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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6회
달그림자
손
정 모
6. 검술 대결(劍術 對決)
가을 호수의 물빛만큼이나 파랗게 드리워진 하늘이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구름 조각 하나 걸려 있지 않은 쾌청한 날씨였다. 초겨울의 정서와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럽고도 따사로운 햇살이 관촌의 들녘을 어루더듬고 있었다.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으랴 ? 이렇게 아늑하고도 평화로운 들녘에서 생사를 건 검술 대결이 벌어지려고 한다는 것을. 갈대 숲에 몸을 숨긴 채, 여인과 나는 세 걸음쯤의 거리를 두고 앉았다. 방금 기력의 운행을 마친 터라, 유사시에는 언제라도 결전장으로 달려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흘낏 여인을 바라보자니, 그녀는 어느새 머플러로 허리를 단단히 동여맨 차림새였다. 여인의 눈빛은 쉴 새 없이 결전장에 선 남녀를 쫓고 있었다. 한 치의 빈틈이라도 보이지 않는 옹골찬 자세였다. 나는 여인의 자세에 내심으로 감탄하며, 결전장에 선 남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시선과 시선이 맞부딪쳐, 한 쌍의 석상처럼 우뚝 선 채 남녀는 말이 없었다. 교차되는 눈빛이 하도 애절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아, 저렇게 바라보다가는 각막이 익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잖는가 ? 각막이 타 버린다면, 그들은 소경이 되고 말 터였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까, 서서히 나의 가슴도 '쿵쿵'거리며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결전장에 선 남녀는 다름 아닌 천궁파의 장세환과 봉황문의 황승미였다. 잠시 후면, 25세 가량의 청춘 남녀가 생사를 걸고 검술을 펼칠 터였다. 한 쪽이 죽든지 아니면 둘 다 절명할 수도 있는 터였다. 어쨌거나 나에겐 아무래도 부질없는 일로 비쳐진 것은 사실이었다. 잠수병을 치료한답시고, 그렇게 생명까지 내걸며 칼을 잡아야 한단 말인가 ? 황승미란 여인의 경우에도 맹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연인의 병을 치료한답시고, 자신의 생명을 선선히 내걸 정도라니,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흡사 앞뒤가 맞지 않는 꿈을 이어 붙이는 느낌이었다.
남녀는 마침내 시선을 거두더니만, 허리를 굽혀 풀밭 위의 장검을
주워 들었다. 잘 닦인 장검에서는 금세 빛살이 번쩍거리며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꽤 예리한 검날인 모양이었다. 저 정도의 검날이 사람의 살갗에 스친다면
? 차마 생각하기조차 끔찍스런 장면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나는 치를 떨며, 마음속으로는
무상검법의 검식(劍式)을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비폭양단(飛瀑兩斷)에 냉동운무(冷凍雲霧)라.
허공을 향해 연속 세 바퀴를 뛰어오르면서 칼을 종횡으로 휘둘러 베는 동작이 비폭양단이었다.
허공에 치솟았다가 수평으로 떨어져 내리면서, 사방으로 칼끝을 펼쳐 뿌리는 동작이
바로 냉동운무였다. 남녀는 장검을 쥔 채로 다시 한 번 서로를 향해 목례를 했다.
그러더니, 칼끝으로 서로를 겨눈 채, 서서히 원형으로 돌기 시작했다. 시계 방향으로
반 바퀴쯤 돌았을 무렵이었다. '쉬익 쉭'하며 검날에서 바람이 일며 검신(劍身)이
허공을 휩쓸기 시작했다. 단순한 근육에 의한 동작이 아니었기에, 검날에서는 서서히
검기가 분출되고 있었다. 검신의 움직임은 완만한 경사지를 흘러내리는 물줄기처럼
무척 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거대한 돌수레가 굴러가는 듯 동작 하나 하나에 잔뜩
기력이 실려 있었다. 검풍(劍風)이 일 적마다 전후좌우로 휩쓸리는 갈대의 움직임을
통해서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확실히 만만치 않은 검식들이었다. 남녀 사이의 거리는
언제나 대여섯 걸음쯤 떨어져 있어서, 검날이 맞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금시라도
칼날이 맞부딪칠 것처럼 서로의 검날의 움직임은 신축성이 있어 보였다. 동작 하나
하나에 놀랄 만큼의 절묘함이 깃들어 있었다. 흘낏 여인을 살펴보니, 여인도 감탄한
듯한 모습으로 남녀의 검식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여인의 손끝에 쥐어진
갈대 줄기의 움직임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잎이 제거된 두 뼘 길이의 갈대 줄기의
끝은 남녀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인이 무아지경에서 휘두르는 동작은 미세했지만,
무상검법의 검식들임에 틀림없었다. 남녀의 검날의 움직임을 따라, 갈대 줄기는 허공을
갈랐으며 미세하게 검기가 분출되고 있었다. 여인은 아무래도 무아지경에 빠져 무의식적으로
갈대 줄기를 휘젓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인이야말로 확실히 천부적인 무예인(武藝人)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기로도 여인의 검식은 남녀의 동작을 제압해 내고 있는 형상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남녀의 검식이 잠시 흐트러지는 순간마다 갈대 줄기의 끝은 그들의
급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갈대 줄기가 진검(眞劍)이었다면, 남녀의 목숨은 진작 끝장이
났으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리 봐도 놀랍고도 신묘한 몸놀림이었다. 나는 여인을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무예 수련의 기간이 길었다고, 다소 여인을 얕잡아
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신묘한 여인의 몸놀림을 본 뒤부터는 나의 시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육체적인 힘은 내가 셀지언정, 칼을 들어 겨루었을 때 누가 이길지는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나는 남녀의 동작과 여인의 몸놀림을 주시하면서, 희대(稀代)의
검식을 분석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경이로움에 젖어 들어, 황홀한 눈빛으로 세 사람의
동작을 주시했다. 그렇게 하여 한 시간 가량이 흘렀으리라.
