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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2회
섬과 나그네
손 정 모

2. 폐가의 별님

  물안개가 하얗게 이빨을 드러낸 채, 호숫가를 자욱하게 뒤덮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일시적으로 안개자락이 걷히면서,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여인은 한 마디로, 첫눈에 심장이 멎어 버릴 만큼의 빼어난 미모였다. 버들잎처럼 휘어져 올라간 눈썹, 오뚝 솟은 콧날, 수정 같은 맑은 눈동자. 은은히 윤기가 흐르는 희부연 살결과 귀티가 나는 우아한 몸 동작. 민수는 가볍게 숨결을 추스르며,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이 때였다. 청아한 목소리의 여인의 말소리가 곧바로 귓전을 파고들었다.
  "뜻밖이군요. 초저녁에 이렇게 호숫가를 거니는 산책객을 만나다니요? 설마 제게 볼 일이 있어서 오신 것은 아니시죠?"
  그는 그녀의 물음에 잠시 어쩔 줄 몰라하며 허둥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정색을 하며 대답을 했다.
  "아뇨! 제대로 맞추셨습니다. 제가 만나고 싶은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다."
  "저 잠깐만요. 다른 호칭은 다 좋은데 '선생'이라는 용어는 좀 거북하네요. 왜냐구요? 선생이라는 호칭은 너무나 먹물 냄새가 나는 의례적인 용어로 느껴지거든요. 좀 다른 호칭으로 저를 불러 줄 수는 없나요?"
  그는 순간적으로 안색이 변하여, 허둥거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어이쿠, 나 원 참. 뭐가 이리도 말꼬리를 물고 야단일까? 나는 좀 대접해 주려는 뜻으로 그 용어를 쓴 것인데, 뭐가 잘못된 거야?'
  "댁의 이름이 민수 씨라고 했죠? 나보다는 나이가 적어도 십오 년 정도는 젊어 보이는데, 내 말 맞죠? 대관절 여기는 무슨 일로 왔죠? 우선 나를 새로운 호칭으로 불러 봐요, 어서요!"
  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여인을 향해 말했다. 절대로 기가 죽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네, 잘 알았어요. 저는 당신을 '별님'이라고 부를게요."

  "호호호호! 뭐라구요? 나를 별님이라고 부르겠다구요? 별 해괴망측한 명칭도 다 들어 봤지만, 여태껏 '별님'이라는 호칭은 처음이에요. 별님의 뜻이 뭐예요?"
  "별님은 하늘의 별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시죠? 당신의 미모가 너무나 빼어났기에, 제 마음속에서 그렇게 부를 수밖에는 없는 심정입니다. 알아들으셨어요, 별님?"
  "어머나, 고마우셔라. 그렇게 띄워 주면, 내가 한동안 황홀해 있을 텐데, 그게 걱정이군요."
  여인은 그와 함께 그녀가 머물던 폐가(廢家)를 향해 걸어나갔다. 그러면서, 여인은 그의 이름과 나이를 물었다. 덧붙여 전직과 현직은 뭐냐고까지 물었었다.
  "흐음, 전직이 회사의 과장님이셨다구요? 그런데도 현재는 실업자라니 가슴이 터질 만도 하겠어요."

  어느새 시야에는 폐가의 모습이 근거리로 바라보이기 시작했다. 민수는 무엇보다도 답답한 마음을 어떻게든 해소하고 싶었다. 일자리를 잃은 데에다 아내마저 잃고 보니, 마음은 이를 데 없이 황량하기만 했다. 민수가 일자리를 잃고 보니 그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삶이 의미가 없어 보였다. 답답하고도 삭막한 마음을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는 언제고 때가 되면 새로운 일을 할 수는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장 수시로 가슴속을 끓이는 울화를 잠재울 수가 없어서 탈이었다.
  마침내 폐가에 도착했다. 잠시 후에 여인이 머물던 방으로 들어가서, 방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인은 벽장문을 열더니, 네모진 상을 꺼내 방의 중앙에 펼쳤다. 자연스레 여인과 그는 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게 되었다. 그는 여인의 옷차림새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유행이 한참 지난 검정색의 원피스 차림이었다. 옷감도 폴리에스테르 계통의 합성섬유에 속하는 값싼 것이었다. 하지만, 여인의 몸에 걸린 옷이기만 하면, 새로운 품격을 갖는 듯한 기분이었다. 설사 여인의 몸에 넝마를 걸쳐 둔다고 할지라도 멋진 의상으로 비쳐질 판이었다. 확실히 옷걸이가 좋아야 옷이 좋아 보인다는 말이 통하는 듯했다.

여인과 민수 사이의 잠깐 동안의 침묵이 있은 직후였다. 여인은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벽장 안으로부터 주전자와 찻잔을 꺼내 들었다. 잠시만 기다리라는 듯이 손을 펴 보이더니, 금세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여인의 동작을 지켜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여인은 호수로부터 물을 길어 온 다음에, 마당에 돌을 세우고는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쌓아둔 마른 솔가지를 써서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서서히 불이 타오르며 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여인은 눈빛으로 그를 밖으로 불러내었다. 그는 잠자코 여인이 불을 때고 있는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는 여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서 여인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세밀히 지켜보았다. 비록 나이는 마흔 다섯이었으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태와 고운 살결을 지니고 있었다. 평범한 옷차림이었어도 천부적으로 빼어난 미모였기에, 볼 때마다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이윽고 그는 여인의 곁으로 가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때였다. 여인은 그를 향해 청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쪽으로 와 앉으세요. 이제 밤은 길고도 아늑한 법. 별 일 없으시면, 여기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때요?"
  여인은 방금 끓인 물을 찻잔에 쏟아 붓고는 말린 도라지 가루와 설탕을 탔다. 금세 향긋한 도라지 차의 향기가 마당가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한동안 둘은 도라지 차를 마시느라고 말이 없었다. 연방 마당에서는 모닥불이 타오르고, 실연기가 주위로 자욱하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점차 편안하고도 아늑한 분위기로 변해 가고 있었다. 여인과 그는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자연스럽게 마주앉게 되었다.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마음은 여인에 대한 존경심으로 차 오르고 있었다.

