 말소리가 또랑또랑한 음색으로 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자, 다들 자리에 앉아서 다리를 펴고 편안히 눈을 감으세요. 어때요? 지금의 마음은 한없이 편안하죠? 앞으로도 항상 마음은 평온하고 즐거울 거예요. 이러한 모든 것은 아마 저희 '국민 건강원'을 찾아 주신 덕분일 거예요. 여러분도 그렇게 믿고 있죠? 네, 그러실 줄 알았어요."
  그는 서서히 머릿속이 갑갑해져 왔다. 도대체 무슨 일을 떠벌리려고 저렇게 횡설수설할까하는 느낌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궁금증이 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싸늘한 바람결에 맞서, 슬쩍 눈을 치떠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보름에 가까운, 풍성한 달이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에 무더기로 파문이 일 것만 같은 달이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정신을 추슬렀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내가 여린 감정의 선율에 흔들릴쏜가?'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다시 쌍안경에 시선을 갖다대고는 호반을 응시했다.
  "아니, 지금 저네들이 왜 저러고 있지?'
  진행 동작으로 미루어 볼진대, 갈색 양복은 일행에게 주사를 놓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주사인지는 모르겠으나, 모두들 사내가 지날 때마다 팔을 내밀고 있었다. 주사를 맞은 뒤엔 모두들 원형으로 둘러앉아 뭔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의 머릿속으로는 온갖 상념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나 원 참. 보자보자 하니까 갈수록 미궁에 휩싸이는 기분이잖아? 대관절 저네들이 왜 저러고들 있느냐니까?'
  그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다른 일행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종적이 묘연하기만 했다. 그뿐이랴? 이래라 저래라 지시를 내리던 중절모마저도 어디로 가 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눈앞에는 단지 갈색 양복과 여덟 명의 일행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양복은 일행에게 주사를 다 놓은 뒤에, 또 뭐라고 연이어 지시를 하는 모양이었다. 양복의 동작에는 잔뜩 여유로움과 온화함이 실려 있는 듯했다. 여덟 명의 남녀는 양복 주변으로 빙 둘러앉더니, 나른한 몸짓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덟 명의 구성원들 중에는 사내들이 셋, 여인들이 다섯이었다. 헌데, 그들의 거동이 점차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아니, 느낌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이상해지고 있었다. 주사를 맞은 남녀는 하나같이 하품을 해 대더니 나른한 기색으로 엉뚱한 동작들을 연출했다. 어떤 사내는 자신의 손바닥을 자꾸만 비비면서, 몽환의 세계에 잠겨들고 있었다. 또한 그 옆의 중년 여인은 남의 이목에 초연하여, 자신의 상반신을 어루더듬기 시작했다. 또 다른 여인은 동서남북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뭐라고 중얼대기 시작했다. 어찌 들으면 경문(經文) 같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푸념 소리 같기도 했다. 하나같이 주사를 맞은 남녀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은 자세로 몽환의 세계에 잠겨 있었다. 그제야, 그는 그들이 마약 주사를 맞은 거라고 단정할 수 있었다.

  '흐음, 그렇다면 중절모는 마약 밀매 조직의 두목이란 말인가? 왜 건물의 내부에서 은밀히 거래를 하지 않고 호젓한 야외의 장소를 택했을까? 이건 아마도  수사 기관의 감시망을 벗어나려는 의도일 거야. 하여간 무슨 일을 하든 살아남으려면 부단히 움직여야 하는 법이라구. 삼라만상이 모두 학습의 스승이 된다는 데, 나는 이들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대략 십여 분이 지났을 때였다. 사방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중절모와 부하 다섯이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 주사를 맞았던 일행들은 모두들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중후한 모습의 중절모가 부하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은 정말 수고들 많았어. 경제 한파로 어디로 가나 끙끙 앓는 추세인데 비해, 오늘은 정말 성공적이었어. 자, 나를 따라들 오라구. 제대로 한잔 낼 테니까."
  중절모와 일당들은 갤로퍼에 올라타더니, 흙먼지를 일으키며 유유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갤로퍼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팔짱을 풀고 호숫가를 거닐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마약 주사를 맞던 일행들을 보더라도 사회의 곳곳에서 균열이 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점차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숫가를 거닐면서, 가슴 시린 상념에 휩싸였다.
  '왜 그 사람들은 마약을 찾을 수밖에 없었을까? 직장과 아내를 일시에 잃은 나 자신도 주관이 뚜렷하지 못하다면 마약의 소용돌이에 휩싸일까?'
