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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5회
달그림자
손
정 모
5. 행운유수(行雲流水)
진주역을 밤 9시 18분에 출발한 무궁화호는 전라선을 타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인과 나는 열차의 진행 방향으로 의자를 전환하고는 나란히
앉았다. 창 밖에는 11월 하순의 초승달이 반공에 떠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서서히
창 밖의 바람결은 비수처럼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세월의 변화가 이처럼 민감한가를
생각하면서 잠시 허공을 바라보자니까, 여인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사형,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시나요. 사람을 곁에 앉혀 두고
말이에요. "
말을 끝낸 여인의 얼굴에선 방긋 미소가 피어오르다가 금세 숙연해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묘한 것이 여자의 표정 변화라더니, 어쩜 이렇게도
표정의 변화가 심할까하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아냐, 특별한 걸 생각하는 건 아니라구. 그저 세월의 흐름이 무상하구나하고
과거를 한 번 떠올려 본 거였어."
말을 마치며, 여인의 시선이 멈춘 곳을 바라보다가 나도 몰래 움찔 놀랐다.
거기는 통로 하나를 건너 대각선 방향의 전방이었는데, 확실히 이채로운 인물이 앉아
있었다. 좌석이 뒤를 향해 있었던 터라, 나와는 서로 마주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여건이었다. 이목을 끄는 인물은 여인과 비슷한 연배의 스물 다섯쯤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수수한 복장에 면도도 하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이따금씩 사물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얼굴 전체의 윤곽은 이목구비가 아주 잘 갖추어져
있어, 한 마디로 걸출한 용모였었다. 이목을 끄는 점은 단순한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쩌다가 시선이 맞부딪치기라도 할라치면, 느낌으로 전해져 오는 강렬한 인상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였다. 빼어난 외모에 뭔가 가슴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릴 것
같은 섬뜩한 이미지 때문이었다. 나는 착각인 듯한 느낌이 들어, 무심함을 가장한
얼굴로 두어 번 바라보았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바라볼수록 점차 더욱 이끌리는
듯한 묘한 매력을 느꼈다. 나는 슬그머니 눈을 내려 감고는 사내의 거동을 좀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나는 곁의 여인을 흘낏 바라보았다. 여인은 졸리는 듯 머리를 의자에
기대고는 조용히 상념에 잠기는 모양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 사내의 시선은 점차 나를 향해 흘낏거리고 있었다.
우연으로 돌리려 했지만, 나를 향해 흘낏거리는 빈도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나는
반쯤 눈을 감은 채, 사내의 행동을 은밀하게 살피기만 했었다. 사내는 때때로 한숨을
내쉬는 것 같기도 했고, 흐느끼는 듯도 했다. 어떨 적에는 눈물을 닦는지 팔을 들어,
소맷귀로 눈시울을 지우기도 했다. 철커덕 철커덕 소리를 내며, 열차는 하동(河東)을
지나고 있었다. 멀리 백사장에 드리워진 달빛이 송림에 부딪혀 실타래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고목이 되어 휘늘어진 하동 송림(松林)의 행렬이 열차를 향해 길다랗게 요동질하고
있었다. 사내는 어느 순간에 화가 난 야수처럼 눈을 부라리며 주위를 마구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나를 향해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사내와 눈빛이
맞부딪치는 순간에, 온통 가슴이 서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 내가
지금껏 남의 눈빛에 기가 질린 적이 있었단 말인가 ? 이건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얘기가
아닌가 ? 무엇보다도 나의 자존심이 이런 걸 묵과하지 못했다. 서서히 나의 가슴의
일각에서 부아가 치밀어 오르려고 했다. 하지만, 나 자신도 몰래 쓴웃음을 지으며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문득 지금의 나의 위치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제12대의
유선문의 제자가 아닌가 ? 게다가 심성의 수련까지 다 마친 사람이지 않는가 말이다.
이젠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유선(流仙)의 아름다움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보여 주어야 할 사람이 아닌가 말이다. 모름지기 유선(流仙)이란 성품과 언행이
경지에 이른 달인을 말함이었다. 하여, 범부(凡夫)들과 같은 시각에서, 하찮은 일로
경거망동을 할 수야 없는 일이었다. 나는 여전히 반쯤 감은 눈으로 사내의 거동을
은근히 살피고 있었다. 어느새 사내는 흉맹(凶猛)스러운 눈길을 거두어, 찬바람이
나부끼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헌데, 놀랍게도 그의 왼 뺨 아래로는 눈물이
가느다랗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못 볼 장면이라도 본 사람처럼 슬며시 가슴이
저려 왔다. 나는 반쯤 눈을 감은 채, 사내의 정황을 헤아리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나는 문득 자문(自問)해 보았다. 대관절 내가 왜 저 사내를 지켜봐야 한단 말인가
? 그렇게도 내게 할 일이 없더란 말인가 ? 나는 나의 할 일을 떠올리며 옆 자리의
여인을 흘낏 바라보았다. 여인은 잠이 깊이 든 모양으로, 입술이 열린 채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열차가 막 구례역을 지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열차 안이 다소 소란스러워지며
한 떼의 사람들이 열차 안으로 휩쓸려 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전라도 본연의 투박한
사투리가 강한 음색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야간 열차이어선지 좌석은 어디에나 여유로움이
있었다. 헌데도 칠순 가량의 노인과 어린 소녀가 사내의 앞 좌석에 앉으려 하고 있었다.
나는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사가 극도로 불안해 보이는 사내가 무슨 망동을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첫눈에 노인의 신수는 오동나무에 깃든 봉황새인
양, 온통 훤하고 말끔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차림새도 깨끗한 옥양목의 한복 바지저고리
차림이었다. 바지저고리 위로는 남색의 기지 두루마기를 점잖게 걸치고 있었다. 혈색도
은은히 선홍(鮮紅)의 빛이 감돌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또렷한 이목구비가 압권이었다.
길다란 눈썹은 연방 가볍게 흔들거리는 것이 마치 하강한 신선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존경심이 일게 만드는 기품이었다. 손녀로 보이는 소녀는
중학교 1학년생쯤 되어 보였는데, 무척 깔끔하고도 아리따운 얼굴형이었다. 노인은
소녀를 향해 말했다.
