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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9회   
            달그림자
                                                                                                                          손 정 모

                                                   9. 동천 세계(洞天世界)

  감은 눈을 통해 비쳐지는 햇살은 보리밭을 스쳐 가는 바람결처럼 감미로웠다. 5m에 달하는 평균 너비와 사람 허리만큼의 깊이를 갖는 도랑의 물줄기는 거침이 없었다. 허리와 넓적다리와 종아리에 휘감기는 물결은 완연히 경이로운 자연의 선율이었다. 그런데다가 여인의 섬세한 손길까지 나의 발목을 휘감아 오니, 정신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나는 나의 동작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멈추고 싶지가 않았다. 이미 깨끗하게 씻긴 사기그릇을 여전히 양손에 든 채 말이다. 눈을 감은 자세로 서서, 두 팔을 빙빙 돌리면서 사기그릇으로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 때였다. 한동안 나의 발목을 어루더듬던 손길은 서서히 종아리를 더듬어 올라오고 있었다. 여인의 동작은 나의 팔 회전 동작에는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다. 나는 동작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여인의 손길에는 바싹 신경을 쓰고 있었다. 여인의 손길은 종아리를 지나자마자 곧바로 무릎을 넘어서고 있었다. 더 이상은  방관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여겨졌다. 나는 이 때까지도 손길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남을 의심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말이다. 나의 안전을 위해, 나 자신의 보호는 조금도 게을리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라도 여인이 부드럽게 접근하다가도 정신병자처럼 느닷없이 흉기로 나를 찌른다면 어쩔 것인가 ? 비명도 못 지르고 죽어 나뒹굴 수도 있는 문제였다. 나는 마침내 마음속으로 결단을 내렸다.
  "이야앗 !"
  기합 소리를 내지르며 수면에서 솟구쳐 올라, 연속으로 공중제비를 돌아 뛰어내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의외로 나의 눈에 비친 여인은 예청혜(芮靑蕙)였다. 그녀 말고는 아무도 나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일순 청혜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경직된 듯했으나, 이내 표정을 바로잡으면서 나를 향해 말했다.
  "종철씨 ! 내겐 종철씨가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침 식사 준비를 한답시고 그릇을 들고 나왔으면

, 빨리 씻어서 와야 되지 않겠어요 ? 언제까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물 속에 서서 팔을 휘젓고 있을 생각이었어요 ? 그리고, 내가 댁의 발목을 잡는 순간에 댁도 마땅히 뒤돌아봤어야 하잖아요 ? 그런데도 나의 손길이 무릎을 지날 때에서야, 반응을 보이지 않았어요 ? 그것도 기합 소리와 함께 공중 회전을 하셨잖아요 ? 대관절 종철씨의 참다운 정체는 뭐예요 ?"
  나는 청혜의 마지막 부분의 말이 영 귀에 거슬렸다.
  "나의 진정한 정체가 뭐냐고 물었어요, 지금 ? 나의 언행이 청혜씨의 상식적인 기준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수상하다는 용어를 마음대로 써도 되나요 ? 누가 더 이상한지 한 번 따져 볼래요 ? 도랑까지 왔으면 나를 부르거나 말을 할 일이지 남의 발목은 왜 잡아요 ? 내가 댁의 애인이라도 되나요 ? 엉큼하게 남의 종아리를 더듬다가 무릎 위로 손길을 뻗친 댁의 행동은 이성적이었던가요 ? "
  청혜는 돌연 눈빛이 날카로워지면서 금속성의 소리로 따지고 들었다.
  "잠깐만요. 방금 절더러 엉큼하다고 했나요 ? 남의 종아리를 더듬으면 모두 엉큼한 사람들인가요 ? 사람이 보기는 안 그런데, 왜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인지 모르겠네. 도대체 당신이 나를 얼마나 안다고 나를 엉큼하다고 몰아 붙이는 거죠 ? 생각할수록 한국에 온 것이 치가 떨리도록 후회스러워 죽겠어, 정말 ! "
  나는 돌연 '심성 수련'이란 네 글자에 생각이 미쳤다. 청혜의 견해도 틀린 데가 있었지만, 나의 말도 절제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고 여겨졌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일단 씻겨진 도자기 그릇들을 챙겨 들고는 도랑 가로 나왔다. 내가 도랑 가에 앉자마자 청혜도 나의 왼쪽 풀밭에 살며시 주저앉았다. 나는 청혜를 향해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듣기 거북한 말을 하여 죄송하다고 말했다. 한동안 파르르 떨던 청혜도 나의 간곡한 사과의 말을 듣고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청혜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지자, 정신적인 충격이 컸다고 말했다. 절망의 상황에서도 항시 밝은 표정을 짓던 나를 보고 느낀 바가 많았다고 했다. 내가 도랑으로 나온 뒤에, 진경과 운주현(雲周賢)은 석실의 청소를 시작하더라고 했다. 청혜 혼자 나를 돕기 위해 도랑으로 나섰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물보라를 일으키던 나의 기묘한 동작을 지켜보고는 장난기가 발동했다는 거였다. 소리를 죽여 가며 접근하여, 마침내 발목을 잡기에 이르렀다는 거였다. 왜 발목을 잡았느냐고 묻자, 그녀는 금세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만약 연인 관계였다면 뒤에서 포옹을 했을 텐데, 연인이 아니라서 발목을 잡았다는 거였다. 그녀는 계속해서 발목을 잡은 또 다른 이유에 대하여 설명했다. 물 속에 있을 때, 사람에게 가장 큰 공포를 일으키는 부위가 발목이라는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발목을 잡았건만, 전혀 반응이 없어서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는 거였다. 그리하여, 내친 김에 슬그머니 장난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만약 내가 계속해서 가만히 있었더라면, 성기까지도 만졌을지 모를 일이라고 했다. 나는 들을수록 청혜가 맹랑하다고 생각되었지만, 청순한 표정에 점차 매혹되어 가는 자신을 느꼈다. 이윽고, 청혜와 나는 화해하여 악수를 하고는, 씻은 칡뿌리와 그릇을 들고 석동(石洞)으로 향했다.
  그 사이에 석실은 놀랄 만큼 환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칡뿌리를 네 개의 그릇에 나누어 담고는 돌 탁자 위에 배열했다. 칼이 없기에, 예리한 돌 조각으로 찧어서 끊었기에, 칡뿌리의 모양새는 엉망이었지만 말이다. 아무도 칡뿌리의 모양새에 대한 말을 꺼낼 상황이 아니었다. 일제히 숙연한 자세로 칡뿌리 한 덩어리씩을 쥐고는 입에 가져가 씹기 시작했다. 아주 찰기가 많은 가루 칡 종류였다. 나는 시골 출신이라, 익숙한 자세로 칡을 씹어 즙을 삼키고는 덩어리를 뱉어 냈다. 진경과 중국 여인들도 금세 나의 행동을 흉내 내었다. 다들 배가 고팠던 탓인지 일체 칡뿌리에 대한 투정이 없었다. 넷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칡을 씹자니까, 어느새 오전 11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정오가 될 때까지 자유 시간을 가지다가, 정오에 다시 석실에 모이기로 했다.