오후 1시 정각을 막 넘어서는 시점이었다. 점차 남녀의 거리가 좁혀지며,
칼을 휘두르는 동작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여태껏 없던 검날의 맞부딪침이 느닷없이
일기 시작했다. 검날이 맞부딪칠 적마다 고막이 파열될 정도의 굉음이 일었다. 검날이
맞부딪쳤다가 떨어질 적마다 사방으로 불똥이 튀는 느낌이었다. 장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남녀의 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수많은 기력의 소모가 있었던 탓이었으리라.
승미는 허공으로 치솟아 올라 하늘을 향해 몸을 눕히면서 검날을 뿌렸다. '찌잉'하는
금속성의 소리와 함께, 세 줄기의 검광(劍光)이 일며 칼끝은 곧장 세환을 향했다.
칼끝의 움직임이 너무도 신속하여, 세환의 목이 금세 푹 찔려 버릴 것만 같았다.
세환도 질세라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면서, 북동과 남서 방향으로 검막(劍幕)을 뿌려
대고 있었다. 세환과 승미의 움직임은 용과 봉황새가 허공에서 뛰노는 형상이었다.
한 마디로 현란하면서도 정밀하고, 그러면서도 신속한 동작들이었다. 어디를 보더라도
단순한 칼잡이들의 칼질은 아니었다. 허공에서 서로 뒤엉킬 듯이 어우러졌다가 유연하게
떨어져 내리는 동작은 정녕 환상적인 예술이었다. 그러한 검술의 어디에도 인마(人馬)를
살상할 듯한 살기는 없어 보였다. 하도 세환과 승미의 검술 전개의 동작이 유연하고도
조화로워 보였기에 말이다. 나는 줄곧 경이로움에 젖어,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쩜 검술이 이다지도 활달하면서도 자유로우며, 그러면서도 정교한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세환의 검술은 청룡이 노니는 듯한 남성다운 기백으로 충만해
있었다. 반면에, 승미의 검술은 봉황새가 자줏빛 구름장을 넘나드는 듯한 아련한
정취가 깃들어 보였다. 그러면서 한동안은 검날의 부딪침이라곤 없이, 검술의 시연
동작만이 허공을 뒤덮었다. 그러다가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쉬이이익 ! 쉬이이익
!'하고 높은 음절의 예리한 음향이 울려 퍼지더니만, 갈대 숲이 일제히 드러눕기
시작했다. 검기로부터 뻗쳐 나온 강풍(强風)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가는 일제히 갈대
숲을 휩쓸기 시작한 거였다. 바람결이 하도 거세어, 은신한 상태의 여인과 나의 존재가
하마터면 노출될 뻔했다. 여인과 나는 어쩔 수 없이 갈대 숲 속에서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새 여인은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창졸간에 맞붙은 어깨로부터 여인의 체온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나는 금세
심호흡을 새롭게 하여,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세환과 승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미 두 사람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창백한 모습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최선을 다하는 검술인 ! 생명마저도 허공에 내건 채, 최상의 기력을 펼치고 있는
검객 ! 아무래도 어지러우면서도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헌데,
요란한 기합 소리가 느닷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야아앗 !"
"야하합 ! 이얍 !"
천지를 뒤흔들 듯한 우렁찬 기합 소리였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이 때, 여인의 손에 쥐어진 갈대 줄기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내쉬는 숨결의 맥이 뜨끔거리면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좌우로 몸을 흔들어, 기력을 운행하고서야 비로소 정상으로 되돌아갔다.
여인을 바라보니, 여인도 이제 막 기력 운행을 끝낸 듯한 표정이었다. 남녀의 대결로부터
뻗쳐 나온 검기로 인해, 일시에 여인과 나의 혈맥이 막혔던 모양이었다. 나는 일시에
굴욕감에 가까운 분노의 감정에 휩싸였다. 정식으로 대결도 하지 못한 채, 검기에
맞아 혈맥이 봉쇄되다니 ! 이러고서야 내가 어떻게 무예인이라고 자처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 창피스러운 느낌에 휩싸여, 당장 일어나 남녀를 향해 일검(一劍)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긋이 입술만을 깨문 채, 다시 남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두 번째의 우렁찬 기합 소리가 울리는 순간이었다. 남녀는 둘 다 가슴 높이만큼 하늘로
솟구친 자세로 장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세환은 허공에 솟구친 상태에서 몸을 수평으로
눕힌 채, 세 차례의 검식을 펼쳤다. 그 때마다 눈부신 검광이 뻗쳐 나와 주위를 뒤덮었다.
승미는 수직으로 치솟는 자세 그대로 네 차례의 검식을 순식간에 펼쳤다. 마지막
검식에서였다. 장검과 장검이 맞부딪는 순간이었다. '챙'하고 검날이 울리면서, 남녀의
장검이 모두 훌쩍 허공으로 날려가 버렸다. 강력한 기력의 진동으로, 남녀는 더 이상
칼을 잡고 있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검날이 교차될 때마다 분출된 기파(氣波)로
인해, 일시에 여인과 나의 혈맥마저도 봉쇄된 터였다. 남녀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여인과 나의 혈맥이 봉쇄될 지경이었다면 말이다. 정녕 남녀의 몸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더 이상 엎드려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홀연히 미친 듯이 남녀를 향해 달려나갔다. 하지만, 달려나가면서도 자꾸만 때가
늦은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 순간에, 세환의 안색이 극도로 창백해지면서 허공에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승미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 웅큼의 피를 길다랗게 토해
내며 떨어져 내렸다. 아마도 격렬한 검기의 교환에서, 세환은 의식을 잃었고 승미는
내장이 파열된 모양이었다. 잠시 후에, '풀썩'하고 세환이 풀밭으로 떨어져 내리면서
졸도해 버리고 말았다. 승미도 거듭 피를 토해 내더니만, 결국 세환의 곁에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 결국 남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졸도하여
쓰러진 거였다. 쓰러지는 순간도 거의 같아서,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쓰러지는 마당에 약속이라니 ? 나는 금세 나 자신에 화를 내며 마음을 추슬렀다.
