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1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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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10회
섬과 나그네
손 정 모

10. 꿈꾸는 세계

긴장감이 목을 죄어 오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민수는 공책을 펼쳤다. 공책은 백여 페이지에 이르렀다. 글자가 적힌 부분은 겨우 70여 면이었다. 두 사내의 눈빛은 공책 면을 따라 파도처럼 휩쓸려 나갔다.

  난파 첫 날.
  이제 우리는 죽은목숨인가? 배는 좌초되어 거의 수중에 잠겨 버렸다. 되돌아갈 길이 막혔다. 심지어 우리가 갇힌 사실마저도 아는 사람이 없다. 이제 배를 끌어올릴 사람은 누군가? 물으나마나 대답은 뻔하다. 뻔하기에 숨통이 막힌다. 우리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아마도 물고기 떼와 안개 탓이리라. 물고기 비늘의 반짝거림만 아니었어도 이렇지는 않았으리라. 어쩌면 비늘의 인광(燐光)이 그다지도 빛났을까? 인광은 그렇다 치자. 헌데, 시야를 가렸던 안개는 어떻게 설명해야 옳을까?
  생각할수록 머리가 어지럽다. 아무리 생각해도 길이 안 보인다. 안 보이는 길을 만들 수도 없는 처지다. 정녕 우리는 이렇게 끝나는 걸까? 그렇게도 애타게 찾던 것이 고작 죽음의 그늘일까? 가슴이 탄다. 가슴이 타다 못해 나무에 목을 매달고 싶다.
  난파선의 침몰 상태부터 수상하다. 완전히 가라앉지도 못했다. 삼 분의 일쯤 머리를 내놓은 건 무슨 일일까? 가라앉으려면 팍 가라앉아 버릴 일이지. 왜 일부만 떠서 우리를 심란케 할까? 저게 무슨 자연의 조화일까? 그렇다 치더라도 석연찮은 점들이 너무 많아.
  미칠 것 같은데도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당장 우리가 죽는데 기록이 무슨 의미가 있어? 설사 사람들에게 읽힌다 치자. 그게 지금의 우리에게 무슨 위안이 되겠는가? 모를 일이다. 깨어진 머리에서 뇌수가 흐를지라도 모를 일이야. 왜 아까부터 자꾸만 몸이 떨릴까? 벌써 내 몸이 마비된 걸까? 별 일도 다 있네.
  내가 일기를 쓰다니? 평소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어. 그랬던 내가 글을 쓰다니? 지금 넋두리를 해대는 나는 누군가? 내 주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고뇌에 잠긴 사내들은 또 누구인가? 무엇 땜에 여기까지 왔던가? 나의 묘소가 되리라는 예지몽(叡智夢)이라도 꾼 걸까? 내가 글자를 채우기로 한 공간은 공책 다섯 장이다.

글자 크기를 작게 하여 쓰고 싶은 소리를 잔뜩 쓰자고? 이건 세 사람이 짜 맞춘 규정이다. 세 사람이 법관인 양 숙연히 합의했다. 여기서 합의가 가당한 걸까? 하필이면 내가 먼저 추첨되어 글을 쓰다니?
  도무지 글이라곤 써 보지 못한 내가 뭘 써야 할지? 그래도 의결된 사항은 지켜야지. 죽을 때 죽더라도 약속만은 지켜야 한다고? 그렇게 죽은들 누가 우리를 칭찬할까? 그 누가 우리의 심정을 이해해 줄까? 눈에 불을 켜지 않고는 내 글은 절대 못 읽을 거야. 시력이 딸리는 사람들이여!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그래도 사람이라고 끄떡거려? 다들 미쳐 있는 세상에 뭐가 온전할까? 당신들도 온전해?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할 수 있어? 쓸데없는 객기 부리지 말아. 내가 제일 식상해 하는 부분이 뭔지 알아? 고작 객기나 부리려는 멍청한 놈들을 대하는 일이라고. 나 역시 멍청이들을 가려볼 줄이나 알까? 한 마디로 웃기는 일이지.

  일이 잘못된 건 사흘 전이었다. 일행 중 하나의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다. 당장 병원을 찾아 섬을 떠나야 할 판이었다. 그 날 따라 섬엔 배가 없었다. 아니, 배가 없었다기보다는 선장이 없었다. 상호와 나는 동력선을 대절할 수밖에 없었다. 우린 상호의 선장 경력을 믿기로 했다. 확실히 상호는 기관 조작이라든가 운전을 잘 했다. 그건 아무나 흉내낼 만한 일이 아니었다. 분명 전문가였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그런데, 왜 배가 좌초되었느냐고? 그건 나중에 쓰기로 하자. 내가 아니라도 두 사람이나 쓸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승선 인원이라고 해야 40대 중반의 사내들 셋일 뿐. 우리가 배를 함께 타기란 분명 어려운 일이었다. 자라 온 배경이나 성향으로 볼 때도 그랬다. 그 날의 정황으로는 배를 몬다는 자체가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우리가 떠난 곳은 상왕등도다. 위도 서쪽으로 뱃길로 두 시간쯤 떨어진 절해고도다. 또한 거긴 동백 숲과 낙조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 날 우리는 섬을 떠나야만 했다. 섬을 나설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급성 맹장이라 의심되는 인수의 통렬한 몸부림 때문이었다. 몇 안 되는 주민들은 원양 어장으로 떠나 버리고 없었다. 배를 몰 만한 선주는 아무도 없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래야 아낙네들과 아이들뿐이었다. 게다가 급변한 악천후로, 격포로부터의 정기 연락선도 끊겨 버린 상태였다.
  상호는 한 때 여객선 선장이었다. 현재 그는 수협의 일을 맡고 있다. 인수는 화공회사의 물질 개발을 맡아보는 부장이다. 나는 전자회로 제작 업체에 근무하는 관리자이다. 세 사람이 만난 경위를 떠올려 보자. 함께 한 기간이 얼마였던가? 딱 석 달만이다. 상왕등도에 머물면서 우리가 한 일을 어찌 몇 자의 글로 가볍게 나타내겠는가?
  잠시 두 사내는 일기장에서 눈을 뗀 다음 호흡을 가다듬었다. 눈을 뗀 지점까지가 일기장의 제1면의 끝이었기 때문이다. 용환이 민수를 향해 말했다.
  "글에 뭔가 흡인력이 있지 않아요?"
  민수도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거리며 대꾸했다.
  "내 생각에도 그래요. 끝까지 읽어 봐야 되겠어요."

