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10회
달그림자
손
정 모
10. 소용돌이
어느새 신년 원단의 아침 7시 무렵이었다. 치솟는 바람결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꽃잎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은하동천(銀河洞天)으로 곤두박질친 날이 지난 11월 30일이었으니 말이다. 여기에 머문 지도 어느새 한 달이 지난 터였다. 일 순간이나마 타는 듯한 가슴속의 갈증을 잠재우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파랗게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2400여 평의 공터를 쓱 훑어보고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사지(死地)에 갇혀 있다는 생각으로, 나는 자꾸만 목이 탔다. 울적한 내 마음과는 달리 활활 치솟는 불길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금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이대로 사지에 갇혀 여생을 마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설사 끝내 이 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탈출을 시도해 봐야 할 일이었다. 설령 탈출을 시도하다가 일이 잘못되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이대로 체념한 채,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암, 그렇고 말고. 하지만, 탈출을 위해서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강력한 아이디어의 창출이 시급한 터였다. 도대체 탈출의 실마리를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 것인가 말이다. 일단은 여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어떠한 영감이라도 건져내고 싶었다. 이러한 마음이 들자마자, 나는 형진경(邢珍境)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진경은 자아 도취에 빠져, 입에 침을 튀기며 과거사를 털어 내고 있었다. 나는 일단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맞아, 바로 그거야. 일단은 신들린 듯이, 자아 도취에 빠지는 듯한 몰두의 자세가 필요해.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점차 진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진경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그 때의 시각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7월
중순의 화창한 오전 11시 무렵이었다. 완전한 알몸 차림의 남녀 안내원은 다시 한
번 차내를 둘러보며 방송을 시작했다.
"회원 여러분께 다시 한 번 협조의 말씀을 드릴게요. 이제 잠시
후면, 시그널(signal) 음악인 '진주조개'가 흘러나올 거예요. 음악은 정확히 3분
동안만 연주될 거예요.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여러분께서는 신속히 일어나셔서, 옷을
벗으셔야 합니다. 시간 내에 완료하지 못하면 강제 하차를 당하게 되오니, 각별히
유념해 주세요."
안내원이 막 오디오의 스위치를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스물 서넛으로
짐작되는 나이의 아가씨가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저, 잠깐만요. 브래지어와 팬티까지 다 벗어야 되나요 ? "
장내는 일순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하지만, 안내원의 표정은 한결 느긋했으며,
미소마저 머금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양말과 스타킹은 물론이고, 신발까지도 다 벗으셔야
합니다. 시계를 제외하고는 몸에 걸친 일체의 패물마저도 다 벗어 놓으세요.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일체의 도난 사고가 없도록 우리 안내원들이 책임질 테니까요."
차내에는 일순 숨막힐 듯한 정적(靜寂)이 드리워졌다. 천마회의 성격으로
볼 때, 가족끼리 왔을 리가 없고 보면 말이다. 절반은 회원이고, 절반은 회원의 부추김에
의해 이끌려 왔을 터였다. 당시 28세의 나이로, 결혼 3주년을 맞는 진경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되돌아가고픈 심정이었지만 말이다.
다리 입구의 무장 청년들의 얼굴을 떠올리자, 그만 힘이 빠지면서 저항 능력을 잃었다.
이제 제대로 살아서 돌아가려면 무조건 시키는 대로 따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어쩌다가 이런 곳에까지 끌려 왔는가를 생각하자, 전신에 마구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느낌이었다.
진경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문득 분지를 막아선 절벽을 둘러보았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버스 안에서 안내 방송을 듣던 진경의 상황이 오늘만큼이나
암담했을까 ? 아무래도 그러고도 남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마음만 굽힌다면, 살아서 세상 밖으로 귀환할 수는 있었으리라.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
? 아무래도 불가능하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절벽에는 하나같이 촉촉이 젖은 물기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절벽을 떠올리자, 인수봉에서의 암벽 등반이 떠올랐다. 자일을
이용한 암벽 등반에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재능을 갖춘 나였다. 학부와 대학원 시절의
6년 세월을 부지런히 암벽 등반에 심혈을 기울였다. 얼마 안 되는 노력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얻기에는 말이다. 암벽 등반보다 더 좋은 취미 생활은 없을
터였다. 한 가닥의 자일에 생명을 맡기고 버둥거리다가, 절벽의 꼭대기에 올랐을
때의 쾌감이란 ! 이건 도저히 필설로는 묘사할 수 없는 황홀감의 극치이곤 했다.
처음 절벽을 바라본 순간에는 어떻게 등반해 볼 수도 있겠거니 싶었었다.
하지만, 높이가 100여 미터인데다가 도처에 물기로 반들거렸기에 말이다. 아무런
장비도 없이 등반을 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한 달이 지난
현시점에서도 절벽을 통한 탈출은 아예 생각조차도 못한 터였다. 절벽이 아니라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해 봐도 달리 뾰족한 방법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없는 방법을 찾으려니까, 더욱 가슴만 탈 뿐이었다.
확실히 진경의 경험담은 '묻지 마 관광'이라는 부류의 음란성 집회보다도
강도가 센 거였다. 1990년대 말부터 독버섯처럼 사회에 음란성 집회들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묻지마 관광'이란 거였다. 주로 생활 정보지의 '이벤트'란을
통해, '색다른 만남의 현장'이란 광고로 출현하기 시작한 거였다. 내 친구들 중에는
색욕이 강하여, 이런 곳이라면 달인급(達人級)에 속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강남에서 오피스텔을 얻어서 실제로 이벤트 사업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친구들이 전하는 음란성의 정도보다도 진경의 회고담은 훨씬 강도가 높은 거였다.