둘 다 의식을 잃었으니, 처리가 문제였다. 나는 세환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대었고, 여인은 승미의 가슴에 손을 갖다 대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너무나도
혈맥의 움직임이 미약했다. 앞 뒤 따져 볼 것도 없이, 세환을 안고는 오원강으로
달렸다. 강물을 머리에 끼얹어 일단은 의식을 회복시키려고 했다. 어느새 여인도
승미의 머리에 물을 끼얹으면서, 승미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세환은 잠시 눈을
떴다가는 이내 의식을 잃어 버렸다. 승미는 일시에 의식을 찾기는 했지만, 탈진하여
이내 코를 골며 잠들어 버렸다. 이제는 병원을 찾기 전에 응급 처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나는 상족암에서 익혔던 지압술(指壓術)과 진기(眞氣)의 운행에 의한 혈맥 소통법을
쓰기로 했다. 비록 수련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유선문 무학의 진수에 해당되는
비법들이었다. 보다 정확한 혈맥을 찾기 위하여, 나는 세환의 상의를 걷어 올렸다.
여인도 나의 행동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승미의 상의를 살며시 걷어 올렸다. 나는
기력을 운행하면서, 안개노인으로부터 경혈의 지도를 받던 장면을 떠올렸다. 금세
노인의 말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마군과 백군은 잘 듣게. 경혈(經穴)이란 십이경맥(十二經脈)을
위시하여,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상에 있는 혈(穴)의 총칭이라네. 이것을 다른
용어로는 십사경혈(十四經穴)이라고도 하네. 십사경혈은 모두 경맥의 순행선상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줄기에 대한 주치작용(主治作用)을 하고 있다네. 경혈에 대한
최초의 의학전적(醫學典籍)은 '황제내경(黃帝內經)'이며, 거기에는 160곳의 경혈이
수록되어 있다네. 중국의 산서의학원(山西醫學院)의 이정(李丁)이 1984년도에 펴낸
십사경혈도해(十四經穴圖解)가 이미 국내에 번역되어 시판되기도 했지만 말일세.
현재까지 공인된 십사경혈의 수는 단혈(單穴) 52곳, 쌍혈(雙穴) 309곳으로 총 361곳이라네.
명칭상으로는 361혈이지만, 혈의 위치상으로는 도합 679곳의 혈로 되어 있다네. 아무쪼록
동양 의술의 심오한 근원을 잘 익혀, 건강 증진에 보탬이 되기를 빌겠네."
나는 잠시 눈을 감은 채, 맑은 심호흡을 했다. 나의 시술 행위가 가져올지도
모를 일체의 결과에 대해 초연하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돌발 상황이었고, 응급 처치가
필요한 시점이었기에 손을 대는 것뿐이다. 절대로 다른 망상을 가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나는 잠시 후에 눈을 떴다. 이 때, 여인의 목소리가 나의 귓전에 부딪쳐 왔다.
"사형, 이제 시작하시죠. 저는 사형의 손놀림대로 승미씨의 경맥을
소통시키겠어요. "
내가 세환의 경맥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방식을 보고, 그대로 승미에게
시술하겠노라는 여인의 말이었다. 더 이상 망설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마음을
크게 먹고, 상반신의 앞쪽 몸통 중앙선을 따라 흐르는 임맥을 주시했다. 우선 쇄골
부위의 선기(琁璣), 화개(華蓋), 자궁(紫宮), 옥당(玉堂)혈의 순서대로 손끝에 기력을
실어 3분 가량을 문질렀다. 그리고 나서는 명치 상부의, 두뇌를 소통시키는 혈맥인
구미(鳩尾)혈과 거궐(巨闕)혈을 3분 가량 문질렀다. 그러면서, 나는 고개를 돌려
여인에게 말했다.
"사제, 아마도 승미씨는 장 파열이 된 것 같거든. 배꼽 조금 위의
신궐(神闕)혈부터 아래로 음교(陰交), 기해(氣海), 석문(石門)을 지나 곡골(曲骨)혈까지를
지압해 봐. 이 부위는 창자의 질환을 다스리는 경맥이므로, 기력의 균배(均排)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돼. 곡골혈은 외음부의 상단부에 해당되기에, 방광에 무리한
힘이 가해지지 않도록 해야 된다구, 알았어 ?"
"어머나, 사형은 마치 수십 년간 의원 생활을 한 사람 같군요.
분명히 배우기는 같이 배웠는데, 그저 놀라울 따름이네요. 사형의 가르침대로 최선을
다해 볼게요."
나는 경맥에 기력을 쏟아 넣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분명 세환과 승미가
의식을 잃은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중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등쪽의 중앙선을 따라 배열된 독맥(督脈)까지는 손대지 않아도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환의 구미와 거궐의 혈이 응축되어 잘 안 풀리다가 조금씩
선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얼굴 우측 안면부(顔面部)의 경직된 피부가
점차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기해와 석문의 경맥 소통이 원활했기에, 세환의 내장에는
상처가 없다고 판단되었다. 바로 이 때, 여인이 내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사형, 잠시 여길 좀 봐요. 음교(陰交)와 기해(氣海) 사이의 경맥이
돌처럼 굳어 있어요. 저의 기력으로는 한계에 이르렀어요. 사형께서 좀 도와 주셔야
되겠는데요. 대신 세환씨에게는 제가 계속해서 지압을 할게요."
여인의 말대로 승미를 향해 앉는 순간이었다. 눈부시게 하얀 승미의
속살을 보는 순간 현기증을 일으킬 뻔했다. 어쩜 그렇게도 고우면서도 청량해 보이는지
차마 손을 못 댈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잠시 맑은 심호흡을 하기로 했다. 그런
뒤에, 배꼽 상단부의 신궐혈부터를 손끝으로 지긋이 누르면서 기력을 보냈다. 아닌게아니라,
음교와 기해혈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결코 손가락만으로는 될 일이 아니었다.