  "별님! 제가 당신께 여기에까지 오게 된 사연을 묻는다면 실례가 될까요?"
  여인은 대답에 앞서서 우선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돌연한 여인의 시선에 가슴이 떨려 왔지만, 태연히 여인을 마주 바라보았다. 여인은 한동안 그의 동공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인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에는 별들이 깨어나 빛을 뿜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던가? 여인의 눈시울 가득히 눈물이 맺혀 그렁거리고 있었다. 하늘을 흐르던 별빛이 여인의 눈동자에 맺혀 가냘프게 떨고 있었다. 돌연히 변해 버린 상황에 처하여, 그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마침내 여인은 서서히 눈물을 지우며 지난날의 일들을 들려주었다. 이제 모닥불을 지피는 일은 그가 했고, 여인은 다소곳이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여인의 이름은 당문혜(唐文惠)라고 했다. 그녀가 남편을 사별한 때는 꼭 한 해 전의 일이었다. 대학병원의 내과 과장으로서 열심히 뛰던 남편이었다. 환자들을 치료하고 돌보느라고, 지난 4개 성상을 줄곧 지친 상태로 일해 온 남편이었다. 의료업계에서나 학계에서도 그녀의 남편은 착실히 명성을 다져 가고 있었다. 과로로 인하여 간(肝)에 무리가 가기 시작한 거였다. 간 피질의 일부에 경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급속히 좌우 상엽마저 딱딱해지고 말았다. 1년 가량을 최신 장비로 치료를 시도해 보았지만, 끝내 생명을 건질 수는 없었다. 남의 생명을 치료한답시고 애를 쓰다가 자신의 생명을 잃고 만 남편이었다.
여인보다 세 살 연상의 남편이었다. 마흔 일곱의 한창 나이로, 종중(宗中)의 산기슭에 영원히 잠들어 버리고 만 남편이었다. 여인이 남편을 묻고 일어서던 날은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바람결에 마구 흩날리던 봄날이었다. 온 산자락을 뒤덮던 벚꽃의 물결이 파도처럼 휘감기던 그 날. 중천에 치솟은 해는 선홍색의 처연한 햇살을 사방으로 내뿜고 있었다. 하얀 색채의 벚꽃 자체가 현란한 아름다움이 되어, 햇살에 반사되어 정녕 눈부시기만 했다. 화사한 벚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이 젖어들 판인데, 하물며 남편을 흙에 묻고 일어섬에랴! 두 아들 녀석과 친척들마저 산을 먼저 내려가게 한 다음, 여인은 산중에 남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수천 수만 마리의 나비 떼들처럼 허공을 날던 꽃잎들이었다. 여인은 서러움이 가득 찬 눈망울로, 하염없이 떨어져 내리는 꽃잎만을 멍하니 바라볼 따름이었다.

  여인은 생각했다. 그녀에겐 남편을 싸늘한 흙에 묻던 그 순간처럼 처절한 아픔은 일찍이 없었다. 하지만, 남편이 묻힌 산자락을 떠나려니, 바람결에 흩날리는 벚꽃으로 인하여 설움이 점차로 끓어올랐다. '쏴아쏴아'하고 밀려드는 솔바람 소리에 휘감기면서, 그녀의 귓전으로는 남편의 목소리가 맑은 샘물처럼 남실거렸다.
  "여보, 당신이 하는 일이 힘들지 않아? 당신의 그 연약한 몸매로부터 어떻게 그러한 저력이 나오는지 문득문득 감탄스러울 때가 많다구. 뭐라구? 그 몸매에도 체중 조절을 할 정도의 군살은 있는 법이라구? 야아, 말도 안 되는 소리이잖아? 나는 맑은 산울림처럼 밀려드는 당신의 목소리가 언제나 사무칠 정도로 좋아. 여보, 나 정말 당신을 하늘보다도 바다보다도 더 사랑해."
  당당한 체구에 점잖은 풍모의 남편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너무나 자상하게 대해 주던 남편이었다. 남편의 곁에만 있으면 언제나 봄바람에 취하는 듯한 아늑한 느낌이었다. 그러한 남편이 간경화로 세상을 떠날 줄이야? 그것도 사람의 질병을 치료한다는, 대학병원의 의사가 그처럼 쉽사리 이승을 떠날 줄이야? 생각하면 할수록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남편은 유독 산을 좋아하는 여인에 대한 섬세한 배려를 많이 했었다. 주말이면 등산을 준비하는 여인을 위해, 남편은 바쁜 일정 중에서도 동참하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세미나의 발표 준비가 덜 된 상태였었어도, 남편은 아내와 함께 산길을 올랐다. 여인에게 남편은 따스한 바람막이이듯이, 남편에게 여인은 언제나 청아한 산울림이었다.