나는 진경의 얘기를 들으면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로부터
혼탁한 성 문화는 도처에 자리잡고 있지 않았던가 ? 아무리 이색적인 경험담일지라도
온전한 정신으로는 털어놓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경이 과거사를
털어놓는다는 것은 확실히 생각해 볼 만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진경의 품격을
믿고 싶었다. 진경이 과거사를 풀어놓을 때엔 필시 그 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아무래도 당면한 현실이 너무나 고달픈 터였다. 모닥불 주위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얘기가 동이 날 만도 했다. 진경의 얘기는 어쩌면 황량한
현실 세태에 대한 사회적 고발일 수도 있었다. 이러한 현실의 직시를 통해, 사람들이
품격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면 말이다. 그 자체로서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 게다가 여기는 세속과는 완전히 단절된 세계가 아닌가 말이다. 귀환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과거사를 풀어놓는다는 것은 어쩌면 애절한 연민일 수도 있었다. 진경은
지칠 줄 모르는 기세로 이야기를 펼쳐 놓고 있었다. 일행은 모두 눈빛을 빛내며 그녀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마침내 스물 서넛의 나이로 보이는 여자 안내원이 오디오의 스위치를
올렸다. 반짝반짝하는 전기 신호가 두어 번 오간 뒤에야, 마침내 '진주조개'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평소 때 이 음악을 듣게 된다면 말이다. 태평양의 흰 물보라를
뒤집어쓰며, 해변으로 늘씬한 미녀들이 달려가는 장면이 연상되었으리라. 야자수
우거진 백사장 개펄에서는 조개 줍는 여인들의 모습이 선히 떠올랐으리라. 황금빛으로
타는 태양과 바다의 수면에서 요동치는 빛살로 휘감긴 해변의 정취가 떠올랐으리라.
더러는 바람결처럼 감미로운 연인들의 밀어가 해변의 모래톱을 적시며 남실거리기도
했으리라.
하지만, 목전의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음악이 들리자마자 사람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시합이라도 하는 듯 옷을 벗어 젖혔다. 진경도 남에게
뒤질세라 서둘러, 남색의 블라우스부터 벗기 시작했다. 막 치마를 벗을 무렵이었다.
주위에서는 이미 팬티마저 다 벗고 양말과 스타킹을 까 내리는 중이었다. 진경은
초조해진 나머지 하마터면 오줌마저 지릴 뻔했다. 서둘러 브래지어와 팬티를 벗고는,
이내 스타킹을 까 내리기 시작했다. 옷과 신발을 서둘러 비닐 가방에 쑤셔 넣고는
이름표에 매직으로 회원번호를 적었다. 그리고 나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리에 앉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리에 앉았는데도 아직도 '진주조개'는 그윽한
음률로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얼굴이 상기되어 어쩔 줄 모르면서 손으로
성기를 가리기에 바빴다. 헌데 바로 이 때였다. 안내원들의 예리하기 그지없는 호루라기
소리가 귓전을 진동시켰다. 그러면서, 위협에 가까운 안내원들의 방송이 뒤를 이었다.
"잠시 주목 ! 누가 마음대로 행동하라고 했나요 ? 지금부터 지시대로
따르지 않으면 강제로 하차시켜 버리겠습니다. 아시겠지만, 강제 하차란 바로 죽음과
직결될 수도 있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내숭은 그만 집어치우고, 지시대로 따라
주세요. 지금부터 모두들 매직으로 쓴 목걸이 형식의 이름표를 꺼내 목에 거세요.
알았으면 일제히 큰 소리로 '천마'라고 대답하세요. 알겠어요 ? "
"천마 !!! "
"아주 좋았어요. 말 잘 듣는군요. 여기서는 나잇살 먹었다고 뻐개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솔직히 이런 곳에 대접받으러 오시지는 않으셨죠 ? 한 마디로
짐승 같은 짓을 하려고들 왔잖아요 ? 그래서, 이제부터는 여러분들을 짐승 수준으로
대접해 드리겠어요. 지금부터는 일체의 질문은 허용되지 않아요. 다만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우리들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해요. 오로지 지시에 대한 복종만이 있을
뿐이다 이 말이에요.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사람은 강제로 하차시켜 버리겠습니다.
자, 모두들 잘 들으세요 ! 지금부터 남녀 공히 앉은 자리에서 넓적다리를 45도 각도로
쫙 벌리세요."
"천마 !!! "
"네, 좋아요. 다음으로 두 손은 깍지를 켠 채, 뒷머리에 갖다 붙이세요,
알겠어요 ? "
"천마 !!! "
"네, 아주 좋아요. 대단히 말을 잘 듣는군요. 이제부터 번호 점검이
있겠습니다. 시간은 단 1분 동안이에요. 남자가 번호를 불리면, 그 분은 아무 여자나
골라 젖가슴을 주물러 주세요. 그리고, 여자가 번호를 불리면, 아무 남자나 골라
성기를 만져 주세요. 절대로 애무를 당하는 사람은 어떤 형태의 반항을 해서도 안
됩니다. 또한 깍지 켠 두 손을 뒷머리에서 떼어서도 안 됩니다. 다들 아시겠죠 ?
"
"천마 !!!"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공지를 향해
걸어나갔다. 더 이상 듣고 싶지가 않았다. 글자 그대로 짐승 같은 집회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야 왜 진경이 성에 대해 민감한지를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 날 천마회의
집회가 너무나도 큰 충격을 주었으리라 여겨졌다. 그 날의 후유증으로 부부 사이에
틈이 생기면서, 이혼을 한 게 틀림없었으리라. 누구나 성에 대한 아련한 향수 같은
욕망은 있기 마련일 터였지만 말이다. 천마회와 같은 군상들의 교접은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짓이라고 여겨졌다. 참으로 요지경 같은 세상이라더니, 별스러운 집회도
다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헌데 놀랍게도 탈출의 영감이 떠오른 것은 극도의
회의(懷疑)에 빠진 바로 이 순간이었다.