"얘야, 바람이 너무 찬 날이로구나. 너무 안쪽으로만 들어가려고
하지 말고 여기 이 자리에 앉았으면 좋겠구나. 어디 좌석표를 한 번 보렴. 자리가
어디쯤이냐 ? 뭐라고 ? 우리가 앉으려던 바로 이 자리라구 ? 잘 됐네그려. 자, 이쪽으로
와서 앉으려무나."
"할아버지 ! 제가 바깥 쪽 통로 쪽으로 앉을 테니까, 할아버지께선
창 쪽에 편히 앉으세요."
"허허, 네가 통로 쪽으로 앉고 싶니 ? 좋아 네 편한 대로
하려무나. 이 할애빈 네가 창 쪽에 앉아 편하게 잠드는 모습을 보고픈데 말이다.
헛허허."
바로 눈앞의 사내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행동이었다. 사내는 노인을
향해 뭐라고 말을 할 듯 말 듯하다가 그대로 참는 모양이었다. 내게는 느닷없이 나타난
노인과 소녀마저도 범상한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꿈을 꾸는 것은
아닌지 의아스러운 느낌이었다. 사내의 존재에도 풀 수 없는 의혹으로 골몰하던 참이었는데
말이다. 정체 불명의 노인과 소녀까지 나타났으니, 나의 빈약한 머리로는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는 없잖은가 ? 나는 혼란스러워지려는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사내의
행동 쪽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헌데 뜻밖에도 소녀의 입으로부터 놀라운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할아버지, 해동비음(海東秘音)이 과연 유선문 고유의 무학(武學)인가요
? 허 노인께서는 왜 해동비음의 비밀을 캐지도 못하고 절명하셨나요 ? 그리고, ……
"
소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인은 황급히 소녀를 제지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이런 곳에서 함부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란다. 할애비가
평소에 그렇게도 주의를 주었건만, 왜 이런 실수를 하냐 말이다. "
소녀는 얼굴 가득히 홍조를 띠면서 기어드는 듯한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할아버지,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세요, 네 ?"
"그래그래, 알았으면 됐다. 밤이 깊어졌으니까, 눈을 좀 붙이려무나."
나는 갑작스럽게 가슴이 쿵쿵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아니, 뜻밖에 이런
곳에서 의문의 실마리를 풀 단서를 찾게 되다니 ! 허 노인이란 사람은 누구인가 ?
나는 나의 사부님인 안개노인과 다른 노인을 구별하기 위해서 말이다. 노인이란 말은
사부님께만 쓰기로 했다. 그리하여 눈앞의 노인은 '한복 차림의 노인'이라는 뜻으로
'한로(韓老)'라고 나타내고 싶었다. 지금 눈앞의 한로와 허 노인의 관계는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 또한 한로가 해동비음은 어떻게 알며, 또 유선문은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 나는 생각할수록 의혹이 짙어졌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유선문을
알고 있는 이들 조손(祖孫)이 전라선의 야간 열차를 타다니 ! 설사 같은 야간 열차를
탔더라도 말이다. 하필이면 열차의 같은 칸에서 만나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잖은가
말이다. 하여, 나는 우발적으로 느껴진 만남에 얽힌 필연성의 고리를 찾아내고 싶었다.
문득 흘러간 학창 시절에 노교수(老敎授)가 거드름을 피우며, 강조하던 말이 기억났다.
"과학이란 말일세. 절대로 비약이란 없는 법이라구. 그 누가 비약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근저를 들여다보면 말일세. 하나같이 점진적인 변화들의 누적
결과란 것이 여실히 드러났었네. 이와 마찬가지로, 기회나 우연을 만날 떠벌리는
친구들을 보면 말일세. 하나같이 우연을 맹신하는 어리석음을 가지고들 있었었네.
정작 그들이 우연이라고 주장하는 그것마저도 필연의 귀결이라 이 말씀이야, 알아듣겠어,
제군들 ?"
그래 ? 그렇다면, 오늘 이 열차에서의 저 한로와 나의 만남이란 어떤
필연의 누적이었을까 ? 오늘의 한로와 나와의 만남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면 말이다.
어딘가에는 오늘이 아니고서는 만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의 고리가 있었으리라.
나의 과거를 한 달만 되돌린다면, 경남 고성의 상족암(床足岩)으로 가 있었을 터였다.
반면에, 한로와 소녀는 어딘가에서는 유선문과 해동비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게 섬광처럼 영감이 떠올랐다.
정작 내가 할 일이란 한로와 내가 만났어야만 했던 필연성을 찾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서울행을 슬그머니 포기하고, 한로가 도중에 내리는 곳에 따라 내리기로 마음속으로
작정했다. 마음을 정하자마자 나는 여인을 깨워 출입문 쪽으로 나가 나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여인은 다소 서운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마음을 정하고는 내게 말했다.
"사형, 알았어요. 그럼, 사형 생각대로 진행하세요. 나는 사형이
수상하다고 여긴 사내를 계속 추적하여 살펴볼게요. 그리고, 제게 수시로 연락 주시는
것 잊으심 안 돼요, 알았죠 ? 그리고, 잠깐만요. 왜 그 사내를 그렇게도 의아스런
인물로 여기는 거죠 ? 이유나 한 번 들어보고 싶네요."
"우선 내 직감 때문이야. 사내는 틀림없이 범상치 않은 인물로
여겨지거든. 내가 그렇게 여기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구. 한 가지는 인물이 내뿜는
기상이 범상치 않았다는 점이었지. 뭐라고 할까, 실력을 감추고 있는 무술계의 기인이라는
느낌이 피부로 와 닿았어. 다른 한 가지는 한 시간 이상을 고뇌와 탄식을 되풀이했다는
점이었어. 여기에는 필시 말 못할 어떤 사연이 있다고 판단된단 말이야. 어쩜 우리의
유선문과도 밀접한 관계일지도 모르잖는가 이 말이야."