  그 날 남편을 흙에 묻고 나서부터였다. 해마다 봄이 되어 꽃잎들이 흩날릴 무렵이면, 여인은 가슴에 마냥 설움이 끓어올랐다. 그리하여, 설움을 삭이느라고 제대로 꽃을 향해 눈을 뜰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은 때때로 섬세한 선율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쩜 바람에 나부끼는 자태가 그렇게도 섬세한지 마냥 가슴이 떨릴 뿐이었다. 눈물로 그렁그렁한 눈시울에 선율 같은 바람이 휘감길 때면, 알싸한 슬픔이 끓어오르곤 했다.
  여인은 남편을 잃은 뒤부터 섬세한 바람결에 곧잘 취하곤 했다. 특히 맑은 솔바람 소리를 들을 때면, 남편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도 했다. 남편을 잃고서부터 그녀는 대금을 익혔다. 정식으로 대금의 달인으로부터 지도를 받아온 거였다. 그리하여, 가슴이 답답할 때면, 언제나 사방을 떠돌며 대금을 연주하곤 했다. 서러운 정조가 배어든 터라, 그녀가 연주하는 어떤 형태의 악곡일지라도 슬픔이 묻어나곤 했었다. 대금 산조를 위시하여, 유초신지곡 중의 상영산에 이르기까지 여인은 대금으로 슬픔을 달랬다. 하루 이틀 반복되는 동안, 여인의 대금 연주의 실력은 가히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한 마디로, 여인의 대금 연주는 그녀의 절절한 슬픔 표현의 한 형태였다. 그리하여, 누구든 여인의 대금 연주를 한 번 듣기만 하면 가슴이 저려오기 십상이었다.

  "민수 씨. 나는 원래 서울의 종로3가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약사예요.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엔 참으로 나도 열심히 일을 했었죠. 마치 내가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마치 금세라도 파탄이 올 것처럼 굴었죠. 하지만, 세상은 쉽사리 어떤 변화를 대뜸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어요."
  그는 여인의 이야기에 적절히 대꾸를 하기도 하면서,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여인은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의 열기로 인해, 두 볼에 살짝 홍조를 띠고 있었다. 여인은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그를 바라보며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물었다. 그가 약간은 당혹한 표정을 짓자, 여인은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직 식사를 못하셨으면 저랑 같이 해요. 저기 저 벽장 안에서 밥통과 찬합을 좀 들고 나오실래요 ? 네, 바로 거기예요. 손에 든 것 이외에, 바로 그 옆에 플라스틱제 통 하나가 보이죠 ? 네, 맞아요. 이리 가져오세요."
  모닥불 주위에 대자리를 편 다음, 그는 여인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언제 마련해 두었던지 음식은 정갈했으며, 꽤 신선도가 유지되어 있었다. 그는 저녁을 먹으면서 여인을 향해 말했다.
  "그럼, 혹시 재혼 같은 건 생각해 보지 않으셨나요? 남편이 돌아가신 지 1년이 지났다고 했잖아요? 제게는 빨리 재혼을 해서 안정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시급한 일이 아닐까 생각되거든요."
  "호호호! 그렇다면 민수 씨도 재혼할 방책은 세워 두셨나요? 아내가 떠나 버렸다면서요? 어쨌든 저와 유사한 신세가 아닌가요?"
  "별님! 그건 좀 달라요. 당신의 경우엔 장성한 자식이 둘이나 있지만, 저는 순전히 홀몸이거든요. 그리고, 당신의 경우엔 배우자를 사별한 것이고, 저는 이혼을 당한 거예요. 말을 하기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저는 너무나 무능력한 자신에 몹시도 화가 나요."
  어느새 식사가 끝나, 여인과 그는 빈 그릇을 챙겨 들고는 호숫가로 걸어갔다. 여인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그는 높다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하늘이었다. 은가루를 뿌린 듯 별들이 지천으로 깔려 빛을 내뿜고 있었다. 가물가물한 하늘의 극점을 올려다보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아, 저렇게도 별이 많은데, 나의 별은 어디에 있지? 유년기에 내가 그토록 나의 별로 점찍어 두었던 별은 어디로 갔을까? 혹시 지금 내 앞의 여인이 사람으로 환생한 별은 아닐까?'
  여인은 어느새 설거지를 마치고는 씻은 그릇들을 챙겨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다소곳이 받아들고는 여인과 함께 폐가의 방으로 갔다. 폐가인지라,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여인이 마련해 둔 촛불을 밝히고는 상을 중심으로 여인과 마주앉았다.
  "어때요? 촛불도 이런 폐가에서는 전깃불 못지 않죠? 분위기도 아담하구요. 근데, 나는 민수 씨의 자신을 비하하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요. 비하는 엄연히 겸손과는 다른 것이거든요. 왜 젊은 사람이 자신을 비하하느냐 이 말이에요. 자, 들어보세요. 분명히 민수 씨는 퇴직하기 전에는 전자 회사의 과장이라 그러셨죠? 그럼, 그 과장은 아무라도 되는 건가요? 분명 그건 아니죠? 적어도 과장이라는 직책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그 집단에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뒤에 퇴직된 것을 두고 너무 가슴 아파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따지고 보면, 회사에서 임원들을 위시하여 퇴직당하는 사람들이 오죽 많겠어요? 일단은 세상의 흐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돼요. 근래에 또 제2차 구조 조정에 들어갈 거라고 정부에서 밝혔죠? 그리하여, 또다시 십여 만 명의 실업자가 생긴다고 하잖아요? 이러한 경우엔 본인 개개인이 아무리 똑똑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대책이 없잖아요?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건대, 제 앞에서는 너무 자신을 비하시키지 마세요, 아시겠죠?"
  여인은 눈빛을 빛내며, 차분히 이야기를 끌어나갔다. 그는 생각할수록 여인의 사람됨의 폭이 크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새로운 의아심을 품게 되었다.
  '대관절 이 여인은 언제까지 이 폐가에서 머물 건지 모르겠군. 그리고 왜 하필이면, 이런 호젓한 곳의 폐가에 숙소를 잡은 것일까? 약사라면 경제력도 풍부할 텐데, 굳이 이런 곳을 택한 이유가 뭘까? 또 혹시 주변의 불량배들이 여인의 처지를 알면, 겁탈하려고 덤벼들지도 모를 일이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호젓한 곳에서는 법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는 일도 허다한 터였다. 그랬기에, 자연스레 여인을 향해, 궁금하게 여겨지던 질문을 던졌다.

