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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7회
달그림자
손
정 모
7. 구룡 동굴(九龍洞窟)
맑은 솔잎만큼이나 청량하게 파고드는 밤바람이었다. 창 밖에는 바람이
불 때마다, 풍경(風磬)이 뎅그렁거리며 맑은 음향을 토해 내고 있었다. 시계는 밤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침실 바로 곁에 마련된, 가로와 세로가 모두 5 m는 됨직한
방에서였다. 30대 초반의 여인인 진경(邢珍境)은 속살이 비치는 얇은 무술복 차림새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었는데요. 저는 남의 말을 쉽게 믿는 대신에, 확인은
꼭 하는 습성이 있거든요. 종철씨가 유선문(流仙門)의 전승자라고 했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귀빈으로 모신 거예요. 하지만, 저는 몇 가지의 검식(劍式)으로 종철씨의
신분이 맞는지를 확인해 볼 작정인데, 괜찮으시죠 ? "
진경은 잠시 말을 하다 말고, 나의 눈치를 순간적으로 예리하게 살폈다.
일체의 표정 변화라도 놓치지 않을 것 같은 깔끔하고도 매서운 눈빛이었다. 나는
진경의 그러한 모습에 오히려 매혹되어, 미소를 띠며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야성 어른의 진전을 물려받은 검주님의 무예를 잠시 후면, 보게
되다니 기쁩니다. 원래 무덕(武德)이란 무예로써 친구를 사귄다는 데에 있지 않겠어요
? 저의 변변찮은 솜씨일망정 최선을 다해, 검주님을 즐겁게 모시도록 노력할게요."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로 은은하게 드러난 진경의 여체는 너무나도 요염하면서도
관능적이었다. 나는 잡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즉시에 맑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맑은 눈빛으로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경은 쌩긋 미소를 짓더니, 두 자루의
목검을 내게로 내밀며 말했다.
"종철씨 ! 이 두 자루 중에서 마음대로 하나를 고르세요. 모두
재질이나 길이는 같은 종류예요."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하나의 목검을 골랐다. 그러자, 진경도 남은
하나의 목검을 들었다. 진경은 남북으로 뚫린 창문을 모두 활짝 열어 놓고는 잠시
바깥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이내 명랑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말했다.
"아주 좋아요. 지금 이 건물 주위로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군요.
이제 대결 규칙에 대해, 잠시 말씀 드릴게요."
진경은 방의 중앙에 흰 선을 그었다. 흰 선으로부터 서로의 목검이 닿을
만한 거리만큼 진경과 나는 뒷걸음질을 했다. 서로의 위치가 정해진 각 지점에서였다.
진경은 각자의 발뒤꿈치를 중심점으로 하여 팔 길이만큼의 반경을 지닌 원을
그렸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종철씨, 잘 들으세요. 여기는 수련하는 방이지 운동장은 아니거든요.
지금 그려 놓은 원 바깥으로는 일체 발을 디뎌서는 안 돼요. 그 원의 공간 속에서
기량껏 검술을 펼치도록 하세요. 물론 몸을 허공으로 솟구쳐서도 안 돼요. 왜냐하면,
동굴과 같은 실내에서 펼치는 검술의 기교를 알아보려는 것이거든요. 제한된 지형에
맞게, 검법에 변화를 주어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이 검객에겐 필요하잖아요 ? 설마
제가 너무나 종철씨를 궁지에 몰아 넣는다고는 생각지 않으시겠죠 ? 그렇죠 ?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그리고,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만약 종철씨가 저한테 진다면,
오늘 밤은 저의 명령대로 따르겠다고 약속을 해 주세요. 제가 지면 어떻게 하느냐구요
?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는 확실히 해 두도록 하죠. 만약에 제가 진다면, 저 역시 종철씨의 어떠한
명령이라도 다 따르겠어요, 아시겠죠 ? 선선히 승낙해 주셔서 고마워요. 자, 그럼
곧장 검술 대결을 하도록 하시죠."
진경과 나는 서로를 향해 예를 올린 후에, 곧바로 목검을 세워 가볍게
맞부딪쳤다. 목검을 쥐자마자, 나의 내면에서 전신의 혈류(血流)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내게는 원래부터 무인의 기질이 혈관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목검을
든 순간부터 마치 전신이 날아오르기라도 할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나는 유선문의
무상검법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서두의 검식을 더듬어 나갔다. 독학번익(獨鶴蒜翼)에
약육소운(躍陸掃雲)이라 ! 두루미가 주위로 돌면서, 날개를 펄럭거려 바람을 일으키고는,
땅을 솟구쳐 구름을 휩쓴다는 내용이었다. 마치 한 마리의 두루미가 살며시 돌아,
하얀 날개를 쫙 펼치듯이 말이다. 지극히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한 힘이 실린 동작으로
펼쳐지는 것이 무상검법의 첫 검식이었다. 다음으로는 땅을 치솟아 구름을 쓸어버리는
위세가 서린 동작이었다. 땅을 박차고 솟구쳐 수평으로 몸을 눕히면서 검기를 펼치는
동작이 두 번째의 검식이었다. 그럴 수 없이 우아하면서도 강력한 위세가 서린, 기선을
제압하는 무서운 동작들이었다. 나는 목검을 든 채 여인을 바라보며 차근차근히 무상검법의
검식들을 떠올려 나갔다. 진경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을 무렵이었다. 돌연
'이얏'하는 힘찬 기합 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진경이 나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첫 동작부터가 뭔가 달라 보였다. 종래에 보던 천궁검법이라든지 봉황검법을 비롯한
민족 고유의 검법과는 확실히 유파가 다른 검식들이었다. 확실히 무상검법처럼 산악을
송두리째 허물어 버릴 만한 위세의 검법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여, 천궁검법처럼
끝없이 파도가 치밀어 오르는 듯한 기력을 담은 것도 아니었다. 봉황검법처럼 부드러우면서도
휘감기는 듯한, 아지랑이에 휩싸인 소용돌이 같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뭐라고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는 오묘한 느낌이 시시각각으로 느껴져 왔다. 처음에는 지극히
느린 듯한 목검의 휘두름이었지만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쾌속으로 나부끼는 검
날의 움직임에, 그만 입을 다물 지경이었다. 게다가 무술복을 통해 드러나는 진경의
매끄럽고도 고운 피부마저도 여인의 신비감을 한층 고조시켰다. 대결을 시작한 지
30분이 지나면서부터 온몸에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 때에 이르러서야 왜 무술복이
얇고 투명해야 하는지를 절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제한된 원 안에서만 움직이는
데에도 마치 광막한 벌판을 쏘다닌 듯한 느낌이었다.