손바닥을 갖다 대어, 장압(掌壓)을 가하면서 기력을 보내어 문질렀다. 다시 3분 가량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웩' 소리를 지르며, 승미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한 모금의
피를 토했다. 완전히 검붉은 색채의 죽은 피였었다. 이 때부터 음교와 기해의 경맥이
선홍색으로 변하면서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안심해도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때부터 문득 햇살이 너무나 따갑게 느껴졌다. 나는 여인에게 남녀를 무성하게
우거진 갈대 숲 속으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여인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여기나 갈대 숲 속이나 햇살을 받기는 마찬가지예요. 차라리,
저기 소나무 그늘 아래가 좋지 않겠어요 ? 거리가 다소 먼 건 다소 마음에 걸리지만,
우리 그 곳으로 가자구요."
겨울철이라 활엽수의 잎들은 대부분 떨어져 버리고, 눈에 띄는 거라곤
소나무뿐이었다. 십 년 생쯤 되어 보이는, 제법 잎이 무성한 소나무였다. 이윽고,
여인과 나는 세환과 승미를 소나무 그늘 아래로 옮겼다. 그리고 나서였다. 나는 다시
여인과 자리를 바꿔 세환의 혈맥을 살폈다. 십여 분쯤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 승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풀밭에서 일어났다. 세환의 의식은 깨어났지만 말이다. 일어날
기력은 조금도 없는 모양으로, 그대로 탈진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여인과 나는
극도로 기력이 떨어져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내부의 기력을 너무나
많이 남녀에게로 분출한 탓이었으리라. 바로 이 때였다. 은방울 소리와도 같은 승미의
맑은 목소리가 귓전에 울려 퍼졌다.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저희들의 생명을 구해 주신 은혜에,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두 분께선 젊은 연세인데도 불구하고, 절학(絶學)을
지닌 기인들이셨군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다시없는 영광이에요. 기력이 극도로
쇠진한 것 같으니, 잠시 눈을 좀 붙이시구요. 그리고 나서, 저의 부탁을 좀 들어주시지
않으시겠어요 ? 이왕 수고하신 김에 조금만 더 상세하게 세환씨의 혈맥을 봐 주셨으면
해서요."
나는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뜬 채, 승미의 설명을 들었다. 세환의 잠수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등쪽의 경맥인 독맥(督脈) 중의 신주(神柱), 신도(神道),
영태(靈台) 및 지양(至陽)혈을 소통시켜야 한다는 거였다. 이들 경맥은 신체 근육의
발열을 관장하는 혈맥이기에, 강력한 기력의 주입이 필요한 부위였다. 근육이 강렬한
발열 작용을 할 때라야만, 근육 조직 속의 기포가 빠져나가는 거였다. 기력의 주입에
있어서, 단순한 체내의 기력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검기의 배합을
시도한 거였다. 검기의 배합에는 생명까지도 잃을 수 있는 위험이 있었지만 말이다.
오로지 연인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생명까지도 내걸 수 있었다는 거였다. 결과적으로는
예상했던 바를 성취한 듯 여겨졌지만, 아직까지는 확인을 해 봐야 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마지막에 해당하는 도움을 청한다는 거였다. 뭐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지금
당장은 쇠진한 기력을 회복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세 사람의 기력을
합하여, 세환의 신주혈에서 지양혈까지를 소통시켜 보자는 거였다. 나는 고개를 끄떡거려
동의를 하고는, 그대로 풀밭으로 몸을 던져 누웠다. 걷잡을 새 없이 금세 꿈의 나락으로
빠져 들었던 모양이었다. 한창 꿈속을 헤매는데, 뭔가 부드러운 감촉이 피부로 느껴져
왔다. 눈을 떠 보니, 여인이었다. 여인이 나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나를 깨우고 있었던
거였다.
나는 금세 일어나 앉아 시계를 보았다. 겨우 눈을 붙인 지 10분쯤 경과된
시점이었다. 왼손에서부터 오른손, 왼발에서부터 오른발에 이르기까지 기력을 운행시켜
보았더니, 원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승미와 여인도 기력을 회복한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승미를 바라보며 당부를 했다.
"승미씨 ! 승미씨는 가벼운 내상을 입은 것 같거든요. 무리를 하면,
다시 내장이 터져 피가 흐를지 모르니까 잠시 쉬고 계세요. 저와 사제 둘이서, 세환씨의
경맥을 소통시켜 볼게요."
세환의 양 어깨 중앙의 신주혈과 등 중앙의 지양혈까지가 여전히 경색되어
있었다. 검기로 인해, 상당히 뚫리기는 했지만, 아직도 부드럽지가 못했다. 참으로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두 개의 손가락을 꼿꼿이 세워 세환의 영태혈에 기력을
쏟으며 문지르기 시작했다. 영태혈은 두뇌와 폐를 비롯한 근육 부위의 발열 작용을
촉진하는 경맥이었다. 유선문에서는 숱한 경맥들 중에서도 영태혈을 가장 중히 다루었다.
영태혈은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기력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도 가장 효율이 높은
혈맥이었다. 신주혈과 지양혈 사이를 오르내리면서, 대략 10분의 시간이 흐르자,
전신에 피로가 몰려들었다. 그러면서, 이마에서부터 땀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여태껏 시술 장면을 바라보고만 있던 여인이, 마침내 나의 등쪽의 영태혈에 손끝을
갖다대었다. 그러더니만, 나의 영태혈을 통하여, 여인의 기력이 힘차게 나의 가슴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관절 여인의 내공(內功)
수련의 정도가 어느 수준까지인지 가늠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다시 한 번 여인의
천부적인 자질에 대해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인의 기력의 도움을 받아,
다시 십여 분의 시간이 흐르면서부터였다. 풀밭 위에 엎드려 있던 세환이 부들부들
떨며 헛소리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잠꼬대로 들리던 소리의 음절들이 뒤로
갈수록 비명 소리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면서, 점차 세환의 온몸으로부터 땀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거무죽죽하면서도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땀방울이 한동안 줄줄
흘러내렸다. 세환은 몸을 이리저리로 비틀면서 연신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다시 십여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 이윽고 세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우뚝 일어섰다. 그러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오원강의 강변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원래의 위치로 걸어오기를 되풀이했다. 서너 차례를 반복한 후에,
세환은 하늘을 향해 환호했다.