  "언제까지 이 곳에 머물 거냐고 물었죠? 그건 저도 알 수 없어요. 잔뜩 뒤엉킨 마음이 수습될 때까지는 여기에서 호수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추스를 작정이에요. 어차피 폐가인데, 여기는 주인조차 없는 곳이라구요. 일단 내가 여기에 머무는 이상, 이 집은 내 거예요, 아시겠죠?"
  공교롭게도 둘은 호수를 찾은 원인이 비슷했었다. 둘 다 멍든 마음을 치유시키기 위해 잠시 호수를 찾은 거였다. 그는 그 나름대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 그래 그런 거였구먼. 이런 상황 아래에선 누가 자신의 처지가 더 비참한지는 모를 일이지 않는가?'
  그는 여태까지와는 다른 각도로 여인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여태까지의 자신은 단순히 대금의 선율에 이끌려, 호기심에 여인을 만난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좀 달라졌다고 여겨졌다. 상대의 위치와 정황을 이 정도면 대략 파악한 거라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인을 바라보면서 그는 자신의 생각에 잠겨 들었다.
  '내가 한없이 마음이 고독하고 울적한 것처럼, 이 여인도 마찬가지이리라. 지금까지의 내 마음이 단순한 탐색 주의자의 것이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제 내 마음의 노선을 바꿔서 여인에게 대응해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 내가 여인에 대한 대응 노선을 바꾼다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내 마음의 작용이 어느 정도인지 나도 알고 싶다구. 어차피 조물주가 남녀를 만들어 놓았다는 건 서로를 찾으라는 뜻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굳이 남녀를 분리해서 만들어 놓을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 여인이 나를 어떠한 대상으로 간주하든 말든 나로서는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다구, 알아 ?'
  여인은 그녀 나름대로 그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무슨 사내가 이리도 용맹이 없어 보일까 ? 그러면서 어떻게 대기업의 과장이 되었을까 ? 나와는 14년의 나이 차이가 나니까, 아무래도 연인이 되기는 어려운 일이야. 그러니, 잘 구슬려서 나의 친동생 하나를 더 얻는다고 여기면 될 거야.'
  각자 상념에 잠기느라고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드리워졌다. 여인은 여인대로 그는 그대로 각자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 나갔다.
  "혹시 이혼한 부인 말고는 사귀던 여자는 없었어요 ? 어머, 그러셨어요 ? 상당히 가정에 충실하셨던 분이네요. 그런데도 부인이 민수 씨의 곁을 떠나 버렸으니, 세상은 참 요지경 같아요."
  그는 여인을 바라보며, 일단은 정신적으로 깔끔한 친구로 지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그는 호숫가 주변의 자신의 텐트로 놀러 가자고 여인에게 제안했다. 여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금세 고개를 끄떡여 동의를 하고는 그를 따라 나섰다. 대략 십여 분 후에 그들은 호숫가에 자리잡은 그의 텐트에 도착했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텐트를 열어 젖치고는 여인을 안내하여 들어섰다. 텐트는 4인용이었던 관계로 두 사람이 몸을 눕히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텐트의 내부는 자주 청소를 했던 관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밤 열 시 무렵이었다. 그는 여인을 향해 말했다. 여태껏 대화를 나눈 것을 바탕으로, 그의 존재를 믿을 수 있겠느냐고 여인에게 물었다. 여인은 잠시 그의 말뜻을 헤아려 보는 눈치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그럼요. 당연히 믿고 말고요. 이런 곳에서 민수 씨가 나에게 거짓말을 늘어 놓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럼 어느 정도 밤도 깊었는데, 여기서 저랑 함께 밤을 보내지 않으시겠어요? 만약 그게 곤란하시다면, 제가 다시 폐가 있는 곳으로 모셔다 드리겠어요."
  여인은 재차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잠시 망설이는 눈치이더니 흔쾌히 대답했다.
  "좋아요. 사실은 폐가에서 혼자 잠을 자는 것은 다소 위험하기는 하거든요. 혹시나 모를 불량배들의 급습에 대한 방어가 다소 허술하거든요. 고작 아까 보았던 벽장문 안쪽의 좁은 공간이 유일한 은신처이거든요. 거기는 다소 밀폐되어 있기는 하지만, 방바닥과의 거리가 가깝고 자물쇠가 없는 단점이 있어요. 하지만, 내가 여기서 오늘밤을 민수 씨와 보낸다면, 경호원을 둔 셈이니까 좋은 일이에요."
  그리하여, 여인과 그는 호숫가에 있는 그의 텐트 속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기로 했다.

