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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1회
섬과 나그네
손 정 모

1. 호수의 달빛

  11월 초순의 저녁 무렵이었다. 예리한 파공음(破空音)을 일으키며, 초저녁부터 강풍이 호숫가의 솔숲을 할퀴고 있었다. '휙휙'거리며 솔가지들이 금세 부러질 듯이 뒤엉켰다가는 허리를 펴지 못한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민수는 마구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한껏 매서운 눈초리로 주위를 노려보았다. 감정이 불안할 때면 시도 때도 없이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지곤 했다. 그는 어느새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쥔 채, 흐느적거리는 솔숲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뇌까리고 있었다.
  '아, 내 나이가 언제 서른 하나에 접어들었을까? 나이에 비해, 뭐가 이리도 안 풀릴까? 정말 한 번 날려 버려, 응? 까짓 것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번민(煩悶)의 싹을 잘라 버리고 싶었으나, 생각에 그쳤을 뿐. 틈만 나면 온갖 번민이 머리를 휩싸며 끓어오르곤 했다.

  경기도 평택에 있는 전자부품 제조업체에서의 일이었다. 구제 금융으로 인해, 국내의 도처에서 위기를 맞고 있을 때였다. 구조 조정의 바람으로, 회사가 술렁거리던 지난 4월말의 오후 2시 무렵이었다. 사장실에서 걸려 온 인터폰이라며, 최 양이 사장실로 올라가 보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문득 가슴이 섬뜩해져 오며, 불안감에 휩싸인 채 생산과를 나섰다.
  "강 과장! 중역 회의의 결정 사항이네. 자네를 잃게 되어 너무나 가슴이 아프지만, 사장인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어. 서운한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테지만, 부디 회사를 이해해 주길 바라네."
  '쩡'하고 얼음장이 갈라지는 듯한 느낌이 일시에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온 세상이 하얗게 바래지며, 전신의 혈맥이란 혈맥은 다 얼어붙는 듯했다. 아,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리다니?

그는 다시금 끓어오르는 울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해는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고, 농염한 저녁놀만 핏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저녁놀로 인해, 호수의 수면마저도 수만 마리의 물고기 떼처럼 파드득거리고 있었다. 잠시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다가 그는 지도를 펼쳤다. 서부 경남 최대의 인공호인 진양호였다. 진양호의 북쪽 유역인 신풍리의 호숫가에서 그는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숫가에는 갈대와 억새풀로 뒤덮인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 풀밭이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끝없이 널브러진 솔숲이 호수를 둘러싸고 있었다. 언제나 그의 귓전에는 솔숲을 스쳐 가는 청아한 바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서서히 호숫가로 걸어나갔다. 그에겐 눈앞의 광경이 그저 공허한 감각으로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발걸음을 옮기다가 부지불식간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 어쩜 이다지도 가혹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이건 해도 너무 심한 거러구.'
  불어오는 바람결에 머리카락을 마구 휘날리며, 그는 이내 과거의 상념에 젖어 들었다.

  "민수 씨! 잠시 나 좀 봐요. 미래가 촉망되는 일 자리라더니, 어쩜 그렇게 간단히 밀려날 수가 있어요, 정말? 설사 밀려났다 치더라도, 지금쯤은 새 직장을 잡아야 하잖아요? 무려 다섯 달을 빈둥거리기만 하다니, 당신 그렇게도 무능력해요? 나를 나쁘고 모진 여자라 생각해도 할 수 없어요. 나는 무능한 사내와는 더 이상 생활을 지속하고 싶지는 않아요. 우리, 이만 헤어지기로 해요. 다행히 우리 사이에 태어난 아기도 없으니, 별로 부담도 없으실 거예요. 제가 법원에서 서류가 나오는 대로 바로 연락 드릴게요."
  그는 발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울화가 끓어올라, 핏발 선 눈을 치떴다. 그는 이내 또다시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래, 3년간 못난 남편의 뒷바라지를 한다고 애썼소. 다 내가 무능한 소치인데, 누구를 탓하겠소?'
  마음을 평온히 추슬러 보려고도 했지만, 아무래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길가에 나뒹구는 조약돌을 보자마자 힘껏 발을 들어 내질렀다. 조약돌은 금세 허공을 날아올라 포물선을 그리더니, 호수의 수면을 향해 곤두박질치며 물거품을 튀겼다.

  이혼하기 2년 전의 일이었다. 밤이 깊었는데도 아내는 인터넷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연방 보험 자료들을 관련 사이트로부터 찾아서 다운을 받느라고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가 조심스레 아내에게 교접의 뜻을 비추자마자, 아내는 대번에 발끈거리며 따지고 들었다.
  "정말 왜 그래요? 우리가 지금 애를 가질 처지인가요? 보험업이란 발로 뛰는 거라구요. 내가 좀 벌어서 생계에 보탬을 주겠다는데, 뭐가 불만이세요? 우리가 최소한 37평 아파트를 마련할 때까지는 절제하기로 했잖아요? 애도 아니고, 이렇게 욕정을 추스르지 못해 어떡할 작정이에요?"
  그는 어느새 고개를 살래살래 젓고 있었다. 아무래도 해도 너무 했다는 생각이 또다시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보험사 여직원인 아내는 매사를 진행함에 있어서도 신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신중한 반면에, 업무의 처리면에서는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신속하고 민활한 편이었다. 그랬기에, 회사로부터는 잔뜩 신망을 받고 있는 위치였다. 그러한 아내였기에, 그의 실직 이후의 암담한 시간을 견뎌 내지 못했다.
  "아니, 여보! 과장이 될 때까지 친구도 안 사귀고 뭐 했어요? 곤경에 처했을 때는 친구를 찾아 부탁도 좀 하고, 뭔가 움직여 봐야 하잖아요? 아무래도 내가 제 명에 못 살겠어! 이렇게 무능력한 사람과 같이 살다니, 짜증 나 죽겠어, 정말."
  앙칼진 눈빛에 결기가 서린 아내의 얼굴이 금세 호수의 수면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는 넋을 잃은 듯이, 지난날의 시간들을 곰씹어 보았다. 어느새 자신도 몰래 호수의 수면을 향해 중얼거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아내는 내가 실직하기 전까지는 내게 잘해 주었어. 모두가 내가 못 난 탓이라구. 정말 내가 왜 이 모양이 되었을까?'