"이야앗 ! 마침내 정상인으로 되돌아왔어, 되돌아왔다구."
실성한 듯이 한동안 하늘을 향해 포효를 계속하더니만, 세환은 나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얼핏 보기에 눈에 광기 비슷한 살기가 실린 듯했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었기에, 일시에 가슴이 뜨끔했다. 나는 은연중에 방어 자세를
취하며, 세환의 모습을 지켜 보았다.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겨 세 걸음쯤의 거리를
남기고는 우뚝 선 채 말했다.
"저의 새로운 삶을 주신 두 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저는
천궁파의 전승자인 장세환이에요. 어쩌다가 사경을 헤매는 저희 두
사람을 구하셨는지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단순한 외상의 치료가 아닌,
기력 운행에 의한 치료를 해 주셨으니 놀라울 뿐이에요. 오늘 이렇게 구명의 은혜에다가
잠수병까지 치료를 해 주셨으니, 어떻게 은혜를 갚을지 모르겠군요. 이렇게 만난
연분으로 무술계의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앞으로 승미씨와
결혼해서, 경기도 여주에 살 예정이거든요. 두 분이 계시는 곳과 거리가 멀지 않으니까,
자주 만났으면 해요."
세환의 말이 끝나자마자, 황승미도 곧장 감사의 말을 했다.
"유선문의 전승자라고 하셨죠 ? 유선문의 무학이 그처럼 심오한
줄은 몰랐어요. 언제든지 시간이 나는 대로 두 분을 찾아 뵐게요. 잠시 시간이 나시면,
식사라도 같이 하고픈데 어떠세요 ? 갈 길이 바쁘시다구요 ? 서운하기 이를 데 없지만,
보내 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두 분의 생활 근거지가 인천과 경기도 이천이라고 하셨죠
? 경기도 여주와는 멀지 않은 곳이니까, 뵐 기회가 많겠죠. 무엇보다도 오늘의 이
은혜, 두고두고 잊지 못할 거예요. 부디 건강하시구요, 안녕히들 가세요."
헤어지기에 앞서, 넷은 오원강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면서, 영원한 우정을
다짐했다. 네 사람은 동시에 손을 내밀어 서로 부여잡고는 차마 놓지 못해 입술을
깨물었다. 정녕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운명들이었다. 어쩜 죽을
때까지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아쉬운 마음들이었다. 결국 황승미와 여인의 눈에서는 부옇게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장세환의 눈에서도 맑은 눈물 방울이 매달려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의 가슴속으로도
설움이 핏물처럼 배어들면서, 어느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강둑에
올라 서로를 배웅하며 작별을 했다. 여인과 나는 강둑을 나란히 걸어가는 남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냥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여전히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렀고, 오후의
햇살은 따사롭기가 이를 데 없었다. 문득 여인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그림 같은 한 쌍의 연인들이군요. 사형 혹시 저 사람들이
부럽지 않으세요 ? "
"아냐, 전혀. 그런데, 사제는 정말로 부러워하는 표정이잖아 ?
갑자기 웬 일이야 ? "
"아이, 몰라서 물으세요 ? 사형을 볼 때마다 왜 이다지도 가슴이
뛰노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짐짓 하늘의 해를 올려다보며 시각을 가늠하는 체했다.
오후 3시 무렵이었다. 아직도 햇살은 따가울 지경이었고, 날씨는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초겨울 날씨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관촌의 들녘을 지나, 17번 국도를 따라 곧장 북상하여 걷고 싶었다. 나의 뜻에
부응하여, 여인도 기꺼이 함께 걷고 싶다고 했다. 관촌에서 남관까지는 족히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하지만, 초겨울의 서정에 취하기 위해, 탁 트인 평야 지대를
걷고 싶었다. 국도변을 따라 평야 지대가 수평선 가득히 펼쳐져 있었다. 추수가 끝난
평야 지대라,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끝없이 널브러진 논과 밭 일색이었다. 간혹 산록이
눈에 띄기도 했지만, 대체로 끝없이 널브러진 벌판이 있을 뿐이었다. 수시로 평야를
가로질러 온 청량한 바람결이 여인과 나의 얼굴을 간지럽히곤 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할 적에는 항시 좁은 강토라고 배웠는데 말이다. 이렇게 끝없이 널브러진 벌판을
보게 되다니, 어찌 감개가 무량하지 않을쏜가 ? 한동안 짓눌렸던 압박감이 바람처럼
흩날려 달아나 버리는 느낌이었다. 국도변을 거닐면서 여인은 어느새 나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여인은 동문 사형제(師兄弟)라는 이유로, 되도록 거리를 두고자 하는
나의 심정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동문 사형제끼리 팔짱 정도는 허용해 주어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내가 여인을 연인으로 받아들이기 전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 일으켜, 서로간에 가슴
아파하는 일은 없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화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여인에게 말을 건넸다. 이렇게 광막하게 드러누운 평야 지대를 거닐면서
무엇을 떠올렸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여인은 수줍은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 사형을 저의 연인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뿐이었어요.
혹시 저의 생각이 지나쳤나요 ? 이 번에는 제발 피하지 말고 정식으로 대답해 주었으면
해요."
"사제, 우리는 동문 사형제이잖아 ? 일단은 동문의 예를 지키는
것을 으뜸으로 삼았으면 해. 그러다가 서로의 가슴에 연정이 쌓이면 연인이 될 수도
있겠지. 여태껏 나는 사제만큼 빼어난 미모에 시원스런 성격을 갖춘 여인을 만난
적은 없었어. 게다가 사제의 천부적인 총명과 운동 감각은 수시로 나를 감탄케 만들었어.
한 마디로 내겐 너무나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비치거든. 너무나 소중한 보물은 사람들이
아끼려 들 듯이, 나도 사제를 경건하고도 소중하게 대하고 싶다구. 하지만, 내가
선뜻 사제를 연인으로 삼지 못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
"사형, 그 이유를 진심으로 듣고 싶어요. 지금 제게 들려주실 수
없으세요 ? 혹시 제게 커다란 결격 사유라도 있나요 ? 아니면, 그저 제가 싫으신가요
?"