  그러다가, 천부당 만부당하다는 듯이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는 잔뜩 눈썹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옮기다가 우뚝 멈춰 섰다. 몸을 좀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흘낏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새 밤 9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싸늘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위에 걸친 청색 점퍼를 벗어 나뭇가지에 걸었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가다듬은 연후에, 자세를 갖추었다. 지금껏 그는 정식으로 무술 지도를 받은 것이라곤 여태껏 없었다. 물론 의례적으로 군대에서 잠깐 체조 수준으로 익히던 태권도는 배제하고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운동 신경은 선천적으로 탁월한 바가 있었다. 간혹 서점에 들러, 무술 서적들을 사 들고는 틈나는 대로 수련을 했다. 그에게 있어서 무술은 신명나는 몸 풀이 동작들이었다. 그 어느 체조보다도 신명나는 율동과 동작을 갖춘 고도의 절제된 몸놀림이었던 터였다. 185 cm의 신장에 체중 75 kg의 그에게는 무술이야말로 최고의 건강 조절용 운동이었다. 그는 태권도, 합기도, 쿵푸, 가라데에 이어, 유도 등에 대해서도 각별한 수련을 쌓았다. 공식적으로 도장에 다닌 적이 없었기에, 단증(段證) 하나도 없는 터였다. 하지만, 그의 무술 실력만큼은 무술 전문가들조차도 경배할 정도의 수준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민수는 숨을 가다듬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앞으로 돌진하다가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면서 뒤돌려 차기와 연속 옆차기를 시도할 작정이었다. 다시 말해, 한 번 뛰어 올라 세 번의 발길질을 해 대는 동작들이었다. 오랜 시간의 수련이 아니고서는 결코 아무나 흉내낼 만한 동작은 아니었다. 가능한 한 그는 그가 지닌 무술을 공개된 장소에서는 시연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에게 무술은 신체 단련과 건강 조절의 의미로서 소중한 터였다. 언제나 틈만 나면 보다 정제되고 우아한 자세를 취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이윽고 그는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쏟아져 나오는 눈빛에 달빛마저 흐트러질 지경이었다. 드디어 그는 앞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섯 번째의 착지점에서 한껏 몸을 껑충 치솟아 올렸다. 그러면서, 그는 왼발 뒤돌려 차기에 이어, 오른발과 왼발을 교대로 써서 옆차기를 해댔다. 그는 계속하여 이 동작만을 십여 회 반복하여 수련을 했다. 운동을 하는 순간에는 잡념이라곤 있을 수가 없었다. 십여 회를 반복하자마자, 전신에는 마구 땀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참으로 격렬한 운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그대로 솔숲을 뚫고 거닐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쯤 걷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어디선가 가는 신음 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창졸간에 그는 놀라 우뚝 선 채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커다란 소나무 아래 뭔가 검은 물체가 보이는 듯했다. 살금살금 걸어 물체에 접근해 보니, 나뒹굴어진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흘낏 시계를 바라보니, 밤 10시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는 일단 가슴이 섬뜩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시각에 땅바닥에 쓰러져 나뒹굴어진 여인이라면 필시 예사로운 사람은 아닐 터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둘을 제외하고는 인적조차 없었다. 그저 들리는 거라고는 청아한 음률의 솔바람 소리와 호수의 수면에서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뿐이었다. 좌우로 고개를 흔들면서, 그는 나뒹굴어진 여인을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그는 우선 여인의 신색(身色)부터 예리한 눈빛으로 살펴보았다. 30대 중반의, 안색이 몹시도 초췌해 보이는 여인이었다. 여인은 의식이 몽롱한 시선으로, 계속하여 낮은 신음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는 여인의 코에 바짝 귀를 갖다 대고는 숨결의 세기를 가늠해 보았다. 숨결이 미약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독해 보이지는 않았다. 한 차례의 차가운 심호흡을 한 뒤에, 그는 서서히 손을 뻗어 여인을 안아들었다. 여인은 너무나도 심신이 미약한 듯, 그에게 고스란히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는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잔디가 넓게 깔린 공지에 여인을 눕혔다. 여인은 조금 전과는 달리 서서히 몸을 떨어 대기 시작했다. 안색마저도 더욱 핼쑥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허, 이건 또 뭔가? 그냥 모른 체해 버리고 말아? 자꾸만 엉뚱한 일에 끌려가다 보면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아냐, 그래도 이건 아냐. 사람이 위급한 처지에 빠졌는데, 고개를 돌리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이잖아?'
  그는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가늠해 보았다. 여인을 병원으로 데리고 갈 만한 액수는 도저히 못 되었다. 자신의 삶도 불투명한 판에, 남의 진료비로 거금을 소모하다니? 그는 잠시 팔짱을 낀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주머니의 금전 사정과 여인의 건강 문제라? 진료비 자체는 얼마 들지 않으리라. 에라, 모르겠다. 일단은 병원으로 데리고 갈 수밖에는 없는 일이다.'
  판단이 서자마자, 그는 텐트 옆에 세워 둔 자신의 승용차에 여인을 실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호수에서 가장 가까운 종합 병원의 응급실로 데리고 갔다. 밤늦은 시각이었지만, 당직 의사는 그를 불러 친절히 설명을 해 주었다.
  "환자분의 건강 상태는 양호한 편이에요.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질환은 없군요. 다만, 기력이 상당히 떨어져 있는 게 마음에 좀 걸리거든요. 이 점은 영양만 충분히 섭취하면 금방 해결될 거예요. 영양 주사를 놓아 드렸으니까, 이젠 데리고 가셔도 됩니다."
  그는 이내 여인을 차에 태워 다시 호반으로 되돌아왔다. 호반에 도착하자마자, 차의 히터를 틀어, 여인의 몸을 따스하게 해 주었다. 이 때 문득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쯤 아내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잠시 상념에 잠겨 들다가 이내 그는 머리를 내흔들었다.
