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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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12회
섬과 나그네
손 정 모

12. 아, 인생이란

  눈부시게 빠른 세월이었다. 위도에서 미란을 배웅하고 돌아온 지 벌써 사흘째였다. 날씨가 화창한 5월 중순이었다. 대전 문평동의 제3공단 입구의 카페에서였다. 오후 2시를 막 지나는 순간이었다. 민수와 정미는 칵테일 잔을 부딪치며 상쾌한 웃음을 나누었다. 그는 정미의 아름다운 치장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시리도록 하얀 투피스 정장에 살짝 걸쳐 입은 흑색의 카디건. 미풍이 일 때마다 치렁거리는 흑색의 머리카락. 우윳빛의 고운 피부에 반사되는 빛살. 가만히 바라만 봐도 저절로 마음이 황홀해지는 느낌이었다. 어쩐지 긴장되고 가슴 설레는 순간이었다. 정미가 그를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요즘 하시는 일에는 만족하세요? 혹시 갈등은 없으세요?"
  돌연한 그녀의 질문에 그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그가 막 뭐라고 대답하려 할 때였다. 술잔을 비운 그녀가 황색 파일을 그에게 내밀었다. 파일의 표면에는 '중부 전자 산업(주)'라고 찍혀 있었다. 파일을 펼치니 회사의 전황이 한 눈에 드러났다. 그가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들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회사의 설립자는 저희 문중의 어른이세요. 한 번 둘러보시고 마음이 있으면 취직될 수도 있을 거예요."

  정문을 통과하여 현장 시찰에 나섰다. 우주복 같은 방진복(防塵服)으로 갈아입은 뒤에 정미와 함께 현장을 둘러보았다. 정미의 문중 오빠인 젊은 이사가 상세하게 안내해 주었다.
  디지털 계통의 신형 전자 제품을 만드는 회사였다. 자동 회전식 비디오 카메라, 적외선 촬영기, 초소형 핸드폰, 액정 비디오 등등. 그에게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만 있으면 얼마든지 도전해 볼 수 있는 분야로 여겨졌다.
  소형 액정 비디오는 신소재 분야로 전자 선진국에서도 개척이 덜 된 분야다. 액정(liquid crystal)이란 액체와 결정의 중간 구조를 갖는 물질이다. 결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분자들의 격자(lattice) 구조이다. 격자란 최소 단위의 규칙적인 분자나 원자의 배열 구조를 말한다. 안정한 액정 구조는 신소재 개발부에서 맡을 일이었다. 반면에 액정에 관련된 전자 회로의 개발은 전자 개발부 소관이었다.
  그의 관심이 가장 끌리는 분야는 전자 회로의 개발 상태였다. 기가 디렘 단위의 집적 회로로는 전망이 불투명하다고 여겨졌다. 세상이 원하는 것은 세련된 형태의 초소형 경량화 제품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정밀도가 적절히 뒷받침되는 제품이어야만 했다.

  그의 머리를 스치며 돌연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이전에는 내가 실력 없던 회사원이었던가? 적어도 전자 회로의 개발에 있어서는 세계를 넘겨다보던 수준이 아니었던가? 그랬어도 직장을 잃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뭐였던가? 나 자신의 개인적인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사원들의 관리 문제였어. 대인 관계와 사원 관리 문제!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냐. 다분히 천부적인 성향에 크게 좌우될 거야. 생각할수록 아무래도 어렵겠는데?'
  그는 현장을 둘러보면서도 점차 깊은 상념에 휩싸였다.
  '누구에게나 일생에 기회가 몇 번은 주어진다고 했어. 지금이 그 기회인지도 모르잖아? 헌데 양어장의 일이 안정화된 판에 업종을 전환한다면? 제일 중요한 게 나의 재능인데 내가 나를 믿을 수가 없어. 내가 이럴진대 누가 날 믿겠어?'
  그는 다시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불안한 심리에 휘말려 가슴을 떨었다.
  '영원히 물고기만 만지다가 이승을 하직할 건가? 또 지난번처럼 물고기가 집단으로 떼죽음을 당한다면? 특히 서해는 선박의 출입이 빈번한 곳이잖아? 그러다 보면 기름 유출의 가능성도 만만치 않단 말야. 물고기냐 대인 관계냐?'
  그는 현장 시찰을 마치고는 정미와 함께 이사실을 방문했다. 50대 초반의 이사가 제법 상냥하게 그들을 맞았다. 이사 역시 정미의 문중 어른이라고 했다. 종업원 수는 500여 명에 달했고 연간 투자 총액은 3조원에 이르는 회사였다.
  이사는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장 대답해 달라는 말은 아닙니다. 적어도 2주간의 시간적 여유를 드리겠습니다. 충분히 검토하신 후에 다시 들러주세요. 만약 입사할 의향이 있으면 사업 계획서도 함께 가지고 오세요. 그러면 이사회에서 검토한 후에 곧바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회사를 빠져 나오니 오후 다섯 시 무렵이었다. 정미의 승용차에 실려 격포로 달렸다. 정미가 계속 뭐라고 말을 건넸지만 통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을 꽉 메운 것은 수없이 뒤얽힌 인간의 군상이었다. 그는 어느 틈에 상념에 휩쓸려 망연해졌다.
  '어떻게 하면 인간의 마음을 읽는다? 사람의 심리만큼 복잡한 게 또 있을까? 아무래도 지난날의 퇴사 충격이 내 마음을 마구 뒤흔들고 있어. 실패만큼 인간에게 잔혹한 후유증을 주는 건 없을 거야. 내가 또 실패한다면 또다시 위도로 건너갈 건가? 위도의 갈섬이 내일이라도 당장 레저 종합 타운으로 개발되어 버린다면? 오로지 현실만 있고 미래는 없어. 내가 뭘 해서 나의 왕국을 구축할까? 보란 듯 중부 전자가 나를 유혹하고 있고 곁에는 약혼녀가 있다. 내가 그녀를 위해 해 줄 일은 무엇인가?'
  그는 끝없는 상념의 터널에서 허우적거렸다. 생각할수록 사람이란 존재가 두렵기만 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깊은 고뇌에 잠겼다. 당장 자신의 심리마저도 파악할 자신이 없었다. 어느 쪽으로 생각해 봐도 뚜렷한 해답이 떠오르지 못했다.
  '되는 대로 막 살아? 일하다가 실패를 하면 그 때 생각하기로 해? 내가 왜 이렇게 우유부단한 사람이 되었을까? 남들은 몇 번씩 실패를 해도 다시 일어서는데 난 뭐냐? 단 한 번의 실패에 가정마저 박살이 나 버렸으니!'
  봄은 그 절정에 이르러 다채로운 신록의 색채로 굽이치고 있었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흘러드는 봄의 정경이 꿈결 같은 아늑한 정취를 불러일으켜 주었다. 자연보다 더 좋은 것이 이 세상에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신선이 아니더라도 봄 하늘 아래에서는 마음을 허허롭게 가질 만도 하였다. 자연의 정취에 젖어들면서도 그는 자꾸만 번민에 휩싸여 가슴을 죄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흘낏 창 밖을 보니 해가 서쪽 지평선에 걸려 있었다. 정미가 차의 속도를 줄이며 그를 향해 말했다.
  "다 왔어요. 항구에 내려드리면 되죠?"
  "벌써 격포군요. 이렇게 빨리 오다니."
  "근데, 무슨 생각이 그리도 많으세요? 시종 생각에만 빠져 있고."
  때마침 위도를 향해 출발하려는 배가 있었다. 그는 배 위에 올라 멀어지는 정미의 승용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가 시계를 들여다보니 오후 6시 무렵이었다.