나는 도로의 가장자리를 거닐면서 다시 한 번 광활하게 펼쳐진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왠지 말을 하려다 말고, 금세 콧잔등이 찡해 오며 눈물이 핑 돌았다.
사별한 선옥과 지연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나의 가슴속에는 아직까지도 선옥과
지연을 잃은 슬픔이 커다란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었다. 혹시 나에겐 불행이 언제나
따라다니는 것은 아닌지 의아스러웠다. 그리하여, 내가 사귀는 연인마다 요절을 하거나
불행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졌다. 이러한 상념은 분명 형태 없는 족쇄였다.
내가 마음을 주고자 하는 여인이 마음에 들면 들수록, 더욱 망설여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일단은 세월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다.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흘러야
할지 나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수시로 가슴이 끓어오르곤 했었다. 내가
굳이 심성 수련을 위해, 안개노인을 찾았던 이유도 따지고 보면 이 때문이었다. 점차
가슴이 서글퍼지며, 그대로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의 착잡한 심사와는
달리, 나는 여인에게 내 마음을 뚜렷이 밝혀 주고 싶었다.
"사제, 내가 옛 날에 들려주었던 적이 있었지 ? 나에겐 사별한
두 연인이 있었다고 말이야. 언제나 내 가슴속에는 그녀들의 속삭임이 떠나질 않아.
내 마음속에서 그녀들을 놓아 보내지 않는다면 말이다. 새로운 연인은 도저히 사귀지
못할 것만 같애. 언제쯤이나 내 마음이 정리가 될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어. 부디
내 마음의 고충을 이해해 주었으면 고맙겠어."
"사형, 너무 초조하게는 생각지 마세요. 오늘 이후로는 말이에요.
사형이 제게 마음을 열 때까지 저는 절대로 떼쓰지 않을래요."
말을 끝내는 순간에, 여인의 눈시울은 살짝 물안개처럼 젖어 있었다.
여인의 그러한 모습을 본 순간에, 시울에 나부끼는 바람결 같은 애잔함이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공허함에 젖어, 고개를 들어 파랗게 가라앉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여인은 나의 팔짱을 낀 채, 나란히 도로변을 거닐었다. 한 시간 가량을 걷고
나자, 여인은 지나가는 화물차를 향해 손을 들었다. 화물칸에 동승하여, 남관의 죽림
온천 입구까지 편안하게 갈 수 있었다. 여인과 나는 화물차의 기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곧장 죽림 온천을 향해 걸었다. 죽림 온천은 남관과 신리역의 중간
지점에 놓여 있는 온천이었다. 온천에 들러 한 시간 가량을 보내면서 몸을 풀었다.
그리고 나서는 여인과 함께 온천 부근에 있는 전통 찻집에 들렀다. 조선 시대의 풍취를
재현한, 목조로 된 2층 건물의 전통 찻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동양란의 그윽한
향기가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물 컵을 가져다주는 아가씨에게 국화 차를 주문했다.
잠시 후에, 말린 국화 송이가 든, 자기로 만들어진 주전자와 함께 찻잔이 나왔다.
찻잔도 옅은 하늘색이 살짝 드리워진 사기그릇이었다. 목제 탁자 위에 놓인 화분들마다
고운 황색으로 어우러진 국화 꽃송이들이 만발하여 있었다. 창 밖에 매달린 장식용
풍경에서는 바람이 불 때마다 쟁그랑거리며 맑은 소리가 울렸다. 국화와 동양란의
향기가 일궈 내는 실내의 분위기는 안빈낙도의 정취마저 자아내었다. 한 마디로 그럴
수 없이 마음이 평온해지는 곳이었다. 실내의 탁자의 수는 정확히 서른 개였고, 대부분이
채워졌고, 서너 자리가 빈 상태였다. 이 정도라면 꽤나 알려진 찻집일 터였다. 연한
자줏빛의 한복을 차려 입은 삼십 대 초반의 얼굴 마담 또한 일품이었다. 눈이 마주칠라치면
가슴마저 떨릴 정도의 미모인데다가, 품격 또한 우아스럽기 그지없어 보였다. 괜히
자꾸만 눈길이 마담에게로만 쏠리려고 했다. 이에, 나는 마음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사람의 배치에 있어서, 적재적소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마담이라고
여겨졌다. 주인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굴 마담 하나는 기막히게 잘 뽑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죽림 온천이 유명세를 탄다고 치더라도 말이다. 전통 찻집에
이렇게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아무래도 마담의 빼어난 미모 탓이라고 여겨졌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감탄을 해 보기도 드문 일이었다. 마담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중앙의 벽면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유려한 필체의 편액이 걸려 있었다. '雲中舞鶴(운중무학)'이란
4글자로 된 한자 어구가 걸려 있었다. 운중무학이란 구름 속에서 춤추는 두루미를
의미하는 것으로, 동양사상의 진수를 나타낸 말이었다. 글자의 의미를 더듬어 본
순간에, 나는 가슴이 섬뜩해져 옴을 느꼈다. 이 정도의 문구를 구사할 인물이라면,
그는 틀림없는 기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렇다면 ? 나는
다시 한 번 편액의 필체와 종이의 색채를 눈여겨보았다. 초서(草書)체로 휘갈겨진
필체엔 글자마다 힘이 뻗쳐 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담황색(淡黃色) 한지의 빛깔은
꽤나 오랜 세월이 흘렀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은 편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회를 봐서, 편액의 글씨를 쓴 사람의 낙관(落款)을 확인해
보리라고 별렀다. 바로 이 때였다. 여인을 찾는 핸드폰의 신호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인은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대고는 눈빛을 빛내며 전화를 받았다.
"어머나, 언니세요 ? 여기는 전주를 지척에 둔 죽림 온천 주변이거든요.
그렇찮아도 한 번쯤 언니 댁에 들를까 했는데 잘 됐군요. 언니의 사는 모습도 한
번 보고, 한 사흘쯤 쉬었다가 이천으로 올라가고 싶어요. 그럼, 나중에 뵐게요, 이만
안녕 !"