  날짜를 헤아려 보니, 어느새 12월 초하루에 접어들고 있었다. 분지에 처박힌 지 이틀째를 맞는 날이었다. 여인들은 한 시간 가량을 열심히 탈출구를 찾으려고 분지의 지형을 탐색해 본 모양이었다. 내겐 진작부터 그러한 노력 모두가 부질없는 짓으로 비쳐졌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는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찾아내겠다는 뜻인데 말이다. 아무래도 부질없는 일이라고 여겨졌었다. 내가 이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이미 다섯 차례나 꼼꼼하게 지형을 조사한 뒤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미 '죽은목숨'들이라고 여겨졌다. 저공 비행을 하는 헬기에 의해 구조되지 않고서는 달리 구조될 길이 없어 보였다. 또한 헬기란 아무 장소에나 쉽게 뜨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사실상 죽은목숨일 수밖에는 더 있겠는가 ?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은 정말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여인들은 아무도 나만큼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설마 구조될 방법이 없으랴 하는 마음을 지닌 모양이었다.
  마침내 정오였다. 여인들은 다들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돌 탁자 주위로 둘러앉았다. 아, 여인들의 눈물이라 ! 내겐 여인들의 눈물을 볼 때만큼 괴로운 일은 없었다. 지금의 상황으론 내가 여인들을 위해 해 줄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막상 식탁 앞에서 여인들의 눈물을 대하자 가슴이 메어지는 느낌이었다. 생각할수록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착잡한 심사로 얼룩져, 되도록 말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으려고 했다. 나는 자연과학의 체질이 몸에 배었기에, 불가능한 일에 대하여는 아예 초연해지려고 했다. 그리하여, 마음속으로만 깊은 그늘을 드리운 채, 일체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 이미 죽은목숨들이다 ! 이미 죽은목숨들이란 말이다 !
  운주현(雲周賢)과 예청혜(芮靑蕙)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제 달리 이 곳을 빠져나갈 길은 없겠죠 ? 우리, 이대로 이 곳에서 죽을 수밖에는 없는 건가요 ? "

  형진경이 시무룩한 어조로 대꾸했다.
  "참으로 박복한 일도 다 있지. 내 전생에 무슨 업보를 타고났기에, 이혼녀에다가 그것도 모자라 이러한 사지에 빠졌을까 ?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 죽는 날까지 의 좋게 지내자꾸나."
  어느새 진경은 나이를 따져 집단 내의 서열 매김을 한 거였다. 진경과 내가 서른 한 살이었고, 주현과 청혜가 스물 다섯이었다. 동갑인 경우에는 생일 순서대로 하여, 진경, 나, 주현, 청혜의 서열이 매겨졌다. 진경은 좌중(座中)을 둘러보며 제안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동갑끼리는 반말을 하고, 연장자는 연소자에게
반말을 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연소자는 연장자에게 깍듯한 경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것이 소위 한국 사회의 전통 관습임을 강조했다. 나는 다소 의외의 발상이라고 여겨졌지만, 어차피 죽은목숨들인데 어떠랴 싶어 쉽게 동의해 버렸다. 주현과 청혜도 나와 마찬가지의 생각이었던지 쉽게 동의했다. 하나의 의견 제안이 의결되기까지의 시간은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결의된 의견은 강력한 구속력을 나타내는 법이었다. 제안이 결의되자마자, 주현과 청혜는 진경을 '언니'라고 부르고, 나를 '오빠'라고 불러야만 했다. 완전히 세상과는 단절된 은하동천(銀河洞天)의 세계가 형성된 거였다. 그리하여, 회의의 의장은 언제나 진경이었다. 진경은 주현과 청혜에게도 뭔가를 제안하고 나서, 나를 향해 말했다.
  "종철아, 우리가 이제는 완전히 여기를 벗어날 수 없게 된 거지 ? 혹시라도 모르니까, 앞으로 보름 동안을 탐색 영역을 할당하여 샅샅이 살펴보기로 하자꾸나. 자, 다들 주목 ! 보름 동안을 탐색한 다음, 이 달 15일에 여기서 다시 대책 회의를 갖자구."
  일행은 의장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형을 크게 사 등분하여, 넷이 보름 동안 샅샅이 재탐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어느새 보름이 순식간에 흘렀다. 12월 15일의 정오였다. 여인들의 표정은 보름 전과 비교하여 더욱 더 절망에 휩싸여 있었다. 사실상 나는 내가 맡은 영역은 말할 것도 없고, 전영역을 세심하게 탐색해 보았었다. 하지만, 결론은 이미 정해진 거였다. 절대로 은하동천을 벗어날 길은 없다고 말이다.
  여인들은 울상을 지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탐색 결과를 털어놓았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을 여인들을 통해 듣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었다. 다들 여기를 벗어날 확률은 절대적으로 영(零)에 가깝다는 대답이었다. 그리하여, 느닷없는 의견이 의장인 진경으로부터 새롭게 제안되었다. 어차피 바깥 세계로 나갈 길이 막연하다면 말이다. 갈아입을 옷도 없는 처지에, 옷을 계속하여 입다 보면 닳을 거라고 했다. 체면 때문에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냄새 나도록 입는 것보다는 다른 대책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모두들 말은 않고 있었지만 통감하는 바였기에, 모두들 귀가 솔깃했다. 진경은 잠시 좌중을 둘러본 뒤에, 말을 이었다. 천만 분의 일의 확률일지라도 말이다. 세상에 다시 나가게 될 때를 대비하여, 벗어서 보관해 두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주현과 청혜가 일제히 반문했다.
  "언니, 그럼 여기서는 발가벗고 지내자는 얘기예요 ? "
  진경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만, 내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종철아 ! 잠시만 자리 좀 비껴 줄래 ? 잠시만 밖에 나가 있어 줘. 15분 이내에 다시 부를 테니까, 너무 멀리 가지는 마."
  나는 흔쾌히 대답을 하고는 석실을 나와 분지의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아닌게아니라, 빨아 입지도 못한 채 몇 날을 옷을 입고 있으려니까 문제가 많았다. 동굴 입구에서 파랗게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어느새 시간이 되었는지 청혜가 나를 부르러 왔다.
  "오빠, 기다린다고 지루했었죠