  한편. 이 날 오전 10시 무렵에 세 여인이 갈섬에 닿았다. 당문혜와 그 나이 또래의 친구가 되는 여인들이었다. 통성명을 하고 보니 용환과 문혜는 마흔 다섯 살의 동갑내기였다. 용환은 민수로부터 얘기를 들은 바가 있기에 최대한 친절하게 세 여인을 보살펴주었다.
  두 시간 동안의 배 낚시에서 용환과 문혜는 동병상련의 정을 느꼈다. 낚시를 통해 우럭을 건져 올릴 때마다 여인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갈섬은 때 아닌 여인들의 활기로 술렁대는 느낌이었다.
  문혜는 용환을 줄곧 지켜보며 나름대로 판단을 내렸다. 민수로부터 이전에 들었던 바가 있어 용환을 판단하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그녀에게 용환은 세무 공무원이었기에 자산 관리와 회계 처리는 잘 하리라고 여겨졌다. 그리하여 일단 그와 결합하면 약국 운영에 상당한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했다. 문혜는 일단 마음이 정해지면 지체 없이 일을 진행하는 성격이었다.
  정오 무렵에 나룻배에서 내린 뒤였다. 문혜는 용환을 따로 만나고 싶었다. 마침 그녀의 친구들이 피곤하다기에 용환은 그녀들을 갈섬의 집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나서 용환과 문혜는 해변을 거닐며 마음을 털어놓았다. 먼저 문혜가 용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제가 어떻게 보이세요?"
  용환은 그녀의 저의를 몰라 눈을 멀뚱거리며 되물었다.
  "어떻게 보이다뇨? 무슨 뜻이에요?"
  문혜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펴며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재혼할 의향은 없으세요? 그런 측면에서 물어본 거예요."
  용환은 잠시 머쓱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생긴 건 청순 가련형인데, 말하는 건 완전 여걸이네. 미모도 아주 끝내 주잖아? 이만하면 민수의 애인인 미란 씨와 쌍벽을 이룰 만한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용환도 서슴없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사실 저도 무척 외로웠어요. 물론 재혼도 하고 싶었구요."
  "근데 왜 이 섬에서만 가만히 있었어요?"
  "민수 씨한테 들었겠지만 생활고를 해결하느라고 그간 정신이 없었어요."
  용환은 잠시 말을 끊고 그녀를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비록 외로운 처지이지만 재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누가 나 같은 사람과 재혼하러 들겠어요?"
  "좋아요. 다시 한 번만 물을게요. 여자로선 제가 어떻게 보이세요?"
  "하도 빼어난 미인이라 첫눈에 마음이 흔들릴 정도였어요. 이만하면 대답이 된 건지 모르겠군요."
  그녀는 풀숲의 수크령을 꺾어 허공으로 내던지며 말했다.
  "삶은 한순간이에요. 또 우발적인 요소도 너무 많구요. 제가 싫지 않으면 여생을 저랑 함께 하지 않을래요?"

