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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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12회

달그림자 손 정 모

12. 보금자리

  6월 중순의 저녁 7시 무렵이었다. 아직도 석양은 마지막 남은 숨결로 처연하게 잔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제 태양은 수평선 위에 한 뼘쯤의 거리를 두고 장엄하게 햇살을 내뿜고 있었다. 자주색 저녁놀에 휘감겨 석양은 온통 노랗게 녹아 내리고 있었다. 천하 제일의 풍광을 자랑하는 양삭(陽朔)이었다. 양삭을 가로질러 바다처럼 광막하게 드리워진 이강에 선홍빛의 낙조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서쪽 강 언덕에 우뚝 치솟은 빈강공원(濱江公園)의 영강각(迎江閣)이 낙조에 휩싸여 신궁(神宮)처럼 가물거리고 있었다. 남쪽에 길다랗게 드리워진 양삭대교(陽朔大橋) 아래로 물안개를 뚫고, 고깃배 몇 척이 들어서고 있었다.
  마침내 배는 양삭의 선착장에 닿았다. 청혜와 주현은 은숙과 나를 안내하는 듯한 자세로 벽련봉(碧蓮峰) 위의 영강각으로 올라섰다. 영강각에 올라 바라보는 이강의 풍경은 확실히 빼어난 절경이었다. 하늘과 강이 수면을 경계로 맞붙어, 온통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가까운 데까지 온통 수면은 황금빛 물고기 떼처럼 파드득거리고 있었다. 낙조로 타오르는 수면을 바라보는 자체가 강렬한 감동이었으니, 잔뜩 가슴만 달떠 오를 뿐이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어떠한 근심이나 고뇌도 심신을 괴롭히지는 못할 터였다.
  온 세상이 반짝거리는 물 무늬에 취해, 그저 황홀함에 젖어 있을 때였다. 주현과 청혜는 영강각을 내려서면서, 물기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형 ! 우리는 영원히 은하동천(銀河洞天)에서의 추억을 잊지 못할 거예요. 가시거든 진경 언니께도 안부 전해 주세요. 함께 한 모든 순간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라고 말이에요. 부디 건강하시구요. 은숙씨와 행복한 나날이 되시기를 빌게요. 안녕 ! "
  은숙과 나는 계림행(桂林行) 저녁 버스에 올라타는 청혜와 주현에게 마지막 작별의 손을 흔들었다. 그녀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마냥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이 없는 이별이었기에 말이다. 서서히 가슴속으로부터 형체를 알 수 없는 설움이 끓어오르면서,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중국 여인들을 떠나 보낸 다음 날이었다. 새벽부터 국내선 항공편으로 광주를 떠나 상해를 거쳐, 산동(山東)의 청도(靑島) 공항에 닿았지만 말이다. 이미 점심나절인 오후 2시 무렵이 되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주 4회 노선인 대한항공편을 예약하기로 했다. 당일은 비행기가 없었기에, 다음 날 오전 11시발 서울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간단히 시내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뒤였다. 은숙과 나는 택시를 이용하여, 청도시(靑島市)의 동쪽 90 km 해안에 있는 몽산으로 향했다. 몽산은 황해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의 중남부 지방을 마주 바라보는 위치였다. '몽'은 '메 산'(山) 변에 '어릴 몽'(蒙)자를 붙인 한자였다. 아무리 향상된 신종 컴퓨터로도 나타낼 수 없는 한자였다.
대략 한 시간 반이 지나자, 몽산에 닿았다. 입장료를 치르고, 몽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다물 수가 없는 장관이었다. 몽산은 황해 바다를 향해 절벽을 이루며 하늘 높이 치솟은 해발 1,130 m의 산악이었다. 몽산은 산동성 내의 도교(道敎)의 본산지라 할 만한 곳이었다. 송(宋), 원(元), 명(明), 청(淸)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도교 사원들이 중흥을 거듭하던 곳이었다. 산의 중턱에 우뚝 자리잡은 태청궁(太淸宮)에 이르렀을 때였다. 은숙과 나는 태청궁의 장관에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사원 아래로는 일망무제로 탁 트여 파랗게 굽이치는 황해(黃海). 쉴 새 없이 절벽을 향해 달려와서는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그 파도의 굽이마다 하얀 포말이 연신 깃털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그뿐이랴 ? 태청궁의 좌우로는 여인의 속살처럼 허여멀쑥한 태깔의 기암괴석들이 길길이 치솟아 굽이치고 있었다. 잎새가 보통의 솔보다는 두껍고 길다란 해송(海松)의 솔잎들이 산 전체를 어우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도관(道館)을 향하여 불어드는 맑은 솔바람 소리. 가만히 도관을 지키고만 있어도 저절로 도사가 될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담황색의 옷에 태극 무늬가 띄엄띄엄 박힌 옷이 도사들의 복색(服色)이었다. 도복 차림의 도사들이 도포자락을 펄럭거리며 간간이 사원을 넘나들 뿐. 주위는 죽음과도 같은 정적(靜寂)에 휩싸여 있을 따름이었다. 태청궁의 본전(本殿) 입구에는 돌 향로가 세워져 있었고, 내방객들은 거기에다가 향불을 피우고 있었다. 은숙과 나는 몇 개의 향을 꺼내 사르고는 향로 속의 모래에 꽂았다. 금세 향 연기가 피어오르며 심산의 웅장한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태청궁은 역대의 도사들이 빠짐 없이 순례를 해 온 성역이라고 했다. 건너다 보이는 산봉우리 곳곳마다 도관의 기왓장에서 반짝이는 햇살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온 김에 몽산 곳곳의 유서 깊은 도관의 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했다. 은숙도 잔뜩 호기심을 드러내며 나와 함께 기암괴석으로 치솟은 몽산의 사원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은숙은 한적한 숲 속의 도관을 둘러보고 지나는 길에 나를 향해 말했다. 내가 은하동천에 있을 때였다고 한다. 아무리 연락을 취해 봐도 연락이 두절된 터였기에 말이다. 그녀는 필시 나에게 중대한 일이 벌어진 거라고 단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이 세상 끝까지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찾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끝내 경찰서에 실종 신고까지 했건만 나를 찾을 길이 막막하기만 했었다. 도저히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기에 말이다. 변산으로 달려가 안개노인과 월선녀에게도 나의 실종 소식을 전했다는 거였다. 나의 실종 소식을 듣는 순간, 안개노인의 안색은 이를 데 없이 침통해 보였다. 안개노인은 침통한 안색으로, 은숙에게 나의 실종이 어쩌면 죽음과 직결될지도 모른다면서 애통해 했었다. 안개노인의 견해로는 말이다. 대부분의 무인(武人)들의 말로는 길바닥 인생이라는 거였다. 즉, 아무런 길거리에서나 복수를 당해 시신으로 나뒹굴 수도 있다는 거였다. 무술을 자주 사용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남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다는 거였다. 만약에 치명상을 입은 상대가 영원히 복수심에 불타 있다면 말이다. 그 무인은 언젠가는 복수를 당해 죽어 나뒹굴 수도 있다는 거였다. 예컨대, 우발적인 공격으로 상대방의 이나 눈에 회생 불가능한 상처를 입혔다면 말이다. 피해자는 절대로 한을 삭일 수 없을 거라는 말이었다. 무력을 쓸 때의 손과 발에는 눈이 없기에, 무인은 항상 조심해야만 한다는 거였다. 은숙도 안개노인의 설명을 듣고는 부쩍 불안한 느낌이 들어 안절부절못했다. 실망에 잠겨 있는 노부부를 떠나, 은숙은 울음을 삼키며 이천으로 돌아갔었다. 혹시나 위안을 얻을까 싶어 찾아 나섰다가 극도의 실망감만 안고 돌아온 거였다.