진경의 검세(劍勢)는 확실히 다양했다. 달빛에 휘감기는 듯한 부드러움
속에서도 장중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뇌성 벽력이 치는 듯한 위세를 보이다가도
목련꽃이 벙그는 듯한 평온함에 휩싸이곤 했다. 때로는 기나긴 동면에 빠진 듯하면서도,
허공으로 치솟는 제비와도 같은 날렵함이 깃들여 있었다. 보면 볼수록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조화가 스며 있었다. 진경의 조화에 이른 듯한 동작을 대하며, 그 때마다 침착하게
대응해 나갈 때였다. 홀연 안개노인의 준엄한 목소리가 귓전을 스치는 듯 되살아났다.
"마군, 무상검법이란 명실공히 천하무적의 제일 검법을 말함일세.
사실상 천하 무적의 기준이 어디에 있을까마는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말이다. 조선
선조 때의 명장인 이청환(李晴煥)의 10년 세월에 걸친 검술의 집대성이라고 여겨진다구.
적어도 무학의 전문가가 10년 세월간을 고심참담(苦心慘憺)하여 이루어 낸 것이라면
말일세. 거기에는 그 만한 품격과 가치가 있을 거라고 믿네. 검술에 관한 수집
자료도 적지 않았지만, 무상검법만큼 탁월한 것은 여태껏 보지 못했었네. 부디 이
검법을 익힘에 있어서는 마음을 가다듬어, 상승 무학의 진수를 맛보기 바라네."
흘낏 벽면의 시계를 바라보고서야, 대결을 한 지가 40분에 이르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더 이상 진경의 검법에 대해 방어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면서, 즉시 비폭양단(飛瀑兩斷)의 검식을 펼쳤다. 허공을 향해 연속
세 바퀴를 뛰어오르면서 칼을 종횡으로 휘둘러 베는 동작이 비폭양단이었다. 하지만,
실내 공간이라 치솟아 오를 수도 없었지만, 몸을 치솟지 않기로 약속했었던 터였다.
치솟는 동작을 칼날의 움직임에 대한 파동으로 전환시키면서 급기야 검기(劍氣)가
실리기 시작했다. 목검의 검신(劍身)에 기력이 실리면서부터 나의 몸은 지극히 유연해지면서
자유롭게 움직여졌다. 서 있으면서도 치솟아 오르는 듯했고, 치솟는 것 같으면서도
요지부동의 자세이기도 했다. 설사 실안개가 전신으로 와 닿더라도 가볍게 피해 버릴
지경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무아지경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느닷없는 검식의 변화에 진경은 기겁을 하며, 정신없이 검을
휘둘러 막았다. 이 정도의 임기응변만으로도 확실히 형야성의 검법은 놀라운 터였다.
연이어 나는 냉동운무(冷凍雲霧)의 검식을 펼쳤다. 허공에 치솟았다가 수평으로 떨어져
내리면서, 사방으로 칼끝을 펼쳐 뿌리는 동작이 바로 냉동운무였다. 이 검식을 펼침에
있어서도, 치솟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검신을 수평으로 눕혀 파동을 실어 보내야만
했다. 바로 이 순간에 또 한 차례의 검기가 목검의 검신을 통해 실내를 진동시켰다.
그러면서, 목검은 안개를 뿌리듯이 수만 갈래로 갈라지며 곧장 진경을 향해 뻗어
나갔다. 나 자신마저도 예상하지 못했던 동작들이라, 동작을 취하면서도 통제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어머낫 !"
임기응변으로 검식을 간신히 막아내던 진경은 재차 공격을 당하자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거렸다. 진경은 목검을 허공으로 휘두르며, 뻗쳐 오는 나의 목검을
막아내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이미 목검의 칼끝이 그녀의 옆구리와
가슴과 허벅지를 순식간에 가격해 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졸간에 사색이 된 채,
얼굴을 위시하여 전신을 뒤흔들며 칼끝을 피해 내려고 발버둥쳤다. 그 새 그녀의
목검은 나의 칼끝에 튕겨 어디론가 날려가 버리고 없었다.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에,
나도 놀라 몸을 뒤로 눕히며 급히 목검을 놓았다. 하지만, 이미 진경은 여러 부위에
목검으로 얻어맞고 방바닥으로 나뒹군 뒤였다.
나는 너무나 놀라, 피가 확 식는 느낌이었다. 나는 급히 달려가 진경을
부축해 일으키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진경씨 ! 많이 다쳤어요 ? 계속 제가 방어만 할 걸, 괜히 공격을
하여 불상사가 생겼어요. 마지막의 공격은 제가 생각하기로도 의외의 동작들이어서
무척 당황스러웠어요. 정말 뭐라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진경은 잠시 나를 말끄러미 바라보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정말 놀라운 무예였어요. 솔직히 패배를 인정합니다. 이제 약속대로
종철씨는 저를 마음대로 다루셔도 돼요. 뭐든 종철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더니,
참으로 유선문의 무학은 깊이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군요. 지금껏 단 한 번도 패배를
해 본 적이 없었던 나였어요. 아하, 패배라니 …… 참으로 가슴이 참담하군요. 지금껏
그 누가 형가 문중의 무학을 깨뜨린 적이 있었어야 말이죠 ? 참으로 가슴이 타네요.