  용환은 정말 놀랍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얼빠진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 참. 아무래도 꿈이 아닌지 모르겠네. 나를 만난 지 고작 두 시간만에 청혼을 해? 아무리 고속화 시대라고 해도 이건 너무 빨라.'
  그녀가 눈치 못 채게 그는 자신의 엉덩이를 두 차례 꼬집었다. 두꺼운 엉덩이 살이었지만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픈 기색을 가까스로 감추면서 그녀를 향해 말했다.
  "좋습니다. 흔쾌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데 ……"
  "알아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속행이란 얘기죠? 하지만, 민수 씨로부터 댁의 성품에 대해 자주 들었어요. 아닌게아니라 만나고 보니 민수 씨의 말 그대로였다는 걸 실감했죠. 그런데 뭘 망설이겠어요?"
  용환도 얼떨결에 그렇겠다며 그녀의 말에 공감의 뜻을 나타내었다. 그녀는 잠시 용환의 눈을 응시하더니 말을 이었다.
  "당신의 생각도 내 생각과 같다면 오늘 당장 저랑 같이 가자구요. 어차피 외톨이 신세인데 뭘 재고 따질 게 있겠어요?"
  용환은 새삼 놀랍다는 듯이 손바닥을 앞으로 드러내며 고개를 내둘렀다.
  "호호홋! 제스처도 아주 일품이네요."
  그녀는 뭐가 우스운지 잠시 키득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장 오늘 함께 가자구요. 같이 가서 종로3가의 태극 약국을 좀 살펴봐 주세요. 앞으로의 전망이나 제가 조언할 점 같은 게 있지 않을까요?"
  "좋아요.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근데 여기서 나가는 배는 몇 시경에나 있을까요?
  용환은 잠시 시계를 바라본 뒤에 말했다.
  "오후 2시 배가 있어요. 그 배로 나가죠."
  용환은 문혜와 나란히 집으로 들어서서 잠든 여인들을 깨워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는 다시 나룻배를 저어 갈섬의 절묘한 풍경을 보여 주었다. 갈섬을 일주하는 동안 여인들은 섬의 절경에 혀를 내두르며 탄성을 터뜨렸다.
  "어머나,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었어?"
  "변산의 풍광이 천하의 절경이라더니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군."
  "진짜 죽인다야!"
  이구동성으로 터져 나오는 찬사는 봄 하늘에 물결처럼 퍼졌다. 용환도 늘 보는 경치였지만 보면 볼수록 더욱 아름다움에 빨려드는 느낌이었다.
  마침내 오후 한 시가 넘어서자 용환은 민수에게 남길 쪽지를 작성했다. 그리고는 여인들과 함께 나룻배에 올라 위도를 향해 떠나갔다. 하루에도 수없이 오가는 뱃길이었건만 용환의 눈시울에는 눈물이 맺혀 반짝였다. 잠시라도 섬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형체 모를 서러운 감정이 후끈 치밀었다. 민수는 불그레 젖은 눈을 바닷바람에 말리며 점점 멀어지는 갈섬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이윽고 용환은 여인들과 함께 위도에 올라섰다. 멀리 서쪽 해상에 파란 색채로 갈섬이 남실거리고 있었다. 갈섬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추스른 뒤에 갈섬을 향해 손을 천천히 내흔들었다. 여인들도 그의 정서에 공감했음인지 고개를 돌리며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위도의 진리 선착장에 닿아 민수는 용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차례나 반복되었건만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핸드폰을 울렸어도 마찬가지였다. 약간 의외의 일이었지만 자고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어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내친 김에 문혜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다섯 번의 신호음에 전화를 받는 문혜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민숩니다."
  "어머, 민수 씨! 지금 어디야? 위도라구요?"
  "혹시 곁에 용환 씨 없어요?"
  "우와 쪽집게가 따로 없네. 용환 씨가 나랑 서울 가는 걸 어떻게 알았죠?"
  "뭐라구요? 갈섬이 아니라 지금 서울로 가는 중이라구요?"
  잇달아 자세하게 설명하는 문혜의 맑은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갈섬을 찾은 문혜가 자신도 만나지 않고 가 버린 것이 못내 서운하게 느껴졌다. 그는 상당히 실망한 표정으로 심구미 해변의 나룻배에 올랐다. 나룻배는 서쪽 해상에서 파랗게 남실거리는 갈섬을 향해 미끄러져 나갔다.
  그는 이제 머리가 혼란스러워 제 정신이 아닌 느낌이었다. 그가 갈섬의 집에 들어서니 마루에 쪽지가 단정히 놓여 있었다.