  은숙은 지난날의 얘기를 하다가 나를 향해 정색을 하며 물었다.
  "사형 ! 나는 이전부터 사형께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죠 ? 아직도 대답을 보류하시겠어요, 아님 뚝 부러지게 대답해 주실래요 ? "
  그녀가 내게 질문을 던진 곳은 기암괴석이 도처에 널브러진 숲 속이었다. 수령을 알 수 없는 해묵은 노송들로 굽이치는 산길이었다. 산을 오르는 관람객은 적지 않았지만 말이다. 해묵은 도교의 사원을 일일이 구경한답시고 찾아다니는 관람객은 거의 없었다. 산길 중에서도 등산객들이 오르내리기 어려운 남쪽 절벽 길 상부에서였다. 그 길은 험난한 오솔길이었고 인적이 너무나도 뜸한 산길이었다.
  산길은 솔숲에 휘감겨 자칫하면 길이라는 흔적조차 못 남길 지경이었다. 은숙과 나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산길에서 조금 벗어난 비등산로(非登山路)를 찾아들었다. 그녀와 나는 인적이라고는 없는, 온통 다복솔로 뒤덮인 화강암질의 반석 위로 올라갔다. 반석 위로 막 올라섰을 때였다. 여인(그래, 나는 다시 은숙을 여인이라고 부르고 싶었다)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이었다. 왠지 여인의 미소는 사람의 것이 아닌 하늘의 절묘한 예술품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감격해 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나를 생각하며 보냈으면 저러한 미소가 나올까 싶었기 때문이다.

  여인은 반석에 오르자마자 손가방을 열더니만, 계림의 산수도가 그려진 커다란 보자기를 펼쳤다. 흰색의 보자기는 두 사람이 충분히 다리를 뻗을 만큼의 크기였다. 아마도 계림의 상가에서 산 모양이었다. 여인은 잠시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혹시 자리가 좁다면 보자기가 한 개 더 있다고 속삭였다.
  나는 선뜻 여인의 제의에 따라 보자기 한 개를 더 펼쳤다. 반석 위에 펼친 터라, 커다란 방석과 다름없었다. 여인은 먼저 신발을 벗더니만, 나의 신발마저 벗겨 주었다. 그리고는 편안한 자세로 나를 바라보며 과거사를 풀어놓았다.
  "전요. 이천으로 돌아간 뒤에도 전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어요. 일이 다 뭐예요 ? 모든 세상사가 다 부질없어 보이면서 나 자신도 그대로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더라니까요. 그 때였죠. 저는 또 다른 것을 경험했죠. 참으로 묘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말이에요. 만약 제가 사라져 버린다면, 이것은 어쩜 사형이 바라는 바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록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지만 말이에요. 혹시라도 사형이 제가 사라져 주기를 바라면서, 의도적으로 속세를 등진 것은 아닌가 싶었어요. 혹시 화나지 않으세요 ? 제겐 은하동천이라는 세상이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거든요."
  나는 여인의 이야기를 밝고 편안한 자세로 경청했다. 내가 만약에 구룡동굴에서 물귀신이 되었다면 듣고 싶어도 못 들을 얘기가 아닌가 말이다. 여인은 때때로 이야기 도중에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했고,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긴 세월 동안 억눌러 참았던 말이었기에 그만큼 더 절실했고, 감동 또한 깊었다. 여인은 작년 9월의, 경남 고성의 상족암(床足岩) 수련 시절을 떠올리며 말했다.
  불량배로부터 구조되던 순간에, 여인은 나에게 혼백을 빼앗길 정도로 반해 버렸다는 거였다. 훤칠한 골격에 뛰어난 무술을 갖춘 과학자라니 ! 여인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이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인은 그녀의 자존심에도 무척 민감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녀가 왜 그렇게 낯선 청년에게로 마음이 기울어지는지를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여인은 서서히 나의 행동이며 습성을 살피기 시작했었다. 혹시 숨겨 둔 애인이라도 있는지 염려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여인은 유선도의 입문식이 있던 날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 날 여인은 노인과 나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일에 기가 질렸었다. 하지만, 내가 태연히 옷을 벗기 시작하자 여인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인은 그 날 온종일 얼굴이 붉어 올라, 숨조차 제대로 못 쉴 정도였다. 밤이 되어 동굴 속에서 잠자리에 들 무렵까지도 얼굴이 상기된 채였었다. 그 뒤로부터 무술 수련이 끝나면 강물 속에서 나란히 혼욕을 하고는 맞절을 했었다. 여인은 여전히 수줍음과 부끄러움을 달랠 길 없었지만 말이다. 여인의 눈에 비친 나는 그게 아니었던 거였다. 전신이 자신감으로 차 올라 당당하게 알몸을 드러내곤 하는 나의 모습이 경이롭게 보였다.