검주(劍主)라는 칭호로 불리던 제가 지다니요 ? 종철씨, 오늘의 제 모습이 정말 미워
죽겠어요. 흐흐흑 !! "
급기야 진경은 허리를 꺾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 자신도 몰래 심한
자책감이 일기 시작했다. 하필 겨룰 곳이 없어서, 여인과 대결을 하여 여인을 울리다니
?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내가 져 줄 걸. 부질없는 일에, 헛된 노력을 쏟은 것은
아닌가하여, 심한 자책감에 사로잡혔다. 제기랄. 무슨 일이 이렇게 꼬이고 야단일까
? 내일 오전 10시에 도착한다는 북경 대학원생들의 영접은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하필이면 오늘 저녁에 검술 시합을 할 건 또 뭐란 말인가 ?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이었다. 이렇게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아이, 종철씨 !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도 그렇게 넋을 놓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 절 좀 어떻게 해 주셔야죠 ?"
아닌게아니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 이런 ? 제가 정신이 없어서 그랬어요. 우선 응급 처치부터
먼저 해 드릴게요."
나는 쓰러져 있는 진경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진경을 옆으로 안아든
채, 침실로 옮긴 뒤에 침상 위에 그녀를 눕혔다. 침실의 방문은 아까부터 열려 있었던
터라, 실내엔 국화의 향기가 그윽히 실려 있었다. 창가에 매달린 장식용 풍경으로부터는
뎅그렁거리며 청량한 음향이 내내 흘러 넘치고 있었다. 내가 진경을 침대 위에 눕히자마자,
그녀는 눈을 말끄러미 떠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살며시 눈을 감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는 진경을 향해 차분한 어조로 말하며, 지압을 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진경씨, 오늘 제가 마음을 쓰라리게 만들어서 무척 죄송해요.
일단은 상처의 회복이 중요하니까, 유선문의 지압술로 경맥을 뚫어 드리겠어요."
"네, 고마워요."
나는 즉시 손가락을 내밀어, 진경의 쇄골 부위의 선기(琁璣)혈부터 누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화개(華蓋), 자궁(紫宮), 옥당(玉堂)혈의 순서대로 손끝에 기력을
실어 5분 가량을 문질렀다. 헌데, 옥당혈의 위치가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다. 여인의
젖무덤 사이의 골짜기 부위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평온하게 가라앉히고는
침착하게 옥당혈에 지압을 가했다. 그리고 나서는 명치 상부의 혈맥인 구미(鳩尾)혈과
거궐(巨闕)혈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지압했다. 원래 내상을 입은 상태가 아니었기에,
칼끝에 맞은 부위는 금세 흔적도 없이 말끔해졌다. 지압을 한 지 십 분 가량쯤 되었을까
? 나의 판단으로는 아프거나 결리는 부위는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하여,
진경을 향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경씨 ! 누운 채 팔 다리를 쭉쭉 뻗어 보세요. 혹시 결리는 데라도
없는지 확인해 보세요. 혹시라도 결리는 곳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진경은 나의 말을 듣자마자, 눈을 뜨면서 팔과 다리를 상하 좌우로 들어
올렸다. 고개도 연방 좌우로 흔들더니, 누운 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덕분에 이제 말끔해졌어요. 오늘 제가 다친 것은 몸보다는 마음의
상처가 더 컸어요. 몸은 이제 종철씨의 덕분으로 회복되었는데, 제 마음의 상처가
문제예요. 제 마음의 상처는 치료해 주시지 않을 건가요 ?"
"진경씨 ! 어떻게 하면 마음의 상처가 치료되겠어요 ? 오늘 제가
이 곳에 들르지 않았더라면 이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죠. 제가 당장
어떻게 해 드리면 되겠어요 ?"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생글거리며 말했다.
"호호호 ! 어쩜 그렇게도 순진하신가요 ? 무술 대결은 제가 하자고
한 거였고, 대결을 하다 보면 질 수도 있잖아요 ? 또한 부상이란 대결을 했으니까,
생길 수도 있는 거구요. 그런데도 한 마디의 불평도 않으시면서, 그렇게까지 송구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시다니요 ? 확실히 출중한 무예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상응하는
품격까지를 갖췄으니 정말 존경스러워요. 제가 괜히 생떼를 써서 미안해요. 사실은요,
제가 져서 자존심이 무척 상했거든요. 그래서 방귀 뀐 사람이 성낸다는 식으로 제가
그냥 앙살을 부려 본 거예요."
말을 마치자마자 진경은 인터폰을 들어 여 종업원을 불렀다.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 금세 20대 초반의 두 여 종업원이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들어섰다. 두
여인의 복장은 초겨울 무렵인데도 얇은 민소매 티와 미니스커트 차림새였다. 한 여인의
손에는 쟁반과 찻잔이, 다른 여인의 손에는 작은 화분이 들려 있었다. 흘낏 화분을
바라보았지만, 식물의 종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연두색 미니가 쟁반을 내려놓더니,
수정과를 찻잔에 따라 진경과 나를 향해 내밀었다. 자주색 미니는 침실 내의 더블베드를
실내의 중앙으로 옮겨 놓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무슨 뜻인지를 몰라, 머리를
돌려 진경을 바라보았다. 진경은 대뜸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침대 위로 올라가라고
손을 들어 안내했다. 나는 무의식으로 이끌려 침대 위로 올라가 몸을 눕혔다. 내가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 있자, 진경이 나의 곁으로 다가와 베개를 받쳐 주었다.
자주색 미니가 이 번에는 선인장과 난초의 잡종으로 보이는 식물을 침대 곁에 놓았다.
그러더니, 식물을 향해 소형 분무기를 이용하여, 물을 살포하기 시작했다. 흰 연기와도
같은 물보라가 식물체를 완전히 뒤덮고 있는 형상이었다. 내가 식물의 형상을 누워서
바라보고 있자니까, 진경이 미소를 머금으며 설명했다.