  민수 씨!
   당신의 볼일은 잘 봤는지 궁금하오.
   잠시 세상 구경을 좀 하고 돌아오겠소.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나도 알 수가 없소.
   가능한 한 빨리 용무를 마치고 되돌아오겠소.
   그럼 이만.
           - 용환 드림 -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문혜 씨는 전화를 받았는데 왜 용환 씨는 전화를 못 받았을까? 혹시 용환 씨가 운전중이라서 그랬을까? 아마 그랬을지도 모르겠군. 그는 철저한 안전주의자이니까.'
  통화 내용으로는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었지만 용환과 문혜의 정황이 눈에 잡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떡거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외로운 사람들끼리 회포를 푸는 것도 좋은 일이지. 그러다가 아예 재혼하는 게 어떨까? 그게 서로 돕는 일일 텐데.'
  그는 다시 중부 전자의 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양어장을 택할 건지 중부 전자를 택할 건지 결정을 해야만 했다. 실직 초기였더라면 중부 전자를 택했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그는 섬에 도착하자마자 샤워를 한 후에 저녁을 먹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식사는 제 때에 했다. 제일 중요한 게 건강임을 그는 일찍부터 터득한 거였다. 포만감으로 인하여 잠시 해변을 산책하기로 했다. 해는 수평선 너머로 지고 바다는 검붉은 빛으로 일렁거렸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서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여유를 찾고 보니 시인이나 화가가 된 느낌마저 들었다. 갈섬의 남동부를 기점으로 동쪽 해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출렁이는 바다. 휩쓸리는 바람결. 수면에 붙을락말락 너울거리는 갈매기의 활갯짓이 아늑한 정취를 불러일으켜 주었다. 광막한 바다를 굽어보며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니 노장(老莊)이 된 기분마저 들었다.
  '흐음, 무위 자연이라. 인공의 흔적이라곤 조금도 없는 원시 그대로의 상태. 그게 좋은 줄 누가 모르겠어? 나도 배부르고 여유 있으면 사상가 되는 건 문제도 없겠다.'
  그는 자못 기고만장한 상태가 되어 거드름마저 피우며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 자아도취에 빠져 기분이 좋을 때였다. 느닷없이 핸드폰이 울어댔다. 귀를 기울이니 여인의 맑은 목소리가 샘물처럼 흘러들었다.
  "나야, 은지라구. 대절선 타고 갈섬으로 가는 중이에요."
  "왜 진작 연락하지 않았어요? 나룻배가 있는데 대절선은 왜 타?"
  "민수 씨 빨리 보고 싶어서."
  그는 은지의 목소리를 듣자 무척 반가웠다. 그에겐 이 세상의 이슬 같은 청정함을 지닌 여인이었다. 스물 네 살의 처녀가 바다를 건너 그를 찾아 온 거였다. 그는 자신도 몰래 가슴이 설레었다. 이 세상에 순수의 표상을 들라면 두 말 없이 그녀를 들 정도였다.

  그는 통화가 끝나자 곧바로 선착장으로 달렸다. 막 그녀를 내려놓고 대절선이 되돌아가는 중이었다. 이윽고 그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걸어갔다. 그녀는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냅다 달려들어 그를 포옹했다. 그도 팔을 활짝 벌려 그녀를 맞았다. 이내 그의 후각에 여인의 상큼한 살 냄새와 향수 냄새가 와 닿았다. 순간적으로 말초신경이 일어서는 느낌이었다. 그는 금세 호흡을 가다듬으며 살며시 그녀를 밀어내며 말했다.
  "저녁은 먹었어요? 벌써 두 달이 지났지?"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죠? 시간이 안 흐르고 오래 있었음 좋겠어요."
  그녀는 이전부터 두 달에 한 번씩은 그를 만나곤 했다. 그녀는 세월을 초월하여 그를 친구로 여겼다. 함께 보내는 시간은 두 시간 가량이었고 화제는 끝이 없었다. 대개는 아침에 와서 점심 때 떠나곤 했다. 헌데 오늘은 정황이 다른 터였다. 저녁에 섬을 찾는다는 건 섬에서 묵겠다는 뜻일 터였다. 그에겐 약간 의외였지만 그럴 수도 있으려니 여겼다. 워낙 그녀의 순수성을 믿는 까닭이었다.
  그녀는 해변을 거닐며 자신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중앙의 월간 문예지 편집장인 그녀는 신춘문예 출신의 여류 소설가였다.
  "문인들이 제일 소중히 여기는 게 뭔지 아세요? 품위라구요. 품위란 실력과 당당함에서 우러나는 것이거든요. 당당함이란 추호도 남에게 거리낄 것이 없을 때 생겨나는 거죠. 일년 내내 작품 하나 못 내놓으면서 입만 살아 있는 거 있죠? 작품이란 부단히 쓰는 과정에서 단련되고 모습을 갖춰 가는 거죠. 문인이란 부단히 정진하는 사람들을 말함이지 결코 명예만 먹고 사는 사람들은 아니에요. 또한 작품의 수준이란 것도 그래요. 일년 내내 남의 작품 하나 읽지 않으면서 무슨 문장 타령이냐 이 말이에요. 최소한 연초에 발행되는 신춘문예 당선작 정도는 읽어 봐야 되지 않겠어요? 그래야 그 해의 문장의 특성과 작품의 변화 추세를 알게 아니겠어요? 자기에게 낯선 문체다 싶으면 어렵다거나 그 작가 고유의 것이려니 여기는 사람도 있어요. 이게 얼마나 책을 안 읽었다는 단적인 증거겠어요? 그것도 모르면서 문인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이 간혹 보였어요. 모든 것은 자기가 갈고 닦은 수준만큼만 보이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에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 그러면서 그는 내면 세계로 빠져들며 중얼거렸다.
  '이야, 무서운 사람을 만났네. 마치 나를 빗대어 욕하는 꼴이잖아? 모든 건 자기 수준만큼만 보인다고? 내 수준이 어느 정도인데? 내 수준이 물고기 수준이야 사람 수준이야? 생각할수록 이거 열 받네? 비록 문인으로 예를 들었지만 모든 사람을 빗대어 비아냥거리는 말이잖아? 말에 가시가 있다더니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을까? 작품 수준이란 건 또 뭘까? 하 이거 나 참. 만나자마자 완전히 개 코 터지네.'
  동쪽 해변에 이르러 그는 위도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신춘 문예 당선작이란 일반인에게 무엇에 비유될까? 나한테는? 양식장 주인에겐? 전자 기술자에게는? 아마도 그 해 최고의 산출 기록자의 연구물쯤 되겠지. 복잡한 생각은 그만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대하자.'
  "그런 반면에 보람 있는 면도 많지요? 많은 사람들이 문인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도 사실이잖아요?"
  "그건 그래요. 반면에 정신적인 결정체를 얻으려다 보니 피가 바짝바짝 마를 때가 많지요."
  그는 자기 수준만큼 세상이 보인다는 그녀의 말에 여전히 몸이 떨렸다. 그는 그녀와 걸으면서도 계속 고뇌에 휩싸였다. 이걸 차라리 그녀에게 털어놓고 자문을 받고도 싶었다. 하지만, 성질상 그럴 수도 없는 문제였다. 대인 관계를 원만히 한다는 것은 무얼 뜻하는 걸까? 대인, 대인 관계라? 그는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져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였다.