 ? 이제 들어가도 돼요. 자, 함께 가자구요."
  나는 마치 청혜에게 이끌리듯 석실로 되돌아가 돌 탁자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진경은 목청을 가다듬으며,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종철아 ! 해양과학 연구원인 네게 다시 한 번 묻겠는데 말이다. 우리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 다들 실망할 만큼 했으니까, 더 이상 낙담하지는 않을 테니까 사실대로 말해 줘."
  나는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잘 알다시피, 우리는 이제 끝장이 난 거라구. 여기서 세상 밖으로 빠져나갈 확률은 완전히 영에 가까워. 이 은하동천 안에서 살 만큼 살다가 죽는 거지 뭐, 별 수 있겠어 ? "
  진경은 다시 한 번 내게 되물었다.
  "종철아, 다시 한 번 묻겠는데, 너의 말이 사실이지 ? 여기서 가장 과학적인 사고와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는 없단 말이야."
  나는 신중한 어조로 다시 한 번 탈출의 길이 완전히 막혔다고 대답해 주었다. 여인들의 탄식이 다시 한 번 터져 나오고 있었다. 잠시 실내를 둘러보던 진경은 나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종철아, 우리 적당한 시기를 택해 옷을 벗고 지내기로 하자구. 여자들 셋이서도 조금 전에 의견 일치를 보았거든. 어차피 바깥 세상으로는 두 번 다시 나가지 못할 신세들 아니냐구 ? 바깥 세상에는 바깥 세상의 규범이 있겠지만 말이다. 여기서는 여기의 규범을 세워야만 할 것 같애."
  이렇게 말문을 열기 시작한 진경의 얘기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천만 분의 일의 확률일지라도, 외부로부터 구조될 때를 대비하여 옷을 보존해 두자는 거였다. 아무리 질긴 옷이라 할지라도 계속 입다 보면 닳게 마련이었다. 언제 구조될지 전혀 기약이 없는 여건이었지만 말이다. 미래를 위해, 한 벌밖에 없는 각

자의 옷을 소중하게 보관해 두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리하여, 내년 4월까지만 옷을 입고, 5월이 되면서부터는 일제히 옷을 벗고 지내자는 거였다. 그 때를 기해, 벗은 옷들은 각자 깨끗이 씻어서 보관해 두기로 했다. 은하동천의 세계에 맞춰, 세속과는 완전한 별천지의 삶을 살자는 거였다.
  그러면서, 진경은 신혼 초에 남편과 함께 다녀온 누드촌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태평양 연안의, 햇살이 눈부신 캐나다 밴쿠버 주변의 렉비치(Wreck Beach)에 대한 이야기였다. 시원하게 드리워진 수평선 위로, 햇살은 연중 타는 듯 뜨거운 곳. 해변에 드리워진 광활한 모래사장과 높다랗게 치솟은 야자수가 북미의 정취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곳. 태평양 상공을 스쳐 온 열대의 눅눅한 바람이 잠시 쉬어 가는 곳이기도 했다. 때는 7월이었고,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여행객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을 무렵이었다. 형진경은 남편과 함께, 렉비치에 들어서면서부터 옷을 벗어 젖히고는 눈부신 모래사장을 거닐기 시작했다. 치안을 담당하는 남녀 경찰도 목에 호루라기만을 걸친 채 백사장을 활보했었다. 그뿐이랴 ? 단체로 와서 배구와 축구를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지나다니는 상인이며, 안내원과 환전 업자들까지도 하나같이 건강한 혈색의 알몸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백사장에는 하나같이 늘씬한 몸매의 서구의 남녀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동양인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서슬 퍼런 빛살마저도 수줍음에 몸을 떨며 비껴 나가던 아득한 방파제. 시리도록 푸른 바다에 하얀 젖가슴을 드러낸 채, 황홀경에 떨던 그 날의 회상이었다. 해변을 거니는 남녀들의 눈에는 하나같이 태평양의 아늑하고도 넉넉한 빛살이 남실거리고 있었을 뿐. 그 어디에도 음란하다거나 추한 면모는 보이지 않는 원시적인 자연이 숨쉬는 곳이었다.
  진경은 계속하여, 세 여인들이 의논한 결과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당장 밤 시간부터 넷이서 함께 잠을 자자는 거였다. 어차피 성(性)이란 조물주로부터 부여된 것일진대, 만약 영원히 은하동천을 벗어나지 못할 운명이라면 말이다. 세속의 규범에는 얽매이지 말기로 하자는 거였다. 그리하여, 유일한 사내로서의 내가 여인들의 모든 애욕을 받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덧붙여서 설사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여인들의 의사를 존중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남자가 둘만 되었어도 나의 자유를 존중해 주겠는데 말이다. 나 혼자뿐이니까 무조건 여인들의 의사를 존중해 달라는 거였다. 확실히 나에겐 너무나도 충격적인 발언이요 제안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하고는, 탁자에서 일어나 석실 밖으로 나섰다.