자리로 되돌아가 앉으면서부터 여인은 은밀히 사내의 거동을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한로와 소녀를 줄곧 관찰해 나가며, 여인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한시라도 한로와 소녀의 거동을 살피는 데에 소홀하지
않았다.
줄곧 긴장 속의 시간이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 차내의 방송으로 다가올
역이 곡성역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마침내 한로와 소녀가
일어나서 짐을 챙기더니만, 출구를 향해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여인에게 눈짓을
보낸 뒤에, 슬며시 일어나 한로와 소녀를 좇기 시작했다. 곡성역의 개찰구를 통해
빠져나가면서부터 나는 되도록 멀찍이 미행을 하며 따라 나섰다.
곡성 서쪽에는 동악산(해발고도 735.3 m)이 우람하게 치솟아 있었다.
동악산을 중심으로, 북에는 매월, 서에는 남양, 남에는 원등, 동에는 곡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동악산은 산세가 웅장하면서도 골짜기가 깊어, 사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끊임없는 명산이었다. 산의 곳곳에는 짙은 솔숲으로 덮여, 연중 솔 향기가 끊임없이
흩날리는 곳이기도 했다. 한로와 소녀는 새벽 무렵까지는 곡성의 강가를 서성거리면서
뭔가 소곤거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햇살이 퍼질 무렵부터 오솔길을
따라 동악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솔 향기에 젖어들며 전신에 기력이 차 오르는
것을 느꼈다. 되도록 심호흡을 길게 내쉬며, 전신의 근육을 이완시키면서 마음을
평온하게 가졌다. 동악산 주봉의 남쪽 산기슭에는 도림사라는 아담한 사찰이 들어서
있었다. 한로와 소녀가 찾아드는 곳은 다름 아닌 도림사 경내였었다. 나는 좌우로
머리를 뒤흔들며, 이런저런 궁리를 다해 보았다. 한로가 도림사에 들어서기 전에,
어떻게 해동비음을 알고 있느냐고 물어야 옳을 것인가 ? 아니면 사찰 내의 누구와
만나는지를 살펴본 후에, 한로를 만날 것인가 ? 어느 방식을 채택할 건가를 잠시
망설인 후에, 나는 결국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뒤로는 병풍처럼 펼쳐진 절벽을 배경으로
삼아, 산 중턱에 우뚝 자리잡은 사찰. 앞으로는 소나무와 잡목으로 어우러져, 끝없이
널브러진 광활한 수풀. 맑은 샘물처럼 흘러드는 청아한 음향의 산새 소리들. 온 몸으로
향긋하게 휘감기는 그윽한 솔 향기. 잎새들 위로 쏟아져 내리다가 은빛으로 부서져
바람에 흩날리는 빛살들. 진정 내겐 세속을 벗어난 선경(仙境)이 바로 이곳인 듯했다.
그냥 선 채로 향기 그윽한 맑은 바람이 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몸가짐을
바로잡으며 경건한 마음으로, 한로를 먼발치로 뒤따라갔다. 이윽고, 도림사의 경내에
들어섰다. 사방에서 불어드는 솔바람에 실려, 풍경 소리가 청량하게 산사에 휘감기고
있었다. 천왕문을 넘어서면서부터 나 자신도 몰래 두 손을 올려 먼발치로 대웅전을
바라다보며 합장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움찔 놀랐다. 나는
철저한 무신론자였지, 불교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심으로 도림사의 분위기에 압도당하여 혀를 내둘렀다.
한로와 소녀는 대웅전에 들러 경배를 올리고 난 뒤엔 주지승을 찾았다.
50대 초반의 건장한 골격의 주지는 인상이 퍽 후덕스러워 보였다. 나도 당당하게
대웅전에 들러, 시주함에 불전을 넣고는 경건한 마음으로 삼배를 올렸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오늘의 일이 정말 순조롭게 성사가 되기를 기원했다. 대웅전을 막 벗어나올
무렵이었다. 주지는 한로와 소녀를 데리고 절의 뒤편 오솔길을 오르고 있었다. 나도
어느 정도 뜸을 들인 후에 오솔길을 뒤따라 올랐다. 세 굽이 길을 돌고 나자, 막다른
듯한 절벽이 눈앞을 막아서며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의 입구에는 하얀 팻말에 붉은
글씨로 '외부인 통제 구역'이라는 경고문이 적혀 있었다. 이미 주지와 한로 일행은
동굴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가눌 길이
없어, 곧바로 팻말 앞에 이르렀다.
<
외부인 통제 구역 >
이
곳은 사찰 내의 승려들이 수도 정진하는
참선
장소이므로, 타인의 출입을 통제합니다.
-
동악산 도림사 주지 벽운 알림 -
나는 선뜻 계속해서 발걸음을 내딛기가 망설여졌다. 그대로 뒤로 물러서야만
하는가 아니면 곧장 들어가 봐야만 하는가 ? 한 동안 나는 결정을 못 내린 채 고뇌에
쌓여 있었다. 그러다가, 여기까지 온 바에야 무슨 일이 벌어지든 부딪혀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신중하면서도 날렵한 동작으로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면서 동굴 내부의 재질을 살펴보았다. 고생대의 퇴적층으로 보이는 석회암
동굴이 안쪽으로 깊숙이 뚫려 있었다. 전혀 인공의 흔적이라곤 찾을 수 없는 천연
그대로의 동굴이었다. 높이는 3m쯤 되어 보였으며, 폭은 네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동굴 내부로 스며드는 물기로 인하여, 동굴의 벽면은 은은하게 반들거리고
있었다. 동굴은 비교적 굴곡이 완만했으며, 점차 지하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대략
200m쯤 걸어들어 갔을까 ? 홀연 50여 명이 들어설 만한 광장이 나타났고, 거기에는
촛대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광장은 원형으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광장의
뒷면에는 화강석으로 된 거대한 불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광장의 천장에는 종유석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으며, 바닥에는 널따란 비닐 장판이 깔려 있었다. 아마도 석순들은
의도적으로 제거되고, 집회 장소를 위해 바닥을 평평하게 다듬어 놓은 모양이었다.