  점차 바람결이 비숫날처럼 매서워지고 있었다. '쏴아쏴아'하고 들려오는 솔바람 소리가 밤이 되면서부터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수런거리는 잎들이 허공에서 부딪힐 적마다 흡사 금속질의 섬광이 치솟는 듯도 했다. 황금빛의 솔잎이 솔숲 바닥에 지천으로 쌓여,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는 오솔길을 버리고, 길이 뚫리지 않은 솔숲 속으로 무작정 파고들었다. 비숫날처럼 날 선 솔잎들이 뺨이며 목덜미를 가차없이 찔러대고 있었다. 두어 걸음을 옮겨 놓자마자 밀집한 소나무들로 인하여, 도저히 길을 열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암담한 느낌이 전신을 휩쓸었다. 석양빛에 휘감긴 자주 빛 하늘의 색조에서 문득 설움이 묻어 났다. 선홍색과 자줏빛으로 뒤엉킨 빛살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치솟는 설움의 조각들을 털어 내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바람결에 내맡긴 채, 그는 노송의 둥치를 움켜잡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탁 틔어야 할 하늘이 아무래도 답답했다. 올려다볼수록 허망하고 암담할 뿐이었다.

  참새를 닮은 멧새 두 마리가 아까부터 그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세상이 싫어지다 보니, 새들까지도 그를 업신여기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새를 바라보는 사이에 점차 눈시울에 눈물이 괴어오르며, 과거의 상념에 잠겼다. 그 때 그의 머리엔 문득 돌연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아, 내게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던가?'
  그 때가 아마 결혼한 지 삼 개월쯤 된 시점이었을 터였다. 그에게 아내가 북한산 등반을 하자고 졸랐다. 마침 토요일은 식목일이었기에 일요일과 연휴를 이루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부터 북한산의 대서문(大西門)을 지나, 산성을 넘어 산의 계곡을 찾아들었다.
  오전 10시 무렵의 하늘은 너무나도 쾌청하여,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산의 여러 봉우리들 중에서, 남서면으로 열려 있는 계곡의 정상 부근이었다. 다른 곳은 바위와 잡목으로 마구 어우러져 있었다. 반면에, 정상 부근의 그 곳은 두 평 넓이의 잔디가 곱게 펼쳐져 있었다. 그보다도 그의 아내가 먼저 그에게 눈짓을 보냈다. 마치 '우리가 쉴 곳은 바로 여기에요.'라는 듯이. 그는 아내와 함께 잔디 위에 나른한 몸을 눕혔다. 신혼 초였기에, 마음이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었다. 잔디에 나란히 몸을 눕혔을 때, 그의 머리엔 문득 연애 시절의 생각이 떠올랐다.

  혼전 2년간이나 지속되어 오던 연애 생활이었다. 만남 자체가 행복이었고, 맑은 눈빛과 미소는 생명의 원천이었다. 만난 지 넉 달쯤 되었을 무렵부터였다. 그와 그의 연인인 희선은 사랑의 밀어가 무르익을 때쯤이면, 농밀한 애무를 하곤 했다. 혼전에는 절대로 교접은 하지 말자는 것이 서로의 당연한 약속이었다. 그랬기에, 진행되는 애무의 정도는 가히 농염한 상태였다. 그도 그랬거니와 그녀도 만날 때마다 몸달아 하곤 했다. 주로 둘이 만나, 애무를 하곤 했던 장소는 주로 야산의 기슭과 계곡이었다. 거기는 어지간해서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들이었다.
  애무가 점차 농밀해져 갈 무렵이면, 그는 그녀의 옷을 벗겨 나갔다. 서로 혼전에는 교접을 말자는 약속이 있었기에, 더욱 더 그랬을 터였다. 만날 때마다 그는 가슴 졸이며 그녀의 옷을 벗겨 내렸다. 그리하여, 그녀는 알몸으로 하루 종일을 산 위에서 애무를 받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때엔 온 우주가 그들의 것인 양 감미롭고도 황홀할 따름이었다.