  동굴 입구에 서서 고개를 드니, 하늘에 낮 달이 창백한 모습으로 떠 있었다. 파리한 달빛을 보자니까, 울컥 서러움이 치솟아 올랐다. 지난번에 양평의 부모님의 묘소를 들른 것이 부모님을 마지막으로 대한 것이었구나하는 생각이 일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해양과학 연구소에서 얌전히 연구만 하고 있을 걸하는 후회마저 일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과거의 회상에 젖어서 울먹거리고만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파리한 모습으로 떠 흐르는 낮 달의 신세가 무척이나 나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면 그리도 눈부신 빛을 뿜어내던 달이건만, 낮에는 어찌 그리도 힘이 없을까 싶었다.
  달에도 지평선이 아득할 테고, 지평선 너머로 드리워진 그늘에서는 나의 유년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을 받아야만 빛을 반사할 수 있는 달이기에 말이다. 언제나 따스한 태양이 없다면, 싸늘하게 죽음의 냉기에 젖어 있을 달이었다. 태양이 그리는 자전의 흐름과 달이 이끌리는 공전의 움직임이 항상 밤낮으로 그늘져 파드득거린다. 유년의 아련한 시골의 향취를 떠올릴 적마다 나는 부모님의 따스한 품을 떠올린다. 흐드러지게 핀 배꽃의 물결로 끝없이 출렁거리던 과수원에, 지칠 줄 모르게 밀려들던 달빛. 아늑한 밤하늘에 끝없이 밀려들던  바람결에 젖어, 시울 퍼렇게 휘감기던 달빛이 아니었던가 ? 바람결에 흩날리던 배꽃을 바라보다가 너무나 고운 꽃잎의 자태에 가슴마저 떨리던 밤이기도 했다. 달빛이 고와서 서러운 건지 꽃잎이 눈부셔서 별빛이 밝은 건지 가슴마저 뛰놀던 밤이었다. 너른 벌판이었어도 집집마다 빈곤의 굴레에 몸살을 앓던 유년기였기에, 낮 달이 서럽기만 했었다. 농가마다 빈곤에서 벗어나 보겠다고, 발길 닿는 데까지 안간힘을 써 보지만 말이다. 결과는 늘상 찌들릴 대로 찌들린 가난과 배고픔뿐이었다. 허기진 유년의 들녘에서 일탈을 꿈꾸고자 마을을 떨치고 떠나는 청년들의 행렬이 있었지만 말이다. 언제나 도시의 냉담한 그늘만이 날카로운 빛살이 되어, 이방인들의 가슴에 되돌아 올 뿐이었다.

   그렇게도 고달픈 시기였건만, 사방 어디에도 허기를 면할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정녕 사무치게 외롭고 고달픈 날들이면 사람들은 마을을 돌며, 품앗이를 하여 시름을 달랬다. 굽이치는 격랑의 시기였어도 들녘을 적시는 농가(農歌)에는 풋풋한 그리움이 실려 남실거렸다. 그 빈한하면서도 정감이 실렸던 시골의 들녘을 한없이 창백하게 밝히던 낮 달이기도 했다. 유년의 꿈이 바람결에 흩날려 떨던 시골의 밤을 현란하게 비추던 달빛이기도 했다. 유년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인생의 질곡을 단적으로 비유하는 것이 달이라고 여겨졌다. 그리하여, 하늘에 걸린 낮 달을 보는 순간에 가슴 밑동부터 저려 온 거였다.
  그런데, 이제 또 하나의 번민(煩悶)이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한 거였다. 선옥과 지연에 대한 연정들을 정리하기도 전에, 또 다시 정념(情念)의 불길에 휘말려야 하는가 ?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려 왔다. 그토록 은숙이 내게 접근을 시도했었지만 말이다. 지금껏 확답을 못 해 준 것도 선옥과 지연에 대한 애환 때문이 아니었던가 ! 새로운 고통을 짊어질 수밖에는 없는 암담한 현실이었다. 아, 여인들이란 그 얼마나 복잡하고도 섬세한 감정의 동물들이란 말인가 ? 내가 여인들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또 다시 이런 질곡에 얽매여야 한단 말인가 ? 옷을 벗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말이다. 아무래도 내 마음이 정리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일이 더 필요한 터였다. 아무리 이 곳이 단절된 곳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내 마음의 애환을 추스르지 않고서는 일이 손에 잡힐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다시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며 마음속의 맹세를 굳건히 했다. 마음이 정해진 뒤에, 나는 서서히 발걸음을 옮겨 석실로 향했다.
  내가 석실에 들어서자마자 여인들은 나를 바라보며 표정들이 다 달랐다. 진경의 눈빛은 너무나 그윽하여 깊이를 알 수 없었지만, 뭔가를 잔뜩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주현의 눈빛은 맑고 서늘하여 촉촉한 정서가 깃들어 있었다. 반면에 청혜의 눈빛에는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휘어잡는 짙은 매력이 실려 있었다. 나는 마침내 여인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일단 내년 4월말까지는 시간을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이성으로서 함께 잠을 자는 문제는 아무리 세계가 달라져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밝혔다. 그리하여, 내년 4월말까지의, 생각해 볼 시간적인 여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진경은 다소 의아스러운 눈빛을 보였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떡거리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선선히 대답했다.

