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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11회  
              섬과 나그네
                                                                                                               손 정 모

                                                 11. 상념의 소용돌이

   파르스름한 향 연기가 망사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일행은 석실을 청소한 뒤에 인골(人骨)의 주위로 모였다. 세 구의 해골을 어떻게 처리할지 의견을 모았다. 이내 의견 일치에 이르렀다. 해골을 수습하여 갈섬에 묻기로 했다. 일기장은 다음의 방문자를 위해 석실에 그대로 두었다. 해골을 옮기기로 한 배경과 방문 일자는 일기장의 뒤에 적었다. 인골 매장의 예정 장소까지 일기장에 소상하게 약도로 나타내었다. 사망자의 후손들을 위한 배려였다. 사망자의 평온한 휴식을 위해 연고지에 알리지는 않기로 했다. 이러한 내력까지도 일기장에 상세하게 밝혀 두었다. 해골을 배에 옮겨 실은 뒤에 일행은 서서히 해식 동굴을 빠져나갔다.
  일행이 해골을 갈섬의 북서 산록에 매장하고 나니 자정 무렵이었다. 혹시라도 자신들의 몸에 악령이 붙지는 않았나 각자 근심스런 얼굴들이었다. 잠시 좀 숙연한 분위기였으나 일행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눈을 붙였다.

  햇살이 눈부신 5월 중순이었다. 아침놀로 붉게 물든 바다가 미풍에 남실거렸다. 민수가 제일 먼저 일어나 집 주변을 비로 쓸었다. 청소를 마친 뒤에는 땅바닥에 엎드려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천천히 숨결을 조절해 가며 100회를 실시했다. 그리고 나서는 앉았다 일어서기를 연이어 200회를 실시했다. 처음의 100회는 발을 붙여서 실시했고, 나중의 100회는 다리를 한껏 벌린 자세로 실시했다. 그리고 나서는 잠시 숨을 추슬렀다. 이어서 그는 30분 가량을 고공 발 차기 동작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에게 있어서 무술은 최상의 건강 유지 방법이었다. 다리를 뻗고 팔을 내밀었다가는 선율에 맞춰 춤을 추듯이 거두어들이는 동작.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강하고, 강한 듯하면서도 평온해 보이는 몸놀림. 물이 흐르듯 거침없는 동작과 시원스런 발길질이었다.
  이윽고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 등이 옷과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수련을 끝내고는 연못으로 나가 몸을 씻었다. 몸을 씻으면서부터였다. 전신의 혈관이란 혈관은 다 깨어나 눈을 뜨는 느낌이었다.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는 가부좌로 앉아 십여 분간 눈을 감았다. 매일 눈만 뜨면 의례적으로 반복하는 아침 운동이었다.
  눈을 감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그에게로 다가서는 느낌이 들었다. 잔뜩 소리를 죽인 날렵한 걸음걸이였다. 누굴까? 발놀림으로 느낄진대 만만찮은 무술의 수련자라고 여겨졌다. 점차 그의 주위로 살금살금 다가서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 눈을 떠 상대가 누군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쉽게 포기할 순 없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앉은 채로 공격 준비를 했다. 앉은 자세에서의 공격이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기에 그가 필살기(必殺技)로 단련해 둔 동작이었다. 앉은 자세에서 단숨에 허공으로 치솟아, 뒤돌려 차기로 상대의 목을 걷어차는 동작이었다. 전신의 체중을 실은 발길질이기에 상대가 맞기만 하면 그대로 나뒹굴어 버리는 거였다.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매섭고도 깔끔한 동작이었다.