  '다 부질없는 일이야. 평소에 아무리 잘 해 주었더라도 돌연한 일이 생기니까, 얼굴을 돌리지 않았던가? 다만, 나 스스로가 머리를 돌리지 않은 것에 위안을 느껴야지, 안 그래?'
  히터를 켠 뒤, 한 시간 가량이 지나서야 여인은 의식을 회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나, 제가 왜 여기에 누워 있죠? 혹시 댁이 저를 구하셨나요?"
  그는 환히 미소를 지으며, 대충 경과를 설명해 주었다. 여인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옷차림을 차근차근히 살펴보는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눈앞의 사내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댄 건 아닌지 살펴보는 모양이었다. 그는 여인으로부터 시선을 비껴 물안개 자욱한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은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알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정말 너무나 고맙군요. 저는 댁이 아니었더라면, 솔숲에서 얼어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에요. 그리고, 저 때문에 히터를 너무 많이 켜신 것은 아닌가요? 차 옆에 텐트가 있더군요. 텐트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을 나누기로 해요."
  텐트 안에 자리를 잡자마자 그는 녹차를 끓여 찻잔을 나누었다. 녹차를 마시면서부터 여인은 자연스레 얘기를 해 나갔다. 그는 시선을 여인의 콧잔등이에 던진 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홍미란이라는 여인의 나이는 그보다 세 살이 많은 서른 넷이었다. 그녀는 스물 여덟에 결혼을 하여, 현재 두 아들의 어머니였다. 그녀의 남편은 중졸 학력의 시골 농사꾼이었고, 부부의 금실(琴瑟)은 꽤나 좋은 편이었다. 주된 작업장은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벌판의 비닐 하우스 지대였다. 비닐 하우스는 남다른 재능을 가진 남편의 사촌 남동생이 때때로 거들곤 했다. 또한 사촌 시동생은 그녀보다도 네 살 아래인 미모가 수려한 총각이었다. 사촌 시동생의 작업장과 그녀의 비닐 하우스는 바로 인접해 있었다. 반면에 그녀의 남편은 비닐 하우스보다는 과수원의 일에 더 매달리는 편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 어스름까지 그녀와 사촌 시동생은 곧잘 어울려 작업을 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부턴가는 진호가 점차 남자로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진호가 누구긴요? 사촌 시동생의 이름이잖아요? 심지어 댁마저도 저를 웃기는 여자라고 생각하겠지만, 제겐 진호가 너무나 소중하단 말이에요."
  "그래, 진호 씨의 어떤 점들이 미란 씨의 마음을 끌던가요?"
  "우선 서글서글한 눈빛이었어요. 진호는 고졸 학력의 농사꾼이긴 했지만, 훤칠한 키에 빼어난 용모가 사람을 사로잡을 지경이에요. 아무리 봐도 시골에서 그냥 섞기는 아까운 얼굴형이었어요. 그런 진호를 날마다 가까이 대하다 보니, 어느새 저도 몰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그는 촛불을 켜 텐트 안을 밝혔다. 보다 여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함이었다. 여인의 얼굴도 아까부터 느낀 바였지만, 평범한 시골의 아낙으로 살기에는 아까울 지경이었다. 첫눈에 확 마음을 끌 정도의 빼어난 미모였기 때문이었다. 추측컨대, 학력이 미천하다 보니, 시골로 시집가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채, 그녀의 얘기에 잠자코 귀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뭐라고 할까요 ? 진호를 만나기 전에는 남편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었거든요. 헌데, 진호를 만나면서부터는 사사건건 진호와 남편이 비교가 되는 거예요. 서서히 남편이 못나 보이고, 무능해 보여서 싫어지기 시작한 거예요. 애들 둘은 이미 나의 관심사가 아니에요. 하여간 나는 남편과 관련된 일체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단 말이에요. 비록 애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요. 그러한 것은 이미 나의 관심 밖의 일이 되고 말았어요. 어때요? 나 못된 여자죠?"
  그는 가만히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묘한 일이야! 내겐 이 여자가 왜 부도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걸까?'
  그녀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지금까지의 그 어떤 순간에 있어서도 진호는 그녀에게 따뜻이 대해 주었을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진호가 음흉한 마음을 먹었던 것은 아니라고 여겨졌었다. 항시 일관된 따뜻한 마음과 경건한 자세가 서서히 그녀의 마음을 뒤흔든 거였다. 마음이 흔들리면서부터는 자꾸만 대화의 빈도가 늘어만 갔다. 그녀의 마음에 담겨 있던 응어리들이 진호와의 대화를 거치면서부터는 눈 녹듯이 풀려갔던 터였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묘한 일이었다. 그녀에게는 6살의 나이 차이를 가진 남편과 진호가 자꾸만 비교되기 시작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언제나 두 사람의 대비가 선명히 이루어지곤 했다.
  처음에는 남편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남편의 결점이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묘한 것이 사람의 마음인 터였다.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남편에 대한 그녀의 후한 점수가 자꾸만 진호에게로 옮아가는 거였다. 때로는 가정적인 문제로 남편과의 분란이 일어나, 마음이 괴로운 날도 있었다. 묘하게도 진호는 그녀의 감정의 변화가 어떻든 언제나 평온하게 다스려 주는 재주가 있었다.