  세월은 거침없이 흘러, 은하동천에 머문 지도 어언 1개월이 다 된 12월말이었다. 그 간 구룡동굴에서 물결에 휩쓸리면서 유실되었던 촬영 카메라의 몸체가 우연히 도랑에서 발견되었다.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주현이었고, 발견 시점은 동짓날 정오 무렵이었다. 카메라는 작동 불능의 상태로, 망가질 만큼은 망가진 상태였다. 다행스럽게도 100 mm의 직경을 갖는 렌즈는 파손되지 않고 온전한 모습 그대로였다. 렌즈를 줍던 날, 일행은 동천이 떠나갈 정도의 환호성을 터뜨렸다. 볼록렌즈를 이용한 점화를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장 그 날부터 나무를 태워 숯을 만들고, 숯을 비축하기 시작했다. 비축된 숯으로는 석실에 불을 지피고,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불을 이용하게 되면서, 잡은 물고기로 국도 끓이게 되어 한결 식사의 해결이 수월했다. 그뿐이랴 ? 낮에 입던 옷을 밤에는 씻어서, 숯불의 열기로 말릴 수도 있어서 좋았다. 불을 사용하면서부터는 일행들의 유대감마저도 한층 더 높아졌다. 식량을 채취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일행은 시간이 날 때마다 불을 지폈다. 또한 모닥불 주위로 둘러앉아 추억담을 늘어놓는 사이에 점점 인간적인 친밀감이 생기게 되었다. 불의 따스한 기운 역시 인간적인 유대감을 만드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했으리라 여겨졌다.
  12월말인 저녁 7시 무렵도 예외는 아니었다. 죽어 넘어진 관목들을 주워 와서, 모닥불을 피우며 일행은 모두 둘러앉았다. 마침 조금 전에 식사도 마친 뒤여서, 그럴 수 없이 풍요로운 심정들이었다. 그 동안 줄곧 돌아가면서 자신들의 과거사를 풀어놓으면서 회포를 풀곤 했었다. 다른 날과는 달리, 산중에서 맞는 송년의 밤이었다. 모닥불의 불꽃이 힘차게 치솟으면서부터 일행의 가슴은 말할 수 없이 설레기 시작했다.
  먼저 의장인 진경의 제안으로, 돌아가면서 차례차례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청혜가 먼저 노래를 불렀다. 쒀촤이치엔의 '해남의 연정'이란 중국의 대중 가요를 구성지게 불렀다. 이어서, 주현은 일어나 국내 가요인 '달팽이'를 불렀다. 신세대다운 목소리와 감정의 처리가 완전히 청중을 매료시켰다. 다음이 바로 나의 차례였다. 구슬픈 심사를 억제할 길이 없어서, 최희준의 '하숙생'을 불렀다. 사춘기 무렵에 산  언덕에 올라 부지런히 목청을 틔운 탓이었으리라. 나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의 목소리가 빼어난 미성(美聲)이라고 감탄을 연발했다. 나의 노래 소리를 듣자마자 여인들은 모두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세속에서 뚝 떨어진 신세의 참담함이 하숙생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나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진경은 손가락을 말아 나의 머리에 굴밤을 먹이며 말했다.
  "에헤, 오늘 같은 날 좀 화끈한 노래를 불러 줄 수 없니 ? 가뜩이나 움츠린 신세인데, 좀 신명이 나도록 해 줘야지 그게 뭐야 ? 하지만, 노래 솜씨 하나는 끝내 주는데 ? 나 정말 뿅 가는 줄 알았다니까 ! "
  이윽고 진경은 자세를 가다듬으면서 키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를 열창하기 시작했다. 남국의 별들이 지천으로 깨어나 빛을 뿜어 대는 해변으로 가자는 노래였다. 거기 파도 치는 해변에서 풋풋한 첫사랑의 고백도 하고 말이다. 하얀 포말과 함께 몸을 날리며, 신명나게 뛰어 놀아 보자는 젊은 연인들의 노래였다. 이 것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하여, 영원한 젊은 날의 추억을 제공하는 활기찬 노래였다. 아닌게아니라, 나의 노래로 숙연했던 분위기가 금세 활기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모두들 일어나서 엉덩이와 몸통을 뒤흔들며, 신나게 춤을 추었다. 손뼉 치는 소리가 에워싼 절벽에 부딪혀 거대한 산울림이 되어 되돌아오곤 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춤을 추며 노래하느라고, 어느새 신년의 새벽이 밝아 오는 줄도 몰랐다. 일행 모두가 극도의 절망감에서 시달리던 정신적인 압박감을 모처럼 유감없이 풀어 젖혔던 밤이었다. 그 밤 내내 모닥불은 기세 좋게 타올랐으며, 하늘은 쾌청하기만 했다. 글자 그대로 은하동천(銀河洞天)의 하늘에는 별들이 잔치를 벌이듯 우르르 몰려, 현란하게 빛을 뿜어대었다.
  어느 정도의 열기가 가라앉은 신년 원단의 오전 6시 무렵이었다. 진경은 일행을 둘러보며 그녀의 과거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개인의 과거가 아름다웠든 추했든 그것은 세속의 판단일 뿐이지 은하동천의 판단 기준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모두들 각자의 과거사에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 들어주곤 했다. 아무도 흘러간 과거사를 붙잡고 토를 달거나 시비를 할 자격은 없는 터였다. 어쨌거나 과거는 개인 각자의 소중한 추억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거가 있음으로 해서, 오늘날의 개인이 형성된 게 아닌가 말이다.
  진경은 정말 뜻밖에도 그녀의 이혼 동기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내색은 않았지만, 나 역시 그녀의 이혼 사유가 뭐였는지 꽤나 궁금했었다. 일행은 계속하여 모닥불을 지피면서, 진경의 이야기에 눈빛을 빛내며 귀를 기울였다.