  그가 옛 날의 추억에 젖어, 아내를 바라볼 때였다. 이심전심이랄까 ? 놀랍게도 아내가 먼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기, 옛 날 생각이 나? 왜 있잖아? 연애 시절 때엔 산에 오를 때마다 나를 발가벗겼잖아? 그러면서, 자기만 옷을 입고, 나는 하루 종일 발가벗겨진 채였잖아? 그 때의 애무만 떠올리면, 온몸이 짜릿짜릿해져 미칠 지경이야. 자기야, 지금도 그 때처럼 나를 뿅 가게 해 줄 수 있어? 흐응, 자기야아! 나 좀 그 때처럼 어떻게 해 줘, 응?"
  "좋아, 오로지 연애 시절만큼이야, 알겠어? 설마 여기서 방사를 하자는 것은 아니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 데, 뭘 못 들어주겠니?"
  일을 착수하기 전에 충분히 주위의 동태를 살폈다. 휴대용 쌍안경으로, 주위의 곳곳을 둘러보았지만, 외진 곳이었던 관계로 인적이라곤 전혀 없었다. 하루 종일을 발가벗은 채, 누워 있을지라도 일반인들에게 발견될 우려는 없어 보였다. 혹시 봉우리의 정상이라면 문제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거기엔 어느 누구도 쉽게 찾아들지 않을 외진 곳이었다. 그는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후에, 손을 뻗쳐, 아내의 블라우스부터 벗겨 나가기 시작했다. 연애 시절을 떠올렸던 탓인지 손이 파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달아오르는 숨길을 추스르며, 이윽고 아내의 팬티마저 벗긴 다음에 아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연애 시절처럼 나란히 다리를 뻗고 잔디에 앉은 채, 아내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새로운 느낌이었다. 일상의 아내가 아닌 발가벗겨진 연인으로서의 아내가 곁에 있었던 터였다. 덩달아 그도 벗고 싶었지만, 당초의 약속대로 연애 시절을 재현하기 위해 참아야만 했다. 돌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옷을 입고 있어야 마땅하다고 여겼다.
  이윽고, 그는 아내의 몸을 끌어당겨 젖가슴을 어루더듬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아내는 비음을 흘리며 황홀경에 빠져드는 모양이었다. 출산 전이었기에, 아내의 몸매는 처녀와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뾰족하게 앞으로 치솟은 젖무덤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는 서서히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유두를 거쳐, 서서히 전신을 어루더듬으며 애무를 하기 시작했다. 연애 시절을 떠올리며 진행되는 그의 애무에, 아내는 연방 가쁜 숨결을 토하며 달아올랐다.
  "자기야, 너무너무 행복한 거 있지? 나 이대로 콱 죽어 버려도 원이 없겠어! 이렇게 황홀할 수가 있다니! 아, 정말 미칠 것 같애."

  산청 산골짜기의 물 맑은 굽이를 감돌아 흘러내리던 경호강이 흘러드는 입구 쪽의 호반에서였다. 그는 여전히 솔숲에 묻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과거에는 그렇게 사이가 좋았던 부부가 이게 무슨 꼴이람? 아아, 나는 떠나간 아내를 미워할 자격

조차 없는 못난 놈이라구, 알아?'
그는 두 팔을 교차시켜 팔짱을 낀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지겨운 인생! 콱 여기서 종지부를 찍어 버려? 내가 사라진다고 해서 이제는 누구 하나 날 위해 울어 줄 사람조차 없구먼.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고 말았지? 모를 일이야, 모를 일이라구!'

  그가 극도의 번민에 휩싸여 몸을 떨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맑고도 힘이 실린 대금의 음률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아니, 이 밤에 대금의 음률이라니?'
  그에게 처음에는 환청인 듯도 싶었다. 하지만, 다시 귀를 기울여 들어도 확실한 대금의 선율이었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유초신지곡 중의 상영산이었다. 한 번 듣게 되면, 곡이 끝날 때까지는 귀를 돌릴 수 없는 곡이었다. 한숨과 흐느낌과 달뜬 환희가 잔뜩 어우러진 곡이기도 했다. 부처는 영취산(靈鷲山)에서 체험으로 이루어진 설법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실어 보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자신은 남들에게 드러내 보일 것도,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이 날 따라, 그에게는 옷깃에 휘감기는 선율이 그렇게 절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문득 회상에서 깨어나 하늘의 색조를 흘낏 살펴보았다. 어느새 저녁놀은 바람에 풀려 버리고, 주위엔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저녁 어스름이 몰려들자 솔숲은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어스름이 진 솔숲을 빠져 나와, 호반의 텐트 속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대금곡(大　曲)의 진원지를 찾아 나설 것인지? 이 때 그에겐 잠시 갈등이 일었다. 그는 솔숲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대금의 선율은 금방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점차 그에게는 대금의 선율을 추적하고픈 욕망이 치솟아 올랐다.
'그래, 유려하면서도 장중한 대금곡을 능숙하게 연주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들어본 바로는 꽤나 능통한 연주임에 틀림없었다. 어설픈 객기로 아무나 흉내낼 만한 악곡이 아니었던 터였다. 흐느끼는 듯하다가도 달래는 듯하고, 그러다가도 회한에 눈시울을 적시는 선율이지 않는가?
  '대금의 연주자는 필시 악곡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음이 틀림없으리라. 어쩜, 깊은 사연을 감춘 기인인지도 모를 일이리라. 아니면, 음률에 조예가 깊은, 퇴직한 국악인일지도 모를 일이리라.'
  솔숲에는 호수의 수면으로부터 피어 오른 물안개가 뽀얗게 밀려들기 시작했다. 서서히 답답해지려는 듯했지만, 금세 청아한 소리를 내며 솔바람이 밀려들어 가슴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무성한 솔숲이라, 무작정 앞으로 뚫고 나가려니 장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얼굴이 솔잎에 할퀼 적마다 자꾸 따끔거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솔숲을 뚫고 나갔다. 오로지 대금의 선율만을 찾아서, 발길을 옮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대금의 음률은 솔숲의 북서 방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솔숲을 헤쳐 나갈 적마다 음률은 한층 더 크게 울려오고 있었다. 굵은 소나무 가지를 막 건드리는 순간이었다. 보금자리에 깃들였던 방울새 떼가 후루룩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몹시 놀란 듯한 활갯짓이었기에, 상당히 미안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한 십여 분을 헤쳐 나갔을까? 그의 눈앞에는 솔숲의 한 자락이 허물어 내리면서, 은빛으로 굽이치는 호수가 드러났다. 마침내 솔숲을 관통하여 호수의 또 다른 가장자리에 도착한 거였다. 호숫가에는 갈대가 길길이 치솟아 널브러졌고, 솔숲이 끝난 지점에는 하나의 폐가(廢家)가 서 있었다. 한 마디로, 폐가의 앞쪽으로는 갈대가 널브러졌고, 뒤로는 울창한 솔숲이 펼쳐져 물결치고 있었다.