  한낮의 산 정상은 이를 데 없이 시원스러웠다. 천년 세월을 휩쓸고 온 듯한 솔바람이 '쏴아쏴아' 소리를 내며 솔숲을 빗질하고 있었다. 햇살이 스쳐 가는 솔숲의 길목마다 은물결이 일렁이는 듯 솔잎이 길길이 치솟고 있었다. 깊은 산중의 적막을 달래는 듯, 호랑지바퀴의 울음소리가 '휘이이 휘이이'하고 들렸다. 나는 여인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사제, 중국에 와서 지금까지 같은 방에서 지내 왔잖아요 ? 그 때는 이런저런 말이 없다가 여기에 와서 과거의 정감을 털어놓는 이유가 무엇이에요 ? 대답이 곤란하지 않다면, 지금 듣고 싶은데요."
  여인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 뒤에,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나를 향해 말했다. 중국에 온 이후로, 지금까지 같은 숙소 같은 침대를 썼지만 말이다. 여인에게는 내가 손길은커녕 살갗의 접촉마저도 전혀 의도적으로 자제하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리하여, 반발심으로 일부러 나의 몸에 다리라도 올려 놓을까도 생각했지만 말이다. 그녀의 자존심이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인 역시 조금이라도 살갗을 접촉하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했었다. 이것이 외관상으로는 서로에 대한 예절이 바른 것이려니 하고 받아들여진 거였다.
  그런데, 삶이란 결코 이런 게 아니다 싶었다. 여인은 이제나 저제나하고 기회를 별렀지만 말이다. 지금까지는 기회가 쉽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풍전행의 문제도 있었고, 중국인들과의 검술 대결이란 과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림을 떠나면서부터 모든 매듭이 술술 풀려 가는 느낌이었다. 또한 광주에서 상해를 거쳐 청도에 내릴 때까지 점차 나의 표정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다음 날 오전 비행기를 예약해 놓은 뒤엔 말이다. 청도의 태평로(太平路)에 있는 잔교빈관(棧橋賓館)에 숙소를 잡는 나를 보고 여인은 놀랐었다. 여인은 검소한 곳을 찾던 내가 상류 호텔에 숙소를 잡을 줄은 정말 몰랐었다. 점차 여인에게는 뭔가 길조 같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었다. 게다가 몽산 등정을 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여인은 기대감으로 부풀어올랐다. 점차 기대감에 걸맞게, 여인에게 몽산과 도관의 정취가 그림처럼 아늑하게 전해져 왔다. 그리하여, 여인과 내가 반석에 오르면서부터였다. 마침내 여인은 억눌러 왔던 과거사를 풀어놓기로 작정했었다.

나는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여인의 속이 그렇게도 깊었던가 싶어 놀라웠다. 내심으로 나는 그 동안 한의 근원이 되어 왔던 두 여인들을 떠올렸다. 다름 아닌 선옥과 지연이었다. 선옥은 간경화로 인하여, 만리 타국에까지 수술을 받았건만 생명을 잃었다. 지연은 석모도에서의 잠수 사고로 싸늘한 시신이 되었다. 생각할수록 나는 죄가 많은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남들은 연인을 사귀어, 쉽게 결혼도 하고 잘만 산다는데 말이다. 왜 나만 자꾸 애환이 생기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선옥과 지연의 문제는 별도로 하고서도 말이다. 지난 반 년 세월 동안을 은하동천에서 머물면서 나는 줄곧 많은 생각을 했었다. 국적이 다른 여인들도 있었고, 이혼 경력의 여인도 있었다. 세 여인들과의 생활에서 알몸 상태로 보름 동안을 함께 생활하기도 했었다. 은하동천이 생의 마지막 장소인 줄로만 알고, 비통해 하면서도 순응을 했던 때가 있었다. 그 때 나는 내가 연락할 만한 단 한 사람을 떠올렸었다. 그 사람이야말로 바로 여인이었던 거였다. 은하동천을 벗어나기 전에 나는 마음속으로 뭐라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맹세를 했던가 ? 그건 바로 내가 은하동천을 벗어날 때엔 여인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리라는 거였다.

  여인은 불어오는 솔바람 소리에 취하는 듯, 시종 평온한 표정이었다. 호랑지바퀴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눈빛은 명상에 잠기는 듯 아늑하기만 했다. 여인은 푸른 빛이 감도는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형언할 수 없는 설움과 고뇌로 뒤엉킨 얼굴이었다. 이윽고 여인은 다소 애조를 띤 목소리로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상족암에서의 3개월간의 수련 기간 동안, 여인은 많은 생각을 했었다. 하필이면 자신이 여인으로서 무술 수련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하고 생각해 보았다. 무술 수련을 한 뒤엔 무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골똘히 생각했다. 그녀 자신이 유선문에 입문한 것도 어찌 보면 낯선 청년인 나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자, 미래가 불확실해 보이면서 까닭 모를 근심이 싹터 올랐다. 그녀 자신이 접근한다고 해서, 나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는 보장이 있었던가 ?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 가득히 번민(煩悶)이 밀려들었다. 여인은 타는 가슴을 달래려고 무술 수련에 진력했다. 그래도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공허감에 휩싸일 때가 적지 않았다. 가슴에 쌓이는 번민이 극심해질수록 여인은 더 밝은 표정을 지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랬어도 말이다. 사무칠 정도로 외로움이 심했던 날들이 두 번인가 있었다. 그 날에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삼키면서 새벽부터 일어나 하늘에 빌었었다. 제발 오늘 내가 청년에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날이 되기를 말이다.
  그리하여, 월선녀가 상족암을 찾은 날 밤에, 샛강을 거닐면서 내게 속내를 털어놓으려고 했었다. 벼르고 벼르다가 속마음을 털어놓으려고 했지만 말이다. '나'라는 청년은 멀리 출렁이는 샛강의 물결만을 응시하면서, 건성으로 듣는 듯한 느낌이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하다 싶어, 가슴 언저리가 하얗게 바래는 느낌이었다. 그리하여, 저녁 바람에 나부대는 길섶의 잎새를 바라보며, 한동안 마음을 추슬렀다.