  그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온 천지가 검붉은 색으로 어우러져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만 지나면 사방이 암흑 세계로 잠길 터였다. 그는 타는 가슴으로 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바로 이 때 그녀의 목소리가 귓전으로 밀려들었다.
  "오늘 제가 갈섬을 찾은 본질적인 이유가 뭔지 아세요?"
  그는 자신도 몰래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잠시 그의 표정을 살핀 후에 그녀는 손가방을 열어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녀의 담배를 본 순간 그의 가슴은 암울해졌다. 그의 경험으로 담배를 피는 여인들 치고 섹스에 민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도 몰래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체념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등단 3년만에 4권의 장편소설을 내놓거든요. 그런데 제일 민감한 부위가 성교할 때의 심리 묘사 장면이었어요. 절정감에 떨며 신음을 삼켰다는 말이 상투적이잖아요? 여기서 절정감의 의미가 뭐예요? 그냥 자위행위의 오르가즘 정도인지 아니면 첨가 요인이 있는지 늘 궁금했어요. 물론 실제로 경험해 보면 알겠지만 아직 그럴 대상을 못 찾았어요. 정직하게 말해 상대는 있지만 상대가 응해 줄지 몰라 두려웠어요."
  그녀는 담배 연기를 훅 내어 뿜으면서 잠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점입가경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말로 대략 느낌은 왔지만 설마 그러랴 하는 의아심이 일었다. 그녀는 더욱 담배를 깊게 빨고는 서서히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죄송하지만 오늘밤 애인이 되어 줄래요? 섹스 파트너요."
  그는 마침내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져 내렸다. 이 세상 순수의 결정체라 믿었던 그녀였다. 그녀가 그에게 섹스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한 거였다. 그는 대충 짐작은 했었지만 설마 그러랴 의심하던 중이었다. 혹시 그녀가 장난을 치려나 싶었지만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그는 똥을 밟은 느낌이었다. 이 세상의 순수함이 한 무더기의 똥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참으로 똥 같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똥 같은 세상이라니? 이 말에는 아직까지는 똥이 아니라는 의미가 교활하게 담겨 있는 느낌이었다. 그럼 누가 똥 같다는 말인지 갑자기 느낌이 안 왔다. 그녀가 똥인지 아님 그가 똥인지? 그것도 아니면 둘 다 똥인지? 세상 사람 냅다 똥 무더기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어느새 생각에 잠겨 중얼대고 있었다.
  '자기 수준만큼 보인다고? 그래, 그 말 한 번 시원하다. 내 수준이 똥 수준인 모양이지? 똥이 되느니 나 차라리 안 살래. 제기랄!'