  대금의 선율은 바로 그 폐가(廢家)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자세를 가다듬은 뒤에,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폐가를 향해 접근했다. 폐가는 조그만 건물 한 채로 이루어져 있었다. 폐가의 지붕에는 노후한 기왓장들이 물고기의 비늘처럼 깔려 있었다. 지붕의 추녀 위, 동쪽 하늘에는 만월에 가까운 달이 걸려 빛을 내뿜고 있었다. 담은 다 무너져 내렸으며, 폐가의 벽체는 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게다가 폐가의 한 쪽 벽면은 일부가 살짝 허물어져 있었다. 그는 허물어진 벽면을 향해,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다가섰다.
  벌써 십여 분 가량을 쉬지 않고 대금의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조금도 선율이 처진다거나 일부의 영역에서조차도 소리가 뒤엉키는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마음에는 이제 슬그머니 경계심마저 일려고 했다. 이제 폐가와의 거리가 십여 미터쯤 떨어진 거리에 이르렀다. 어둑어둑했지만 허물어진 벽을 통해, 건물 안의 사람의 형상이 아슴푸레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이 때부터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문득 과거의 상념이 살며시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가 결혼하기 1년 전 무렵이었다. 여름철 휴가에, 어려서부터 죽마고우(竹馬故友)였던 인권과 함께 남해의 해변을 더듬고 있을 때였다. 그가 찾아든 곳은 통영시에서 여객선으로 한 시간 반 거리의 추봉도였다. 섬의 주민들은 이전부터 추봉도를 간단히 '추봉'이라고 불러왔다. 추봉에는 분교급인 초등학교가 자리잡은 이외에는 다른 큰 건물이 없었다. 잘룩하게 치솟은 섬의 정상 부근에는 해묵은 노송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섬의 북서쪽 해안은, 인가라곤 별로 없는 한적한 바위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관광객들에게 추봉은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섬이었다. 그런 연유로, 연중 섬을 찾는 관광객들의 수도 많지 않은 편이었다. 바위 벼랑 곳곳마다 간간이 치솟은 해송(海松)들로 인해, 해안은 배어난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바다의 수면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의 반석 위에서, 그와 인권은 낚싯대를 드리웠다. 갯바위 낚시로, 섬에서는 길다란 대나무에 직접 낚싯줄을 매단 낚싯대를 즐겨 쓰고 있었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으니, 대략 십여 분마다 어신(魚信)이 전해져 왔다. 그리고, 그 때마다 우럭이며, 볼락, 놀래미, 도다리 등이 낚싯줄에 매달려 올라왔다. 그와 인권은 애초부터 일 주일간의 휴가를 받아온 터였다. 비록 소속된 회사와 업종은 달랐지만, 둘 다 회사원인 터였다. 구체적으로 밝히자면, 그는 전자제품 조립회사의 직원이었고, 인권은 건설회사의 현장 직원이었다. 그랬던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을 보는 시각이 둘은 상당히 달랐다. 아마도 자신의 업무 영역이 몸에 밴 탓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둘은 마음 편히 추봉의 해안에서 텐트를 쳐 놓고는 내리 닷새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들은 주로 낮에는 섬의 이곳저곳을 산책하다가, 피곤하면 잠을 잤다. 그러다가 초저녁 무렵부터는 해안의 너럭바위에 올라, 낚싯대를 드리우곤 했다. 그들 주변에서 새로운 변화가 생긴 것은 텐트를 친 지 이틀째부터였다.