  십여 미터의 거리쯤에서였다. 상대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어느 방향인가? 정면인가 아님 측면인가? 예상했던 바대로 후면이었다. 야비하게 등을 노리다니? 절대로 가만히 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서너 발자국의 거리만큼 좁혀졌다. 그래도 상대로부터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뭔가 접근해 오기는 왔지만 막상 행동을 취하기에는 갈등이 이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의 근접 거리에서 돌을 맞는다면 대책이 없는 터였다. 눈을 뜨느냐 그대로 상대를 지켜보느냐? 뒷머리가 자꾸만 섬뜩해지는 느낌이었다. 전신의 근육이란 근육은 다 긴장된 상태였다. 이윽고 상대의 발이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본능적으로 그는 왼손으로는 얼굴을 오른손으로는 명치를 가리며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며 눈을 떴다. 사람이 아닌 한 마리의 커다란 셰퍼드였다. 이전에 결코 보지 못했던 크기의 개였다. 이미 그의 두 다리는 허공에서 일자로 펼쳐진 채 개를 향해 돌아나가고 있었다. 동작을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발길이 개에 닿는 순간이었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개는 단숨에 땅바닥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개는 곧바로 숨이 끊기고 말았다. 굳이 죽일 의사는 없었는데 그만 개가 죽어 버린 거였다. 그가 펼친 동작은 글자 그대로 필살기가 되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주위에 개의 주인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가능한 한 눈을 크게 뜨고 그는 주위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인적이라곤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참 알 수가 없네. 분명 개 주인이 부근에 어디 있겠지? 토종개 같았으면 마구 짖어대어서 금방 개라는 걸 알았을 텐데. 어 그 참!'
  그는 개를 끌어다가 잠시 가까운 나무 그늘에 눕혀 놓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았던 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가슴이 몹시도 언짢았다. 자신의 행동을 완전히 우발적으로만 볼 수 있겠는지 의아심이 일었다. 몸을 허공으로 솟구쳤을 때 이미 공격의 의사가 있었던 게 아닌가? 셰퍼드는 맹견이라 단숨에 죽이지 못했다면 그의 생명이 위태로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예정에 없던 일이 벌어졌다. 그는 잠시 착잡한 심정으로 개의 주검을 내려다보았다. 우선 몇 개의 솔가지를 꺾어 개의 몸을 덮었다. 잠시 후에 삽을 가지고 와서 제대로 묻어 줄 생각이었다.
  '대관절 개가 왜 나를 향해 달려왔을까? 나의 몸에서 개를 부르는 무슨 독특한 냄새라도 났던 걸까? 생각할수록 알 수가 없네.'
  그는 중얼거리며 집을 향해 무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삽을 들고 나올 때까지도 처녀들과 용환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이윽고 개를 묻으려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땅을 파면서도 그는 영 마음이 편치 못했다.
  '개였기 망정이지 만약 사람이었다면?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해. 왜 하필 필살기를 쓸 생각을 했을까? 살다가 이런 일을 다 당하다니?'
  개를 조심스레 땅에 묻고는 정성껏 흙을 밟았다. 예로부터 개는 영물이 아니던가? 그러한 영물을 죽이다니? 그것도 발로 차서 말이야! 생각할수록 가슴이 말할 수 없이 쓰라렸다. 그는 삽을 던져 놓고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게 혹시 내게 닥쳐 올 불길한 징조는 아닐까? 왜 지금까지 못 보던 셰퍼드가 이 섬에 있을까? 혹시 누군가 은밀히 이 섬을 염탐하는 것은 아닐까?'
  그는 잠시 개의 무덤을 향해 고개를 숙인 다음 천천히 집으로 걸어갔다. 집에 들어서자 그제야 다들 일어나서 한껏 떠들어대었다.
  "어디 갖다 오세요?"
  "일찍도 일어나셨군요."
  "샤워까지 다 마친 것 같네요."
  "벌써 운동 다 마쳤소?"
  일행의 얘기에 끝까지 귀를 기울인 뒤였다. 그는 버럭 언성을 높이듯 큰소리로 말했다.
  "아, 나 원 참. 아침에 살생을 하고 말았어요, 글쎄."
  그의 얘기를 듣고서도 주변의 반응은 의외로 덤덤했다. 벌레 하나쯤 밟혀 죽었거니 여기는 모양이었다. 더 이상 이야기할 흥미가 그에게서 사라져 버렸다. 그는 머쓱해져 잠시 실내를 둘러보았다.
  용환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였다. 용환이 그의 핸드폰을 건네주며 말했다.
  "왜 핸드폰을 안 갖고 갔어? 내가 대신 받았거든. 홍 미란 씨라고. 방금 갈섬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소. 이 사람은 약사 아니죠? 약사 아주머니는 사흘 뒤에 온댔잖소?"
  그는 놀라 달력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셋째 주 토요일이었다.
  "아, 맞아. 오늘이 약속 날짜였소. 나 잠시 나갔다 올게요."
  
  그는 서둘러 선착장으로 달려갔다. 작은 능선을 넘어야만 선착장이 바라보였다. 아닌게아니라 선착장에는 젊은 여인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가 느끼기로 먼발치에서도 미란임에 틀림없었다. 반가운 마음이 훅하고 일었다. 매달 셋째 주 의 토요일. 이 날에 맞춰 둘은 주로 유성에서 만나 밀회를 즐기곤 했다. 때때로 계룡산의 동학사를 지나 갑사로 넘어가며 회포를 풀기도 했다. 그러던 그녀가 지난달에는 그를 향해 속삭이듯이 말했다.
  "다음 번엔 갈섬에 가 보고 싶어. 거기에 방이 둘이라고 했지? 아, 친구가 함께 있음 어때? 요새 애인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정 마음이 불편하면 내가 그 친구에게 말할게. 알았어?"
  벌써 한 달이 지난 터였다. 그는 미란을 보자마자 손을 흔들며 말했다.
  "언제 왔어? 진작 연락할 일이지?"
  그녀도 반가움이 그득 실린 얼굴로 그를 향해 말했다.
  "핸드폰은 왜 안 갖고 다녀? 어제 오후부터 부지런히 연락했단 말이야."
  "하필 어제 오후에 연락했다고? 어제와 오늘은 핸드폰을 집에다 두었어."
   그녀는 곧장 달려와 그를 포옹하며 말했다.
  "아이, 얼마나 네 목소리가 듣고 싶었는데. 정말 보고 싶었어."
  그녀의 목소리엔 계절이 주는 신록의 풋풋함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꽃향기가 실린 듯한 그녀의 체취에 숨이 멎는 듯했다.
  "나도 네가 많이 보고 싶었어. 이렇게 날 찾아와 너무나 고마워."
  "근데 집이 어느 쪽이야?"
  그는 그녀의 손을 이끌고 능선 위로 올라섰다. 능선에 올라서자마자 신록으로 뒤덮인 평원 위에 자리잡은 벽돌집이 보였다.
  "우와 끝내주네? 저걸 네가 지었어? 동화 속의 궁전 같네."
  "미란아!"
  "아, 이 느낌! 네가 내 이름을 불러주니 너무나 감미로워. 마치 소녀가 된 느낌이야."
  "그렇게도 좋아? 헌데 조금 문제가 있어. 집에는 다른 여자 손님 셋이 와 있어."
  "뭐야? 다른 여자 손님이라고? 두 사내가 아예 여자에게 걸신이 들린 것 아냐?"
  그는 능선을 지나 북서쪽 숲 속으로 그녀를 데리고 들어갔다. 잔디가 무성하게 깔린 숲을 찾아 나란히 앉았다. 숲은 신록으로 인해 잔뜩 어우러져 있었다. 남녀가 나란히 잔디에 앉자마자 그들은 금세 하늘로부터 격리되고 말았다. 피부에 와 닿는 부드러운 바람결. 새들의 노랫소리가 맑은 음향이 되어 그들의 귓전에 부서지고 있었다.
  그는 섬에서 일어났던 일을 그녀에게 간추려 들려주었다. 세 처녀들이 섬을 찾게 된 연유와 해식 동굴 속의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살짝 묻기도 하며 교태를 부렸다. 조금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말 한 마디에도 일일이 눈빛으로 반응을 보였다. 커다란 이야기의 줄거리가 끝나자 그녀가 쌩긋 웃으며 말했다.
  "어쩜 그런 일이 다 있었어? 내가 별천지에 온 느낌이네."