  그의 상념을 뒤흔들 듯 연기가 매캐하게 목을 죄어 왔다. 담배를 피지 않는 그였지만 상대를 생각하여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담배 연기가 상당히 비위에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돌리며 피해 보려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극도의 실망감으로 그는 속이 잔뜩 뒤틀렸다. 그러한 그의 귓전에 그녀의 은근한 목소리가 재차 밀려들었다.
  "왜 말이 없으세요? 혹시 제 말뜻을 못 알아들으셨나요?"
  그의 뇌리에 세상은 고해라는 말이 떠올랐다. 고해라는 의미조차 거의 생각해 보지 못했던 그였다. 하지만, 근래의 상황이 예사롭지 않았다. 미란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게다가 은지까지 가세하다니! 그는 자신에게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밤 8시 무렵이었다. 일단 사방이 어둑어둑해졌으므로 집으로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그녀는 선선히 고개를 끄떡거리며 그의 팔짱을 꼈다. 그는 모질지 못한 그의 심성에 울화통이 치밀었다. 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진정 내가 모질지 못한 건가 아니면 색을 밝히는 건가? 미란에 대해 그만 만나자고 했던 결과가 뭔가? 인생을 융통성 있게 살자며 오히려 나를 설득시키지 않았던가? 내가 그녀를 설득시키려 했는데도 오히려 내가 설득당했다면? 이미 일은 글러 버린 상태다. 한 마디로 나의 영향력이 그녀보다 약했다는 소리지. 이래 가지고 무슨 대인 관계를 해 나가겠다고?'
  그는 한참 상념에 잠겼으면서도 부지런히 걸어 집 가까이 이르렀다. 마루에 들어서자 그가 불을 켜고 저녁을 차리려고 했다. 그러한 그를 밀치며 그녀가 팔을 걷어 부치고는 저녁을 차렸다. 창졸간에 그에게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저녁을 차리는 그녀를 향해 그가 물었다.
  "오늘 여기에 나 혼자 있을 줄 어떻게 알았죠?"
  "제가 여기에 한두 번 오나요? 다 아는 수가 있어요."
  "글쎄 그 아는 수가 뭔지 궁금하네? 가르쳐 주지 않겠어요?"
  그녀는 고개만 좌우로 흔들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에겐 아는 수를 가르쳐 주지 않겠다는 처사로 여겨졌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전혀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녀가 용환의 핸드폰 번호만 안다면 전화해 보면 알 일이었다. 둘이 마주앉아 저녁을 먹으면서 지난날의 얘기로 자못 화기가 감돌았다. 그의 눈에 비친 그녀는 아무리 봐도 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대담한 제의를 해 올 정도로 그녀가 달라진 거였다. 그에겐 생각할수록 알 수 없는 일로 비쳤다. 하지만 그와 견해가 다르다고 하여 그녀의 의견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었다. 묘한 문제는 거기에 근원을 두고 있었다.
  그는 다른 각도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도저히 그녀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그녀를 돌려보낼까도 싶었다. 당장은 그녀가 서운하겠지만 시일이 지나면 그를 이해할 수도 있으리라 여겼다. 확실히 명분만 서면 그게 아주 바람직한 일이라고 여겨졌다. 모처럼의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여 의절하는 사태가 두려운지도 몰랐다. 자존심이 강한 그녀이고 보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녀와 의절해서 그가 손해 볼 것은 뭔지도 따져 보았다. 손해의 정도는 적지 않으리라고 여겨졌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서로를 격려해 온, 청정한 마음의 지기였다. 그런 관계가 단숨에 무너져 버린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싶었다. 아마 정신적으로도 많은 상실감을 느끼리라고 예상되었다.
  또 다른 요인으론 잠재적으로 숨겨진 욕정이 꿈틀거리는 건 아닌가 싶었다. 새로운 여인과 교접을 꿈꾸는 것은 대다수의 남자들의 숨겨진 본성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은 법과 양심과 도덕으로 인해 잠시 억눌려 있을 뿐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자신에게는 새로운 여인에 대한 욕정이 없는지 자문해 보았다. 놀랍게도 잠재된 의식 속에는 그러한 욕정이 강렬하게 굽이치고 있었다. 단지 현실의 법과 도덕이 그걸 금하고 있기에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었다. 만약 법이 그걸 허용했다면 아마도 그는 새로운 여성을 찾아 나돌아다녔을 터였다.

  저녁을 먹은 후에 커피를 마시며 마주 앉았을 때였다. 그의 곁으로 그녀가 바싹 붙어 앉아 눈을 감으며 입술을 내밀었다. 가을의 맑은 호수처럼 시원스런 그녀의 얼굴이었다. 워낙 빼어난 미모인데다가 청순한 인상마저 곁들였으니 순간적으로 갈등이 일었다. 서서히 그녀의 몸에서 은은하고도 감미로운 향내가 그의 후각으로 밀려들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성기가 꿈틀대며 흥분되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점차 그의 입술로 다가왔다. 그녀를 밀어내야 하는지 입맞춤을 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치솟는 욕정의 불길과 양심이 대립하여 그의 가슴을 마구 죄어 왔다. 점차 가빠지는 숨길로 그가 위기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도 몰래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다리를 일자로 벌렸다. 상대를 공격하려는 상승의 무술 동작이었다. 너무나도 날렵하고 경쾌한 동작이어서 그녀가 보았다면 넋을 잃을 정도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면서도 그의 동작을 빠뜨림 없이 훑고 있었다. 돌연 이상한 느낌에 휩싸여 그녀는 눈을 떴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허공에서 손과 팔을 일자로 펼친 채 떨어져 내리는 그를 보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동작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느낌마저 들었다.

  한편, 용환과 문혜는 서울의 종로3가에 도착했다. 3층 건물의 1층에 50여 평 규모로 자리잡은 약국이었다. 고용된 약사만 해도 다섯이나 되는 대형 약국이었다. 건물 2층의 주거지에 올라 그녀가 문을 열며 그를 방으로 안내했다. 완전 주거 공간으로 이루어진 50여 평이라 넉넉한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다. 그의 표정을 살피며 그녀가 말했다.
  "이게 제 생활 공간이에요. 아래의 약국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데에 당신의 재능을 빌렸으면 해요. 어때요, 둘러본 느낌은?"
  "한 마디로 대단히 놀랍소. 이 정도의 규모라면 내가 심혈을 기울여 당신을 최대한 돕도록 하겠소."
  잠시 후에 샤워를 마친 그들은 거실에 마주앉아 양주잔을 맞부딪쳤다. 그녀는 오디오에 'Only you(오로지 당신뿐)'의 음반을 올려 작동 버튼을 눌렀다. 보컬 그룹 플레터즈의 성량이 풍부하고도 매혹적인 목소리가 이내 실내에 아늑하게 휘감겼다.