  "아마도 2년쯤 전의 일일 거예요. 어느 날부터인가 진호는 내게 바다로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아무리 시린 바람이나 눈보라마저도 포근하게 감싸 줄 수 있는 바다. 수시로 얼어붙는 여인의 가슴을 언제나 따뜻이 녹여 줄 수 있는 바다. 적어도 제겐 진호가 그러한 바다로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제겐 진호가 바다로 느껴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냥 이성이 마비되는 느낌이었어요. 아마도 지난해 겨울철이었을 거예요. 바깥 바람이 몹시도 차갑게 느껴지던 날이었죠. 진호와 나는 무성하게 자란 상추들을 솎으며 하우스 안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하고 있었어요. 농사일 좀 해 보셨나요? 어머나, 그러세요?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틈틈이 농사일을  하셨다구요? 그러면, 제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으시겠군요. 농사일이란 게 원래 시작도 끝도 없는 일이잖아요? 현실이 고달프다고 엄살부리는  사람들에게 한 시간만 호미를 맡겨 보면 어떨까요? 모르긴 해도 아마 십중팔구는 일제히 도망을 칠 걸요?"

  민수는 다시 한 번 여인의 얼굴을 말끄러미 들여다보았다. 확실히 여인의 미모는 고혹적이며 뇌쇄적인 데가 있었다.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사람의 마음을 마구 뒤흔들어 놓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별님과 미란의 얼굴을 동시에 떠올리며 비교를 해 보았다. 아무리 따져 봐도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미모의 여인들이었다. 이러한 여인들이 벌써 둘씩이나 그의 텐트 안에서 시간을 보낸 거였다. 만약 그가 음흉한 마음을 먹었더라면 여인들은 꼼짝없이 당할 판이었다. 하지만, 그의 외모에는 여인들로 하여금 안심하게 만드는 평온한 분위기가 배어 있었다. 그러한 평온한 분위기는 오랜 세월을 거쳐 무형 중에 다져진 것이리라. 그가 별님과 미란의 미모에 감탄하듯이, 그의 얼굴 역시 눈부신 아름다움의 결정체였다. 사람들은 곧잘 아름다운 외모는 아름다운 마음과 통한다는 관점에 사로잡히곤 하는 터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곧잘 사람들로부터 후한 점수를 받아온 터였다. 그랬기에, 지금껏 그는 여인들과 눈을 마주치기를 두려워했었다. 여인들은 대부분 일단 그와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눈빛이 금세 변하곤 했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오해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그는 가능한 한 여인들과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었다. 하지만, 미란을 만난 순간부터는 왠지 미란의 눈을 정면으로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러한 심리적인 요인이 무엇일까?'하고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작 뚜렷한 해답은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바람기가 센 여인의 눈빛은 어떤 것일까'하는 강렬한 호기심 때문인 듯도 했다. 아무리 봐도 그녀가 가정을 무너뜨리고 일탈해 버릴 여인으로는 비쳐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녀가 가정을 포기하면서까지 진호에게 빠져들게 된 걸까? 그는 일단 그녀의 얘기를 더 들어보고 싶었다. 아무리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는 하지만, 뭔가 본질적인 원인이 있을 듯도 했다.
  "죄송한 질문인데요, 미란 씨와 진호 씨와의 관계는 어느 정도까지 진행했나요?"
  "네, 천천히 다 말씀 드릴게요. 혹시 저의 이야기가 지루하시지는 않으세요?"
  "아뇨. 단지 정황이 어느 정도였기에, 오늘처럼 병원에 다녀오게 되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에요."
  
  여인은 계속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제가 진호를 바다라고 생각한 시점부터 저는 부쩍 진호에게 몸달아 하곤 했어요. 아무리 힘든 일일지라도 진호의 따스한 눈빛을 한 번만 받으면, 그저 그만일 따름이었죠. 저는 점차 저의 헝클어진 머리를 다듬기도 하고, 옷차림새에도 신경을 쓰게 되었죠. 심지어 남편으로부터 들에 나가는 사람이 몸단장은 뭐하러
하느냐고 핀잔을 받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 때마다 저는 남편에게 당당하게 말하곤 했었죠. 왜 내가 이쁘게 꾸미면 당신의 어디가 불편해 ? 저의 차림새가 날로 변할수록 진호는 제게 더욱 감미로운 말로 추켜 주곤 했죠. 하루 종일 선녀와 함께 일을 하니, 피로가 몸에 쌓이질 않는다고 진호가 말했어요. 진호의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저는 선녀가 된 기분이었어요."
  지난해 가을철의 일이었다. 진호에게 이끌리는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어서, 미란은 이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흔들리는 마음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번민으로 그녀의 입술만이 바짝바짝 타올랐다. 핼쑥해진 얼굴로 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잠든 가족의 얼굴을 내려다보곤 했다. 네 살과 두 살인 사내 애기인  인철과 인준의 잠든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남편인 태호의 둥글넓적한 얼굴도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그 동안 알뜰히 가정을 이루어 오느라고 항상 노력해 오던 남편이었다. 배운 바가 넉넉지 못한 자격지심인 듯, 때때로 그녀를 향해 털어놓곤 했다.