나는 우선 내게 영감을 가져다 준 진경에게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나서는 하늘을 향해, 커다란 환호성을 터뜨렸다. 이윽고 나는 쏟아져
내리는 10여 미터 높이의 폭포수를 향해 곧장 달려갔다. 폭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다리와 팔을 걷어붙인 채, 폭포를 향해 암벽 등반을 시작했다. 미끄러운 물길만 슬쩍슬쩍
피하면서, 절벽에 매달린 다복솔을 움켜쥐면서 절벽 위로 타올랐다. 설사 올라가는
도중에 추락하더라도 죽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처음에
이 곳에 떨어져 내릴 때에도 죽지 않았었지 않은가 말이다. 게다가 절벽 밑에는 두터운
관목 숲으로 뒤덮였기 때문이다.
족히 20여 분은 지났으리라. 마침내 폭포수가 힘차게 쏟아져 내리는
입구에 도착했다. 폭포수를 내뿜는 절벽 면에 노출된 배출구의 직경은 3m 가량은
족히 되었다. 폭포수 측면의, 둥치가 20cm는 됨 직한 다복솔을 움켜쥐고는 배출구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머리에 물살이 튀기자마자 머리가 통째로 으스러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애써 참으면서 머리를 물 속으로 넣고는 호흡을 멈추며
배출구 안을 들여다보았다. 가만히 눈을 떴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짙은 암흑뿐이었다.
3분간을 절벽 내의 배출구를 들여다보았지만, 여전히 눈앞은 짙은 암흑뿐이었다.
한낮인데도 배출구 안이 짙은 암흑이라면, 아무래도 출로는 없는 거나 다름없을 터였다.
영감이 생겼다고 쾌재를 불렀던 사실이 후회스럽기 그지없었다. 영감이란
바로 폭포수 안을 이용하여, 구룡동굴을 거쳐 세상으로 되돌아나간다는 거였다. 처음에도
이러한 생각을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차마 거대한 물살을 거슬러 나갈 생각을
못했던 터였다. 한 마디로,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는 것이 가장 큰 영감이었던 터였다.
진경의 이야기를 듣다가 떠오른 영감이 하필이면 물살을 거스른다는 것은 무슨 말이었더냐고
? 천마회의 여자들이 벌거벗은 몸으로 아무 남자나 닥치는 대로 성기를 어루더듬는다는
것은 말이다. 확실히 기존의 세파를 거슬러 오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떻든 물살을 거슬러야만 사는 것이다. 지금의 사는
것은 결코 삶이 아니란 말이다.
여전히 귓전을 파고드는 것은 '콸콸'거리며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의
소리뿐. 물보라가 수천 수만의 흰 나비 떼가 되어 허공을 날아오르는 듯했다. 전신의
기운이란 기운은 다 빠져, 이제 정말 내려갈 기운마저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당장 생명이 직결된 게 아닌가 말이다.
나는 다음을 위해 발자국 디딤 자리를 만들어 두고 싶었다. 다복솔의 굵은 가지를
하나 꺾어서는 차례차례 디딤 자리를 만들며, 절벽 아래로 내려섰다. 절벽 아래로
내려서자마자 일시에 허기가 일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1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그 길로 곧장 석실을 향해 걸어갔다.
석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구수한 음식 냄새가 났다. 붕어가 담긴
고깃국과 구운 칡뿌리와 도라지 뿌리가 전부인 식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여인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반기면서, 청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빠, 아무런 말도 없이 지금까지 어디에 있다가 오는 거예요
? 우린 오빠가 완전히 이 곳을 떠나 버렸거나 아니면 세상을 떠난 줄로만 알았어요.
아까부터 한 시간 가량을 고함을 지르면서 찾아다녔는데도 대관절 어디 계셨어요
? "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내가 석실을 떠난 지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다니
? 따지고 보면 그럴 만도 했다. 나는 미소를 머금으며, 여인들을 향해 말했다.
"어이구, 걱정을 끼쳐 드려서 미안해요. 확실하게 신선(神仙)이
되는 길은 없는지 좀 궁리를 하다가 온 거예요. 결론은 다음에 알려 드릴게요."
잠시 후에 여인들과 식사를 마친 뒤에, 담소를 나누며 석실의 벽에 기대었다.
또 다시 도전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가슴속으로 밀려들었다. 잠시라도 시간을 죽이고
지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오후 3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여인들을
바라보며 잠시 바람을 좀 쐬고 오겠다며 석실을 빠져 나왔다. 나는 다시 폭포수를
향해 다가갔다. 디딤 자리를 만든 덕분으로, 채 5분도 안 되어서 10여 미터의 배출구까지
올랐다. 최대한의 폐활량으로 가슴을 부풀려서 물 속으로 몸을 들이밀어 보기로 했다.
일단 몸을 웅크려 배출구 안으로 들이밀자마자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의 수압이 느껴졌다.
일단 자세를 바로잡은 다음에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몸을 바로 세웠는데도
여전히 몸은 물 속에 잠긴 채였다. 나는 일단은 호흡 곤란을 느껴 배출구로 다시
나왔다. 이 번에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입은 옷을 죄다 벗어 버렸다. 벗은 옷은
다복솔 밑동에 잘 감아둔 채, 다시 배출구 안으로 들어섰다. 아까보다는 훨씬 여유가
있었다. 밖에서 들여다 볼 때는 암흑이었지만 말이다. 안에서 물 속을 올려다보니
그렇게 맑을 수가 없었다. 이 번에는 다소의 모험을 무릅쓰고 물밑을 박차고 수면
위로 치솟아 오르려고 했다. 고개를 수직으로 하고는, 발끝을 꼿꼿이 편 채 물밑을
차고 올랐다. 그러면서, 빠르게 두 발을 앞뒤로 번갈아 반복적으로 흔들어 대었다.