  저녁 7시 무렵쯤 되었을까? 20대 초반의 여인이 홀연히 두 사내가 있는 해안 벼랑 위에 나타난 거였다. 예상치 못한 여인들의 출현에 두 사내는 일순 놀랐지만, 부쩍 흥미도 일었다. 그와 인권은 일부러 여인으로부터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서로간에 대화를 나누며, 바다를 내려다보며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여인은 날아갈 듯이 산뜻한, 연두색 블라우스에 녹색의 미니 스커트 차림새였다. 초승달처럼 양 끝만 살짝 휘어진 눈썹에, 오똑한 콧날이며 시원스런 눈동자를 지닌 여인. 아니, 어쩜 이렇게도 아름다울 수가? 그들은 너무나 빼어난 미모의 여인을 대하자마자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갸름한 얼굴에, 뽀얀 살결의 여인은 한없이 청순한 자태로 사내들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점차 가슴을 졸이다가, 두 사내는 고개를 돌려 여인을 바라보았다. 버들잎에 휘감기는 바람결처럼, 한없이 서글서글한 눈매의 여인이 그들을 향해 다가서고 있음에랴! 두 사내는 일순 숨이 탁 막히는 듯했다. 그들로부터 십여 걸음쯤 떨어진 거리에까지 여인이 접근하자마자, 마침내 그들은 허리를 펴면서 일어섰다. 막상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막 그가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여인의 경쾌하고도 또렷한 음성이 사내의 귓전에 날아와 박혔다.
  "아, 석양에 휩싸인 바다! 나를 이 곳으로 데리고 온 저 물안개!!"
  여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감전된 듯한 목소리로 그가 즉시 받아 넘겼다.
  "그 물안개로 인해, 미인을 보게 된 나! 진정한 아름다움에 빠져든 황홀경."
  여인은 흠칫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그를 향해 다가서며 물었다.
  "방금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하셨죠? '진정한 아름다움의 세계'가 바로 제가 지금껏 찾아 헤매는 화두(話頭)이거든요. 대관절 그게 뭐예요? 제게 좀 알려 줄 수는 없나요? 제게 그걸 알려 주신다면 바로 이 자리에서 스승으로 모실 게요."
  곁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인권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대화에 동참했다.
  "어, 대화의 방향이 약간 이상해지네요? 뚜렷이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느껴져요."
  여인은 인권의 얘기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계속 민수의 얼굴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에, 그는 약간 당혹스러웠다. 여인의 미모가 하도 빼어난 데 대한 찬사를 하다가 그만 곤경에 빠진 셈이었다. 그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는 침착해지려고 애쓰면서 대답했다.
  "저는 거창한 철학 같은 것은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단지 제가 느낀 것은 댁의 얼굴이 하도 아름다웠다는 점이에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다른 뜻이 있었다는 말의 의미는 또 뭔가요? 어쩌면 여기서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여인의 말이 막 끝나자마자, 인권은 텐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더니, 금세 진로 한 병과 고추장을 들고 나왔다. 인권의 배려로 셋은 우럭의 회와 소주병의 둘레로 모여 앉았다. 낚시 걸상에 여유가 있었기에, 셋은 편안한 자세로 앉을 수 있었다.

  미모의 여인을 바라보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이건 마치 쌩떽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지구에 불쑥 나타난 꼴인 걸. 여태 여인은 어디에 있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걸까? 그녀가 버리고 온 소혹성은 어디에 있는 걸까 ? 생각할수록 이상해지네?'
  인권은 그 나름대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히야, 이 년 정말 잘 빠졌네. 이걸 그냥 홀랑 벗겨 따먹어 버려? 아랫도리가 뻐근해져 오는 것이 정말 미칠 지경이군.'
  인권에겐 자꾸만 미니스커트 속의 여인의 넓적다리가 마음을 유혹했다. 회를 먹는 듯하면서도 눈길은 쉴 새 없이 여인의 넓적다리에 머물곤 했다.
  '대관절 이 년이 팬티는 입기나 한 것일까? 어디서 굴러먹던 작부(酌婦)인지는 모르겠지만, 기가 막히게 섹시하게 생겼는걸? 섬을 찾는 여행객들이 별로 없다 보니까, 살살 꼬리를 치러 온 걸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처녀가 남자만 있는 곳에 왜 나타나냐구? 아무래도 거기가 되게 꼴리든지 무슨 수가 있지 아마?'

  점차 회색 빛으로 사위어 가는 해변의 석양을 바라보며 여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여인은 아예 주변에 사내가 있다는 것도 초월한 모양이었다. 자꾸만 사위어 가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더니, 급기야 눈시울에 이슬이 맺혀 흘렀다. 결국 '흑흑'거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여인의 그러한 모습을 대하게 되자, 자신도 몰래 가슴이 저려 왔다. 그러면서, 자신도 몰래 슬퍼지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는 자신도 몰래 가슴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 사랑하는 나의 공주님! 공주님이 떠나온 소혹성이 안 보여, 그렇게도 가슴이 애달픈지요? 소혹성에서는 단순히 의자를 몇 번만 옮겨 놓아도 석양을 오래오래 바라볼 수 있었겠지만요. 여기서는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지는 해를 어째 볼 도리는 없더라구요. 지는 석양 너머로 그대가 바라본 것은 무엇이었나요? 정성 들여 가꾸던 장미꽃인가요 아님 그대의 죽음을 예약해 놓은 빛깔 고운 독사인가요?'
  처음부터 불신에 찬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던 인권은 입가에 잔뜩 조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 인권은 그 나름으로 여인을 마음속으로 평가했다.
  '흥! 그럼 그렇지? 네 년이 별 수 있겠어? 이제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군! 그래도 연기 하나는 죽여주는데? 아마 그런 식으로 몇 놈의 돈주머니를 울궈 내었는지 모르겠는걸? 하지만, 너의 그런 수법은 내겐 안 통한다고, 알았어?'