  "여보, 난 원래 공부 체질이 아닌 모양이야. 내겐 몸으로 때우는 게 제격인가 봐. 뭐라고 할까? 타고난 농부라고 해야 하나? 당신 혹시 농사일이 싫은 건 아니지?"


  "흥, 싫다면 달리 빠져나갈 길이라도 있어? 별 뾰죽한 수도 없으면서 묻기는 왜 묻고 그래, 응? 그냥 열심히 땅만 파다가 이 세상 떠날 때가 되면 떠나가는 거지 뭐."
  미란은 태호의 물음에 심드렁하게 대답해 놓고서도 마음은 늘 애달팠다. 그러면서 그녀는 깊은 상념에 휩싸이곤 했다.
  '아이, 도대체 이게 무슨 삶이야? 남들은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서도 이 세상을 잘만 사는데, 나는 이게 뭐냐구? 옛 말이 하나도 그른 게 없구먼. 여자는 모름지기 남편을 잘 만나야 돼. 어쩌다가 순하기만 한 양반을 남편이라고 만나 가지고는 일평생 흙만 파다가 끝낼 것인가?'
  생각할수록 미란의 가슴은 착잡하기만 했다. 농사란 그냥 일만 한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닌 터였다. 농산물이란 때가 되면 소담스럽게 산출되는 터였다. 이것을 화물차로 실어 시장에 가져 가 팔아야만 돈이 되는 거였다. 농산물을 상품화하려면 새벽같이 잠을 설쳐 가며 일어나 앉아 물건을 다듬어야만 했다. 잘 다듬어지지 않은 물품은 주부들이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터였다. 짐을 실어 나르더라도 새벽이 아니고서는 시장 거리에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농산물이 양이 많기만 하다면, 대단위 농협이나 청과물 상회에 도매로 넘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대개는 그렇게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시장 골목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일일이 소매로 넘겨야만 했다. 시작은 새벽부터인데, 다 팔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면 언제가 될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물건이 잘 팔리는 날이면, 물건을 내려놓자마자 금방 일어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개는 몸에서 진이 다 빠져나가는 저녁 어스름까지도 남아 있어야만 했다.
  마치 물건을 살 것처럼 말만 잔뜩 늘어놓고는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는 주부들이 대다수였다. 그 때처럼 사람들이 밉살스러워 보일 때도 없었다.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미래가 불투명하기만 했다. 젊어서는 젊은 기운으로 이렇게 헤쳐 나간다지만, 늙어서도 계속 이런 식이라면? 아무래도 이것은 삶에 있어서 가혹한 조건으로 작용하리라는 생각에 휩싸이곤 했다.
  골목마다 저녁 시간이면 온갖 맵시로 치장을 하고 거리를 오가는 주부들이 부럽게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수시로 상념에 젖어들곤 했다.
  '여자는 확실히 남편을 잘 만나야만 하는 거야. 이게 무슨 삶이냐구? 하루 이틀도 아니고, 새벽같이 일어나서는 시장 거리에서 시간을 다 보내지 않는가? 그리고 농사일은 얼마나 많은가? 잠시라도 소홀히 하면, 논과 밭에서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오르지 않는가?'
  또다시 불면에 휩싸인 지 며칠이 지난 뒤였다. 미란은 새벽 무렵에 남편의 가슴에 손을 얹고는 어루더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내 남편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잠투정을 해 댔다.
  "에이, 무슨 여자가 잠도 없이 이래? 제발 나 잠 좀 자게 내 버려 둬."
  약간은 서운했지만 이내 팔을 내려, 남편의 아랫도리를 더듬어 내려갔다. 막 잠옷의 바지 섶을 헤치려고 손을 내뻗친 순간이었다.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밀쳐 내며 냅다 소리를 질러댔다.
  "야, 도대체 왜 그래? 제발 잠 좀 자자니까."
  남편의 말을 듣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설움이 끓어오르면서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미란은 고개를 돌려 자꾸만 치솟는 눈물을 걷어 내며 훌쩍거렸다. 그러다가, 입술을 깨물며 남편으로부터의 이탈을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아무리 뼈 빠지게 일해도 눈앞의 전망은 암담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물려받은 재산이나 모아 둔 재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몇 개월 동안을 줄곧 생각해 온 '이탈'이었다. 이탈을 생각하면 할수록 점차 진호에게 이끌리는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점차 비닐 하우스로 향하는 옷차림은 나날이 맵시를 더해 가기만 했다. 점차 바지에서 짧은 치마로 옷차림이 바뀌어지면서, 몸에는 향수의 향이 주위로 스며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일을 도우려고 비닐 하우스 안으로 들어선 진호를 향해 그녀는 매혹적인 눈웃음을 지었다.