점차 몸이 두둥실 위로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머리에 무엇인가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급히 들어 올려다보니, 온통 널따란 석판이 있을 따름이었다.
이것을 확인하는 순간 다시 한 번 절망감에 휩싸여 몸을 떨었다.
'이제는 정말 끝장난 거야. 끝장난 신세라 이 말이야.'
비참한 심정에 휩싸여 온몸이 후들후들 떨려 왔지만 말이다. 이내 마음을
추스르며, 곧바로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는, 이내 몸을 돌려, 배출구 밖으로
빠져 나왔다. 옷을 입고는 한동안 숨을 추스른 후에, 절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섰다.
분지 아래로 내려섰지만 말이다. 너무나 현실이 고달파서 목이 콱 메려고 했다. 전신을
엄습해 오는 전율 같은 절망감으로 인해, 심장이 터져 버릴 지경이었다. 그랬기에,
석실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바깥 날씨는 몸으로 견디기에는 너무나도
차가웠다. 나는 내가 기거하던 석실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오후 다섯 시 무렵이었다. 석실 앞에 이르자마자 여인들은
사랑이 가득 실린 눈빛으로, 나의 표정을 살피며 다가왔다. 나는 짐짓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뭔가를 얘기하려고 했지만 말이다. 한없이 따사로운 여인들의 눈빛을 대하자마자,
그만 콧잔등이 시큰거리면서 목이 꽉 메었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떨리면서,
눈시울 가득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렇게도 억누르고 자제해 왔던 감정의
통제선이 맥없이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이 때였다. 바람결과도 같이 맑은 여인들의
속삭임이 귓전에 빛살처럼 휘감기고 있었다.
"아, 어쩌면 이런 일이 다 있을까 ? 사내의 눈물이라니 ? "
"어쩜 사내의 눈물이 이렇게도 시리게 느껴질까 ? "
나는 절망에 휩싸여, 썩은 나무 등걸처럼 석실의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여인들은 아무도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능히 느낌으로
알 수 있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여인들의 눈에도 눈물이 그득 실려, 반짝이고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연함이 온통 실내를 가득 채웠다. 나는 이성을 회복하려고 했지만,
자꾸만 들끓는 설움에 휩싸여 그대로 쓰러져 눕고 말았다. 아, 남은 것은 바람결인가
눈물인가 ? 아니면, 풀잎에 부서지는 빛살인가 ? 이슬만큼이나 가벼운 존재의 실상에
아연해 하며, 점차 영혼은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잔뜩 황량하고도 처절한
심사로 뒤얽혀, 나는 그저 숨만 쉬는 송장일 따름이었다.
바로 이 때였다. 슬며시 여인들의 입술이 나의 얼굴을 더듬기 시작했다.
어차피 나는 송장의 신세가 아닌가 ? 이 순간만큼은 나는 여인들의 행동을 제지할
만한 아무런 명분이나 기력도 없었다. 고귀한 생명체로서의 여인들에게 나는 이제부터는
그 누구에게도 경어를 쓰고 싶었다.
"그래, 하고 싶은 게 그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우리는
죽은목숨인데, 뭔들 못 들어주겠어요 ? "
나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처절한 상황이었음에도 말이다. 여인들의
입술은 봄철의 밀밭을 스쳐 가는 바람결처럼 감미로웠다. 긴 밤 내내 여인들의 입술은
나의 얼굴과 입술에 파도처럼 휘감기고 있었다. 내가 바다였다면 여인들은 조각배였을
테고, 여인들이 바다였다면 나는 또 무엇이 되어 떠돌았을까 ? 눈물로 뒤얽힌 밤이었지만,
끝내는 입술만의 애무로 순수하게 영혼을 넘나들었던 밤이었다. 다들 창천의 뭇별이
된 심정으로, 기나긴 밤 내내 그렇게 지순하게 타오르기만 했었나 보다.
나는 아침 7시 무렵에, 다시 폭포를 향해 달렸다. 우선 절벽을 오르기에 앞서, 칡과 민들레 뿌리를 파서 즙을 내어 마셨다. 우선 민들레 뿌리를 먼저 먹은 뒤에, 칡뿌리를 씹었다. 민들레 뿌리는 쓴맛이 강한 식물이었지만, 칡은 달착지근했기 때문이다. 먼저 쓴맛을 본 뒤에, 단 맛을 즐기려는 의도였었다. 마침내 가볍게 식사를 해결하고는 절벽을 올라, 폭포 배출구에 도달했다. 거대한 물살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굵은 다복솔을 힘껏 움켜쥐었다. 배출구 안으로 몸을 들이밀기에 앞서서 몸에 걸친 옷을 죄다 벗었다. 옷은 다복솔에 잘 묶어 놓은 뒤에, 마침내 배출구 안으로 들어섰다. 휩쓸려 내리는 물줄기의 위력이 강하여,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발바닥에 전신의 체중을 실어, 천천히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내부에는 역시 커다란 공간이 드러났다. 물 속에서 눈을 뜨고 올려다보아도 위는 잘 보이지 않았다. 분명 물이 들어찬 공간의 상부 어딘가에는 구멍이 뚫려 있을 거였다. 그 구멍이라야 구룡동굴로 통할 터였다. 일단 구룡동굴로만 연결된다면 곧장 바깥 세계로 나갈 수 있을 터였다. 나는 180초 동안은 숨을 쉬지 않고서도 견뎌낼 수가 있었다. 시계를 바라보았다. 20초가 경과되고 있었다. 나는 곧장 물밑을 박차고 상층부로 떠올랐다. 그러면서 미리 생각해 둔 방식대로 오른쪽 부분부터 시작하여 탐색해 나가기로 했다. 몸을 물층의 상부에 밀착시켜 돌 바닥을 쭉 더듬어 나갔다. 시계를 보았다. 30초가 남아 있었다. 욕심을 버리고 다시 밑바닥으로 가라앉아야만 했다. 오늘은 중앙에서 오로지 오른쪽 방향으로만 탐색하기로 했다. 다음 날은 왼쪽, 그 다음 날은 앞쪽, 또 그 다음 날은 ……. 내 나름으로의 확고 부동한 계획이 서 있었었기에, 그렇게 조바심이 일지는 않았다. 잡념을 버린 채, 5분씩 휴식을 취하고는 다시 물질을 계속하였다. 오른쪽 부분은 워낙 넓게 드리워져 있었기에, 하루의 시간으로는 부족할 것만 같았다. 얼마가 걸리더라도 수색할 것은 다 해 봐야 할 일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영감 같은 것을 얻었다. 영감이 떠오르자마자 나는 물밑으로 가라앉아, 배출구를 통해 빠져 나왔다. 다복솔에서 옷을 찾아 입으면서도 나는 영감을 분석해 보았다. 확실히 그 방법이라면, 아무래도 무리가 없을 듯했다. 떠오른 영감이란 다름 아닌 구성원들의 협조를 얻는 거였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는 여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을 해야 하나하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의 심성이며 얼굴의 표정 관리부터 선행되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몸의 물기가 완전히 마를 때까지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절벽을 타 내려갔다.