  그 때였다. 문득 죽은 개에 대한 생각이 그에게 떠올랐다. 그는 그녀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근데 넌 언제 섬에 도착했어? 내가 널 마중 나간 바로 그 때였어?"
  "그래 거의 그 무렵이야. 조금 일찍 도착했거든. 근데 개 찾느라고 이십여 분이 훌쩍 지났지 뭐니?"
  그는 느닷없이 가슴에 찬물을 뒤집어 쓴 느낌이었다. 놀란 가슴에 그만 말이 떨려 나왔다.
  "뭐, 뭐라고? 방금 개, 개라고 했어?"
  오히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아니 왜 그리 놀래? 말까지 더듬거리고."
  불안한 마음을 잠시 추스르며 그가 말했다.
  "아니 웬 개 이야긴가 싶어서 그랬어. 좀 설명을 해 줘."
  그녀는 아마 앉은 자세가 자유롭지 못한 모양이었다. 짧은치마가 계속 말려 올라갔지만 모른 척 내버려두었다. 그녀의 뽀얀 허벅지가 드러나면서부터 그의 숨길이 가빠졌다. 그는 서서히 손을 뻗어 그녀의 허벅지를 더듬기 시작했다. 가볍게 그녀가 신음을 내뱉더니 몸을 뒤로 눕히며 다리를 더 벌렸다. 그의 손이 슬며시 그녀의 사타구니 부근까지 더듬어 올라갔다. 이내 그는 봉긋한 그녀의 젖가슴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마침내 생활이 안정됐다고 했다. 남편인 진호가 기술을 익혀 카센터에 자리를 잡았다. 남편이 학원에 등록을 하여 정식으로 자격증을 취득했다. 지금은 동업을 하는데, 언젠가는 남편이 독립할 수 있으리라는 얘기였다.
  그녀는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냥 그대로 지낼 수는 없는 심정이었다. 뭔가 기념물을 마련하고 싶었다. 가정이 자리 잡힌 것을 기념하고 싶었다. 또한 그간의 민수의 격려에 보답하고도 싶었다. 그리하여 생각해 낸 것이