광장 뒤쪽으로도 길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아예 철판으로 가려져 있었다. 광장에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오직 주지와 한로 및 소녀가 전부였다. 나는 광장이
바라보이는 통로의 모퉁이에 숨어서 그들 일행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들
일행과의 거리는 대략 십 미터 정도는 되었으리라.
주지는 잠시 숨결을 고르더니, 철판 뒤편으로부터 거문고를 꺼내 왔다.
주지를 바라보던 한로가 소녀와 함께 장판 위에 앉으면서, 말문을 열었다.
"이 보게, 벽운. 근래에 세간에서는 놀라운 소문이 돌고 있네.
나도 처음에는 미심쩍어했지만 말일세. 상황을 종합해 본 바로는 뭔가 커다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옛날부터 기(氣)를 악곡에 사용한 경우는 사람의 생명을
어떻게 해 보려는 의도밖에는 없었네. 기공(氣功)의 수련이란 결코 아무나 달려들
만한 일은 아니었네. 달려든다고 해서, 마음대로 되는 것 또한 아니지만 말이야.
그런데, 자네도 들었을지 모르지만, 허중천(許中天)이란 기인을 알고 있겠지 ? 맞아,
행적이 어느 날 갑자기 끊겨 버린 바로 그 기인을 말함일세. 허중천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구한말의 천부적인 문무 겸비의 달인이었네. 그는 특히 중국의 죽림칠현을
사모해 왔으며, 자신의 행적마저도 은연중에 그들을 닮고 있었네. 나의 돌아가신
은사인 청해노인(靑海老人)마저도 평소에 그렇게도 존경하며 추앙했던 분이었네.
나는 스승을 통해, 허중천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었네. 이제 내가 오늘 아침부터
이곳을 찾은 연유를 들려주겠네."
한로는 잠시 말을 멈춘 뒤, 내가 숨어 있는 모퉁이를 유심히 노려보았다.
나는 자신도 몰래 가슴이 뜨끔거렸다. 나는 혹시라도 나의 행적이 드러난 것은 아닌가하여,
잠시 긴장했다. 하지만, 한로는 이내 주지를 돌아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한로의
말에 따르면, 청해 역시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하는 기인이라는 거였다. 청해는
정식으로 제자를 두지 않는다는 허중천을 수시로 따라다니며 많은 무학을 지도받은
터였다. 허중천의 첫눈에 든 청해는 점차로 기공의 수련에 이르기까지 많은 지도를
받았다. 허중천은 기력(氣力)을 실은 거문고의 연주에까지도 혼신의 열정을 다해
청해를 지도해 주었다. 점차 거문고의 연주에 심취한 청해는 심혈을 기울여, 기력의
운용에 몰입했다. 그러던, 어느 날 허중천은 잠시 어디를 다녀올 데가 있다면서,
청해의 곁을 떠났다. 허중천이 길을 떠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석양 무렵이었다.
허중천은 엄청나게 괴롭고도 지친 표정으로 곡성으로 되돌아왔다. 몸에 이렇다 할
상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극도로 기력이 떨어진 것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러더니 내리 이틀간을 혼수 상태로 허우적거리다가 사흘만에 절명하고 말았다.
절명하기에 앞서, 허중천은 청해에게 겨우 들릴락 말락한 소리의 한 마디만을 남겼다는
거였다.
"경남 고성군의 해안에...... 쌍발이라는 바위 동굴이 있는데......
나의 소장 물건들을...... 남겨 두고 떠나네. 시간이 난다면, 부디......"
그런데, 청해는 상족암의 쌍발을 찾으려고 벼르기만 하다가, 수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청해 역시 눈을 감기 직전에, 간절한 목소리로 상족암을 찾아달라는
당부를 했었다. 한로 역시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다가 작년에 상족암을 찾았건만,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이미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역력했던 터였다. 한로는 자신의
태만함을 뼈저리게 뉘우치며 한탄해 보았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로는
그 날의 죄책감으로 며칠 동안을 몸져누웠었다. 그러다가, 뜻밖에도 제자인 국악원
교수로부터 하나의 놀라운 소문을 듣게 된 거였다. 다름 아닌 '해동비음'이라는,
기공으로 연주되는 놀라운 악곡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얘기였다. 나는 이 때 머릿속으로
이전에 여인이 내게 들려주었던 얘기를 떠올렸다. 여인의 스승인 옥청자(玉靑子)는
국악원의 은퇴 교수였었고, 그녀가 해동비음을 연주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옥청자와 가깝게 지내던 후배 교수들 중의 하나가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교수가 바로 한로의 제자일 수도 있는 터였다. 나는 스스로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가며, 한로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로가 이 소문을 들은 것은 바로 이틀 전이었다. 이것은 제자와의 전화
통화의 결과였다. 소문을 듣는 순간, 한로는 무형의 위기 의식을 느꼈다. 일이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제자에게 해동비음을 처음으로 말한 사람이 누구였는가를
거듭 물었지만 말이다. 제자는 더 자세한 것은 잘 모른다는 대답으로 일관했었다.
제자의 심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한로였기에, 제자의 말을 믿기로 했다. 대신 자신이
청해로부터 배운 악곡이 혹시라도 해동비음은 아닌가 의심스러웠었다. 그리하여,
기공 수련의 달인인 벽운에게 자신의 악곡을 들려주어, 악곡의 위력을 알아내고 싶었다.