석실에 도착하니, 오전 9시 무렵이었다. 여인들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불을 지펴, 물고기 국을 끓이고 길다란 칡 세 뿌리를 구웠다.
도라지의 즙을 듬뿍 받아 그릇마다 채워 놓고는 조용히 가부좌를 취하며 명상에 잠겼다.
반시간이나 흘렀을까 ? 이윽고 여인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진경이 먼저 식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어머나, 종철씨 ! 언제 일어나셨어요 ? 게다가 아침 준비까지
미리 해 놓으시다니 ? 이렇게 황송할 수가 없네요."
진경은 지난밤에 내가 경어를 쓴 이후로는 다시 내게 경어를 쓰기 시작했다.
이윽고, 청혜와 주현도 들어서며 각각 인사말을 건네었다.
"만날 저희들보다는 먼저 일어나시더군요. 맑은 공기 많이 마셨겠네요
? "
"안녕하세요, 종철형. 산 공기가 이렇게 감미로울 수가 없네요."
나는 미소를 지어 대답을 대신하고는, 여인들을 식탁으로 불러모았다.
식사를 마치고는 식탁에 둘러앉은 채, 나는 조용히 나의 의견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여인들은 내 말을 듣는 순간에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대며 야단들이었다.
"어머나, 세상에 ! 그럼, 우리가 이 곳을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 "
"왜 그걸 진작 얘기하지 않으셨어요 ? 설마 혼자서만 슬그머니
빠져나가려던 것은 아니시죠 ? "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에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
"
나는 일부러 눈을 지그시 감고는 뜸을 들였다. 뜸을 들일수록 내게는
심리적인 안정감이 생겼기에 더욱 좋았다. 여인들은 일제히 숨을 죽인 채, 나의 동작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마침내 번쩍 눈을 뜨면서, 자신감에 넘치는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탈출하려면 전체 구성원들의 단결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봐요.
구성원 각자의 협조가 없이는 현재의 난관을 헤쳐 나갈 길이 없다구요."
물길을 이용한 탈출 방법일진대, 폐활량을 늘이는 훈련이 시급한 터였다.
다들 수영에는 일가견이 있는 터여서, 별로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말이다. 조직적인
탈출의 훈련에는 지도자가 필요한 터였다. 나는 유선문의 무예들 중에서 수중 호흡법에
관한 훈련을 지도해 나갈 생각이었다. 일단 유선문의 무예를 전수받으려면, 유선문의
입문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어느새 점심을 마친 오후 1시 무렵이었다. 여인들과 나는 도랑으로
가서 일제히 목욕을 하기 시작했다. 목욕을 끝내고는 몸의 물기를 말끔히 닦아낸
알몸으로 여인들은 나를 향해 일렬로 섰다. 이윽고 유선문의 입문 의례가 시작되었다.
도랑 가에는 훨훨 타오르는 모닥불이 지펴졌고, 금새 연기가 바람을 타고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나는 가부좌로 앉았으며, 알몸의 여인들은 일제히 나를 향해 세 차례의
큰절을 했다. 이로써, 나는 세 여인들에 대한 유선문의 선배가 된 터였다. 또한 여인들은
유선문에 입문하여 이제 유선문의 가족이 된 거였다. 여인들은 알몸으로 천지신명께
고하여, 어엿한 유선문의 제자가 된 터였다. 이렇게 하여, 나는 여인들에게 유선문의
모든 무예를 전수해 주기 시작했다.