한동안 여인의 흐느낌은 그치지를 않았다. 잠자코 지켜보는 이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대략 십여 분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여인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지우기 시작했다. 눈물을 수습한 뒤에, 여인이 한 첫 번째의 동작은 빈 잔을 민수에게 내민 거였다.
그는 경건한 자세로 술을 따라 주었다. 여인은 당당한 자세로 술잔을 받아들었다. 그러더니, 여인은 술을 한 모금씩 마시며 다시 서쪽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럴 때엔 기다려야 하는 법이라고, 절대로 서둘 필요가 없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여인은 말문을 열었다. 올해 스무 살의 여인은 대학 2학년에 재학중인 은지였다. 현재는 학교의 축제 기간이라, 잠시 쉬는 중이라고 밝혔다. 고향이 통영시인 그녀는 서울에서 줄곧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가 애완견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8개월 전부터였다. 그녀의 자취방에 코커 스패니얼(Coker Spaniel) 계통의 애완견을 사 들고 온 것은 그녀의 친구였다. 결이 고운 하얀 털의 어린 애완견은 아주 영리한 개였다. 여인은 개에게 '노을'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노을은 키운 지 이틀째부터 펼쳐 놓은 신문지 위에서만 변을 보았다. 사료도 잘 먹고, 밥과 과일이며 채소들까지도 잘 먹어 치우는 노을이었다.
  헌데, 노을을 키운 지 3개월째 되면서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영리한 노을에게 간질병의 징후가 나타난 거였다. 잘 놀다가도 얻어맞은 것처럼 느닷없이 깨갱깨갱 소리를 내며 2분 가량을 뛰어 다녔다. 발작이 끝날 무렵이면, 입에 뚝뚝 흐르는 점액질의 침을 흘리며 다리를 떨곤 했다. 간질이 나타나기 시작한 초기의 경우는 1주일에 서너 번이 고작이었다. 이 때에는 노을을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서 2개월에 걸쳐 치료를 받아 보았다. 하지만, 간질은 원천적으로 치료되기 어려운 질환이었다. 치료를 한답시고 데리고 다녔어도, 점차 악화 일로를 치닫는 노을의 병세였다. 점차 간질의 발작 빈도가 높아지면서 발작의 시간도 길어지고 있었다. 키운 지 6개월째에 접어들자, 노을은 하루에도 서너 번씩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점차 발작의 시간은 길어졌다. 그 때마다 입에 거품을 물면서 지극히 고통스러워했다. 발작이 끝날 무렵이면, '우어엉 !'하고 목이 잠긴 소리로 울음 조각을 털어 내곤 했다. 노을을 볼 때마다 여인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했다.
  '아이, 이를 어쩌나! 저 고통을 하루에도 몇 번씩 평생을 되풀이해야 한다면? 이는 사는 게 아니고, 날마다 고통을 축적하는 것이리라. 이를 어쩌면 좋아?'

  여인은 한 잔을 비운 뒤에, 이 번에는 민수에게로 잔을 돌렸다. 잔을 받고 돌리는 품이 엄연히 격식을 갖춘 상태였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풍도마저 풍겨 나오고 있었던 터였다. 애기를 듣는 사이에, 인권은 어망(魚網)에서 우럭을 건져 올려 회를 장만했다. 금세 회는 쟁반에 그득했고, 회는 입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들곤 했다. 벼랑에 드리워진 해송에서는 솔잎들이 길길이 치솟아, 맑은 음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바람이 일 적마다 솔잎의 향기가 은은히 해변을 뒤덮고 있었다.
  여인은 술을 반 잔 가량 마신 다음에,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입가심으로 회를 두어 점 집어먹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처음에는 상당히 냉담한 표정을 짓던 인권도 서서히 여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노을을 키운 지 8개월째가 되던 지난 주 금요일의 일이었죠. 그 날은 교내 축제가 시작되던 날이었기에, 저는 그냥 집에서 머물기로 했었죠. 그 날은 새벽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한밤중에 한 번. 도합 세 차례의 발작이 일어났어요."
  그 날 저녁 무렵의 상황이었다. 물을 마실라 치면, 두 귀가 물에 닿을 정도로 귀가 길다란 노을이었다. 암캉아지인 노을은 평소에도 애교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때로는 5 kg의 체중으로 하루 종일 마루를 휘젓고 다니기도 했다. 여인이 밖에서 돌아오면 반가워서, 뒷발과 몸뚱이를 반복적으로 허공으로 솟구쳐 껑충거리기 일쑤였다. 여인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면, 얌전히 무릎 위에 올라 드러누워 있곤 했다. 고구마를 삶아 껍질을 벗길 때면, 빨리 달라는 듯이 '아어엉!'하고 울며 보채기 일쑤였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었다간 작은 몸뚱이로 연방 껑충거리며 치솟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여인이 그릇을 들고 움직일 때면, 뒷발만 마루에 붙인 채 곧잘 여인을 따라다녔다. 뒷발로 일어선 채, 앞발은 여인의 넓적다리 부근을 쉴 새 없이 후벼 대었다. 때론 헉헉거리기도 했고, 혀를 날름거리기도 했지만, 눈빛은 언제나 맑게 빛나던 노을이었다.
  "그러던 노을이가 말이에요. 금요일 저녁 8시 무렵에 또다시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어요. 발작의 전초 동작은 제 자리에서 두세 번 빠르게 도는 거였어요. 그러다가 '깨갱깨갱'하며 마루를 끝까지 달려갔다가는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기를 반복하는 거였죠."