  일기의 세 사내는 번갈아 가며 자신들의 과거사를 적나라하게 펼쳐 놓았다. 형태와 상호 및 인수의 세 사내들에 의해 기술되는 정황이 상세한 느낌으로 살아났다.
  그들은 현실의 고뇌를 벗어나려고 섬을 찾았다. 형태는 회사 경영의 미래에 대한 영감을 얻고자 고심했다. 나날이 무너지는 회사들의 실태를 지켜보며 그는 심한 고뇌에 휩싸였다. 신선하고 창의적인 경영을 위하여 그는 날마다 머리를 굴렸다. 다른 회사를 둘러보기도 하고 해외로 나가 산업 시찰도 다녔다.
  연구원들을 배치하여 연구 분위기도 강화하고 경쟁력도 갖추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자신의 두뇌를 통하여 회사의 실질적인 경영이 이루어졌기에 수시로 진땀이 흘렀다.

  섬을 찾기 1년 전이었다. 형태는 전무이사라는 직함에 걸맞게 회사 전반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았다. 개인 중소 기업체였기에 관리자의 판단 착오는 곧바로 기업 붕괴로 이어지는 현실이었다. 반도체 조립에 관련된 4월의 야간 작업 현장에서였다. 우주복 같은 방진복(防塵服) 차림으로 현장을 순찰할 때였다. 자동화 시스템으로부터 부려진 부품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조립되어 선을 보였다. 사원들은 한결같이 반복되는 작업으로 타성에 젖어 들만도 했다. 예고되지 않은 순찰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작업실 공간에 들어 있는 40여 명의 직원들의 몸짓이 한결같이 타성에 젖은 듯했다.
  형태는 스물 다섯 살쯤의 청년에게로 시선이 이끌렸다. 청년은 형태가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청년은 비닐 장갑을 낀 손으로 부품들을 분류하고 있었다. 최신형 오디오 기계를 이루는 반도체 소자들이었다.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 콘덴서(蓄電器), 저항기(抵抗器)가 차례대로 부려지고 있었다. 이들을 결합시켜 집적회로(集積回路)를 만들어야 했다. 집적회로 작업실에는 집진기(集塵器)로 정화된 공기만이 실내를 채웠다. 먼지란 반도체의 회로에 있어선 치명적인 방해 물질이었다. 제일 위험한 요소는 전기 스파크였다. 스파크가 일면 반도체 회로의 수명이 격감되기 마련이었다. 작업자의 안전에도 꽤 위협적인 요소가 된다. 청년은 마스크를 한 얼굴 가까이 인두의 예리한 날을 비춰 보았다. 인두를 타고 파르스름한 연한 연기가 살며시 피어올랐다. 그는 단련된 몸짓으로 땜질용 납을 인두 날로 쿡쿡 찍어 나갔다. 인두의 날이 오르내릴 때마다 치지직 소리를 내며 파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때마다 소자는 가지런하게 회로를 이루며 형체를 갖춰 나갔다.
  전기 인두가 그려내는 허공의 궤적에선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실내에는 에어컨이 작동되어 항온 항습(恒濕)이 유지되고 있었다. 청년은 작업 도중에 때때로 졸음을 쫓느라고 머리를 내흔들었다. 지정된 시간까지는 작업량을 채워야만 했다. 이러한 요인이 스트레스가 됨 직했다. 졸음을 견디면서까지 작업량을 맞추어 야만 했다. 졸음의 선상에서 날카로운 인두의 날이 허공을 가르곤 했다. 보는 자체가 섬뜩할 지경이었다. 형태는 조심스레 다가가 청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야, 정신 차려. 그러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차라리 잠시 쉬었다 해."
  형태는 작업실 건너 제품 포장실로 건너가 보았다. 컨테이너 벨트를 따라 조립된 오디오 기계들이 천천히 부려졌다. 사원들이 4인 1조가 되어 박스를 꺼내 제품을 포장했다. 아주 획일적인 작업이 줄줄이 진행되었다. 그는 회사 내 부서들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점검하고 싶었다. 그는 발길을 옮겨 제품 출하장으로 나섰다. 회사의 마당에는 트럭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러다가 차례차례 짐을 싣고는 행선지 별로 떠나곤 했다. 사원들은 6인 1조가 되어 신속히 출하된 제품을 차에 옮겨 싣곤 했다.
  형태는 이 번에는 연구실로 향했다. 각자 국내외 특허 문서를 펼쳐 놓고는 열심히 분석 중이었다. 더러는 연구원들끼리 열심히 토론을 하고 있었다. 소비자의 불만 사항에 대한 보완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회로에 대한 분석이 끝나는 대로 곧바로 수리가 진행되었다. 각 부서는 물론 부서들간의 유대도 현재로선 무난하다고 그는 판단했다. 그럴수록 그의 가슴은 더욱 답답해졌다. 조직 내부의 잘못이라면 그 부서로 책임을 물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부서 자체의 정화 과정을 거쳐 기업 구조가 탄탄해지기 마련이었다. 헌데, 조직의 단합과 업무가 잘 되는 반면에 관리자의 경영 능력이 한계를 보인다면? 이는 기업체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말과 다름이 없는 터였다.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그는 부서별 회의와 임원 회의를 정기적으로 소집했다. 사람들의 머리를 활용하는 데엔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었다. 기존의 틀 안에서만 조금씩 이루어지는 개선책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회사의 미래는 관리자의 경영 전략에 의해 결정되고 진행되는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형태는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에 매달렸다. 정보를 통해 국내외의 기업 의 미래를 예리하게 짚어나갔다. 동향에 뒤지면 회사는 그 날로 끝장이라고 여겼다. 그는 피상적인 자료만으로는 돌파구를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섬을 찾았다. 섬에서 지내면서 향후 삼십 년 세월을 내다보려고 했다. 셋 중 제일 먼저 섬에 도착한 사내가 형태였다. 그는 상왕등도의 북서쪽 해안에 자리잡았다. 거기에서 그는 벽돌조의 간이 건물을 지어 심신 수련을 시작했다. 건물은 해변의 둔덕에 자리잡았으며 벽돌과 슬레이트로 만들어졌다. 실내 면적이 스무 평에 달하는 조촐한 집이었다.
집이 지어진 지 이 주일이 못 된 시점이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상호와 인수가 형태의 집으로 합류했다. 마음이 통한 세 사내는 하늘을 우러러 뜻을 함께 하기로 했다.