세월은 빨라, 어느새 4월말이었다. 그 사이에도 동굴의 탐색 작업과
무술의 지도는 쉬지 않고 진행되었다. 폭포수의 근원인 수중 동굴의 탐색 작업은
의외로 어려움이 많았다. 제일 큰 애로점은 180초의 시간 이내에 탐색 작업을 마쳐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탈출의 가능성이라곤 전혀 없던 시기에 거론되었던 말이 또 다시
의제로 떠올랐다. 은하동천을 벗어날 기약이 없다면, 5월초부터는 옷을 벗고 지내기로
한 의제 말이었다. 구룡동굴을 향한 수중 탐색 작업을 한 지도 어언 4개월째가 아닌가
말이다. 언제 출로가 발견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는가 ? 또한 출로가 발견된다고
할지라도 폐활량이 거기에 상응하지 못한다면, 결국은 죽은목숨일 터였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하여 다들 극도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또한 처절할 정도의 암담한 심사에
휘감겨 있었다. 대관절 삶과 죽음과의 경계가 애초부터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루만 넘기면 5월이 되는 시점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여인들과
나는 식탁에 둘러앉아 문제의 의제를 놓고 의견을 나누었다. 이제 어느 모로 보나
날씨는 화창했고, 옷이 없어도 감기가 들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옷을 벗고
지내는 데엔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완전한 발가숭이보다는 약간은
신비한 면이 더 사람을 매료시키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구성원의
의장은 진경이 아닌가 ? 게다가 의사의 결정은 다수결로 하기로 했기 때문에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다고 주먹으로 우격다짐을 할 수도 없기에, 마음속의 울화를
삭이며 견딜 수밖에는 없었다. 하여간, 다수결의 결과로 다음 날인 5월 초하루부터는
옷을 벗고 지내기로 의견을 모았다. 심히 고약한 일이었지만, 다수결의 의사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어차피 여기는 단절된 세상이지 않은가 ? 단절된 세상의 규범은
세속과는 충분히 다를 수도 있는 문제였다. 결국 옷을 벗고 지내자는 것의 실질적인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희박하기 짝이 없지만 말이다. 혹시라도 세속으로 돌아갈
때를 대비하여, 옷을 아껴 두자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 정작 세상으로 돌아갈 때
옷이 없어서 발가숭이로 나서는 일보다는 말이다. 여기서 발가숭이로 지내는 것이
낫기는 할 터였다. 어쨌든 의제가 결정되면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심사를 잠재울
수가 없었다.
그 뿐이랴 ? 여인들은 일제히 성적인 교접 문제까지도 거론했다. 일단 남녀가
알몸으로 지낸다면, 마땅히 성적인 욕구도 해결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발가벗고 지낸다고 해서 모든 남녀가
교접을 한다는 것은 억지라고 반론했다. 원시 사회는 분명 옷이 없는 사회였을 터였다.
설사 그 때였을지라도, 남녀가 발가벗고 지낸다고 해서 아무하고도 교접을 했겠는가
말이다. 굳이 원시 사회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직업인들 중에는 누드 모델들이
적지 않은 터였다. 그럼 누드 모델들은 옷을 벗을 때마다, 언제나 주변인들과 교접을
하겠는가 말이다. 어림도 없는 일일 터였다. 나는 정색을 하고 여인들을 향해 말했다.
"의제에는 다수결로 결정할 것도 있고, 소수의 의견일지라도 반영되어야만
하는 경우도 있어요. 성욕의 해결 문제는 후자의 견해라고 봐요."
그러면서, 나는 관련된 나의 견해를 말했다. 꼭 성욕을 추스를 수가
없다면, 자위행위 등의 방법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랬더니, 여인들은 일제히
얼굴을 붉히며 말이 없었다.
산 속의 별천지에서도 세월은 거침없이 흘렀다. 어느새 신록이 무성한
5월 보름의 아침나절이었다. 여인들과 나는 폭포수 아래의 도랑 가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다들 조금 전까지 무상검법의 비폭양단(飛瀑兩斷)과 냉동운무(冷凍雲霧)의
검식 수련을 막 마치고 난 후였다. 그 동안 구룡동굴로의 수중 탐색은 전혀 진전이
없었다. 모두들 절망에 휩싸인 채 암담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짙은 아카시아의 꽃향기가 분지 가득히 남실거리고 있었다. 아카시아의 꽃향기 사이로
간간이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애절하게 울려 퍼지곤 했다. 아, 저렇게 울다가는 끝내
목청이 다 타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의
내가 뻐꾸기의 처지를 걱정하고 있을 일인가 ? 어쩌면 평생 이 분지에 갇혀 숨을
거둘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 말고, 나는 눈앞의 청혜를 바라보았다. 뽀얀
살갗에, 뾰족하게 돌출한 젖가슴을 드러낸 여체가 한없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게다가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을 바람결에 나부끼며, 빼어난 미모에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라니 ! '아름답다'는 생각만으로도 나의 성기가 발기하려고 했다. 나는
급히 도리질을 하며, 다시 멀리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아닌게아니라, 5월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일제히 옷을 벗고 지내었다. 여인들은 생리 기간에만 속옷을 잠시 입을 뿐이었다.
나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모습이 좋게 보였다. 그러한 관점에서, 세 여인들의
발가벗은 몸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기도 했다. 그 어떤 조각이나 작품이
인체의 오묘한 아름다움에 견줄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여인들의 시선도 때때로
발가벗은 나의 몸에 머물곤 했다. 마치 하늘의 구름인 듯, 나 역시 당당한 모습으로
나의 알몸을 드러내곤 했다. 인체는 어차피 조물주의 창작품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기에,
미술 세계에서도 누드화는 회화들 중의 기본이 아닌가 말이다. 누드의 아름다움에
대해, 알량한 윤리를 들먹여 매도한다면, 그건 아름다움을 모르는 소치일 뿐이리라.
문득 주현이 가볍게 팔 운동을 하며 내게 말을 건넸다.
"종철형 ! 근래에 들어서 수중 호흡 시간이 모두들 240초까지 연장되지
않았어요 ? 이 정도라면 말이에요. 정확한 탈출 위치만 알면, 바로 탈출할 수가 있지
않겠어요 ? "
나는 여인들을 바라보며, 앉은 자세로 대답했다.
"240초라는 수중 호흡 시간은 분명 눈부신 발전이었어요. 하지만,
아직은 겸허한 자세로 수련을 더 쌓아야만 해요. 게다가 탈출 위치도 못 찾은 상태이잖아요
? 무상검법의 수련을 한 차례 더 한 다음에, 수중 탐사를 나서기로 해요."
