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Return)
장편소설·11회
달그림자
손
정 모
11. 계림 일전(桂林一戰)
나는 여인들을 향해 굽혔던 허리를 바로 펴고는 미소를 머금은 채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여인들은 일순 표정이 숙연해진 채, 나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나는 문득 석실 바닥에서 활활 타오르던 숯불 토막 하나를 집어들었다.
숯불은 붉은 불꽃을 내뿜으며 잘도 타오르고 있었다. 붉게 타는 숯불을 석실의 중앙에
놓으면서, 나는 여인들을 향해 말했다.
"이제 우리는 은하동천으로부터의 탈출을 목전에 두고 있는 시점이에요.
갇혔던 기간은 작년 11월 30일 이후부터 오늘까지 딱 6개월 보름만이 아니겠어요
? 이렇게 역사적인 순간을 일시적인 기분에 휩쓸려 보내서는 안 되겠죠 ? 모두들
탈출을 위한 마지막 준비를 하도록 하시죠. 자 다들 일어서서 나를 따라 주변 정리를
하는 게 어때요 ?"
여인들은 잠시 들떴던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이내 나를 따라, 석실 청소를
시작했다. 석실은 금세 말끔하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흘낏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새 밤 8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각자 자신의
침실로 돌아가서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맑은 휘파람새의 울음소리로 새 아침이 밝았다. 여인들과 나는 그 동안 갈무리해 두었던 각자의 옷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에는 은하동천의 곳곳을 돌아보며 훼손되었던 자국들을 말끔히 복원시켰다. 그리고는, 탈출을 위한 효율적인 도구로서, 칡 줄기를 꼬아 길다란 밧줄을 만들었다. 여인들과 함께 하는 작업이라, 금세 밧줄의 길이는 30여 미터에 달했다. 아침 식사를 간략히 마치고는 여인들과 나는 은하동천의 중앙에 늘어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하여, 과거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일제히 은하동천을 향해 삼배를 올렸다. 석동을 떠나, 일행의 발걸음이 풍전행의 무덤에 이르렀을 때였다. 여인들은 나를 바라보며 풍전행의 유골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이 문제는 절대로 나 혼자 가볍게 결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여인들과 의논을 한 결과, 풍전행의 유해를 은하동천에 그대로 남겨 두기로 했다. 자신들만의 몸마저도 가까스로 빠져나갈 판인데, 시체를 함께 가져 나간다는 것은 도무지 무리였다. 일단 동굴을 빠져나간 뒤에는 경찰관서에 사고 경위를 신고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하여, 풍전행의 사망 사고는 국가 대 국가 기간끼리의 해결 문제로 남기기로 했다.
마침내 아침 10시 무렵이었다. 일행은 절벽을 타 올라,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절벽의 배출구에 이르렀다. 나는 여인들에게 탈출 요령을 가능한 한 자세하게 설명했다. 설명을 마치고는 칡으로 꼰 밧줄을 입에 물고, 먼저 수중 동굴 속으로 들어섰다. 이내 나는 호흡을 중지한 채, 수면의 출구를 향해 몸을 솟구쳐 올렸다. 금세 탈출구를 통해, 구룡동굴로 들어설 수 있었다. 구룡동굴의 바닥에 올라서자마자 나는 밧줄을 동굴의 돌출한 바위에 단단히 붙잡아 매었다. 그리고는 밧줄을 두 번 크게 흔들었다. 이내 밧줄이 팽팽해지면서 누군가 수면 위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축축이 젖은 머리카락을 털면서 올라온 여인은 청혜(芮靑蕙)였다. 다음으로 운주현(雲周賢)이 올라왔고, 마지막으로 형진경(邢珍境)이 올라왔다. 여인들은 동굴 바닥에 도착하자마자 감정이 격하여, 퍽퍽 소리를 내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나도 슬그머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에 어리는 물기를 추슬렀다. 이제는 확실히 새로운 삶을 찾게 된 터였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새로운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하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서서히 전신을 휩쓰는 흐느낌 같은 것이 치솟으면서 왈칵 콧속이 뜨거워졌다. 여인들의 흐느낌이 진정될 때까지를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그 얼마나 갈구했던 탈출이었던가 ! 누가 보더라도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오열하고도 남음이 있는 상황이었으리라.
물기를 충분히 말린 뒤에, 일행은 그 동안 고이 간직했던 옷을 펼쳐
입었다. 옷을 차려 입은 넷은 다시금 콧잔등이 시큰거려 일제히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악몽 같았던 은하동천의 세월이었지만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각자 마음을 추스르며, 각지를 향해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했다. 형진경은 전통 찻집으로 연릭을 취했고, 나는 은숙에게 교신을 보냈다.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받던 은숙은 급기야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은숙은
경황 중에서도 금세 달려오겠다면서, 전통 찻집에 그대로 머물러 달라는 말을 반복했다.
전통 찻집의 여 종업원들도 구룡동굴로 금세 달려오겠다는 것을 진경이 애써 말린
모양이었다.
일행은 서둘러 구룡동굴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에 일행은 죽림 온천
부근에 있는 형진경의 전통 찻집에 들어섰다. 이제껏 영업을 계속하던 금옥이와 희선이가
반색을 하며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참으로 벅찬 재회였다. 저녁 무렵에는 은숙이
경기도 이천으로부터 곧바로 전통 찻집에 도착했다. 마치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을
맞는 듯한 분위기였다. 얼떨떨한 와중에서도 경찰관서에 사망자의 신고를 하는 일은
진경이 맡아 처리하기로 했다. 그 동안 은숙은 나와 교신이 끊긴 이후로, 사방으로
나를 찾았다는 거였다. 구룡동굴에도 그간 두 번이나 찾아왔다고 했다. 심지어 변산의
월선녀와 안개노인에게도 연락을 취해 보았다고 했다. 전통 찻집의 두 여 종업원과
함께 수사 기관에도 실종 신고를 했었다는 거였다. 수사 당국에서도 몇 차례나 구룡동굴까지
가 보기는 했지만 말이다. 물로 막혀 있어, 더 이상의 수사가 어려웠다는 거였다.