"종철씨, 이 식물은 설산(雪山)이라고 불리우는 히말라야로부터
가져 온 '설란(雪蘭)'이라는 거예요. 이건 주로 눈 덮인 고산 지방에서만 서식하는
식물이거든요. 얼핏 보기엔 교잡종인 것처럼 보이지만 순종이에요. 설란의 효능은
차차 아시게 될 거예요."
자주색 미니가 재차 설란에 살수(撒水)하기 위해, 조금 더 무릎을 구부리자
속옷이 드러났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았다가 이내 식물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봉오리가 닫혀 있었던 게 금세 꽃봉오리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은은한 향기가 실내를 채우기 시작했다. 은은하고 부드럽게 휘감기는 향기를
맡으면서부터 온몸이 나른해져 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일시에 졸음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졸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 덮이려고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려고도 했지만, 의식은 자꾸만 혼미해졌다. 게다가 온몸에
힘이 다 빠져 도저히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누워서 생각에 잠겼다. 대관절
어쩌다가 이러한 현상이 생기게 되었는지를 자꾸만 더듬어 보았다. 아무래도 수정과와
설란이 수상하게 여겨졌다. 수정과에 수면제가 들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고, 설란의
향기가 아무래도 수상하게 느껴졌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몽롱한 상태에 마냥 젖어
있었다. 이제는 누가 나를 죽이려고 해도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전신의
경맥이란 경맥은 다 굳어 있는 느낌이었다. 살아 있는 주검 ! 그래, 바로 시신의
형상이 아닐까 ? 도저히 몸을 움직여 볼 수 없는 상태에 빠지자, 나는 마음을 평온하게
가졌다. 지금 발버둥치더라도 나에게 돌아올 이득은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어차피
진경의 흉계에 말려 든 바에야, 부질없는 저항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있을 때였다.
"종철씨, 잠깐만 제 설명을 들으세요. 설란은 기력이 쇠한 사람에게
빠른 시간 내에 원기를 회복시키는, 영험한 효능의 식물이에요. 처음에는 전신 마취가
일어나지만, 경맥을 지압해 주면 금세 원기를 회복하게 되죠.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 그리고, 금옥이와 희선이는 이제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취침해도 좋아, 알겠지 ?
"
"네, 알았어요, 검주님 ! 저희들은 이만 물러 갈게요."
두 여인들은 이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더니 물러가 버렸다. 이제 실내엔
진경과 나만이 남았다. 진경은 벽면에 드리워진 줄을 잡아 당겨, 샹들리에의 불빛을
약하고 은은하게 만들었다. 여인은 다가와 나의 안면부와 머리 상부의 혈맥들을 지압해
나가기 시작했다. 여인의 손길이 와 닿자마자, 금세 전신에 맑은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나는 가물거리던 의식계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살며시 눈을 떠서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뜬 순간 나는 하마터면 놀라 신음을 토할 뻔했다. 투명한 무술복
안의 속옷에 감춰진 여인의 속살이 거의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의 안면부를 지압하는 중인지라, 여인의 뽀얀 젖무덤이 얼굴 위에서 출렁거리고
있었다. 한 마디로 너무나도 선정적인 모습이어서, 그만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눈을
뜨고 있기가 민망스러워서 눈을 감으려니까, 여인의 젖가슴이 나의 얼굴을 압박해
왔다. 물컹거리는 느낌과 탄력적인 감각이 피부에 와 닿으면서부터는 전신의 혈류가
거꾸로 치솟는 느낌이었다. 이 때 여인의 목소리가 은은한 속삭임으로 나의 귓전에
밀려들었다.
"종철씨는 오늘 저의 귀빈이에요. 제가 최상으로 예우(禮遇)해
모실 테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계시기만 하면 돼요. "
잠시 후 잠결처럼, 은은한 여인의 목소리가 다시 귓전에 날아들었다.
"종철씨 ! 사람의 삶이란 대관절 어느 정도일까요 ? 200년 후에,
우리를 기억해 줄 사람이 누굴까요 ? 언제나 생시처럼 우리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있을까요 ? 지금 저는 당신과 살갗을 맞대고 있어요. 비록 지압이라는
명목이기는 하지만요. 저는 처음 종철씨를 본 순간부터 정신이 달아나 버릴 정도로
마음이 설레었어요. 비록 종철씨의 곁에는 연인이 함께 있었던 걸로 알고는 있었지만요.
남녀 관계가 꼭 이론대로만 설명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 언젠가 이야기 책으로부터
들은, 전형적인 선풍도골형(仙風道骨形)의 인물인 것만 같아서 그저 매달리고 싶더라구요.
시골의 이혼녀로부터 별스런 이야기도 다 듣는다면서, 저를 흉보시더라도 어쩔 수
없어요. 좋은 걸 좋다고 하고, 느낀 대로 이야기할 따름이에요. 혹시 지나칠 정도의
결벽증을 가지지만 않으시다면요. 오늘 밤 제가 당신과 함께 밤을 보내고 싶은데
어떠세요 ? 오늘 밤에는 꼭 당신을 갖고 싶어요. 그렇다고, 오늘 밤의 일로 인하여
당신에게 평생 족쇄를 채우지는 않을게요. 당신의 마음이 오늘 이후로 변하여 나를
반려자로서 취하겠다면 그것은 별도의 일이구요, 아시겠어요 ? 종철씨, 혹시 마음속에서
지금 욕정이 끓어오르지는 않나요 ?"
"진경씨 ! 저 역시 동물적인 본성에 민감한 수컷이에요. 하지만,
동물적인 본능의 끝이 가져다주는 황량함을 알기에, 자제하고 있을 뿐이에요. 저는
솔직히 투명한 무술복 차림의 당신을 대했을 때부터 심층부로부터 동물적인 피가
끓어올랐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구요."
"정말이세요 ? 그럼, 왜 솔직히 손을 뻗어 저를 안지 못하세요
? 동물적인 본능의 끝이라고 말했나요 ? 그 끝이 뭔지 설명해 주실래요 ? 나는 오늘
밤 꼭 설명을 듣고 싶어요."