여인은 무성한 다복솔 잎을 손으로 어루더듬으며, 과거사를 풀어 내렸다. 내가 은하동굴을 벗어난 뒤에, 이천으로 처음 연락을 취한 날이었다. 여인은 전화를 받는 순간에 그만 목이 콱 메었다. 마치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온 듯한 형국이었다. 게다가 여인을 감격시킨 것은 말이다. 갇혔던 청년이 처음 연락한 상대가 그녀 자신이었다는 점이었다. 여인의 가슴은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머지 터져 버릴 지경이었다. 하여, 말보다도 먼저 쏟아져 나온 것은 울음이었다. 이 말에 이르러, 여인의 눈에는 뽀얀 이슬이 맺혀 흘렀다.
나는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깨달았다. 이제 나는 나의 의식계로부터 선옥과 지연을 놓아 줄 시점이 된 터였다. 당장 잊혀지지 않더라도 세월을 약으로 삼아, 잊도록 해야 할 시점이 된 거였다. 나는 가파르게 치솟은 몽산의 주봉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오늘의 이 시간 이후로는 말이다. 더 이상은 선옥과 지연의 굴레로부터 상심하거나 우울해 하지 않겠노라고 말이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인은 흘러 넘치려는 눈물을 감추느라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나는 결코 여인의 눈물에 약해진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다짐을 두었다. 내가 단순히 눈물에 좌우될 만한 정도의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절대로 여인의 눈물 때문에 충동적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여인을 향해 손을 내밀어 여인의 양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여인을 서서히 일으켜 세웠다. 여인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자리에서 다소곳이 일어섰다. 마침내 여인과 나는 커다란 소나무 아래에서 일어선 채, 마주 바라보고 섰다. 여인의 그렁그렁한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어느새 나도 몰래 코끝이 찡해 오며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순간이었다. 나의 내면의 무슨 형태의 힘이 시킨 것일까 ? 나는 어느새 여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내가 여인을 끌어안는 순간이었다. 여인도 맑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없이 내 목에 팔을 휘감았다.
  "은숙씨 ! 정녕 기나긴 세월 동안의 만남이었군요. 나를 이처럼 가슴속으로 애태우며 그리워하는 여인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내 나름으로는 일시적인 착각일지도 모를 일로 여기면서, 그냥 세월만 죽이고 있었을 뿐이에요. 변변치 못한 내가 당신의 소중한 사랑을 받아들여도 되는지 두려워요. 너무나 가슴이 떨려, 그대로 타 버릴 지경이에요. 나는 미모와 재능이 뛰어난 당신이 나의 연인이 되리라고는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어요. 그간 망망대해를 떠도는 한 조각의 배처럼, 참으로 신산(辛酸)스러웠던 저의 삶이었어요. 내 비록 재능은 빈약한 사내이지만 말이에요. 오늘 이 순간부터는 당신만을 영원히 나의 연인으로 사랑할게요. "
  나를 바라보며 잠자코 얘기를 듣던 여인은 끝내 흐느끼면서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여인은 나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정감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마워요, 종철씨 ! 무척 불러보고 싶었던 이름이에요. 때때로 소월의 시 '초혼(招魂)'을 떠올리면서까지 불러보고 싶었던 이름이었어요. 이제 저를 외롭게 놓아두면 안 돼요, 아시겠죠 ? "
  서로를 껴안은 채였다. 한동안 여인과 나는 홍조로 물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서로의 뺨이 맞닿는 순간이었다. 불에 델 듯이 뜨거운 열기가 왈칵 내게로 밀려들었다. 찰나간에 여인의 몸에서 산찔레 향의 향수 내음이 와 닿은 순간이었다. 일시에 머리가 윙윙거리며, 전율 같은 쾌감이 전신을 휩쓸었다. 일시에 주위는 죽음 같은 정적에 휩싸인 느낌이었다. 오로지 들리는 것이라곤 서로의 펄떡거리는 심장의 박동 소리뿐.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 여인과 나는 나란히 손을 잡은 채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해는 꽤나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타오르는 황금빛 햇살이 연방 솔잎으로 파문을 일으키며 줄달음질치곤 했다. 바람결이 '휙휙'거리며 솔숲을 빠져 나갈 때마다 박새들이 날개를 파드득거리며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저만큼 밀려나갔던 솔잎의 물결들이 금세 배를 하얗게 드러내면서 밀려들곤 했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숙소로 정한 시내 태평로(太平路)의 잔교빈관(棧橋賓館)을 떠나, 20여 분 거리의 노신공원(魯迅公園)으로 향했다. 여인과 함께 공원 내의 해양 박물관에 들렀다. 청도가 일찍부터 서양의 풍물을 받아들여 왔던 일환인 듯. 청도의 절반은 서구풍의 건축물로 자리잡고 있어서, 마치 유럽의 해양 도시를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박물관 내의 전시물과 대형 수족관을 관람하면서부터였다. 여인은 눈빛을 빛내며 전시물들을 시종 호기심 어린 모습으로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대형 수족관에 이르렀을 때였다. 해양 생물들에 대한 질문을 하다가 자신도 바다거북을 닮고 싶다고 했다. 왜 하필이면 바다거북인지를 물었더니, 여인은 잠시 미소를 지으면서 뜸을 들였다. 내가 재차 물어보자, 여전히 생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헤엄치는 모습을 좀 보세요. 얼마나 여유가 있어 보이세요 ? 조급하게 네 다리를 놀리지 않고서도 말이에요. 저렇게 가고 싶은 높이까지를 마음대로 갈 수 있잖아요 ? 이미 다리는 전부 물갈퀴로 되어 있어서, 육지에서는 생활이 어렵겠죠 ? 하지만, 적이 공격해 올 땐 목만 몸통 깊이 넣어 버리면 그만이잖아요 ? 목을 몸 속에 넣은 후면, 어떤 동물들이 공격을 하더라도 무슨 걱정이 있겠어요 ? "
  여인의 의미 심장한 질문의 진의가 뭔지에 대해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불쑥 여인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은숙씨 ! 왜 누군가 은숙씨를 공격할 것 같아서요 ? 왜 갑자기 바다거북의 목에 대해 그렇게 관심을 갖죠 ? "
  여인은 이내 살래살래 고개를 저으며, 서서히 말해 주겠다면서 미소를 지었다. 밀려드는 인파로, 나는 여인의 말에 더 이상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인파에 밀려, 그대로 다음 전시관으로 발길을 옮겨야만 했다.