  민수가 일기장을 넘기며 용환에게 말했다.
  "형태의 뜻이 상당히 옹골찬데? 변신해 보겠다는 집념이 대단하죠?"
  용환도 고개를 끄떡거리며 응답했다.
  "세 사내가 비슷한 시기에 섬에서 함께 만나다니. 이 사실만으로도 뭔가 이루어질 것 같소."

  형태와 상호 및 인수! 뜻을 함께 하기로 한 사내들은 그 날부터 지기였다. 사내들은 살아오면서 힘들었던 숱한 상황을 정리하기로 했다. 마음을 포근하고도 아늑하게. 그러면서 시각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아침마다 눈을 뜨면 일제히 부르짖는 구호였다.
  새벽 다섯 시면 이들은 아침 바다를 가르며 배를 몰곤 했다. 그 무렵의 새벽 바다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펼쳐진 별천지였다. 가없이 펼쳐져 하늘과 경계를 이룬 바다. 바람에 휩쓸릴 적마다 파르르 떨며 치솟는 물안개. 사방으로 고개를 돌려보지만 눈에 띄는 거라곤 탁 틘 바다뿐. 햇살이 퍼지면서부터 서해 바다는 선홍색의 빛살로 굽이쳤다. 눈을 뜨기만 해도 바닷바람이 빛살이 되어 가슴으로 밀려들 것만 같았다. 두근거리는 가슴. 펄떡거리는 핏줄. 괜스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일행은 호기롭게 가슴을 내밀었다.
  통통통통! 통통통통!!
  숨가쁜 뜀박질이 이어지듯. 동력선에선 엔진 소리가 빛살처럼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구름 속을 떠다니는 나그네인 양. 갈매기 떼가 날 때마다 수천 송이의 목련꽃이 일시에 떨어져 내리는 듯했다. 간지럼을 타듯 하늘이 점점 파래지면서 곳곳에 흰 구름이 피어올랐다. 쉴새없이 굽이치는 바다. 하얗게 물 이랑을 일구며 휩쓸려 가는 물결들. 그 언저리에선 언제나 뽀얀 물거품이 허공으로 피어올랐다.

  동쪽 수평선에서 나뭇잎처럼 떠서 흔들리는 위도를 지켜보며 일행은 닻을 내렸다. 낚시할 때가 되었다. 낚시질에는 다년간 단련된 몸들이었다. 낚시를 드리우자마자 사방으로부터 입질이 시작되었고 연이어 물고기가 줄줄이 낚였다.
  인수가 물칸에 잡힌 우럭을 던져 넣으며 말했다.
  "낚시는 딱 한 시간만 합시다. 그래도 며칠 분은 너끈히 건져 올릴 거요."
  형태와 상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사내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가슴 설레는 정감이 남실거렸다. 오랜만에 얻는 여유 탓일까? 가슴 벅차 오르는 감동이 치솟아 올랐다. 물결이 일렁일 때마다 와락 달려들어 서로들 껴안고도 싶었다. 아침 바다에만 서면 언제나 느껴지는 정감들이었다.
  "이야, 많이 잡혔어. 이제 그만하고 술 한 잔 해요."
  사내들은 우럭과 도다리 회를 놓고 둘러앉았다. 낚시꾼들이라면 회를 뜨는 데에도 전문가들이었다. 쟁반마다 수북히 뜬 회를 바라보며 일제히 술잔에 술을 따랐다. 바다는 치솟는 태양으로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아침놀이 지는 바다는 해당화의 꽃잎처럼 선홍색의 빛깔로 물들었다. 수정처럼 맑은 수면 위로 굽이치는 햇살. 바람이 일 때마다 수만 갈래의 물 이랑을 이루며 부서져 나가는 바다. 바람이 스치는 물결마다 물고기 떼가 파드득거리며 치솟는 듯했다. 선홍색과 자줏빛으로 점점이 물든 바다가 끝없이 반짝였다. 모두들 몽환의 경지에 취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나같이 벅찬 감동으로 넋이 나간 듯한 표정들이었다. 해풍에 휘감길 때마다 간지럼을 타듯 사내들의 속눈썹이 떨리곤 했다.
  분위기에 취한 탓일까? 흥에 겨운 듯 상호가 입을 열었다.
  "내가 뭐 땜에 이 섬을 찾았겠소? 자연에 취해 이젠 털어놓고 싶소. 다들 내 마음 알겠죠? 발단은 이 메일(e-mail) 때문이었소."