  그는 여인에게 제안했다. 가볍게 참이슬을 한 잔씩만 들고서, 호숫가를 산책하다가 잠자리에 들자고 말이다. 여인은 쾌히 승낙을 하고는 이내 그를 따라 호숫가를 거닐기 시작했다. 호수로부터 피어오른 물안개가 호숫가를 따라 자욱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참이슬을 꺼내 소주잔으로 한 잔씩만 따른 다음에, 천천히 호반을 거닐기 시작했다. 맑은 바람결이 안개자락을 젖힐 적마다 달빛에 반사된 물안개가 은빛 망사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보름에 가까운 달빛이 더욱 눈부신 빛살을 허공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바람이 일 적마다 물결에 반사된 달빛이 수면을 현란하게 빗질하며 멀어져 가곤 했다. 한 잔의 술잔을 다 비우고는 나란히 호반을 거닐 때였다. 여인은 오른손으로 그의 왼쪽 팔을 끌어안은 채, 자연스런 표정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민수 씨는 여기에서 며칠간이나 머물 건가요? 빨리 마음을 추스른 뒤에 어디에 가서 일자리를 잡도록 하셔야죠?"
  "네, 저도 최대한 빨리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만약 순조롭지 못하다면 얼마의 세월이 더 걸릴지 알 수가 없겠더라구요. 근데, 별님! 당신은 언제까지 여기에 머무를 건가요?"
  여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역시 그걸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해요. 만약 나도 상심의 굴레로부터 헤어날 수만 있다면 빨리 현실로 복귀해야죠."
  찰나간의 일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여인의 흐느낌 같은 것이 느낌으로 전해져 왔다. 흘낏 눈을 돌려 여인을 바라보았지만, 여인의 표정에는 전혀 동요가 일지 않았다. 홀린 듯한 느낌이었지만, 묵묵히 호반을 따라 앞으로 걸어나가며 밤의 정취에 젖어들었다. 호반의 솔숲 어디에선가 잠을 깬 듯한 박새의 울음소리가 슬며시 새어나오다간 이내 잠잠해졌다. 점차 달빛은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 수면 곳곳에서 수만 갈래로 갈라져 파드득거리고 있었다. 때마침 청아한 솔바람조차 밀려들어 마음이 그렇게 애잔할 수가 없었다. 이 때 슬그머니 그의 머릿속으로는 두 달 전 실직 상태의 일이 떠올랐다.

  밤중에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려 수화기를 들고 보니, 스물 넷의 은지의 목소리였다.
  "민수 씨, 나야 은지라구. 실직과 이혼으로 무척 마음이 우울할 텐데, 내일 나랑 같이 바람 좀 쐴까요 ? 안면도의 솔숲이 어때요 ? 내일 아침에 승용차로 데리러 갈게요, 잘 자요. 안녕 !"
  옛 날 추봉에서의 만남 이후로, 은지는 줄곧 그와 인권과는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8시경에 은지는 자주색 레간자를 몰고 그를 데리러 갔다. 서울을 빠져 나와 3시간 가량이 지난 11시 무렵에 안면도에 들어섰다. 안면대교를 건너, 안면도에 도착하니 곧바로 송림이 쭉 펼쳐지기 시작했다. 특히 승언리에서 중장리에 이르는 6.7 km의 자연 휴양림은 풍광이 좋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차를 솔숲의 가장자리에 세워 둔 채, 그와 은지는 천천히 솔숲을 산책했다. 노송들로부터 분출되는 송진 냄새와 솔잎의 향기가 찌든 심신을 맑게 해 주기에 족했다. 솔숲이 짙게 어우러지는 곳곳마다 달뜬 마음으로 그들은 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연이어 몰려드는 여행객들로 인해, 자리를 비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청아한 바람결이 솔숲에 휘감길 적마다 솔잎이 하얗게 이를 드러내며 길길이 치솟곤 했다.

  휴양림을 조금 벗어난 외진 솔숲에서였다. 거기에는 좀처럼 사람의 출입이 없는 밀림 지역이었다. 계속하여 귓전을 어루더듬는 바람 소리에 취했음일까, 은지는 영롱한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
  "이렇게 맑고 웅장한 솔숲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몰랐어요. 통영 추봉의 해송들로 어우러진 솔숲도 좋았지만, 이처럼 광활한 솔숲은 처음이었어요.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면서 아늑하게 잠겨드는 느낌. 아, 이 런 느낌을 그대로 놓치고 싶지는 않아요. 어때 저를 한 번 안아 주지 않을래요?"
  언행에 있어서 추호도 때묻지 않은, 그녀의 청순한 속삭임이자 하소연이었다. 눈밭에 내리는 순백의 눈꽃송이처럼 청정한 마음으로 그는 오래오래 그녀를 안아 주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서부터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서서히 달뜬 목소리로 변해 가면서, 그의 품으로 한층 깊숙이 파고들었다.
  문득 이전의 추봉에서의 석양 무렵의 그녀의 모습이 선히 떠올랐다. 애완견의 죽음에 가슴을 앓던 청순한 모습의 그녀를 말함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의식계의 심층부를 향해 속삭였다.
  '그래, 절대로 나의 사사로운 욕정으로 은지의 앞날을 그르칠 수는 없는 일이야. 내가 그녀를 진실로 좋아하는 이유는 일체 오염되지 않은 청순함에 있지 않았던가 ?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녀만큼은 설원에 내리는 순백의 눈꽃 같은 청순함으로 대해 주리라.'
  그 날 긴 시간을 솔숲에서 함께 지냈지만, 그는 그녀를 일관된 청순함으로 대했다. 그래서 그런지 만날수록 둘의 우정은 그럴 수 없이 깊어만 갔다.