심지어는 월북의 가능성까지 거론되어 수사가 좀체 진척되지 못했다고 했다.
밤을 지새면서 지난날의 이야기로 설움을 달래다가, 새벽 무렵에야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경이 자리를 잡아준 대로 전통 찻집 2층의 각자의 숙소로 들어가서
잠자리에 들었다.
경찰관서에서 수사 요원들이 나와 현장 검증을 하기까지 2주일의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중국 북경대학으로의 사망자 조사서가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발송되고서야 일행은 여로를 결정했다. 주현과 청혜는 진경과 함께 은숙과 나를 중국으로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진경은 단호하게 더 이상의 모험은 하고 싶지 않다며 단번에
거절했다. 은숙은 나의 뜻에 따르겠다며, 나의 의사를 묻고 있었다. 나는 청혜와
주현의, 초청의 진의를 조심스럽게 타진해 보았다. 그 사이에 청혜와 주현은 비디오
카메라를 새로 구입하여 구룡동굴의 운중검법(雲中劍法)의 도식을 재촬영했었다.
그녀들은 귀중한 자료를 얻은 보답으로 말이다. 진경과 나를 중국으로 초대하여,
검법의 달인들과 만나게 해 주겠다는 거였다. 또한, 한국의 은하동천과는 달리 진정으로
빼어난 중국의 산수를 보여 주고 싶다고 했다. 나는 주현과 청혜의 말을 이틀 동안
신중하게 검토했다. 마침내 나는 그녀들의 제안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넓고 큰 중국
천지에서 당당한 검술의 전문가와 만나 검술을 겨루고 싶었다. 그리하여, 단순한
무술을 초월한, 폭넓은 경험을 쌓는 인생 수련의 장으로 삼고도 싶었다. 중국 방문에
대한 나의 뜻을 밝히자, 은숙은 나와 함께 가고 싶다고 했다. 나도 기꺼이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편, 현실에 돌아온 순간 직장을 생각했다. 나는 일단은 해양과학 연구소로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몇 마디의 말로 설명될 성질이
아니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미 해직 처리가 되었으리라 여겨졌었다. 직장은 얼마든지
새롭게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일단은 해양과학 연구소에 대한 미련은
깨끗이 버리기로 했다. 얼마 안 될 퇴직금에 대한 미련까지도 깨끗이 바람에 날려
버리기로 했다. 하지만, 인간적인 유대감 때문에 수일 내에 연구소를 방문하여 자초지종을
설명하리라고 마음먹었다.
어느새 세월은 흘러, 6월 초순이 되었다. 사지에서 벗어난 지도 어언
7개월이 다 된 시점이었다. 그 사이에 해양과학 연구소에도 다녀와 모든 일을
정식으로 마무리했다. 다소간의 미련은 남았지만, 모처럼 홀가분한 심정이기도 했다.
유월 첫째 월요일 오전 8시 10분이었다. 예약해 놓은 대한항공편으로
북경을 향해 비행기는 활주로를 이륙하기 시작했다. 금세 비행기는 고도를 높이며
상승하여, 서해 바다를 향해 기체를 돌리고 있었다. 비행기가 점차 서해를 지나 발해만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윽고 바다는 끝없이 펼쳐진 흰 구름장으로 가려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눈에 띄는 거라고는 오로지 설원(雪原)으로 느껴지는 아득한 운해(雲海)일
뿐이었다. 끝없는 설원처럼 보이는 운해에도 더러더러 구름의 산봉우리가 곳곳마다
치솟아 있었다. 맑은 날씨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이런 장관을 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감회 어린 시선으로 끝없이 펼쳐진 운해를 바라보며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바로 이 때였다. 은숙이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너무나 장관이죠 ? 어쩜 저렇게도 구름장의 색채가 순백으로 곱게
빚어졌을까요 ? 참으로 저는 선녀가 된 느낌이에요."
이심전심이랄까 ? 나도 막 구름의 평원을 내려다보며 어쩜 은숙은 선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근심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맑은 얼굴 모습이었다.
문득 기내를 돌아다보니, 통로 건너편의 청혜와 주현도 나란히 뭔가를 속삭이며
웃고 있었다. 나는 은숙의 살짝 홍조가 실린 얼굴 모습을 들여다보다가 조용히 미소를
실어 보냈다.
공항을 빠져 나와 택시에 오르니, 오전 10시 1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청혜와 주현을 따라, 북경대학에 가는 길이었다. 청혜와 주현이 대학원 연구실에
들러, 지도 교수에게 귀국 보고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들이 용무를 마칠 때까지
은숙과 나는 대화를 나누며 북경대학의 교정을 거닐고 있었다. 아마도 한 시간 가량이
지났을 때였다. 청혜와 주현이 은숙과 나를 향해 손짓을 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잠시
후에 그녀들에게 안내되어, 그녀들의 지도 교수와 환담을 나누게 되었다. 또한 예상했던
바였지만 말이다. 얼마 후에는 지도 교수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공안 당국의 수사
요원들과도 만났다. 풍전행의 사망 경위에 대한 참고인 진술을 중국어를 써서, 차분하게
설명해 나갔다. 수시로 은하동천과 구룡동굴의 사진을 공안들에게 보여주며 필요한
보충 설명을 해 주었다. 그 이후로 이틀간을 더 참고인 진술을 한 뒤에야, 사건은
비로소 종료되었다. 공안들은 조만간 유가족들이 유해를 인양하기 위해, 한국으로
건너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 때 잘 도와 달라는 것이 마지막 당부였다.