  "이야, 형수님 맞으세요? 너무나 이뻐져서 못 알아볼 뻔했어요."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마음마저도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진호의 눈빛이 그녀의 얇고 짧은 치마의 끝단을 따라 움직이곤 했다. 청순한 듯한 얼굴에 넋을 잃은 듯한 진호의 표정을 간파하자마자 그녀는 자신감을 얻었다. 설사 진호가 그녀의 도피처가 못 된다 할지라도, 위안의 대상은 충분히 되리라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가슴을 떨며 저녁 어스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비닐 하우스 안에는 오이와 상추가 끝없이 널브러지게 심겨져 있었다. 제대로 손질을 하고 물을 주려면 대여섯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가게 마련이었다.
  그녀는 이제 본격적으로 진호를 유혹하기로 작정했다. 되도록 진호의 곁에서 작업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자꾸만 상반신을 부딪쳤다. 때로는 치마의 끝단이 넓적 다리 위로 말려 올라가도록 의도적으로 허리를 굽히곤 했다. 그럴 때마다 흘낏거리며 그녀는 진호의 표정을 살펴보곤 했다. 그 때마다 진호는 확실히 달뜬 표정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미란은 이제 진호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는 확실한 자신을 얻은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만일에 대비하여, 마음을 다잡으며 치밀한 점검을 계속해 나갔다.

  한편 진호는 그 날 따라 마음이 유난히 달떠 올랐다. 평소부터 그는 사촌 형수인 미란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만난 여자들 중에서 형수보다 더 빼어난 미인은 없었다. 비록 사촌 형수이기는 했지만, 나날이 작업장에서 만나다 보니 마음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형수라기보다는 여자 친구 같다는 생각이 점차 들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던가? 점차 형수의 옷차림이 화려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로 우습지 않은 일에도 형수는 깔깔거리면서 수시로 교태를 부리곤 했다. 교태를 짓는 모습마저도 애교스러워, 어떨 적에는 꼭 안아 주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그러면서부터 서서히 그의 가슴속에서 알지 못할 욕정이 끓어오르곤 했다. 그러면서 '이래서는 안 되는데'하면서 자신의 욕정을 절제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형수는 점차 그에게 상반신을 부딪쳐 왔다. 처음 한 두 번은 우연이려니 싶었건만, 생각할수록 의도적인 행위로 여겨졌다. 그것을 느낀 순간부터 진호의 마음은 한없이 동요되기 시작했다. 혼자 있을 때에도 그의 얼굴은 수시로 달아오르곤 했다. 그러면서부터 진호도 자신의 용모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자신의 용모에 신경을 쓰다가도, 그는 문득 사촌형의 얼굴을 떠올리곤 마음이 울적해졌다. 사람 좋기로는 근동에서도 필적할 만한 상대가 없을 정도의  사촌형이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공부에는 애초부터 소질이 없던 사촌형이었다. 그래서 진호 자신과 마찬가지로 땅만 파는 농부일 따름이었다. 농부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려면, 자신도 농과대학 정도는 나와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공부 자체가 남으로부터 죽도록 얻어맞는 것보다도 더 끔찍하게 여겨지던 자신이었다. 정말이지 피하고만 싶다면, 하늘 끝까지라도 공부만은 피하고 싶었던 진호였다. 그랬기에 사촌형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촌형은 그가 존경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사촌형의 아내인 형수에게 점차로 마음이 이끌리는 자신을 좀체 추스를 수가 없었다. 형수를 대할 때마다 사촌형의 얼굴이 떠올라 좀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점차 형수와 상반신을 부딪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서서히 욕정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형수와 시동생간의 신의냐 이성간의 욕정이냐가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현란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진호에게 이전에는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였건만, 이제는 그게 아닌 듯한 느낌이었다. 때때로 잠을 자다가도 심한 갈등에 휩싸여, 헛소리를 내지르며 식은땀을 흘리곤 했다. 때때로 꿈속에선 사촌형에게 떠밀려 절벽으로 곤두박질치며 외마디 비명을 질러대기도 했다. 집으로 가나 작업장으로 나오나, 언제든 마음속에는 신의와 욕정이 뒤얽혀 진호를 괴롭히곤 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점차 진호는 갈등에 휩싸여 몸살을 앓곤 했다. 그러는 사이에, 형수인 미란의 육체적인 유혹의 강도도 점차 높아만 갔다. 이제 형수를 찾아서는 안 되겠다고 여기면서도 어느새 진호의 발길은 형수를 찾고 있었다. 이심전심이라고 했던가? 간절하게 서로를 탐닉하는 마음이 서서히 무르익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차 신의보다는 욕정 쪽으로 진호의 마음이 이끌리고 있었다. 어느새 형수의 입김의 변화에도 심하게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읽으면서 진호는 초조해 했다.