또 한 차례의 무예 수련을 마치고는 10여 m의 암벽을 일제히 타올랐다.
마침내 세 여인과 나는 폭포수의 배출구를 통해 수중 동굴에 들어섰다. 여인들도
수중 동굴에서 탐사를 한 지 어언 한 달째를 맞는 시점이기도 했다.
수중 동굴 바닥에서 일제히 치솟아 오르면서, 각자의 탐색 방향으로
더듬어 나갔다. 180초의 시간이 경과되자마자, 일제히 물밑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정확히 다섯 번을 반복하고는 여인들을 먼저 벼랑 아래로 돌려보냈다. 여인들을 돌려보낸
뒤에, 나는 다시 수중 동굴로 들어섰다. 여인들이 다들 분지에 안전하게 내려서는
것을 본 뒤였기에, 나는 마음이 평온했다. 수중 동굴에 한 발을 옮겨 딛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생각이 머리를 치며 떠올랐다. 막대기를 이용하여 동굴의 천장 부근을 두드려
소리를 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배출구 부근의 다복솔의 가지 하나를 꺾어 들고는
다시 수중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패기 있게 수면 상부로 치솟아 천장을 두드려 보았지만 말이다. 어느
곳에서도 작은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세 차례를 더 시도해 보았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자 갑작스럽게 허탈해지기 시작했다. 호흡을 중단하고 탐색 작업을 하기란
절대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탐색에 실패하고 보니, 전신이 나른해져 오며 기운이
빠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쓰러져 자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는 여건이었다.
만약에 내가 실망하여 쓰러져 눕는다면, 여인들의 사기는 어떻게 될 것인가 ? 나는
오슬오슬 떨려 오는 몸을 추스르며 벼랑을 타고 분지로 내려섰다.
나는 여인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여인들은 민들레와 고들빼기,
씀바퀴 등의 야생 식물들을 제법 수북히 캐어 다듬고 있었다. 국을 끓이기 위한 재료일
터였다. 여인들의 곁에는 캐 낸 야생 도라지의 뿌리도 제법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계절이 바뀌어 제법 미각을 돋구는 식물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머루와 오디도 보였고,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다래나무도 찾아볼 수 있었다. 나도
여인들을 도와 야생 도라지를 찾아 캐내었다. 얼마간을 더 식량 준비에 매달리다가
점심을 먹고는 곧장 수중 호흡 단련에 들어갔다. 생사가 달린 중요한 훈련이었기에,
저마다 사력을 다하여 연습에 열심이었다.
물 속에서 시계를 바라보면서 300초 가량을 참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도랑 속의 물밑을 수영하다가 손으로 슬쩍 나의 엉덩이를 더듬고 지나갔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재차 손길이 다가오며 나의 사타구니를 더듬어 왔다. 나는 놀란
나머지, 크게 두 팔을 휘저으며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러면서, 누가 그렇게 했겠는가를
가늠해 보았더니, 놀랍게도 주현이었다. 나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문득 여인들의 처지가 참으로 안쓰럽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탈출의 기약도 고국으로의 귀환도 보장받지 못한 이국 처녀의
심사가 어떠했겠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생사를 건 훈련에는
혼신의 힘을 쏟아야만 하는 법. 나는 잠시 물가로 나가 주현을 눈짓으로 불렀다.
나는 그녀를 향해, 잠자코 말했다.
"주현씨 ! 지금 우리 앞에는 오로지 탈출이냐 아니냐하는 것만이
남았을 뿐이에요. 생사를 건 훈련에 임할 때엔 잡념을 배제하시고, 최선을 다해 주세요,
아시겠죠 ?"
주현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떡거려 동의했다. 수중 호흡 훈련이
끝나자, 여인들과 함께 석실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여인들은 저마다 탈진하여
자리에 눕자마자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나도 잠을 잘까하고 자리에 누워 보았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석실 바깥을 노려보았다. 도저히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눈빛을 빛내며 서서히 발걸음을 옮겨, 석실을
빠져 나와 폭포수로 향했다.
다시 한 번 수중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이 번에는 물고기들의 이동
방향을 주시하기로 했다. 특히 피라미 떼들의 이동 방향을 말함이었다. 왜냐하면,
피라미는 수중(水中)의 층간(層間)을 이동해 가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몇 번이고 수중을 오락가락하며 관찰해 보았다. 때로는
막대기로 피라미 떼들을 쫓으며 물 속을 헤엄쳐 보기도 했다. 그러자, 10여 분쯤
후에는 피라미들의 통행로를 추정할 수 있었다. 성미가 급하기에, 피라미들에게는
절대로 우회를 한다든지 복잡한 유영로(遊泳路)를 갖지 않는 속성이 있었다. 때문에
자신감을 갖고 피라미들의 유영로에 직선을 그어 상부 지점을 추정해 보았다. 세
군데 지점에서 선을 그어, 합치되는 방향을 가늠해 보았다. 그랬더니, 물밑으로부터
남서쪽 지점의 상부 방향이었다. 그 쪽은 의외로 상부 공간이 좁은 곳이었다. 나는
최대한의 폐활량으로 공기를 저장한 뒤에, 남서쪽의 상부 방향으로 치솟아 올랐다.
세 번을 시도한 직후였다. 마침내 수면 상부의 은빛 쟁반 같은 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긴가민가하면서도 가슴을 졸이면서 수면 상부에 닿아보니, 놀랍게도
거기에는 커다란 구멍이 열려 있었다. 마침내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구룡동굴과 통하는
구멍을 찾은 터였다. 구멍은 퇴적암으로 이루어진 암반에 형성되어 있었으며 직경은
2 미터에 달했다. 나는 곧바로 구멍 위로 뛰어올라, 발가벗은 몸으로 환호성을 터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환호성 대신에 밖으로 새어 나온 것은 흐느낌과 눈물 방울뿐이었다.