  상호는 2년 전부터 십 년 연하의 젊은 유부녀와 사랑을 나누었다. 여인의 이름은 연주였다. 그녀는 교육자 집안의 후예로 미술대학 조교수였다. 반면에, 그녀의 남편은 종합 병원 외과 과장이었다. 그녀는 서른 다섯 살이었고 그녀의 남편은 서른 여덟 살이었다. 그들은 세상에 부러울 것 없이 화목한 부부였다. 서로가 진심으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다. 그랬기에 함께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언제나 만족스러웠다.
  상호는 오랜 기간을 선장으로 일했다. 때로는 외항선도 탔다. 한 때 그의 꿈은 소설가가 되는 거였지만 쉽지 않아 그만두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문학을 향한 열정이 수시로 들끓곤 했다. 그는 수시로 다양한 소재를 구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그는 컴퓨터 채팅에 눈을 돌렸다. 사방으로 인터넷을 더듬다가 '가슴으로 통하는 방'이라는 사이트에 들어섰다. 거기는 월 회비만 내면 채팅 상대자의 누드 사진까지도 볼 수 있는 사이트였다. 의외로 젊은 남녀 회원들이 등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어떤 때는 이용자가 몰려 몇 차례를 시도해서야 겨우 인터넷이 터지곤 했다.
  놀랍게도 연주도 정식으로 등록된 회원이었다. 비록 신분을 숨기고 가명을 쓰고는 있었지만 틀림없는 연주였다. 아마 그녀의 남편은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었으리라. 상호는 그녀와 접속이 되면서부터 나타나는 그녀의 누드 사진에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사진은 2주 단위로 갈아 끼우게 되어 있었다. 상호도 자신의 누드 사진을 촬영하려고 사진관을 은밀히 물색했다. 사진 촬영이 문제가 아니라 현상과 인화가 문제였다. 그래서 아예 단골 사진관을 정해 두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치근거리는 메일을 띄웠다. 그러면서 상대의 반응을 떠보았다.
  "헤, 나는 좀 잘 서는 싸나이임. 맘 있음 멜로 답 보내."
  "얼마나 잘 서는데? 선 사진 좀 멜로 보내 줘여.(~_*)"
  그러다가 점차 메일의 내용이 길어지면서 문학적인 색채가 흘러 넘쳤다. 곧바로 그녀로부터 시가 전송되었다. 시를 읽자 그의 가슴에선 묻혀 있었던 감흥이 살아났다. 그는 오랜만에 가슴을 적시는 정서에 감동되어 몸을 떨었다. 그는 연주가 명성이 드높은 여류 시인임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녀는 신세대 독자들로부터 팍팍 감성이 틔는 시를 쓰는 문인이라고 알려졌다. 그는 그녀로부터 시를 배우고 싶다고 메일을 보냈다. 그녀는 독자 하나를 얻은 즐거움으로 기꺼이 답장을 보내 왔다.
  서로의 뜻이 통했을까? 그녀에게 비친 그의 문체는 놀랄 만했다. 문장의 유려함이나 섬세한 감각의 묘사에 있어서 빼어난 바가 있었다. 단지 좀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흠이었지만, 문장의 감각은 가히 천부적이라고 여겨졌다. 점차 서로는 메일의 교신을 통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다. 메일의 빈도가 점차 높아지다가 마침내는 서로 만나기로 했다.
  상호와 연주가 처음 만난 날이었다. 충무로의 술집에 마주앉아 술잔을 들며 연주가 그에게 말했다.
  "지금도 소설가를 꿈꾸세요?"
  "네, 그래요."
  "어떤 얘기를 쓰고 싶으세요?"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얘기예요."
  "참 내. 무슨 대답이 그래요?"
  "나는 진정을 다해 말씀 드렸어요."
  "네. 그렇긴 한데 너무 모호하잖아요?"
  그녀는 문학에 담긴 작가의 혼에 대해 슬쩍 이야기를 비쳤다. 그의 관심도에 따라 문학의 주제와 동기에 대해서도 설명해 줄 생각이었다.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그의 시선은 그녀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그에게 비친 그녀는 일찍이 보지 못했던 빼어난 미인이었다. 해맑은 얼굴에 그믐달처럼 휘어져 올라간 눈썹. 오뚝 선 콧날과 반짝이는 눈동자. 그린 듯 촉촉이 젖은 입술. 그녀의 눈길이 스칠 적마다 만물이 경이로움에 취해 몸을 떠는 듯했다. 그는 너무나 감탄스러워 그녀의 몸에서 좀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호소적인 눈빛이었다. 가만 바라보고만 있어도 금세 마음이 허물어질 것만 같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억새꽃의 보풀처럼 섬세한 눈빛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그렇게 평온해질 수가 없었다. 마치 지난날은 그녀를 만나기 위한, 예비적인 삶이었던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영적인 면에서부터 그녀에게 먼저 매혹을 당한 느낌이었다.