나는 이야기하지 않으면 큰 일 날 사람처럼 달뜬 목소리로 여인에게
말했다.
"진경씨 ! 저는 당신의 그윽하면서도 기품 있는 분위기를 좋아해요.
하지만, 당신을 연인으로 좋아하고 싶다는 감정은 아직까지는 전혀 없어요. 서로에
대한 그리움이 없는 동물적인 교접은 하고 싶지 않아요. 정녕 당신이 저를 발가벗기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이건 결코 ……"
여인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더니만, 손을 뻗어 나의 얇은 무술복을
풀어 젖혔다. 나는 다시 몸을 움직여 보려고 애썼으나, 아직까지는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인은 다시 나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알았어요, 군자님 !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직까지도 고리타분한
유교의 선비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세요 ? 저도 자존심이 높은 여자거든요. 비록
제가 먼저 당신의 옷을 벗기기는 하지만요. 반드시 당신 스스로 나를 갖도록 만들겠어요.
제 말이 못 미더우시면 잠시 후에 지켜보시면 알게 될 거예요."
여인은 어느새 얇은 팬티 한 장만을 남겨 둔 채, 나를 발가벗기고 말았다.
여인은 지압인 듯 애무인 듯한 손놀림으로 서서히 나의 전신을 어루더듬기 시작했다.
여인의 손길은 오뉴월의 보리밭을 스쳐 가는 바람결처럼 부드럽고도 감미로웠다.
처음에는 단순한 지압이려니 했는데, 강약이 엄격히 조절된,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손놀림이었다. 처음에는 가슴 부위를 오르내리던 손놀림이 서서히 배꼽 아래로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단전과 명치 부위를 어루더듬던 손길이 슬쩍 팬티를 건너뛰더니만,
넓적다리와 정강이를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손길이 한 번 스칠 적마다 근육에는 새로운
느낌의 활력이 차 오르곤 했다. 봄 하늘에 치솟은 종달새의 맑은 노래 소리를 들을
때처럼 점차 마음이 평온해졌다. 나의 온몸으로 맑은 물줄기가 흘러들고, 나의 살갗에서
푸른 잎새가 돋아나는 느낌이었다. 문득 지압을 하는 여인의 얼굴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졌다. 나는 슬며시 눈을 떠 여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뜨기 전의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거의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예컨대, 여인은 한껏 색욕에 달아올라,
먹이를 삼키기 직전의 살모사처럼 탐욕스러운 얼굴 모습일까 ? 아니면, 뜨내기 사내의
바람기를 점검하려는 간특한 여인의 얼굴 모습일까 ? 그도 저도 아니면, 신들린 무녀처럼
광신적인 모습으로 부들부들 떠는 얼굴형일까 ? 아닌게아니라, 나는 망상에 잠겨
눈을 뜨기가 겁이 났다. 눈을 떠서 실망스런 장면을 보게 된다면, 눈을 아니 뜸만
못할 것 같았다. 어쨌든 불안한 마음으로 눈을 떴다. 헌데, 나의 마음이 찡해 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의 도를 닦듯 경건한 자세였으며, 입술에는 잔잔한 미소마저
머금은 얼굴이었다. 그러한 자세에 손놀림은 시냇물이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만큼이나
자연스러웠었다. 피부에 와 닿는 느낌 또한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의 손길이
미치는 곳곳마다, 신경 세포에서 활활 생명의 불꽃이 피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이
때였다. 나의 뇌리 속에 절대로 이대로 함몰할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침잠하다가는 마냥 깊은 잠에 빠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가물거리는 의식으로부터
깨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마침내 나는 눈을 감은 채로, 기력을 운행시켰다.
단전의 진기를 가슴 상부로 끌어올리면서, 나는 두 발과 손끝으로 기력을 내보냈다.
서서히 온몸으로부터 활기가 치솟으면서 몸이 개운해지기 시작했다.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여인이 나의 혈맥에 지압을 했지만, 기력을 주입시키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만약 여인이 조금이라도 기력을 사용했었더라면, 나는 좀더 일찍 깨어날 수 있었을
터였다. 누운 채로 기력을 운행해 보니, 이제는 어디 하나 막히거나 결리는 곳이
없었다. 나는 일어나 앉으려고 상체를 막 일으켰다.
바로 이 때였다. 여인은 나를 부축하면서, 방바닥에 놓여 있던 설란을
왈칵 나의 코 앞으로 들이밀었다. 막혔던 경맥이 막 뚫린 상태에서, 설란의 향기가
코에 닿자마자 또다시 현기증이 일었다. 현저하게 가슴의 피가 끓어오르면서, 놀랍게도
나는 색정의 소용돌이에 휘감기게 되었다. 이제는 나를 통제해야겠다는 일체의 생각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나 자신도 모르게 진경에게 다가서면서, 진경의 무술복을
벗기기 시작했다. 진경은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를 뒤로 젖히며, 오히려 나의 동작을
도와 주었다. 어느새 여인의 속옷마저도 말끔히 벗겨 내리는 중이었다. 바로 이 때였다.
문득 안개 노인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그의 준엄한 목소리가 나의 귓전을 울렸다.
"마군, 심성 수련이란 절대적인 자신과의 싸움이야. 스스로 자신을
기만하고 있지는 않는지 항시 점검을 해야만 한다네. 심성 수련이란 모든 무예의
첫 과정이자, 또한 마지막 관문일세. 심성 조절에서 진다는 것은 곧 자신의 생명을
포기함을 말함이야. 절대로 잊지 말게. "
여인의 발끝으로부터 막 팬티를 벗겨 내린 순간의 일이었다. 여인도
일어나서 나의 마지막 속옷을 벗겨 내면서, 나의 샅을 어루더듬기 시작했다. 안개
노인의 얼굴이 떠오르자마자 일시적으로, 맑은 정신이 드는 듯했지만 말이다. 이내
의식이 안개 더미에 휩싸인 것처럼 뿌옇게 흐려지면서 현기증이 전신을 엄습했다.