중국에 도착한 지 닷새가 되는 저녁 무렵이었다. 숙소로 잡힌 여관으로
청혜와 주현이 들어섰다. 그 동안에 은숙과 나는 같은 여관방에서 동숙을 하며 지냈지만
말이다. 둘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사형제의 관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둘 다
청결한 마음으로 상대방에 대한 예절을 깎듯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하동천의
체험 이후로는 나는 모든 여인들에게 경어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사제인
은숙에게도 깎듯이 경어를 쓰고 있었다. 돌변한 나의 언어 체계에 대하여, 은숙은
정색을 하며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물었었다. 내가 은하동천에서 생활하는 도중에,
생명체의 존엄성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나의 설명을 듣고서도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은숙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사형, 아무리 그렇다 치더라도 사형이 사제에게 경어를 쓴다는
것은 안 맞는 일이잖아요 ? 사형 사제 관계를 떠나서, 저를 한 사람의 여인으로 보기
때문이라구요 ? 어머나, 정말이세요 ? 그렇다면, 저는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말을
못 할 지경이군요. 어쩜 은하동천에서의 사형의 체험이 제겐 커다란 행운을
가져다 준 건지도 모르겠네요."
청혜와 주현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장미꽃 다발을 내밀었다. 은숙은 감탄을
하며, 기쁜 듯이 받아들고는 실내의 물병에 장미꽃을 꽂았다. 장미가 선홍과 노란
색의 색채로 흐드러지게 어우러지면서, 실내의 분위기를 금세 압도하고 있었다. 나는
청혜와 주현을 바라보며, 진정 반가운 마음으로 말했다.
"안녕하셨어요 ? 이 곳 숙소에까지 직접 찾아 주시다니 정말 고마워요.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 "
주현은 연녹색의 민소매 티에 흰 미니스커트 차림새로 교태를 부리며
대답했다.
"저희들은 그간 경과 보고를 하랴, 검술 전문가와 섭외를 하랴,
참으로 정신없이 바빴어요. 가까스로 중국 검술계의 최고의 달인인 무당검법의
전승자인 장소(張沼) 노인을 만났어요. 하지만, 그는 지금 노환으로 자신의 몸도
추스르지 못하는 상태였어요. 어, 실망하는 눈치네요. 하지만, 그렇게 실망하지 않으셔도
돼요. 왜냐하면, 장소 노인으로부터 20여 년간 무예를 전수받은 수제자를 만났거든요.
수제자의 이름은 진청(陳淸)이구요. 올해 나이는 마흔 둘이며, 어릴 적부터 무예를
수련해 온 전형적인 무술인이에요. 그는 중국 무술인 시연 대회에서도 각종 대상을
수상해 온 대단한 경력자이기도 해요. 어때 한 번 만나 보시지 않으시겠어요 ? "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소리였다. 내가 불원천리로 여기까지 달려온 이유가
뭔가 말이다. 나는 청혜와 주현에게 검술의 전문가들을 만나, 중국 무술의 진수를
맛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청혜와 주현은 다시 전화 연락을 주기로 하고 나의 숙소를
떠나갔다.
6월 중순의 오전 10시 무렵이었다. 햇살은 눈부시게 빛났고 중국의
천지는 어디를 바라보아도 녹색으로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광활하고 장대한
대지가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청혜와 주현의 안내로 계림(桂林)의
이강(?江)변에 있는 마반산(磨盤山)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광서장족 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의
북동 지역에 위치한 계림은 인구가 40여 만명에 이르는 지방 도시였다. 가을이 되면
도시의 거리마다 계수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계림이라는 지명을 얻었다고도
한다. 계림의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는 이강(?江)은 하류로 83 km 떨어진 양삭(陽朔)에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계림에서 양삭까지의 환상적인 8시간 짜리의 유람선 여행은 관광객들을
완전히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내가 탄 배는 일반 유람선이 아닌, 청혜와 주현이 대절한 배였기에 말이다.
잔뜩 자연의 경치를 조망하면서 여유롭게 흘러 내려갈 수 있었던 터였다. 이강의
양안(兩岸)에 펼쳐진 경치는 어느 한 부분도 놓칠 수 없는 빼어난 산수화였다. 대략
2 km의 평균 폭을 지닌 강은 티없이 맑았으며 수면에는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배는
계림을 벗어나면서부터 줄곧 남서 방향으로 흘러내려 가고 있었다. 계림을 벗어나면서부터였다.
줄곧 먼 발치로 석회암 층이 대규모로 드러나 형성된 산악들이 줄줄이 치솟아 있었다.
대개의 산봉우리들은 여인의 젖무덤을 닮아, 탄력적으로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었다.
강물의 수면 위론 때때로 물안개가 피어올랐으며, 물오리와 갈매기가 수시로 허허로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널따란 강의 양안에는 자욱한 물안개 사이로 때때로 고깃배가
그림처럼 떠 흔들리고 있었다.
멀리 강심(江心)을 거쳐 온 바람결이 수면을 스칠 때마다 수면이
은빛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통통거리며 흘러내리는 동력선의 엔진음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음절들이 연방 빛살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끝없이 널브러진 강줄기를 따라 간들간들
흔들리면서 흘러내리는 동력선은 문득 애잔함을 불러일으킬 지경이다. 두견의 본
고장이 여기였던가 ? 수시로 뻐꾸기의 구성진 울음 소리가 절절하게 강물에 닿아
파랗게 가라앉곤 했다. 수평선에 살짝 드리워진 강가에서, 등이 구부정한 노인이
가마우지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배 위에 남아 있는 두 마리의 가마우지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노인을 지켜보고 있다. 햇살은 고깃배가 출렁거릴 때마다 수면에서
은빛 물고기의 비늘처럼 파드득거리고 있었다. 연한 자주색의 구름 조각이, 산봉우리들이
이룬 제공선을 따라 이따금씩 흘러가곤 했다. 올려다보면 볼수록 현기증이 일 정도의,
연한 청색으로 끝없이 가라앉은 하늘이었다. 휘익휘익 소리를 내며 뱃전에 와 닿는
물결은 금세 하얗게 이를 드러내곤 사라진다.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려 선주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등이 구부정한 60대의 노인이었다. 지금 노인은 입에 담배를 문 채, 시선은
먼 수평선 끝자락을 더듬고 있었다. 노인의 등 뒤로는 눈부신 햇살만이 하염없이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노인은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걸까 ? 왠지 노인의
가는 어깨를 떠올리자 시울에 휘감기는 바람결처럼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나는 문득
은숙을 비롯한 여인들을 흘낏 바라보았다. 다들 수려한 경치에 듬뿍 빠져들어 시선은
초점을 잃은 채 수평선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뱃전을 뒤덮는 그 어떤 대화도 단절된
상태였다. 오로지 들리는 것이라곤 흐느끼는 듯이 반복되는 뻐꾸기의 울음소리와
발동선의 엔진음뿐. 정녕 배가 강 위를 달리는 건지 ? 아니면, 배는 그대로 선 채
물살만 밀리는 건지 ? 하여간 세상이 온통 물 속에 곤두박질쳐 아득하기만 할 뿐이었다.