  문득 사이트에서 본 그녀의 누드 사진이 떠올랐다. 덩그렇게 돌출해 있던 탄력적인 젖무덤. 사타구니를 매혹적으로 가려 주던 음모. 우윳빛으로 윤기가 흐르던 그녀의 알몸에 생각이 미치자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자신도 몰래 낮게 한숨을 토했다. 그녀에게 품었던 엉뚱한 생각 때문에 그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섬뜩했다. 잠시 마음을 추슬러 보려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왠지 자꾸만 그의 눈이 감기려고 했다. 가까스로 눈을 뜨고 심호흡을 했다.
  "눈빛을 보니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네요. 혹시 그럴 만한 이유라도?"
  "아뇨. 그런 건 전혀 없어요. 아마도 지난밤의 과로 탓인 모양입니다."
  그는 속마음을 틀킨 것만 같아 곤혹스러웠다.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는 곧바로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 술이 좀 오르거든요. 잠시 맑은 공기를 좀 마시고 싶어요."
  "그래요? 그럼 같이 나가요, 우리."
  충무로의 대한극장 앞을 지날 때였다. 속이 영 거북스러웠다. 아무래도 과음한 탓이라고 여겨졌다. 자칫 토할 것만 같은 느낌에 휩싸여 몸을 떨었다. 그는 이제 그녀와 작별하고 싶었다. 차마 그녀의 앞에서 토악질을 해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속이 점점 거북해졌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런 낌새를 알아채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잔뜩 목소리를 가라앉혀 그녀를 향해 말했다.
  "오늘 즐거웠어요. 다른 곳에 또 볼일이 있거든요."
  "네, 그러세요? 그럼 다음에 봐요."
  그녀와 작별을 하고 막 돌아선 순간이었다. '우욱'하고 그의 입으로부터 토사물이 황톳물처럼 흘러 내렸다. 그는 견디다 못해 쪼그려 앉은 채, 계속 토사물을 쏟아 내었다. 그 때 누군가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돌아보니 그녀였다. 그녀는 근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연신 그의 등을 두드렸다. 사내로선 들켜 버리기 싫은 부끄러운 장면이었다. 무척 부드럽고 따스한 그녀의 손길이었다. 이 때 그의 가슴을 휘저으며 치솟는 강렬한 떨림이 있었다. 무한히 포근하고 따사로운 느낌에 휩싸여 그의 콧등이 시큰거렸다. 그는 무슨 힘이 시키는 줄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한동안 남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나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 날 이후로 틈틈이 만나다가 육체 관계까지 갖게 되었다. 세월은 거침없이 흘렀다. 계절은 여름철이었고 그렇게 밀회를 즐긴 지 반 년쯤 되었을 때였다. 그는 친구의 초청으로 하와이에서 이 주일간을 보내게 되었다. 섬을 찾기 석 달 전이기도 했다. 그는 야자수 무성한 와이키키 해변의 정취에 푹 젖어 지내었다. 그 무렵에도 그는 친구의 컴퓨터를 이용하여 연주와 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는 매일 연주에게도 메일을 보냈지만 아내에게도 부지런히 메일을 보냈다. 헌데 어느 날부터인가 느낌이 좀 이상했다. 아무래도 누군가 자신의 메일을 열어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단정할 수는 없었지만 예감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하와이로 건너가기 닷새 전이었다. 그는 연주와 함께 인천의 덕적도로 놀러갔다. 밤이 늦어 돌아갈 배를 놓친 뒤였다. 할 수 없이 민박집을 잡아 놓고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핸드폰이 울어대었다. 그는 그녀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에 핸드폰을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 나야. 지금 거기 어디야?"
  "여기? 덕적도야. 인천까지 나온 김에 잠시 들렀어. 그러다가 배가 끊겨 저녁 먹는 중이야."
  "세월 참 좋으시군. 누구랑 갔어?"
  "아아, 참 오 선장이라고 알지? 오 선장이랑 같이 왔어."
  "오 선장 옆에 있어? 인사 좀 하게 바꿔 줘."
  "그래. 어? 잠시 화장실에 갔나 봐."
  "그럼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좀 수상한데? 하여간 알았어."
  "그래, 잘 있어."
  핸드폰의 뚜껑을 닫으면서도 그는 가슴이 벌렁거렸다. 관자놀이 부근의 실핏줄마저 펄떡거렸다. 줄곧 그의 동작을 지켜보던 연주가 안타까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덕적도라고 밝혔어요? 그냥 지하철이라거나 식당이라 해도 되잖아요? 만약 이 일을 계기로 들통이 나면 어쩌죠?"
  그는 금세 가슴이 떨려 오 선장에게 급히 전화를 했다. 핸드폰은 닫혀 있었고, 집으로 전화를 하니 안 들어왔다는 거였다. 할 수 없이 핸드폰으로 음성 녹음을 남길 수밖에는 없었다. 아무래도 마음이 켕기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상호는 회계사인 친구와 함께 하와이의 밤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 그 때 좀 침착했으면 됐을걸. 왜 그 때 오 선장을 들먹여 아내에게 들통이 났을까? 하필이면 그 밤 따라 왜 그 친구와 통화가 안 되었을까? 확실히 재수가 옴 붙었나 봐. 아내가 오 선장의 명함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니. 어쩜 이렇게 일이 꼬일 수가 있어?'
  와이키키 해변을 따라 축축 늘어진 야자수를 바라보며 그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 때 왜 아내가 오 선장에게 전화했을까? 뭔가 지피는 바가 있었을까?'    거짓말이 들통나는 바람에 일체의 변명이 무색해져 버린 그였다. 뒤에 부지런히 사과도 하고 해명도 했지만 아내의 얼굴엔 불신의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회계사인 친구 종균은 하와이에서 자리잡은 입지의 한국인이었다. 종균과 상호는 어릴 적부터의 허물없는 친구였다. 종균은 이미 몇 차례에 걸쳐 상호에게 하와이를 찾아달라고 초청했다. 친구의 호의를 저버릴 수가 없어 마침내 하와이를 찾은 상호였다.
  듣던 바대로 종균은 하와이의 유지였다. 종균과 함께 가는 곳 어디에서든 대접이 융숭했다. 종균은 상호에게 이 주일간은 충분히 관광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 기간이 상호에게 인생의 중대한 전환기가 되리라고는 미처 몰랐다.
  상호는 나날이 하와이의 비경을 더듬어 보느라고 황홀경에 취해 있었다. 황홀한 느낌을 문학적 감수성에 실어 그는 조석으로 연주와 아내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는 연주와 육체적인 정분을 나눈 사이였기에, 야한 말을 마음껏 메일로 보냈다. 그는 욕심을 내어 나중에 소설을 쓸 경우까지도 대비했다. 그리하여 연주와의 교신 내용을 모두 문서 파일로 저장해 두었다. 비밀번호에 대한 타성에 젖어 그는 메일에서나 문서 파일에서나 같은 비밀번호를 썼다. 그는 남들이 자신의 메일을 열어 보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그리하여, 한껏 저속하고도 낯 가려울 정도의 용어로 연주에게 메일을 보냈다.