이제 더 이상 나를 통제할 근원은 없어지고 만 거였다. 이제 통제라는 개념마저도
사라진 상태였고, 오로지 눈앞에는 들끓는 욕정뿐이었다. 의식마저도 완전히 몽롱해진
상태였기에, 그저 본능적인 흐름에 몸을 내맡길 도리밖에는 없었다. 이윽고 여인과
나는 침상에 나란히 몸을 눕히면서, 한 몸으로 엉겨 붙으려고 했다.바로 이 때였다.
핸드폰의 날카로운 신호음이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귀에 가져갔다.
"사형, 나예요. 지금까지 언니랑 함께 전주 시내를 쏘다니다가,
이제 막 언니네 집에 도착했어요. 저는 잠시라도 사형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헌데도 제가 언니댁을 찾은 것은 또 다른 감정의 표시였다는 걸 사형은 아셨어요
? 대답하지 않으셔도 돼요. 사형은 지금 어디세요 ? 잘 지내고 계신가요 ? 아, 할
말은 많지만, 또 다음에 연락 드릴게요, 안녕 !"
나는 이제야 완전히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핸드폰을 내려 놓을 때까지도
진경은 여전히 발가벗은 몸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이내 진경의 무술복과
속옷들을 그녀에게로 건네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경은 옷을 받아 몸에 걸치면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종철씨 !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세요 ? 갑자기 왜 그래요
?"
나는 급히 옷을 챙겨 입고는 진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뇨. 나의 사제로부터 연락이 왔었어요. 지금 잘 있다고 말이에요.
그건 그렇구요. 제가 감정의 조절을 못해 하마터면 실례를 할 뻔했었군요. 저는 당신의
빼어난 미모와 그윽한 분위기를 정말 좋아해요. 하지만, 제가 지금 당신과 육체 관계를
나눌 만큼 당신을 깊이 알지는 못해요. 제 생각으로는요. 멋도 좋고 풍류도 좋지만요.
보다 서로를 깊이 알게 될 때까지는 ……"
"이 보세요, 종철씨 ! 제가 그렇게도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요. 저는 종철씨의 관점이 참으로 답답하게 느껴져요. 저는 이혼녀고
댁은 총각이라, 지금 교접을 한다고 해서 사회적으로나 인륜적으로 문제가 되나요
? 그리고, 제가 오늘 밤을 준비한 것은 무예인끼리의 멋진 풍류에 관한 것이었거든요.
저도 분명 속된 창녀는 아니에요. 설란이 경이적인 최음 식물이긴 하지만, 제가 단순히
욕정 때문에 사용한 것은 아니에요. 지금 정 싫으시다면, 다음의 어느 기회엔가는
소탈한 상태로 풍류의 도를 나누었으면 해요. 그럼, 저는 옆 방의 제 침실로 자러
갈게요. 고운 꿈 꾸시고, 안녕히 주무세요."
자리에서 일어서는 여인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물기가 서려 반짝이고
있었다.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 방은 어느새 소등 상태였고, 싸늘한 새벽달이 허공에
떠서 가냘픈 빛살을 나부끼고 있었다. 나는 심한 갈증에 시달려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 곁의 물 주전자를 찾아 들었다. 맛이 달기 이를 데 없어서, 생각해 보니 수정과였다.
얄따란 담요 자락을 들쳐 나의 몸을 덮고는,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여전히
머리는 무거웠고, 밤은 길기만 했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눈을 뜨면서 시계를 바라보니, 오전 다섯 시
무렵이었다. 사방은 여전히 먹빛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나는 운동복으로 갈아입고는
침실을 빠져 나온 다음, 곧바로 남관을 향해 시골길을 달려나갔다. 달리면서부터
마음이 상쾌해지기 시작했다. 초겨울 바람이 날 선 비수처럼 예리하게 가슴을 헤치며
파고들었다. 시골길을 달리는 순간부터 지난밤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검술 대결에서부터 설란의 등장까지를 떠올리다가 문득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진경의 알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달리면서부터 악몽과도 같은 지난밤의
일들을 떠올리며 숱한 상념에 젖어 들었다. 하마터면 치러졌을지도 모르는 교접 행위에
생각이 미치자, 전신으로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운동을 마친 뒤에 되돌아 와 샤워를 끝내고 나니, 아침 여섯 시 무렵이었다.
옷을 갈아입은 뒤 경건한 자세로 앉아 기력 운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살며시 침실
문이 열리며, 진경이 연한 자주색의 한복 차림새로 들어섰다. 하강한 선녀를 대하는
느낌이었다. 이렇게도 빼어난 미모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이러한 진경이 어쩌다가
이혼녀가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경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 서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온통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진경은 가만히 의자에 앉으며, 단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종철씨 ! 지난밤에 잘 주무셨어요 ? 종철씨께 혹시 번민을 안겨
드린 것은 아닌지 참으로 두렵군요. 어쨌건 지난밤의 일에 너무 연연해 하시지 마셨으면
해요. 모든 것은 하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순리대로 따르는 게 좋겠죠
? 그건 그렇고, 오전 10시에 이 곳으로 중국의 대학원생 셋이 도착할 거예요. 그
때쯤 종철씨도 나랑 함께 세 중국인들을 만나 주었으면 해요. 그리하여, 진정으로
그들이 연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봐 주셨으면 해요. 연구 대상이 형가
문중의 검법인지 아니면 다른 건지를 좀 파악해 주셨으면 해요.
여인과 함께 아침 식사를 끝낸 뒤에 잠시 눈을 감고 쉬고 있을 무렵이었다.
침실 내의 인터폰이 심하게 울고 있었다. 흘낏 시계를 올려다보니, 오전 10시를 5분쯤
남겨둔 시점이었다. 전화기를 드니, 예상대로 진경이었다.
"종철씨, 마침내 한 사내와 두 여인이 도착했어요. 잠시 이리로
좀 나와 주실래요 ? 그럼, 기다릴게요."