  이 때, 문득 나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우주는 무한하여 깊이조차 알 수 없을지언정, 뭔가 거대한 흐름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태양계가 은하의 중심을 기준으로 공전하듯이, 태양계 내의 혹성들도 공전을 하고 있는 터였다. 은하동천 밖의 세상을 태양계에 비유한다면 말이다. 이 곳 은하동천은 분명 작은 혹성일 수밖에는 없는 터였다. 바깥 세상이 태양이라면, 은하동천은 태양의 언저리를 맴도는 낮 달일 수도 있는 터였다. 은하동천에서의 일행의 삶은 어쩌면 햇살에 의해 구획되는 달 그림자일 수도 있는 터였다. 달 그림자의 반대쪽은 강한 햇살이 소용돌이치는, 빛살의 파동으로 들끓는 광막한 빛의 공간이리라. 강한 빛살 속엔 과거의 영욕으로 다져진 새로운 세상이 꿈틀거리고 있으리라. 지평선을 파르스름해지도록 태우고 태워서 창백해진 낮 달에 슬쩍 드리워진 달 그림자 ! 달 그림자의 그늘에 실려 현대인들은 애환을 삼키며 각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리라. 그 얼마나 방대한 세상이던가 ? 얼굴 생김새를 비롯하여 직업과 고뇌마저도 제 각각인 현대인들이 아닌가 ? 현대인들의 슬픔과 고뇌가 어떤 조류로 흘러가는지, 새벽이 찾아올 때마다 못내 궁금하기만 했다. 나의 과거가 빚어내는 달 그림자와 타인의 과거가 연출하는 달 그림자는 어떻게 다를까 ? 기나긴 세월 동안을 나는 이러한 물음에 시달려 왔다. 나의 이러한 물음에 입각하여, 나의 미래는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내게로 다가오곤 했었다. 나의 과거가 의미가 있었던 것은 빈한하지만 넉넉한 온정이 실린 유년기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내가 시인이든 아니든 누구든 시(詩)는 쓸 수 있다고 믿어 온 터였기에 말이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 마음의 정서를 한 편의 시로 읊조려 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시인으로서 문예지에 발표한 적이 있는, 제목이 '달 그림자'인 시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달 그림자>

  그 지평선에 드리워진
  선명한 음영.
  그 그늘을 풀어헤친들
  누가 반기랴 ?
  
  그쯤이면 궤도를 벗어나리라.
  귀환을 거부하자 지평선 위로
  날카로운 섬광의 유성이 난다.

  파동으로 전해지는 의미를 몰라
  그리도 애절커든
  슬쩍 햇살의 사타구니를 벌려
  눈요기도 좀 하렴.

  끝없는
  호기심의 회오리 속에
  창백하게 드러누운 유년의 바다.
  
  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동안 상념에 잠겨 있자니까, 주현이 나를 보며 말했다.
  "아이참, 나는 개인적으로 노는 사람은 싫더라구요. 이렇게 황홀한 신년의 새벽에 무슨 생각을 그렇게도 골똘히 하시나요 ? "
  나는 얼떨결에 미소로 얼버무리며, 진경의 과거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참으로, 은하동천의 하늘은 파르스름하게 윤기가 나는 쾌청한 하늘 그 자체였다. 서서히 햇살이 퍼져 오르면서부터였다. 기나긴 밤을 추위와 싸우던 산새들의 노랫소리가 고운 선율이 되어 빛살처럼 나부끼기 시작했다. 풀잎에 나부끼는 빛살처럼 맑은 목소리로 진경은 그녀의 과거사를 풀어 젖혀 나가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결혼 3주년째의 여름철이었다고 했다. 전직 검사였다가 변호사로 개업한, 진경의 남편이 어느 날 뭔가를 그녀에게 불쑥 내밀었다. 남편은 소장파 검사로 재직할 때에, 커다란 수뇌 사건에 휘말려서 검찰청을 떠나야만 했었다. 어지간하면 내부 징계로 끝날 줄 알았던 것이 끝내 사직하기에 이른 거였다.
  남편이 내민 것을 받아보니, 그것은 특별 회원증이었다. 빳빳한 플라스틱에 해골 모양의 그림이 천연색으로 인쇄된 '천마 특별 회원증(天馬特別會員證)'이었다. 영문을 몰라 바라보는 그녀에게 남편은 말했다.
  "진경아 ! 내가 이 회원증을 여러 번 써 봤거든.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이 한 장의 회원권으로 얻을 수가 있다구. 여러 말 할 것 없이 나랑 당장 같이 떠나자구. 이 회원증은 가족들간에는 전혀 쓸 수 없는 것이거든. 너도 잘 알다시피 나는 대단히 색을 밝히는 변태 성욕자가 아니냐구 ? 오랜 동안을 생각해 봤는데, 나 혼자서만 쾌락을 누리기가 뭣해서, 너를 데려가기로 했어. 너를 데려가기에 앞서, 네게 당부해 둘 말이 있어. 절대로 이 회원권이 사용된 곳의 정경을 누구에게나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야, 알았어 ? 만약 발설을 하게 되면, 어떠한 불이익도 감수를 해야 된다구, 알아 ? 심지어 이혼까지도 말이야."
  그 길로 진경은 전주를 떠나 남편과 함께 곧장 평창읍에 도착했다. 평창읍 시외 버스 주차장에 있으려니까, 군청색의 봉고 버스가 다가와 그들을 실었다. 봉고 버스에 올라탄 뒤부터 남편은 그녀에게 일언반구의 이야기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었다. 차가 하안미리에 도착하자마자, 대기중이던 대형 버스로 갈아타야만 했다. 버스 내에는 빈 자리 하나 없이 사람들로 꽉꽉 채워졌다. 미니스커트를 걸친 스무 살 가량의 안내원이 차가 대화리를 지나자마자 차내 방송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 저희 천마도원(天馬桃源)을 찾아 주신 회원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본 천마회(天馬會)는 고위직 권력층의 비호를 받는 단체로서, 입회 절차가 무척 까다롭기로 유명하죠. 하지만, 일단 회원이 되기만 하면, 지상 최대의 쾌락이 즉시에 제공되는 게 특징이죠. 자, 그럼 이제부터 보안 지대를 통과할 예정이오니, 모두들 눈가리개를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지시 사항을 준수하지 않으면 강제로 하차될 수도 있사오니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차내에는 건장한 덩치의 청년 안내원 넷이 우락부락한 모습으로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차내에는 순식간에 긴장이 감돌며, 앞다투어 눈가리개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눈가리개를 착용하고 달린 지 30여 분쯤 되었을 때였다. 다시 맑은 음성의 여자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회원 여러분, 이제 눈가리개를 푸시고, 다음 차로 갈아타 주시기 바랍니다. 모쪼록 천마도원의 즐거움을 만끽하시기를 빌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인가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호젓한 산중턱의 광장이었다. 갈아타기 위해 늘어선 버스의 대수는 정확히 일곱 대였다. 여기까지 실어다 준 차는 먼지를 풀풀 날리며 이미 산 아래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흘낏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니, 남녀가 200명 가량이 버스를 갈아타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을 제일 먼저 얼어붙게 만든 것은 안내원들의 알몸뚱이였다. 각 차량마다 남녀 안내원들이 각각 두 명씩 배치되어 있었는데, 모두가 훤한 알몸이었다. 오로지 호루라기와 신발만을 착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진경은 안내원들의 알몸을 보면서부터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게다가 버스를 갈아타면서부터는 남편과 다른 차에 타게 되어 더욱 가슴이 떨렸다. 대형버스의 내부의 구조도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지하철처럼 창 쪽으로 길다랗게 의자를 배치한 게 달랐다. 안내원의 지시로 15명의 남자는 통로의 오른쪽에, 진경을  포함한 15명의 여자는 왼쪽에 앉았다. 차는 시멘트로 말끔히 포장된 산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 곳의 위치라든가 지명이 무엇인지를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산길의 경사는 수평에 가까웠고, 길은 널따랗게 뚫렸기에, 시종 수려한 풍광을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도로를 따라 시냇물이 시원스레 흘러내리고 있어서 자연의 풍치가 극치에 이르렀다. 차가 10여 분을 달렸을 때였다. 갑자기 커다란 골짜기가 나타나면서 유량이 풍부한 시냇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버스는 시냇물 위로 놓여진 50여 m 가량의 시멘트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다리의 입구에는 총기로 무장한 삼십 대 가량의 청년들 다섯이 다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리를 지나면서부터는 계곡의 경사가 급해지면서 양쪽으로는 가파른 산등성이가 펼쳐지고 있었다. 무장 청년들이 다리를 지키고 있는 한, 외부에서 천마도원으로 들어오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참으로 천연적인 요새를 이룬 곳에 무장 청년들을 배치해 둔 것이었다. 이러한 지형적인 구조라면, 천마도원 내에서 살인이 일어난들 아무도 모를 일이라고 여겨졌다.