오전 11시에 청도 공항을 이륙한 지 1시간 30분만에 김포 공항에 닿았다. 오후 1시를 막 넘어설 무렵에야, 여인과 나는 공항을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여인과 함께 곧장 인천의 학익동에 있는 나의 아파트에 닿았다. 아파트에 닿자마자 여인은 집안 청소와 세탁물들을 씻어 널었다. 오래 묵혀 두었던 아파트여서, 처음에는 어수선했지만 여인의 손길이 미치면서부터 일변하였다. 금세 집안 가득히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집에서 이 주일간을 머물면서 말이다. 낮에는 취직 자리를 알아보느라고,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제일 손쉬운 방법은 이전 직장이었던 곳에 가서 연구소장을 면담하는 일이었다. 이전의 연구소장은 안산시에 있는 기업체 소속의 해양 연구소에 소개서를 써 주었다. 국내 굴지의 그룹에서 운영하는 해양 연구소는 때 마침 연구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서류 전형을 통해, 3주 후에 연락을 주겠다는 거였다. 적어도 나는 명문대 출신에, 국립 연구 기관 경력의 석사 학위 소지자가 아닌가 ? 그 외에도 몇 군데에 서류를 더 내 놓고는 말이다. 나는 여인과 함께 변산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어느새 태양의 열기가 강렬하기 그지없는 7월 중순이었다. 집에서 머문 지도 어언 이 주일이 지난 터였다. 나는 아침 일찍 차를 몰아, 정오 무렵에는 변산에 닿았다. 차를 내소사에 주차시켜 두고는 뒷산을 넘어 1시간 가량을 오른 후에, 용추폭포에 도착했다. 폭포는 계절에 관계없이 유량이 풍부하여, 연중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였다. 다시 폭포로부터 상류로 1 km쯤 올라가니, 갈대 지붕으로 이루어진 움막집이 나타났다. 집 주위로는 대숲이 잔뜩 어우러져 움막의 분위기가 한결 그윽하기만 했다. 여인과 나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움막집에 들어섰다. 움막집의 부엌 아궁이로부터는 가는 실연기가 흩날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움막집의 그 어디에서도 안개 노인과 월선녀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움막집을 지나 상류로 십여 분쯤 올라가자 느닷없이 널따란 소(沼)가 나타났다. 놀랍게도 소의 가장자리에는 안개 노인과 월선녀가 나란히 앉아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여인과 나는 노부부를 발견하자마자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즉시 큰 소리로 외치며 소를 향해 달려갔다.
  "사부님 ! 사모님 ! 제자 마종철과 백은숙이 돌아왔습니다."
  말이 끝나자 커다란 산울림이 일어났고, 노부부는 즉시 고개를 돌리며 일어섰다. 노부부는 낚싯대도 그대로 둔 채, 은숙과 나를 향해 다가왔다. 노인은 날렵한 동작으로 나를 향해 달려오더니, 나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아니, 마군이 아닌가 ?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 정말 이렇게 고마울 데가 없구나. 더구나 백군과 함께 나란히 이 곳을 찾아오다니, 너무나 반갑네."
  잠시 후에 직경이 30여 미터에 달하는 소에 모두들 둘러앉았다. 노인과 월선녀는 아까부터 나의 두 손을 붙잡고는 연신 눈물을 닦고 있었다. 노인은 75세였고, 월선녀는 72세의 나이임에도 건강한 빛이 온 몸을 누벼 흐르고 있었다. 노인이 가진 여분의 낚싯대를 받아, 여인과 나도 소에 낚싯대를 드리운 채였다. 노부부는 나를 바라보며 그 동안의 경과가 어땠는지를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나는 차분하게 지난 6개월 반 동안의 은하동천에서의 생활에 관해 들려주었다. 내친 김에, 중국을 다녀온 일에 대해서도 소상히 설명해 주었다. 긴 시간에 걸쳐 나의 설명을 끝낸 직후였다. 노부부는 다시 한 번 나의 손을 붙잡고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하마터면 자네를 다시는 못 볼 뻔했구먼. 정말 이렇게 고마울 데가 없네. 게다가 중국 검술과도 교류를 했다니, 자네야말로 타고난 무술인일세그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사로운 일은 자네들 둘이 미래를 약속했다고 ? 좋은 일이야. 정말 좋은 일이구먼. 유선문의 동문끼리 맺어진다면, 유선문의 부흥에도 더욱 좋은 일일 테고 말이야. 우리 노부부는 자네들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바일세."
  나는 잠시 분위기를 쇄신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물에 잠긴 어망을 잠시 들어보니, 붕어와 메기들이 제법 그들먹했다. 언제부터 낚시질을 했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말이다. 소에서 물고기가 그 정도로 잡힐 지경이라면 말이다. 이것은 확실히 계곡수가 청정하다는 얘기였다. 노인의 곁을 바라보니, 구입한 지 얼마 안 되는 작은 그물이 눈에 띄었다. 나는 월선녀를 향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 ! 된장과 고추장은 많이 있으세요 ? 없으면 저희들이 좀 사 올 거구요."
  "별 소리도 다 하네. 살림을 하는 할망구가 된장, 고추장도 준비 안 해 놨겠어 ? 매운탕을 먹고 싶은 모양이지 ? 잡은 고기만으로도 매운탕을 얼큰하게 끓여 줄 테니까 염려 말라고. 그건 그렇다 치고 말이야. 나는 너희들이 이 곳을 찾아 준 게 너무나도 고맙고 기뻐. 삶이 정말 힘들고 고달플 때도 적지 않지만 말이야. 힘들고 고달픈 이면에는 힘들지만 보람된 세계 또한 우리의 곁에 있다고 믿거든. 인생의 애환을 승화시켜야만 삶의 진정한 의미를 맛볼 수 있지 않을까 ? 자네들이 시련을 겪은 뒤라서, 나의 생각을 말해 본 거야."
  월선녀가 낚싯대를 내려놓고는 허리를 쭉 펴며 활달하게 말했다. 나는 양평의 남한강에서 유년 시절부터 단련해 온 투망질을 선보이고 싶었다. 소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다섯 걸음쯤 떨어진 물밑에 피라미들이 떼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민물 고기 매운탕의 진수로는 단연 피라미의 매운탕을 따를 것이 없을 터였다. 나는 그물을 사려 오른손에 쥐고는 바지를 적시며 살며시 물 속으로 들어섰다. 슬쩍 고개를 돌려 햇살을 살피면서 호흡을 가다듬다가, 나는 다시 물밑을 바라보았다. 피라미들의 은빛 비늘로부터 분출되는 빛살의 방향이 잠시 어수선해지는 순간이었다. 피라미들의 이동 방향이 막 전환되는 시점인 터였다. 나는 수면과 30도 각도를 이루며, 반시계 방향으로 그물을 던져 활짝 펼쳤다. 그물은 순간적으로 낙하산처럼 활짝 펼쳐지더니, 스르르 수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물이 충분히 수면에 잠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는 서서히 그물의 손잡이를 잡아당겨 올렸다. 예상한 느낌대로였다. 그물이 묵직한 느낌이 들며, 피라미들이 그물 가득히 실려 올라왔다.
  저녁 7시 무렵이었다. 보글보글 끓는 매운탕 냄비를 중심으로, 일행은 움막집 앞의 평상 위에 둘러앉았다. 구수한 매운탕 냄새가 퍼져 흐르면서부터 오가는 대화마저도 그렇게 화기로울 수가 없었다. 노부부의 움막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상족암의 수련 시절을 떠올리면서 아늑한 밤 시간을 보냈다.