정말 이러한 상태야말로 무아지경의 상태가 아닐 수 없다고 여겨졌다.
"종철씨 ! 계림의 산수가 비록 천하 제일의 풍광이라고는 하지만
말이에요. 어쩜 그렇게도 넋을 잃고 자연에 몰두하는지 정말 놀랬어요. 지금까지
1시간 반을 흘러내렸으니까 말이에요. 10여 분 후에는 물길의 방향이 정남으로 바뀌는
대우(大玗)를 지나게 될 거예요. 거기를 지나면서부터 오른쪽에 펼쳐지는 산악이
바로 마반산(磨盤山)이에요. 그렇게 하여, 다시 10여 분쯤 흘러간 뒤에야 우리의
목적지에 닿을 거예요."
고개를 돌려보니, 청혜가 연한 남색의 미니스커트를 바람에 나부끼며
나를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바람결이 때때로 강하게 와 닿아, 스커트 자락이 뒤집힐
지경이었어도 청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당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인의 실체를 보는
느낌이었기에, 나의 마음도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청혜를 향해 고맙다는
심정을 따스한 눈빛으로 실어 보냈다.
과연 10여 분이 지나자, 강의 건너편에 대우(大玗)라고 적힌 하얀
팻말이 눈에 드러났다. 청혜의 말대로라면 말이다. 이곳에서부터 물길의 방향이 남동에서
돌연 정남으로 바뀌게 될 터였다. 아닌게아니라, 대우를 지나면서부터 강물의 방향은
남동에서 정남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면서, 강의 서안을 따라 높다랗게 치솟은
마반산(磨盤山)의 봉우리들이 웅장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마반산이 나타나면서부터
여인들의 눈빛은 일제히 빛나기 시작했다. 점차 목적지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나는 다시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승선하기에 앞서 주현이 들려준 말을
떠올렸다. 오늘 내가 만나야만 할 사람은 장소와 진청을 비롯한 도합 여섯 명의 무술인들이었다.
여섯 명이 정한 장소가 바로 마반산의 제3봉인 팔선봉(八仙峰)에 가까운 마반평전(磨盤平田)이라는
곳이었다. 주현의 말에 따르면, 장소와 진청은 검술의 달인이라고 했다. 또한 오평(吳平)과
신청웅(申靑雄)은 중국 제일의 무술 연구가이며 북경대학의 체육과 교수라는 거였다.
송헌(宋軒)과 진현마(陳玄磨)는 각각 소림권과 진가식 쿵푸의 달인이라는 거였다.
상대방의 명성을 생각하자, 나는 나 자신의 위치를 떠올려 보았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조금도 꿀릴 게 없다고 여겨졌다. 나는 태권도 공인 5단의 당당한 유단자이다.
게다가, 유선문의 자랑스러운 제12대 전승자이다. 그뿐이랴 ? 기이한 인연으로 운중검법(雲中劍法)을
송두리째 터득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또한 천궁검법과 봉황검법의 진수도 꿰뚫고
있는 바가 아닌가 말이다. 나는 자신의 위치를 각성하며 서서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사형, 이제 목적지에 닿았어요. 추호도 동요하지 마시고, 최선을
다하세요. 곁에는 제가 있지 않아요 ? 절대로 기가 꺾여서는 안 돼요."
은숙이 나를 향해 침착하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상념의 세계에서 깨어나,
은숙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어 고마움을 표시했다.
선주(船主)는 이미 배를 돌려, 아득히 펼쳐진 수평선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가고 있었다. 주현과 청혜는 강가에 올라서서 은숙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가에는 무릎 높이의 들풀이 지천으로 깔려, 바람결에 이리저리 나부대고 있었다.
흘낏 시계를 바라보니, 오전 11시 무렵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휘감기는 햇살로
인하여, 강가의 풀숲은 은빛 물결로 휩쓸리곤 했다. 마치 수천 수만의 은빛 물고기의
비늘이기라도 하듯. 풀잎에 매달려 파드득거리는 햇살의 소용돌이가 연방 광막한
풀밭을 줄달음쳐 아스라이 흩어지곤 했다.
강가로부터 내륙으로 대략 1 km쯤 걸었으리라. 작은 언덕을 넘어서자마자,
도무지 끝이라곤 보이지 않는 광활한 평야 지대가 펼쳐졌다. 온통 수크령과 억새로
뒤덮인 광활한 평야 지대였다. 마침내 마반평전(磨盤平田)에 도착한 거였다. 산악의
지형 탓인지 가득 찬 들풀의 높이는 무릎 높이를 넘어서지 않고 있었다. 평야의 중앙에는
폐허가 된 사찰이 버려져 있었고, 사찰 주변에 인기척이 일고 있었다. 광활한 초원에
우뚝 선 사찰이라 ! 쉽게 감이 안 잡히는 느낌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주현을
바라보았다. 주현은 나의 속내를 알았다는 듯이 즉시 내게 말했다.
"저기 저 건물 보이죠 ? 바로 저 사원 주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중국 무술의 달인들이에요. 이제 한 번 만나 보시죠. 좋은 추억이 될 거예요."