   진경은 그제야 왜 특별 회원증이 필요했던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협곡에 놓인 다리를 건너서자마자, 여자 안내원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안내 방송을 시작했다.
  "잠시 회원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차는 20분 후에는 목적지인 천마도원(天馬桃源)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된 세계이므로, 지시 사항에 무조건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부터는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말입니다. 지시에 불응하면 회원 자격의 박탈은 물론이요, 생명까지도 위태로울 수가 있사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여자 안내원들이 오른손을 위로 들자마자, 두 남자 안내원들이 커다란 자루를 풀기 시작했다. 자루 속에는 소형의 비닐 가방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비닐 가방에는 흑색 유성 매직과 함께 이름표를 부착하는 곳이 있을 뿐. 자물쇠나 기타의 장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에 남녀의 안내원들이 차내의 회원들에게 비닐 가방을 한 개씩 나누어주었다. 진경도 하나의 예쁜 비닐 가방을 건네 받았다. 진경은 갑자기 비닐 가방은 왜 던져 주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을 알 수가 없었기에, 차내의 정경만 살필 뿐이었다. 차내의 사람들의 연령 분포는 30 ∼ 40 대가  70%에 이르렀다. 그 외에 20대가 10%, 50대가  20%에 달하고 있었다. 또한 남녀의 구성은 애초부터 절반씩이었었다. 이러한 분포라면, 다른 차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진경은 남편과 떨어지게 된 것이 커다란 불안 요인이었지만 참고 견디기로 했다. 어차피 쾌락을 추구하는 곳이란 말은 들은 터였기에, 약간의 야릇한 기대감은 없지 않았다.
  끝내 비닐 가방의 용도를 예측하지 못한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여자 안내원이 다시 방송을 시작했다.
  "회원 여러분 ! 지속적인 협조에 거듭 감사 드립니다. 모두들 비닐 가방 하나씩은 다 받으셨죠 ? 그래,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정확히 5분 후에 '진주조개'라는 음악이 흐를 예정입니다. 음악은 정확히 3분 동안 흐르게 됩니다. 음악이 끝나기 전에 입고 있던 옷을 죄다 벗어서 가방 속에 넣는 겁니다. 비록 부피는 작아 보이지만, 입었던 모든 옷들이 들어갈 수 있는 가방입니다. 음악이 끝나기 전에 동작을 완료하지 못하는 분은 미안하지만 강제 하차를 당하게 됩니다. 강제 하차로 인하여 발생하는 일체의 불이익에 관해서는 본 천마도원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옷을 다 벗은 분은 가방에 부착된 이름표에 회원번호를 적어 주세요. 이름이 아니고, 회원번호를 적도록 하셔야 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금품이나 귀중품까지도 안심하시고 비닐 가방에 넣어 주세요. 저희 안내원들이 책임지고 지켜 드릴 테니까, 안심하고 맡겨 주시기 바랍니다."
  여자 안내원의 설명이 끝나자, 실내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잠시 후에 옷을 벗는다는 말을 듣자마자, 진경은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아, 어쩜 이런 일이 ? 자꾸만 숨길이 가빠지면서, 어느새 성기가 흥분되기 시작했다. 진경은 혹시 자신만 그런가 싶어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느껴진 분위기는 그게 아니었다. 여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으며, 눈빛마저 충혈되고 있었다. 남자들은 남자들대로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어디에 둘지를 몰라 쩔쩔 매고 있었다.