개였다. 그녀에게 호젓한 섬을 지키려면 셰퍼드가 제격일 거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대략 한 달간을 개를 사서 길들였다. 그녀가 대절선으로 섬에 닿았을 때였다. 해안에 내려서자마자 개가 유난히 낑낑대기 시작했다. 그녀에게는 개가 용변이 마려운 모양이라고 여겨졌다. 개가 용변을 보도록 그녀는 고삐를 풀어놓았다. 한 달 동안 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개를 훈련시켜 왔다. 개는 금세 숲 속으로 달려갔다. 개가 금세 되돌아오리라는 생각으로 그녀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콧노래마저 흥얼거렸다. 그랬는데 조금 느낌이 이상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개가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던 개가 나타나지 않자 그녀는 해안에서 개를 부르며 찾아다녔다. 설마 개가 능선을 넘어가 변을 당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한 일이었다.
  그는 너무나 놀라 가슴이 섬뜩해졌다.
  '아니 어쩌면 그럴 수가? 그 개가 새 주인인 내게로 바로 달려왔다는 얘기인데? 새 주인은 그것도 모르고 발로 차서 개를 죽이다니! 무슨 일이 이렇게 뒤틀릴까?'
  그는 눈에 띌 정도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이마에선 몇 방울의 땀까지 흘러내렸다. 자꾸만 그의 숨이 차 올라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의 표정을 살피던 그녀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왜 그래? 어디 몸이 불편해?"
  어느새 그녀를 애무하던 그의 손길도 허공을 더듬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펄떡거리며 마구 부풀어오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도 몰래 그녀에게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뭘? 내가 어때서? 개는 잠시 바람 쐬느라 돌아다니겠지."
  그녀는 일말의 기대를 걸며 그에게 말했다.
  "그래, 네 생각에도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도대체 개가 어디로 간 걸까?"
  그는 미묘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정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는 문제라고 여겨졌다. 설사 그가 정직하게 말해도 상대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럴 바에야 오히려 거짓말을 하는 편이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거짓말을 말함이었다.
  "일단 네 가정이 안정됐다니 축하해. 개는 돌아다녀 봐야 섬 안이지 까짓게 어딜 가겠어? 나중에 개를 만나면 잘 키울게. 그냥 와도 되는데 웬 선물이야? 하여간 고마워."
  "그래, 그렇담 맘놓을게. 개 키가 제법 큰 편이야. 털은 검정색이고 윤기가 자르르 흘러."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으로 자꾸만 얼굴이 달아올랐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마음이 곤혹스러울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가슴이 타는지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이럴 게 아니라 개 한 번 찾아보자, 응?"
  그는 또 한 차례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예 거짓말했다고 실토해 버리고도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적절한 시기를 놓친 기분이었다. 그는 목소리를 억지로 가다듬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 그 개를 찾아야만 돼? 어차피 섬 안에 있는 개라면 천천히 찾아도 될 것 같은데."
  "왜 지금 찾으면 불편해?"
  "아니. 조금이라도 너랑 오래 있고 싶어서 그래. 너무 시간이 빨리 가는 게 아쉬워서 그래."
  "하긴 그래. 나도 네 곁에 좀더 오래 머물고 싶어."
  그녀는 정말 아쉬운 듯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두어 번 몸을 뒤척거리는 사이에 그녀의 허연 속살이 드러났다. 자연스레 둘은 가쁜 숨결을 토해내며 서로를 어루더듬었다. 서서히 속옷이 벗겨져 나가고 둘은 잔디 위에서 뒤엉켜 서로를 탐닉했다. 격정적인 순간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녀의 아랫도리를 타고 남성의 열기가 쭉쭉 거침없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자지러질 듯이 몸을 비틀면서도 신음을 죽이려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강풍에 휩쓸리는 갈대라면 그는 차라리 시린 바람이었다. 시린 바람, 시린 바람이라? 격정에 떨며 쏟아지는 열풍에서도 그 언저리에 휘감기는 것은 언제나 시린 바람이곤 했다. 시린 바람의 실체는 불륜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개가 죽게 된 연유를 깊이 헤아려 보았다. 아무래도 불륜 관계를 청산하라는 계시일지도 모를 터였다. 아무리 간통이 낭만으로 미화된다고 할지라도 현실로는 엄연한 범법 행위이지 않는가? 그는 가슴을 가만히 쓸어 내리며 고뇌에 잠겼다. 열기가 가라앉자 그들은 옷차림을 단정히 하여 풀밭에 나란히 드러누웠다. 눈을 크게 떴지만 무성한 잎새들로 가려져 하늘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시야를 가로막는 건 커다란 수목의 바다였을 뿐. 신록의 잎새들이 나부댈 때마다 반사된 빛살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수목의 바다 깊숙이 가라앉은 남녀. 그는 가만히 숨을 추스르며 그의 미래를 읽었다. 절대로 이대로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는 상념에 잠겨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가정이 안정되었다지 않은가? 이제는 그녀를 가정으로 되돌려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생각이 든 결정적인 계기는 그녀 가정의 안정화였다.
  그녀는 몸을 돌려 그의 뺨과 턱을 조심스레 어루더듬었다. 그녀의 입술이 열리면서 은근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너를 볼 때마다 네 턱을 만지고 싶었어. 항상 날 배려해 주는 너의 그윽한 눈빛이 좋았어. 네 눈빛을 따라가기만 해도 네 심장에 이를 것만 같았어."
  그는 그녀의 아리따운 얼굴과 뽀얀 살결을 들여다보았다. 단 한순간이라도 떠나고 싶지 않은 여인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영원히 그녀한테 머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만약 관계가 지속되다가는 황정미와의 사랑에도 문제가 있을 것 같았다. 일시적인 불륜일지라도 그것이 좋게 끝난다면 충분히 아름다울 수도 있는 터였다. 어디까지나 결과가 좋게 끝난다는 걸 전제하고서. 결과가 좋다는 건 뭔가? 그는 잠시 상념의 소용돌이에 휘감겨 버둥거렸다.
  '너를 보내면 다시는 너 같은 미인을 만날 수는 없을 거야. 정말 널 놓치기 싫고 아쉬워. 지금 정리하지 못하면 영원히 네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겠지? 널 벗어나서 나도 참다운 가정을 이루고 싶어. 그러려면 주변 정리를 반드시 해야겠는데. 너무나 괴롭고 답답해. 당장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서 미치겠어. 이 괴로움을 어디다 하소연할까? 그래도, 난관을 꼭 이겨내야 한다고? 만약에 그렇게 못한다면?'