잠시 후에 여인들과 나는 폐허가 된 사원 앞에 도착했다. 폐허가 된
사원의 마당 앞에서 마침내 중국 무술인들과 상견례를 하게 되었다. 상견례는 주현이
나서서 진행해 주었다. 나는 아무래도 직접 의사 소통을 하고 싶었다. 그게 훨씬
더 중국인들과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직접
중국어를 써서, 나의 경력과 함께 유선문을 설명했다. 예상했던 바대로, 그들은 내가
중국어를 써서 설명하자마자 놀랍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렇게 치떴다. 그들은 금세
친숙한 어조로 차례차례 중국의 무술을 계통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50세의 동갑내기
교수들인 오평(吳平)과 신청웅(申靑雄)은 야외 촬영 비디오 카메라까지 들고 있었다.
올해 45세의 송헌(宋軒)은 소림권 쿵푸의 최고의 달인이었다. 한편 46세의
진현마(陳玄磨)는 진가식 쿵푸의 최고의 실력자라고 자신을 밝혔다. 나도 나의 소개를
가능한 한, 자세하게 그들에게 해 주었다. 태권도 5단이라는 나의 소개를 듣고서도
그들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들처럼 최고의 달인이라느니 최상의 실력자라는 말을
쓰지 않은 터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 후에,
유선문과 유선문의 무술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별로 기대를 하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슬그머니, 가슴속으로부터 오기가
치솟아 올랐지만,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마지막으로 형씨(邢氏) 문중의 운중검법(雲中劍法)에
대해 설명할 때에서야 중국 무술인들은 일제히 관심을 드러내었다. 아무래도 무당검법과
유사한 검법이라는 데에 그들은 깊은 관심을 갖는 모양이었다. 중국 무술인들은 가방에서
뭔가를 잔뜩 꺼내기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점심 식사 도시락들이었다. 그들은 미리
여인들과 나의 도시락까지도 넉넉하게 준비를 해 온 거였다. 열 명의 인원이 폐허가
된 사원의 마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원의 마당에는 훈훈한
정서가 깃 들었다. 오래 전부터 유대를 다져 온 듯한 화목해 보이는 장면이기도 했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주현과 청혜가 가방을 열더니, 아이스박스 속으로부터
청량 음료수를 꺼내 주위로 돌렸다.
식사 후 반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오평과 신청웅은 나에게 다가오더니
운중검법을 시연해 줄 것을 정중하게 부탁했다. 아무래도 최대의 관심사는 무당검법(武當劍法)과
운중검법(雲中劍法)의 연관성을 규명해 보려는 데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검으로
사용할 만한 것을 찾으려고 할 때였다. 오평은 길다란 가방 속으로부터 진검(眞劍)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너무나 잘 닦여 검날이 예리하기 짝이 없는 장검이었다. 장검이
움직일 때마다 검날에 햇살이 부딪혀 섬광을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공터로 나간 뒤에, 지켜보는 사람들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그런 뒤에 잠시 눈을 감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머릿속으로 운중검법의
도식들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이윽고 나는 운중검법의 제1식인 낙화유수(落花流水)에
이어, 제2식인 비조통폭(飛鳥通瀑)의 검식들을 차례대로 펼쳐 나갔다. 제1식인 낙화유수를
펼치면서부터였다. 몸을 허공으로 치솟아 천천히 떨어져 내리면서, 흩날리는 꽃잎처럼
자유자재로 기력을 분배하였다. 비조통폭에 이르러서는 허공을 나는 새가 폭포수를
꿰뚫는 듯한 기백이 검에 잔뜩 집결되었다. 그러면서부터 검날을 통해 기력이 주변으로
서서히 분출되기 시작했다. 사원의 마당에 둘러선 사람들의 얼굴에 서서히 경악의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연이어 제3식인 발검팔분(拔劍八分)에 이르렀을 때였다. 놀랍게도
예리한 검날로부터 기력이 폭발적으로 분출되면서 허공을 8조각으로 갈랐다. 외마디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오평과 신청웅을 위시하여 주현과 청혜가 풀밭으로 나뒹굴었다.
관전을 하다가 강력하게 분출된 검기를 맞아, 일시적으로 혈맥이 마비된 거였다.
바로 이 때였다. 진청(陳淸)은 신속히 몸을 날려, 나뒹군 4명의 등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반면에, 여든 살의 장소(張沼)는 불편한 몸으로 나를 바라보며 급히 말했다.
"잠시만 멈추시오. 그대의 무술 실력이 이처럼 대단하리라고는
미처 몰랐었소. 그 정도만 해도 운중검법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소. 무당검법의 전승자로서 말하건대 말이오. 운중검법은 약간은 무당검법을
닮은 점도 없지 않소. 하지만, 검을 휘두르는 방식이나 검기를 분출하는 방식은 분명
중국의 검법과는 완전히 달랐소. 또한, 진정으로 놀라운 것은 운중검법의 오묘한
검식 때문이었소. '어쩌면 그렇게까지도 부드러움과 강함의 완벽한 조화를 갖출 수
있느냐 ?'하는 점 때문이오. 운중검법은 이제 그만 봐도 되겠소. 진심으로 바라건대,
유선문의 무예로 나의 제자와 몇 수만 겨루어 주었으면 고맙겠소. 부디 조선검의
진수를 볼 수 있도록 해 준다면 다시없는 영광이겠소."