  그 날 저녁의 상황은 몹시도 심각했다. '깨갱깨갱'하고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노을은 5분 가량을 마루를 마구 질주했다. 그러다가 혀를 잘못 물었는지 입에서 흘러내린 피가 하얀 털을 빨갛게 적셨다. 게다가 근육 마비까지 일어나, 바닥에 나뒹군 채 일어서지 못해 버둥거리기만 했다. 뻣뻣한 다리를 바로 세우지 못해, 입을 덜덜 떨어 대며 노을은 연방 울부짖었다. 다시 5분 가량을 그렇게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는 노을이었다. 겨우 몸을 일으킨 노을이의 주둥이에는 침이 띠를 이루며 줄줄 마루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때마침 주인 집 여자도 마루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는 한 마디를 거들었다.
  "이 봐요, 학생! 하루에도 몇 번씩 소리를 질러대며 발작을 하는데, 어떻게 평생 데리고 살 거유? 이건 사는 게 아니라, 혹독한 지옥도를 보는 느낌이야. 나 같으면 동물병원에 가서 안락사(安樂死)를 시키겠어. 그렇게 하는 것이 강아지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여겨져. 목숨만 살아 있다고 해서, 어디 사는 건가? 아마도 이 강아지는 전생에 지은 업보 때문에, 고통을 반복해서 받을 거야. 노을이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고통에서 발리 벗어나게 해 주는 게 도리가 아닐까 싶어. 누군가 그렇게 해 주지 않는다면, 노을은 계속해서 잔인한 형벌을 받게 될 거라구. 내가 간섭하는 것은 아니니까, 부디 잘 생각해 보라구."
  주인 여자가 위층으로 올라간 뒤에, 여인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목숨만 붙어 있다고 해서, 사는 게 아니라고? 아무래도 노을의 발작은 잔혹한 천형(天刑)이야. 내가 노을이를 위해 해 줄 게 뭘까? 자연사(自然死)를 할 때까지 지켜 주고 돌봐야 하는 게 도리인지? 아니면, 안락사를 시켜 날마다 되풀이되는 잔혹한 천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는 게 도리일까? 아,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 정말 생각할수록 미치겠네, 정말.'

  낮에는 집에 없어서 잘 모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노을과 함께 하는 새벽과 저녁과 한밤중이면 되풀이되는 발작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이를 통해 유추할진대, 낮에도 몇 번씩이나 발작을 하여 나뒹구는지 생각할수록 머리가 어지러웠다.
  저녁의 격렬한 발작으로 인해, 고뇌와 갈등에 휩싸인 채, 여인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꿈자리가 사나워 이리저리 뒤척거리기만 했을 뿐, 제대로 잠들 수가 없었다.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안락사를 시킬 것인지 자연사를 시킬 것인지를 놓고 번민에 휩싸였다. 실타래처럼 생각이 잔뜩 뒤엉켜 있을 때였다. '깨갱! 깨개앵!'하고 또 노을이의 발작이 시작된 거였다. 흘낏 눈을 돌려 야광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3시 5분이었다. 자지러질 듯이 울부짖는 소리와 마루를 종횡으로 질주하는 소리.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 저녁에 그처럼 심한 발작을 하고서도 또다시 격렬한 발작을 하다니? 어이구, 우리 불쌍한 노을이! 너도 발작을 하고 싶어하겠니? 그 작은 몸에 얼마나 고통스럽겠니? 이 불쌍한 녀석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네가 이다지도 내 마음에 고통을 안겨 줄 줄이야?'
  노을이 발작할 때마다 달려나가, 끝나기를 기다려 안아 주고 달래 주곤 했었다. 하지만, 그 날 밤만큼은 여인은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여인의 마음 하나에 노을의 운명이 바뀌는 터였기 때문이다. 귀를 기울인 채, 침실문 밖의 노을의 발작이 멎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략 십여 분이 지나서야, '우어엉!' 소리를 내며 노을이 숨을 할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작이 끝나고, 기력이 쇠진하여 엎드려 누웠을 노을이를 떠올리자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겨우 마음을 추슬러 눈감고 자리에 누우니, 얼추 새벽 다섯 시 무렵이었다.

  요란한 자명종 소리에 여인이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아침 7시였다. 여인은 부스스한 얼굴로 침실문을 살며시 열었다. 침실문 밖에는 노을이 엎드려 있다가, 앞발을 들어 일어서면서 꼬리를 살래살래 휘젓고 있었다. 여인은 침실문을 여는 순간에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말았다. 절대로 생명체에 가혹한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보다 노을을 위한 길은 뭔가? 진정으로 노을의 행복을 찾아 주는 길은 뭐란 말인가?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지만, 혹독한 고통을 되풀이해 받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누군가 대신해 주지 못한다면, 모질고 질긴 생명 때문에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여겨졌다. 그리하여, 오후 2시 무렵에 동물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종식시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일단 마음을 정하자마자, 여인은 의도적으로 마음을 차갑게 먹기로 했다. 그렇게 눈을 맞추고 싶어하는 노을에게 눈길 한 번 보내지 않고 마루에 들어섰다. 혹시라도 노을에게 눈길을 준다면, 마음이 약해져 결심이 번복될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정을 준다면, 정의 굴레에서 헤어나기가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점심 무렵의 고구마 간식을 줄 때에도, 껍질을 벗기고는 바구니에 담아서 노을에게 내밀었다. 노을은 게걸스럽게 달려들어 금세 바구니를 비우고는 여인을 바라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노을이 간식을 먹고 혼자 담요 위에 올라가 잠들었을 때였다. 여인은 침실에 들어가, 노을이 일어날 때까지 눈물을 글썽이며 깊은 고뇌에 잠겨 있었다.
  마침내 노을이 깨어 일어난 오후 2시 무렵이었다. 여인은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며, 노을을 안고 동물병원을 찾았다. 여인의 얘기를 듣고 난 수의사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떡거릴 따름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노을을 지금껏 치료해 보겠다고 노력해 온 주치의였었다. 그랬기에, 그는 안락사를 의뢰해 온 여인을 대하자,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괴롭지만 의료 기술의 한계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체격이 건장한, 50대 초반의 수의사는 슬픔이 서린 목소리로 여인에게 말했다.
  "노을에게 아픔이라곤 없는, 좋은 세계로 보내 드릴게요. 그 동안 많이 애썼어요. 한동안 노을이 잊혀지지 않겠지만,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노을이 그 동안, 많이 괴로웠을 텐데 이제는 편한 세상으로 갈 거예요."
  노을의 안락사 및 화장하는 비용으로, 7만원을 지불하고는 여인은 동물병원을 나섰다.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에, 여인은 그만 슬픔이 북받쳐 올랐다. 연약한 노을의 영혼이 이승을 떠나야 하다니?
  "노을아! 더 이상은 아프지 않는 곳으로 가서 잘 살아라. 밥도 많이 먹고, 재롱도 많이 피우고 ……"
  가까스로 추스르고 달랬던 설움이 일시에 끓어오르며, 여인은 끝내 오열하고 말았다.