  여인의 제의로, 경남 고성에 있는 샛강의 발원지인 향로봉 운흥사를 찾아보기로 했다. 변산을 떠난 지 7시간만인 오후 6시 무렵에야 운흥사에 닿았다. 운흥사에 도착하니, 이미 청강(淸江)은 고령으로 입적하고 없었다. 청강의 문하인 매선화(梅仙花)와 심은정(沈恩情)은 경기도 여주의 제약회사에 다닌다는 거였다. 여인과 나는 발길을 돌려, 석 달간 수련을 쌓던 상족암 부근의 석동(石洞)으로 향했다. 과거에 안개노인과 함께 수련을 쌓던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상족암 군립공원의 주차장에 차를 버려 두고는 여인과 나는 마침내 석동에 닿았다. 도착하자마자 가슴에 까닭 모를 서러운 정서가 밀려들며, 목이 메었다. 그러면서, '사람의 삶의 본질은 대관절 어떤 것일까'하는 의문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여인과 나는 수련 시절을 떠올리며 샛강의 강변 길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샛강의 강변은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고요한 밤이었다. 옛 날처럼 밝은 달빛이 은은하게 수면에 드리워져, 은빛 물고기처럼 파드득거리고 있었다.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강바람이 연방 수면으로부터 밀려들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무수히 깨어나 하얗게 빛을 뿜고 있었다. 강변을 거닐다 보니, 예전에 여인이 내게 속마음을 털어놓던 지점을 지나게 되었다. 여인도 옛 날을 회상하고 있었음일까 ? 내딛는 걸음마다 시종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여인과 나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순간적으로 강렬한 감동이 가슴을 적시며 다가왔다.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떠밀리기라도 했음일까 ?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인을 향해 다가서며 말했다.
  "은숙씨 ! 수련 시절처럼 지금 여기에서 옷을 벗고 함께 목욕할 수 있겠어요 ?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잖아요 ? 어때요 ? 저랑 알몸으로 나란히 강변을 산책할 수 있겠어요 ?"
  "물론이죠. 확실히 우리는 예비 짚신이네요. 어쩜 저랑 마음이 똑 같아요 ? 혹시 지금 제가 꿈을 꾸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요."
  잠시 후에 여인과 나는 옷을 훌훌 벗어 던진 채,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금세 서늘한 물 기운이 전신을 파고들었다. 이내 여인과 나는 물가로 나와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는 마주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인과 나는 알몸으로 포옹을 했다. 그리하여, 나란히 팔짱을 낀 채, 알몸으로 천천히 강변을 거닐기 시작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불빛 하나 없는 강변이었다. 단지 청아한 달빛만이 강바람에 실타래처럼 풀려, 수면에서 은빛으로 남실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석동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에, 인천의 아파트에 닿으니 오후 1시 무렵이었다. 우편함에는 전보 한 통이 배달되어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펼쳐 보니, 안산에 있는 해양 연구소로부터 온 합격 통지서였다. 일 주일 후의 화요일 오전부터 근무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너무나 기뻐 여인과 감격적인 포옹을 했었다. 일 주일의 여유를 두고서 말이다. 이 번에는 여인의 제안에 따라, 이천으로 차를 몰았다. 이천은 확실히 도예의 고장이었다. 이천시 사음동에는 여인과 여인의 친구인 윤혜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도자기 상점이 있었다. 상점 뒤편에는 도자기 제조 작업장까지 딸려 있었다. 도자기 상점은 60여 평의 실내 공간을 갖는 비교적 규모가 큰 건물이었다. 상점과 작업장을 둘러보고는 이천시 교외의 여인의 단독 주택으로 차를 몰았다. 강물에 면하여 우뚝 치솟은 양옥 주택은 주변의 자연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마치 그림 같은 전원풍의 가옥이었던 거였다. 듣던 대로, 주택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인의 부모는 10년 전에 캐나다로 이민을 간 상태였다. 여인의 부모는 여인마저도 데려 가려고 했지만, 여인은 한국을 떠나고 싶지가 않았던 터였다. 여인은 무남독녀였기에, 형제라곤 없었다. 여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는 다음 날 아침에는 여주를 향해 떠나기로 했다.