이전부터 여인은 내게 전주에는 절친한 이종사촌 언니가 산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점이었다. 지금까지 함께 지내다가 외톨이가
되는 기분이라, 다소 서운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한편으로는 내 행동의 자유를 얻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여인이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화장실을
다녀오는 체하며 편액의 낙관을 확인했다. 편액에는 검봉(劍峰) 형야성(邢野聲)이라는
낙관이 찍혀 있었다. 이전에 안개노인은 전주의 만덕산(해발고도 761.9 m) 주변은
예로부터 허다한 기인이사들이 살던 터전이라고 했었다. 기인이사들 중에는 문무에
통달한 선비들과 무인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문득 나는 검봉이라는
아호에 흥취를 느꼈다. 아호에 '칼 검(劍)'자가 들어 있다면, 필시 무인임에 틀림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인의 필체가 저 정도의 달필일진대, 형야성이란 사람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일단 뭔가 마음에 실마리가 잡히기만 하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 나의 성격이었다. 일단은 여인을 배웅한 뒤에, 다시 찻집에 들러서
마담에게 형야성의 내력을 물어보리라고 작정했다. 택시에 오르기 전에 여인은 생긋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여인과 악수를 하며, 좋은 여행이 되기를 빈다면서,
다정한 미소를 실어 보냈다. 여인을 실은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찻집으로 되돌아섰다. 카운터에 서는 순간에,
마담은 우아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 조금 전에 나가셨던 분 맞죠 ? 혹시 빠뜨리신 물건이라도
있으신가요 ? "
"아뇨. 한 가지 여쭤 볼 말이 있어서요. 다름이 아니라, 저 편액의
필자인 형야성이란 분에 대해 좀 알고 싶거든요. 제가 쌍화차를 두 잔 살 테니, 설명
좀 해 주시지 않을래요 ? "
마담은 고용된 얼굴 마담이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전통 찻집인
'죽림(竹林)'의 어엿한 주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형진경(邢珍境)이었고, 나와 한동갑인
서른 한 살의 이혼녀였다. 여태껏 자식은 없었고, 이혼한 지가 3년째라고 했다. 이혼
사유는 서로의 유별난 성격 차이였다면서 묻지 않았던 말까지 들려주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형야성의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졌다. 형야성은 진경의 6대조 할아버지로서,
조선 인조 때의 장군이라고 했다. 족보에 의하면, 형야성은 무예의 달인이었으며,
유달리 풍류를 즐긴 기인이었다는 거였다. 형야성은 1623년의 인조 반정 때에 공을
세우면서부터 만덕산 주변에 정착해 왔다는 거였다. 형야성은 김류, 이서 등의 서인(西人)들의
배려로, 인조로부터 권세를 부여받아 풍류를 즐기며 살았었다. 지금까지 형야성에
관해서는 이 정도로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남긴 검법 도식(劍法圖式)이
근래에 만덕산 석동(石洞)에서 발견되면서부터 일약 유명해지게 되었다. 근래에 들어
부쩍 전통 찻집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도 실은 그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형야성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여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전통 무예를 연구하는 사학자들의 견해로는 말이다. 형야성이 남긴 검법은
우리 나라의 검법과는 확실히 계통이 다른 검법이었다. 굳이 유파를 따지자면, 청나라
초기에 대폭 수정된 중국의 무당검법(武當劍法)과 비슷하다는 거였다. 그리하여,
그 동안 몇 차례나 중국 북경대학의 역사 고증반의 사학자들이 다녀갔다는 거였다.
내일 오전 10시에는 중국 무당검법의 전승자인 두 명의 여인들이 죽림을 방문한다고
했다. 그녀들은 현재 북경대학의 사학과에 재학중인 20대 중반의 대학원생들이라고
했다.
진경은 느닷없이 내게, 중국의 동정호와 소항의 절경을 감상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도 가 보고는 싶었는데, 아직은 못 가 봤노라고, 태연스레
중국어로 대답했다. 진경은 깜짝 놀란 얼굴로 한동안 나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해양과학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중국인들을 자주 만나는 관계로 중국어를 좀
익혔노라고 밝혔다. 진경은 여전히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이 번에는 우리말로 내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종철씨, 2층의 특실을 비워 놓을 테니, 오늘은 여기에서 주무시고
가세요. 이 곳 찻집 우측으로 3개의 특실이 더 있거든요. 특실은 호텔급에 해당되는
방으로, 주로 귀빈들을 접대하는 숙소로 사용하고 있어요. 제가 거처하는 숙소는
이 건물의 1층 건물 전체예요. 애초에는 상가 건물로 임대해 주려고 지었는데, 아직까지는
시기가 이른 모양이에요. 숙박비는 받지 않을 테니까, 혹시라도 숙박비 걱정은 하지
마세요. 어디까지나 종철씨를 귀빈으로 모시고 싶어서 그래요. 검술의 달인이시고,
중국어에 능통하시니까, 제가 오늘 밤에 종철씨를 귀빈으로 모시고 싶거든요. 저는
대학 때의 전공 학과가 중국어였기에, 중국어에 익숙하지만요. 종철씨의 경우에는
비전공이면서 그렇게까지 중국어에 유창하리라고는 전혀 뜻 밖이었어요. 제가 잘
모실 테니까, 오늘 밤은 꼭 여기서 주무시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는 저와 함께 내일
중국에서 도착하는 두 여인들을 만나 주세요. 그리고, 만덕산 석동의 검법 도식을
전문가의 견해로 설명도 좀 해 주시구요, 알았죠 ? 지금부터 30분 정도만 주변을
구경하시고 돌아오시면, 식사 준비와 함께 특실을 치워 놓을게요. 저의 제안을 받아
주시는 거죠 ?"
"네, 기꺼이 수락하죠. 아닌게아니라, 저도 석동(石洞)의 검법
도식이 꽤 궁금하거든요. 그럼, 잠시 바람 좀 쐬고 돌아올게요. "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찻집을 빠져 나와 온천 주변의 경치를 둘러보았다.