전통 찻집에 들어서니, 벌써부터 사람들이 절반쯤 들어차 있었다. 쓱
주변을 훑어보다가 진경이 앉아 있는 곳을 발견했다. 진경의 앞 자리에는 한 사내와
두 여인이 앉아 진경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진경은
손을 흔들어 나를 불렀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진경에게로 다가갔다. 진경은
일어나 의자를 건네면서, 나를 한 사내와 두 여인에게 소개를 시켰다. 사내와 두
여인도 일어나 예를 올리며 나를 맞았다. 유창한 북경어로 진행되는 중국어로 이제껏
네 사람이 대화를 나누었던 모양이었다. 나도 상대방의 정확한 내력을 알아보기 위해,
중국어로 사내와 두 여인들을 향해 말했다.
"세 분께서 사료 연구를 위해, 여기까지 오신 데 대해 놀라울 따름입니다.
북경대학 사학과에 재학중인 대학원생들이라고 하셨죠 ? 이전에 한국의 형야성의
검법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으세요 ? 중국의 무당검법에 대해선 조예가 깊으신 모양이죠
? 중국 정통의 검법인 무당검법(武當劍法)에 대해서는 어릴 적부터 익히 들어온 바가
있어요. 무당검법과 형야성의 검법이 어떤 점에서 유사성을 보이는지 매우 궁금하군요.
오늘을 기해서 견문을 익힐 수 있다면, 무한한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나의 중국어를 듣자마자, 사내와 여인들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거의 동시에 말했다.
"어머, 중국어에 대단히 유창하시네요. 언제 그렇게 중국어를 유창하게
익히셨나요 ? 전공이 중국어이신가요 ? 아니, 해양과학 연구원이시라구요 ?
점점 생각할수록 놀랍군요. 게다가 검법의 전승자라구요 ?"
사내는 박사과정에 있는 서른 다섯 살의 풍전행(馮電行)이라고 했다.
그는 연구를 하는 데 있어서도 성미가 급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훤칠한 키에
다부진 골격을 지닌 장사형의 골격을 갖추고 있었다. 이 번 여행길에 그는 두 여인들의
경호원 노릇까지도 도맡은 셈이었다.
내가 진경의 미모를 두고, 월궁(月宮)의 선녀를 떠올린 적이 있었지만
말이다. 두 여인을 처음 본 순간만큼은 도대체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두 여인의 외모는 세속에선 좀체 찾아볼 수 없는, 빼어난 미모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 설마 이처럼 빼어난 미모를 새롭게 둘씩이나 볼 수
있으리라고는 좀처럼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어제의 첫 만남에서부터 내내
감탄했던 진경까지를 포함한다면야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세 여인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벌써 점심 나절이 되었다.
점심을 먹은 직후에, 진경과 나는 사내와 여인들을 데리고 만덕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만덕산(해발고도 761.9 m)을 오르기 시작한 후, 두 시간쯤 지난
뒤였다. 만덕산은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전주 교외의 명산이었다. 정상 부근을
500여 미터 남겨 둔 지점에서부터 길은 세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진경은 망설임이
없이 가운데로 뚫린 길을 밟아 나갔다. 그것도 잠시였다. 눈 앞을 높다랗게 막은
천연 바위 장벽으로 인하여, 더 이상의 진행이 어려웠다. 진경은 바위를 끼고 우측으로
십여 걸음쯤 걷더니, 아래로 향하는 오솔길을 향했다. 지금까지는 오르막길이었는데,
여기서부터는 내리막길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십여 분쯤 더듬어 내려가니
발 아래로는 웅장한 협곡이 펼쳐졌다. 골짜기를 감돌아 흐르는 수량도 적지 않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산 정상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지점에서
발달된 협곡이라, 가히 장관을 이루었다. 협곡을 바라보며 다시 5분쯤 걸어 내려가자,
협곡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그렇게 조금 내려서자마자, 골짜기의 접경지에 동굴
입구가 수목에 가리워져 있었다. 동굴의 입구에는 노송들로 잔뜩 어우러져, 좀처럼
동굴의 존재를 알아낼 수 없었다. 가까스로 진입로에 닿자, 네 사람이 나란히 들어갈
만한 동굴의 입구가 드러났다. 동굴의 입구에는 '구룡동굴(九龍洞窟)'이라고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동굴의 높이는 2 m 가량이었으며, 입구부터 비스듬히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동굴은 전형적인 석회 동굴이었으며, 세상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십여 미터를 걸어 들어가면서부터, 동굴은 수평으로 발달되었고 폭은 점차 넓어지고
있었다. 대략 200여 미터를 걸어 들어갔을 때였다. 동굴의 벽은 협곡을 향해 발달된
듯 어디선가 옅은 빛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렴풋한 햇살일망정 실내를 살피기에는
지장이 없었다. 10여 미터를 더 걸어 들어갔을 때였다. 벽면에는 웅휘한 초서체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近接不可地域(근접불가지역)
近接時而可脫爾命(근접시이가탈이명)
勸爾速歸不問侵洞(권이속귀불문침동)
이 곳은 접근을 해서는 안 되는 금지 구역으로, 접근시에는 생명을
빼앗겠다는 거였다. 그리하여, 급히 되돌아간다면, 동굴 침입의 죄는 묻지 않겠다는
거였다. 참으로 가슴이 서늘해질 만한 글귀였다. 어지간한 배포로는 그만 되돌아서고
말 것만 같았다. 헌데, 그 글씨들로부터 안쪽으로 10보 정도의 거리에는 뭔가 다른
글씨가 적혀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운중검법(雲中劍法)이란 글씨가 벽면에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더 이상의 글귀는 없는가 싶어 벽면을 훑어 보았지만, 그
부위에는 없었다. 그러다가 천장을 올려다본 순간이었다. 천장에는 가로로 100줄
세로로 200줄로 된 검법의 설명과 도식이 상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텐데도, 천장에는 선명한 필체로 검법이 조각되어져 있었다. 진경만을
제외하곤 일행은 모두 천장을 올려다보며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이야아, 어쩜 이리도 힘찬 서체일 수 있을까 !"