  그는 자신도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여인 고유의 직감 때문일까?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듯, 그녀는 대뜸 풀밭에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오늘 아무래도 이상한데? 혹시 내가 싫어진 거야?"
  그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대답했다.
  "절대로 그런 건 아냐. 하지만 진정으로 네게 말해 줄 게 있어."
  그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한참을 듣고 있던 그녀가 가로채듯 말했다.
  "그래, 결론이 뭐야? 결국 그만 만나자는 것 아냐? 그 동안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는데? 네 말이 맞으면 네 말 들을게. 그게 아님 난 절대 네 말 안 들어, 알겠어?"
  그녀가 오해하지 않도록 그는 그녀를 충분히 설득해야만 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견해를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한참 듣고 있다가 그녀가 또 발끈거리며 대꾸했다.
  "아무리 네가 설명한대도 내겐 이해가 잘 안 돼. 왜 하필 그런 얘기를 오늘 하느냐구?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납득이 안 돼."
  그에게서 또 한 차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 그는 안간힘을 썼다.
  "나도 너 같은 미인과 정말 헤어지고 싶지 않아. 한 달에 한 번이 아니라 아예 함께 있고도 싶어. 그렇지만 현실이 그게 아니잖아? 내 말 곡해하지 말고 잘 들어. 네가 날 좋아하는 감정을 모두 네 남편에게로 돌려 줘. 나도 오늘부터는 내 모든 사랑을 약혼녀에게 돌려줄 거야. 우리 인생 공부를 했다고 치고 이제라도 헤어지면 안 될까?"
  "아, 한 마디로 괴로워. 여기까지 온 내게 헤어지자는 말을 꼭 해야 돼? 미리 얘기했음 아예 안 왔지."
  그녀는 풀밭의 수크령을 꺾어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보랏빛 보풀이 휩쓸릴 때마다 그녀의 가슴에 설움마저 일었다.
  '아무래도 내가 마음에 안 찼나 봐? 약혼녀 말고 그 동안에 새 애인이라도 생겼나?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이렇게 사람한테 설움을 줄 수가 있어? 한 달에 딱 한 번이잖아? 그런데 뭐가 그리 어려워?'
  그녀는 그를 향해 말했다.
  "오늘은 결론을 짓지 말자, 우리."
  의외인 듯 그가 약간은 떨리는 음색으로 대답했다.
  "아니 왜 마음을 못 잡고 그래, 응? 내 설명이 부족해?"
  "아무리 들어 봐도 네 설명은 억지야. 우리가 언제 자주 만났니? 여태껏 한 달에 딱 한 번이었어. 그게 그리도 네 마음에 부담이 됐어? 네가 이전에는 안 그랬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이 변한 거야? 혹시 나 말고 다른 애인이 생겼어? 오늘은 제발 날 울리지 말아 줘. 날 슬프게 만들지 말고 그냥 편안히 지내자, 응?"
  그녀는 눈을 스르르 감으면서 다시 풀밭 위로 드러누웠다. 그녀의 감긴 눈가로 슬며시 이슬이 비쳤다. 그녀가 그에게 손짓을 했다. 함께 눕자는 신호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갈등에 휩싸였다.
  '좀 비위를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당장 섬을 떠나 달라고 이야기를 해? 오늘 여기서 매듭을 짓지 못한다면 ……'

  그녀는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슬그머니 끌어당겼다. 한없이 부드러운 여인의 손길이었다. 그의 몸에 잠재되어 있던 본능이 여인의 손길에 이끌려 터지려고 했다. 그녀의 손길에 이끌려 그도 풀밭에 나란히 드러누웠다. 잠시 그가 숨결을 가다듬는 사이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바지의 앞섶을 열며 팬티 속으로 밀려들었다. 그는 고통으로 마구 고개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속타는 마음과는 달리 그녀의 손길에 닿자마자 그의 성기가 서서히 부풀어올랐다. 어느새 입술을 깨무는 그의 눈시울에도 이슬이 맺혀 반짝였다. 이 때였다. 그녀가 깔깔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호홋! 나 정말 미친다니까. 지금 눈물을 보였어? 그것도 사내가."
  "내가 이렇게 결단력이 없는 놈인 줄 미처 몰랐어. 내가 자신을 한 대 갈겨 주고 싶어. 좋아. 이젠 네 마음대로 해. 무조건 네 뜻에 따를게."
  "야,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니? 네 말대로 인간은 단 번 태어나는 거라며? 우리가 억지로 규율의 형식만 따질 게 아니잖아? 중요한 건 규율의 본질이 아닐까 싶어. 각자의 가정에 충실하면서 때때로 만나 사랑을 나누자는 건데 어때서 그래? 내가 볼 때는 사유의 폭과 융통성의 문제라고 생각해. 우리 이전처럼 그렇게 지내, 응? 괜히 마음에도 없는 억지를 부리고 그래?"
  "내가 널 설득하기는커녕 오히려 네게 설득당한 셈이야. 그래, 다음에 다시 따져 보기로 오늘은 즐겁게 보내자꾸나."
  그녀는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하늘로 치켜세워 보이며 말했다.
  "역시 너는 이거다. 한 마디로 멋진 사내야."

  햇살의 강도가 높아 시계를 보니 정오 무렵이었다. 그녀는 조금 전부터 그의 팔을 벤 채 잠들어 있었다. 보면 볼수록 눈부실 정도의 미인이었다. 초승달처럼 살짝 휘어져 올라간 눈썹. 우윳빛으로 윤기가 도는 갸름한 얼굴. 눈시울을 따라 자리잡은 가지런한 속눈썹. 오뚝하게 솟은 콧날과 복사 꽃잎처럼 매혹적인 입술.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워 언제까지나 눈을 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전혀 구김살이라곤 없어 보이는 활달한 성격의 여인이 아닌가? 그는 여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말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한 그의 마음이 그를 결단력이 없는 사내로 비치게 만든 거였다.
  한 시 무렵이 되자 그는 그녀를 깨워 집으로 데려 갔다. 집에 들어섰을 때였다. 용환과 처녀들이 점심상을 차리다가 장난기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오세요. 하도 소식이 없기에 위도로 건너간 줄 알았어요."
  밥상에는 섬에서 가꾼 상추와 배추를 비롯하여 우럭과 도다리 회로 그들먹했다. 갓 밥을 한 상태라 구수한 밥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자리를 찾아 빙 둘러앉고 보니 모두 여섯 명이었다. 밥술을 뜨면서 용환이 걸걸한 목소리로 민수와 미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태껏 두 분은 어디 계셨소? 설마 양어장에서 일을 하다 온 건 아닐 테고?"
  명주도 덩달아 교태가 가득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양어장에서 일을 하다니요? 거기서 설마 두 분이 물고기의 알을 낳고 온 건 아니겠죠?"
  민수가 약간 쑥스러워하며 뭔가 대꾸를 하려 할 때였다. 미란이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들 아시면서 그래요? 남녀가 만나서 할 일이란 게 뭐겠어요? 워낙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
  미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실내엔 폭소로 들끓었다. 여기저기서 순식간에 농담 이 터져 나왔다.
  "어머나, 세상에. 민수 씨는 거의 반죽음이 되다 말았겠군요."
  "그래도 숟가락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조금 더 일을 하실 걸 그랬어요."
  "민수 씨는 잘 안 밝히는 남자라고 알고 있거든요. 누가 먼저 일을 시작했죠?"
  "아따 그런 걸 꼬치고치 캐묻고 그래요? 두 분이 얼마나 무안하겠어요? 척 들으면 대여섯 번은 했겠다고 감을 잡을 일이지."
  입에 침을 튀기며 떠들고 웃는 사이에 밥그릇은 말끔히 비워졌다. 한낮이라 다들 식욕이 왕성했던 모양이었다. 식후에는 다들 소화도 시킬 겸 김 양식장으로 가서 일을 하기로 했다. 설거지를 끝낸 뒤에 일행은 다들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섬의 북서쪽 해변을 따라 줄줄이 걸어갔다.
  