  가는 곳마다 한여름의 열기가 속속들이 느껴지는 7월 하순이었다. 쾌청한 하늘에 눈부신 햇살이 나부끼는 오전 10시 무렵이었다. 장세환과 오승미가 양어장을 차려 놓은 경기도 여주에 도착했다. 농가의 전형적인 논을 이용하여, 메기를 비롯하여 향어와 송어를 키우고 있었다. 그 외에도 버섯 재배도 겸하여, 소득이 만만치 않다는 거였다. 세환과 승미의 얼굴 어디에도 천궁검법과 봉황검법의 달인이라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밀짚모자를 눌러 쓴 순박한 얼굴의 시골 농부 내외로 비쳤을 따름이었다. 세환과 승미는 여인과 나를 즉시 알아보고는 곧바로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나왔다.
  "어이구,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네요. 유선문의 무인들이 이렇게 나란히 방문해 주실 줄이야 ? 어서 들어오세요. 우선 특식(特食)인 화끈한 메기 매운탕부터 들면서 이야기를 나누시죠."
  세환과 내가 악수를 하며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였다. 승미와 여인도 서로 포옹을 한 채,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장형 ! 신선이 따로 없네요. 이렇게 경치 좋은 곳에서 물고기를 기르고 버섯을 재배하며 사는 모습이 정말 부럽소. 자연과 더불어 생활한다는 말이 정말 실감나네요."
  승미와 여인은 연방 깔깔거리면서, 매운탕을 준비하기 위하여 부엌으로 나갔다. 세환은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마형 ! 잠시만 기다리세요. 마형이 너무나 반가워할 사람을 금방 불러들일 테니까요."
  내가 반가워할 사람이라니 ? 나는 잔뜩 의아스러웠다. 아무리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보았지만 말이다. 쉽게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다. 향어 회와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지난 세월의 이야기로 빨려 들어갈 무렵이었다. 문득 집 앞에 잘 닦인 검은 색 승용차가 와 닿았다. 승용차의 문이 열리면서, 두 여인이 차에서 내려섰다. 아, 바로 저 여인들이었구먼

. 나는 여인들을 보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갔다. 여인들은 다름 아닌 매선화(梅仙花)와 심은정(沈恩情)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 샛강의 발원지인 향로봉을 찾았으나, 못 만났던 여인들이었다. 그 때 운흥사에서는 여인들이 여주의 제약회사에 다닌다고 했었다. 세환에게 듣고 보니, 약국을 공동으로 운영한다는 거였다. 부엌에서 달려나온 은숙도 뛸 듯이 기뻐하며 두 여인들을 맞았다. 여인들과는 이전에 샛강에서 만나 차를 마시며, 대금 연주를 청해 들은 적이 있었다. 샛강에서 여인들의 신청으로 은숙과 나는 유선문의 무술인 잠룡승천(潛龍昇天)을 보여 준 적도 있었다. 오랜만에 여섯이 둘러앉아 메기 매운탕을 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로 화제의 꽃을 피웠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지난날의 추억이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 가슴속으로 밀려들었다. 둘러앉은 사람들은 내가 은하동천의 얘기를 꺼내자마자 경탄스러운 마음으로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아예 음식을 장만하여 가까운 강변으로 가자는 의견이 제시되어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후의 일이었다. 일행은 세환의 집에서 십여 분의 거리에 있는 남한강변에 텐트를 치고는 자리를 잡았다. 술을 마시며 신나게 대화를 나누느라고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를 지경이었다. 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이었다. 흰색의 승용차가 강변에 와 닿더니, 미모의 여인이 번쩍 손을 들며 차에서 내렸다. 여인을 알아본 순간, 나는 너무나 반가워 눈물이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알고 보니, 은숙이 진경에게 오전에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했다는 거였다. 나는 진경을 만나, 너무나 감격스러운 나머지 격렬하게 포옹을 하고는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문득 여인을 떠올리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포옹을 풀었다. 여인은 나와 시선이 맞부딪치는 순간에, 장난기 실린 미소를 실어 보냈다.