우선 목젖을 휭하니 울리고 지나가는 서러움 때문에, 울컥 목이 메었다. 당장의 심정으로는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푹 쓰러져 나뒹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
동안 쌓였던 설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느라고, 좀체 흐느낌과 눈물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른 뒤에, 구멍의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구멍의 천장을
올려다본 순간에 그만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가로 100자 세로 200자로 새겨진 운중검법(雲中劍法)의
도식이 커다랗게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방향이 제대로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돌비석이 있던 부분으로부터는 10 m쯤 떨어진 위치였고, 운중검법의 도식 바로 아래
지점이었었다. 나는 혹시 그 동안에 검법의 도식이 훼손되지는 않았는지를 면밀히
살폈다. 검법의 도식을 읽어 나가는 도중에, 나는 황홀경에 젖어 몸을 떨지 않을
수가 없었다.
自然之攝理達求道者之道(자연지섭리달구도자지도)
以克難關可到絶對之境地(이극난관가도절대지경지)
자연의 섭리는 구도자의 길에 통하고,
난관을 극복해야만 절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나는 거듭거듭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호, 이러한 풍도(風度)의
검객이라면, 형야성이야말로 천하 제일의 검객이었으리라고 여겨졌다. 나는 운중검법의
제1식인 낙화유수(落花流水)의 검식을 도식을 통해 수련해 보았다. 떨어진 꽃잎들이
물 위에 떠서 흘러가는 듯이, 유려하면서도 매섭고 깔끔한 동작들이었다.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기를 써서 시연을 해 보기로 했다. 그러자, 가볍게 몸이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면서 어느 방향으로든 공수(攻守)가 가능한 자세로 전환되었다. 나는 내심으로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친 김에 두 시간을 기울여, 12식으로 된 운중검법의
모든 동작을 익혔다. 참으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기연(奇緣)이라고 여겨졌다.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새 오후 6시 무렵이었다. 나는 큰 동작으로 호흡을 조절하고는 조용히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내가 석실에 도착하자마자, 여인들은 온통 호들갑을 떨며 일제히 일어나 나를 에워쌌다. 여인들의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그토록 염려스럽고도 안타까운 표정의 여인들을 보는 순간에 그만 가슴이 벅차도록 감격하고 말았다. 나는 엉겁결에 알몸이라는 사실도 망각한 채, 차례대로 여인들과 포옹했다. 그러자, 여인들은 도화선의 불꽃처럼 타오르며 일제히 신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려고 했다. 미처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라,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다. 미처 얘기할 틈도 없이, 진경의 입술이 나의 입술을 막아 버렸다. 이를 계기로 일제히 청혜와 주현도 나의 알몸을 애무해 대기 시작했다. 곧바로 제지하려고도 해 보았지만 말이다. 알몸을 애무하는 여인들의 손길에 의해, 그만 억눌러 왔던 욕정이 터져 버리려고 했다. 이 때에서야 나는 모면할 수 없는 절망감의 실체와 맞닥뜨린 느낌이었다. 이러다가는 도저히 감성을 조절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야앗 !! "
나는 벽면을 향해 우레 같은 기합 소리를 내질렀다. 여인들은 순간적으로
움찔 놀란 표정들이었다. 나는 이내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여인들을 향해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구룡동굴과 통하는 구멍을 발견하여, 나갔다가 되돌아왔다는
말을 하는 순간이었다. 여인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대며 갑자기 나를 에워싼 채
포옹을 해 왔다. 그러면서 어느새 여인들은 다시 나의 알몸을 애무해 대기 시작했다.
잠시만 마음을 가라앉혀 달라고 애걸하다시피 말했지만 말이다. 여인들은 기쁨에
겨워, 미쳐 날뛸 듯한 음조로 말했다.
"종철씨 ! 확실히 새롭게 태어난 인생이에요. 이 곳 은하동천에
온 것도 전생의 깊디깊은 인연이었으리라고 여겨져요. 이 곳을 떠나기 전에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 주지 않으시겠어요 ? 정녕 풍류를 모르시나요 ? 아니면 억지로
모르는 척하며 절제하는 건가요 ? 배우자도 없으시면서, 대관절 누구를 위한 절제인가요
? "
"종철형 ! 저희 중국 여인들도 근 반 년 세월을 여기에서 갇혀
지내지 않았어요 ? 영락없이 이대로 죽는 줄로만 알았다구요. 다시는 세상의 빛을
못 볼 줄 알았다구요. 정녕 새로운 삶을 얻은 시점이에요. 세속을 초월하여, 부디
은하동천의 멋진 풍류를 저희들과 함께 나누지 않으시겠어요 ? 저희들이 한국 남성의
진면목을 대한 건 이 번이 처음이에요. 참으로 종철형 같은 남성을 만난 걸 영광으로
생각해요. 부디 이 곳을 떠나기 전에 저희들에게도 잊지 못할 추억 거리를 안겨 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느새 여인들의 섬세한 손길은 나의 성기를 어루더듬고 있었다. 이제는
말이다. 도저히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차라리 이럴 때엔 말이다.
정직하게 말하여, 정절보다는 풍류를 좇고 싶었던 터였다. 헌데, 바로 이 때였다.
호수의 물빛만큼이나 맑은 은숙의 미소가 문득 나의 가슴에 빛살처럼 와 닿았다.
아, 그래 바로 당신이었어요. 당신이야말로 내가 그렇게도 기나긴 세월 동안을 찾아
헤매던 그리움의 실체였어요. 비록 내가 풍류도 모르는 푼수로 여겨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에요. 나는 나의 삶을 소신대로 살아나가겠다구요. 확고하게 마음이 정해지자마자,
나는 여인들을 향해 경건한 자세로 허리를 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