벽운은 흔쾌히 동의하며, 자신이 들고 있던 거문고를 한로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면서, 광장 뒤의 철판을 두드리자마자 열 명의 젊은 학승들이 몰려 나왔다. 그들이
한로를 보자마자 공손히 합장을 하는 것으로 봐서, 꽤나 친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학승들은 금세 자리를 잡고 앉더니, 전형적인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러면서, 눈까지
단정하게 감고 앉아 동굴 안은 금세 숙연한 분위기였다. 한로가 뭐라고 말하자마자
벽운과 소녀도 가부좌로 앉은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소녀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한로와 함께 다닌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공 수련의 정도가
심오하리라고 예측했다. 동굴 안은 잠시 정적에 휩쓸리는가 싶었다. 이윽고, 바닥에
앉은 한로가 거문고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첫 음절이 어떻게 시작되는가에 모든
청각을 집중시켰다. 시작부터가 해동비음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악곡이었다. 하지만,
악곡은 운치와 기품이 잔뜩 서려 있어, 가히 악곡으로서는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악곡을 들을수록 점점 이상스러운 느낌에 휩싸였다. 약간의 기력이 실려 나오기는
했지만, 이건 아무래도 기공 음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도중에서 예상치
못한 변화가 생기지는 않을까하여 끝까지 귀를 기울였지만 말이다. 한로가 거문고를
세우고 자리에서 일어설 때까지도 기공 음률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내심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소리 없이 동굴을 빠져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눈이
뒤집힐 만한, 놀라운 장면이 벌어진 거였다. 가부좌를 틀고 단정히 앉아 눈감고 있던
열 명의 학승들이 차례차례 나뒹굴기 시작했다. 그리고, 벽운과 소녀마저도 부들부들
떨며 몸이 앞뒤로 마구 흔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단전에다 기력을 실어 넣으며, 혹시라도
내가 악곡으로부터 내상(內傷)을 입지는 않았는지를 점검했다. 기를 운행시킨 결과로는
나는 전혀 이상이 없음을 알았다. 동일한 기파(氣波)에 휩쓸리더라도 내공의 수련
정도에 따라, 감응의 정도가 다른 터였다. 이 때, 한로는 입가에 쓴웃음을 지으며,
벽운과 소녀의 등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벽운과 소녀는 크게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멀뚱거렸다. 이어서, 한로는 신속한 몸놀림으로
십여 명의 승려들의 등을 주물러대었다. 금세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학승들이 일어나 앉기 시작했다. 나는 느닷없이 당혹스러워졌다. 분명 한로가 연주하던
악곡이 해동비음이 아니란 건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런데도 무형의 기력으로
장내의 사람들을 쓰러뜨리지 않았던가 말이다. 나는 나의 거만스러웠던 생각을 떨쳐
버리고, 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학승들은 벽운의 손짓으로 다시 철판
뒤의 공간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벽운은 철판 뒤로 들어가더니, 금세 얼굴을
드러내었다. 아마도 학승들이 멀리 물러난 것을 확인한 듯한 표정이었다. 다시 셋은
삼각형의 꼴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벽운이 감탄한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역시 선배님께서는 대단하시더군요. 어쩜 기공의 수련이 그 정도에까지
이르렀는지요 ? 저는 아직도 놀라 부들부들 떨릴 지경입니다. 저로서는 조금 전의
학승들이 기공 수련을 쌓은 승려들이라, 쉽게 나뒹굴지는 않으리라고 확신했었거든요.
저 역시도 마찬가지였지요. 저는 솔직히 선배님의 기공이 저보다 높은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오늘 선배님께 참패를 당한 셈입니다."
한로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확실한 것은 내가 연주한 악곡이 해동비음이 아니란 걸 확인했었네.
나는 스승으로부터 해동비음을 전수받지는 않았지만 말일세. 혹시라도 내가 물려받은
것 중에 들어있지는 않나 해서, 학승들에게 시험해 봤을 뿐이네. 이왕 자네가 나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으니까 말일세. 이제 내가 스승으로부터 들은 해동비음의 내력을
알려 주겠네."
한로는 자못 신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숨을 죽인
채 한껏 청력을 돋워 한로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해동비음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타난 것은 조선 인조 때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있던 직후였었다. 인조 14년(1636년)에,
조선은 청나라에게 패하여 삼전도(三田渡)에서 수항단(受降壇)을 쌓고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삼전도란 지금의 서울 송파구 삼전동(三田洞)을 일컫는 거였다. 삼전도는 원래
경강삼진(京江三津) 중의 하나였던 '삼밭나루'가 있었던 곳이었다. 역사적으로 삼밭나루가
처음으로 자리잡은 것은 세종 21년(1439년)이었다. 세종이 30리 도성 밖의
태종의 헌릉(獻陵)에 참배하기 위한 능행로(陵行路)로 개발한 거였다. 삼전도는
인조가 청태종을 향해 삼배구고(三拜九叩:세 번 절하고, 이마를 아홉 번 땅에 대는
복종의 예)를 하여, 치욕으로 얼룩이 진 곳이기도 했다. 청태종은 연이어 압력을
넣어, 삼전도비(사적 제101호)라고 불리는 '청태종 공덕비'를 세우게 했다. 공덕비의
내용은 이경석(李景奭)이 지었는데, 읽을수록 가관인 문장이었다. 당시의 치욕상을
반추해 보는 의미로, 뜻을 새겨 볼 만도 했다. 서두부터 가관인 문장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본 청나라의 견해로는 평화를 파괴한 것은 오로지 조선측이었다. 무능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봄의 얼음을 밟듯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뿐이었다. 청태종이
그러한 인조를 죽이지 않음은 커다란 인덕을 편 것이 아닌가 ! 꿩처럼 흩어져 달아났던
백성들은 청태종의 덕으로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마른 뼈에 살이
차 오르고, 차가운 뿌리에 봄기운이 서림과 같도다.
내용은 그렇다 치더라도, 문제는 비문의 글씨를 쓴 한성판윤 오준(吳埈)과
관련이 있었다. 뒤에 오준은 비문에 글씨를 쓴 걸 자책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절필해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서, 오른손을 돌로 짓이겨 스스로 못 쓰게까지 할 정도로
자책이 심하였다. 오준은 절해고도(絶海孤島)의 동백 숲에 묻혀 지내면서, 자신의
이름 대신에 동백선(冬柏仙)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마음은 더욱 울분에
휩싸여, 처절하고도 절통한 심정으로 거문고의 악곡을 지었다. 대략 2개 성상(星霜)의
세월이 흐를 때쯤이었다. 해동비음(海東秘音)이란 전무후무한 거문고의 악곡이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된 터였다. 이 악곡은 기공(氣功)으로 연주하도록 만들어진 거였다.