"참으로 그림의 윤곽이 너무나도 선명한데요 ?"
"일찍이 중국에서도 천장에 조각된 검법의 도식은 못 봤다구요."
검법의 제일 마지막 부근에는 검봉(劍峰) 형야성(邢野聲)이라는 서명이
되어 있었다. 진경은 일행을 둘러보더니, 눈빛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여기 검봉이란 분은 제 가문의 중시조 어른이거든요. 인조 반정
때에 공을 세워, 여기 만덕산 일대를 봉토로 지급받게 된 거였어요. 문헌에 의하면
당대 제일 가는 검법의 달인이셨다더군요. 제 가문에서 줄곧 전승되어 온 검법의
이름은 무학검법(舞鶴劍法)이었거든요. 운중검법은 저로서도 예상치 못했었는데요,
근래에 우연히 발견된 거였어요. 이게 알려진 지 대략 2년쯤 되나요 ? 그간 중국의
북경대학의 교수님들과 대학원생들이 연구를 위하여 많이 다녀갔었어요. 중국의 정통
검법인 무당검법과 너무나 유사한 검법이라고 다들 놀라던 눈치였어요. 그런데, 형야성
어른이 당시에 중국을 방문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는 점이 화제 거리였어요.
그렇다고 중국의 검객이 우리 나라까지 와서 검법을 전했을 가능성도 별로 없었구요.
더욱 놀라운 건 중국의 무당검법이 오늘날의 형태를 갖춘 건 말이죠. 형야성 어른의
검법이 세상에 나타난 지 훨씬 지난 뒤라는 점이에요. 중국의 무예만큼 독보적이고도
자긍심이 대단한 것도 없잖아요 ? 그런데도 마치 조선의 검법을 모방한 꼴이 되었으니,
당혹할 수밖에는요. 주현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운주현(雲周賢)이라는 20대 초반의 여인이 간드러진 목소리로 즉시 대꾸했다.
"잠깐만요. 제게도 이 검법 도식을 보고 분석할 만한 시간을 주셔야
되지 않겠어요 ? 조금 더 자세히 도식을 들여다볼 때까지만, 기다려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
주현은 함께 온 예청혜(芮靑蕙)와는 백중지세를 이루는 절세적인 미모를 지녔었다.
그녀들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진경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오늘 중국 여인들을 보자마자 완전히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참으로 여인의
미모만큼 오묘한 것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진경은 이 번에는 청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대답이 가능하다면, 대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청혜도 살짝 눈 꼬리를 돌리며 천장을 올려다보기에만 급급할 따름이었다.
한동안 천장을 올려다보던 주현이 이 번에는 비디오 카메라를 들이밀며 촬영에 들어갔다.
사내와 청혜도 뒤질세라 카메라를 꺼내 열심히 동굴 벽면을 향해 플래시를 터뜨리고
있었다. 한동안 촬영 작업에 몰두하던 사내와 여인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는 유창한
우리말로 말했다.
"어머나, 저희들이 사진 촬영을 하느라고 너무나 부산을 떤 것
같군요. 하도 놀라울 정도의 정교한 작품인데다가, 필체가 하도 미려해서 넋을 잃을
정도였어요. 검법의 깊이는 저희들이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영역이거든요. 그리하여,
본국에 돌아가는 대로 무예 전문가로부터 자문을 받을 예정이에요. 그런데,
저건 뭐예요 ?"
두 여인들이 가리킨 지점을 향해 진경과 나는 다가섰다. 동굴의 돌출된
부분에는 가슴 높이에 달하는 정방형의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거기에는 깨알
같은 한문 글씨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 동굴은 형씨 문중에서 무예 수련을 위해 사용하는 장소로서 타인의
출입을 금한다. 이 동굴은 습기에 무척 약하며, 세월이 흐를수록 훼손되는 특징이
있다. 이 동굴의 측면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협곡과 닿아 있는 특징이 있다. 이 비석은
협곡의 물줄기와 통하는 관문으로, 일체 이 비석에 손대지 않도록 한다. 만약 이를
어기게 되면, 이 동굴과 함께 그대의 목숨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
형야성 -
이 비문을 읽고는 모두들 표정이 묘했다. 각자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 무슨 어려운 숙제를 풀려고 모여 있는 분위기였다. 하나같이 석상처럼 사색에
잠겨 있을 때, 돌연 풍전행(馮電行)이 우뚝 일어서서는 비석으로 다가섰다. 30대
중반의, 우람한 골격의 그가 비석 앞에 다가서자, 일순 긴장이 감돌았다. 일단 나는
그를 만류하는 자세를 취하며, 갑작스레 무슨 영감이라도 얻었는지를 물으려고 했다.
그는 제지하려는 나를 갑자기 뒤로 확 밀어내며, 돌연히 비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바로 이 때, 섬뜩할 정도의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이 가슴을 스치며 지나갔다. 나는
급히 자세를 회복하며, 풍전행이 비석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다. 허나,
내가 미처 그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비석에 닿아 싸늘하게 웃었다. 그러더니만,
곧바로 비석의 밑동을 두 손으로 왈칵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나는 공중으로 치솟아
달려들며 다급한 김에, 고함을 질러대며 말했다.
"아니, 이보시오. 이게 무슨 ……"
막 말을 끝내기도 전에 콰르르릉 소리를 내며, 동굴 바닥이 쫙 갈라져
나갔다. 그러면서, 비석이 섰던 자리로는 커다란 구멍이 드러나면서 물줄기가 폭포수처럼
치솟아 올랐다. 세 여인들은 일제히 고함을 질러 대며 발버둥쳤으나, 금세 물결에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내게도 이젠 마지막이구나 하는 느낌 외엔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순식간에 동굴 안은 치솟는 물기둥으로 천장이며 바닥이 온통 물보라로 뒤덮여
버리고 말았다. 이제 시야에는 치솟는 물기둥과 하얀 물보라 외엔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