  연주에게
  지금은 한낮이야. 와이키키 해변을 휩쓰는 남태평양의 바람결이 이렇게 감미로울 줄은 몰랐어. 친구 내외는 일 보러 가고 나 혼자만 해변에서 돌아와 쉬고 있어.
  내 인생에 있어서 내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단 한 분의 여인이여. 나는 그대를 위해 태어났고 앞으로도 그대와 함께 영원히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해변의 빛살을 받을 때마다 그대의 맑은 눈동자를 떠올리곤 했어.
  내가 얼마나 그대를 사랑하는지 알지? 나 자기 젖 먹고 싶어. 아울러 거기도 핥아 주고 싶어. 나도 그게 지금 부풀어올라 수시로 끄떡거리거든. 막 쥐어박아도 더욱 기승을 부리며 일어서서 야단이야. 하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참아 볼게. 나중에 봐. 안녕!

연주에게 메일을 띄운 뒤에 그는 곧바로 아내에게도 메일을 날렸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그리운 여인이여. 당신은 내 삶의 희망이요 불빛이며 생명이오. 내가 당신을 만난 게 이렇게 축복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 야자수 휘늘어진 해변을 서성이면서도 오로지 당신만을 떠올리다가 이 글을 써. 당신을 잠시 떠난 것이 이렇게 사무치는 허전함일지 정말 몰랐어.
  나의 맑은 영혼의 동반자여. 남태평양의 습윤한 바람을 맞으면서도 내 가슴은 그대를 그리워하여 하얗게 말라붙고 있어. 잠시의 헤어짐이 보다 윤택한 만남의 모태가 되기를 빌며 그리운 마음을 달래고 싶어. 사무친 이 외로움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가슴이 먹먹하게 젖어들어. 나중에 또 쓸게. 안녕!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정작 놀랄 만한 일은 서울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상호의 아내는 덕적도에 관련된 남편의 거짓말에서부터 짙은 의혹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가 하와이로 가고 난 뒤에 상호의 모든 물품을 뒤져보았다. 그의 수첩에 메일의 비밀 번호를 상징하는 번호가 적혀 있었다. 아마도 망각에 대비하여 그가 비밀리에 적어 놓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전에 절대로 그의 물품을 뒤져본 적이 없기에 그는 안심하고 있을 터였다. 평소에는 그럴 엄두를 못 내었다가, 마침 의혹이 일 때 뒤져보고 싶었다. 뒤지다 보면 틀림없이 단서가 나타나리라고 믿었다. 만약에 치밀한 남편이라면 허점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으로 그는 결정적인 실수를 한 거였다. 그가 대충 둘러대고 출국했지만 그녀에게는 석연찮은 점이 너무 많아 보였다. 그리하여, 그의 물품에 대해 세밀한 조사를 시작했다.
  sh8378j. 비밀번호의 내역은 영문 표기의 이름(주상호) 세 글자와 체격 지수였다. 체격 지수의 83은 183 cm란 신장을, 78은 78kg이란 체중을 나타낸 거였다. 이 비밀 번호가 묘하게도 그의 문서 번호의 비밀 번호와도 일치되었다. 비밀 번호를 알아낸 날부터 그녀는 남편의 메일을 열어 보기 시작했다.
  남편의 메일을 열고 들어선 순간이었다. 받은 편지함에 메일이 그득하게 실려 있었다. 메일의 주 발신자의 이름은 연주였다. 잔뜩 불안감에 휩싸이면서도 그녀는 커서를 옮겨 마우스 왼쪽 키를 눌렀다. 메일의 창이 열릴 때까지 가슴이 마구 떨렸다.

  몽둥이의 제왕에게
  지금 뭐 해? 논문을 쓰다가 잠시 그대 생각이 떠올라 창을 열었어. 혹시 거기 가서까지도 미인들을 꿰어차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더러 잘 생긴 남학생들을 볼 때마다 그대의 물건이 떠오르곤 해. 그대를 가장 잘 말해 주는 게 있다면 바로 그 몽둥이가 아닐까 싶어.

하와이의 해변을 거닐다가도 색정을 못 이겨 괴성을 지르는 건 아닌지? 나의 영원한 구원자인 그대를 위하여 나는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어. 근데 나 거기가 꼴려 죽겠어. 나 어떡해, 응? 나중에 또. 안녕!