  여인의 얘기를 들으면서부터, 그와 인권의 가슴에도 어느새 슬픔이 피어 올 랐다. 셋은 슬픔에 젖어 석양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였다. 여인이 추봉을 찾은 것은 섬의 이모 댁과 석양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가슴이 혼란스러울 때엔, 여인은 종종 이모 댁과 섬의 석양을 찾곤 했다. 게다가 대학 축제 기간이라는 점도 크게 한몫을 한 거였다.
  그 날 이후로, 은지는 그와 인권과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느 때든지, 연락만 하면 서로를 찾아갈 수 있는 친숙한 사이가 된 터였다. 그 날의 석양과 여인의 슬픈 심사가 셋을 묶어 두는 역할을 한 터였다.

  민수는 십여 미터의 거리를 두고 폐가의 내부를 살펴보려고 했다. 하지만, 땅거미가 진 시각이라, 육안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갈대 숲에 몸을 숨긴 채, 휴대용 쌍안경을 꺼내 눈에 갖다 대었다. 금세, 폐가의 내부가 또렷한 형상으로 살아났다.
  무너진 벽면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폐가의 정경은 괴기스러울 지경이었다. 폐가의 방 안에는 이렇다 할 시설이나 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전신에 검은 옷을 차려 입은 40대 중반의 여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인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쉴 새 없이 대금을 불어 대고 있었다. 그는 달빛에 시계를 흘낏 비쳐 보았다. 밤 8시를 갓 지나고 있었다. 무려 20여 분이 넘도록 대금을 불던 여인의 정체는 무엇일까하고 궁금했다.
  그는 별로 할 일도 없던 차라, 계속하여 쌍안경으로 여인의 동태를 살폈다. 아까부터 여인은 지그시 눈을 감은 터였다. 혼신의 열정을 다해, 부는 대금의 선율에는 뭔가 색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는 다시 쌍안경으로 폐가의 방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방바닥에는 거적자리가 깔려 있었을 따름이었다. 방의 사방의 벽에는 여인의 옷이라고 여겨지는 두어 벌의 옷과 수건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조금 색다른 점은 방의 중앙에 노란 천이 길다랗게 깔려 있다는 점이었다. 천의 폭은 30 cm 가량으로 방을 길다랗게 양분하고 있었다. 혹시 침구류는 없는가 싶어 다시금 쌍안경을 들어 바라보았으나, 흔적조차 없었다. 다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쌍안경을 들여다볼 때였다. 여인은 마침내 대금 연주를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더니, 곧장 노란 천의 중앙에 서더니, 금세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여인은 동서남북을 바라보며, 네 차례의 큰절을 올렸다. 잠시 목 고개를 숙여, 여인은 생각에 잠기는 듯도 했다.
  여인은 이내 신발을 신더니 바깥으로 걸어나왔다. 아까부터 여인의 얼굴 모습이 궁금했었지만,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밖으로 나온 여인의 얼굴은 너무나 눈부셨다. 단지 '눈부시다'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운 정서가 그를 휩싸고 있었다. 한 마디로 은지 못지 않은 빼어난 미모의 여인이었다.
  이윽고 여인은 호숫가를 향해 산책을 나섰다. 여인이 어느 정도 호숫가를 향해 멀리 옮겨 간 연후였다. 나 자신도 몰래 여인의 뒤를 좇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여인이 앉아 있었던 방안의 구조가 궁금했던 터였다. 쌍안경에 의한 파악보다는 육안으로 살펴보고 싶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쉽게 폐가의 방안으로 들어섰다. 아까 보았던 바대로 벽면에는 여인의 옷가지들이 걸려 있었다. 방바닥에는 포근해 보일 정도의 멍석자리가 얌전히 깔려 있었다. 방바닥의 중앙으로는 황색의 천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깔려 있었다. 천의 폭은 쌍안경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넓은 50 cm 가량이었다. 밖으로 다시 나설까하여 막 문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방의 귀퉁이에 뭔가 조각상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호반단심(湖畔丹心)이라 새겨진 목재 편액이 세워져 있었다. 편액의 글씨나 색채로 유추해 볼진대, 약간의 세월이 흐른 물품이었다. 혹시 도둑으로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지는 않을까 싶어 그는 서둘러 방을 벗어났다. 그리하여, 그는 호숫가를 따라 여인의 뒤를 좇고 싶었다. 하늘에는 눈부신 달빛이 흘러내리고 있었기에 산책을 하기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