  김 양식장에 도착하니 오후 2시 무렵이었다. 저마다 대바구니를 한 개씩 챙겨들고는 말목으로 다가섰다. 다들 머리에는 챙이 둥그런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강렬한 햇살에 피부를 보호할 의도였다. 다른 사람들은 이전에 작업을 해 본 경험이 있었다. 민수는 미란에게 말목에 붙은 김발을 다루는 법을 일러주었다. 무슨 일이든 이치를 잘 터득해 내는 미란이었다. 몇 마디의 말만으로도 그녀는 척척 손을 맞춰 가며 김발을 고를 줄 알았다. 썰물이 진 시간을 이용하여 일행은 줄지어 선 말목을 따라가며 허리를 굽혔다. 김발의 작업은 심기와 잇기에 이어 갈아붙이기로 이루어진다. 말목의 습도 조절이 잘못되어 홍합의 어린 패각이 밀착되지 못하게 막아야만 한다. 말목에 엉겨 붙은 패각의 배설물로 인해 김의 착생이 원활치 못할 수도 있다. 그 부분은 살짝, 아주 조금만 호미 끝으로 긁어주면 된다.
  말목 아래로 물구덩이들이 별처럼 깔렸다. 물이 빠져나간 모래 바닥에는 각종 치어들이 갇혀 파드득거리고 있었다. 다들 길다란 장화를 신었기에 말목간의 이동은 어렵지 않았다. 대바구니 속에는 말목에서 뜯어낸 파래 줄기와 홍합의 패각들로 그들먹했다. 장화를 신었건만 일행의 옷은 이미 개펄로 얼룩이 져 있었다.
  열심히 말목의 줄을 따라나가다가도 대바구니가 차면 해변으로 올라서서 휴식을 취했다. 다들 즐거움에 취해 상기된 얼굴이었다.
  "용환 씨! 여기 잠깐만 봐 줘요. 살짝 잡아당기려고 했는데도 김발이 그만 줄줄이 밀려 버렸어요."
  연희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가까운 거리에 있던 용환이 금세 달려가 살펴보면서 말했다.
  "아예 껍데기를 발가벗기려고 작정했구먼. 어쩜 이렇게 통줄이 훤하게 밀려 버렸죠?"
  연신 혀를 차며 김발이 벗겨진 자국마다 꼼꼼히 포자가 부착할 자리를 만들었다. 줄칼로 밀며 다듬질하는 동작이 날렵했으며 숙련미가 돋보였다. 미란은 민수와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일의 맥락은 그 어느 것이나 유사한 모양이었다. 과거에 농가에서 비닐 하우스의 일을 거들던 미란이었다. 그녀는 김발을 고르는 작업에서도 단연 손놀림이 빨랐다. 그녀가 이동해 가는 속도는 다른 어느 줄의 사람보다 빨랐다. 그러면서도 작업은 정교하면서도 맵시가 있었다. 일을 한 지 두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용환이 허리를 펴며 큰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 그만하고 나갑시다. 한낮에 두 시간 이상 일을 하면 위험해요."
  마치 그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여인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해변으로 올라섰다. 다들 개펄이 튀긴 옷차림이라 모습이 가관이었다. 여인들이 해변으로 올라서자 민수가 연못의 위치를 알려주며 샤워를 권했다. 또 한 차례 환호성이 일며 여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꺾으며 깔깔거렸다. 민정이 느닷없이 민수와 용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연못 주위에 몰래 카메라 같은 건 없죠? 있기만 해 봐라. 콱 부숴 버릴 테니."
  민수가 씽긋 웃으면서 대꾸했다.
  "거 참 좋은 아이디어예요. 다음에는 거기에 꼭 설치해 놓을게요. 그래야 누구의 몸매가 제일 끝내 주는지를 알죠."
  연희와 명주가 장난스레 서로 눈을 흘겨대며 말했다.
  "앞으로 미인들은 필히 여기로 와야 되겠어요. 아름다운 몸매 휘날리는 파도. 여자들의 엉덩이를 쫓는 몰래 카메라. 어디 광고라도 내 볼까요?"
  천막용 포장 비닐로 에워싼 대형 샤워장이 두 개였다. 시원스레 샤워를 마친 일행은 집으로 들어섰다. 노동 뒤의 피곤이 살풋이 머리를 내밀려고 했다.
  