연주할 때에 발생된 음파의 간섭 작용으로 형성된 기파(氣波)가 상대방의 혈맥을
끊는 거였다. 혈맥이란 혈액의 순환 통로를 말함이었다. 강한 기파의 작용으로 상대방의
혈액을 얼어붙게 하여, 생명을 잃게 만드는 터였다. 서서히 동백선은 거문고의 달인이
되어 신비로운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덧붙여 동백선은 악곡을 영구적으로 전승하기
위해, 틈 나는 대로 제자를 길렀다. 제자의 수는 나날이 늘어만 갔고, 해동비음의
신비한 위력은 청나라를 떨게 했다. 해동비음이 흘러나올 때면, 백 보 이내의 청나라의
관원들은 소리 없이 죽음을 맞았다. 세상을 떨게 하는 살생지곡(殺生之曲)인 해동비음의
탄생은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터였다. 제자들의 수가 급증하자, 동백선은 모든 제자들에게
죽편(竹片)에 악보를 새기도록 했다. 죽편의 악보가 완성될 때마다 내용을 검증한
뒤, 반드시 연대와 동백선이란 호를 새겼다.
한로는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말을 이었다. 해동비음이 아닌 악곡을
연주했음에도 학승들이 혼절한 것을 보면 말이다. 허중천은 동백선의 후예는 아닐지라도
대단한 기공의 수련자였을 거라고 말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은 동굴에 머물 이유가 없어진 셈이었다. 소리 없이
동굴을 벗어 난 뒤엔, 오솔길을 따라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동악산의 빼어난 산세에
취해,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도 산의 전경을 조망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음은
그럴 수 없이 평온하고 아늑하여, 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느낌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였다. 바람이 산등성이를 넘나들 때마다 햇살은 금빛으로
깨어나 솔숲에 부서지고 있었다. 억새의 잎새에서 파드득거리며 부딪히는 바람결에서,
한없는 청량함을 느낄 때였다.
핸드폰의 호출음이 예리하게 청각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예상대로
여인이었다.
"사형, 나예요. 거기 일은 잘 진행되고 있나요 ? 어머, 벌써 해결되었다구요
? 역시 능력 있는 사람은 틀리네요. 지금 제가 있는 곳은 임실 부근의 관촌이라는
곳이예요.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요, 섬진강댐의 상류 발원지가 되는 하천 유역의
평야 지대예요. 일 끝났으면 이리로 좀 나와 줄래요 ? 저 혼자서는 약간 좀 불안하고
두렵기도 해요. 제 핸드폰 번호는 아시죠? 그럼, 빨리 오셔야 해요. 안녕 !"
택시로 두 시간쯤 달려 마침내 관촌의 평야 지대에 도착했다. 섬진강댐의
상류 발원지가 되는 하천이라 맑기가 거울 같았다. 하천은 폭은 다소 넓었지만, 대체적으로
얕아서 돌들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11월의 하순이라, 들녘은 텅텅 비어 광활한
평야만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런 황량한 벌판이라면, 하루 종일을 기다려도
인적 하나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하천 옆으로는 갈대가 길길이 자라, 길다란 갈대
숲만이 하천을 따라 굽이치고 있었다. 갈대의 키는 평균적으로 사람의 키를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하여, 만약 사람이 갈대 숲에 숨는다면 좀체 찾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사람의 기척이라곤 좀체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여인의 핸드폰 번호를 누르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내
여인의 맑고도 밝은 목소리가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어디세요, 지금 ? 오라, 지금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감이 잡히네요.
거기서 하천을 거슬러 바라볼 때, 왼쪽 편 물가로 짚 무더기가 보이죠 ? 거기서 상류로
50m 정도만 거슬러 올라오시면 갈대 잎이 흔들리는 곳이 있을 거예요. 제가
머물고 있는 곳이 바로 거기예요. 그럼, 잠시 후에 봐요."
여인의 위치 안내는 혀를 내두를 만큼 정확했다. 평소에도 관찰력이
그처럼 예리하리라고는 미처 몰랐었다. 갈대 숲 속에서 은신한 상태로 엎드려 있던
여인을 만나자 반가웠다. 여인도 나를 보자마자 활짝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겼다.
여인은 눈빛을 빛내며, 소리 없이 손을 내밀었다. 나도 반가움에 겨워, 여인의 손을
따스하게 감싸 쥐었다. 나는 여인과 나란히 엎드린 채, 강변의 갈대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지난밤보다도 더욱 얼굴이 경직되어 있었으며, 머리카락을 불어오는
바람결에 마구 흩날리고 있었다. 사내의 눈빛은 잔뜩 충혈되어 있었으며, 오른손에는
한 자루의 장검이 들려 있었다. 목검도 아닌 진검(眞劍)이라니 ! 아닌 게 아니라,
이 사내의 고뇌 속에는 숙명적인 무언가가 있었단 말인가 ? 사내의 장검을 떠올리자마자,
나의 머릿속에는 가지가지의 상상이 끓어올랐다.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는 지난밤의
사내의 고뇌에 찬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하다 보니까,
점점 둘 사이의 거리가 좁아졌다. 그러면서 여인의 향수 냄새와 은은한 살 냄새가
서서히 후각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움찔 놀라, 맑은 심호흡을 했다. 하늘은
너무나도 맑아, 구름 조각 하나 흐르지 않는 쾌청한 날씨였다. 나는 여전히 사내의
행동을 주시하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 동안을 더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휘익 ! 휘이이익 !"
느닷없는 여자의 휘파람 소리가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면서, 들녘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흑색의 무술복으로 차려입은, 이십 대 중반의 여자가
호기롭게 강변으로 내달으며 말했다.
"호호호 ! 역시 나보다는 한 걸음 먼저 와서 기다릴 줄도 아네요.
천궁파(天宮波)의 존망(存亡)이 오늘로 결정된다니, 그저 만감이 교차할 따름이네요.