  메일의 글을 읽는 도중이었다. 그녀는 숨이 탁 막히는 느낌이었다. 웬만하면 끝까지 읽어 내려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더 이상은 읽어 나갈 수 없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이 들며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눈물이라니? 그녀는 강하게 머리를 내흔들며 방바닥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마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머리가 터져 버리기라도 할 듯이. 그녀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엉겨 붙는 듯했다.
  가슴의 밑바닥으로부터 펑하니 구멍이 뚫려 버린 느낌이었다. 입술이 뒤틀리도록 심하게 입술이 실룩거렸다. 그렇게 믿던 남편으로부터의 배신이라니! 설마 그가 자신을 배신하리라고는 미처 몰랐다. 몰랐다기보다는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가슴은 안개더미에 휩싸인 듯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도저히 발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상황이었다. 그녀는 문득 이 세상에 혼자가 된 느낌이었다. 생각할수록 한겨울에 발가벗겨져 내쫓긴 꼴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방바닥에 쓰러진 채 어깨를 들먹거리며 흐느껴 울었다. 가능하다면 그대로 드러누워 눈을 감아 버리고도 싶었다.
  대략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내친 김에 확실한 근거를 찾고 싶었다. 그녀는 남편의 보낸 편지 보관함에 저장된 메일들을 열어 보았다. 4/5가 연주에 대한 것이었고 나머지가 그녀 자신에 관한 거였다. 메일을 열 때마다 낯뜨거운 용어들이 사정없이 밀려들었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남편이 연주와 그녀 자신에게로 오르내리며 요설을 늘어놓는 일이었다. 그의 메일의 내용을 들여다보자니까 한 마디로 가관이었다. 한글 문서로 들어가 '밀애'라는 파일에 시선이 머물렀다. 파일 이름을 클릭하자마자 문서 번호를 입력하라는 자막이 나왔다. 그녀는 메일의 비밀 번호를 자막에 차례대로 입력했다. 그러자 문서의 내용이 눈에 확 들어왔다. 글은 연주와 주고받은 메일의 복사문의 전문이었다. 또다시 피가 확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치를 떨며 그가 돌아오기를 별렀다.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서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작정했다. 치솟는 울분으로 친다면 그녀는 당장 메일로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확실히 목을 죌 만한 근거를 확보해야 했다. 자칫 잘못 메일로 뛰어들었다간 남편과 연주가 입을 맞출 여지도 없지 않았다. 괜히 메일로 장난을 쳤다든지하여 얼마든지 오리발을 내밀 수도 있을 터였다. 마음은 엄청나게 달아올랐지만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는 일체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하와이를 다녀온 뒤 사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의 아내가 슬며시 그에게 다짐을 두었다.
  "당신 혹시 나에게 숨기는 게 없어? 솔직히 털어놓는 게 좋을 거야. 그래야 마음도 편할 거고."
  그 사이에 들통 난 일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그였다. 그는 퉁명스런 기색으로 대답했다.
  "이 사람이 뭘 잘못 먹었나? 왜 엉뚱한 소리를 하고 그래?"
  일단 첫 날은 그것으로 넘어간 줄 알았다. 며칠 사이에 그의 아내가 연주를 찾아가 만났다. 그녀는 남편의 자백을 받고 왔다면서 슬며시 연주에게 유도 심문을 해댔다. 그러면서 예리한 눈빛으로 연주의 표정을 살폈다. 아니나다를까 연주의 표정이 바뀌면서 목소리까지 떨렸다. 연주는 교수실의 문을 걸어 잠그고는 그녀에게 타협하는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해 드릴까요?"
  "내가 댁의 남편을 만나지 않고도 될 정도로 결단을 보여 주세요. 앞으로 어떡하시겠어요?"
  상호의 아내는 치밀하게 머리를 굴려 상대를 제압해 나갔다. 연주로부터 자백을 받고서야 그녀의 남편을 족쳤다. 상호는 그저 잘못했다고 빌지 않을 수 없었다. 수없이 자신의 메일을 읽었을 아내를 떠올리자 그는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그리하여, 그는 음울한 가정의 분위기를 쇄신하여 새로이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에서 그가 섬을 찾은 터였다.

  인수의 얘기는 대단히 짧았다. 아마도 병마에 시달리느라고 제대로 못 쓴 모양이었다. 맹장 부근의 아랫배의 통증으로 인해 인수는 혼수 상태에 빠졌다.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느라고 상호와 형태가 배를 대절했다. 배가 출항한 지 삼십여 분만이었다. 폭풍 주의보가 막 해상에 내려졌다. 인수는 배가 출항하면서부터 좀처럼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예상대로 사방에는 물안개가 자욱했고 사나운 폭풍우가 완전히 바다를 뒤흔들었다.
  전직이 선장이었던 상호가 조타실에서 키를 잡았다. 기관실은 자동 상태로 내버려 둔 채였다. 위도를 향해 출발한 배가 자꾸만 항로를 잡지 못해 비틀거렸다. 휘몰아치는 폭풍우 때문이었다. 항로를 연방 수정해 보았지만 폭풍우 앞에서는 대책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폭우는 더욱 거세어졌고 시야는 끝없이 가물거리만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간 관념도 방향 감각도 서서히 잊혀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째를 허우적거렸건만 결국은 항로를 잃고 말았다.
  세 사내는 몸이 달아올랐다. 해상에는 폭풍 주의보가 발령된지라 어떤 배도 뜨지 않았다. 여섯 시간 동안 파도를 넘나들며 달려온 곳이 고작 위도 부근이라니! 위도인 줄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위도 근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때부터 발생했다. 주변에 산재한 암초 지대를 지나면서부터였다. 선체가 암초 더미를 들이받으면서부터 자꾸만 기관에 무리가 간 듯했다. 일단은 배로 무사히 바다를 건너고 볼 일이었다. 그랬기에 다른 일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배가 암초 지대를 지나면서부터 휘몰아치는 폭풍우를 만났다. 배는 금세 물 속으로 가라앉아 버릴 듯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긴박한 순간들이었다. 그 바람에 혼수 상태에 빠졌던 인수마저도 거짓말처럼 의식을 되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 몸이 되어 배를 위도 해변에 정박시키려고 애썼다. 더 이상 얼쩡거리다간 수장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초를 다투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배는 점차 위도의 남서쪽 해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콰르릉거리며 연방 번개가 쳤다.
  위도의 쪽박금을 향해 배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허나 워낙 드센 파도였다. 버스 두 대 높이의 파도가 휩쓸려 들 때마다 동력선은 바들바들 떨어야만 했다.
  쿠웅쿠쿵! 쿠쿠쿵!!
  또 한 차례 암초에 선체가 부딪히고 말았다. 암초에 부딪힐 때마다 사내들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지곤 했다. 창졸간이었다.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엔진이 꺼지려는 듯이 헐떡거렸다. 여태껏 겨우 버텨 온 엔진이었다. 악천후 속에서 엔진이 꺼진다면? 엔진이 꺼진다는 건 생명의 소멸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입술이 탔다. 그렇게 잘 해 보려고 버둥거렸건만 고작 결과가 이건가 싶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무(海霧)까지 피어올랐다. 바다에서 널따랗게 치솟아 오른 두꺼운 안개 층이 위협의 대상이었다. 절망하는 한숨 소리가 잇달아 터져 나왔다. 아, 여기서 해무를 만나다니? 해무를 만나게 되면 모든 게 끝장인데. 이 일을 어쩐다?