  진경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지난날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나는 흘낏 눈을 돌려, 주현과 청혜를 바라보았다. 주현과 청혜의 얼굴은 어느새 달아올라, 핏빛 노을처럼 곱게 물들어 있었다. 살짝 볼을 건드리기만 해도, 핏빛 저녁 노을이 꽃잎처럼 뚝뚝 떨어져 내릴 듯했다. 나는 진경의 말을 들으면서부터, 줄곧 그녀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대관절 그녀가 저러한 이야기를 하는 저의가 무엇일까하고 마음속으로 곰씹어 보았다. 사람의 말에는 나중에 연결될 어떤 것에 대한 암시의 요소도 적지 않은 법이었다. 은하동천에서 생활한 이후로, 한 달의 시간이 흐른 시점이 아닌가 ? 한 달 동안의, 진경의 나에 대한 태도는 어떠했었던가를 문득 더듬어보고 싶었다.
  진경의 성격은 누가 보더라도 쾌활하고 시원스러웠다. 활달하면서도 가볍지 않고, 은근히 당당함이 배어 있는 성품이었다. 그녀는 누구를 대하더라도 항시 밝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으며, 서글서글한 눈빛을 띠었다. 한 마디로 첫눈에 사람의 마음을 확 끌어당기는 강력한 흡인력을 지닌 성품이었다. 나는 왠지 그녀의 눈빛을 대하기만 하면, 그녀에게로 무너져 내릴까 봐 두려워지는 심정이었다. 여기에는 내가 갖지 못했던 숱한 장점들을 그녀가 지니고 있다는 측면도 작용했을 터였다. 지금의 나의 정신은 병들어 있지는 않나 싶을 때가 더러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나의 정서가 너무나도 삭막한 것이 단적인 예가 아닐까 싶었다. 단언컨대, 선옥과 지연을 상실하기 전만 해도 내 마음이 이토록 황량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 솔바람에 휘감겨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가슴에 전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밀밭을 스쳐 가는 바람결에서도 봄의 선율을 느끼지 못하는 멍청이가 되고 만 터였다.
  지금의 내 가슴속에 남은 것이라고는 끝없이 공허한 진한 상실감뿐이었다. 이것은 달리 어떤 이론이나 수식으로 해결될 성질은 아니었다. 내게 남겨진 진한 상실감 때문에 때때로 터져 나오는 것은 격렬함이었다. 누가 내게 사소한 언행으로 접근했을지라도 내가 느끼는 강도는 작지 않은 거였다. 나는 황량한 벌판에 벌거벗고 선 허수아비와 같은 신세다. 그래, 나는 속이 텅텅 빈 허수아비일 뿐이다. 이러한 나에게 여인들이 애욕을 가지겠다고 ?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여겨졌다. 진경은 과연 뭐가 좋아서, 내게 틈만 나면 접근해 보려고 안달일까 ? 지나고 보면, 풀 수 없는 문제 거리도 많았지만 말이다. 애초부터 문제 거리도 되지 않은 것들이 허다했던 터였다. 내가 상심에 잠겼을 때, 듣고 싶은 목소리는 누구의 음성일까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또 다시 가슴속으로부터 끝을 알 수 없는 공허감이 밀려들었다. 부질없는 생각을 떠올린 데 대한 울분마저 들끓어 오르려고 했다.
  생각할수록 처연한 심정이었지만 말이다. 겉으로는 언제나 서글서글하며 활달해 보이는 청년으로 비쳐지고 싶은 터였다. 마음과 실체를 분리하는 이런 생활에 오래 젖다 보니 말이다. 어느새 나는 활달한 외향성의 인물로 도처에서 인정받아 온 터였다. 가슴이 타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정신의 건강이라는데 말이다. 대관절 나는 언제까지 사멸한 두 연인들에 대한 환상에서만 맴돌 것인가 ? 과거의 환상이나 그로 인한 추억은 분명 소중한 정신적인 영역의 일부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그게 현실적인 즐거움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 건가 말이다.  

  "아이, 오빠는 왜 그리도 집중력이 없으세요 ? 다른 사람은 모두 열심히 언니의 얘기를 듣고 있는데, 혼자서만 뭘 하세요 ? 설마 군중 속의 고독을 즐기려는 것은 아닐 테죠 ? "
  주현이 말을 하면서, 나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어대었다. 나는 몹쓸 장난을 하다가 들킨 어린애처럼 잠시 얼굴을 붉히다가 이내 대꾸를 했다.
  "야, 주현이 너 사람을 놀라게 할거야 ? 너희들은 남의 얘기를 그저 듣는 것으로만 끝내지만 말이다. 나는 수시로 정리를 해 나가면서 듣는다 이 말씀이야. 어때 내 말 알아듣겠어 ? "
  내 말이 끝나자마자 청혜도 뒤질세라, 내게 한 마디를 던졌다.
  "가만히 듣고만 있으려고 했는데 이건 아니다 싶어 한 말씀 드릴게요. 남의 이야기를 정리하든 어떻든 하여간 시선은 상대방의 얼굴에 가 있어야 하잖아요 ? 내가 오빠를 볼 때마다 시선은 하늘 저 멀리로 달리고 있었거든요. 이래도 제 말에 반박하실 거예요 ? "
  진경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면서 좌중을 둘러보더니, 기어코 한 마디를 던졌다.
  "흥 ! 다들 남의 이야기를 듣는 태도가 이게 뭐야 ? 번갈아 가며 이야기하기로 했으면, 좀 열심히 듣는 척이라도 해야지 이게 뭐냔 말이다. 화가 나면 그만 둘 수도 있어 ! "
  "아이참, 언니도 ! 뭘 그렇게 짜증을 내고 그러세요 ? 열심히 들을 테니까 화내지 말고 얘기해 주세요. 온몸이 흥분이 되는 바람에, 혼날 지경이었다구요."
  주현과 청혜는 신속히 응답을 한 반면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양해를 구했다. 그랬어도, 진경은 환한 웃음으로 답하며 한결 목청을 가다듬으며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