  여인들은 자기들끼리 묵계가 된 듯. 시간을 들여 머리며 몸단장에 공을 들였다. 민수가 미란에게 물으니 다섯 시 출항인 배를 타려고 준비중이라는 거였다. 여인들이 치장을 끝내고 나니 오후 네 시 반이었다. 민수와 용환을 나룻배를 바다에 띄워 여인들을 실었다. 배는 선착장을 벗어나 곧장 위도의 심구미 해안으로 향했다. 심구미 해안에 배를 정박시킨 뒤에 일행은 위도의 심구미 해안으로 올라섰다. 일행은 때마침 심구미를 지나 북상하던 화물차를 세워 탑승했다.
  마침내 오후 다섯 시 무렵이었다. 격포행 카페리가 힘찬 뱃고동을 울리며 위도를 떠나가고 있었다. 배의 갑판에는 세 처녀와 미란이 두 사내를 향해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갔다. 서해산장의 처녀들도 휴가를 이용하여 어디 먼 데로 여행을 떠나는 모양이었다.
  통통통! 통통통통!!
가슴을 퍼렇게 적시는 뱃고동 소리였다. 뱃고동이 울릴 때마다 여행객의 가슴은 먹먹하게 젖어들곤 했다. 배는 수평선 위로 아스라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 몸체를 흔들며 배는 시야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떠나는 배를 향해 두 사내는 연신 손을 흔들었다. 건장한 골격의 두 사내의 눈에도 살짝 이슬이 맺혀 반짝였다.
  머물던 사람이 떠날 때면 언제나 느껴지던 허전함이었다. 두 사내는 한동안 가슴이 먹먹하여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답답한 침묵의 줄기를 잘라 버리기라도 하듯, 민수가 입을 열었다.
  "우리 여기까지 온 김에 풍란주 한 잔 하고 갑시다."
  용환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풍란주라고? 옛 날에 그 술을 마신 뒤에 경을 치렀잖소? 생각만 해도 끔찍해."
  "괜찮아요. 내가 책임 질 테니 같이 갑시다."
  선착장에서 가까운 해변에 있는 '벌금 반점'으로 들어섰다. 거기는 이전에 들렀던 음식점이었다. 해변이 바로 창가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민수는 술과 음식을 주문했다.
  이내 향긋한 냄새에 실려 풍란주와 음식이 들어왔다. 마개를 채 내려놓기도 전이었다. 풍란주의 은은한 향기가 사내들의 후각을 자극했다. 향기만으로도 전신이 나른해지는 느낌이었다. 너무나 감미로워 슬그머니 성기마저 발기되려고 했다. 서로의 술잔에 술을 채우자 둘은 잔을 맞대어 건배를 외쳤다.
  
  대형 해물탕을 안주 삼아 몇 순배의 술잔이 돈 다음이었다. 용환이 억눌러 왔던 가슴속의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당신은 내년 봄에 결혼한다고? 참 좋겠소."
  민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에 말했다.
  "싱겁기는요. 당신도 부러우면 짝을 구하면 되지 않소?"
  위도를 찾기 1년 전이었다. 용환이 면직 처분을 받자 아내마저 이혼해 그의 곁을 떠나 버렸다. 그는 글자 그대로 혈혈단신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남들 다 하는 수뢰 혐의로 그렇게까지 생활이 비참해질 줄은 몰랐다. 절망으로 고뇌를 되씹으며 1년 가량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다가 1년이 지나서야 위도에 찾아든 거였다. 그는 민수를 만난 뒤부터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래서 부지런히 전국의 김 양식장을 찾기도 하고 대학을 찾아 기술 지도도 받았다.
  "헌데 아내를 잃고 보니 너무나 외로웠소. 이제라도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싶소. 혹시 당신 주위의 사람들 중에 내게 권할 만한 사람은 없소?"
  민수가 막 뭐라고 대답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핸드폰이 울어대었다. 그는 폴립을 열어 귀에 갖다 대며 말했다.
  "여보세요?"
  "나예요. 사흘 뒤에 대전으로 좀 나와 줄래요?"
  은구슬이 구르는 듯한 맑은 목소리의 정미였다. 하마터면 반가워서 눈물이 빠질 뻔했다.
  "아니, 대전은 왜?"
  "문평동에 있는 제3공단 입구에서 만나기로 해요. 오후 두 시 정각이에요."
  "아, 그 날 섬에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거든요. 날짜를 좀 바꾸면 안 될까요?"
  "안 돼요. 굳이 바꾸려면 손님한테 양해를 구하세요. 그리고, 시간을 꼭 맞춰 오세요."
  "무슨 일인지 미리 좀 알려줄 순 없소?"
  "그 날 만나면 자연히 알게 되어 있어요. 그럼, 안녕!"
  민수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정미가 느닷없이 그런 전화를 다 하다니? 당장 문혜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 판이었다. 그는 핸드폰을 열어 문혜의 전화번호로 신호를 보냈다. 네 번째 신호에 문혜의 목소리가 그의 귓속으로 빨려들었다.
  "여보세요?"
  약간은 꿈꾸는 듯, 억양의 끝이 살짝 휘말려 올라가는 정다운 음색이었다.
  "나, 민수예요. 그 동안 잘 지냈어요?"
  "아, 어쩜 텔레파시가 통했나? 나도 막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근데 어쩐 일이세요?"
  "날짜를 좀 바꾸면 안 될까? 내게 갑자기 사정이 생겼어요."
  "혹시 내가 두려워졌나? 왜 무슨 일이 있어요?"
  "사실은 그 날 누구를 만나기로 했거든요. 조금만 날짜를 바꿔 주면 안 되겠소?"
  "그건 좀 곤란해요. 친구들이 교통편을 다 예약해 놓은 상태거든요. 그리고 우리의 약속이 선약이잖아요?"
  "알았어요. 내가 없더라도 섬에 와서 구경을 하면 될 테니까. 마중은 친구인 용환 씨가 나갈 거예요."
  "네,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안녕!"
  전화를 끝내자 용환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확실히 유명 인사는 틀려? 어디에 있어도 전화가 다 걸려오고?"
  "참 내. 전화만 걸려오면 유명 인사요? 그럼 유명 인사되기가 문제도 없겠네."
  용환과 민수는 두 병째의 풍란주를 따서 술잔을 부딪혔다.
  