  헌데, 찰나간이었다. 느닷없이 바닷길을 가로지르는 불빛이 줄지어 치솟아 올랐다. 상호는 잠시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몰래 중얼거렸다.
  '흠, 이건 바로 야광충을 섭취하는 형광 물고기 떼들의 집단적인 이동이 아닌가? 어쩜 이렇게 운 때가 맞는지 모르겠네.'
  상호는 축적된 항해술을 발휘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기관실로 달려갔다. 해머로 엔진 부위를 텅텅 치며 엔진 상태를 점검했다. 그에게 아직은 견딜 만하다고 여겨졌다. 그는 인수와 형태를 향해 말했다.
  "키를 물고기 떼의 진행 방향으로 맞춰 나가. 그렇지. 그렇게만 하면 돼."
  인수와 형태가 조타실에서 자리를 잡았고, 상호는 수시로 들락거리며 엔진을 점검했다. 인수가 생각난 듯이 상호를 향해 물었다.
  "물고기 떼의 진행 방향과 우리의 진행과는 어떤 관계가 있죠?"
  "형광 물고기가 떼를 지을 땐 산란기에 해당하는 법이거든. 산란 장소로 취하는 곳이 맑은 모래가 있는 얕은 바다예요."
  그는 형광 물고기의 이동 상태를 흘낏 지켜본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얕은 모래 지역이야말로 정박지로는 최상의 장소가 아닌가? 하여튼 부지런히 물고기 떼를 뒤쫓아 주세요."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였다. 배가 자꾸만 주위의 암벽에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다. 연이은 충돌에 일행은 넌지시 지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배는 어느새 무인도의 해식 동굴로 진입하고 있었던 터였다.
  해식 동굴에 닿은 직후였다. 배는 엉망으로 망가져 버렸다. 돌아갈 길이 막혀 버린 거였다.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생존의 자취를 남겨 두고 싶었다. 비상을 시도하다가 허망하게 사라져야 하는 현실에 진저리를 쳤다. 이것도 다 운수 소관인가 싶었다. 그들은 나중에 동굴을 찾게 될 사람들을 위해 삶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리하여,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고도 싶었다. 그들은 가물거리는 혼미한 정신 속에서도 일기장만큼은 성의를 다해 썼다. 그 결정체가 색 바랜 공책 뭉치로 남겨진 거였다.

  공책을 끝까지 읽고 난 뒤였다. 두 사내는 가슴이 먹먹하여 한동안 입을 열 수 없었다. 얼마간의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민수가 용환을 향해 말했다.
  "어, 제법 시간이 지났네. 어때요? 여자들을 부를까요?"
  "네, 좋아요. 우릴 기다리느라고 지금쯤 속이 다 탔을 거요."
  민수가 다시 좁은 길을 더듬어 내려갔다. 이윽고 그가 여인들이 있는 배로 다가갔다. 민수 혼자서 내려가자 여인들은 의아해 했고 일부는 경계하는 눈빛마저 보였다. 아마도 여인들은 돌발 상황이 벌어진 거라고 느낀 모양이었다. 돌발 상황이라면 흔히 목숨과 직결되는 게 보통이었다. 민수는 가능한 한 간결하게 정황을 설명했다. 그런 뒤에 여인들을 데리고 석실을 향했다. 설명을 들으면서 여인들은 일제히 놀라 탄성을 질러댔다. 명주를 선두로 하여 연희와 민정이 배에서 내려 석실로 통하는 길을 밟았다. 이윽고 여인들이 석실에 올라섰다. 인골들을 보는 순간에 여인들은 잠시 놀라 몸을 움츠렸다. 두 사내는 여인들에게 일기장의 내용을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그런 뒤에, 망자들의 영혼에 예를 표하자고 제안했다.
  용환과 민수는 잠시 명상에 잠긴 듯했다. 민수는 조심스레 일기장을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그들은 3구의 유해를 정성스레 석불 곁에 나란히 세웠다. 유해라기보다는 차라리 인골이었다. 살은 다 달아나 버리고 남은 것이라곤 뼈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행은 마침내 제단 앞에 일렬로 늘어섰다. 일기장을 읽느라고 촛대마다 불을 붙인 터라 실내는 환했다. 민수가 향을 찾아 향불을 피웠다. 향 연기가 서서히 궤적을 그리며 실내로 퍼져 나갔다. 숙연한 분위기였다. 용환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이제 예를 올리기로 합시다."
  말이 끝나자마자 일행은 제단을 향해 경건히 절을 올렸다. 파르스름한 향 연기가 허공에 차 오르면서 한결 숙연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저마다 동굴을 떠나는 대로 새롭게 인생을 살겠다며 각오를 굳혔다.
  민수는 잠시 자신을 되돌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느새 내가 섬사람이 되다니. 일단 내가 착수한 일에는 뿌리를 뽑아야지. 양어장을 나의 평생의 작업장으로 알고 일해야지.'
  그는 삶이 있는 곳마다 자신을 깨우쳐 주는 스승이 있다고 여겼다. 그들이 바위 동굴을 찾아 들어선 것도 그런 맥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동굴을 벗어나기만 하면 정말 확실한 삶을 살겠다며 그는 재차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