"
"그 동안 잘 지내셨어요 ? 정녕 봉황문(鳳凰門)의 무예가 압권이라던데,
오늘 그 진수를 보여 주기 바랍니다. 오 년 전부터의 어른들간의 약속인데도 용케도
잊지 않으시고 나와 주셨군요. "
둘 다 20대 중반의 나이였는데도, 5년 전의 약속이라고 했겠다 ? 그렇다면,
두 사람들의 내력은 대충 짐작이 가는 바였다. 두 문파의 제자들간의 대결을 통해,
하나의 문파로 통합하려는 취지라고 여겨졌다. 그렇다면 별스러운 일도 아닐 법한데,
왜 그다지도 사내는 고통스러워했을까 ? 물론 진다는 것에 대한 창피스러움이나 굴욕감이
심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기는 했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잠까지 설치면서 고뇌에 휩싸일
정도는 아니라고 여겨졌었다. 이 때에, 여자는 단호하고도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환씨 ! 오늘 저를 상대함에 있어서는 필생의 기력을 다 쏟으셔야
될 거예요. 만약 저를 생각해 주느라고 충분한 기력을 운용하지 않는다면, 검기에
휘말려 절명할지도 몰라요. 물론 얼마나 마음이 괴로우리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아요. 부디 저와의 대결을 통해, 건강을 회복하시기를 빌게요. "
여자와 사내는 각각 장검 한 자루씩만을 든 채, 강변에서 마주보고 있었다.
잘 닦인 검 날에서는 짙푸른 섬광이 연방 주변으로 분사(噴射)되고 있었다. 마치
영화 속에서나 봄직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흥미로운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다가, 잠시 눈길을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주위에는 그들 둘을 제외하고는
도무지 인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여자와 사내는 더욱 더 자세를 낮추며, 서로를
향해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긴박감이 송두리째 묻어 나오는
장면이기도 했다.
일 순간이었다. 여자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단단히 동여매면서, 사내를
향해 다가서며 말했다.
"장세환씨 ! 우리,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10분쯤 후에 겨루기로
해요. 세속에서는 아무도 우리의 대결을 눈치채지 못 하겠죠 ? 세환씨나 저나 무술
수련을 한 지가 아마 7년쯤 되죠 ? 아시다시피 오늘의 대결은 그냥 육탄적인 결투가
아니잖아요 ? 그 누가 나선대도, 우리네 봉황문과 천궁파의 검기(劍氣)를 막아내겠어요
? 두 문파의 검기 배합을 통해 새로운 검기의 영역을 개척해 보자는 게 아니겠어요
? 오늘의 검기 배합의 성공 여부에 따라, 우리의 운명은 새로운 모습으로 결정되겠죠
? "
나와 여인은 갈대 숲에 숨어서, 사내와 여자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장세환이란 사내는 남해 미조항에서 직업적인 잠수질로 해산물을 건져 올리던 젊은 어부였다. 사내는 잠수 도구를 착용하여, 수시로 바다 속의 해산물을 건져 올리곤 했다. 문어, 전복, 해삼, 소라 등등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건져 올렸다. 그러다가 잠수병에 걸린 거였다. 물 속에서는 지극히 자유롭다가도 일단 육지에만 오르면, 다리를 절어야만 했다. 아무리 균형을 맞추려고도 해 보았지만, 근육과 뼈에 스며 든 기포가 영 말썽이었다. 사내가 절망하여 실의에 잠겨 있을 때였다. 미조항에 낚시를 왔던 노인이 사내의 기백과 불편한 거동을 눈여겨본 거였다. 노인은 천궁파의 문주인 주선웅(周仙雄)이었고, 사내의 기백과 몸놀림이 범상치 않아 며칠간 사내를 관찰했었다. 그러다가, 사내의 뛰어난 운동 신경과 건장한 체격에 마음이 끌려 무예를 전수하기 시작했다. 그게 벌써 7년이나 된 거였고, 주 노인은 임종 직전에 비장의 검법을 전수했었다. 이름하여, 천궁검법(天宮劍法)이었다. 이것은 양기(陽氣)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기공 검법의 진수였다. 이 검법이 음기(陰氣)로 이루어진 기공 검법을 만난다면 말이다. 장검에 의해 형성되는 검막(劍幕)을 통해, 강력한 검기의 교환이 일어난다는 거였다. 검기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언저리에서는 찰나간에 강력한 힘의 소용돌이가 일어난다는 거였다. 이러한 검기의 음양 교환이 일어날 때엔 파동의 간섭 효과가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이러한 찰나적인 기의 교환 현장에서는 간섭 효과로 증대된 강렬한 합성파(合成波)가 형성되는 터였다. 합성파가 미치는 공간 내의 모든 대상은 강력한 기파(氣波)에 휩쓸리게 되는 거였다. 만약 수련자의 내공이 기파를 이겨낼 정도이면 모르되, 그렇잖으면 죽어 나뒹굴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음기의 최상의 검법은 봉황문의 봉황검법(鳳凰劍法)이었다. 비록 천궁검법이 양기의 최상의 검법이긴 하지만, 봉황검법을 이겨내리라는 보장은 없었던 터였다. 그리고, 검기 교환에 있어서는, 문파들간의 절대적인 협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검기를 교환할 때엔 왕왕 검상(劍傷)을 입거나 사망하는 경우도 허다했기 때문이었다. 사내의 잠수병을 고치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하자면 말이다. 검기의 교환에서 이루어지는 합성파를 흡수하여 체내의 기포(氣泡)를 근육 밖으로 몰아내는 방법이었다. 잠수병을 치료하는 것은 고사하고, 누가 죽을지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누가 이러한 위험한 일에 생명까지도 선선히 내걸고 협조해 주겠는가 말이다. 장검을 든 여자의 이름은 황승미(黃承美)였다. 그녀는 사내가 봉황문을 찾아온 칠 년 전부터 사내를 흠모해 온 터였다. 그리하여, 주 노인과 봉황문주인 오창문(吳昌文) 노인과의 오 년 전 약속에 따르기로 했었다. 두 노인은 사내를 구하기 위해, 선선히 검기 대결을 약속했었다. 검기 대결에는 시간적인 준비가 필요했기에, 오 년 전에 약속을 했었던 터였다. 그랬는데, 두 노인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주 노인은 3년 전에 숙환으로, 오 노인은 작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거였다.