  용환은 약간은 취기가 서린 목소리로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여기에서 뼈를 묻을 작정이오?"
  민수는 일순 당황스러웠다. 용환의 질문에 숨겨진 뜻이 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니, 이럴 수가? 그럼 이 사람은 언제든지 섬을 떠날 작정을 하고 있었을까? 느닷없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인데?'
  마음속으로는 분명 당혹스러웠지만 짐짓 바다를 굽어보며 대답했다.
  "그래요. 나는 갈섬에 도착한 첫 날부터 비장한 각오를 했소. 여기에 내 후반기의 모든 생애를 내걸기로 말이오."

  용환은 붉게 타오르는 얼굴을 들어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뜻 보면 눈시울이 젖은 듯도 했다. 용환의 눈빛은 안개처럼 그윽한 깊이로 잠겨 들었다. 민수는 문득 자신의 나이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내 나이 서른 하나. 인생 칠십이라고 한다면 아직 절반도 못 산 셈이군. 이 나이에 변화를 시도해도 몇 번은 가능한 일이야. 용환 씨가 내게 던진 말의 의미가 뭘까? 젊은 나이에 현실의 포기가 너무 빠르다고 질책하는 걸까? 내 전공은 분명 전자 기술이었는데? 전자 기술이 물고기 양식 기술로 바뀌다니? 지금 내가 가는 길이 후회가 없으리라고는 아무도 속단할 수가 없어. 뒷날에 후회할 때 하더라도 일단은 이 길을 계속 걷고 싶어. 분명 나의 숨은 재능이 있을 거야. 회사 생활을 하려면 업무 처리와 인간 관리에 있어서 막힘이 없어야 돼. 인간 관리란 상급자와 하급자를 내 뜻대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인데 자신이 있을까? 이전에 그런 능력을 갖추었더라면 내가 왜 직장을 잃고 아내와 헤어졌을까?'

  다섯 병째의 풍란주를 마실 무렵이었다. 용환은 게슴츠레 풀린 눈빛으로 머리를 벽에 기대어 상념에 잠겨 있었다. 현실에 대한 원망인지 처절한 외로움에 대한 슬픔인지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민수는 용환에게 더 이상은 술을 권하지 않았다. 술은 주량에 맞춰 먹어야 한다는 관점 때문이다. 술이 몸을 괴롭히고 길바닥에 토사물로 버려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단 한 방울의 술일망정 진정으로 술을 사랑한다. 그는 인생에 활력을 부여하고 복잡한 세상사에 격조를 얹어 주는 것이 술이라고 믿는다.
  민수는 화두처럼 던져진 용환의 질문에 골몰했다. 정말 여기에서 뼈를 묻을 작정이냐고? 뼈를 못 묻을 것도 없지만 왜 그런 질문이 나왔는지 궁금했다. 문득 그의 뇌리에 해식 동굴의 일기장이 떠올랐다. 인생 칠십이 유한한데 그렇게 버둥거리던 결과가 뭐였는가 싶었다. 일기장의 주인공들은 서해 바다의 외로운 영혼이 되어 구천을 떠돌 터였다. 그 누가 그들의 영혼을 천도시켜 주었던가? 그는 자신도 몰래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서히 자신의 존재에 대한 막막한 느낌에 휩싸이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생각하면 할수록 남보다 특출한 재능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가 관악 캠퍼스를 드나들 때만 해도 세상이 좁은 존재로 여겨졌다. 한 마디로 세상은 안중에도 차지 않았다. 헌데, 지금은? 문제는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의 실체마저 또렷이 내세울 수 없는 처지임에랴? 자신을 능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자체가 과거에 얼마나 못마땅했던가? 그는 글자 그대로 개인의 실력을 숭상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가슴이 답답하여 술잔을 들어 주인을 불렀다. 주인은 술을 못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주인에게 개인 택시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택시가 도착하자마자 주인과 함께 용환을 뒷자리에 싣고는 그는 조수석에 앉았다. 창 밖으로는 5월의 바람이 비단결처럼 포근하게 밀려들었다. 그는 택시를 타고 가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생각했다. 그의 뇌리에 문득 채석강이란 지명이 떠올랐다. 이백이 달밤에 술에 취해 배를 몰다가 물 속으로 뛰어내렸다는 강을 말함이었다. 밤중에 배를 몰다가 어쩌면 그도 이백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용환을 둘러메고는 심구미의 해변으로 내려섰다. 때마침 전설처럼 고요한 달빛이 바다 가득히 남실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