나는 즉시 진검을 돌려주고는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 역시 운중검법의
위력이 그렇게까지 대단하리라고는 미처 예측하지 못한 터였다. 나는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소모된 기력을 서서히 복원시키고 있었다. 대략 십여 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마침내 진청(陳淸)과 나는 목검을 쥔 채, 서로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허리를 펴자마자 나는 무상검법(無上劍法)의 기수식인 독학번익(獨鶴蒜翼)에 약육소운(躍陸掃雲)을
펼치기 시작했다. 한 마리의 두루미가 날개를 펄럭거리며 비상을 시도하듯이 목검은
허공을 갈랐다. 비록 동작은 완만한 듯했지만 말이다. 어느 방향으로도 추호의 빈틈조차
보이지 않는 매섭고도 깔끔한 동작이었다. 연이어, 땅을 치솟아 몸을 수평으로 떨어져
내리면서 노도처럼 검기를 분출시킬 때였다. 온화하기 이를 데 없이 부드러운 기력이
검막(劍幕)을 향해 슬그머니 밀려들었다. 진청도 이미 목검을 허공에 휘두르며, 무당검법의
도식을 전개하기 시작한 거였다. 진청의 목검에 실린 기력의 세기는 그의 수련의
정도도 만만치 않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만찮은 상대를 만났다는
느낌에 서서히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제3식인 팔방풍우(八方風雨)에 이르러서는 목검이 사면팔방을
향해 미친 듯이 검기를 분출하고 있었다. 나 자신도 도무지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검을 잡은 건지 내가 목검에 휘감긴 건지를 가늠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제4식인
광풍노도(狂風怒濤)에 이르렀을 때였다. 나의 몸은 금세 사방으로 터져 나갈 듯한
느낌으로 휩싸여 전율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돌연 진청의 몸은 대숲에
휘몰아치는 광풍처럼 걷잡을 수 없이 마구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였다.
돌연 진청은 접전의 검막(劍幕) 주변으로 급속도로 떨어져 내리면서 기합을 내질렀다.
진청의 목검의 검날이 움직인다고 느껴진 순간이었다. 수천 수만 송이의 목련꽃이
한꺼번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듯. 그렇게 파공음(破空音)을 일으키며, 목검의 검날이
허공을 현란하게 갈랐다. 목검의 검날끼리 순식간에 십여 차례나 허공에서 부딪히면서
섬광을 쏟아 내었다. 검날끼리 맞부딪칠 때였다. 강력한 기력이 손바닥으로 흘러들
때마다, 하마터면 나는 목검을 몇 차례나 놓칠 뻔했었다.
무상검법의 제5식인 폭양만소(曝陽萬燒)의 검식을 막 펼치는
순간이었다. 예리한 파공음(破空音)을 내며 지면의 돌과 모래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순식간에 하늘을 휘감았다. 관전자들은 마구 비명을 질러대며, 이리저리로 몸을 피하느라고
경황이 없었다. 한편 진청은 일순 당황한 표정이었으나,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목검을
빛살처럼 휘둘러대었다. 그가 취한 정확한 자세의 본질이야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오랜 세월 동안을 단련한 무술 동작의 정화(精華)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쏟아져
나오는 수만 갈래의 빛살마다 강력한 기력이 실려 급소를 공격해 오고 있었다. 공중
3회전 동작에서 몸을 수평으로 풀어 내리는 폭양만소의 마무리 동작 부분에서였다.
나의 목검의 검날은 진청의 목과 몸통 중앙과 견정혈을 향해 파죽지세로 공격해 들어갔다.
진청과 나의 목검이 공중에서 또 다시 서너 차례나 격렬하게 부딪히며 섬광을 내뿜었다.
바로 이 때였다.
"잠깐만 멈추시오. 우욱 !! "
말 소리와 함께 날렵한 사람의 그림자가 검막을 헤치고 뛰어들었다.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는 찰나, 나도 몰래 순간적으로 목검의 검날에서 기력이 노도처럼
분출되었다. 순간적으로 사방의 시야가 잠시 차단되는 듯하더니, 나의 아랫배에 심한
통증이 느껴져 왔다. 눈 앞에 섬광이 연거푸 번쩍거리는 사이로 두 명의 그림자가
땅바닥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통증을 추스르며, 목검을 거둔 채 장내를 둘러보았다.
진청은 연방 입으로부터 피를 쏟아내고 있었으며, 장소는 실신하여 나뒹굴고 있었다.
'아니, 이럴 수가 ? '
나는 목검을 풀밭에 내려놓고는 곧바로 장소와 진청에게로 달려갔다.
즉시 장소의 혁대를 느슨하게 풀어 젖히면서, 상의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두 손에 기력을 실어, 대동맥 주변에 지압을 가했다. 두어 번 지압을 가하자, 장소는
금세 의식을 회복했다. 고개를 돌려 진청을 바라보니, 이미 쿵푸의 두 달인이 진청에게
장압(掌壓)을 가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진청의 입에서는 더 이상의 선혈은 흐르지
않았다. 진청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장소가
실신을 한 것은 말이다. 진청이 위기에 처하자, 몸을 던져 검막을 해소시키려 한
탓이었다. 나의 하복부에도 꽤나 큰 통증이 실려 왔다. 장소와 진청이 검기에 맞아
나뒹굴기 직전에 발악적으로 내지른 발길질 때문이었다. 나도 조용히 가부좌로 앉아
기력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이 때였다. 은숙이 내게 살며시 다가오더니, 나의 등에
손바닥을 갖다대고는 기력을 실어 보내기 시작했다. 즉시 이를 데 없는 상쾌한 기운이
밀려들며, 전신이 개운해지기 시작했다. 이 때, 두 중국인 교수가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참으로 검법의 진수를 보여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조선검(朝鮮劍)의
위력이 그 정도이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말 대단했어요."
이 때였다. 송헌과 진현마가 나를 향해 말했다.
"검법 동작들 중에서도 몸을 치솟고 눕히는 일체의 동작을 봤는데
말이죠. 검을 쥔 것을 빼면, 권법으로서도 가히 완벽한 무술이었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했다가, 우리들과 권법 대결을 해 주실 용의는 혹시 없으세요 ? "
무술의 대결이라면, 절대로 마다하지 않는 나였다. 기꺼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일단은 반 시간 가량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휴식이 끝난 뒤였다. 먼저, 소림(少林) 쿵푸의 달인인 송헌과 겨루기로 했다.
마침내 송헌과 나는 풀밭 위에 서서, 세 걸음쯤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이 때엔 둘 다 정식 도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었다. 막 공격을 개시하기 직전이었다.
문득 진현마가 앞으로 나서면서, 하나의 의견을 제시했다.