두 노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결국 제자간의 대결로 남겨지게 된 터였다.
두 노인이 세상을 떠나자, 사내는 여자에게 달려가 대결을 포기하겠노라고 뜻을 밝혔었다.
여자의 생명을 위협하면서까지 잠수병을 고치고 싶지는 않다고 사내는 간곡하게 말했다.
하지만, 여자는 두 가지의 명분을 세워 대결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하나는 사내의 잠수병의 치료는 시기를 놓치면 영원한 고질병이 된다는 점이었다.
다른 하나는 두 문파의 검기의 배합으로, 새로운 영역의 기공 검법을 창안하려는
의도였다. 어차피 생사는 하늘에 달린 거라고 믿었다. 설사 그녀가 죽게 될지라도
진정으로 사내를 사랑하기에, 즐겁게 죽음을 맞겠다는 거였다. 사내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모를까 그 외의 사유로는 대결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불행스럽게도 사내가
죽는다더라도 하늘의 운으로 돌리겠다는 단호한 태도였다. 이제 사내의 입장으로서는
대결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아니, 어쩜 사내는 처음부터 대결을
원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단지, 열차에서 보여 주었던 사내의 고뇌 어린 몸짓은
분명 다른 뜻이었으리라. 내가 사내의 마음속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 하지만,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본다면, 결코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서는 아닌 모양이었다. 혹시 발생할지도
모르는 여자의 죽음을 염려함이었으리라. 갈대 숲 속의 여인과 나의 심사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해졌다. 두 문파의 검기가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슬그머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안개노인으로부터 전수받은 무상검법의 위력마저도 아직까지 실감하지
못한 상태였었다. 나는 여인에게 지극히 낮은 귀엣말로 속삭였다. 체내에 기력을
끌어올려, 검기 교환으로부터 발생되는 합성파에 견뎌낼 수 있도록 하자는 거였다.
여인은 눈빛을 빛내며, 가만히 고개를 끄떡거려 나의 말에 동의했다. 이윽고 여인과
나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단전호흡을 실시하면서, 서서히 기력을 끌어올렸다. 회음(會陰)으로부터
치솟은 기류가 단전을 지나 전신의 경맥(經脈)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뒷골이 서늘해지면서 온 몸에서는 따사롭고도 부드러운 신열이 전신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서서히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세계에 젖어들며 전신이 날아오를 듯이 가벼워지면서
힘이 치솟아 올랐다. 이제 손가락 하나만 뻗쳐도 어지간한 바위 조각 정도는 박살을
내고도 남을 만했다. 잠시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더니, 여인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며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내심으로 감탄을 했다. 분명 무술의 수련 기간은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짧은 터였다. 그런데도 여인은 유선문의 잠룡승천을
포함한 모든 무술을 너무나도 능숙한 솜씨로 구사했었다. 게다가 기의 수련까지도
상당한 경지에 오른 것으로 보였기에, 참으로 감탄할 만하다고 여겨졌다.
사내는 여자를 향해 다가서며 말했다.
"승미씨 ! 참으로 저의 가슴이 탑니다. 나의 검기로 인해 혹시라도
승미씨가 다치게 된다면, 나는 어쩌란 말입니까 ? 더구나 죽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차라리, 잠수병을 안은 채 평생을 절름거리는 한이 있더라도 승미씨를 잃고 싶지는
않아요. 절대로 나로 인해 승미씨를 ……"
"세환씨 ! 됐어요. 너무 고통스럽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천궁파의
무학(武學)이 경이로운 수준이듯이, 봉황문의 무예도 결코 만만치는 않으니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 검기를 최대한으로 펼치기
위해서는 진검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에요. 진검을 쓰다 보면, 우리의 생사를
전혀 예측할 수가 없게 되잖아요 ? 생사가 두려워 목검으로 대신한다면, 결코 검기의
교환은 기대할 수 없는 일 아니겠어요 ?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이렇게 만날 이유도
없었구요. 어쩔 수 없이 진검을 들어야만 하는데, 가슴이 떨리고 두려워요. 정말
두려운 것은요. 혹시라도 야기될지 모르는 생명의 상실로 인하여, 우리의 사랑이
단절될까 그게 두려울 따름이에요. 혹시 제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씀은 없으세요
?"
사내는 장검을 조심스레 풀밭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도 승미씨 못지 않게 가슴이 마구 떨려요. 지금이라도 대결을
포기하고 싶지만, 승미씨의 숭고한 사랑을 차마 저버릴 수가 없는 일이라서 ……승미씨,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설사 제가 이 들녘에서 한 줄기의 바람결로 사라진다더라도
말이에요. 저는 영원히 당신을 잊지 못할 거예요. 우리, 어쩜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 삼배(三拜)의 인사를 나누는 게 어떨까요 ?"
사내의 마지막 목소리에는 울음기마저 서려 있었다. 여자의 눈시울에도
어느새 이슬이 맺혀, 햇살에 반짝거리며 매달려 떨고 있었다. 그러다가, 여자도 장검을
두 손으로 받들어, 풀밭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지 여자는
가볍게 상체를 떨면서 점차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잠시 후에, 사내와 여자는 다섯
걸음쯤의 거리를 두고, 서로를 향해 섰다. 수그려졌던 여인의 얼굴이 반듯하게 세워지더니,
여인은 맑은 눈빛으로 사내를 응시했다. 이윽고 두 남녀는 날아갈 듯한 단정한 자세로,
서로를 향해 큰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삼배(三拜)의 의식이 하도 경건하고도 숙연했기에,
여인과 나는 숨조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었다. 들녘을 스쳐 지나는 바람결도 이
순간만은 멎었는지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가을 호수의 물빛처럼 파랗게 드리워진
하늘만 아스라이 바람에 떨고 있었다. 이윽고 남녀는 서서히 허리를 펴고 일어나,
한없이 맑은 눈빛으로 서로를 들여다보았다. 순간적으로, 서슬 퍼런 슬픔이 빛살처럼
그들의 몸에 휘감겼다가는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