  미란은 집을 나설 때마다 정갈한 모습으로 옷차림새를 가다듬곤 했다. 마을의 이목을 염두에 두고는 치마의 끝단이 무릎 위로 오르지는 않게 주의를 했다. 언제 보아도 수수한 차림새이긴 했지만, 은연중에 상대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한 차림새였다. 산뜻한 색상과 언제 보아도 정갈한 복장은 항시 차림새에 신경을 쓴다는 징표였다. 헌데, 놀라운 것은 진호의 차림새도 그녀 자신과 마찬가지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침내 지난해 가을이 깊어지던 날이었다. 주위의 산야는 단풍으로 인해, 형형색색의 화려한 빛깔로 굽이치고 있었다. 그 날 미란은 일부러 오후 네 시쯤이 되어서야  비닐 하우스로 갔다. 예상대로 초조한 듯이 진호가 그의 비닐 하우스 안에서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나타나자마자 손을 흔들며 곁에 있는 그녀의 비닐 하우스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는 진호를 보면서도 그녀는 스프링클러(sprinkler)로 통하는 호스의 꼭지를 틀었다. 금세 '쏴아' 소리를 내며 물줄기가 물안개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물기를 맞자마자, 상추와 쑥갓이며 시금치들이 파랗게 깨어나고 있었다. 바깥은 차가운 바람기로 기승을 부렸지만, 비닐 하우스 안은 훈기로 아늑하기만 했다. 미란은 어깨에 걸쳤던 숄(shawl)을 벗어 내리면서 눈길을 돌려 진호를 바라보았다.
  진호는 스프링클러로부터 허공으로 치솟는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미란에게로 다가갔다. 꼭지를 돌려 분사되는 물방울의 크기를 조절하면서 진호는 자세를 낮췄다. 진호는 끝없이 펼쳐진 비닐 하우스 안의 상추들을 바라보면서, 잠시 경이로움에 잠겼다. 항시 농사일을 하면서도 느끼는 점이지만, 언제 보아도 자연물은 경이롭기만 했다. 특히 햇살과 바람과 거름만 충분하면, 언제든지 싱싱한 생명체가 자라는 거였다. 게다가 풍성한 과일이며 잎새를 안겨 주는 농산물만큼 정감을 주는 것도 드물었다. 잠시 진호가 자연의 경이로움에 젖어 있을 때였다.
  경이로움에 취한 진호의 청순한 모습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아, 정말 저러한 모습이 인생이야. 아무리 하찮은 일에도 경이로움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여. 진정으로 내게 필요한 사람은 바로 당신 같은 사람이라구요.'
  미란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면서, 진호의 어깨를 뒤쪽에서 감싸 안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불안정한 자세의 진호가 미란이 어깨를 감싸는 바람에 그만 땅바닥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어느새 땅바닥에는 스프링클러로부터 흘러내린 물줄기로 인해 한껏 반들거리고 있었다. 미끄러운 땅바닥인데다가 불안정한 자세였으니, 미란이 진호를 감싸 안자마자 넘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호가 쓰러지는 순간, 미란도 함께 나뒹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창졸간에 미란이 진호의 밑에 깔려 버린 거였다. 예상치 못한 일로 당황한 진호가 급히 몸을 바로 세우려고 할 무렵이었다. 어느새 미란의 부드러운 손길이 진호의 가슴 부위를 어루더듬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미란의 머리카락과 목덜미로부터 분출된 은은한 향수 내음이 왈칵 진호의 콧속으로 밀려들었다.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듯, 전신이 멍해져 오며 진호는 그만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 미란을 볼 때마다 그녀의 젖가슴을 만지고 싶은 충동을 지그시 참아내던 진호였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진호는 미란의 옷섶을 풀어헤치며 젖가슴을 더듬기 시작했다. 금세 우윳빛의 윤기가 흐르는 그녀의 젖무덤을 두 손으로 움켜쥐면서 진호는 몸을 떨었다. 그 얼마나 만지고 싶었던 여인의 젖무덤이었던가 ? 얼굴은 온통 열기로 달아올라 눈을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는 서서히 미란의 유두에 입술을 갖다 대고는 정신 없이 빨기 시작했다. 덩달아 미란도 신음을 토해 내며, 손을 뻗어 진호의 바지를 벗겨 내리기 시작했다. 연이어 격렬한 애무와 몸부림의 회오리에 휘감겼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살갗이 부딪칠 때마다 열기를 내뿜곤 했다. 물안개에 파고드는 햇살처럼 따사롭고도 감미로운 격정에 몸을 떨며, 마침내 둘은 하나가 되었다. 거듭 몇 차례나 몸을 떨어대며, 황홀경의 늪에서 빈사 상태가 될 지경이었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절정감에 잠겨 있다가, 서서히 남녀는 땅바닥으로부터 일어나 앉았다.
  "진호 씨 ! 혹시 후회하지는 않아 ? 우리 그만 멀리 날아 버리자, 응 ?"
  "미란 씨 ! 저 역시 오래 전부터 당신을 갖고 싶었어요. 근데, 이후의 일을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해요."
  
  점차 밤이 깊어지면서 텐트 속의 촛불도 사위어 들고 있었다. 미란이 하도 열심히 이야기를 늘어놓는 통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 날 이후로 줄곧 진호와 저는 사랑을 나누어 왔었죠. 그런데, 그렇게 한 삼 개월간을 지낸 뒤였죠. 느닷없이 진호가 제게 시내로 가서 술 한 잔을 나누자는 거였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저는 상당히 의아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 있잖아요? 여자에겐 강한 직감 같은 것이 있다는 것 말이에요."