"잠깐만요. 이 번 기회에 태권도의 위력도 보고 싶거든요. 송헌씨와
겨룰 때엔 태권도를 쓰시구요. 저를 상대할 때엔 유선문의 무술로 겨루면 어떨까요
? "
나는 즉시 송헌의 눈치를 살폈다. 송헌도 좋다는 듯한 눈치였다. 나는
즉시 흔쾌하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제게 중국 무술에 대한 시야를 넓힐 기회를 주신 데
대해 감사 드립니다. 최선을 다해서 두 분의 절학을 지도받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송헌과 나는 겨루기의 자세를 취하며, 풀밭 위에 마주
섰다. 나는 코로 맑은 공기를 크게 들이키고는 송헌의 눈빛을 주시했다. 송헌의 눈빛은
너무나 그윽하여, 과연 싸울 의사가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문득 나의 느낌으로
그의 심성 수련의 정도가 보통이 아닐 거라고 여겨졌다. 일단 나는 발차기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우측 후굴 자세를 취하였다. 왼 주먹은 말아서, 인중을 보호하고,
오른 주먹으로는 명치를 보호하며 자세를 굳혔다. 그러다가, 신속히 몸을 측면으로
밀면서 오른발과 왼발을 미끄러질 듯이 교차시키면서 송헌에게 접근했다. 송헌의
눈빛은 그믐날 밤의 적막처럼 그렇게 아무런 동요도 없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다소
섬뜩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대로 앞으로 달려들면서, 이 연속 뒤돌려
차기와 이단 옆차기를 날렸다. 송헌은 그제서야 '흥 !'하고 코웃음을 날리면서, 제
자리에서 훌쩍 뛰어 몸을 뒤집었다. 그러면서,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 무릎을 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몸을 풍차 돌리듯이 하며 양발 옆차기에 이어, 공중 3연속 돌려차기로
공격해 왔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자, 나의 마음속으로부터 호적수를 만났다는 기쁨이
순간적으로 전신을 엄습했다. 나 자신도 몰래 두 차례나 커다란 기합 소리를 내지르며,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공인 5단을 받기까지 심혈을 기울여 수련했던 십여 종의
절기들을 유감없이 펼쳤다. 540도 몸통 비틀어 내려 찍기를 비롯해서 말이다. 십여
가지의 고난도급의 발 동작으로 쉴 새 없이 송헌을 공격했다. 그렇게 하여 3분 가량을
공격했지만 말이다. 송헌은 얼굴에 미소까지 띤 채, 지극히 여유스럽게 나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미소 띤 송헌의 얼굴을 보자, 슬그머니 반발심이 피어올랐다. 아무래도
태권을 얕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뭔가를 보여 주지 않으면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필살기 중의 하나인 벽력직격(霹靂直擊)을 쓰기로 했다. 공중에 치솟아 몸을 부딪쳐
가다가, 갑자기 머리를 숙이며 몸통을 선회하는 속공법이었다. 그리하여, 몸을 급선회하여
양발 뒤돌려 차기로 상대의 목과 관자놀이를 급습하는 동작이었다. 벽력직격을 쓰자마자,
송헌은 입안 가득 선혈을 토하면서 땅바닥으로 쓰러져 나뒹굴었다. 그제서야 진현마는
황급히 송헌에게로 다가가 손바닥으로 송헌의 가슴 자락을 쓸어 내리기 시작했다.
잠시 주변의 분위기는 꽤나 숙연한 느낌에 휩싸였다. 나도 그냥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송헌의 견정혈에 기력을 실어 서서히 어깨 부근의 혈맥을 소통시켜
나갔다. 그렇게 하여 대략 십여 분의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송헌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몸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나를 향해
공수의 예를 올리며 말했다.
"정말 태권도의 위력이 그 정도일 줄은 전혀 몰랐어요. 지금까지는
누가 뭐래도 동양에서는 쿵푸가 최고의 무술이라고 자부해 왔거든요. 오늘에야 상승무학은
형체를 숨긴 채, 도처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실감했어요. 오늘 참으로 지도를
잘 받았습니다."
"아뇨. 제가 중국에 와서 감히 결례를 한 건 아닌지 심히 두렵습니다.
모름지기 무덕(武德)이란 무술로써 친구를 사귀는 데에 있지 않겠어요 ? 저의 실력이
엄청나게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저의 체면을 살려 주느라고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중국 무학(武學)의 심오한 깊이에 거듭 경의를 표합니다. 오늘 이렇게 중국
무술과 교류할 수 있게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일시에 중국 무술인들은 머쓱한 모습으로 땅바닥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헌데, 그것도 잠시였다. 달관한 듯한 모습으로,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밀었다.
순식간에 송헌과 진청을 비롯한 무술인들과 일제히 악수를 하며, 화기롭게 대화를
나누었다. 진현마는 진가식 쿵푸와 유선문의 무학인 잠룡승천(潛龍昇天)과 겨루고
싶지만 말이다. 너무나 자기네 중국인들이 나를 성가시게 만든 느낌이라면서 대결을
취소하겠다고 정중히 말했다. 나는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띠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6명의 무술인들은 평원을 가로질러 먼저 떠나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중국의 정통 검법인 무당검법과 유선문의 무학의 대결은 종지부를 찍은 터였다.
청혜와 주현은 은숙과 내가 중국에 머물 동안만큼은 명승지를 안내해
주고 싶다고 했다. 분명 명승지에 정통한 사람과 여행을 한다는 것은 커다란 복일
터였다. 은숙과 나는 그녀들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윽고 일행은 다시 이강의 강변에 섰다. 청혜는 잠시 강물의 상류를
바라보다 말고 크게 팔을 상하로 세 번을 휘저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상류를 바라보니,
10인 승 정도의 작은 동력선이 흘러오고 있었다. 동력선에는 세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즉시 뱃머리를 이쪽으로 돌려 다가오기 시작했다. 금세 배는 강가에 닿았고, 청혜가
선주에게 흥정하기 시작했다. 이강 하구의 양삭(陽朔)까지 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대답하면서 일행을 타라고 했다. 계림에서 양삭까지는 건조기를 제외하고는
배가 운행되는데, 소요 시간이 8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허풍과 과장이 심한 중국인들이
아니었던가 ? 걸핏하면 '천하 제일'을 갖다 붙이는 습성을 지닌 족속들이 바로 중국인들이다.