온천의 북동쪽으로는 하늘 높이 치솟은 만덕산의 산세가 웅장하게 펼쳐져 있었다.
대관절 저 산 어디에 절세적(絶世的)인 검법이 새겨져 있더란 말인가 ? 나도 몰래
중얼거리면서 밤이 깊어지는 줄도 모른 채 만덕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기슭 주위로는
저녁 안개가 뽀얗게 서려 산의 신비함을 더욱 고조시켜 주었다. 한동안 넋을 잃고
만덕산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까, 찻집 여 종업원이 나를 불렀다.
"어머나, 여기에 계셨군요. 저녁 준비가 다 되었기에 모셔 오라고
해서 왔어요. 저를 따라오세요."
시계를 보니, 저녁 7시 무렵이었다. 저녁 식사가 차려진 곳은 전통 찻집
건물의 1층이었다. 산해진미로 구색을 갖춘 음식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미각을 자극할
정도였다. 커다란 식탁에 진경과 둘만 마주앉아, 세상사를 얘기하며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치자, 여 종업원이 나를 특실로 안내했다. 글자 그대로 호텔의
특실에 해당할 만큼의 시설이었다. 가로와 세로가 각각 5 m에 달하는 침실의 중앙에는
2인용 침대가 놓여 있었다. 사방의 벽면에는 은은한 샹들리에의 불빛이 운치 있게
비치고 있었다. 벽면을 따라서는 대형의 거울이 연달아 부착되어 있었다. 거울 앞쪽으로는
40 cm의 폭을 가진, 무릎 높이의 목제(木製) 진열대가 펼쳐져 있었다. 진열대 위로는
십여 개의 화분이 있었고, 거기에는 만발한 국화 꽃송이로 남실대고 있었다. 양쪽
벽면을 마주 보게 널따란 창문이 뚫렸고, 창 밖에는 풍경이 매달려 있었다. 실내엔
온통 은은한 국화 향내로 감미로웠다. 벽면에는 근래에 이름이 높은 화가가 그린
만덕산의 산수도가 웅장한 모습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데, 침상의 머리 부분의
벽면에는 두 가지의 물건이 걸려 있었다. 하나는 대금이었고, 하나는 거문고였다.
나는 내심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단한 운치의 주인이라고 말이다.
"손님, 우선 욕실에서 목욕을 하시죠. 이건 목욕 후 입으시라고
해서, 주인 언니께서 주셨어요. 여기서는 주인 언니를 모두 검주(劍主)님이라고 불러요.
아마도 검객의 후예라고 해서, 예우하여 부르는 모양이에요. 그럼, 이만 물러갈게요.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저기 인터폰을 사용하세요."
목욕을 마치고 침실에 들어서니, 밤 9시 무렵이었다. 살짝 열린 창 밖에서는
청량한 음향의 풍경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목욕한 뒤라서 그런지
국화의 향기가 사람의 심금을 울릴 정도로 감미로우면서도 그윽했다. 벽면의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나신을 들여다보며,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거울에는 내가 봐도
감탄할 정도의 탄력적이고도 균형 잡힌 근육질의 청년이 미소짓고 있었다. 이윽고
나는 옷을 입기 위해, 침상 위의 옷가지를 들어 올렸다. 속옷 한 벌과 살결이 그대로
비치는 남색의 얄따란 두루마기 형태의 잠옷이었다. 잠옷의 등 부분에는 한자로 '劍仙'(검선)이라는
두 글자가 흑색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검선이라 ? 기고 만장한 별호로군 ! 도대체
무예의 실력이 어느 정도나 된다고 검선이라는 별호를 쓰는 걸까 ?
생각에 잠긴 채, 무의식적으로 막 옷을 입고 난 순간이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는 듯, 침실의 문이 열리며 진경이 들어섰다. 나는 순간적으로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진경의 의상 역시 속옷이 그대로 비치는 연두색의 얄따란 한복형의
잠옷이었던 거였기 때문이다. 아니, 여인이 잠옷 차림으로 남자의 숙소에 들어오다니
?
"호호호 ! 놀라셨죠 ? 이건 잠옷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잠옷이
아니에요. 상승 무학을 단련하는 수련복(修練服)이라서, 속살이 그대로 다 비치게
만든 것뿐이에요. 상승의 기력을 발산하기 위해서는 옷이 얇을수록 효과가 높지 않겠어요
? 괜히 부끄러워하시지 마세요. 저는 주로 남의 말을 잘 믿는 사람이지만, 반드시
확인까지도 하는 사람이에요. 지금의 무술복 차림으로 바로 옆 방으로 가시죠. 거기는
평소 때의 저의 무술 수련방이거든요. 거기에서 잠시 종철씨의 무학을 좀 지도받고
싶군요. 불편하시지는 않으시죠 ? 자, 그럼 저를 따라 오세요."
나는 아무래도 얼굴이 화끈거려 진경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진경의 얇은 무술복 안에는 분명 속옷이 있었지만 말이다. 너무나 얇았기에, 속옷
안의 살결이 은은히 다 비쳐져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꾸만 달아오르는 얼굴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진경의 속옷에 생각이 미치자, 문득 나의 속옷이 염려스러웠다.
진경이 준 속옷을 입을 때는 생각 없이 입었었는데 말이다. 이제 진경의 옷차림을
본 순간에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들어 벽면에 부착된
대형 거울을 바라본 순간에 기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랍게도
내가 착용한 속옷마저도 얇아서, 전신은 물론이요, 성기까지도 은은하게 드러났던
터였다. 나는 당황하여 몸을 돌리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종철씨 ! 제 말을 못 들었어요 ? 이 옷은 중국 사천성에서만 나는
비단으로 만든 무술복이에요. 저는 이미 종철씨의 모든 부위를 다 보았어요. 새삼
몸을 돌리실 필요는 없다구요. 자, 이제 옆방으로 가서, 목검(木劒)으로 검술 대결을
하도록 하시죠. 저를 이기신다면 모르되, 만약 제게 지게 된다면 말이죠. 종철씨는
오늘밤 제 명령대로 해야만 된다구요, 아시겠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