  마침내 미란은 진주로 나와 카페에서 진호를 만났다. 동네의 이목을 고려하여, 따로 출발하여 진주에서 만난 거였다. 남강(南江)이 바라보이는 카페에서, 진호는 한동안 뜸을 들이고만 있었다. 미란은 답답하여 죽을 노릇이었지만, 그가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는 잠자코 기다려야만 했다. 주문한 주스를 다 마시고 나서야 진호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한 달 전에 미란 씨와 나와의 일을 부모님께 말씀 드렸거든. 예상했던 바대로 두 분은 입에 거품까지 물며 야단이었어. 인간 못된 놈이 집안 망신을 시키려고 작정한 거냐며 세상에 그런 난리가 없었어."
  결국 진호의 부모는 중매를 통해 진호를 처녀와 결혼시키기로 하고 날짜까지 잡았다는 거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미란은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결코 그대로 넘길 수는 없는 일이라고 미란은 생각하며, 진호에게 애원을 했다. 제발 이제는 마을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서 함께 살자고 눈물로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다른 점은 다 좋은데, 결단력이 좀 모자라는 게 진호의 흠이라고 미란은 생각했다. 그 날 카페에서 그렇게 호소를 했건만, 진호는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결국 일 주일 뒤에 예정된 순서대로 진호는 산청의 처녀와 결혼식을 올리고 말았다. 미란은 유일한 도피처였던 진호를 그냥 속수무책으로 놓아 보낼 수만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진호가 결혼식을 올린 뒤부터는 완전히 사람이 달라진 듯이 그녀에게는 느껴졌다. 진호를 생각할수록 음식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였고, 자꾸만 불면증에 시달렸다.
  진호가 결혼식을 올린 지 두 달째가 되는 날이었다. 줄곧 불면증에 시달리던 미란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진호를 다시 그녀의 품으로 데려 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수많은 밤을 불면에 시달리며 얻어 낸 결론이었기에, 어떻게든 관철시켜야겠다고 다짐했다.
  근래에 들어서 미란은 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삶이란 무엇인가 ? 진정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지는 느낌이었다. 좋은 남편을 만나려고 했으면, 그녀 자신이 왜 과거에는 공든 탑을 쌓지 않았던가 후회스러웠다. 과거에 부모님이 그만큼 공부하라고 노래를 불렀건만, 허송 세월을 한 자신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게다가 생명이란 유한하며 다시 태어날 수 없지 않은가 ? 사회의 이목도 이목이지만, 모처럼 보장된 그녀의 행복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진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쯤 울리고 나서 곧바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신부의 목소리였다. 신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은 확실히 피가 식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신부가 먼저 전화기를 놓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화기를 내리곤 했다. 사흘을 계속 전화를 걸었건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한결 같은 신부의 목소리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짜증스러워져서 진호를 바꿔 달라고 신부에게 말해 버렸다.
  힘들게 통화하여 진호를 불러낸 날에, 미란은 진호에게 진정한 사랑을 호소했다. 진호가 결혼을 한 지 두 달 반만의 일이었다. 그 날부터 진호는 신부를 내버려두고는 집을 나온 거였다. 미란도 남편과 애기들을 내버려둔 채, 가출해 버린 터였다. 그 날부터 둘은 어렵고도 힘든 세상살이를 꾸려 나가기 시작했다. 진호는 공사장 막노동꾼으로, 미란은 파출부로 생계를 연명해 나가고 있었다.
  가는 곳곳마다 공사장이 널려 있었건만, 막노동꾼으로 일할 자리는 쉽지 않았다. 그나마 일자리를 구한 날은 행운이었다. 그렇지 못한 날은 우울한 마음으로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번민해야만 했다. 어렵기는 미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경제 한파가 있기 전까지만 해도 공급이 달렸다는 파출부 자리였다. 진호와 미란이 집을 나선 그 무렵이 묘하게도 경제 불황으로 국내가 휘청거리던 때였었다. 때가 때인지라, 일을 하겠다는 파출부는 많았지만, 수요처는 별로 없었다. 그랬기에, 나날이 내외가 밖에서 일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글세방을 구해,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 나간 지 다섯 달이 되던 시점이었다. 몹시 피로한 얼굴로 방에 들어서던 진호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미란에게 말했다.
  "미란아, 나 오늘 확실히 좀 슬퍼. 왜냐구? 아까 어머님한테만 살짝 전화를 해 봤거든. 그랬더니 글쎄, 신부가 가방을 싸 들고는 훌쩍 친정으로 가 버렸다지 않겠어? 그러면서 어머님께는 내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벼르고 있겠다고 말했다더군. 이제 내겐 앞이 안 보이는 암담한 현실만 남았을 뿐이야."
  땅이 꺼질 듯 내쉬는 진호의 한숨 소리로부터 진한 상실감이 느껴져 왔다. 미란은 미란대로 시댁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하나같이 냉담한 목소리로 뒤엉킨 반응들이었다. 이래저래 불편한 심기를 다스리느라고 미란이 진양호를 찾은 거였다. 며칠 동안의 수면 부족으로 인해, 눈을 붙이려 했지만 잠은 좀체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호숫가의 솔숲에 들어서서 청량 음료에 수면제를 타 마신 거였다. 그러다가 미란이 의식을 잃고 나뒹굴어져 버린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