천하 제일의 풍광이라고 떠드는 이강 연안의 경치가 어느 정도인가를 직접 봐야만
했다. 그래야, 다른 더 뛰어난 경치가 있으면 단번에 면박을 줄 수도 있을 터였다.
배는 마반산을 지나, 반 시간쯤 지난 후에는 명촌(明村)에 이어 초평우(草坪玗)를
지나고 있었다. 강의 우측으로는 망부선석(望夫仙石)이라는, 눈이 번쩍 띌 정도의
자주빛이 감도는 명승(名勝)이 나타났다. 강물에 반짝거리는 수만 갈래의 빛살들이
허공을 날아, 돌출한 절벽의 끝에서 떨고 있었다. 연한 자줏빛과 보랏빛의 색채로
드리워진 높다란 층암절벽은 단연 세속을 초월한 은둔자들의 자태였다. 기이한 봉우리에서는
안개비라도 내리는 건지 연방 바위의 색깔이 변해 가고 있었다. 층암절벽의 맨 상층부에서였다.
미려(美麗)한 자태로 강을 내려다보며 살짝 허리를 굽힌 여인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마치 살아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비록 먼 발치였지만 말이다.
바위가 주는 느낌이 그렇게 절실해 보일 수가 없었다. 전란을 마치고 귀향하는 지아비를
기다리는 여인의 애절함이 바위 곳곳에 서려 있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안개비로 인하여
시시각각으로 색채마저 변하고 있으니, 사무치는 정한이 가슴으로 밀려들 지경이었다.
바위의 내력을 설명하는 청혜나 설명을 듣는 일행의 눈엔 어느새 물기가 촉촉이 배어들었다.
"방금 초평우를 지났거든요. 잠시 다들 일어나서 강의 좌측을 봐
주세요. 사람의 갓처럼 생긴 바위들이 일대 군락을 이루어, 높다란 평원을 이룬 곳이
보이죠 ? 네, 맞아요. 바로 저기 저 부분이에요. 저기에 숱하게 내리 깔린 바위를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들을 떠올렸죠 ? 모르긴 몰라도 열이면 열 모두 생각이 다를
거예요. 저 장엄한 바위의 군락들이 바로 관암유경(冠岩幽境)이에요. 이 바위의 내력을
두고도 설이 분분한데요. 가장 유력한 것은 지금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이에요."
이 번에는 주현이 일행을 바라보며, 관암유경의 내력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하늘과 강이 맞닿아, 어디까지가 강이며 바다인지를 알 수가 없을 정도의
그윽한 풍광이었다. 때때로 물새가 나타나 연약한 날개로 허공을 가르다가는 아득한
안개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파르스름하게 가물거리는 수평선과 원근으로 나타나는
유방형의 산봉우리들이 세속의 풍진을 씻어 주는 듯했다. 굽이치는 물빛을 바라볼라치면
마음마저도 파랗게 젖어드는 기분이었다. 과거에 급제하고는 견문을 넓히려 강남
풍월을 즐기려 이강을 찾은 선비들이 허다했을 터였다. 이강의 절경에 취해, 갓을
던져 초야에 은둔해 버린 선비 역시 부지기수였을 터였다. 이 정도의 빼어난 경치라면,
나 역시도 이 곳에 은둔하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어느새 살짝 물안개가 드리워진
선경(仙境)인, 이강의 경치에 듬뿍 취해 버렸다. 굽이치는 물빛, 하늘을 가르는 물새의
활개 소리에도 시종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어느새 배는 마반산으로부터 5시간 반을 흘러, 용매평(榕梅坪)을 지나고
있었다. 이제 양삭(陽朔)이 30분 거리의 지척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일단 양삭에만
닿으면, 양삭에서 90분의 소요 시간으로 계림으로 되돌아가는 버스가 있다고 했다.
용매평을 지나자 강의 우측으로는 기이한 봉우리들로 이루어진 첩첩산중의 장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서산의 낙조가 핏빛처럼 타오르는 석양 무렵이었다. 강의 양안에는
부드러운 대숲이 바람결에 녹색의 깃털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바람이 수면을 스칠
적마다, 수면은 금빛 은빛의 물고기 떼처럼 파드득거리며 깨어나고 있었다. 멀리서
태양을 등지고 가뭇가뭇이 흐르는 발동선의 할딱거리는 소리가 꿈결처럼 귓전에 부서진다.
뱃전에 와 닿는 빛살에 휩쓸리면서, 연방 극락조가 수면을 스치고 대숲 속으로 사라진다.
배가 굽이치는 골짜기를 돌 때마다 잊은 듯이 꿈결처럼 나타나곤 하는 기암괴석의
산봉우리들. 양삭에만 닿으면 선남선녀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없다고 말하는 주현과
청혜였다.
점차 다가오는 이별을 생각했음일까 ? 언제부터였는지 그녀들의 눈에는
뽀얀 이슬이 맺혀, 석양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시울에 휘감긴 바람결처럼 자꾸만
시린 아픔이 내 가슴을 적셔 왔다. 이제 양삭에 닿으면, 주현과 청혜는 계림을 거쳐
북경으로 되돌아갈 터였다. 반면에, 은숙과 나는 광주와 상해를 거쳐 귀국할 예정이었다.
다가오는 이별을 슬퍼함일까 ? 저녁 안개를 헤치며, 발동선의 엔진음이 자꾸만 서슬
퍼런 빛살처럼 귓전에 부서지고 있었다.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었지만 말이다.
휘감기는 강바람에 젖어, 마냥 흐느끼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 오르는 설움으로, 강바람에
휘감긴 채, 나의 목은 어느새 파랗게 젖어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