  "민수 씨는 자연의 정서에 너무나 섬세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요. 내가 이렇게 팔짱을 끼고 걷는데도, 전혀 나에 대한 느낌조차 없어 보이니까 말이에요. 무념 무상의 경지가 바로 이런 건가하고 혀를 내두를 지경이에요."
  "아뇨, 천만의 말씀이에요. 저는 별님의 기품이 서린 당당한 모습이 너무나 좋아,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있어요."
  "민수 씨가 나를 존경한다구요? 그럼 좀 걱정스러운데요? 모든 사랑의 시발점이 존경하는 마음이라고 하잖아요?"
  "별님! 제게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든 저는 당신을 순수한 마음으로 존경하고 싶습니다."
  "어머, 민수 씨가 사람을 감동시키려 하네요. 묘하게도 민수 씨의 이지적이고도 일관성 있는 태도가 저의 마음을 자꾸만 끌어들이는 느낌이에요. 이러다가 연상의 과부인 내가 그대를 사랑할지도 모르는 이변이 생기면 어쩌죠?"
  "별님! 당신의 농담이 저의 마음을 마구 설레게 만들곤 해요."

  호반을 20여 분쯤 산책한 뒤였다. 그와 여인은 나란히 손을 맞잡은 채, 텐트를 향해 되돌아오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자리에 먼저 누운 뒤에, 옆자리에 여인이 서서히 몸을 눕혔다. 텐트의 안과 밖을 가르는 지퍼를 내리고 둘은 나란히 자리에 누웠다.
  비록 14년의 세월 차이가 있다지만, 남녀가 어엿이 함께 누운 자리였다. 사내는 총각과 다를 바 없는, 귀티가 나는 청년이다. 반면에 여인은 윤기 있는 살결을 지닌 빼어난 미인이지 않는가? 이럴진대, 어찌 상호간에 전류가 통하지 않겠는가?
  여인은 무신경을 가장하면서, 반 팔만큼의 거리를 두고는 그의 옆에 반듯이 드러누웠다. 텐트 속은 어두웠지만, 이내 어두움에 적응이 되어 상대의 위치가 어렴풋이 드러나 보였다. 우선 담요와 이불이 한 채뿐이라서, 같이 덮고 잘 수밖에는 없는 실정이었다. 여인은 숨을 가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만약에 사내가 밤중에 그녀를 일방적으로 발가벗긴다면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는 없는 터였다. 거기에 대해서 여인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었다. 일단 일이 발생한 뒤에는 심히 수습하기 어려운 터였다. 여인은 사내의 양심을 믿기로 했지만, 가슴속에 내재된 불안감은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더욱 위험스러운 요소는 둘 다 결혼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리하여, 밤중의 무의식적인 동작으로 상대의 몸을 더듬게 될 가능성이 충분히 내재된 터였다. 여인은 생각하면 할수록 일이 복잡하게 얽혀 들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여겼다. 서서히 불안한 마음이 조금씩 치밀어 올랐지만, 약속을 번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없이 미묘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 않는가 ? 그러기에, 여인이 약속을 번복하는 순간에 사내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렇게 되면, 위기를 모면하려다가 일시에 겁탈당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여인은 서서히 가슴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이럴 바엔 먼저 옷을 벗고, 사내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게 나을 듯도 싶었다. 하지만, 여인은 최대한 마음을 침착하게 다잡기로 했다. 일단 그녀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한 일이었다.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녀 자신이 감당하리라고 당차게 마음을 먹었다. 이렇게 마음을 먹자마자, 약간의 심리적인 여유가 생기면서 스르르 눈을 감을 수 있었다.
  한편 그의 경우에도 결코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여인이 잠자리를 함께 하겠다는 것은 그 자신을 믿는다는 뜻이었다. 이러한 믿음에 대해, 혹시라도 실망을 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밤중에 무의식으로 내뻗는 손길에 의해 혹시라도 욕정에 휩싸인다면 보통 문제가 아닌 거였다. 이래저래 그는 그대로 가슴이 달아올랐다. 그러면서, 그는 마음속의 갈등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에이, 연상이면 어때? 그냥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옷을 벗겨 버려? 일단 교접을 하고 나면, 여인의 마음이 달라질 테지. 뭐라고? 여자가 얼마나 독종인지 알기나 하느냐구? 오죽하면 오월에도 서리를 내리게 하는 게 여자의 한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안 될 말이야. 안 될 말이고 말고. 사내가 엉큼한 방법이나 폭력에 의해 여인의 사랑을 구한 대서야 그게 무슨 창피냐구? 다른 날이라면 몰라도 오늘만큼은 내가 여인의 정조를 지켜 줄 의무가 있다구, 알아?'
  마음은 돈독하게 먹었지만, 곁눈으로 바라보이는 여인의 젖무덤이 예사로 탐욕스럽지가 않았다. 그대로 미친 척하고 냅다 주물러 터뜨려 버리고픈 충동이 전신을 휩쓸곤 했다. 여인의 젖무덤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면서, 그는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입술을 굳게 깨물고는 잠을 청하려고 시도했다.
  '으음, 제발. 오늘밤엔 잠이 좀 빨리 와 줬으면 좋겠어. 제발 좀 빨리 잘 수 있기를 빈다, 빌어.'
  일체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으려니까, 자꾸만 마른기침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아무래도 심리적인 요인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사내의 자긍심으로, 끝까지 견뎌 내려고 이를 악물었다.

헌데, 바로 이 때였다. 그에게 어떤 느낌이 와 닿았다. 그 자신뿐만 아니라, 여인도 몹시 잠 못 들어하고 있다는 느낌 말이었다. 한동안 잠을 못 이루어 버둥거리다가 언제였는지 잠이 든 모양이었다.