Only you can do make oh this world seem right. Only you can do make the darkness bright. ……
당신만이 이 세상을 올바르게 할 수 있어요. 당신만이 어두움을 밝혀 줄 수 있어요. ……

  가사와 음색이 너무나 감미로워 보리밭에 휩쓸리는 봄바람이 느껴지는 듯했다. 형체 모를 아늑한 그리움으로 서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가 선율에 취한 듯 고혹적인 미소를 띠며 그를 향해 말했다.
  "어때요? 나랑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
  "좋아요. 당신을 나의 새로운 반려자로 맞아들이겠소."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가 팔을 벌리며 눈을 감았다. 그는 꿈을 꾸는 듯 감개가 무량하여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윽고 그는 그녀를 안아 들고는 침대를 향해 다가섰다.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으면서부터 그는 그녀의 상반신을 어루더듬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의 욕의(浴衣)를 풀어 젖혀 그녀의 젖가슴을 손으로 어루만질 때였다. 그녀도 손을 뻗쳐 그의 욕의를 벗겨 내렸다. 아늑한 실내에는 남녀의 가쁜 숨소리가 점차로 높아지고 있었다.

  은지가 당황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수는 이내 거실 바닥에 착지를 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조금의 숨소리도 내지 않았으며 눈빛은 물 속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어 막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그의 목소리가 먼저 울려나왔다.
  "당신의 상대가 될 때 되더라도 오늘만큼은 안 돼요."
  그녀가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마치 생리 기간중인 여자처럼 말하네요. 나 참 기가 차서. 왜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본 후에 밥상을 가져와서 거실의 중앙에 놓았다. 밥상을 경계로 마주 앉아 그는 천천히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사람의 관리 문제로 새로운 자아 혁신을 하고 싶다며 그의 뜻을 밝혔다.
  한참 말없이 듣고 있던 그녀가 체념한 듯이 말했다.
  "자아 혁신을 하고 싶으시다? 그것도 좋은 일이지요. 제겐 못내 애석하지만 도와 드릴게요."
  "애석하다니?"
  "알면서 뭘 그래요? 난 오늘 당신을 갖고 싶었단 말이에요. 찬 물 마시고 정신 차려야지."
  이전의 관계로 되돌아가 청정한 마음으로 기나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도 하마터면 지기를 잃을 뻔했다며 그의 손을 소중한 듯 움켜쥐었다. 그러면서 그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제가 먼저 도와 드리죠. 일단 저를 먼저 자유롭게 다루어 보세요."
  그리하여, 그녀는 평온하고도 아늑한 갈섬에서의 하룻밤을 보내었다. 그는 다음 날 아침에 나룻배로 그녀를 위도로 건네주었다.

  그로부터 일 주일이 지난 뒤였다. 아침나절에 용환이 갈섬으로 되돌아왔다. 둘은 감회에 젖어 손을 맞잡았다. 용환이 민수를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나는 다시 도회로 되돌아가야겠소. 양식장에 내 인생을 묻기는 시간이 너무나 아까운 마음이오."
  이 말을 듣자 결단을 못 내리던 민수도 번쩍 정신이 드는 느낌이었다. 은지로부터 자신감을 찾은 상태라, 이젠 그도 새 삶을 살고 싶었다. 그는 서서히 주변을 정리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하여, 오후에는 정미에게 전화를 걸어 중부 전자에서 일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다. 전화기를 통해 흘러드는 정미의 목소리에는 기대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그래, 마음 잘 먹었어요. 열심히 하다 보면 새로운 성취감을 느끼게 될 거예요."
  저녁 식사를 하고 난 뒤였다. 용환과 민수가 만나 서로의 미래에 관해 얘기를 나누며 결의를 다졌다. 그 동안 정 들었던 갈섬에 대하여도 의견을 나누었다. 용환이 먼저 말했다.
  "양어장과 양식장에 대한 후계자를 길러야 되지 않겠소? 참, 지난번에 연희가 애인이랑 또 기술 지도를 받겠다고 했죠?"
  민수도 고개를 끄떡거리며 말했다.
  "그럼, 이미 네 번째예요. 이 번에는 갈섬에 장기 체류를 하겠다고 했어요."
  "아주 잘 됐군요. 그들을 아예 후계자로 지도합시다."
  "좋습니다. 그렇게 해 봅시다."
  둘이 막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민수의 핸드폰이 날카롭게 울어대고 있었다.
  "여보세요. 연희예요. 내일 애인이랑 갈섬에 가도 되죠?"
  민수는 별로 어려울 거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요. 올 때 전화 주세요. 마중 나갈 테니까."

   다음 날 오후 2시 무렵이었다. 연희와 그녀의 애인이 갈섬에 도착했다.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통해 연인으로 맺어진 그들이었다. 전남 진도가 고향인 연희에게는 바다의 생활이 언제나 동경의 세계였다. 마침 수산대학을 졸업하고 양식업에 인생을 걸겠다는 청년과 마음이 통하여 갈섬을 찾은 거였다. 그녀의 애인은 연희보다 네 살이 많은 스물 입골 살의, 호철이라는 청년이었다.
  용환과 민수는 먼저 위도에 들러 찬호를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찬호는 흔쾌히 그들의 뜻을 받아들여 그들을 축하해 주었다.
  "두 분, 그 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소. 마침 후계자가 왔다니까 잘 좀 지도해 주세요. 지도하는 데에 적어도 3개월은 걸릴 거요."
  그 날 이후로 두 사내는 연희와 호철에게 기술 지도를 꼼꼼히 해 주었다. 그 동안 갈고 닦은 모든 진전을 아낌없이 털어 주었다.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대로, 배우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대로 열정이 넘쳐흘렀다. 하루하루가 꿈결 같은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과거에 언제 이처럼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가 싶을 정도였다.