  강폭이 좋이 200 미터는 되어 보이는 강변이었다. 흘낏 시계를 바라보니 저녁 7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보름에 가까운 달이 잔뜩 미소를 머금은 채, 허공에서 맑은 빛살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늘은 너무나 맑아 구름 한 점 없었다. 하늘엔 온통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 별들이 지천으로 깔려 빛을 뿜고 있었다. 강변에는 맑은 조약돌이 끝나는 지점부터 풀숲이 우거져 있었다. 사람의 무릎 높이만큼의 풀숲은 강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녹색의 수면을 이루며 물결치고 있었다. 술이 몇 순배를 더 돌아, 모두들 얼큰하게 취한 상태였었다.
  문득 선화와 은정이 대금을 꺼내, '월하매향(月下梅香)'이라는 청강(淸江)의 대금곡(大曲)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장내는 순식간에 봄기운이 감도는 듯한 분위기에 젖어 들었다. 대금곡의 선율이 오르내릴 때마다 매화의 꽃잎들이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하도 운치 있는 곡이었기에, 일행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 갈채를 보냈다. 그러자, 몇 곡의 정감이 실린 대금곡이 더 연주되었다. 밤 8시를 넘어설 무렵부터는 사방의 수면에서 물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물안개는 이제 강변에까지 그 넓은 자락을 휘날리며 밀려들고 있었다. 바로 이 때부터였다. 형진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남도의 뱃노래를 애환을 실어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는 하도 사무친 정한이 서렸기에, 도저히 앉아서만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심전심이었을까 ? 어느새 다들 일어나 서로 손을 맞잡고는, 넓은 동그라미를 이루며 원무(圓舞)를 추기 시작했었다. 나 자신도 어느새 휩쓸려 원무를 추며 열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바로 이 때였다. 어쩜 환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말이다. 강물 저 멀리로 황포돛배가 가뭇가뭇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안개 사이로 드리워진 수면으로는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물결이, 물고기의 비늘처럼 파드득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숨을 쉬는지 꿈을 꾸는지 도 모를 일이었다. 강바람은 제 흥에 겨워 수시로 수면을 타고 나타났다가는 슬그머니 사라지곤 했다. 이 때 문득 나의 뇌리로 화두(話頭)처럼 어떤 생각이 와 닿았다. 평생 사무치도록 일만 하다가 잠시 드러눕는 것이 삶인지 ? 아니면 다른 세상에서 살다가 죽어서 잠시 환생한 것이 현실인지 ? 아무래도 삶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가슴을 파고들었다. 연방 원무를 추며 가깝게 붙었다가는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경황이 없는 중에서도 말이다. 나는 다시 황포돛배에 생각이 미치자, 강물을 바라보았다. 강의 수면에는 뽀얀 물안개와 은빛으로 남실거리는 달빛만이 아득하게 굽이칠 뿐이었다. 어느새 나는 원무의 중심에 들어서 있었다. 세환과 여인들은 손에 손을 맞잡고 내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이 때였다. 갑작스럽게 서러움이 확 끓어올랐다.

  나는 슬그머니 원무의 중심을 벗어나서 강가로 갔다. 은빛으로 남실대는 길다란 달빛의 물 무늬를 향해, 나는 수면으로 돌팔매질을 했다. 그러자, 강물 위로 얇은 돌 조각이 튕겨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면서 가물가물하게 사라져 갔다. 나는 서서히 발목을 적시며 강물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물 무늬 찬란한 수면에 귀를 갖다 대고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후룩 눈물을 삼키며 흐느끼는 지연의 울음소리가 와 닿았다. 나는 낯빛이 하얗게 질린 채, 고개를 반대로 돌려 귀를 가져가 보았다. 수면으로부터 말없이 푸른 한숨을 쉬는 선옥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전해져 왔다. 나는 취중에서도 고개를 흔들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족함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달이 허공에 걸려 미소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길다란 달빛의 물 무늬를 거쳐, 원무를 추는 일행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의아스러웠다. 방금 전 내가 들은 선옥과 지연의 한숨과 흐느낌은 말이다. 혹시 수면에서 반짝이는 달빛에 실려온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일시에 들었다. 그리고, 원무를 추는 일행은 어쩌면 달의 요정인지도 모를 일이라고 여겨졌다. 이 때였다. 푸른 강줄기를 통해, 섬광처럼 어떤 영감이 와 닿았다. 아무래도 삶 자체는 환상이고, 즐거움과 슬픔은 달 그림자와도 같은 것이리라는 생각 말이었다. 햇살이 어느 부위를 비추느냐에 따라 달 그림자의 방향이 달라지듯. 인생의 자취와 그림자도 환상에서 이루어지는 예술품이란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래, 즐거움도 슬픔의 일부이고, 슬픔도 즐거움의 일부이리라. 나는 이제야 하늘에 걸린 달빛의 의미를 알 것만 같았다. 나는 이제야 일행이 원무를 추는 참다운 의미를 알 것만 같았다. 강렬한 영감에 의해 가슴이 확 뚫리는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나의 눈에는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끝까지 나의 가슴을 답답하게 옭아매던 속박에서 진정으로 벗어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제는 나의 마음이 달빛이요, 자연의 흐름인 거야, 알겠어 ?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원무의 대열에 뛰어들면서, 은숙을 수평으로 안아 들었다. 순간적으로 요란한 박수갈채와 함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나는 살며시 고개를 숙여 답례를 했고, 여인은 가만히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정녕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어느새 여인과 나의 눈에서는 뽀얀 이슬이 맺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녕 오랜 세월 동안의 질곡(桎梏)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강변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서, 나는 여인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은숙씨, 지금 달빛의 속삭임 소리가 들리세요 ? "
  "그럼요. 그것도 아주 환상적인 목소리로 들리고 있어요. 저는 원무를 추기 훨씬 이전부터 제 마음의 달빛은 당신임을 알고 있었거든요. 항상 자신감을 가지시고, 절대로 방황하시면 안 돼요. 아시겠죠, 달빛님 ? "
  그러면서, 여인은 눈을 감은 채, 처음으로 나를 향해 입술을 내밀었다. 나는 곧바로 여인의 부드러운 입술에 나의 입술을 가져갔다. 순간적으로 말초신경이 마비되는 듯한, 강렬한 황홀감이 전신을 엄습했다. 인기척에 놀랐음일까 ? 강변의 풀숲으로부터 몇 마리의 물새가 놀란 듯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나를 포함한 삼라만상의 존재가 수면에 반짝이는 달빛으로 느껴지면서부터 나는 한껏 자유로워지고 있었다. 내 마음을 알았음일까 ? 드러누운 수면 가득히, 달빛이 은빛 물고기의 비늘처럼 파드득거리며 치솟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