꽤나 눈부신 햇살이 텐트 자락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그는 깜짝 놀라,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침 7시 반이었다. 그러다가 지난밤의 일이 떠올라, 자신도 몰래 신속히 옆자리를 살펴보았다. 헌데 아무리 살펴보았어도 여인의 자취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 이른 아침에 텐트를 빠져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민수는 침구를 말끔히 정리해 놓고는 서둘러 텐트 밖으로 빠져 나왔다.
놀랍게도 호반은 안개 기운 하나 없이 말끔히 개어 있었다. 호수의 수면은 햇살을 맞아, 수천 수만 마리의 은빛 물고기 떼처럼 파드득거리고 있었다. 광막하게 펼쳐진 호수의 위용이 유감 없이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했다. 그는 호숫가를 따라 쭉 달려가 보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여인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내처 폐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하지만 폐가의 그 어디에서도 여인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여인이 사용하던 벽장문도 다 열어 보았으나, 남겨진 집기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찻잔이며 주전자, 밥 그릇 등의 일체의 도구마저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잔뜩 허탈한 심정으로 폐가를 떠나오려고 할 때였다. 놀랍게도 폐가의 기와 지붕의 추녀 끝에 흰 종이가 매달려 바람에 펄럭거리고 있었다. 그는 혹시나 하고 급히 달려가 보니, 예상대로 여인이 남긴 서한이었다.

                        민수 씨께
        지난밤의 풍정이 한 폭의 그림인 양 가슴에 새롭기만 해요.
        이후로 어떠한 난관을 만나더라도 쉽게 좌절하지는 마세요.
        혹시 저를 만나고 싶거든 언제든지 화순의 운주사로 오세요.
                                    - 별님 드림 -

  그는 뒤통수를 된통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허탈할 수가 없어, 눈시울에는 물기마저 설핏 비칠 정도였다.
  '아니, 대관절 인생이란 게 뭔데, 이렇게 야박스러울 수가 있을까 ? 별님 ! 하룻밤을 같이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데 이렇게 말없이 떠나 버리다니요 ? 아하,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공허하게 만들다니 !'
  개탄을 거듭하는 그의 눈시울에는 어느새 눈물이 괴어 반짝이고 있었다. 쪽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는 다시 한 번 폐가 주위로 산책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한동안 발길을 돌리지 못하던 그는 소맷귀로 눈시울에 맺힌 물기를 지우고는 폐가를 떠났다.
  내처 그가 텐트를 쳐 놓았던 곳으로 가서 당장 텐트를 걷어 버리려고 했다. 텐트를 고정시킨 고정쇠를 뽑으려다가, 그는 울컥 설움이 배어 올라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이 번에는 그가 가야 할 곳을 지도로 표시해 보았다. 남해안 고속도로를 거쳐서, 전남 화순의 운주사(雲住寺)로 가 볼 참이었다. 하지만, 전화번호 하나 표기되지 않은 쪽지를 들고 여인을 찾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그는 고정쇠를 뽑지도 못하고 주저앉은 자세로, 진양호의 지도를 살펴보았다. 그는 잠시 어째야 좋을지를 몰라 기로에 섰다. 당장 화순으로 가야 할지 아니면 진양호에 더 머물러 있어야 할지를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그는 이내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만약에 그녀가 떠날 생각이 있었다면 왜 미리 말을 좀 해 주지 않았을까? 아무리 인생이 정처 없는 떠돌이의 삶이라 할지라도 이건 너무 심한 것이 아닐까?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는데, 어쩜 이렇게 허망할 수가 있을까?'
  그는 나뭇가지를 주워 들고는 이리저리로 땅바닥에 선을 그어가며 여로를 구상하고 있다. 마침내 몇 줄기의 선을 더 그린 다음에야 여로다운 여로를 찾아낼 수 있었다. 길과 길이 만나는 궤적을 그리다가 마침내 그는 결론을 맺었다. 어떤 장소를 찾던간에 목표했던 소기의 성과는 달성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진양호를 찾아왔다가 무슨 깨달음을 성취했는지를 가만히 자성해 보았다. 하지만, 이렇다 할 아무런 성취가 없었기에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리하여, 그는 며칠 더 진양호에서 머물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단 마음을 정하고 나자, 다시 가슴이 답답해져 오며 현실이 암담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텐트 안으로 들어가서, 취사 도구를 챙겨 호숫가로 갔다. 그는 라면을 두 개 넣고, 달걀 한 개를 깨어 넣고는 잠시 기다렸다. 잠시 후에 젓가락으로 라면을 입으로 건져 올리면서 그는 광막한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았다. 낮에 수면을 바라보면 흡사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마음이 몹시 울적할 때라도 바다나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기만 하면 그저 그만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산이나 내륙보다는 바다나 호수가 좋기만 했다. 그가 진양호를 찾은 이유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었다. 취사 도구를 갈무리한 다음 그는 낚싯대를 꺼내 들고는 호숫가를 찾았다.