  어느새 훌쩍 석 달이 지났다. 9월 초순의 햇살이 눈부신 저녁 무렵이었다. 그 동안 호철과 연희는 두 사내들로부터 양어와 양식에 대한 기술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 석 달 동안.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교육과 학습의 효과가 최대로 충족되는 그런 기간이었다.
  하지만, 마침내 두 사내가 떠나야 할 때가 된 거였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사흘 전부터 정미와 문혜가 갈섬으로 건너와 숙식을 함께 했다. 이제는 떠날 때가 된 거였다. 석양 무렵을 기해 용환과 문혜, 민수와 정미 커플은 나룻배에 몸을 실었다.
  일행을 실은 나룻배가 갈섬과 위도의 중간 해역에 이르렀을 때였다. 마침내 태양이 수평선으로 잠겨들기 시작했다. 핏빛처럼 타오르는 서해의 낙조가 수면에 불길처럼 일렁거렸다. 숨막힐 듯한 전율감이 일행의 전신을 휩쓸었다. 선홍색과 자줏빛으로 어우러진 저녁놀이 공작의 깃털처럼 바람에 나부꼈다. 바람에 불타는 공작의 깃털. 깃털에서 일렁이는 섬세한 불길이 솜털처럼 하늘과 바다를 뒤덮었다. 찰나간이었다. 울컥하고 치솟는 짜릿한 황홀감이 일행의 전신을 휩쓸었다. 정녕 흥분되어 목이 탈 정도였다. 어쩜 이렇게도 현란한 석양인지 자꾸만 눈시울이 젖어들려고 했다.
   용환과 문혜, 민수와 정미 커플이 갈섬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갈섬의 해변에서도 호철과 연희가 두 손을 크게 흔들어 답례를 했다. 이제 배는 점차 갈섬을 떠나 위도의 해안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민수의 가슴에 잔물결이 일며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끓어올랐다. 8개월 동안이나 정들었던 갈섬이었다. 막상 갈섬을 떠나려니까 연인과 사별하는 만큼이나 서러운 감정이 끓어올랐다. 생각할수록 애틋한 정이 들어 선뜻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다행히 갈섬에는 새로운 나그네인 호철과 연희가 보금자리를 틀지 않았는가! 시대의 변화, 경제의 변화에 따라 나그네는 섬을 찾기 마련이었다. 그는 상념에 휩싸여 온통 가슴이 들끓었다.

'어차피 삶은 환상에 불과하리라. 찰나 같은 인생에 그리도 목매달며 서럽게 살게 뭐였던가? 자고 나면 흩어지는 바람결과도 같은 인생이리라. 대관절 인생이란 뭔가? 생존의 현장이 섬이라면 인간은 누구나 나그네가 아닐까? 잠시 섬에 발 붙였다가는 때가 되면 떠나가는 나그네. 처절하도록 가슴 고독한 나그네. 아무에게나 속내를 터놓지 못하는 나그네. 강해지겠노라고 당당하겠노라고 그렇게 다그치던 나그네. 언젠가 수명이 다하면 가슴에 한숨과 추억만을 남겨둔 채 떠나가겠지. 그래, 그렇게 바람처럼 사라져 가고 말겠지.'

  점차 배가 위도의 심구미 해안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민수는 고개를 돌려 용환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용환은 선미에 서서 타는 듯한 눈빛으로 갈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풍이 일고 저녁놀이 서해를 뒤덮을수록 용환의 얼굴은 울먹울먹해졌다. 자칫 말이라도 걸라치면 그대로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민수는 내쳐 정미와 문혜의 안색도 살펴보았다. 그녀들도 사내들의 애절한 정서에 공감했는지 눈시울을 글썽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배가 해안에 닿기 직전이었다. 바다는 화염에 뒤덮인 불길처럼 자줏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천지가 자줏빛으로 치솟는 불길로 휩싸인 느낌이었다. 점차 갈섬은 암흑색으로 물들며 수평선 끝자락에서 남실대고 있었다. 어쩌면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를 섬이었다. 이대로 떠나면 다시는 변산을 찾지 못할 것도 같았다. 모든 게 이대로 스러진다고 생각하자 울컥하고 서러움이 치솟았다. 가슴 저 끝자락에서부터 휭하니 바람이 일더니 자꾸만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자칫 그대로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그가 애써 수평선을 바라보며 감정을 억제하려 할 때였다.
   부우우웅! 부우우웅!!
   위도를 돌아나가는 발동선의 뱃고동이 가슴을 적시며 밀려들었다. 너무나 정들었던 서해의 뱃고동 소리였다. 잇달아 통통거리는 발동선의 엔진음마저 아늑하게 가슴에 휘감겨 들었다. 찰나간이었다. 사내들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서 만나 흔들거렸다. 서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사내들이었다. 급기야 용환이 눈물을 쏟으며 선체를 부여잡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용환의 젖은 눈빛과 마주친 순간이었다. 민수의 눈시울에서도 연거푸 경련이 일며 급기야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사내들의 눈물로부터 서슬 퍼런 슬픔이 빛살처럼 흩날렸다. 흐느끼는 사내들을 지켜보는 여인들의 눈에서도 안개가 뽀얗게 서렸다. 때마침 피어오른 물안개가 그들의 슬픔을 달래려는 듯 망사처럼 흩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