  카아본 블랙으로 된 낚싯대 세 개를 호수의 수면 아래로 드리웠다. 지렁이를 낚시 바늘에 끼워 포인트로 보이는 지점에다 낚시를 담가 두었다. 낚시가 문제가 아니라, 들끓는 상념이 골치 거리였다. 잠시만 눈을 돌려도 머릿속으로는 과거의 온갖 잔상들이 휩쓸려 들곤 했다.
  두 시간 가량을 낚시를 하자, 이십여 마리의 붕어와 메기가 서너 마리 올라왔다. 냄비를 걸고 고추장을 풀어, 매운탕을 끓였다. 매운탕의 냄새는 금세 구수하게 호숫가의 공기를 타고 흘러 퍼지고 있었다. 끓은 매운탕에 참이슬을 곁들여, 호수를 바라보며 점심을 때우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또 슬그머니 과거의 상념으로 흘러들려고 할 때였다. 호숫가의 비포장 도로 위로 신형 그랜저 한 대가 천천히 미끄러져 와 멈추었다. 그런데, 차의 문은 열리지 않은 채, 차의 바퀴가 상하로 거듭 진동하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그의 뇌리에 와 닿은 것은 카 섹스였다. 그가 있는 곳은 인적이 너무나 드문 곳이기는 했다. 하지만, 낚시꾼이 있는 줄 알면서도 설마 그럴 리는 없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하여, 차내에 돌발 사고가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되어, 그는 차량으로 다가갔다. 헌데, 다가서고 보니 열정적인 카 섹스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50대 초반의 근육형의 건장한 사내와 30대 초반의 여인이 뒤엉켜 있는 모습이었다. 다가선 그를 보자마자,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고함을 버럭 질렀다.
  "야, 이 양반아! 남이 성교하는 걸 처음 봐? 왜 남의 일에 끼어 들려고 지랄이야?"
  그는 일단 숨이 딱 막혔다. 하지만, 침착한 모습으로 얼른 대꾸해 주었다.
  "아, 미안합니다. 나는 차가 멈췄는데도 사람이 안 나오기에 사고가 난 줄 알고 왔었소. 계속 즐거운 시간이 되기를 ……."
  그는 다시 낚시터로 돌아와서 낚싯대를 쥐고 있었지만, 조금 전의 광경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차를 바라보니, 아까보다도 더욱 격렬하게 타이어가 상하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낚싯대를 들여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근래에 전국적으로 러브호텔이 우후죽순처럼 생겨 말썽이라더니, 저건 이동형 모텔인가? 근데, 저 친구가 왜 아무한테나 반말을 지껄이고 야단이야? 확 꺼내어 두들겨 패 버려? 아냐, 인간 같잖은 걸 무엇 땜에 상대를 하느냐구? 하여간 말기적인 현상이군.'
  점심 취사 도구를 치우고 나서, 본격적으로 낚싯대를 드리우며 앉아 있을 때였다. 끓어오르는 마음을 다잡으며 걸려 올라오는 물고기들을 부지런히 어망에 옮겨 담고 있었다. 원래 진양호는 어족과 수량이 풍부한 담수호였기에, 낚시로 올라오는 물고기의 양은 적지 않았다.

호수의 수면 속에 드리워진 솔 그림자의 색채가 상당히 짙어진 느낌이었다. 흘낏 시계를 들여다보니, 저녁 7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그는 낚싯대를 갈무리해 놓고는 호반으로 발을 내디뎠다. 어느새 그랜저는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는 땅바닥에 엎드려, 체력 조절을 위해 100회의 팔 굽혀 펴기를 실시했다. 하루에 두 번씩 반복하여 실시하는 그 자신의 고유한 건강 관리법이었다. 그는 이제껏 어떤 형태의 무술도 체계적으로 단련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천부적인 자질로 인하여 싸움질에 있어서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묘한 것은 그가 주먹을 직접 휘두르는 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었다.

  저녁이 되자, 문득 폐가에 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마음을 먹자마자 서둘러 폐가에 가 보았다. 이미 여인도 떠나 간 터라, 텅 비어 있을 폐가를 떠올리며 폐가에 도착했다. 막 허물어진 폐가의 담장에 이르렀을 때였다. 폐가로부터 은은한 불빛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불빛의 모양새로 보아서 촛불임에 틀림없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가슴은 반가움으로 끓어올랐다.
  '이건 아무래도 별님일 거야. 틀림없이 별님이 다시 돌아온 걸 거야.'
  그는 반갑고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폐가의 허물어진 담장을 향해 달렸다. 한참을 달려가다가도 그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쌍안경을 들어 전방을 살폈다. 분명 폐가의 방 한가운데엔 사람이 서 있었다. 헌데, 검정색의 옷이 아닌 백색의 옷차림이었으며, 게다가 여자가 아닌 사내였다. 그는 다시 쌍안경을 들어 자세하게 방안의 사내를 살폈다. 사내의 나이는 대략 50대 초반으로 보였으며, 근육질의 건장한 골격이었다. 사내는 중절모에 흰색의 양복 차림새로 방안에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사내의 얼굴은 드물게 보는 귀공자형의 얼굴이었으나, 강인한 기백이 얼굴 가득히 서려 있었다.
  사내를 바라보면서 그는 문득 돌연한 생각에 휩싸였다.
  '이것 참 이상한 일인데? 별님이 사라지자마자, 영문 모를 사내가 폐가에 와서 자리를 잡다니? 어찌 보면, 폐가가 수상한 건물일지도 모르는 일이야. 혹시 불온 세력들의 밀회 장소는 아닐는지?'
  그는 쌍안경을 내리고는 조심스레 접근하여, 폐가에 닿았다. 최대한으로 몸을 은폐시키며, 조심스레 허물어진 담장 아래에 닿았다. 쌍안경으로 볼 때보다도 훨씬 또렷한 형태로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여, 그는 폐가로부터 몸을 후퇴시켜, 솔숲에 몸을 은신했다. 그는 쌍안경으로 사내를 지속적으로 관찰해 나갔다. 돌연 사내가 우뚝 일어나 앉아 핸드폰으로 교신을 시도했다. 대략 5분쯤 지났을 때였다. 폐가 주위로 작은 웅성거림이 일더니, 다섯 명의 사내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저마다의 표정마다 험악한 기운이 잔뜩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